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말의 향기/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욕설과 비속어, 외래어와 성적표현으로 가득 채워진 우리말을 생각하면 절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쓰는 사람이야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들을 사용하겠지만, 저속한 표현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만나면 그 천박성이 감각으로도 전해지는 것 같아 몸부터 움츠러들기 십상이다. 대중적 언사(言辭)이든 현대인의 욕망을 관습화한 표현이든 그런 말투로 상대와 마주서는 사람이라면 인품부터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쇼 오락프로그램처럼 즐기기 위한 경우라 하더라도 저급한 언술의 바이러스는 그 오염의 폐해를 지겹도록 겪고 난 뒤에야 심각성을 깨닫게 만든다. 그때 말의 사회성은 돌이킬 수 없도록 피폐해져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은 사람의 경험이나 느낌,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말은 소리이면서 글자이자 색깔이면서 의미이기도 하지만, 존재가 포섭하는 세계의 울림이기도 하다. 말을 로고스(Logos)로 표현했던 옛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오성(悟性)이나 이성뿐 아니라, 진리와 신성까지 함께 자각하려는 예지가 자리잡고 있다. 말은 소리의 연쇄나 문자 기호의 단순한 조합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의미의 실질’이 따라야 한다. 의미의 실질이란 표현에 상응하는 경험적, 사상적, 현실적 ‘근거’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말의 쓰임새나 방편도 다양해진다. 인간의 사유와 경험이 시대의 변화와 굴곡을 끌어안는 까닭이다. 그러나 변화가 개입한다고 해서 우리가 쓰는 말을 세태의 급류 속으로 그냥 내몰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말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하게 치장되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신뢰가 늘 싱싱하게 유지되고 진실이 대접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말에 담긴 참뜻이 상록수처럼 가꾸어져야 사람 사이의 믿음 또한 넉넉하고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말이 오용되거나 변질되어 나날이 제 가치를 잃어버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국어의 피폐는 절박한 순간에까지 이르렀다. 기계적 편의성을 앞세워 말의 규범을 제멋대로 파괴하기 예사이고, 탈락과 축약, 은어와 특수기호로 괴상하게 변형시킨 표현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 우리말을 혼돈의 나락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오염된 말이 횡행하는 이면에는 “거짓말도 잘하면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는 식의 진실을 경시하는 우리 특유의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말은 때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도구로써, 비열하고 가련한 ‘죄악의 연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말로 비롯되는 투쟁과 분열로 인격의 존엄성은 심각하게 침해받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말이 미덥지 못한 사회일수록 궤변과 수사적 허위가 횡행하며, 결국은 사람이 살아 갈 수 없는 위기의 세상으로 변하고 만다. 나쁜 말은 인간의 무의식 깊은 곳에 웅크린 저열한 방어심리들을 활성화시켜 속임수, 시기, 질투, 과장, 욕설, 분노 등을 동원하도록 자극하며, 나아가 인간 정신의 황폐화를 부추기는 것이다.
말을 가볍게 생각하고 참과 진실의 구분이 모호하게 된 세태라 해서 말의 순수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말의 가치가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우리는 자연의 황폐는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 보호에 열정을 쏟지만, 말의 오염에는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고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거짓과 과장에 물든 불신의 말들을 함께 반성하고 몰아내려는 의식화된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까지 대중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쪽 팔린다.’라는 비속어를 남발하는 나라에서 국어정화운동이 또 무슨 소용이리. 우리 아이들의 세대가 더욱 극심하게 오염된 언어의 노골적인 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릴까 두려울 따름이다.
김명인 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