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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소 총재직 도전 ‘암초’

    |도쿄 박홍기특파원|아소 다로 일본 자민당 간사장이 5일 ‘포스트 후쿠다’를 노리며 간사장직을 공식 사퇴했다.4차례에 걸친 자민당 총재 도전이다. 간사장에 취임한 지 36일만이다. 지난해 9월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맞붙을 땐 간사장을 맡은 지 18일만이었다. 아소 전 간사장은 이날 “여기서 멈춰 서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며 총재 선거 입후보를 공식화했다. 아소 전 간사장은 현재로선 가장 유력한 총재 후보다. 자파인 아소파(소속 의원 20명), 이부키파(28명), 야마사키파(41명)로부터의 계파적 지지와 함께 마치무라파 소속 일부 의원들의 동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요사노 가오루 경제재정상, 고이케 유리코 전 방위상, 이시하라 노부테루 전 정책조사회장이 출마의 뜻을 굳히고 세확산에 나선 데다 일부 파벌과 함께 소장파 의원들도 독자 후보를 낼 채비를 하고 있다. 후보들이 난립할 조짐이다. 때문에 아소 전 간사장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총재 후보들은 의원 20명을 추천인으로 확보해야 등록할 수 있는 탓에 표의 분산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더욱이 파벌들은 계파의 결정이 아닌 의원들의 자유 의사에 따른 투표에 비중을 두고 있다. 총재 선거의 규정상 당원 141표와 참의원·중의원 387명 등 528표 가운데 과반수를 얻어야 당선된다. 과반수를 못 넘을 경우,1∼2위를 놓고 2차 투표를 실시하도록 돼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후보들이 5∼6명 출마하면 표가 흩어져 1차 투표에서 1위가 과반수 획득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면서 “그렇게 되면 2차 투표에서는 2위 후보로 결집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관측하기도 한다. 아소 전 간사장 측은 “2차 투표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없다. 다자 구도가 수구와 개혁에 초점을 맞추는 양자 대결보다 오히려 대중적 인기 및 정책 대결로 몰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kpark@seoul.co.kr
  • 삼성전자 와이브로 러시아 진출

    삼성전자는 러시아에 무선인터넷 와이브로(모바일 와이맥스)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미국, 일본, 중동, 중남미에 이어 러시아에서도 와이브로 상용 서비스를 추진하면서 동유럽으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삼성전자는 2일 모스크바 리츠칼튼 호텔에서 러시아 통신사업자 스카텔과 기자회견을 갖고 스카텔에 와이브로 장비와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다. 스카텔은 내년 상용서비스를 시작하고 앞으로 러시아 전역으로 서비스 지역을 확대할 계획이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일요영화] 아들

    [일요영화] 아들

    ●아들(EBS 일요시네마 오후 2시40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벨기에의 거장 감독 다르덴 형제의 2002년 작품.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목수의 갈등과 혼란을 그린 영화로, 복수와 용서의 의미를 되짚는다. 특히 아들을 죽인 소년의 입에서 죄의식 없이 쏟아지는 고백을 듣게 되는 아버지의 심리변화를 통해 종교윤리에 관한 문제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소년원을 출감한 아이들에게 목공 기술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에게 이혼한 아내 마갈리(이사벨라 소파트)가 찾아온다. 그리고 얼마 뒤 소년원에서 복역을 마친 프란시스(모르강 마린)도 재활센터로 들어온다. 이 소년이 5년 전 자신의 아들을 목 졸라 살해한 범인임을 알게 된 올리비에의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프란시스를 애정을 다해 지도하고 차츰 프란시스도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물론 프란시스는 올리비에 선생님이 누구인지는 꿈에도 알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올리비에가 프란시스를 지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마갈리는 학교까지 찾아와 올리비에의 이해 못할 행동에 대해 다그치지만, 사실 올리비에 자신도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느날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캐묻기 시작하고 프란시스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며 그에게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목재소로 프란시스를 데려간 올리비에는 5년 전에 살해된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자신임을 밝힌다.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다. 아들의 살인범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을까. 이런 혼돈스러운 자문을 거듭하는 관객들에게 영화는 오히려 차분한 시선을 빌려준다. 직접적인 행동이나 심리묘사 대신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의 동선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그러나 건조한 앵글로 잡는다. 카메라는 영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지기까지의 꽤 오랜 시간을 무심히 올리비에의 일상을 보여주는 데만 집중한다. 심지어 왜 올리비에가 프란시스의 직업 교사를 자처하고 나서는지조차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불친절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끝내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게 된다. 실제 목수이기도 하며 본명으로 영화에 등장하기도 하는 올리비에 구르메의 뛰어난 연기력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생생한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보장해준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범에 대한 근원적 분노, 스승으로서의 사명감 등 상반된 감정이 묘하게 교차되는 주인공의 내면연기가 압권이다. 올리비에의 표정연기를 보고 있자면,2002년 칸국제영화제가 왜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겼는지 이해할 수 있다.100분.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IPTV ‘속빈 강정’ 우려

    오는 10월 상용서비스를 앞두고 있는 인터넷TV(IPTV) 사업자 신청에 첫날인 28일 KT와 하나로텔레콤 등 4개사가 신청했다.하지만 MBC,KBS,SBS 등 지상파 실시간 전송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콘텐츠 사업자 신청에도 중소업체들만 몰리는 등 자칫 ‘방송통신 융합서비스’인 IPTV가 볼거리 없는 ‘반쪽짜리’ 서비스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29일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마감된 IPTV 제공사업자 신청에 KT·하나로텔레콤·LG데이콤·오픈IPTV가 신청했다고 밝혔다.29일 신청한 곳은 없었다.70여개의 채널을 제공할 KT와 하나로텔레콤은 10월부터 IPTV를 서비스할 예정이다.LG데이콤과 오픈IPTV는 내년 1월쯤 지상파 실시간 방송이 포함된 상용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IPTV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콘텐츠 사업자 등록에는 의료건강분야의 ‘KMB 네트워크’,KT 자회사 드라마제작사 올리브나인 등 7개 회사가 신청했다. 사업자들의 의욕은 높지만 제대로 된 IPTV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다. 지상파와 주요 케이블 방송과의 콘텐츠 협상이 상용화를 앞둔 지금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의무전송방송인 KBS1과 EBS를 제외한 MBC와 KBS2,SBS 등 다른 지상파 방송을 IPTV에서 보려면 사용료를 내야 한다. 방송사측에서는 무려 연간 400억∼700억원의 사용료를 요구하고 있다. 협상 초기의 1000억원보다는 내려갔지만 IPTV사업자들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그렇다고 지상파 실시간 방송을 포기할 수도 없다. 국내 유일의 위성방송업체인 한국디지털위성방송은 2002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KBS1과 EBS를 제외한 지상파 콘텐츠를 확보하지 못해 사업에 실패했었다. 한 IPTV업계 관계자는 “재전송 요금에 대한 입장차가 크기 때문에 서비스 개시 전까지 마무리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서로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려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콘텐츠 사업자 등록에 메이저 업체들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케이블 방송에도 프로그램을 전송하는 입장에서는 케이블의 경쟁사인 IPTV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게 케이블 사업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드라마, 영화 등 인기 케이블 채널을 보유한 CJ미디어와 온미디어는 IPTV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다. 한편 방통위는 9월 초 심사를 거쳐 사업허가권을 교부할 예정이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짧은 몽골 체류기](중편)

    [심재억 기자의 짧은 몽골 체류기](중편)

    ■ [심재억 기자의 짧은 몽골 체류기](중편) ■ “이제는 ‘전사’가 아니라 ‘시민’이고 싶다.” ■유목민들의 환호… 들뜨는 초원 현지에 도착해 사흘째 되는 날 늦은 오후,갑자기 울란바타르 시내가 들썩거렸다.도심 곳곳에서는 차량이 경적을 울려대며 질주하고 있었고,그 차창 밖으로 벗은 몸통을 드러낸 청년들은 뜻을 알 수 없는 환호성을 토해냈다.저녁이 되자 시내 중심지에 있는 정부 청사 앞 수흐바토르 광장에 끝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몽골 혁명의 아버지 수흐바토르가 1921년 울란바토르에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조성한 광장이다.울란바토르의 중심부에 있는 이곳에는 지금도 황톳빛 나는 수흐바토르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는 울란바토르와 몽골의 중심 광장이다. 그들은 손에 손에 몽골 국기를 들고 있었다.베이징 올림픽에서 몽골 전통 씨름선수 출신인 투브신바야르 나이단(24)이 유도 남자 100㎏급 결승에서 카자흐스탄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딴 것이다.몽골 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최초의 일이라고 했다.그 분위기가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을 때의 서울 풍경과 흡사했다.방송은 종일 그 소식을 전했다.방송체계가 열악해 금메달을 따는 순간의 경기 비디오는 나중에야 국민들에게 전해졌으나 시민들 반응은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송하며 자국민들의 신명을 긁어댔다. 환호작약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유분방한 유목정신과 버무려진 근대의 국가주의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국가주의의 한 모습은 심야에 대통령이 각료를 불러모아 광장의 연단에 오른 것에서도 확인됐다.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장의 축하 집회에서는 ‘몽골 만세’라는 구호가 밤새 울려퍼졌다.도심의 건물 곳곳에 대형 몽골 국기가 내걸리고,사람들은 취한 듯 이런 분위기에 젖어 그날도,다음날도,그 다음날도 금메달 얘기를 되내이고 곱씹었다.한 시민은 금메달을 딴 몽골선수에게 족히 5억 토그르기는 주어질 것이라며 부러워했다.일종의 포상금이고 격려금인 셈이다. 하기야 엥흐바야르 대통령이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소요로 곤욕을 치르는 가운데 이들의 관심을 일거에 잠재울 금맥이 터졌으니 그 선수가 얼마나 고맙고 기특했을 것인가.아직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부족한 탓인지 그들은 금새 그런 국가적 과제를 잊고 금메달의 환호에 매몰되어 가고 있었다.우리에게도 전두환 집권 초기에 ‘3S(Sports,Sex,Screen) 정책’의 아픈 기억이 있었다.그 묵은 관성은 지금도 때만 되면 되살아나 국민들의 정신을 갉아댄다.일종의 심리적 마약 같은 것이다.이번 올림픽도 마찬가지다.애쓴 선수들의 노고와는 별도로 그런 마약 같은 정치적 의도가 많은 국민들의 정서에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필자만 가진 것은 아니리라. 초원의 나라를 들뜨게 하는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얼핏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도 가만 들여다 보면 온갖 생명의 약동이 있듯 더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듯 보이는 왕년의 제국 몽골이 긴 잠을 털어내고 약동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그들은 칭기스칸과 그의 후예들이 일군 제국의 꿈을 다시 이루는 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이런 바람은 그들의 유전자가 된 정복욕의 현대적 발현일지도 몰랐다. 이번 여행길에 만난 몽골의 엥크볼드 총리는 이런 말을 했다.“지금 몽골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오로지 말 안장에 몸을 얹은 칭기즈칸이 극동에서부터 멀리 아랍권과 서·동유럽 일대를 아우르고 위대한 승자가 되었듯 우리 몽골도 반드시 국부를 일궈 그 옛날의 영화를 재현하려 한다.” 지금도 몽골 초원에는 양과 말,야크 무리가 끊임없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으며,사내들은 말을 타고 거침없이 초원을 질주한다.그러나 그런 노마드의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런지는 알 수 없다.옛적 몽골의 용맹스런 기마부대가 마각(馬脚)을 앞세우고 지축을 흔들며 질주해 간 길을 지금은 차량과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말과 오토바이가 갖는 기능의 유사함은 놀랄 만큼 닮았다.말이 달릴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오토바이로 달릴 수 있다.몽골 젊은이들이 구닥다리라도 오토바이를 즐기는 것은 이런 말의 문화에 대한 향수를 담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그들의 핏속에는 말등에 생애를 얹고 거친 초원을 끝에서 끝으로 달리며 살아온 강인하고 웅혼한 기백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울란바토르 시내에서는 검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에 눈매가 날카로운 안짱다리 사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그들은 바깥으로 휜 안짱다리로 어기적거리며 불안하게 걷는다.다 까닭이 있다.유목민인 그들은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자라고 살아왔다.그런 그들이 말을 버리고 도시로 들어와 살아도 기마의 흔적까지 청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안짱다리는 그들이 말을 몰아 초원을 내달리며 살아왔음의 지울 수 없는 유흔이다.그렇게 말과 함께 살아온 그들이 생계를 위해 다리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가 퇴행성 관절염이다.말을 버렸으니 말이 겪어야 할 다리의 노역을 고스란히 사람이 감당해야 하고,그러자니 관절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이를테면 문명이 그들에게 편의만 준 게 아니라 관절염의 고통까지 가져다준 셈이다. 사실 지금의 지리멸렬한 몽골을 보면서 옛 영화의 재현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엥크볼드 총리의 말마따나 강한 희구가 또한 강한 동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 혹은 희망이 읽히는 것도 사실이었다.구체적인 삶의 일이야 짧은 기간 머물다 이내 떠나야 하는 나그네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원나라 멸망 이후 일패도지해 세계 곳곳에 흩어진 혈족들을 다시 불러모아 당장 뭔가를 도모할 여력을 갖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가진 무한한 자연자원과 광물 등 지하지원,그리고 옛 영화에의 향수가 언젠가는 무한한 에너지로 발산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곳 ‘젊은 전사’들의 눈빛에서 읽힌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전사’가 아니라 ‘시민’이고 싶다 사실 몽골에서 마주친 젊은이들은 비록 입성이 초라하고,용모가 꾀지지하다 해도 눈빛 만큼은 여전히 도발적이고 진취적이었다.노마드의 기질을 타고난 그들은 바깥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적극적이었다.그들은 소득 수준에 어울리지 않게 자유로운 섹스를 즐긴다고 했다.이것 역시 유목의 한 관습이다.하기야 과거 칭키즈칸의 정복 시절,수만리 원정길에 나선 그 ‘전사’들이 무슨 재주로 제 나라 여자만을 품었겠는가.그렇게 생각하면 답은 간단한 것이었다.그로부터 자유로운 섹스의 관행이 또한 하나의 습속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울란바토르 시가지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휴대폰으로 통화하고,MP3를 즐겨들으며,더러는 콜라를 곁들인 햄버거를 먹기도 했다.그들 중 한 젊은이와 대화를 나눴다.올해 스물 두살인 그의 이름은 오고바흐타였다. -학생인가. ▲울란바토르 국립대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있다. -여자친구는 있는가. ▲있었는데,두달 전쯤 헤어졌다.나는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그 쪽 부모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사실 우리집은 양을 키우는 가난한 집인데 그 쪽은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어서 매우 유족한 편이다. -그런 일로 헤어져 안타깝지 않나. ▲처음엔 무척 속이 상했지만 어쩌겠나,받아들여야지.사실,날 좋아하는 여자들도 꽤 많다. -최근 몽골에서도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런 일이 있었지만 외국인에게 국내 일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그는 자국의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한사코 발언을 꺼렸다.) -사실,옛 영화를 돌이켜 보면 지금의 몽골 모습은 좀 실망스럽다.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기는 어렵다.경제적 어려움은 몽골의 현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중국의 집요한 방해가 크게 작용한 측면도 있다.중국은 네이멍구 자치주의 독립 요구를 의식해 철저하게 우리를 견제하고 있고,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이 더 심하다.사람들은 몰라도 네이멍구는 당연히 우리 땅이다.언젠가는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몽골은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는데 이 중 생활 여건이 좀 나은 내몽골은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돼 있다.) 또 정치인들이 더 정직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지금 몽골의 많은 실력자들은 부패해 있고,그래서 신뢰를 못 받고 있다. -혹시 밖으로 나가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당연히 기회가 되면 나가고 싶다.나 뿐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그걸 바란다.하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만약 갈 수 있다면 한국에 가고 싶다. -그럴 이유라도 있나. ▲몽골 사람들이 한국을 동경하고 있으며,나도 마찬가지다.생김이 비슷한 것도 좋고…,한 혈통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나.사실,2년 전 형이 한국 평택에서 돈벌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 몽골에 들어와 있다.형을 통해서도 한국 얘기 많이 들었다. 오고바흐타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몽골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생각보다 깊고 강했다.그들은 중국을 몽골을 토막낸 분열의 조종자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었다.근대 이전에 한족과 몽골족(흉노족·선비족)은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투를 끊임없이 되풀이했다.중국은 틈만 나면 군대를 동원해 흉노족을 토벌했다.칭기즈칸 이전만 해도 흉노족은 통일된 세력을 이루지 못해 항상 중국의 한족 토벌군에게 쫓기며 살아야 했다.한족 토벌군이 한번 들이닥치면 그들의 생업은 한순간에 초토화되기 일쑤였다.그럴 때면 이들은 또다시 기약없는 유랑길에 오르곤 했다.부족 단위로 연맹체를 이뤄 살았던 이들이 막강한 한족 토벌대에 맞설 결속력을 갖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이런 몽골인들의 한은 이들이 남긴 노래에도 흔적이 남아있다.‘해가 지면 저 먼 동쪽에서 낯선 말울음 들리고 갑옷 입은 적들이 초원의 단잠을 해치러 온다….’ 지금도 몽골의 유목민들은 게르를 지을 때 항상 출입구를 동쪽에 둔다.언제 한족 토벌군이 들이닥칠지 몰라 항상 동쪽을 경계하면서 살라는 의미였다.그것이 오랜 세월 되풀이되면서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그만큼 그들은 한족의 중국을 두려워하며 살았다.그런 두려움은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해 대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계속됐다.몽골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런 뿌리 깊은 적대감은 중국 본토를 정복해 원제국을 건설한 과정에서 여과없이 투영됐다. 칭기즈칸은 동서양 어느 나라를 정복해도 결코 무리한 동화를 요구하지 않았다.‘너희 식으로 살라.종교든 전통이든 다 예전처럼 향유하도록 허락한다.단,나를 배반하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겠다.복종하지 않으면 죽음 뿐이다.’이것이 정복자 칭기즈칸의 지배방식이었다.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철저한 복속을 요구했다.몽골인들이 갖지 못한 문자 말고는 모든 것을 몽골 식으로 바꿨다.그 과정에서 수많은 살륙이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몽골족은 중국 정복 이후 이전의 앙심을 철저하게 되갚았다.몽골이 우리나라를 대한 것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광경이다. 그와의 대화는 계속됐다. -젊은이들의 사교는 자유롭나. ▲그렇다.대학생쯤 되면 대부분 연인을 갖는다. -혼전 관계는 어떤가. ▲자유롭다.요새 젊은이들은 노인들과 다르다.부모 세대와는 그런 점에서 이해를 공유하기 어렵지만 유목민족이어서 그런지 어른들도 그런 점에서는 보기보다 개방적이다.그런 점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의 영향이 크다.이곳에서는 한국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실제로 그곳에서는 아리랑 TV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혼전에 동거하는 경우도 많지 않겠나. ▲당연하다.내 친구 중에도 결혼을 약속하고 같이 사는 애들이 많다.개중에는 아이를 둔 친구도 있다.사실 몽골에서는 유목 특성상 결혼식이라는 의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물론 전통적으로야 그렇지 않지만….요새는 젊은이들이 그런 습속에 얽매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나.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친구들 얘길 들으면 아직 몽골 대학에는 첨단 기술을 배우는 학과가 부족한 것 같다.한국이나 중국은 같은 기술이라도 세분화해서 가르치는데 몽골에서는 기술 분야의 경우 엔지니어링이라는 큰 틀에서 공부를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분야를 정해 공부를 한다.그런 점 말고는 별로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역사를 자부하되 거기에 갇히지는 말자.” 그 전에 투브 아이마그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만난 바이갈마 국립병원장은 자신이 옛 소련에서 의학을 공부했다고 얘기했다.이처럼 기성세대의 주류는 대부분 소련 유학파들이다.당연히 대학 교육의 주류도 소련 유학파들이었다.구미지역으로 나가 공부를 하는 부류는 대부분 나이가 젊은 신세대들이다.그들에게서 몽골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제국의 몰락 이후 한없이 추락하는 지리멸렬한 몽골이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뜻밖에 그들은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당찬 모습을 보였고,구닥다리 전통에 발목이 잡힌 답답한 국수주의자나 국가주의자도 아니었다.담담하게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몽골의 모든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어했고,과거보다 다가올 미래를 말하고 싶어했다. 오고바흐타와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그는 제법 기품있고 당당한 젊은이였다.자신의 생각을 말하는데 별로 주저함이 없었다.그는 몽골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을 ‘전통과 현대의 갈등’이라고 정리했다.현대적인 것도 좋지만 그것이 전통과 잘 어우러져야 하며 특히 현대문명이 몽골의 가족주의를 해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지금 몽골의 젊은이들은 거침없이 초원을 누비던 예전의 ‘전사’가 아니었고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오히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열린 세상에서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시민’이었다.오고바흐타가 그런 몽골의 바람을 내게 보여주었다. 하기야 울타리가 없는 초원에서 살던 그들이 문명의 규격화된 틀 속에 갇혀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몽골은 우리나라와 달리 컴퓨터로 대변되는 디지털의 수혜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마치 전통 매듭을 엮어 늘어뜨린 것 같은 그들의 문자 ‘외가르징’을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지 않아서다.이런 까닭에 그들은 지금도 몽골말로 의사 소통을 하면서도 글은 러시아 문자를 쓴다.예전에 한자를 들여와 우리 식으로 음을 부여한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몽골 구레대학에 재학 중인 아마르자르갈(20)이라는 여학생은 “이런 방식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그래도 사람들이 몽골말을 잊은 건 아니다.”고 말한다.그는 “정부가 지금 프로그램을 개발 중인데 한 3년쯤 후면 우리 문자로 컴퓨터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전망을 내놓았다.그들의 얼굴에서 몽골의 내일을 볼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전성기는 10∼12세기였다.이 때 몽골을 이끌었던 칭키즈칸과 그의 아들 우고데이,손자 쿠빌라이칸 등은 몽골은 물론 세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정복사업을 완성했다.지금 몽골인들이 갖는 자부심은 여기에서 기원한다.물론 그런 자부심이 그들에게 더 이상 ‘빵’이 될 수 없으며 ‘칼’도 될 수 없음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세계 어디를 가봐도 몽골인들처럼 순박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비록 경제적으로는 곤궁하지만 받은 것은 반드시 되돌려 주는 것도 특성이라고 할만 합니다.그것이 모욕이든 은혜든….이런 몽골 사람들을 상대로 일부 한국인들은 구차하다,못 산다,지저분하다며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몸짓과 표정을 드러내 보였는데 그런 한국인들을 보고 이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저것들이 이제와 우릴 얕잡아 본다.예전엔 우리 발밑을 기던 것들이….’라고 합니다.가난하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요.”ACC 김종구 회장의 말이다.그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몽골통이다.울란바토르에만도 그와 형님,동생 하는 현지인들이 즐비하다.몽골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뒤 이런저런 인연으로 현 총리와 울란바토르 시장 등 정부 고위 관료들과도 격의없이 지내 이젠 그들과 사적인 인연도 무척 깊다고 말한다.그는 몽골인들의 기질이 사내다운 면모를 좋아하지만 의외로 정에 약하다고 정리했다. 다시 그의 말을 듣자.“사실 많은 사람들이 몽골의 실상을 보고 실망하지만 이 나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자원이 있습니다.그래서 구미 열강들이 벌써 그걸 노리고 엄청난 공세를 펴고 있기도 합니다.일본만 해도 벌써 몽골의 지하자원 지도를 만들었답니다.우리가 오불관언할 처지가 아닙니다.지금 하지 않으면 늦습니다.알짜배기를 다른 나라가 다 가져간 뒤에 겉만 핥아대는 우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되지요.우리도 몽골을 장기적인 국가전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울란바토르에서 만난 또 다른 청년 오르디흐(‘오르디흐’는 산을 오르다는 뜻의 몽골어이다.그는 우리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며,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몽골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이런 말을 했다.“잘은 모르지만 유럽 국가들이 우리 지하자원을 불법적으로 채굴(무단 채굴이 아니라 당초의 협정을 위반한 채굴이라는 뜻)해 가고 있으며,이걸 우리 지도자들도 알고 있다고 들었다.그러나 그 후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는 모른다.국민들은 이런 점에서 지도자들이 좀 더 투명한 국정운영을 바라고 있다.”(사실 오르디흐의 말을 듣기 전에도 몽골 권력자들이 지하자원 채굴권을 외국에 넘기면서 막대한 사익을 챙기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지를 달구던 해가 설핏 기울자 울란바토르 거리에는 다시 사람들로 넘쳐난다.낮에는 없던 과일 노점도 서둘러 좌판을 펴고,재래시장도 아연 활기를 띤다.오가는 차량도 낮보다는 훨씬 많아진 듯 하다.시내의 한 음식점 창밖으로 내다본 울란바토르 시가지는 확실히 낮과 밤이 달랐다.더위 탓이리라.밤이면 활기를 띠는 곳이지만 중국의 도시들처럼 환락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그런 곳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지만….)도시 분위기는 그냥 수더분하고 소박했다.어둠이 내리자 나방이 다시 가로등을 에워쌌다.도심의 경직된 스카이라인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멀리 지평선 너머로 사위는 노을이 조용히 잔광을 거두고 있었다.음식점 점원에게 동쪽을 물었다.그 어디에 서울이 있을 것이다.‘오랑캐 말은 북풍에 귀를 열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운운했던 무명씨의 싯귀가 떠오른다.‘바람의 땅,태양의 나라’에서 맞은 하루가 또 그렇게 저물었다.(하편에 계속)
  • [사설] 종교간 화합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에 항의하는 범불교도대회가 어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20여만명(주최측 추산)의 불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별다른 충돌이나 사고가 없었던 것이 무엇보다 다행스럽다. 참석자들은 공직자들의 종교차별이 국민화합을 저해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화합과 상생의 정치를 펴줄 것을 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종교편향을 나무라는 불교계의 뜻은 정부는 물론 국민들에게도 충분히 전달됐을 것이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반성이 충분치 않다며 행사를 계속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요구사항을 끝까지 관철하겠다며 몰아붙이는 것은 관용과 용서의 종교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행사를 준비한 원학 스님도 봉행사를 통해 “야단법석의 대집회는 분열과 갈등을 끝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 만큼 범불교도대회는 종교간 화해와 평화를 다짐하는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종교편향의 수혜자였던 기독교계도 엊그제 타종교와 화평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종교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종교간 갈등이나 반목이 없어 종교화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상대편에 대한 배려, 존중이 없으면 종교평화는 순식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사태는 여실히 보여준다. 종교평화의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지도록 정부와 국민, 종교인들 모두 몸을 낮추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 [사설] 범불교도대회 종교편향 시정 계기 돼야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어제 종교편향에 대해 불교계에 사과했다. 유 장관은 종교편향방지입법을 추진하고 공직자들이 종교차별을 하지 않도록 공무원복무규정을 신설하고 관련자 처벌조항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불교계는 수습책이 미흡하다며 예정대로 오늘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헌법파괴·종교차별 이명박정부규탄 범불교대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종교편향과 관련,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것은 정부수립 이후 드문 일로, 종교평화국가의 전통이 깨지는 것이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정부는 이번 사태와 관련, 불교계의 4가지 요구사항 중 재발방지대책은 수용하고 촛불관련 수배자 해제는 불교계의 의견 및 법과 원칙을 감안하겠다며 신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명박 대통령 사과와 어청수 경찰청장 퇴진은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들에게 국민화합을 해치는 언동과 업무처리를 하지 말도록 주의를 환기시켰고, 어 청장도 불교계를 방문해 유감을 표명하도록 했다며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불교계는 성의가 부족하다며 추석이 지나면 전국 각지에서 규탄대회를 열겠다고 밝혀 상황에 따라 범불교도대회는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집회가 계속됐을 때 “먹거리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을 섬기지 못했다.”며 반성했다. 그런 마음과 다짐으로 불교계를 어루만지면 불교계도 마음을 열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불교계의 응어리진 마음을 푸는 데 소홀함이 없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종교간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면 종교계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 발휘돼 범불교도 대회가 종교편향에 따른 갈등을 풀고 새 출발을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기독교 등 여타 종교도 자중자애해 새로운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 [27일 TV 하이라이트]

    ●클로즈업(YTN 낮 12시35분) 정부가 지난주 부동산 경기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 주에는 공기업 선진화 2차 방안도 내놓았고, 다음 주에는 양도세 종부세 등을 포함해 세제개편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의 잇따른 대책이 경제불황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나라당 경제통인 이한구 의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본다.   ●산너머 남촌에는(KBS1 오후 7시30분) 인수와 가깝게 지내던 4년차 레지던트 여자친구가 보건소를 방문해 며칠 지내다 간다고 하자, 종아는 왠지 모를 소외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유미는 남자에게 여자친구란 없다며 종아를 가르치려 들고, 결국 종수와 함께 종아가 한심하다며 탓하다 들켜 시누이 올케 사이에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간다.   ●낭독의 발견(KBS2 밤 12시45분)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부분을 낭독하며 무대를 연 정훈희.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보릿고개 넘기기가 힘들었던 시절 읽은 책이다.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다시 일으키는 스칼렛의 강인한 모습은 그녀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가수 정훈희와 낭독의 무대를 함께한다.   ●극한직업(긴급 전기 보수팀)(E BS 오후 10시40분) 그저 서있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 100m의 상공에서 안전하고 밝은 밤을 만들기 위해 전기 보수에 한창인 긴급 전기 보수팀.2만 2000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만지며 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는 작업환경 속에서도 주어진 일에 묵묵히 매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대한민국 변호사(MBC 오후 9시55분) 잠에서 깬 민국은 자신 옆에 잠든 이경의 모습이 믿기지 않고, 이경은 여기서 뭐하냐는 민국의 말에 눈을 뜬다. 이경은 민국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맘을 드러낸다. 법정에 들어온 변혁이 판사에게 아파트는 부부의 공동재산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자 이경은 기가 막힌다.   ●애자언니 민자(SBS 오후 7시20분) 민자는 애자로부터 세아가 집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가워한다. 그러자 애자는 범만이 세아를 만나 설득했고, 더구나 자신이 바람을 피운 사실까지도 이야기했다고 털어놓는다. 애자는 자신이 채린을 낳은 데 대해 세아가 아직 용서를 안 했다며, 그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풀어갈 문제라고 말한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4) ‘독립문 공동체’ 예수회 박문수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4) ‘독립문 공동체’ 예수회 박문수 신부

    종로구 행촌동, 독립문 전철역 인근 골목의 천주교 ‘무악동 선교본당’. 마당과 툇마루가 달린 아담한 ㄷ자 한옥집의 이 선교본당엔 ‘독립문 공동체’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미사와 성사가 이뤄지는 신앙공간이기에 앞서 지역주민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주기 위한, 이 지역 주민 공동체 운동의 중심. 천주교 예수회에 소속된 미국 출신의 박문수(67·본명 프란시스 부크마이어) 신부는 10년간 이곳에서 주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사회복음’에 앞장 서온 독특한 사제이다. 예수회 사제로 살기 위해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했고 예수회가 세운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도 20년간 대학에 몸담았지만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택해 교수직도 버린 채 소신을 펴고 있는 거리의 사제요, 거리의 사회학자이다. ●공공임대 입주민들에겐 ‘과거사의 산증인´ 선교본당이란 재개발이 한창이던 지난 80∼90년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재개발 지역의 힘없는 빈민들을 돕기 위해 세운 작은 지역 성당들. 모두 5개의 선교본당이 세워졌고 무악동 선교본당은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본당으로 예수회가 맡아 오고 있다. 박문수 신부가 이 곳 주임신부 발령을 받은 것은 1999년이었으니 햇수로 10년째 주임 소임을 보고 있는 셈. 그동안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을 비롯해 지역주민들의 권익 찾기를 위한 자치회와 노인회, 부녀회 결성과 운영을 이끌고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 이 지역 주민들에겐 아주 유명한 ‘푸른 눈의 신부님’이 되었다. 특히 독립문 일대 공공임대주택 입주자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사의 산 증인이다. 현재 이 선교본당에 적을 두고 있는 신자는 고작 50여명. 보통 성당이라면 응당 천주교 신자 중심의 신앙공간이겠지만 박 신부는 이 선교본당을 말할 때마다 꼬박꼬박 “사회정의가 깃든 지역사회를 일구기 위한 공동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있게 목소리를 내고 참여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구심점인 만큼 신자든 아니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일곱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박 신부는 앨라배마 주 스프링힐 대학에서 철학과 생물학을 전공했으면서도 한국에서 사제로 살기 위해 한국의 가톨릭대학 신학과를 졸업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예수회가 운영하는 스프링힐 대학에서 박 신부가 공부하던 무렵 미국 예수회에선 한국에 관구를 설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박 신부도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학생들과 사귀면서 주저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사제의 꿈을 키워 한국행을 결심한 그가 번듯한 본당 대신 이른바 ‘도시빈민’들을 위한 작은 선교본당에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수시절 철거현장 강의로 유명 “원래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어요. 유전공학과 생명윤리는 천주교회에서 중요한 전략적 분야였으니까요. 하지만 서품을 받을 당시 군사정권의 암울한 한국 상황은 사제로서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머물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했어요.” 힘없는 지역 주민들의 수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인권, 재갈 물린 언론 등 초창기 한국생활에서 겪은 부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사회를 좀더 알고 파고들기 위해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으로 유학,5년간 도시사회학을 공부한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곧바로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직을 맡아 이 곳 선교본당 주임으로 오기까지 20년간을 강단에 섰다. 서강대 교수 시절 학생들을 이끌고 인근 도화동 재개발 지역을 찾아 다니며 철거현장의 폭력이며 내쫓기는 주민들의 아픔과 투쟁을 직접 체험케한 현장강의는 당시 박 신부에게 배웠던 사회학과 졸업생들에겐 지금도 잊지 못할 수업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한국의 재개발 사업은 정부의 투자를 기업체의 자본으로 충당하는 기본속성상 업체의 이윤창출과 가난한 지역민들의 희생이 따랐지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정부·업체의 횡포와 주민 강제철거는 도시사회학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학생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 뛰어들어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유학까지 다녀온 사제였으니 도시빈민들의 수난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 제정구(1999년 작고) 의원과 예수회 소속 정일우 신부가 주도했던 천주교 도시빈민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빈민운동에 뛰어 들었다. 먼저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끝까지 한국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생각에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에 귀화했다.1985년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상계동 재개발 사건이 터졌다. 말로만 듣던 철거현장에 직접 나가 목격한 실상은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억울하게 내쫓기는 세입자들과 가옥주들을 원수지간으로 만들고 용역회사 직원과 깡패를 동원한 강제 철거, 무자비한 폭력에 수수방관하는 경찰…. 철거현장에서 저질러지는 비인간성의 극치를 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함에 눈물을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정의는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것 ‘나약한 대학교수’로 강단에 선다는 것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현장으로 파고 들었다. 강제철거가 진행되는 재개발지역을 찾아가 폭력사태를 촬영하고 기록하다가 철거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뭉치게 하는 일에도 나섰다. 1990년 독립문 지역 철거에 앞서 다른 예수회 신부 두명과 전셋방을 얻어 살면서 주민들과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꾸렸고 결국 200가구에 달하는 세입자들이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도록 이끈 주인공이다. 강단에 서면서도 늘상 “대학교수보다는 빈민들의 옆에서 활동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중 1999년 서울대교구에서 ‘선교본당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해와 미련없이 교수직을 내놓고 이곳으로 옮겨와 살고 있다.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가장 빠른 길은 가장 나약한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하는 박 신부. 이젠 상황이 많이 바뀌어 도시빈민들의 입지도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홀대받기 일쑤라며 안타까워한다. “사제는 교회를 만들어 신자를 모으는 사목과 영성의 매개자로서의 소임도 갖지만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일구는 ‘사회사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난 80∼90년대 도시빈민들의 실상을 알리고 권익을 찾는데 앞장섰다면 이제는 주민들의 눈 높이에 맞춘 또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기쁜 소식, 즉 복음의 가치는 바로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란 소신엔 변함이 없다. “한국이 어려웠던 시절 천주교 사제들과 평신도가 함께 뜻을 모은 도시빈민회에 참여해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박 신부. 내년 2월이면 이 곳 주임신부 근무연한이 다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지만 어디에 있든 ‘한국의 사회 사도’임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웃는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박문수 신부는 ▶1941년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출생 ▶1960년 예수회 입회 ▶1966년 스프링힐대학 철학과 졸업 ▶1973년 가톨릭대 성신교정 신학과 졸업, 사제서품 ▶1979년 하와이주립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 ▶1979∼1999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1985년 한국 귀화 ▶1999년∼ 무악동 선교본당 주임
  • 수원 ‘생태발자국 지수’ 조사 착수

    경기 수원시가 전국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으로 생태파괴 수준을 면적으로 환산해 나타내는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지수를 측정해 발표하기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생태발자국은 인류의 자원(에너지, 식량, 원자재)생산이나 쓰레기 처리 등에 소요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낸 것으로, 수치가 높을수록 자연에 부담을 준다는 의미다. 수원시는 생태발자국 산출을 위해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ICLEI)가 선정한 1인당 소비지출, 인구밀도, 에너지소비, 통근거리, 쓰레기 발생량 등의 지표를 활용할 계획이다. 조사는 9월 말까지 전문기관 및 환경단체 등과 공동으로 실시한다. 수원시는 생태발자국 지도가 작성되면 이를 토대로 분야별 감소방안을 마련해 내년부터 시민 설명회와 학교·기관·단체대상 교육을 통해 생태발자국 지표 감축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용서 수원시장은 “생태발자국은 우리의 환경이 얼마나 훼손됐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종합지표”라고 말했다. 수원시는 이번 조사 결과를 내년 6월 캐나다에서 열리는 ICLEI 세계총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Metro] 수원시, 공무원 행사동원 안한다

    경기 수원시가 공무원들의 행사 동원과 입장권 강매 행위를 금지하기로 공무원노조와 합의했다. 22일 시에 따르면 수원시 김용서 시장과 전국민주공무원노조 경기지역본부 서형택 수원시지부장은 최근 열린 단체협약에서 이런 내용을 포함해 조합활동, 노동조건, 후생복지, 인사 등 모두 115개 항목의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시와 공무원노조 간 단체협약은 1949년 수원시청 개청 이래 처음이다. 이번 단체협약에서 양측은 부정부패 척결 차원에서 각종 행사 동원과 표 강매·할당 행위를 금지하고 부패신고 공무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도록 합의했다. 또 적재적소에 유능한 공무원을 기용하기 위해 직위공모제를 시행하고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7급 이하 근속승진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밖에 주 40시간 근무에 연장, 야간, 휴일 근무는 당사자 동의를 얻어 실시하기로 했다. 단체협약에는 숙직수당을 기존 5만원에서 6만 3000원으로 인상하는 한편 보육수당 지원, 생후 12개월 미만 자녀 수유시간 보장 등 여성복지를 향상시키고 출산을 장려하는 조항도 포함됐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Metro] 수원시 화성 종각 복원

    조선 정조가 ‘신도시 화성(華城)’을 축성할 당시 만든 종각(鐘閣)이 복원된다. 수원시 화성사업소는 21일 팔달구 팔달로1가 6의9 화성행궁 앞 종각 중건현장에서 김문수 경기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종각 상량식을 가졌다. 상량식은 중요무형문화재 85호 석전대제 이수자 최성종 선생의 집례로 식전 풍물놀이, 상량고유제의, 시장 축사, 도지사 치사, 상량문 봉안의식 순으로 진행됐다. 시는 2006년 10월 종각 일대를 역사공원 도시계획시설로 결정하고 토지보상, 학술용역, 설계를 거쳐 종 제작 및 종각 중건공사에 착수, 다음달 30일 완공한다. 종각 중건공사에는 모두 109억원이 들어갔다. 수원시는 종각이 중건되면 매년 10월 화성문화제 때 타종식을 가질 예정이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자꾸자꾸 그리워해도 그리움이 남아 있는 엄마”

    최근 암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시인 이해인(63) 수녀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시집 ‘엄마’(샘터)를 펴냈다. 지난해 어머니 김순옥씨가 별세한 뒤 써내려간 사모곡 60여편과 이에 앞서 어머니를 소재로 썼던 20여편의 동시, 유품 사진 등을 함께 묶었다. ●“아플 때 제일 먼저 불러보는 엄마” 올해로 수도생활 40년, 시인생활 30년을 맞은 그는 지금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항암치료에 몰두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절제된 시어로 드러낸다.“몸이 아프고/마음이 아플 때/제일 먼저 불러 보는 엄마/엄마를 부르면/일단 살 것 같다/엄마는/병을 고치는 의사/어디서나/미움도 사랑으로/바꾸어 놓는 요술천사/자꾸자꾸 그리워해도/그리움이 남아 있는/나의/우리의 영원한 애인/엄마.”(‘엄마’ 중에서) 시인 자신의 간절한 사모곡이지만, 세상 모든 자식들의 마음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만큼 그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껏 멋을 낸 어머니에게 수수하게 차려 입으라며 잔소리를 해대는 둘째딸,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카레라이스를 너무 좋아한 딸…. 시인은 ‘귀염둥이 딸’로 생전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언니 같고 친구 같던’ 자애로운 어머니를 추억한다. “엄마를 부르는 동안은/나이 든 어른도/모두 어린이가 됩니다/밝게 웃다가도/섧게 울고/좋다고 했다가도/싫다고 투정이고/변덕을 부려도 용서가 되니/반갑고 고맙고/기쁘대요.”(‘엄마를 부르는 동안’ 중에서) 세상을 등진 수도자이지만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딸일 뿐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삶의 지혜를 새삼 되새기기도 한다.“엄마가 모아 두신/수백 개의 단추들을/제가 수도원으로 가져간다니/매우 기뻐하셨지요/“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단추는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몰라”/하시던 엄마가/블라우스에 장식도 만들고/치마의 앞뒤를 분별하는/표지판도 된다며/단추 자랑을 하시던 엄마.”(‘단추 예술’ 중에서) 시인은 ‘엄마’의 주인공처럼 지혜로운 ‘원더우먼’이 되고 싶은 소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도장집·꽃골무 등 사진 실어 시집에는 시인과 어머니가 주고 받은 편지와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도장집과 꽃골무, 괴불 주머니 등의 사진도 실려 있다. 시인은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암 선고를 받았을 때의 심경을 들려 줬다.“지금 아픈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 몰라요. 투병의 고통을 통해 더 넓고 깊게, 모든 이들을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병자록(丙子錄)’‘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종로구, 전국 첫 도로굴착 실명제

    종로구, 전국 첫 도로굴착 실명제

    전국 최초로 도로굴착 공사 ‘실명제’가 실시된다. 종로구는 도로굴착 시 주민과 차량운전자가 무슨 공사인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도로굴착 노면에 공사계획과 시공사를 표시하는 ‘굴착실명제’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는 미리 공사 내용을 알려 시민불편과 민원발생을 줄이고 안전한 공사를 하기 위해서다. 기존의 공사안내문과 안내 간판에는 공사시행 업체 등 자세한 설명이 없어 잦은 민원에 시달렸다. 구는 이런 문제해결을 위해 공사가 시행될 길 위에 공사정보를 표시함과 동시에 시행사까지 알 수 있는 굴착실명제를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 또 현재 10m 이하 소규모 굴착의 경우에는 당일굴착·당일복구가 원칙이지만 문제점을 쉽게 찾지 못해 며칠씩 걸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때 임시복구로 보기에도 좋지 않고 통행불편으로 많은 민원이 발생한다. ‘굴착실명제’를 시행하면 주민들이 공사내용과 시행사를 알 수 있고 무분별한 도로굴착이라는 주민들의 오해도 방지하는 등 여러 민원을 해결할 수 있다. 한편 구는 ‘굴착실명제’를 서울시 전용서체인 ‘서울서체’를 이용해 표시할 계획으로, 디자인서울 가이드라인 기준마련과 서울거리 르네상스 사업의 성공적 추진에 기여할 계획이다. 오는 9월부터 100m 이상 관로에 대해 굴착실명제를 우선적용하고 내년 상반기 도로굴착부터는 소규모 굴착에 대해서도 적용할 예정이다. 김충용 구청장은 “도로 곳곳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공사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이번 실명제 도입으로 시행사는 책임 시공을 하고 주민들은 민원을 직접 해결할 수 있어 깨끗하고 편리한 종로구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동유럽 국가 ‘그루지야 후폭풍’

    러시아가 그루지야 사태에서 보여준 초강경 대응의 여파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체코 등 친서방 성향의 러시아 주변 국가들이 바짝 긴장했다. 옛 소련의 영향권에 있었던 이 나라들은 자칫 러시아의 손아귀에 다시 들어갈 것을 우려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안보협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에 맞서 러시아는 냉전 이래 처음으로 발트함대를 핵탄두로 무장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돌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통합 방공시스템 추진우크라이나는 16일(현지시간) 미사일 공격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는 통합 방공시스템을 미국·유럽과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 시스템은 유럽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가 올초까지 사용하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두 나라가 1992년 체결한 미사일 조기 추적 방공시스템이 올초 러시아의 협정 파기로 무효화됐다.”면서 이같이 제안했다고 BBC, 텔레그래프 등이 보도했다. 친서방 노선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앞서 크림반도에 배치된 러시아 흑해 함대가 세바스토폴 항구에서 출항하려면 사전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혀 러시아의 반발을 샀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이런 조치는 내부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러시아의 공격 우려와 맞물려 있다. 현지의 한 유력 인터넷 매체는 16일 “서방이 그루지야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를 용서하면 러시아의 탱크들이 우크라이나로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라고 보도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반발로 그동안 최종 합의를 미뤄 왔던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MD)계획을 최근 전격 수용했다. 그루지야 사태를 지켜 보면서 안보협력 필요성을 절감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英언론 “러, 발트함대 핵탄두 무장 검토”그 결과 러시아가 보복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17일 미국의 MD에 맞서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에 주둔한 발트함대를 핵탄두로 무장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 땅이다. 폴란드에 앞서 MD에 합의한 체코도 불안해 하긴 마찬가지다. 미레크 토폴라네크 체코 총리는 현지 언론 기고문에서 “그루지야 거리의 러시아 탱크는 1968년 소비에트의 체코 침공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또다시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묻는 현재적 질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MD정책 반대자들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 3국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3국 정상은 지난 12일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정상들과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열린 러시아 항의집회에 참석해 연대를 다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 인터넷판은 17일 그루지야 전쟁을 사실상 지휘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지나친 압박이 오히려 역내 국가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편 18일부터 남오세티야에서 군 철수를 시작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발표가 17일 나온 가운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각각 러시아의 즉각 철군을 요구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콘텐츠 부실·설익은 게임 찬밥신세

    콘텐츠 부실·설익은 게임 찬밥신세

    밥을 지을 때에는 뜸들이기가 밥맛을 좌우하듯 게임도 개발기간과 완성도가 ‘게임맛’을 좌우한다. 개발기간을 앞당겨 설익은 상태에서 내놓은 게임은 이용자의 외면을 받는다. 반면 개발기간은 길더라도 완성도를 높인 게임은 당연히 이용자의 인기를 얻는다. ●완성도 낮아 이용자들 외면 대표적인 설익은 게임으로는 리처드 게리엇의 ‘타뷸라라사’와 빌 로퍼의 ‘헬게이트 런던’을 들 수 있다. 리처드 게리엇은 역할수행게임(RPG)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울티마’ 시리즈를 만든 전설적인 개발자다. 그런 그가 2001년 엔씨소프트와 손을 잡고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타뷸라라사를 북미에 선보였을 때 기대치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게임은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곧 시장에서 잊혀져 갔다. 이런 사태의 원인에 대해 이재호 엔씨소프트 부사장은 최근 실적발표에서 “타뷸라라사는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상용화되면서 이용자들의 실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헬게이트 런던도 비슷한 경우다. 빌 로퍼는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어도 여전한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크래프트’나 ‘디이블로’ 시리즈를 만든 스타개발자다. 빌 로퍼가 스타크래프트의 블리자드사(社)를 나와 플래그십이라는 게임사를 만들면서 심혈을 기울인 헬게이트 런던은 그의 전작 디아블로의 최신 시리즈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정작 뚜껑이 열린 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이용자들의 불만이 계속 터져나왔다. 성급하게 게임을 선보인 탓이다. 플래그십 개발진은 북미와 유럽에서 게임유통을 맡은 미국 게임회사 일렉트로닉아츠(EA)의 압박 때문에 완성도가 미흡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게임을 론칭했다고 밝혔었다. 이런 일은 외국의 유명 게임개발자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국산 온라인 게임에서도 완성도는 떨어지는데도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경우가 있었다. 한 게임업체 관계자는 15일 “과거에는 일단 게임을 선보이고 비공개 서비스나 업데이트를 통해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설익은 게임을 선보이는 이유는 돈 문제 때문이다. 게임개발 기간이 길면 비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건비가 늘기 때문이다. ●블리자드 게임 출시일 보다 완성도 치중 하지만 더 이상 국내에서도 완성도가 떨어진 게임을 선보이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비공개테스트 과정에서도 이미 완성된 게임을 선보이는 경우들이 많다. 다른 게임업체 관계자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공개 테스트라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소문이 들면 아예 상용서비스를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의 비벤디그룹과 합병하면서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된 블리자드사는 차기 게임 발매시기를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용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스타크래프트2’나 ‘디아블로3’는 게임 동영상을 선보일 정도로 개발이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정작 블리자드측은 언제쯤 게임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블리자드사의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시리즈가 인기를 얻은 것은 다른 요소도 있지만 높은 게임의 완성도도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1637년 1월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12월 그믐과 정월 초하루, 몽골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홍타이지는 휘하 장졸들에게 군기를 확립하고 함부로 약탈을 자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몽골병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청에 귀순했고, 또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군기를 강조하여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고 묶어두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지켜 줄 군사도, 이끌어 줄 조정도 없는 상황에서 도성 백성들은 몽골병들의 분탕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도성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칭신(稱臣) 여부를 둘러싼 고민 1월3일,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조정은 당장 홍타이지의 ‘조유(詔諭)’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조유를 건네받는 자리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부하지 못한 이상, 조선은 이제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회답서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김류는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청에 대해 ‘칭신(稱臣)’하는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여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류가 울자 인조도 울기 시작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뒤 벌써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인조였다.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를 적에만 해도, 아니 정묘호란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눈물이 잦아질 만도 했다. 이홍주(李弘胄)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상 ‘대청황제(大淸皇帝)’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 했다. 홍서봉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군부(君父)를 보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저들의 지적대로 요금원(遼金元) 시절의 고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는 주장이었다. 김신국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그들에게 칭신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하더라도 인조가 직접 홍타이지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월30일, 인조가 성을 나가서 항복할 때까지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장유(張維)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단 ‘조유’에서 홍타이지가 질책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과하되,‘칭신’ 여부는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식(李植) 또한 ‘대청황제’라는 칭호는 그냥 사용하되 ‘칭신’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답서의 서식(書式)과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외로운 성에 갇혀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멸시해 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황제’임을 인정하다 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에 보내는 서신을 ‘조유’ 운운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홍타이지와 청의 위상을 처음으로 인정한 표현이었다. 답서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소방(小邦)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特使)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나 병과(兵戈)에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궁벽한 구석까지 오셨다는 소식에 의심과 믿음,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소방이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 소방 신민들의 식견이 얕고 좁아 대국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눈앞에 닥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되, 자존심을 최대한 살리려는 몸짓이었다.‘조유’ 속에 넘쳐나는 홍타이지의 ‘질책’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면서 사죄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의 뒷부분은 홍타이지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방에게 새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청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홍서봉(洪瑞鳳),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이 답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황제는 만나지 못했다. 답서를 접수한 마부대는 상의한 뒤에 회답을 주겠다고 했다. ●비변사의 독주에 대한 반발 상황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비변사의 몇몇 신료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화친을 추진하는 것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비변사 신료들은 과거 척화·주화 논쟁 때처럼 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적진에 보내는 문서의 초안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주고받았다.‘인조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에 넣어 출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했다.‘우리는 참월(僭越)하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오랑캐에 맞서 명나라를 대신하여 화란을 당하는 것’이니 ‘의열(義烈)에 당당하고 해와 달에 비춰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의 국서를 태워버림으로써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친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조유’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신료들 사이의 논란을 다시 방치할 경우, 화친의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7년 1월 초, 청과 조선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조유’와 조선의 답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의 ‘꿈’은 청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록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를 ‘조선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조선국왕’으로 남아 명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국왕’이란 표현 대신 ‘신(臣) 이종(李倧·인조의 이름)’을,‘숭정’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의 꿈이 실현될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페루 국회의원, 이웃집 애완견 총살 논란

    이웃집 개를 무자비하게 총으로 쏘아 죽인 페루의 한 국회의원이 60일 의정활동금지 징계를 받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페루 국회는 지난 7일 비공개회의를 열고 ‘애완견 사살’ 혐의로 고발된 미로 루이스 국회의원을 징계했다고 현지 언론이 10일 보도했다. 페루 국회는 “동물을 향해 총을 쏜 것은 국회의원 윤리규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징계를 결정했다. 사건이 발생한 건 3개월 전인 지난 5월. 자신이 길러온 새가 사라지자 흥분한 문제의 국회의원은 이웃집 개를 범인(?)으로 추정, 총격을 가했다. 18개월된 슈나우져종 개는 총탄 3발을 맞고 죽었다. 애견이 죽자 이웃 주인은 “마티아스(개의 이름)가 새를 잡아먹었다는 증거도 없는데 이성을 잃은 국회의원이 발포를 했다.”며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미로 루이스 의원은 사과성명을 내고 “경솔하게 총질을 한 건 실수였다.” 며 “애완견을 잃은 주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총기류를 불법으로 소유하고 있던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국회는 징계위원회를 소집했다. 미로 루이스 의원은 “인간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징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사과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손영식 nammi.noticias@gmail.com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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