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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관계 획기적 돌파구 기대/분단후 첫 정상대좌 이뤄지면

    ◎우리측,“핵해결 도움” 판단 전격 수용/북의 성실성 의문있으나 미가 담보 북한주석 김일성의 조건없는 빠른 시일내 남북정상회담제의는 북한핵문제로 긴장감을 지울 수 없는 요즈음 상황에서는 매우 전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때문에 우리측 관리들도 아직 김일성의 전격제의의 실현가능성,성실성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과 분석을 내놓지 못하는 상태다.특히 김은 기존의 남북대화채널을 젖혀두고 카터전대통령이란 미국의 고위인사를 메신저로 활용함으로써 우리측의 분석변수를 더욱 다양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김영삼대통령은 카터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은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는,역시 전격성을 과시했다. 김대통령이 기존의 방침을 1백80도 바꾸면서까지 즉석에서 수락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하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연구를 해온 만큼 비록 조건없는 회담을 하더라도 북한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이다.이러한 자신감은 『핵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한 지난 2월25일기자회견에서의 「조건」을 스스로 극복하고 충족시키는 요소다. 이와 함께 북한핵문제가 당사자인 한국을 젖혀두고 미국과 북한간에 논의되려는 데 대한 「주권회복」차원에서 이를 수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카터의 방북으로 급격한 국면전환의 모양을 보이고 있는 북한핵문제 해법에서의 자구책일 수도 없지 않다.대화를 통한 해결로 가는 북한핵문제에서 우리가 「선제재,후대화」의 기존방침을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정상회담제의가 얼마만한 성실도를 갖춘 것인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다만 서로가 「무조건」에 동의를 했고,「언제 어디서든」을 강조했다는 점,또한 한반도의 상황이 급박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남북분단후 첫 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조건없이 만난다는 점은 의제에 대한 사전조율이 필요없다는 점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이는 특히 북한이 그동안 실무회담에서 트집을 잡아 특사교환등을 거부하던 기존의 방법을 쓸 여지를 스스로 없앤 것이기 때문에 어느때보다 회담의 성사가능성이 높다 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는 김일성이 이번 카터전대통령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핵과 관련해 비교적 진지한 대화를 했고,전직미국대통령을 메신저로 썼다는 점이 다른 어느때의 선전공세와는 달리 북한 스스로가 미국과 국제여론을 이행의 담보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파악하는 눈치다. 남북정상회담이 실무적으로 논의되는 시점에서 북한핵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기는 어렵다.주돈식청와대공보수석은 『유엔의 제재와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별개의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이 시점에서 유엔의 제재는 이미 물을 건너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와 관련,청와대가 과연 김일성의 제의를 신중한 검토 없이 즉답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카터가 방북할 때 우리측이 우려하던대로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제의가 만에 하나라도 시간을 더 끌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전술차원에서 취해졌다면 우리측은 너무 잃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 그나마 실현단계로 가던 제재가 실종되고,문제는 몇달 뒤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그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국론분열,이에 따르는 정부의 지도력손상은 회복되기 어렵다.정상회담이 열리면 핵문제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성실성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북한에 모든 이니셔티브를 넘기게 되는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카터전대통령은 김일성이 김대통령의 올 2월 정상회담제의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조건없는 정상회담을 제의했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김대통령에게 김일성이 보내는 「몇가지」메시지를 전달했다고 공개했다.청와대가 공개한 것은 이 가운데 조건없는 정상회담을 갖자는 메시지 단 한가지였다.때문에 이날 카터가 전한 여러개의 메시지 안에 김대통령이 이를 즉석에서 수락하도록 만든 또다른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평양과 서울 가운데 어느 한 곳이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또한 회담이 성사된다면 시간을 끌지 않고 빠른 시일 안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절차와 실무협의로 시간을 보낸다면 북한의 정상회담제의는 이미 성실성을 결여한 것이란 비난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남북한관계가 새로운 요동을 시작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 ▲생년월일:1912년 4월15일 ▲출생지: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학력:25년 만주 길림성 육문중학중퇴 ▲집권기간:48년 9월(제1차내각수상)부터 46년동안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우려할 만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로 영리하고 참을성 있고 꽤 예측가능한 독재자라는 평. 카리스마적이고 사려깊고 철학적이라고 함. ▷김영삼대통령◁ ▲생년월일:1927년 12월20일 ▲출생지: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학력:51년 서울대 철학과졸 ▲집권기간:93년 2월25일부터 1년 4개월 ▲「감의 정치」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정치적 순발력·판단력이 뛰어나다. 위기를 극복하는 돌파력도 돋보인다. 최연소 의원,최다선 의원(9선),최장수 원내총무,최연소총재(당수)등 정치경력 다채.
  • 무역울타리 재편…시장판도 대변환/주요 경제블록 현황과 향후 움직임

    21세기 세계경제대전을 앞두고 지구촌 곳곳에서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른바 경제블록화가 한창이다.새해부터 유럽공동체(EC)가 유럽자유무역지역(EFTA)소속6개국을 포괄하는 유럽경제지역(EEA)으로 새로 발족되며 또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라는 거대한 경제공룡도 등장한다.더욱이 지난 연말 세계무역의 자유화를 내세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타결과 그에따른 세계무역기구(WTO)창설합의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붕괴 이후 새롭게 재편돼가고 있는 국제경제질서에 새로운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세계지도를 뒤바꿔놓은 탈냉전의 대변혁에 이은 경제블록화의 거센 물결,그리고 거기에 맞부딪혀오는 무역자유화라는 또하나의 물결은 94년의 국제경제를 예측불허한 21세기 경제대전의 전초전 양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 주도속 강대국 헤게모니 쟁탈전 가속/개도국선 종속 우려… 새결합체 적극 추진/EC/세계 교역량의 44%… EEA로 확대/NAFTA/원산지규정 등 배타적… 신흥국 타격/APEC/한·미주축 대회개방·역내결속 추구/ASEAN/산업구조 유사… 상호 출혈경쟁 자제 미국·일본·EC등 경제대국들의 자국 이기주의를 바탕으로한 경제블록화와 무역자유화의 두 물결,그리고 그 와중에서 자국의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개도국의 몸부림등이 어우러져 세계경제는 한바탕 요동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흐름을 대표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20세기의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에 이어 21세기의 경제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미국은 지난해 UR타결에 총력을 기울여 각국으로부터 서비스 농산물등 시장개방을 얻어냈을 뿐만 아니라 북미 3국을 하나로 묶는 NAFTA의 의회통과를 성사시켰다. 또 지난해 11월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의 주도로 APEC를 느슨한 협력체에서 더강한 결속력을 가진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기초적인 합의도 이뤄냈다. 한편 이같은 미국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대해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의 이익에 종속될 것을 우려하는 ASEAN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이는 ASEAN이 지난해 10월 각료회담에서아시아자유무역지대(AFTA)창설을 새해부터 재추진하는 한편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등을 포함,아시아나라들만으로 동아시아경제협의체(EAEC)구성을 추진키로 한데서 잘나타나 있다. 현재 세계를 재편하고 있는 블록화의 양상이 어떤 모습을 띠느냐에 따라 94년 새해는 세계경제발전의 새로운 전기가 될 수도 있고 피비린내 나는 경제전쟁의 전초전의 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현재 형성된 경제블록의 내용과 성격을 알아보는 것은 향후 세계경제의 전개양상을 예측해보기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대표적인 경제블록이라 할 수 있는 EC,NAFTA,APEC,ASEAN의 내용과 현황을 알아본다. ▷ECA◁ 지난 67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넬룩스3국 등 6개국으로 발족한뒤 영국 덴마크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 추가가입,이제까지 회원국은 12개국이었다.그러나 93년 12월 13일 스위스를 제외한 EFTA소속 6개국과 시장통합에 합의,EEA를 창출키로함으로써 18개국 3억8천만명을 하나로 묶는 거대경제권으로 확장되었다 기존의12개 EC회원국만을 놓고보면 인구 3억4천5백만명,국민총생산(GNP)5조9천억달러,무역량 3조5백억달러로 세계교역량의 43.8%를 차지하고 있다. 92년부터 상품 자본 서비스및 노동력이 자유이동할 수 있는 「단일시장」이 출범,유럽통합의 발판이 마련됐다.91년 12월 EC정상회담에서 타결된 유럽통합조약(마스트리히트조약)이 작년 11월 발효,유럽통합작업이 한단계더 진전되었다.또 지난해 10월 EC정상회담에서 97년 통합유럽의 중앙은행이 될 유럽통화기구(EMI)의 소재지가 프랑크푸르트로 확정됨으로써 새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단일시장의 출범,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EMI의 설립은 EC가 완전통합의 길에 성큼 들어섰음을 의미하지만 이 길에는 아직 넘어서야 할 수많은 걸림돌이 있다. 회원국들간의 인구및 경제력의 차이,장기간 경기침체에 따른 1천7백여만명의 실업인구는 완전통합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또 92년 영국 이탈리아의 EMR(유럽환율메커니즘)탈퇴로 촉발된 통화혼란상태와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일부회원국의 잇따른 환율재조정등 통화불안도 통합의 장애물이다. 그러나 EC통합은 미일 경제대국에 맞서 유럽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EC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EC는 이미 통합에 참여한 EFTA회원국말고도 헝가리 루마니아 터키등 가입을 희망하는 나라들의 추가가입문제를 95년 1월1일까지 마무리짓기로 한 상태이다. ▷NAFTA◁ 미국 캐나다 멕시코등 북미3개국으로 구성된 경제블록.인구 3억6천만명,GNP 6조8천억달러,교역량 1조3천7백억달러에 이르는 세계최대의 단일시장이다.92년 8월 협정체결이 3국간 합의된뒤 지난해 11월 미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새해부터 발효되게 되었다. 이 협정의 체결은 미국의 자본과 캐나다의 자원,멕시코의 노동력이 결합하는 거대단일시장 구축을 의미한다. NAFTA의 핵심내용은 역내 관세및 쿼터 철폐,원산지규정등이다.NAFTA는 북미시장안에서는 노동과 상품의 자유이동을 허용하지만 그밖의 외국기업에는 배타적인 블록이다.그 배타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원산지규정이다. 이 규정으로 외국기업들은 현지에 공장을 세워 원산지규정을 이행하거나고율관세를 물고 현지기업의 무관세상품들과 가격경쟁을 해야만 한다. EC와 일본경제에 대한 견제가 NAFTA의 주요한 출범목적이었으나 블록내 자유무역에 따른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 대만등 아시아신흥공업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APEC◁ 89년 호주 캔버라의 제1차 APEC각료회의에서 출범.첫 각료회의에 참가한 나라는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ASEAN 6개국등 12개국이었으나 그후 중국 대만 홍콩이 추가가입,15개국으로 늘어났다. 인구 19억1천3백만명,GNP 10조8천억달러(세계GNP의 48.3%),교역량 3조달러(세계무역량의 43.1%)에 이르는 세계최대의 지역경제권이다. 92년 방콕에서 열린 4차각료회의에서 APEC상설사무국 설치를 합의했으며 역내무역자유화를 추진키 위한 저명인사그룹(EPG)을 설립키로 했다. 93년 시애틀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의 주도아래 느슨한 형태의 결합체인 「경제협의체」에서 좀더 강력한 결속형태인 「경제공동체」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또 여기에서 역내 무역과 투자의 활성화를 위한 무역투자위원회를 구성,한국을 의장국으로 선출하였다. APEC는 역내결속과 대외개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고 있다.이는 미국의 회원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행사를 꺼리는 아시아나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APEC는 일인당 GNP 3백40달러에서 3만달러에 이르는 나라간 경제력 격차,선진국 미국과 일본간의 이해상충등 여러가지 내부갈등요소를 안고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APEC의 방향은 「개방적 지역주의에 입각한 경제공동체」쪽으로 잡혔으며,APEC의 결속력강화와 함께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커질 것이 틀림없다. ▷ASEAN◁ ASEAN은 67년 인도차이나 공산화물결이 고조될 당시 비공산국간의 경제문화협력을 위해 결성된 느슨한 반공기구로 출발했다. 구성국은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등 6개국.역내인구 3억1천4백만명,GNP 2천8백억달러,교역량 3천8백억달러에 이른다. 유럽과 북미지역이 각기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지역안보상황이 호전된데다 자체경제력이 급증하면서 기구발전을 모색해왔다. ASEAN은 나라간 산업구조가 유사한 탓에 동종의 외국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여왔고 따라서 역내자유무역에 기초한 실질적인 경협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ASEAN은 제2차엔고와 신흥공업국의 급격한 임금상승을 이용,한국 대만등을 바짝 뒤쫓고있다. ASEAN은 새해들어 동남아자유무역지대(AFTA)를 본격 출범시킨다.AFTA는 현재 『ASEAN회원국에 국한돼야한다』(말레이사아 마하티르총리)는 주장과 『ASEAN외에 호주도 참가시켜야 한다』(인도네시아 수하르토대통령)는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ASEAN은 규모가 크지 않고 회원국간 의견조율도 충분히 안돼 있어 결속력이 얼만큼 강화될지는 의문이다.그러나 APEC에서는 한목소리를 내는등 세계경제블록화에서 자기위치를 찾기위한 노력을 확대하고 있다.
  • 남북국시대(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5)

    ◎통일신라와 발해 2백여년 공존/발해사 새 평가… 한국사 일부로 자리잡아/북방부각 따라 「3국통일」은 다소 빛잃어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현 충남 부여)을 공격해 멸망시켰다.8년이 지난 뒤 나당연합군이 다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함으로써 3국시대는 종말을 맞았다. 그렇다고 곧 신라의 시대가 된 것은 아니었다.당은 고구려·백제의 옛땅에 일종의 식민통치기구를 두는 한편 신라마저도 집어삼키려 했다. 이에따라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힘을 합해 당군에 대항,매소성(경기도 양주군으로 추정)전투에서 당병 20만명을,금강하구 기벌포(충남 논산·서천군 일대)전투에서 수군을 각각 섬멸했다.676년 신라는 대동강이남 지역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3국을 통일했다. 한편 고구려의 유민들은 요동지방에서 당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으며 그 지도자인 대조영은 698년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 일대에서 고구려를 뒤잇는 나라 발해를 세웠다. 이처럼 7세기 후반은 한국사에 큰 획을 그은 변혁의 시대였다. 북중국과만주 일대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해 중국세력의 침입을 막았던 민족의 방파제 고구려,일찍부터 해외로 활발히 진출했고 또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백제는 한국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신라의「3국통일」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며 발해가 한국사에서 자리잡아야 할 위상은 무엇일까. 「신라의 3국통일」과 발해사에 대한 평가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3국 통일에 큰 의의를 부여하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한국사에서의 위치가 그만큼 낮아진다.거꾸로 발해사를 강조하다 보면 신라의 통일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된다. 따라서 신라의 통일을 올바로 인식하고 발해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3국통일은 통일신라기는 물론 고려·조선조를 통해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신라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청주운천동사적비에는 「삼한을 통합하니 나라의 땅이 넓어졌다」는 구절이 들어있고 최치원(858∼?)도 924년에 세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문에서「삼국이 이제서야 장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구나」라고 썼다. 당시 신라인들이 고구려·백제와 동족의식을 갖고 있었고 신라가 3국을 통일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조선조의 「삼국사절요」「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신라의 3국통일은 찬양 일변도로 기록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의 3국통일에 한계성이 있다는 전제아래 통일이후 고려이전까지를 「통일신라」기로 시대구분하는 대신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다는 의미에서 「남북국시대」로 규정한다.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통일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함께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한편 만주의 동북지역을 거점으로 건국된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민족 수호신 양만춘(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4)

    ◎안시성전투서 「수십만명의 당군」 물리쳐/살수·한산도대첩 못지않은 위대한 승전/“정사에 기록없다”… 국사교과서에 안실려 645년 6월 중국 당나라의 태종은 수십만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안시성(현 중국 요령성 해성현 영성자고성)을 에워쌌다. 당에 앞서 중국을 통일한 수왕조가 598∼614년 4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했다 모두 참패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침략군은 사기가 드높아 안시성쯤은 금세 함락시킬 듯했다.당군은 이미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등 주변의 주요성들을 빼앗은데다 고구려의 구원병 15만명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다.그러나 당군의 총공격에도 안시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고 침략군은 60여일만에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시성전투는 고구려의 살수대첩(612년),고려의 귀주대첩(1019년),임진왜란 때의 한산도대첩(1592년)에 못지않은 한국사상 위대한 승전이었다. 역사에 있어서「가정」이란 의미없는 것이긴 하나 만약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당했다면 이후의 한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고구려는 당시 정예군 15만명을 요동일대에 보내 당군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섬멸된 뒤였으므로 당태종이 친히 이끄는 침략군에게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또 대륙세력의 침입에 방파제 구실을 해왔던 고구려의 멸망은 백제·신라의 존립에도 큰 영향을 미쳐 결국 한민족의 국가는 사라지고 이 땅은 중국의 변경지대로 전락했을 것이다. 당이 이후 혼자의 힘만으로는 고구려를 정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신라와 연합,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신라가 독립을 유지해 민족의 정통성을 이은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안시성전투의 승리를『백제·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시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는 누구인가. 살수대첩의 을지문덕,귀주대첩의 강감찬,한산도대첩의 이순신등이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겨 길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과는 달리 안시성을 지킨「민족의 수호신」은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많은 역사책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한국사」등 일부 사서에서만「양만춘」을 안시성주라고 밝히고 있을뿐 고교 국사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그의 이름이「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의 정사는 물론 중국의 어떤 정사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이후 나온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김시량(1581∼1643)의 부계기문,성호사설의「경사문」,동사강목의「고이」,박지원의 열하일기등에는 양만춘을 안시성주로 기록하고 있다.특히 월정만필과 부계기문은「양만춘」이야기가 중국측 사서인「당태종동정기」「당서연의」등에 나온다고 밝히고 있어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정사가 그들이 거꾸러뜨리지 못한 적장의 존재를 묵살한 것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당한 수치를 기록하지 않는 그들의 일관된 역사서술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책에서마저「양만춘」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자랑스러운 선조를 한명 발굴한다는 의미말고도 중국측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되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 북,고조선 수도는 평양/단군릉 발굴계기로 새학설 등장

    ◎종래 「요하유역 왕검성」설 뒤집어 북한은 최근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된 사실을 들어 단군이 5천11년전의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한데 이어 고조선의 수도가 처음부터 평양이었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부교수 박영해는 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날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수도가 요하유역에 있었다고 보아왔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번에 단군 뼈가 평양이 지척인 강동군의 단군릉에서 발견되고 그가 지금으로부터 5천11년전에 출생한 실재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된 결과 고조선문제에 관한 기성견해를 전면적으로 검토하고 정정하게 되었다』고 말했다.북한은 지금까지 고조선의 수도를 「요하유역의 왕검성」으로,고조선의강역에 대해서는 『조선반도의 서북부에서 요동과 요서지역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해왔다.
  • 아시아나기 “위기일발”/착륙중 랜딩기어 파손 미끄러져

    ◎제주공항서… 활주로 끝에 멈춰 【제주=김영주기자】 23일 하오3시25분쯤 서울에서 승객 1백23명과 승무원 7명등 1백30명을 태우고 출발해 제주공항에 내리던 아시아나항공 소속 보잉 737­400 815편 여객기(기장 루스벨트·브라질국적)가 제주공항에 착지하는 순간 앞바퀴 지주대 4개중 1개가 절단되면서 미끄러지다 활주로 끝부분에서 1백70도나 회전한 후 급제동해 멈춘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기체가 크게 요동치는 바람에 탑승객들이 놀라는등 불안에 떨었으며 공항 활주로가 1시간 폐쇄돼 항공기 이·착륙이 한때 중단됐다. 사고여객기는 이날 김포공항을 이륙할 때도 정비점검작업이 늦어져 20분쯤 늦게 떴으며 제주공항 상공에 이르러서도 앞바퀴가 달린 노스기어가 제대로 작동 안돼 10여분간 공항상공을 선회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 서해훼리호 설계 중대결함/전문가분석/여객선에 부적합한 U자형 구조

    ◎무게중심 위쪽에… 복원력 달려/칸막이장치 없어 하중분산 안돼 【전주=임송학기자】 전북 부안앞바다에서 침몰한 서해훼리호는 설계자체에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는 것으로 지적돼 사고원인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서해훼리호의 설계도면을 정밀 분석한 조선공학 전문가들은 19일 사고배는 설계상 파도가 적은 항로나 내수면을 운항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파도가 심한 연안여객선용으로는 적합치 않다고 말했다. 한국해양대학교 박명규교수(48·선박공학)는 『일반적으로 정면에서 배를 보았을때 V자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사고배는 U자형으로 돼 있다』면서 『이점 때문에 무게중심이 위쪽에 가 있어 롤링(좌우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물에 잠기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어 무게중심이 위쪽으로 올라가게 되고 따라서 파도 등의 충격을 받아 한쪽으로 기울어졌을때 복원력이 크게 떨어져 끔찍한 참사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박은 최대중량이가해졌을 경우 수면 아래로 잠기는 선(만재흘선)이 최소 배 전체 높이의 3분의 1정도가 돼야하지만 서해훼리호는 이같은 설계결함때문에 만재흘선이 1.9m로 전체 높이 7.3m의 4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서해훼리호의 두번째 설계상 문제는 하중이 집중되는 선실이 지나치게 앞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사고배는 뒷부분이 자꾸 뜨는 경향을 보였으며 앞뒤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배 뒷부분에 상당량의 모래주머니를 실을 수 있도록 「밸런스팅」작업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공학 전문가들은 사고배는 분명 설계가 잘못됐으며 사고당시 하중이 집중된 배의 앞부분에 강한 충격이 가해져 전복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단을 내렸다.사고배는 북서풍을 따라 항해중 회항하기 위해 선수를 북쪽으로 돌리는 순간 뱃머리에 강한 파도를 맞고 그대로 전복돼 침몰했다. 사고배는 설계당시 2층 객실에 복도가 있었으나 건조 직전 회사측의 요구에 따라 복도를 없애고 선실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를 변경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또 여객선의 경우 요동을칠 경우에 대비,하중이 배전체에 고루 분산되도록 칸막이장치가 돼야 하지만 사고배는 칸막이가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전문가들은 이에 따라 이번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중대한 설계결함,제작기술 미숙,정원초과,무리한 운항등이 함께 빚어낸 참사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서해훼리/“요동심해 자갈 깔고 운항”/검찰 수사

    ◎전북도의원 주장/제작사도 “모래싣게 개조” 시인/승선표 3백24장 묶음 발견/검찰 【전주=특별취재반】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를 수사중인 검·경합동수사본부는 18일 사고배가 좌우요동을 줄이기 위해 선박 뒷부분에 상당량의 모래주머니를 싣고 운항하도록 선체 구조를 개조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선박이 인양되는대로 이 부분에 대해 집중 수사키로 했다. 서해훼리호 제작사인 군산 대양조선소 김상환사장(45)은 이날 『사고배가 제작때부터 선미쪽이 뜨는 경향이 있어 선미에 모래주머니를 실어 무게중심을 조절할 수 있도록 「밸러스팅」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또 전북 옥구군 옥도면 섬 출신 전북도 도의회의 김철규의원(54)은 『「선장 백운두씨가 평소 무게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요동이 심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다』며 『요동방지를 위해 배밑바닥에 상당량의 자갈을 싣고 다녔다는 확증을 갖고 있다』는 내용을 새롭게 제기했다. 수사본부는 이에따라 선체가 인양되는대로 해양·조선전문가들과 함께 「자갈 운항」을 비롯 ▲사고배의무게중심 조절장치 결함 ▲이를위한 불법 설계 변경여부등에 대해 정밀수사키로 했다. 수사본부는 또 이와함께 배가 침몰하면 자동으로 구조신호를 보내도록 돼 있는 사고선박의 SSB 무전기가 작동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지난달 11일 무전작동상태를 조사한 한국무선국관리사업소 전북지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한편 수사본부는 이날 사고선박의 1차인양 당시 찍어온 비디오를 검증한 결과 조향타는 오른쪽으로 7도 기울진데 반해 방향키는 20도정도 꺾여진 사실을 밝혀냈다.그러나 이는 침몰로 정전된 상황에서 조향타는 멋대로 움직이게 돼있다는 군산 대양조선소측의 설명에 따라 이번 사고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결론 지었다. 수사본부는 이에앞서 지난 17일 인양된 선체를 수색,일련번호가 3백24번까지인 승선표 묶음과 현금 95만여원이 든 돈가방 그리고 항해일지와 통신일지를 발견했으나 항해일지와 통신일지에는 사고당일의 기록이 전혀 안돼 침몰원인 수사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 선체설계 결함… 무게중심 윗쪽에/침몰 참사 직접 원인은

    ◎주민,“복원력 적어 요동 심해”/해항청 안전도 평가는 만점 서해훼리호가 침몰,대형 참사를 빚게 된데는 선체의 결함과 이를 감독하는 기관의 관리체계 허점도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건조된지 3년밖에 안된 1백10t급 여객선이 3∼4m 높이의 파도에 쉽게 침몰한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것이 선박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사고선박은 정원초과,무리한 운항,기상악화 등의 직접적 원인외에도 선체 자체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선박을 자주 탔던 위도등 주민들은 서해훼리호가 다른 여객선에 비해 유달리 요동이 심했음을 느꼈으며 선체의 윗부분이 아래보다 넓어 불안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해훼리호는 평소에 승객들이 갑판위에 올라가지 못하고 선실에만 있도록 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즉 무게중심이 다른 배보다 위에 있도록 설계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승객들이 선실내에만 머물도록해 배의 무게중심의 역할을 극복해 왔으나 사고당일에는 승객이 초만원이어서 불가피하게 갑판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사망자유족들은 갑판위로 몰려 살아난 승객들때문에 선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평소 갑판위로 승객들이 올라가지 못할정도의 선박이라면 웬만한 파도도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운항이 어려운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이런 결정적인 문제점을 가진 서해훼리호는 해운항만청의 여객선 안전관리상태평가에는 만점을 받은 것으로 국회의 국정감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안전관리평가도 선박운항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음은 미루어 쉽게 짐작이 간다.올 상반기에 평가항목의 하나인 「신원확인」란에 만점을 받은 것을 보면 평가가 적어도 허위작성됐거나 아예 서류로만 평가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지난달 항만청의 정기검사에서 별다른 문제점이 나타나지 않은 사고선박이 20여일동안 선체수리를 받았다는 사실 또한 선체결함과 행정당국의 안전관리의 허점을 입증한다. 이번 사고는 행정당국의 철저한 안전관리가 있다면 대형사고는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새삼 일깨워 줬다.해난사고 세계 제1위라는 불명예는 「승객안전이 제일」이라는 행정당국과 해운회사들의 각고의 자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 김 대통령 개혁/「유교적 가부장」이미지/미 타임지 최신호서 보도

    ◎금융실명제·권력형 축재 척결 등 효과/국민,도덕성 제고·이기주의 불식 기대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은 5일 최신호에서 「유교적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정치에 대해 보도했다. 다음은 서울발 타임지 기사내용의 요약이다. 민간인 출신인 김영삼대통령은 이중 이미지를 풍긴다.하나는 청와대를 일반 시민에게 보다 가깝게 만든 와이셔츠 차림의 민주인사이며 또하나는 권력을 남용해 축재하는 관행을 뿌리뽑으려는 유교적 가부장의 이미지다. 요즘은 두번째 이미지가 첫번째 이미지를 압도하고 있다.한국내 부유층들은 모든 은행계좌의 실명전환 시한인 오는 12일을 앞두고 초조하게 달력을 지켜보고 있다. 실명제 조치는 탈세가 만연하고 금융기관 예탁금 2백90억달러중 10∼20%가 가명인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에서 금융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는 은행들에 일대 요동을 불러 일으켰고 일반 시민들의 과소비에도 갑작스런 제동을 걸었다. 이와 함께 32년간의 군부통치하에서 부유해진 공직자들을 해임 또는 자퇴케 했다.이 과정에서 김대통령의 위상도 동시에 강화됐다. 김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최근 지지율은 80%에 달하고 있다. 군부는 고위 장성들이 해임되고 재판을 받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조용하다.이른바 부패척결운동의 「한파」는 김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섬직한 유력 국회의원들의 기를 꺾어 놓았고 역대 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재벌들 역시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 개혁운동에 유일한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경제다.한국국민은 지난주 가족이 한데 모여 선물을 주고 받는 추석을 맞았으나 분위기는 침울하고 불안했다.백화점 판매고는 절반이 줄어들었고 술집들은 예년에 비해 손님이 20% 감소했다. 가명계좌에 돈을 숨기고 있는 사채업자들은 지하 깊숙이 숨어버렸고 이로 인해 많은 중소기업자들은 자금조달원을 잃어버렸다.경제적 활력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일련의 완화조치를 취했지만 몸조심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주까지 44%만이 실명신고를 했다.많은 사람들은 시한이 되기 전까지 정부가 어떤 추가 완화조치를 취할 것인지를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최소한 일부 국민들은 김대통령의 개혁조치가 도덕성을 제고시키고 광범위한 탈세를 조장했던 이기주의와 냉소주의를 불식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중소제약회사의 사장은 『전정부는 올림픽 우승자를 국가적 영웅으로 환호했지만 이제는 고액 납세자가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게 됐다』고 말했다.
  • 중국 공해에 해양·대기 “오염비상”

    ◎공업폐수 등 유해물질 연610만t 쏟아내/서해 적조현상… 어족 해마다 감소/중금속 먼지 늘고 산성비 “적신호”/외교마찰 우려 불구 이젠 대처를 최근 중국의 급속한 공업화로 인한 각종 공해가 우리나라 해양과 대기를 오염시키고 있으나 관계당국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오염은 해양오염·산성비·먼지공해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 최근에는 중국산 수입농산물 검역과정에서 다량의 농약이 검출,반송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어 환경오염은 물론 식생활까지 위협하고 있다. 현재 가장 큰 현안은 급격한 공업화에 따른 마구잡이 공장폐수배출로 서해안이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양오염은 이미 중국근해 해안에서 적조현상이 나타나 가까운 시일안에 우리나라 해안에도 나타날 만큼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 중국 산동·요동반도지역의 동북부해안으로 배출되는 유기오염물질은 연간 6백10만t으로 우리나라의 한해 배출량의 15∼20배에 이르고 있다. 이로인해 양자강 하구에서는 82년과 89년,황하하구에서는 89년 적조현상이 공식적으로 확인됐으며 우리나라 서해안의 어족도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또 상해 앞바다는 인천앞바다의 COD(생화학적산소요구량)1.7㎛보다 높은 2.5㎛의 오염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공업화정책은 우리나라 대기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화북성·흑룡강성등 동북부 공업지역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물질로 호남성·광주등 남부지역에 산성비가 내린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또 우리나라에서 황사현상이 나타날 때 먼지농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평상시보다 먼지농도가 2∼4배 증가했으며 인체에 유해한 납과 황산농도도 계속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국에서는 농작물오염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1천2백여개 비료공장에서 나오느 폐수·폐가스로 농작물생산량이 감소하고 있으며 농민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과다한 농약을 살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사부에 따르면 9월현재 냉동논우렁 2만7천여㎏이 세균초과로 보관중인 것을 비롯,모두 3건의 농작물등이 통관과정에서 하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중국의 개발정책으로 우리나라는 환경은 물론 식생활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으나 당국의 대응책은 걸음마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환경처는 환경오염의 과학적 인과관계규명은 손도 대지 못하고 내년부터 장거리이동오염물질 추정망건립,한·중 환경협정체결등에 기대를 걸고있는 실정이다. 또 중국측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 “고구려인”“중국인” 논쟁(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5)

    ◎평남덕흥리 고적 묻힌 「유주자사 진」/“유주는 북경일대… 4C 고구려가 지배”/북한학자/“채색벽화 중국설화 표현… 중국인 분명” 중·일 학자 4세기 후반 고구려가 국토를 크게 넓혀 북경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일대를 지배했었을까.한국과 중국 양쪽의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같은「사실」이 한 무덤의 발굴을 계기로 학계에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76년 평남 남포시 강서구역(옛 강서읍)덕흥리 무학산 기슭에서 발굴된 덕흥리고분은 찬란했던 고구려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었다.전실과 후실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이 석실분은,무덤 입구의 길인 선도(연도)와 내부통로인 묘도의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채색화가 그려진 벽화고분이기도 하다. 벽화는 무덤의 주인인「유주라사 진」이 유주소속 13개 군 태수로 부터 문안을 받는 장면,소수레에 탄「진」이 말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내를 행차하는 장면등을 포함하고 있다.또 그의 일대기를 적은 묘지명등 6백여자의 먹글씨가 발견돼 4∼5세기를 걸쳐 살았던 한 인간의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진」은 □□(판독 불가능 글자)군 신도현 사람으로 건위장군·국소대형·요동태수·동이교위·유주자사등을 지낸 뒤 영락18년(광개토대왕 18년,408년)에 죽었다. 이같은 묘지명의 내용 중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이 그가「유주자사」를 역임했다는 부분이다.고구려 고분에 묻힌 인물이 유주를 관할하는 자사를 지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현재의 북경일대인 유주를 지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학설은 고분을 발굴한 북한에서 처음 나왔다.79년 북한학자 김용남은 논문을 통해▲신도현이 현재의 평북 운전·박천일대이며▲「진」이 역임한 관직이 모두 고구려의 벼슬이름 이므로「진」을 당연히 고구려 사람으로 보았다.그는 따라서『전연이 멸망해 북중국 일대가 혼란에 빠진 370년 무렵 고구려가 서쪽으로 진격해 유주를 점령,13군 75현을 두었으며 이때 진을 유주자사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나왔다.김원용박사는「진」을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추정했다.그의고향인「신도」를 고구려의 땅이름으로 본 것은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하북성에 같은 지명이 있는만큼「진」은 중국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그는『진은 중국 왕조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낸 고위관리였으나 뒤에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논쟁은 결국「진」의 국적이 어디인가로 바뀌었다.그가 속한 나라가 곧 유주를 지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학계는 이후 ▲무덤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라는 점 ▲묘지명에는 유주에「13군 75현」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중국 왕조중에는 이처럼 군을 구성한 적이 없다는 점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83년부터는 중국 학계가,87년부터는 일본 학계가 논쟁에 가담해 한국 학계와 함께 일제히「진=고구려인」설을 부인했다.이들은 고구려의 유주점령을 기록한 역사서가 일체 없는데다 벽화 내용이 주로 중국의 설화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양쪽의 주장은 여지껏 팽팽히 맞서 있다.그러나 만약「진」이 중국인임이 밝혀진다 해도,그를 받아들여 호사한 무덤을 꾸며주었던 고구려의 국력과 관대함은 더욱 돋보일 뿐이다.
  • “김대중씨 납치범은 중정요원”/당시 용금호선원 조시환씨 회견

    ◎“새벽 2∼3시경 비행기 떠 살해기도 실패/윤진원씨가 총책… 사례금 2백만원 받아” 지난 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씨가 한국까지 실려온 것으로 알려진 「용금호」의 선원이었던 조시환씨(65·부산 사하)가 9일 하오 국회 민주당 원내부총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초로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조씨는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으로 승선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부산 사하구에 살고 있다.조씨는 사건후 다른 배의 선원으로 일본에 갔을때 일본 경시청의 조사를 한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다음은 조씨가 밝힌 당시 상황. ▷용금호◁ 원래 미군수송선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인수한 공작선이었다.용금호 선원이 될때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지시를 받는 등 중앙정보부 선박인줄 알고 있었다.납치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석탄등 화물을 주로 날랐다.납치사건후 부산 남항조선소에서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김선생을 가둬두었던 닻 보관창고 구멍을 땜질하고 이름도 유성호로 바꿨다. ▷출항◁ 부산에서 출항했으며 출항시 선원은 11명이 탔고 정보부요원 2명이 승선했으며 이들은 김과장·정과장으로 통했다. ▷김대중씨의 용금호 승선◁ 오사카외항에 정박한뒤 정보부원 정과 김,조기장 김광식과 2기사 정순남등 4명이 상륙해 하루저녁 있다가 밤에 보트를 타고 왔다.보트가 용금호에 접선하자 사다리를 내려서 김선생을 올렸는데 선생은 결박당하고 눈을 가린 상태였고 로프로 묶어 끌어당기는 것을 배위에서 지켜보았다.처음보는 순간 김대중선생인것을 알았다. ▷감금장소◁ 선미에 있는 나다실(닻을 넣는 장소)인데 눈을 가리고 두손을 뒤로 묶어 놓았으며 한명이 걸상을 놓고 감시하고 있었다.나는 3차례 김선생을 접촉했다.처음에는 밥을 갖다주었는데 안먹겠다고 해서 다시 미숫가루를 타서 갖다 드렸더니 조금 드셨다. 식사는 아침 저녁만 제공했고 소변도 내가 받아드렸다.경비가 심해 말은 못하고 『고생되시겠습니다』라고만 했다. ▷항해 상황◁ 오사카에서 오다가 새벽 2∼3시쯤 3시간정도 정박했다.아마 그때 살해하려 한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꼈다.비행기가 떠서 일을 못한것 같다.비행기가 떴다고선원들이 막 그러는데 나는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배밑에 있어 소리는 듣지 못했다.그러나 다알고 있었고 갑자기 배가 요동을 치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산항 도착◁ 부산외항의 조선소와 세관사이에 정박하여 이틀동안이나 못나가게 했다.이후 강제로 선원을 다 내려 보내고 정보부원들만 남았다. ▷사건이후 상황◁ 용금호에 타지 않았던 윤진원씨가 총책임자였는데 그사람 주관으로 사건후 두차례 회식을 했다. 나는 이후 정보부에서 알선한 배에 승선하지 않고 일본배로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압력은 없었다.그러나 선원 김광식은 대만에 갔다가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져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선원들이 사례금으로 3백만원씩 받았다고 해서 나는 귀국해 하얏트호텔 근처의 윤진원씨를 찾아갔다.윤씨는 내가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배를 탔으니 2백만원만 받고 영수증은 3백만원으로 쓰라고 요구해 그렇게 했다.당시 납치사건에 관련된 김광식·정순남은 다른 선원과 달리 엄청난 사례금을 받고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행적은 알수 없다.
  • 맛과 멋의 녹차에 항암효과라(박갑천칼럼)

    『하늘이 좋은나무(다나무를 뜻함)로 하여금 귤나무와 같은 덕을 갖게 하였나니 태어난 천성을 바꾸지 아니하며 남쪽고장에서만 자라도다.달콤한 잎은 우박과 싸워 겨우내 푸르고 흰꽃은 서리에 씻겨서 가을경치를 빛나게 하더라…』.초의선사의 「동다송」은 이렇게 시작된다.차나무를 보는 다인의 시적표현이 돋보이는 글이다. 차(녹차)의 맛과 멋을 아는 우리의 조상들은 적지않다.그들은 차가 사람의 심신을 맑힌다는 것을 알았다.「삼국사기」(삼국사기:열전·설총조)에도 그런 대목이 보인다.설총이 신문왕에게 하는 우언으로 왕을 모란꽃,충신을 할미꽃,간신을 장미꽃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서 할미꽃이 모란꽃한테 이렇게 말한다.­『…임금님은 좌우에서 온갖물건을 공급하여 고량진미로써 배를 부르게하고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한다 하더라도…』.안민가를 읊기전 경덕왕에게 끓여바친 충담스님의 차 또한 아름다운 향기 못잖게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매월당 김시습(매월당 김시습)도 차의 멋과 맛을 아는 다인이었다.그의 「작설차」(작설다)란 제하에 쓴 시의 끝맺음에서도 그걸 느낄수 있다.『운유(다의 이칭)차 한번 마시면 두눈이 밝아지네…/어찌 알리요 설다맛이 그처럼 맑은 것을』.기우자 이행(기오자 이행)의 혀끝은 더욱 놀랍다.그는 특히 상곡 성석연(상곡 성석연)과 가까이 지냈다.어느날 상곡의 집에 갔을 때 상곡은 집안 젊은이(공도공)에게 차를 끓이게 한다.차를 끓이다가 찻물이 넘치자 다른물을 넣고 끓였던바 차를 마시던 기우자는 말했다.『자네가 두가지물을 부었군그래』(용재총화3권). 그렇기는 해도 차가 대중적인 것으로 발전되어오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임진왜란때 우리나라에 왔던 명나라 장수 양호와 선조임금 사이에 있은 대화도 그걸 말해준다.그는 주둔지 남원에서 선조를 뵈러오면서 그곳에서 따온차 두봉지를 진상한다.그러면서 이차는 품질이 가호한데 왜 조선에서는 차를 안마시느냐고 한다.『이 차를 가져다 요동에서 팔면 10근에 은1전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차에대한 인식은 이제 많이 높아져있다.첫째 많이들 마시는 편이다.며칠전엔 국제녹차 심포지엄이 롯데호텔에서 열리기도 했다.그자리에서는 차에 항암·중금속제거 효과가 있다는 말도 나왔다.하지만 차를 어찌 약리효과 따지며 마실일이겠는가.맛과 멋으로 마셨던 선인들 풍류를 되살려야 하는 것이리라.
  • 문민시대에 「예총」 필요한가(오늘의 쟁점)

    한국 예술단체를 대표하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장 신영균)의 존폐논의가 최근 예술계 일부에서 강력히 대두되고있다.지난62년 출범한 이후 많은 정권을 거치면서 예술인들의 공식조직으로 대표권을 행사해온 예총이 새 시대를 열어가는 문민정부에 들어 그 역할론에 대한 따가운 비난의 화살을 맞고있다.그러나 한편에선 예술인의 목소리를 집약시킬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 예총의 존립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이치라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최근 예총해체를 주장하며 비판론을 거세게 내세우고있는 연극계의 중견과 예총의 순수한 역할론으로 존립의 당위성을 강변하는 예총관계자의 상반된 의견을 함께 들어본다. ▷존속론◁ ◎최절로 시인·예술 사무총장/창작활동 지원·권익신장 구심역할/문화예술 중흥위해 더 활성화돼야 예술이 필요한 사회는 예술인이 있게 되어있고 예술인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상호친목도모와 권익옹호를 위한 예술단체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10개 예술단체(건축·국악·무용·문학·미술·사진·연극·연예·영화·음악)를 회원으로 구성하고 있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는 의연히 존재해야 하고 앞으로도 예술단체를 대표하는 구심체로서 이나라 예술발전을 위하여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그리고 국가나 사회는 예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예술문화의 중흥이 이루어지도록 예술단체를 적극 지원해주어야 할것이며 예술인들의 분열을 조장하는 어떤 조직의 탄생이나 음해행위에 동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예술이 없는 사회나 참다운 예술이 존재하기 힘든 사회는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이거나 인간의 행복을 맛볼 수 없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예술이란 깨끗한 정서의 표현으로 창작자나 감상자에게 청순한 감동과 희열을 안겨줌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라서 예술가는 스스로 물질적으로나 물리적 힘의 부강을 내세우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최근 몇사람의 연극인이 문화체육부장관에게 제출한 건의문에서 정부와 예총의 단절론을 펼침으로써 도하 몇몇 신문에서 추측과 과장까지 각색하여 마치 예총이 과거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정권안보의 도구역할을 수행해 온것인양 매도하고 있어 수십년을 예술창작에 전념해온 사람으로서 심히 불쾌하며 전체예술인을 모독하는 일이다. 몇몇 사람이 현실상황을 잘못 파악하거나 세속적인 개인의 공리때문에 전체 예술단체나 그 구성원에게 손상을 가하는 것은 참다운 예술가들의 집단에서는 제기될수 있는 일이 아니다.그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중에는 과거 예총의 부회장을 했거나 이사를 역임한 인물까지 끼어 있다는데 수치와 분노가 더 요동하는 것이다. 과거 어떻게 했기때문에 그시대를 존립했던 단체나 그 회원이 함께 싸잡혀 비판받아야하는 이 시대의 극한 논리가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에게서까지 성립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우리 예술인들은 아직도 깨끗하다.앞으로도 비굴하거나 추하게 세상사에 편승하지 않을 것이다. ▷폐지론◁ ◎정진수 연극연출가 성대 교수/분야다른 예술인 단일조직 구성 불요/자유세계 유례없는 군국주의 잔재 쾌도난마와 같은 김영삼대통령의 사정과 개혁의 서릿발은 엊그제 구총독부 건물의 해체 단안을 불러왔다.그동안 이 건물의 처리를 둘러싸고 설왕설래,좌고우면하던 소관부처와 여론도 숙연해진듯 하다.이제 문민개혁시대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는 거듭나야 하지만 그 안에는 구총독부 건물처럼 완전 해체,철거되어야 할 것들도 있다.예총,곧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그중 하나이다. 명칭부터 군국주의 냄새를 풍기는 이 조직체는 과거 군사독재치하에서 정권안보의 시녀역할을 자임해 왔으며 예술정상배들의 서식처였음을 모르는 이가 없다.가장 가까운 예만 들어보자.88년 정부의 4·13호헌조치에 맞서 소위 제도권 예술계에서는 최초로 중견 연극인 18인이 호헌반대 성명을 내고 이어서 1백여명의 연극인들이 가세하여 2차 반대성명을 내기에 이르자 예총은 황급히,자발적으로 호헌지지 성명을 도하 각 일간지에 게재했었다. 각기 분야가 다른 문학,연극,영화,음악,미술,국악,건축,사진,무용 등의 예술인들이 모여서 하나의 조직체를 형성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공산권을 제외하고 그와같은유례도 없는 예총이라는 조직이 문민개혁시대에도 잔존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그런데도 새정부 출범 1백일을 훨씬 넘긴 시점에 이르도록 소관부처인 문화체육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이마저 김대통령 자신이 발벗고 나서야 하는가? 소위 인치혁명이라 불리는 새정부의 사정과 개혁이 김대통령의 원맨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섞인 일부 국민의 시선이 있다.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금융실명제나 국가안보가 걸린 국가보안법개정은 개혁의 당위성만 가지고 감상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그러나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운 예총의 처리문제야말로 새정부의 개혁의지를 짚어볼 수 있는 시금석인 것이다. 지금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새정부는 6공의 뒤치닥거리 하기에도 황망하다.예술의 전당,국립예술학교,종합촬영소,서울시립극단,정동극장 등 모두 6공에서부터 넘겨받은 것들이다.얼마전 발표한 문화창달5개년 계획마저,거기다 사람들마저 모두 그때 그사람들이 자리바꿈만 하고 있지 않은가.자,이제 1백일도 지났다.새정부답게 새로운면모를 보일 때다.
  • 감사원/전·노 전대통령 조사할까/평화의댐·율곡특감의“뜨거운감자”로

    ◎최고결정자 진술필수적… 조사 시사/노 전대통령/통치행위 논란소지로 결정 못한듯/전 전대통령 율곡사업및 평화의 댐 감사의 「휴화산」이던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문제가 조금씩 요동을 하기시작했다. 감사원은 잠시 보류해뒀던 차세대전투기사업을 포함한 율곡사업에 대한 보완감사에 착수,오는 10일까지는 마무리할 방침이어서 노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여부의 결정이 임박한 것으로 보인다. 또 평화의 댐 감사도 장세동전안기부장에 대한 조사까지 마친 상태여서 전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여부가 가장 큰 현안이 되고있다. 그러나 감사원은 여전히 『두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방침은 정해지지 않았다』고만 되풀이 하고있어 사안의 민감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감사원은 노태우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어느정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율곡사업중에서 가장 큰 의혹을 받고있는 차세대전투기사업의 기종 선정및 변경과정에 대해서는 최고결정권자의 진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노대통령측에서는 감사원의 조사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바있다. 따라서 감사원이 조사를 강행할 경우다소간의 진통이 뒤따를 전망이다. ○…전두환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조사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인 것같다. 평화의 댐 건설은 율곡사업과는 또달라 통치행위 논란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어려움 때문에 감사원은 최근 전전대통령에 대해서는 조사를 하지않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안이 결정될 경우 『공사감독이나 하고 말려면 애초에 감사를 뭐하러 시작했느냐』는 국민여론에 부딪힐까봐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전대통령측에서는 『감사원이 조사방침을 굳히고 서면으로 질의할 경우 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바 있다. 전씨측이 이처럼 다소 적극적인 입장인 것은 그동안 감사원의 의중을 타진한 결과 차츰 조사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감사원은 가급적 두 전직대통령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싶은게 솔직한심정인 것같다. 그것이 이회창원장이 천명해온 「성역없는 감사」의 원칙에도 맞고 실제 감사의 정확도를 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국제그룹의 해체와 관련,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법테두리내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결정을 내려 감사원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에 따라 국제그룹측이 전씨에 대한 소송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나 12·12사태등과 관련해 정치권이 두전직대통령에 대한 국정조사권발동을 요구하는 것등은 단순히 감사차원의 조사만 하고 싶은 감사원의 입장을 거북스럽게 하고있다. 특히 감사 차원이 아니라 국정운영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는 청와대로서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을 것같다. 이처럼 전두환·노태우 두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감사원의 방침만으로 결정되기는 어려운 여러가지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감사원은 지난 9일의 율곡감사결과 발표와 그에 대한 축소은폐의혹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두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여부를 결정하는데도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보인다.
  • 5세기 장수왕때 가장넓은 영토보유(온가족이 함께보는 우리역사:9)

    ◎백제 해외진출·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중국 침입 막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했다.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다.…(재위기간중)무릇 공파한 성이 64개,촌이 1천4백이었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 대비가에 우뚝 서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일명 호태왕)의 능비에 새겨진 그의 업적이다. 광개토왕은 한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391년 왕이 된 뒤 21년동안 재위하면서 그는 북으로는 북부여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말갈족을 복속시켰다.서북으로는 흥안령,동으로는 북간도지역,서로는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에서 중국측과 맞설 만큼 영토를 확장했다. 또 남으로는 백제의 왕성을 공략,아신왕으로부터「신하의 맹세」를 받았으며 신라로부터는 조공을 받았다.신라를 도와 위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또 중국과 별도의 연호를 사용한 최초의 왕이었다.그가 만주의 지배권을 확실히 한 뒤로 고구려는 668년 멸망할 때까지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하기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대에 이르러서 였다. 고구려의 성장과정은 곧 중국 세력과의 대결과정 이었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군현이 들어서자 조선주의 하나였던 고구려주은 한군현을 몰아내는 싸움에서 힘을 길러 독립된 정치집단의 틀을 이뤘다.이후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1세기 후반에 국가체제를 완성하고 주변 소국으로 남아 있던 옥저·동예등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러나 3세기초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는다.중국 위의 장수 무구검(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을 빼앗긴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는 미천왕때인 311년 요동지방의 서안평현에 진출했으며 313년 낙낭을 멸망시켰다. 위기는 다시 닥쳤다.중국 북부의 새 강자로 등장한 선비족인 전연이 342년 침략해 수도가 함락되고 왕모가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이어 371년에는 백제 근소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처럼 중국 세력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백제의 침입도 받았던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사망 20년만에 광개토왕의 등장으로 중흥의 계기를 맞게된 것이다. 그뒤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침입에 대해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 백제가 3∼4세기에 활발한 해외활동을 벌여 화려한 문화를 이룬 것도,한반도 동남부에서 뒤늦게 성장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것도 고구려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것이 학자들의 평가이다.
  • 4세기 후반 요서·산동지방 진출(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8)

    ◎중국측 「송서」「양서」「북제서」등 사서에 기록/우리학자들 부정… 70년대에 교과서 수록 삼국 가운데 백제는 그 역사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되고 있다.고구려가 만주의 지배자로서 중국의 왕조와 패권을 다투었고,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데 비해 백제의 활약상은 두드러진 것이 없는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초기에 가장 왕성하게 대외활동을 벌인 나라는 백제였다는것이 정설이다. 백제는 4C 후반 근초고왕 때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여러나라를 사실상 복속시켰다. 또 바다 건너 중국 남조의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으며,요서·산동지방과 일본 일부지역에 직접 진출했다.당시 백제의 대외진출을 대표하는 사실이「백제의 요서및 산동 경략」이다. 5C 후반 편찬된 중국의「송서」백제전에는『백제략유료서 백제소치위지 진평군진평현(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했다.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양서」백제전에도『백제 또한 요서·진평 2군을 점거하고 백제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두 사서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백제가 요서지방(또는 요서지방내 요서·진평등 2개 군)을 점령해 군현을 세웠다」는 큰 테두리에서는 일치한다. 이와함께「북재서」후주기에「571년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현재의 산동반도 동남부)자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산동반도에서도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백제의 중국경략」이 기록상 명확한 데도 불구하고 국내 학계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19C 전반의 학자 한진서가「해동역사」에서 이를 부정한 이후 19 6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책은「백제의 중국경략」을 다루지 않고 무시했다. 부정론자들의 주장은「당시 백제가 바다건너 만리가 떨어진 요서에 군을 설치할만큼 강력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또 요서에 군현을 설치했다면,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중국 북조의 국가와 마찰을 빚었을텐데 북조측 사서에서는 그같은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따라서 남조측 사서인 송서의 내용은 믿기 어려우며 송서를 옮겨 적은 양서등 다른 역사서들도 역시 믿을게 못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난 67년 서울대 김상기교수가 ▲백제가 당시 바다를 통해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맺고 일본에 진출한 점으로 미뤄 요서를 경략할만한 능력이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가 이에 맞서 요서에 진출했다」는 송서의 기록이 당시의 정세와 맞아떨어진다고 밝힌 이후「요서경략론」은 김철준·방선주·신영식씨등에 의해 꾸준히 보강돼 왔다. 국사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70년대 중반부터 실렸다.다만 백제의 진출시기,점령기간등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려 있다.
  • 「청산과 개혁」 격동의 일본정국(사설)

    일본정치의 자민당시대는 끝나는가.장기안정을 자랑하던 일본정치가 요동을 치고있다.내각이 불신임당하고 의회가 해산되었으며 때아닌 총선이 실시된다.그것만이라면 흔한 진통일 수 있다.그러나 이번은 시작과 내용이 심상치않다.개혁이 쟁점이며 자민당내분이 기폭제다.세계를 휩쓰는 전후정치청산의 개혁바람과 탈냉전적 국제질서변화의 분위기는 일본에도 상륙하고 있는 것인가. 이번파동은 일단 선거구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대립이 발단이다.한 선거구에서 복수당선자를 내게함으로써 자민당의 장기집권과 야당의 설자리를 보장해온 중선거구제를 정권교체를 보다 쉽게할 1명선출의 소선거구제로 바꾸자는 것이었다.야당의 비례대표제가미 소선거구제요구에 자민당은 순수 소선거구제 고집으로 중선거구제를 고수하려 했다.야당의 불신임안제출에 하타(우전)의원등 자민당 개혁세력의 가세가 파국을 부른 것이다. 이를두고 미야자와총리의 지도력부족등이 비판되기도 하나 보다 근본적으론 55년 보수합동이후 38년간 지속돼온 자민당장기집권의 구조적 한계가노출된 필연의 결과라 할수 있다.록히드사건에서부터 리크루트,사가와등에 이르는 자민당정치의 부패상은 「장기독주집권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했다.국민의 불만과 불신이 극에 달했으며 「55년체제」의 역사적 소임은 이미 끝났다는 주장도 나오고있다.개혁파는 이런분위기를 배경으로 당도 거역하는 도전에 나선 것이다. 자민당은 어떻게 되며 일본정치는 어디로 가는가.7월하순으로 예상되는 총선의 결과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자민당의 보수파는 총선이 중선거구제에서 실시되며 일본유권자들의 유명한 보수성향을 믿고있는 것같다. 그러나 그것이 이번에도 과연 위력을 발휘해줄지가 주목거리다.그렇더라도 신뢰를 너무 잃은 자민당의 의석감소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이미 반란세력의 이탈이 시작되고 있다.일본신당등 야당세의 진출이 두드러져 간접세파동당시의 참의원선거 경우와 같은 여야역전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자민당의 붕괴도 예상할 수 있다.미야자와총리의 퇴진정도가 아닌 정치권의 혁명적개편도 불가피할 것이다. 그것은일본의 변화를 예고하거나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경제대국화의 견인차역할을 한것으로 평가되는 자민당 장기안정집권체제의 붕괴임박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그렇다면 국제정치적 의미와 파장도 클 또 하나의 중대한 역사적 변화가 아닐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의 이웃 일본이다.그 일본의 변화는 곧 우리 정치·경제·안보환경의 중요한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자민당은 물론 일본정치의 운명도 좌우하게될 정치소용돌이의 결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물리학자들의 세계/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수소원자의 스펙트럼에 관한 실험으로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소콜로프박사는 70세인 데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전형적인 과학자이다.그는 진고요동(진공요동)에 기인하여 수소원자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극히 미세한 변화(램 시프트로 알려져 있음)를 세계에서 가장 정밀하게 측정한 장본인이다. 진공이라하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생각하겠지만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진공은 그러한 단순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것이다.실제로 진공은 시공(시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즉 그 속에 어떤 물질이 들어가면 원래있던 시공이 변하며 따라서 진공도 달라진다.이러한 시공이 미세 진동을 하고 있다고 현대물리학은 말한다.시공 자체가 진동하고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결코 정지될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은 영국의 과학철학자 화이트헤드의 「과정만이 실체」라는 주장을 입증한 것이 된다.시공의 미세진동,즉 진공요동이 수소원자에 미치는 영향으로서 램 시프트라는 현상이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것이다. 작년 4월에 모스크바로 소콜로프 박사를 방문했을때 그는 긴 세월동안 램 시프트 측정을 하다가 최근에 기이한 현상을 발견한 것 같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그것은 수소원자가 구리로 만든 슬릿사이를 지나갈때 아직 알려지지 않은 힘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정기적으로 완전히 차폐되어 있는데도 힘을 받은 흔적을 실험적으로 관측한 것이다.진공요동이 공간적 영향을 받는다는 내 이론과 혹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는 내 이론에 대해 상세한 질문을 나에게 퍼 부었다.그러나 결국 양자간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아내지 못했다.나는 잘 이해가 되지않았다.이 세상에 중력,전자기적 힘,핵 속에 있는 강력과 약력 이외에 새로운 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서로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그런데 약 8개월이 지난후 독일의 프리케교수로부터 소콜로프 박사의 논문을 심사해 달라고 요청을 받았다.소콜로프 박사는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는 세계적인 학술지 「PhysicsLetters」에 논문을 투고하였고 편집위원인 프리케교수가 나에게 그 논문의 심사를 부탁한 것이다.물론나는 소콜로프 박사의 논문을 심사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스크바에서 편지가 한장 날아왔다.모스크바에서 발행되고 있는 세계적인 학술지 「LaserPhysics」의 편집위원장이자 러시아 학술원 회원인 프로코로프 박사가 보낸 편지인데 19 94년에 특집호를 낼 예정이며 이 특집호에 원고를 써 달라는 내용이다.이 특집호의 편집위원중 한사람은 소콜로프 박사의 공동연구자인 야코프레프 교수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보면 물리학자들의 세계는 물리학을 중심으로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으며 국경을 넘어서 한 식구같은 집단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물리학의 엄격성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논문평가에 가혹하다.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남의 연구를 비판한다.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평균수명도 보통사람 보다 짧다는 통계도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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