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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마당] 인문학의 밭과 시장/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한 대학의 교수들이 인문학 선언을 하고, 전국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이 협력하여 인문학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행사를 했던 것이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래서 제법 세간의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늘 그렇듯이 그 관심이 오래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위기다.’라는 말이 뒤따라 튀어나와 이 일에 관계한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말은 ‘너희 인문학자들이 해놓은 일이 무엇이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터인데, 나 같이 인문학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적잖이 원망스러운 말이다. 짧게 말한다면 우리의 인문학자들이 울타리나 지키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처신할 수 있는 정황도 아니다. 인문학이 세상의 직접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우수한 신진 인력들이 몸담을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든다고 해서, 인문학이 감당해야 할 영역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어서 인문학자 개인들이 떠맡아 책임져야 할 일은 그만큼 더 많아진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듯 너덜거리는 강의 노트 하나로 10년,20년을 버티는 교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공부를 성실하게 부지런히 하는 사람일수록 표가 안 나는 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 이 학문의 성격이기도 해서, 세상에서 잊히고 스스로도 사기가 꺾인 나머지 자신의 일과 삶을 더듬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같은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하는 동료들을 이따금 만난다. 그렇다고 세상과 그 시장을 무턱대고 원망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시장과 시장의 욕망이야말로 인문학이 온갖 억압을 벗고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었고 그 발흥을 도운 동력이었다. 역사를 들먹일 것까지도 없다. 이제 그 시장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다고는 해도,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인문학의 임무일진대, 인간들이 저마다 운명을 걸고 있는 그 시장에 대한 성찰의 책임을 어느 다른 손에 떠맡길 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의 인문학 시장은 넓으며, 그 시장을 통해 우리가 소비하는 인문학의 양은 적지 않다. 천만명의 관객 동원이 다반사로 되어버린 우리의 영화도, 동남아의 안방 깊숙이 파고들어간 우리의 방송 드라마도 그 배후에는 어떤 수준의 것이건 인문학이 있다. 각종 기록 영상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단발성 화장품 광고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학문과 예술의 성과를 소비한다. 누구는 활자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하지만, 각종 출판물을 통해서건 인터넷의 게시문과 댓글을 통해서건 우리 시대만큼 문자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인문학을 요구하고, 인문학이 충족시키고 개선시켜야 할 자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많다. 문제는 인문학 소비 시장의 확장과 흥왕이 그 생산자들의 힘을 북돋워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마치 시장의 배추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라도 밭에서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는 그 생산비도 채 건지지 못하는 경우와도 같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어느 명망 있는 번역가의 번역에 수많은 오류가 있다고 누군가 지적하면 일시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다. 그러나 전문적인 수준에서 번역의 문체와 수사를 분석하고 그 윤리성과 인문학적 의의를 논의하는 연구와 연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연구는 온갖 우회로를 거쳐 수많은 번역 출판물에 이용되고, 그래서 한 권이라도 번역서를 읽은 사람은 그 혜택을 입기 마련이지만, 그 연구의 과정과 환경은 늘 사회의 관심 밖에 있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논의는 오역이나 트집 잡는 원시적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관심 밖의 연구에는 사회적 투자도 물론 없다. 이 지식 유통구조를 고칠 수 있는 길은 멀다. 그러나 소비시장의 사회적 투자를 기다리기 전에 생산자들이 제 생산품이 어떻게 소비되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일이 그 개선의 첫걸음인 것은 분명하다. 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 불문과 교수
  • [발언대] 산 소중함 되새기자/손봉영 산림청 구미국유림관리소장

    국토의 3분의2를 차지하는 산에는 나무와 풀뿐 아니라 그 밑 땅 속에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각종 동물들이 먹이사슬을 이루면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명을 유지해간다. 모든 동·식물들이 산을 생명의 축으로 한 하나의 생태계 속에서 인간과 공존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의 균형을 무시한 무자비한 산림파괴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지구환경은 재생 능력을 상실해 가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이상징후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자 유엔은 지난 2002년을 세계 산의 해로 정한 바 있다. 우리 정부도 10월18일을 산의 날로 정하고 산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 있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산행인들이 머문 자리에는 아직도 산림훼손과 함께 쓰레기가 쌓여 있고, 가재도구마저 버리고 가는 등의 무질서한 행락질서가 계속되고 있다. 산을 찾는 목적이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성장과 보람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면 올 단풍 나들이부터는 행락질서를 지키고 남이 버린 휴지라도 주워오는 선진시민이 늘어났으면 한다. 또한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위락시설 등을 조성하기 위해 산림 곳곳이 파헤쳐지는 광경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인간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산을 파괴한다면 자연은 더 이상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를 제공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산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숱한 동·식물들이 인간이 저지른 환경파괴로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등 이미 생태계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자연환경과 생태계는 한번 파괴되면 좀처럼 복구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도록,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모으기를 당부한다. 손봉영 산림청 구미국유림관리소장
  • [일요영화]

    [일요영화]

    ●말타의 매(EBS 오후2시20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의 허무함을 다루는 필름 누아르의 걸작. 필름 누아르의 ABC가 담겼다. 신사 숙녀들은 이제 더 이상 점잖치 않은, 욕망의 노예이자 남들을 등쳐 먹는 요부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쳐 허둥대고 배신과 속임수에 능숙하다. 그 와중에 주인공의 쓸쓸한 뒷모습이 클로즈업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 착한 것만도 아니다. 이렇게 펄펄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을 음울하고도 비관적인, 그야말로 누아르적 연출로 뒷받침한 20세기 대표영화를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영화가 됐다. 이 영화 덕분에 감독 존 휴스턴과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새뮤엘 해밋의 유명한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스토리는 탄탄하다. 탐정 샘은 어떤 여자로부터 남자에게 빠져 사라져버린 여동생을 찾아달라는 사건을 의뢰받는다. 동료를 보내 해결하려 하지만 외려 동료는 물론, 여동생을 꼬여냈다는 남자마저 살해당한다. 자초지종을 알고자 의뢰인 브리짓을 찾아간 샘은 의뢰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다 수상한 남자로부터 ‘말타의 매’ 조각상을 찾아달라는 새로운 의뢰가 들어온다. 고대 말타 섬의 기사단이 스페인 국왕에게 바쳤다는 이 매 조각상은 그 안에다 엄청난 보물을 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샘은 이 의뢰를 처리하면서 ‘말타의 매’에 얽힌 놀라운 비밀을 하나씩 풀어간다. 그리고 뭔가 위험한 낌새를 알아차리면서도 브리짓에게 점차 빠져들기도 한다. 마침내 밝혀진 진실은? 알고 보니 모두가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1941년작,100분. ●프리즈 프레임(KBS1 밤12시30분) 괴기스럽다고 할 정도로 실험성이 돋보이는 스릴러물. 살인범으로 몰렸다가 겨우 풀려난 숀은 그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해둔다. 그 어떤 사태가 닥쳐도 비디오테이프를 무죄 증거로 내놓겠다는 생각에서다.10년 동안 찍은 비디오 테이프는 산처럼 쌓이지만, 한순간 도로아미타불이 된다.5년 전 살인사건을 쫓던 경찰이 숀을 의심하는데 그 때 찍은 비디오테이프만 사라져버린다. 코미디언 리 에번스가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이란 잠깐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정지화면을 뜻한다.2004년작,99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새영화 ‘파이널 컷’

    새영화 ‘파이널 컷’

    ‘파이널 컷’은 조이칩이라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그러나 얼마든지 있을 법한 기억장치를 등장시킨다. 인간의 일생을 시간단위까지 낱낱이 영상과 음성으로 기록하는 조이칩은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걸작이다. 태어날 때 이식된 칩은 사망하면 분리해 ‘커터’라는 편집자의 손을 거쳐 장례식의 ‘리메모리’의식 때 상영되는 부유층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이란 게 단 몇 십분에 편집된 영상만큼 아름답고 고귀하기만 한 것일까. 시나리오에 감독까지 맡은 오마르 나임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은 그래서 잘 닦인 칼처럼 날카롭고 섬뜩하다. 이름값 하는 ‘커터’인 앨런(로빈 윌리엄스)은 어느 부자의 리메모리를 위해 조이칩을 편집하다가 소년시절 자신이 죽게 만든 친구가 성인이 된 모습을 발견한다.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온 앨런은 죽음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뇌하던 중 자신에게도 조이칩이 이식돼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조이칩을 볼 수만 있다면 비밀은 저절로 풀리는데…. 영화는 몇 사람의 일생을 편집기를 돌리면서 보여준다. 번듯한 망자의 이면에는 불륜이 있는가 하면 음모가 있고, 끔찍한 근친상간이 숨어있는가 하면 비열함이 존재한다. 해서 관객이 스크린에 빨려들어가면 갈수록 마치 자신에게 조이칩이 이식돼 있는 듯한 착각으로 쑥 밀어넣는다. 1977년생의 오마르 나임의 장편 데뷔작으로 ‘기억의 소멸’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시사한다. 러닝타임 95분의 비교적 짧은 영화는 “앗, 이게 끝이야!”라는 탄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올 만큼 끝마무리가 왠지 허전하다.12세 관람가.12일 개봉.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 [12일 TV 하이라이트]

    ●글로벌코리안(YTN 오전 10시25분) 미국내 한인동포들의 마약 관련 범죄가 심각하다. 밀매 수준을 넘어 마약을 사기 위해 강도 행위까지 저지른다.LA경찰은 한인타운 내 마약밀매 장소도 2배 이상 늘어났고, 여성·청소년도 마약 관련 범죄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밝혔다. 증가한 마약범죄율에 비해 치료를 받는 한인들이 적어 심각성을 더한다.   ●생방송 60분­부모(EBS 오전 10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인 수학이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수학에서 엄마들이 꼭 알아야 할 기본 개념을 알아본다. 수학을 학원에서 배우는 어렵고 두려운 학문이 아닌 일상 속 재미난 소재로 배우고 익히는 방법도 알아본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오후 8시55분) 젊은 시절, 가수활동을 하면서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에 시작한 불법성형 시술. 한미옥씨는 지난 20여년간 얼굴을 잃어버린 채 세상과 벽을 쌓고 살아야했다.10차례에 걸친 성형수술을 마친 요즘 가수의 꿈을 되찾으려 노력하는데…. 세상 속으로 한 발 다가선 한미옥씨를 만난다.   ●여우야 뭐하니(MBC 오후 9시55분) 한 술집에 마주앉은 철수와 희명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집에서 나오던 희명이 병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자 철수는 멈칫하며 차 뒤로 숨는다. 다음날 창고방에 철수와 함께 있던 병희는 승혜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계단으로 가려고 하지만 준희가 초인종을 누르자 깜짝 놀란다.   ●해피투게더(KBS2 오후 11시5분) 옥동자 이후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골목대장 마빡이 정종철의 남다른 어린시절 비화들이 공개된다. 체격이 좀 크긴 했어도 얼굴이 예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아서 인기가 많았던 박지윤 아나운서. 서로 좋아하면서도 눈만 마주치면 싸웠던 친구와의 특별한 사이가 공개된다.   ●열아홉 순정(KBS1 오후 8시25분) 동국은 우경의 능력과 인간성에 끌려 호감을 보이지만 명혜는 무조건 결사반대다. 옥금과 혜숙은 몸보신을 위한 추어탕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풍구가 일하는 야간업소를 찾은 팔자는 감춰뒀던 푼수끼가 발동하고 만다. 자존심을 죽이고 협력업체에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윤후는 술에 취해 괴로워한다.
  • [문화마당] 인문학은 위기인가/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 교수

    인문학의 위기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달 고려대 문과대 교수 전원이 서명한 ‘인문학 선언’이 발표된 후, 전국 80여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촉구했고, 학술진흥재단은 인문주간을 선포했다. 그 뒤를 이어 출판인들도 인문학과 인문서적의 위기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이러한 집단적 표명들은 인문학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은 이례적으로 커다란 사진과 함께 거의 한 면을 다 차지하는 특집 기사들을 내보냈고, 방송은 메인 뉴스의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서 보도해 주었다. 반면에,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들을 별로 우호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들이 인문학 내부에서도 표출되었다. 기초과학을 포함한, 이른바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행위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데 인문학만이 특별히 위기라고 선언하는 것은 별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는 투정이라는 비판에서부터,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내재적 비판론, 그리고 인문학은 항상 위기였다는 주장,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인문학의 위기가 인문학의 본질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응이었다. 모두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 이의제기였다. 시장에서 배제되어 방치된 것 중에 인문학보다 더 심각하게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들도 많이 있고, 인문학이 학문적 자폐증에 빠져 구체적인 삶의 현실과 건강한 관계를 상실하고 바깥 세상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도 맞는 말이며, 인문학이 항상 자신의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정체성을 만들어 왔다는 것도 적절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은 위기에 있으며, 위기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위기, 인문학 전공자의 위기라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적 삶으로부터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박탈되고 있는 어떤 인간적 능력과 가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라고 느끼는 것의 실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하고 반응하고,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인간 능력의 총체적 위기이다. 우리의 진전된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 능력에 적대적인 것은 자명하다. 학교에서부터 대중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이 능력을 신장시켜줄 우리 공동체의 사회적, 문화적 자원들은 급격하게 사라지거나 주변화되고 있다. 이 공리주의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주도하는 것은 자본과 과학기술이며, 전자기술과 결합한 새로운 매체가 우리의 욕망을 끌어가는 힘은 맹목적이고 압도적이다. 정보와 이미지의 과잉 생산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기보다는 인간을 왜소하게 하고 퇴행시키고 있다. 따라서 인문학의 위기는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특수하고 구체적으로 우리 시대의 것이며,‘내 탓이오.’라고 말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위협하고 있는 어떤 힘의 작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가 주체적 판단과 비판적 개입의 능력, 공적 인간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는 시민적 능력의 위기라면 그것은 더 적극적으로 확인되고, 더 넓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민주적 공동체의 위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의 인문학 위기에 대한 표명들이 적어도 이러한 인식의 일부라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언어를 찾아내고, 인문적 능력을 대중에게 복원시킬 수 있는 실천적 프로그램을 모색하는 것이다. 학교와 대학, 대중미디어와 출판, 그리고 일상적 삶의 다양한 상징 행위들로 이어지는 지식 생태계의 순환구조에서 대학은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 생산의 조건 속에서 인문적 능력의 복원을 위한 진지하고 실제적인 노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인문학 위기 담론은 대학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의 지적 만족감에 머무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여건종 숙명여대 영문학 교수
  • 儒林(70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2)

    儒林(70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5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52) 퇴계가 자신의 ‘이기이원론’을 말을 탄 사람은 이(理)로, 말을 기(氣)로 비유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理)는 귀하고 기(氣)는 천하게 보는 ‘이우위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릴 때 말이 순조롭게 의지에 순응하여 달리는 경우는 이에 기가 순응하는 것이며,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며 말 스스로의 의지로 달릴 때에는 기가 이에 불응하는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이로써 칠정, 즉 인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독특한 철학은 박택지(朴澤之)에 보낸 서한에서 ‘사람의 한 몸에는 이와 기가 겸비하고 있으나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人之一身 理氣兼備 理貴氣賤)’라고 표현한 내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는 퇴계가 이기론을 인성론 계열로 수용하고 이와 기를 각각 공아(公我)와 사아(私我)에 적용하여 ‘천아무간(天我無間)’을 실현하기 위해 수양의 재료로 삼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이 퇴계의 이기론이 비록 주자의 이기론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주자의 이기론을 한층 더 심화시킨 퇴계만의 독특한 철학사상인 것이다. 주자는 이를 만물이 갖고 있는 ‘소이연의 이(理)’, 즉 만물이 갖고 있는 원리(原理:principal)로 보고 있지만 퇴계는 이(理)는 인간이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소당연의 이’ 즉, 이성(理性:reason)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의 이기론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한 데카르트의 이성론을 연상시킨다. 데카르트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고 있는 이성능력을 ‘양식’, 또는 ‘자연의 빛’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여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카오스로부터 조화적인 우주의 코스모스로 전환시키는 빛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밝은 빛인 이성에 견주어보면 칠정의 감정적 욕망이나 욕정은 어둡고 맹목적인 광기이다. 기쁨, 슬픔, 분노, 욕망, 두려움의 감정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 내부에서 폭발한 광기인 것이다. 이것을 이성적 의지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정신의 자유성을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이성에 의한 감정지배에는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실천이성(實踐理性)’인 것이다. 퇴계의 이기론은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의 실천이성론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에 있어서 이기론은 주자가 말하였던 ‘만물이 갖고 있던 원리’이기보다는 칠정을 극복하고 사단을 확충하면 하늘과 내가 다름이 없는 ‘천아무간(天我無間)’의 성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양론과 일치하고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퇴계가 ‘퇴계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학문을 하는 것은 기질의 편법됨을 바로잡고 물욕을 막고 덕성을 높여서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로 들어가는 것이다.(君子爲學 矯氣質之偏 禦物欲 而尊德性而 歸於大中至正之道)”
  • 인간사색/강준만 지음

    “한국에서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발달돼 있지 않다. 왜 그럴까. 높은 인구밀도와 특유의 정(情)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가 가장 중요한 게 인간관계일 텐데, 왜 그 연구가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걸까.” ‘지식인들의 지식인’‘논평가들의 논평가’로 불리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펴낸 ‘인간사색’(개마고원)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식은 ‘생존 처세술’로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하지만, 그런 지식이 개인 차원의 암묵지(暗默知)로 머물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의 분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책은 ‘한국인론’이라는 큰 틀 아래서 한국인의 인간관계 행태와 유형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사랑, 욕망, 청춘, 진실 등 4개의 주제로 나눠 다룬다.1만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70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8)

    儒林(70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8) 그리하여 주자는 이기론의 골수인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천지 사이에는 이가 있고 기가 있다. 이라는 것은 형이상의 도이며, 사물을 낳는 근본이다. 기라는 것은 형이하의 기(器)이며, 사물을 낳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이(理)를 품부 받은 뒤에 성이 있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기를 품부 받은 뒤에 형체가 있게 된다.” 주자는 이처럼 이기론을 정립함으로써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수용하고 정이, 정호형제의 성리론까지 집대성한다. 그러므로 주자의 철학체계는 자신보다 앞선 성리학의 모든 대가들의 사상을 흡수하고 재창출한 결과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주자는 이처럼 수평적으로 송대의 앞선 사상들을 총정리하여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공자로부터 시작된 증자, 자사, 맹자의 수직적인 유가사상까지도 모두 집대성하였던 것이다. 주자가 이처럼 이(理)의 존재에 ‘천지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으며, 만약 이가 없었더라면 천지도 없었을 것이며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사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외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未有天地之先 畢竟也只是理 有此理 便有此天地 若無此理 便亦無天地 無人無物 都無該載了)’라고 절대성을 부여하고 ‘태극은 단지 천지만물이다. 천지가 있기 전부터 먼저 이이가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결국 맹자가 주장하였던 ‘성선설(性善說)’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결국 주자의 ‘성즉리(性卽理)’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로 직결되는 것이다. 주자가 이처럼 이의 선재(先在)를 주장하고, 이를 형이상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성선설에 따른 도덕과 윤리를 사상의 중심에 놓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특히 주자는 맹자의 사단설에 주목하고 있었다. 주자는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의 근거로 예시하고 있는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은 정(情)이고,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인·의·예·지는 성(性)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자는 성(性)과 정(情)의 관계를 발(發)과 미발(未發), 즉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보고 있었다. 인간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 정(情) 때문이며, 이러한 감정이 발현된 것은 성(性)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정의 총칭을 칠정(七情)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칠정이란 원래 ‘예기(禮記)’에 나오는 인간이 가진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하는데, 이는 기쁨(喜), 분노(怒), 슬픔(哀), 두려움(懼), 좋아함(愛), 미워함(惡), 욕망(慾) 등의 인간감정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칠정은 다만 일곱 가지로 한정한 인간의 심리상태라기보다는 인간이 가진 감정의 총칭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자는 맹자가 주장한 사단을 ‘이의 발현(理之發)’으로, 칠정은 ‘기의 발현(氣之發)’으로 설명하고 양자를 구분해 놓고 있는데, 사단은 이(理)의 발현이므로 항상 선하지만 칠정은 이치에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불선(不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첫 장편소설 ‘백치들’ 펴낸 김숨

    첫 장편소설 ‘백치들’ 펴낸 김숨

    중동 건설현장에서 6년을 일하고 돌아온 아버지는 할 일이 없었다. 프라이팬에 식빵을 구워 먹거나 양은대야 속 물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옥상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마친 아버지는 소방공무원이 되고 싶었다. 월북한 큰할아버지 때문에 꿈이 좌절되자 사막으로 떠났다. 대낮에 할 일이 없기는 동네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지방신문사 기자였던 소진 아저씨는 재개봉관에서 하루종일 영화 보는 게 유일한 낙이다. 도배장이 만우 아저씨는 시도때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고, 설암으로 아내를 잃은 도식 아저씨는 엄청난 식욕에 사로잡혔다.1980년대 대전시 한 귀퉁이에 모여살았던 이들은 백수였고, 백치였다. 김숨(32)의 첫 장편소설 ‘백치들’(랜덤하우스코리아)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은 무력하고, 안일하기까지 하다.“해방과 함께 태어나거나 해방 이후에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 6·25전쟁과 4·19를 겪은” 이들은 “청년이 되어서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사막의 건설현장으로 가거나, 군인이 되어 월남의 전쟁터로 가거나, 광부가 되어 서독으로 날아가야했다”(28쪽). 그러나 고도 압축성장 시대에 한순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밀려나면서 옥상에 올라가 술이나 마시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어릴 때 대전에서 살았는데 동네 어른들 대부분이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많았어요. 그때는 ‘왜 저렇게 살까’하고 경멸했는데 지나고 나서야 그들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워낙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기 때문이란 걸 알았죠.” 소설 속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아버지도 중동 근로자였다. 휴가차 서울에 올 때면 양탄자며, 소니 라디오며, 크레파스 같은 외제 물건들을 한보따리씩 풀어놓았다.“남들이 못 가진 걸 가지니까 좋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귀국해서 직업 없이 힘들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이랄까, 원망 같은 것들도 생겼고요.”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욕망조차 상실해버린 아버지 세대를 원망과 경멸 대신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언젠가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작가는 “백수일 수밖에 없었던 그 분들이 나를 소설가로 키웠다.”고 말했다.“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던 백치들에게 소설에서나마 ‘빛나는 것’들을 하나씩 안겨주고 싶었다.”는 것. 아버지 세대를 대놓고 ‘백치들’이라고 부르는 건 작가 나름의 애정의 표시다.“어리숙하고 서툴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순하게 살아온 그들은 천사 같은 사람들”이라면서 “백치는 그들에게 보내는 찬사의 의미”라고 말했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지난해 첫 소설집 ‘투견’을 낸 바 있는 작가는 “내 소설이 잔혹하고,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독자들과 소통할 부분이 많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직장에 다니며 틈틈이 글을 쓰는 그는 소설가 부부다. 남편 김도언도 최근 소설집 ‘악취미들’(문학동네)을 냈다.“소설 경향이나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서로 무관심한 편”이라는 작가는 “집필할 때도 그렇고, 발표된 작품도 안 읽는 경우가 많다.”며 웃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9) 마음의 혁명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9) 마음의 혁명

    지난주에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 비판의 내용을 훑어보면서, 그의 사유의 한계를 금주에 말하겠다고 언급했다. 그의 사유의 한계는 서구의 지성주의가 안고 있는 한계와 그 궤적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듯이,3대째로 내려오는 서구의 반자본주의의 사상은 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사상(fetishism)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의 표시와 같다. 그런데 경제기술적 자본주의든 사회도덕적 사회주의든 다 서구적 지성철학의 전통이 낳은 쌍생아와 같다. 본디 서구 지성철학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논리학이 지성적 사유의 원조와 같다. 그의 논리학은 동일성(同一性)과 이타성(異他性)을 확연히 쪼개는 이분법적 사유로서, 간단히 말해서 A와 비(非)A를 완전히 별개로 취급하여 그 둘 사이에 어떤 애매모호한 중간지대도 용납하지 않는 사유를 말한다. 그 논리는 택일적 사유를 기본으로 한다. 택일적 사유는 명사적 사유와 같다. 명사적 사유는 산은 산이고 골짜기는 골짜기로 여기는 사고방식으로서, 산과 골짜기가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로 상호 이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명사적 사유는 개념적 사유로 이어지면서, 인간지성이 개념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파악하려는 소유의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서구의 기독교 신학도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사유와 만나서 신학을 합리적 논리학과 어긋나지 않게 정립하게 되었다. 이런 정립의 금자탑이 바로 토머스 아퀴나스에게서 시발된 토미즘(Thomism)이라 하겠다. 무(無)에서부터 신(神)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이성(지성)의 능력으로 에누리없이 파악하는 철학이 헤겔의 사유다. 그래서 헤겔의 사유는 웃음을 빼고 역사와 자연과 사회의 모든 것을 다 놓치지 않고 파악한 철학이라고 풍자되기도 한다. 이것은 그의 철학이 너무 진지해서 인간이 웃는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는 우스갯 소리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논리학과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이 다르다고 항의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자가 반대되는 양자사이의 택일을 주장하는 것이나, 후자가 모순되는 양자의 투쟁사이에서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두 논리학은 다 서구의 지적 전통의 뼈대로써 지성이 어떤 경우에도 세상을 혼미한 상태나 모순된 상태로써 방임하지 않는다는 지적 소유의 강인한 소화력을 상징한다. 지성의 철학은 그 출발부터가 소유의식의 자부심이 강렬했다. 지성이 세상을 소유하려는 철학은 서구 지성사에서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경제적 기술적으로 세상을 소유하려는 도구적 실용철학이고, 둘째는 그 실용적 소유철학이 회임하고 있는 이기적 속성을 싫어한 반(反)이기적 사회도덕을 중시하는 인도적 해방철학이다. 소위 인도적 해방철학은 스스로의 이상주의에 심취해서 자신의 지성철학은 소유론이 아니고, 인간을 물질적 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인간주의의 정상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도덕주의가 곧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라고 착각했다. 좌우간 서양지성사에서 이런 착각을 처음으로 명쾌하게 세상에 밝힌 이가 독일의 하이데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적 실용주의만이 소유론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도덕주의도 역시 지성철학이 분비한 소유론이라는 것이다. 이 하이데거의 통찰은 사회주의적 이상주의가 짙게 피워온 신비의 안개를 하루아침에 날려보낸 셈이다. 사회주의적 소유론은 물질적 소유론보다 더 지독한 정신적 소유론이라는 것이다. 정신적 소유론이므로 독재를 필연적으로 몰고 온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의 비판으로써 제기한 환영(simulacrum), 흉내내기(simulation), 초과실재(hyperreality), 내파(implosion)(38회 글 참조) 등과 같은 용어들은 다 실재의 알맹이를 잃고 기호로 변해가는 사회의 환상들을 비판한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은 사회가 도덕적 가치를 잃지 않고 내용이 있는 현실이 구성되기 위하여 교환가치보다 더 튼튼한 사용가치를 기반으로 해서 존재의 알맹이가 있는 사회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소비사회가 그런 존재론적 알맹이를 다 잃어버렸거나 상실해간다는 것을 통탄하고 있다. 그의 사회학은 반자본주의의 사회학이 자본주의적 소비사회를 길들이지 못한 것을 한탄한 소리와 같다 하겠다. 그러나 그의 사회학은 두 가지의 착각을 범한 셈이다. 첫째로 그는 그의 사회학이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요구라고 생각한 점이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정신적 소유론의 요구이지, 결코 존재론의 요구가 아니다.(모든 정신적 가치론은 경제적 가치론의 은유화에 다름 아니라고 지난 9회 글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시장에서 매매가격의 은유적 표현으로 정신적인 사용가치나 교환가치를 인간이 상정한다. 따라서 정신적 가치도 인간이 세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은유적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은 세상을 사용가치로서 정초시키고 싶어하는 지성의 도덕의지가 바라는 소유학이다. 둘째로 그는 아직도 정신적 도덕적 가치론이 경제적 이기적 소유론을 길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도덕적 가치론은 당위적인 명령인데, 그 당위의 명령이 자연적 본능의 이기심을 이은 지능(지성)의 이익추구의 충동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지성의 이기주의는 자연적이고, 지성의 도덕주의는 당위적인데, 당위가 자연을 못 이긴다는 것을 노자가 이미 풍자했다.‘도덕경’에서 노자는 ‘발돋움하고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성큼성큼 걷는 자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암시했다. 인위적인 노력이 자연적인 것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의 도덕적 사회주의가 경제적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한 까닭은 그것이 힘이 들어간 인위적 당위주의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반자본주의 사상은 자본주의 병리현상의 지적에선 빛났으나, 그 병리를 치유하는 생리적 처방에는 아주 미흡해서 당위적 주장만을 늘 내놓는 추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경제기술적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찌꺼기와 같은 낭비와 배금주의를 씻어내는 길이 무엇인가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다시 그 처방으로 생각한다. 반자본주의적 서구의 지성이 범한 사유상의 과오는 십자군적인 도덕주의의 사고에 너무 젖었었다는 것이다. 십자군적 도덕주의의 사고는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선악을 각각 분리된 별개의 것인 양 실체론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도 그런 십자군적 도덕주의의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 서구 지성이 이런 과오에 습관적으로 젖어있는 경향을 갖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비판도 그가 반소비적 물건 가치의 실재를 선으로 집착한 정신적 소유주의를 기본으로 깔고 있기에 생긴 이론이다. 선이 악을 온전히 제거하겠다는 사상으로는 악이 사라지지 않는다. 악과 싸우는 선이 이미 내부에서 악을 또한 분비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실패한 까닭이 바로 도덕주의의 허상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론적 욕망의 부름으로써의 양심’을 천명하였다. 나는 이 뜻을 우리가 다시 깊이 새겨야 한다고 여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를 철학자들이 하는 어려운 관념의 유희라고 오해하거나 일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장 절실하게 세상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리의 길이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 욕망의 부름으로써의 양심의 소리’는 흔히 도덕론자들이 즐겨 쓰는 선의 진군나팔 소리를 울리자는 뜻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세상사람들이 손익의 계산적 지성이나 또는 선악의 도덕적 지성의 둘 중 하나에 젖어서, 전자는 현실주의자들의 방패로, 후자는 이상주의자들의 창으로 각각 써 온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둘 다 소유주의의 철학이다. 소유주의적 문명을 존재론적 문명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 그의 사유의 본질이다. 모든 것은 다 동시에 양가적이므로 선악을 분별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이분법을 버려야 한다. 모든 것이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한에서, 세상을 구하는 길은 세상을 분별적으로 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양심의 소리는 분별적인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본래의 본성적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의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가리킨다. 본성의 소리는 당위적인 도덕의 명령이 아니라, 본능처럼 마음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기호적(嗜好的) 욕망을 말한다. 기호적 욕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본능적 소유욕을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이다.(1·2회 글 참조) 하이데거가 언급한 양심은 마음이 자기의 본성을 되찾은 자성(自性)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그 자성을 그리스도성이라 불러도 좋고, 불성이라 말해도 괜찮다. 그러므로 그 양심의 부름은 도덕적 당위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성이나 불성이 하고싶어 하는 욕망을 부르는 것이다. 이런 부름을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마음)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에로의 말건넴’과 같다고 언명했다. 소유론적 욕망은 이기배타적인 욕망이지만, 존재론적 욕망은 그리스도성이나 불성이 욕망하는 것이므로 자리이타적 욕망이다. 인간에게 이런 욕망의 자발성도 있다. 이 자발성을 부르는 것이 양심의 부름이다. 이 욕망은 경제와 과학기술을 위한 지혜도 부정하지 않고, 사회도덕도 파괴하지 않는다. 자리이타의 욕망은 자기본성에 의한 재능의 계발이 곧 사회적 이타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소유론적 지성(知性)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성(智性)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명스님은 ‘대승기신론’에서 이 지성(智性)을 중생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수염본각(隨染本覺)의 능력인 지정상(智淨相)과 그 것의 불가사의한 활동력인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라고 명명했다. 본성의 욕망인 양심이 숨을 쉬면, 이 본성의 능력들이 우리를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을 하이데거는 간결하게 말했다.“양심의 부름은 나로부터 나오지만, 나를 넘어서 나온다. 그 부름이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나에게 온다.” 이것이 마음의 혁명이다. 세상을 혁명하려하지 말고 마음을 혁명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콕 찍은 영화 9편 “안보곤 못배길걸”

    콕 찍은 영화 9편 “안보곤 못배길걸”

    마음만 먹으면 9일간의 긴 휴식에 빠질 수도 있는, 올 추석은 말 그대로 ‘황금’연휴. 영화계가 일찌감치 이 황금시장에 눈독을 들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추석 연휴에 각축하는 한국영화만도 무려 6편. 융단 폭소탄을 내장한 코미디에서부터 대규모 스케일의 액션, 눈물을 훔치게 만드는 감동드라마까지. 골라보는 즐거움에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감독/배우/장르/관람등급) 황수정 최여경기자 sjh@seoul.co.kr (1) 타짜 최동훈/조승우·김혜수·백윤식·유해진/드라마/18세 이상 허영만의 인기만화가 음모와 배신이 녹아든 드라마로 스크린에 옮겨졌다. 도박판에 인생의 전부를 걸어버린 젊은 타짜(속임수를 잘 쓰는 전문도박꾼)의 이야기. 조승우의 밀도있는 연기, 여유있는 카리스마의 진맛을 보여주는 백윤식, 화투판을 떡주무르듯 하는 ‘악녀’ 김혜수 등 이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은 없다. 방대한 원작을 최대한 쓸어담은 드라마가 지루할 때도 있으나,‘범죄의 재구성’의 그 치밀함을 다시 확인시키는 최동훈 감독! (2) 라디오 스타 이준익/안성기·박중훈·최정윤·정규수/드라마/12세 이상 배우 안성기와 박중훈의 건재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웃음과 감동이 반반씩 사이좋게 손잡은 휴먼드라마.‘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의 물흐르는 듯한 연출력이 돋보이고, 국민배우 안성기의 연륜이 그 어떤 영화에서보다 편안해 보인다. 지방도시의 라디오 DJ로 전전하는 왕년의 사고뭉치 가수왕과, 그를 변함없이 응원하고 보듬어주는 속깊은 매니저 이야기. (3)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Ⅲ 정용기/김수미·신현준·김원희·탁재훈·공형진·신이/코미디/15세 이상 조폭가문 백호파, 업계 1위 김치회사 ‘엄니손김치’로 거듭나다! 그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가는 전직검사와 한판 승부. 세련된 현재의 모습과 ‘유치찬란’한 과거 행적을 번갈아 더듬으며 드라마의 강약을 조절해 간다. 전편의 캐릭터에 배우의 개인기를 제대로 버무렸다. 특히 구수하고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김수미의 홈쇼핑 출연 장면이 압권. 한바탕 웃기 좋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4) 잘 살아보세 안진우/이범수·김정은·전미선·변희봉/코미디/12세 이상 1970년대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을 둘러싸고 시골마을에서 빚어지는 코믹 해프닝. 김정은·이범수가 엮는 환상의 복식 코미디에 전미선 변희봉 등 연기력 탄탄한 조연들 가세. 산아제한이라는 참신한 시대적 소재를 완성도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흐지부지 주저앉은 후반부가 아쉽다. (5) 구미호 가족 이형곤/주현·박준규·박시연·하정우·고주연/뮤지컬 코미디/15세 이상 가족을 깊이 사랑하는 아버지, 남자 밝힘증이 있는 섹시한 첫째딸, 단순무식한 아들, 귀엽지만 엽기적인 막내딸. 단란한(?) 구미호 가족과 죄질 나쁜 한 남자의 좌충우돌 인간 되기. 서커스장을 배경으로 한 구미호 가족의 ‘생쇼’, 배우들의 캐릭터, 간간히 삽입한 뮤지컬 장면이 적절하게 녹아있다. 배우의 재발견이 가장 눈에 띄는 영화. 박장대소 없이 잔웃음으로만 이끌어가는 것이 살짝 아쉽네∼. (6) 무도리 이형선/서영희·박인환·최주봉·서희승/코미디/15세 이상 자살명당으로 소문난 강원도 산골짜기, 무도리. 세 노인과 방송작가, 자살동호회 회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자잘하게 이어지다가 막판에 살짝 감동을 주는 소박한 이야기. 폭소보다는 독특한 소재에서 나오는 낯설고 다소 당황스러운 냉소가 튀어나오는 코미디 영화라고나 할까. 끈질기게 들이대는 철지난 유머는 난감하다. 노장의 힘으로 극복하려나. (7) 야연 펑 샤오강/장쯔이·대니얼 우·저우쉰/무협액션/15세 이상 10세기 중국을 배경으로 황실의 로맨스와 음모, 권력을 향한 욕망 등이 얽히고 설킨 서사무협. 화려하되 고즈넉한 색감, 잔인하되 부드러운 액션 등 대비와 강약을 거듭하는 화면의 균형미가 훌륭하다. 화려하게 스케일 큰 액션 화면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장쯔이의 매혹적인 카리스마가 빛을 발한다. (8) 앤트 불리 존 A. 데이비스/줄리아 로버츠·니컬러스 케이지·메릴 스트립(목소리)/애니메이션/전체 ‘왕따’ 꼬마가 개미를 괴롭히다 마법사의 주술에 걸려 개미만큼 작아진 뒤 겪는 모험과 화해의 과정.‘폴라 익스프레스’로 3D 아이맥스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톰 행크스가 자신의 아들에게 원작 그림책을 읽어주다 제작을 결심하게 된 작품이라고. 폭력의 부당함, 약자에 대한 배려 등 교훈적 메시지가 뚜렷하다. (9) BB프로젝트 진목승/성룡·고천관/액션/12세 이상 눈이 즐거운 ‘성룡표’ 액션물. 개운하고 유쾌하며 코믹한 천연 액션 퍼레이드를 별 생각없이 즐기면 되는 팝콘무비. 두 명의 절도범이 어쩌다가 납치한 아기가 ‘빌리언달러 베이비’일 줄이야. 천진한 아기를 다시 엄마에게 돌려주기 위한 고군분투가 아찔하면서도 신명난다.6개월된 아기 매튜의 귀여운 ‘연기’가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책꽂이]

    ●백화점의 탄생(가시마 시게루 지음, 장석봉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1852년 근대 자본주의의 문화수도 파리에서 문을 연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의 창업자 부시코 부부 이야기. 이를 통해 백화점이 어떻게 ‘욕망의 쇼윈도’‘자본주의의 꽃’이 됐는지를 보여준다. 부시코 부부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백화점의 상술과 문화전략을 만들어낸,‘소비자본주의’를 발명한 천재상인이었다.1만 1000원.●남인희의 길 이야기(남인희 지음, 삶과꿈 펴냄) 예로부터 도로는 국가발전의 중요한 인프라로 인식돼 왔다. 도로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대표적인 민족은 로마인이다. 중국의 진시황이 5000㎞의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도로건설의 시발점이라 할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우리가 길다운 길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길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담긴 에세이.1만 5000원.●역사를 뒤흔든 위인과 악인 100, 그들의 어머니(다이어그램 그룹 지음, 황종호 옮김, 하서 펴냄)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갱단 두목 알 카포네의 어머니는 아들을 항상 ‘착한 아이’로 생각했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던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고,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는 미국 독립전쟁 중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농장 일이나 돌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명인의 어머니와 그 배경을 가벼운 에피소드를 통해 만나본다.9500원.●평양기생 왕수복 10대 가수 여왕되다(신현규 지음, 경덕출판사 펴냄) 기생 출신으로 최초의 유행가수가 된 왕수복 평전. 평양 기성권번 기생학교를 나온 그는 정오에 평양에서 공연하고 비행기를 타고 경성에 내려가 저녁엔 다시 청중 앞에 설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광복 전후 고향 평양에 머물면서 납북 또는 월북 인사로 취급된 그는 1930년대 대중가요사에서 정당한 위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공훈배우의 칭호를 얻은 그는 북한에선 매우 드물게 개인적인 창작으로 독창회를 여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1만원. ●힘 빼는 기술(우에하라 하루오 지음, 이소영 옮김, 영림카디널 펴냄) 스모에 ‘히키와자’라는 기술이 있다. 먼저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밀어붙이면 상대 선수도 이에 질세라 온힘을 다해 밀어내려 하고, 그런 상대의 항력이 극에 달했을 때 순식간에 밀어붙이던 힘을 빼거나 상대선수의 몸을 잡아당기는 기술을 말한다. 히키자와가 성공하려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힘과 물러나는 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래 에너지인 해양온도차발전의 세계적 권위자인 저자는 ‘물러서는 미덕’이 사라진 사회를 안타까워한다.1만원.
  • 추석연휴 ‘타짜’ 끝발 날릴까?

    추석연휴 ‘타짜’ 끝발 날릴까?

    올 하반기 충무로의 최대 기대작은 일찍부터 ‘타짜’(제작 싸이더스FNH·영화사 참)였다. 치밀함에 숨이 막히는 데뷔작(범죄의 재구성)을 던졌던 최동훈 감독, 탄탄한 연기력을 밑천으로 맹렬히 뻗어오르는 조승우, 늦깎이 재발견의 진맛을 보여주는 백윤식, 존재감이 곧 작품의 신뢰도로 연결되는 김혜수. 기실, 조합이 이쯤되면 덮어놓고 내용물에 대한 기대치가 끝점을 찍을 만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짜’는 그 기대의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은 완성도를 갖췄다.28일 개봉하는 영화는 규모를 들이대지 않고서도 관객을 압도할 수 있음을 증명한 탄탄한 드라마를 자랑한다. 도박판 줄타기의 긴장을 펼쳐내는 영화는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타짜(속임수를 잘 쓰는 전문 도박꾼) 인생으로 들어서는 우연한 지점에서 출발점을 찍는다. 가난한 청년이 허름한 일터의 한구석에서 벌어지는 화투판에서 욕망의 느낌표를 찍어버린 이후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서도록 브레이크 없이 속도를 낸다. 누나의 위자료를 몽땅 사기도박단에게 털린 고니는 전설의 타짜 평경장(백윤식)을 쫓아다니며 ‘꽃싸움’(화투)판에 몸을 던진다. 고니와 평경장을 구심점으로 거미줄처럼 얽히는 음모와 배신으로 드라마는 살을 붙여간다. 방대한 원작을 강력한 점성으로 스크린에 압축해낸 감독의 역량은 놀랍다. 화투판을 둘러싸고 줄기차게 명멸하는 등장인물들을 이분법 선악구도에 줄세우지 않고서도 긴장감을 더해가는 요령많은 음모극이 됐다. 이 영화의 최대 무기는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주인공으로 별개의 작품을 찍어도 좋을 만큼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해석됐다는 점이다. 원정도박에 나선 고니의 욕망에 기름을 붓는 정 마담 역의 김혜수는 기대 이상의 걸출한 수확이다. 영화는 원작의 이야기 얼개와 인물들을 평경장, 고니, 정 마담, 고니와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도박판에서 유일하게 소시민적 면모를 보이는 고광렬(유해진) 등 4인 중심구도로 틀을 짜나간다. 파국을 예견하면서도 승부욕을 잠재우지 못하는 고니, 진심과 가식의 모호한 경계에 선 정 마담과 달리 유해진은 현실감각을 대변하는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로 흠잡을 데 없이 유쾌하다. 캐릭터에 따라 관점을 달리하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20분. 원작 속 캐릭터들의 개성을 최대한 다양하게 분산하려 애쓴 흔적이 길어진 러닝타임에서 엿보인다. 쉼없이 인물 만화경을 펼쳐놓는 반복된 호흡 탓에 드라마의 요철이 주는 쾌감은 떨어진다. 범국민적인 소재가 범대중의 영화로 도약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지점이 바로 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분히 반사회적인 소재를, 과장없이 휴머니티를 견지한 드라마로 일궈낸 장르적 성취만으로도 이 작품은 ‘잘 빠진’ 한국형 도박영화임에 틀림없다.18세 이상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업계소식-모집]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가을 정기강좌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는 다음달 9일부터 가을학기 정기강좌를 연다. ▲창조와 모방의 경계(강사 김재인) ▲우리 시대의 문화, 대중의 욕망을 껴안다(구재진) ▲한국근대미술특강(최열) ▲중국을 살피는 여섯 가지 문화 코드(유중하) ▲꼼꼼 이선생의 천방지축 글쓰기(이병훈) ▲서양음악사 조각 모으기(홍은미) ▲소설창작교실(최인석) 등의 강좌가 마련돼 있다.문의 및 수강신청은 문예아카데미 홈페이지(www.myacademy.org) 또는 전화(서울 739-6854~6)로 하면 된다.
  •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8)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8) 자본주의와 소비사회의 비판에 대하여

    미국의 거대한 자본주의에 늘 정신적 대립각을 세워 온 유럽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명제를 3세대에 걸쳐 시도했었다.1세대의 극복시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거대한 관료주의의 괴물로 치달음으로써 실패했다. 소련의 붕괴가 이를 입증한다.2세대는 네오 마르크시즘 운동으로서 관료화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 이성에 의하여 소외로부터의 인간해방을 목표로 하는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 이른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사상을 기본으로 삼았다. 이들의 철학사상이 지닌 고매한 도덕적 이상주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거리감을 지울 수 없었다. 첫째로 60년대 내가 유학생이던 당시의 한국은 아직도 고도자본주의 사회에로 진입할 기미도 없었던 저개발 최빈곤국이었다. 반대로 신좌파운동은 그들 사회가 이미 맛보고 있는 풍요한 고도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그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인데, 이들 사상을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20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이 경고한 ‘지식인의 아편’인 혁명적 관념의 유희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둘째로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현실성에 큰 의문을 가졌었다. 관념적으로 아무리 멋져도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면,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와 같다고 늘 생각했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는 연습장이 아니기에, 관념적 사유로 현실을 대체하겠다는 혁명적 발상을 나는 저어했다. 특히 1세대 ‘사회주의=관료주의’의 실패가 늘 나로 하여금 2세대 신좌파운동의 사상에 선 뜻 동의하기를 어렵게 했다. 더구나 그 당시에 나의 철학공부를 이끌어 주던 두 정신의 스승이 있었는데, 프랑스의 메를로-퐁티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전자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가 소련의 스탈린주의가 실현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낭만적 허구를 보고서 이상주의 사상의 거짓을 고발한 철학자였다. 그는 또 현실역사가 이성의 빛과 의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정리하지 못하는 애매모호성으로 엮어진다는 것을 서술하면서, 인간역사를 오직 의미의 역사로 환원하고자 하는 과잉 도덕적 명분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후자는 가톨릭 철학자로서 인류의 역사세계가 이미 ‘깨어진 세계’인데, 그 세계에서 악을 박살내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진 절대선 지향이 결국 국가주의적 나치즘과 계급주의적 공산주의와 같은 광적인 격정의 정치체제를 만들게 된다고 고발했다. 다음 3세대의 자본주의적 비판운동이 다시 등장했다. 해방적 이성의 자기 소외극복 운동으로 마르크시즘을 승화시키려는 2세대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한 마당에서 생긴 포스트 모던적인 운동이 3세대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너무 농염하게 성숙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새 사회를 창조하기가 어려운 경지에 이르러, 비마르크스적인 자본주의의 극복이 시도되었다. 이번에는 독일과 달리 프랑스의 푸코, 들뢰즈, 알튀세르, 보드리야르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상의 운동이 생겼다. 이들 사상의 공통점을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자본주의적 정치권력의 상품적 대중화를 비판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심어 놓는 무의미한 허무주의적인 흐름을 그대로 빨리 노출시켜 자본주의가 허무주의로 종말을 맺게끔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들은 약간씩 허무주의자들이다. 들뢰즈와 알튀세르가 좌우간 자살로 삶을 마감했고, 푸코가 에이즈병에 걸려 5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특이한 일이겠다.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을 잠시 훑어보자. 단적으로 보드리야르의 사회사상은 초월의 정신을 망각한 현대 소비사회의 정신부재의 경박성을 슬퍼하면서, 그런 삶의 경박성의 원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자본적 본질인 모든 것의 기호화(signalization)에 있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물건은 어떤 가치에 대응했었다. 사용가치든 교환가치든 물건은 인간의 구체적 욕망의 충족을 만족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집은 어떤 정신적이고 내면적 가치를 가족에게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집은 단지 상상적인 상품의 기호적 가치만을 지시해서 헌 물건 버리고 새로 사듯이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의 소비품목에 불과하다.TV프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앉아서 리모컨으로 쉽게 손가락 끝으로 바꾸듯, 모든 것은 소비자의 순간적 변덕에 따라 움직이는 기호와 같은 ‘환영’(幻影=simulacrum)에 불과하다. 고도소비사회에서 자동차도 기능가치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유행이나 삶의 스타일이나 허세나 으쓱대고 싶은 욕망의 환영을 만족시켜 주는 일시적 대용물일 뿐이다. 그런 욕망의 환영은 마치 옛 사회주의 소련의 한 청년이 서방 자본주의의 대명사 같은 블루진을 입고 다니거나, 아프리카 부시맨의 어떤 사나이가 비행기에서 떨어진 서방 콜라병을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싶어하는 그런 환영과 유사하다 하겠다. 중요한 것은 블루진이나 콜라병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차이의 기호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소비사회에서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른 어떤 기호의 환영을 소비하고 싶어한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본질은 노동과 정신적 가치 등 모든 것이 다 시장의 교환가치로 전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가치유물에 불과하고, 이제 사회는 모든 것이 기호적 교환과 같은 ‘흉내내기’(simulation)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실재적 가치가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든 흉내내기의 환영은 소비사회가 부추긴 차이화의 조작 코드에 인간이 멋모르고 덩달아 춤추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연상시킨다고 보드리야르는 진단한다. 차이화 코드는 소비사회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차별화 기호의 놀이에 해당한다. 그래야만 소비자가 차이의 환영 속에서 각각 섹시(sexy)해지기 위해 돈을 마구 쓴다. 섹시하다는 것은 소비시장에서 상품으로 잘 전달되기 위하여 남들을 유혹하는 기호고, 각자는 대중사회에서 차이를 표시하기 위하여 과감히 더 섹시하게 튀어 보이게끔 스스로를 기호화한다. 모든 이는 다 섹시한 차이를 연출하기 위해 환영을 좇는다. 보드리야르가 그의 저서 ‘소비사회’에서 기술한 것처럼 ‘소비는 기호(sign)가 흡수하고 기호에 의하여 흡수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비쳐진다. 브라운관이나 컴퓨터의 화면, 유리처럼 투명하나 절연체와 같은 차가운 매체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구경하거나, 백화점의 상품을 훑어본다. 충격적인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도 자동차 유리를 통하여 감정이 절연된 상태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감정만 사람들이 갖는다. 서로 관여하는 진실이 우러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금방 지나가는 일시적 참상에 불과하고,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져도 그것은 TV화면의 순간적 그림으로 보는 환영일 뿐이다. 사람들이 지하철에 우굴거리나 그들이 사람들이라고 여겨지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환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냥 사람 비슷한 환영들이 득실거릴 뿐이다. 아무도 대중을 사람들의 실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현실을 실제로 느끼지 않고, 차가운 기호로 대체되어 실제로 느낀 척 흉내낼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런 소비사회를 형이상학적 근거를 상실한 ‘환영’의 사회,‘흉내내기’의 사회라고 불렀다. 이런 사회를 그는 또한 실재가 증발되고 환영이 진짜보다 살을 그 위에 더 덧붙이는 ‘초과실재’(hyperreality)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이 초과실재가 바로 환영이고 흉내내기의 허상과 같다. 그는 이런 환영의 흉내내기와 같은 기호가치(value-sign)만이 비대해진 소비사회에는 환영처럼 무수하게 지나가는 기호적 ‘초과실재’에 의하여 인격의 파탄이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런 파탄을 그는 ‘내파적 폭력’(implosive violence)이라 불렀다. 예컨대 게임이나 쇼핑에 미친 사람이 상상적 초과실재를 현실로 착각하고 자기 내부에서 환영으로 배가 불러 파열한다. 본디 내파(內破=implosion)는 음운론적으로 외파(外破=explosion)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영어의 ‘tap(탭)’,‘cut(컷)’에서 파열자음의 음가인 ‘t’,‘k’ 등이 첫 발음에서는 바깥으로 폭발하는 외파적 파열음이 되지만, 끝 발음의 파열자음인 ‘p’와 ‘t’는 밖으로 폭발하지 않고 안으로 파열이 잠기는 그런 음가를 지닌다. 이것이 외파음에 대한 내파음의 의미다. 과거의 문명은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외부의 모순(계급투쟁)으로 외파하는 구조를 지녔지만, 현대 소비사회의 본질은 스스로 인간이 기호처럼 흉내내기를 하다가 많은 기호에 헛배가 불러 내부에서 내파하여 폭발하는 폭력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본 소비사회에 대한 허무적 진단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3세대의 주장인 보드리야르의 사회학이 소비사회의 병을 진단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상이 소비적 인간사회를 구원하는 약이 아니고, 오히려 허무주의적 결말을 예견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풍요와 편리, 그리고 낭비와 배금주의를 동시에 가져온 이중적 얼굴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서구의 사상은 마르크스로부터 보드리야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적 소비사회의 병리(病理)를 잘 보았으나,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생리(生理)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나도 그 생리를 알지 못해 많은 시간 헤맸지만, 최근에 해체적인 존재론적 사유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생리의 길이란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이기적이고 물질적 소유론을 그 동안 서구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당위의 가치론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하였기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마르크시즘이나 네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의 본능적 소유론에 비하여 반본능적 정신의 소유론에 다름 아니다. 본능적 소유론을 치유하는 길은 역시 자연적 존재론에 의해서 가능하지, 인위적 당위론으로 불가능하다. 보드리야르의 허무론도 결국 형이상학적 실체의 붕괴를 소비사회가 촉진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생긴 반본능적 형이상학적 소유론에 대한 그리움과 같다. 그러나 거기에 그의 사회학의 큰 약점이 있다 하겠다. 이것을 다음주에 더 설명하련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오일만 기자의 여의도 프리즘] 손자병법 ‘反間計’와 대선 줄세우기 괴문서

    [오일만 기자의 여의도 프리즘] 손자병법 ‘反間計’와 대선 줄세우기 괴문서

    괴문서는 시공을 떠나 권력투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존재했다. 익명이란 방패 뒤에 숨어 무방비로 노출된 반대파를 공격하는 치졸한 ‘정치 테러’의 일종이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조선조에 유독 괴문서 파문이 많았다.1547년 조선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은 ‘양재역 괴벽서사건(정미사화)’을 일으켰다. 당시 권력을 주물렀던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를 지칭,“여왕으로 등극해 나라를 망치려고 한다.”는 벽서(대자보)를 자작극으로 꾸민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반대파 사림 100여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조 대표적 개혁가인 조광조의 실각도 비슷하다. 당시 조광조의 개혁 드라이브로 위기에 처한 훈구파는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로 하여금 ‘조(趙)씨가 왕이 된다.(走肖爲王)’는 글을 새겨 반전을 시도했다. 바로 ‘기묘사화’의 발단이 됐고 조광조의 개혁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과거 정권에서도 괴문서는 정치공작에 유용하게 사용됐다. 대표적인 것이 북풍(北風) 공작이다.97년 12월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당시 안기부 내 ‘반 DJ(김대중)’ 세력들은 ‘해외공작원 정보보고’라는 괴문서를 유포시켰다. 당시 여야 모두 북한과 내통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모자 혐의의 권영해 안기부장이 구속되고 정치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최근 여의도 정가에 떠도는 괴문서 소동은 어떤가.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계파간 ‘권력 암투’의 냄새가 풍긴다. 한나라당 예비 대선 주자와 관련된 유인물을 보자. 이 괴문서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친(親)박근혜 50명, 친 이명박 20명, 친 손학규 11명이라는 식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며칠 전 나온 다른 문건에는 ‘친박’과 ‘친이’의 숫자가 정반대다. 당내 대선 경쟁의 포석으로, 전형적인 ‘줄세우기’와 ‘세불리기’를 겨냥한 측면이 크다. 최근에는 범 여권의 예비 주자로 꼽히는 고건 전 총리의 지지자들을 열거한 괴문서도 나왔다. 일부 거론된 인물 가운데 “나는 아니야.”라며 펄쩍 뛰었고 ‘음해 세력의 장난’이라고 분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수법은 손자병법의 33계인 ‘반간계(反間計)’와 맥이 닿는다. 반간은 아군을 이간하려는 적의 계략을 역이용, 적을 이간시키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오나라의 주유가 조조의 수군을 궤멸시킨 전략이다. 과거 권력형 게이트가 불거질 때마다 “OOO의원이 XXX의 돈을 받았더라.”는 괴문서도 단골로 등장했다. 먹히면 정적은 치명타가 되고 최소한 ‘흠집’은 남는다. 정말 비열하고 더러운 ‘정치 게임’이다. 이제 다시 대선의 계절이 다가온다. 전례로 보아 숱한 괴문서가 난무할 가능성이 크다. 대권을 향한 간절한 욕망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공학적’ 유혹에 굴복한 까닭이다. 권력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며, 권력의 경쟁은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요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음습한 ‘투서 문화’를 도려내지 않는 한 투명하고 건전한 대선경쟁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oilman@seoul.co.kr
  • 휴양도시 변신 라스베이거스를 가다

    휴양도시 변신 라스베이거스를 가다

    번쩍거리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한 몫’ 잡으려는 거대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라스베이거스. 일년 내내 각종 국제 회의와 대규모 전시가 끊이지 않으며 세계 최고의 공연 등 볼거리가 가득한 문화의 도시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가을의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글 사진 라스베이거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협찬 : 대한항공 ■ 다양한 볼거리 ‘호텔24시’ 미국인들도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휴양 도시, 라스베이거스는 객실이 몇천 개인 거대한 호텔들로 이루어졌다.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을 위해 다양하고 재미난 공연과 이벤트 등이 매일 열린다. 또한 파리, 로마, 이집트, 베네치아 등 특정한 주제로 꾸며진 호텔에서 걷는 것만으로 전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 미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은 휴양 도시 수만평의 카지노장에 흥겨운 음악이 흐르면 모든 겜블러들은 게임을 멈춘다. 카지노장 중앙에 무대가 솟아오르고 천장에는 각종 배와 자동차 등 모형들이 무희들을 태우고 날아다닌다. 바로 리오 호텔의 ‘쇼인더스카이’란 쇼이다. 또한 51층 전망대는 저녁에 꼭 한번 올라가기를 권한다. 하늘로 빛을 쏘아올리는 피라미드 모양의 호텔부터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도시의 모습에 감탄사가 흐른다. 호텔 로비에 평일 밤 10시까지 무료로 전망대를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이 놓여있다. 아찔한 미녀들의 몸짓과 불꽃쇼, 흥겨운 음악이 함께하는 트래저 아일랜드 호텔의 ‘사일러스 오브 티아이’. 상상할 수 없는 규모와 재미를 선사한다. 커다란 불꽃, 대포로 배가 부서지기도 하는가하면 마지막에는 커다란 해적선이 인공 호수로 가라앉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또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옮겨다 놓은 듯한 베네시안 호텔에서는 인공 운하를 따라 작은 배를 타고 다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안 뱃사공의 구수한 노래가 마치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벨라지오 호텔은 천장에 600만달러(약 54억원)짜리 수제 유리 작품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으며 60년대 미국의 모습을 축소해 놓은 전시물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꼬마 기차가 인상적이다. 환상적인 조명과 1500개가 넘는 시원한 물줄기와 더불어 켈리나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에 맞춰 춤추는 분수쇼도 연인들에겐 인기다. 매일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30분 간격으로 펼쳐진다. 고대 로마제국을 테마로 한 시저스팰리스 호텔,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로 외관을 장식한 룩소 호텔,100여 종 2000마리가 넘는 해양동물을 볼 수 있는 만달레이베이 호텔의 수족관 샤크 리프, 백호랑이와 백사자 등이 있는 미라지 호텔의 시크릿 가든,서커스서커스 호텔의 어드벤처돔, 정확하게 2분의1로 축소된 파리 호텔의 에펠탑과 개선문,11점의 피카소 진품 유화를 만날 수 있는 윙 라스베이거스 호텔 등은 빼놓을 수 없는 명물들이다. 이밖에 용암을 분출하는 미라지 호텔의 화산쇼,370m 거리의 천장에 한국의 LG CNS가 제작한 600만개의 발광다이오드가 화려함을 자랑하는 다운타운 프레몬트 거리의 전구쇼 등 공짜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 꿈같은 무대를 보고 싶다면 라스베이거스에 간다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적 스케일의 공연들이다. 아트 서커스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서크 드 솔레이가 베네시안 호텔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비틀스 러브’는 라스베이거스만의 자랑.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무대에서 그대로 만들어내는 기술과 스케일이 사로잡는다. 또한 트레저 아일랜드 호텔의 ‘미스테어’, 만달레이베이 호텔의 뮤지컬 ‘맘마미아’, 시저스 팰리스 호텔의 가수 샐린 디옹 공연 등 브로드웨이를 방불케 하는 수준 높은 유료 공연들도 매일 밤 펼쳐진다. # 여행정보 대한항공(1588-2001)은 오는 22일부터 주3회 라스베이거스에 직항편을 취항한다. 직항편으로 가면 11∼12시간 안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할 수 있어 지금처럼 로스앤젤레스를 거치는 것보다 3∼4시간을 아낄 수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호텔 요금은 매일 다르다고 한다. 가장 저렴할 때는 하루에 69달러이지만 컨벤션 기간에는 룸당 500달러를 호가하기도 한다. 각 호텔 홈페이지를 이용해 예약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밖에 다양한 관광정보는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한국사무소(02-777-9282,www.visitlasvegas.co.kr)나 삼호관광(02-771-3575)에 문의하면 된다. ■ 모하비 사막 ‘불의 계곡’ 라스베이거스는 ‘그랜드 캐니언’ ‘죽음의 계곡’ ‘불의 계곡’ 등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주변에 많다. 그 중에서 15억년 전, 거대한 자연의 힘이 바다를 육지로 만들면서 생긴 ‘불의 계곡’(Valley of Fire)을 가봤다. # 위대한 자연의 힘이 느껴지는 곳 라스베이거스에서 자동차로 1시간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불의 계곡은 모하비 사막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타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의 계곡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자 눈앞에 붉은 바다가 펼쳐진다.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어떻게 붉은 색을 띠고 있을까. 태워버릴 듯한 사막의 강렬한 햇볕을 가슴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 작은 구멍, 때론 수평으로, 수직으로 선이 그어진 붉은 바위산.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조각을 하듯 무늬를 만들었을까. 바람과 물방울이 만든 자국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도 조금씩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다 밑의 퇴적층이 솟구쳐 화강암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화강암이 공기를 만나면서 온통 붉은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동차에서 내려 20여분을 걸었다. 하얀 모래 사막에 발을 디뎌본 느낌이 색다르다. 신기하게 생명체들이 살아 움직인다. 조막만한 다람쥐부터 도마뱀,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바다로 가지 못한 거북이들이 진화를 거듭해 사막에 살고 있다고 한다. 기온이 40℃가 넘는 사막이지만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붉은 땅이었다. 혼자 운전하기 두려운 사람은 반나절 패키지 상품을 이용해도 좋다. 불의 계곡 한국사무소 (02)734-8397, www.grandcanyon.co.kr.
  •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7) 희망이라는 것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7) 희망이라는 것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 어떤 희망도 없는 경우를 우리는 절망이라 부른다. 절망은 삶의 에너지가 소진된 경우와 같다. 절망의 극치가 곧 자살로 이어진다. 희망은 삶을 지탱시켜 주는 에너지와 같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판도라는 그녀가 가져온 상자를 열어 인간 세상에 모든 재앙들을 다 퍼뜨려 놓고 뚜껑을 닫았기에 마지막 남은 희망이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신화는 인간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실존하면서 희망만을 아직도 기다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누구나 다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싶어한다. 보통 사람들은 인생에서 대개 어떤 것을 갖고 싶은 소유욕을 희망으로 삼는다. 돈을 벌고 싶은 희망, 출세하고픈 희망, 시험에 합격하고픈 희망 등등 다양한 희망을 갖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살아간다. 이런 희망을 단적으로 소유론적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희망의 철학적 의미를 화두로 삼은 20세기 가톨릭 실존철학자 마르셀은 저 소유론적 희망을 ‘나는 …을 희망한다.’(I hope that…)라는 구절로 간략하게 묘사했다. 이것은 희망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서술되는 구조다. 객관적으로 서술되는 (…)의 희망은 내가 소유하고픈 내용과 같다. 그런 희망이 달성되는 경우에 나는 만족을 느낀다. 만족의 현상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충분히 먹어서 포만상태에 이른 것과 유사하다. 포만상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게걸스러운 기분에 젖은 식곤증처럼, 생각하기 싫고 일하기 싫은 판단공백의 상태를 동반한다. 거기에 비하여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하여 시기와 원한의 감정을 표출한다. 그래서 이들은 식곤증에 취해 있는 만족계층과 달리 더욱 또렷하게 의식이 깨어 있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면서 계급전복을 준비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투쟁’의 모습이다. 만족의 게걸스러움과 불만의 분노는 다 소유론적 희망의 취득여부와 직결된다. 소유론적 희망은 결국 인생에서 만족을 누리려는 욕심과 직결되어 있다. 이 욕심을 불교에서 오욕(五欲=재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라 부른다. 세상살이는 예나 이제나 이 오욕을 쟁취하기 위한 모든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것을 얻지 못하면 화가 나고, 화의 분노가 이기적인 것이 아님을 명분화하기 위하여 그럴싸한 이론을 다 끌어들인다. 인간의 사회적 투쟁은 거의 대개 이 오욕의 쟁취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벌이는 소유론적 불만이나 절망을 분노의 명분으로 표시한다. 아집(我執)에 찬 분노의 명분이 진리의지와 만나면, 그 분노는 진리의 투쟁이란 법집(法執)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아집과 법집이 뒤엉키면, 소유론적 욕심이 결국 결사항전의 어리석은 고집으로 바뀐다. 그런데 한 사회의 정신문화가 일반적으로 속물적인 소유론적 희망만을 삶의 동력으로 여기면, 그 사회는 그만큼 만족과 불만의 양극단에서 늘 요동친다. 속물적 희망은 오욕의 소유만을 인생에서 성공의 척도로 보는 태도를 말한다. 속물적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소유적 지배층의 거만떨기와 상대적 박탈감으로 원한의 심리를 품고 있는 소외층의 대등 질투심리와의 양극사이에서 출렁거린다. 평소에 속물이 아닌 것처럼 도덕적으로 온갖 좋은 말씀을 내놓던 분이 일단 자기의 출세와 직결되는 순간에 벼슬을 놓칠까봐 명예욕에 추하게 매달리는 탐욕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지배층의 게걸스러움을 싫어하던 소외층의 가열찬 투사가 하루아침에 지배층에 오르자마자 자기가 그토록 미워한 그 오욕의 탐욕에 정신을 못 차린다. 이제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생각이 깊지 않은 인간은 그가 투사이든 지배층이든 소외층이든 도덕적 설교자이든 다 속물적 소유욕을 인생의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사회의 부정부패는 모두가 다 속물적 탐욕의 근성을 희망으로 갖고 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속된다. 우리는 생각이 깊은 정신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악을 박살내려고 흥분하지 말고 속물근성에 빠지지 않는 깊이 있는 사회를 일구자. 그러기 위하여 인생의 동력인 희망을 소유론적인 것에서 존재론적인 것으로 바꾸는 마음의 혁명이 필요하다. 인생의 희망을 소유론적인 만족으로 채우려 하지 말고, 존재론적 기쁨으로 인생을 승화시키려는 마음의 전환에서 마음의 혁명이 가능해진다. 불만의 심리는 늘 복수의 심리를 속으로 감추고 있다. 역전의 상황이 오면, 불만의 심리는 복수한다. 만족의 심리는 남들에게 으쓱대면서 과시하려는 충동을 띠고 있고, 불만의 심리는 속으로 응어리를 품고 있어서 비뚤어진 공격성을 감추고 있다. 과시적이든, 열등의식으로 비뚤어졌든 다 공격적이다. 이런 사회에서 어찌 서로서로 존재하도록 친절을 베푸는 열린 마음의 기쁨이 삶의 희망으로 등록되겠는가? 나는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비록 TV 드라마에 사랑 극이 너무 넘쳐나고,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일상의 깊지 않은 희비극이 화면에 벌어져도, 우리는 진실로 서로서로 존재하도록 친절을 베푸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안이나 바깥에서나 서로 모래알처럼 살면서 “제까짓 것” 한다. 속물적 욕망만이 인생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곳에 절대로 서로 화합하고 서로 융결(融結)하는 사회적 인간관계가 자라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족한 자나 불만스러운 자나 다 속으로 타자에 대하여 “제까짓 것” 하는 심리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족과 기쁨, 불만과 괴로움은 다르다. 만족의 포만감은 꽉 차서 더 이상의 여백이 없는 닫힌 마음의 상태를 함축하고 있으나, 기쁨은 5세기 말 신플라톤주의자로서 익명의 철학자인 가짜(Pseudo)-디오니시오스의 말처럼 ‘자기의 확산’(self-diffusion)과 같다. 만족은 자아위주로 닫힌 느낌이지만, 기쁨은 우주로 자기가 확산되는 열림의 느낌을 준다. 불만은 외부로 향하는 공격성을 띠고 있지만, 괴로움은 내적 평안을 찾으려는 긴장완화의 요구를 품고 있다. 소유적 만족보다 존재의 기쁨을 찾으려는 희망은 단순한 낙관적 계산과는 무관하다. 낙관적 계산은 속물적 욕심의 취득이 계산적으로 명백할 때에 생긴다. 그러나 존재의 희망은 오히려 속물적 인생의 무상함과 괴로움의 자각에서부터 움튼다. 내 인생의 의미가 속물적 오욕(五欲)의 소유적 다과로 평가되기를 거부하는 ‘존재론적 요구’가 마음에서 싹틀 때에, 존재론적 희망의 의미가 절실히 다가온다. 속물은 소유나 적어도 허영의 과시에 사로잡힌 수인(囚人)과 같다. 짝퉁으로도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속물은 인생의 동력인 희망을 가짜 소유로 채우려는 자기체면에 걸린 수인이다. 희망을 소유에서 존재로 돌리는 마음의 혁명은 죽음의 응시에서 가능하다. 죽음은 소유의 수인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약이다. 속물들은 죽음이 없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처럼 산다. 그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죽음이 있음을 그들도 알지만, 그들의 지금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죽음의 생각을 그들은 유예한다. 속물들은 세상에 가장 친사회적으로 사는 것처럼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그들은 사실상 가장 고독한 인생을 산다. 소유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인생은 열린 기쁨의 마음을 모른다. 속물사회에서는 다 고독하다. 지옥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나 모두 고독한 곳이다. 존재론적 희망은 괴로운 번뇌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인생의 요구에서 싹튼다. 모든 번뇌는 소유의식에서 생기고, 그 소유의식은 집착을 낳고 나의 마음을 뇌쇄시켜 거기에 중독되게 한다. 앞에서 본 마르셀이 그의 저서 ‘편력하는 인간’에서 희망의 철학을 가르친다. 희망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는 ‘나는 우리를 위하여 그대 안에서 희망한다.’(I hope in you for us.)는 것이다. 소유의식을 지우는 것이 번뇌에서 해방되는 첩경이다. 소유의식은 잘난 척하거나 으쓱대는 자만심과 같이 간다. 불만도 역설적인 소유의식에 다름 아니다. 마음의 존재론적 혁명은 마르셀이 언명하였듯이 겸허하며 요란스럽지 않고 수줍은 듯한 마음의 전환에서 시작한다. 마르셀이 말한 ‘그대’의 이인칭은 고요하고 정결한 자기 마음의 본성과 같다 하겠다. 소유로 들뜬 속물들은 수줍고 정결한 자기 마음의 본성이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하면서 살아 왔다. 오욕을 사냥하는 소유론적 속물근성을 떠나서 자기 마음에 늘, 그리고 이미 있어 온 그 고요한 본성에 인사드리고 그 본성의 요구에 성실하게 살 것을 마음이 약속하는 순간에, 존재론적 희망은 문득 솟아오른다. 내가 그 본성의 요구에 성실하게 살 것을 희망하는 그 순간은 동시에 만족과 불만이라는 소유적 삶의 수인(囚人)상태를 벗어나 나의 존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존재들을 함께 기쁘게 해주려는 열린 마음의 상태로 변하는 마음의 비약이 생기는 순간과 같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웃이 된다. 이것이 마르셀이 말한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이겠다. 존재론적 희망은 나의 본성인 ‘그대’와 나의 일상적 마음이 일치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요, 그런 일치는 이웃들과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되는 융결의 띠를 형성한다. 이 ‘우리’는 소유론적 폐쇄적 집단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네가 존재하도록 도와주는 자타불이(自他不二=자기와 타인이 둘이 아님)의 ‘우리’다. 마르셀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가 ‘코러스’(chorus)를 들었을 때에 느끼는 마음의 환희가 바로 존재론적 희망에 아주 가깝다고 하겠다. 코러스의 감동이 식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열려 있고 서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기쁨을 맛본다. 우리 사회가 속물근성의 자기 감옥을 부술 때에, 우리는 상호주관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서로서로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무 콘텐츠가 없는 공허한 추상적 구호로서의 같은 민족끼리의 감상을 넘어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경계하는 모래알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으로 기쁨을 주고 서로서로 친절한 이웃이 될 것이다. 속물적 희망을 존재론적 희망으로 돌리는 마음의 혁명은 곧바로 우리가 전대미문의 도약판을 밟고 비상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각자의 좁은 감옥을 벗어나는 해방의 날이 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7) 신앙·사고상징

    [한민족 문화유전자를 찾아서] (7) 신앙·사고상징

    대다수의 민족문화재나 문화상징은 종교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종교는 엘리트의 고매한 종교사상이나 우리네 소박한 삶의 논리에서나 늘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렇다고 종교라는 것이 늘 추상적인 인식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교인의 삶을 대하면서 그것이 현실의 자리에서 늘 삶의 긴박한 문제를 풀어내는 기제임을 쉽사리 확인하게 된다. 갖가지 신앙을 통해 혹은 적극적인 의례나 소극적인 금기와 꺼림을 통해 현실의 질곡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의 종교문화는 인식을 넘어선 풀이의 몸짓이었다. 그러면서도 종교는 일상을 지탱할 삶의 핵심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망의 토대였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살면서도 아노미에 젖어들지 않는 것은 종교를 자양삼아 삶의 가치와 기틀을 굳건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신앙 및 사고와 관련된 9개의 민족문화 상징들은 삶의 궁극적인 물음과 해답을 향한 몰입과 발산이었으며, 실제로 삶의 응어리를 풀어내려는 바람이자 몸짓이었으며, 세계를 품는 안목과 가치의 본산이자 근원이었다. 분명, 우리 민족은 뜨겁고 화끈한 민족이다. 그러나 우리는 열을 내는 문화와 더불어 능동적으로 그 열을 식히고 가라앉히는, 다시말해 삶의 열기를 조율하는 냉정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선(禪)의 문화가 그것이다. 선은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샤먼의 엑스터시와는 달리 정신의 몰입(엔스타시스)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끊고 내면의 평정을 얻으려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이다. 치열한 일상의 어지러운 삶에 고요와 집중을 끌어들여 삶의 활력을 일으키는 선은 이제 산간의 선방의 문지방을 넘어 도시의 시민문화와 스포츠문화에까지 이르고 있다. 평상의 삶에서 문득 자기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불성(佛性)을 발견하는 각성과 몰입이야말로 현대의 정신 웰빙과도 통한다. ● 禪 - 내면의 평정을 ‘닦는 의례’ 선이 한국인의 내면을 ‘닦는 의례’라면 굿은 한국인의 ‘비는 의례’이다. 굿은 치병, 점복, 의례의 종교전문가인 무당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얽히고설킨 문제의 근원을 궁극적으로 살피고 종국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발산의 몸짓이다. 염원을 몸으로 발산하기 때문에 굿이 벌어지는 판에는 늘 열기가 가득하다. 춤과 무악은 그 열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북과 춤으로 신명에 도달한다(‘周易’鼓之舞之以盡神)는 의미에서 고대 부여의 영고(迎鼓)나 동예의 무천(舞天)과 같은 제천의례에서 춤과 음악의 굿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때론 그런 굿문화가 음사(淫祀)의 굴레로 위축되기도 했으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몰입뿐만 아니라 가무로 삶의 에너지와 열기를 역동적으로 발산하려는 풀이의 몸짓은 한국인을 뜨겁게 만드는 문화였다. 유교문화가 지성인에게 늘 마음 닦을 것(修心)을 강조하고 있을 때, 굿은 삶의 질곡에 지친 민중의 상한 마음을 달래주고(安心) 있었다. 민중의 구복적 욕망을 의례로 분출시키는 무속과는 달리, 신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인간의 성실한 의무 이행을 목표로 하는 유교문화는 외면적으로는 제물을 다하고, 내면적으로는 성의를 다하는 것이 제사에 임하는 태도임을 늘 강조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 유교문화의 자랑인 종묘와 종묘대제는 이러한 유교의 경건주의적인 태도를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다. 기일에 맞추어 진행된 능제사와는 별도로 납일과 춘하추동 사시를 포함해, 모두 5회에 걸쳐 종묘대제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히 왕실의 조상숭배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의 질서와 주기를 인간의 삶에 아로새기는 우주론적인 차원의 의미를 지닌 의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무속의 굿문화로 삶의 뜨거움을 발산하기도 했고 선의 문화로 냉정과 고요를 되찾으며 삶의 궁극성에 몰입하기도 했으며, 유교의 경건하고도 정제된 몸짓을 통해 도덕질서와 우주의 질서를 일원화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은 세계를 바꿀 마지막 희망으로 미륵(彌勒)을 대망하기도 하였다. ● 미륵 - 염원하는 미래-희망의 상징 미륵(산크리트어 Maitreya)은 본래 미래불로서 세상에 하생하기 전까지 성불을 미룬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이지만 그 어떠한 명상과 기원으로도 희망을 찾지 못할 때 강력하게 요청된 한국인의 메시아였다고 할 수 있다. 미륵의 화신으로 일컬어진 화랑, 정치적인 격변기에 미륵이기를 서슴지 않았던 궁예와 고려말의 이금, 그리고 석가불을 능가하는 미륵불을 강조하며 자칭 미륵불임을 내세웠던 조선후기의 여환 등은 혼란을 일소할 힘과 권위의 상징으로 미륵에 주목했던 것이다. 한말 이후에는 미륵신앙이 영적인 천재들에게 의해 신종교의 형태(미륵불교, 용화교)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은 삼국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보면 느껴지듯이, 미래의 세계를 예지하는 미륵의 사유를 늘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론 경건하고도 엄중한 석가를 능가하는 힘 있는 상징으로 미륵을 떠올렸다. 미륵은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염원하는 미래와 희망의 상징이었고, 현실의 질곡과 역사의 공포를 이겨내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었다. ● 도깨비 - 특유의 해학과 재치 상징 거창하게 세상의 운세를 바꿀 미륵을 대망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이 늘 심각했던 것은 아니다. 위력이 넘치고 재주가 많은 초월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상상력은 세상을 약간 비켜 볼 수 있는 재치와 여유를 늘 간직하고 있다. 한국인의 신앙적 정서에는 떨리는 두려움과 더불어 친근한 매혹도 함께 있는 것이다. 도깨비가 꼭 그렇다. 변신과 둔갑의 귀재이지만 허깨비로 여겨질 정도의 막힘과 허술함이 남녀노소 누군가에게나 해학 거리로 통한다. 도깨비는 벽사신앙의 상징이면서도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마저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한국인의 상상력의 소박한 유산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에 마냥 조아리지 않고 특유의 해학으로 공포마저 되먹임하는 한국인의 내적인 힘에 감동하게 된다. ● 서낭당 - 성스런 공간의 형상화 한국인의 상상의 힘은 공간으로도 형상화된다. 성스러운 공간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기력을 얻고자 했던 서낭당 신앙과 새로운 신성 공간의 구획인 금줄문화는 공간에 투영된 한국인의 상징이다.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시는 어엿한 공간이나 단출한 신수(神樹)와 소박한 돌무더기의 차림새에서 우리네 조촐한 일상에서 삶의 공간을 정화하고 신성화하려는 종교적 상상력을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다. 금줄도 그렇다. 꺼림과 경계 세움을 통해 공간을 구획하고 갱신시키는 것이 금줄이다. 한낱 새끼줄이 획기적으로 공간의 질을 변형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는 것이다. 금줄을 보면서 우리는 성역과 속역을 가름하는, 새끼줄에 얹어진 한국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유교문화는 그저 동물적인 차원의 보은을 넘어서는 규범으로 효의 가치를 갈고 닦아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교의 이상사회를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유교는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한 삶의 전형으로 선비에 주목하였다. 이른바 공부하는 사람의 이상적인 삶의 표상으로 선비가 숭앙되었던 것은 선비가 자신의 삶을 맑게 하고 또 타인의 삶마저도 정화해낼 만한 가치의 체계를 굳건하게 확립한 주체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중심세력이었던 사림들은 독서와 인격수양을 통해 유교의 이념과 가치를 몸에 익히고 강상과 절의에 찬 의리론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 하였다.‘맹자’가 전하는 대로, 선비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연마하면서도(獨善其身) 자신의 연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교화하고자 하는(兼善天下) 삶의 목표를 통해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실현하는 전형이다. 이러한 선비정신이야말로 실리적이고도 현실적인 목표에 사로잡힌 조급한 현대교육의 병을 치유하는 동시에, 양심과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건전한 지식사회의 모델로 주목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역사에서 무속-불교-유교-서학(가톨릭)-동학(신종교)-기독교(개신교) 등이 종교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충격과 파장을 일으켜 왔건만 우리의 삶의 넓이에 포진하고 삶의 깊이에 도달한 상징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직 무속(굿, 서낭당, 도깨비, 금줄), 불교(선, 미륵), 유교(효, 선비, 종묘와 종묘대제) 등의 문화로 국한되고 있다. 후발의 종교문화도 한국인의 상상과 사고의 기반에서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어간다면 우리는 보다 풍부한 민족문화의 상징을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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