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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5ㆍ18민주화운동 10주에 부쳐/조오현

    ◎“원을 원으로 풀순 없다” 법구경 되새겨야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지도 벌써 10년이 됐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그러나 광주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채 마치 악성종양처럼 우리 사회의 내부를 불신과 증오로 채워가고 있다. 광주문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더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 아픔이 10년이 지나고도 치유되지 않았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동안 광주문제를 정리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6공화국 출범이후 국회는 그동안 망월동에 묻어두었던 광주문제를 꺼내 진실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국민들을 모두 TV수상기 앞에 매달리게 했던 청문회를 통해 가려졌던 진실이 조금이나마 밝혀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또 5공시절에는 광주문제를 단순히 「광주사태」로 부르고 희생자들도 「폭도」라고 매도했던 것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의미를 규정하고 「폭도」가 「희생영령」이란 말로 바뀐 것도 변화라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가 그만큼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표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광주가 내장하고 있는 본질적인 몇가지 문제는 미결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이며 민주화를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광주문제는 일부 정치군인의 권력장악에 맞서 긴 군부통치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일어난 민주항쟁이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구호도 민주주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고 선량한 시민과 학생은 폭도로 매도되었다. 처참한 살육전이 우발적인 것이었는지 계획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이로 인해 광주는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도시가 되고 말았다. 5월18일만되면 시내 전체가 죽은 사람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통곡하는 도시는 광주밖에 없다. 우리가 적어도 같은 하늘 밑에 사는 형제라면 광주의 이러한 아픔을 어떻게든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진작 매듭을 풀고상처를 아물게 해야할,정치적으로 책임있는 사람들은 「광주의 아픔」을 미끼로 추악한 정치흥정만 계속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보상문제만 해도 그렇다. 정부여당의 경우 광주문제에 보상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마치 무슨 항복문서에 도장찍는 일인 것처럼 주저주저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애써 광주문제의 본질과 진상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지도 않을 뿐더러 무조건 덮어두자는 식이다. 광주문제를 빌미로 명분상 흠을 잡히지 않겠다는 속셈이다. 야당이라고 해서 이 문제 해결에 여당보다 적극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야당은 광주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6공화국의 입장을 난처하게 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정치인들은 아무도 광주문제를 마무리짓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보인다. 말로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떠들면서도 청산방법이 당리당략에 어긋날듯 싶으면 여지없이 생트집을 잡고 돌아앉고 만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광주의슬픔을 진정으로 나누려고 하지 않고 사람의 목숨값을 무슨 물건값 흥정하듯이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면서 그 언저리에서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할 뿐이다. 저간의 형편이 이러하고 보면 광주문제가 10년이 지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태는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지 않고 유가족들과 슬픔을 나누지 않는다는 단순히 도덕적인 이유로만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로 인해 높아진 불신의 벽과 삭여지지 않는 분노의 감정이다. 광주에 가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광주문제가 10년째 공산의 메아리마냥 울리기만 하고 실체가 잡히지 않자 이제는 분노를 넘어 증오감으로 치닫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다시 어떤 비극적 사태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광주사람들은 차마 입밖에 이런 말을 내뱉지 않고 있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불만이 낙진처럼 누적되고 있다. 일을 자꾸 어렵게만 만들어가서는 안된다. 광주의 슬픔이 아무리 크다고해도 10년을 거기에 매달려 역사의수레바퀴를 헛돌게 해서는 곤란하다. 수많은 사람이 광주항쟁때 쓰러져간 것은 길을 잘못 든 민주주의의 수레를 바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 역사의 제단앞에 공양물이 되었다. 진흙에 빠진 수레를 건져 올리기 위해 돌이 되고 다리가 되었다. 지금 살아남은 사람이 할 일은 그 돌을 딛고 일어나 그 다리를 밟고 민주사회라는 피안에 도착하는 일이다. 그것이 죽은 사람의 죽음을 욕되지 않게 하는 길이요.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언제까지나 광주의 비극을 흥정만 한다면 광주의 역사적 의미인 민주화가 오히려 광주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당장 우리가 서둘러 해야할 일은 우선 광주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고 청산하는 길밖에 없다. 개인적 감정으로야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용서가 안될 수도 있다. 장승같은 자식 잃고 기둥같은 형제를 잃은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례한 요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용서와 관용이 아니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을.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우리들 중생에게 이렇게 가르친바 있다. 『원망은 원망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원망은 또다른 원망을 낳기 때문이다. 원망은 용서함으로써만 갚을 수 있다』 어려운 때,마음이 상하는 때일수록 우리는 성인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가 담겨 있다. 광주문제도 마찬가지다.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만이 참으로 이기는 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과거를 잊자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란 과거의 아픔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진하는 것이라면 간디의 말처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10년전 광주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중음으로 맴도는 광주의 원혼들도 그래야 하루속히 정토왕생 이고득락하게 될 것이다. □약력 스님ㆍ전불교신문 주필 1968년 문단데뷔 신흥사주지 역임
  • 경관폭행등 「공무방해 영장」/법원,잇따라 3건기각

    공무집행방해 사범에 대해 엄중처벌키로 한 검찰의 방침과는 달리 법원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신청된 구속영장을 잇따라 기각시켰다. 서울지법 남부지원 박형명판사는 16일 시간외 영업을 단속하던 경찰관을 때려 상처를 입힌 양천구 목3동 「두볼」카페주인 정은자씨(38)에 대해 서울 신정경찰서가 공무집행방해등 혐의로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박판사는 이날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다 파출소로 연행된뒤 경찰관을 때려 상처를 입힌 박철순씨(37ㆍ운전사ㆍ양천구 신정3동)의 구속 영장도 『사안이 중하지 않고 연행되는 과정에서 박씨가 화상을 입어 흥분된 상태에서 저지른 점을 참작한다』고 기각했다. 이에 앞서 서울형사지법 이현승판사도 15일 검문소로 동행할 것을 요구하는 교통경찰의 뺨을 때린 김건택씨(38ㆍ회사원)에 대해 경찰이 공무집행방해혐의로 신청한 구속영장을 『우발적 범행으로 사안이 경미하고 도주의 우려가 없다』고 기각했다.
  • 불쌍한 아버지/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마침내 주정으로 지새던 한 아버지가 여남은살 안팎의 딸 아들에 의해 죽기까지 했다. 그 자신,술에서 깨어났다면 생명처럼 아끼고 먹여살리기 위해 뼈를 깎을 각오를 새로이 했을지도 모를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살아보려고 애탄개탄하며 고달프기 한량없는 어머니를 구박하고 때리고 아이들을 죽일것 처럼 무섭게 굴던 비정한 아버지였으므로 어린아이들의 우발적인 행동은 법에서도 관용처분을 받을 것이다. 또 그래야 마땅하기도 한다. 그러니 죽은 아버지만 「못된 아버지」로 남겨졌다. 불쌍한 아버지. 신병있고 실직한 가장이 날마다 당하는 스트레스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가슴에서 치미는 화를 삭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술이나 퍼마시는 일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알코올로 황폐해진 사람은 정신적인 황폐정도가 정신질환상태와 마찬가지다. 정신이 온전했다면 자신으로 해서 일생을 「아버지 죽인 자식」이란 가위눌리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 하는 아들 딸을 만드는 일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MBC­TV가 일요일이면 내보내는 「우정의 무대」라는 프로가 있다. 군부대를 찾아가 제작하는 이 프로에는 씩씩하고 젊은 사나이들인 대한민국 국군들이 수백명씩 등장한다. 이 프로의 하이라이트는 병사들중 한사람의 어머니를 고향에서 모셔다 숨겨놓고 그 음성만으로 아들이 찾아나오게 하고 그 길로 귀향휴가를 가는 대목이다. 솜씨 좋은 사회자 뽀빠이가 이 대목을 아주 극적으로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전 병사들은 이 대목에 이르면 저절로 눈들이 흐릿해진다. 마침내 아들을 만난 어머니가 단상에서 북받쳐 울어버리면 거무튀튀하게 그을린 건장한 군복의 장정들도 눈꼬리에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만다. 어머니­. 불러보는 것만으로 간장이 녹아드는 그리운 어머니. 그처럼 따뜻하고 정겨운 것이 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라도 동정을 받는 애물이다. 거기 비하면 아버지는…. 모파상의 단편에 「무용의 미」라는 것이 있다. 주인공 마스카레백작부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질투와 불안 때문에 남편인 백작은 11년동안 부인이 7남매나 되는 아이를 갖게 한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내의 배를 비워두지 않는」 남편의 야비함에 몸서리치게 된 백작부인은 어느날 남편인 마스카레백작을 교회로 이끌어간다.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남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당신의 자식들중 하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어요. …당신에게 할수 있는 유일한 복수의 수단으로 그런 일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그 거만하고 권세있고 이기적이던 백작은 고뇌하기 시작한다. 방황하고 좌절하며 헤맨다. 네딸과 세아들중 누가 「아닌 아이」인지 말하지 않는 아내에게 조르고 애걸하고 윽박도 지르지만 아내는 『알게 되면 당신이 죽일까봐』 밝히지 않는다. 아무리 지체가 높고 권위있는 위대한 남성이라도 비록 하찮고 초라하고 못난 여성에게일망정 「보증」을 받지 못하는한 「아버지」일수가 없다. 여자가 『당신의 아이가 아니오!』하고 부정하면 「아버지」는 취소된다. 아버지란 추상이고 상징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버지들은꽝꽝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젊고 늙은 머슴처럼. 흔히는 여자가 층층시하에 있다고 말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시하란 기껏해야 시집식구나 남편 정도다. 그러나 남성들은 첩첩쌓인 층층 시하살이를 한다. H라는 증권회사 전문경영 사장은 자신이 5%의 재량권도 갖지 못했다는 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위로부터는 대주주 압력이 내려오고 아래로부터는 노조가 치받치고,군소주주가 협공하고,증권관리위원회가 「지도」를 하고,주무관청이 눈치를 주고…. 『말이 좋아 사장이지,그 스트레스란 아이고오,말도 마시오』하고 머리를 흔든다. 자리가 낮으면 낮은 대로,동료와 경쟁하랴,상사에게 눌리랴,성적 올리랴,승진신경쓰랴,함정조심하랴…. 그래도 옛날 아버지는 힘이 있었다. 옛날 아버지는 배를 만드는 사람이었으면 그 배는 「아버지가 만든 배」일수 있었다. 돛도 닻도,선복도 키(타)며 노도 다 아버지가 만들었으므로 그건 아버지의 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굉장히 큰 기선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어린아들이 하루는아버지회사에 견학을 갔다. 빌딩처럼 큰 배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에 아들은 우쭐하고 신이 났다. 『우리 아버지가 만드는 배!』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찾아 더듬어갔다.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을 보았다. 아버지는 작은 볼트와 너트따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 조그만 일이 아버지 일이었다. 아들에게 더는,그 배가 「아버지가 만든 배」라는 자부심은 생기지 않았다. 현대의 아버지는 그렇게 왜소해졌다. 워낙은,월급쟁이 가장이 월급봉투를 집으로 가져가는 날만은 어깨를 펴고 잴 수 있는 날이었다. 아내 앞에 턱 던져주면 속으로는 어쨌든 아내는 황송해 하는 시늉을 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경리과에서 아내의 온라인 통장으로 쏘옥 들어가 버리게 마련이다. 잴수 있는 유일한 날도 퇴화해 버렸다. 그래도 아버지들은 기꺼이 목숨을 갉아가며 수걱수걱 아버지노릇을 한다. 잘못 관리하다가 아내의 정부에게 청부살인 당하는 남편도 있고 직장에 안간다고 마누라에게 찔려죽기도 하고 늙고 병들었다고 패륜한 아들에게 구박받고 내쫓기고얻어맞기도 하지만 그렇게 안되도록 애써가며 체면과 꿈으로 윤색된 「아버지」의 상징을 소중히 지키며 열심히 일한다. 그에게는 여전히 「좋은 아버지되기」가 가장 큰 보람이며 희열이어서 사랑하는 가족을 울타리로 감싸주며 살아간다. 불쌍한 아버지. 그러나 고마운 아버지. ◆지난 3월30일자 서울칼럼 「정치인의 아내」에 대하여 고령신씨 문중에서 강력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보한제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자결했다고 묘사한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고 그것이 정식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역사소설의 인용이지만 신씨문중에 물의를 일으킨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본의가 아니었음을 밝혀 드립니다.
  • “파키스탄군 이동… 전쟁준비”/인,국경에 적색경계령

    ◎통금령 카슈미르서 경관 5명 사상 【뉴델리ㆍ잠무 AP AFP 연합】 잠무 카슈미르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비슈나와트 프라탑 싱 인도총리는 14일 파키스탄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인도는 어떠한 우발적 사태에도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싱 총리는 기자들에게 파키스탄이 레이다 부대와 기갑연대를 인도 국경지역 근방으로 이동시켰으며 공군기지를 사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따라 인도북부 국경지역에는 전쟁 대비 태세중 마지막 단계인 적색경계령이 내려져 있다고 말했다. 【잠무 AFP 연합】 인도당국은 14일 회교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3명이 숨진 바데르와와 키스티와르등 카슈미르주의 두개 마을에 무기한 통금령을 내리고 군병력을 배치했다고 관리들이 전했다. 한편 13일 통금령이 발효중인 카슈미르주의 하도 스리나가르에서 순찰중이던 민병경찰대가 회교 지하단체의 수류탄 공격을 받아 5명이 사상했으며 인도당국은 카슈미르주 독립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피랍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에 나서 5백여명의 반정부 용의자들을 체포했다.
  • 외언내언

    여나믄살 안팎의 3남매가 주사부리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칼과 방망이로 때려 죽게 한 사건이,어머니 때린 아버지를 살해한 고교생의 집유석방기사와 함께 보도되었다. 「3남매」가 아버지를 죽게 한 것도,그 아버지가 술만 취하면 어머니를 못살게 굴고 집안을 「지옥처럼」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법부는 고교생에게 집행유예 처분한 이유를 『…우발적으로 저질렀으며 크게 뉘우치고 있다』는 데 두고 있다. 3남매의 「아버지 죽임」도 지극히 우발적인 범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술로 파탄된 가장의 고쳐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행패처럼 지겨운 증세는 없다. 혼자서 집안 이끌어가느라고 고달프고 가엾은 엄마를,하고한날 두들기는 「아버지」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평소에 3남매는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엄마뿐만 아니라 저희도 꼭 죽일 것만 같은 공포속에서 정신없이 저지른 죄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이는 무서운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억제할 수 없도록 살의를 자극하는 아버지의 행패가 날마다 계속되고 점점 더 공포의상황만 벌어진다면,어린 3남매만 참고 냉정해지라고 할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의외로 이와 유사한 가정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다. ◆고교생에서 중학,국민학생까지 내려간 이 「아버지 죽이기」가 또 다른 모방증후군을 부르지나 않을까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다. 아버지들이 정신을 차려서,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직 덜 성장한 자녀의 우발적 충동을 자극하지 않는 일이 최상이지만,현실은 그렇지도 않아 걱정스럽다. ◆특히 우리 사회는 술주정뱅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집안에서 주사를 부리거나 행패가 심한 것은 거의가 내버려두고 「참는것」말고는 손을 못쓴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식들을 평생 「아버지 죽인 죄인」이 되어 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가 자리가 잡히면 주정뱅이라는 이름의 정신병자 아버지를 그 자녀나 가족에게서 격리시키는 제도도 마련돼야 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 음성 의원폭행 사건/불구속 수사를 지시

    【음성=한만교기자】 박찬종의원 등 폭행사건을 수사지휘하고 있는 청주지검 충주지청 조영수검사는 30일 이 사건의 가해자로 입건된 신재문씨(48ㆍ민자당 음성 감곡면 협의회장) 등 11명을 불구속 수사하도록 음성경찰서에 지시했다. 조검사는 『계획적인 폭행이 아니고 선거운동과정에서 생긴 우발적 사건임을 감안,불구속 수사토록 했다』고 말했다.
  • “김일성에 권좌 이양이란 없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퇴설」 분석

    ◎김정일의 호칭변경은 정치적 위상 부각조치/김일성 생존하는 한 일부승계는 큰 의미 없어 김일성의 은퇴설이 올들어 심심찮게 나도는 가운데 지난 16일 홍콩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가 또다시 김일성의 조기퇴진설을 들고 나왔으나 대부분의 국내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또는 가까운 시일내에 북한에서의 공식적인 권력승계가 가시화되리라고 전망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최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도 불구하고 폐쇄의 담을 더 높이 쌓아가고 있는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고 있고 개방압력 또한 날로 점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김일성이 죽기 전에 스스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아들 김정일에게 주석자리를 넘겨줌으로써 비판의 화살을 피하는 동시에 김정일의 권력관리 능력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세습체계를 더욱 확실히 다질 것이라는 가능성은 점칠 수 있으나 그 과정이 그렇게 빨리 이뤄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 국내전문가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김창순씨(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건강이 유지되는 한 김일성은 종신군주로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는 김일성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체제유지의 필요성 때문에 북한의 원로그룹 등 측근들이 허용치 않을 것이며 또 신진세력 또한 김정일보다는 김일성체제 아래서 개혁정책을 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김정일의 호칭중 「경애하는」 또는 「친애하는」이라는 접두어를 「위대한」이라고 바꾼 것은 그의 정치적 인격을 격상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나 「지도자」를 「수령」으로 지칭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사실과 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성철교수(경희대)는 『북한정권이 권력이양문제를 신중히 고려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이같은 조짐을 외부에 시사한 것은 외부적인 압력과 내부불만을 다른 방향으로 호도하기 위한 선전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고 『등소평의 은퇴에 비유해 김일성의 퇴진을 예측하는 주장 또한 등이 지난해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를 간과한 성급한생각』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국가주석ㆍ정무원총서기ㆍ당총비서ㆍ당군사위위원장 등 현재 누리고 있는 최고직위중 하나 정도를 조만간 김정일에게 승계할 수는 있지만 이 문제 또한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큰 의미가 없으며 북한권력 내부에 큰 변화가 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김갑철교수(건국대)는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방향제시,김정일의 정책수행 형태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후계체제를 바꾸려 해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구축되어 있으나 김일성이 자신의 생일인 오는 4월15일 또는 가까운 시일내에 권력승계를 공식화할 조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경제정책의 실패 등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올해안에 노동당 전당대회가 열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지적하고 김일성이 나이가 80세가 되고 제3차 경제7개년계획이 끝나는 오는 92년쯤 제7차 당대회가 열릴 것이며 이때 가서야 김일성의 은퇴문제가 보다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김일성의 사망 또는 건강악화라는 우발적인 상황발생에 따른 김정일의 전면등장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한 외부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등소평식의 2선후퇴 등 김일성의 조기퇴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몇가지 예외가 있겠지만 김일성이 살아있으면서 실권을 이양하는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본사 논평위원인 서병철교수(외교안보연구원)도 『김일성 사후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국가의 권력승계 때 일어났었던 전임자의 격하,주변인물에 대한 숙청 등의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막고 시대적인 흐름인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김일성 스스로 은퇴하는 방안이 제시될 수 있으나 이 문제가 단시일내에 급격히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성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에 대한 호칭변화 ▲73년 9월 당중앙 ▲75년 6월 유일한 지도자 ▲83년 2월 영도자 경애하는 지도자 ▲83년 5월 최고사령관 ▲86년 2월 인민의 어버이 ▲87년 5월 위대한 영도자 ▲90년 2월 위대한 지도자
  • 모방방화범 첫 구속/연세대생/호기심에 승용차덮개 불질러

    ◎10대 근로자 영장은 기각… 기준에 혼선 서울 마포경찰서는 16일 최근의 방화사건을 흉내내 길가에 세워진 승용차에 불을 지른 연세대 정지영군(24)을 방화혐의로 구속했다. 정군의 구속은 지난15일 검찰이 『모방방화 이더라도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라』고 지시한 이후의 첫번째 케이스이다. 정군은 15일 0시20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0 주택가 앞길에서 최병진씨(52ㆍ회사원)의 소나타승용차 비닐덮개 아랫부분에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여 덮개 일부를 태운혐의를 받고있다. 정군은 경찰에서 『여자친구와 술을 먹고 집까지 바래다 준뒤 택시를 기다리다 호기심에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서울 종암경찰서도 최모군(17ㆍ공원ㆍ서울 성북구 장위동)을 방화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 의해 영장이 기각됐다. 서울지법 이창학판사는 구속영장 기각사유를 『나이가 어리고 전과경력이 없으며 범행동기가 우발적인데다 최근의 방화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군은 15일 상오3시40분쯤 장위동 골목길에 세워져 있던 서울2 므4815호 포니승용차 덮개에 불을 지른혐의로 경찰에 연행됐었다. 이같이 법원이 모방방화사건에 대해 엇갈린 처리기준을 적용함으로써 앞으로 경찰의 방화사건수사가 큰 혼선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 미 베이커 국무ㆍ체니 국방ㆍ파월 합참의장,상원 증언요지

    ◎“소 군축 불구,한국안보 위협 상존”/우방과 협조,전진배치군 존속시켜야/북한의 대남 적화야욕 포기 조짐 없어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과 딕 체니 국방장관,콜린 파월 합참의장 등 부시 미 행정부의 고위관리들은 1일 미 상원 외교위 및 국방위에서 각기 1991회계연도 예산안 제출과 관련한 외교ㆍ국방정책에 관해 증언했다. 베이커 장관은 이날 증언에서 미국의 대한 안보공약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긴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파월 합참의장은 북한이 계속 가공할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한미 안보관계는 한반도에 대한 도발을 계속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음은 베이커 국무,체니 국방장관과 파월 합참의장 증언의 요지이다.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 미국 정부는 미ㆍ북한간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88년 10월 이래 북한에 대해 대화재개 등의 조치를 취해왔다. 미국은 남북한과 미ㆍ북한간의 관계개선을 가져올 수 있는 꾸준하고 상호주의적 원칙에 따른 과정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대한 안보공약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긴요하며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궁극적인 통일의 요체는 남북한간의 생산적인 대화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북한을 고립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노태우 대통령의 노력을 지지한다. 카스트로의 쿠바와 중국처럼 민주적 가치를 봉쇄하려는 정부들은 국민들의 발전을 지연시킬 뿐이고,모든 국가들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발전을 이루기를 원한다. 소련군이 완전철수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주민들이 자유의사로 결정,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부를 지원해 항구적인 평화정착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이를 위해 소련과 유엔 및 이해 당사자들과 대화를 가질 용의가 있다. 또한 10여년간 내전에 시달리고 있는 캄보디아 사태와 관련,크메르 루주의 재집권을 저지하고 이 지역에서 유엔 주관 아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실시돼 진정한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된 정부가 들어서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 지난 1월16일 파리에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대표들이 만나 캄보디아 문제를 논의,이 지역의 평화정착을 위한 16개항의 원칙에 합의해 앞으로 유엔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딕 체니 국방장관◁ 미국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가 전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가장 큰 변화가 소련과 동구에서 일어나고 있으나 소련은 강력한 군사력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동구와 소련의 최근 사태는 소련의 계획적인 대서구 공격 위험성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상황의 가변성과 예측불허성 때문에 다방면에서 우발적인 분쟁의 기회가 증대되고 있다. 현재 공산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장차 어디로 갈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지적했듯이 긍정적인 변화가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지금처럼 불확실한 과도기에 미국이 취할 최선의 자세는 단기적으로 확고한 방위정책을 견지하는 것이다. 향후 10년간 미군은 다음 도전들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①소련=우리는 소련군의 축소를 예상하지만 지금까지 소련군의 감축은 최소한에 그쳤고 그들의 중요한 군사능력은 그대로 남아있다. 소련의 핵무기 비축시설은 현대화되고 있으며 소련군의 효율성 제고작업이 진행중이다. 모스크바가 현재와 같은 군사적 억제를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소련 당국의 중앙집권성 때문에 크렘린은 언제라도 군사정책의 방향을 신속히,그리고 결정적으로 바꿀수가 있다. ②잠재적 적대국으로의 군비확산=최소한 6개 국가가 핵능력 획득작업을 진행중이며 적지않은 숫자의 제3세계 국가들이 장거리 미사일과 화학ㆍ생물학 무기를 포함한 신무기 병기창을 보유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 국가의 일부는 미국에 대해 적대적이며 근린해역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시사하고 있다. ③반미정권=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가 그랬듯이 몇몇 제3세계 국가들은 승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국과 군사적 대결로 나갈지 모른다. ④비국가 위협=미군은 미국의 이해관계와 가치관에 적대되는 마약밀매,반민주적 모반,테러리스트 그룹 등과의 대결이 요청되고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은 세계적으로 개입이냐 고립이냐의 선택을 계속해야 한다. 미국은 핵심지역인 유럽ㆍ지중해ㆍ아시아ㆍ태평양의 우방 및 우호국들과 협조하여 전진배치군을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소련 군사력의 감축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해관계는 한국과 페르시아만 지역에서처럼 지속적으로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은 전쟁억지력,신축적 대응,전진방어,안보동맹,신중한 군비감축등의 독트린을 전략으로 고수해야 한다. 1989년의 이례적인 사태가 미국으로 하여금 이같은 전략적 기초를 포기케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콜린 파월 합참의장◁ 태평양에서 소련이 미국의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적대행위를 주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련의 관심은 중국과의 상호관심사에 집중돼 있다. 소련은 일반적인 병력감축의 일환으로서 몽고와 캄란만 주둔지상군 및 공군의 감축을 개시했다. 소련 태평양 함대는 노후함정의 퇴역으로 인해 다소 약화됐다. 그들 함대의 역외배치도 계속 축소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대화를 바라는 신호가 있어왔지만 서울과 평양간의 대화는 북한이 대결관계의 변화를 원한다는 것을 미국에 전혀 확신시키지 못했다. 북한은 강력한 군사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한미안보관계는 한반도에서 침략을 계속 억제시킬 것으로 미국은 판단하고 있다.
  • “어떤 심판도 달게 받겠다”/전 전대통령,서면답변내고 백담사로

    ◎증언 소란끝에 중단,파행종결/「광주」 군 배치ㆍ이동 관여 안했다/정치자금 민정외엔 준일 없어/증언내용 전두환 전대통령은 구랍 31일 재임기간중 정치자금문제에 대해 『개인 또는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기부받은 바 있다』고 말하고 『민정당 이외의 특정인에게 정치자금을 준 일은 없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국회 5공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로 열린 청문회에 출석,이같이 말하고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열게 됨으로써 과거청산의 마무리가 아니라 청산의 새로운 시작이 되고 과거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될까 두렵다』며 구체적인 정치자금 내역은 밝히지 않았다. 전 전대통령은 6ㆍ29선언에 대해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어떻게 실현되고 추진돼 정치발전과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경위나 배경을 들추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면서 『정치이면의 얘기는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해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전 전대통령은 광주사태에 언급,『초동 진압단계에서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악의적인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의 과격시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하고 『본인은 당시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말해 광주사태진압 및 발포와 무관함을 주장했다. 전 전대통령은 『본인은 광주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고 시민 상대의 사태수습을 군작전 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는 의견을 계엄사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바 있다』고 말하고 『자위권행사 문제는 군인복무 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되며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의 작전지침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 전대통령은 『12ㆍ12사태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었다』고 밝히고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본인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날 청문회는 전 전대통령의 증언 부실 등을 이유로 여야간 야유와 고함ㆍ몸싸움이 속출해 8차례나 정회를 거듭한 끝에 민정당측과 전 전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야3당 의원들만으로 자정을 넘겨가며 파행적으로 진행되다 1일 0시50분에 산회됐다. 이날 저녁 7시30분 5차례의 정회끝에 속개된 회의에서 광주문제에 대해 증언하는 가운데 평민당의원들이 격렬하게 항의,민정당의원들과 격돌을 벌였고 정회가 선포되자 민주당 노무현의원이 전 전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던지는 사태가 발생,민정당측이 서면사과를 요구했으나 야당이 이를 거부하자 민정당과 전 전대통령은 증언을 중단키로 결정했다. 이날 파행적인 청문회 결과 야당측이 위증시비를 제기하는 한편 부실답변을 계속 문제삼고 있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증언에 대해 평민당과 재야 등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 전대통령은 이날 증언이 중단된 뒤 서류로 제출한 나머지 증언을 통해 광주에서의 발포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던 입장에서 건의를 받을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고 부인하고 『광주의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 당시 정부와 군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책임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고 재임중 상처를 치유,해결하지 못한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 동기에 대해 『최대통령이 하야시 발표한 성명내용에 비춰 헤아려 볼 수 있을뿐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추측해 말하기 어렵다』고만 답변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증언 속기록

    ◎“강경진압ㆍ과격시위가 광주사태 도화선”/합수부 설치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계획/정 총장,「김재규 관련조서」 4차례 고쳐/광주특위 ▷6ㆍ29선언◁ 어느 시대,어느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이면사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 그때 속속들이 알려지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ㆍ29선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그동안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또 지금 어떻게 추진되어 정치발전과 국가이익에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그 경위나 배경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 일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이면의 얘기들은 현실정치에 민감한 영향을 주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훗날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소상히 밝힐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국민 여러분의 양해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간첩조작사건등◁ 선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게 마련입니다. 실무진에 의해 이뤄진 일인 경우 대통령에게 보고될 수도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임대통령으로서 답변할 수있는 부분을 총괄적으로 얘기한 것입니다. 간첩조작사건 등은 실무진들이 조작했는지 않았는지 제가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또 물리적으로 답변준비시간이 짧아서 거기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답변하지 못한 점을 양해바랍니다. ▷10ㆍ26에서 12ㆍ12까지◁ 1979년 국내 정국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로 정치ㆍ사회적으로 매우 어수선하고 경제도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박 대통령시해사건으로 18년간이나 지속되어온 절대권력이 일시에 무너져 국가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 공백상태와 행정체제의 마비는 국민들의 충격과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시해사건이 권력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지절러졌다는 점에서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0월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예상되는 북한의 군사적 책동에 대비하여 전군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상계엄선포와 동시에 계엄지역내에서의 수사업무를 일원화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구 계엄법 제11조와 비상계엄업무의 구체적인 시행지침인 「육군계엄시행계획」과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계엄사령관 직속하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설치 운용하게 되었습니다. ▷합수부설치 배경◁ 본인은 1979년 3월 국군 보안사령관이 된 뒤 을지연습을 실시해본 결과 전쟁 발발시의 보안사령부의 역할 및 임무수행과 관련,여러가지 미비점이 발견되어 보완책의 강구를 각급 참모에게 지시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시 전국계엄상황하에서는 정부의 모든 조직이 실제상 군의 통제하에 들어오게 되는 바,이러한 상황을 가정하여 각급 정보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해야 할 비상계획수립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상계획의 일부로서 합수부안이 평소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 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 직후 준비했던 합수부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합동수사본부는 기존의 수사기관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기구로 구성한 것이 아니고,당시에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로 나누어져 있던 수사업무를 조정 통제하여 계엄하에서 수사기능과 활동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1962 당시 김재춘방첩부대장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공화당 사전조직 및 4대 의혹사건 등 중요한 사건들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김재규 체포 경위◁ 대통령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이며 사건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국방장관과 정승화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불러서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정 총장실에 가보니 정승화총장은 본인에게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에 보호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나는 당시 헌병감 김진기장군과 협의하여 김 장군으로 하여금 김재규를 국방장관실로부터 참모총장실로 유인해 나오도록 하여 그곳에서 보안사수사관을 시켜 김재규를 체포토록 하여 보안사 안가로 이송,보호 조치케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10월26일 24시경이었습니다. 얼마 후 안가의 수사관들로부터 김재규가 틀림없는 범인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안가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김재규를 보안사 수사분실로 이송하여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때가 27일 새벽 02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당시 김재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정승화는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시킨 사람이다. 당시 국방장관은 3군사령관을 참모총장으로 밀고 있었으나 내가 1군사령관인 정 장군을박 대통령께 강력히 추천해서 총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고 김재규 자신의 지시에 따라 정승화총장을 범행장소에서 36m 떨어져 있는 궁정동 안가에 대기시켰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 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 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해 정 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종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총장이 김재규의 공범 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의 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11시께 본인에게 정 총장을 연행 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습니다. 만일 이 시기를 놓치면 증거를 인멸시켜 버릴 우려가 있고,수사 진행을 방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 버릴 염려마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수사관들로서는 정승화에 대해 많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사통제ㆍ조정 필요◁ 어째서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이 할일없이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근처에 두시간 가량이나 머물러 있었느냐는 것이고,근접한 위치에서 수십발의 총성이 들려왔는데도 대통령이 근처에 있는 줄 알면서 당장 진상을 알아보려고 안한 것은 30여년 군에 복무하여 군의 최고직위까지 오른 사람의 습성으로 보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고 피묻은 셔츠바람에 맨발로 달려온 김재규를 목격했으면서도 경위도 알아보기도 전에 같은 자동차를 탔다는 것,김재규는 여섯발을 장전한 권총으로 다섯발을 쏘고 한발이 남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고 있었으니 김재규의 몸에서 화약냄새가 났을 것임에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차 안에서 김재규가 수행원의 상의와 구두를 빌려 입고 신고하는 동작이 있었는데도 그냥 넘겨버렸고,육군본부에 도착하고서도 별다른 조치없이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군 이동을 한 것 등으로 하여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었고 당시 저 자신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분간은 계엄령의 질서하에 국내 치안확립이 시급한 일이었고,북한 남침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인데,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지 일곱시간밖에 안된 정 총장을 연행하는 사태가 생기면 혼란을 더욱 격화시키게 될지 모른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도피의 우려도 희박하고 증거인멸을 한다 해도 그 범위는 뻔할 것이니 정세가 안정된 후에 수사를 전개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도 있어 그대로 수사관을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신보도와 국내언론을 통해 시해사건에 정 총장이 관련되지 않았는가 하는 설이 나돌게 되자 정 총장은 자신이 스스로 조사를 받겠다고 간청했습니다. 그 자청에 따라 10월29일부터 11월1일까지 4일간 합수부 조사관들이 육군참모총장실에 출두하여 매일 두시간 정도 정 총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수산관들은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위압감을 조성함으로써 순리적인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내용이 사실과 다르다 하여 전후 4차례에 걸쳐 수정시키기도 했습니다.심지어 그는 조서를 총장실로 가져오라고 해서 자신이 조서내용을 직접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총장의 10ㆍ26시해사건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습니다. 많은 억측이 유언비어가 되어 항간에 범람했습니다. ▷10ㆍ26,쿠데타로 판단◁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시해사건이야말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 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 군 자체의 기강이 흔들리는 동시 마침내는 군이 분열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11월께 본인은 모든 상황을 노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건의하였더니 「좀 더 두고보자」고 했고 그후 최 대통령에게 건의드렸더니 『국방장관과 상의하라』고 말씀하셔 본인으로서는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 총장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내부에 강력한 지지세력을 구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조사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한 노릇이었습니다. 목숨을 걸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으며 그야말로 구국적인 소신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입니다. 평상시 본인은 미국의 케네디대통령 암살사건이 영원한 미궁에 빠져버린 것을 미국의 수치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인이 운명적으로 시해사건수사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을 때에 저 개인의 신상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기필코 이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히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본인은 김재규의 수사과정에서의 진술이 미국이 개입되었다는 통설,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육군참모총장이 범행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취합해서 쿠데타가 아니면 쿠데타에 준하는 사건이라고 당시로서는 판단할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정 총장 자신의 말대로 오비이락격으로 그가 시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건 그분의 불운이라면 불운일 것입니다. 불운이라 해서 수사의 객관성과 냉정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용의자를 제외하고 수사를 마무리지었다간 의혹은 의혹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수사책임자의 직무태만이란 원성으로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직무태만이란 비난이 겁나서가 아니라 정 총장에 대한 완벽한 조사가 국민의 의혹을 해소시키는 동시,정 총장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한 조치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본인은 정 총장을 수사할 적기를 포착하기 위해 정국의 추이를 주시하는 한편 군부내의 여론을 수집하였습니다. 11월 중순경부터 중진 장성들과 접촉을 계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정 총장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장군도 끼여있었습니다. 당시 황영시 1군단장,차규헌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노태우9사단장 등을 한분한분 찾아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그분들은 하나같이 10ㆍ26사태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어떤 고위층도 예외일 수 없으며 빨리 흑백을 가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최고책임자의 관련혐의는 군의 단결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하루속히 결판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화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12월 초순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 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 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 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본인은 총리공관으로 최규하대통령을 찾아뵙고 정승화총장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보고를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혐의만으로도 정총장이 계엄사령관과 참모총장직에 부당하다는 것을 설명드리고 정 총장을 조사한 결과 그가 계엄사령관 및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그 공백을 대통령께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시해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대통령의 사전결재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수부장의 포괄적인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 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 후 모셔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정 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 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본인은 그날 밤 18시30분 경복궁에 있는 30단으로 평소 정 총장과 가까운 관계인 군의 중진 장성들과 그밖의 몇몇 장성들을 초청해 놓고 있었습니다. 정 총장이 시해사건과 고의이건 아니건 관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군내부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으로 군 지휘계통에서 물러나는 용단을 내리도록 허심탄회하게 건의토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사결과 예편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30단에 모인 장성들이 총장공관에까지 따라가서 조용히 예편하도록 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정 총장이 일단 예편하기로 결심하였다가 혹시 울컥하는 감정으로 군을 동원하여 보안사를 공격하고 수사요원을 체포하여 하극상 사건으로 몰아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려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전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를 보안사가 아닌 30단으로 정한 것은 본인이 정 총장의 감시하에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보안 유지를 위해 저의 사무실이 아닌 바로 인접한 30단의 단장실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상했던 대로 연행과 관련된 무력충돌 직후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면서 수도권의 병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 총장 측근의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 등이 탱크를 포함한 중무장부대를 동원하여 청와대 지역을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합수부는 수사기관으로서 전투병력이 없는 상태이고 부대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될 것이므로 주요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제를 당부하는 등 충돌을 피하도록 적극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정 총장측근에서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안보상 필요한 조치를 취한 가운데 제한된 규모의 예비병력을 동원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긴급대응의 조치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회일각에서 또는 미국측에서 이 사태를 계획적인 거사가 아니었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만 이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태는 돌발적이었습니다. 당시 30단에 모였던 장성들이 병력을 출동시킬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또한 본인에게 대한 전보발령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있는 모양이지만,본인은 그 당시에는 일체 그와 같은 일은 들안 바가 없습니다.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장악하지 않았겠습니까? 본인은 그 당시로서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과거 고 박대통령으로부터 정치입문 권유를 몇차례 받은 바 있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2ㆍ12사태는 당시 시해사건에 대한 최고 수사책임자인 본인이 주도한 것이며 따라서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 발생◁ 광주사태는 10ㆍ26 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보고를 들은 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읍니다. ▷광주참극 상상 못해◁ 당시 광주 일대는 중앙정보부 보안사 경찰 등의 정보기관들이 모두 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정보책임자였던 본인도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하였고 현지 주둔부대인 광주계엄분소에서 계엄사에 보내는 보고를 통해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극히 혼미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부재의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보안사에서는 서울에 있던 광주출신의 한 장교가 자진해서 현지에 잠입,단편적 정보를 계엄사를 통해 보내오기도 하고 또 당시 보안사의 간부를 현지로 실정 파악을 위해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가지로 정확한 상황판단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본인은 무력진압에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으며,시민을 상대로 한 사태수습을 군 작전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정보책임자로서의 의견을 계엄사의 지휘관들에게 전달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커다란 인명피해를 낸 이 비극적 사태의 원인에 대하여 본인은 무어라 한두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당시 계엄하에서 광주사태 이전에 서울 등지에서도 각종의 시위가 있었으나 평온을 되찾은 반면 유독 광주에서만 그러한 비극이 발생했던 이유는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 수 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군부대 파견ㆍ작전◁ 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이동 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으며 당시의 계엄사령관 이희성장군은 그분의 강직한 개인적 성품으로 보아도 지휘선상에 있지 않은 본인이 군작전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본인이 파악한 바로는 공수부대는 5ㆍ18계엄확대조치의 일환으로서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대전 전주 지역에도 파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병력을 광주 전주 대전에 각각 3백여명 규모의 일개 대대씩 파견하였고 서울지역 8개 대학에도 6개 여단병력 9천6백여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계엄군의 증강은 광주지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광주지역에 특별한 상황을 예상하여 투입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현지 지휘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파견 배속했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군지휘의 이해부족에서 제기된 의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 배속이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서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시의 현지 지휘관이 군 경력상 특수부대에 대한 지휘경험이 전무하여 원활한 작전수행에는 차질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해가 갑니다만 배속된 부대가 현지 지휘관의 지휘통제에 불응했다는 주장은 군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본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자위권행사문제◁ 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이 되며 현지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판단에 따라 제한적으로 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당시 위급한 상황에 처한 현지 지휘관들이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으나 상급사령부나 계엄사령부 등의 군 고위층에서는 신중론이 우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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