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우익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식수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승인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삭제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메탄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600
  • 獨 바이마르市 ‘홀로코스트 속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南玎鎬 특파원□ 99년 유럽 ‘문화도시’ 바이마르가 나치 탄생의 어두운 역사를 새로운 교훈의 역사로 변신시키고 있다. 지난 19일 개막공연을 갖고 축제의 한 해를 시작한 인구 6만의 소도시 바이마르는 작가 괴테,실러,작곡가 바흐,리스트등 고전 대가들의 숨결이 깃든 곳.20세기초엔 최초 민주헌법이 피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마냥 들떠 있지 않다.이 도시가 민주헌법 수립이후 우익정권을 최초로 배태,나치 태동에 앞장선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3년 ‘문화도시’로 선정 이후 준비를 해온지 6년만에 바이마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700만달러를 쏟아부어 새단장을 했다.당시 선정된 배경에는 99년이 괴테가 이곳에서 탄생한지 250주년되는 해라는 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러나 재탄생의 발목을 부여잡는 것이 바로 과거의 악령.지난 37년부터 45년 사이 5만 6,000명이 학살된 부켄발트 유태인 수용소가 바로 이곳에 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한번씩 신나치주의자들이 발흥한다. 시는 이런 역사 잔재를 외면하기보다는 프로그램속에 끌어들여 반성의 계기로 삼는 길을 택했다.괴테가 자신의 연극을 공연한 언덕위 궁전에서 부켄발트 수용소까지 1마일 거리의 숲속 산책로가 만들어졌다.부켄발트의 대변인은 ‘시간의 편린’이라 이름붙인 이 산책로를 만든 배경을 “독일역사에서 문화와 야만이 얼마나 가까이서 공존하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njh@
  • [책과 세상]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이라는 책 속의 한국은 무질서의 나라다.공중도덕과 질서의식은 사라지고 부정과 비리만 판치는 무법천지다. 한국인을 혹독하게 비판한 이 책은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 오사카 라센 관공업 고문의 작품이다.이 책이 몇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며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 1월2일 나온 이후 50여일 만에 18만부나 팔렸다고 출판사는 밝혔다. 많은 한국인들이 이 책을 찾는 것은 그의 비판에 큰 관심이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많이 읽고 우리의 잘못된 점을 고치는 계기가 된다면좋은 일이다.그의 정당한 비판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케하라씨의 한국비판은 적지않은 문제가 있다.그의 비판은 객관성이 부족하고 지나친 과장이 많다.일부의 잘못을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일반화하기도 한다.그는 한국인들은 약속을 안 지킨다며 이렇게 쓰고 있다.“한국의 텔레비전 역시 예고된 시간에 정확하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9시 뉴스말고는 하나도 없다”.모든 한국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는 또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한 젊은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당연히 자기 자리라는 듯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노인들이 압도적으로많다”고 쓰고 있다.한국노인을 비하하고 우리의 좋은 점인 경로사상까지도왜곡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도 ‘정당화’한다.“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무렵은 전세계적으로 힘있는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를 정복하는 제국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일본 보수·우익의 전형적인 침략 정당화 논리중의 하나이다.그의 말에 침략에 대한 진솔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일본적 오만만이있을 뿐이다. 이케하라씨의 오만과 과장된 비판은 많은 한국인들을 화나게 한다.그러나우리는 외국인의 눈에 비리와 무질서로 보이는 사회에 너무 익숙한 것은 아닐까.그의 눈에 ‘추한 한국인’으로 보이는 현실이 부끄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가.다시는 이런 책이 나올 수 없도록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李昌淳
  • 99지구촌 점검-인권단체(2회)

    최근 몇년간 국제 사회의 핫 이슈는 인권문제였다.보스니아 인종청소,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독립운동 유혈진압,중국의 티베트 탄압,칠레 전독재자 피노체트의 재판 등.각국의 외교적 갈등으로까지 치달은 이 문제들을 지구촌현안으로 떠올린 주역은 다름아닌 비정부기구(NGO)의 인권단체들이다. 유엔인권선언 선포 50주년인 지난해 국제사회는 NGO인권단체들에게 인권향상의 공을 기꺼이 돌렸다.초기 양심수문제,인종차별 등에 머물던 인권운동의 범위가 여성,아동,전시 민간인,동성애자,죄수 등의 영역으로 확대된 데도이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최근에는 세계화에 따른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경제위기에 의해 고난받는개도국 빈민들의 문제로까지 인권운동의 초점이 맞춰지는 양상이다. 전세계 5,000여개 인권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지난 61년 런던에서 설립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양심수 석방,정치범 박해 금지 등을 위해 활동하며 92개국 110만명의 정기 기부자를 확보하고있다.지부만도 54개에 달한다. 미국 국제법률가위원회(ICJ)도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200여개 인권단체과 연대 켐페인을 벌여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비준절차에 이르기까지결정적인 공헌을 했다.96년엔 한국의 정신대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최초로 제출했다.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와 ‘휴먼 라이트 워치’도 대표적인 단체.남아공 인종차별문제에서 르완다 대량학살 등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지난 89년 설립된 중국의‘휴먼라이트 인 차이나’(HRIC)도 반체제인사 석방 등 인권문제를 다루면서 급성장하고 있는 단체다. 정부간 외교행사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이들의 압력 시위는 협상의 변수역할도 하고 있다.대표적인 것이 지난 97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때.ICJ와 휴먼라이트워치 등이 백악관앞에서 티베트독립과 반체제인사 탄압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여 미국의 대 중국정상외교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같은해 국제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참상은 호주에본부를 둔 동티모르국제센터(ETIC)의 ‘작품’.인니 군인들이 동티모르 여성에게 자행한 잔혹행위 사진을 입수,공개함으로써 국제사회가 하비비 정권에압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수난도 끊이지 않는다.좌익과 우익의 대결이치열한 콜롬비아에서는 IPC, CSPP등 인권단체 운동가에 대한 테러가 계속돼올 들어서만 6명이 살해됐다.金秀貞crystal@
  • ‘제주 4·3사건은 민중항쟁’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발생한 소위 ‘제주4·3사건’을 두고 그동안 역사의 평가는 엇갈려왔다.한쪽에서는 ‘폭동’으로,다른 한쪽에서는 ‘민중항쟁’ 또는 ‘무장봉기’로.그러나 최근들어 ‘4·3’은 과거 ‘공산폭동’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적 평가에서 미군정과 경찰의 횡포에 저항한 제주도민의 민중항쟁 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으로 재평가되고있다. 최근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제주4·3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펴낸 ‘제주4·3연구’(역사비평사 발행)는 ‘4·3’ 재평가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이 책은 작년 3월 제주4·3사건 5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에 발표된 6편의 논문을 수정·보완하고 여기에 5명의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탠 것으로 총11편의 논문을 싣고 있다. 이 가운데서 양정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주도세력을 통해서 본제주4·3항쟁의 배경’에서 항쟁에 참여했으나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과 사건 개입과정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남로당은 ‘4·3’ 발생 1년전인 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발생한 발포사건에 대한 대응책으로 ‘3·10총파업’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김순태 방송대교수(법학)는 논문 ‘제주 4·3 당시 계엄의 불법성’에서 4·3당시 선포된 계엄은 일제시대 때의 ‘계엄령’을 근거로 한 것으로 불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해구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제주4·3항쟁과 미군정 정책’에서 4·3의 발발과 확산,뒤따른 대량학살은 미군정이 항쟁세력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책실패라고 주장했다.또 임대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제주4·3항쟁과 우익청년단’에서 ‘외인부대’ 서북청년회가 4·3을 촉발시킨 배경,좌우세력이 이들을 이용한 측면을 고찰하고있다. 이책은 결국 ‘4·3’은 단순폭동사건이 아니라 미군정하 경찰과 우익세력의 인권유린,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단독선거에 항의해 봉기한 제주도민의‘민중항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들은 앞으로 미국측 자료를 총체적으로 분석,미군정이 강격책을 최종선택한 배경을밝히고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보상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임을 강조한다.
  • 포커스 투데이-베냐민 베긴

    ‘아버지의 영광을 잇겠다’.이집트와의 평화협정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고 (故)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의 아들 베냐민 베긴 전 과학부장관(56)이 2 8일 소속 리쿠드당을 탈당,총리직 도전의 출사표를 던졌다. 부친 베긴 총리는 77년 리쿠드당을 창당한 인물.부친이 만든 리쿠드당에 탈당계를 던짐으로써 베냐민 전 장관은 당내 분파에 시달려온 현 네타냐후 총리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베긴 전 장관은 이날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 며 극렬히 비난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출현을 저지할 진정한 우익정당 결 성이 목표라고 출마의 변을 밝혔다. 지질학자 출신의 베긴 전 장관은 리쿠드당내 최고의 이론가로 꼽혀온 대표 적인 강경파.지난 96년 5월 네타냐후 정권 창출의 1등공신으로 과학부장관이 된 그는 지난해 1월 네타냐후 총리의 요르단강 서안의 철군 결정을 ‘굴복 에 의한 평화’라며 반발,장관직을 내놓았다. 부자(父子) 총리의 탄생 여부와 함께 중동평화의 장래가 맞물려 있어 그의 행보는 새해 이스라엘 정국의 핵으로 등장할 전망이다. ?겉桔?煥 khkim@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이 총선정국 혼미

    ?맙뭍瀯痍? AP AFP 연합?립뺙? 5월 17일로 예정된 이스라엘 조기총선을 앞두고 베니 베긴 전 과학장관이 총리 선거전에 합류하는 등 등 총선 판세 가 혼미 양상을 띠고 있다.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초대 총리의 아들로 민족주의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베니베긴(56)은 28일 총선에서 총리직에 도전하기 위해 소속 정당인 리쿠드 당을 탈당한다고 전격 선언했다. 베긴은 이날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의 압력에 굴복했다고 비난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위험과 싸울 수 있는 진정한 우익 정당을 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집권 연정을 이끄는 리쿠드당에서만 댄 메리도르 재무장관과 암 논 리프킨-샤하크 전 군참모총장에 이어 베긴 전 장관 등 모두 3명의 후보가 차기 총리 출마를 위해 탈당을 선언했다.또 네타냐후 총리를 리쿠드당의 총 리 후보로 지지한 아리엘 샤론 외무장관도 이날 “특별한 상황하에서는 총리 직 출마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밝혀 총리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여기에 이츠하크 모르데차이 국방장관도 리프킨-샤하크전 참모총장이 결성 할 중도 정당에 합류할 수도 있어 리쿠드당의 분열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 다. 유력 후보들의 연쇄 탈당으로 리쿠드당 총리 후보 선두주자로 남게 된 네타 냐후총리는 27일 리쿠드당 중앙위에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는 이스라엘의 존 재 자체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사실상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네타냐후 재선 출마 “”먹구름””

    이스라엘 의회의 조기 총선안 승인 이후 정치 생명연장에 골몰하고 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집권 리쿠드당의 분열로 궁지에 몰리고 있 다. 지난 26일 집권 리쿠드 당 중앙위 총회에 앞서 당내 최고 경쟁자로 부상한 에후드 올메르트 예루살렘 시장의 출마포기를 이끌어내 총리 재선 가도를 달리는가 했던 네타냐후 총리는 28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초대총리의 아들 인 베니 베긴(57)의 강력한 도전에 맞닥뜨렸다. 베긴은 차기 총선에서 총리직에 도전하기 위해 소속 리쿠드당을 탈당한다 고 이날 전격 선언했으며 별도의 우익 정당을 결성할 것으로 보인다. 네타냐후는 당내에서도 중도계의 암논 리프킨 샤하크 전 육군 참모총장 등 의 도전을 이겨내야 총리 지명을 받을 수 있다.게다가 이미 댄 메리도르 재 무장관이 차기 총리 도전을 선언했으며 이츠하크 모르데차이 국방장관과 리 모르 리브내트 통신장관도 탈당을 내비쳐 안팎으로 고비를 넘어야 하는 처지 다. 팔레스타인과의 ‘영토-평화 교환’으로 불리는 와이 리버 협정에 강력히 반대하고있는 베긴은 벤야민 네타냐후 총리 정부에서 과학장관을 지냈으며 지난해 1월 네타냐후 정부의 요르단강 서안 철군 결정에 반대,사임했었다. 이스라엘은 네타냐후 정부가 체결한 와이 리버협정 이행을 둘러싼 논란끝 에 최근 여야가 내년 4,5월께 조기선거 실시에 합의했으나 선거일을 확정하 지는 않은 상태다. [金秀貞 crystal@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납·월북문인­검열·삭제(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6)

    ◎좌익계열 문학인 1∼3급 분류/49년 첫 제한조치로 교과서서 삭제/50년 전향작가 원고심 사제 없앴지만/6·25 터지자 대부분 자의·타의로 월북 광복 직후 한국문단은 제대로 된 문인족보도 없는 황무지에서 이념적인 패가름에 따른 단체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분단 고착화가 조금은 미지수였던 1946년 2월8∼9일에 열렸던 조선문학자대회는 그 무렵까지의 단체중 가장 광범위한 명단을 과시했는데 그 대회 초청자에는 213명의 문인 이름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명백한 우익적 문학인도 약 60명이 포함되어 있는데,여기에는 널리 알려진 친일문학인이 빠져있다.이 명단중 월북이 확인되는 게 대략 80명 가량이고,신원 미상은 50명 전후,기타 사상적으로나 전공이 애매한 인사가 20여명이다. 조선문학자대회는 바로 이 행사를 고비로 급격하게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한편 불법화 조처로 분단 한국사에서 암매장당해 오다가 87년에야 해금으로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고 있다. 세칭 납·월북 문학인에 대한 금서조치는 일제 식민시기의 작품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한국의 근대문학사에 커다란 공백을 초래했었는데,일단 한번 뚫어진 가치의 공동화 현상은 해금 이후에도 그대로 흉뮬스럽게 남아있는 것 같다. 정부 수립후 좌경문학인에 대한 첫 제한조처는 49년 9월 중등국어와 글짓기 교과서에서 일체의 관련작품을 삭제한 것인데,이때 삭제당한 작품수는 8종의 교재에서 시 수필 소설등 총 55편이었다. 관계기관이 공식적으로 ‘좌익계열 문화인’에 대한 제한조처를 발표한 것은 49년 11월5일이다. ○조선문학인대회 초청자 215명 이미 월북한 문학인을 1급으로 분류하고 남한에 남은 문학인중 좌익적이라고 당국이 판단한 문학인을 2,3급으로 나눠 총 51명이라고 밝힌다. 이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창작과 발표 활동 제한 조처를 강화하는 한편 보도연맹 가입권유가 잇따랐다. 분단 한국 현대문학사의 주축을 이루게 될 한국문학가협회 총회가 열린 것은 49년 12월17일이다. 추천회원의 명단에는 151명의 문학인이 올라있는데 이중에는 김기림,정지용 등 이른바 ‘전향자’들이 약 20명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이내 전향문필가들의 원고 심사제를 발표(50년 1월27일),이들의 작품이나 저서를 게재 혹은 출판하려면 “각 시도 경찰국장을 경유하여 발간 사전에 원고를 치안국장에게 보내어 심사를 거친 후 출판”하고,“신규 간행물을 치안국 사찰과 검열계로 2부씩 보내주길 바란다”고 지시했다. ○근대문학사에 커다란 공백 초래 이러한 조처가 내린 한편 친일문학인들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자유화돼 신문에는 그들의 각종 저서 광고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좌경 문학인에 대한 실질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우리 민족문학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정부는 50년 4월7일 전향작가 원고심사제 철폐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심사제가 정착도 안된 불과 석달만의 일이다. 그리고 두달뒤 6.25가 발발했고,전향문학인들 대부분은 자의,혹은 타의로 월북했다. 정부가 ‘부역자’란 개념을 정립,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한 것은 51년 10월1일로 대략 75명 정도인데 여기에는 이광수와 같은 우익인사들도 포함돼있는 반면 박승극이나 송완순같은 비중있는 문학인의 이름은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부분 연구가 진척돼있으나 납·월북문학인 문제가 아직은 숫자나 인적인 초보자료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라는 점에서 남북대화나 통일문학의 창출을 위하여 관계당국이 적극 대처해야 될 시급한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월북문학인중 상당수가 북한에서의 활동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 북한체제에서 이들에 대한 연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자료의 소멸시한이 이미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 문화비평가 진중권씨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우익인사 비판서 눈길/박정희 추종자에게 풍자와 독설 대한민국 우익 개구리의 배를 해부했더니 썩은 내장들이 드러났다.국수주의,군국주의,전체주의,몽골 인종주의,아류 제국주의,변태적 낭만주의…. 일본에서 들여온 썩은 폐기물이다. 문화비평가 진중권씨가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소설가 이문열,이인화씨,종교인 박홍씨 등 평소 글이나 주장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옹호해온 추종자들에게 풍자와 독설을 퍼부었다.책 제목도 조씨가 박정희에 대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맞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전2권·개마고원 펴냄)라고 지었다. 진씨는 우익인사들의 주장은 아시아적 가치나 유교 자본주의로 덧칠되지만 실상을 벗겨보면 전체주의에 맥이 닿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이인화의 인간의 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조갑제의 박정희 철학,개발독재론 등은 나치의 변태적 낭만주의,일제 군국주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진씨는 이들의 글이나 주장을 인용,우익들을 논박한다.이들의 논리로 이들의논리를 반박하는 이른바 텍스트 해체 전법이다. 이 충무공 정신은 화랑도의 이조적 중흥이다. 박정희의 말이다.이후 전국국민학교 교정에는 구리로 만든 이순신과 반공소년 이승복의 동상이 무더기로 세워졌다.진씨는 이승복 동상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광신의 상징이라면 이순신은 박정희가 민족의 태양이라고 가르치는 파시스트 국가주의 이념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조선일보가 최장집 고려대 교수에 퍼붓고 있는 이념공세도 안보 상업주의에 기초한 수구세력의 결집과 김대중 정권의 개혁에 발목을 잡기 위해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며 조선일보와 일부 극우세력의 사상검증 요구는 명백한 ‘위헌’이며 자유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 제3의 길/앤소니 기든스 지음(화제의 책)

    ◎좌우익 한계 뛰어넘는 사회주의 모색 영국의 토니 블레어,독일의 슈뢰더,프랑스의 조스팽 등 유럽의 신(新)중도좌파 정권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이론.복지국가로 대변되는 구식 사회주의의 사회정의와 평등의 개념은 빛이 바랬다.시장경제원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성취와 성장의 가치도 점증하는 번영과 함께 위력을 상실하고 있다.이러한 좌우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이 나아가야 할 사회주의의 길을 모색한 것이 제3의 길이다.양식을 갖춘 전문가와 시민 집단,즉 중민(中民)이 제3부문에 많이 있다.이들은 어떤 집단보다 정부개혁,금융개혁,재벌개혁 등을 강하게 요구한다.이들을 조직화하는 참여 민주주의에서 그 대안을 찾을수있다. 한상진 등 옮김 생각의 나무 8,000원
  • 사상 검증과 인권 침해/黃台淵 동국대 교수·정치학(대한광장)

    과거 서독의 사상검증관행과 ‘방어민주주의’라는 냉전의 유물이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늘날 한국에 끌려나와 고생을 하고 있다.독일제도를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에 관한 최근 논의의 허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서독은 정부수립과 함께 나치분자의 공직침투를 막으려고 ‘방어민주주의’라는 법이념을 정립하였다. 1950년초 냉전이 격화되자 분단국가 서독은 이 ‘ 방어민주주의’를 확대·적용하여 헌법재판으로 1956년 공산당(KPD)을 불법화하였다.그러나 이 재판에 입각한 안보형법은 곧 ‘생사람 잡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게다가 이 법률은 사민당 정부가 동서해빙을 위해 새로 추진하는 동방정책의 걸림돌이 되었다.이로 인해 사민당 정부는 이 법의 폐지와 함께 새 공산당(DKP)을 다시 합법화하였다.이로써 서독은 이미 1969년에 법적으로 ‘열린 자유민주주의’로의 민주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민주발전 막는 냉전 유물 그러나 나치와 극좌파의 공직 침투를 우려한 주(州)지사들은 ‘우익·좌익과격파의 정치활동에 관한 주(州)정부 수반들의 결의’(1972)를 마련하였다. 이 ‘결의’는 원래 인사상의 신원조회 내규에 불과하였으나 1975년 합헌판결과 함께 마치 사상검증제도처럼 기능하면서 인권침해 논란에 휩싸였다.이에 사민당 정부는 1979년 이것을 ‘헌법충성검증 원칙’으로 완화하였다가 1980년대에는 이것마저도 사문화시켰다.사민당은 1989년 베를린강령에서 이 검증정책이 ‘민주주의의 적을 양성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스스로 비판한 바 있다.서독은 통일되기 약10년전 이미 닫힌 ‘방어민주주의’로부터 ‘열린 자유민주주의’로의 완전한 정치발전을 이룩한 것이다.이 시점을 호도(糊塗)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도 독일의 보수적인 주에서는 서면질의 방식의 검증이 있다는 말도 옳지 않다.보수적인 바덴­뷔르템부르크주의 정치교육원 원장인 슐레씨는 지난 11월7일 필자의 질의에 대해 “그런 건 사라졌다”고 확언하였다. 오늘날 독일은 과거 적군파 변호사와 과거 무정부주의자가 장관으로 재직중이고,한주는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사당의 통치하에 있는 나라이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권 중의 인권’이라고 말한 옐리네크에 주목하자.남의 사상을 검증하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이다.유일하게 인권유보의 권능을 가진 법률의 근거 없이는 어떤 언론과 국가기관도 사람의 사상을 검증할 수 없다. ○진보학자 언론검증 안될일 이 ‘원칙’을 알고 우리 현실을 보자.한국은 서독과 달리 전쟁을 겪은 분단국가로서 국가보안법을 짐으로 짊어지고 있다.한국에서 과거 서독의 관행을 빗대 공직자의 사상을 검증할 여지는 있으나,이 비교논의는 한계를 지켜야 한다.첫째,이 검증은 극우·극좌파에게만 적용되었다.따라서 훨씬 온건한 진보학자에게 이것을 원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둘째,‘일반공무원’만이 검증의 대상이었다.‘정치공무원’이나 ‘위촉된 민간인’과는 무관한 것이다.이 경우에는 인사권자의 판단이 최종적이다. ‘위촉된 민간인’ 자문위원장의 사상에 대한 언론의 검증은 있을 수 없고 국회의 검증도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는다.이 ‘검증’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고유한 권능에 속한다.야당과 친야 언론은 ‘위촉된 민간인’에 관해 ‘논란’할 수 있으나 사상검증으로 비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스런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 ‘崔章集 교수 논문’ 월간조선 販禁결정 반응

    ◎“발췌왜곡은 언론자유 아닌 언론 폭력”/사회단체 “당연한 조치” 일제히 환영/대책위,조선일보 불매운동 강력 전개 崔章集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을 보도한 월간조선에 대해 법원이 판매 및 배포금지 결정을 내리자 고려대와 시민단체는 당연한 조치라며 환영했다. 고려대 대책위원회는 ‘조선일보 왜곡보도 근절을 위한 고려대 연석회의’(회장 김준형·고대대학원 총학생회장)를 오는 16일 열기로 하는 등 앞으로의 활동 일정 마련에 분주했다. 대책위 소속 위원들은 지난 10월16일 대책위가 결성된 뒤 27일만에 내려진 결정을 환영하며 학내 뿐 아니라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 대책위는 조선일보 불매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여 조선일보의 반성을 촉구할 계획이다. 조선일보사가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친일기사 등 과거 행적에 대한 고발형식의 전시회 등을 마련하기로 했다. 오는 30일에는 조선일보사를 추가 방문,항의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PC통신 동호인들로 구성된 ‘언론개혁 통신연대’(대표 김동필·29)도 동호인들간 연대를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金씨는 “월간조선의 왜곡보도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정당하다고 본다”면서 “조선일보의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여러 단체와 협의하여 유인물과 전단지를 배포하고 통신상에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 자료를 폭로할 계획”임을 밝혔다. 시민단체도 대책마련에 분주하다. 13일 오후 1시 서울 마포구 불교방송 7층에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경실련,참여연대,전교조 등 20여개 단체가 대책활동 간담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경실련 魏枰良 연구위원(38)은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학문자유의 기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판결이라 생각한다”면서 “우리 사회는 이제 좌·우 대립을 넘어 개혁·반개혁의 새로운 구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林崇澤 사무총장(48)은 “문제점을 여러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일단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면서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19개 문제항목 중 16개에서 이겼으니 자신들의 승리라고 아전인수(我田引水)적 해석을 하는 조선일보의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동”혹세 무민의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柳初夏 민교협의장(50·충북대 철학과 교수)은 “이번 사건은 국민적 동력을 집중하고 합의해야 할 시점에 불필요한 논쟁을 종식시켜준데 의미가 있다”면서 “정치권,언론,정부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그 본질의 하나인 사상의 자유 원칙을 존중해야 하고 이에 반하는 수구세력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金起式 사무국장(33)은 “언론이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적 성과를 부분 발췌하여 왜곡하는 것은 일종의 언론 폭력이다”고 규정하면서 “이번 판결은 언론 자유의 범위를 벗어난 것임을 명확히 해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李敏壽 대외협력부국장(37)은 “법원의 결정이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조선일보사가 崔교수의 저작에 대해 필요에 따라 짜집기하는 등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을 적극적으로 바로 잡는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소송 법적절차는/崔 교수측 ‘가처분’으로 정당성 확보/재판부 결정 번복 가능성 희박/명예훼손·사상검증 자유 맞서 조선일보사가 지난 11일 법원이 내린 ‘월간조선 11월호’ 발행·판매 및 배포 금지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제기키로 함에 따라 崔章集 교수의 논문해석을 둘러싼 법정공방이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됐다. 이의신청은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는 가처분 결정에 불복,정식 재판을 통해 결정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하는 절차다. 심리는 이번 결정을 내린 서울지법 민사합의51부(재판장 申暎澈 부장판사)가 맡는다. 다음달 초부터 열릴 이의신청 공판에서는 “공인에 대한 언론의 사상검증은 헌법도 보장한 자유”라는 조선일보측 주장과 “사실을 왜곡해 명예를 훼손한 행위까지 언론의 자유로 볼 수 없다”는 崔章集 교수측 주장이 맞설 것으로 보인다. 또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등 문제가 된 10군데에 대한 견해를 밝힐 정치학자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과정에서도 설전이 예상된다. 정치학자의 증언은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증인의 중립성’ 여부가 논쟁거리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처분 결정을 내린 재판부가 자신의 결정을 뒤집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쨌든 양측은 이의신청 판결에 대해 서울고법에 항소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崔교수측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같은 법원 민사합의25부(재판장 李性龍 부장판사)에서 따로 진행된다. 심리에서는 월간조선 기사로 인해 崔교수의 명예가 훼손됐는지와 훼손됐으면 그 위자료는 얼마인지를 결정한다. 崔교수가 승소할 경우 위자료 액수는 보도 경위,매체의 영향력,기사 분량,월간조선 11월호의 판매 정도 등을 감안해 결정된다. 이의신청과 손해배상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현재까지는 가처분 결정을 얻어낸 崔교수측이 한층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상태다. ◎‘崔 교수논문’ 논쟁 전말/월간조선 ‘좌파적 시각’ 게재에 시민단체 등 “매카시즘” 강력 비난/崔교수측 손해배상 소송/국내 외 학자·단체들 조선일보 비난성명 봇물 崔章集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고려대 정외과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쟁은 조선일보가 10월 18일 발간한 월간조선 11월호에 ‘崔章集 교수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월간조선은 96년 10월 출판된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란 崔교수의 저서에 들어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하나의 이해’란 논문을 문제삼았다. 이 논문은 崔교수가 90년 9월 ‘한국전쟁 연구’란 책에 발표한 것으로,월간조선은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南進은 민족해방전쟁,北進은 가공할 사태’라는 소제목 아래 崔교수의 논문이 좌파적 시각에서 쓰였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또 93년 4월에 발간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이란 崔교수의 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崔교수가 “한국전쟁은 미국이 金日成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도록 유도한 결과로 일어났다”는 내용의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을 “한국 정치학의 연구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이면서 커다란 영향을 미친,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매우 복합적인책”이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崔교수는 월간조선의 보도가 논문 가운데 일부 내용만을 발췌해 왜곡했다며 지난달 23일 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의 배포금지 가처분신청과 5억원 상당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崔교수는 24일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 “월간조선은 金日成의 6·25 개전 결정과 관련해 전후 맥락을 빼버린 채 ‘역사적 결단’이라고 인용함으로써 마치 내가 이를 찬양한 것처럼 표현하고,심지어 조선일보는 내가 쓰지도 않은 단어인 ‘위대한 결단’이라고까지 표현했다”고 반박했다. 조선일보는 연일 사설과 기고,우익단체들의 崔교수에 대한 비난 등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에 비례해 국내외 학자와 시민단체들의 조선일보에 대한 비난도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정치학회는 성명을 통해 “월간조선의 기사는 공정한 인용에 바탕한 합리적 비판이 아니라 논지의 부당한 왜곡에 근거한 이념적 폭력”이라며 매카시즘적 마녀사냥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민주노총 등은 “월간조선이 崔교수의 논문을 왜곡보도해 사상논쟁을 유발하고 용공조작을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정치연구회,민족예술인총연합,국민승리21,4월혁명회 등 조선일보를 비난하는 단체의 성명이 줄을 이었다. 특히 미국 UCLA의 신기욱 교수(사회학)와 존 던컨 교수(동아시아 언어문화사) 등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한국학 학자 22명이 성명을 통해 “(조선일보 보도는) 냉전시대에나 통할 단순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11월 3일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성명을 냈고,국민승리21은 조선일보사 사옥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6일에는 경실련,흥사단,환경운동연합 등 50여개 시민단체가 가입한 한국시민단체협의회가 조선일보사의 사상검증 시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언론개혁통신연대,고려대대책위 등 4개 단체는 이날 조선일보 앞에서 규탄집회를 가졌다.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우익단체들의 성명도 잇따랐다. 대한민국 건국 50주년기념사업위원회는 지난달 26일 ‘국가 정통성을 부인하는 崔章集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崔교수의 논문 논쟁은 11일 법원이 월간조선 11월호의 일부 내용을 삭제하지 않는 한 배포할 수 없도록 판결을 내림에 따라 1라운드는 崔교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논문 논쟁 일지 ▲10월18일 ­월간조선 11월호,‘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 崔章集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에서 崔교수의 사상문제 제기. ▲10월20일 ­崔교수,월간조선 보도에 대한 반박문 발표. ▲10월23일 ­崔교수,서울지법에 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가처분신청 및 약 5억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제기. ▲10월26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고려대 정외과교수,조선일보 비난성명 발표 ▲10월27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조선일보의 과거 행적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성명 발표. ▲10월2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조선일보의 사상 시비중단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10월30일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의 학자 22명,조선일보의냉전적 사고를 비판하는 성명 발표. ▲10월31일 ­예비역 영관 장교 모임인 대한청죽회,‘崔章集 건국사관 규탄 결의대회’ 개최. ▲11월2일 ­언론개혁시민연대,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참여연대,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협의회,학술단체협의회 등 5개 단체,‘崔章集 교수의 현대사 연구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태도­실태와 문제점’이라는 토론회 개최. ▲11월11일 ­서울지법,월간조선 11월호 배포 금지 결정.
  • 유럽 68세대 “새 정치 실험”

    유럽에 새 물결이 일고 있다. 60∼70년대 반 체제운동을 주도했던 ‘68세대’가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신,유럽 정치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젊은시절 유럽의 정신 세계를 압박하고 있던 권위주의에 도전했던 이들은 이제 금리인하,고용창출,공공지출 확대를 통한 성장추구 등을 내세우며 기존 정책들을 뒤엎고 있다. 젊은 혈기 탓에 ‘실패한 혁명’을 맛보아야 했던 이들의 성공 여부가 주목된다. ‘68세대’의 주체와 성격,미래를 진단해본다. ◎혁명은 지금도 진행중/30년전 佛서 깃발 올린 개혁성향 좌파/佛·獨·英·伊서 집권… 변신에 관심 집중 유럽의 ‘68혁명’ 세대들이 정치무대에 전면 포진,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기성 질서의 저항세력으로 대별됐던 좌파적 색채의 68세대는 30여년이 지난 지금 성숙한 정치인으로 변신,유럽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실패로 끝난 혁명’의 뒤늦은 완성을 추구하고 있다. 68혁명의 진원지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우선 꼽을수 있다. 68시위가 발발하자 외무부 관리였던 그는 이에 동조하여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당에 입당,정치인으로 나섰다. 죠스팽 내각의 장클로드 게소 교통주택장관 등 공산당 소속 4명의 관료는 시위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다. 68세대의 강세가 가장 두드러지는 국가는 독일·대다수 각료들이 68세대다. 세계 최초의 환경정당으로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은 전적으로 ‘68세대’가 만든 정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사민당 총재인 오스카 라퐁텐 재무,요슈카 피셔 외무,오토 실리 내무,위르겐 트리틴 환경장관 등이 선두주자. 특히 슈뢰더와 실리는 역시 68세대들이었던 독일 적군파들의 변호사를 자임했다. 프랑스로 넘어가 68시위를 주도했던 다니엘 콘 밴디트는 현재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재무,로빈 쿡 외무,잭 스트로 내무,피터 멘델슨 무역장관 등도 68세대의 기수들. 브라운은 68년 당시 글래스고대학 급진학생노조 회장이었고 스트로는 전국학생연맹 의장이었다. 제3의 길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 총리도 같은 범주에 든다. 좌익 민주당 소속의 마시모 달레마 이탈리아 총리도 60년대 말 좌익 청년시위를 주도했던 골수 사회주의자로 올리비에로 딜리베르토 법무장관과 함께 이탈리아 68세대를 대표한다. ◎좌파정권 정책과 전망/고용확대·성장추구·복지강화 초점/금리인하·정부지출 확대 불가피… 이전 정책과 상충/각국사정 복잡·다양… 정책 협조·성공에 부정적 시각 유럽연합(EU) 좌파정권들은 고용창출과 공공지출 확대를 통한 성장추구,복지정책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전의 우파정권들이 내년 1월1일 출범 예정인 유로화(유럽단일통화) 도입을 위해 펴온 공공부채 및 재정적자 감축정책 등 기존 정책들과는 상충되는 점이 많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경기부양과 실업자를 축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공공지출을 늘려 나가겠다고 종전 정책를 뒤집었다. 마시모 달레마 이탈리아 총리도 경기회복을 위해 재정적자 확대를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열린 EU 정상회담에서 각국 지도자들이 주장한 금리인하는 종전 정책을 기본부터흔들었다. 과거 우파정권들은 강한 유로화를 위해 현금리 고수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이들의 새로운 정책이 착근에 성공할 지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각국 지도자들의 입지강화를 위해 자국민용 정치적 발언이라는 분석이다. 뒤젠베르크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EU 지도자들의 발언은 금융정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동안 활성화된 유럽의 자유시장경제제도와 각국의 다양한 국내 사정도 이들 연대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던지게 한다. 우선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각국 입장의 교통정리가 급선무다. 그러나 모두 고만고만해 서로가 어느누구도 교통경찰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68세대는 ‘또다른 실패’를 맛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8세대의 정의와 변천/68년 佛 학생·반체제운동 주도/기성세대 거부 유럽·美 젊은층 지난 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과 6월의 반체제운동을 주도한 대학생과 젊은층,이들에 동조해 시위를 벌이거나 청년문화를 이끌어갔던 당시 유럽과 미국 등지의 20∼30대를 68세대라 일컫는다. 전후 경제적 풍요 속에서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체제에 도전,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프랑스는 2차대전의 폐허에서 완전히 재기,경제적으로는 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완고한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지만 교회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보수화된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 집단이었던 셈이다. 운동권 학생은 물론 노동자,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학생조직으로는 ‘프랑스학생연합(UNEF)’‘3·22운동’ 등이,노동자단체에서는 ‘프랑스 노동총동맹(CGT)’‘프랑스민주노조연맹’‘프랑스 교원노조(FEN)’가 그리고 정치단체로는 베트남위원회 등이 참여했다.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를 비롯해 트로츠키주의자,마오저뚱주의자,체게바라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세력이 뛰어들었으나 내부적 통일성은 없었다. 이후 변질 과정을 겪게 되지만 오늘날의 생태주의,여성 권리와 남녀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모색하는 페미니즘,반전·반핵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범사회적 저항운동과 문화운동의 기수가 됐다. ◎68세대 탄생 당시 주요 사건 ▲62년 2월8일=프랑스 우익 폭탄테러 발생.시위대 8명 사망 ▲63년 11월22일=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64년 8월7일=미군 통킹만 보복공습 ▲65년 4월17일=미 대학생 1만5,000명 백악관 앞에서 반전시위 ▲66년 4월=마오저뚱(毛澤東)문화혁명 시작 ▲66년 11월=미니스커트 돌풍 ▲67년 7월27일=미 주요 도시 최악의 인종폭동 ▲68년 4월4일=마틴 루터 킹 피격 사망 ▲68년 5월30일=프랑스 총파업 ▲68년 8월22일=소련,체코 프라하 침공 ▲69년 4월28일=드골 프랑스 대통령 사임 ▲69년 11월15일=워싱턴서 25만명 반전시위 ◎70년대 신좌파와의 차이/70년대,공산주의와는 다른 진보적 반체제 운동/90년대,노동자 권익보호 등 정치정책노선 치중 68세대가 주도한 6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의 ‘신좌파’(New left)운동은 반체제운동이었다. ‘진보’를 뜻하는 좌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당시 모든 인습과 제도에 저항했다. 그러나 권력 장악이 목표였던 정치적 좌파(구 좌파),즉 공산주의 노선과는 다른 다분히 이념적·이상적인 것이었다. 신좌파운동의 대표격인 68년 프랑스 5월운동은 드골 정부의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배격해 일어났고 미국의 학생민권평화운동은 베트남전으로 드러난 추악한 자본주의체제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 ‘프라하의 봄’으로 상징되는 체코 반체제운동은 소련 동유럽의 전통적 좌파가 대상이었다. 반면 90년대 말부터 유럽을 강타하고 있는 새 조류는 30년이 흐른 지금 주역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신좌파(New New left)’로 불릴 만큼 노선엔 차이가 있다. ‘좌파 정당’들의 새로운 ‘정치정책노선’으로 70년대 이후 환경·여성·반핵·지역자치운동의 신사회운동으로 계승된 기존의 신 좌파운동과는 대별된다. ‘개량적 좌파정책’,‘중도좌파’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자본주의 장점을 취하면서 직업교육 의료혜택,연금제도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보호하겠다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제3의 길’이 대표적 예다.
  • 중동협상 주역들 무사할까

    ◎아라파트­아랍권 매국노 지목 ‘암살리스트’에/무바라크­10여 차례의 암살기도 간신히 모면/네타냐후­이스라엘 정착촌서 ‘반역자’로 불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23일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베냐민 네타야후와 야세르 아라파트 등 협상 주역들이 발 뻗고 자기에는 시기상조인것 같다. 과거 중동협상의 전기를 마련했던 주역들이 강경 과격단체들에게 피살되거나 위험에 처하면서 성과가 물거픔이 됐던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협상주역들에 대한 신변안전도 평화정착에 중요한 문제인 셈이다. 첫 희생자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79년 이스라엘 베긴 총리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시나이반도 반환 문제 등을 타결 지음으로써 중동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다.그러나 81년 카이로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이슬람 지하드’ 소속 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95년에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총리가 과격 우익단체에 의해 피살된다.93년과 94년 팔레스타인 및 요르단과 각각 평화협정을 체결,적대관계를 청산,아라파트와 노벨평화상을 함께 받았으나 기뿜도 잠시.이듬해 시리아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아라파트도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을 체결한 이후 아랍권에서는 ‘매국노’로 지목돼 암살대상 리스트에 올라있으며 여러 차례 암살기도가 있었다.라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동평화중재로 이집트를 외교 강국으로 부상시킨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도 국내 이슬람 근본주의자 단체들의 10여차례에 걸친 암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다.이번 협상의 숨은 주역 후세인 요르단국왕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다.네타냐후도 벌써부터 이스라엘 정착촌에서는 ‘반역자’라는 말이 나돈다.호사가들은 ‘순교자’가 또 나올 여지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 부패의 국가경쟁력(張潤煥 칼럼)

    지난 70년 필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월남등 몇몇 동남아 국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 나라들은 하나같이 부패해 있었다.그러나 당시 필자는 동남아 국가들이 대부분 개도국(開途國)이기 때문에 부패 또한 과도기적 현상쯤으로 가볍게 보아 넘겼다.한국도 부패에서 예외는 아니지만 개도국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말이다. 당시 월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월남의 부패상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다고 했다.결국 월남은 총체적 부패로 패망하고 수도 사이공은 ‘호치민시’가 됐다.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하자 朴正熙 대통령은 엉뚱하게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했다.그러나 그는 유신헌법을 철폐했거나 절대권력에 따르는 ‘절대부패’의 싹을 잘랐어야 했다. ○‘墨筆代’라는 급행료 필리핀은 당시 마르코스가 통치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부패상은 말할 것도 없다.마르코스가 국민의 힘에 몰려 권좌에서 물러난 뒤 스위스 은행에 빼돌려 놓았던 몇십억달러의 비자금이 드러났고,영부인 이멜다는 구두가 몇백 켤레나 된다고 해서 세계적인 조소거리가 됐다.아키노와 라모스 정권을 거친 오늘날의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일족이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아키노나 라모스의 민주화가 현상적 민주화에 그쳤을뿐,구조화된 부정부패의 뿌리를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독재의 반대어는 민주화가 아니라 부패구조의 척결이라고 해야 옳다. 70년의 인도네시아는 65년 공산당의 9·30 불발 쿠데타를 진압한 우익 군부의 실력자 수하르토장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군사정권인지라 장차관은 물론 도지사와 시장 군수,심지어 산림청장 같은 직책마저도 현역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5·16군사쿠데타 당시 한국을 다시 보는듯 했다.朴正熙 소장이 그랬듯이 수하르토도 반공과 빈곤퇴치,그리고 ‘부정부패의 척결’을 혁명공약으로 내걸고 있었다.자카르타에서 만난 한 화교(華僑)는 공직 사회에 만연된 극심한 부패상을 ‘묵필대’(墨筆代)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묵필대란 ‘잉크값’이라는 중국말로 공무원들에게 바치는 급행요금을 의미했다. 관청에서 서류 한장을 떼더라도최말단에서부터 주사·계장·차석·과장·부국장·국장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묵필대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그것도 공공연하게 말이다.수하르토가 그동안 얼마나 빈곤을 퇴치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했는지는 잘 모른다.다만 수하르토가 국민의 힘에 몰려 권좌에서 밀려난 뒤 부패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으며,인도네시아 또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체제에 들어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IMF 구제금융의 뿌리 ‘사돈 남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아시아의 몇마리 용들 가운데 선두를 달린다던 한국은 구제금융에서도 선두주자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정치권과 재계와 공직사회가 부패의 고리로 서로 뒤엉켜 나라를 송두리째 부도낸 마당에 더이상 할 말이 있는가.동남아 국가들을 내려다 보았던 그때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뒤늦게 한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국가경쟁력도 가려가며 높아야 한다는 사실이다.한국을 포함해서 앞에 말한 나라들은 적어도 ‘부패의 국가경쟁력’에서는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그러나 엉뚱하게 높은 부패의 국가경쟁력이 바로 구제금융을 불러온 뿌리다.
  • 日 정객 妄言 사라질까/관방장관 ‘입단속’ 피력

    ◎‘양국 협력 긴요’ 저변 확산/자제 요인으로 작용할듯 【도쿄=黃性淇 특파원】 8일의 역사적인 한·일 공동선언이 일본 정객들의 고질적인 ‘망언’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역사의 톱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없도록 공동선언을 소중히 여기겠다”면서 “앞으로 발언 등에 각별히 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의 방일 때마다 일황이나 총리 등이 과거사에 대해 사죄나 사과를 했으나 번번이 일본 각료나 정치인들의 망언이 터지는 통에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오히려 격앙시키는 등 방일 성과가 반감된 예가 많았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사죄의 ‘교과서’로 삼았던 95년 ‘무라야마 담화’ 직후 한·일합방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망언이 이어져 金泳三정부 때 한·일관계가 한동안 냉랭했던 사례가 잘 말해준다. 최근에는 오부치 내각 출범 직후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농수산상이 종군위안부문제의 일본 교과서 게재와 관련한 망언으로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을앞두고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노나카 장관이 “한·일 공동선언의 정신에 입각,양국 역사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발언을 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할 것”이라고까지 강조,입단속을 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피력한 것도 이같은 전례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일본 정객들의 망언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좌지우지될 성격은 아니지만 두 나라 정부가 과거청산을 처음으로 문서화하고 관방장관이 이례적으로 재차 강조하고 나선 만큼 망언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내 한국전문가들도 21세기에 한·일 두 나라의 협력은 서로에게 불가결하다는 인식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확산되고 있는 만큼 이런 분위기가 망언을 자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등 우익성향 정객들의 돌출행보가 최대 변수인 셈이다.
  • ‘과거 청산’에 큰 의미/공동선언 日 시각

    ◎이번 사죄 진심 담겨 더이상 문제 안돼야/김 대통령 일 긍정 언급 “솔직한 표현” 높게 평가 【도쿄=黃性淇 특파원】 8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선언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각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20세기의 불행한 과거를 씻고 21세기를 향해 신뢰와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전반적 기류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회담 전 “이번 회담은 양국이 21세기를 앞두고 과거를 청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공동선언에서 “한국 국민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준 데 대해 통절(痛切)한 반성과 사죄를 한다”는 오부치 총리의 입장표명은 과거사와 관련된 일본의 ‘사죄’를 진심으로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 근거로 역대 한국 대통령의 방일 때와는 달리 ‘사죄’를 명문화한 대목을 든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있어온 정부 차원의 사죄 요구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인식도 깔려있다. 그러나 오부치 총리의 사죄 발언 내용이 회담 전부터 일본 언론에 보도되면서 집권 자민당 일각은 물론보수 우익층에서 ‘사죄 반대론’이 제기돼 왔던 것이 현실이다. 이들에 대한 무마용으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의 ‘95년 담화’에 들어있던 ‘국가정책의 잘못으로 전쟁의 길을 걸었다’라는 자기비판이 이번 사죄부분에는 빠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응어리는 일황의 조기방한 요청이나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등 金大中 대통령이 견지하고 있는 전향적 대일(對日)자세를 바탕으로 양국간 인적,문화적 교류를 확산시킴으로써 점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보고 있다. 일본측은 金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언급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기여,민주주의,개발도상국가에 대한 지원,유엔에서의 공헌 등 전후 일본이 이룬 긍정적인 면모에 대한 언급은 역대 대통령의 방일 때는 없었던 ‘솔직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사죄’ 단어 공식문서에 명기/진일보된 과거사 사과

    ◎일 망언 예방효과 기대/교과서 개정돼야 완결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담긴 과거사 사과 표현은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의 담화에서 ‘아시아 제국’을 ‘한국민’으로 바꾼 것이다.공동선언에 쓰인 ‘오와비’란 일본어도 무라야마와 하시모토 총리의 과거사 사과 때는 ‘사과’와 ‘사죄’로 병행 해석돼 발표됐지만 이번에는 사죄로만 명기한 것도 진일보한 점이다. 그러나 일본어 사용 강요와 창씨개명,군대위안부 문제를 적시했던 지난 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의 발언과 비교할 때는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특히 과거사 사과가 말이 아닌 공식문서에 담겼다는 점만은 큰 진전이란 평가다.그동안 여러차례 일황과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가 있었지만 보수우익 각료와 정치인들의 망언으로 그 의미가 희석돼왔다.이제 공식문서화된 만큼 최소한 일본 정부차원의 망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양국이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선언적 행위보다도 일본의 성실한 자세가 관건이다.과거사 사과는 역사교과서의 개정으로 완수된 다는게 우리의 입장.이번 공동선언에도 젊은 세대에 대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언급됐지만 양국의 입장은 아직 다르다.우리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 교과서 개정에 큰 관심이 없다.얼마전 ‘한·일 역사연구촉진공동위원회’설치 때도 일본측이 강력히 주장해 ‘촉진’이란 용어를 넣어야만 했다.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예비작업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과를 해야 하느냐”는 일본의 비아냥도 있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진정으로 과거사 문제가 종료된다는 게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 과거사 사과 발언 ▲히로히토 일황 ­금세기 한 시기에 양국간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84.9.6 전두환 대통령 방일 만찬사 ▲아키히토 일황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고 본인은 痛惜의 念을 금할수 없다. ­90.5.24 노태우 대통령 방일 만찬사 ▲미야자와 총리 ­과거 한시기 귀국국민들께서 일본의 행위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셨던 사실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잊지않도록 해야할 것이며 저는 총리로서 다시한번 귀국국민께 반성과 사과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92.1.16 방한 만찬답사 ▲호소카와 총리 ­과거 우리의 식민지 지배시절엔 한반도의 여러분들은, 예를 들어 모국어의 기회를 빼앗기고 타국어의 사용을 강요당하고 창씨개명이라는 이상한 일이 강제되고, 군대위안부,노동자의 강제연행 등 각종 문제가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당한데 대해 가해자로서 우리가 한 일을 깊이 반성하며 이번기회에 다시한번 陳謝드리는 바이다. ­93.11.16 경주 정상회담 ▲무라야마 총리 ­일본은 멀지않은 과거의 한시기에 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에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 역사의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한번 통렬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95.8.10 전후 50주년 특별담화 ▲오부치 총리 ­일본이 과거 한 시기에 한국민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의해 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인식,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 ­98.10.8 김대중 대통령 방일 공동선언
  • 美 공화 의원들 성추문 도미노/모두 클린턴 비판자

    ◎“백악관의 음모다” FBI에 수사 요구/블루멘탈 보좌관 배후 지목… “믿을만한 증거 있다” 요즘 미국 정가에서는 정치인들의 추문 폭로전이 한창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이 파문을 일으키며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 게 첫단추가 되었다. 공화당은 17일 하원 법사위원회 헨리 하이드 위원장의 간통사건이 폭로되자 루이 프리 연방수사국(FBI) 국장에게 서한을 보내 즉각 수사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서한은 “의원들에 대한 조직적인 중상과 협박운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면서 백악관의 시드니 블루멘탈 보좌관을 직접 거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하원 법사위원장의 성추문이 폭로되자 백악관이 배후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고 본 것이다. 성추문 파문이 확산되면서 클린턴 비판에 앞장서온 댄 버튼 하원 정부개혁 감시위원장이 혼외정사로 자식까지 낳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공화당의 여성의원인 헬렌 체노웨스도 지난주 한 기혼남과 오랫동안 불륜관계를 가져온 사실이 들통나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민주당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사임을 맨먼저 요구했던 폴 맥헤일 의원은 남의 공적을 가로채 무공훈장을 받았다는 투서로 곤욕을 치러야 하기도 했다. 비리가 뒤늦게 들춰진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클린턴 비판자들이다보니 의혹의 눈길은 그대로 백악관으로 향했다. 백악관은 물론 펄쩍 뛰었다. 배후로 지목받은 블루멘탈 보좌관은 성명을 발표하고 “나는 그런 것을 공개하는 것이 잘못된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관측통들은 비록 추문 폭로전에 백악관이 개입하지는 않았더라도 클린턴 대통령을 탄핵위기로 몰고 있는 공화당과 우익의 공세에 대한 견제세력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4월에는 캘리포니아 민주당원 봅 멀홀랜드가 “만약 클린턴에 대한 탄핵절차가 강행될 경우 공화당 의원이나 배우자들의 사생활 비리를 계속 폭로,수개월내에 하원 법사위원회는 의결정족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했던 터라 의구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 日王 천황 호칭 공식화(쟁점)

    ◎찬/상대국 고유 호칭 쓰는게 외교 관례/徐東晩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서 ‘천황(天皇)’을 공식표현으로 쓰기로 최종정리하였다.이번 결정은 옳은 판단이다.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정부는 외교 관례에 따라 모든 공문서에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해 왔으며,역대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천황에 대해 의전적인 예의를 갖춰왔다.89년 이래 일시적으로 ‘일황(日皇)’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나 국내에서의 호칭이지,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이란 호칭을 써 왔다.외교적 관례나 일관성이란 측면에서 천황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옳다. 한국정부가 천황이란 호칭을 쓸 때,그 이유는 우선 외교적인 배려로서 일본 고유의 호칭을 써 준다는 것이지만,천황이란 한국 내에서도 이미 역사적 존재로서 굳어진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또한 천황이란 일본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에서 볼 때,상징적 원수로서 헌법적 의미외에도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일본 황실은 ‘만세일계’란 말로 황실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한·일 관계에서 볼 때에도,천황은 일본의 상징적 국가원수 이상의 역사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일본은 천황제 국가로서 한국을 식민지화했다.현재의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히로히토 천황의 아들이다. 한국의 대일 외교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과거사 청산외교’이다.과거사 청산의 주체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실질적인 국가수반인 일본총리 외에 바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천황인 것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할 때,천황의 발언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일본에서 사죄를 할 때,그토록 어려운 것은 천황의 경우이다.‘천황’으로서 사죄해야 하기 때문에,일본 국민 자신도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나 애매한 표현을 찾아내서 ‘사죄’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천황은 일본정부 못지 않게 우리 과거사 청산 외교의 대상이다.과거사 청산은 어디까지나 천황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천황으로부터 사죄를 받기 위해서도 우리가 천황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 ◎반/일왕 숭배 장식물 따를 필요없어/韓相範 동국대 법학과 교수 일제시대를 살아 본 사람에게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와 불구화를 남긴 것은 일제의 왕을 신(現人神­아라히토가미)으로 섬기도록 정신세뇌를 당한 후유증이다.다같은 생물을 신(神)으로 둔갑시켜 정치적 주문으로 우민화를 자행한 사연은 메이지유신의 왕정복고 지배구조에도 원인이 있다.이같은 정치적 신화는 군국주의 정신의 온상이 되었고,나아가 아시아 2,000만의 민중을 학살하기도 했다.그런데 이 미신과 신화는 아직도 우익반동의 온상인 채로 과학적·합리적 사고방식을 가로막아 오고 있다.바로 이 봉건적이고 시대착오적,반(反)민주적 정치신화의 상징적 언어가 ‘천황폐하(天皇陛下)’라는 말이다. 일본 왕을 영어로는 emperor라고 하므로 구미 외교계에서는 다른 나라의 군주처럼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그런데 우리말로 부를 경우 ‘왕’이나 ‘군주’라고 하면 그만이다.굳이 일본말인 ‘천황’으로 부를 필요는 없다.원래 ‘천황’이라는 칭호는 일본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현행 일본국 헌법은 주권이 국민에게있다는 국민주권원리에 입각하고 있다.1946년 1월 1일 일본왕은,자신은 신도 아니며 또 일본인만이 우월하다는 편견도 잘못됐다는 내용의 신앙고백을 한 바 있다.그는 자신의 신격화를 부정한 대가로 전쟁범죄의 공격을 교묘하게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있다. 우리가 일본 왕의 칭호를 두고 신중을 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부 대표가 사용하는 용어는 역사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히로히토는 한국침략에 대해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하는 애매하고도 무성의한 표현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비켜 갔다.전후 일관된 일본의 역사왜곡·날조는 왕을 신격화해 무책임의 논리를 구축한 기형적·비합리적 정신구조에서 연유한 것이다. 천황숭배주의의 장식물인 ‘천황’이란 일본식 말 표현을 우리가 따를 것은 없다.우리 말로 ‘왕’이나 ‘국왕’이라고 하면 그만이다.외교통상부 일부에서 말하는 ‘천황’칭호는 일본식 용어이니 따를 것은 아니다.우리 말대로 자연스럽게 부르면 되지 여기에 무슨 외교의례상의 문제가 있겠는가?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