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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이좋아 산으로] 경북 봉화 청량산

    [산이좋아 산으로] 경북 봉화 청량산

    사통팔달 잘 뚫린 포장도로가 전국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요즘,‘오지’라는 단어조차 무색하지만 경북 봉화는 개발의 광풍을 살짝 비켜간 덕에 오히려 전통마을의 미덕과 청정한 자연을 오롯이 간직한 땅이다. 여기 청량산(淸 山·870m)이 있다. ●12개 빼어난 바위 봉우리가 인상적 경북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와 명호면 북곡리, 안동시 도산면, 예안면에 걸쳐있는 청량산은 1982년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청량산 육육봉’이라 불리는 12개의 빼어난 바위 봉우리들 때문에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한국의 3대 기악으로도 불린다. 특히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바위 절벽에 어우러진 단풍빛이 고와 가을철 관람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청량산은 퇴계 이황의 산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어린시절부터 산에 들어와 학문을 닦던 산으로 스스로 ‘청량산인’이란 호를 썼을 정도다. 훗날 그가 공부하던 자리에 제자들이 세운 청량정사를 ‘오산당(吾山堂)’이라 부르는 것도 퇴계가 ‘나의 산(吾山)’이라 부르며 사랑한 탓이다. 청량산은 규모와 높이만으로 따지면 별로 내세울 게 없다. 하지만 아담한 산세에 비해 독특한 모양을 자랑하는 12개의 봉우리와 봉우리마다 전망 좋은 대(臺)가 있고, 산자락에는 8개의 굴과 4개의 맑은 샘이 있다. 한때 3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산에는 현재 청량사와 청량정사만 남아있고 청량사에는 두 가지 보물인 공민왕의 친필 현판 ‘유리보전’과 종이 부처인 지불이 있다. 산행 들머리는 청량폭포, 선학정, 입석 세 군데. 선학정에서 청량사까지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시멘트 포장도로가 힘에 부친다. 그 밖의 길은 대체로 편안하고, 안내판과 표지기가 많아 길 찾기에 어려움이 없다. ●풍혈대·어풍대서 바라보는 절경 압권 산행 시작은 입석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편안하고 경치가 좋은 편이다. 각자의 산행 여건에 따라 짧게는 2시간, 길게는 7시간까지 다양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입석에서 출발해 금탑봉∼경일봉∼자소봉을 거쳐 정상인 장인봉에 오른 후 병풍바위∼청량사에 들러 선학정으로 하산하는 코스는 청량산의 면모를 두루두루 볼 수 있는 적당한 코스로 약 5시간 소요된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 가운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경일봉, 자소봉, 연적봉, 장인봉, 축융봉 등. 그 중에서 자소봉, 연적봉, 장인봉은 철계단을 올라갔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 경일봉으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정상인 장인봉을 향하는 막바지 오르막은 가파르고 미끄러운 데다 낙석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청량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는 청량산의 이름난 기암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축융봉과 입석에서 금탑봉을 오르는 길의 풍혈대와 어풍대가 있다. 자소봉에서는 첩첩 산중인 봉화 일대의 동북쪽 산세를 볼 수 있다. 장인봉 정상은 수풀에 가려져 답답하지만 대신 정상 50여m 아래쪽에는 멋진 전망대가 숨어 있어 청량산 바위 벼랑 아래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의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다. # 청량산의 볼거리 ◇청량사 산사음악회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청량사 산사음악회가 10월6일 늦은 7시에 열린다. 연꽃의 수술 자리에 앉았다는 청량사, 봉우리들이 에워싼 도량 안 천연무대에서 ‘장사익의 별빛나들이’가 펼쳐진다.1986년 29세에 청량사 주지로 부임해 등짐을 나르며 절을 가꿔온 청량사 주지 지현스님은 최근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도 길은 있다’라는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www.cheongryangsa.org ◇청량산박물관 봉화 지역의 역사와 전통 문화 속에서 청량산을 조명한 의미 있는 곳으로 청량산집단시설지구 내에 있다. 인근 지역의 향토역사자료와 민속자료,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료는 무료. ◇산꾼의 집 청량정사의 요사채 건물에 있는 산꾼의 집에서 주인 이대실씨가 무료로 제공하는 9가지 약초를 달여서 만든 구정차를 맛봐야 청량산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찻잔을 씻어놓기만 하면 된다. 이대실씨는 달마를 그리고 도자기를 구우며 청량산 바람과 함께 대금과 가야금을 즐기는 예인. 글 정수정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 [종교건축 이야기] (26) 화성 용주사

    [종교건축 이야기] (26) 화성 용주사

    경기도 화성시 화산 아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 전농동)에서 화성(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옮겨 모신 뒤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던 능침사찰(陵寺)이다. 사도세자와 사도세자비 혜경궁홍씨의 합장묘인 융릉(용주사에서 동북쪽으로 10여분 거리)을 수호하기 위해 지어 ‘효(孝)의 본찰’로 널리 알려진 도량이다. 능사의 사격 그대로, 다른 전통사찰과는 달리 산이 아닌 평지에 들어서 사찰보다는 오히려 궁궐과 사대부 가옥의 특징들을 더 많이 갖춘 독특한 가람이다. 능사란 왕이나 왕비의 능 근처에서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비는 재(齋)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모두 11곳이 세워졌다.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론 용주사를 비롯해 세조의 광릉을 위한 봉선사, 세종의 영릉 수호사찰 신륵사, 중종의 정릉 능사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이들 능사 가운데 용주사는 당파싸움의 와중에 억울하게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절절한 효심이 그득한 ‘효 사찰’이란 차별성을 갖는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으로 옮겨 조성한 뒤 능사를 짓기 위해 큰 공을 들였다고 한다. 각처에서 길지를 모색하던 중 신하들로부터 ‘천하제일의 복지’로 추천받아 낙점한 곳이 바로 옛 갈양사 터이다. 신라시대부터 사찰의 이름이 등장하는 갈양사는 한국불교 선종(禪宗)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조 염거 스님이 창건하고 주석했던 선찰이다. 지금도 그 선풍을 이은 선원 서림당과 중앙선원엔 안거(安居)를 가리지 않고 참선수행하는 선승들의 정진이 이어진다. 신라기부터 고려기까지 왕실 원찰로 받들어졌으며,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는 ‘수륙재’가 처음 열린 곳이기도 하다. 갈양사는 이처럼 명성이 높았지만 어떻게 소실됐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잦은 전란으로 사라져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용주사 대웅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에 따르면,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겨 봉안한 다음해인 1790년 2월 공사를 시작해 불과 7개월 만에 사찰 짓기를 모두 마무리했다.140여칸이나 되는 사찰 규모를 볼 때 정조가 용주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절을 지을 때 큰 시주를 한 관료의 명부인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는 경기감사를 비롯한 각 도의 감사 9명, 군수·현감·부사·만호·첨사 같은 지방관료 87명 등 모두 96명의 관직명과 이름이 들어 있다. 중앙의 고위관리들도 당연히 시주했을 것이며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에서 확인되었듯이,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 지방의 승려들이 책임을 맡고 나섰음을 볼 때 이 불사는 승속을 초월해 대규모로 진행된 유례없는 것이었다. 절 이름 ‘용주(龍珠)’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지형에서 비롯됐지만, 절을 다 지은 뒤 낙성식이 있던 전날 정조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 꿈을 꾼 뒤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가람의 큰 골격은 비교적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고(故) 정대 스님이 주지 시절 새로 지은 불음각이며 중앙선원, 호성각, 천불전을 빼곤 창건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제일가람 용주사’라고 쓴 일주문을 들어서 좌우에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같은 불교 경전 속 경구들을 새긴 표석들을 바라보며 천왕문을 넘으면 좌우 양쪽에 행랑을 거느린 맞배지붕 양식의 삼문이 눈에 들어온다. 삼문이란 동서 옆문과 중앙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부르는 이름. 전통사찰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인데 사도세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졌음을 보여준다. “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삼문 네 기둥에 ‘龍珠寺佛’의 네자를 각각 첫 글자로 딴 시구를 적은 주련이 인상적이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꾼 꿈에서 비롯됐다는 사찰 이름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삼문과 주 전각인 대웅보전 중간에 서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천보루(天保樓)도 왕실이 직접 지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주문 쪽에서 보면 천보루요, 대웅전 쪽에서 보면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인 현판이 사찰 양식이 아닌, 꼭 궁궐 풍이다.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 여섯 개의 목조기둥을 떠받치는 거대한 장초석도 주로 궁궐 건축에 쓰이는 것들이다. 누각 좌우로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료, 서쪽에 만수리실이 회랑과 연결돼 있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바깥 마당으로 출입문이 나 있고 툇마루가 달려 있어 절집보다는 오히려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창건 당시 각각 선원과 강원으로 쓰였는데 지금은 회의 때 사용하는 큰방과 스님들의 요사채로 바뀌었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이 천보루와 나유타료, 만수리실을 대웅전과 연결해 ‘ㅁ’자형으로 도드라지게 꾸며 그 정점에 대웅보전을 놓았다. 대웅보전은 창건 때 세워진 주 전각으로 조선후기 사찰양식을 그대로 따라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화려한 닫집이 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과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의 삼존불과 후불탱화를 옹휘하는 듯하다. 삼존상 뒤 후불탱화의 아랫부분 중앙에 ‘주상전하 수만세(壽萬歲) 자궁저하 수만세 왕비전하 수만세 세자저하 수만세’라 쓴 축원문이 들어 있다.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한 탱화인 것이다. 당대의 불화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서양화법의 원근법·명암법을 쓴 게 특이하다. 오래 전부터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의 “민관 상겸 성윤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는 기록을 앞세운 학자들이 김홍도가 아닌 다른 화승들의 작품임을 주장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웅전 앞의 회양목(천연기념물 제264호)은 정조가 직접 심은 나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뒤 갖은 위협과 고난을 참고 견뎌냈던 지난날을 돌이키며 번뇌를 떨어내려 심었을까. 오래도록 사철 푸른 잎을 피웠지만 지금은 병이 들어 앙상하게 마른 모습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정조는 용주사를 세운 뒤 융릉과 용주사를 틈나는 대로 들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능을 참배한 뒤 귀경하다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해 일행이 걸음을 늦추곤 했는데, 바로 그곳이 서울로 향하는 1번 국도변의 ‘지지대 고개’이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때문인지 대웅전 앞의 회양목은 마른 가지에서도 힘겹게 꽃을 피워내고 있다. “나를 잉태하고, 쓴 것은 뱉고 단 것은 먹여 주시며, 나를 키워주고, 먼길 떠나는 자식을 걱정하신 부모님의 은혜는 부모님을 양어깨에 모시고 수미산을 수억만년 돌아다녀도 결코 다하지 못한다.” 마치 바로 옆 ‘부모은중경탑’의 경문에 화답하듯이…. kimus@seoul.co.kr ■ 용주사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정조는 즉위 초기에 조선시대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억불정책을 폈던 것으로 전한다. 즉위하자마자 조선 초기부터 궁실에서 빈번하게 지어왔던 원당(願堂) 사찰 건립을 금지시켰고, 걸미승(乞米僧)들의 성내 출입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정조가 어떻게 전 국민이 동참하는 불사인 ‘용주사 건립’의 뜻을 세웠을까. 다름 아닌 불경 ‘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때문이다.‘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정조는 전남 장흥 보림사의 보경 스님이 바친 ‘부모은중경’을 읽고 마음에 느끼는 바가 커 용주사를 창건토록 지시했다.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크고 깊은 10가지 은혜에 보답하도록 가르친 경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컸던 정조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정조는 실제로 ‘부모은중경’에서 비롯된 용주사 창건을 전후해 불교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었다. 해남 대흥사에 세워진 휴정 스님 사당의 편액 ‘표충’을 직접 썼으며, 안변 석왕사의 고사(古事) 내용을 담은 비문을 손수 지어 세웠다. 표훈사의 사찰 중수를 도왔는가 하면, 무학대사에게 ‘개종입교보조법안광제공덕익명흥운대법사’라는 법호를 내리는 등 고승들의 추존에도 열성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는지는 용주사의 숱한 유물들에서 그대로 읽힌다. 용주사 건물들에 걸린 많은 주련들은 정조가 당대의 명 문장가였던 이덕무에게 명해 쓰도록 한 것이다. ‘부처님과 용주사의 복을 빈다’는 내용의 게송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는 직접 지은 것이며,‘부모은중경’의 내용을 한문·언문·그림으로 새긴 73매의 ‘부모은중경판’중 목판 42매(변상도·김홍도 그림)도 정조가 하사한 것이다.
  • [종교건축 이야기] (23) ‘유일한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東國寺)

    [종교건축 이야기] (23) ‘유일한 일본식 사찰’ 군산 동국사(東國寺)

    서해안 대표 항도(港都) 군산의 동국사(전북 군산시 금광동 135의1, 등록문화재 제64호)는 일제강점기 이 땅에 있던 500여개의 일본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경술국치(한일합방)가 있던 바로 전해인 1909년 일본인 승려에 의해 개창된 뒤 1913년 철저하게 일본불교 전통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지금도 초창기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됐다가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 말사로 등록됐지만 군산 시민을 포함한 일반인은 물론 신도들에게조차 생경할 정도로 ‘소외된 사찰’. 하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책자에 꼭 소개될 만큼 일본엔 각별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로 우리에겐 일제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는 역사의 큰 흔적이다. 북·남부로 금강과 만경강이 흐르며 넓은 평야를 형성하는 군산은 예로부터 빼놓을 수 없는 호남의 주요 곡창.1899년 개항과 함께 개항장의 외국인 전용주거지역인 조계지가 설정되면서 일본화되었던 도시다. 군산시지에 따르면 동국사가 창건될 당시 전체 인구 4900명 가운데 일본인이 절반에 가까운 2000여명이었으니 일제가 얼마만큼 군산에 눈독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열강들이 조선 개항에 종교를 앞세웠던 것처럼 일본도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1877년 부산 개항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강요에 따라 정토진종과 일연종 등 각종 불교 종파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 불교세력들이 각 지역에 자리잡는 데는 물론 넓은 토지를 확보한 일본인 유지들이 앞장섰다. 군산에도 여러 종파가 들어왔으며 동국사가 창건되기 전 이미 6개의 일본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동국사는 한일합방 전해인 1909년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 붓관(內田佛觀)이 금강선사(錦江禪寺)란 이름으로 개창했지만 사찰 자체는 4년 뒤인 1913년 세워졌다. 사찰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여러 이야기들이 떠돌았으나 동국사 스님들이 지난 2005년 대웅전 남쪽의 범종 명문을 탁본해 밝혀낸 것이다.1919년 일본인 주지 현정이 쓴 명문에는 “천황의 은덕이 영원히 미치게 하니,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복락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같이 굳세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어 당시 이 사찰의 사격이 어땠는지를 짐작케 한다. 명문에 붙인 발기인들은 김제 등 호남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해 지금도 군산시 지적부에 이름이 남아 있는 일본인 유지들. 일본 게이오대를 졸업한 뒤 군산에 자리잡고 900만평을 경작했다는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며 도요사키 게타로(富岐佳太郞), 오사와 도주로(大澤藤十郞) 등 대지주 6명이 들어 있다. 사찰의 설계자와 건축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 에도(江戶)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문화재청의 기록화 조사보고서대로 사찰 안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일본 분위기에 휩싸인다. 우선 정면 5칸, 측면 5칸에 팔작지붕을 인 정방형의 대웅전과 전형적인 일식 건축인 요사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다. 법당과 요사채가 떨어져 있는 한국의 사찰들과는 영 딴판이다. 대웅전을 들어가려면 요사채와 연결된 복도를 통해야 하며 요사채의 각 방에는 일본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납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국의 사찰과는 달리 장식이나 벽화를 일절 쓰지 않은 맨 벽의 대웅전 뒤편에는 원래 납골당이 붙어 있었지만 1960년대에 헐렸다. 납골당의 유골들을 모두 수습해 금강에 뿌렸는데 이 소식을 들은 후손들이 찾아와 대성통곡하며 절 마당의 흙을 담아갔다고 한다. 대웅전의 앞쪽과 양측면엔 모두 창호를 설치해 습기가 많은 섬나라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웅전 기둥이며 이 기둥들을 잇는 인방과 불단, 공포의 목재는 모두 직접 일본에서 날라온 쓰기목(일본 향나무종)을 썼다. 대웅전 출입 공간인 정면 앞 칸의 바닥이 시멘트로 마감된 것도 독특하다. 법당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 선 채로 예배를 드리는 일본 불교 전통에 맞춘 것이다. 대웅전 바닥엔 원래 다다미가 깔렸으나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철거했고 대신 장마루가 깔려 있다. 건물 뒷벽에 조성된 불단에는 소조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가섭·아난 존자 등 삼존불을 모셨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은 해방 이후 이 사찰을 인수해 ‘동국사’란 이름으로 개명한 남곡(1983년 입적) 스님이 김제 금산사에서 이운해왔다. 남곡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재무·교무부장과 조계사·선운사 주지를 지낸 조계종의 이름난 스님. 절의 이름을 ‘해동대한민국’을 줄인 동국사로 바꾸고 불단의 석가모니불을 애써 금산사에서 옮겨온 것을 볼 때 일제의 흔적을 지우려 무던히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럼에도 대웅전의 석가모니불 머리 위 천장에서 내리건 보산개는 치우지 않았다. 한국 사찰 대웅전의 닫집 격인 보산개는 일본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장엄물이지만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 아닐까. 범종각에 걸린 범종도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한국의 범종과는 달리 종각 지붕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어 특이하다. 범종각 앞에 늘어선 석불상에선 주술과 밀교성격이 강한 일본 불교가 그대로 읽혀진다. 우리 사찰에선 흔한 불탑 대신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33가지의 모습으로 현현한다는 33신과 여래·보살상 7기를 세웠는데 지금은 2기가 없어진채 38기만 남아 있다. 절에 들어온 일본인 신도들은 맨 먼저 12개의 띠별로 조성된 이 석불상에서 소원을 빌고 석불상 앞에 일종의 세숫대야로 만들어놓은 황등(黃燈)에서 손을 씻은 뒤 법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 사찰들은 다른 일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훼손되거나 사라져갔다. 동국사도 석불상과 사찰 입구 기둥에 새겨진 일본 글씨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망치로 뭉개졌고 조선총독부 건물로 쓰였던 옛 중앙청 건물이 헐린 1995년 무렵엔 군산시청이 철거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웅전이며 요사채, 범종이 온전하게 남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남곡 스님의 법맥을 이은 동국사 회주 재훈(71) 스님의 대답은 이렇다.“아픈 역사도 엄연한 역사인데 지우려고만 든다고 지워지나요. 반면교사로 삼아 후대에 교훈으로 남겨야지요.” 스님 말마따나 총무 종걸 스님은 지난해부터 일본 조동종 본부와 창건주의 후손들을 만나며 동국사지를 정리하고 있다.1주일 평균 50여명씩 찾아드는 일본인 관광객이며 건축학도들도 살갑게 맞이한다. kimus@seoul.co.kr 사진 군산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고은시인이 한쪽청력 잃고 19세때 출가한 곳 동국사는 절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군산 출신인 고은(74) 시인이 출가한 절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다. 고은 시인의 출가후 환속까지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동국사에 얽힌 이야기는 별로 없다. 다만 작품에 동국사의 만리향을 언급한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이 만리향은 대웅전 앞의 것을 비롯해 5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4그루만 남아 있다. 동국사 스님들에 따르면 고은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동국사를 자주 찾곤 했다.6·25전쟁 직후 극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후유증으로 한쪽 귀의 고막을 심하게 다친 뒤 방황하다가 이곳에 머물던 객승 혜초 스님을 만나 참선을 배우며 불교에 빠져들었다. 군산북중 미술교사로 있던 19세 때인 1952년 마침내 혜초 스님에게 중장이란 법명을 받아 출가했다고 한다. 동국사 회주 재훈 스님에 따르면 기승(奇僧)으로 알려진 혜초 스님은 고은 시인과 전국을 떠돌았는데 “너는 나의 제자이지만 스승”이라며 고은 시인과 절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고은 시인이 은사인 혜초 스님에게 절을 받고 다음날은 혜초 스님이 고 시인에게 절을 받곤 하였던 것이다. 결국 혜초 스님은 고은 시인의 그릇을 알아본 때문인지 당시 통영 미래사에 주석하던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추천했으며 고은 시인은 효봉 스님을 찾아가 일초라는 법명을 새로 받았다고 한다. 27세 때 2개월간 해인사 주지 서리 소임을 맡기도 했던 고은 시인은 이후 조계종 총무원 간부와 불교신문 주필, 전등사 주지를 지낸 뒤 만행을 계속하다가 1962년 환속했으며 틈날 때마다 출가사찰인 동국사를 찾곤 했다.
  •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에 고즈넉이 앉은 신계사(神溪寺). 갈려진 반도의 북녘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수월치 않지만 예로부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혀왔던 명찰이다. 정어리 어장으로 유명한 장전에서 출발해 만 가지의 다양한 형상을 가졌다고 하는 만물상으로 가는 길 한편에 자리잡아 금강산 관광객들은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보고 싶어하는 곳. 바로 앞쪽 기봉, 왼쪽의 응암, 오른쪽의 문필봉, 뒤쪽의 관음봉에 둘러싸여 천혜의 경관으로도 이름높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1500년 고찰이지만 6·25전쟁 중 무차별 폭격을 당해 삼층석탑과 당우 만이 덩그맣게 남아 있던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맞잡고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신계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일제기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의 ‘신계사지’와 1825년 남경 지환 스님이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에 전한다. 이 사료들대로라면 신라 법흥왕 5년(519년) 보운 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왕실의 통일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신(新)자를 따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창건 이후 김유신은 진덕여왕 7년(679년) 왕실의 기도를 올린 기념으로 사찰을 중건했고 통일 후인 679년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을 보수한 것으로 전한다. 고려기 국사까지 지낸 대표적 화엄사상가 탄문 스님이 보수했으며 서경천도론을 편 묘청에 의해 중창됐고 조선시대엔 나운(1709∼1782년), 대은(1780∼1841년) 스님 등이 주석하며 숱한 후학들을 배출했다고 한다.18세기 말 무렵엔 30여동의 전각들이 들어설 만큼 흥성했으나 일제기를 거치면서 유점사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란을 맞아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금강산은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물며 중생을 제도하는 곳으로 알려진 불교계의 성지다. 이곳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2000년. 남측 불교계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사찰 복원을 협의했으나 지지부진하다가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사찰 되살리기가 시작됐다. 목재며 기와 같은 자재를 일일이 남측에서 날라다 써야 하는 만큼 공사 진행은 무척 더뎠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단 세월의 켜만큼이나 달라진 남북의 전통건축 양식과 사고방식이었다. 현장에서 공사를 총지휘한 도감, 제정 스님은 “초창기만 해도 남북의 인부며 전문가들이 한 끼 밥을 같이 먹기에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전각에 들일 단청 하나를 놓고도 의견 차가 많아 몇주일씩 토의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것은 대웅보전과 만세루,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어실각, 칠성각, 종각, 축성전, 요사채 등 건물 11개 동. 요사채 한 동을 마저 짓고 주변정리를 끝내면 복원공사도 모두 마무리된다. 건물은 복원됐지만 원래의 전각 단청이며 주 불상들은 아직 갖춰지지 못한 상태. 일주문이며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모든 전각들이 일렬로 선 채 사찰 문을 대신하는 만세루를 내려다본다. 이 가운데 주 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 김규복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복원한 사진이 ‘조선고적도보’에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남한 사찰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엄하다. 뒷 외벽에 부처님 설법도와 전법도, 앞 벽에 부처님 칠불을 미장처리하지 않은 건식공법으로 붙였는데 남북 합작의 첫 단청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서쪽 끝의 어실각은 조선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 사찰에 사당이라니. 조선조 숭유억불 체제 아래 그나마 왕실의 사당을 모신 탓에 신계사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인근 표훈사의 본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려 초석과 기단석, 댓돌 등을 온전히 살려냈는데 모래, 황토, 석회를 다진 삼화토(三華土)가 생생하다. 문은 조선조 사당의 전형적인 형태인 삼문(三門) 형태를 띠고 있다. 어실각 바로 옆에 들어앉은 나한각도 특이한 전각.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외견상 한 건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한전과 조사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불교적인 시각으로 볼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부분. 어실각을 둘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지만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찰의 위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나한각과 나란히 앉은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며 바로 옆 축성전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 뒤 현신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곳. 임시로 불상을 봉안했지만 전국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서 내년 부처님 오신 날 원래의 모습대로 불상을 봉안할 예정이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구. 기단에 팔부중과 비천이 부조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쯤 생긴 것으로 금강산 3대석탑 중 하나로 꼽힌다. 빛처럼,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법을 중생에게 가장 빨리 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범종각도 대웅전 앞에 엄연히 자리잡았다. 삼층석탑의 옥개석이며 기둥돌, 대웅전 기단석 등 범종각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발굴 유물들도 눈길을 끈다. “신계사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으나…야수적 폭력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터만 남았다.-국보유적 제95호 신계사터” 북측이 신계사 터에 세운 표지석 명문이다. 남과 북의 불교계가 사찰 복원의 원(願)을 세우기 한참 전 새겨진 명문이지만 남북 불교계가 합동 작업을 벌여 복원해놓은 신계사의 명문답게 새로 고쳐써야 할 것 같다. kimus@seoul.co.kr ■ 창건설화 들어보니 신계사의 명칭이 언제부터 ‘神溪’로 굳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창건 당시 원래의 이름은 ‘新溪’였다고 한다. 많은 사찰이 창건이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듯이 신계사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신계사 앞 개울에는 알을 낳기 위한 연어 떼가 몰렸다고 한다. 당연히 연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바로 앞에서 살생(殺生)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절집에서 그냥 놔둘리 없었음은 빤한 일.“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신계사 창건주인 보운 조사가 결국 주문으로 방편을 써 고기 떼를 푸른 바다(동해)로 몰아내었고 그 바다까지 계곡물이 이르러도 고기 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운 조사가 용왕에게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요청했는데 신통하게도 그때부터 이곳에서 연어 떼를 볼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란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설화가 다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게 각색된 이야기쯤으로 돌릴 수 있지만 설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어 흥미를 더한다. 2003년 11월 신계사 대웅보전 발굴 조사 때 수습된 평기와가 그것. 기와의 등에 물고기가 새겨졌는데 물고기 문양이 들어 있는 기와 유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 “남북 불교계 문화교류 꽃 피웠다”

    “남북 불교계 문화교류 꽃 피웠다”

    “남북의 불교계가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문화·학술 교류의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지난 2004년부터 남한 조계종과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의 합동 공사 끝에 대웅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복원된 신라고찰 신계사(519년 창건) 복원공사의 현장 총지휘를 맡아온 도감, 제정(44)스님.19일 신계사에서 열린 남북 불교계 합동 낙성식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은 소감을 피력했다. 6·25전쟁 중 불타 없어진 신계사는 대웅전을 비롯해 안세루, 요사채,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칠성각, 어실각, 축성전, 삼층석탑 등 11개동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요사채 한 동 추가복원과 주변 시설이 정리되는 내년 말 복원공사가 마무리된다. 그는 “발굴, 단청을 비롯해 지금까지 복원공사에 동원된 연인원만 해도 남북을 합쳐 1만명이 넘었다.”면서 “특히 북한에선 전통건축의 맥과 연구작업이 거의 끊기다시피해 단청의 색감 하나를 결정하는데도 남북의 전문가가 며칠씩 실랑이를 벌였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목재 등 남한에서 가져오는 자재 조달에 1주일씩 걸리는 탓에 공사 진행이 원활치 못하고 기와가 휙휙 날아갈 만큼 바람이 강해 견디기 힘들었다는 고충도 털어놨다. 발굴현장의 성과를 함께 정리해 공동보고서를 내는가 하면 남북 통일 건축용어집 발간도 고려 중이다. 신계사 복원공사는 북측에서도 중시하는 큰 사업이라고 스님은 귀띔했다. “북측은 신계사를 비롯해 유점사, 표훈사, 장안사 등 금강산 4대 사찰과 국청사, 현화사 같은 개성 지역의 큰 사찰들을 복원·보수할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사찰들을 모두 파괴했던 중국과는 사뭇 다릅니다. 남북이 함께 할 일이 많은 셈이지요.”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1500년 신라 고찰이 되살아나다

    1500년 신라 고찰이 되살아나다

    1500년 신라고찰 금강산 신계사가 남북 불교계의 합동 복원공사 끝에 제모습을 되찾았다.8일 조계종 총무원에 따르면 조계종과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은 지난 2004년 총 4년간에 걸친 신계사 복원공사에 합의한 뒤 첫 해에 대웅보전, 지난해 만세루·요사채·산신각·삼층석탑을 복원한 데 이어 올해 들어 극락전과 축성전, 칠성각, 종각, 나한전, 어실각 등 주요 전각 7개동을 모두 복원했다. 이에따라 남북 불교계는 오는 19일 주요 전각 복원을 기념하는 합동 낙성식을 금강산 신계사에서 갖는다. 신라 법흥왕 6년인 519년 보운 스님이 산문을 열고 창건한 신계사는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명찰. 금강산의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채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무는 으뜸 성지중 하나로 통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중건됐으나 6·25전쟁중 미군의 폭격에 의해 소실되어 석탑과 1929년에 세워진 만세루의 돌기둥(石柱)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남북 불교계는 해방전 신계사의 모습을 되찾자는 데 합의해 내년까지 모두 21채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원할 계획이며 현재 신계사엔 남한 승려인 제정 스님이 머물면서 신도들과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한편 오는 19일 낙성식은 남측에서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스님과 신도 300명, 북측에서 조불련 위원장을 비롯한 스님 신도 등 300명이 각각 참석한 가운데 불상 봉안, 복원된 전각의 편액 제막, 범종 타종, 남북 대표자 연설 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충남 공주 영평사 구절초 축제

    충남 공주 영평사 구절초 축제

    산과 들이 붉고 화려하게 물들어 가는 계절, 가을. 소박하고도 청초한 모습으로 피어나 가을바람에 가녀린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는 꽃이 있다. 쑥부쟁이, 개미취 등과 뭉뚱그려 들국화로 일컬어지는 구절초다. 퇴락해 가는 계절의 끝자락에 피어나 보는 이의 눈을 아리게 하는 대표적인 가을꽃. 고 박용래(1925∼1980) 시인이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이라고 노래했듯, 낮고 해맑은 모습이 여간 정겹지 않다. 어느 시인은 또 “비탈진 들녘 언덕에 니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텅빈 들의 색시여….”라며 칭송하기도 했다. 구절초 축제가 한창인 충남 공주시 영평사를 다녀왔다. 붉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가을산 한자락을 하얀색으로 명징하게 빛내고 있었다. 글 사진 공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그랬듯, 영평사와 장군산 기슭이 온통 구절초로 둘러싸여 있다. 진입로에서 시작된 구절초 군락은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과 요사채 뒤편 산비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때아닌 횡재를 만난 벌과 나비들이 부산을 떨어댄다. 영평사 주변 1만여평을 하얗게 수놓은 구절초 군락은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영평사 주지 환성 스님이 구절초의 청초한 모습에 반해 10여년전부터 공들여 가꿔온 것이다. “13년전 만행을 하던 때에 구절초를 보았는데 청초한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었어요. 수행자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며 순화시켜 주는 꽃이지요. 저 혼자 보기 아까워 축제를 열었는데 오시는 분들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꽃을 완상하며 무슨 의학적 효험을 따질까마는, 딸을 출가시킨 우리네 친정 어머니들은 예전부터 9월이 되면 갓 피어난 구절초를 사랑과 정성으로 채집해 그늘에 말려 두었다가 시집간 딸이 해산을 하고 친정에 오면 달여 먹이곤 했다. 그런 까닭에 구절초에는 선모초(仙母草), 신선이 어머니들에게 준 약초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충만하다는 중양절, 음력 구월구일에 채취해 달여 먹으면 특히 부인병에 좋다고도 한다. 요사채 뒤편에서 미래의 추억거리를 열심히 만들고 있던 안명석(43·대전)씨는 “탐스럽지는 않아도 멀리서 보면 소박하고 평화로운 모습에 절로 마음이 평안해지네요.”라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안씨는 또 “막연히 가을이면 피는 꽃이려니, 뭔가 청순하지만 서러운 느낌을 간직한 꽃이려니 짐작만 했어요. 그런데 유심히 살펴 보니 닮고 싶을만큼 소박하고 청초한 꽃이네요.”라며 애틋한 여심(女心)을 내비치기도 했다. 구절초를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깔깔거리며 웃는 어린아이와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노오란 암술을 둘러싼 채 활짝 벌어진 이십여개의 꽃술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대로다. 구절초밭을 서성이다 보면 어디선가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쏟아지는 듯하다. 그 아이가 자라 여고생이 되고, 어느새 성숙한 여인이 되어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에 ‘머리핀’ 대신 꽂았을 때, 소박한 구절초는 그 어느 꽃보다 화려한 꽃이 된다. # 먹을거리, 볼거리 풍성 영평사에 가면 반드시 맛봐야 할 것이 국수와 백련잎 찹쌀밥. 점심무렵이면 무료로 제공되는 국수를 먹으려는 관람객들이 줄을 잇는다. 사찰음식이 그렇듯, 일체의 조미료를 쓰지 않고 죽염수 등으로만 간을 맞춰 정갈한 맛을 낸다.2∼3년된 된장이 익어가는 장독대를 소반삼고, 청량한 공기를 반찬삼아 먹는데, 노인이건 장성한 청년이건 한그릇을 게눈 감추듯 비워낼 만큼 일품이다. 백련잎에 싸서 쪄낸 찹쌀밥을 이곳에선 연선식이라고 부른다. 반찬이라고는 달랑 고추장아찌 하나. 가격은 5천원을 받는다. 그럼 맛은 어떨까? 백련잎 위에 찹쌀밥과 고추장아찌를 얹어 한쌈을 만든 다음, 입안 가득 넣어 보시라. 화려한 맛에만 길들여져 있던 미각에 새로운 충격이 더해진다. 티베트 승려들이 모래로 재현한 만다라 시연회, 산사에서 열리는 음악회 등은 눈을 즐겁게 한다. 아울러 청소년들이 세시풍속을 재현하는 중양절 잔치, 구절초 사진전시회 등이 볼거리를 더해주기도 한다. 구절초 축제는 오는 22일까지 계속된다.(041)857-1854.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간고속도로→정안 나들목→논산·공주 방향→조치원·종촌방향→은용리→영평사 ●중부고속도로→서청주 나들목→대전·공주방면 508번 지방도→연기군 조치원읍→36번국도 공주방향→산학리→영평사
  • [길섶에서] 노스님/김학준 지방자치부 차장

    대학시절 공부한답시고 여러차례 기거한 고향 절의 노스님은 참으로 특이했다. 새벽부터 예불은 하지 않고 절 주변에 개간한 밭에서 일을 했다. 틈이 나면 인근 계곡을 돌며 놀러온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주웠다. 죽어서 신세지기 싫다며 자신의 관을 미리 짜서 학생들이 있는 요사채 지붕 밑에 놓아둬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불공차 찾아오는 시골 아낙들이 이고 오는 것은 쌀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스님은 학생 기숙비 등을 아껴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새경을 넉넉하게 쳐줬다. 때문에 산 아래 마을에서는 “절에 가면 부자 된다.”라는 말이 돌았다. 지난 여름 오랜만에 찾은 절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노스님이 돌아가신 뒤 새로 온 스님이 많은 돈을 들여 수리를 한 덕택이라고 한다. 하룻밤을 자며 젊은 스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풍채 좋은 스님은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촌 보살들이 이게 있어야지. 내가 여기저기서 불사 좀 했지.”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얘기를 들을수록 노스님의 존재가 커져만 가는 것은 어인 일인지. 김학준 지방자치부 차장 kimhj@seoul.co.kr
  • 절이 왜 저잣거리로 나왔을까

    절이 왜 저잣거리로 나왔을까

    서울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은 쌀집이며 방앗간, 채소가게, 어물전 등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전형적인 재래시장. 그런데 이 시장 한쪽 3층짜리 건물 2층에는 ‘열린선원’이란 독특한 절집이 들어서 있다. 지난해 6월 태고종 사회부장 법현(48) 스님이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저잣거리 포교’의 원력을 세워 문을 연 선원. 처음에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 “절 집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무성했지만 차츰 입소문이 번지면서 신도 수가 200여명을 넘어섰다. ‘열린 절’로 통하는 이곳은 아무래도 보통 절집이나 선원과는 사뭇 다르다.60평짜리 법당과 공양간, 요사채를 합쳐 모두 10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찾아드는 신도들의 절에 대한 애정과 신심은 예사롭지가 않다. ‘열린 선원’은 원래 조계종 적문 스님이 전통사찰음식문화연구소를 운영했던 자리. 적문 스님이 평택 수도사 주지로 옮기면서 법현 스님이 참선 포교당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러면 법현 스님은 왜 이곳 저잣거리로 절을 들여왔을까.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심우도(尋牛圖) 10단계 중 마지막인 입전수수(入廛垂手). 바로 시장거리에 들어가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정신이다. 시장 상인들을 일일이 찾아가 전단과 책자들을 나눠주는 등 발품을 판 때문인지 지금은 시장 상인과 손님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찾아드는 신자가 늘고 있다. 지난해 선원 개원 때부터 매주 빠짐없이 선원을 찾고 있다는 김판수(67·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4동)씨는 “불교의 원 정신과는 한참 동떨어진 채 원형을 잃어가는 요즘 절집들과는 달리 우리 문화의 원형질을 순박하고 진솔하게 찾을 수 있는 분위기가 참신하다.”고 말했다.‘차례상에 술 대신 차 올리기 운동’이나 어린이 생태체험도 대중적인 인기를 더한 프로그램들이다. ‘열린 선원’이란 이름답게 선원의 운영은 비단 불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인근 교회의 목사를 초청해 설교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법현 스님이 교회에 가서 설법을 하기도 한다.‘쉽고 유익하고 재미있는 불교’를 표방하는 선원답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제대로 된 참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3∼6개월 과정의 불교아카데미 코스는 제법 엄격하다. 지금까지 4기에 걸친 아카데미를 거쳐 나간 신자만 해도 80여명. 참선도 간화선뿐만 아니라 묵조선이나 위파사나를 연결해 다양한 이론과 실제를 경험하도록 하고 있다. 법현 스님은 “일반인들에게 참선이 널리 번지고 있지만 어렵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며 “기본교리와 수행론을 터득한 뒤 참선을 하면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 말마따나 선원은 3∼6개월 과정의 기본 교육을 거쳐 삼귀의와 오계를 받은 사람만 신도로 등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우리의 불교 포교는 용어도 어렵고 친절하지 못한 측면이 많아 신자이면서도 불교를 잘 모르고 신앙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법현 스님.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효과적인 수행을 통해 평화와 깨달음을 얻도록 돕는 선교방편연구소를 설립할 원력을 세워놓고 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강남 귤,강북 탱자/원철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국장

    그 암자에는 탱자나무가 길게 빙 둘러져 있다. 이런 생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이제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산중은 겨울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라 잎 없이 뾰족뾰족한 가시들이 더욱 도드라져 담장이라는 본래 기능에 더없이 충실하다. 길바닥에는 지난해 떨어진 탱자 열매들이 메마른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예전에는 한약재라고 하면서 일부러 익기를 기다렸다가 더러 따가고 하더니 이즈음은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물론 떨어진 뒤도 마찬가지다. 열매가 제 값을 못해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춘삼월이 왔음을 아는지 여기저기 가지 끝에도 파아랗게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서귀포에 위치한 그 절은 정원수가 모두 귤나무였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으로 경계를 친 요사채의 큰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을 돌려 이른 봄임에도 불구하고 황금빛의 큼지막한 귤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 쳐다보았다. 그 곳에 머물고 있는 도반과 함께 오랜만에 찻상을 마주하니 십만팔천리 떨어진 강남으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하귤(夏橘)’이라고 대답했다. 육지에서 온 사람마다 모두 의아해 하며 물어보는 모양이다. 겨우내 꽃처럼 나무에 매달려 동절기를 견디는 만생종이라고 부연설명까지 해주었다. 며칠 전 두루마리 상태로 남아 있는, 고려에서 처음 만든 경전들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남선사(南禪寺)로 향하는 연구원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일보다도 ‘호시절이라 교토 곳곳에 만개한 매화꽃을 볼 수 있겠다.’라고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즈음의 강남 풍경을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생각하니 새가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로우리라.’라고 했던가. 봄을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제주도건 일본이건 중국이건 남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봄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귤나무를 생각하니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론 원어의 남북은 중국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지역을 나눈 것이다.‘강남의 귤, 강북의 탱자’라고 했으니 같은 나무를 심어도 강 남쪽에는 귤이 열리는데,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므로 그 맛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강남과 강북의 지리적·자연적 환경이 서로 다른 까닭이다. 하지만 귤과 탱자는 같은 운향과(雲香科)에 속한다. 그처럼 양자강은 남북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강을 중심으로 서로를 함께 마주보도록 해주어 또 다른 하나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강남북의 기준을 양자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꾸어 놓으면 또 다른 언어가 된다. 강남의 뚝섬 봉은사는 강북의 잘 나가던(?) 상궁들이 나룻배를 타고서 갈대밭을 헤치며 기도하러 오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화려한 고층빌딩의 숲에 둘러싸인 채 도심 속의 섬이 되어 버렸다. 이는 몇십년만에 강남과 강북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 까닭이다. 이제 지하철 종각역 벽에는 ‘강남같은 강북’ 혹은 ‘강북에서도 이제 강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가 심심찮게 나붙는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적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든지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변한 ‘말씀’으로 읽히는 한가한 토요일 아침, 송나라 야보도천 선사의 시를 가만히 읊조려 본다. 강북에는 탱자되고 강남에선 귤이지만(江北成枳 江南橘)/ 봄이 오면 모두 함께 같은 꽃을 피우는구나(春來都放一般花) 원철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국장
  • [이사람]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장 현고 스님

    [이사람]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장 현고 스님

    서울 견지동 조계사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한 귀퉁이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단장 현고 스님)이라는, 일반인에겐 조금 생경해보이는 조계종 기구가 자리잡고 있다.4개팀 18명으로 구성된 이 사업단 사람들은 요즘 머리를 맞댄 채 이른바 불교문화산업과 불교콘텐츠의 디지털화란 화두를 들고 밤낮 고심하고 있다. 지난 2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선 ‘불교전통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화의 중요성과 개발방안’이란 세미나를 열어 불교계 안팎의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조계종 총무원 언저리에서 불교문화의 대중화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의 중심에는 현고(56) 스님이 우뚝 서 있다. 평소 거침없는 말투와 튀는 행동으로 조계종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해왔던 현고 스님. 삼보사찰 송광사 주지와 조계종 기획실장·총무부장을 거쳐 지난해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후 지관 스님 취임 때까지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맡아 큰 무리없이 종단의 행정이양을 완수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불교문화의 대중화에 이처럼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불교는 중생구제란 대도와 자기수행이란 명목아래 스스로의 세계에 침잠해 왔던 풍토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불교도 안으로만 파고들 게 아니라 사찰이며 스님 등 모든 것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와 문화사업의 연관성을 묻자 특유의 스스럼없는 말투로 한국불교를 성토한다. “지구상에 선(禪)불교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이처럼 간화선이란 불교전통의 훌륭한 자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가 그 장점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무엇보다 불교계가 각성해야 하며 그 훌륭한 문화자산의 대중적인 활용에 눈뜨지 못한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실 현고 스님은 오래전 총무원에 몸담고 있는 스님들을 곱지않게 보아왔단다.1971년 당시 송광사 방장 스님으로 주석했던 구산 스님을 은사로 송광사에서 출가,98년 주지에서 물러날 때까지 27년간 단 3년을 빼놓곤 송광사를 벗어나지 않아 조계종에선 철저하게 ‘송광사 사람’으로 통한다. 서정대 총무원장 취임후 기획실장으로 전격 발탁된 게 총무원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총무원에 들어가 보니 역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무언가 나름대로 차별화된 문화를 찾던 중 우리 불교가 갖고 있는 훌륭한 자산들을 대중 속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지요.” 그래서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제안한 게 템플스테이다. 당시 처음 제안했을 때만 해도 “스님들 밥장사를 시키려 드느냐.”고 질타한 정대 총무원장을 비롯한 불교계의 반대가 심했지만 꾸준히 설득한 끝에 마침내 성사시켰다. 지금은 한국불교의 가장 성공적인 대중행사로 꼽히는 템플스테이가 있게 한 주인공인 셈이다. 이후 한국 전통문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불교문화의 대중화 작업에 매달리게 됐으며 그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 2004년 초대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에 취임했고 잠시 떠났다가 지난해 11월 다시 단장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현고 스님이 한국불교의 대중화에 천착하게 된 데는 은사인 구산 스님의 역할이 컸다. 지방 모 대학 건축과 2학년을 휴학하고 전남 순천 송광사 사하촌 여관에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던 때였다. 우연히 구산스님을 만나 대화하던 중 “허공 우주가 다 네 안에 있다.”는 일성에 발심, 주저없이 불가에 귀의했고 불과 70일 만에 사미계를 받았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빠른 수계였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1983년 12월 구산 스님은 입적하기 직전 두 수제자인 현호(현 법련사 회주)스님과 현고 스님을 불러놓고 송광사 중창불사를 하라는 엄한 유지를 남겼다. 구산 스님은 생전 삼보사찰인 송광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사찰을 중창할 것을 버릇삼아 말했다고 한다. 결국 그 엄청난 불사가 현고 스님에게 떨어진 것이었다. 그때부터 98년 주지 소임을 마칠 때까지 송광사 건물 64개 동 가운데 3동을 빼놓고 모두 개·신축하는 놀라운 업적을 일군 것이다. 이것 말고도 김천 청암사, 울진 불영사, 제주 법화사, 광주 신광사, 화순 운주사의 대웅전·요사채 등 150채가 스님의 손을 거쳐 새로 지어지거나 고쳐진 사실은 유명하다. “송광사 중창불사를 하면서 한국 사찰에 담긴 조형미에 빠져들었던 게 우리 불교문화의 특장에 매달리게 된 계기였지요. 한국의 건축은 철저하게 자연과 친하면서 인간을 배려하도록 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문화, 특히 불교문화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다고 할까요.” 그러나 1998년 주지 소임에서 불명예 퇴진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재직 중 일어났던 송광사 성보인 ‘16국사영정 도난사건’의 책임을 물어 종단 호계위원회가 공권정지 3개월 판결을 내려 주지 재임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랄까. 스님은 이때부터 불교의 사회사업에 눈뜨게 된다. 산사에서 내려와 마을에 살면서 환경이며 사회복지, 문화와 관련된 세상 일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절에서 내려와 살다보니 우리 불교가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 너무 일천하더군요. 불교의 큰 미덕 중 하나가 회향입니다. 이 회향이야말로 지금 시대에 사회를 향한 환원의 큰 의미가 아닐까요?” 내쳐 광주대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학해 졸업한 데 이어 지난해 고려대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땄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광주 지역에서 송광종합사회복지관장을 맡고 있는 것을 비롯해 이 지역 13개 사회복지시설의 실질적인 운영책임자이기도 하다. 불교계에선 독보적인 사회복지사업가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부터 광주 남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로 출강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초빙교수로 격상돼 강의를 맡고 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 등 남방 소승불교 국가들은 기독교 위주의 유럽 사회속에 불교를 보편적인 종교로 심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불교를 통해 고도의 정신수행을 하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는 이를 능가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장점과 콘텐츠를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사회와 고립된 불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하루빨리 대중속으로 파고들어야 합니다. 대중화가 시급합니다. 물론 여기엔 불교의 특성인 자비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 현고 스님은 ▲1950년 전남 완도 출생 ▲1971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4∼98년 송광사 주지 ▲2001∼2002년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2003년 총무원 기획실장겸 불교신문사 주간 ▲2004∼2005년 한국불교문화사업 단장 ▲2005년 총무원 총무부장, 총무원장 권한대행, 광주남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현재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광주남부대학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암자를 찾아서/안직수 지음

    우리 선조들은 산에 사찰이 들어서야 비로소 산이 생명력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개산(開山)이란 단어를 썼다. 산을 연다는 것, 그것은 곧 절을 세운다는 뜻이다. 서양의 산에는 사찰이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산에는 어디든 사찰 혹은 암자가 있어 땀에 젖은 나그네를 맞는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겐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 호젓한 요사채에 걸터앉아 산바람을 쐬며 약수 한 잔 마시면 그대로가 극락이다. ‘암자를 찾아서’(안직수 지음, 운주사 펴냄)는 우리를 그런 마음의 쉼터로 안내한다. 저자(불교신문 기자)는 마음의 길을 따라 산빛을 깨치며 전국 2000여 개의 사찰을 일일이 찾았다. 이 중에서 관광사찰 같은 큰 절은 일단 제외했고, 추리고 추려 책에는 자그마한 암자 27곳을 실었다. 호남 제일의 비경인 무등산 규봉암, 해학적인 나한신앙을 만날 수 있는 남원 서진암, 지리산의 소금강 구례 사성암, 스님들의 공부처인 무안 승달산 목우암, 꽃무릇 지천으로 피어나는 백제고찰 함평 용천사. 대숲 소리 가득한 영동 중화사, 봉황의 배 위에 위치한 횡성 봉복사, 세마대의 전설이 어린 오산 보적사…. 한 가닥 인연만 닿으면 스스로 암자의 ‘주인’이 되어 한껏 마음공부도 할 수 있으니 가파른 인생길에 이보다 더한 안식처가 또 달리 있을까. 저자는 암자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제재가 나무와 대화를 하듯, 그저 자연의 소리와 대화를 하다 오면 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암자여행 철학이다.1만 1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전북 완주 위봉산(524m)

    [조용섭의 산으路]전북 완주 위봉산(524m)

    허물어져 가는 위봉산성 돌담 위로는 아직도 옛 시간이 머물며 늦가을의 따사로운 햇살과 두런두런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한갓지고 여유롭다. 성곽을 따라 나있는 산길을 걷다 보면 비스듬히 창을 어깨에 기대고 졸던 옛사람이 놀라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전북 완주의 위봉산(524m)에는 유사시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선조 숙종 때에 축성된 위봉산성이 있는데, 산자락 아래의 위봉사를 에두르는 산줄기 전체가 성곽을 이루고 있다. 산길은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인 뱁재(위봉재)의 산성 서문(西門)에서 출발, 되실봉을 거쳐 702봉(서래봉)에 오른 뒤, 다시 되실봉으로 되돌아와 위봉산∼위봉사(가운데 사진)로 이어지는, 산성을 따라 나있는 코스로 잡았다. 뱁재는 위봉사와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있고, 예닐곱 대의 주차공간이 있다. 산성 3개의 성문 중 유일하게 그 형태가 남아 있는 아치형의 서문 안쪽 임도를 따라 10여분 오르면 고개에 닿고, 전방 오른쪽으로 성곽과 함께 길이 이어진다. 고개 정면 맞은 편 산자락의 건물은 태조암이다. 임도 고개에서 약 20여분 올라서서 갈림길에 닿으면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오른쪽 길은 위봉사 방향이다. 완만한 능선, 산성을 따라 나있는 호젓한 산길을 걷다 보면 참호처럼 낮게 통로를 낸 암문의 모습도 보인다.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 이내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내려서는 길은 나중에 되돌아 와 진행할 위봉산 가는 길이고, 능선으로 계속 나아가면 두루뭉술한 되실봉에 닿는다. 길은 약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소잔등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는데,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가 서래봉이다. 약 1시간 30여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 이 지역 산꾼들은 서래봉에서 서쪽 오도치로 내려서서 서방산∼종남산을 잇는 종주산행을 즐긴다. 동쪽 수만리 쪽으로 길이 잘 나있다. 되실봉에서 10분 정도 능선을 되돌아 나오면 갈림길을 만나 왼쪽으로 내려선다. 마치 너덜처럼 놓여 있는 무너진 산성의 돌 위로 길이 이어진다. 내려선 안부에는 오른쪽 위봉사로 내려서는 길이 있고, 뼈대만 남은 2층 구조물이 을씨년스럽다. 능선을 따라 산성은 오름길로 이어지고 산길도 줄곧 함께 나있다. 봉우리 2개를 지나 안부로 내려서면 이제 정상까지는 약 20여분 거리, 안부 오른쪽 내려서는 길은 되돌아와 위봉사로 하산할 길이다. 정상 동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 지역의 맹주산인 운장산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북쪽 저 멀리 달려가는 금남호남정맥마루금의 대둔산도 어렴풋이 보인다. 정상에서 안부로 되돌아와 위봉사로 내려서는 데는 30여분이 걸린다. 요사채 뒤로 들어서서 깔끔하게 정렬된 장독대를 돌아 절 앞마당으로 나오면 차분하면서도 탁 트인 위봉사의 전경이 드러난다. 절 현판의 ‘추줄산’은 옛이름이라고 한다. 위봉폭포는 위봉사를 나와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500m 정도 내려오면 도로 오른쪽 계곡 깊은 곳에 있다. ■ 대중교통: 전주대∼수만리 행 106번 버스(하루 6회운행 막차 수만리행 20:00, 전주행 21:40) 전주 시내버스(063)272-8102 ■ 자가용: 호남고속도 익산IC∼799번지방도∼봉동∼17번국도∼26번국도(진안 방면) 741번 지방도(송광사. 위봉사), 혹은 익산∼비봉(741지방도)∼고산∼동상(호반 드라이브) ■ 숙박: 동상면 수만리 자연산장농원(063-243-6604)등 인근에 숙식을 겸하는 민박집이 다수 있다. ■ 가볼 만한 곳: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 송광사(완주 소양면), 화심온천 ■ 문의:완주군청 문화공보과(063-240-4224)
  • 소나무재선충 백두대간 습격?

    소나무 재선충병이 백두대간 줄기인 강원도 동해시 무릉계곡 인근 국유림지대에서 또다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달 19일 강릉시 성산면 영동고속도로 인근에서 발견된데 이어 직선거리 50㎞ 남쪽지점인 백두대간 관리지점인 쉰움산 인근에서 발견되면서 산림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정상)인 고적대와는 1㎞, 두타산과는 2㎞ 쯤의 거리를 두고 있어 이미 소나무 재선충병이 백두대간 전반으로 번졌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동부지방산림관리청은 지난달 21일 등산객의 신고로 동해시 삼화동 산 267 일대 국유림에서 소나무 재선충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소나무 9그루의 시료를 채취, 정밀 검사한 결과 3그루가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4일 밝혔다. 이번에 소나무 재선충병이 발견된 곳은 무릉계곡에서 정상 방면으로 약 1.3㎞, 지난달 19일 감염이 확인된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와는 50㎞가량 떨어진 곳이고 지난 6월 최북단 발견지인 경북 안동지역과는 120㎞ 가량 거리를 두고 있다.도는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의 연간 이동 능력이 2∼3㎞에 불과해 매개충의 자체 확산에 의한 감염보다는 인근 삼화사의 요사채 증축 과정에서 감염목이 유입된 것으로 보고 감염경로를 정밀 조사중이다. 1988년 부산에서 시작된 소나무재선충병은 지난 6월 안동까지 북상해 강릉에서 발견된데 이어 동해에서도 발견됨에 따라 재선충병이 태백산맥 등 백두대간 전 지역으로 확산될 우려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강원도와 산림청 등은 이번에 발견된 피해지역 일대 소나무를 전면 벌채한 뒤 소각처분하고 정밀예찰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다. 또 소나무 반입 및 반출을 철저히 차단키로 했으며 도정 핵심사업인 숲가꾸기 사업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동해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종교계 문화유산·환경보전 ‘열기’

    종교계 문화유산·환경보전 ‘열기’

    “숙원사업인 개성 영통사 복원작업이 무사히 마무리돼 보람이 큽니다.” 지난 2년여에 걸친 개성 영통사 복원사업을 도맡아온 대한불교천태종 김무원 사회부장은 19일 복원기념 낙성식을 앞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영통사 복원불사는 남북 최초의 사찰 복원사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주변 환경을 지키려는 종교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북한 사찰의 복원활동을 통해 ‘민간 문화외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며, 문화유산 주변의 환경을 지키려는 운동도 종교계가 앞장서고 있다. ●북한사찰 복원 적극 지원 북한의 노후한 사찰 문화재를 직접 찾아 복원하는 활동을 벌여온 불교계가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불교천태종은 2003년 5월 북측과의 개성 영통사 복원 합의서 채택 이후 2년여 만에 29개 건물과 사찰 주변을 복원, 오는 31일 개성 현지에서 이를 기념하는 낙성법회 및 학술토론회를 갖는다.16차에 걸쳐 기와 40만장과 건축재료 등을 보냈으며 스님 등 300여명과 차량 180여대가 영통사를 방문한 결과다. 최근 북측과 낙성법회 개최를 합의한 김무원 스님은 “영통사 복원으로 남북 문화교류 및 북한 문화재 복원활동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천태종의 성지인 국청사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개성의 다른 사찰들도 복원사업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조계종도 지난 1년간 공들인 금강산 신계사 삼층석탑 복구사업을 최근 끝내고, 연말까지 요사채·산신각 등 신계사내 다른 곳들도 복원할 계획이다. 조계종 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지난해 8월 석탑을 해체한 뒤 대웅전 낙성, 만세루 복원과 함께 1년여만에 석탑의 보존·조립이 마무리됐다.”면서 “붕괴 직전의 탑을 복원했다는 데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문화환경 지키기에도 앞장 천주교 수원교구는 최근 교구내 ‘생명환경연합’라는 시민단체 성격의 조직을 만들었다. 지난 2000년부터 안성 미리내 성지 앞 약산마을에 부지를 매입, 골프장 건설을 추진해온 업체를 상대로 반대운동을 벌이기 위해서다. 골프장 건설업체가 제출한 사업안이 이들의 철회운동에 부딪쳐 안성시로부터 반려된 뒤 업체측이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을 청구했고, 다음달 중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수원성당 강정근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유택이 있는 미리내 성지는 국내 천주교의 모태인 곳으로, 문화유적 답사지로 정해져 있으며 성지 부근은 산림보존지역으로 오염을 막아야 한다.”면서 “골프장업체를 무조건 내쫓겠다는 것이 아니라 업체와 안성시, 성지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용도변경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입추(立秋)가 지나니 저녁과 아침 바람끝이 제법 차다. 세상의 번잡한 세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은 자기자리를 내주기 싫어 천둥번개를 치며 몸부림을 친다. 일지암(一枝庵)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초의 스님의 숨결이 실려 있는 일지암의 작은 차밭에는 벌써 가을준비로 수런거리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우주의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거대한 진리를 우리는 찰나지간에 느낄 뿐만 아니라 긴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잔의 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초의 스님이 말씀하셨던 동다(東茶) 즉 우리 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큰절인 해남 대흥사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새벽숲길 수련회’를 실시한다. 평상시 수련회 일정에 일지암을 찾아서 차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회 마지막 날인 일요일 아침 일찍 수련생들이 자우 홍련사 툇마루에 앉았다. 차 한잔을 공손히 손에 들고 맑은 얼굴을 한 수련생들은 차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우리차는 맛과 약효 둘다 겸비” 간단한 강의가 끝나자 한 수련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스님 우리 차가 좋습니까, 중국 차가 좋습니까. 요즘 턱없는 소문이 떠도는 푸얼차는 도대체 어떤 차입니까.” 차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차 문화는 대중들에게 너무도 멀리 있구나.’하는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먼저 푸얼차에 대해 답을 했다.“푸얼차는 중국인들조차 야만인들과 유목민들이나 먹었던 흑차, 흔히 오랑캐 차로 부르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보내준 몽정차와 육안차를 직접 마셨던 초의 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육안차는 맛, 몽정차는 약효가 있다는데, 우리 차는 그 두 가지를 다 겸했다고 옛 사람들은 높이 평했다.”고 우리 차를 극찬했다. 필자 역시 우리차는 색(色), 향(香), 미(美), 기(氣) 측면에서, 또한 요즘 현대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웰빙 측면에서 이 세상 그 어느 차보다 ‘좋은 차’라고 먼저 못 박고 싶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시고 있는 포도주의 예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매우 귀하고 맛있는 포도주’에 대해 그냥 오래되면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좋은 포도주는 기온의 변화가 심하고 가뭄과 추운 겨울 등 자연의 악조건 속에서 힘들게 자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가 당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지금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의 보졸레누보가 대표적인 경우다. 인기없는 포도 중 하나였던 보졸레누보는 자갈밭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했다. 척박한 땅이란 악조건 속에서 보졸레누보 포도나무는 땅속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포도로 재탄생한 것이다. 차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의 변화가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이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그런 점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는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 군산과 목포의 위도에 해당하는 산둥성등 몇군데를 제외하곤 우리나라 제주도 이남지역에 해당할 정도의 따뜻한 아열대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토심(土心)이 매우 부족해 찻잎의 맛과 질이 떨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즈오카 등 몇몇 지방을 제외하곤 온도의 차가 매우 적어 좋은 찻잎을 수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 찻잎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 토심이 좋다는 것이다. 차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려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우리의 차는 맛과 영양 그리고 약리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차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우리차의 성전인 ‘동다송´은 일지암에서 초의 스님이 순조의 부마이자 사대부 차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해거도인 홍현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물음을 받고 이에 대한 답으로 52세(1837년)때 편찬됐다. 홍현주는 우리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초의 스님은 당시 순조의 ‘부마’로 ‘실세’였던 홍현주 등 유가의 뛰어난 선비들과 한양을 왕래하며 학문과 차담을 나누었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 ‘동다송´은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차나무를 직접 심고 따본 경험을 바탕으로 덖고 건조시키는 조다법을 이용, 우리차의 공(功)과 덕(德)을 찬양하고 있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중국 다서(茶書)에 있는 각종 고사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있어 육우의 ‘다경´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다경´으로도 손색없을 정도의 노작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현존하는 ‘동다송´은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의 다예관에 소장된 필사본인 ‘다예관본(茶藝館本)´, 석오 윤치영의 필사본인 ‘석오본(石梧本)´, 갑술중추 경앙등초라고 쓰여 있는 ‘경암본(鏡菴本)´, 송광사 보정 스님이 필사한 ‘다송자본(茶松子本)´ 등 크게 4가지본이 있다. ‘동다송´을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의순(艸衣意恂)선사가 40세(1825년)때 터를 닦고 입적 때까지 주석했던 일지암은 지금 한국 차의 성지로 5.5평의 초당,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자우홍련사,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다. 그러나 앞마당에 펼쳐진 몇백평 규모의 야생차밭을 필두로, 서해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먼 풍광은 유천(乳川)의 물맛과 함께 차의 성지로서 군계일학이다.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일지암은 우리 현대 차문화사의 명실상부한 중흥조다.1979년 복원된 일지암은 한국의 차인들을 한곳에 결집(結集)시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과 차 문화를 현대인들의 품속으로 되돌려 놓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지암의 이름은 장자(莊子) 남화경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뱁새는 일생동안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구절과 한산시(寒山詩)의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구절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초의 스님은 일지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윤연 홍석주 등과 다도를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동다송´ ‘다신전´을 지었다. 일지암의 흔적은 일지암시집(一枝庵詩集)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장춘동은 해남 남방 20리 두륜산 일맥, 용과 호랑이 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산맥은 십구요, 계곡은 구곡이다. 대흥사의 남방이요, 북암에서 볼 때는 서쪽이요, 남암에서 볼 때는 북쪽, 이곳에 초당을 지었으니 이름이 일지암이다. 삼간 초당에는 초의 스님과 동자 한 사람, 법상(法床)에는 금으로 도금된 부처 일좌(一座), 아침저녁의 목탁소리 샘물과 수목이 의지하고 죽림의 바람소리는 가야금소리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石澗)에서 나오는 물은 죽관으로 받아 차를 끓인다. 남은 물이 고인 곳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 위에는 나뭇가지를 얽어 포도넝쿨을 틀어 올리고 정원주변은 수석으로 갖추었다.” ●일지암 복원은 차문화사의 중요한 사건 그러나 초의 스님 열반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의 일지암은 1979년 후대의 차인들의 노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1976년 여름 해인사 율원에 박태영 화백의 주선으로 박동선씨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필자와 도범 스님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와 도범 스님 등 방문자 일행은 토우 김종희 선생댁을 방문, 한국 차문화의 복원과 일지암 복원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김봉호 박동선 김미희 박종한 김종희 안광석 조자룡씨 등 수백명의 차인 결성으로 이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지암터 확인이었다.‘대둔사지´ ‘몽하편병서´ 문헌을 확인하고 대흥사 주지를 역임했던 응송(당시 90세) 스님 을 지게에 업고 다니던 1977년 2월 하순 오늘의 복원터를 확증할 수 있었다. 당시 에밀레 박물관장이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구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자룡씨가 새롭게 복원되는 일지암의 설계를 맡았다. 조자룡씨는 한국의 전형적인 다실을 찾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답사했다. 결국 한국전통 초당형식을 갖춘 일지암 초당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형태로, 법당 겸 요사채는 15.5평의 기와집으로 일지암복원위원회가 결정한 후 1979년 2월 완공했다. 일지암의 복원은 한국현대 선차(禪茶)문화의 복원으로 연결됐다. 그때부터 초의 스님 ‘동다송´ ‘다신전´ 등 차 관련사업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을 추모하는 초의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차 문화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암복원은 초의 스님이 생존했던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한국현대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한국차의 중흥조인 초의 스님의 자(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초의,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우사(芋社), 자우(紫芋), 병발(甁鉢) 등 여러 가지가 있다.15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초의 스님은 월출산에서 해가 지고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연담 유일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며 ‘초의’라는 호를 얻었다.‘초의’는 고려말 야운선사의 ‘자경문´ 가운데 있는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송라와 풀옷으로 몸뚱이를 가린다.”는 구절에서 유래됐다는 설과,‘중국사략´ 가운데 “굴을 파서 즐겨 살며 나무를 얽어매어 집을 삼고 나무 열매 먹고 풀옷을 입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초의선사는 요즘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영국에서 활약 중인 박지성처럼 어느 포지션에서도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실력있는 멀티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먼저 스님으로서 수행의 최고봉인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해 대흥사 13대강맥을 이었다. 초의 스님은 또한 탁월한 금어(金魚:불화를 최고의 경지에서 그리는 스님)이자 선필(禪筆)가였다.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익혔으며 , 탱화를 잘 그려 당나라 최고의 탱화장이였던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겨룰 정도로 예서체에 뛰어난 경지를 보였다고 한다. 불교전통음악인 범패, 원예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만드는 법 등에도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는 바로 남종화와 초의 스님의 인연이다. 초의 스님이 50세 되던 해인 1835년 봄 진도에서 남종화의 시조(始祖)가 된 소치 허유(小痴 許維)가 찾아온 것이다. 소치는 일지암에 3년을 머물며 초의 스님의 화법과 시학·불경과 차를 배웠다. 초의는 소치의 자질을 알아보고 추사와 인연을 맺어준다. 오늘날 한국화단의 큰 산맥인 남종화가의 탄생이 바로 초의 스님과의 인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소치는 먼 훗날 초의 스님의 인품을 묻는 헌종에게 “세인이 모두 고승이라 하옵는데 그분은 내외전(內外典)에 달통했으며 승속간에 많은 인사와 교유하고 있다.”고 밝히는 연유가 된다. 또한 그의 자서전인 ‘몽연록´을 통해 초의 스님과 추사의 인연에 대해 “두 스승은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초의선사가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은 당시 조선후기 유교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와 거리를 사상적으로 좁혔다는 점이다.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연천 홍석주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유·불·선에 대한 담론을 이뤄냈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성취해낸 것이다. ●43세때 번역서 ‘다신전´ 편찬 초의 스님의 또 하나의 노작(勞作)은 바로 ‘다신전(茶神傳)´이다.1828년 그의 나이 43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에 머물며 초록(抄錄)해낸 ‘다신전´은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부분인 ‘채다론’(採茶論)을 번역한 것이다.‘다신전´은 차의 신에 관한 기록으로 찻잎을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꾸며놓았다. 초의선사는 “전에는 승가에 조주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 다도를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초록해낸 것”이라며 ‘다신전´ 편찬의미를 밝히고 있다. 초의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시(詩), 서(書), 화(畵), 차(茶) 4절(絶)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당대 최고의 ‘신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 스님은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땅끝 대흥사 일지암이란 오지에 머물면서도 요동치듯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변화를 실천하는 실천가였다. 당대의 신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당대 중생들 삶의 ‘개화’(開化)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초의 스님에게 음풍농월의 수단이 아닌, 전통을 이어가고 새로운 현실의 삶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 같은 것이었다. 초의 스님이 살던 시대는 참으로 척박했다.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경제는 민중들을 빈곤한 삶으로 몰아댔고, 낡은 시대의 유물들은 쌓여진 지식의 보고들을 갉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심세력들의 당쟁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이리저리 내몰린 조선후기의 초의 스님 시대와 오늘 우리시대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할 혜안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의 곱디 고운 삶을 현실속에서 아름답게 보듬어 안고 함께 걸어갈 우리시대의 신 지식인이 그리운 때다 (일지암 암주)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6) 낙산사와 해수관음

    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맙소사!’,‘아이구, 하나님!’이라거나 ‘어머나!’를 외친다. 그런데 예전 사람들은 ‘나무관세음보살….’이 입에 붙어 있었다.5일 식목일, 한국 관음도량의 진원지인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염에 휩싸인 장면을 보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관음보살은 화마도 물리친다는데…. 지난해 10월 낙산사를 답사했지만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라는 생각에 막상 글은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했다. 동해의 ‘관해 1번지’는 두 말할 것 없이 낙산사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곳이라 오히려 수학여행 코스에서 빠질 정도로 널리 알려진 낙산사가 쑥대밭이 되었으니, 고찰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남해 보리암·강화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도량 관음보살은 관세음, 또는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대자대비의 화신으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진심으로 부르기만 해도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관세음보문품’에 부처께서 이르기를 “선남자여! 많은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음을 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소리를 들으시고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 활활 타는 뜨거운 불길에 갇힌다 해도 타지 않으니, 관세음보살의 위력 때문이다. 큰 물길에 떠내려간다 해도 관음을 부르면 곧 안전한 땅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큰 일 닥쳤을 때 저절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 것은 이런 관음 영력을 믿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한국 3대 관음도량이자, 세계 8대 보타성지다. 그 중 관음신앙의 원조는 아무래도 낙산사다. 의상조사가 세운 가람이기 때문이다. 순조시절의 범해(梵海)가 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에 다음 같이 의상의 행장을 밝히고 있다.“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실려 입당, 화엄의 2대 조사인 종남산 지엄의 방에 들어가 함께 화엄경에 관해 문답하였다.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논함에 있어 깊숙하고 은밀한 부분까지도 철저히 해부, 분석하니 가히 청출어람 격이었다.”이렇듯 해동 화엄종의 시조라 하여 그는 의상조사로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은 원효와 가까웠던 도반이다. 뜻을 같이 해 중국유학길에 오르다 원효는 되돌아오고, 의상은 건너갔다.661년에 산둥반도 끝에 있는 무역항 등주로 들어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 이미 30대 후반. 오늘날까지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애송되는 그 유명한 법성게도 바로 의상조사의 창작이다. 화엄경의 심오한 진리를 7언시 30구로 응축시켜 놓았으니 본래 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은 일관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니,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인 당대에 거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린 사찰의 영화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런 그가 세운 가람이 바로 낙산사이다. 설악산의 준수한 줄기가 양양쪽 동해로 흘러 내리다가 빚어낸 오봉산 품안에 넉넉하게 자리잡아 산은 작되 옹골지며, 산세가 수려하여 송림이 우거졌고, 동해를 벗하여 가히 해산(海山)의 격조를 말해 준다. 벼랑 때리는 파도를 벗삼아 잠들고, 다시금 파도 소리에 선잠을 깨는 가람이다. 오봉산은 본디 보타산 낙가산이었으니, 낙산이란 관음보살이 산다는 포타라카(Potalaka)의 음역으로, 낙가산 혹은 낙가로도 불린다. ●당에서 귀국한 의상, 관음 계시로 낙산사 지으니 당에서 귀국한 의상은 온 나라를 주유하며 뜻을 펼칠 마땅한 땅을 찾다가 이곳에 이른다. 해변 석굴에 관음 진신이 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100자가 넘는 해식 단애의 깎아지른 바위 틈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드나드는 험한 곳. 그곳에서 관음 진신을 만나길 간구했으나 뜻을 못이루자 그대로 바닷물에 몸을 던진다. 마침내 관음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진신은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건냈으며, 동해 용왕도 여의보주 한 알을 내렸다. 그러나 의상은 다시 이렛동안 진심으로 기도하여 마침내 관음을 친견한다. 관음은 의상에게 굴 위 산꼭대기에 쌍죽이 솟아날 것인즉, 그곳에 절을 짓도록 계시한다. 낙산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중국 보타산을 알아야 한다. 관음도량인 보타산은 오대산 문수보살, 아미산 보현보살, 구화산 지장보살 도량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성지다. 바다 가운에 꽃처럼 피어있는 보타산은 상해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반, 항주 이남의 영파에서는 4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은 보타산의 여러 사원 가운데 중심이며, 조음동사원은 우리 낙산사와 주위 경관이나 지형이 너무도 흡사하다. 동해 일출의 관해지인 의상대와 바닷물이 절벽 아래까지 밀려들어와 절벽을 치며 동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홍련암 관음굴이 너무 비슷해 하나의 의문이 풀린다. 의상이 일찍이 중국 보타산을 순례하고 그곳 지형과 거의 흡사한 동해안에서 바다로 돌출한 해식 동굴을 찾아내 그 위에 건물을 올렸던 것이 다양한 연기설화로 전해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불긍거관음원을 세운 유래를 불조통기(佛祖統記)란 자료를 통해 일본 승려 혜악(慧鍔)선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학설이 주류였으나, 신라 상인들이 지었다는 설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북송 말 서긍은 고려도경(1124)에서 “석교의 산록 위에 양무제가 세운 보타원이 있고, 전각 안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에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 갔다가 그 불상을 조성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바다로 나아갔으나 배가 암초에 걸려 더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관음상을 바위 위에 내려 놓았다. 관음원의 승려 조악이 전각 안으로 모셨더니 해상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반드시 나아가 기도하매 감응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적었다. 글은 보타산이 관음보살의 주도량이며, 항해를 위한 기도도량으로 조성된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관음원 앞바다에는 신라초(新羅礁)로 불리는 조그마한 암초까지 남아 있다. 의상을 비롯한 많은 고승들의 중국유학, 보타산과 비교되는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의 신라인 흔적은 해로를 통한 중국과의 왕성한 교류를 잘 암시한다. ●중국 보타산과 주위경관·지형 흡사 낙산사에는 관음과 얽힌 여러 설화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효 역시 낙산의 관음 참배에 나선다. 낙산 근처에서 흰옷 입은 여인이 벼를 베기에 원효가 다가가 장난삼아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흉작이라 줄 수 없다고 답한다. 다리에 이르니 한 여인이 서답을 빨고 있기에 마실 물 좀 달라고 청하니 서답 빨던 더러운 물을 주는지라 원효는 냇물을 새로 떠마셨다. 그랬더니 들판의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와상아”라고 말하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나무 밑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절에 이르러 보니 관음상 아래에 방금 전에 보았던 짚신이 한 짝 있음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여인이 관음임을 깨닫는다. 원효가 다시 암굴에 들어가 관음 진신을 보고자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도 못한 채 낙산을 떠나야 했다. 원효의 관음 친견까지 더해 관음도량 낙산사의 격을 한층 높이는 설화다. 관음의 주장처이면서도 정작 낙산사는 늘 편치가 않았다.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어 관음상도 부서진다. 오대산에 자주 나다니던 세조는 원통전 석탑을 7층으로 늘리고 중창 불사를 단행한다. 그로부터 20년 뒤(1485)에 낙산사를 찾은 남효온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를 보면, 그 때까지는 의상이 만들었다는 관음소상이 관음전에 안치돼 있었고, 관음굴에는 파도가 돌을 쳐대는 전각도 있었으며, 그 시대에도 낙산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일출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유명세를 치렀으니 최소한 600년이 넘는 전통이다. ●여러번 화마에 휩싸였던 낙산사 또 ‘고통’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절은 다시 무너진다. 광해 11년(1619)에 관음굴을 중건하며, 인조 9년(1631)에 재건하여 어느 정도 복원된다. 그 모습은 겸재 정선이 힘찬 필치로 그린 낙산사와 관음굴에 잘 남아 있다. 이후 낙산사는 중건을 거듭하며 1925년에는 의상대까지 세워 동해 일출의 적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삼팔선 근역에 위치, 한국전쟁의 격전지가 되면서 다시금 금석물과 원통전 앞 원문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불타버린다. 불자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고려시대 불상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362호)을 모신 원통보전도 전쟁 이후 새로 세운 것이다. 연꽃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관음이니, 낙산사 홍련암이란 검푸른 동해에 떠있는 붉은 연꽃, 즉 관음의 분신이렸다. 홍련암 마루바닥에는 10㎝ 가량의 구멍이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이 한 여름에도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해일이 몰아쳐서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쳐도 홍련암만큼은 버텨 왔다. 의상이 관음을 친견하고 동해 용왕이 여의주를 내린 장소로 손색이 없다. 이상하게도 벼랑 위에 위태롭게 세운 홍련암은 온갖 병화에도 끄떡없다. 그것 또한 관음의 원력은 아닐런지. 그러나 이 모든 게 이번 산불로 다시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낙산사는 본디 애초의 출발지였던 관음굴로 되돌아 간 셈이다. 원통보전은 물론이고 해수관음을 상징하던 보타루도 사라졌다. 한가롭게 바다를 굽어보며 차를 마시던 솔숲이 흉물스럽게 그을렸다. 바닷가 홍련암 요사채도 사라지고 관음굴만이 화마를 피했으니 본디 낙산사의 원점으로 회귀한 폭이다. 붉은 장송이 하늘을 가린 아름다운 솔밭길을 올라가면 해수관음상이 있는 신선봉이 나오는데, 그 솔밭도 그만 타버렸다.1977년에 700여t의 돌을 들여 높이 16m로 세운 해수관음만이 남아있어 먼 동해를 굽어보며 서있을 뿐이다. 관음보살이 중생들의 원력을 시험하려고 하심인가. ●집채만한 파도 몰아쳐도 버텨온 홍련암 죽어 자빠진 소나무의 몰골들이 귀신을 부를 것만 같은데 화마가 훑고 갔어도 낙산의 일출만은 어제와 다를 바 없으니, 그 아름다운 관해의 1번지를 모두의 공력으로 다시 세울 일이다. 관해의 명당이어서 만은아니다. 역사적으로나, 규모로나 동해안 사찰의 태두 격인 낙산사의 화마 소식에 실로 안타까운 헌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덧없음을 갈파한 낙산사 조신설화처럼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말 못하는 문화유산도 덧없는 것이런가. 아름다운 원장(垣墻)이 처참하게 불에 그을린 채 동해를 굽어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고 민망하다.
  • 낙산사 잿더미 왜 못막았나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와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을 앗아간 화마는 막을 수 없었을까. 5일 아침 강원도 양양군에서 1차 산불이 진행될 당시 낙산사 인근에는 10여대의 헬기가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전 한 때 불이 잦아들자 낮 12시쯤 산림청 헬기 8대 가운데 3대가 불이 번지던 고성 명파리쪽으로 급파됐다. 나머지 5대의 헬기도 양양에서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잔불이 오후 2시쯤 초속 20m의 강풍을 타고 번져나갔고 결국 낙산사를 침범했다. 낙산사 주지 정념 스님은 “오후들어서면서 바람이 심상치 않아 소화전을 열고 소화기 150여개를 동원해 미리 물을 뿌렸지만 강풍을 등에 입은 불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면서 “급히 소방본부에 다시 헬기를 보내 물을 한 번 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헬기는 한 시간이 지나서 왔다.”고 밝혔다. 결국 화마는 낙산사 건물 20여채 가운데 주전인 원통보전과 홍예문, 요사채 등 목조건물 14동과 낙산사 동종 등을 삼키고 말았다. 낙산사 총무 대공 스님은 “중요한 문화재가 있는 만큼 잔불을 확실하게 정리한 뒤 헬기를 철수시키고 절 근처에 방화선도 구축하는 등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더라면 중요한 문화재를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산림청 관계자는 “당시는 잔불이 거의 정리된 상태였고 고성 산불이 위험한 상태여서 헬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면서 “당시 양양군에 머물던 헬기 5대는 강풍으로 뜰 수가 없어서 지연됐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화재 감시 시스템도 무용지물이었다. 양양군은 2000년 고성 산불 이후 7억원을 들여 삼발이재, 천치산 등 주요 지점에 무인감시카메라 7대를 설치해 상당한 효과를 본 것으로 자체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산불이 처음 발생한 지난 5일 자정 무인감시카메라는 곧바로 잡아내지 못했다. 발화지점이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산밑이었기 때문이다. 화재의 기운이 잡혔을 때는 이미 불길이 무서운 기세로 번진 다음이었다. 양양군청 관계자는 “연기 단계에서 포착해 화재를 알려야 하는데 이번 산불은 바람이 워낙 강해 연기를 확인하는 순간 불이 솟아올랐다.”면서 “카메라 7대로 5만 3000㏊에 이르는 양양군 전역을 감시해야 하는 물리적 한계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양양 유지혜 이재훈기자 wisepen@seoul.co.kr
  • [식목일 산불] 낙산사 화재 현장

    [식목일 산불] 낙산사 화재 현장

    천년사찰엔 불에 탄 잔해만이 가득했다. 5일 오후 화마가 지나간 낙산사에는 의상대와 관음전, 곡예문만 남은 채 주요 건물이 모두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숯으로 변한 목조건물의 잔해뿐 천년고찰의 장엄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무너져내린 기와조각과 인근 담에서 아직 손을 대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남아 화마의 엄청난 기세를 느끼게 했다. ●사찰내 건물 15채중 11채 소실 일주문과 스님들이 머물던 요사채가 전소됐고, 대웅전격인 원통보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처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보타전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을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시도유형문화재 34호), 홍예문(虹霓門·시도유형문화재 33호) 등 목조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졌고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도 범종각과 함께 불에 타 훼손됐다. 낙산사 경내에 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불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1362호)’을 비롯한 신중탱화, 후불탱화 등 3개의 문화재는 이날 오전 지하 창고로 옮겨져 일단 안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 당국이 파악한 낙산사의 화재 피해는 홍예문, 일주문 등 사찰 내 건물 15채 중 11채가 소실된 것으로 집계됐다. 바닷가쪽에 위치한 의상대, 관음전은 간신히 화마를 피했다. ●바닷가쪽 의상대·관음전 화면해 산불은 이날 오전 7시쯤 강풍을 타고 양양과 속초 사이 7번 국도를 넘어 낙산 해수욕장 내 송림 단지에 옮겨붙었다. 헬기 10대와 소방 인력 800여명을 투입, 총력 진화작전을 펼친 끝에 오전 10시쯤 불길이 집히는 듯했지만 오후 3시쯤 초속 15∼30m에 이르는 강풍을 타고 다시 급속히 번져나갔다. 수백년 된 소나무숲은 송진을 머금고 있어 불길이 낙산사로 번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낙산사 스님들이 긴급 대피한 후 송림쪽에 가까운 낙산사 서쪽 일주문에 불이 붙었고, 화마는 순식간에 천년사찰의 대부분을 삼켜 들어갔다. 당시 낙산사 종무실에서 근무하다 불길을 피해 긴급 대피했던 전희경(26·여)씨는 “원통보전 뒷산에서 불길이 치솟아 아무것도 치우지 못하고 동료들과 함께 황급히 뛰쳐나왔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낙산사측은 이날 오전 긴급 구입한 소화기 150개를 이용, 자체 진화작업을 폈지만 양양 지역을 휘감은 산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낙산사 주지스님은 “오늘 아침에 헬기가 물을 뿌린 다음에 잔불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성으로 옮겨갔다.”며 “‘낙산사에 유물이 많으니까 확실히 소화를 하기 위해 헬기를 남겨달라.’고 부탁했지만 너무 빨리 철수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유홍준씨 “불타기 이전모습 복원 가능하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산불로 사찰 내 건물을 많이 잃었으나 다행히 보물 등 주요 문화재는 안전하다.”며 “소실된 건물은 6·25 이후 복원된 건물인 만큼 불타기 이전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양양 조한종 유지혜 이재훈기자 bell21@seoul.co.kr
  • 불국사에 웬 골프연습장

    조계종 11교구 본사이자 석가탑과 다보탑 등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 불국사(佛國寺)가 경내에 골프연습장을 불법으로 설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을 빚고 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는 1일 “사적 및 명승 1호인 불국사 경내 정혜료(定慧寮) 앞에 골프연습장과 테니스장이 불법 조성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이들 시설물 설치와 관련, 불국사측은 문화재청의 어떠한 허가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연구소측은 “100평 남짓한 테니스장은 10년 전에,6타석의 골프연습장은 2003년에 각각 만들어졌다.”며 “원래는 테니스 코트가 2개였지만, 이후 1개를 밀어버리고 골프연습장을 만든 뒤 외부에서 못보게 블록 담장을 쳤다.”고 덧붙였다. 연구소측은 또 “정혜료는 20년 전 열반한 월산 스님이 지은 요사채로 지금은 불국사 스님들이 기거하고 있다.”면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고찰내 골프연습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불국사 내에 골프연습장이 설치됐다는 주장에 대해 문화재구역 내에 설치되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조만간 정밀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불국사 종무소 관계자는 “문화유산정책연구소가 문제를 제기한 골프연습장은 사찰 경외에 있다.”면서 “그러나 연습장이 문화재구역에 포함되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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