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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대북사업 ‘새틀’

    북측이 금강산관광을 축소한 데 이어 롯데관광에 개성관광 사업을 제의하는 등 대북사업이 요동치고 있다. 지난 16년간 1조 5000억원을 쏟아 부으며 대북사업을 주도해 온 현대그룹이 앞으로 대북사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북사업이 기로에 서 있다.”는 현정은 회장의 발언에서 현대가 대북사업의 새 틀을 짜고 있다는 기류가 감지된다. 그동안 남북평화사업 성격이 짙었던 현대의 대북사업은 최근 북측과의 관계 악화로 이미 ‘머니게임’으로 바뀌고 말았다. ●北, 현 회장 입장발표에 불만 표시 최근 북측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13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한 북측인사는 현정은 회장이 전날 발표한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금강산관광 중단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부회장 퇴진을 빌미로 금강산관광을 축소하면서 현대를 압박한 북측은 롯데관광에도 개성관광 사업 참여를 제의했다. 현대측에 개성관광 대가로 1인당 150달러를 요구한 북측은 롯데에는 이보다 많은 200달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관광사업을 경쟁체제로 전환하면서 관광 대가를 올려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현대아산이 지난 2000년 북측에 5억달러를 내고 ▲주요 명승지 관광사업 ▲철도 연결 ▲통신 ▲전력 공급 ▲금강산댐 수자원 이용 ▲임진강댐 ▲통천비행장 등 ‘7대 사업 독점권’을 따낸 바 있어 개성관광이 실제 복수사업자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롯데측도 “수익성이 있는지 따져보고 있다.”고 밝혀 북측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현대,“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다” 현대그룹은 최근 북측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정공법’을 구사하고 있다. 금강산사업 대가로만 북측에 9억 4200만달러를 지원하는 등 그동안의 ‘퍼주기’에서 비즈니스 관점으로 대북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현 회장은 “(북측의 요구에 굴복해 얻는) 비굴한 이익보다는 정직한 양심을 택하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현대아산은 최근 한화콘도 등을 운영하는 한화국토개발측에 금강산·개성관광 공동투자를 제의했다. 현대아산으로서는 이미 금강산에 콘도 건립을 추진 중인 한화개발을 개성관광에 끌어들여 투자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한화측은 레저사업 노하우를 살려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현대측은 또 교직원공제회에도 투자를 제의한 상태며 앞으로도 관광·레저업체와 유통업체 등에 대북사업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입점업체들에 공간을 대여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백화점처럼 대북사업을 운영하겠다는 뜻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대북사업의 성격상 수익성만 앞세울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사업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부회장 퇴진을 계기로 이른바 ‘김윤규식’ 대북사업을 접고 철저한 비즈니스로 대북사업을 끌고 간다는 방침을 세웠다. 만에 하나 북측이 현대측의 방침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대북사업을 중단할 수도 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볼 때 대북사업은 크게 매력이 없다. 현 회장은 이미 “대북사업이 기로에 서 있지만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고 속내를 밝혔다. 바꿔 말해 북측이나 국내 여론이 결정해주면 대북사업을 털고 갈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남북관광공동체 조항원 대표는 “지금까지 현대의 대북사업은 김윤규 부회장의 비리·전횡 의혹에서 나타났듯이 투명하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는 개인의 판단이나 사적 인연 등에 의존하지 말고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재경부·한은 또 ‘금리 신경전’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이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8일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가 끝나고, 박승 한은총재가 기자회견을 가진 뒤부터다. 당초 재경부나 한은은 콜금리를 결정하는 문제 만큼은 확실하게 같은 편으로 보였다. 양쪽 모두 ‘동결’에 사실상 의견을 같이 했고, 예상대로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하지만 금통위가 끝난 뒤 박승 총재의 말은 조금 달랐다.9월에는 동결했지만, 사실상 다음달에는 금리를 올리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물론 경기가 회복돼야 한다는 전제는 달았다. 그래도 시장은 ‘10월 금리인상’을 단번에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채권금리가 연중 최고치를 기록할 정도로 치솟는 등 한바탕 요동을 쳤다. 솔직담백한 어법을 즐기는 박 총재가 또 한번 ‘말실수’를 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인상을 꺼리는 재경부는 당장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는 “(다음달 금리인상은)박 총재의 개인 생각 일 뿐”이라는 지극히 냉소적인 재경부의 반응까지 전해졌다. 그러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재경부쪽으로 진의를 확인하려는 한은 고위관계자의 항의성 전화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재무장관 회의 참석차 제주를 방문 중인 한덕수 부총리는 “경기가 좋아지면 금리를 올리겠다는 것은 당연하고 원론적인 얘기 아니냐.”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재경부와 한은이 금리인상과 그에 따른 파급 효과에 대한 시각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박 총재는 금리인상이 가계부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가계부문은 금융자산이 빚보다 많아 금리를 올려도 전체적으로는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될 것”이라고 다소 긍정적인 전망을 했다. 최근 지표경기는 좋아지지만, 체감경기가 조금도 나아지고 있지 않은 데 대해서도 한은 박재환 부총재보는 “8월 중 소비자기대지수 등 소비심리는 악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종합적인 심리지표는 상승곡선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달 중에는 소비심리지표도 좋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재경부의 한 핵심관계자는 “가계부채가 500조원에 육박하고 있어 금리를 올리면 부채가 많은 가계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면서 “다음달에도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는데 ‘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식의 언급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경기가 좋아져도 금리를 올리려면 기업투자도 늘어야 하는데 정부가 기업으로 하여금 투자를 하도록 유도할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성수 전경하기자 sskim@seoul.co.kr
  • 0.7m의 전율…견지낚시

    0.7m의 전율…견지낚시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계곡들이 고요함과 적막함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곳은 강태공들의 차지. 견지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계곡으로, 강으로 손맛을 즐기러 떠납니다. 조상들의 멋과 여유를 간직하고 있는 견지낚시. 아름다운 자연과 한 몸이 되어 강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서나 세월을 낚을 수 있는 견지낚시는 릴낚시나 대낚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다른 맛이 있습니다.‘꾼’만 하는 낚시가 아닙니다. 짧은 낚싯대에 큼직한 고기를 낚는 재미도 좋지만,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하루를 보내다보면 스트레스까지 말끔히 날아갑니다. 현대인을 위한 웰빙 레포츠이자 온 가족이 함께 하는 가족형 레저로 견지낚시는 더욱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견지낚시는 물에 들어가서 하는 흘림낚시와 배에 앉아서 하는 배낚시로 나뉩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여울과 견지’, 견지협회 회원들과 함께 견지의 맛을 보러 떠났습니다. 가평 글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300년이 넘은 낚시 정확하게 견지낚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소요정’이란 그림에 견지낚시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아 왔음은 분명하다. 일본인 미쓰사키 메이지가 쓴 조기백과에는 1730년대 평양에 사는 홍씨가 견지낚시를 발명했다고 적고 있다. 역사가 최소한 300년 이상 되는 셈이다. ●숏다리, 잡으면 대물 견지대는 불과 70㎝. 세계에서 가장 짧은 낚싯대다. 낚싯대보다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견지대 하나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 구조를 살펴 보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전후 원대(손잡이 부분)에 나무빗살을 스무 두어 개 박은 것으로, 그 모양은 파리채와 비슷하다. 원대의 직경은 겨우 3∼4㎜. 빗살의 위와 아래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약간씩 비틀려 어느 낚시도구에서도 찾아 보기 어려운 절묘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비틀림’ 때문에 낚싯줄이 고르게 감긴다. 또 큰 고기가 걸리면 낚싯대가 휘면서 줄이 풀릴 때 탄력을 줘 매달린 물고기에게 충격을 가한다. 그 작은 낚싯대가 큰 물고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비결은 여기에 있다. 과거에는 대나무와 등나무, 아카시아나무 등이 쓰였으며 지금은 솔리드 글라스대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국내 유일한 배 견지터 청평댐 앞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배 견지낚시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견지낚시는 흐르는 물에서 해야 하므로 댐의 수문을 열지 않으면 낚시를 할 수 없다. 청평배견지(011-745-3342)에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1만5000원이면 OK! 낚시도구에 미끼까지 1만원이면 충분하다. 견짓대 한 대에 수십만원짜리도 있지만 줄을 포함해서 2000∼5000원짜리 보급형도 있다.2만∼3만원이면 사림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을 구할 수 있다. 칠칠낚시(www.77fishing.co.kr)에서는 미끼와 밑밥을 담은 목걸이형 주머니(1000원), 낚은 고기를 담아 두는 살림망(3000원), 미끼를 담아 물고기를 유인하는 썰망세트(8000원) 등 기본 장비를 판다. 수장대(7000원)는 여울견지에서 몸을 지탱하게 하거나 살림망을 걸어두는 필수 장비. 사고에 대비한 구명조끼(3만원선)와 체온유지를 위해 바지장화(4만원)도 준비해야 한다. # 지금이 ‘딱’이에요 아침 10시 우리나라 유일한 배 견지터인 청평댐을 찾아갔다. 벌써 많은 강태공들이 북한강 지류에서 배를 타고 견지낚시를 하고 있었다. 함께 나간 이들은 강대식(71)·이정훈(56) 씨를 비롯해 짧게는 10년, 길게는 40년 이상 견지낚시를 즐긴 도사급들이다. “이맘때가 견지낚시를 하기에 제일 좋은 시기”라는 강대식씨는 “물고기들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먹이 사냥 움직임이 활발해져 씨알이 굵은 놈들이 자주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물도 그다지 차지 않고 무엇보다 피서객들이 없어 한가로이 세월을 낚을 수 있기 때문에 꾼들은 이맘때를 항상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옆에 있던 이정훈씨는 “낚시의 종착역이 바로 견지낚시”라며 “견지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고 거든다. 웃음으로 반겨 주는 꾼들의 얼굴에선 한 점의 각박함이나 스트레스를 읽을 수 없었다. 일단 깻묵과 구더기를 4대1정도로 섞어 밑밥을 만든다. 그 다음 밑밥을 넣은 썰망에 추를 달아 강에 던진다. 흐르는 강물을 타고 썰망이 저만치 가라앉는다.“이게 고기들을 유인하는 겁니다. 썰망 사이로 빠져 나가는 미끼를 먹으려고 고기들이 썰망 앞쪽에 모이죠. 자, 손맛을 볼까요….” 손을 강물에 넣어 보았다. 물살이 꽤 빨랐다.“추가 좀더 무거워야 할 것 같은데….”그는 중간 노란 고무에 추를 달고 바늘에 구더기 3마리를 끼우고 강물에 바늘을 던졌다. 순간 “어, 왔네. 역시 바로 오네.” 금방 고기가 물었다. 이씨의 환호에 덩달아 들떴다. 설장(견지대의 머리부분)이 휘청이며 ‘투두둑´ 줄이 풀려 나간다.“견지대를 옆으로 뉘어서 몸쪽으로 쭉 당기세요. 오른손으론 대를 돌려 줄을 감아요. 조심 조심! 줄이 설장 밑으로 감기면 휘어지지 않아 대가 쉽게 부러져요.”뭔가 도울 게 없을까 대를 쥐고 있던 내게 이씨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들고 있는 대가 20만원이나 하는 고가품이라며…. 하지만 물고기가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폭이 10㎝도 안되는 설장에 보이지도 않는 낚싯줄을 감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 찌릿찌릿 전기가 오르는 손맛 물고기의 퍼덕거림에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설장이 휘청휘청, 놈이 바늘을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마다 손을 타고 온몸에 전율이 전해졌다. 갑자기 이씨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왔다. 저기저기….” 정말 푸른 물 속에 검은 물체가 하나 보였다. 표면에 모습을 드러낸 놈은 누치였다.30㎝는 족히 넘어 보인다. 놈도 위험을 직감했는지 마지막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견지대를 머리 위로 올려서 공기를 마시게 해요. 물고기 힘빠지게….”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이씨는 내게서 낚싯대를 잡아챘다. 순간, 누치는 바늘을 빼고 사라졌다. 아, 그 아쉬움이라니…. 또 다시 바늘을 바닥에 드리우고 견지대를 몸 안쪽으로 당겼다 밀었다하는 스침질을 하며 바닥을 훑었다. 스침질을 할 때마다 설장을 반바퀴씩 돌려 줄을 풀어 준다. 견지로 반평생을 살아온 이씨의 스침질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몸짓처럼 부드러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이렇게 입질이 없을 때는 뭔가 잘못된 겁니다. 줄을 감아 미끼가 있는지 아니면 이물질이 붙지는 않았는지 한번 살펴 보세요.”역시 선배의 말은 들어야 한다. 바늘에 청태(파래같은 물이끼)가 잔뜩 묻어 있다. 새 미끼로 갈았다. 바로 그때 옆자리에선 또 환호성이다.“왔다.” 견지대를 쭉 당겼다 밀면서 감기를 몇 번. 이번엔 20㎝가 넘는 누치였다. 신기했다. 이렇게 작은 낚싯대로 큰 고기를 건져 올리다니…. 내가 잡은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고, 우리 배에서 잡았다는 자족감에 젖었는데 이번엔 옆 배에서 환호성이 들렸다.“멍짜(50㎝가 넘는 물고기)야. 멍짜가 왔어.”박찬화(50)씨는 휘어진 견지대를 두 손으로 잡고 소리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20분이 흘렀을까, 놈이 실체를 드러낸다.60㎝ 가까운 녀석이라 뜰채로 건져 올렸다. 우리 선조들은 참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이런 낚싯대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짧은 낚싯대로 그처럼 큰 고기를 건져 올리다니…. 나는 다시 한번 집중했다. 어깨너머 구경하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일. 또 한마리를 더 잡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 물고기도 사람을 알아 본다네 이상도 하지. 같은 배에 나란히 앉아서 스침질도 비슷하게 하는데 왜 내 바늘에는 소식이 없을까. 욕심탓인가, 내 낚시바늘은 여전히 가뿐한데 옆사람은 5분에 한 마리씩 잡아올렸다. 정말 고기에게도 눈이 있다더니…. 누치는 미끼가 흘러갈 때 문다. 그래서 스침질을 할 때마다 줄을 조금씩 풀어줘 썰망 앞에 있는 녀석들을 유인해야 한다. 추를 달아 썰망 앞 2m 정도에서 스침질을 해야만 물고기의 입질을 받을 수 있다. 무작정 던져 놓고 물고기가 물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라나. 역시 어느 분야든지 고수는 다른 법. 우리 배에서만 누치 20여마리를 잡았다. 물론 내가 잡은 것은 한 마리도 없다. 하지만 내가 건진 것은 ‘많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 전, 일행은 잡았던 누치를 모두 놓아 주었다.“원래 우리는 손맛을 보려고 오지. 또 누치는 가져가 봐야 별로 쓸 데가 없어요.”올 때처럼 역시 빈바구니였다. 아, 이것이야말로 자연과 하나된 삶의 모습이구나. # 자연과 내가 한 몸 청평에서 차를 몰고 약 1시간을 달려 홍천 팔봉산 앞 계곡으로 들어갔다. “요즘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지나간 뒤라 입질이 자주 없지만 대물이 종종 출현해 손을 즐겁게 해주지요.” 바지장화를 입고 견지대를 뒤에 꽂고 가는 김정교(50·견지협회 사업국장)씨의 모습이 멋스럽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줄을 강물에 띄워 보내며 스침질을 한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계곡물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든다.“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어요. 줄을 풀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좋은 사람들….” 김군학(51·건축업)씨는 한창 견지낚시 예찬론을 늘어놓는다. “경제적이지요. 낚싯대가 2만원이면 되는데 대낚시나 바다낚시와는 비교가 안되죠. 초보자도 배우기 쉽고….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견지를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없어져요.” 섬유수출업에 종사하는 권재구(55)씨의 견지낚시에 대한 자랑은 끝이 없다. #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움 정말 산그늘에서 반짝이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니 온갖 근심걱정이 사라진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듯, 강물은 그렇게 흘러간다. 계곡 얇은 곳에는 아이들과 견지낚시를 하는 가족들이 눈에 띈다.“아빠 잡았어. 이것 봐. 물고기야.”하는 들뜬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와 반바지를 입고 스침질을 하던 황소윤(9·고양초등학교)양의 목소리다. 불과 2∼3㎝도 안되는 피라미를 잡고는 너무 좋아한다.“견지낚시는 아이들에게 집중력을 키워 주고 자연과 함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효과가 있지요. 정말 아이들이 쉽게 배우고 바로 손맛을 느낄 수 있어 가족 레포츠로 그만이에요.” 황선태(38·식당운영)씨의 견지예찬론이다. “어허 왔네.” 조그마한 피라미를 들어 올리는 김정교씨의 웃음은 결코 커다란 누치를 잡을 때에 비해 작은 것 같지 않다. 피라미의 손맛은 누치와는 또다른 묘미가 있다. 견지대는 70㎝도 안 될 정도로 작아 손에 오는 느낌이 대낚에 비해 훨씬 살아 있다. 찌를 쓰지 않고 오직 줄을 타고 오는 느낌만을 손으로 감지하기 때문에 예민하고 섬세하다. 그래서 민물, 바다, 루어 등 낚시를 웬만큼 안다는 사람들이 찾는 마지막 코스다. 또 루어나 플라이처럼 물고기를 찾아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서 물고기를 유인하므로 체력 소모가 적다. 자연과 벗하며 짜릿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견지를 하며 다가 오는 가을을 준비하면 어떨까.
  • 텍사스유 67.35弗 또 최고치

    텍사스유 67.35弗 또 최고치

    국제유가가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로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5일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4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서부텍사스중질유(WTI) 선물가격은 전날보다 1.64달러 급등한 배럴당 67.35달러로 지난 12일의 종전 최고가(67.10달러)를 넘어섰다. 이어 시간외 거래에서는 68센트 오른 68달러까지 치솟았다. 현물시장에서도 WTI는 전날보다 1.69달러 오르며 사상 최고가인 67.28달러를 기록했다. 종전 최고가는 지난 12일의 66.88달러였다. 중동산 두바이유 현물가격도 57.42달러로 83센트 올랐다. 북해산 브렌트유의 경우 선물가격은 1.36달러 오른 66.01달러를 기록했지만, 현물가격은 27센트 내린 65.33달러에 장을 마감했다. 이날 국제유가는 미국의 가솔린 재고가 320만배럴 감소했다는 미 에너지정보청(EIA)의 발표가 전해지면서 급등세를 탔다. 여기에 열대성 폭풍 ‘카트리나’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플로리다와 산유지인 멕시코만으로 향하고 있고, 에콰도르 및 이라크의 원유수출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 더해지면서 공급차질에 대한 우려를 자극했다. 이처럼 사소한 악재에도 국제 석유시장이 요동치는 이유는 원유에 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 여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석유 수요는 중국과 인도 등의 소비증가로 꾸준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잉여 석유생산능력은 2003년 300만∼350만배럴에서 올해 7월 100만∼125만배럴로 감소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엔듀로타고 산길질주

    엔듀로타고 산길질주

    엔듀로라는 오토바이는 일반적인 오토바이에 쇼바와 타이어 등을 바꿔 넣은 것으로 4륜오토바이인 ATV와는 속도감이나 스릴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다. 인터넷 2&4오프로드(www.2and4.co.kr)동우회 회원들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의 산으로 라이딩에 나섰다. ●폼은 끝내줘요 경기도 장흥의 휴게소에서 만난 그들은 멋졌다. 오토바이는 물론, 유니폼과 부츠, 고글에 헬멧까지 그야말로 폼났다.“전부 선수들인가요?”라고 묻자 총무인 한주현(34·매직모터숍 운영)씨는 “그런 건 아닌데요. 워낙 험로를 주행하다 보니 이 정도 장비는 필수예요.”라며 “어차피 차로는 갈 수 없으니 저쪽에 있는 오토바이 뒤에 타시죠.”라고 자리를 내줬다. 엔듀로 10대가 ‘부릉 부∼왕’하며 시끄러운 엔진소리를 낸다. 모두가 무슨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처럼 멋진 모습으로 라이딩을 하는데 나만 카메라 가방 하나 둘러매고 매미처럼 김종구(30·회사원)씨 뒤에 매달렸다.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선두의 수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차로를 바꾸고 간격을 유지하고 달린다. 지나가는 차들이 신기한 듯 차 창문을 내리고 쳐다본다. 어째 쑥스럽다. 남의 뒤에 매달려가는 내 꼴이…. ●꽉 잡아요 오토바이 뒤에 타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이 남자의 허리를 꽉 잡고 달리는 모습을 영화에서 자주 보았다. 내가 종구씨 허리를 꼭 잡기가 왠지 찜찜하다. 그래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잡았다.‘부아아아 앙∼’굉음을 내며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30분을 달렸다.“꽉 잡으세요. 올라갑니다.” 오토바이들이 좌회전을 하더니 산길을 타기 시작한다. 울퉁불퉁 오토바이가 이리저리 요동친다. 뒤에 앉은 내가 중심을 잃어 오토바이가 넘어진다. 오토바이는 ‘웽∼’ 헛바퀴가 돌고 나는 옆으로 넘어졌다. 오토바이를 세운 종구씨는 “원래는 오프로드에서는 사람들을 태우지 않습니다. 운전자와 뒤에 앉은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균형을 잡지 않으면 바로 넘어지거든요. 허리를 꽉 잡고 다리까지 제 허리를 감싼다는 생각으로 몸을 밀착시켜야 합니다.”라고 했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약간은 찜찜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그의 허리를 꽉 잡고 몸을 바짝 붙일 수밖에. 일행은 이미 다들 지나가고 아무도 없다. ●천천히 가세요 입구를 지나자 폭이 1m도 안 되는 산길을 달린다. 어깨 너머로 속도계를 보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시속 60㎞가 넘는다. 흙먼지가 사정없이 날리고 바닥의 돌이 사방으로 튄다.‘왕∼앙’‘끼∼익’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밟으며 좁은 산길을 미친 듯이 달린다. 나무가 얼굴을 때린다. 흙먼지에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종구씨는 속도에 원한 맺힌 사람처럼 달려댄다. ‘붕’하고 굴곡이 있는 곳을 달리자 몸이 살짝 공중에 떠 정말 떨어질 뻔했다. 사나이 체면이고 뭐고 나는 “좀 천천히…!”라고 외마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묵묵부답. 이젠 나도 요령이 생겼다. 턱을 종구씨의 어깨에 올리고 전방을 주시하며 그와 같이 운전을 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여 봤다. 이제 그와 나는 한몸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산길을 내달린다.‘슝∼끽’‘왕∼앙’ 정말 이러다 오토바이가 부서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웬만한 레포츠는 맛을 봤지만 이 엔듀로의 속도감과 스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보다 짜릿하다. 자동차로 시속 200㎞이상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달리는 것이 무섭다고 느껴지기는 처음이다.“어차피 늦은 거 천천히 갑시다.”라고 큰소리로 외치자 종구씨는 “괜찮아요. 꽉 잡고 계세요.”라며 뿌연 흙먼지를 뚫고 내달린다. ●엔듀로는 자신과의 싸움 한 시간쯤 달렸을까.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려 하는데 너무 힘을 줘서인지 다리가 후들거린다.“아니 도대체 왜 그렇게들 미친 것처럼 달립니까.”라고 묻자 종구씨로부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저도 물론 달리면서 두려울 때가 있지요. 그것이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오토바이에 오르면 다른 생각은 정말 100분의1초도 할 수 없습니다.‘나는 할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 바로 우리 엔듀로 모험의 요체입니다.” 엔듀로(Enduro)는 ‘참다’ ‘인내하다’라는 뜻. 오토바이에서 가장 중요한 게 험로를 달릴 수 있는 내구성이라면, 라이더에게는 오토바이를 제어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이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강창석(38·금호타이어대리점)씨는 “여럿이 같이 라이딩을 하지만 서로 도움의 손길을 쉽게 내밀지 않는 것은 한 번 도와주면 계속 도움을 청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엔듀로의 정신이라는 얘기다.2&4오프로드 단장 서승영(37)씨는 “힘들고 위험하지만 뿌옇게 올라오는 흙먼지와 친구하며 엔듀로를 타고 산을 오르면 심장이 쿵쿵 뛰고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 오른다.”며 자랑이 대단하다. 그렇다. 정말 엔듀로는 매력있다.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빠져 볼 만한 그런 레포츠다.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올 가을부터는 나도 ‘엔듀로 맨’이다. ■ ‘초보부터 선수까지’ 이렇게 배워라 오토바이를 타본 사람도 오프로드를 달리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2∼3번 교육받으면 비포장도로를 달릴 수 있다. 산을 오르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선 선배들의 조언과 철저한 연습이 필수. 보통 1년 정도 타면 어떤 길이든 능숙하게 주행할 수 있다. 주로 동우회 정모 때 배우는 것이 좋다.2&4오프로드 동우회(www.2and4.co.kr)는 초보자들을 위한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며 회원들 간의 교류가 많다. 대한모터사이클연맹(KMF)에서 공식적으로 주관하는 오프로드스쿨은 없다. 다만 대한모터사이클연맹에 소속되어 있는 팀에서 자체적인 교육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인들이 선수라이선스를 취득하는 방법으로는 우선 대한모터사이클연맹(KMF)에 소속된 팀에 가입한 후 연맹에 선수등록에 필요한 준비서류를 구비하여 제출하면 정식으로 선수활동을 할 수 있다. 라이선스 취득 시 준비서류는 증명사진 2장, 주민등록등본 1통, 면허증 사본 1통, 선수등록신청서 1부이다. 비용은 국제등급 3만원, 국내A등급 2만원, 국내B등급 1만원 등이다. 엔듀로 경기대회는 보통 1년에 3∼4회 정도 개최되며 경기 참여 인원은 60∼100명 정도이며 현재 전국적으로 18개팀 정도가 활동 중이다. 문의 (02)591-0088. ■안전장비 꼭 준비하세요 비포장도로는 부상위험이 생각보다 적다. 넘어져도 흙이나 나무들이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다만 바위에 부딪히거나 바이크에 깔릴 때를 대비해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뿐 아니라 가슴 팔 다리 등도 전용 보호대를 착용한다. 손에 나는 땀 흡수나 나무로 인한 부상을 막기 위한 장갑도 필수품. 헬멧은 10만∼20만원선, 부츠는 30만원대. 레이싱 슈트는 무척 비싸다. 상의만 100만원이 넘는 제품도 많다. 상·하의 합쳐 60만원대면 무난하다. 또 중요한 것은 사고에 대비한 프로텍터. 정강이나 허리보호대는 3만원 선. 선수용으로 상체를 모두 보호해주는 제품은 70만원대. ●오토바이는 국산 125㏄ 엔듀로가 90년대 말에 생산이 중단되면서 일제 야마하 등의 제품을 사용한다. 보통 일제는 700만∼800만원 대이므로 입문하는 사람들은 국산 중고 오토바이를 사는 것이 좋다. 보통 100만원 전후면 입문용으로 ‘딱’이다. 오토바이 구입 전 엔듀로 동호회에 가입해 선배들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다.
  • [사설] 검찰 떡값 의혹 스스로 밝혀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떡값 검사’ 명단 공개로 안기부 X파일 사건이 거듭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는 앞으로 수사를 통해 가려야겠으나 거명된 전·현직 검찰 고위인사 7명의 면면은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때맞춰 일선 검사와 경찰, 방송사 간부 등에게 ‘떡값’을 줘가며 이들을 관리해 왔다는 브로커가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마저 접하고 보니 우리 사회의 ‘부패시계’가 아예 멈춰 있었던게 아닌지 개탄스럽기 그지 없는 심경이다. 노 의원이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9월 삼성의 고위인사 2명이 검찰 고위인사들에게 줄 ‘떡값’을 논의한다.1인당 수천만원씩이 거론됐다. 떡값 대상자로 등장한 7명은 검찰 내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다. 돈이 과연 이들에게 전달됐는지, 이들 외에 떡값을 받은 인사들은 없는 건지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니다. 이번 파문으로 검찰의 불법도청 수사는 치명적인 법적·도덕적 상처를 입게 됐다. 명단에 등장한 김상희 법무차관이 사의를 밝혔지만 이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다.‘삼성 돈을 받은 검찰이 어떻게 삼성을 수사하겠느냐.’는 게 보통사람들의 생각이다. 제 아무리 엄정하게 수사한들 어느 국민이 믿겠나. 검찰은 더이상 여론 동향이나 살피며 사태추이를 지켜볼 생각을 거둬야 한다. 극에 달한 국민들의 불신을 조금이라도 덜 생각이라면 당장 떡값 수수 의혹의 진실을 국민 앞에 밝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나마 검찰을 신뢰하는 선량한 국민에 대한 도리이며, 야당의 특검 주장에 맞서 떳떳이 불법도청 수사에 임할 최소한의 명분을 확보하는 길이다.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5) 초의스님과 동다송

    입추(立秋)가 지나니 저녁과 아침 바람끝이 제법 차다. 세상의 번잡한 세속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은 자기자리를 내주기 싫어 천둥번개를 치며 몸부림을 친다. 일지암(一枝庵)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초의 스님의 숨결이 실려 있는 일지암의 작은 차밭에는 벌써 가을준비로 수런거리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다. 우주의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거대한 진리를 우리는 찰나지간에 느낄 뿐만 아니라 긴 인생의 전환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잔의 차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초의 스님이 말씀하셨던 동다(東茶) 즉 우리 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큰절인 해남 대흥사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새벽숲길 수련회’를 실시한다. 평상시 수련회 일정에 일지암을 찾아서 차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도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련회 마지막 날인 일요일 아침 일찍 수련생들이 자우 홍련사 툇마루에 앉았다. 차 한잔을 공손히 손에 들고 맑은 얼굴을 한 수련생들은 차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우리차는 맛과 약효 둘다 겸비” 간단한 강의가 끝나자 한 수련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스님 우리 차가 좋습니까, 중국 차가 좋습니까. 요즘 턱없는 소문이 떠도는 푸얼차는 도대체 어떤 차입니까.” 차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도 우리의 차 문화는 대중들에게 너무도 멀리 있구나.’하는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먼저 푸얼차에 대해 답을 했다.“푸얼차는 중국인들조차 야만인들과 유목민들이나 먹었던 흑차, 흔히 오랑캐 차로 부르기도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보내준 몽정차와 육안차를 직접 마셨던 초의 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육안차는 맛, 몽정차는 약효가 있다는데, 우리 차는 그 두 가지를 다 겸했다고 옛 사람들은 높이 평했다.”고 우리 차를 극찬했다. 필자 역시 우리차는 색(色), 향(香), 미(美), 기(氣) 측면에서, 또한 요즘 현대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웰빙 측면에서 이 세상 그 어느 차보다 ‘좋은 차’라고 먼저 못 박고 싶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마시고 있는 포도주의 예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매우 귀하고 맛있는 포도주’에 대해 그냥 오래되면 좋은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좋은 포도주는 기온의 변화가 심하고 가뭄과 추운 겨울 등 자연의 악조건 속에서 힘들게 자란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가 당도도 높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지금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의 보졸레누보가 대표적인 경우다. 인기없는 포도 중 하나였던 보졸레누보는 자갈밭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했다. 척박한 땅이란 악조건 속에서 보졸레누보 포도나무는 땅속깊이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포도로 재탄생한 것이다. 차 나무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의 변화가 혹독한 조건에서 자란 차나무의 잎이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그런 점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는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은 우리나라 군산과 목포의 위도에 해당하는 산둥성등 몇군데를 제외하곤 우리나라 제주도 이남지역에 해당할 정도의 따뜻한 아열대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토심(土心)이 매우 부족해 찻잎의 맛과 질이 떨어진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즈오카 등 몇몇 지방을 제외하곤 온도의 차가 매우 적어 좋은 찻잎을 수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 찻잎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느 나라보다 토심이 좋다는 것이다. 차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려 좋은 찻잎을 생산할 수 있는 좋은 땅의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당연히 우리의 차는 맛과 영양 그리고 약리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차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우리차의 성전인 ‘동다송´은 일지암에서 초의 스님이 순조의 부마이자 사대부 차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해거도인 홍현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간절한 물음을 받고 이에 대한 답으로 52세(1837년)때 편찬됐다. 홍현주는 우리차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등과 깊은 교류를 가졌던 초의 스님은 당시 순조의 ‘부마’로 ‘실세’였던 홍현주 등 유가의 뛰어난 선비들과 한양을 왕래하며 학문과 차담을 나누었다. 모두 31구송(句頌)으로 되어 있는 ‘동다송´은 차의 기원과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과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차나무를 직접 심고 따본 경험을 바탕으로 덖고 건조시키는 조다법을 이용, 우리차의 공(功)과 덕(德)을 찬양하고 있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중국 다서(茶書)에 있는 각종 고사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상세하게 주석을 달고 있어 육우의 ‘다경´에 필적하는 우리나라의 ‘다경´으로도 손색없을 정도의 노작을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현존하는 ‘동다송´은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의 다예관에 소장된 필사본인 ‘다예관본(茶藝館本)´, 석오 윤치영의 필사본인 ‘석오본(石梧本)´, 갑술중추 경앙등초라고 쓰여 있는 ‘경암본(鏡菴本)´, 송광사 보정 스님이 필사한 ‘다송자본(茶松子本)´ 등 크게 4가지본이 있다. ‘동다송´을 통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한국의 다성(茶聖) 초의의순(艸衣意恂)선사가 40세(1825년)때 터를 닦고 입적 때까지 주석했던 일지암은 지금 한국 차의 성지로 5.5평의 초당, 그리고 새롭게 단장한 자우홍련사, 법당과 요사채가 전부다. 그러나 앞마당에 펼쳐진 몇백평 규모의 야생차밭을 필두로, 서해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는 먼 풍광은 유천(乳川)의 물맛과 함께 차의 성지로서 군계일학이다.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일지암은 우리 현대 차문화사의 명실상부한 중흥조다.1979년 복원된 일지암은 한국의 차인들을 한곳에 결집(結集)시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과 차 문화를 현대인들의 품속으로 되돌려 놓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지암의 이름은 장자(莊子) 남화경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뱁새는 일생동안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구절과 한산시(寒山詩)의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구절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초의 스님은 일지암에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윤연 홍석주 등과 다도를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동다송´ ‘다신전´을 지었다. 일지암의 흔적은 일지암시집(一枝庵詩集)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장춘동은 해남 남방 20리 두륜산 일맥, 용과 호랑이 상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산맥은 십구요, 계곡은 구곡이다. 대흥사의 남방이요, 북암에서 볼 때는 서쪽이요, 남암에서 볼 때는 북쪽, 이곳에 초당을 지었으니 이름이 일지암이다. 삼간 초당에는 초의 스님과 동자 한 사람, 법상(法床)에는 금으로 도금된 부처 일좌(一座), 아침저녁의 목탁소리 샘물과 수목이 의지하고 죽림의 바람소리는 가야금소리 같다. 축대를 쌓아 과원(果園)을 만들고 석간(石澗)에서 나오는 물은 죽관으로 받아 차를 끓인다. 남은 물이 고인 곳에 연못을 만들어 연못 위에는 나뭇가지를 얽어 포도넝쿨을 틀어 올리고 정원주변은 수석으로 갖추었다.” ●일지암 복원은 차문화사의 중요한 사건 그러나 초의 스님 열반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됐다. 지금의 일지암은 1979년 후대의 차인들의 노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1976년 여름 해인사 율원에 박태영 화백의 주선으로 박동선씨가 그곳에서 공부하던 필자와 도범 스님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필자와 도범 스님 등 방문자 일행은 토우 김종희 선생댁을 방문, 한국 차문화의 복원과 일지암 복원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일지암 복원은 김봉호 박동선 김미희 박종한 김종희 안광석 조자룡씨 등 수백명의 차인 결성으로 이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지암터 확인이었다.‘대둔사지´ ‘몽하편병서´ 문헌을 확인하고 대흥사 주지를 역임했던 응송(당시 90세) 스님 을 지게에 업고 다니던 1977년 2월 하순 오늘의 복원터를 확증할 수 있었다. 당시 에밀레 박물관장이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구조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자룡씨가 새롭게 복원되는 일지암의 설계를 맡았다. 조자룡씨는 한국의 전형적인 다실을 찾기 위해 전국 각처를 답사했다. 결국 한국전통 초당형식을 갖춘 일지암 초당은 5.5평의 정사각형 초가형태로, 법당 겸 요사채는 15.5평의 기와집으로 일지암복원위원회가 결정한 후 1979년 2월 완공했다. 일지암의 복원은 한국현대 선차(禪茶)문화의 복원으로 연결됐다. 그때부터 초의 스님 ‘동다송´ ‘다신전´ 등 차 관련사업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켰을 뿐만 아니라 초의 스님을 추모하는 초의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차 문화의 보급이 급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지암복원은 초의 스님이 생존했던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한국현대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한국차의 중흥조인 초의 스님의 자(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초의, 해사(海師), 해노사(海老師), 우사(芋社), 자우(紫芋), 병발(甁鉢) 등 여러 가지가 있다.15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초의 스님은 월출산에서 해가 지고 보름달이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연담 유일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며 ‘초의’라는 호를 얻었다.‘초의’는 고려말 야운선사의 ‘자경문´ 가운데 있는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주린 창자를 달래고, 송라와 풀옷으로 몸뚱이를 가린다.”는 구절에서 유래됐다는 설과,‘중국사략´ 가운데 “굴을 파서 즐겨 살며 나무를 얽어매어 집을 삼고 나무 열매 먹고 풀옷을 입는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초의선사는 요즘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영국에서 활약 중인 박지성처럼 어느 포지션에서도 역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실력있는 멀티플레이어’였던 것이다. 먼저 스님으로서 수행의 최고봉인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해 대흥사 13대강맥을 이었다. 초의 스님은 또한 탁월한 금어(金魚:불화를 최고의 경지에서 그리는 스님)이자 선필(禪筆)가였다. 범자(梵字)를 익혀 범어의 뜻을 익혔으며 , 탱화를 잘 그려 당나라 최고의 탱화장이였던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와 겨룰 정도로 예서체에 뛰어난 경지를 보였다고 한다. 불교전통음악인 범패, 원예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만드는 법 등에도 능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하나는 바로 남종화와 초의 스님의 인연이다. 초의 스님이 50세 되던 해인 1835년 봄 진도에서 남종화의 시조(始祖)가 된 소치 허유(小痴 許維)가 찾아온 것이다. 소치는 일지암에 3년을 머물며 초의 스님의 화법과 시학·불경과 차를 배웠다. 초의는 소치의 자질을 알아보고 추사와 인연을 맺어준다. 오늘날 한국화단의 큰 산맥인 남종화가의 탄생이 바로 초의 스님과의 인연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소치는 먼 훗날 초의 스님의 인품을 묻는 헌종에게 “세인이 모두 고승이라 하옵는데 그분은 내외전(內外典)에 달통했으며 승속간에 많은 인사와 교유하고 있다.”고 밝히는 연유가 된다. 또한 그의 자서전인 ‘몽연록´을 통해 초의 스님과 추사의 인연에 대해 “두 스승은 꿈속에서 만난 인연”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초의선사가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은 당시 조선후기 유교와 활발한 교류를 통해 불교와 거리를 사상적으로 좁혔다는 점이다.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연천 홍석주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유·불·선에 대한 담론을 이뤄냈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성취해낸 것이다. ●43세때 번역서 ‘다신전´ 편찬 초의 스님의 또 하나의 노작(勞作)은 바로 ‘다신전(茶神傳)´이다.1828년 그의 나이 43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에 머물며 초록(抄錄)해낸 ‘다신전´은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만보전서´에서 차에 관한 부분인 ‘채다론’(採茶論)을 번역한 것이다.‘다신전´은 차의 신에 관한 기록으로 찻잎을 따는 시기와 요령, 차를 만드는 법, 보관하는 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 쉽게 꾸며놓았다. 초의선사는 “전에는 승가에 조주풍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져 다도를 알고자 하는 이를 위해 초록해낸 것”이라며 ‘다신전´ 편찬의미를 밝히고 있다. 초의 스님을 두고 사람들은 시(詩), 서(書), 화(畵), 차(茶) 4절(絶)이라고도 했다. 그런 점에서 초의 스님은 당대 최고의 ‘신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의 스님은 세속의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땅끝 대흥사 일지암이란 오지에 머물면서도 요동치듯 흘러가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현실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변화를 실천하는 실천가였다. 당대의 신지식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당대 중생들 삶의 ‘개화’(開化)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초의 스님에게 음풍농월의 수단이 아닌, 전통을 이어가고 새로운 현실의 삶의 변화를 위한 첫걸음 같은 것이었다. 초의 스님이 살던 시대는 참으로 척박했다.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경제는 민중들을 빈곤한 삶으로 몰아댔고, 낡은 시대의 유물들은 쌓여진 지식의 보고들을 갉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심세력들의 당쟁으로 인해 민중들의 삶이 이리저리 내몰린 조선후기의 초의 스님 시대와 오늘 우리시대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조망할 혜안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중생들의 곱디 고운 삶을 현실속에서 아름답게 보듬어 안고 함께 걸어갈 우리시대의 신 지식인이 그리운 때다 (일지암 암주)
  • [재계 인사이드] MK 용병술 빛날까

    세대 교체 신호탄인가, 회오리식 용병술인가. 현대·기아차 그룹이 최근 경영진 인사를 단행했다. 여느 때처럼 전혀 예고에 없던 인사다. 재계는 정몽구(MK·67)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ES·35) 기아차 사장 체제 구축을 위한 세대 교체 인사라고 해석한다. 물론 그룹측은 ‘한번 내보냈다가도 다시 부르는’ MK 특유의 인사 스타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룹은 11일 전략조정실장 겸 마케팅 총괄본부장에 ‘쉬고 있던’ 이재완(52) 부사장을 임명했다. 이 직함을 맡아 ‘잘 나가던’ 최한영(53) 사장은 상용차 사업 담당 사장으로 이동했다. 일단은 이 부사장이 6개월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베이징 올림픽 공식 스폰서 탈락 등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이 부사장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와 75년 현대차에 입사, 상품기획실장 등 마케팅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 부사장이 마케팅본부장에서 물러났을 때, 후임자도 없이 그 업무를 겸직했던 최 사장의 전보 발령도 여러가지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최 사장은 잘 알려진 대로 MK의 심중을 가장 정확히 읽어내는 측근으로 꼽혀왔다. 그룹측은 “중국 내 상용차 공장 설립 등 상용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독자 사업부문으로 독립시켜 최 사장에게 책임을 맡겼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룹의 ‘두뇌’격인 전략조정실장 자리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해석을 낳는다. 최 사장은 경기고와 한양대를 나와 MK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왔다.99년 이사 대우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 지난해 전략조정실장 사장으로 승진했다.2000년 전후, 그룹이 요동칠 때 핵심참모로 활약했던 MK사단의 마지막 세대로 꼽힌다.‘ES체제를 위한 물갈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격에서 계열사(현대모비스) 부회장으로 옮겨간 이상기(54)씨가 얼마전 사퇴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혀진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내쳤는가 싶으면 반드시 다시 불러들이는’ MK의 인사 스타일과, 특유의 순발력과 성실함으로 ‘오너’에 대한 로열티가 강한 최 사장의 품성상 그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는 지적이다.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日우정민영화법 부결 후폭풍] (상)격랑 휩싸인 일본 정국

    [日우정민영화법 부결 후폭풍] (상)격랑 휩싸인 일본 정국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최대 개혁과제로 인식돼 온 우정민영화법안이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고,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일본정국의 격동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개혁으로 상징된 고이즈미식 정치는 표류 상태다. 아울러 포스트 고이즈미를 향한 찜통더위 속의 선거전은 어느 때보다 뜨거울 전망이다. 일면 금융시장 개방의 성격이 강한 우정민영화 좌절은 일본으로 향했던 미국 등 해외자본의 이탈이 우려돼, 금융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소수 극우세력을 등에 업은 고이즈미식 강경외교도 제동이 걸릴 것인지 주목된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국의 한여름 대격랑이 시작됐다. 개혁을 기치로 2001년 4월말 출범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밀어붙이기식 개혁이 최대 시련을 맞은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4년 3개월여의 집권 기간 중 초기에는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사법개혁, 도로공사 민영화, 연금개혁, 국립대학 특수행정법인화, 기초자치단체의 대대적 합병 등 개혁조치를 일사천리로 단행했다. 반면 일본정치의 상징인 파벌의 힘은 조금씩 무력화시켰다. ●고이즈미의 개혁 좌절 하지만 고이즈미 개혁의 정점으로 불리는 우정민영화가 끝내 좌초되고 말았다.‘반(反)고이즈미 세력’들이 정치생명을 걸고 반격을 취한 결과, 참의원에서 관련 법안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반고이즈미 세력은 그동안 낡은 정치의 상징인 ‘반개혁세력’으로 몰리면서 정국 운용에서 철저히 소외되자 우정민영화 법안을 계기로 ‘거사’했고 일단 성공을 거뒀다. 이처럼 중의원 해산 정국은 개혁과 반개혁의 충돌 결과로 인식된다.9월에 치러질 것으로 보이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공명당과 연합, 과반수를 확보해 고이즈미가 총리에 재선되면 우정민영화 법안을 다시 제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과반 획득에 실패하면 고이즈미 정권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민주당 지지율 우세 민주당이 제1당이 되면 정권교체가 이뤄져 1993년 이래 12년 만에 비(非)자민당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물론 선거결과에 따라 민주당 단독, 사민당 등과의 연립 등 여러 변수가 생겨 최종적으로는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현실성을 띤다. 정계개편의 에너지는 충분하다는 평이다. 우선 자민당은 중의원에서 전체 의원(249명)의 20% 이상이 이미 당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한 채 중의원 본회의에서 우정민영화 법안에 반대나 기권(혹은 불출석)했고, 당지도부는 공천배제 의사를 밝혀 극적인 타협점이 없는 한 집단 모반파들이 신당 창당 모색 등 길을 달리 해 정계개편의 불씨가 될 것 같다. 이들이 민주당과 손을 잡는 것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양당정치 공고화되나 자민당과 민주당의 ‘양당정치’가 공고화될지도 관전포인트다. 일본 정국은 2002년 북한이 일본인 납치문제를 시인한 뒤 급격히 우경화,2003년 11월 중의원, 지난해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정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민·공산당이 쇠퇴했다. 무엇보다 과반수가 넘는 안정적인 제1당이 등장할 수 있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일본 정치는 그동안 자민당이 안정적인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공명당과의 연립정부를 가동, 애초부터 정국 불안의 요인을 지고 있었다. 하원격인 중의원 2003년 11월 총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정원 480명의 과반에 미달하는 237석을 얻은 뒤 보수신당(4), 무소속(3)을 영입해 겨우 과반을 넘겼다. 이후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선전, 현재 의원수는 249명이다. 한편 자민당과 민주당 등 각 당의 분석과 언론사들의 자체 조사 결과 대부분 민주당의 우세로 나오고, 자민당 반란의원 51명 가운데 20명 정도만 생환할 수 있을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taein@seoul.co.kr
  • [국제플러스] 日우정법 반대 확산… 정가 요동

    일본 참의원 우정 민영화 특별위원회는 5일 오후 우정 민영화 법안을 자민·공명 양당 찬성 다수로 가결, 본회의로 넘겼다. 이에 따라 8일 오후 참의원 본회의에서 법안 표결이 이뤄질 계획이지만 자민당에서 반대하는 의원이 속속 늘어나 일본 정국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우정 민영화에 가장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자민당 내 가메이파 회장인 나카소네 히로부미 전 문부상은 이날 법안에 반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동향이 주목돼온 나카소네 전 문부상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자민당 집행부는 동조세력이 늘어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 같은 파 가시무라 다케아키 방위청 정무관도 법안에 반대하기 때문에 내각에 남을 수 없다며 정무관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 [코드로 읽는책] 카운트다운 히로시마/스티븐 워커 지음

    ‘원자폭탄이 있으니 대규모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대가로 우리가 누릴 것은 무한정으로 연장된 평화 아닌 평화뿐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2차대전이 종료된 후 두 달여쯤 지난 1945년 10월19일 조지 오웰은 ‘트리뷴’지 칼럼에 위와 같이 썼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오웰의 바람대로 아직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수천배 위력을 지닌 핵폭탄에 둘러싸인 채 ‘평화 아닌 평화’ 속에 현대인은 숨죽이고 살고 있다. 8월6일은 일본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다.1945년 8월6일,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미국은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스티븐 워커 지음, 권기대 옮김, 황금가지 펴냄)는 첫 원폭 실험에서 실제 투하까지 긴박했던 3주간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 스티븐 워커는 작가이자 12년간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지난 2003년에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주제로 한 ‘히로시마:세계를 뒤흔든 그날’이란 작품으로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원자폭탄을 주제로 씌어진 책은 많았지만, 주로 원폭 개발 과정을 다룬 과학서이거나 일본측 시각에서 피폭자들의 참상을 다룬 책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이 책은 저자가 방대한 자료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원폭 실험 성공(1945.7.16)부터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8.6)되기까지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저자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이 원자폭탄의 자취를 좇아 로스앨러모스를 비롯한 미국 전역과 히로시마를 비롯한 일본의 몇몇 도시들, 그리고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싣고 발진했던 서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작고 외딴 티니언 섬까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인터뷰했다. 원자폭탄 제작을 책임진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스탈린을 따돌리고 실제 투하를 결정한 처칠과 트루먼, 요동치는 B29 안에서 원자폭탄을 조립한 폭격수 모리스 젭슨 소위, 그리고 히로시마 피폭자 중 살아남은 이들 등등. 수많은 생존자들의 체험담을 바탕으로 저자는 60년 전에 있었던 사상 최대의 ‘작전’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티니언 섬 509대대 병영은 이제 정글 속에 묻혀 잊혀지고 있다. 하지만 대원들은 지금까지도 매년 친목회를 갖는다고 한다. 이미 상당수가 사망해 몇명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지금 당시와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명령에 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저자는 전한다. 마치 ‘히로시마 원폭의 망령’이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말이다.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3중악재’ 겹쳐 국제유가 요동

    ‘3중악재’ 겹쳐 국제유가 요동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정 불안 가능성이 국제 유가를 장중 한때 배럴당 62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10여년 전부터 진행된 권력 승계가 순탄하게 마무리됐고 원유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우디 정부의 거듭된 언명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사우디 왕실에 불어닥칠 내홍의 먹구름에 더 무게를 실었다. ●국제유가 하룻만에 소폭하락 1일 파드 빈 압델 아지즈 사우디 국왕의 사망 소식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국제유가는 2일 오전(현지시간) 뉴욕시장에서 소폭 하락하며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앞서 1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9월 인도분 서부텍사스 중질유(WTI)는 장중 한때 배럴당 62.3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전날보다 1달러 오른 61.57달러에 마감됐다. 이 장중가는 1983년 NYMEX에서 거래가 시작된 이래 최고 기록으로 종전 기록은 지난달 7일의 62.10달러였다.WTI 가격은 2년만에 곱절 이상으로 뛰었고 올해만 42%가 올랐다.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9월물 북해산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1.07달러(1.8%) 오른 60.44달러에 거래를 마친 것으로 집계됐다. 우리의 원유 수입원인 두바이유 역시 전날보다 89센트 오른 54.70달러에 장을 마쳤다. 물론 사우디 정정의 향배만이 유가를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미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주에 있는 엑손 모빌,BP, 발레로 등의 정유공장이 가동 중단됐다는 소식, 사우디에 이어 2위 수출국인 이란이 우라늄 농축 강행으로 제재를 받을 경우 석유 수급이 커다란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것 등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왕가 권력다툼 격화 우려 석유시장 분석가들은 압둘라 새 국왕이 82세 고령에다 얼마전 위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점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지난 1995년 파드 전 국왕의 뇌졸중 이후 10년간의 통치 경험과 그가 추진한 개혁노선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확인했지만 왕실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이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새 왕세제로 지목된 술탄 빈 압둘 아지즈 국방장관도 고령이어서 차기 왕세제 자리를 놓고 왕실 내 치열한 ‘암투’가 벌어질 가능성마저 상존한다. 1953년 리야드 지사로 출발해 1963년 국방장관에 이어 1982년부터 부총리도 겸임해온 술탄 새 왕세제가 “진작부터 ‘압둘라 이후’를 꿈꿔온 야심가”라고 BBC 인터넷판은 평가했다. 장기간 미국 대사를 역임했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도 절친한 것으로 알려진 반다르 왕자가 최근 자리를 물러나 귀국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관측도 있다. BBC 보도는 ‘단기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비관적’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알리 나이미 석유장관은 유가를 배럴당 40∼50달러 선에 맞추는 것이 사우디 정부의 목표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국왕 승계과정에 따른 정치·경제적 불안을 줄이기 위해 비현실적인 유가밴드(적정 가격대)를 폐기하고 당분간 고유가 정책을 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여하튼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컨트롤 타워’인 사우디의 역할을 고려할 때 정정 불안은 세계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번째 비행기 사고… 또 10년 감수”

    |발리(인도네시아) 홍희경특파원|“10년 만에 ‘십년감수할 만한 일’을 한 차례 더 겪은 셈이죠.” 2일 새벽 엔진고장으로 출발지인 인도네시아 발리 덴파사 공항으로 긴급회항한 서울행 대한항공 KE630편의 승객 고창립(47)씨는 부쳤던 짐을 찾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씨는 지난 1994년 제주도 비행기 동체착륙 사고 당시의 탑승자이기도 하다. 이 사고 이후 2∼3년 동안 고씨는 비행기 타기를 꺼려했지만, 제주도 출신이면서 서울에 사는 그가 항공기를 매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날 엔진고장도 미리 알아챌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새벽 3시20분에 출발한 항공기의 엔진 1개가 망가지면서 이륙 뒤 10분 만에 기체가 요동했지만, 대부분의 승객은 기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모니터를 보던 고씨는 비행기의 고도가 그대로인 사실을 발견했다.그는 “함께 휴가를 온 20여명의 가족과 친지 걱정에 괴로웠다.”고 전했다.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하고 덴파사 공항으로 돌아가겠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에 안정을 찾았다는 그는 “남들은 한 번 겪기도 어려운 비행기 사고를 두 번이나 당했지만, 몸도 멀쩡하고 가족을 향한 정도 절실해진다.”면서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웃었다.saloo@seoul.co.kr
  • [열린세상] 글로벌시대의 공격적 구조조정/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세계 기업판도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자동차시장을 주름잡던 GM과 포드의 신용등급이 투자를 꺼리는 정크본드 수준으로 추락하고,PC산업의 대명사였던 IBM의 PC부문이 중국에 넘어갔으며, 경쟁자인 르노와 닛산이 세계시장 공략을 위해 손을 잡았다. 생존을 위해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글로벌기업들의 몸부림은 숨막힐 정도다. 시장은 글로벌화되고, 기술은 디지털화 융·복합화되면서 어디서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전방위 경쟁상황이다. 핀란드 국민기업인 노키아가 제지업체에서 이미 휴대전화업체로 과감한 변신을 하였고, 순익 1조원이 넘는 초우량기업 도요타 스스로 “타도! 도요타”를 내세우며 몸부림치고 있다. 생존의 절박감은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30대 그룹 중 절반이 몰락하고 1955년 100대 기업 중 반세기가 지난 지금 100위권에 남아 있는 기업은 7개사에 불과하다. 최근 30년간 우리기업 5개사 중 1개만 살아 남았다. 문제는 이런 추세라면 향후 생존전망도 희망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오죽했으면 삼성 이건희 회장이 5년,10년 후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했겠는가. 우리 기업들은 IMF를 거치면서 과감한 비용절감을 통한 구조조정으로 수익성은 개선되었으나 고용과 투자는 위축되고 있다. 상장 제조업체 평균 수익률은 95년 3.4%에서 지난해 8.3%로 높아졌지만, 다운사이징 위주의 수세적 구조조정으로 같은 기간 평균 종업원 수는 무려 23.8%나 감소했다. 국내 100대 기업의 매출대비 연구개발 투자비율도 1.6%로 글로벌 100대기업 평균(3.7%)의 절반도 안 된다. 게다가 일부 대기업과 하이테크 벤처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기업들이 경쟁력과 실적의 악화로 새로운 성장동력에 투자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든 국가든 성공적인 미래전략 없이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세계 자동차 1위 기업인 GM과 가전 브랜드가치 1위인 SONY의 최근 위기에서 보듯 이제는 세계 1위 기업도 안심할 수 없는 시대다. 최소한 5년,10년 앞을 내다보고 캐시 카우(cash cow)가 될 경쟁무기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규범화되는 글로벌 관행을 받아들이면서 환율 유가 원자재가격 등의 대외 불안요인과 싸워야 하고, 막강한 선진기업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떠오르는 브릭스(BRICs)도 기회인 동시에 위협적인 경쟁상대다. “세계 제일이 아니라 세계 유일의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치다 가즈히코 샤프 CEO의 말처럼 공격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말고 수익이 나더라도 미래 성장이 불확실한 사업은 과감히 매각·분사·아웃소싱하고, 경쟁사의 추격이 불가능한 최초·최고의 제품을 개발하는 공격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향후 시장을 주도할 혁신사업 진출을 위해 과감한 전략적 제휴도 중요하다. 차세대사업으로의 매끄러운 전환을 위해 GE의 R&D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GE는 자사의 총 역량 15%를 현 사업과 기초연구 개발에 각각 투입하지만,35%는 신제품 개발, 나머지 35%는 차세대 제품개발에 쏟고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해야만 시장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보다 사람이 우선한다.”는 잭 웰치의 말처럼 기술개발과 함께 또 하나의 필수적인 경쟁력 원천은 우수한 인력의 확보다. 연령 성별 학력 국적에 관계없이 글로벌 차원에서 핵심인재를 확보하고 활용하는 글로벌 경영체제의 도입은 국제경쟁력 확보를 위해 시급하다. 시장구조와 산업조직 면에서의 혁신도 시급하다. 보다 많은 글로벌 기업이 출현하자면 규모나 경쟁력, 기술면에서 뒷받침해줄 유망한 중소·중견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상생의 리더십도 절실하다. 패자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성공의 월계관을 쓸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미래를 담보할 성장동력에 대한 투자와 범국가적인 지원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패자부활전은 없기 때문이다. 현오석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장
  • 비극의 주인공서 전설로

    불리한 신체 조건을 딛고 우뚝 선 스포츠맨들의 얘기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잔잔히 요동치게 한다. ‘맨발의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사진 왼쪽·에티오피아)는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맨발로 질주, 월계관을 썼다.64년 도쿄올림픽에서 2연패를 일궈낸 그는 69년 자동차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불굴의 투지로 장애인올림픽의 전신인 70년 ‘스토크·맨더빌 게임스’에서 양궁 금메달을 목에 걸어 전세계를 울음 바다에 빠뜨렸다. 로마올림픽 100m와 200m,400m 등 단거리 3개 종목에서 여자 최초 3관왕에 오른 윌마 루돌프(미국)는 11살 때까지 목발에 의지해야 했던 장애인. 그는 피나는 운동 끝에 걷기에 성공한 것으로도 모자라 비장애인보다 더 잘 뛰겠다는 목표를 세워 결국 육상 단거리의 여왕이 됐다. 미국프로야구의 짐 애보트(오른쪽)는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조막손 투수. 그는 왼손으로 투구한 뒤 오른손에 걸치고 있던 글러브를 다시 왼손에 끼고 수비를 하는 등 남들이 불가능하리라던 동작을 연습으로 극복했다. 그는 93년 뉴욕 양키스에서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이와 함께 수류탄 폭발로 오른손을 잃었지만, 왼손으로 48년 런던과 52년 헬싱키올림픽 자동권총 2연패의 위업을 수립한 카로리 타카스, 사고로 눈과 귀를 잃었지만 88년 서울과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수영에서 2관왕에 오른 타마스 다르니(이상 헝가리) 등이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차시장 지각변동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차시장 지각변동

    한국, 중국, 타이완, 일본, 홍콩등 동남아시아는 지금 차 전쟁 속으로 급속히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마치 중국과 영국이 차 매매 대금을 놓고 아편전쟁을 치른 것처럼 수천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 차밭을 조성하고, 젊은층의 문화 구미에 맞는 차가게, 그리고 그에 맞는 차 음식들이 급속하게 개발·보급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최근의 차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중국차의 최고봉은 무이산에서 생산되는 대홍포라는 차다. 현재 무이산에 남아 있는 대홍포 차나무는 8그루 정도다. 그 나무에서 차의 생엽을 채취해서 만든 차가 올해 초 홍콩에서 열린 차 경매시장에 나왔다. 가격은 무려 25g에 2500만원이나 됐다. 그 차 가격에 참가한 경매자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홍포는 예상과는 다르게 금방 구매자를 만나고 말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한 홍콩 여성기업인이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겠다.’며 그 차를 선뜻 구매해버린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중국 상하이에 가면 푸얼차를 파는 전문점이 즐비하다. 그들은 중국인들을 위해 푸얼차를 파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타이완 차 상인이나 차를 주로 소비하는 한국 중산층 관광객들에게 파는 것이다. 상하이의 푸얼차 전문상인들은 최근까지 100∼200년 됐다고 추정되는 푸얼차가 2000여만원 가까이에 쉽게 판매되고 있으며 그나마 없어서 못 판다고 울상이었다. 지금도 50만∼60만원대 고가 푸얼차가 부족할 정도로 팔려나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코엑스에서 열린 ‘제3회 티 월드페스티벌´에 참여한 수백개의 부스 중에서 중국, 타이완에서 출품된 보이차가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10만원도 채 안되는 한국차는 외면을 받고 20만∼30만원짜리 5∼6년된 보이차는 불티나게 팔린 것이다. 중국 차 상인들은 그런 푸얼차 열풍에 고무돼 한국과 타이완인들의 입맛에 맞는 차를 계속 생산하기위해 품종을 개발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차 상인들의 상술이 놀라울 뿐이다. 차가 한 나라의 산업과 문화를 동반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차는 이제 동남아시아 변방을 벗어나 세계로 그 길을 확장하기 위한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다. 세계 차 전쟁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중국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땅, 그리고 값싼 임금을 무기로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차 생산을 위해 재배 면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의 한 기업인과 중국 산둥성 인민정부 초청으로 제3차 세계 차 박람회에 참석했다가 차밭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성되고 있는 차밭의 면적은 약 1000만평, 차밭 안에는 50홀 규모의 골프장과 각종 레저시설이 들어서고 있었다. 차와 레저문화를 결합시킨 새로운 문화상품이 중국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중국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중국의 차 문화가 부활한 것은 1970년 후반.2000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의 차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쇠퇴의 길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반당’적이며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중국인들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던 ‘다관’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차 문화의 부활은 개방·개혁을 주도했던 덩샤오핑에 의해 시작됐다. 그리고 불과 10년만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다원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차잎 생산량에 있어서도 세계 총생산의 22%정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중국의 차 생산지구는 크게 서남차구, 화남차구, 강서차구, 강북차구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생산량은 현재 약 74만t(2002년 통계 67만t,12억 인구 중 1인당 670g 6.7통)으로 총 18개성 1000여개의 현에서 생산되고 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푸얼차가 아닌 녹차류가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선호하고 있는 푸얼차를 전인구의 0.3%도 마시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푸얼차가 ‘변방의 오랑캐 차’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차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교각 스님의 차인 ‘구화불차’ 등 차 상품, 한국차의 유적이랄 수 있는 대각국사 의천의 고려사 복원 등 역사의 복원을 통해 관광 상품을 속속 탄생시키고 있을 정도로 전략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을 통해 단절됐던 소수민족의 다예, 법문사의 황실다예, 중국 10대 명차다예등을 복원해 문화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는 차 브랜드는 현재 5000가지 정도로 10대명차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비롯, 세계인들의 입맛에 맞는 차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차의 세계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인적·물적 인프라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타이완 차 역시 세계 차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17세기경 중국 푸젠에서 타이완에 차가 전래된 이래 우롱차(烏龍茶) 포종차(包種茶) 홍차(紅茶) 녹차(綠茶) 등 연간 150톤을 생산하고 있고 국민 1인당 1.5㎏(100g 기준 15통정도) 정도를 소비하고 있을 정도로 차가 일상화되어 있다. 타이완은 또 베트남, 인도네시아, 중국에 대규모 차밭을 가꾸고 있다.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타이완차의 80% 정도가 베트남에서 키운 차밭의 차잎들이라는 점이다. 최근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차 베스트 10에 타이완 대우령 고산차가 중국 10대 명차를 제치고 세계 1위를 해서 타이완차의 위력을 실감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명차의 반열에 올라있는 동방미인(東方美人), 문산 포종차, 목책 철관음, 대우령 고산차, 동정산 우롱차 등은 소규모 차농들이 정성스럽게 생산해내고 있는 브랜드들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차상들이 고급화된 타이완차를 사기 위해 타이완으로 몰려들고 있기도 하다. 타이완차를 세계적인 차로 끌어올려 문화상품으로 떠오르게 한 것은 1960년 초 설립된 천인·천복그룹이다. 천인집단은 타이완과 서양을 겨냥한 차 문화사령탑으로 전세계에 모두 126개의 분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천복집단은 중국대륙 내 명차산지에서 생산되는 차의 관리와 유통을 맡아 현재 470여개의 분점을 가지고 있다. 천인집단의 이서하(李瑞河) 회장(2001년 이 회장은 중국차인연합회 회장인 왕가양과 일지암을 방문, 한국 차문화를 견학할 정도로 열성적이다)은 중국의 대표적인 차 잡지인 ‘시대보´에 세계 차왕으로 선정된 이래 세계차 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차 기업인이 되었다. 타이완은 90년대 중반 이후 최고의 차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각지에 다예관이 들어서고, 최근들어 우리에게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페트병 속의 차등 현대적 버전을 속속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흐름을 반영하듯 타이완의 천인집단은 2000년 발빠르게 ‘끽다취’ (喫茶趣)라는 젊은 세대의 기호에 맞는 문화공간을 탄생시켰다.1층은 차를 전시 판매하고 2층은 찻집 겸 음식점,3층은 육우다예 중심의 학습공간,4층은 천인다예문화기금회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끽다취’는 젊은층의 기호에 맞는 문화공간을 조성한 후에 차와 음식의 만남을 주제화시켜 철따라 새로운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차요리가 웰빙과 맛물리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끽다취’는 타이완, 미국, 일본 등에 속속 그 체인점이 들어서고 있다. 세계적인 차 시장의 호황과 천인·천복그룹의 성공에 힘입어 타이완 내 차농들은 대륙의 길이 열린 중국으로 속속 진출하고 있다. 타이완차는 또 우리나라에 보이차 열풍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하다. 최근 수년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국 찻자리에는 30년,50년 된 푸얼차가 빠지지 않는 진귀한 손님으로 등장했다. 푸얼차가 한국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약효가 뛰어나 건강을 지키기 때문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푸얼차는 말레이시아, 인도 등에서 부를 축적한 화교들을 대상으로 타이완의 차상인들에 의해 감비차(減肥茶:살을 빼는 차) 형식으로 교묘하게 팔려나갔다. 그 현상을 지켜본 홍콩의 차상인들은 한술 더떠 창고에 버려져 있던 푸얼차를 독과점 매매했다. 그 효과로 푸얼차 값이 오르자 차상인들이 고가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정작 푸얼차의 원산이랄 수 있는 타이완과 중국에는 수년된 푸얼차만 존재하고 있다. 얼마전 한국의 인사동을 방문한 세계적인 차학자 진현 중국 무이농대 교수는 90%가 가짜 푸얼차라고 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세계에 차를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2차세계대전 패전의 아픔을 이른바 ‘다도’로 치유했다. 일본의 다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글귀가 있다. 오카쿠라가쿠조는 그의 책 ‘차의 책’에서 “15세기경 일본은 그것을(다도) 하나의 심미적 종교인 다도로까지 드높였다. 다도는 일상생활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데 근거를 둔 일종의 의식이며 청정과 조화로써 사랑하는 선비에게 사회질서의 낭만주의를 순순히 가르쳐주는 것이다.”고 쓰고 있다.500년간 대를 이어온 센리큐 유파, 우라센케가, 오모테센가 등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차의 유파들이다. 일본은 차의 생산보다는 차의 정신을 통해 차 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2004년 12월 일본 규수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때의 다도 시연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는 숙소인 하이스칸 호텔 사쓰마야스키룸에서 우라센케 본가인 다두(茶頭:차가의 수장) 센소시쓰가(家)가 직접 시연한 다도를 보고 차를 마셨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마신 다완은 그들이 최고의 국보로 취급하고 있는 500년된 ‘이도다완’(기자이에몬)이었다.500년전 조선의 경남지역에서 생산된 이 다완은 우라센케가에서 15대 동안 써온 것으로 ‘국빈’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특별히 초빙된 것이었다. 일본 역시 차가 전래된 1200년 동안 독자적인 차문화와 제조기술을 극도로 발전시켜오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야산이 많은 일본은 다원의 60% 정도가 경사지에 조성되어 있다.85% 정도가 그들이 개발한 야부기다종이며 6만㏊에서 약 17만t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인 1인당 차 소비량은 17통정도(100g 기준)이고 생산된 녹차의 대부분은 국내에서 소비되고 있으며, 상당부분 수입에 의존할 정도로 차는 국민의 음료로 보급되어 있다. 일본 역시 차 생산원가와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중국, 호주 등에 광활한 다원과 공장을 설립 일본인 기호에 맞는 차를 생산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은 다른 곳과 다르게 녹차음료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2004년 녹차음료시장은 약 4000억엔(한화 4조원 상당)에 이를 정도로 매년 급성장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를 ‘녹차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치열한 시장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음료기업인 산토리의 이에몽은 215년의 역사를 가진 교토의 노포 후쿠주엔과 제휴해 40∼5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한 ‘주전자로 따르는 차맛’을 개발,4000만 케이스를 판매했다. 라이벌 회사격인 기린비바렛지는 여성 중심의 차 음료인 ‘생차’를 새롭게 보완해 선보였으며, 일본 코카콜라도 ‘다원 농가의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신선하고 소박한 맛’을 목표로 하고 있는 ‘처음(-)’을 개발 판매하고 있다. 일본의 또 다른 음료기업인 아사히 음료는 직장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캔에 든 전차‘를 판매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최근 녹차를 비롯한 무당차 음료가 최초로 커피를 제치고 청량음료시장의 1위를 탈환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세계적인 차 전쟁이 불붙고 있는 지금 우리 차 산업과 차 문화의 현실은 ‘걸음마 수준’이다.2005년 WTO 개방을 앞둔 우리 차는 그 생산량이 연간 2000t 정도로 미약하다.1인당 차 소비량(티백이 아닌 잎차 소비량)은 40g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한국차문화 부흥은 70년대말 응송 박영희, 효당 최범술, 명원 김미희 여사 등에 의해 개화기를 맞은 이래 눈부시게 발전해오고 있다.30년이란 짧은 시간에 500만에 육박하는 차 인구와 연간 2000억원대에 이르는 차 소비량, 다양한 차인회가 춘추전국의 차 문화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의 차문화는 우리의 전통차와 차문화를 복원하기보다는 중국과 일본차와 문화에 더욱더 관심을 쏟는 ‘사대주의적’인 발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차의 보급 그 첫 번째가 웰빙바람이고, 두 번째가 묻지마 ‘이도다완’ ‘푸얼차’ 바람이다. 최근에는 ‘묻지마’ 다예사(타이완), 심평사(중국) 열풍도 함께 불어닥치고 있다. 중국의 차는 이미 한국 내 시장을 20% 이상 점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다예사 심평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돌아온 차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실정이다. 단순히 마시는 차를 넘어 그들의 차 문화까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 차계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도 시도되고 있다. 지금 한국대학에는 다도(茶道) 바람이 불고 있다. 성균관대, 목포대, 성신여대, 한서대, 원광대 등이 대학원에 관련학과를 두고있다. 또한 청주의 서원대학교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4년제 차학과를 신설 운영할 계획이다. 뿐만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지금 중국, 인도네시아에 다원을 조성하기 위해 속속 진출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녹차품종의 개량 및 보급 그리고 세계 10대명차 반열에 들 수 있는 명차의 개발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이밖에도 인도, 스리랑카, 러시아, 인도네시아, 터키 등 동·서남아시아 지역도 주목을 해야 한다. 인도는 최대의 차 생산국인 동시에 차 수출국이다. 세계 3대명차로 꼽히는 다질링 홍차가 해발 2000m 이상의 급경사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다. 세계 차 생산량의 30%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 인도는 약20만통 정도를 수출하고 있다. 생산되는 차의 90%가 홍차인 인도는 에스테이트라고 하는 다원을 통해 효율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다.1개 에스테이트 재배면적은 대개 400∼600ha의 넓은 다원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600여개가 차를 생산하고 있다. 스리랑카 역시 약 20만ha 다원에서 세계 총생산량의 17%인 18만t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한·중·일·타이완 등 각국 차계의 최대의 관심사는 얼마나 저렴한 가격에 생찻잎을 확보하느냐에 있다. 그것은 곧 가격대비 생산원가를 통해 국내외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완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 등도 베트남에 대량의 차밭을 조성하거나 제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차 시장은 그 높은 시장성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또한 스타벅스의 성공사례인 ‘홍차라떼’ ‘녹차라떼’에 힘입어 새로운 신개척지인 서구 유럽을 향해 요동치고 있다. 타이완은 ‘대우령’을, 중국은 100g에 1000만원을 호가하는 ‘백차’와 같은 고품격 차 브랜드를 생산해 세계시장에 내보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중국의 천인·천복집단이나 일본의 산토리처럼 메이저급 기업들이 미국의 ‘스타벅스’성공에 착안, 전세계를 상대로 차 전문 체인점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차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동남아시아는 지금 차 전쟁 속으로 급속히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중국의 10대 명차처럼 세계가 주목할 만한 명차를 만들어야 할 때다. <일지암 암주>
  • 美·日·유럽 일제히 환영

    |워싱턴 이도운·도쿄 이춘규·파리 함혜리특파원 외신|세계 각국은 중국의 고정환율제 폐기 결정을 일제히 환영했다. 말레이시아도 고정환율제를 포기, 관리변동환율제를 선택하면서 중국의 뒤를 이었다.유럽 외환시장은 런던테러 소식까지 겹쳐 개장 직후 엔화가 급등하는 등 충격에 휩싸였으나 테러 규모가 소폭이라는 소식에 곧 회복세를 보였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요구해 왔던 미국의 존 스노 재무장관은 21일 발표된 성명서에서 “중국의 발표를 환영하며 새로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면밀히 관찰할 것”이라고 밝혔다.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좋은 출발”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스노 장관은 “중국의 환율체제 개편은 중국뿐만 아니라 국제금융계에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월가의 외환 전략가들은 특히 일본 엔화의 미국 달러화 대비 가치가 상당한 폭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은 중국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인상할 것이며 이날의 조치는 첫 단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리먼 브러더스 홀딩스의 대니얼 테넨고저 선임 외환전략가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외환 시장은 위안화 절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엔화의 가치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도 21일 성명을 내고 자유로운 시장에 반응할 수 있도록 환율을 유연하게 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을 높이 평가했다.BOJ는 “우리는 이번 결정이 보다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중국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국제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중국의 페그제 포기가 완전변동환율제를 향한 먼 길의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중국이 전격적으로 페그제 포기와 통화바스켓제 도입을 발표한 뒤 외환시장에서 엔과 달러 등 주요 통화들의 요동이 그리 심하지 않은 것도 이런 관측과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제 외환시장의 관심은 중국의 추가 조치 여부에 모아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홍콩 소재 JP모건의 프랭크 공 수석애널리스트는 중국이 연내 위안화를 추가로 5%가량 평가절상하지 않겠느냐고 내다봤다. 말레이시아도 이날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관리변동환율제로 전환시킨다고 밝혔다.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경제위기 극복 방안으로 고정환율제를 도입한 말레이시아의 중앙은행 제티 아키타르 아지즈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환율에 경제체력을 반영시키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럽도 일단 중국의 위안화 절상을 유익한 조치라며 적극 환영했다. 독일 재무부는 성명을 발표,“중국의 이번 조치는 보다 균형된 중국 경제의 성장은 물론 독일 경제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시장에서는 일본 엔화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엔화는 이날 오후 런던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11.33엔에 거래돼 전날의 113엔대에서 2엔 이상 환율이 하락했다. 위안화 절상으로 일본 경제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면서 엔화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금융시장은 위안화 절상을 호재로 받아들였다. 중국의 구매력이 늘어 각종 사치품을 포함, 더 많은 유럽 상품을 구매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런던 증권시장의 우량주들로 구성된 FTSE 100 지수는 위안화 절상 소식에 5256으로 치솟았다가 런던 추가 연쇄폭발 소식에 5180.2로 떨어졌다. 하지만 폭발이 소규모로 알려지자 다시 상승, 추가 연쇄 폭발 충격을 순식간에 극복했다.daw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은 대단한 기인(奇人) ‘조선왕조실록’엔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이라 불렀다. 이지함이 거처하던 곳이 토정(土亭)이었기 때문이다. 토정은 일찍이 한양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아래 굴을 팠으며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졌을 때도 토정이 만든 흙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였다(실록, 선조 수정 11년 7월1일 경술). 토정은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특히 발이 무척 컸다고 한다. 토정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고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토정은 보통 선비들과는 차림새도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짚신을 신고 죽립(竹笠)을 쓴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초립(草笠)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조랑말이라도 타고 다녀야 되는 줄로 알았고, 항시 의관을 정제했다. 고급스러운 말총으로 꾸민 큰 갓을 쓰고 가죽신을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토정은 이런 풍습을 도외시했으므로, 그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마련이었다. 담화를 나눌 때도 토정은 수수께끼나 농담을 즐겼고,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다(실록, 선조 수정 6년 5월1일 경진). 한마디로, 토정은 격식을 초월했다. 혼례를 치른 다음 날에도 의외의 행동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모처럼 새로 지은 도포를 입고 외출한 토정은 어느 다리 밑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세 명의 거지아이를 만났다. 토정은 입고 있던 새 도포를 벗어 세 폭으로 찢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일 바깥에서 일을 보았다. 토정은 이처럼 호방한 성격이었다. 도인의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 그는 열흘 정도는 굶어도 거뜬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냉수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었다. 요즘의 건강상식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다. 토정은 간혹 천리 길을 걸어 어딘가를 바람처럼 다녀오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방랑하기를 좋아해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는데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센 날을 용케 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간혹 여행 중에 기생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유혹했으나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정은 정욕마저 완전히 끊어버린 이를테면 속세의 신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설화도 그래서일까. 토정에겐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인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 한다. 명종 초년의 일이다.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아뢴 뒤 식구들을 이끌고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실록’은 토정의 예언 능력을 무척 칭찬한다. 한 번 사람을 만나보면 그 성품은 물론, 앞날의 길흉까지 환히 알아 맞혔다 한다. 토정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예언했다는 구비설화가 남아 있다. 만년에 그는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하명산 금강산에도 들렀다. 하루는 날이 기울자 토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암벽 위에 서 있는 초라한 암자를 찾아갔다. 워낙 피곤해서 제대로 자리를 펴고 누울 겨를도 없이 방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꿈속에 스님 두 분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풍과 자리를 깔며 부산을 떨었다. 토정은 스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모여 장차 다가올 난리를 의논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과연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여러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자 금강산 산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왜놈들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놈들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놀란 토정은 퍼뜩 깨어났다. 조금 전 기대어 잠을 청했던 암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암벽 위엔 한 그루 늙은 소나무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 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고, 토정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실록, 영조 30년 11월27일 임인).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돼 금산에서 북상하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사화에 얽혀 불우했던 토정 사실 토정은 국가경영에 관심이 컸다. 평상시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바꿀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평안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토정은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명종5년(1549년) 토정이 33세 되던 해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토정의 장인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했고, 연좌법에 걸린 토정은 벼슬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안명세(安名世)마저 필화를 입고 죽었다. 사관(史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명세는 명종 연간 을사사화(1545년)에 관련해 윤원형과 이기 등 소윤(小尹)이 윤임 등 대윤(大尹)을 모함해 몰살했다고 적었다. 윤원형 일파는 몰래 사초를 들여다보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제거한 것이다. 이후 토정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기인(奇人)으로 처세하게 됐다. 지지난 호에 소개한 정렴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아들이라 스스로 세상을 피했던 데 비해, 토정은 억울하게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 기벽(奇癖)을 갖게 됐다고 해야 맞다. 어찌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기가 참 쉬웠을 텐데, 토정은 절망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및 의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조헌과 이산보를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다. 조정이 토정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을사사화의 주도세력이 조정에서 물러난 선조 초년이었는데, 그 사이 토정은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사실상 초임이나 다름없는 아산군수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평생 닦아온 선비의 웅지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토정이 남긴 글은 뒷날 ‘토정유고’(2권1책)로 정리됐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주역(周易)에 관한 ‘월영도’, 풍수지리를 다룬 ‘농아집’ 등을 토정의 저술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상 ‘토정유고’에는 위에 언급한 어떤 책자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만일 실증주의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토정비결’이나 ‘토정가장결’ 등은 토정의 저술이 될 수 없다.‘토정유고’외에는 이지함의 저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후대의 위작으로 볼 것인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매력 물론 어느 쪽도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몰라도 ‘토정비결’만은 토정의 붓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의학과 점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와 운수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의 그런 요구가 많아지자 토정은 아예 한 권의 책을 지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도모했을 법도 하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르다.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비해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처럼 기발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각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것이 점을 통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점에만 의존하지 않게 유도하는 기능이 숨겨진 반점술서(反占術書)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과 같이 점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철학을 신봉한 큰선비가 남겼을 법한 저술이다. ●그럼 ‘토정가장결’은? 정리하면, 토정은 살아생전에 이미 기인, 도사 그리고 큰선비로 세상에 유명했다. 더욱이 후세에는 ‘토정비결’과 같은 명저의 지은이로 민중에게 더욱 친숙한 이름이 됐다. 그가 만일 무수한 개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나라의 운수인들 모를 까닭이 있었겠느냐는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맴돌았음이 틀림없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토정이 남긴 예언서가 어디선가 발견돼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토정가장결’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정가장결’에 앞서 ‘정감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진인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참작해 ‘토정가장결’이 쓰였다.“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토정가장결’은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의 멸망을 점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본 결과, 조선왕조의 운수를 짐작하게 됐다고 했다. 천문에 중점을 두고 예언을 했다는 점이 ‘토정가장결’의 특징이다.‘감결’을 비롯해 다른 예언서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국운을 점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천문 점의 전문가들은 서북지방에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중국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토정가장결’에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잠시 비결을 인용하겠다.“장류수(계사) 운은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침략한다. 이때 전읍(奠 , 즉 鄭姓 眞人)이 바다 섬의 군사를 이끌고 방성, 두성의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 즉시 금강을 건너면 다시 천운이 커질 것이다.(중략) 곽 장군이 요동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 및 서남 오랑캐를 무찌르며,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편들고 이씨를 공격하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니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계사년에 외침이 있는데 만일 그 때 요동의 곽 장군이 나서서 정씨를 도우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재편된다고 했다. 곽 장군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인데, 곽 장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상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 후반엔 고구려의 옛 땅이던 만주가 가난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상당수 민중들의 손길로 개발되고 있었다.‘토정가장결’에 등장하는 곽 장군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간도에 진출한 빈농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겼을 법한 가상인물이다. 셋째,‘토정가장결’은 난세의 피란지로 전혀 새로운 장소를 거론했다.“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 대소궁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정감록’은 주로 삼남 지방에 십승지 또는 길지를 설정해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상도의 풍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운봉이었다.‘토정가장결’은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요동과 삼척이란 뜻밖의 장소를 최고의 길지로 내세운다.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기서 나는 ‘토정가장결’이 출현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간도로의 ‘불법이민’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이 예언서가 창작된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삼척이 길지로 대두된 이유를 헤아려 보겠다. 토정에 관한 구전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토정은 삼척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데 거기서 스님 행색으로 위장한 왜놈 첩자를 붙들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토정이 살던 삼척에는 아예 얼씬도 못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기하게도 구전설화는 예언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거꾸로 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토정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우한 재사였다. 그래서 그는 기인이자 도사가 되기도 했고,‘토정비결’ 같은 책을 지어 고난 받는 민중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토정은 민중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돼 ‘토정가장결’의 저자로도 둔갑됐다.‘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의 변화된 사회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알 자는 알리라.” (푸른역사연구소장)
  • [시론] ‘대입정책’ 분권화로 풀어야/권대봉 고려대 교육대학원장

    [시론] ‘대입정책’ 분권화로 풀어야/권대봉 고려대 교육대학원장

    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 금지 등 대입 ‘3불(不)’정책은 문민정부 말기에 고등교육법시행령을 고쳐서 만든 것인데, 참여정부도 고수하고 있다. 당시의 대통령과 교육부장관은 모두 서울대 출신인데, 그 중 본고사 금지 조항이 작금 서울대를 대학자율권 논쟁의 중심에 세웠다. 수능과 내신의 변별력 약화를 이유로 통합형 논술카드를 내민 서울대의 입시방침이 통합형 논술준비 사교육시장을 요동치게 했다. 논술공부를 꼭 사교육에 맡겨야 하느냐는 여론이 들끓자, 서울·부산·전북교육청은 통합논술 교육을 학교에서 할 수 있도록 여름방학에 교사 연수를 실시키로 했다. 급기야 교육부는 대입논술이 본고사 수준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논술고사 심의제를 시행하고, 심의 결과가 본고사로 판정되면 행정·재정상 제재를 하기로 했다. 지난 2주간 대학입시를 비롯한 대학자율권에 대하여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이 치열하게 표출된 만큼, 이제는 냉철하게 입시정책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야 할 때다. 논술고사 파동을 계기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됐다. 한국에서 대학 입시정책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챙겨야 할 만큼 중차대한 사안임이 입증됐다. 그리고 정작 자율을 요구해야 할 사립대학은 침묵하고, 정부기관인 국립 서울대 총장과 교수평의회가 자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을 보면 공무원 신분의 교수가 민간인 신분의 교수보다 힘이 세거나 용감하다는 것도 판명됐다. 대학자율에 관한 국제적인 추세를 보면 사립대학에 대한 자율은 확대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이나 공공성을 강조하는 국가에서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대학 경영에 대한 정부의 개입도가 큰 것이 특징이다. 한국과 일본은 노르딕 국가와 더불어 정부의 개입도가 큰 국가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공통적으로 국공립 대학을 정부의 한 부서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비슷한 대학의 구조를 갖추고 있던 일본은 국립대학 법인화가 2004년도부터 시행되면서 자율권이 확대되는 추세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재정을 부담하는 도쿄대를 비롯한 구(舊)국립대학은 정부가 주관하는 대학입시센터의 시험을 요구하지만, 사립대학에는 학생선발권을 전적으로 보장한다. 사립대학은 부속학교 출신의 동일학교계열 무시험 입학, 대학이 지정한 교장 추천 입학, 대학 자체 입학시험이나 정부주관 시험 활용 등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초·중등 시절에 대학입학이 보장돼 전인교육을 받은 부속학교 출신 중에 인류사회발전에 기여한 졸업생이 더 많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학경쟁력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경우, 사립대학의 학생선발권은 전적으로 보장된다. 주립대학의 경우, 형평성 확보 차원에서 해당 주 학생을 일정 비율 이상 입학시켜야 하는 것과, 수월성 확보 차원에서 일정 성적 이상의 학생들을 입학시켜야 한다는 조건 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정부가 간섭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과 일본은 대학에 관한 한 분권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한국처럼 대입정책 때문에 나라전체가 논쟁에 휩싸이는 일이 없다. 정권이 부담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형평성과 수월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입시정책은 분권화다. 국립대는 중앙정부와, 공립대는 지방정부와 정책을 조율하고, 사립대는 자율권을 부여하는 분권화 정책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교육선진화로 가는 길이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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