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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상황 1]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황 2] 1950년 9월 28일 일몰 직전.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수복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제1성은 이렇게 다급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KBS 아나운서 위진록(85)씨.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 11월 도쿄에 자리한 유엔군총사령부(VUNC)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의 물줄기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력을 얼핏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월남한 뒤 경성역(서울역)에서 역부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고 만 19세때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창기의 현장 일선에서 활약했다.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이승만 대통령의 수행기자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지켰던 것이다.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위씨가 잠시 귀국했다.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규칙적인 생활과 생각, 그리고 책을 읽고 독후감을 꾸준히 기록한다. 아마 늙지 않는 비결인 것 같다”면서 웃는다. 주로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번역물도 읽고 영어와 일어로 된 책도 읽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최근 펴낸 자서전도 그동안 열심히 메모해둔 결과물이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이민길에 올라 LA 해변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지금은 현지에서 수필가, 방송인,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수필집과 음악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을까. 한창 전쟁중인 1950년 11월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 방송 아나운서로 가게 된 배경부터 설명한다. “연희송신소(당시 고양군 연희면)에서 기거하면서 방송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도쿄의 맥아더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담당자 매튜 중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며 2차대전때 종군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와 목소리가 아주 닮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국전쟁도 이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달정도 도쿄에 가서 방송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고 대답했지요.” 맥아더 사령부의 심리작전국은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 방송국을 창설하고 NHK 방송망을 통해 이미 방송을 시작하고 있던 터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보내는 별도의 송신소가 작동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송은 NHK 본사의 여러 스튜디오를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방송은 전쟁에 관한 뉴스가 최우선이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소식,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의 내막, 김일성이 소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해설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방송원고는 모두 미국인이 작성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서울을 떠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아군 수중에 있던 평양에 공산군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평양시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피난하는 모습을 보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흥남 지역에서 미 해병1사단의 해상탈출 등을 보도하면서 한달 예정이었던 체류기간이 무기한 연기 됐지요. 그렇게 도쿄에서 8년을 보낸 뒤 오키나와 사령부로 옮겨 14년을 더 근무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식구들과 미국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일화를 떠올린다. 1968년 가을 한달동안 종군기자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이때 비둘기 부대가 주둔한 나트랑 외에 맹호와 청룡부대 주둔지 등을 두루 방문했고 사이공에서는 주월한국군 채명신 사령관과 수차례 만나기도 했다. 또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면서 한국군의 파병은 계속됐다. 자연스럽게 오키나와는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을 위해 위문차 오가는 연예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 됐다. 이때 길옥윤과 패티 김 등 여러 연예인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얘기를 다시 ‘6·25 남침 제1성’으로 돌렸다. 방송국장의 지시로 38선상(경의선의 한 중간역)에 있는 여현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10일이었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38선이 보이는 지점에 중계차를 세우고 38선을 오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을 했지요.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6월 24일 밤 저는 아나운서실 숙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후배 아나운서와 11시에 야간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방송순서를 점검하고 숙직실로 쓰고 있는 제2 스튜디오로 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퉁탕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새벽 5시 10분이었습니다. 방송국 수위와 육군대위가 스튜디오에 급히 들어왔던 것이지요.” 육군대위는 종이 한장을 내밀면서 즉시 방송하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종이에는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모두 원대에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송시작이 6시 30분이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상부의 허락 없이 방송할 수 없다고 했다. 잠시후 민재호 방송국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확인한 뒤 원고를 급히 작성하고 제1보를 내보냈다고 위씨는 회고했다. “서울수복이 됐는데도 그해 6월 말에 이미 행방불명되거나 처형됐다고 알려진 선배 아나운서들의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온 방송요원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도운 아나운서들은 그들과 함께 도주하듯이 북쪽으로 갔고 자백서를 쓰고 포섭당해 그들 밑에서 방송한 아나운서들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며 살아남은 그는 동료와 선배들이 하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한동안 연희송신소에서 기거하면서 열심히 방송을 하게 된다. 이국땅에서 60여년을 살고 있지만 그 기억의 편린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2남 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군청 토지측량기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42세때 늑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평안북도 선천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들 생각이었지만 돈이 없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좋은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합창과 독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교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본 연주를 했다. 아울러 문학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학교생활에서 일탈, 모란봉 주위를 쏘다녔다. 결국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발각돼 3학년때 퇴학당했다. 이후 형이 있는 남신의주역으로 가서 역부로 생활한다.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 등의 문학서적은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온 그는 낙원동 근처의 한 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경성역의 역부로 취직한다. 이어 해방이 되면서 누이가 종로2가 근처에 술집을 열자 외상값 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게 된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극 연구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다. 그후 2주일 만에 방송드라마에 출연한다. 당시 동기생으로는 장민호, 민구, 송영란, 윤길숙 등이었다. 같은 해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하면서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20세기 격동기를 한 마리 늑대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직도 내 마음의 눈물 줄기에는 희망의 꽃망울이 살아 있다”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마르케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교 랍비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말처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아니냐”라고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위진록은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개성, 평북 선천 등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3학년때 중퇴했다. 남신의주역 역부, 서울의 한인회사, 일본광고회사 대리점 등의 사환을 거쳐 서울역 역부로 일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했다. 장민호, 민구, 조남사 등과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해 만 19세로 최연소 아나운서 기록을 세운다. 1948년 KBS 제1회 방송극 대본 공모에 입선했으며 김구 선생의 장례식 중계 등 격동기의 방송 일선에서 활약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9월 28일 서울수복의 제1보를 방송한 아나운서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해 11월 일본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파견돼 22년동안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했다. LA에서 햄버거 장사 10년, 서점 등을 경영하면서 동네 신문을 발행했다.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필집 ‘하이! 미스터 위’(1979년), ‘잃어버린 노래’(1993년), ‘낙타의 속눈썹’(1997년),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년), ‘클래식, 내마음의 발전소’(2011년) 등이 있다.
  • 기자가 직접 본 중국판 ‘아빠어디가’…한국과 다른점?

    기자가 직접 본 중국판 ‘아빠어디가’…한국과 다른점?

    중국판 ‘아빠어디가’(爸爸去哪儿)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성동일 부자(父子), 이종혁 부자, 김성주 부자, 윤민수 부자, 송종국 부녀(父女)가 출연한 MBC의 간판예능인 ‘아빠 어디가’의 포맷을 정식으로 수입해 제작한 중국판 ‘아빠어디가’는 지난 11일 첫 방송에서 1.46%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다. 이날 방송 배우 겸 가수인 린즈잉(임지령)부자, 전 다이빙 선수인 텐량 부녀, 감독 오아위에룬 부녀, 모델 장리앙 부자, 배우 궈타오부자 등이 출연해 난생 처음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기자가 직접 본 중국판 ‘아빠어디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예상한 것처럼 한국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막형태와 효과음까지도 한국판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기도 했다. 하지만 1시간 30분 분량 전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니 중국판만의 남다른 특색이 엿보였다. ▲한국판과 다른 점 1. 역시 스케일 중국판 ‘아빠어디가’ 첫 회는 등장인물들의 소개와 함께 첫 여행을 준비하는 가족들의 집에서 시작됐다.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수도 베이징 외곽에 있는 시골마을인 링수이춘(靈水村). 시골마을이라고는 하나 그 규모는 한국판과 사뭇 달랐다. ‘사합원’(쓰허위안, 四合院, 베이징의 전통적인 건축양식. ‘ㅁ’자 형태에 가운데에 마당을 두고 본채와 사랑채 등 4개 건물로 둘러싼 구조) 형식의 집들은 한국판 초기에 등장한 작고 아기자기한 초가집과 달리 역사와 전통을 고스란히 담은 ‘포스’가 느껴졌다. ‘가장 나쁜 집’의 수준도 달랐다. 나무판자 두 개로 이어진 재래식 화장실은 기본, 아이 손바닥보다 큰 거대한 ‘거미 시체’가 누워있는 집이 등장해 흉가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작은 벌레에 놀라 울던 윤민수의 아들 윤후가, 혹은 초반 ‘불운의 상징’이었던 김성주의 아들 김민국이 이를 봤다면 충격과 울음으로 촬영이 중단될 수도 있을법한 수준의 집이었다. ▲다른 점 2. 아이들의 연령대 한국판 ‘아빠어디가’는 10세 김민국, 8세 성준, 윤후, 7세 송지아 이준수 등 비교적 다양하고 ‘높은’ 연령대의 아이들이 출연하지만 중국판은 대부분이 5세 전후다. 가장 나이가 많은 궈타오의 아들 샤오스토우는 2007년생으로 올해 6살. 나머지 아이들도 5세 2명, 4세 2명으로 전반적으로 어린 편이다. 때문에 분위기는 한국판 ‘아빠어디가’ 형제편과 사뭇 비슷하다. 김민국의 동생 김민율이 형·동생과 다른 귀여움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한 것처럼 때 묻지 않고 순순한 모습이 화면 내내 이어진다. 한국판 아이들보다 떼를 쓰는 모습이나 우는 모습이 자주 비춰지는 것도 이 때문. 임지령의 아들 키미(4)가 흉가에 ‘당첨’되고 울음을 터뜨리자 아빠는 아들을 안고 ‘잘 지낼 수 있다’며 달랜다. 그러자 키미가 “하오”(好, 우리말로 ‘알았다’라는 뜻)라고 말하며 여전히 울먹이는 모습에서는 이미 훌쩍 커버린 한국판 아이들과는 또 다른 귀여움을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배우, 운동선수, 방송인 등으로 구성된 한국판 아빠와 달리 중국판 아빠들은 감독과 모델 등이 추가돼 더욱 다양한 직업군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들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어른들이 일명 ‘소황제’라 부르는 중국의 아이들을 통제하는 모습, ‘소황제’ 아이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또다른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 등을 통해 우리와는 다른 중국의 교육문화와 가정환경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국판 ‘아빠어디가’가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시에 지나치게 호화로운 캠핑장비와 협찬 의상 등으로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지적을 받았던 만큼, 중국판이 이와 비슷한 논란을 비껴갈 수 있을지 역시 관심이 쏠린다.   한편 지난 18일 방송된 2회 시청률은 전편보다 0.21%포인트 상승한 1.67%를 기록하며 인기를 입증했다. 3회의 여정지는 사막으로 알려져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현지에서도 중국판 ‘아빠어디가’가 소위 대박이 날 것으로 예측하는 분위가 지배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옛 책들이 말한다, 나 아직 안죽었어!

    옛 책들이 말한다, 나 아직 안죽었어!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장유승 지음/글항아리/364쪽/1만 8000원 고서(古書)란 말 그대로 오래된 책이다. 예로부터 인쇄술이 발달한 우리나라에는 옛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고서가 많이 남아 있다. 진귀한 고서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한다.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자취를 감춘 것도 많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고서들이 전해 온다. 하지만 요즘에는 어떨까. 몇십년 전만 해도 웬만한 집에서는 고서 한두 권쯤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드물다. 바쁜 현대인들은 이사를 가거나 짐을 옮길 때 미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고서들을 쓰레기 취급하기 십상이다. ‘섭치’라는 순우리말이 있다.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 변변하지 아니하고 너절한 것’을 뜻한다. 흔하고 ‘싼티’ 나는 고서들이라는 뜻도 있다. 바꿔 말하면 희귀한 고서가 아닌 쓰레기 고서인 셈이다. 신간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은 한 인문학자의 섭치 정탐기다. ‘반란’이라는 말이 흥미롭다. 진귀한 고서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반면, 쓰레기 고서는 지금도 찢기고 불타고 썩고 버려지고 있지만 조금은 나은 대접을 해달라는 뜻에서 책 제목을 정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총 15장으로 이루어졌고 각 장마다 책 한 권의 입수경로, 역사적 발화자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담고 있다. 고서더미에서 당시 사회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쓰레기 고서’들을 선정해 그들의 역사를 자술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백미고사’(白眉故事)는 중국의 고사성어를 분류해 엮은 사전으로 조선선비들에게 전자사전과 같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최대 관심사는 과거시험이었다. 제목이 주어지면 그에 걸맞은 글을 지어 내야 했다. 그런데 한문 글쓰기는 전고(典故·전례와 고사)를 많이 인용해야만 했다. ‘백미고사’는 바로 그러한 쓰임새를 충족시켜 주던 조선후기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밖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써야 하는 편지 작성법을 모은 ‘척독요람’(尺牘要覽), 로맨스 소설 ‘숙영낭자전’, 가정용 의학백과사전 ‘의학입문’ 등 제각각 쓰임새가 다른, 포켓북에 가까운 대중용 고서들을 한데 모아 소개해 고전 지식을 다양하게 맛보게 한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씨줄날줄] 관광경찰/박현갑 논설위원

    ‘Tourist Police.’ 우리말로 관광경찰이다. 그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관광경찰 발대식이 있었다. 101명의 한국관광 지킴이들이다. 이들은 명동, 이태원, 인사동, 청계천 등 서울시내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를 순찰한다. 업무는 관광지 범죄예방 및 기초질서 유지, 외래 관광객 대상 불법행위 단속·수사, 외래 관광객의 관광불편사항 처리 등이다. 외래 관광객들은 바가지 요금이나 환불 거부 등 불합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가까이 있는 관광경찰에게나 관광 안내전화(1330)로 신고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관광경찰은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로 구성됐다. 경찰청은 내년에는 부산, 제주, 인천 등지로 관광경찰 도입을 확대할 예정이란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관광객이 1100만명을 돌파했다. 외래 방문객이 500만명이었던 2000년에 비해 곱절 이상 늘어난 셈이다. 2015년 무렵엔 1500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우리나라도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관광대국처럼 관광을 산업자원으로 활용한 기본 토대는 구축된 셈이다. 그런데 외국 관광객들을 ‘봉’으로 인식하는 수준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2009년 468건이었던 외국 관광객 상대 범죄는 지난해엔 897건으로 늘었다. 지난 5년간 외래 관광객 불편신고 중 환불 거부, 가격표시제 미실시 등 쇼핑과 관련한 불편신고도 해마다 증가했다. 2008년 23.6%에서 2012년에 34.7%로 늘었다. 택시 바가지요금, 콜밴 불법 영업 등 교통 불편사항도 해마다 전체 불편신고의 15~ 20%를 차지한다. 이러한 불편사항은 우리나라 관광에 대한 만족도를 떨어뜨리고 결국 재방문을 기피하게 하는 요인이다. 관광경찰은 이런 연유로 도입됐다. 관광산업은 ‘굴뚝 없는 산업’이다. 또 외화획득, 고용창출, 투자촉진 등 다양한 파급 효과를 유발하는 고부가가치산업이다. 게다가 사람의 관심사가 물질적 풍요뿐만 아니라 문화, 레저 등 정신적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더 주목받고 있다. 교통과 정보통신 발달로 관광산업을 둘러싼 각 국 간 경쟁도 치열하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1985년부터 관광경찰을 운영해 오고 있다. 태국의 휴양지 푸껫에서도 관광경찰이 ‘1155’라는 관광객 안내전화로 관광객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5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만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사회적 자산은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하다. 관광경찰이 코리아 이미지도 개선하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작은 주춧돌이 되기를 바란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국감 말말말] “7개월간 한 일 MOU 체결 뿐…미래부를 ‘뭐유부’로 바꿔라”

    [국감 말말말] “7개월간 한 일 MOU 체결 뿐…미래부를 ‘뭐유부’로 바꿔라”

    지난 14일부터 시작된 국회 국정감사 현장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증인들과 치열한 논리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촌철살인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로는 엉뚱하고 황당한 발언도 있었다. 국감 첫날인 14일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의 미래창조과학부 국정감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국정과제인 창조경제가 도마에 올랐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7개월이 지나도록 미래부가 한 일이라고는 양해각서(MOU) 체결밖에 없다”면서 “MOU 창조부로 이름을 바꾸거나 MOU를 우리말로 읽은 ‘뭐유부’로 바꾸라”고 비꼬았다. 기초연금 논란이 쟁점이 된 보건복지위의 보건복지부 감사에서는 엉뚱하게도 대통령기록물 관련 발언이 나왔다. 이언주 민주당 의원은 “기초연금 관련 청와대 보고 자료를 요구했는데 원본이 아닌 발췌본으로 (자료가) 왔다. 원본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이영찬 복지부 차관은 “청와대에 보고하면 대통령기록물로 갈 수 있어서 드리지 못한다”는 군색한 논리를 폈다. 교육문화체육관광위의 교육부 국감에서는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이 “북한 책이 나오니 난리네”라고 혼자 읊조리다 사과까지 하는 소동이 있었다.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이 북한 책을 내보이면서 일부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를 비판한 데 대해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공감의 뜻을 나타내자, 김태년 민주당 의원 등이 “여당 의원이 (검정기준을) 지적한 것은 인정하고 야당 의원의 것은 하나도 인정 안 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박 의원의 ‘북한 책’ 발언이 나왔고, 결국 박 의원은 사과했다. 환경노동위의 고용노동부 국감에서는 장하나 의원이 신계륜 환노위원장에게 “앞으로 장관 대신 차관에게 물어도 되나요?”라고 묻자 고용부 공무원들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학자 출신인 방하남 고용부 장관에게 롯데마트 등 유통업체 근로실태 조사 여부를 묻던 도중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고용부 관료 출신인 정현옥 차관에게 묻는 게 낫겠다는 취지였다. 신 위원장은 “국장이든 차관이든 알아서 물으시라”고 말했고 장 의원은 정 차관에게 질의했다. 15일 안전행정위의 경찰청 국감에서는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과 관련,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와 사적인 관계였던 수서경찰서 신모 경위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국정원 여직원 김씨와 어떻게 만났느냐”는 진선미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신 경위는 “소개팅해서 만났다”고 밝혔다. 신 경위는 김씨와 국정원 상급자들 간 대책회의에 참석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대책회의와의 연관성은 부인했다. 부처종합·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문화마당] 언어의 권위/김재원 KBS 아나운서

    [문화마당] 언어의 권위/김재원 KBS 아나운서

    매년 10월이면 마지막 밤을 노래하는 가수를 기억하듯, 한글과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심지어 KBS 아나운서실로 우리말 상담전화도 더 많이 걸려온다. 우리말을 잘하는 것으로 먹고살고, 게다가 한국어를 연구하는 팀장을 맡고 있기에 삶의 대부분을 언어의 힘을 생각하며 산다.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는 누군가의 말을 사람들이 안 믿어준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권위’ 때문이리라. 권위는 제도, 이념, 인격, 지위 등이 가치의 우월성을 공인시키는 위력이다. 궁극적인 근거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따라서 인간 집단에는 여러 권위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인정하는 권위를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일단 언어의 ‘문자적 권위’를 보자. 언어는 공동체의 규범인 만큼 화폐처럼 표준화가 필요하다. 예부터 언어의 권위는 사전에서 찾았다. 국립국어원 같은 기관에서 권위를 갖고 있었다. 표준어라는 이름하에 맞춤법 규정으로 얽어매던 언어의 권위는 슬슬 그 위엄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개인이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권위를 내세우기도 하고, 대중이 언중의 이름으로 신조어를 만들기도 한다. 방송사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의견이나 청소년들의 통신언어를 보면 권위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이다. 진짜 얘기하고 싶은 언어의 권위는 ‘인격적 권위’이다. 말하는 사람의 성품과 인격에서 나오는 인격적 권위는 그 사람의 영향력과 진정성, 신뢰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국가조직 총수의 변명을 믿어 주지 않는 사회 풍토 속에서 그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대중에게는 사랑받지만 동료에게는 그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방송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성의 가면을 쓰고 시청자들에게는 사랑받을지언정, 동료나 선후배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언어의 권위는 그야말로 안팎이 천지차이다. 대중은 모르는 그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토스이다. 언어의 권위는 세계 속에서 ‘문화적 권위’를 갖는다. 언어는 지구촌 사람들을 연결하는 힘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지도가 현재 사용하는 언어지도인 것을 보면 언어는 국가의 힘이다. 한 나라의 최대 수입원이 되는 상품이기도 하고,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는 자산이기도 하다. 언어의 영향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과 문화지배력을 반영한다. K팝과 한류드라마 열풍으로 우리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세종학당 보급은 반가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 언어의 문화적 권위가 높아지는 것이리라. 드라마 한류로 인한 한국어의 문화적 권위 상승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주인공이 부인을 두세 명씩 두는 드라마를 보노라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일부다처제 국가로 오해할까봐 겁나기도 한다. 권위의 왜곡이다. 어느 연극계 원로에게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공연계 풍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나가 있지”라는 문장으로 말문을 연 그 어른은 이렇게 답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 있고, 권력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은 늘 공짜표를 원한다니까.” 공짜표를 구하는 그들은 자신의 언어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있다. “돈 있고, 권력 있고, 명예 있는 사람들은 늘 공짜표를 원한다니까.” 공짜표를 구하는 그들은 자신의 언어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권위는 이미 땅바닥에 있다.
  • [데스크 시각] 21세기 문체반정/최여경 정책뉴스부 차장

    [데스크 시각] 21세기 문체반정/최여경 정책뉴스부 차장

    시작은 ‘애정하다’였다. 최근 지인들과 가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던진 한마디가 정조 얘기로 이어졌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가 애정하는 분들과…”라는 말에 지인이 “정조를 개혁 군주라고 하잖아”라고 운을 뗐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요상한 말들이 유행했는데, 이런 걸 다 잡문이라고 본 거야.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그런 문체로 쓰였거든. 우리 말과 문장이 있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이상한 표현을 써대니 열을 받아, 안 받아. 그래서 우리 문체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증학과 패관소설 같은 소설 수입을 금지해 버린 거지. 이게 문체반정이야. 딱 요즘 얘기 같지 않아?” 문체반정이 무엇인가. 조선 22대 왕 정조(1752~1800)는 규장각을 만들어 문예부흥을 이끌고, 신분 차별의 벽을 허물었다. 그런데 문체만큼은 정통을 강조했다. 당시 박지원과 같은 진보적 문인들이 청나라 문물에 흥미를 갖고 고답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난 패사소품체를 즐기자 정조는 문풍을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문체반정책을 펼쳤다. 사상의 발로인 글쓰기까지 보수적인 시각을 갖다 대니 사상통제나 문화억압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문체반정에 대해서는 학계의 해석이 여럿이다. 개혁세력 탄압 정책이라는 시각도 있고, 지배층인 노론 세력 견제책, 남인을 향한 천주교 탄압을 피하기 위한 방책 등의 풀이도 존재한다. 배경이야 어찌 됐든 중국 학문에 경도된 이들을 향한 날 선 비판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뜸 거론된 18세기 조선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이 떠올랐다. 중국 문체에 쏠린 18세기 조선과 영어에 잠식된 오늘의 한국이다. 우리는 영어를 잘못 쓰면 큰일 날 것처럼 배우면서도 정작 우리말에는 옳고 그름에 참 관대하다. 가장 심각한 오용은 ‘지다’이다. 한 문화재단의 기자간담회가 기억난다. 이 재단 대표는 “사진에서 보여지는”, “호응을 얻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등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새로 뚫린 고속화도로에는 이런 표지판이 버젓이 붙어 있다. ‘이 차로는 버스전용차로로 운영되어지는 차로입니다.’ 피동에 수동을 더한,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너무’라는 부사도 남발한다.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도 좋든 나쁘든 무조건 쓴다. 너무 좋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아주, 몹시, 무척, 매우 등 단어가 다양한데도 다 ‘너무’를 갖다 댄다. 국어를 똑바로 사용해야 하는 언론인조차 틀린 문장을 쓰기 일쑤다. 특히 정확한 국어를 구사한다는 아나운서들의 말에도 잘못된 표현이 첨가되고 정작 장단음은 사라졌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차 국어발전 기본 계획’을 보면 ‘품위 있는 언어생활을 위한 국민의 창조적 국어능력 향상’이라는 과제가 담겨 있다. 청소년 언어문화 개선도 중요 사업으로 꼽아 놓았지만,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오히려 비속어와 욕설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늘었다. 지난 9일 한글날 정부가 국어 사용 장려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벌써 정부 부처 자료에는 콘퍼런스, 뮤직페어, 힐링 등 영단어가 난무한다. “가장 과학적인 한글”, “우리말이 발전해야 문화가 융성한다”는 말은 며칠 만에 공허한 메아리가 됐다. 국어 훼손의 현실로 따지자면 지금은 21세기형 문체반정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cyk@seoul.co.kr
  • [생명의 窓] 한 처음에 말이 있었다/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생명의 窓] 한 처음에 말이 있었다/구미정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시작 글이다. 한 처음에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곧 하나님이란다. 옛 사람들은 이렇듯 말을 신성시했다. 인간에게 말이란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글자는 훨씬 나중에 탄생했다. 그런데 글자 역시도 그렇단다. 지난여름 중국 허난성 은허박물관에서 직접 보았다.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진 고대 상형문자들이 인간의 숱한 물음들을 안고 춤추듯 신에게로 올라가는 황홀한 모습을.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겼던 일제강점기로 시간여행을 해본다. 어째서 일제가 그토록 강포하게 조선어 사용을 불허했는지 알 것도 같다. 조선의 정신, 곧 형체로서의 국가 존망과 상관없이 영원에 잇대어 살아 꿈틀대는 민족의 얼을 강탈하겠다는 거다. 학교 교실에서 일본말로 가르치지 않고 꿋꿋이 조선말을 사용한 죄로 교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된 김교신 같은 이가 끝내 지키고자 한 것도 불멸의 민족혼이었으리라. 조선시대의 주요 소통 수단은 한글이 아니라 한자였다. 아무리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널리 반포하였다고 해도 중화주의에 물든 사대부 양반들의 관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문과 한글은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어서 지배 엘리트를 자임할수록 한문에 집착했다. 이처럼 한글이 천대받던 시절에 기독교가 한글을 적극적인 포교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1903년 5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부인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한글 글짓기다. 기생도 아니고 여염집 아낙네들이 낯선 사내들 앞에서 글을 짓고 발표한다니, 그 자체가 후천개벽에 해당할 문화 충격이 아니었을까. 과거시험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여성들이 야소(예수) 덕분에 사람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했겠다. 한글을 당당히 부활시키기는 개혁파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서재필은 총칼을 통한 개혁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신혁명에 돌입했다. 그 수단이 한글이다. ‘독립신문’은 “조선 전국 인민이 상하귀천 없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사용했는데, 그에게 한글은 노예화된 정신을 일깨우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여 한글학자 최현배가 한글 ‘가로쓰기’를 주창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겠다. 세로쓰기로는 영영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갈 평등한 시민 주체가 나올 수 없다는 천재적 영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용상 위에 있거나 나뭇잎 지붕 아래에 있거나 다 같은 사람”이기에 그렇단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옥살이를 할 때도 그를 지킨 것은 바로 이 신념이었다. “현대는 민중의 시대요, 한글은 민중의 글자”이니, 봉건시대의 유산인 세로문화에 갈음하려면 한글로 가로문화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변치 않는 믿음이었다. 단언컨대, 이 믿음의 밑절미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권 선언, 곧 천하 만민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렷다. 무엇이든 흔하고 쉬우면 귀히 대접받지 못한다. 이 시대의 한글이 딱 그 짝이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쓰게 된 데는 지난한 역사의 투쟁이 있었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중국말에 이어 일본말과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된 우리말이 다시 미국말에 밀려 수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말이 곧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우리말을 이리도 박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짓밟는 행위이겠구나. 우리말의 모음과 자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고, 또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수단이라고 가르치신 유영모 선생이 지하에서 통곡하시겠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한강 왜, 어떻게 달라졌나 옛 한강은 오늘의 한강과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달라졌을까. 한강은 한성 백제가 위례(풍납·몽촌토성)에 터 잡은 이후 2000년 동안 한민족의 젖줄이었다. 조선의 500년 도읍지 한양(한성부)의 식수원이자 하수구였으며 명승지였다. 한성부를 도읍지로 정하게 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큰 축이었으며 어느 한 곳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풍광을 뽐냈다. 조선시대 한강의 이름은 경강(京江)이었다. 서울의 중심부인 삼전도(송파)에서 양화진(합정) 구간을 경강이라고 했다. 그중 남산 기슭을 흐르는 강을 한수(漢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한강이 됐다. 한(큰) 가람(강)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그런 한강이 불과 100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 근대기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인식과 쓰임새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난리를 막아 보겠다는 치수(治水)에 대한 집착과 인구의 광적인 서울 집중에 따른 택지 제공, 교통로의 필요성이 개발을 불렀다. 게다가 휴전선이라는 인공 장애물이 한강의 서해 출구를 가로막으면서 안보적 측면도 겹쳤다. 아라뱃길을 새로 뚫은 까닭이다. 한강의 변화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섬(河中島)이 사라지면서 모래톱과 습지도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강이 마치 활주로 같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중세도시를 흐르는 크고 작은 자연하천과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매년 1만 척을 헤아리는 황포 돛배가 사람과 물자를 싣고 광나루(광진), 삼밭나루(삼전도), 뚝섬나루, 한강나루, 동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노량진), 양화나루를 오갔지만 흥청거리던 뱃노래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29개의 다리가 덩그러니 놓였고 나루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골재 채취용으로 폭파했으나 20년 만에 되살아난 밤섬(율도)을 제외하고 강폭이 최대 900m에 이르는 넓디넓은 강이 텅 비었다. 여울과 소(沼)마저 사라져 생명력과 자정력을 잃었다. 강변에 60㎞에 이르는 콘크리트 호안이 일사불란하게 펼쳐진 곳이 오늘의 한강이다. 한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한강이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시대와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시기에서 출발한다. 또 1392년 조선 건국,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과 이후도 의미 있다. 서울 숭례문 입구까지 물에 잠기게 한 을축년 대홍수는 땅밑에 숨었던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를 드러나게 했지만, 제방 구축용 골재로 쓰려고 선유봉(선유도)을 폭파하는 빌미가 됐다. 결정적인 변화는 1967년 제1차 한강개발과 19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몰고 왔다. 1차 한강개발은 여의도를 육속화하면서 서울의 경계를 사대문 안에서 남산 성곽을 넘어 한강변까지 확장했다. 여의도개발은 한강개발의 출발점이자 강남개발의 전초기지였다. 아파트공화국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여의도 제방을 쌓으려고 밤섬과 선유봉을 폭파한 원죄가 있지만 한강 상류에 팔당댐을 만들어 한강 수량을 조절했고, 한강 제방을 완성해 서울 시민들을 물난리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여의도, 동부이촌동과 반포지구에 대단위 아파트 택지를 제공했으며 서울은 이때부터 사대문 중심 일핵도시에서 다핵도시로 나아갔다. 한강 제방은 워커힐호텔~김포공항을 잇는 강변북로를 부산물로 남겼다. 동호대교 아래 저자도는 압구정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데 온몸을 바치고 사라졌다. 제2차 한강개발 이후 오늘의 모습이 갖춰졌다. 홍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맨살을 드러낸 채 가늘게 흐르던 한강이 365일 물로 가득 찬 사실상의 호수가 된 것이다. 두 개의 수중보가 한강을 수심 2.5m의 인공호수로 만들었다. 잠실대교 아래 잠실수중보와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가 물을 가두고 있다. 상전(桑田) 잠실섬을 강남 쪽으로 인위적으로 붙이면서 한강의 본류를 바꿔 놓았다. 이때 삼전도 나루 앞을 흐르던 한강 물길은 석촌호수가 됐다. 강남 쪽 한강 제방에는 올림픽대로가 개설됐다. 2007년 한강 복원을 외쳤지만 바뀐 물길과 사라진 섬, 습지와 백사장 그리고 파괴된 봉우리와 누정은 되찾을 수 없었다. >>한강의 옛 모습은 어땠나 옛 사람들은 한강을 강이 아니라 호수로 여겼다. 동호(東湖), 서호(西湖), 남호(南湖) 등 3개의 호수로 나눠 부르면서 풍류를 즐겼다. 강물이 하중도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굽이치는 장면이 그들의 눈에는 호수처럼 보였으리라. 동호에는 저자도와 독서당, 입석포(선돌개), 두모포(두뭇개), 제천정과 천일정(한남동의 정자), 압구정 같은 명승지가 즐비했다. 동호대교라는 지명이 동호에서 유래했다. 서호는 용산으로부터 마포와 선유봉, 양화진 잠두봉(절두산)을 아우르는 지역을 일렀는데 서강(西江)이라는 지명도 널리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에 ‘서강조박’(西江漕泊)이 포함될 정도였다. 남호는 용산강의 다른 이름이다. 여의도와 밤섬을 품고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을 조망할 수 있는 동작진과 노량진 구간이다. 옛 한강은 산수화와 지도를 통해 상상할 도리밖에 없다. 그림이라고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사진 뺨치게 정밀한 진경(眞景) 산수화여서다. 실경(實景) 산수화라고도 한다.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굽이치는 곳에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하중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와 바람에 나부끼는 수양버들, 갈대가 지천인 그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개화기 이후 선교사들이 남긴 낡은 사진과 개발기의 각종 사진을 통해 20세기 이후 한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강수욕을 즐기던 백사장, 나룻배와 나루터, 얼음 캐는 채빙(採?)과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 같은 한강의 풍광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에 인파가 붐비겠는가. 중국이나 일본 사신들에게 한강 유람은 필수 코스였다. 대개 동호변 제천정에서 시작해 저자도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서호쪽 양화진으로 내려오면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제천정은 왕실 소유의 정자로 서울에서 경치 좋은 열 곳(京都十詠) 중 한 곳으로 꼽혔다. 달 구경의 으뜸 명소였다. 사신들은 다녀간 흔적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한강승경 그림을 요청해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한강은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문화공간이자 교류의 장이었다. 18세기 진경 산수화의 대표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에 한강 풍광 수십 점을 남겼다. 저자도는 잃어버린 섬이다. 닥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관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저자도 서북단의 독서당을 그린 ‘독서당계회도’와 저자도 남단의 압구정을 그린 ‘압구정도’, 저자도 북단의 살곶이다리를 그린 ‘진헌마정색도’를 통해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1922년에 인쇄된 실측지도 ‘경성도’에 등고선과 초지 및 모래벌판이 표시돼 있다. 시인들은 저자도를 한강 유람의 백미로 여겼다.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 물굽이 언덕을 두르고 있으니 흰 모래 갈대 숲 그 경치가 매우 좋다”(15세기 정인지가 살곶이다리 인근 낙천정에서 내려다본 저자도의 풍경), “봄꽃이 만발하여 온 언덕과 산을 뒤엎었네”(15세기 강희맹의 저자도도(楮子島圖)의 발문), “봉은사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16세기 심수경이 독서당에 머물던 중 봉은사를 다녀오면서 남긴 글)는 글들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초 저자도는 왕들의 휴식처였다. 태종이 상왕이자 형님인 정종과 낙천정에서 술잔을 나눴고,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떠나는 이종무를 격려하고 환송한 장소였다. 고종 등 왕이 집전하는 기우제 장소 중 한 곳 이었다. 왕실 재산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마(철종의 사위) 박영효 소유였다. 동서 2000m, 남북 885m 길이에 넓이가 118만㎡에 이르는 모래벌판이었다. ‘신선이 노닐던’ 선유도는 섬이 아니라 산이었다. 선유봉은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잠두봉)을 마주 보는 높이 40m의 작은 봉우리였다. 두 산은 나란히 서 있었다. 선유봉은 홍수가 나면 봉우리만 물 위에 떠 있었다. ‘예조낭관계획도’ 등 잠두봉을 그린 16세기 후반의 실경 산수화 10여 점이 빼어난 경관을 보여 준다. 정선은 ‘선유봉’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 등 4점의 그림을 통해 선유봉을 묘사했다. T S 엘리엇은 “역사란 언제나 동떨어진 원인에서 기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파했다. 옛 선비들은 한강을 호수로 미화해 풍류를 즐겼으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한강은 사실상 인공호수로 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joo@seoul.co.kr
  • [길섶에서] 단어의 비밀/문소영 논설위원

    ‘달콤한 마(麻)’라는 뜻의 한자어 감저(甘藷)는 어떤 식품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17~18세기에는 감자나 고구마를 뜻했다. 16세기 이전에는 마(麻)를 표현한 한자였다. 1925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에 나오는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당시 서울말 또는 표준어로는 고구마도 감자라고 불렀는데 평양 출신인 작가가 혼용한 것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춘천 출신의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에도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대목이 나온다.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는 표현이다. 지구온난화로 난리인 지금도 ‘붉은’ 동백꽃의 서식 북방한계선은 충청남도를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김유정의 동백꽃은 무엇인가. 봄이면 김유정 생가에 지천인 생강나무로, 강원도 사투리라고 한다. 울릉도 호박엿도 사실은 약리작용이 있는 후박나무 껍질을 삶아서 만든 후박엿에서 변이된 것이다. 우리가 관성적으로 쓰는 말에 이렇게 다양한 비밀이 감춰져 있다니…. 그동안 맥락도 모르고 고운 우리말들을 써온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조어(造語)의 기술/최광숙 논설위원

    ‘오도이촌’(五都二村)이란 일주일 중 닷새는 도시에서 생활하고, 이틀은 농촌에서 작은 밭을 가꾸며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이런 말도 있어요’라는 코너에서 알게 된 신조어다. 이 코너는 국립국어원이 최근 생겨난 새로운 말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인 ‘웃프다’라는 말도 있다. 재미가 있어 웃기면서도 마음이 아프다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언어는 시대와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요즘 유독 신조어가 대세인 것 같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새누리당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 개혁을 한다며 ‘손톱 밑 가시 제거 특위’를 구성했는데 ‘손가위’로 불린다. 민주당은 약자의 편에 서서 을(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한다며 ‘을지로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정도 신조어라면 이해가 되지만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신조어들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좀처럼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갠소’(개인 소장), ‘개드립’(순간적인 재치),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다), ‘꿀잼’(매우 재미 있음)의 뜻을 아는 기성세대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젊은 세대에게는 이런 말들이 표준어인지 몰라도 기성세대들에게는 소통의 단절을 가져다 주는 언어 파괴로 느껴질 뿐이다. 어디 신조어뿐인가. 일본어와 같은 외래어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젊은이들이 ‘멋있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 ‘간지난다’ 같은 일본어가 그 대표적인 예다. 배탈이 났을 때 먹는 ‘정로환’의 유래는 ‘러시아 군대를 정벌하러 간 일본군을 위한 약’이라니 충격적이다. ‘출산’도 일본식 한자다. 우리말은 ‘해산’을 쓰는 게 맞다. 우리 헌법 조문 중 약 30%가 일본식 용어라는 지적이 나왔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은 한글날인 어제 법제처의 용어 정비 중 일본식 한자·표현·어투를 기준으로 헌법 조문을 분석한 결과 전체 130개 조문 중 29%인 37개 조문 53곳에서 일본식 용어가 있었다고 밝혔다. 공공기관의 문서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타’(그 밖에), ‘당해’(해당) 등은 일본식 용어다. ‘~없는 한’, ‘~한하여’도 일본어투이기에 ‘~없으면’ 등으로 바꿔 써야 한다고 했다. 헌법은 우리의 얼굴인데 많은 부분이 일본식 용어로 쓰여 있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개헌 작업이 쉽지 않으니 국민의 동의를 얻어 개헌 절차 없이 일본식 용어만이라도 개정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정쟁이나 일삼는 정치권이 이런 일에 열과 성을 보인다면 박수 받지 않겠나.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섹스’(sex)의 순우리말은 ‘니디티’? 네티즌 ‘황당’

    ‘섹스’(sex)의 순우리말은 ‘니디티’? 네티즌 ‘황당’

    ‘섹스’(sex)의 순우리말은 뭘까. 출산장려 시민단체 ‘부부핵교’ 대표 황주성씨는 지난 8일 ‘성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섹스’(sex)에 해당하는 신조어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그 저작권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등록했다. 황주성씨는 한국저작권위원회로부터 해당 신조어의 저작권 등록번호 제C-2013-019964호를 받았다. 황주성 대표가 만든 ‘섹스’(sex)의 순우리말은 ‘니디티’. 이는 컴퓨터 자판에서 ‘섹스’의 알파벳 철자 ‘s’, ‘e’, ‘x’를 한글 2벌식 입력에서 차례대로 치면 나오는 ‘ㄴ’, ‘ㄷ’, ‘ㅌ’에 모음 ‘ㅣ’를 붙인 것이다. 황주성 대표는 ‘섹스’에 해당하는 신조어 ‘니디티’를 만든 이유에 대해 “출산장려를 외치면서도 정작 섹스를 터부시하는 부정적인 문화를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이 같은 신조어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황주성 대표는 “SEX가 원래 나쁜 게 아닌데 한국에서만 금칙어로 지정해놓고 있다”며 “그렇다보니 착한 섹스를 하는 부부들까지 주눅이 들 정도여서 우리말로 만들어보게 됐다”고 밝혔다. 황주성 대표는 “어른들도 말하면서 부끄러워지는 한자어인 성행위, 성관계나 영어인 섹스를 대신할 새로운 순우리말인 ‘니디티’의 저작권 등록이 한글날에 즈음해 이뤄지게 돼 더욱 의미가 있다”면서 “착하고 아름답고 멋진 섹스라면 공공장소에서도 ‘니디티’라고 당당히 말하고 쓰자”고 권유했다. ‘니디티’ 캐릭터도 공개했다. 칼을 치켜든 미녀 요정이다. 칼은 ‘나쁜 섹스, 못된 섹스를 추방한다’, ‘착한 섹스, 멋진 섹스를 방해하는 마귀를 쫓아낸다’를 뜻한다. 황 대표는 “앞으로 니디티 사용 정착 캠페인도 벌일 것”이라며 “일반 국민들은 아무런 제약없이 쓸 수 있지만 저작권이 등록된만큼 이를 상업적으로 쓸 경우엔 민형사상 처벌을 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 네티즌은 “한글로 적혔다고 다 순우리말인가”라면서 “그렇다면 egg의 순우리말은 달걀이 아니라 ‘디히히’냐”라고 황당해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무늬만 한글’ 공문서

    ‘무늬만 한글’ 공문서

    ‘킥오프 회의(착수 회의), 블랙 마켓(암시장), 로컬 푸드(지역 농산물), 스트레스 테스트(금융 안정성 검사)….’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정부 부처와 국회, 사법부 등이 정작 보도자료 등 공문서에는 뜻 모를 외국어 사용을 남발하고 있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려운 외국어 명칭을 붙이면 정책을 과대 포장할 수 있다는 인식이 공직 사회에 퍼져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영어 등 외국어를 한글로만 옮겨 적어 우리말을 훼손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는 지난 4~6월 3개월간 17개 정부 부처와 국회, 대법원이 배포한 보도자료 3068건을 분석한 결과 보도자료 1건당 평균 2.88건씩 국어기본법을 위반했다고 8일 밝혔다. 국어기본법 제14조에는 공문서를 작성할 때 한글을 쓰고 꼭 필요하다면 한글 뒤에 괄호를 표시해 한자나 외국 글자를 함께 적도록 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 측은 “국어기본법 위반을 피하려고 영어 단어를 발음대로 한글로 옮겨 적는 사례가 보도자료 1건당 평균 5.5건씩 발견돼 지난해 같은 조사 때보다 1.6배나 늘었다”고 우려했다. 예컨대 과거에는 영어 알파벳 ‘Risk’(위험 요소)로 적던 것을 한글로 바꿔 ‘리스크’로 적는 사례가 증가했다는 얘기다. 공문서에 외국어를 알파벳과 한자 등으로만 쓰면 국어기본법 위반이지만 이를 한글로 옮겨 적으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어 꼼수를 썼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표적으로 ‘퍼스트 무버’(선도자), ‘패스·페일’(합격·불합격), ‘그린카’(친환경차), ‘수출 인큐베이터’(수출 지원센터), ‘대출 제로화’(없애기) 등은 대체할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영어로 표현한 것들이다. 한글이 ‘이두’(신라시대 때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처럼 변질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정부 부처의 보도자료 등을 검토해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바로잡도록 권고하지만 공무원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고 푸념했다. 한글 전문가들은 공직 사회가 외국어 표현을 고집하는 이유로 ▲과거와 유사한 정책을 새로운 것처럼 포장할 수 있거나 ▲우리말로는 해당 정책 등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 국어학자는 “단순히 거짓 포장을 하려고 외국어 정책명을 쓴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외국어 사용으로 정책 내용이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정인환 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은 “영국에서 한때 공문서를 어려운 단어로 쓴 탓에 에너지 빈곤층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얼어 죽는 일이 있었다”면서 “이후 영국에서는 쉬운 말 쓰기 운동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정부 부처가 우리말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는 경향이 있어 대통령 직속의 한국어위원회 설치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한글 세계화에 앞장서는 국어학자 이상규 경북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한글 세계화에 앞장서는 국어학자 이상규 경북대 교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서 묵묵히 앉아 백성을 살피고 있는 세종대왕을 잠시 알현한다. “전하,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돌아왔다고 하옵니다.” 아무 말이 없다. 다시 아뢴다. “공휴일로 재지정된 것이 23년 만의 일이라고 하옵니다. 기쁘지 아니하십니까.” “….” 이번에는 주변에 있던 남녀노소 여러 사람이 세종대왕 앞으로 모였다. 다같이 노래를 부른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 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기르자~” 세종대왕은 그제서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이 한글날 567돌이다. ‘돌아온 공휴일’이어서 한글에 대한 사랑과 세종대왕의 업적을 다시 한번 뜻깊게 되새기게 한다. 한글날의 유래를 잠시 되짚어 본다.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 아래서 조선어학회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26년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 한글 창제 480돌을 맞아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식을 가졌다. 바로 한글날의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 정인지 서문에 ‘구월 상한(上澣)’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글날은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 즉 민족 정체성을 한데 뭉쳐 주권을 회복하자는 실천적 저항운동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이상규(60) 경북대 교수는 열정적으로 한글 세계화에 앞장서는 국어학자로 알려져 있다. 남북 언어학자들이 참여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국어 연구와 어문정책을 총괄하는 국립국어원장 시절에는 ‘세종학당’ 설립을 통해 한글 세계화의 기반을 다졌다. 특히 그는 ‘한글 고문서 연구’ ‘언어지도의 미래’ ‘한국어방언학’ ‘둥지 밖의 언어’ ‘방언의 미학’, 그리고 최근에는 한글날을 앞두고 조선어학회 33인의 열전을 담은 ‘민족의 말은 정신, 글은 생명’이라는 책을 펴내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전파하고 있다. 한글날 직전 서울 세종로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만났다. 잠시 사진 촬영을 마친 뒤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종로에서 열리는 이번 한글날 행사 때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논문집 ‘훈민정음, 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 2500권을 나눠 주면서 훈민정음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다시 알릴 예정이라고 이 교수는 말했다. 최근에 펴낸 책 ‘민족의 말은 정신, 글은 생명’을 꺼낸다. 그는 “우리의 말과 글이 일제의 굴레에서 말살의 위기를 겪는 동안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희망의 땅을 일군 조선어학회 33인의 이야기를 다뤘다”고 설명했다. 또 “서울시가 추진하는 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광화문거리에 조선어학회 33인 기념탑 조성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광화문’ 한글 현판을 떼어내고 ‘光化門’이라는 한자 현판을 달았고 그 앞에 세종대왕 좌상이 있지 않느냐”면서 “대한민국은 한글 공동체임을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한글날이야말로 5대 국경일 가운데 한글공동체의 진정한 축제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날”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세종대왕은 한자와 한자를 빌려 쓴 이두와 구결의 불편함으로 인한 지배계층과 백성들 사이 소통의 단절,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지식과 정보의 차등을 뛰어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지요. 다시 말해 일반 백성을 교화하고 지식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탁월한 애민정신에서 탄생한 결과물입니다.” 문자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한글은 인류가 만든 문자 가운데 유일하게 창제자와 창제 연대가 밝혀진 문자라는 점, 그리고 문자의 구성과 조직 면에서도 매우 과학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 표음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글의 창제 원리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으며, 한국어가 유엔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서 국제특허협력조약(PCT) ‘국제공용어’로 채택돼 세계 속의 한글, 한국어로 비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현재 한국어 사용자는 8000만명이 넘을 정도로 세계 8~10위의 주요 언어권에 속하며, 근래 ‘세종학당’의 세계 진출로 그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세종학당’은 현재 유럽, 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51개국 113곳에 세워져 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한글과 한국어가 계속해서 꽃을 피워 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문자는 사용 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갖게 하고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하는 인자입니다. 로마자는 이라크 지역에서 만들어져 로마에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으로 물 흐르듯 퍼져 나갔습니다. 이렇듯 우리 한글도 자연스럽게 상대 국가의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상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문자가 없는 종족과 그런 국가의 표음문자로 전파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외국의 언어학자들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 부처 간의 효율적인 지원과 운영이 절실하고 반듯한 표준학습 교재, 교원, 교육시설 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비정부기구(NGO) 등에서도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한글을 전 세계에 나눠 주는 ‘한글나눔운동’으로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외국인들이 한국어 배우기가 너무 어렵다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국어 어휘 기반의 70%가 한자어에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정부의 외래어와 전문용어 관리가 느슨한 틈을 타 우리말의 생태 기반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 이르고 있지요. 사전에도 없는 외국어 한글 표기가 마치 표준어인 양 언론을 통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학문 연구의 성과로 과학, 인터넷에 등장하는 낯선 용어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면 외국인의 한국어 배우기는 훨씬 쉬워집니다.” 맞춤법이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어 기계화를 통해 역기능을 줄이는 것, 즉 사전을 활용하고 또 워드에 어문 교정기를 장착해 불편을 최소화하면 된다. 띄어쓰기 문제는 이미 자동교정 기술의 정확도가 거의 90%를 상회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화제를 바꿨다. 아직도 ‘한글파’니 ‘한자파’니 하는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지 않느냐고 했다. “민감하고 난해한 문제이긴 하지만 국민 소통의 원칙을 지식인이나 국가 지도자의 눈높이에 맞추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한자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언어를 학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전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국민도 있거든요. 말과 글은 하나입니다. 한글이 중심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수천년 누적돼 온 우리 문화유산이 대부분 한문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를 정밀하게 연구하려는 사람에게 한문의 학습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이런 특수 상황을 고려해 정부에서는 한글로 읽을 수 있도록 번역 사업에 지속적인 투자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창의적 발전을 위해 한글과 한자를 이념적 대립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한글 중심의 소통구조 속에서 필요하다면 대량 번역 작업을 통해 조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글날의 공휴일 재지정이 한글의 가치를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단다. 한글의 미래에 대해서는 “앞으로 컴퓨터 언어가 인지와 추론까지 가능한 기술로 발전한다면 미래 로봇산업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부가가치가 대단히 높은 분야라고 할 수 있다”면서 걸어다니면서 한글 텍스트 입력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 언어의 자동 번역이 가능한 단계가 눈앞에 와 있다고 전망한다. 따라서 한글을 단순한 의사소통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 융성과 미래 지식 정보화 기술력의 한 축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글은 풍화하지 않는 주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은 순간처럼 흩어지지만 글자는 지식과 정보를 고정하는 창고의 기능을 하는 순기능과 더불어 개인과 세상을 어두운 감옥으로 유폐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한글공동체 구성원입니다. 우리 모두 나라 말과 글을 사랑하며, 언어 질서를 우리 스스로 순화시키려는 의지와 노력을 보여야겠습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상규 교수는 국립국어원장 시절 ‘세종학당’ 설립 주도 195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및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북 방언의 통시 음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방언조사 연구원과 울산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도쿄대학교 대학원 객원연구교수, 중국해양대학교 고문교수 등을 거쳤으며 국립국어원장, 남북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및 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 외에 한국문학언어학회장, 국어정책학회장, 한글학회 이사, 방언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방언학’ ‘경북방언사전’ ‘둥지 밖의 언어’ ‘방언미학’ ‘언어지도의 미래’ ‘한글고문서연구’ ‘민족의 말은 정신, 글은 생명’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집으로는 ‘훈민정음, 영인 이본의 권점 분석’ ‘디지털시대의 한글미래’ ‘우리말 연구’ 등이 있다. 일석학술장려상(1986년), 외솔학술상(2011년), 봉운학술상(2012) 등을 수상했다.
  • [IT 단신]

    GS25에서도 알뜰폰 판매 7일부터 전국 3000여개 GS25 매장에서도 알뜰폰이 판매된다. 폴더폰과 롱텀에볼루션 스마트폰 등 알뜰폰 10종을 구매할 수 있다. 1개월 기본료는 7800∼1만 3000원이며, 30개월 사용하면 단말기 대금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통신 서비스는 KT 알뜰폰 통신사인 에넥스텔레콤이 담당한다. 현재 알뜰폰은 사업자별로 전국 226개 주요 우체국과 하이마트, 전자랜드, 새마을금고, 홈플러스 등에서 판매되고 있다. 알뜰폰은 대형 이동통신 서비스에 비해 30%가량 요금이 저렴하다. ‘한국’ 도메인 나눔 이벤트 한국인터넷진흥원은 한글날을 맞아 ‘아름다운 한글.도메인 한국 나눔 이벤트’를 20일까지 진행한다. 한글 도메인은 ‘청와대.한국’ 같은 우리말 인터넷 주소다. ‘.한국’ 공식 페이스북(www.facebook.com/jumhanguk)에서 진행 중인 ‘갖고 싶은 .한국 도메인’, ‘숨바꼭질 .한국 도메인 찾기’ 코너에 응모하면 심사를 통해 109명에게 선물을 제공한다. .한국 도메인 1년 무료 사용권, 문화상품권, 커피이용권 등이 걸려 있다. 한국 도메인 등록방법 및 등록 가능 여부 조회는 ‘도메인.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저자와 차 한잔] ‘훈민정음’ 펴낸 서울대 김주원 교수

    [저자와 차 한잔] ‘훈민정음’ 펴낸 서울대 김주원 교수

    ‘당신은 한 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우수하고 독창적인 표음문자’ 대개 이 정도 수준을 넘지 못하는 답변을 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훈민정음’(민음사)은 한글을 정확하게 알고 바로 쓰자는 차원에서 한글의 역사를 기록으로 촘촘히 정리한 책이다. 책 출간에 맞춰 저자인 김주원 교수(56·서울대 언어학과)를 지난 3일 서울대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우리는 한글을 말할 때 들뜨지요.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장점만 강조합니다. 냉철히 따져보면 한글도 문자의 일종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실체를 잘 알아야 제대로 자랑하고 내세울 수 있습니다”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 독창성이야 세계가 널리 인정하는 추세. 해외 학자들의 연구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고 김 교수는 귀띔한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뒤 우리 학자들이 아무리 한글의 과학성과 독자성을 주장해도 외국 학계에선 거들떠보지 않았지요. 이미 있는 문자의 변형일 뿐, 새로운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1960년대 들어서야 외국 학계가 한글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문자 자체의 독창성과 과학성의 인정을 넘어 사회·인문학적 측면까지 들추는 추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국민은 한글을 잘 모르고 오해하기 일쑤란다. 가장 흔한 오해의 단적인 예는 ‘세종대왕은 우리말을 발명했다’는 것과 ‘한글이 세계기록유산’이며 ‘한글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는 인식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도 우리 말은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을 혼동합니다. 세종대왕은 우리 말이 아닌 우리 글을 만든 것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한글이 아니라 한글의 창제·운용 원리를 적은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역시 말과 글의 혼동이 부른 잘못이지요.” 특히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적을 수 있다는 인식은 큰 오류라고 강조한다. “아직까지 인류는 세계의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적을 수 있는 표기체계를 개발하지 못했어요. 한글이 소리글자 중에서도 음소문자라는 점에서 낱낱의 소리를 모두 표기할 수 있는 문자체계임을 확대부각시킨 탓으로 봅니다.” 김 교수는 한글의 정확한 이해와 활용에 천착해온 훈민정음 전문가다. 2007년 창립한 훈민정음학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한국알타이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15년 전부터 시베리아, 몽골을 비롯한 동아시아 구석구석을 누벼 사라져가는 알타이언어를 기록하는 데 힘을 쏟고있다. “아직도 훈민정음을 둘러싼 학계의 논란은 뜨겁게 진행 중입니다. 한글 자모음이 27자인지 28자인지, 그리고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협찬이 있었는지, 언문의 정확한 의미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지요.” 어찌보면 가장 기본적인 사안들인데 왜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할까. “훈민정음 창제는 극비 프로제트로 진행된 만큼 창제과정을 적은 기록이 전혀 없어요.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반포에 반대한 학자들의 상소문이 간접적으로 편린을 볼 수 있는 전부인데 그것도 맥락이 맞지 않아 학설이 나뉘는 것입니다.” 학계의 논란이야 어찌됐건 또렷한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와 장점을 부각시켜 키우고 단점은 보완 개선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군주가 표기문자를 만들어 제공한다는 게 예사로운 일일까요. 훈민정음의 창제정신과 원리를 똑바로 알고 쓸 때 우리가 늘상 자랑하는 우수한 한글 문자의 진정한 나눔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남·북극 해저지형, 우리말 이름 붙여 바다지도로

    이름이 없는 남·북극 해저 지형에 우리말 명칭이 생기고 이를 해도로 제작, 극지활동 및 연구에 활용한다.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과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는 16일 이 같은 내용의 업무협약을 체결한다. 두 기관은 협약 체결을 계기로 남·북극에서 수집한 해저지형 자료를 공동 활용하고, 남·북극 해저지형에 우리말 이름을 붙여 국제기구에 등록하는 방안을 공동 추진키로 했다. 해양조사원은 해도 제작과 국제수로기구의 해저지명 등록지원 업무를 맡고 있으며, 2011년 남극 해저지형에 ‘궁파 해저구릉군’과 ‘쌍둥이 해저구릉군’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붙인 바 있다. 궁파는 신라 무장 장보고의 다른 이름을 뜻한다. 극지연구소는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와 장보고 과학기지, 세종 과학기지 등을 활용해 남극과 북극에서 조사·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남극 주변 해역은 지금까지 단 5%만이 조사됐고, 그동안 발간된 국제 해도도 71종에 머물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해역이다. 해양조사원 관계자는 “남극수로위원회를 주축으로 하는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들은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속에서도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극지 조사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정부 부처와 산업계, 학계 등과 협업을 통해 극지 해양 정보를 지속적으로 축적해 극지 활동과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우린 프로이트에게 속고 있다

    우상의 추락/미셸 옹프레 지음/전혜영 옮김/글항아리/712쪽/3만 2000원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1906년 50세 생일선물로 앞면에는 자신의 얼굴이, 뒷면에는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각각 새겨진 메달을 받고 무척 좋아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의 정신분석학의 뿌리인 만큼 그가 얼마나 기뻐했을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2010년 프랑스에서 나온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적 평전이 ‘우상의 추락’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겨졌다. 프로이트에 심취했다 비판자가 된 저자는 이 책을 낸 뒤 논란의 중심에 섰다. 프로이트는 본능 또는 충동을 뜻하는 리비도와 무의식, 금기시됐던 성욕 등의 개념을 끌어내 인간의 심리를 파헤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잠재의식으로 인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저자는 프로이트가 임상 사례를 조작하고, 전기작가들이 그를 미화해 그의 사상이 실제와 달리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또 가족 등 주변 사람들과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만든 것이어서 과학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으로 치료했다는 환자가 6개월 뒤 사망하는가 하면 프로이트는 처제 민나 베르나이스와 모호한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러나 전기작가들은 두 사람이 스위스, 이탈리아 등 10여 차례 장기여행을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불륜관계는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연결고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반(反)유대주의자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들에게 모멸감을 안기는 모순적인 아버지, 후처로 들어와 장남인 프로이트를 최고로 여긴 20세 연하의 어머니, 딸 안나에 대한 프로이트의 과보호 등 복잡한 가족관계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형성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산다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어머니에 대한 사랑, 딸에 대한 집착, 처제와의 밀월 행각 등 다양한 행태로 나타난다. 저자는 그러나 근친상간에 대한 욕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또 미국의 영화 배우 메릴린 먼로가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에서 프로이트의 딸 안나에게 심리치료를 받았으며 이것이 인연이 돼 먼로의 유산이 사후 안나 프로이트 재단과 프로이트 연구소에 들어가는 재미난 사연도 담겨 있다. 저자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숨겨진 면모는 프로이트 정신심리학을 다시 보게 한다. 임태순 선임기자 stslim@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11) 남산

    남산 하면 벼슬길 진출을 위해 ‘열공’하던 딸깍발이 선비와 그들이 살던 낭만적인 남촌 풍경이 떠오른다. 조선 신궁과 통감부, 헌병사령부, 일본인 거주지 같은 좋지 않은 상념도 꽈리를 튼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구절이나 한때 ‘남산’으로 불리던 옛 중앙정보부의 추억도 있다. 케이블카와 도서관, 어린이회관, 서울타워도 빠지지 않는다. 한강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기에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가 겹쳐 떠오르는 것이리라. 남산은 사대문 안에서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이기에 익숙하고 친근하다. 풍수지리학상 342m 높이의 백악(북악)이 조선 한양의 주산(主山)이었다면 265m의 남산은 안산(案山)이었다. 쉽게 풀면 나라(임금) 앞에 놓인 밥상이나 책상 같은 개념의 산이다.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대의 마지막 종착점이어서 남산 5개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가 태평성대를 의미하는 평화의 산이기도 했다. 남산 위에 오르면 도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했다. 덕분에 산림이 우거지고 울창해 서울의 허파가 되었다. 서울의 팽창에 따라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자연지리적인 요건을 갖췄다. 우리가 남산에 대해 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아는 것도 있다. 일례로 남산 소나무이다. 산림청에 등록된 4440개의 우리나라 산 이름 중 남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31개에 이른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마을 앞산을 남산 또는 앞산이라고 불렀다. 남(南)자를 ‘남녘 남’ 자가 아닌 ‘앞 남’으로 썼다. 남산은 앞산을 한자로 쓴 것이다. 목멱(木覓)의 유래도 흥미롭다. 남산의 다른 이름은 ‘마뫼’였다. 마뫼의 ‘마’는 ‘앞’, 뫼는 산의 우리말이다. 독립지사이자 역사학자였던 안재홍에 따르면 목멱은 이두식 표기다. 목(木)은 ‘마’를, 멱(覓)은 ‘뫼’를 적었다는 얘기다. 남산=앞산=마뫼=목멱이 같은 뜻 다른 이름이다. 방방곡곡 동네 앞산의 소나무가 모두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인 셈이다. 샌님이 살던 남촌에 언제부터 왜색의 기운이 드리웠을까. 남산과 일본의 악연은 뿌리 깊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1592~1598) 이전까지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이 남산 기슭 인현동 2가에 있었다. 남산은 7년 전쟁기간 동안 왜군 진지였다. 마스다 나가모리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서 왜장터(왜성대)라고 불렸다. 그들의 진지는 지금의 정동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그로부터 292년이 지난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남산 기슭 녹천정 자리를 영사관자리로 제공받아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곳에 일본공사관, 통감부, 총독부가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1가인 진고개(본정)일대는 일본인 거주지였다. 진고개를 거점으로 남대문, 회현동, 명동(명치정), 을지로(황금정)쪽으로 주택가와 상가가 확장됐다. 화려한 남촌 일본인 상가는 북촌 조선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일본인 관광객이 유독 명동을 즐겨 찾는 까닭도 그들이 누렸던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회귀본능이 아닐까. 해방 직후 본정(本町)을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딴 충무로(忠武路)로 바꾼 것은 이를 차단하려는 속뜻이 작용한 것 같다. 남산과 남촌은 조선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일본인촌으로 변했다. 종로 우미관을 주름잡던 김두한 패가 청계천을 경계로 진고개 일본 건달과 세력을 다투던 시절이다. 19가구 89명(1885년)에 불과하던 일본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1986가구 7677명(1905년)으로 늘었다. 강제병 탄이후 8794가구에 3만 4468명(1910년)으로 무서운 팽창세를 보였다. 일제의 남산 잠식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 1898년 예장동에 대성궁(경성신사)이라는 작은 신사를 세우더니, 1904년에는 2만여 평을 임대해 필동에 헌병대사령부를 구축했다. 1908년에는 30만 평을 영구 무상임대,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조선 신궁을 세웠다. 그들이 잠식한 땅이 현재 남산공원(87만 6000평)의 3분의 1을 넘는다. 일제가 열도를 창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와 명치 천황을 모신 조선 신궁은 한반도 전역에 있는 일본 신사의 총본부였다. 신궁은 사대문 안 어디에서나 보이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으며 시내에서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승객 전원이 일어서서 묵념을 올려야 했다. 1918년 남산중턱 13만평의 수목을 베어내고 조성에 들어가 1925년 완공됐다. 지금의 남산식물원 자리이다. 일본의 성지 조성을 위해 남산은 깔아뭉개졌다. 남산 중턱 힐튼호텔에서부터 384개의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도록 꾸몄다. 남대문에서 조선 신궁에 이르는 참배로를 조성하려고 남대문에서 남산을 잇는 성곽을 부수고 자동찻길을 냈다. 지금의 소월로이다. 남산생태계를 파괴한 주범이다. 조선신궁과 황국신민서사탑은 광복 직후 서울시민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파괴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남산의 동쪽 기슭 장충단은 명성황후시해사건(1895) 당시 일본자객에 맞서 순직한 호국영령을 기리는 곳이다. 장충단(奬忠壇)이란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다. 일제는 창경궁, 덕수궁과 함께 이곳을 공원으로 희화화하고서 장충단 동편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터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웠다. 일본 1000엔권 지폐에 얼굴이 등장하기도 한 이토의 업적을 영구히 기념한다는 구실로 내선일체를 꾀했다. 당시 여행안내책자에서 경성 제일명소로 칭송했다. 총독부를 지을 때 헐어낸 경복궁 선원전을 부속건물로,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정문으로, 광화문 양옆 궁성벽 석재를 가져다가 담으로 쌓았다. 박문사 건물은 해방 후에도 동국대 기숙사로 쓰였고 흥화문은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에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구 필동 남산한옥마을은 악명 높은 헌병통치의 본산인 조선헌병대사령부 터였다. 조선 초 박팽년의 사저였던 한국의집은 조선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의 관저로 쓰였다. 이들은 남산 중턱 왜성대에 총독관저를 세우고 그 아래 조선헌병대사령부를 뒀다. 서울유스호스텔은 일본공사관과 통감관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가 각각 자리했었다. 남산은 경복궁 안에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옮겨가기 전까지 일본 식민통치의 심장부였다. 남산꼭대기 N타워 옆 팔각정은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평범한 정자에 불과하지만, 내력은 간단치 않다. 이 자리는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부터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조가 남산의 산신을 모시려고 지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무속사당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민속신앙 터인 국사당이 일본 토착신앙의 대표인 신궁에 쫓겨 인왕산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이다. 일제는 ‘일본 최고 신과 살아있는 신인 천황을 모시는 신궁에 식민지 나라의 굿 집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1925년 오백년 내내 있던 자리에서 내쳐버렸다. 한국의 무속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신도(神道) 역시 원시종교에 가깝지만, 정부나 국민이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생명을 건 야스쿠니 신사참배 행렬에서 엿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국사당을 원상회복시키자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 얘기를 꺼냈다간 종교전쟁이 일어날 판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보고 싶어하는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명동을 거쳐 남산타워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들이 국사당 축출 사연을 듣는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광복 후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남산을 그냥 두지 않았다.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이승만은 국사당 터에 국사당을 되돌리기는커녕 자신의 호를 딴 우남정을 만들었고,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동상을 세웠다. 조선 신궁 터를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결정해 1959년 기공식까지 가졌지만 2년 뒤 5·16 쿠데타로 백지화됐다. 3500가구 2만 5000명이 정착한 서울 최초의 판자촌인 해방촌이 남산의 북쪽 기슭 12만 6000평을 차지하도록 사실상 허가해 남산의 피폐를 가속화했다. 이런저런 압력과 로비를 통해 숭의학원, 리라학교, 동국대학교가 남산에 틈입했다.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훼손된 곳은 장충단공원이었다.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자유센터, 타워호텔(반얀트리),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옛 재향군인회(동국대), 옛 중앙공무원교육원(동국대) 등이 줄줄이 들어선 것이다. 장충단공원은 21만평이 넘던 서울시내 최대 근린공원에서 9만평의 평범한 공원으로 쪼그라들었고 1984년 남산공원으로 흡수합병당하는 신세가 됐다. 1994년 외인아파트 2동이 폭파 철거되는 등 남산제모습찾기운동이 시작됐고 2009년 남산르네상스를 내세운 오세훈 전 시장이 찢어진 남산녹지축 연결을 시도했지만 마무리짓지 못했다. 남산에는 지금도 동상 10기, 기념비 14개를 비롯한 각종 시설물 28개, 체육시설 269개가 촘촘하다. 그러나 남산은 이들에게 마른 품을 기꺼이 내주고 있다. 아! 남산이여…. joo@seoul.co.kr
  • 진도-해海 그리고 서화가무書畵歌舞

    진도-해海 그리고 서화가무書畵歌舞

    진도에선 알게 된다. 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왜 소리꾼이 창을 하고, 왜 시인이 시를 쓰는지를. 씹어도 삼켜도 내려가지 않는 응어리를 진도 사람들은 ‘예술’이라 했다. 바다도 울고 칼도 울고 해海 용산역에서 KTX로 3시간을 달려 목포에 내렸다. 호남선의 시작과 끝을 찍는 목포역은 개청 10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다. 1913년 태어난 목포역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겪으며 1세기를 무던히 견뎌냈다. 목포에서 다리 하나만 넘으면 진도다. 진도대교를 넘는 순간, 바다가 흐느껴 울었다. 생명줄을 잡고 있는 존재만이 운다. 그래서 진도대교가 길게 누워 있는 ‘울돌목’은 그냥 바다가 아니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낀 울돌목의 파도는 제 존재를 증명하고자 부지런히 온몸을 비틀고 꼬았다. 바다의 연주에 맞춰 칼의 노래가 들렸다. 충무공 이순신이 울돌목을 굽어봤다. 순우리말 울돌목을 한자로 대치하면 ‘명량鳴梁’이 된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명량을 이용해 이순신은 왜구의 배 330척을 물리쳤다. 그가 거느린 배는 고작 13척뿐이었다. 영웅담은 과대 포장되기 마련이지만, 이순신의 이야기에선 왠지 모를 진정성이 느껴졌다. 허깨비를 좇는 정치에 죽을 뻔하고, 백의종군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고, 전쟁 도중 아들을 잃었다. 그건 할리우드 영화 속에 나오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로 피눈물을 흘린 인간의 이야기였다. 매년 울돌목에선 명량대첩일인 음력 9월16일을 기점으로 ‘명량대첩축제’가 열린다. 올해 9월27일부터 9월29일까지 울돌목에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마음으로 싸운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진도의 바다는 우는 것도 모자라 시커먼 제 속을 드러냈다. 검게 타들어 간 진도의 가슴은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를 잇는 바닷길이다. 길이 2.8km, 폭 40m의 이 길을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바다 위에 갈색 뱀이 구불구불 기어가는 것만 같다. 뱀의 비늘이 알록달록해 보이는 건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 때문이다. 진도군은 ‘신비의 바닷길 축제’를 35번이나 치렀다. 지난 4월 나흘간 개최된 올해 축제에는 무려 51만명이 다녀갔다. 매년 4~5월경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찰나의 길’인지라 여름에 찾은 바닷길은 행방불명이었다. 바닷길을 지켜본 동상 두 개가 ‘기적을 믿어라’고 했다. 목격자는 멀리서 바닷길을 지켜보는 피에르 랑디 동상과 다른 하나는 축제 현장을 지키고 선 뽕할머니 동상이다.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였던 피에르 랑디는 진도의 바닷길을 보고서 ‘모세의 기적’이라 프랑스에 전했고, 그 덕분에 프랑스 신문에 진도가 소개될 수 있었다. 피에르 랑디는 실존 인물이지만 뽕할머니는 전설 속 인물이다. 호랑이가 득실거리는 빈 마을에 혼자 남겨진 뽕할머니가 이웃 섬으로 도망간 가족을 그리워하자 용왕이 ‘길’을 내주었다는 전설은 신비의 바닷길의 모태가 됐다. 신비의 바닷길┃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신비의 바닷길 74 홈페이지 miraclesea.jindo.g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풍경 앞에선 붓이 춤춘다 서화書畵 진도의 바다 옆에는 늘 논이 따라다녔다. 바다 너머 논, 논 너머 바다…. 물과 흙이 진도 사람을 빚어냈을 것이다. 진도에선 보이는 대로 툭 찍어내는 사진이 아니라 뭉툭한 연필로 쓱쓱 그리고 고운 물감으로 덧칠한 풍경화가 갖고 싶었다. 사물 하나 제대로 스케치하지 못하는 아둔한 손을 원망했다. 재주 없는 외지인의 마음이 이러한데, 진도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진도의 미술관은 진도 출신의 작가와 진도의 풍경이 담긴 그림 위주로 전시를 꾸리고 있었다. 서예가 장전 하남호 선생이 사비를 들여 만든 남진미술관은 아늑하고 소담했다. 미술관 정원에는 색이 고운 토기와 조각품이 가득 메워져 있고 별관에는 분청사기, 백자, 청자 등이 높은 몸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술관 본관으로 들어가면 책에서 봤던 역사 속 인물들이 걸어 다닌다. 이름만으로 무게가 느껴지는 추사 김정희와 한호 한석봉의 글씨를 알현하고, 대원군 이하응의 박력이 느껴지는 글씨도 볼 수 있다.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무정 정만조, 고균 김옥균, 계정 민영환 등의 작품도 미술관 곳곳에 촘촘하게 박혀 있다. 미술관의 벽면 한쪽을 크게 메운 그림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다. 다산 정약용의 ‘홍매도’다. 다산의 유배지는 진도가 아니라 강진이건만 정약용이 그린 매화 그림은 진도에까지 진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진도의 그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의 흔적을 밟아야 한다. 운림산방은 진도 출신의 허련이 여생의 끝자락을 보내던 화실이다. 이곳을 지키는 건 연꽃이 동동 떠 있는 호수와 의젓한 소나무, 하늘거리는 배롱나무 등이다. 운림산방은 배우 배용준과 전도연 주연의 영화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허련은 평생 한 스승를 우러러봤다. 허련의 재능을 알아보고 키워 준 추사 김정희 말이다. 추사는 중국 원나라의 4대 화가로 손꼽힌 ‘대치’ 황공망과 견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 제자의 호를 ‘소치’라 지어 주었다. 소치 허련이 운림산방에 기거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추사의 죽음 때문이었다. 허련은 스승을 만나러 제주도까지 찾아가곤 했다는데, 스승을 향한 사랑은 운림산방에서도 느껴진다. 심지어 운림산방은 뜻밖의 선물을 내어 놓았다.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를 본 것이다. 메마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마주 보고 꼿꼿하게 선 세한도에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글씨가 숨어 있었다. ‘서로 오래 잊지 말자’는 이 말은 귀양살이 중이던 추사가 중국에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띄우는 감사의 인사다. ‘예술 혼’은 세월의 바람 앞에서도 쉽게 꺼지지 않는다. 소치 허련에 이어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인 허림, 임전 허문, 허진 등 소치의 집안은 5대에 걸쳐 화가를 배출했다. 호수 오른편에 보이는 소치 기념관에선 소치 집안의 가계도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피는 같을지언정, 각자 그려낸 그림의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한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들의 그림을 한자리에서 비교해 보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남진미술관┃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하미길 39 문의 061-543-0777 운림산방┃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문의 061-543-0088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진도 Q&A Q.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갤러리가 있다? 그림을 전시하고 커피와 케이크를 파는 갤러리형 카페는 봤어도 그림을 전시하며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곳은 생전 처음 봤다. 진도니까 가능한 일이다. 우초 박병락 선생이 운영하는 ‘작은 갤러리’는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이자 음식점이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수제비와 파전. 진도의 바다를 표류하던 각종 해산물이 수제비와 파전에 들어 있다. 노란 색감이 퍼지는 막걸리도 진도의 특산품인 ‘울금’으로 만들어져 독특하다. 울금은 생강과 식물로 울금의 주성분인 커큐민은 카레의 주원료가 된다. 우초 선생의 그림은 진도스럽다. 진한 먹으로 그려낸 작품에선 검정빛 개펄이 살아 있다. 소나무 너머의 바다, 갯벌의 변화, 낙조 등 작품의 주제는 진도를 비켜가지 않는다. 작은 갤러리┃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300 문의 061-544-0071 Q. 진도개? 진돗개? ‘진도개’는 진도를 알리는 일등공신이다. 1993년 5살짜리 진도개 백구가 대전으로 팔려갔으나 주인을 잊지 못하고 7개월간 팔백리길을 달려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는 얘기가 알려졌기 때문이다. 진도개 테마파크에서는 똑똑한 진도개의 공연을 볼 수 있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명연기부터 조련사의 어깨 위에 올라가는 고난이도 묘기도 부린다. 여기서 잠깐! 진돗개와 진도개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사이시옷 맞춤법을 따르자면 ‘진돗개’가 맞지만 진도 사람들은 진돗개를 ‘진도개’라 부른다. 1963년 진도개가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될 당시 진돗개가 아니라 진도개로 등재됐기 때문이란다. 진도개라는 단어에는 ‘진도개’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진도 군민의 자부심이 배어 있는 셈이다. 진도개 테마파크┃주소 전남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홈페이지 dog.jindo.go.kr Q. 홍주는 섞어야 맛있다? 진도의 특산품은 헤아리기 어렵다. 꼬들꼬들하고 튼실한 돌미역, 불로장생의 명약으로 불리는 구기자, 한겨울에도 잘 자라는 대파 등…. 수많은 특산품을 비집고 진도 토속주인 ‘홍주’가 무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됐다. ‘지초’라는 약초를 가미해 색을 낸 홍주는 이름 그대로 새빨갛다. 도수가 무려 40도를 웃돌기 때문에 주당이 아니라면 그냥 마시기 쉽지 않다. 맥주잔에 맥주를 70% 가량 채운 뒤 홍주를 약간 부으면 마치 맥주 위에 해가 뜬 것 같은 ‘일출주’가 된다. 맥주가 든 맥주잔 안에 홍주가 든 소주잔을 넣으면 ‘일몰주’. 또한 투명한 사이다와 홍주를 섞으면 접점 부분이 분홍빛으로 바뀌어 상당히 곱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핏방울 터트리듯 노래하더라 가무歌舞 “진도 앞에선 서화가무를 자랑하지 마시오”라는 충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예술이라는 향수를 얼마나 뿌린 것인지, 나중에는 예술이라는 말만 들어도 특유의 진도 내음이 풍겨 왔다. 아리랑마을 관광지 내 아리랑체험관에서 아리랑은 물론이고 사물놀이, 진도씻김굿 등을 간접 체험했다. ‘지잉’ 징이 울면 바람이 불고, ‘둥둥’ 북이 울면 구름이 따라왔다. ‘꾕꾕’ 꾕과리가 소리치면 천둥이 밀려왔고, ‘덩기덕’ 장구가 움직이면 비가 쏟아졌다. 논밭을 일궈 살기 위해 그들은 악기를 쳤다. 자연을 ‘적’이 아닌 ‘동지’로 만드는 우리 민족의 지혜다.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전승된 ‘남도 들노래’는 아예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남도 들노래 하면 지산면 인지리의 조공례 할머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소리에 미친 조공례 할머니의 윗입술은 “노래하지 말라”는 남편의 돌팔매에 찢겼다. 책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 곽 시인은 입술이 찢기던 순간을 “그날 흘린 피가 꼭 매화꽃잎처럼 송이송이 서럽고 고왔는디”라 묘사한다. 윗입술이 찢기고도 ‘핏방울 터트리듯’ 노래한 그녀는 남도들노래 창 기능 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51호가 됐다. 농사지으랴, 밥하랴, 아이 키우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진도의 부녀자들은 때론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남도들노래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강술래의 탄생기다. 이곳저곳 정처 없이 진도를 염탐하다 보니, 해日와 이별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해와 만나고 헤어지는 건, 먹고 자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진도에선 해조차 특별했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듯 진도의 해는 애잔하게 바다의 품에 안긴다. 떠나가는 해를 보려 세방낙조 전망대로 달렸다. 일몰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공백기를 달래 준 건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의 공연이었다. 중중모리 가락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관람객의 몸 사위를 따라 흘렀다. “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 아이고 아니로구나. 초장화, 초장화, 초장화, 장화초, 장화초 아이고 이것도 아니로구나….” <흥부가> 중 화초장 대목. 부자가 된 동생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빼앗아 온 놀부가 화초장을 ‘고초장’이라고 했다가 ‘초장화’라고도 했다가 정신없이 소리 질렀다. 흥부가가 끝나기 무섭게 북을 맨 세 사람이 등장했다. 양손에 북채를 쥐고 북을 장구처럼 양쪽으로 치는 ‘진도북놀이’는 잔가락이 많기로 유명하다. 두 손에 북채를 들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심장도 북의 장단에 맞춰 쿵쿵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쩌렁쩌렁 울리던 소리가 자취를 감출 무렵, 해가 서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숨을 멎을 듯 말듯 해가 어느 순간 바다에 스며들었다. 아리랑마을 관광지┃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아리랑길 95-5 문의 061-544-8839 세방낙조┃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세방낙조로 문의 061-544-0151 글·사진 구명주 기자 취재협조 진도군청 www.jindo.go.kr 한국관광공사www.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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