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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흑인 혼혈 여가수 소냐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흑인혼혈 여가수 소냐(19·본명 김손희)에게 딱 어울린다.두달 전 내놓은 첫 음반 ‘올 베스트’가 꾸준한 인기 속에판매량 10만장을 넘어선 데 이어 최근 뮤지컬 ‘페임’의 여자 주인공 카르멘 역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저 같은 새내기에게 이런 큰 배역을 맡겨 준데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맙습니다.여고(구미 금오여고)1학년때 뮤지컬을 처음 보고는 ‘나도한번 해봤으면’했는데 꿈을 이뤄 기뻐요”. 그는 탁월한 가창력을 지니고 있다.더욱이 어려운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를 발탁한 연출가 윤호진은 그를 이렇게 말한다.“그를 다룬 신문기사를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 오디션을 가졌습니다.모든 제작진이 ‘OK’사인을 냈죠.연습을 거듭할수록 천부적인 끼와 신들림이 보여요.무대에서 더 빛을 발하는 타고난 라이브형 가수입니다”. 소냐는 하루 10시간씩 맹연습을 한다.노래 솜씨야 검증되었고 문제는 연기와 춤.“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고 있다”는 주위의칭찬에 “땀흘리며 가르쳐 주는 언니·오빠에 보답하려 최선을 다한다”고 수줍게 말한다. ‘페임’은 미국의 세계적 예술학교 학생들의 방황과 성장과정을 다룬 뮤지컬.방송과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인기있는 레퍼토리다. 소냐는 “카르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나 방황이 불우했던 제 성장기와 비슷한 점이 많아 몰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밝힌다. 주한 미군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오빠만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고 어머니마저 8세 때 숨졌다.이후 외할머니와 살았다.여고시절 방직공장에서 일했는데 이 것이 전화위복이 됐다.소음이 심한 탓에 귀마개를 끼고 작업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여고시절 교내 행사에서 노래부르는 것을본 교사들이 그의 재능을 아껴 음반제작을 도와줬다. “노래와 연기를 함께 하는 뮤지컬이 너무 재미있습니다.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제
  • 프리뷰-내일 방영 K2TV TV문학관 ‘새’

    KBS2TV ‘TV문학관’이 1년남짓만에 부활해 30일 밤 10시10분 오정희의 원작소설 ‘새’(극본 박남준 연출 장형일)를 내보낸다. 꿈은 찬란하지만 현실은 처절한 남매의 이야기이다.아빠의 매질에 못이겨달아난 엄마,돌봐주던 외할머니마저 쓰러지자 친척집을 전전하던 남매는 다시 아버지를 만나 바다가 내려보이는 달동네의 단칸 셋방으로 이사온다.그곳에서는 천박한 새엄마 등 인간군상이 남매를 기다리고 있다.살인자인 포장마차 주인 정씨,동성연애중인 여성 부부,새를 키우는 트럭운전수 이씨,밤무대에서 트럼펫을 부는 김씨와 휠체어의 아내…. 새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도 떠나지만 동심을 잃어버린 소녀는 아버지를 붙잡지 않는다.이 소녀는 동생의 엄마이자 선생님.또 동생을 의지하지만 결국 남동생마저 죽고 만다.소녀는 동생이 죽자 “새가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던 동생의 꿈을 이뤄주려 바닷가로 나가고,누나는 진짜 새가 된 동생의 환영을 만난다. 꿈이란 무엇인가.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에너지이지만 실제로 꿈을 이루기에는 현실의 벽은너무 높고 가파르다.가난과 고독,소외… 이 드라마는 원작처럼 어둡고 절망적이다.어린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세상살이의 무게를 새삼 깨닫게 한다.장수혜와 유종원의 아역연기는 화면을 생동감있게 살려낸다.또 인간군상을 연기한 할머니 김지영과 정종준,정동환,방은희도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TV드라마에서는 금기시된 남장여자로나와 동성부부의 남편역을 해낸 연운경의 몸을 던진 연기가 두드러진다. “새가 되고 싶다”는 구체화되지못한 꿈으로 버티지만 갈수록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린 남매의 삶은 꿈을 잃어버린 오늘의 어른들을 울린다.부산에서 촬영한 어두운 도시와 바다의 영상,희끄무레하게 변해가는 하늘을 담은 화면은 남매의 불행한 삶을 그들의 것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인생은 슬픔일까.주체할 수 없이 가벼운 여느 드라마와는 다르지만 너무 무겁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등신불’‘바닷가 소년’‘열녀문’‘불새’‘인간과 전장’ 등 옛 ‘TV문학관’을 연출한 장형일감독의 작품이다. 허남주기자
  • 함께사는 외할아버지도 소득공제

    ◎외할머니·외손자 함께… 올부터 100만원씩/퇴직전 저리 대출금 이자차액 비과세로 외조부모와 외손자녀도 함께 살면 올해 연말정산부터 소득세 기본공제대상에 포함돼 내년 1월에 1인당 100만원씩을 소득공제 받는다. 시대변화에 따라 공제대상을 모계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국세청은 21일 처음으로 민간인이 포함된 법령심사협의회를 열어 이같은 내용의 예규개선내용을 확정,시행에 들어간다. 근로소득자나 사업소득자의 소득세 기본공제대상에 지금까지는 부모,조부모,증조부모,자녀,손자녀,증손자녀등 직계존비속만 포함시켰으나 앞으로는 생계를 함께 하는 외조부모와 외손자녀까지 인정해 준다. 외조부모가 65세이상이거나 외손자녀가 6세이하인 경우에는 1인당 50만원씩의 추가공제를 받을 수 있다. 또 외조부모나 외손자녀에 대한 의료비,보험료,교육비에 대해서도 공제혜택을 받는다. 기업의 고용조정으로 종업원이 재직당시 무상 또는 저리로 자금을 대여받은뒤 퇴직했을 경우 일반금리와 실제 대여금리 차이 상당액은 기타소득으로 간주된다. 기타소득으로 간주되면 무주택종업원이 2,000만원이하를 대여받았을 경우 이자차액은 비과세되며,기타소득 금액이 연간 300만원이하인 경우에는 분리과세와 종합과세 중 선택할 수 있다. 수출업자가 수출선수금을 받아 수출하기 이전까지의 이자상당액을 물품으로 지급할 경우에는 이를 이자로 보지 않고 매출에누리(할인)로 간주,이자소득세를 매기지 않는다. 또 제조업체가 임가공업체에게 공정개선,첨단설비,노후시설개체 등의 생산성 향상시설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한 뒤 생산량을 모두 납품받았을 경우 투자액의 5%를 법인세에서 공제해준다. 국세청은 이번에 법령심사협의회에 공인회계사 강성원,김익래씨와 변호사 최선집씨 등 3명을 추가로 임명해 기존 예규를 바꾸거나 새로운 세무처리기준을 정하도록 했다.
  • “고아되기 싫어요” 엄마 시신과 열흘/부천 초등4년생 홀로 생활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정상 학교생활/엄마는 자살 추정… 아버지 5년전 가출 한 초등학교 어린이가 숨진 엄마 곁에서 10일 남짓 홀로 살아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25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4동 H마을 ○○○동 ○○○호 金경희씨(35·여)집 안방에서 金씨가 숨져 있는 것을 동생 동일씨(31)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동생 金씨는 “며칠동안 연락이 끊겨 집을 찾아가 보니 누나가 안방에서 심하게 부패된 채 숨져 누워 있었다”고 말했다. 27일 부천 중부경찰서에 따르면 金씨는 5년전인 지난 93년 남편이 집을 나간 뒤 아들 金 모군(B초등학교 4년)과 함께 살아 왔으며 평소 만성 질병을 앓아 약을 복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 金군은 경찰 조사에서 “엄마가 죽은 뒤 아침은 굶었지만 점심과 저녁은 학교급식이나 엄마 지갑에 있던 돈으로 라면을 사 먹으며 지냈다”고 말했다. 金군은 또 “아버지는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데다 엄마마저 죽어 혼자됐다는 게 무서워 주위에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金군은 “집에 돌아오면엄마가 숨져 누워있는 방을 피해 작은 방에서 지내 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 16일 학교 운동회 날 엄마 지갑에서 몰래 1,000원을 꺼내 라면을 사 먹은 뒤 엄마로부터 ‘너 때문에 못살겠다’는 등의 꾸지람을 들었다”는 金군의 말에 따라 金씨가 생활고를 비관,지난 16일밤이나 17일쯤 홧김에 음독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숨진 金씨와 아들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월 5만원의 영세민 지원금으로 방이 두개인 12평짜리 시영아파트에서 살아 왔다. 金군은 27일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뒤 인근에 사는 외할머니 집에 맡겨 졌다.
  • 손가락 절단 姜군 어머니 나타났다/“내가 키우겠다” 제의

    보험금을 노린 아버지에게 손가락이 잘린 姜政佑군(10)이 입원한지 2주일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던 姜군의 어머니가 14,15일 이틀간 姜군이 입원한 병원과 초등학교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姜군의 고모(39)는 姜군의 어머니(37)가 14일 밤 姜군이 입원한 마산삼성병원으로 찾아와 아들의 안부를 묻고 양육문제를 의논했다고 말했다. 또 15일 상오에는 교방초등학교를 방문,교장에게 아들을 자신이 키우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姜군의 외가친척들은 이날 姜군의 양육문제에 대해 회의를 한 끝에 외할머니 金모씨(71)가 키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편 金大中 대통령이 위로금을 전달한 것을 비롯해 자민련 朴泰俊 총재, 金正吉 행정자치부장관 등이 마산시장을 통해 금일봉을 전달했으며 교방동사무소 모금함에도 이틀동안 140여만원이 모이는 등 姜군 돕기 성금으로 모두 1,440여만원이 모아졌다.
  • 또또와 유령친구들·뮬란/초등학교 방학맞춰 17일 동시개봉

    ◎여름童心을 뺏어봐!/또또와 유령친구들­개구장이 꼬마 악령 퇴치소동 귀여운 캐릭터 뛰어난 색감 볼만/뮬란­남장하고 戰場에 흉노족 무찔러 동양미 내세운 디즈니 애니메이션 초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는 오는 17일 만화영화 두편이 나란히 전국 극장가에 오른다. 국산 애니메이션 ‘또또와 유령친구들’과,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디즈니의 작품 ‘뮬란’이 그것. 외형으로야 ‘또또…’와 ‘뮬란’을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는 둘다 장단점이 있어 선택하는 데 참고로 삼을 만하다. ‘또또…’는 한국의 프러스원애니메이션(대표 이춘만)과 대만의 라이스필름이 5대5 합작으로 22억원을 들여 만들었다. 한국측은 그동안 애니메이션 하청작업으로 닦은 노하우를 실현하고,대만측에서는 세계적인 배급망을 활용키로 해 손을 잡은 야심작이다. 7살 소년 또또는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외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할머니는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전령사다. 또또가 영혼단지를 깨뜨리는 바람에 악령이 되살아나 착한 유령들을 잡아먹자 또또가 할머니를 도와 악령을 물리치고 유령친구들을 천국으로 보낸다는 줄거리. 가족사랑과 모험심·용기라는,어린이에게 필요한 가치를 무난하게 살려냈다. 또또와 할머니 말고도 개·고양이·뱀·고래들을 활용한 캐릭터가 다양하고,섬세한 그림과 예쁜 색조 등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보통 만화영화 한편에서 쓰는 동화(動畵)의 2배인 10만장을 사용한 결과이다. 다만 세계시장을 노려서인지 인물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에서 한국적인 정서가 옅은 점이 눈에 거슬린다. ‘토론토 필름 페스티벌’에 이미 초청받았고 미주지역과의 수출상담이 활발하다. ‘뮬란’은 디즈니사가 동양적인 소재로 만든 첫 애니메이션이다. 옛 중국에 북방민족인 흉노가 침입한다. 전국에 징집령이 내려 파씨 집안에서도 늙고 병든 뮬란의 아버지가 전장에 나가야 한다. 외동딸인 뮬란은 남장을 하고 아버지 대신 출정해 흉노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황실에까지 잠입한 흉노족의 손에서 황제를 구한다. 1억달러의 제작비에 디즈니의 기술력을 맘껏과시한 작품인만큼 영상·음악·구성 등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 ‘동양적인 사고’를 해석한 시각도 무난하다. 그러나 ‘치명적’일 수 있는 약점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어려워 보인다는 점이다. 최근 있은 관계자 가족시사회에서도 어른들은 재미있어 한 반면 아이들은 대개 시큰둥해 했다. 디즈니가 성인 취향을 가미해 만든 ‘포카혼타스’ ‘노틀담의 꼽추’‘헤라클레스’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한 것과 통하는 바로 그 요인이다.
  • 서울 김백진씨네 생활비 아끼기 자린고비 百態

    ◎절약과 환경보호 한꺼번에 해결/20년된 전자레인지 160㎖ 냉장고 사용/빨래세제는 표시량의 반만으로 충분/에어컨 덜쓰고 겨울철엔 옷 두둑히 서울 영등포구 신길4동 20평 남짓한 김백진씨(29·고시준비)네는 골동품상 저리가라다.김씨네 냉장고는 대우 로얄 원투쓰리.이름이 기억속에 가물가물한 이 모델 160㎖ 짜리를 김씨네는 15년째 쓰고 있다.김장철 3차원 테트리스 하듯 그릇 포개는데 절묘해져야 하는 점 빼곤 여느 신형 특대형 못잖게 반찬거리들을 시원하고 싱싱하게 지켜준다. 터줏대감은 냉장고만이 아니다.20년된 전자레인지,고물상도 주워가지 않을 냄비들….모두 손때 듬뿍 묻고 미운정 고운정 들어 쫓아낼 수 없는 한 식구가 됐다. 지난해말 IMF한파가 닥쳐오자 주변에선 살림살이 허리띠를 졸라맨다며 끙끙댔다.하지만 외할머니,어머니 등 세식구 김씨네 살림엔 따로이 경계령이 필요없었다.궂으나 개나 자투리없이 사는게 체질화돼 왔기 때문. “원래 어머니 세대는 다 그랬잖아요.6·25 겪고 개발시대 거치며 뭐든 아끼는게 당연했죠.저도 그런 우리 어머니에게 적극 동감 되더라구요” 미용실을 하는 어머니 채향연씨(55) 수입이 전부인 이 집 가계는 넉넉한 편은 아니다.하지만 살림이 빠듯하지 않았어도 IMF가 없었어도,김씨는 불필요한 소비를 몰랐을 터다.절약은 환경보호와 직결된다고 믿기 때문. “빨래할 때 세제는 표시량의 반만 쓰면 돼요.세제회사의 뻥튀기대로 따르다간 국토는 세제와 샴푸거품 범벅이 된답니다.치약은 칫솔위 5㎜정도만 짜면 충분해요.머리 헹굴땐 린스 대신 무공해 식초를 쓰지요” 얼마전 김씨는 이 집 알뜰살이 정보를 모아 ‘누구나 가능한 생활비 절약방법’이란 글을 PC통신에 올렸다.변기 물탱크에 1.5ℓ짜리 물 채운 페트병을 넣으면 수도요금이 절약된다거나 재활용 표시된 종이는 꼭 모아두라는 등은 기본. △목욕할 때 바가지로 퍼붓는 것보다 샤워기쪽이 훨씬 절수된다.단 비누칠 등으로 사용하지 않을땐 꼭 잠글것. △거실 전구는 백열등보다 형광등,그보다는 장미전구가 전기를 덜 잡아먹는다.전구 6개 달린 우리집 등은 신문보거나 세금계산때는 5개,TV 볼때는 2개 켜지고 밤 영화 볼 때는 부엌불만 켜고 다 끈다.간접조명은 눈의 피로도 덜어준다. △이기적인 에어컨을 쓰지말자.집안 온도 낮추는데 든 에너지(열)는 환풍기를 통해나가 바깥온도를 크게 올린다.전기,석유도 엄청 잡아먹는다. △겨울은 추운게 정상.실내에서 추우면 불을 때기전에 스웨터까지 옷을 껴입으라.난방비 절약뿐 아니라 가스와 석유를 덜 쓰는만큼 지구는 숨을 쉰다 등. 절약과 환경보호를 함께 아우른 이 글은 많은 조회수를 보였고 통신상의 다른 방에서 퍼가는 인기를 끌었다.
  • KAL기 추락 참사­부상자 후송 병원 주변

    ◎기적의 생환… “너 정말 살았구나”/1차 8명 도착/가슴 졸인 가족들 얼굴 확인하고 안심/의료진 “쇼크 커 정신과 치료 병행” 8일 새벽 서울에 도착,한강성심병원 등 4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 부상자 8명은 1차 검진결과 부상 상태가 예상보다는 심하지 않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의료진은 그러나 이들의 외상보다는 사고에 따른 쇼크를 더 걱정하면서 정신과적 치료를 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생존 소식에도 불구하고 줄곧 ‘혹시나’하며 가슴을 조렸던 가족들은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동행자들의 참변을 떠올리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삼성의료원으로 옮겨진 고 홍성현 KBS 보도국장의 둘째딸 화경양(15)은 응급실 침대로 내려놓는 순간 “머리가 아파요”라고 비명을 지르고 상처를 소독할 때도 엉엉 울며 통증을 하소연,의료진들을 안타깝게 했다.사고 여객기에 탑승했던 홍국장의 일가족 5명 가운데 생존자는 부인 이재남씨(43)와 화경양 등 2명뿐이다. 병원측은 “홍양이 머리가 찢어지고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으나 비교적 가벼운 부상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앰뷸런스에 동승했던 응급의학과 전문의 송형곤씨는 “화경양은 사고 당시 졸고 있다가 거의 다 도착했다고 생각할 즈음 꽝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 깨어보니 다리가 부서진 비행기 조각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화경양은 외과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병원측은 2차로 송환될 어머니 이씨를 바로 옆방에 입원시킬 예정이다.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송윤호씨(28·서울 마포구 마포동)는 어머니 이홍영씨(55·경북 상주시)가 “윤호야,엄마 여기있다”고 외치자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렸다. 송씨는 얼굴과 다리에 심한 열상을 입었으나 실명의 위험은 없다고 의료진은 밝혔다.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여승무원 오상희씨(24·서울 강남구 역삼2동)와 김지영양(12·서울 강남구 도곡동)은 끔찍한 악몽을 떨쳐버리려는듯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김양의 외할머니 등 친척들은 “탑승객중 동명이인이 있어 끝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면서 김양의 얼굴을 확인하고야 안도했다.
  • 함북 무산읍 외곽마을(김정일의 북한:2)

    ◎농약 절대부족… 농작물 ‘해충털기 운동’/옥수수 다락밭엔 ‘속도전 앞으로’ 푯말만/공장 가동중단 붉은빛 녹슨기계 그대로 북한과 접경한 중국쪽 숭선진 고성리마을은 북한의 무산시 외곽 삼장리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지호지간에 위치하고 있다.지난 10일 하오 1시쯤 고성리 강변엔 일군의 조선족이 모여앉아 물맑은 장백산백 원류에서 잡아왔다는 산천어로 어죽을 끓여 회식을 하고 있었다.불원천리하고 찾아온 길이라 우리 일행은 술과 밥을 대접을 받으며 북한쪽 사정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들을수 있었다. ○성공한 개혁­실패한 수구 북한주민들의 살림살이는 목불인견이라며 얼마나 견딜수 있을지 동족으로서 걱정이 태산이란다.강변에 놓여진 한켤레 운동화는 북한제로 밤새 탈북한 북한주민이 버리고 간 것이 분명하다고 일러준다.이켠의 강가엔 조선족 아이들이 물장구치며 노느라고 여념이 없는데,저켠 북한쪽에선 유랑민인듯 행색이 초라한 일가가 미루나무 그늘에서 포식을 하고 있는 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성공한 개혁·개방과 실패한수구·쇄국정책의 극명한 대비를 실감케하는 접경지의 진면목이다. 고성리를 떠나올때 동행을 간청한 세사람의 조선족이 있었다.모녀와 그 어머니의 친정 조카딸이다.이모와 조카딸은 숭선을 떠나 모스크바에 돈벌러 가기 위함이고 11살짜리 딸아이는 외할머니댁에 맡기기 위한 출행이란다.딸아이의 아버지는 북한 무산읍에 나가 접경무역에 종사하고 있어 이 무남독녀를 돌보아줄 틈이 없다는 것이다. 외가마을에 먼저 내린 딸아이는 그때까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어머니는 아이가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이역만리 모스크바에서 한밑천 잡아 한국행 수속비를 만들기 위한 고행의 출발임을 어머니는 전해준다.겨울이면 강이 얼어붙어 남편과 지면이 있는 북한주민이 자기집에 와 식량이며 옷가지를 얻어간다기에 그만큼 살만한데,왜 모스크바까지 고생하러 가느냐고 묻자 사람이 먹고만 사느냐고 잘라 말한다.개방의 물결은 이곳 접경 벽지마을까지 깊이 침투하고 있다는 증좌다.의식주 다음엔 아이들 교육이고,그리고 문화생활이던가.중국의 조선족은 분명 개발도상기의 가치관을 듬뿍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연변대학 동북아정치연구소의 조선족연구원이 밝히는 북한실상은 가히 충격적이다.물자부족의 실례로 농작물의 모종을 배양하기 위해 비닐을 덮어씌어야 하는데,비닐이 절대부족해 하루하루 고랑을 바꿔가면서 모종을 덮어주는가 하면,해충이 극성을 부리나 방제할 농약이 없어 농민들이 일일이 농작물의 해충털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한다는 것이다.더욱이 수년간의 자연재해로 흉작에다 다락밭 조성으로 산림의 황폐화와 지력소모가 극심하여 금년에는 홍수나 가뭄이 아니더라도 소출은 기대하기 어렵고,산업활동이 마비상태인지라 적절한 비료공급조차 되지 않아 흉작은 정해진 이치란다. 이같은 절박한 사정을 국제기구나 민간단체에 긴급히 호소하고 북한실상을 직접 객관적으로 조사케 하여 인도적 차원의 위기상황 타개책 마련에 적극 나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한여름이면 초근목피도 독이 오르고 질겨서 식용할 수 없게 되니 그 기아의 고통은 이루 형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료 공급안돼 흉작 반복 중국 연길시에서 중국과 합작회사 사장으로 있는 온성군 군수출신의 한 북한인사는 중앙정부의 식량배급에 지친 나머지 온성이 화급히 필요한 200t정도의 곡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나는 중국인들마다 ‘200t,200t’하고 애걸하며 동분서주한다는 일화를 소개해준다. 연구원은 결론적으로 북한의 살길은 중국의 선례처럼 과감한 개혁·개방정책외에 대안은 없다고 말하면서,그런데도 북한 지도층과 당국은 북한의 경제난이 미 제국주의자와 남조선의 경제봉쇄에 기인한다고 선전하며 주민을 통제하는 구태의연한 수법을 행사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일침을 놓는다.그는 또 한국정부가 중국의 대북한 개방권유를 지원하고 그같은 분위기의 조성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는 점을 덧붙인다.중국과 북한 사이를 이간시켜 한국측이 득볼게 없다는 사실이다.한·중 수교후 중국과 북한간의 미묘한 냉각기류를 한국측이 계속 조성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오히려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복원시키는데 일조하여,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의 물결이 북한쪽으로 유입케 하는 것이 현명한 외교정책이라는 조언도 제시한다. 중국 용정시에서 대외경제합작국의 책임자인 조선족 이모국장은 수년전만해도 경제합작사업 관계로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측 파트너인 고급관리들이 양담배를 수두룩하게 내놓으며 과시하고 음식대접도 융숭하게 했는데,작년과 금년 두차례에 걸쳐 방문해보니 양담배는 고사하고 조악한 북한산 담배조차도 옆구리가 터져 침을 발라가면서 피우는 지경이며,중국에서 자신들이 먹을 음식이며 술,그리고 안주감으로 소세지까지 휴대하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개방물결 북 유입 돼야” 북한의 혜산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중국의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 지난 8일 상오내내 혜산 주민들의 동태를 조망할 수 있었다.이날은 바로 김일성주석의 3주기일이다.강폭이라야 좁은데는 20m도 채 되지 않은 곳이니 육안으로도 혜산을 속속들이 볼수 있는 입지이다. 상오 10시,추모행사를 마친 수만명의 인파가 대오도 정연히 ‘배움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포착된다.배는 곯아도 가슴 가득 숭배의 염을 안고가는 북한 주민들을 바라보며 착잡한 심정 금하기 어렵다.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의 한단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사로 잡힌다. ○“북의 빈궁은 자업자득” 주택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공장들은 지붕조차 없이 내부가 하늘과 맞닿았고,기계들은 녹슬어 붉은 빛이 완연하다.해발 200∼300m의 산정상까지 옥수수를 심은 다락밭이 펼쳐진 가운데 대문자의 ‘속도전 앞으로’라는 푯말이 우뚝 서 있다.무엇을 위한 속도전인가.다락밭 조성을 위한 속도전이라면 기아상태로 돌입하기 위한 속도전일 것이며,해방전쟁 승리를 위한 속도전이라면 남한에까지 기아를 수출하기 위한 속도전일 것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상당수 조선족의 후예들은 북한의 빈궁이 결국은 자업자득이라는 비판과 함께 동쪽에 대한 연민을 함께 가지는 애증의 갈등현상을 거의 공통적으로 가지는 듯했다.
  • 농산물이 제값 받으려면/박상우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굄돌)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농산물도 모자라면 값이 오르고 많으면 값이 떨어지지만 공산품처럼 가격에 따라 생산량을 줄이거나 늘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간혹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김장철 배추가 풍년이면 값이 형편없다가도 섣달 초 강추위가 이삼일만 계속되면 배추값이 금값이 되기도 한다. 올해는 연초부터 산지 소값이 크게 떨어져 축산농가의 시름이 크다.한우는 작년 이맘때 큰소(500㎏)한마리에 320만원 갔지만 지금은 100만원이나 떨어졌고 젖소는 거의 반값이 되어 가격하락을 막으려고 정부가 소 수매에 나섰다.그런데 정육점 쇠고기가격은 그대로이니 소비자들도 유통체계가 문제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동안 도시에는 도매시장과 물류센터가 건설되고 농촌에는 여러가지 산지유통시설이 들어섰지만 복잡한 유통경로나 구태의연한 거래관행이 아직 남아 있다.수입쇠고기가 한우로 둔갑하고 중국산이 토산품으로 버젓이 팔리는 풍토에선 아무리 품질 좋은 신토불이 농산물이라도 제값을 받기 어렵다. 썩거나변질되기 쉬운 특성을 가진 농산물이 홍수출하되면 높은 값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 연구원에서는 품목별로 수급과 가격을 예측하는 관측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정부 힘으로 가격을 안정시킬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따라서 정부도 물류가 잘 되도록 스스로도 생산과 출하를 조정하고 적극적으로 소비자 기호와 시장에 대응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작년에 전북의 한 농업인이 「다마금」이라는 쌀을 퇴비만으로 농사지어 20㎏들이 포장으로 보통 쌀의 세배에 가까운 1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외할머니 떡도 싸고 맛있어야 사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농산물이 제값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생산자와 유통인의 노력이 더욱 필요한 때다.
  • 작년3월 어둠 뚫고 두만강 건너 북경도착/두가족 탈출­귀순 경로

    ◎대사관서 망명 거부해 10개월간 유랑생활/조선족 도움으로 밀항선 타 서해서 구조돼 김영진·유송일씨 가족은 각각 지난해 3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간 뒤 10개월여동안의 유랑생활을 거쳐 지난 22일 꿈에 그리던 남한 땅을 밟을수 있었다.이들은 모두 현지 조선족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두 가족은 귀순때까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김씨 일가의 탈북 장정은 지난해 3월19일 고향인 평남 문덕군을 떠나 국경에서 가까운 함북 무산 외할머니댁으로 가면서 시작됐다.기회를 엿보다 24일 상오 3시30분쯤 어둠을 뚫고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땅에 발을 디딘 이들의 목표는 오직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이었다.망명신청을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생활비 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못했던 이들은 주로 조선족 집들을 전전하며 반 구걸 생활을 했다. 갖은 고생 끝에 5월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대사관측은 외교문제 때문에 망명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날품팔이와 식당잡부,벌목공 등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기회를 엿보던 중 현지 조선족이 소개한 「박사장」의 도움으로 지난 1월21일 밀항선을 탈 수 있었다. 유씨는 어머니 이의순씨(65)와 부인 이영순씨(39) 등 가족 5명을 이끌고 김씨 가족보다 보름 가량 이른 3월4일 함북 청진을 떠났다. 24년간 군에서 복무했던 유씨는 군복차림에 제대증명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원들의 감시 눈길을 피해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얼어붙은 두만강을 걸어서 건넌 뒤 곧장 중국 심양으로 향했다. 심양에서 조선족 동포들의 집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하던 유씨도 북경의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유씨는 북경역 앞에서 앞으로의 거취를 놓고 부인과 심하게 다퉜고 부인은 그 길로 헤어져 돌아오지 않았다.6월23일에는 어머니마저 힘든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가족들을 잃고 체념상태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유씨에게 지난 7일 그동안 도움을 주던 조선족 동포가 찾아와 중국 청도에서 21일 밤 남한행 밀항선이 출발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한 배에 탄 김씨 가족과 유씨 가족 8명은 강풍과 파도속에서 항해를 계속한 끝에 다음날 낮 인천 서남방 75마일 격렬비열도 해상에서 한국 해경정에 의해 구조됐다.두 가족의 10개월간의 대탈주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두 가족 탈출경로

    ◎김씨,남한방송 듣고 “자유세계 품으로” 꿈 착실히 키워/지난해 3월 자식들엔 숨긴채 국경부근 장모댁 이동/24일 새벽녘 도강성공→조선족 보호 받으려 은신생활 22일 귀순한 북한주민 두가족 가운데 김영진씨(50)가족은 지난해 3월 북한을 탈출,중국에 머무르면서 10월에는 둘째아들 해광군(13)이 일가족의 북한 탈출기를 담은 일기를 MBC에 보내 방송됐던 것으로 밝혀졌다.유송일씨(46)가족과는 중국에서 만나 행동을 같이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MBC에 보도된 해광군의 일기를 토대로 김씨 가족의 탈출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김씨 일가족이 고향인 평남 문덕군을 떠나 부인 김찬옥씨(46)의 어머니가 사는 함북 무산군으로 향한 것은 지난 96년 3월19일이었다.김씨는 남한의 방송을 들어오면서 자유세계의 꿈을 키워왔다.식량난으로 집까지 팔아치운 처지에 드디어 탈북키로 하고 국경 부근에 있는 장모의 집으로 떠났다.아내의 양해는 얻어냈지만 해룡(16),해광(13) 두 아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두 아들은 외할머니가 있는 무산에 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김씨 가족은 아이들이 배고파 우는 소리등으로 아수라장인 기차안에서 꼬박 이틀동안 부대꼈다.해광군은 기차안에서 굶주림에 시달린 한 청년이 기차에 누워있다 숨을 거두자 충격을 받았다.사람 죽는 것을 처음 봤다. 3월 21일 무산역에 도착한 김씨 가족을 장모는 반갑지 않은 기색으로 맞이했다.배는 곯지 않겠지 하는 기대감에 찾아갔지만 외가의 사정도 별로 다를바 없었다.해광군은 잠결에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로 끼니를 때우는데 너희들까지 왔으니 걱정거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실망감 밖에 들지 않았다. 김씨는 탈출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국경까지 왔지만 정작 국경에서 결심이 서지 않았다.그러나 배고픔에 울먹이는 아들들을 생각하곤 마음을 다잡아먹었다.김씨는 두 아들에게 『이제 살길은 남조선으로 가는 것 뿐』이라며 『그래야 너희들도 공부를 할 수 있고 배불리 먹을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해광군은 아버지가 나라를 배반하자고 국경 부근으로 우리를 데리고온 나쁜 사람으로 생각됐다.해룡군도 아버지의 설득에 맞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지도자 김정일 선생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어머니 김찬옥씨도 아들들을 설득했다.두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따르기로 했다. 김씨 가족은 23일 밤 10시부터 두만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두만강기슭에 가까이 접근했다.상오 2시까지 은밀히 정찰을 하면서 보초병과 조명 등의 움직임을 살폈다.조각달도 지고 캄캄한 야밤이었다.살아도 두 아들을 먼저 살리겠다며 김씨는 두 아들을 흰포대로 위장해 포복으로 강을 건넜다.도강에 성공,중국땅을 밟은 것은 24일 새벽 3시30분이었다. 중국국경 부근에 사는 조선족 부부가 경계심을 표하는 김씨 가족을 환대했다.해광군에게 중국땅은 먹을 것도 많고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학교에 다니는 등 놀라움 투성이었다.더욱이 남조선이 아주 잘 살고 자유가 있으며 자기의 희망을 마음껏 꽃피울 수있는 지상낙원이라는 것을 듣고 더욱 놀랐다.한국으로 빨리 가서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 조국통일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이 해광군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 김영진씨 둘째아들 해광군의 탈북기­우리가족 로정의 일기 전문:Ⅱ

    ◎“남행이 살길” 언제나 북서 알까요/외할머니 찾아가니 “끼니 걱정 돋우려 왔구나”/“쥐약 먹고 죽겠다”던 이모님 살고나 계신지 ◇1996년 3월 29일 금요일 (맑음) 이날도 역시 갈데가 없어 사정하여 이집에서 하루 더 묶게 되었다. ◇1996년 3월 30일 토요일 (약간흐림) 이날도 한국사람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잠자리와 거처할 집이 없어서 기차역전에서 하룻밤 지내었다. ◇1996년 3월 31일 일요일 (맑음) 아침 일찍 우리 일행은 또다시 한국사람을 찾으러 나섰다.또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어느 과수원 초막에서 하루 잠을 잤다. ◇1996년 4월 1일 월요일 (맑음) 오늘도 백산호텔에 한국사람이 많이 온다기에 백산호텔 앞에서 3시간 가량 있다가 수사 경찰이 다니기 때문에 위험해서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 일행은 걷고 또걸어 하오3시가 되어도 점심도 먹지 못한채 우리는 흥안향 흥안촌에 들어섰다. 우리 일행은 초두부집에 들어섰다.초두부집에서는 각종음식을 다하였다.우리는 밤과 초두부를 청하여 편안하게 식사를 나누고 식당에서 나와 한동안 밖에서 가족끼리 토론하였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저녁이 되었다.저녁이 되어서 어머니는 잠자리를 찾느라 서둘렀다.초두부집 주인이 퍽 마음이 후하여 우리를 보고 북조선에서 왔다고 하면서 초두부집 아주머니가 들어와 여기서 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초두부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면서 마음속으로 동정하는 것을 보았을때 마치 고향의 이모 생각이 그리워지며 친이모와 같은 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1996년 4월 2일 화요일 (흐림) 하루밤 푹 자고 난 우리 일행은 또다시 기약없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때 초두부집 주인장이 들어와 북조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시며 친척에 어디에 있는가.(없다).돈은 얼마나 있는가(15원 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12월에 북조선에 갔다왔다고 하면서 실정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온가족이 목숨을 내걸고 외국땅에 아이들까지 왔는가 하면서 우리를 크게 고무하고 동정하였다. 이때 우리 가족은 근심어린 심정으로 있으니 식당주인이 우리 심정을 알고 절대 시름놓고 살라고 목숨을 내걸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니 살아야 한다고 하며 이제부터는 근심을 말라고 다시한번 위로의 힘을 주었다.그러면서 살아갈 방도를 같이 찾아보자고 하였다.이때 나의 마음은 북한에 있는 나의 할머니도 몇년 있다 만나는 손자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는데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집 주인이 우리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여기고 몹시 가슴아파 하는가.진정으로 친혈육으로 맞이하여 주는가? 왜 북한에서는 친혈육도 모르게 되는가? 또한 기차간에서 숨지고 있는 그 청년보고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주려고 하지 않는가.이 두 현실도 무엇때문에 너무도 판이하게 차이 나는가? ◇1996년 4월 3일 수요일 (약간흐림) 우리 가족은 이틀동안 북조선에서 맛보지 못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북한실정 나의 다정한 동무들이 지금 굶주려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것이 눈앞에서 선히 떠올랐다. ◇1996년 4월 4일 목요일 맑음 나는 아침밥을 푸짐히 먹고나서 또 북한 생각뿐이었다.우리 떠나올때 옆에살던 이모네 집에서 요즘 어떻게 하루하루 살고 있는지? 너무 먹을것이 없어 온가족이 쥐약을 먹고 죽자고 하는 것을 물을 먹고 살어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고무하여 주고 떠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된다. ◇1996년 4월 5일 금요일 (맑음) 초두부집 주인을 만난때로부터 벌써 5일이 지났다.오늘도 역시 우리 가족은 하는것 없이 대접을 잘 받았다. 먹지 못했다가 잘 먹어서인지 설사를 만나 약까지 쓰면서 대접을 받았다. ◇1996년 4월 6일 토요일 (갬) 나는 설사치료로 하여 밥을 먹지 않았다.먹고싶은 고깃국과 이밥을 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집에 누워 치료를 받았다.누워서 북한에 있는 모든 어린이들이 잘먹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또 생각해 보았다. ◇1996년 4월 7일 일요일 (맑음) 주인님은 오늘은 일요일인데 시내에 구경을 가자고 하시었다.나는 너무좋아 어쩔바를 몰라 기쁨을 감출수 없었다. 연길시 백화상점 시장거리 모든것은 눈이 모자라 못볼 정도였다.가계에는 전기용 가마며,전자계산기 등 수없이 많은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북조선에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이 없어 살수 없는데 여기에는 정말 없는 것이라는건 찾아볼래야 찾아볼수가 없었다. 나는 북조선에서 텔레비전을 볼때마다 세계에서 제일 잘살고 살기좋은 나라는 북조선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와 내눈으로 직접 보니까 현실과 너무나도 차이가 엄청나게 있었다. 식당주인이 말하기를 남조선은 중국보다 훨씬 더 경제가 발전하고 공업이 발전하여 세계 아세아의 4번째에 손꼽힌다고 하기에 나는 실지 그렇다면 한국에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1996년 4월 8일 월요일(약간흐림) 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나도 모르게 어제 일요일 하루 시내구경을 갔던 생각이 떠오르던 나머지 자꾸자꾸 떠오른 것이 아버지께서 떠나오실때 북조선과 남조선을 러무도차이가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우리 일행은 꼭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국으로 가 희망으로 나래를 떨치고 싶다. ◇1996년 4월 9일 화요일 맑음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은 무조건한국으로 갈 욕망이라고 말하니 주인님께서는 한국으로 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고 하면서 천천히 방도를 구해보자고 하시었다. 정말로 한국으로 가기 힘들단 말인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1996년 4월 10일 수요일 (비) 이날은 비가오니 우리 5식구만 집에있게되었다. 창밖의 비가 내리니 쓸쓸한 기분으로 우리 가정이 걸어온 노정에 대해 더듬어보게 되었다.내가 떠나올때 정다운 동무들과 이별할때 우리는 식량구하러 함북도 무산군으로 간다고 하며 헤어지던 일이 오늘도 나의 눈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나는 중국에 와서 고마운 분을 만나 생일을 매일같이 맞다시피 하는데 북조선의 나의 동무,○○ ○○ 지금 먹을 것을 제대로 먹고 학교에 다니는지 아 그립구나. ◇1996년 4월 11일 목요일 (맑음) 유달리 날씨는 화창하고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이 해도 나만이 비치는듯 싶었다.나는 해를 보며 해는 하나이지만 무엇때문에 북조선어린이들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려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용사로운 품인가? ◇1996년 4월 12일 금요일 (맑음) 이날은 우리형님이 강가로 놀러나가자고 하여 우리3형제는 강가로 향했다. 강가로 나가는 우리의 마음을 기뻤다. 강가의 나무들도 우리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우리 3형제는 강변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이때 형님이 민들레꽃 한송이를 뜯으며 북한에서는 이 민들레꽃이 피기도전에 다 뜯어먹는다고 하였다.나는 형님의 말을 들을때마다 북조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1996년 4월 13일 토요일 (흐림) 아버지 어머니는 오늘도 한국사람을 만나러 시내갔다가 끝내 한국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996년 4월 14일 일요일 (맑음) 집주인은 우리들 거처를 찾자고 안도현으로 갔다고 하였다.우리는 한국을 못가고 안도현으로 가면 장차문제는 어떻게 되겠는가고 생각하였다.몹시 근심속에 하루를 보냈다. ◇1996년 4월 15일 월요일 (맑음) 이날은 내가 이국땅 중국에 왔지만 북조선 생각이 간절하다.왜냐하면 이날은 어버이 수령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라북조선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이날은 어린이들이 소망이 풀리는 날이다.왜냐하면 1년동안 먹어보지못한 사탕,과자를 먹어보기 때문이다. 나의 동무들에게도 차례가 가겠지. 동무들아.오늘은 너희들도 기쁘겠구나. 내눈에 선하다. 금철이 성국이 너희들은 지금 사탕과자를 먹으며 좋아하는 것이 눈에 삼삼하다. ◇1996년 4월 16일 (흐림) 오늘 아침은 북경으로 간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기뻐하시었다. 처음 우리아버지께서는 한국 대사관으로 가보자고 주인께 말하니 주인께서는 대사관 가보나마나 한국가기 힘든데 이왕 목숨을 내걸고 온바에야 한번 대사관에 가는 것이 옳은것 같다고 하시면서 가기로 결정했다. ◇1996년 4월 17일 수요일 (갬) 식당집 아주머니께서는 북경으로 갈때 차안에서 먹을 도중식사도 준비하느라고 바삐 다니시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한국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돈 500원을 동무네 집에서 꾸어주면서 이번에 북경에 가면 말도 모르니 찾아가기 힘들다고 하며 자기 아들과 같이 가라고 하시었다.이날저녁 아버지,어머니께서 북경으로 떠나시었다.
  • 김영진씨 둘째아들 해광군의 탈북기/우리가족 로정의 일기 전문:Ⅰ

    ◎“탈북=지도자 배신” 생각들어 갈등/농촌일손 가들랴 폐품 모으랴… 공부시간 몇이나/기차안서 굶주려 사람 보고 “누구때문” 울분 22일 귀순한 김영진씨 일가의 탈북기록인 김씨의 둘째아들 해광군의 「우리가족 로정의 일기」는 우리 맞춤법에 틀리거나 낯선 북한용어도 있지만 생생한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살려 게재했습니다. 나는 애어린 14살 아이이지만 살길을 찾아떠나가는 노정을 기록하여 어느때에 이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며 북조선 나의 동무들이 이 글을 볼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리며 한자 두자 일기로 적고저 한다.내가 살던 고향 집 앞에는 들판,뒷산 옆에는 4월,5월이 되면 과수나무들이 흰색옷을 입는듯 만발한 꽃으로 봄을 알리는 배나무들이 지켜섰습니다. 아름다운 내고향과 정다운 동무들을 버리고 나는 왜 떠나야 했는지,…. 그것는 배고픔에 못이겨서인지 아니면 북조선의 무상교육 무상배려가 좋은데 내가 일년에 공부하는 시간이 도대체 몇날,몇시간이 되었던가. 북조선에서는 한창 배울 나이에 공부를 배우는 시간보다 농촌자원에 동원했고 폐철모우기 폐유리모우기 폐고무 폐동 등등,모우기를 하루도 그칠날이 없으니 그런것이 어디에 있으량 하는수없이 나의 동무들은 선생님의 성화에 못이겨 공장,농장 주민의 것을 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것이 도리어 나라에 좋은일 한다는 것이 학생들에게 도적질을 배워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우리 학급 인원은 42명이다. 거기서 학교에 오는 동무들은 하루에 절반밖게 못온다.절반숫자의 동무들은 왜 학교에 오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참기어려운 배고픔때문이다. 나는 정말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어디로 가야 배움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1996년3월18일 월요일 날씨 맑음 이날은 정든고향,정다운 동무들과 이별하고 3월19일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향하였다. 기차에 오른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많은지? 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집을 떠나 다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침침컴컴한 기차에 올라서니 사람들이 밀고당기고 힘내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듯 하였다. ◇1996년3월20일 수요일 이날도 기차안에서 무대기였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사람들이 서로 붐비면서 자기보따리를 찾는 사람,아이들이 배고파 우는소리,여성들이 신경질적으로 아우성치는 소리에 기차간은 그야말로 난장판 수라장이었다. 더욱이 내가 목격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려 숨을 방금 지울듯한 한 청년이 기차한막판에 누워 있었다. 그누구도 그사람을 동정과 위안해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끝내 그사람은 굶주림에 못이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도 처참한 참상을 보고 울분을 금할수 없었다.나는 처음으로 어린 나이에 내눈으로 직접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학교에서 공산주의 도덕교양을 받을때 웃사람을 존경하고 아래 사람을 사랑하며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교양을 받은 나로서 아직도 그참상은 나의 눈앞에 생생이 나마있다. 어째서 이 비참한 참상,한 인간의 운명을 보고도 모르는 척 하는가? 아직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누구탓이며 누구 때문인가? ◇1996년 3월21일 목요일 지루함을 느끼면서 타고온 기차는어느덧 끝내 목적지 무산읍에 도착하였다. 이날은 마을이 서글퍼서 인지 하늘 그름을 뭉게뭉게 나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목적지인 외할머니네 집에 들어서니 할머니는 없었고 누나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무산에서는 외할머니네 생활처지는 내고향의 생활처지와 다름이 없었다. 피곤한 나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서 오시는줄도 모르고 잠에 골아 떨어졌다. ◇1996년 3월22일 금요일 날씨(맑음) 아침 새벽에 나는 잠결에 할머니와 어머니 간에 말씀하는것을 들으니 먹을것이 없어 풀뿌리로 끼니를 채우며 겨우 장사를 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너희들이 또왔으니 반가움대신 근심이 된다고 걱정하는것이 였다.나는 비롯 나어린 마음이지만 또다시 마음속 충격을 받았다. ◇1996년 3월23일 토요일 맑음 아침에 깨여나 보니 벌써 할머니는 장사를 나가고 없었다.나의 아버지니와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무슨 토론을 하고있었다.그때나는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앞으로 우리들의 살길을 찾는 심정에서 모데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아버지어머니한테 묻고 싶었지만 어른들의 말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을 강냉이 뿌리로 만든 국수로 대충끼니를 하고 우리 온가족은 두만강 구멍을 나갔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얼마쯤 내려가니 유달리 화려한 집이 두만강 건너에 있었다. 후에 알아보니 그집은 남조선 사람들이 와서 지은집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때에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되여 남조선 사람이 자기 나라도 아닌 중국땅에 와서 훌륭한 집을 지을수 있는가고 생각하여 나는 이사실을 알고 싶었지만 부모님한테 선듯 묻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께서 하는 말씀이 이제는 더는 북조선에서 살길이 막막하여 더는 살수없으니 너희들이 보다시피 할머니에 집도 생활이 구차하며 하루하루끼니를 이어가는 형편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아버지에게 정확한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살길은 다만 남조선에 가야만이 너희들은 공부도 마음대로 할수있고 마음놓고 배불리 먹을수도 있고 희망의 날개를 펼칠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이때 나는 아버지가 나라를 배반하고 친애하는 지도자품을 떠나자고 여기로 데리고 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때 나는 나의 아버지이지만은 나쁜 사람이 아닌가고 생각되어 내 생각대로 절대로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품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올리었다. 이때 나의 형님 누나는 이구동성으로 나의 말을 찬성하였다.우리 행동을 보신 아버지께서는 먼 남쪽하늘만 쳐다보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였다. 침묵을 지키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중 어머니께서는 그러면 너희들은 어디로 갔으면 좋겠는가? 우리는 집도없고 재산도 다 팔고 할머니를 크게 믿고 왔댔는데 보다시피 할머니네 집 신세역시 구차하여 먹을것이 없어 하루살이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우리까지 어떻게 같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어머니 말을 듣고 우리 형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쪽에 가서 말을 좀 하자고 하였다. 나의 형님은 우리보고 너희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이때 나와 누나는 한결같이 우리는 절대로 지도자동지품을 떠날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 형제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침묵을 깨뜨리면서 하는 말씀이 너희들은 지도자 동지품이 좋다고 하지만 우리 온집안을 거처하여 먹여 살릴수가 없을 뿐만아니라 아버지는 이제는 고향으로 갈래야 갈수가 없는 몸이라고 말하였다.내가 왜서인가고 물으니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몇년전부터 남조선 방송을 들으면서 남조선은 자유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또한 15명을 조직하여 북조선정치는 불모순 정치며 남조선정치는 자유정치라는 것을 선전하던중에 아버지는 노출되어 갈 수 없는 문제라고 알기싶게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형님은 잘돼도 우리아버지 못돼도 우리아버지인데 아버지 뜻을 따르자고 말하였다. 나는 이때 생각이 많았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이고 하나는 조국의 품이었다. 이 갈림길에서 나의 심정은 아버지와 이별하고 싶지 않고 친애하는 지도자선생님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현실은 하나의 길만 선택하여야 했다.하지만 현실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기본 선차적 문제로 생각할때 아버지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 상에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께서는 명령하다싶이 요구성을 높여 무조건 남조선으로 가야만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결심하면서 너희들은 꼭 부모들의 의향대로 움직이라고 강박하는 것이었다.아버지께서 결심하신 그날 저녁 밤10시부터 중국도강준비에 들어갔다. 음력 2월6일이라 조각달은 지고 두만강 기슭옆에 캄캄한 밤 아버지를 따라 두만강 기슭에 가깝게 접근하였다.은밀히 접근하여 새벽2시까지 정찰하면서 보호병 움직임,조명등,불바침의 시간적으로 하산하여 아버지께서 명령을 내리시었다.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는 부모님들은 우리를 꼭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백포로 우리를 위장시켜 한치 한치 두만강을 도강하기 시작했다. 끝내 새벽 3시30분에 성공하여 중국땅을 밟게 되었다. ◇1996년 3월 24일 일요일(맑음) 이날은 유달리 날씨도 쨍쨍하게 맑은 날씨였고 하늘도 우리를 도와주는듯 기분이 상쾌하게 날씨가 맑았다. 새벽4시에 중국 조과향에도착하여 산에 오르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해 50도가량인 벼랑급한 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자니 급한 벼랑에서 아차 한발 실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아슬아슬한 벼락산이었다.이때에 어린 여자의 몸으로 산을 오르는 나의 누나는 기진맥진하여 겨우 형님의 도움을 받으며 산등성이에 올라 섰을때 새벽 6시30분이 되었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아침식사 준비에 굴뚝에서 연기들이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그때 나의 정든 고향 생각을 하며 다시한번 강건너 북조선을 바라보았다. 이때 어머니께서는 사람들이 볼수없는 산에 좀더 들어가 불을 피우고 아침식사를 하자고 하는 말에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또다시 우리 일행은 지친 발길을 돌리며 눈이 무릎까지 오는 북쪽 산으로 향했다. 1시간쯤 눈길을 걸어 나무가 우거진 깊은산에 불을 피울장소를 찾았다. 우리들은 불을 피우고 젖은옷을 말리며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 물이 없어 눈을 녹이며 물을 만들어 먹었다.식사를 끝낸후 피곤에 몰려 나도 모르게 잠에 떨어져 꿈나라로 갔다. 꿈속에서 나의 동무들이 나를 보고 나라를 배반한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꿈을 꾸고 있을때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는 바람에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때 나무하러온 조선족 중국부부가 올라오고 있었다.그들이 하는 말이 북조선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물어볼때 우리 온가족은 어쩔바를 몰라 몹시 당황하였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자기는 나쁜사람이 아니라고 하며 북조선 생활정황을 잘알고 있으니 우리를 동정하여 말하면서 자기 집으로 내려가자고 하였다.우리는 중국집에 들어섰을때 나는 아주 놀라며 이집은 중국에서 제일 부유한 부자 집이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서니 한눈에 안겨오는 것이 냉동기 텔레비전 재봉기 등 가정품들이 일제히 꾸려져 있었다. 나는 이집 주인님이 여기에서는 이밖에 고깃국을 정상적으로 먹는다고 할때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이때 어머니께서는 이것이 사실인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다시 물어보시었다. 주인은 웃으며 중국은 개방이후 발전되어 백성들의 생활이 보다시피 좋다고,집집마다 생활형편이 모두가 이정도는 된다고 하면서 우리집은 보통 생활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중국땅을 처음 밟았을때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 부부가 나에게 준 첫인상은 정말로 내가 상상도 하지못한 인상이었으며 자연적으로 중국과 조선을 대비해 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중국땅에 처음와서 만난 사람은 담배농사를 지으며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때어 온실관리를 하고 있는 집이다. 밤11시가 되도록 주인님의 말을 들으니 정국정황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집주인은 우리에게 중국 낡은 옷이지만 조선옷과 바꾸어 입혀주면서 화룡현까지 갈 차비를 주어 우리일행은 버스를 타고 화룡까지 수월히 오게 되었다. ◇1996년 3월 25일 월요일 (맑음) 화룡시에 들어서니 북조선에서 볼수없는 휘황하고 유명한 시장거리,사람마다 웃음이 가득찬 거리,생기발랄하고 환희가 넘치는 얼굴들.그모든 모습들.없는것없이 차려놓은 시장과 과일류,복장류,당가루류 등등 없는 것없이 그득히 차려놓는 시장거리 그야말로 영화의 한장면을 펼쳐 놓은듯 하였다. ◇1996년 3월26일 화요일 (흐림) 우리일행은 노비가 떨어지며 화룡시에서부터는 도보로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상오 9시30분부터 걷기 시작한것이 어찌 피곤하고 힘들던지 저녁 10시에 서성명함에 도착하였다.한밤중에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오니 잠자리가 근심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한집에 들어가 길가는 손님이니 하룻밤 쉬고 가자고 애원하고 사정하였다.첫집에서는 안되고 열집만에 애원하던중 11번째 집에서는 우리를 받아들여 밥도 주고 잠도 잘수 있게 되었다. ◇1996년 3월27일 수요일 우리일행은 도보로 걸어서 연길시내에 도착하였다. 연길시내에 들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한국사람만 만나면 도움을 받는다고 하여 한국사람을 찾았다.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하려고 공동전화 하는 곳에 가니 한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북조선에서 오지 않았는가 하며 자초지종을 물으며 반갑게 대하는 것이었다.그는 북한에 오빠가 있다고 하며 북한실정을 물어 우리는 북한생활 형편을 말하며 우리는 망명자가 아니라,중국에 친척방문왔다고하였다. 박아주머니는 우리는 북조선돈 3천원을 가지고 중국돈도 바꾸어주어 90원을 생활에 보탰다. ◇1996년 3월 28일 목요일 연길시 장백공사 리화의 김래삼아저씨네 집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이집은 채소농사를 하며 살아가는 집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대해주면서 하는말이 어째서 온 가정이 한창 공부시킬 나이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먼길을 떠나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흑룡강 오상현에서 빚에 시달려 빚재촉에 못견디어 살수없어 연변에 친척을 찾아온다고 말하였다. 살수없이 연변에 친척 찾아 온다고 말하였다. (이말은 로라를 처음 만났던 부부가 이렇게 알려 주었다)
  • 구름의 그림자/권원태 기상연구소 예보연구실 연구관(굄돌)

    초등학교 5학년 여름으로 기억된다.작은 외삼촌을 따라 경기도 광주(현 하남시)외할머니 산소가 있는 야산에 올라갔다.그런데 산에 올라 우연히 바라본 건너편 산은 밝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검푸른 부분이 보였다.외삼촌께 왜 저기는 더 어둡냐고 물어보았더니 그게 바로 「구름의 그림자」라고 대답하셨다.그 말은 어린 나에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렸고,이때부터 구름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같다. 때로 우리는 생각의 관점을 전환해 볼 필요가 있다.단순히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생각해오던 것을 구름의 그림자로 이해하면서 구름을 또다른 과학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듯이,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기상현상도 인간입장에서 바라보기 전에 지구 기후시스템의 에너지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기상현상은 태양에너지로부터 출발한다. 지표표면은 시간,장소,지표면의 성질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흡수하는 양이 다르며,이에따라 온도의 차이가 생기고 공기흐름이 생긴다.공기의 흐름은 공기중 에너지의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때에 따라 구름이 생기고 비가 오기도 한다. 지구가 오랜기간 비슷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지구 기후시스템이 에너지 평형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지역적 규모에서 볼때 에너지 평형은 계속해서 깨어지고 다시 에너지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공기의 흐름이 생겨난다. 구름이 생기고 비가 오는 현상은 지표면 부근의 남아도는 에너지를 상층으로 수송하는 방안이며,태풍의 경우도 열대지방에서 남아도는 에너지를 추운지방으로 수송하는 중요한 에너지 수송기구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름철 우리나라에서는 태양에너지가 지구 복사 에너지보다 많아서 기온이 올라가고 가을이 되면 차츰 태양에너지가 적어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한다.인간은 이러한 자연을 이용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찌보면 자연은 인간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개의치 않고 변화하고 있다.
  • 간호사 김선재씨 일가(컴퓨터와 더불어)

    ◎“3대가 컴퓨터에 빠졌어요”/할머니는 테트리스 박사/아들은 게임도사/김씨는 병원PC고장 해결사 외할머니와 함께 사는 병욱이네 가족은 컴퓨터와 관련된 별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고등학교 2학년생인 병욱이는 「게임도사」,어머니 김선재씨(43·경희의료원 인공신장실 간호사)는 「컴퓨터 검열관」으로 불린다..또 칠순인 외할머니는 「테트리스박사」로 통한다.3대로 이뤄진 컴퓨터 가족이다. 병욱이네 가족이 컴퓨터와 친해진 것은 올해로 간호사생활 20년째를 맞은 어머니 김씨 덕분이다. 김씨는 8년전인 지난 89년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 하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병욱이를 보면서 컴퓨터를 배우기로 결심했다.한가지라도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아서였다.곧바로 병원 컴퓨터동호인회에 가입하고 「컴퓨터를 배우려면 컴퓨터부터 사라」는 동호인회장의 말을 따라 286급을 구입했다. 『처음엔 기본 개념이 서있지 않아 단어 하나 하나가 너무나 생소했습니다.다운된 컴퓨터를 살려내는 법등을 회장님의 어깨 너머로 배웠지요.받아 적은대로 해봐도 컴퓨터가 자꾸만 다운되더라구요.내가 이렇게 멍청할 수 있는가 하고 낙심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1년여에 걸쳐 하드디스크 포맷과 프로그램 복사 등 도스의 기본개념을 익힌 김씨는 틈만 나면 병욱이가 보는 앞에서 컴퓨터를 두들겼다.김씨의 생각은 적중했다.컬러모니터로 바꿔준지 얼마되지 않아 병욱이는 종일 컴퓨터오락에 빠져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오락에 너무 빠져드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막지 않았습니다.오락이 컴퓨터를 아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자연스럽게 도스의 기본명령어를 자판으로 두드리다 보니 혼자 영어를 읽고 꽤 많은 단어를 외우더라고요.병욱이한테는 「게임도사」라는 별명이 따라 다닙니다.또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성격도 갖게 됐지요.영어에 취미를 갖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결실입니다』 김씨는 요즘 병원내의 컴퓨터고장 문의에 응답을 해주고 있다.때로는 고장난 컴퓨터를 고쳐 주기도 한다.병원 안을 돌아 다니며 컴퓨터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인 V3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도 김씨 일이다.병원내에서 도스강좌도 하면서 아들과 친정어머니의 컴퓨터생활 감시역(?)도 맡고 있다.어머니가 컴퓨터도사이다 보니 아들이 컴퓨터를 가지고 딴 짓을 할 수가 없다. 『한번은 집에서 인공신장실 간호사들과 도스실습을 하다가 디스켓에서 히든파일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압축을 풀어보니 음란디스켓이더라구요.그때 모인 사람들이 「이래서 엄마들이 컴퓨터를 배워야하는 거야」하더군요』 이런 김씨도 「테트리스」만큼은 친정어머니를 못당한다.불면증 해소용으로 병욱이에게서 286급을 물려 받은 이 할머니의 「테트리스」수준은 가족중에서 최고다.고희를 맞은 그는 노인들이 치매를 막기 위해서라도 간단한 컴퓨터게임을 배우고 자판을 두드릴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이 컴퓨터오락을 한다고 야단쳐선 안됩니다.밖에 나가면 오락실 천지 아닙니까.차라리 어머니들이 컴퓨터를 배워 자녀들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김씨가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당부다.
  • “엄마 찾아주오” 「뉴스넷」노크/재미교포주부 타미씨 애타는 사연

    ◎전세계에 메아리 치는 서울신문 「뉴스넷」/미군 아버지 따라 도미/어머니만 홀연히 귀국/“견딜 수 없는 그리움… 상봉 도와주세요” 「엄마 찾아 인터넷으로」 타미 미셀 드 라킨(Tami Mishelae De Larkin).1968년 11월11일 생.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시 거주.5살짜리 아들을 둔 주부다.서울신문의 「인터넷 전자신문」인 「뉴스넷」을 통해 26년 전에 헤어진 한국인 어머니를 찾게 해 달라고 호소해왔다. ○어머니는 김진란씨 어머니 이름은 김진란.46년 11월6일생으로 기억한다.아버지는 이슬레이 마틴 드 라킨(Easley Martine De Larkin).60년대 중반 주한 미 공군으로 근무했다.한국에서 결혼,68년 타미씨가 태어나기 직전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할머니는 영어교사였고 두 외삼촌의 이름은 김진만·진득이라고 전해들었다. 어머니와 헤어진 것은 태어난 지 18개월만인 70년 5월 무렵.한국으로 되돌아갔는데 이유는 모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고교시절에야 어머니가 한국에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어머니는저와 연락하려고 무척 애를 쓴 것으로 들었습니다』 부모님의 결혼식장은 지금은 없어진 서울의 한 교회당.『초가집이 있는 조그만 마을에 있었다』고 들었다. 『늘 가족이 그리웠고 그 내력을 궁금해 했는데 이젠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돼버렸습니다』 타미씨는 『꼭 도와달라』는 말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서울신문은 타미씨의 메일에 『기꺼이 돕겠다』는 회신을 보냈다.『이름만으로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우니 가족사진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가족사진 뉴스넷 전종 이에 따라 타미씨는 최근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던 가족사진 2장을 포함,5장의 사진을 뉴스넷을 통해 e­메일로 전송해 왔다. 타미씨의 e­메일 주소는 「MammaMisha@aol.com」 서울신문은 지난 해 11월22일 동영상·음성·문자 종합전자신문인 「뉴스넷」을 개설했다.8개월 동안의 접속건수는 총 6천6백62만여건.하루 평균 65만여건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왔다. 서울신문과 스포츠서울,자매지인 TV가이드와 뉴스피플 등 4개 매체의 뉴스와 컬러사진을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제공한다. 인터넷에 연결된 PC를 이용,웹 브라우저라고 하는 Netscape,Mosaic Internet Explorer를 통해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의 주소인 www.seoul.co.kr를 연결하면 된다.〈이지운 기자〉
  • 오정희씨,짧은 장편소설 「새」 출간

    ◎“열두살 소녀가 겪는 어려운 세상살이”/원고지 4백매 분량… 삶의 본질적인 어둠 탐사 삶의 어둠을 투시하는 단아한 단편에 주력해온 작가 오정희씨가 짧은 장편 「새」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냈다.원고지 4백장 분량으로 본격장편이라기엔 어중간하지만 오씨가 서사성의 세계로 영역을 넓혀가는 징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설은 어린 소녀 우미를 내세워 그 의식세계를 1인칭으로 따라간다.엄마가 가출하자 남동생 우일이와 함께 외할머니댁,큰아버지댁을 떠돌던 아이는 어느날 아버지를 따라 「안집할머니」네 셋방으로 옮겨간다.셋집엔 이들 외에도 새를 키우며 사는 트럭운전사 이씨,공장에 다니는 동성연애자 문씨부부,외판원으로 떠도는 정씨,지붕에 고추를 널다 떨어져 반신불수가 된 주인집 연숙아줌마 등이 방 한칸씩 차지하고 살아간다. 이같은 설정이 얼핏 세태소설,풍속소설의 그것처럼 느껴지지만 「새」는 그와 정반대로 오씨가 「지긋지긋하게 걸어온 삶의 본질적인 어둠」을 탐사하는 길로 기울어진다. 이 소설에서 삶이란 근원적으로뿌리뽑힌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거듭 박탈해가는 사악한 힘이다.외판원 정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하는 통에 공소시효를 반년 남겨둔채 살인용의자임이 밝혀진다.불구의 연숙아줌마를 끔찍이 아끼던 남편 김씨는 트럼펫 연주하던 직장을 잃자 아내마저 버리고 떠난다.이같은 삶의 불모성은 우미의 경우 무엇보다 섬뜩하게 드러난다.그애는 학급아이들이 돌아가며 집에 초대하는 인형 「곰순이」를 데려다가 배를 가른다.「…(배속에는)심장도 허파도 위장도 창자도 없었다.더럽고 냄새나는 시커먼 헌 솜뭉치와 스펀지조각,자투리헝겊 따위가 빼곡 배를 채우고 있었다.…(다른 집에선)수영을 하고 햄버거를 먹고 피자를 먹었다구? 우일이와 나는 하하 웃었다.끄집어냈던 것들을 텅빈 뱃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굴러다니는 토막연필과 크레용도 밥상에 흘린 라면가닥도 넣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동생도 죽은 뒤 아무 보호도 애정도 없는 곳에 홀로 팽개쳐진 열두살 우미에게 삶이란 「물을 삼키듯 쓴약을 삼키듯」 울음소리를 삼켜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삶,착란과 혼돈으로 이끄는 삶의 공간을 정확한 상징과 빈틈없이 정교한 구성에 담은 「새」는 오씨 작품세계에 독특한 새로움을 보태고 있다.〈손정숙 기자〉
  • 백혈병 소녀 “눈물의 투병” 1년/안산 경일정보산업고 이유림양

    ◎할머니 모신 가장… 뜨거운 회생의지/교우들 온정 밀물에도 수술비 막막 『주위의 사랑이 이토록 뜨거울 줄은 몰랐어요.그 분들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습니다』 할머니를 모셔온 사춘기 소녀가장이 백혈병과 투병하고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경기 안산시 경일정보산업고(교장 윤동섭) 1학년에 재학중인 이유림양(16).백혈병 치료 및 수술에 필요한 엄청난 비용은 힘겨운 그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 유림양의 거듭된 시련이 처음 시작된 것은 태어난 지도 얼마 안된 두살 때부터.당시 아버지가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얼마후 어머니마저 재혼,외톨이가 된다.친척집을 전전하던 유림양은 7살이 되면서 외할머니인 김미순씨(74)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극빈한 살림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던 유림양은 『빨리 자립해 할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실업고인 지금의 학교에 입학했으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최대의 시련이 그에게 닥친 것이 지난해11월.평소 자주 피로감을 느끼던 유림양이 진찰받은 결과 판명된 병명이다. 학교친구들 및 선생님들이 발벗고 나서 「유림이 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다.한푼 두푼씩 성금을 모아내고 안산주민들과 각 단체들에도 『유림이를 살려달라』는 호소문을 띄웠다.인근 군부대에서는 군인들이 현혈에 참가,치료에 필요한 혈액을 제공했고 다른 학교 등에서 모금한 성금이 속속 들어왔다.「유림이 살리기」에 앞장선 윤교장은 『온갖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유림이가 오히려 어른들을 숙연하게 한다』며 『그 티없는 생명을 돈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죄악』이라고 말한다.유림양의 이번 수술에 필요한 비용은 자그마치 7천여만원.한번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는 데만 1천만원이 드는데,수술전에만 통상 3번의 항암치료를 받는다고.수술받는 데 또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이 혈액이다.건강한 혈소판을 제공받아야 하기 때문에 A형 혈액을 가진 스무살 전후의 젊은이들을 찾고 있다. 이제 다음달 6일이면 1·2차에 이은 3차 항암치료에 들어가는 유림양.3차 치료후 20일이 지나면 골수이식수술을 받아야 한다.유림양을 치료해 온 여의도성모병원측은 『유림양은 비교적 건강하고 투지도 강할 뿐 아니라,만성이 아닌 「급성」백혈병이기 때문에 수술을 받으면 완치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머리가 모두 빠지고 고통스런 항암치료지만 그런 육체적 아픔쯤은 유림양에겐 크게 문제가 안된다.『앞으로 수술비가 제대로 마련될 지,빨리 완치돼 파출부일을 나가시는 외할머니를 모실 수 있을지…』.그러면서도 『어서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싶다』며 활짝 웃는다.〈임창용 기자〉
  • “피란때 김대통령이 보증서줘 인연”/이수성총리 KBS대담내용화제

    ◎「골프 취소」는 남부지방 가뭄 고려 결성/어제 소년소녀가장 사는 「벌집」 찾아 격려 이수성국무총리가 KBS­TV와의 대담프로그램에 출연,김영삼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인연과 국정운영의 소신,골프관(관) 등을 솔직담백하게 피력,화제가 되고있다. 이총리는 1일 밤 방영된 후배 박명진교수(서울대 신문학과)와의 TV대담에서 『피란시절 우리 8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림을 꾸리시던 어머니께서 장사를 하기 위해 시민증이 필요했으나 보증인이 없어 애태우다 국무총리실(당시 장택상총리)을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그때 젊은 비서 한 분이 보증을 자청해 서주었는데 그분이 바로 김영삼대통령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총리는 『이후 그분이 의기있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애정 비슷한 게 있었다』면서 『총리가 되는 과정에서 몇차례 만나 평소 몰랐던 면을 알게 되면서 개인적으로 반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총리는 『과거 정권 때도 관직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해왔는데 이번에는 수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상적인 권력체계를 거치지 않은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오기가 있었다』면서 『존경하지 않는 분에게는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았으나 김영삼정부는 다르게 봤다』고 답했다. 이총리는 연초에 골프약속을 취소했던 에피소드에 대해 『대통령께도 말씀드리고 계획을 세웠으나,비서실에서 남부지방에 가뭄이 심하다고 만류해 취소한 것』이라면서 김대통령이 골프를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골프가 사치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총리는 광주 망월동묘역을 참배한 이유에 대해서는 『광주항쟁 당시 나는 컴컴한 지하감방안에 있었으며 제발 희생이 적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고 회고한뒤 『망월동에는 86년 조용히 가본적도 있으며,총리로서 참배를 알릴 상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총리는 대담 말미에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총리로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린아이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를 위해 총리실에 특별팀을 이미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이총리는 이같은 자신의 뜻을 실천하듯 2일 낮 기자들을 물리친채 서울역앞 언덕배기의 1평짜리 「벌집」에서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유진아양(18·고1)과 안국동 막다른 골목 셋집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안정규군(15·중2) 등 소년소녀가장을 찾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달라』며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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