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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아파트(상)

    서울은 넓고 그리고 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장기연재한 ‘서울택리지’가 서울의 윤곽을 더듬는 도시학적 탐사였다면 이번에 후속으로 선보이는 ‘서울택리지-테마기행’은 서울의 속살을 찬찬히 살펴보는 풍물적 탐사의 성격을 띨 것입니다. 먼저 세계 최고,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서울의 아파트와 아파트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어 서울의 극장, 백화점, 호텔, 공원, 시장의 명멸사(明滅史)를 추적할 작정입니다. 서울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상가와 지하도, 고가도로와 육교의 부침이나 한강 다리와 나루의 변천도 들여다보기의 대상입니다. 물난리와 하천복개, 전차, 판자촌과 달동네, 다방·댄스홀 같은 유흥업소에 얽힌 흘러간 추억도 되새김해 볼만할 겁니다.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이내믹이 지배하고 있는 서울의 변화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어쩌다 아파트가 서울의 압도적 주거문화가 됐을까 아파트는 서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한국사회를 읽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서울사람 열 명 중 여섯 명이 아파트에 살고 있고, 서울 도시경관을 아파트가 주도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성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교수가 2007년에 출간한 ‘아파트 공화국’은 파리의 아파트가 아니라 서울의 아파트를 연구한 결과물이다. 줄레조는 1990년 서울 방문길에서 공룡처럼 군림하고 있는 아파트와 아파트단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서울의 아파트’를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주제로 선택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서울의 아파트 건설 이유와 한국인들의 아파트에 대한 열망을 분석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0년 넘게 걸린 긴 조사과정을 통해 그녀는 왜 아파트가 서울의 지배적인 주거형태가 됐으며, 한국의 중산층은 왜 아파트에 집착하느냐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이방인의 눈에는 희귀한 이상현상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은 덤덤했다. “그런 것도 연구대상인가”라는 조롱 섞인 핀잔을 극복하고 줄레조는 2003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아파트문화 분야연구의 독보적인 학자로 인정받는다. 유수 기관들이 그녀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다. 줄레조의 의문에 한국사람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서울은 땅이 좁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아파트라는 거주형태의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우리가 알고 생각하는 대로다. 그러나 줄레조의 연구결과는 달랐다.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압축된 현대성’(compressed modernity)의 반영이었다. 아파트는 돈이나 주식과 비슷한 환금성을 가진 재화인 동시에 현대화의 매개체 또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1970~80년대 산업화를 담당한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중산층이 맺은 ‘3각 동맹’이 아파트를 상위 계급화했다고 주장한다. 아파트는 서울사람, 나아가 한국인 욕망의 상징이며 3각 동맹이 건재하는 한 아파트에 대한 환상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아파트와 아파트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비평한다. 영화평론가 이형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집의 역사’와 다름없다”라면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갖는 것을 중산층 평균적 삶의 실현으로 봤다. 주거지역과 평형, 아파트 건설회사의 브랜드가 신분을 드러내고, 재개발이나 뉴타운 공약이 선거 판세를 좌지우지하고, 아파트 정책이 정권의 성패를 가르는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이다. 2004년에 출현한 초고층 최첨단 주상복합 아파트는 또 다른 성공과 신분을 상징하는 ‘욕망의 바벨탑’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경제 칼럼리스트 우석훈도 줄레조의 분석에 동의하면서 중산층의 욕망과 개발독재의 획일성이 결합된 부동산정책과 아파트공화국의 파국을 예고했다. ‘아파트 한국사회’를 펴낸 건축가 박인석(명지대) 교수는 “문제의 핵심은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고 비판의 대상을 좁혔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담장을 둘러친 ‘단지’가 문제라는 인식이다. 그는 아파트를 열악한 도시환경이라는 사막 속에 자리 잡은 ‘사설(私設) 오아시스’라고 명명하면서 오아시스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임대아파트 단지, 분양아파트 단지, 주상복합아파트 단지처럼 아파트 단지가 재산가치에 따라 계급화하면서 계층적으로 폐쇄성을 띤다고 보았다. ‘단지 해체’가 왜곡된 아파트문화를 바로잡는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충정아파트부터 와우아파트까지… 아파트의 부침 아파트가 서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였다. 일제는 회현동에 3층짜리 공동주택(미쿠니아파트)을 지은 데 이어 1932년 충정로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충정아파트(도요타아파트)를 지었다. 혜화동과 적선동 등에도 아파트가 선보였다. 주로 일본인 임대·거주용이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짜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이었으니 충정아파트는 당장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아파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가 주창한 미래주택 개념에 따른 획기적 건축물이었다. 이 아파트는 한때 호텔(트레머호텔, 코리아관광호텔)로 개조됐다가 다시 아파트(유림아파트)로 되돌아갔다. 1979년 충정로 8차선 확장으로 건물 절반이 뜯겨나가는 곡절을 겪었지만 살아남았다. 서울시는 지난해 충정아파트를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공인, ‘100년 후의 보물, 서울 속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정부 수립 이후 지어진 최초의 민간아파트는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 종암동에 세운 종암아파트였다. 17평짜리 4층 건물에 152가구가 살았다. 정식명칭은 ‘종암 아파트먼트 하우스’였지만 ‘종암아파트’로 줄여 부르면서 ‘아파트’라는 용어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잘나가는 기업인, 정치인, 예술가들이 입주했으며 최초의 옥내 수세식 화장실과 입식 부엌이 장안의 화제였다. 특히 양변기로 대변되는 화장실 문화의 대혁명을 알린 옥내 좌식화장실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변기에 앉아 일을 보는 해괴망측한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온돌이 깔린 침실이 현관이나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은 특이한 구조였다. 1995년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 안양으로 이전한 마포형무소 자리에 대한주택공사가 최고급 마포아파트(도화동 삼성아파트)를 건립하자 서울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사이에 아파트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됐다. 입주 초기 연탄보일러 중독사고가 연발하고 부유층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주변에 담장을 쌓아 외부와 격리시키는 ‘자폐적 공간’을 조성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세계 유일의 ‘한국형 아파트 단지’의 모델등장이었다.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유입은 주택난을 부채질했다. 도심과 가까운 지역의 산비탈과 국공유지변 하천부지를 꽉 메운 토막집과 판잣집을 밀어내고 시민아파트를 지었다. 당시 지은 낙산 시민아파트 등 대부분 시민아파트는 경관훼손 사례로 낙인 찍혀 1990년대 철거 신세를 면치 못했다. 김현옥 시장(1966~70년 재임)이 주도한 시민아파트는 본래 철거민 수용용이었다. 시민아파트 1호는 천연동 금화아파트였다. 한 서울시 공무원이 해발 203m의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짓는 이유를 묻자 김 시장은 “이 바보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볼 것 아니냐”라고 답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전해진다. 1968~69년에 지은 시민아파트는 어김없이 산허리 또는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그래서인지 경관 하나는 끝내주는 금화아파트는 아직도 살아남아 개발연대기의 암담함을 나타내는 영화촬영장으로 쓰인다.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 뚫린 물길은 막을 수 없었다 도심재개발 차원에서 이뤄진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롯데백화점 청량리점)는 요즘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격이다. 특히 세운상가 아파트는 1960년 후반부터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1970년대 초까지 상한가를 쳤다. 18~25평의 작은 평수였지만 대규모 상가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이 아파트에 사회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입주했다. 사대문 안에 밀집된 직장에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상류층 집결지였다. 세운상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집창촌으로 알려졌던 ‘종삼’과 무허가 판자촌 철거로 얻어진 1만 3000평의 공지 위에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까지 무려 1km를 8개의 건물이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심의 괴물이었다. 아파트의 고급화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에서 처음 시도됐다.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에 지은 한강맨션은 중앙집중식 난방을 채택한 첫 호화 아파트였다. 시민아파트의 싸구려 이미지를 벗으려고 ‘아파트’ 대신 ‘맨션’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계약 1호는 27평형을 구입한 탤런트 강부자였다. 고은아, 문정숙, 패티 김 등 연예인들이 줄지어 입주했다. 분양이 대박 나자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장동운 주공 총재에게 “아파트 사업 그거 돈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현대를 비롯한 대형 건설업체들이 아파트사업에 뛰어드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1970년 4월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의 붕괴로 위기를 맞았지만 뚫린 물길을 막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서울은 아파트 공화국의 문턱을 막 넘어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몸… 때론 욕망의 표현 때론 문화의 저항

    몸… 때론 욕망의 표현 때론 문화의 저항

    몸의 역사1/다니엘 아라스, 로이 포터 외 지음/주명철 옮김 길/630쪽/4만 5000원 “역사가는 오랫동안 몸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그 중요성과 깊이를 밝혔다. 몸의 독창적 위치는 개인과 사회적 경험이 만나는 데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생각과 욕망을 표현하고, 그 시대의 문화를 소비하는 장소다. 그런가 하면 공동체의 규범과 틀 속에서 개인의 생각과 욕망을 억제하거나 곁눈질하면서 한계를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즉 문화적 저항이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몸의 역사에 눈길을 돌리면 그 시대의 정치·사회·문화 속에서 인간이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문화 전반의 흐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몸을 국가 차원에서 사회관계 속에서 또는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하지만 그 중요성과 깊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정치·역사 담론에서 다룬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프랑스의 아날학파가 1974년 ‘역사하기’ 제 3권에서 몸을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등록하면서 역사학의 틀 속에서 몸을 다루게 된다. 신간 ‘몸의 역사 1: 르네상스에서 계몽주의 시대까지’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몸에 대한 담론을 역사적 측면에서 고찰한다. 프랑스 파리 5대학 사회역사학 교수로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학제간 연구센터 공동소장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과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조르주 비가렐로가 책임편집을 맡았다. 사고방식과 상징, 종교, 예절, 풍속, 미술의 중심에 몸이 있는 만큼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방대하다. 제 1장의 저자는 온갖 고통을 겪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개의 상처를 통해 몸의 신성함에 집중한다. 로마병사의 창에 상처 난 구세주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결되는 신성한 의미를 갖는다. 중세만큼은 아니지만 르네상스와 근대까지 종교가 일상의 모든 것을 지배한 만큼 ‘몸’ 역시 그 프레임 안에 머문다. 3장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앙시앵 레짐 말까지 성욕의 역사를 통해 몸에 접근한다. 제도와 문화적 규범 속에서 개인의 처세와 경험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밖에 몸을 보는 관점과 태도, 운동과 관련된 담론, 해부술과 해부학, 건강과 질병, 비인간적인 몸, 왕의 몸 등 다양한 주제들을 전문가들은 각자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몸의 역사를 르네상스부터 시작한 이유에 대해 바가렐로는 “근대의 몸이 르네상스 시대에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은 몸이 그 자체의 추진력과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가졌다고 규정하기 시작했고, 몸을 개별화하는 문화가 생겨 옛 문화와 충돌했다”고 설명한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몸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사실적이 되었을 정도로 가치체계가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와 관습은 몸의 해방과 개별화를 늦추는 힘으로 작용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몸에 정신을 집중하고 합리적인 제도로 개인의 정체성이 발현되도록 뒷받침해 주면서 몸에 대한 담론도 바뀐다. 공동체의 규제가 강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개인의 해방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근대인의 몸은 복종과 해방이라는 두가지 역동적 요소가 뒤섞인 특별한 곳이 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300년전 세계, 맛에 눈 뜨다

    300년전 세계, 맛에 눈 뜨다

    18세기의 맛/안대회 외 22인 지음/열린 책들/320쪽/1만 8800원 ‘미각’이란 키워드로 동서양의 문화현상을 파헤친 책이다. 한국18세기학회에서 활동하는 인문학자 23명이 저마다의 시각으로 동서양의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폈다. 18세기에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급스러운 음식이 대중화 되고, 이국적 음식이 세계화되는 큰 변화가 있었다. 또 저급한 감각으로 치부되어온 맛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문화의 전면에 등장했다. 금욕과 절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욕망을 추구하고 소비를 과시하는 취향의 대중화도 시작됐다. 음식의 맛은 혀끝의 감각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화와 교류, 경제와 사회의 복잡한 세계사를 인드라(고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의 그물망처럼 얼기설기 엮어주는 그물코가 된다. 18세기는 교류의 시대였다. 조선에 들어온 고추는 고추장의 형태로 제왕의 식탁에 올랐다. 입맛이 까다로웠던 영조는 50대 중반부터 매콤달콤한 고추장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경이 돼 자신이 세운 탕평책을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사헌부의 지평(정오품 관리) 조종부(趙宗溥)는 미워해도 그 집 고추장을 좋아해 그것만은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18세기 봄 노량진과 마포 등 한강 하류에는 복어들이 떼지어 올라왔다. 당시 한반도에선 이곳에서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좋았다. 서울 봄철의 으뜸가는 풍미였던 복어의 치명적인 맛에는 스릴이 있었다.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은 복어를 먹고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정조·순조 연간의 저명한 시인 신위(申緯)는 복을 즐겼으나 한 번은 복어를 먹지 못한 채 봄을 보내자 “복사꽃 피고 진 뒤 빈 가지만 마주하다니. 서글퍼라! 하돈(河豚·복어의 한자어) 맛도 모르고 지났구나”란 시를 짓기도 했다. 18세기 초 영국 빈민가에는 진(gin) 광풍이 거셌다. 값이 싼데다 조금만 마셔도 쉽게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는 노동자들의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진은 적극 규제했지만 비위생적인 물의 대체제였던 맥주는 오히려 권장했다. 아랍에서 전래돼 ‘천천히 퍼지는 독약’으로 불린 커피는 프랑스 대혁명을 일깨운 계몽주의 운동의 촉매제였다. 1868년 파리에서 문을 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인 ‘카페 프로코프’에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많은 철학자들이 드나들었고 위대한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베스트셀러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카페 프로코프를 묘사하기도 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루이비통이 전통악기를 만났을 때

    루이비통이 전통악기를 만났을 때

    순수미술과 명품 가방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현란한 소비문화에 흠뻑 젖은 현대사회에서 팝아트풍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초현실적인 백화점의 명품관 인테리어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허상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돌아보고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소비한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 부분까지 있다. 오는 13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스페이스K에서 공개되는 루이비통의 사회공헌 미술프로젝트 ‘아티잔스’(ARTisans)는 최근 거세게 불고 있는 미술과 명품 브랜드 ‘콜라보레이션’(협업)의 대표적인 사례다. 프로젝트는 영상과 악기, 설치미술, 조각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마치 미술관과 백화점 명품관 사이의 벽을 허물려는 노력으로 비친다. 이번 협업의 소재는 백수광부의 아내 여옥이 불렀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구슬픈 사연을 담은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으로 꼽힌다. 현대미술 작가 전준호(45)·문경원(45)은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최초의 악기란 어떤 형태일지, 소리의 원료와 원형은 어떤 모습일지를 담은 다큐멘터리 ‘공무도하’를 찍고 있다. 두 작가는 2대째 전통악기를 제작하는 이영수(85·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보유자)·이동윤(58·악기장 전수교육조교) 부자를 만나 영감을 얻었다. 악기장 부자는 또 순수미술, 도예, 가구, 디자인, 작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6명의 신진 작가에게 관련 작품을 만들도록 도움을 줬다. 아울러 젊은 작가들은 2개월간 악기장 부자를 도와 가야금을 만들었다. 프로젝트는 이렇게 장인-현대미술가-신진작가를 잇는다. 협업에 필요한 2억원의 예산은 루이비통이 댔다. 루이비통이 국내 작가를 초청해 전시를 연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1년여에 걸쳐 전통문화와 현대예술의 교류를 시도한 것은 처음이다. 이동윤 악기장은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무 트렁크를 만드는 데서 출발했다는 회사의 역사를 듣고, 전통과 현대적인 것이 만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는 루이비통 입장에선 비교적 적은 돈으로 수월하게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기회다. 이 회사는 앞서 제임스 터렐, 아니시 카푸어, 그자비에 베이앙 등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을 주요 매장 내에 전시해 예술적 메시지를 전하고, 일본의 팝아티스트인 무라카미 다카시와 협업해 제품(루이비통 다카시 백) 라인업을 다양화하는 등 미술협업 분야에선 ‘선수’로 꼽힌다. ‘아티잔스’와 비슷한 미술 협업의 사례는 국내 화장품 브랜드인 설화수에서 찾을 수 있다. 설화수는 2007년부터 매년 전통 장인과 현대 미술가를 잇는 ‘설화문화전’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활을 주제로 궁장 권무석, 궁시장 김윤경·유영기 등과 현대미술 작가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기획전을 열었다. 가방 브랜드인 쌤소나이트도 2011년부터 배병우, 이용백, 황주리 작가와 아트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이 회사가 올해 초 시작한 신진작가 공모전도 미술협업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예술의 상업화’란 비난에도 불구하고 명품 브랜드와 미술 작가는 협업을 통해 이미지 상승과 경제적 도움이란 상호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지금&여기] 작가의 집/정서린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작가의 집/정서린 문화부 기자

    캐나다 동쪽 끝 섬에 간 적이 있다. 프린스에드워드 섬. 이름만 대면 다들 ‘거기가 어디냐’고 되물어오는 이 낯선 땅을 일종의 사명감마저 갖고 찾은 이유는 어릴 적 읽은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 작가의 고향이자 소설의 배경인 섬에 매료돼 ‘일생에 한 번은 가련다’고 별렀던 차였다. 풍광은 오래 품은 기대만큼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섬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만든 작가의 박물관이나 현실로 재구성해 놓은 ‘빨간 머리 앤’의 집은 정작 한철 관광객들이 눈도장 찍고 가는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싶을 만큼 콘텐츠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출장차 방문했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자택 박물관은 뜻밖의 감동을 안겼다. 톨스토이의 집엔 작가가 잠깐 외출이라도 나간 듯, 4000여 점의 유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밭을 갈 때 입었다는 허름한 농노의 옷, 에디슨이 선물했다는 축음기 등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이야깃거리도 무궁무진했다. 체호프 박물관에서는 방 1개당 사진은 두 컷만 찍으라고 단도리하던 깐깐한 안내인 할머니에게 샐쭉했던 일행이 나중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반전(?)도 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전해주려는 그녀의 열정과 작가를 향한 애정, 자부심이 제스처 하나에서도 묻어났기 때문이다. 작가의 집, 박물관 견학은 16세기 상류층들의 유럽 일주 여정에도 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왜 작가의 집을 찾는가’란 질문을 품고 미국 작가들의 집을 순례한 앤 트루벡 미 오벌린대 교수는 그 이유를 “작가가 창조한 세계와 ‘아!’하는 날카롭고도 생산적인 깨달음의 순간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불가능한 욕망 때문”이라고 풀어냈다. 하지만 그 세속의 공간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건 각자 상상력의 몫이라는 결론과 함께. 우리 주변에도 쉽게 가 볼 수 있는 ‘작가의 집’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한국문학관협회에 등록된 문학관만 전국 65곳. 협회에 따르면 내년까지 7~8곳이 더 들어선다고 한다. 올해 각각 작고 20주기, 25주기를 맞은 김남주,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 설립 소식도 들린다. 작가가 떠난 빈 의자, 손길을 거둔 지 오래인 원고만 남았을지라도 혹시 모를 일이다. 작가를 조종한 영감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 또 다른 내밀한 이야기를 갖게 될지는. rin@seoul.co.kr
  • [최태원 징역 4년 확정]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다른 판결 이유는

    최태원(54) SK그룹 회장이 27일 상고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이 확정됨에 따라 지난 11일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를 확정받은 김승연(62) 한화그룹 회장과 엇갈린 길을 걷게 됐다. ‘범행이 개인적인 착복을 위한 것이었느냐’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두 재벌 총수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최 회장은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옵션투자로 돈을 벌어 동생인 최재원(51) SK 부회장에게 나눠 주려 한 것은 사실이나 선지급된 출자금이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에게 송금됐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최 회장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며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로서 누구보다도 기업 경영의 합리성과 투명성에 앞장서야 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펀드출자 목적의 계열사 자금을 사적인 용도에 유용했다”고 지적했다. 2심 재판부도 “피고인들이 허황되고 탐욕스러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계열사 자금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대법원도 이러한 원심의 판단이 타당하다고 판단해 실형을 확정했다. 반면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김기정)는 지난 11일 김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범행 당시 한화그룹이 겪고 있던 재무적, 신용적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우량 계열회사들의 자산을 동원한 것으로, 기업주가 회사 자산을 자신의 개인적 치부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사안과 거리가 있다”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관계자도 이날 판결 직후 “재계 서열 3위인 SK그룹의 회장이 그룹 계열사 자금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유용한 행위에 엄정한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자신의 경영권 유지를 위해 부실 계열사 회사채 등을 발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현재현(64) 동양그룹 회장과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기소된 조석래(78) 효성그룹 회장 등은 불안한 마음으로 법원 종합청사가 있는 서초동을 바라보게 됐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20대女, 살 빼려고 기생충 골라먹었다가 결국…

    20대女, 살 빼려고 기생충 골라먹었다가 결국…

    날씬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2000년 전 고대 로마·그리스인들도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고 한다. ‘다이어트’(Diet)의 어원이 그리스어 ‘디아이타’(Diaita)에서 유래한 것도 이런 이유다.  물론 지금처럼 날씬해지기 위한 다이어트가 시작된 것은 19세기부터다. 산업혁명이 만든 풍요는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고, 다이어트를 하나의 ‘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도 속성 다이어트나 체중감량 비법(秘法), 연예인 다이어트 같은 ‘독특한 살빼기 방법’들이 유행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1930년대 미국에서는 일명 ‘기생충 다이어트’가 유행했다. 소고기에 기생하는 ‘촌충’(인체의 장내에 기생하는 곤충)을 먹어 살을 빼는 방법이다. 원리는 알약에 담겨 장까지 도달한 기생충이 소화가 덜 된 음식물을 흡수하는 것으로 실제 체중 감소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일단 원하는 체중에 도달하면 기생충 약을 복용해 촌충을 몸 밖으로 배설하면 된다. 문제는 촌충이 장기 속에서 최대 9m까지 자라는 탓에 두통이나 시력 감퇴 같은 부작용부터 척수염, 간질, 치매 같은 심각한 질병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기생충 다이어트 붐이 일면서 연예인을 등장시킨 광고까지 신문에 나올 정도로 기생충 약은 불티나게 팔렸다.  약물 다이어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독성물질까지 ‘신비의 묘약’으로 둔갑해 팔리는 일도 벌어졌다. 사약(死藥) 재료로 주로 쓰이는 비소가 대표적이다. 비소는 중추신경계를 흥분시켜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는 암페타민의 효과를 가져 몸무게를 줄여 준다. 물론 다이어트 약에는 소량의 비소 성분만 들어 있지만 때때로 살을 많이 빼려고 약을 과다 복용해 비소 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흔했다.  역사상 최초로 유명인의 이름을 타고 대중적인 인기를 끈 다이어트 약물은 식초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은 지금의 가수나 배우처럼 꽃미남 외모로 유명했다. 바이런은 평소에도 날씬한 외모를 유지하려고 식초를 통째로 마시거나 식초에 절인 감자를 먹었다. 구토 증세와 설사 탓에 웬만큼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바이런을 너무나 사모했던 영국의 젊은이들은 창백하고 마른 그의 외모를 따라 하기 위해 앞다퉈 식초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도 따라 했다고 하니 식초 열풍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단순히 음식을 오랫동안 씹어서 살을 빼는 다이어트도 있었다. 미국의 운동선수 호레이스 플래처(1849~1919)는 영양분을 모두 흡수할 만큼 충분히 음식을 씹고 나서 남은 찌꺼기를 뱉어 내면 살이 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라 ‘플래처리즘’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냈다. 음식에 따라 씹는 횟수는 다르지만 양파(샬럿)의 경우 최소 700번은 씹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살 빼기에도 유리한 이 다이어트법은 당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등 유명인들도 따라 했다고 전한다. 남은 섬유질을 모두 뱉어 내기 때문에 화장실은 2주일에 한 번만 가도 된다. 심지어 변은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플래처는 이 방법을 알리기 위해 직접 변을 들고 다니며 주위에 홍보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에 따른 대량생산 체제로 새롭게 주목받은 다이어트법 중에는 고무 속옷을 입는 것도 있었다.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을 배경으로 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은 비비언 리가 잘록한 허리를 만들기 위해 착용하는 코르셋도 이 고무 속옷의 일종이다. 탄력이 있으면서도 단단한 고무 속옷을 착용함으로써 지방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육중한 무게 탓에 가만히 있어도 땀을 쉽게 흘려 살을 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유행했지만, 과하게 몸을 조이다 뼈가 으스러지거나 장시간 착용해 피부가 괴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지난달 27일 허핑턴포스트 등 외신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회면 주요 기사로 실었다. 약물 다이어트 유행을 틈타 중국에서 인육(人肉)이 든 약을 운반해 온 중국 유학생 2명이 한국 경찰 당국에 적발됐다는 보도였다. 엽기적이기로는 이전의 사례에 뒤지지 않는다. 효과만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약이 팔리는 탓에 이 같은 촌극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욕망코드’로 본 세계지도… 그 속에 시대상이

    ‘욕망코드’로 본 세계지도… 그 속에 시대상이

    욕망하는 지도/제리 브로턴 지음/이창신 옮김/알에이치코리아/692쪽/3만 3000원 세계 지도 12개를 중심으로 지도에 숨겨진 당대 제작자와 사용자의 욕망을 파헤치며 인류의 세계관을 풀어낸 역사서가 나왔다. ‘욕망하는 지도’(원제:A History of the World in 12 Maps)가 그것이다. 1402년 조선은 조선, 중국, 일본은 물론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유럽 등 전 세계를 그린 지도를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완성했다. 이름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로 통합된 땅과 역대 국가와 도시를 표시한 지도라는 뜻이다. 지도 탄생 배경은 이랬다. 태조 이성계와 그의 성리학 참모들은 고려 왕조 전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조의 흥망을 설명하는 고대 중국의 사고방식인 천명(天命·하늘의 명령)을 끌어들였다. 이성계는 새로운 천명에는 새 통치만이 아니라 새 수도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도를 송도(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지은 뒤 하늘을 그린 지도와 땅을 그린 지도를 주문했다. 하늘을 그린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먼저 완성돼 경복궁에 전시됐다. 새로 들어선 왕조가 하늘의 뜻이라는 우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이어 완성된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약어 강리도)였다. 이는 현존 지도 가운데 조선을 표현한 최초의 지도이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유럽을 표시한 지도였다. 이 지도를 보면 중심엔 조선이 아니라 거대한 중국대륙이 인도 서해안부터 동중국해까지 축 늘어져 매달려 있다. 중국의 뿌리 깊은 정치적, 지적 영향은 지도 맨 위에 새긴 글에도 나타난다. 중국의 역대 수도 목록이 나오고 당대 중국의 성, 현 등의 행정 구역이 표시된다. 조선은 중국 다음으로 큰 땅덩어리로 등장한다. 제주도 아래쪽에 보이는 일본은 작은 섬에 불과하다. 아라비아 반도 옆의 아프리카는 실제보다 훨씬 작다. 아프리카 위쪽에 있는 유럽도 크지 않게 표시된다. 강리도는 조선이 자국의 정치 지형과 자연 지형을 동시에 인식해 만든 것으로 지리적 정확성보다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중국과 조선, 일본 등의 구조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지도는 ‘구글어스’다. 컴퓨터 화면에서 구글어스 아이콘을 클릭하면 지상 1만 1000㎞에서 본 푸른 지구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용자는 구글어스를 통해 지구 어느 곳으로든 접근할 수 있으며 생생한 3차원 이미지로 동네, 거리, 건물, 집 및 산, 강, 바다를 다양한 크기로 볼 수 있다. 이는 인쇄된 종이 지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구와의 상호 작용’ 기회를 제공한다. 구글은 방대한 지리정보를 인터넷에서 무료로 쓸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구글이 지도와 관련해 엄청난 정보를 독점하고 있으며, 지도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책은 과학, 신앙, 제국, 돈, 정보 등 12개의 욕망 코드를 통해 각각의 지도가 제작 당시의 사회적 욕망이 반영된 시대의 거울임을 보여준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말을 빼앗긴 인간, 잔혹한 상상일 뿐일까

    말을 빼앗긴 인간, 잔혹한 상상일 뿐일까

    입 밖으로 말을 뱉어내는 순간 ‘펠릿’이 튀어나온다. 파충류의 표피 같은 축축한 물질인 펠릿은 사람들의 몸에 달라붙어 부패하고 악취를 쏘아대며 사람들을 고통과 우울증에 빠뜨린다. 펠릿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혀를 자른다.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을 차마 다잡을 수 없는 사람들은 펠릿 더미에서 죽는 것을 택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말을 못하도록 뱃속 태아의 혀와 성대를 수술한다. 손바닥과 손을 이용해 가슴에 활자를 띄우는 ‘팸패드’가 등장하지만, 성대를 울리고 입술을 파열해 내는 말의 간절함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인간에게서 말을 앗아간 잔혹한 시대 ‘바벨’이다. 정용준(33) 작가가 언어에 대한 거대한 실험극을 첫 장편소설로 내놨다. 성서의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바벨’(문학과지성사)이다. 2009년 ‘현대문학’에 단편 ‘굿나잇, 오블로’가 당선되며 등단해 2011년 첫 소설집 ‘가나’에 이어 3년 만에 첫 장편을 발표한 작가는 작가의 동력이자 덫인 ‘언어’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말할 때마다 뭔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 왔다”는 고백에서 배경이 짐작된다. 데뷔작 ‘굿나잇, 오블로’에서는 억압이나 폭력 때문에 말을 못하는 인물을, 단편 ‘떠떠떠, 떠’에서는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말더듬이를, 단편 ‘벽’에서는 말부터 통제당하는 염전 노예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제 작가는 말을 못한다는 조건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하는 실험에 나섰다. “순전히 제 상상력으로 쓴 염전 노예 이야기 ‘벽’이 얼마 전 정말 현실에 있었다는 뉴스를 접하곤 ‘아무리 작가가 가혹한 상상을 해도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구나’ 싶었어요. 인간으로서 자존감이 가장 낮아지고 굴종감이 깊어질 때가 (강제로) 말을 못하게 될 때죠. 그럴 때 사람들이 느끼는 공통된 통증이란 무엇일지 궁금했어요.” 소설은 소년 노아의 다락방에서 잉태된다. 말을 하면 얼음 결정으로 변하고 봄이 되면 그 말들이 되살아나는 지구상 가장 추운 나라에 관한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가 소년을 매료시킨다. 언어생물학자가 된 노아는 말을 결정화하는 실험에 매달리지만 ‘펠릿’을 만들어 내면서 실패하고 만다. 처음엔 사람들과 펠릿의 싸움이었던 세상은 시민 대 정부의 갈등으로 균열을 일으킨다. 왜 노아는 아이라를 꿈꿨을까. “인간이 남긴 것 가운데 유일하게 영원할 수 있는 건 언어라고 봐요. 건물이나 유물, 유산은 무너지고 훼손되지만 언어와 활자, 책은 계속 살아 남잖아요. 하지만 정부와 미디어 등 사회는 늘 언어를 억압해 왔습니다. 반면 아이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말이 얼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끝없이 들리죠. 이렇게 모든 언어들의 자존감이 살아 있는 게 노아가 처음 생각했던 꿈이었어요.” 동화로 시작하는 소설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장, 공상과학소설(SF)의 상상력과 맞물리면서 극단이 주는 고통과 매혹을 한꺼번에 체험하게 한다. 인물들을 극단의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서사의 종착역으로 내달리며 독자들에게 궁금증과 흥미를 한껏 주입한다는 점에서 ‘바벨’은 정유정의 소설을 연상시키며 속도감 있게 읽힌다. 말을 되찾으려는 인물들의 분투와 절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언어’라는 명제를 또렷이 각인시킨다. 저마다 다른 질감과 냄새, 색 등으로 화자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펠릿은 진정한 교감과 소통이 부재하는 우리의 비루한 현실을 아프게 상기시킨다. “에밀 시오랑(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작가)은 ‘불행 속에 친구는 사라지고 동료는 늘어간다’고 했어요. 아는 사람은 늘어나지만 새벽 1시에 전화할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매일 밤 SNS로 남이 어떻게 사나 들여다보죠. ‘공통 감각’을 느끼며 교감하는 주인공들을 보고 독자들이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웠으면 좋겠어요. 그 느낌이 우리를 조금 바꾸지 않을까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성매매 혐의’ 성현아 재판, 3번에 5천만 원? ‘5분 만에 끝난 이유는?’

    ‘성매매 혐의’ 성현아 재판, 3번에 5천만 원? ‘5분 만에 끝난 이유는?’

    성현아 재판 배우 성현아가 성매매 혐의로 정식 재판에 회부됐다. 성매매 혐의로 약식 기소된 배우 성현아(39)가 19일 오후 2시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에서 열린 첫 공판기일에 출두했다. 이날 성현아는 뿔테 안경에 다소 수척해 보이는 모습으로 법원에 나타났다. 성현아의 법률대리인이 지난 달 공판심리비공개신청서를 제출해 이날 재판은 사건 관련자 외에 참관이 철저히 통제됐다. 5분여 만에 공판이 끝나고, 법원 밖으로 나온 성현아는 취재진의 물음에 답변 없이 미리 세워뒀던 차량을 타고 황급히 사라졌다. 당초 이 사건에 참여한 성현아의 변호인단은 금성과 단원 두 곳이었지만 금성은 이날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사임했다. 성현아는 지난해 12월 성매매 등의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당시 검찰 측은 “성현아가 2010년 2월~3월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한 개인 사업가와 성관계를 맺은 후 5000만원을 받은 혐의”라고 밝혔다. 이에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힌 성현아는 지난달 16일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성현아는 1994년 미스코리아 미 출신이다. 드라마 ‘보고 또 보고’,‘허준’,‘나쁜 여자 착한 여자’, ‘자명고’와 영화 ‘애인’,‘시간’ ,‘주홍글씨’ 등에 출연했다. 2011년 드라마 ‘욕망의 불꽃’이후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2002년 3월 엑스터시 복용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받았다. 2010년 6살 연상의 사업가와 재혼한 후 2012년 8월 아들을 출산했다. 성현아 소식을 접한 네티즌은 “성현아 남편..검찰이 잘못 한거면 성현아 결혼까지 했는데 한 사람 인생 망친 꼴”, “성현아 미스코리아 출신인데.. 왜 이런 소식에 휘말렸지? 안타깝다”, “성현아 남편..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성현아 재혼 했었구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성현아의 다음 공판은 3월 31일 열린 예정이다. 사진 = 영화‘애인’포스터 (성현아)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새 영화] ‘아메리칸 허슬’

    [새 영화] ‘아메리칸 허슬’

    영화의 첫 장면, 어빙 로젠필드(크리스천 베일)는 출렁거리는 뱃살 위로 셔츠 단추를 잠그고 가발을 곱게 빗어올려 대머리를 숨긴다. 허술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가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13일 개봉한 영화 ‘아메리칸 허슬’은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짜’의 삶을 살았던 사기꾼들의 이야기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기의 대상도, 연인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속이는 이들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진짜’이고 싶은 진심이 때때로 고개를 든다. 영화는 197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앱스캠 스캔들’을 다룬다. FBI가 공직자 비리를 적발하기 위해 실제 사기꾼들과 함께 벌인 함정 수사로 당시 하원의원 6명과 상원의원 1명, 뉴저지주 캠든시장 등의 비리 혐의가 일제히 드러났다. 영화는 이 ‘앱스캠 스캔들’에 가담한 사기꾼들과 수사관 개개인의 사연과 이들의 관계에 살을 붙인다. 사기 행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어빙은 매력적인 내연녀 시드니(에이미 애덤스)와 함께 승승장구한다. 이들의 사기를 적발한 수사관 리치(브래들리 쿠퍼)는 이들에게 거물급 4명만 잡아오라는 거래를 제안한다. 애초 딱 4명만 잡자던 작전은 유력 정치인들과 마피아, 어빙의 사고뭉치 아내 로절린(제니퍼 로렌스)까지 가세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점점 대담해지는 사기극 속에 고개를 드는 건 인물들 저마다의 욕망이다. 부와 명예를 꿈꾸면서 사랑도 놓치기 싫은 이들은 사기의 대상을 속였듯 서로를 속인다. 치고 빠지는 사기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대사가 압권이다. “사람은 고된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에게도 사기를 친다”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회색이다” 등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머리에 쏙쏙 박힌다. 그러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건 ‘사기’ 그 자체가 아니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사건의 주인공들에게도 진심과 감정이 있었으며 각자의 삶을 제대로 살기 원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자신을 원하는 리치에게 “진짜 나를 사랑할 때까지 기다려”라며 거절하는 시드니처럼 때로는 진짜이고 싶은 이들의 진심이 바로 허술한 사기꾼들이 매력을 획득하는 지점이다.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애덤스,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렌스 등 화려한 배우들의 면면은 그 자체로 눈을 즐겁게 한다. 미남 배우 크리스찬 베일은 이번 영화를 위해 체중을 20㎏이나 불리면서 완벽하게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애덤스와 쿠퍼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뜨거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소화해 냈고 로렌스가 연기하는 ‘민폐녀’ 로절린도 결코 미워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197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의상과 도시의 배경, ‘딜라일라’ ‘지프 블루스’ 등 당대 팝 음악이 요령 있게 버무려졌다. 제86회 아카데미 영화제에 최다(10개 부문) 노미네이트됐고, 앞서 제71회 골든글로브에서는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공연리뷰] ‘은밀한 기쁨’ 무대 복귀한 추상미의 이사벨 너무 밋밋해

    [공연리뷰] ‘은밀한 기쁨’ 무대 복귀한 추상미의 이사벨 너무 밋밋해

    착한 사람을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타주의와 배려가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은밀한 욕망과 희열을 종교와 대의(大義)로 포장할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67)의 연극 ‘은밀한 기쁨’은 공연 내내 질문을 던진다. 1988년 영국 로열국립극장에서 초연한 꽤 오래전 작품이다. 하지만 자본을 추앙하고, 권력을 지향하며, 사랑을 갈망하는 군상은 달라진 게 없어 고스란히 오늘의 질문으로 남는다.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은밀한 기쁨’(연출 김광보)은 이런 다양한 군상을 통해 전통적 가치와 인간성의 붕괴, 자본주의의 파괴력을 이야기한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었던 이사벨(추상미), 그의 언니이자 환경부 차관인 마리온(우현주), 마리온의 남편으로 성공한 기업가 톰(유연수)은 각자 자신이 추종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왔다. 일종의 도덕성과 원칙주의, 권력, 자본과 종교다. 아버지의 죽음은 여기에 변수를 안겼다. 아버지의 애인이자 알코올 중독자 캐서린(서정연)이다. 이 가족에게 짐이 될 게 뻔한 캐서린을 아버지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떠맡으면서 이사벨의 삶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대립의 원인은 으레 힘, 돈, 욕심 등 부정을 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요상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욕심 없고 원칙을 지키고자 한 이사벨이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듯 보인다. 회사를 위기로 내모는 사고뭉치 캐서린을 끝까지 감싸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기대는 동업자이자 애인인 어윈(이명행)은 매몰차게 뿌리친다. 매우 도덕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그 원칙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오히려 환경부 차관이면서도 환경단체를 경멸하는 마리온이나 기도 하나로 모든 잘못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톰이 더 설득력 있다. 추상미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이사벨이) 이해되지 않았다”면서도 “삶의 존경, 존중을 고집이나 신념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이 고집은 다소 밋밋하게 드러났다. 착하기만 한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명확한 발음과 시원한 발성으로 연기하는 우현주와 이명행 때문에 추상미의 이사벨이 답답해져 버린 것일까. 삶의 문제든, 사람 문제든, 이 작품은 여러 질문을 던진다. 3월 2일까지. 3만 5000원. (02)3443-2327.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 ‘읽어라, 청춘’] 카프카 ‘변신’

    [서울대 추천 도서 100선 ‘읽어라, 청춘’] 카프카 ‘변신’

    유치원에 다니던 딸은 TV를 보며 마법을 이용해 어른으로 변신할 수 있는 꼬마 밍키를 유난히 좋아했다. 예쁜 옷을 맘껏 갈아입고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밍키가 어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바람을 잠시나마 채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커서는 자신이 거미 인간인 양 손바닥을 쫙 펴보이며 생기지 않는 초능력을 시험하며 놀곤 했다. 평범한 청년인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해 정의를 구현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을 구체화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변신의 소망에는 제한된 세계를 넘어서서 자유자재로 활동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판타지가 들어 있다. 변신은 욕망을 가능한 현실로 만들면서 인간이 꿈꾸어 온 공간과 존재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어른을 꿈꾸는 어린 아이에게 밍키는 현재에 가능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한 욕구의 해결 방안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청소년에게 스파이더맨은 존재에 대한 불안과 의문, 소망이 투영된 영웅인 셈이다. 문학에서 변신의 속성은 종종 저주의 결과이거나 통과의례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동화 속 개구리 왕자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징벌을 받는다. 그러나 저주의 결과는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어서 애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를 만나 구원받는다. 단군 신화 속 곰은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먹은 지 삼칠일 만에 웅녀가 되었으니 이러한 변신에는 선에 대한 절대 긍정과 신뢰가 있다. 그런데 여기 갑충(곤충)으로 변한 한 청년이 있다.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위에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라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에서 변신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판타지도, 선에 대한 절대 긍정도, 희망이 담보되는 통과의례도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윤리적인 존재인 인간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 속에 철저히 무시되는 소외된 삶의 적나라한 모습일 뿐이다. ‘변신’은 알고 보니 주인공이 귀신이었다거나, 다 읽고 나니 범인은 따로 있었다는 식의 어설픈 요령이나 잔꾀 없이 이미 주인공이 갑충이 된 상태로 시작한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파산한 아버지의 채무를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해결해 가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갑충으로 변신해 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비록 갑충이 됐지만 의식은 그대로인 채 가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며 새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과거 5년간 희생적으로 가정 경제를 이끈 잠자의 헌신은 중요하지 않다. 정상인으로 살아가야 할 가족에게 그는 짐일 뿐이다. 결국 사회나 직장, 가족 모두에게 배제돼 기생적 존재가 된 그레고르는 죽음과 스스럼없이 타협하게 된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썩어갈 때 자신의 방에 갇혀 죽게 된다. 이 죽음 앞에 남은 가족은 새 출발을 위한 소풍을 간다. 이런 ‘변신’의 내용은 카프카의 현실인식이며 실존에 대한 질문이다. 카프카의 생애를 엿보면 ‘변신’의 그레고르가 카프카의 다른 이름임을 눈치 챌 수 있는데 그것은 그레고르의 상황과 카프카의 삶이 많은 부분 공통되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유태인인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생을 살았으며 당연히 체코의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유태인인 카프카에게 당시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산업사회에 접어든 프라하의 역사적 상황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카프카는 가족 부양의 책임에 떠밀려 노동자재해 보험국에서 14년간 일을 했는데 ‘부친에게 드리는 서신’을 통해 “저의 모든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쓰였습니다. 글 속에서 저는 평소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 대고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댔지요”라고 고백하며 “생선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다”라고 위협하며 폭압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고통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구약에서 인식의 열매를 나타내는 사과를 아버지가 던짐으로써 그레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상태는 카프카가 평생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과 실존의 위기에서 느낀 삶의 부조리에 대한 통찰이다. 당시 주류 사회의 부정적인 타자상인 유태인의 몸으로 끊임없이 실존과 정체성의 문제에 당면했던 카프카에게 몸에 대한 인식은 남달랐을 것이다.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로 꿰어진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다. 그대의 몸은 거대한 이성으로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동한다”라고 했던 니체의 말은 그레고르의 변신을 이해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다. 육체의 변화는 단순히 외형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 관계의 변화를 이끄는 구체적인 삶의 주체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레고르는 갑충이 된 이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며 가족의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갑충으로의 변신은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야기된 그레고르의 고립의지이며, 변형된 욕망이며, 인간의 위선을 폭로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자아는 껍데기에 불과한 벌레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며, 피곤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 보호받기를 소망한 실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레고르의 변신은 동화와 달리 사랑으로 풀지 못했다. 결국 도피처이자 치유처일 것 같았던 그레고르의 방은 감옥이 되고 그레고르는 가족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 오히려 철저히 소외된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이미 오래전부터 경제논리와 이해관계에 따른 가족 내 배반과 살인사건조차 종종 확인할 수 있는 일상이 됐다. 학교 폭력은 3년 사이 2배가 늘어났으며, 은둔형 외톨이는 최소 1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가차없이 물질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성이 가족관계에조차 반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을 기계와 물질로 환원시킨 삶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폭력에서 가족사는 자유로울 수 없고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일그러짐이 일상이어서 이성복이 시 ‘그날’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고 고백하듯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겪은 끔찍한 사건을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서술한다.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를 세워 놓고 독설을 쏟아내지만 거기서 자유를 느끼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소외된 한 인간의 고독한 얼굴을 마주하게 하여 통증을 느끼게 한다. 그 통증은 인간에 대한 비하가 물질 숭배로 나타나고, 제 역할과 존재가치에 대한 불안이 스펙 쌓기로 나타나며, 미해결된 분노가 왕따와 자살 문제로 드러나는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변신할 것인가. 혹은 누군가의 변신에 무관심할 것인가. 소외된 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에 내 마음을 얹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내가 갑충이 되어가는 데 무감각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신운선 한우리독서토론 논술책임연구원 *덧붙임 : ‘변신’과 함께 이성복의 시 ‘그날’과 ‘그해 가을’을 함께 읽으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레고르를 만날 수 있다.
  • ‘음란 영상’ 본 뒤 13세가 8세 여동생 성폭행…英, 강력대책 나서

    ‘음란 영상’ 본 뒤 13세가 8세 여동생 성폭행…英, 강력대책 나서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게임기로 음란 영상을 본 뒤 8세 친여동생을 성폭행한 13세 소년이 체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랭커셔 주에 거주 중인 13세 소년이 친여동생을 성학대한 혐의로 체포돼 재판 중이라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법률적 신상보호 때문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소년은 인터넷 연결이 가능한 게임기 ‘엑스박스’로 음란 영상을 접했으며 해당 행위를 직접 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드러났다. 블랙번 법원에 따르면 해당 소년은 “친여동생이 아직 어려 힘으로 굴복시키기 용이했고, 해당 행위가 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해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다”고 진술했다. 이 소년은 지난 5일 성폭행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이번 사건으로 ‘음란물’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 되고 있다. 지역 성폭행 방지 위원회 피오나 앨빈스는 랭커셔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성인들이 ‘포르노’와 ‘범죄’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나?”며 정부의 엄중한 제재를 촉구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정부는 2014 년 말까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대해 강력한 포르노 사이트 차단 조치를 취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한편, 소년이 음란물 접속에 활용한 엑스박스 게임기의 개발사인 ‘마이크로소프트’는 “해당 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과 책임을 느낀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와 함께 “엑스박스는 부모가 자녀들의 음란물 접근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시스템이 구축돼있다”며 음란 사이트 접속 시 자동으로 인터넷이 종료되는 설정방법 등을 공개했다. 자료사진=포토리아·위키피디아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유라시아 루트를 가다] 힐링 여행지…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유라시아 루트를 가다] 힐링 여행지…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와 원작을 각색한 197분짜리 동명영화에 등장하는 눈 쌓인 자작나무와 그 위를 달리는 열차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여행길에 오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여기에 수심 40m까지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바이칼 호수의 투명함과 시베리아의 청명한 공기까지 더해진다면 힐링 여행으로 이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로 꼬박 72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관광 도시 이르쿠츠크. 인구 70만명의 중소 도시지만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는 앙가라강만 둘러봐도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바이칼 호수, 한민족의 시원이라 불리는 알혼섬, 환바이칼 철도 등 여행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명소들을 품고 있어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1시간 30분 정도를 달리면 도착하는 리스트비얀카는 시내에서 가장 짧은 거리에 위치한 바이칼 호수다. 창밖으로 펼쳐진 눈 쌓인 나무 숲을 보다 보면 울퉁불퉁한 도로가 불편하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다. 현지 가이드인 BK투어의 김민석씨는 “바이칼호의 면적이 우리나라의 30%에 달하는 만큼 전부 둘러보기 위해선 3주는 머물러야 한다”고 귀띔했다. 성수기인 5~8월에는 리스트비얀카에서 유람선을 타고 바이칼을 둘러볼 수도 있다. 바이칼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담수량을 자랑하는 데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1637m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카메라에 그 느낌을 담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연신 셔터를 눌러댔지만 거대하고 투명한 호수와 눈 쌓인 타이가 숲은 앵글에 담기조차 벅찼다. 바이칼이 얼어붙는 2월 이후에는 수심 4m까지 빙판이 만들어지고 그 위로 차량이 달리는 진풍경도 볼 수 있다. 한민족의 시원으로 알려져 특히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알혼섬과 함께 시베리아횡단철도의 버려진 구간을 활용한 환바이칼 철도도 명물이다. 연휴를 맞아 바이칼을 찾은 알렉세이·빅토리아 부부는 “5월 연휴에는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환바이칼 철도를 타러 다시 올 생각”이라면서 “환바이칼 철도는 러시아에서 최고의 효도 선물 중 하나”라고 말했다. BK투어의 박대일 대표는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라면서 “한·러 비자면제 협정으로 이르쿠츠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 사진 이르쿠츠크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성추문 검사’ 뇌물죄 적용 징역 2년 확정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9일 여성 피의자와 성관계 및 유사 성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전모(32) 전 검사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검사를 포함한 공직자가 직무 수행과 관련해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것을 뇌물죄로 처벌한 판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2012년 4월 검사로 임관해 서울동부지검에 실무수습으로 파견된 전씨는 그해 11월 자신이 조사하던 여성 피의자와 2차례 유사 성행위를 하고 검사실과 모텔에서 총 3회에 걸쳐 성관계를 가진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가 법정 구속됐다. 이후 법무부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전씨를 해임했다. 1·2심 재판부는 “전씨가 여러 차례 성행위를 할 당시 검사로서 직무 수행 중이었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었고 검사가 수사 중인 피의자로부터 성적 이익을 제공받는 것은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 고의성이 충분히 인정될 뿐 아니라 직무의 공정성을 중대하게 훼손한다”며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이에 전씨 측은 “성적 이익의 가액 산정이 불가능하며 뇌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대법원 재판부는 국내외 판례를 검토한 끝에 “뇌물은 사람의 수요·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체의 유무형 이익을 포함한다”며 “경제적 가치가 있거나 금전적 이익으로 환산 가능한 것만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유죄를 인정했다. 이어 “이 사건으로 검찰 조직의 사기가 떨어지고 국민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면서 “검사가 지위와 의무를 망각한 채 대담하게도 피의자와 성행위를 가진 점은 상상하기 어려운 중대 범죄”라고 강조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그녀만의 ‘독특한 방’ 페미니즘을 엿보다

    그녀만의 ‘독특한 방’ 페미니즘을 엿보다

    “예쁘고도 구슬픈 프랑스 소설 같은 분위기, 맑고 편안하면서도 반짝이는 문체 속에 탐미주의적 예감이 깊숙이 흐르는 그의 소설은 일찍이 한국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녀만의 독특한 방일 것이다.”(문정희 작가) 낭만적인 시선, 섬세한 감수성으로 세공한 문체로 우리 문단에 ‘독특한 방’을 만들어냈던 재미소설가 고 김지원. 지난해 1월 30일 유방암으로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1주기를 기념하는 소설 선집(작가정신)이 3권으로 묶여 나왔다. 1942년 경기 덕소에서 장편 서사시의 개척자인 파인 김동환과 소설가 최정희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 드나들던 문인들로부터 예술적 감각을 수혈받았다. 아란이었던 본명을 지원이라는 필명으로 바꿔준 이는 소설가 김동리였고, 등단 당시 그의 작품을 추천해준 이는 황순원이었다. 1965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73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1975년 현대문학에 단편 ‘사랑의 기쁨’, ‘어떤 시작’이 발표되면서 등단했으며 1997년 중편 ‘사랑의 예감’으로 제2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소설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때문에 그의 소설 속에는 사랑과 결혼에 달뜨면서도 욕망 뒤의 결핍과 환멸, 불안으로 부유하는 여성들이 포진해 있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김지원의 소설들은 허약한 여성성을 벗어던진 강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허약한 여성성에 갇힌 예민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페미니즘의 또 다른 페이지를 펼쳐 보여 준다”고 평가했다.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부유하는 거리,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주류가게를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읽고 썼던 작가의 분투는 50편의 중단편으로 남았다. 이번 선집에는 이 가운데 작가가 각별히 아꼈던 중단편 20편이 실렸다. 첫 소설 ‘늪 주변’과 등단작인 ‘사랑의 기쁨’,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의 예감’ 등이 포함됐다. 중편소설 ‘폭설’, ‘잠과 꿈’을 담은 1권에는 이제하, 서영은, 문정희 작가의 추모글과 김지원의 두 아들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편들이 실렸다. 책의 말미에는 김지원의 일생을 더듬어볼 수 있는 사진 30장이 펼쳐진다. 동생 김채원 작가는 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 속 추억을 자분자분 풀어놓는다. 이번 선집의 출간도 “내 흔적을 모두 지워달라”고 부탁했던 언니의 부탁을 거스른 동생 김채원의 뜻 때문이었다. 그는 “언니가 떠난 후 부탁하던 그 증류의 시간에 반하여 책을 내겠다고 생각한 것은 위험스럽지만 바로 그렇게, 언니가 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번 책은 독자들이 손쉽게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자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권당 5000원, 특별 보급판으로 출간됐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유사 성행위’ 성추문 검사 징역2년 확정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29일 여성 피의자와 성관계 및 유사 성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전모(32) 전 검사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검사를 비롯한 공직자가 직무 수행과 관련, 여성과 성관계를 가진 것을 뇌물죄로 처벌한 판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 공무원이 연루된 수뢰 사건의 하급심 판결에서는 성행위 자체를 뇌물로 인정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전씨는 2012년 4월 검사로 임관해 서울동부지검에 실무수습을 위해 파견된 그 해 11월 자신이 조사하던 여성 피의자와 2차례 유사 성교행위를 하고 검사실과 모텔에서 총 3회에 걸쳐 성관계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가 법정 구속됐다. 법무부는 이후 징계위원회를 열어 전씨를 해임했다. 1·2심은 전씨가 여러 차례 성행위를 할 당시 검사로서 직무 수행 중이었거나 그 연장선상에 있었고 검사가 수사 중인 피의자로부터 성적 이익을 제공받는 것은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 고의성이 충분히 인정될 뿐 아니라 직무의 공정성을 중대하게 훼손한다며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전씨 측은 ‘성적 이익의 가액 산정이 불가능하며 뇌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내외 판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뇌물은 사람의 수요·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체의 유무형 이익을 포함한다. 경제적 가치가 있거나 금전적 이익으로 환산 가능한 것만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또 당시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검찰 조직의 사기가 떨어지고 국민의 신뢰가 심각하게 훼손됐다. 검사가 지위와 의무를 망각한 채 대담하게도 피의자와 성행위를 가진 점은 상상하기 어려운 중대 범죄”라고 질타했다. 전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女화장실에 ‘한 발 디딘’ 남자 벌금 100만원

    울산지법은 24일 여자화장실 쪽으로 경계를 넘어 한쪽 발을 들여놓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성적 목적 공공장소 침입)으로 기소된 A(41·회사원)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26일 울산 남구 신정동 주상복합건물 4층 남자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바로 옆 여자화장실에 침입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여자화장실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화장실 안에 있었던 여성의 증언으로는 피고인의 신체 일부(한쪽 발)가 화장실 경계선 내부까지 들어온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여성용 공중화장실의 평온을 깨뜨리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범죄로서 죄질이 나쁘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은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게 아니라며 범죄 의도를 부인하지만 피고인의 행동과 경위 등에 비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화장실 입구에서 발각돼 즉시 도주한 점, 같은 종류의 전과가 없는 점 등을 고려해 벌금형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다시 범행할 위험이 있다며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도 명령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출세 욕구에 엘리트층까지 확산… ‘공부의 신’ 알고 보니 ‘커닝 신’

    [주말 인사이드] 출세 욕구에 엘리트층까지 확산… ‘공부의 신’ 알고 보니 ‘커닝 신’

    1595년(선조 28년) 12월 치러진 문과 과거시험에서 온양에 사는 이응길은 16세로 소년 급제했다.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 시험관은 그를 불렀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시험관이 답안지 뜻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시험 볼 때 초집(抄集·경서 등에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만든 요약집)을 옷 속에 숨겨 몰래 가져가 답안지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이에 선조는 이응길의 급제를 취소했고, 시험 감독관이었던 감찰을 파직했다. 이처럼 ‘커닝’(cunning)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언제 어디서든 나타났다. 순조실록을 보면 1818년 성균관 사성 이형하가 유생들의 부정행위 수법을 8가지로 요약한 내용을 담은 상소를 순조에게 올리기도 했다. 술차작(借述借作·남의 글을 베껴 쓰거나 남이 대신 글을 지어 써줌), 수종협책(隨從狹冊·수종이 책을 들고 따라가거나 책을 들고 가 베껴 씀), 정권분답(呈券紛遝·답안지를 바꿔 제출함), 외장서입(外場書入·시험장 바깥에서 답을 미리 써 가져감), 혁제공행(赫蹄公行·시험관이 문제를 응시자에게 미리 가르쳐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과거제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양반들의 거센 반대로 개혁은 이뤄지지 못했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커닝 수법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 커닝 페이퍼를 OHP(스크린 위에 영상을 확대 투영할 수 있는 광학계 투영기기) 필름에 작성해 몰래 가져가는 건 이미 고전이 됐다. 일명 ‘삐삐’를 이용해 답안을 전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휴대전화, 무전기, 초소형 카메라, 해킹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부정한 수법으로 출세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은 셈이다. 아울러 과거엔 꼼수를 부리려는 고만고만한 성적의 대학생이나 수험생들이 커닝을 기웃거렸다면, 최근에는 엘리트층까지 커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10일 연세대 법학대학원 1학년 A(25)씨는 교수 연구실에 잠입했다. 교수가 사용하는 컴퓨터에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시험지를 빼내기 위해서였다. A씨는 순찰하던 경비업체 직원에게 붙잡혔고 영구제적 처분을 받았다. 이 학생은 이전 학기에 연세대 법학대학원에서 유일하게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은 ‘공부의 신’으로 유명했다. 비슷한 사건은 제주대 수의학과에서도 발생했다. 이 학교 수의학과 3학년 B(26)씨는 지난해 4월 담당 교수 연구실에 침입해 책상에 놓여 있던 시험지 사본을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3학년 본과에 진학한 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비결은 커닝이었던 셈. B씨는 교수가 설치한 몰래카메라에 덜미가 잡혀 1년 유급 판정을 받았다. 커닝은 학생들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커닝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한국농어촌공사 승진시험 비리 혐의자가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공기업 승진시험을 내는 한국생산성본부의 직원 엄모(57)씨가 2008년 3차례에 걸쳐 농어촌공사 소속 윤모(54)씨 등 3명에게 수천만원을 받고 승진시험(3급) 문제 등을 넘겨준 것. 문제지를 산 사람들을 포함해 연루된 사람만 32명에 이른다. 커닝이 만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성공을 최우선 가치를 두는 사회 분위기를 꼽는다. 커닝으로 적발됐을 때 처벌에 대한 두려움보단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는 의미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소위 말하는 ‘스펙’과 1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경쟁이 지나치게 가열되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엘리트층의 커닝이 확산된 이유에 대해 “엘리트 집단은 성공에 대한 욕구가 심해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더 완벽해지고자 커닝을 하는 것”이라면서 “화이트칼라 범죄가 일어나는 심리와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안종배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장도 “우리나라는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면서 “이익을 위해 범죄를 저질러도 이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했다.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의 저자인 정구선 성결대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되면 곤장 100대나 군인으로 차출됐지만, 과거급제가 유일한 출셋길이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근절하기엔 역부족이었다”면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출세 지상주의가 커닝이 만연하는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능·첨단화되는 커닝을 막고자 시험출제 기관들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초소형 카메라를 도입해 조직적으로 커닝하는 사례가 빈발하자 YBM 한국토익(TOEIC)위원회는 금속탐지기를 도입했다. 또 정·오답 편차와 답안 유사도를 비교해 사후 적발 시스템도 마련했다. 이 밖에도 ▲부정행위 특별조사팀 운영 ▲고사장 내 휴대전화 수거 ▲전국 고사실 수험자의 무작위 재배치 등 다양한 ‘부정행위 방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역시 금속탐지기를 복도 감독관에게 보급했다. 앞서 2004년 치러진 수능 시험에서 수험생 374명이 집단으로 휴대전화 문자 전송 시스템을 이용해 답안을 공유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2006년부터는 휴대전화를 아예 고사장에 가지고 올 수 없게 했다. 공무원 시험을 관리하는 안전행정부도 수험생이 귀마개, 모자 착용 시 시험감독관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있다. 전자계산기 허용과목(5급 기술 2차)은 수험생들이 직접 다른 수험생의 전자계산기를 초기화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발상의 전환으로 커닝을 방지하려는 노력도 있다. 강제적인 수법보단 수험생들의 양심에 기대는 것이다. 한동대는 1995년 개교부터 시험 무감독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1~4학년 학생 6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중 94%가 부정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98%는 앞으로도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답했다. 한동대 관계자는 “학생 스스로 양심을 지키며 무감독 시험을 하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팀 단위 프로젝트 활동 등을 통해 서로 경쟁자라는 인식이 아니라 협력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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