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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약투약 혐의’ 황하나 체포영장 발부…병원 입원 중

    ‘마약투약 혐의’ 황하나 체포영장 발부…병원 입원 중

    마약 투약 혐의로 논란의 중심에 선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 황하나(31)씨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4일 KBS에 따르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지난해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약한 혐의를 받고 있는 황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집행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조만간 황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가 체포영장을 집행할 방침이다. 경찰은 지난해 황씨가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약했다는 신빙성 있는 제보자와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해 수사를 벌여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황씨를 강제수사하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두 차례 신청하고, 한 차례 체포영장까지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반려해 논란이 일었다. 황씨는 경찰의 출석 요구도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 결과 2015년 황씨를 마약 투약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을 당시 경찰이 불구속 입건한 7명 중 2명만 소환조사한 사실도 드러나 ‘봐주기 수사’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는 “관련 수사기록을 분석한 결과 경찰이 불구속 입건된 7명 중 2명만 직접 불러 조사하고 황씨 등 나머지는 조사하지 않은 채 송치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밝혔다. 당시 황씨 등의 조사를 맡은 경찰 수사관은 “2015년 민주노총이 주도한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통제 때문에 바빠 조사가 뒤로 미뤄졌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바쁘다는 이유로 황씨 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은 전날 황씨의 마약 투약 혐의에 관한 수사과정에서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고자 내사에 착수했다. 황씨는 2015년 9월 강남 모처에서 조모씨에게 필로폰 0.5g을 건네고 함께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조씨는 이후 황씨가 알려 준 마약 공급책 명의의 계좌에 3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담당한 종로경찰서는 황씨를 2017년 6월쯤 검찰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황씨는 이후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구속된 조씨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황하나, 대포폰 사용 의혹

    황하나, 대포폰 사용 의혹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이자 JYJ 박유천 전 여자친구로 유명한 황하나가 대포폰 사용 의혹에 휩싸였다. 3일 방송된 MBC ‘뉴스데스크’에서 황하나의 마약 의혹이 다뤄졌다. 앞서 ‘뉴스데스크’는 2일 방송을 통해 황하나가 마약 공급 투약 의혹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황하나 마약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종로경찰서 지능팀이었다. ‘뉴스데스크’ 측은 “보통 마약 조사는 강력팀이 조사하는데 지능팀이 수사를 맡은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의문을 표했다. 이와 관련 당시 종로경찰서 수사책임자는 “처음에는 수사 의지가 있었다. 이후 황하나 사건에 대해 보고받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1년 7개월 만에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을 송치했다. 검찰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이 재수사 지시 없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 이에 경찰은 외압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당시 수사 기록에 대한 열람 조사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또 경찰은 황하나가 지난해 초에도 마약을 투약한 정황을 포착해 수사 중이다. 황하나는 경찰 소환에도 불응하며 차일피일 조사를 미루고 있다. 현재 사실상 연락두절 상태로 전해졌다. 이 가운데 황하나가 경찰 추적에 대비해 다른 사람 명의의 대포폰을 사용했다는 제보자의 주장도 나왔다. 마약 관련 연락을 할 때 이 대포폰을 사용했다는 것. 경찰은 황하나가 클럽 버닝썬의 주요 고객이었으며 마약 혐의로 구속된 클럽 MD 등 마약 사범과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사진 = MBC 뉴스 캡처 연예부 seoulen@seoul.co.kr
  • 경찰, 황하나 ‘마약조사’ 생략…“집회로 바빴다” 황당 답변

    경찰, 황하나 ‘마약조사’ 생략…“집회로 바빴다” 황당 답변

    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외손녀 황하나(31)씨가 2015년 마약 투약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을 당시 경찰이 불구속 입건한 7명 중 2명만 소환조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는 “관련 수사기록을 분석한 결과 경찰이 불구속 입건된 7명 중 2명만 직접 불러 조사하고 황씨 등 나머지는 조사하지 않은 채 송치한 사실이 확인된다”고 3일 밝혔다. 당시 황씨 등의 조사를 맡은 경찰 수사관은 “2015년 민주노총이 주도한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통제 때문에 바빠 조사가 뒤로 미뤄졌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바쁘다는 이유로 황씨 등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무혐의 처분이 내려진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은 전날 황씨의 마약 투약 혐의에 관한 수사과정에서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고자 내사에 착수했다. 황씨는 2015년 9월 강남 모처에서 A씨에게 필로폰 0.5g을 건네고 함께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A씨는 이후 황씨가 알려 준 마약 공급책 명의의 계좌에 3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를 담당한 종로경찰서는 황씨를 2017년 6월쯤 검찰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황씨는 이후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구속된 A씨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손녀 사연에 눈물바다 된 추념식(영상)

    손녀 사연에 눈물바다 된 추념식(영상)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서 8살 나이에 4·3을 경험한 김연옥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됐다.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국가추념식으로 거행됐다. 이날 추념식에서는 김연옥 할머니의 외손녀 정향신(23)씨가 3세대에 걸친 굴곡진 가족사를 낭송하며 추념식 참가자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정향신씨는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며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참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정씨는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쁘다. 그러니 이제 자식들에게 못 해준 게 많다고 미안하다고 말 안 했으면 좋겠다”며 “앞으로는 울지 않고 매일매일 웃겠다고 약속 하나만 해달라”라며 할머니를 위로했다. 김 할머니는 손녀가 사연을 낭독하는 동안 내내 흐느끼다 오열하기를 반복했다.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들도 눈물을 훔치며 위로와 격려를 담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영상부 seoultv@seoul.co.kr
  • [사설] 마약 환각 빠진 재벌 3세들, 성역 없이 수사하라

    ‘버닝썬 사건’으로 서울 강남클럽의 마약오염 실태가 드러나는 가운데 재벌가의 마약 투약 혐의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고농축 신종 대마를 구매한 SK, 현대 등 재벌 3세들이 경찰에 입건됐다. 영화에 나오는 재벌가 자제들의 마약 환각파티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SK그룹 3세 최모씨는 체포돼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현대그룹 3세 정모씨는 한 달 전 외국으로 나가 도피 중이다. 삼성그룹 3세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또한 마약류인 프로포폴 남용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재벌 3세들의 마약 투약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엄정한 수사나 재판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쉽게 법망을 빠져나갔다. 현대그룹 3세 정씨의 여동생 또한 지난 2012년 대마 흡연 혐의로 기소됐지만 벌금 300만원형에 그쳤다. 또 지난 2015년 남양유업 외손녀 황모씨는 공범 A씨의 판결문을 통해 구체적 필로폰 투약 정황이 밝혀졌지만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황씨는 2011년에도 대마 흡연 혐의로 기소유예 처벌을 받은 전과가 있었지만 처벌하지 않은 것이다. 충북 지역 건설업 재력가 2세 이모씨는 자신이 2대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15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필로폰,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을 투약한 혐의를 받았지만 2015년 집행유예 4년형에 그쳤다. 한국은 유엔이 정한 인구 10만 명당 마약사범 20명이라는 마약청정국 지위 기준을 2016년부터 잃었다. 실제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마약이 공공연히 유통되는 현실 탓이다. 그럼에도 재벌가 등 고위층 마약사범에 대한 석연치 않은 수사, 판결이 비일비재하다. ‘물뽕’과 성폭력 등으로 얼룩진 2019년 ‘버닝썬 사건’은 오래전부터 예고된 셈이다. 마약류 유통과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재벌 등 사회지도층에 대해 더욱 철저한 성역 없는 수사와 판결로 법질서를 엄정히 세워야 한다.
  • 마약 혐의 황하나 “아빠랑 경찰청장은 베프”

    마약 혐의 황하나 “아빠랑 경찰청장은 베프”

    강신명 전 청장 “누군지 몰라” 선그어 경찰, 마약 무혐의 과정 내사 착수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외손녀 황하나(31)씨의 마약 투약 혐의가 무혐의 처분된 과정에 의혹이 일자 경찰이 내사에 착수했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일 “수사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내사에 착수한다”며 “기록을 살펴본 뒤 관계자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황씨는 2015년 11월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A씨와 함께 입건됐다. 황씨는 2015년 9월 서울 강남 모처에서 A씨에게 필로폰 0.5g을 건네고 함께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A씨는 이후 황씨가 알려준 제3자 명의 계좌에 30만원을 송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종로서는 황씨를 소환조사하지 않은 채 2017년 6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반면 A씨는 기소돼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최근 한 언론은 2011년에도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황씨가 무혐의 처분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MBC가 입수한 대화 녹취에 따르면 황씨로 추정되는 인물은 2015년 지인에게 “우리 삼촌이랑 아빠는 경찰청장이랑 다 알아. ‘개베프’야(완전 친구야)”라고 말하며 경찰 고위급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논란이 커지자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마약류 정밀 감정에서) 음성 판정이 나와서 진술만으로는 수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 전 청장도 “황하나가 누군지 모른다”고 선을 그었다. 남양유업은 이날 입장 자료를 내고 “황씨는 회사 경영과 무관하다”며 “고인이 된 창업주의 외손녀라는 이유로 황씨 개인에 대한 내용을 남양유업과 결부해 보도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전날 변종 마약을 구매·투약한 혐의로 체포한 SK그룹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의 손자 최모(31)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최씨는 지난해 3∼5월 평소 알고 지낸 이모(27)씨로부터 15차례 고농축 대마 액상을 구매해 자택 등에서 투약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경찰은 이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모(28)씨의 혐의도 포착해 입건했다. 해외 체류 중인 정씨가 귀국하는 대로 조사할 방침이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종합] 황하나, 마약 관련 남양유업 입장 “무관한 사람”

    [종합] 황하나, 마약 관련 남양유업 입장 “무관한 사람”

    남양유업은 최근 마약투약 의혹이 불거진 황하나 씨와 관련해 “회사 경영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남양유업은 2일 공식입장을 발표하고 “황하나씨와 그의 일가족 누구도 회사와 관련한 일을 하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오너일가 봐주기식 수사 의혹과 관련해 회사는 전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남양유업은 “황하나씨를 고인이 되신 창업주의 외손녀라는 이유로 남양유업과 연관 지어 보도해 회사의 임직원, 대리점주, 낙농가 및 그 가족들까지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고있다”고 덧붙였다. 황하나씨는 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외손녀다. 황하나씨는 2015년 9월 대학생 조모 씨의 필로폰 투약 혐의에 연루됐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도되며 봐주기 수사 논란이 불거졌다.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조씨의 판결문에 황하나씨 이름이 8차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조씨가 황하나씨와 공모해 필로폰을 투약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 발생 2년이 다 되어서야 황하나씨를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고, 이후 황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남양유업 입장 전문. 황하나씨는 회사 경영과 무관하며, 황하나씨 일가족 누구도 회사와 관련한 일을 하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울러, 오너일가 봐주기식 수사 의혹과 관련해 회사는 전혀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일부 언론에서 황하나씨를 고인이 되신 창업주의 외손녀라는 이유로 남양유업과 연관 지어 보도해 회사의 임직원, 대리점주, 낙농가 및 그 가족들까지 많은분들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황하나씨 개인과 관련한 내용을 남양유업과 결부해 보도하는 것을 자제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남양유업 외손녀’ 황하나 무혐의…수사과정 내사 착수

    ‘남양유업 외손녀’ 황하나 무혐의…수사과정 내사 착수

    경찰이 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외손녀로 알려진 황하나(31)씨의 마약 투약 혐의와 관련해 수사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사에 착수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일 “황씨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명확한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내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황씨는 2015년 11월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조모씨와 함께 입건됐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종로경찰서는 황씨를 2017년 6월쯤 검찰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고, 황씨는 이후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조씨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에 3년을 선고받았다. 황씨는 2015년 9월 강남 모처에서 조씨에게 필로폰 0.5g을 건네고 함께 투약한 혐의를 받았다. 조씨는 이후 황씨가 알려 준 마약 공급책 명의의 계좌에 3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종로경찰서 수사팀 관계자는 “당시 한명이 구속됐고 조사 과정에서 언급된 사람이 여러 명이 있었다”며 “이들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하는데 (마약류 정밀 감정에서) 음성 판정이 나와서 진술만으로는 수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급책을 검거해 조사하려 했는데 그 과정이 길어졌고 공급책 검거도 되지 않아 사건이 너무 장기화하는 바람에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수사팀 관계자는 “구속된 인물을 진술 외에 뒷받침할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불기소 의견으로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며 “수사과정에 외압이 있었다면 기억할 텐데 그런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과거 다른 인물에 대한 법원 유죄판결에도 황씨가 등장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법원은 2011년 대마 흡연 혐의로 기소된 2명에게 1심에서 유죄를 선고하면서 2009년 12월 중순 이들이 차 안에서 대마를 흡연할 당시 황씨도 함께 대마를 피웠다고 적시했다. 황씨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남양유업은 입장 자료를 통해 “황씨는 회사 경영과 무관하고 황씨 일가족 누구도 회사와 관련한 일을 하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오너 일가 봐주기식 수사 의혹과 관련해 회사는 전혀 무관함을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또 “일부 언론에서 황씨를 고인이 되신 창업주의 외손녀라는 이유로 남양유업과 연관지어 보도해 회사의 임직원, 대리점주, 낙농가 및 그 가족들까지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며 “황씨 개인과 관련한 내용을 남양유업과 결부해 보도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황하나, 김치에 “필로폰 첨가해주시나요?” 묻자 반응이..

    황하나, 김치에 “필로폰 첨가해주시나요?” 묻자 반응이..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 황하나 씨가 마약 범죄 의혹이 불거졌다. 황 씨는 의혹이 제기된 지난 1일 공교롭게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마약 김치’를 홍보해 눈길을 끌었다. 한 네티즌이 2일 황 씨의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특산품 판매업체 N사(상호명 S사)의 온라인 쇼핑몰에 “이 김치에 필로폰도 첨가해주시나요?”, “마약하는 사람이 홍보하는 상품을 어떻게 믿고 사죠?”라고 물었다. 이에 ‘판매자’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십시오”라고 답할 뿐 황 씨 관련 의혹에 어떤 반박이나 해명도 하지 않았다. 해당 김치는 다른 업체가 제조한 것으로, 황 씨 아버지는 이를 대행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마약 범죄 의혹을 받는 황 씨가 홍보하는 김치에 하필 ‘마약김치’라는 태그까지 붙어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황 씨는 현재 자신의 SNS 계정을 ‘비즈니스 계정’이라고 밝히며 N사의 제품 홍보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이날 일요시사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황 씨는 지난 2015년 9월 대학생 조 모 씨의 필로폰 투약 혐의에 연루됐다.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조 씨의 판결문에는 황 씨의 이름이 8차례 등장한다. ‘필로폰이 든 비닐봉지를 건넸다’거나 ‘3차례에 걸쳐 일회용 주사기에 마약을 넣고 생수로 희석해 주사하게 했다’ 등 조 씨에게 마약을 공급한 정황이다. 재판부는 조 씨가 황 씨와 공모해 필로폰을 투약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판결문에도 혐의가 명시된 황 씨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수사기관이 황 씨를 한 차례도 소환조사 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황하나 마약 논란…재범에 필로폰 공급자였는데 ‘무혐의’

    황하나 마약 논란…재범에 필로폰 공급자였는데 ‘무혐의’

    남양유업 오너 일가인 황하나씨가 과거 마약범죄에 연루됐지만 소환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봐주기 수사’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1일 법조계에 따르면 2016년 1월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9부(부장 윤승은)는 마약류관리법 위반(향정) 혐의로 기소된 대학생 조모씨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2016년 4월22일 서울고법에서 확정됐다. 해당 사건 1심 판결문에는 조씨가 황씨와 공모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적시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조씨는 2015년 9월 중순 황씨로부터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필로폰 0.5g을 건네받고 그해 9월22일 대금 30만원을 송금했다. 조씨는 구입한 필로폰을 일회용 주사기에 넣고 자신의 팔에 3차례 주사한 혐의가 모두 유죄로 판단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조씨는 황씨와 공모해 필로폰을 투약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 언론사는 황씨가 사실상 공급자 역할을 한 사실이 법원에서 밝혀졌는데도 처벌이 없었다며 당시 검찰과 경찰이 황씨에 대해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2년이 다 되어서야 황씨를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고, 이후 황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2011년에도 대마 흡연 혐의로 적발됐지만, 검사의 판단으로 재판에 넘기지 않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 초범도 아닌 데다 보통 투약자보다 마약 공급자를 더 엄히 단죄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황하나씨가 처벌을 받지 않은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법조계의 반응이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현재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에서 진상을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황씨는 국내 3대 우유업체 중 하나인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로 과거 가수 박유천의 여자친구로 유명세를 탔다. 남양유업은 2일 “황하나씨는 회사 경영과 무관하며, 황하나씨 일가족 누구도 회사와 관련한 일을 하거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고인이 되신 창업주의 외손녀라는 이유로 남양유업과 연관 지은 보도에 회사의 임직원, 대리점주, 낙농가 및 그 가족들까지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 역시 이날 “황씨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당시 수사 과정에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지 명확한 진상을 밝힐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황하나, 버닝썬 이문호와 친분 ‘지인들과 방문’

    황하나, 버닝썬 이문호와 친분 ‘지인들과 방문’

    황하나가 마약을 투약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그가 버닝썬 이문호 대표 등과의 친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눈길을 끈다. 1일 일요시사 보도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대학생 조모씨가 필로폰을 수차례 투약하고 매수·매도한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는데, 해당 판결문에 황하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전해졌다. 이로 인해 온라인상에는 ‘황하나 마약 의혹’이란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이어 황하나가 버닝썬 이문호 대표 등과의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서 네티즌의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황하나 관련 게시물이 대량 게재됐다. 황하나가 그간 자신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버닝썬 이문호 대표 등과의 친분을 드러낸 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는 과거 지인들과 버닝썬에 방문한 사진을 종종 올린 바 있으며 정준영, 승리, FT아일랜드 최종훈 등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황하나는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로, 박유천과 결혼 발표까지 했지만 지난해 8월 결별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양한 게시물을 올리고 공동 구매를 진행했던 황하나는 현재 인스타그램 활동도 중단한 상태다. 사진 = 서울신문DB (기사와 관련 없음)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헌화하는 日 추모객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헌화하는 日 추모객

    26일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에서 스가와라 도시노부(왼쪽 두 번째)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국제교류협회장이 헌화하고 있다.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관한 추모식에는 안 의사 외손녀 황은주씨와 시민·학생 500여명, 일본 인사 20여명이 참석했다. 뉴스1
  • 황하나, 버닝썬 이문호 어떤 관계? ‘지인들과 방문한 버닝썬에선..’

    황하나, 버닝썬 이문호 어떤 관계? ‘지인들과 방문한 버닝썬에선..’

    황하나 버닝썬 친분이 화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황하나 관련 게시물이 대량 게재됐다. 가수 박유천의 전 여자친구이자, 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외손녀 황하나의 관련 게시글에 네티즌 관심이 모아진 상황. 특히 황하나가 그간 자신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버닝썬 이문호 대표 등과의 친분을 드러낸 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황하나는 과거 지인들과 버닝썬에 방문한 사진을 종종 올린 바 있으며 정준영, 승리, FT아일랜드 최종훈 등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황하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동안 너무 참아서 모든 일을 공개하려고 한다. 이런 글을 쓴다 해서 나에게 이득 되는 거 하나 없고 엄청난 손해인 것도 안다”고 글을 게재했다. 이어 그는 “지금 그의 회사와 가족들은 머리를 맞대고 저를 어떻게든 가해자로 만들어야 한다며 더러운 작전을 짜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며 “나도 실수한 부분이 물론 있지만, 너는 너무 많지? 성매매, 동물 학대, 여자 폭행, 사기 기타 등등 나는 충분한 시간을 줬고 기회를 여러 번 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폭로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한편 황하나는 남양유업 창업주의 외손녀로, 박유천과 결혼 발표까지 했지만 지난해 8월 결별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양한 게시물을 올리고 공동 구매를 진행했던 황하나는 현재 인스타그램 활동도 중단한 상태다. 사진 = 서울신문DB (기사와 관련 없음) 연예부 seoulen@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네 어머니와 아내를 무겁게 대하라.” 지난달 8일 시인 이윤옥씨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 완간 기념 ‘책 잔치’가 열렸다. 권마다 20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시와 산문으로 담은 책이다. 속표지에는 이런 짧은 헌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에게 바칩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다음은 지은이의 머리말 일부. “원고 뭉치를 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봤지만 선뜻 이 책을 찍어 준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남성의 전유물이 돼 버린 풍토에서 여성독립운동가만의 책을 출간하는 것은, 독립운동처럼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야 가능했다.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홍수를 이뤘다. 그동안 여성의 역할을 액세서리 정도로 평가절하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반성치고는 너무 피상적이었다. 양적으로만 늘었지 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택 기준은 언제나 ‘남성 못지않은 활동상’이었다. 삼종지도의 억압구조 속에서 수행했던 여성 혹은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외면당했다. 건국훈장 서훈자 1만 5537명 가운데 여성 독립지사가 전체의 2.3%(357명)에 불과한 현실이나,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부분 마지막 등급인 애족장을 서훈했거나, 훈장이 아닌 건국포장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런 기준 때문이었다. 일송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여사는 1987년 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 때 보훈처 초청으로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 개관식 치사에선 온통 일송 이야기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아버지께 공이 있다면 반 이상은 시어머니(박순부 여사) 몫이었다. 독립운동도 의식주가 있어야 가능한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하루 스무 시간씩 일하며 밥해 먹이고 옷 지어 입히고 땔감 마련해 추위를 피하게 했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도 남녀를 동등하게 대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하찮게 보는지 모르겠다.” 박순부 여사는 만주 벌판을 호랑이처럼 떠돌며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옥사한 남편 일송과 그 동지들의 후방을 말없이 지키다가 만주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이 여사 역시 1989년 영구귀국할 때까지 77년간 여러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둘째 중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맏아들 이준형은 출소한 뒤 “일본 놈들 밑에서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치욕”이라며 자결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네 가지 유언 가운데 하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자들의 고생이 심했다. 여성을 대할 때 보통으로 대하지 말고 무겁게 대하라.” 허은 여사는 조부 허형, 재종조부 허위 등 집안이 모두 독립지사였다. 어른들을 따라 1915년 만주로 망명한 허 여사는 1922년 석주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 뒤 끝없이 찾아오는 독립군을 수발하는 ‘독립군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시집온 첫해 집에서는 서로군정서 회의가 서너 달 계속됐다. 만주의 독립지사치고 그의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가 부족해 삼시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양식이 없을 때는 좁쌀 쭉정이로 죽을 끓였다.”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생산을 했다. (중략)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밥 짓다가 기절해 가마솥 안으로 고꾸라질 뻔하기도 했다. “시집온 이듬해, 한번은 감기에 걸렸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 안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잡아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꼬박 24시간을 혼절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시조부, 시부에 이어 남편도 7년간의 옥고 탓에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남겨진 5남2녀를 키우고 가문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허 여사의 몫이었다. 형제들이 때론 고아원에도 가고, 보육원에도 보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4남1녀는 허 여사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혁명 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의 간난신고는 ‘고초당초’보다 매웠다. 결혼 당시 지금 시세로 수천억 혹은 수조 원에 달한다는 남편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의 재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 등을 경영하는 데 모두 썼다.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하루 잘해야 일중식이요, 한겨울에도 절화하기(불피우지 못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었다. ‘매일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했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살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서간도 시종기’에서) 이 여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고무공장 직공으로, 부잣집 침모로, 심지어 유곽 여인네의 옷을 수선하는 삯바느질까지 했고, 몇 푼 벌면 송금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 경찰서로 불려가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손녀와 아들 규오가 성홍열로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규숙, 현숙 자매는 천진 부녀구제원에 보내야 했고, 외손녀 현덕은 늑막염으로, 딸 현숙은 폐렴으로 그리고 외손자는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 규학은 친일파 암살 과정에서 체포돼 고문으로 청력을 잃었고, 셋째 아들 규창 역시 13년형을 받았다. 이 여사 자신은 마적떼의 총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우당은 1932년 일제의 감옥에서 고문당한 끝에 세상을 떴고 첫째 시숙 이건영은 질병으로, 조선 10대 갑부로 꼽히던 둘째 시숙 이석영은 영양실조로, 셋째 시숙 이철영은 풍토병으로, 여섯째 시숙 이호영은 일본군에 의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다. 함께 망명했던 식솔 60여명 가운데 살아서 귀국한 이는 다섯째 시숙 이시영 선생 포함 20여명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살아서는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단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망명 전 박 여사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엘리트였다. 파업 태업 등을 주도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터였기에 1922년 귀국한 뒤 온갖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나석규 의사 등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사를 뒤에서 도왔다.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그 자신은 잦은 체포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단칸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단재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탓에 2009년 가족관계등록부가 생기기까지 무국적자였다. 가족관계부가 생기고도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하여, 단재의 가족관계부에는 지금도 아들과 손주 이름만 달랑 올라 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 15명을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도 세 아들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김 여사는 평소에도 잠입한 독립지사들을 숨겨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다. 백범의 부인 곽낙원 여사는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모아 김치를 담갔고, 그것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둘도 없는 반찬이 되었다. 베트남에는 ‘어머니 영웅’이란 칭호가 있다. 항불, 항일, 항미 독립전쟁에 자식을 바친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서훈’이다. 세상에 어머니를 배반할 자식은 없다. 베트남이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2018년 허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자 아들 이항증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첫 서훈이며 음지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은 여성 독립지사에 대한 첫 훈장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머니 영웅’, ‘아내 영웅’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안중근도 이회영도 이상룡도 김동삼도 김구도 여운형도 신채호도 없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文 “친일 땐 3대가 떵떵… 독립유공자 끝까지 찾아낼 것”

    文 “친일 땐 3대가 떵떵… 독립유공자 끝까지 찾아낼 것”

    문재인 대통령은 4일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었다”며 “이를 바로잡는 게 해방된 조국이 해야 될 일인데, 역대 정부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런 점을 반성하며 독립운동가를 최대한 발굴하고 그 후손을 제대로 모시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날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 이같이 밝힌 뒤 “친일한 사람들은 당대에 떵떵거리며 자식을 유학 보내면서 해방 후에도 후손이 잘살 수 있었고, 독립운동 하신 분은 가족을 제대로 못 돌봐 뿔뿔이 흩어지거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자식까지 오랜 세월 고생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마지막 한 분의 독립유공자까지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 행사에는 유공자 34명의 후손으로 8개국에 거주하는 64명이 참석했다. 광복군 비행학교 교관 등 공로를 세운 장병훈 선생의 외손녀 심순복(70)씨,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손녀 수전 블랙(64) 등이 참석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서울포토]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서울포토]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4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에서 입장하는 장병훈 독립운동가의 외손녀 심순복 씨와 인사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독립운동가 후손과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서울포토] 독립운동가 후손과 인사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4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에서 입장하는 장병훈 독립운동가의 외손녀 심순복 씨와 인사하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박유천 전 여친’ 황하나, “마지막 기회..” 끝나지 않은 이야기

    ‘박유천 전 여친’ 황하나, “마지막 기회..” 끝나지 않은 이야기

    황하나의 SNS 글이 화제다. 가수 박유천의 전 연인으로 알려진 황하나가 자신의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가 삭제한 가운데 그들의 과거 사진이 재조명됐다.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인 황하나는 박유천의 전 연인. 두 사람은 열애설 이후 결혼설로 화제가 됐다가 지난해 8월 결별했다. 열애 당시 황하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빠 핸드폰에는 온통 나”라는 글과 함께 박유천과의 달달한 스킨십 사진을 게재하는 등 깊은 관계임을 증명한 바 있다. 한편 황하나는 2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저는 진짜 심하게 마음도 약하고, 불쌍한 거 못 봐서 절대 이런 글을 쓰거나 복수를 하거나 하는 사람이 못 된다. 그런데 그동안 너무 참았어서 모든 일을 공개하려고 한다”고 말하며 폭로전을 예고했다.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中 국민당 도움받아 충칭 정착…中 공산당, 조선의용대 탈영 부추겨 팔로군 편입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출범해 1945년 해방 때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뒤 일본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옮겼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각지를 떠돌았다. 임정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서남부 쓰촨성의 작은 도시 충칭이었다. 임정은 1945년 11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5년 넘게 독립을 준비했다. ●임정, 충칭서 5년 넘게 한국 독립 준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의 최종 목적지 충칭. 1937년 11월 중국이 일본에 수도 난징을 빼앗기자 임시 수도로 정한 곳이다. 주민 수가 3100만명에 달해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유비와 제갈량이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세력을 길렀던 촉(蜀)의 옛 땅이다. ‘안개 도시’라는 별명답게 한겨울에도 뿌연 안개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예전에 이곳은 안개와 매연이 결합해 공기 질이 나빴다고 한다. 김구(1876~1949)의 맏아들 인(1917~1945)도 여기서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임정은 중일전쟁으로 난징이 함락되자 후난성 창사로 피신했다가 1838년 7월 광둥성 광저우로 내려갔다. 국민당 정부가 충징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곳은 인구 20만명 정도의 소도시였지만 국민당 정부가 오자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주택과 학교, 도로 등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 임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결국 중국의 도움으로 류저우(1938년 10월~1939년 3월)와 치장(1939년 3월~1940년 9월)을 거쳐 2년 뒤인 1940년 9월에야 입성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임시정부에 있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이 사실을 외면하고 독립운동 성과를 우리만의 노력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국뽕 사관’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임정의 리더십 회복과 좌우합작 성사 일본은 지상군 병력이 닿지 않는 이곳을 파괴하려고 5년여간 200여 차례에 걸쳐 공습을 감행했다. 영화로도 제작돼 잘 알려진 충칭 대폭격(1938~1943)이다.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47)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를 보면 당시의 공포가 잘 묘사돼 있다. “(공습경보를 듣고 대피소인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일본 비행기가 폭탄을 수없이 떨어뜨렸다. 석굴이 심히 흔들리며 당장 무너지는 듯했다. 동굴 안에서는 천둥·번개 치듯 불빛이 번쩍였고 천장이 내려앉는 듯 작은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폭격이 끝나고) 굴 밖으로 나왔더니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가 있었던 집의 앞과 뒤, 오른쪽, 왼쪽이 불바다였다. 참혹한 시신도 많았다.”(1938년 12월 5일) 역설적이지만 임정은 공습에 시달리던 충칭 시기에 리더십을 회복했다. 중국이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임정 중심으로 합작해 나설 것을 촉구했고, 한인 내부에서도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다고 느껴 단결에 나섰기 때문이다. 임정은 처음으로 청사에 ‘대한민국 림시정부’ 간판도 내걸었다. 독립운동 중심체로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의미다. 1940년 5월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1887~1958), 홍면희(1877~1946)가 주도한 한국독립당, 이청천(1888~1957)이 이끈 조선혁명당은 충칭에서 우파 통합정당을 만들었다. 임 정 여당인 한국국민당의 지분이 가장 컸지만 당명은 ‘한국독립당’을 계승했다. 한독당은 해방 뒤 한국에서도 민족주의 정당으로 활동했다. 임정에 비판적이던 사회주의 계열도 태도를 바꿔 1941년부터 하나둘 합류했다. 임정이 설립 20여년 만에 제대로 된 위상과 권위를 갖추게 됐다. 승려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1942년 임정 내무차장이 된 김성숙(1898~1969)의 증언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권위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임시정부만한 것이 없었거든. 임정이 계속해서 일본하고 대립하고 싸웠기 때문에 ‘(진정성을 인정해) 임정을 중심으로 모여야겠다’ 이렇게 생각했지.”●조선의용대, 팔로군 주둔 화베이 이동 1939년 말 중국 후베이성 라오허커우. 중국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단체들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부대장 김학무(1912~1944)가 동료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우리 손으로 적(일본군)들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이런 ‘가짜 항일’ 전선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럽소이다.”조선의용대는 임정이 만든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선 1938년 10월 결성됐다. 대원 상당수가 중국 군관학교나 일본의 유명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를 원했지만 중국은 인원이 많지 않은 의용대에 전투 대신 정보 수집과 선전 공작 등 보조 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후방에서 선전전이나 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전체 대원 300여명 가운데 대다수가 1941년 3~5월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있던 화베이 지역으로 떠났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들이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국내에 진격하려고 북상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중국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고 전했다. 공산당이 조선의용대를 팔로군에 편입시키고자 의용대에 밀정을 심어 탈영 분위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중국 공산당 출신 역사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가 홍콩에서 출간한 회고록(2004) 등에 수록돼 있다.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이라고 놀라워했다.조선의용대 주요 전력이 화베이로 올라가자 최고 책임자였던 김원봉(1898~1958)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따르는 대원이 100명도 남지 않았다. 이 관장은 쓰마로의 회고록을 토대로 “당시 김원봉도 남은 부대와 함께 화베이로 가려고 했지만 중국 공산당 저우언라이(1898~1976)가 이를 막았다. 화베이 부대의 새 리더로 김무정(1904~1951) 등을 세운 뒤여서 더는 김원봉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갈 곳을 잃은 그는 한국광복군 합류를 고심했다. 임정과 김원봉 간 통합 협상이 길어지자 중국군사위원회가 직접 나섰다. 1942년 5월 광복군에 부사령관 직제를 신설하고 그를 임명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제됐다. 군사 분야에서도 좌우합작이 성사됐다. 늘 대원이 부족했던 광복군으로서는 이들이 그야말로 단비 같은 존재였다. 임시정부 좌우통합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이슈가 있다. 바로 김구의 ‘백색 테러’(우익에 의한 테러) 논란이다. 그가 일본군이나 친일파를 상대로 ‘의열 투쟁’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이념이나 성향이 다른 일부 독립운동가에게도 같은 방식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구가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어 언급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공론화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다. 김구는 상하이 임정에서 초대 경무국장(경찰청장)을 맡아 반민족주의자에 대한 처형을 주도했다. 1922년 2월 사회주의자 김립(1880~1922) 살해 사건이 대표적이다. 백범 자신이 “김립이 (소련이 준) 임시정부 공금을 사사로이 사용해 처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 등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임정이 아닌 한인 사회주의 진영에 자금을 제공했다. 김구가 주장하듯 김립이 이 돈을 사적으로 썼다는 증거도 없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김립 암살 사건은 임정이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근거해 단행한 국가 폭력”이라며 “같은 독립운동가라도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해 독립운동계에 큰 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해방 뒤인 1945년 12월 말 동아일보 주필이자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1890~1945)는 김구가 살던 경교장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벌였다. 그는 우파진영이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본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반탁을 고수하던 김구를 비판했다. 송진우는 밤샘 토론을 마치고 자택에 돌아가자마자 살해됐다. 브루스 커밍스(76)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사건의 배후를 김구로 본다. 김구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1889~1939)과 안창호(1878~1938)의 후견인 옥관빈(1887~1933)의 암살에도 간여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미 군정은 친일파 출신으로 한국민주당 정치부장이던 장덕수(1894~1947)가 살해되자 김구가 개입했다고 보고 재판정에 세웠다. 좀더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②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성장해 1880년대에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상업 도시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를 설치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외국인에게도 건국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보장해 한국인에게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태동했다.●“첫 번째 ‘임정 터’ 못 찾아…대한민국의 숙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지난달 중순 찾아간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일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넘쳐나고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건물마다 즐비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인 이곳이 정말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고층빌딩이 가득 찬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지역을 바라보며 “100년 전 이곳 어딘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이 작가는 “최근 중국인 학자가 첫 번째 임정 터를 찾았다고 간략히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고려인들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임정 수립을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달 26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 모였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과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도자들의 뜻을 들어 보고 정하자”는 반론이 맞섰다.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중국과 러시아에서 거물급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어 정부 수립을 더는 늦추기 어려웠다. 앞선 노령정부에다가 서울에 임정(한성정부)이 또 생기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4월 10일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여운형(1886~1947)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온 것이다. 여운형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상하이정부의 이름이 정해졌다. 다음날 이들은 국무총리에 이승만(1875~1965)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1878~1938), 재무 최재형(1860~1920) 등 6부 총장(장관)을 임명했다. 우리가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은 여기서 유래됐다.●왕 아닌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 첫 공식화 그렇다면 두 번째 임정은 왜 상하이에 세워졌을까.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년)를 보면 여기가 왜 임정의 적지인지 잘 묘사돼 있다. “중일전쟁(1937~1945) 전 상하이는 서양 문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조계지로 분할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가 시설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조선에서 온 이들이 다른 조계지에 숨으면 곧 붙들려 갔지만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안전했다. 설사 끌려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1946년 2월 21일) 상하이정부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령·한성정부와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하고 한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전까지 이어져 오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다만 상하이정부가 추구한 ‘외교독립론’은 훗날 임정이 끊임없이 갈등과 내분에 빠지는 단초가 됐다. 외교적 방법론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적 역량을 반영한 전략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기든 지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믿는 무장투쟁론자들을 설득하진 못했다.●쑨원의 부인 추모 능원에 신규식 등 만국공묘 상하이지하철 10호선 쑹위안루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아버지’ 쑨원(1866~1925)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불리는 쑹칭링(1893~1981)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원 한쪽에 외국인 묘지를 모아 놓은 ‘만국공묘’가 나타났다. 묘비를 하나씩 더듬다가 낯선 한국인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인정받는 신규식(1880~1922)이었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카이저 수염을 기른 외모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그가 초기 임정을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채호(1880~1936), 신석우와 함께 ‘산동삼재’(산동신씨 가문의 3대 수재)로 불렸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첫 번째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눈 시력을 잃었다. 지인들이 ‘애꾸눈’이라고 놀리자 신규식은 스스로를 ‘예관’(睨觀·한쪽 눈으로 흘겨봄)으로 불렀다.●신해혁명 경험삼아 민주공화정 개념 전파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집에서 독을 마셨다. 때마침 대종교 종사 나철(1863~1916)의 눈에 띄어 다시 한 번 구조됐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공화주의 노력을 한반도에 적용하겠다는 생각에 쑨원과 천두슈(1879~1942), 천치메이(1878~1916) 등 혁명가 그룹과 친분을 맺었다.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1905~1912·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고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1912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동제사’를 조직했다. 총재 박은식(1859~1925)을 비롯해 김규식(1881~1950), 신채호, 조소앙(1887~1958) 등 동제사 출신은 후일 임정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년 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번째 임정이 상하이에 자리잡은 건 신규식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가 바로 신규식의 조카”라며 “신규식은 자신의 신해혁명 경험을 독립지사들에게 소개해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정 개념을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웠다. 신규식은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쑨원은 혁명동지 신규식을 극진히 예우했다. 호법정부의 정치·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그의 부탁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정식 주권기구로 인정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임정이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다소나마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됐다. ●해외서 문전박대 뒤 임정 외교독립론 도마에 1922년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워싱턴회의에 갔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 당해 쫓겨났다. 임정의 외교독립론이 논란이 됐다. 신규식은 이런 임정의 처지를 비관해 25일간 단식하다가 같은 해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1921년 쑨원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만세’를 외친 것을 두고 사대적 자세를 지적한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신규식의 평소 성격에 비춰 볼 때 그런 굴욕을 참아내며 쑨원을 대한 건 오로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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