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성 더해가는 ‘비정규직’ “저임금·권리침해에 시달린다”
경실련은 29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비정규직에게 노동법은 있는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토론회에서는 비정규노동자의 권리보호 방안으로 정부차원의 근로감독 인력 확대,악덕사업자 블랙리스트 공개제도 도입,비정규노동 권리구제 위원회 신설 등이 제기됐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병훈 교수와 노동연구원 강명세 연구위원이 ‘비정규직 권리침해와 정책대안’을 공동 발제했다.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종수 노무사는 ‘공공기관의 비정규직에 대한 노동법위반 사례’를 발표했다.주요 발제와 토론 내용을 요약한다.
●비정규노동자 권리침해와 정책대안
비정규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이등시민’으로 전락했다.임금은 정규직의 52%에 불과하다.사회보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전체의 10∼20% 수준이다.
비정규노동센터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수집한 697건의 비정규직 노동권 침해 사례를 분석하면 고용계약 침해가 44.8%로 가장 많았다.
임금 침해는 40.6%였다.침해 사례 가운데 여성이 64.5%를 차지했다.주요 유형은 고용계약해지·전환,근로계약서 미작성,임금체불,시간외 근로수당 미지급,퇴직금 미지급,휴무 일방지정,근로시간 임의편성,노조 불인정,산재 불인정,불법파견 등이다.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근로감독 인력을 대폭 늘려야 한다.또 각 지역의 노사단체와 공익전문가가 참여하는 ‘명예감독관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권리침해가 빈발하는 공공·민간서비스부문과 학원·학습지판매업,아르바이트 인력을 활용하는 중소사업장에 대해서는 특별 근로감독을 시행해야 한다.그동안 비정규직 보호방안에서 배제됐던 아르바이트 학생과 재택 여성노동자를 위한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사용자의 노동권 침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청소년 성범죄자의 공개와 유사한 방식의 ‘악덕사업자 블랙리스트 공개제’를 시행하고,‘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한다.
비정규 노동자가 손쉽게 구제신청을 할 수 있도록 ‘비정규 노동권리구제 위원회’를 현재 인수위가 구상중인 ‘차별시정위원회’와 ‘노동위원회’ 산하에 설치해야 한다.독일이 실시하고있는 ‘고용계약 서면요건주의’를 도입,고용계약을 서면으로 명시토록 하는 조항을 근로기준법에 추가해야 한다.
●공공기관의 비정규노동자 권리침해
지자체에 종사하는 비정규 노동자는 상용직과 일시적인 업무에 3개월 미만 종사하는 일시 사역인부가 있다.
대다수 지자체는 상용직·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지급하는 노무관리를 일종의 행정처리 개념으로 파악한다.따라서 노사 관계가 아닌 공무원 특유의 특별권력관계로 악용,자의적인 법집행을 하고 있다.
일시 사역인부에 대해서는 예산을 짤 때부터 주휴수당과 연월차휴가수당,퇴직금을 책정하지 않는다. 지자체의 일용직노동자는 근로기준법상 해고제한규정의 적용을 받지만 많은 지자체는 이를 무시한 채 정부지시라는 이유로 집단해고에 나선다.
학교의 과학실험 보조원과 일용직 사서,우체국 집배원 등도 권리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감사원 등 예산통제기간은 인건비 절감을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예산 편성에서 저임금을 강요하는 실정이다.
●토론
한나라당 전재희의원은 해결책으로 비정규직에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적용할 것을 강조했다.노동법에 규정된 ‘균등처우의 원칙’이 제대로 실행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전 의원은 “노동법에 규정된 균등처우의 원칙에 따라 사업주가 채용이 결정된 근로자와 직무·임금 및 계약기간,임금인상 조건,사회보험 등과 같은 사항을 모두 문서로 작성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이상학 정책국장은 “근로기준법을 상습적으로 위반하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야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고,노조탈퇴종용·근로계약해지·도급계약해지 등을 일삼는 사례도 가중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창구 박지연기자 window2@kdaily.com
◆레미콘 운전자 박대규씨 인터뷰
“연말 계약 때마다 노비문서를 쓰는 기분입니다.”
경기 파주에서 13년 동안 레미콘 운전을 해 온 박대규(42)씨는 “20대 후반에 몇 만원 더 받으려고 레미콘 운전자가 된 것이 생애 최대 실수였다.”고 말했다.
군제대 후 고압가스 트럭운전을 하던 그는 90년 여름 파주에 있는 한 레미콘 회사 정규직원으로 입사했다.입사 초기에는 수입도 괜찮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94년 건설업계의 불황이 이어지자 회사 사장은 차량구입을 개인에게 전가했다.박씨는 “차량 불하를 거부하면 해고하겠다는 위협에 동료들과 차량을 불하받았지만 그 결과가 이토록 참혹할지는 몰랐다.”고 말했다.
차량소유로 인해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대부분의 레미콘 운전사들은 이 당시를 전후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박씨와 같은 특수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의료·산재 등 4대 보험과 각종 수당은 물론 퇴직금도 없다.
비정규직의 꼬리표가 붙은 이후 회사측은 걸핏하면 휴일작업·새벽출근·심야작업을 강요했다.회사에 출근해 배당받은 일을 하지만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어 보호받을 수 있는 노동법도 없다.
박씨는 “보름에 한 번 쉬고,하루 평균 14∼16시간을 일하지만 이번달 집에 가져다 준 돈은 고작 70만원”이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사정이나,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거부해도 계약해지의 빌미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회사 지시대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고도 잦다.피로누적으로 차량사고가 자주 발생하자 레미콘 차량은 보험업계의 기피대상 1호다.
박씨는 “젊었을 땐 건설역군이라는 자부심이라도 있었지만,이젠 학원비조차 대지 못하는 무능하고 늙은 아비의 모습뿐”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돈은 조금 벌어도 좋으니 ‘계약 때 보자’는 회사측의 협박을 더이상 듣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kdaily.com
◆정부선 비정규직 확산 막기로
비정규직 문제는 이미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다.비정규직의 고용이 남용되고 있으며,부당한 차별과 인권무시 등 비정규직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는 비정규직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보호방안을 마련했다.노동계는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비정규직 차별의 즉각적인 철폐를 주장하고 있으며,재계는 재계대로 상반된 입장을 내놓고 있다.
●노동부와 인수위의 보호방안
노동계가 주장하고 있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있다.비정규직은 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에 없애는 것은 어렵고 수요를 억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 보호방안을 마련했다.
지난 22일 인수위와 노동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보호방안은 크게 ▲비정규직 확산방지 ▲부당한 차별금지 ▲특수고용관계 종사자 단결권 인정 ▲사회보장 확대 등이다.
비정규직 규모를 인위적으로 줄여나갈 경우 사내하청·위장도급 등 더욱 열악한 근로형태가 양산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따라서 합법적 비정규직 사용은 노동시장에 맡기되 부당하거나 탈법적인 사용은 강력하게 단속키로 했다.
특히 기간제 근로의 경우 단기계약의 반복갱신으로 인한 고용불안이 크기 때문에 3년을 초과하는 경우 해고를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노동부는 상반기중 정부안을 마련,정기국회에서 처리할 계획이다.
●노동계 요구
노동계는 즉각적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계는 비정규직의 임금이 정규직의 52.6%에 지나지 않는다며 임금차별을 없애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는 입장이다.또 임금뿐만 아니라 사회보험 등 각종 사회적 임금에서도 큰 차별을 받고 있다며 즉각적인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특수고용직의 경우 기존법률로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고용형태이기 때문에 마땅히 노동법을 개정,이들을 노동자로 인정,노동3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견근로자를 없애기 위해 파견법을 폐지하고,기간제 노동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근로기준법 제5조를 개정,차별금지 조항에 고용형태를 명시하고,동일사업장내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급원칙을 명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 입장
재계는 노동계와 상당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우선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정확한 직무분석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도입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또 노동부가 마련한 기간제 근로자의 반복갱신 제한 방안에 대해 인사경영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특히 노동시장 경직화를 초래,결국 고용기피의 부작용이 올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대신 기간제 근로기간 상한선을 1년에서 3년으로 연장,고용안정을 도모하고 기간만료시 최소한의 구직활동시간을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수고용직의 경우도 근로자개념을 확대해선 안된다는 입장이다.
김용수기자 dragon@kdaily.com
◆비정규직 4가지 유형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은 고용계약기간과 근로형태에 따라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기간제 근로직
대개 계약기간이 1년으로 정해진다.그러나 단기계약의 반복 갱신으로 인한 고용불안이 크다.3년을 초과할 경우 해고를 제한하고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보호방안이 마련돼 있다.
●단시간 근로직
일용직·시간제 등이 해당된다.단시간 근로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상근로자처럼 근로시키는 등 탈법적으로 운영되기도 한다.근로시간이 통상근로자의 80%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파견 근로직
비서·운전사 등 26개 직종에 한해 파견직으로 근무하고 있다.그러나 저임금에 시달려 적정수준의 임금을 보장하는 방안이 검토중에 있다.불법파견근로 사업주는 처벌이 강화된다.
●특수고용직
캐디·레미콘기사·보험모집인·학습지교사 등이 해당된다.사용종속성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개개 사안별로 근로자임을 인정하는 방안이 마련됐다.그러나 특수고용직의 경우 근로자임을 인정하는 판례가 제각각이다.
김용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