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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브게니 바자노프 러 외교아카데미 부원장(지구촌 칼럼)

    ◎미­러 밀월관계 깨지고 있/러­“경제개혁 실패는 미국탓”/미­국제문제 독자행보는 배신” 미국과 러시아 두나라간의 밀월관계는 확실히 끝났다.그리고 갖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이 두 나라의 밀월을 해치고 있다.관계를 해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그리고 앞으로 이 두나라 관계는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들의 국내정치적 요인들을 체크해봐야한다.러시아에서는 소위 「쇼크요법」식 급진경제개혁이 실패함에 따라 크렘린내 권력핵심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보수주의,전통주의 정치인들이 진출해있다.물론 이들은 과격 반대파 정치세력에 의해 점차 많은 압력을 받고 있다.극단주의자들은 소연방의 해체,강대국 지위의 상실,그리고 친서방 일변도의 정책에 대해 크렘린내 민주세력을 거세게 비난하고 있다.이들은 지난 10년간 러시아가 겪은 재난들이 모두 미국에 의해 계획되고 저질러진 것으로 믿는다.사회,경제,민족문제등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이러한 선동에 쉽게 휘말린다.이런 분위기에 과감히 제동을 거는 정치인도 없고 대외정책도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 역시 러시아에 대해 점차 덜 우호적으로 돼간다.이는 부분적으로는 러시아국내 문제 탓이지만 크게는 미국내 사정 탓이다.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민주·공화 두 세력간 경쟁관계가 첨예화된데서 파생되는 현상이다. 두나라 관계를 해치는 또다른 요인으로는 수년에 걸친 협력관계 모색이 별 결과를 낳지 못했다는 실망을 들 수 있다.처음 러시아 민주세력들은 미국을 러시아의 개혁을 도와줄 이념,정치적 동맹관계로 보았다.미국 지도자들 역시 러시아의 개혁을 지지했다.그러나 최근 러시아의 대내외 정책 기조가 변하면서 미국의 관심은 급격히 퇴조했다.그러자 러시아 정치인들은 이를 미국의 배신으로 받아들였다.양측 모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원조문제만 해도 그렇다.1992년에 미국은 러시아를 주 원조대상국으로 간주했다.새 러시아에 필요한 물품,재정적 지원을 베풀 태세가 돼있는 듯했다.하지만 지금 러시아는 미국의 차관,원조가 불충분하다고 욕한다.투자 역시 미미하다.필요한 투자 대신 미국은 쓸데없고 유해한 물품(예를들면 껌·담배등)들만 러시아에 실어나른다.법적 제약 때문에 기술이전도 되지 않고 미국은 러시아가 제3국에 기술을 팔아 돈을 버는 길마저 막고 나선다.러시아와 이란간 핵기술 판매협정 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러시아가 미국에 대해 쏟아내는 이런 불평불만이나 미국이 러시아에 대해 갖는 불만들 모두 합당한 논리를 갖지 못한다.러시아에 주는 차관·물품은 관료,범죄조직의 주머니로 사라진다.러시아의 투자환경은 너무 열악하다.그리고 러시아 수입업자들 스스로가 그런 무익한 물품들만 골라서 사간다.그리고 극단적인 나라들에 대한 러시아의 기술판매는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위험을 초래한다. 러시아 역시 미국 모델을 따라 보겠다고 한 개혁이 실패로 끝난 데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이들은 미국인 경제학자들이 자기들에게 잘못된 처방을 해주었다고 욕한다.물론 미국학자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새로운 개발모델을 소화할 능력을 못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양자 관계를 해치는 또하나의요인은 국제무대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시간이 갈수록 러시아는 안보·경제·민족문제등 여러 면에서 옛소련방 공화국들이 반드시 다시 뭉쳐야한다고 믿는다.러시아는 소위 「가까운 외국」으로 일컫는 옛연방 공화국들도 이에 동감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미국은 이를 러시아제국주의의 재등장 조짐으로 해석한다.그래서 미국은 이들 옛소련 공화국들에게 소련의 영향권을 벗어난 독자적인 정책을 펴고 다른 외국과의 관계강화를 추구하라고 부추긴다. 동구에서도 양국간 이해는 충돌한다.러시아가 보기에 과거 자기의 동맹국들이 나토에 가입한다면 이는 유럽대륙에서 자기들만 고립돼 러시아의 평화,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미·러 관계가 악화되고 러시아의 장래가 불안해질수록 미국은 동유럽국들의 희망대로 이곳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지금 러시아에서는 미국이 자기들을 2등 파트너로 대한다는 불만이 높아간다.주요 국제문제들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면서도 러시아의 대내외 문제에사사건건 간섭한다.그리고 러시아국민들의 미국여행에 온갖 제약을 다 가하면서 저질 팝 문화로 러시아를 오염시키고 또한 러시아의 언론들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강대국 러시아의 옛영광을 되찾자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미국의 이러한 횡포를 도저히 참지 못한다.이제 더이상 미국의 입장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자고 이들은 주장한다.그래서 이들은 최근 들어 모든 주요 국제분쟁에 개입해 독자적 입장을 제시하려고 한다. 미국은 러시아의 이런 태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미국은 러시아를 손 아래 파트너로 취급하는데 익숙해 있다.우선 크렘린은 국내정적과의 투쟁에서 번번히 미국의 지원에 신세를 졌다.그리고 미국은 경제원조를 제공했고 러시아는 사회,교육,행정,환경등 거의 모든 문제에서 미국의 도움과 자문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국제무대에서 독자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은 미국이 볼 때는 일종의 배은망덕이다. 이런 여러 문제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관계가 완전 회복불능은 아니다.최악의 시나리오로 설사 러시아에극우 민족주의 독재정권이 등장하더라도 양국관계가 완전 끝장나지는 않을 것이다.우선 러시아가 군사적,지정학적으로 그런 대결을 감당할 힘이 없다.그리고 아무리 독재정권이라도 군사력,나아가 국민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경제협력이 필수적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양국관계를 떼놓을 이념대결이 없다.러시아가 현대사회를 건설하는데 미국·서유럽 모델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그리고 어떤 독재자가 나와 세계강대국이 되겠다고 호언해봤자 러시아국민들이 이를 지지할 리가 없다.러시아국민들은 이미 그런 슬로건에 식상해있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보다 나은 삶뿐이다.미국 역시 오랜 냉전대결로 힘이 소진돼 새로운 냉전대결을 벌일 입장이 아니다.따라서 미·러 관계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완전히 판이 깨지지는 않는 미묘한 관계가 계속될 것이다.
  • 미 여권운동가 하이트 저서 논란(해외 출판)

    ◎“자녀 양육에 편모가 낫다”/“전통 가족체계는 억압적” 주장/사회각계서 신랄한 비판… 15개월만에 출간 『홀어머니 슬하의 아들이 성장하면 여성들과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하며 모친에 대한 존경심도 훨씬 깊다.양친과 자녀들로 구성되는 전통적 가족은 억압적인 것이며 수많은 사회적 불의의 온상이다』 기존의 가족관을 근간부터 뒤엎는 이같은 주장은 현재 미국에서 일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미국의 여권운동가 시어 하이트 여사가 쓴 「하이트 가족문제 보고서」의 일부이다. 남녀간 성문제와 가족관계를 다루고 있는 이 보고서는 약 3천개의 항목들에 대해 조사대상자들의 응답을 토대로 작성됐다. 그러나 하이트여사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녀가 이전에 출간한 보고서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신랄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내 출판사 변경,여권운동가들의 지원항의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영국과 유럽대륙에서 출간된지 1년 3개월뒤인 지난달 중순 미국에서 비로소 출간됐다. 이 책은 유럽에서 출간된직후 미국의 대형출판사인 더튼사에 판권이 팔려 수주내로 발간될 예정이었으나 원고를 받아본 출판사는 구체적 설명없이 「편집상의 이유」를 내세워 발간계획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래서 하이트여사는 할 수 없이 소규모 출판사인 글로브 어틀랜틱사에 출판을 맡겼다.
  • 창무극 1인자 공옥진(이세기의 인물탐구:76)

    ◎고독을 춤추는 이시대 마지막 광대/타고난 끼와 파격의 몸짓으로 한맺힌 삶 표현/헤살궂은 사설조에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부친에게 창배워 유랑극단에… 장애인 동생 조카위해 국수장사도 전라도 광주땅에서 공옥진예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공옥진」 이름을 대면 「함평군 문장을 지나 40㎞쯤 들어간 영광에 가보라」고 일러준다.영광읍 교촌리 영광예술연구소에 들어서자 그는 찾아간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부터 글썽인다.눈물 많고 한 많고 정많은 모습은 예전이나 변함 없다.연구소 마루는 널찍한 20여평인데 비해 뒤꼍에 위치한 살림방은 사람이 둘만 앉아도 비좁은 골방에 불과했다.전국 방방곡곡 이름을 떨치지 않은데가 없건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다.그러나 자신이 직접 캐온 불갑사 산나물이며 법성포 바닷가에서 주워온 바지락으로 상을 차리면서도 지난해 피땀으로 절약한 1천만원을 중고생 장학금으로 내놓아 주변을 훈훈하게 했다는 얘기다.가난과 한과 고독이 점철된 그의 지나온 생애에 비춰 그는 한푼이라도 돈이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지금도 의탁할곳 없는 동네 노인들을 집에 데려다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하고 산에 가서 고사리를 캐기도 한다. ○생활은 여전히 궁핍 지금부터 17년전 중앙대 교수이자 무용평론가인 정병호씨가 「참으로 이 시대 그대로 지나쳐선 안되는 예사롭지 않은 예인」이 있다면서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데려간적이 있었다.그때 공옥진은 하얀 옥양목 치마 저고리차림의 평범한 시골 아낙에 지나지 않았으나 창과 춤뿐 아니라 일인다역으로 「흥보가」「심청가」를 혼자서 몇시간이든 두루 꿰어나간다고 했다.막상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가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번뜩이는 예살이 범상치가 않았다.「서리서리 한맺힌 구성진 가락은 한여름철 장대비와도 같고 헤살궂은 사설조마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 담겨있었다.용궁막 황성 맹인잔치대목에 이르러 저고리 뒷섶을 활짝 뒤로 젖히더니 목속에 턱을 깊숙이 파묻고 눈을 사팔로 만들고는 엉거주춤 허리춤을 부여잡고 뒤뚱뒤뚱 휘돌아나갔다.엉덩이 빠진곱사춤,절름발이 곰배팔이 오리발 병신춤을 눈부시게 펼치는 가운데 인물치레 성음치레를 무시한 자재로운 몸짓은 도무지 몸을 사리거나 풍색을 개의치도 않았다.솔직하고 천연덕스러운 그의 춤은 얼핏 보기엔 즉흥적인 신명같지만 하나의 익살스러운 동작에는 반드시 그 시작과 끝을 알리는 회무가 따르고 있었다.경륜 있는 예인으로서의 여유와 능수능란이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민속학자 심우성씨(문화재 전문위원)의 「고격의 예술에 식상한 관객들이 섬세한 아름다움이기를 거부한 그의 진솔한 인간적 표현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탓」이라는 평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다.이후 국악관련 책자나 프로그램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예술가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공옥진을 꼽겠다」고 당당하게 밝혔고 「공옥진의 타고난 「끼」,철저한 광대기질,총명과 명석은 가히 천재적인 것으로 그는 한번만 힐끗 보고도 상대방의 모든 동작과 표정을 날카롭게 읽어낸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예술사 연구를 하는 김철순은 『일찍이 이동백옹이 이혜구씨에게 말한 것처럼 판소리 뿐 아니라 모든 한국예술의 본질은 기존의 법칙과 양식,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류의 새로운 음악과 춤으로 자연스럽게 창조해내는 것」이라야 한다면 그가 바로 공옥진』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공옥진의 춤은 춤사위로 이어진 정제된 춤이 아닌 고통스런 삶의 한풀이이자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진짜 고유의 조선춤」으로 호평했고 무언극공연차 한국에 왔던 마르셀 마르소도 「나는 무언극을 하지만 공옥진의 일련의 움직임은 그것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독특한 파격의 예술」임을 거듭 강조한바 있다. ○한때 입산… 비구니로 공옥진의 광기랄가,신기랄가.그의 천부적 재질은 연습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격식을 갖춘 전통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사람을 사로잡는 힘과 정과 한이 일체감을 이루면서 「고통과 슬픔이라는 껍질을 과감하게 깬 살아 있는 몸짓」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만의 독특한 창무극을 무대에 정착시켰고 그는 일약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7살때 단돈 천원에 일본에 팔려간 적이 있어요.당대 제일의 무용가인 도쿄의 최승희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일본인집에 넘겨졌지요.5년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방랑길을 떠났고 어머니 마저 개가해버려 동생들과 먹고 살기 위해 그때부터 장터에서 춤을 추고 창을 하게 됐답니다』 하얀 옥양목 치마끝에 찍어낸 눈물은 그의 말을 빌리면 「눈물이 고여 바다」가 됐을 정도다.그만큼 그의 지난 세월은 어느 대목을 들어도 고초와 한숨이며 통곡의 파노라마다.그런중에도 국내 구석구석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 초대되어 젊은이들에게 「어머니」라 불렸고 미 카네기홀 링컨센터 대공연을 갖는가 하면 일본의 저명한 사진작가 세키네는 그의 공연사진과 데생으로 도쿄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옥진은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태어났다.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중 둘째딸,그의 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서울 협률사 초기멤버이던 공창식 명창이다.그는 일찍이 부친에게 창을 배운후 유랑극단의 소녀주역으로 활약하다가 두번의 결혼 실패끝에 한때는 지리산 천은사에 입산하여 「수진」스님으로 참선,중년에 접어들어 농아인 남동생과 곱사등이인 조카딸을 돌보기 위해 광주 지산면에서 국수장사를 했고 그곳에 공연을 왔던 김연수씨를 만나 우리국악단에 몸담으면서 다시 유랑생활에 나섰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로 얼룩진 그의 인생사는 그동안 여러잡지 신문 등에 소개된바 있지만 그 어느것도 그가 돗자리 하나만으로 장바닥에서 펼치는 통한의 눈물과 익살과 한숨에 미치지 못한다.또한 그의 「살풀이춤」은 장탄식과 짙푸른 한의 음영이 깃든 명무지만 「살다보니 어찌어찌하다 희극무인 병신춤 동물춤의 일인자」처럼 되었고 한때는 장애자들로부터 「무엇 할짓이 없어 장애인 흉내로 무대에 서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그때마다 그는 곱사춤은 옛날부터 각 지방에서 내려오던 사당패들의 자리판 놀음이며 더구나 그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과 내손으로 키운 조카아이까지 장애인의 가족으로서,살아있는 여러 삶의 절박한 표현은 춤일수 밖에 없음」을 그때마다 상기시키지 않으면안되었다. ○84년 서울생활 청산 그는 지난 84년 6년여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노부를 모시고자 그가 자라난 영광읍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동생과 조카를 앞세웠고 부친마저 90년 세상을 떠난후 지금은 예술연구소에 남아 고향의 「아기」들에게 그의 춤을 전수시키고자 만모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요즘은 수년전부터 앓아온 담석증을 세번째 수술하고 아직 건강치 못한 몸이지만 산에 가서 즉흥무를 추거나 산야에 대고 「제비 노정기」를 내지르면 「없던 힘과 신명이 절로 솟아」 아프던 몸이 거뜬히 낫는다고 말한다.지난봄부터 여수 영암공연,크고 작은 경로 효도잔치에 빠지지 않았고 7월에는 광주에 새로 생긴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을 앞두고 있다. 공옥진은 참으로 한이 많은 예술가다.그리고 그의 춤과 소리를 격조와 품위로 논하기란 어렵다.그러나 무대에 서면 진흙탕에 뒹굴듯 몸을 사리지 않고 인간의 「절대고독」을 춤추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 그 이상」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누군가 말한대로 「광대가 될때만가장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꾸미지 않은 옛광대의 기질과 체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옥진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광대라는 예감이다. □연보 ▲1931년 전남 승주 출생 ▲38∼43년 일본 체류 ▲45∼47년 조선창극단 ▲48년 고창·정읍 명창대회1등 ▲57∼63년 임방울창극단 협률사 입단 ▲61∼63년 김연수 우리국악단 ▲64∼66년 김원술안성국악단 ▲66∼67년 박녹주국극협회 ▲67·68년 일본공연 ▲78년 공간사랑 1인창무극 ▲81년 미 케네디센터 「한국전통무용」공연,전남 영광읍장터 「공옥진놀이판」 ▲84년 일본 공연,서울 결산무대 「공옥진춤판­그의 모든 것」(문예회관대극장),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서 「마당놀이 춤판」,낙향 광주서 부친 공대일명창과 「아버지와 춤을」 대공연 ▲85년 런던 국제 연극제 참가 ▲91년 1인창무극(호암아트홀) ▲92년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돕기 서울공연(세종문화회관)을 필두로 인천 성남 수원 구미 대구 천안 평택 충주 제주등 15개도시 순회공연 ▲93년 뉴욕(링컨센터) 시카고 LA 하와이 중국 런던 일본등 세계순회 및 부산(KBS홀)공연,「한국의 소리와 몸짓」시리즈(예술의 전당),1인 창무극(미도파 메트로홀) ▲94년 1인창무극 「학녀의 한의 춤」(세종문화회관),그외 전국 50여 대학 초청 「공옥진 한의 춤」공연등 경로위로 잔치 수백여회 ▲95년 여수(진남체육관) 및 영암 정읍 공연,7월9일 광주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 예정 전남 영광예술연구소 대표
  • 일 연립여당 「종전 50년」결의안

    일본 연립여당이 전후(전후)50년에 즈음한 국회결의안이란 것을 마련했다.작년 6월 자민·사회당등의 연립정권 발족당시 채택키로 합의한지 1년만의 일이다.그러나 「과거의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미래의 평화결의를 다짐한다」는 당초 취지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일본은 반성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는 결의안 같다는 것이 우리가 받는 인상이다. 우선 이결의안 채택을 둘러싸고 지난 1년동안 일본에서 전개된 우여곡절은 한마디로 불쾌하고 실망적인 것이었다.누구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작한 일이었다.그럼에도 사회당본부 화염병투척 등 우익들의 반대는 완강했으며 결과적으로 마련된 결의안은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자민당을 비롯,일본정계에 일제)와 침략전쟁이 정당했다고 신봉하는 우익세력이 얼마나 뿌리깊게 남아 있는가를 재확인하는 역설적인 기회였다. 물론 우리는 처음부터 기대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그동안 국왕과 총리등의 입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수없이 해왔으며 그 이상이 나올 수 없는일본의 속성과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우리가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그동안의 수준에서도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결의안 내용은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사죄 및 다시는 않겠다는 다짐보다는 한마디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변명과 정당화에 급급하고 있다.그당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은 세계열강 모두가 추구한 보편적 시대상황이었음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인 자기변명과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결의라면 왜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그것은 한국 등 아시아 이웃들의 지난 상처를 달래고 공존공영의 미래를 함께 개척해 나가자는 일본국회의 전후 50주년 결의안에 걸맞는 내용은 아니다.와타나베망언과 함께 일본제국주의·패권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경기(6·27 표밭 기류:13)

    ◎민자 초잔독주에 민주·자민련 추격양상/개혁·참신성 무기 지지기반 넓히기­민자 이인제/경선진통 딛고 “바람몰이” 전력투구­민주 장경우/남부지역 유권자 공략 주력­자민련 김문원 민자당의 이인제 의원이 독주하던 경기도지사 선거는 지난달말 출마를 선언한 자민련의 김문원 대변인에 이어 민주당의 장경우 의원이 지난 6일 우여곡절끝에 후보로 확정됨으로써 3파전의 모양을 갖추었다. 경기도는 전통적으로 한강 이북의 경기북부와 서울에서 먼 남부지역은 친여,성남 부천 광명등 서울과 근접한 남부 위성도시들은 친야성향을 보여왔다. 지난 14대 총선에서 민자당은 37.1%,민주당은 31.8%를,14대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는 35.8%,김대중후보는 31.5%의 득표율을 보이는등 여당이 근소한 차이로 앞서 왔다. 총 7백43만명 가운데 토박이가 2백만명에 불과하고 15∼20%를 호남과 충청출신이 각각 차지하는 등 나머지는 다른 지역 출신이다. 인구유동이 큰 위성도시 인구가 60%를 넘고 특히 분당 일산 평촌등 신도시는 66.7%가 직장을 서울에 두고 있다.따라서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대도시에 못지 않다는 분석이다. 출사표를 던지기 전 여론조사에서부터 20% 이상의 가장 높은 지지율을 나타냈던 민자당의 이인제 후보는 문민정부 출범 때 최연소 장관을 지낸 경력에다 본인이 자처한 경선을 통해 당당히 여당의 후보가 됐다는 점등을 앞세워 초반 이미지 부각에 일단 성공했다는 중평이다. 경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지난달 중순부터 도내 기초자치단체장 추천대회등 공개석상에 빠짐없이 참석,분위기를 이끌고 있다.개혁성향의 참신함,도덕적 이미지와 젊음,그리고 민주계 핵심그룹에 속한다는 점을 내세워 여권의 전통지지기반인 농촌은 물론 여론전파력이 큰 신도시 중산층에 집중적으로 파고든다는 전략이다. 충남 논산출신이라는 핸디캡은 외지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 특성으로 이미 극복했다는 설명이다.여기에다 「지역맹주」인 이한동 국회부의장이 선거대책위원장으로 경선후유증을 앓고 있는 민정계조직을 추스려주고 있어 이 후보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또 도내 31개 지구당위원장이 선거대책위 운영위원장으로 지역을 훑는데다 50명으로 구성된 직능대표단,도내 원로 20여명으로 구성된 고문단,2백50여명의 자문위원단 등 조직력도 이 후보측이 믿고 있는 강력한 무기다. 이 후보측은 『그동안 상대후보가 나타나지 않아 비교우위를 통해 대중 앞에 부각될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서 『정치권 전반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능력과 인물면의 차별화로 당당하게 승리하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민주당의 장경우 후보는 경선과정의 돈봉투시비와 폭력사태등으로 만신창이가 된채 가장 늦게 시동을 걸었다. 장 후보는 후발주자로서의 어려움을 만회하기 위해 7일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는 등 범계파적 지원체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경선파문에 따른 감표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선거전을 본격화하면서 야권 고정표와 「반민자」 구여권표를 흡수해 나가면 반전이 가능하다는 게 장 후보측의 판단이다. 이를 위해 조세형 부총재가 경기 북부,이종찬 고문이 남부지역의 유세지원을 맡아주는 것 말고도 이기택 총재가 상주하다시피 하며 조직을 총동원하기로 했다는 설명이다.특히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도 7일 부천강연을 비롯,수도권 거점도시를 돌며 서울 경기 인천을 묶는 수도권에 「민주당 바람」을 일으켜 주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증권사장등을 지낸 전문경영인 출신 3선의원임을 내세워 독자적인 경기발전 모델을 제시한다는 복안도 마련해 둔 상태다. 한강 이북(의정부)을 기반으로 출마한 자민련의 김문원 후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부지역 공략을 위해 이병희 부총재의 사무실이 있는 수원의 도지부에 선거대책본부를 마련,표밭을 갈고 있다. 도내 자민련 지구당이 8개에 불과한 조직상의 열세는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반민자·비민주」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것으로 극복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경기북도 신설 추진위원장」으로 경기도 분할을 주장해 온 김 후보는 이인제(안양)·장경우(안산) 후보가 남부지역 표를 나눠갖다보면 적잖은 반사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교육개혁 발자취/50년새 6차례… 「입시」만 11회 “손질”

    ◎정권 바뀔때마다 손대 수험생들 혼란 초래/「새안」 여론수렴 1백여회… 15개월만에 “햇빚” ▲세계 최고의 입시지옥 ▲한해 사교육비 17조원 ▲토플점수 세계 25위 ▲고교학력 세계 최하위 ▲공교육비 선진국의 3분의 1 ▲대학교수 한 사람앞 대학생수 일본의 3.5배­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다. 이 지표에서 보듯 우리교육의 세계 석차는 「꼴찌」에 가깝다. 정부의 교육개혁은 이같은 우리교육의 낙후성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출발했다. 교실에서 분필로 가르치는 암기식 교육으로는 미래의 첨단 정보사회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판단 또한 교육개혁의 절실함을 더해 주었다. ○…교육개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를 중심으로 개혁안을 만들었다.그러나 추진력의 부족과 이해집단의 반발,국민의 인식부족으로 언제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오히려 혼란만 초래했을 뿐이다.시행착오를 거듭하며 11차례나 바뀐 입시제도는 수험생을 혼란스럽게 한 교육행정의 대표적인 잘못된 사례였다. ○…해방 이후 굵직굵직한 교육개혁 조치만 6차례가 단행됐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개혁조치는 6­3­3­4제의 단선형 학제 채택과 의무교육 실시가 핵심이었다.한자와 왜색문화 일소를 기치로 내걸었던 당시의 개혁은 미국식 교육의 도입과 교육재건이라는 특징을 지녔었다. 60년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이 학원혼란 수습이란 차원에서 단행한 개혁은 교육행정의 분권화를 내세웠지만 61년 5·16군사혁명후 혁명정부의 개혁안에 밀려 흐지부지됐고 혁명정부는 반공과 국방교육의 강화,정신혁명을 근간으로 하는 인간개조,생산과 기술교육의 진작 등을 내걸어 군·학 연계에 의한 개혁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제3공화국에서 유신정권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경제발전에 따른 인력양성과 학생운동의 통제수단으로 개혁이 필요했다.중학교 무시험제 도입,고교평준화제 실시,교수 재임용제·학도호국단 창설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제5공화국도 집권 초기인 80년7월30일 대학본고사 폐지를 주내용으로 하는 대학입시 개혁안을 발표했다.졸업정원제실시,대학입학인원 확대,과외금지 등을 주내용으로 한 당시의 개혁은 국민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88년 제6공화국은 독학사제도 도입과 함께 대학입시제도를 수능·내신·본고사로 치르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김영삼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93년8월10일 교육개혁위원회 규정이 대통령령으로 공포되고 대통령의 직속 자문기구로 교육개혁위원회가 발족됐다. 이 규정에 따라 교육개혁위는 지난해 2월 위원장에 대우재단 이석희 이사장,부위원장에 서강대 김윤태 교수를 선임하고 위원 23명도 위촉,교육개혁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어 3월에는 전문위원 10명을 위촉했고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실무협력위원회가 구성됐다. 교육개혁위는 위원회의 구성을 마친 뒤 곧바로 국민여론 수렴 작업에 들어가 그동안 공청회 3회,정책협의 29회,교육현장 방문 80여회,국민제안 접수 4백40여건등 활동을 벌였으며 외국실태도 3차례나 조사했다.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개위는 2백여차례의 소위원회,14번의전체회의를 통해 교육개혁안을 논의했다.교개위는 그러나 지난해 6월 대학입시 본고사를 95년부터 폐지하자는 건의안을 냈다가 하루만에 철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 뒤 지난해 9월 ▲교육재정 확충 ▲대학교육 개혁 ▲사학의 자율과 책임 제고를 우선 추진 3대 과제로 삼고 교육개혁 11대 과제를 마련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교개위는 이 방안을 토대로 최종 개혁안의 입안에 나서 9대 과제를 교육개혁안으로 확정,발표하게 된 것이다. ○…교육개혁안을 마련하는데 핵심역할을 한 사람은 이명현 상임위원(53)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위원은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위원과 함께 새 입시제도를 마련하는데 중심적인 활동을 한 곽병선 전문위원(54)은 미국 마켓대 철학박사 출신으로 한국교육개발원 교육공학연구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경남/“적수 없다” 민자후보 사실상 독주(6·27 표밭 기류:6)

    ◎“지지율 50%”… 특표율에 더 관심 높아­민자 김혁규/「토종 경남인」 내세워 힘겨운 추격전/자민련 김용균/민주선 “승산없는 게임”… 아직 후보조차 못내 경남에서는 민자당의 압도 분위기를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민자당의 김혁규후보가 김영삼 대통령의 텃밭에서 일찌감치 표밭을 다져온 데 반해 야권 후보들의 발걸음은 더디다.민주당은 아직 후보를 내지도 못하고 있고,자민련은 지난 29일에야 김용균후보를 내정했다. 이곳의 최대 변수는 한때 무소속 출마 가능성이 점쳐지던 몇몇 인사들이었으나 모두가 출마를 포기했다. ○일찍이 표밭 다져 김혁규후보와 민자당 공천에서 경합하던 최일홍 전지사는 우여곡절 끝에 김후보 진영의 고문이 됐다.울산출신의 박진구 전의원도 출마 포기 의사를 밝혔다. 민주당은 강갑중 진주지구당위원장이 공천 신청을 내놓고 있지만 중앙당은 「승산 없는 게임」이라는 듯 애정을 보이지 않고 있다.게다가 최근에는 내분까지 겹쳐 공천작업은 소걸음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민자당의 김후보와 자민련 김후보의맞대결로 압축되고 있다.그러나 실상은 김혁규후보의 독주 양상이다.김용균후보도 열세를 인정한다. 이 때문에 각 여론조사 기관들도 이곳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김혁규후보와 대비시킬 후보가 부각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론조사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반응이다.김후보측은 개인에 대한 지지도는 50%,민자당에 대한 지지도는 45%로 조사됐다고 주장한다.부동층이 30% 가량이므로 역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장담하고 있다. 김후보측이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대목은 득표율을 얼마나 높이느냐 하는 문제다.스스로는 『내부와의 고독한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자민련,열세 인정 그러나 도지사 선거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는 냉랭하다.유권자들의 관심도는 시장·군수>기초의원>도지사>광역의원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특히 전체 도민의 30%를 점하고 있는 울산은 지난해 광역시 승격이 불발로 그친데다 현대자동차 파업사태까지 겹쳐 김후보는 두터운 반발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 김후보는 기업인 출신답게 지사시절 도가 주주인 경남기업을 설립하는등행정에 경영기법을 도입,관료조직에 새 바람을 불어 일으킨 점이 강점이다.정책도 『경영마인드에 바탕을 두고 경쟁력 있는 행정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사조직도움 기대 창원의 선거사무실 전화번호가 82­0303(영삼영삼)인 것은 김 대통령과의 영향력을 최대한 표로 연결시키려는 뜻에서다. 김 후보측은 전문직 화이트칼라 계층을 제외한 나머지 유권자들에게 인지도가 높지 못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인물알리기」에 주력하고 있다. 자민련의 김용균후보는 인지도,조직,정책개발 등 모든 면에서 처져 있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그래서 추천대회도 갖지 않고 바로 득표전에 뛰어들 생각이다. 그의 강점으로는 입법·행정·사법 3부를 두루 거친 경력을 들 수 있다.국회 행정차장,체육청소년부차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및 변호사 등 경력이 다양하다.자민련이 약세인 이곳에서 정당차원이 아니라 인물로 싸워 보겠다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김용균 후보는 민자당이 일방통행식으로 김혁규 후보를 내세운 것을 『선택된 강요』라고 꼬집으며 경남도민들이 반발 심리를 부추기고 있다.캐치프레이즈가 『경남의 자존심을 찾자』인 것은 이 때문이다.특히 『정치경남이 아닌 자치경남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그의 주장이 얼마나 먹혀들 지는 미지수다. ○「월계수」 경력 약점 김 후보는 「토종경남인」임을 적극 내세움으로써 김혁규 후보와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승부를 걸 계획이다.김혁규 후보와 같은 합천 출신이지만 5백년 가량 이어져 내려온 집안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여기에다 함안 의령등 서부 경남을 홈그라운드로 활용,동부 및 중부경남에 비해 낙후된 이곳 주민들의 표를 적극 공략한다는 전략이다.외가가 있는 진주,처가가 있는 울산 지역의 지지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육군 법무관(예비역 중령)출신으로 재향군인회와 변호사회,교육계,체육계 등 다양한 지원계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각 지역별로 5백∼6백명씩 관리해 온 사조직도 힘을 보태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박철언 전의원의 「월계수」 회원 경력이 약점으로지적되고 있다.민자당에 대한 절대적 지지 분위기 속에 김혁규 후보를 따라 잡기에는 힘이 달리는 듯한 인상이다.
  • 모­김 북경 비밀회담(모스크바 새 증언:7)

    ◎모택동,김일성에 남침 세부작전 일일이 지도/모택동/“평화통일 불가능… 무력침공 밖에 없다”/미 개입땐 중국 지원병력 파병 재확인 □모 충고사항 장병에 구체적 임무 부여 모든 작전 신속하게 전개 대도시는 우회공격 할 것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 스탈린이 모택동앞으로 보낸 전문은 스탈린·김일성 두사람이 무력남침을 결행키로 합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전문번호N8600·1950년 5월14일). 『모택동 동지앞.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국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조선인들의 통일제의에 동의했음.이와 함께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는 데도 합의했음.중국동지들이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종결정은 새로운 논의가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 함.조선동지들이 이번 회담의 상세한 내용을 귀하에게 통보할 것임.­필리포프』 ○스팔린 가명 사용 스탈린은 김일성과 남침계획을 확정지은 뒤 이같이 모택동에게 뒤늦게 통보,그의 체면을 살려 주는 체하면서 개전의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다.재미있는 것은 남침결정 사실을 문서화한 이 전문에서부터 스탈린은 「필리포프」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후 그는 필리포프외에 「환시」라는 가명도 사용했다. 이보다 이틀전인 5월12일 평양의 슈티코프대사는 본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띄웠다.『5월12일 김일성의 요청으로 그와 박헌영을 면담.김일성은 북경주재 대사 이주연이 김일성의 중국방문을 주재로 모택동·주은래를 만났다고 했음.주은래는 이 방문을 공식방문으로 하자고 주장.반면 모택동은 언제 북조선이 통일작전을 개시할 계획이냐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군사작전을 곧바로 시작할 계획이라면 비공식 방문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함. 모택동은 또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며 무력에 의한 통일밖에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함.미국의 개입가능성에 대해서도 모택동은 미국이 그런 작은 나라에서 3차세계대전을 시작할 리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함.김일성은 이에 덧붙여 이주연대사는 자기와 모택동간의 회담을 논의할 권한이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그래서 그를 소환해 견책한 뒤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음.5월10일 이주연대사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모택동을 만나 정식으로 김일성의 접견승인을 받았다고 함.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5월13일 아침 출발예정임.김일성은 그때까지 자신이 타고 갈 비행기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음.이에 대해 본인은 비행기는 이미 준비돼 있다고 답했음.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문제를 당중앙위에서 토의하지 않고 김책(정치국원)과만 의논했다고 함』 여기서 엿볼 수 있듯이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추진하면서 스탈린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크게 신경을 썼다.이주연 대사를 소환해 견책한 것도 스탈린을 의식한 쇼였다.모택동과의 회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다룰 의제를 다음과 같이 슈티코프 대사에게 통보했다.다음은 슈티코프가 보낸 보고전문의 계속.『김일성은 모택동과 다음의 문제들을 토의할 계획이라고 함. 1,무력통일 의향을 알리고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통보. 2,조만간 북조선과 중국간 무역협정체결과 통일 후 양국간 우호조약체결을 희망.3,중국공산당과 북조선노동당 중앙위간 교류문제.4,북조선 수력발전소 건설,중국거주 조선인문제등 상호관심사 논의』 이와 함께 김일성은 중국거주 조선인군 부대가 갖고 있는 일본제 및 미제 무기에 쓸 탄약공급을 중국측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총참모장과 이야기를 나눈 뒤 김일성은 이 물건들은 요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군이 사용할 3벌 분량의 탄약이 이미 비축돼 있다는 것이었다.김일성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이미 필요한 원조는 다 받기로 합의됐기 대문에 실제로 모택동으로부터 원조받을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예정대로 북경으로 날아갔다.도착 당일 저녁늦게 모택동과의 1차회담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주은래는 로신 북경주재 소련대사를 불러 회담결과를 설명했고 로신대사는 이를 곧바로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다음은 로신대사가 보낸 5월13일자 전문. 『1,김일성과 박헌영이 중국에 도착했음.2,조선지도자들은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상황이 바뀌어 북조선이 작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사항을 설명했음.이 문제는 조선지도자들과 중국,특히 모택동과 의논해야 된다는 필리포프 동지의 지시도 전달됐음.3,조선지도자들은 이틀간 북경체류예정임.…중략…모택동 동지는 이 문제에 관해 필리포프 동지가 직접 설명해주기를 원함.중국동지들은 신속한 답을 원함』 ○개전땐 승리 보장 이튿날인 5월 14일 로신대사는 스탈린·김일성의 모스크바 회담결과에 대해 본국에서 보낸 전문을 받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그리고 로신 대사는 같은 날 모택동의 반응을 본국으로 타전했다.이 전문내용에 의하면 모택동은 신속한 군사적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하며 승리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북한지도부가 내린 현 남북한 정세와 남북한 군사력 균형에 대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모는 또한 통일 뒤 중소조약과 유사한 우호동맹조약 및 상호원조조약을 북조선과 체결할 것을 북조선지도자들에게 제의했다고 밝혔다.물론 이같은 조약체결은 스탈린동지의 의견을 들은 뒤에 추진할 것임도 덧붙였다. 5월15일 2차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박헌영과 무력남침에 대해 상세한 입장교환을 했다.회담 뒤 로신대사는 양측(주은래·박헌영)으로부터 별도 브리핑을 통해 회담결과를 전해 들었다.회담결과의 대한 양측의 설명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다음 사항은 양측 브리핑내용이 일치한다.김일성이 먼저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합의한 남조선 침공계획을 모에게 설명했다.즉 1단계 준비 및 병력집중배치.2단계 북조선이 수차례 평화통일 공세를 펼칠 것.3단계 남측이 이 평화통일제의를 거부하는 즉시 군사작전 개시.모택동은 이 3단계 작전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택동은 작전과 관련,몇가지 중요한 충고를 덧붙였다.우선 모든 병사와 지휘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할 것.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대도시는 우회할 것.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됨.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두어야 함.이미 알려진 대로 후일 김일성은 모택동의 이 「귀중한」 충고를 제대로따르지 않아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3단계 계획」 동의 그 다음 모택동은 일본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물었고 김일성은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답했다.다만 미국이 2만∼3만의 일본군을 파병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는다고 김일성은 말했다.하지만 그 경우 북조선군은 더욱 열심히 싸울 것이기 때문에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은 자신했다. 주은래가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이 말을 듣고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개입은 전쟁을 장기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진짜 개입위험이 큰 쪽은 일본보다 미국이라고 모택동은 말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같은 지적에 대해 『미국은 극동에 군사적 개입의사가 없다』고 미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미국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 났으며 한국에서도 이같이 신중한 입장을 지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후일 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2일에도 주은래는 로신 대사에게 미군의 개입가능성에 대해 같은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반면 김일성은 끝내 미국의개입가능성을 과소 평가했다. 박헌영이 로신 대사에게 브리핑한 내용은 주은래의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다음은 로신이 본부에 보고한 박헌영의 브리핑부분.『50년 5월16일.박헌영의 발언.모택동은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음.미군개입시 중국이 병력을 보내 북조선을 지원하겠음.모택동은 또 소련은 미국과 38도선 분할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했음.반면 중국은 그같은 의무규정에 얽매이지 않아 북조선에 대한 지원을 쉽게 확대할수 있음』 5월15일 저녁 공식일정을 끝낸 김일성 일행을 위해 모택동은 만찬을 베풀었다.만찬시작 전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이렇게 말했다.『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은 매우 순조로웠다.모동지는 해방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했다.모동지는 모스크바에서 있은 스탈린동지와 본인사이의 합의사항을 모두 지지했다』 이튿날 5월16일 스탈린은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통일 뒤 중국·북한간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 체결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우여곡절끝에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간 무력남침에 대한 합의는 이렇게 마무리됐다.이제 남은 것은 공격개시의 택일뿐이었다.
  • 민주/경기경선난장판/안동선씨/“장경우씨 돈봉투적발”…주먹·욕설난무

    ◎한밤까지 개표 못하고 산회… 무산 가능성 【안양=한종태 기자】 민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대회가 불법선거운동 시비로 후보지지자들 사이에 욕설과 주먹다짐이 오간데 이어 돈봉투까지 발견돼 경선무효 시비로까지 확산되면서 결국 개표마저 하지 못하는 사태를 빚었다. 민주당은 13일 안양 문예회관에서 경기지사 후보선출을 위한 대의원대회를 열어 우여곡절을 겪으며 1차 투표에 이어 이기택 총재가 지원하는 장경우 후보와 동교동계인 안동선 후보를 놓고 결선투표에 들어갔으나 장 후보측이 대회장에서 대의원들에게 돈봉투를 돌렸다고 안 후보측이 주장하며 무효를 요구,두 후보측의 대립이 계속되면서 자정이 넘도록 투표함을 열지 못했다. 이날 1차투표에서는 대의원 4백59명이 투표에 참가,이기택총재의 지원을 받는 장후보가 과반수에 2표 모자라는 2백28표,동교동계인 안후보는 2백22표,정관희후보는 7표를 얻었다.무효는 2표였다. 양측간의 대립이 계속되자 제정구 대의원대회의장은 14일 0시40분쯤 『선거관리 기능이 마비상태』라며 『의장으로서 투표함을 중앙당에 보관하기로 하고 산회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 투표함이 유효한지에 대한 결정은 총재단회의와 도지부의 합의결정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안 후보와 동교동계의 선거무효 주장이 워낙 강해 이날 경선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안 후보측은 이날 결선투표가 진행되는 도중 장 후보측 대의원인 최모씨가 성남수정구 및 중원·분당구 대의원명단과 10만원씩이 들어있는 봉투 3개를 갖고 있는 것을 적발,장 후보의 사퇴를 주장했다. 양측간의 대립이 계속되자 주최측은 이규택 도지부장과 장·안 후보의 3자회담을 열었으나 안 후보는 이 문제를 총재단회의에 넘기자고 주장한 반면 장 후보는 개표부터 한 뒤 진상을 규명하자고 맞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깨끗한 승복의 멋진 경선을(사설)

    집권 민자당과 제1야당인 민주당이 「경선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정치권의 혼미에 짜증스러워 하던 국민들에게 모처럼 신선감을 주는 바람직한 현상이다.민자당의 경기도지사경선과 민주당전남도지사경선이 국민적 관심을 모은데 이어 민자당의 서울시장후보도 자유경선으로 선출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민주정치를 운영하는 정당이 민주적 절차를 실천하는 것은 첫번째 당위다.정당의 공직후보경선은 그 구체적인 실천이다.본격적인 지방자치선거 실시를 앞둔 정치권의 활발한 후보경선은 열린 정치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발전적인 청신호로 받아들여진다.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경선은 민주정치를 하는 맛과 멋을 주고 정당의 통합과 후보의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도 크다.그러나 지금까지 주로 야당의 경험에서 보듯이 당원다운 당원조차 확보되지 않은 취약한 정당구조와 무분별한 계보정치 및 인신공격의 풍토에서 그것은 당을 분열시키는 후유증과 폐해마저 가져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특히 과거 집권당은 권위주의적 체질 때문에 경선은 권력자에 대한 도전으로서 금기시되어 왔다.그런 점에서 세계화개혁을 표방한 민자당이 그동안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후보의 자유경선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경기도지사경선의 성공과 함께 민주적 국민정당의 발전을 가져올 당내민주화의 진일보로 평가된다. 물론 보수정당의 체질상 원로에 대한 예우차원의 추대방식도 이해될 수 있지만 정원식 전국무총리가 당원의사에 따르겠다는 경선선언을 한 것은 돋보이는 결단이다.진정한 경선은 어디까지나 페어플레이정신의 실천에 있다.공정한 관리도 필요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을 깨고 훌륭한 인물을 선택하는 대의원의 양식은 더 중요하다. 그보다도 후보자들이 결과에 진심으로 승복하는 자세야말로 경선의 성패를 가름한다.안되면 탈당하는 후보는 정치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남은 주요경선에서 여야가 민주주의의 시대정신을 실천하여 정치불신을 희망의 정치로 바꾸어주기 바란다.
  • 3만 관중 「사랑가」 맞춰 어깨춤/본사주최 「성춘향」 공연현장

    ◎“어사 출두야” 함성속 분위기 절정 서울신문·스포츠서울과 LG전자가 향토문화발전을 위해 공동 주최한 「뮤지컬 성춘향」공연이 7일 하오 8시 제65회 춘향제가 열리고 있는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특설무대에서 1시간30분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향토축제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세계화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공연에는 조남조 전북도지사,양창식(민자)의원,허규 축제문화진흥회장,김완주 남원시장 등 문화예술 관계자와 주민,관광객 등 3만여명이 참석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공연은 경쾌한 오케스트라 서곡에 맞춰 30여명의 출연진들이 봄,여름,가을,겨울 사계를 나타내는 고전무용을 선보이며 막이 올랐다.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단오날 광한루에 올라 그네 뛰는 춘향을 한번 보고 연정을 느끼게 되는 대목인 「연분만 맺어주면」 「낙양성에 꽃이 피네」 등을 부르자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열기에 휩싸였다. 이어 이도령이 저녁에 방자를 앞세우고 춘향집에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백년가약을 맺는 장면에서 춘향의 「내마음 나도 몰라」,월매의 「내딸 춘향이」,춘향과 이도령이 황홀하고 질탕한 「사랑가」를 함께 부르며 춤을 추자 관중들도 덩실덩실 어깨춤을 따라 추며 극중에 몰입했다. 공연의 클라이맥스인 어사출두 대목에서는 청중들이 연기자들과 함께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쳐대며 관객과 무대가 혼연일체가 됐다. 윤기호 춘향제전위원장은 『서울신문사가 지난 90년 변사또 행렬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6차례나 춘향전의 문화적 가치를 드높이는 각종 행사를 주최해 춘향제가 세계 속의 축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한­베트남/김 대통령­도 무오이 회담 의미

    ◎경협바탕 정치적 협력관계 구축/기술­풍부한 자원 교류… 개발경험 진수/안보리 진출·북개방 협력 약속 큰 성과 김영삼 대통령과 도 무오이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12일 정상회담은 한­베트남 관계가 과거의 적대관계를 완전히 청산,새로운 협력관계로 돌입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월남전이라는 냉전 시대의 구원을 간직하기 보다는 경제 발전을 위해 두나라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은 양국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에 따라 이날 열린 단독 및 확대정상회담을 통해 집중적으로 논의된 사안도 역시 경제협력 분야였다.한­베트남 양국은 지난 92년 수교이래 무역규모가 엄청나게 증가했고,우리측의 투자도 계속 늘고 있다.지난해말을 기준으로 우리는 베트남에 1백건에 8억8천만달러를 투자,제4의 투자국이 됐다.또 지난해 수출 10억2천7백만 달러,수입 1억1천4백만 달러로 베트남의 세번째 교역상대국이 되었다. 이날 회담에서 김대통령은 베트남의 사회간접자본 확충사업에 한국기업들이 참여하기를 희망했고,도 무오이 서기장은 베트남의 경제개발에 한국이적극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트남은 우리를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고,우리나라도 오는 7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가입하는 베트남의 지리적 요건과 풍부한 자원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물론 양국의 관계발전이 경제분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도 무오이 서기장의 방한과 양국 정상회담은 정치,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두 나라가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당국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이날 회담에서 양국정상은 폐쇄적이고,동아시아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상호협력하기로 했다. 또 김대통령은 우리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으며,우리나라도 베트남이 각종 국제기구등의 진출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함께 이날 정상회담은 개혁을 지향하는 양국 정상간의 우정을 다지는 자리도 됐다.김대통령은 또 베트남의 「도이 모이(쇄신)」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높이 평가했으며,도 무오이서기장은 한국 문민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개혁정책의 성공을 기원했다. 수교이후 한­베트남 관계가 급속하게 진전된데는 베트남의 실권자인 도 무오이 서기장의 우리나라에 대한 개인적 관심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우리측도 그런 점을 감안,도 무오이 서기장이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아닌데도 이에 상응하는 의전적 예우를 했다.도 무오이 서기장은 우리가 월남전에 참가한 64년부터 73년까지 상무부 장관,건설부 장관,부수상등을 역임,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그 점도 우리나라와의 관계개선에 순작용을 했다고 한 당국자는 말했다. ◎노혁명자의 간곡한 투자 요청/도 무오이 서기장 서울 행보/“전쟁만 했지 국가메커니즘 못갖춰”/“기댈곳 한국뿐” 채산보장을 약속 12일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도 무오이 베트남공산당서기장은 올해 78세다.19살에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그의 이름 도 무오이(10차례의 탈출)가 말해주듯 「조국해방전선」에서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이 노혁명가가 청와대 회담에서 「평화시대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이야기하며 간곡한 세일즈 활동을 펴 우리측 관계자들을 감동시켰다.그는 베트남이 중국과 1천년,프랑스와 1백년에 걸쳐 독립을 위한 전쟁을 치렀다는데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그가 이러한 독립투쟁을 이야기한 것은 한국과의 역사적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우리는 여러가지면에서 비슷하다』 고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혁명가.그의 입에서 감동적인 연설이 나왔다.『우리는 통일을 이뤘다.그러나 우리는 전쟁만 했고 평화시대에 필요한 국가 메커니즘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평화시대에는 주변국과 새로운 관계,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그는 이어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을 들어 『한국과 베트남간에 최근세에 들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쟁의 메커니즘이었다』고 말하고 『두 나라가 이제는 평화시대의 새로운 체제아래서 과거를 덮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열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이 필요하다고 매달리다시피 했다. 『한국이 아세안과 갖고 있는 관계처럼 우리와도 그렇게 지내자』면서 『우리의 국제화,경제개발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그는 특히 『우리에게는 전략적으로 제철·조선분야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한국기업이 이분야를 도와줄 수 있는 최적격』이라고 강조했다.그는 중국남부·캄보디아까지를 포함하면 베트남에의 투자는 결국 3억인구의 거대시장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고 베트남에의 인식전환을 요청하기도 했다.한국기업이 투자하면 채산을 맞출 수 있도록 국가차원의 지원을 하겠다고도 덧붙였다. 한국은 베트남에 네번째로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나라.그러나 앞의 세나라는 대만·싱가포르·홍콩등 모두 중국계이고 투자도 서비스업에 치우쳐 있다.도 무오이서기장은 『한국만이 베트남의 제조업에 투자하고 있다』고 감사해했다.그는 도로·통신분야에 장기저리 차관을 주고,민간공동위를 구성해 인적접촉을 강화하며 베트남의 풍부한 인력을 산업연수생으로 많이 받아달라고 열거하기도 했다. 노혁명가의 간곡하고 진지한 세일즈에 김대통령은 『베트남의 경제개발에 지속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도 무오이서기장의 발언요지는 「악연도 인연」이니 한국이 베트남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 추상화가 유영국(이세기의 인물탐구:72)

    ◎간결한 선­강렬한 색채 “산의 화가”/데생을 하지않은 성품… 비례로 화면 골격잡아/자신의 그림 천여점 보좌,12일부터 공개 전시/고교2년때 화가 결심… 도일후 대학3학년때 일 미술전 대상 수상 그의 산은 항상 젊다.거센 불길로 타오르거나 짙푸른 숨결로 우거져 있다.화면 여기저기서 문득문득 솟구치는 빛의 반사는 비바람과 일출,일몰을 함축한다.단순하게 선 하나를 그었을 뿐인데도 원근의 면과 지평선의 무한공간,원과 삼각형이 절묘하게 조화된다.잡다한 수사학을 떨친채 그의 산은 높고 꿋꿋한 기상으로 피안을 우러르고 「강렬하고 명쾌한 색채의 변부」는 급류처럼 화면에 휘몰아친다. 그가 산을 그리게 된 것은 「산이 높아 골이 깊다.(산고곡심)」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친 속에서 산만을 바라보며 성장했다.울진의 중첩된 산들은 습곡단층을 이루면서 항상 무엇으론가 꽉차 있었고 그때부터 산은 무한한 신비감과 감동으로 그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산의 작가」이자 「원색의 연마사」로 대변되는 화가 유영국은 『화가의 눈은 항상 먼곳을 바라볼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먼곳으로 눈을 돌릴때 산과 바다와 자신의 세계가 도저(도저)하게 펼쳐진다.일부러 산을 그리지 않아도 자연에 눈을 돌리고 있으며 그곳에서 절로 『산과 바다가 대어나온다』고 도했다. ○“항상 먼곳을 보라” 강조 「근대한국미술논총」을 보면 평론가 김영나는 「1930년대 동경 유학생들」이란 글에서 『유영국의 경우 19 48년부터 계속 산을 주제로한 그림을 그려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제국미술학교출신이며 판화가인 정규는 『1930년대 자유전을 대표한 추상주의 화가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지만 그중에서도 철저한 우리나라의 추상주의 화가는 유영국』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그만큼 보이지 않는 변화속에서 산에 대한 그의 사고와 사상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틀속 갇혀 안주하는 형은 아니다.구성과 묘사가 완성되는 타블로와는 달리 초기엔 크고 작은 나무판을 콜라주한 릴리프(부조)적인 방법으로 앵포르멜 경향을보이고 있다가 차츰 기하학적 구성에서 벗어나 넓은 면과 밝은 색채,직선을 선회한 곡선의 이미지로 장식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색채 감정에 대해 『매우 투명한 원색이 주류를 이루면서 화사한 색채의 구성은 경쾌한 사유를 동반한다』고 말한다.모든 것을 극도로 걸러낸 생략과 절제는 이미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극치로서 색채언어를 완결했다는 의미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서울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졸업반때 부터다.일본 유학 안내팸플릴을 보고나서 화가가 될것을 결심했으나 그는 도무지 데생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망설이던 끝에 데생시험이 까다로운 동경(동경)제국미술학교 대신 데생시험이 없는 동경(동경)문화학원을 지망하게 되었고 혼자서 데생을 공부하는 모색과 탐구의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지금도 그는 그림을 그릴때 데생을 하지 않는다.화면에 자리와 크기만 정하고 공간관계 비례관계로 골격을 잡아 나간다.야외에서 스케치를 하는 일도 없고 미대 시절외엔 대상을 놓고 그림을 그린 적도 없다. 당시동경(동경)분위기는 일본 문부성이 주도하는 문전(문전)과 이과전(이과전)이 대립되어 일년 내내 전시회가 열릴 만큼 회화운동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그는 대학 3학년때인 38년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에서 영예의 최고상을 차지 했다. ○한때는 고기잡이 생활 그러나 전쟁말기의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선 면 색」의 삼요소로 형태의 절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설화성과 감정이 배제된 단순한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의 작가 몬드리안을 좋아하는 이유는 「몬드리안의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말하는 회화」이기 때문이며 그림은 그래야 된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활동에 제동이 걸리자 그는 43년에 귀국하여 일단 고향에 잠적했다.한동안 고기잡이 배를 타는 엉뚱한 생활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김환기 장욱진 이규상과 신사실파전을 창립,「절제된 율동미로 신비스런 평면세계를 전개」하기도 했으나 또다시 6·25가 터져 귀향,이번엔 죽변에 정착하여 그림을 멈추고 부인 김기순여사와 함께 양조장 경영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새벽부터 밤늦도록 술을 거르기도 하고 마차로 손수 술배달에 나서기도 했다.그러다가 『이만하면 생계에 급급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수 있다』고 생각되자 다시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고향에 두고온 양조장은 그가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될만큼 얼마동안은 생활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처음엔 난로를 피워도 손이 시려운 약수동의 적산가옥에서 몇시간씩 선채로 그림을 그린 것이 화근이 되어 뒷날 골절을 앓게 되었고 79년부터는 화곡동에 거주 7년전부터 건축가인 차남(건)이 지어준 지금의 신방배동으로 이사해 왔다.자녀는 2남2녀.다리가 불편 해서 주로 휠체어를 타고 그림을 그린다. 최근의 그는 산의 형상성을 존중하여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또다른 변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동양적인 또는 한국적인 자연관을 지닌 때문」이며 근작들에 이르러「더욱 불타는 색채의 대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산은 모든 자연풍경의 시초이자 종말」이라는 러스킨의 말을 절감시킨다.처음은 즐겁고 다음은 깊은 사색을 던지며 상서로운 관유(관유)와 유열의 진동이 화면전체에 창만해 있다. ○휘체어 타고 그림 그려 언제나 시대의 첨단에 서서 선도적 구실을 했다는 자부심을 감추고 갈채를 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까.그는 최초의 추상작가니 선구자니 하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자신이 좋아서 했을뿐」선구자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다.회화의 개화를 주도한 이후 혼란과 무분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언제나 의연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왔고 현재도 그는 시대적인 경향으로 자신만의 회화간을 고수하는 자세다. 큰 키에 희끗한 머리.은근하게 멋이 풍기는 옷차림에 꾸밈없는 경상도 억양이 그럴수 없이 정답다.직업화가로서 고집스럽게 평생을 버텨온 그로서는 실은 커다란 우여곡절을 겪었다곤 할수 없다.그의 절친했던 화우인 장욱진같은 기인기질도 천재적 광기도 신화도 없어 보인다.다만 싫은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모슴을 쉽사리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자 한다.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하고 한달에 한번 예술원 회의,병째 마시던 폭주습관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그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은 천여점,드물게 거의가 보관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은 한 화가의 위대한 투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직장에 나가듯 하루 8시간의 작업을 지켰으나 요즘은 아침 저녁 한시간씩 그린다. 그의 화실에는 근작 소품들의 손질이 끝나가고 있다.12일부터 갤러리 현대 초대로 실로 10여년만에 60년대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한지리에 펼치기 위해서다. 그의 산하는 여전히 푸르르고 보석더미처럼 번쩍이는 화면은 이제 「차가운 추상」을 지난 중첩되는 산주름이 격정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경이롭다. 만일 현대의 고전이란 말이 가능하다면 형태와 색채에 있어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미술사를 말할때 그를 빼고는 말할수 없다는 차원에서라도 그의 존재는 눈부신 그의 화면만큼이나 「빛나는 고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보 ▲1916년 경북 울진출생 ▲1935년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졸업후 동경문화학원 유화과 진학 ▲1937년 일본 독립미술전 출품,제1회 자유미술전 출품(42년까지),N·B·G(NeoBeaux­ArtsGroup)출품(41년까지) ▲1938년 동경문화학원졸업,제2회 자유미술전 회고상 수상 ▲1947년 신사실파 창립회원(유영국 김환기 이규상),서울대 강사 ▲1957년 모던아트 창립전 ▲1958∼61년 현대작가초대전 및 국제자유전 ▲1962년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신상회 창립전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1964년 제1회 개인전(서울신문회관 화랑),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1966년 제2회 개인전(중앙공보관)한국현대회화 10인전 ▲1967년 동경국제 미술전 ▲1969년 제3회 개인전(신세계화랑) ▲1971년 제4회 개인전(신세계화랑),한국회화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제5회 개인전(현대화랑) ▲1976년 제6회 개인전(신세계) ▲1977년 제7회 개인전(진화랑),예술원상 수상 ▲1978년 살롱 드메초대전(파리시립현대 미술관) ▲1979년 국립현대 미술관초대 유영국 회고전(1백20점 전시) ▲1982년 제8회 개인전(현대화랑) ▲1985년 서울미술대전출품 ▲1988년 88올림픽 기념 세계현대미술제출품 ▲1995년 갤러리 현대초대전 「1965∼1990」 예술원회원,화집 「유영국」(79년 국립현대미술관 출간)
  • 「민주 공천장사」 논쟁 재연/탈락5명 금품수수 의혹 수사요구

    ◎“소문이 사실 입증” 민자선 즉각 공세 기초의원 공천을 둘러싼 민주당 영광·함평지구당(위원장 김인곤)의 분란이 「공천장사」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논쟁의 발단은 이렇다.민주당 영광·함평지구당은 지난 15일 기초의원후보공천자를 발표했다.국회의장공관점거와 공권력투입등 우여곡절끝에 기초의원의 공천을 배제하기로 했던 여야의 합의를 정면으로 무시한 행위였다. 불씨는 윤여은 함평군의회의장 등 민주당공천에서 탈락한 현역 기초의원 5명이 다시 살렸다.이들은 27일 『이번 공천은 중앙당과 동교동이 묵인한 가운데 몇몇 반민주인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쇼」』라고 주장하며 『공천과정에서 금품이 수수됐다는 의혹에 대해 사법당국이 즉각 수사에 착수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민자당은 즉각 박범진대변인의 논평을 통해 『이는 소문으로만 나돌던 「공천장사」가 현실임을 밝혀준 사건』이라고 공세를 취했다. 민주당 함평·영광지구당은 『공천은 당헌·당규에 따라 결정된 것으로 금품수수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있다. 민자당은 28일에도 이 문제를 지방자치제선거전에서 무기로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 자료수집에 나섰다.반면 민주당은 불똥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집안단속에 부심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공천탈락의원들의 주장과 민주당쪽 해명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그러나 공천탈락의원들이 27일 발표한 「성명서」와 「김인곤 의원·김대중 이사장·이기택 총재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탄원서」에는 기초의원후보공천권을 쥔 지구당위원장과 후보희망자들사이의 불합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공천탈락자들의 주장은 이렇다.민주당 영광·함평지구당은 지난해 당원들의 모금으로 영광에 당사를 새로 지었다.이때 6억원짜리 부지를 희사한 K씨는 이번에 공천이 됐다.최근에는 함평연락사무소도 넓은 곳으로 옮겼다.두 당사를 위한 모금에는 읍·면책임자를 비롯,지방자치선거에 뜻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기부금을 냈다고 한다.이들은 공천이 걸려 있지 않았으면 누가 2백만∼3백만원씩이나 냈겠느냐고 반문한다.지구당단합대회때도 버스대절비와 밥값·술값을 지구당이 아닌 읍·면책임자가 냈다.게다가 국회의원의 의정보고회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는 하소연이다.이처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은 풀뿌리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제를 근본부터 시들게 만들었다는 것이 공천탈락자들의 뒤늦은 자성이었다.
  • 해방후 식량·농지문제(새로쓰는 한국현대사:11)

    ◎남북 모두 흉년… 귀환동포 늘어 식량난 심각/소,살 북송 않으면 대남 전력중단 위협/미군정 쌀시장 자유화… 가격뛰자 폐지/미,일인소유토지 환수… 소작농 선발나서 인구는 때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다시 말하면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을 의미한다.광복 이듬해 19 46년의 남한인구는 1천9백36만8천2백70명.이는 해방직전에 비해 자그마치 2백80만3천8백53명이 더 늘어난 것이다.북한으로부터 남하한 인구에 일본이나 북지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의 민생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해방원년 19 45년은 그런대로 풍년이 들어 쌀 1천2백83만5천섬을 수확했다.그 다음해인 46년에는 장마가 져서 흉년이 드는 통에 1천2백5만섬을 수확하는 것으로 그쳤다.오늘날 3천4백만섬을 해마다 웃도는 쌀 생산량에 비하면 분명히 격세지감이 있다.농촌의 쌀 과소비 탓도 있었지만 하여튼 해방이후 군정하에서 식량사정은 매우 심각했다.쌀 산지로 유명한 경기도에서도 45년 한해에 15만4천섬이 모자랄 정도였다. ○경기서만 15만섬 부족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쌀은 대단한 존재다.쌀농사 문화권(미작문화권)에서 쌀은 주식이려니와 재화의 척도가 되었다.그럼에도 1945년 미군정은 쌀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군정은 10월11일 쌀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쌀 시장 자유화 시책을 시행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미국적 사고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이 적용되었다.또 일제의 수탈로 위축된 농촌경제에 활로를 열어준다는 의도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쌀 자유시장 시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2주일이 걸렸다.그래서 군정은 한국경제를 위해 언제라도 식량을 통제하겠다고 선포했다.자유시장이 개설되고 나서 쌀 값은 해방전 암시세인 1말 1백50원선을 웃돌았다.도시민들은 자유시장 기능 정지와 배급제 실시를 연일 외쳤다.미군정은 다음해 1946년 2월 자유시장 폐지와 아울러 긴급법령으로 전년도에 생산한 쌀 수집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하지장군의 경제고문 A C 번스는 쌀 자유시장 채택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생각으로는 작년에 도입한 쌀 자유시장을 큰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본다』고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나섰다(서울신문 1946년9월4일자).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수집령을 내린 1946년 2월은 수확기로부터 3∼4개월이 지난 뒤였다.마침 2월2일은 마음놓고 선호할 수 있는 해방후 첫 구정이어서 농촌 쌀 소비량은 절정을 이루었다. 군정이 전국에서 수집한 쌀은 68만3천섬에 불과했다.서울시민 1백20만명에게 하루 1홉꼴씩 일곱달 반을 배급할 양을 겨우 수집한 것이다.이에앞서 1월2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소련은 지체없이 북한에 쌀을 보내지 않으면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왔다.그러나 미국산 잡곡으로 간신히 배급제를 유지하는 남한 실정으로는 어려웠다.북한은 8만㎾가 넘게 송전하던 전력을 4월부터 최하 3만2천㎾로 실제 내려버렸다. 한반도의 민생경제가 몹시 궁핍했다는 사실은 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도 보여주었다.최종 확정한 15개 항목 의제가운데 민생 경제관련 분야가 6개항목을 차지했다.쌀과 전력을 포함한 원자재,연료,화공품 교역과 철도차량 운송문제 등이 그것이다. ○미,쌀 수집령 긴급공포 철도는 북한에 미군보다 먼저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8월27일 자정을 기점으로 이미 끊긴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물자교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남한에서는 농사짓는데 쓸 비료가 당장 필요했다.그러나 비료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당시 북한에 있었다. 1946년 2월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급히 막을 내린 이유의 하나도 쌀이다.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다른 어떤 사안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소련대표 스티코프 대장은 쌀 공급요청을 되풀이하면서 더이상 토론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일방적 폐회 결론을 내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5일).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 노린 소련쪽의 주목적은 쌀이었다.소련은 북한에 쌀만 준다면 남한에서 아주 필요한 전력,석탄,비료를 보내줄 수 있다고 매달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7일).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재산,특히 농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23만1천3백㏊에 달했는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선 법령을 만들어 1945년 9월25일부로 일본인 재산 모두를 확보했다.이어 미군정은 이상한 현상들을 발견한다.그 하나가 해군대위로 전남도 미군정에 참여한 바 있는 E G 미드(전 버지니아대 교수·90년 작고)의 저서 「주한미군정 연구」에 나온다.「내가 전남에 도착했을 때 마침 수확기였는데 아무도 일본인 논의 벼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일본인 소유농지를 법적으로 귀속시킨 미군정은 1945년 11월 신한공사(신한공사·New Koean Co.)를 서둘러 만들었다.과거 일본의 농촌수탈 법인격인 동양척식회사 보유 농지는 물론 다른 개인소유 토지를 인계받은 신한공사는 농사를 지을 소작농을 선발했다.미군정의 농지정책은 소련과 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세력의 비난이 늘상 따라다녔다.왜냐하면 북한은 명목상 임시인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19 46년 초반기에 토지개혁을 끝내고 이를 선전자료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론도 토지개혁 반대 미군정도 토지개혁을 그냥덮어둔 것은 아니다.하지장군은 일본인의 재산,그중에서도 농지처리문제 결정을 워싱턴에 요청했다.국무부는 이를 지지하면서도 정작 행정지침은 내려보내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결국 사문화한 1946년 2월 미군정의 농지령 역시 농지개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15년동안 농지를 점유한 농민에게 자작을 허용하고 대신 일정액의 현물지대를 내는 것을 골자로 한 이 법령은 군정기간 내내 빛을 못보았다. 미국의 입장은 새로 태어날 한국정부에게 농지개혁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실제 군정이 1946년 3∼6월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분의2 이상이 장래의 한국정부가 담당하길 희망했다.이 조사에서 서울에서는 응답자의 89%,농촌에서는 68%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와 비슷한 입법여부를 물어본 결과 서울의 73%,농촌의 56%가 반대했다는 것이다(미외교문서시리즈·1946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소련군 명령에 의해 거의 몰수성격을 띠고 19 46년 1월부터 강력히 진행되었다(별도기사 참조).김일성은 그해 4월10일 「토지사업을 결산하는 보고서」에서 『북조선 경제생활 향상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자찬했다.그러나 북한은 지금 혹독한 식량란을 겪고있다. 역사의 존재가치는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존중되느냐에 있다고 한다.그럼에도 역사를 무시한 북한의 고립주의적 주체철학은 「다 함께 침몰하는 운동」을 가속화시켰는지도 모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미( 〃 〃) ▲김경운(조사부 〃) ◎「꼭두각시」 북정관 연구에 큰가지/서울신문 입수 미 노획문서를 보고/토지·농업 등 정책 배경 드러나/당시 행정 소군 사령부서 명령 서울신문이 입수한 미국의 노획문서는 해방 이후 북한 실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어떤 자료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특히 이 문서와 같이 북한의 각급 행정당국 간에 내부적으로 전달된 문건일 경우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간 혹은 발표한 자료에 포함되지 않는다.그래서 구체적인 정책 입안과정이나 배경등이 파악된다는 점에서 가치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들문서 2건은 1945년 12월과 1946년 1월 초에 생산된 문서로서,모든 농업및 토지 문제에 관련된 자료이다.모두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작성되었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1945년 12월 문서의 경우 『북조선 농림국은 소련군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임시조치 시정요강을 좌와 여히(왼쪽과 같이) 포고함』이라고 명기했다.이로 보아 이 당시 북한의 행정은 명백히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마치 자치정부인양 선전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가 실제로는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하부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6년 1월의 문서는 제목 자체가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이기 때문에 「북조선주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참모부장 벤코프스키」의 이름으로 발령된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1945년 12월의 문서는 「북조선 농림국장 이순근」의 이름으로 포고되었는데 이는 외형적으로 당시 북한의 각종 정책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정부기구에 의해 자율적으로 제정 집행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된다. 농림국 문서 내용 중에 각별히 눈에 띄는 것은 1945년 12월 이전에 이미 전일본인 소유 재산과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위원회 혹은 농민단체에서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이 문서에는 조선인 지주들이 「건국성납」이란 명목으로 토지등을 내놓았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 1945년 12월에 『전도농호등록을 행하고 매년도 말까지 그 이동을 보고』토록 한 뒤 46년 1월부터는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관이 전농호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여기에는 각종 토지사용자들(농민·소작농·지주·사원 소유지 기타)과 일체 국유지,이전 일본인 소유지들이 세밀하게 포함되었다.토지면적조사는 46년 2월15일 이전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어떻든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토지개혁 준비에 필수적인 과정이다.그래서 북한의 토지개혁이 1946년 3월에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료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도 이처럼 1945년 말부터 그 준비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정치신의 뒤집기/이목희 정치1부 기자(오늘의 눈)

    『법을 만든 사람 스스로가 법을 안 지키려 하다니…』 기초자치의회 선거에서 정당공천을 금지한 법규정을 무시하려는 민주당의 노골적 태도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일반 범법자도 법을 어기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법을 어기게 된데는 대체로 구차한 변명이 있을 뿐이다. 16일 민주당 박지원 대변인의 논평은 이런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그는 『아직 통합선거법이 정식 공포되지 않았으므로 기초지방의원 공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이어 『법공포 뒤에도 필요하다면 지구당 위원장의 책임아래 지구당별로 내부 공천의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박대변인의 언급은 원천적으로 두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첫째는 정치적 신의를 뒤집고 있다.여야가 통합선거법을 우여곡절끝에 「합의통과」시킨 때는 15일이다.정부가 법공포 절차를 밟는 동안 「재빠르게」 당리를 챙기겠다는 것은 제1야당의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며칠을 못참고 어길 규정이라면 왜 법개정에 동의했는지 묻고 싶다. 둘째,법이 공포된 뒤에도 되도록 법을 어겨보겠다는 발상은 정말 위험천만이다. 박 대변인의 이날 발언을 좋게 해석하면 「솔직하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하지만 제1야당 대변인의 공식발언으로서는 문제가 있다.술자리에서도 삼가야 할 수준의 논평이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사안이 있다.여야 공히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의 후보자 공천작업이 시작됐다.이미 공천이 발표되거나 내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상당수가 지구당 간부들이다.평소 국회의원을 돕던 지역 유지가 대거 단체장 자리를 노리고 나선 것이다.그들의 면면은 참신성이나 전문성등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인다.그보다는 오히려 고령화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시행착오를 겪었다.지역졸부들이 지방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지방자치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렸는가.단체장의 중요성은 지방의원에 비길 바가 아니다.여야 모두가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 지방자치와 중앙의 정치력/김석준 이대교수·정치행정학(시론)

    지방선거에서의 정당공천문제를 둘러싸고 노출된 정치권의 낮은 정치력을 다시 확인한 국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다.여야 모두 국가의 장래를 멀리 내다보기보다는 당장의 당리당략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지방자치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정치권이 보인 단견과 임기응변은 국민의 질책을 도저히 면할 수 없을 것이다.작년에 보인 시군통합과 광역시문제부터 잘못된 표본이다.근본적인 지방자치제도나 지방행정구조의 개편에 대한 진지한 논의조차 못하게 하고 부분적인 문제에 온 나라를 매몰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이 지역이기주의와 도농갈등을 해소하기는 커녕 도리어 이를 부추기는 듯한 행태를 보였던 점은 두고두고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다. 다음으로 이번 정당공천문제의 경우 여·야당의 경직된 태도는 정치권의 무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다.논의자체를 거부하고 의정사상 처음으로 의장공관과 부의장사저를 강제 점유,농성한 야당의 전략은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여당 또한 대통령의 외국순방기간동안 강제처리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야당을 자극한 일들은 잘한 일이 아니다.늦게나마 여야간에 협상이 추진되어 기초의원의 정당공천배제에는 합의하고 단체장의 경우 어느 수준에서 타결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대립을 보이는 등의 우여곡절을 보였던 점은 정치력의 가능성을 보였던 일이다.정치의 선진화가 대결이나 물리력에 의한 방식이 아닌 타협과 협상에 의한 문제해결임을 확인하면서 우리정치의 선진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은 협상에 의한 정국타개를 기대했던 것이다.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정당공천문제만이 지금 온 정치권이 해결해야 할 유일한 일인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든다.국민들은 정당공천의 장단점을 고려하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지방선거이전에 정비된 상태에서 지방선거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먼저 지방행정 계층구조전면개편이전이라 할지라도 지방자치제도가 성숙한 제도로 정착하기 위한 중앙과 지방의 기능재배분과 행정권한의 과감한 위임이 있어야 한다.그동안도 행정적으로 많은 업무들이 지방에 이관되었다고 발표하고 있지만 과연 지방정부차원에서 필요한 일들이 지방으로 이양되고 있는지 전면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둘째,지방의회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자치입법권과 행정감독권을 대폭 강화하여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가능토록 제도화해야 하겠다.지난 4년간 지방의회들이 운영되면서 보인 좋은 기능들을 더욱 장려하고 아쉬웠던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치들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자치단체장의 실질적인 권한과 기능도 지방자치에 걸맞게 재조정되어야 한다.현 제도하에서는 선거에 의해 단체장이 선출되더라도 자신의 정책공약을 집행하거나 행정업무를 집행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참모들도 공직에 임용할 수 없도록 되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비서외에 부단체장을 공무원 가운데 임명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선거를 통해 뽑힌 단체장이 자신의 공약을 추진할 만한 추진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넷째,지방선거과정에 시민단체의 참여를 보장토록 제도화하여야 한다.지방자치가 풀뿌리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당초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를 제한하고 있는 조치들을 폐지해야 하겠다.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이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국이 정당공천문제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국민들은 안타까울 뿐이다.하루빨리 당리당략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지방자치제도가 정착하여 선진민주주의가 이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여야정당이 앞장 설 수 있기를 촉구한다.「복지부동」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정치권이 정치력을 높여 국민에게 봉사하고 생산적인 정치가 되기를 기대한다.
  • 강대국 무역전쟁 벼랑끝 대타협/미­중 지재권 타결 안팎

    ◎중,보복발동땐 타격우려 미의 요구 수용/지방적 차이 등 변수많아 합의이행 불명 미국과 중국사이의 재적재산권 관련협상이 마감 시간을 넘기는 진통끝에 26일 밤 타결됐다. 이날 회담은 두나라 모두 무역분쟁에서 얻을 것이 없으며 분쟁은 피하는 선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데 이해를 갖이했다.샤를린 바셰프스키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도 이날 합의와 관련,『두나라는 포괄적인 부문 뿐만아니라 구체적인 부문에 있어서도 합의했으며 미국은 매우 만족하고 있다』고 이날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회담에서 중국측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컴팩트디스크등 불법음반및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온 29개 공장등에 대한 단계적인 폐쇄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미국측은 회담초기부터 이들 공장들에 대한 폐쇄를 회담의 핵심요구로 삼아왔다.연간 7천5백만개의 불법 CD및 LD를 생산,이 가운데 7천만개 가량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중국의 불법복제 회사들때문에 미국의 관련회사들이 연간 1억달러이상의 피해를 입어왔다는 것이 미국측의 주장이었다. 이에따라 지금까지중국에서의 지적재산권보호가 소매상위주의 단속에서 제조업에 대한 단속으로 확대할 것을 중국정부가 약속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이미 중국정부는 회담이 진행되는동안 각종 비디오테이프와 음반을 불법복제해온 심천등의 2개 공장을 폐쇄,미국측에 지재권준수의 제스처를 취해왔다. 중국은 불법복제물의 단속과 함께 민사소송등 법적인 사후보장등에서도 미국측의 의견을 반영,점진적인 제도개혁이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했다. 한마디로 이번 회담은 미국측의 요구가 형식상으로 상당히 수용된 것으로 풀이된다.그만큼 이번 회담에서 중국측은 명분상에서나 실제적인 무역관계에서 수세에 몰려왔었다. 막상 10억달러에 달하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미국의 무역보복이 이루어질 경우 중국의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다는 점이 중국측의 강력한 대응호언에도 불구,협상입지를 약화시켜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랫동안 실질적인 행정조치가 따라야 할 문제임을 고려할때 문제의 불씨를 남기고 있으며 하나의 선언적인 합의로 해석할 수 있다.협상의 핵심이 돼 왔던 불법음반물 복제공장의 폐쇄문제만 하더라도 협상결과 여부를 떠나 실효성있는 실행여부도 주목된다. 게다가 지적재산권 분쟁과 관련한 민사소송등 법적인 조치 역시 국내법과의 관계등을 고려할때 마련되는데는 상당한 시간과 우여곡절이 따를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등과 관련,미국측은 상당히 세밀한 부분까지 규정하는등 노력을 보여왔으나 지재권보호를 위한 법률집행이 기술적으로 까다로우며 중국처럼 방대한 국가에서 지방적인 차이등으로 실질적인 약속및 법이행에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미국측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이번 회담은 미국이 중국과의 문제협상에서 원칙을 분명히 재확인하고 앞으로 중국에서의 지재권보호를 위한 유리한 고지와 기틀을 마련한 회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이형구 장관에 듣는 노동정책(국정 어떻게 돼갑니까)

    ◎「임금 과다인상」 장관이 나서서 막겠다/노조전임 너무 많아… 축소조정 유도/노사 해외시찰 2배로 늘릴 계획/「임금 가이드라인」 보완 정착시킬터/외국인연수생 산재·의보·최저임금 적용 □대담:이기백 사회부장 세계화 원년인 올해 노동부에 떨어진 임무는 다른 정부부처보다 크다.우리 경제를 세계화시키는 첫걸음인 경쟁력강화,이를 위한 노사관계안정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형구 노동부장관을 주말 과천 정부제2청사에서 만나 올해 노사정책과 노동행정의 세계화방향,산업재해 감소대책,고용보험 준비상황 등을 들어보았다. ­임금합의를 골자로 하는 경총과의 사회적 합의를 거부한 한국노총의 입장이 철회되지 않은 가운데 3월을 전후한 본격적인 임금교섭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노총을 사회적 합의를 위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방안이 있습니까. ▲노총이 정부에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이 있습니다.솔직히 말해 정부의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지요.정부는 노총이 이같은 불신을 갖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게 중요하다고보고 합의가 재개되기 위해 필요한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노총과 경총의 사회적 합의는 지난 2년간 문민정부에서 어렵게 해온 일입니다.개별기업의 임금교섭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는 사회적 합의가 바람직한 「임금문화」로 정착되었으면 하는게 정부의 입장입니다.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보완시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할 생각입니다. ­「경기회복」「6월선거」「제2노총출범」 등 갖가지 변수와 상황들로 노사관계가 지난 해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입니다.어떻게 대처할 계획인지요. ▲사실 불안요인이 많습니다.정치환경도 그렇고 노동계 내부의 노동단체간 선명성 경쟁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며 호황업종의 경우 임금기대 심리가 높아질 것으로 봅니다.올들어 근로자와 경영자들과의 대화를 10여차례이상 하고 여러 채널을 통해 이해를 넓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이와 함께 노사가 함께 외국의 실정을 직접 보고 느끼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노사해외시찰을 지난 해보다 배로 늘려 4백여명정도 해외로 보내려고 합니다.무엇보다 근로자와 경영자가 다르지 않다는 「노경불이」의 인식이 확산돼야 합니다. ○3천억원 지원 계획 ­노동행정의 세계화는 무엇이며 추진방법은 어떴습니까. ▲인력의 최적배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외국인들의 투자가 2백억달러에 육박하는 대만과 달리 우리의 경우 10억달러에 지나지 않은 것은 결국 우리의 생산조직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경쟁력 있는 인력을 창출하기 위해선 국민교육 체계와 구분되는 종합적인 산업인력 체계를 정립해야 합니다.정부는 기술과 이론을 겸비한 숙련된 다기능기술자의 양성을 확대하기 위해 직업전문학교,기능대학 및 산업기술대학으로 연결되는 직업능력개발체계를 마련중입니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를 줄이기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지난해 11월말까지 산재로 사망한 2천3백18건을 분석한 결과,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추락·감전·끼임에 의한 사고가 작업중 재해의 7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노동부는 이같은 후진국형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전 산업에 근로감독관과 안전공단 기술진을 투입,분기에 1차례이상 일제점검을 벌이고 안전설비 개선 등에 3천억원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한 예로 부산의 한진중공업 화재사건만 해도 안일한 작업태도가 원인이었습니다.근로자들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기업에는 강력히 대처하겠습니다.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위해 기업규모별 임금격차를 줄이는 구체적 방안은 무엇인지요.예컨대 지나치게 임금을 올리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세제·금융상의 불이익을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같은 문제는 대기업의 독과점체제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정부는 이를 허무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기업에서 과도한 임금인상을 할 경우 장관인 제가 나서서 그러지 못하도록 요구할 것입니다.세제·금융상의 제재는 검토가 되는 것이지만 그에 앞서 정부가 대기업에 대해 총력적인 행정지도를 펴 중소기업과의 임금격차를 줄이는데 힘쓰겠습니다. ○무노무임원칙 견지 ­지난해 전임장관이 노동계 개혁차원의 일환으로 노조 업무조사를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엄포용」으로 끝난 느낌입니다.과다한 노조 전임자 문제도 그렇고 「무노동 무임금」원칙이 일부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여론인데요. ▲「무노동 무임금」원칙은 분명히 견지하겠습니다.그러면 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을때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이 문제는 경영자나 근로자가 책임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다른 길은 없습니다.노조 전임자 문제를 보면 미국과 유럽의 경우 조합원 8백명 내지 1천5백명당 1명,일본은 5백∼6백명에 1명꼴인데 비해 우리는 1백40명당 1명씩으로 지나치게 많습니다.정부는 공공부문부터 사업장 여건과 조합원 규모에 맞게 전임자를 조정해나가고 민간부문에도 확산되도록 유도하겠습니다. ­오는 7월부터 실시되는 고용보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고용보험은 4대 사회보장제도의 틀이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고용보험은 선진국의 실업보험 기능외에도 직업능력개발·직업안정 등의 기능을 가집니다.기업으로 볼때 신속한 업종전환(구조조정)을 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나라 전체로 따지면 어느 직종,어느 업종에 인력이 모자라고 남는가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어 인력의 최적배분을 가능케 합니다.근로자 개인으로 볼때도 다른 직종으로의 전환을 쉽게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경영자 책임감 강조 ­정부가 최근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도 최저임금과 산재보험 등을 적용키로 한데 대해 중소기업 등에서 반발하고 있다는데요. ▲그렇습니다.그러나 외국인 근로자의 인권차원에서 이는 풀어내야 할 과제입니다.이미 들어온 연수생에 대해서는 산재보험·의료보험·최저임금 등이 적용되는 준근로자로 대우하게 될 것입니다.앞으로 들어올 연수생에 대해서는 연수취업제나 고용허가제 등 외국의 사례를 검토해 새로운 법을 만들어 대처할 계획입니다. 이장관은 새해 벽두부터 근로자는 물론 경영자들을 쉴새없이 만나면서 노사안정을 위한 대화에 여념이 없다.이장관은 『생산적 노사관계가 없는 세계화는 허구』라는 신념을 갖고 있을 만큼 새시대에 적합한 노사관계 정립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답게 우리 경제를 꿰뚫고 있는 이장관은 『현재 노사관계가 「안정」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불안요인이 많이 남아 있다』며 『노사 각자의 책임성이 강조되고 「더 이상 노사분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만큼 정부에서는 이를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장관은 특히 이제는 경영자가 과거의 근로자에 대한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책임있는 자세로 발벗고 나서야 할 때임을 힘주어 말했다. ◎정부 임금정책의 변화/73년 최저임금·84년 생산성임금제 도입/문민정부 자율 원칙… 노­경총서 「기주」 절충 정부의 임금정책은 60년대이전 제로상태,80년대 관치기를 거쳐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실시된 민간자율 시대로 들어섰다. 한국노총이 경총과의 중앙단위의 사회적 합의를 거부,올해 임금합의가 진통을 겪고 있는 것도 이같은 노사자율 원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사회여건이었던60년이전만 해도 정부의 임금정책은 전무했다. 그러나 고성장정책이 등장하고 노동집약적 상품수출이 우리 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70년대 들어 저임금 계층이 늘어나자 정부는 과도한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73년 임금하한선(3만원)을 설정했다. 임금정책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정부가 실시한 첫 임금개입이었다.어느 정도 저임금이 해소됐다고 판단한 정부는 79년부터 임금결정을 노사자율협상에 위임하게 된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임금정책을 갖고 산업현장의 임금에 개입한 것은 경기침체기에 접어든 80년대부터.물가와 임금·생산성을 연동시킨 임금정책을 펴게 된다.80년 임금인상률 10∼15% 및 하후상박원칙을 권고하고 81년에는 공무원과 정부투자기관을 임금선도부문으로 정해 민간부문의 적정임금 상승을 유도했다.말이 유도이고 권고이지 실제 각 사업장마다 임금인상률을 정해 노사에 「강요」하는 일이 다반사였다.이때는 임금타결시한을 4월까지로 정해 임금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관할 지방노동관서장은 문책을 당하기까지 했었다. 생산성 증가율범위에서 임금을 올리는 생산성임금제가 도입된 것도 84년부터다.이후 고성장·고물가가 지속되면서 생산성보다 임금수준이 높아지고 노사분규가 정점에 달했던 88년을 기점으로 정부는 생산성에 근거한 임금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정부가 강력하게 임금에 개입한 것이다.이때는 공무원 봉급 9%인상 및 민간부문 한자리수 인상방침이 표명되고 고임기업 3백곳을 부처별로 전담해 중점지도했었다. 다시 경기침체(성장률 5.6%)를 맞아 92년 정부의 임금개입은 최병렬 노동부장관시절 「총액임금제」로 나타나고 총액기준 5%이내 인상원칙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자율과 민주화를 표방한 문민정부는 임금은 노사 당사자가 결정하는 「자율의 원칙」이 중요함을 강조하기에 이른다.책임 있고 대표성 있는 중앙단위 노사가 임금가이드라인을 만들어내고 각 기업은 이를 준거로 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임금정책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지속되고 문제점이 있으면 보완,노사관계를 안정시키는 임금문화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입장이다.그러나 무리한 사회적 합의가 미칠 파장을 고려해 자율협상원칙은 지키되 새로운 대안을 내놓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 「약속 또약속」「심수일…」「그리스록큰롤」…/대형뮤지컬 신출무대장식

    ◎막대한 제작비·외국 유명 안무가 초빙/극단들 완성도 높은 무대 만들기 최선 춤과 음악,연극이 어우러진 뮤지컬들이 한 겨울 공연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민중극단이 7일 J아트 예술극장에서 「약속,또 약속」 공연을 시작한데 이어 극단신시 뮤지컬컴퍼니가 12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그리스 록큰롤」의 막을 올렸다.그런가하면 에이콤의 「심수일과 이순애」(27일∼3월12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환퍼포먼스의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2월7일∼19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한국배우협회와 민중극단의 「나도 출세할 수 있다」(21일∼2월1일 문예회관 대극장) 등이 개막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연습 중이다. 올초 공연되는 뮤지컬들은 과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브로드웨이 등 뮤지컬 본고장으로부터 안무가를 초빙하는 등 무대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약속,또 약속」(연출 박봉서)은 영화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를 미국의 희극작가 닐 사이먼이 뮤지컬로 각색,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국내에 뮤지컬 붐을 일으킨 민중극단이 1년간의 장기공연을 목표로 무대에 올렸다.『탤런트들을 앞세워 떠들썩한 홍보로 기대를 모으게 한 뒤 설익은 무대로 실망감만 안겨준 종전의 뮤지컬 공연 패턴을 깨뜨리는 것』을 목표로 2백석이 채 안되는 소극장에서 알찬 공연을 시도하는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 록큰롤」(김상열 각색·배해일 연출)은 영화 「그리스」를 우리 감각에 맞도록 각색한 작품.록큰롤 개화기인 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10대들이 기성세대와 부딪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간다는 주제를 담고있다.올리비아 뉴튼존과 존 트래볼타가 주연했던 영화 「그리스」를 통해 우리 귀에 익은 「섬머 나이트」등 15곡이 전속 그룹사운드 「보스」의 반주로 선보인다.남경주 이경미 등이 출연하며 미국 플로리다에서 활동중인 안무가 엘리 파츠가 무용지도를 맡았다. 「불좀 꺼주세요」의 강영걸이 연출을 맡은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는 환퍼포먼스의 첫 뮤지컬.브로드웨이 정통코미디를 송승환이 뮤지컬로 각색했다.음악은 대중가요 뿐 아니라 영화음악,무용음악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김수철이 맡았고 중견 연기자 김성옥외에 최수종,엄정화,양희경,이정섭 등이 출연한다. 「심수일과 이순애」(이상우 연출)는 순수 창작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다른 뮤지컬과 구분된다.기존 「이수일과 심순애」의 현대판으로 무명 코미디언과 가수가 우여곡절 끝에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요즘 부각되고 있는 연예계 뒷얘기를 소재로 하는 이 뮤지컬의 타이틀롤은 가수 이상우와 탤런트 나현희가 맡았다. 「나도 출세할 수 있다」는 「아가씨와 건달들」을 쓴 에이브 버러우스의 작품으로 유리창닦이를 하다 대기업 말단 사원으로 취직한 주인공이 처세술 책에 따라 술수를 발휘,그 회사의 사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브로드웨이의 일급 안무가인 에디 코완이 내한해 출연진에게 탭댄스 워크숍을 실시중이다.서인석,배종옥,허윤정외에 원로배우 고설봉,강계식과 장민호 이순재 김성원 박웅 등 중진연기자들이 출연해 중량감있는 무대를 꾸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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