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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불평등 이제 그만] (10)·끝 시공사 횡포에 속터지는 입주민

    [경제불평등 이제 그만] (10)·끝 시공사 횡포에 속터지는 입주민

    지난해 서울 강북에서 A건설 아파트에 입주한 김모(42)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지은 지 1년밖에 안된 아파트 외벽이 갈라지고 빗물이 샜다. 시공업체에 하자보수를 요청했지만 시공업체는 ‘하자보수 보증금’을 포기할 테니 입주민(500여가구)들이 직접 고치라고 통보했다. 지방자치단체에 맡긴 ‘하자보수 보증금’보다 공사비가 더 나올 것으로 예상되자 발을 뺀 것이다. 주택법은 건축비의 3%를 ‘하자보수 보증금’으로 지자체에 예치토록 규정하고 있다. 또 하자보수기간(시설공사별 1∼4년)에 발생한 문제는 보증금 규모와 관계없이 시공사가 100% 책임지도록 했다. 시공사가 고치지 않으면 입주민들이 먼저 고친 뒤 보증금을 초과하는 비용만큼 민사소송으로 돌려받으면 된다. 하지만 소송은 3∼4년 걸려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때문에 시공사들은 배짱을 부리곤 한다.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은 분양 계약시 ‘VIP’ 대우를 받지만 일단 계약금과 중도금을 내면 ‘찬밥’ 신세로 전락한다. 공사비가 늘었다며 시공사가 추가 부담금을 요구해도 분양 계약자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입주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잔금을 치르고 만다. 입주한 뒤에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당초 약속한 편의시설이 없거나 마감재가 다른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지방 건설업체가 미분양 사태를 겪으면서 법적 의무사항인 주택(임대)보증보험에 들지 않는 사례도 늘고 있다. 회사원 박모(43)씨는 지난 4월 서울 강남의 109㎡(33평형) 아파트에 입주했다. 입주 예정일인 1월을 3개월 넘겨 집 열쇠를 받으려면 연체된 관리비를 먼저 내야 했다. 하지만 시공사측은 박씨가 입주하기 이전의 겨울철 난방비까지 요구했다. 난방은 동파 사고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므로 입주일을 지키지 못한 박씨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중앙난방도 아닌 개별난방에서 지나친 처사라며 반발했으나 시공사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관리사무소의 중재로 50%를 물고 입주했다. 이 정도는 다행이다. 최근 부도난 신일건설이 경기도 시흥 능곡지구에 분양한 해피트리 아파트 315가구는 대부분 ‘발코니 트기’공사를 옵션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주택보증보험에는 계약금과 중도금만 포함됐을 뿐 별도 옵션은 제외됐다. 일부는 발코니 계약금 100만원 이외에 최고 1800만원의 공사비를 선납했다. 새시·바닥재 등의 옵션 계약까지 포함하면 피해액은 수천만원에 이른다. 건설업체가 어려움을 겪다 보니 분양(임대)약관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경기도 용인에 노인복지주택(실버타운)을 임대아파트로 분양한 B건설은 준공일까지 계약금과 중도금을 보장하는 보증보험에 들지 않았다. 준공검사만 마치면 입주자들을 위한 전세권 설정과 임대보증금 보증보험에 가입할 테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계약자들은 자칫 시공사가 부도나면 보증보험에 들지 않아 중도금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계약자인 C모씨는 이런 사실을 서울신문에 알려 왔다.B건설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관계자는 “착오였다.”면서 뒤늦게 100여만원을 들여 보증보험에 들었다. 하지만 다른 계약자들을 위해 보증보험에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자금사정 때문이겠지만 엄연한 계약 불이행이다. 분양사기 피해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2005년 12월 대구에서 Y건설아파트 270가구를 분양한 S시행사는 계약금만 챙기고 지난 5월까지 착공하지 않고 있다. 2004년 경기도 군포에 분양한 D아파트는 스포츠센터와 독서실 등의 편의시설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해 입주가 끝났는데도 편의시설에는 환풍이나 냉·난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생색만 냈다. 독서실은 칸막이만 쳐놓았다. 시공사가 부도나면서 내집마련의 꿈을 접어야 하는 사례도 많다.2005년 청약률 1.8대 1을 기록하며 지방 주택건설의 불을 지핀 경북 경산의 와촌 짜임아파트는 시공사 ㈜세창이 지난해 11월 부도가 나면서 현재 주택보증보험의 공매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계약자들은 세창이 내기로 했던 대출금 이자까지 내면서 준공을 기다렸으나 끝내 만족할 만한 수준의 공사로 이어지지 않아 입주를 포기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입주자대표 하자 손배청구 불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건설사를 상대로 하자보수에 대한 손해배상을 직접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이에 따라 아파트 입주자들은 입주자대표회의 등 단체가 아닌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대구의 모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입주 후 1년이 채 안 돼 외벽 균열, 배수관 부실 등으로 수차례의 하자·보수 공사를 했다. 하지만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2003년 7월 대한주택공사를 상대로 7억 4000여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해 대한주택공사에 대해 5억 9000여만원의 배상책임을 인정했고,2심 재판부도 4억 1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대법원 1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11일 “입주자대표회의가 건설업체에 하자보수를 요구할 수는 있으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면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1) 구 천주교 포천성당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1) 구 천주교 포천성당

    문화유산의 멋과 의미는 후대에 가공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에서 외려 오롯하게 살아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심하게 훼손된 채, 혹은 아주 작은 부분만 옛 모습대로 남아 있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화려했던 옛날을 들쳐보게 만드는 그리스 곳곳의 폐허화된 유적이며 유물들은 그래서 더 빛이 난다. 옛 것을 지금의 기준으로 다듬어 되살려내는 복원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남겨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서 곱씹는 역사의 교훈과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경기도 북부지역의 유일한 등록문화재인 구(舊)천주교 포천성당(경기도 포천시 신읍동·등록문화재 제271호).1950년대 중반 군부대에 의해 지어져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지만 훼손된 뒤 복원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붉은 성가정 성당 옆 회색빛 벽체 만나다 포천시내의 신읍동에서 서편 왕방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좁은 길을 오르다보면 산 중턱의 예쁘장한 성가정 성당을 만나게 된다. 현대식 건물의 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사제관 앞 언덕을 둔중하게 두른 거대한 축대 위의 흉물스러운(?) 또 다른 건물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쏠린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벽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어 그야말로 폐허를 연상케 한다. 바로 이곳이 구 천주교 포천성당이다. 동쪽 종탑 아래에 ‘성가브리엘성당’이라 새겨진 아치형 출입문에서 휑뎅그렁하게 매달린 종을 올려다보며 안으로 들어서면, 안인지 바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하늘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군데군데 부서져 떨어져나간 틈새를 시멘트로 메운 화강암 벽체가 서있기조차도 버거워 보인다. 그럼에도 서쪽 정면의 감실이며 감실 앞에 두켜로 만들어진 제단은 이곳이 한때 간단치 않은 신앙의 중심 공간이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대지 기증 받아 공병대대가 5개월간 공사 한국의 성당들은 대부분 신자와 신자들의 신앙공간인 공소를 중심으로 해서 세워지곤 했다. 그런데 이 성당은 거꾸로 성당이 먼저 세워진 뒤 신자들이 모여들고 본당이 설정된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다.6·25전란의 험한 세상에서도 살아 남은 교회들은 당시 천주교 신자들에게 ‘하느님이 보호하는 굳건한 성’이란 인식을 심기에 충분했다. 그런 때문인지 1950년대엔 유난히 석조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의정부 제2성당(1953년), 돈암동성당(1955년), 횡성성당(1956년), 홍천성당(1957년), 제기동성당(1957년)이 모두 그런 성당들이다. 특히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석조건물이 적지 않았는데 이 포천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것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6·25전쟁의 포화가 멈춘 1955년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 장군이 성당을 지은 주인공. 할머니의 인도로 독실한 신자가 되었던 이 장군은 당시 신앙처가 없던 포천에 성당터를 물색하던 중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곳을 낙점했다고 한다. 폐허의 성당 앞에 서면 지금도 포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포천의 유지로부터 기증받은 1000여평의 대지 위에 5개월간의 공사 끝에 55평짜리 석조성당과 20평의 사제관으로 지었는데 공사는 모두 이 장군의 지시를 받아 공병대대가 맡았다. 종탑 아래 아치형 벽체에 새겨진 ‘성가브리엘성당’의 이름은 이 장군의 세례명을 땄다고 한다. ●사업실패자가 촛불 켜고 잠들어 지붕 소실 1955년 11월말 완공되었을 때의 모습은 나무 마루바닥에, 인근 덕정리에서 날라온 화강암 벽체와 종탑을 세우고 함석지붕을 인 준고딕식 조적조 성당이었다. 나중에 나무바닥을 걷어내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돌 바닥으로 바꾸었으며 지붕도 동판 기와로 교체했다.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성당 신부, 학자들이 고집을 부려 마침내 지난해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다. 비록 성당안 구조물은 모두 소실됐지만 서쪽 벽에 뚜렷하게 남은 감실과 제의 때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은 신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제대가 놓여 있던 제단이 두개의 층으로 구분된 것도 흥미롭다.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 때 신부들이 신자들에게 등을 돌린 채 미사를 집전하던 제단에 더해 나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자들을 바라보고 집전하기 위해 새로 만든 제단이 붙어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지난해 등록문화재 올라 본당이 설정된 것은 성당이 지어진 이듬해인 1956년. 이후 지난 2004년 의정부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될 때까지 의정부 지역을 비롯해 송우리성당, 일동성당, 운천성당, 가산성당 등 경기 북부지역의 5개 본당을 관할하는 중심본당으로 성장했다. 구 성당 아래의 본당인 성가정 성당은 지난 1992년 별도의 건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춘천교구와 성당측은 구 성당의 외벽 등 지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보수공사를 거쳐 주민들과 미사며 문화행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고 있다. 구 성당을 문화재에 등재하는데 앞장섰던 단국대 김정신 교수(건축학)는 “군의 원조를 받거나 군이 직접 지은 종교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희귀유산인데다 도시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사의 흔적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며 “외관을 그대로 보존한 채 전시회나 야외미사, 휴식처 등 소규모의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홍인, 신유박해때 고향 포천서 순교… 지역 천주교 ‘뿌리’ 구 천주교 포천성당이 지어질 때만 해도 이렇다 할 신앙공간이 없었지만 포천 지역은 원래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이 포천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 바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인(레오·1758∼1802)으로, 지금도 천주교사에 굵은 선으로 남아 있다. 한양에서 포천으로 이주해 온 명망있는 집안 출신인 홍인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부친에게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포천에서 자라난 홍인은 1794년말 중국에서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아 입교했다. 이후 당숙인 홍익만, 황사영 등과 교류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의 책 뭉치가 든 상자를 집안에 숨겨 두었다가 발각돼 44세의 나이에 고향 포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함께 체포된 부친은 한양으로 압송된 뒤 참수됐다. 그 즈음 홍인과 부친의 순교 소식은 전국에 퍼졌으며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신앙공동체를 일구기 시작해 1900년대초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공소가 세워졌다. 이후 1930년대 개성본당,1931∼1935년 행주본당의 관할에 들었으며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2동 본당) 관할지역에 속했다. 이한림 장군이 포천성당을 세운 이듬해인 1956년 본당이 설정되면서 경기북부와 강원도 일부지역을 관할하는 중심성당으로 우뚝 선 것이다. 신앙심이 유별났던 이한림 장군이 포천지역에 성당을 건립할 뜻을 세운 것도 이같은 포천지역의 신앙 내력을 잘 알았던 때문일 것이다. 성당 건립부지를 선뜻 내놓은 지역 유지도 물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에 고즈넉이 앉은 신계사(神溪寺). 갈려진 반도의 북녘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수월치 않지만 예로부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혀왔던 명찰이다. 정어리 어장으로 유명한 장전에서 출발해 만 가지의 다양한 형상을 가졌다고 하는 만물상으로 가는 길 한편에 자리잡아 금강산 관광객들은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보고 싶어하는 곳. 바로 앞쪽 기봉, 왼쪽의 응암, 오른쪽의 문필봉, 뒤쪽의 관음봉에 둘러싸여 천혜의 경관으로도 이름높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1500년 고찰이지만 6·25전쟁 중 무차별 폭격을 당해 삼층석탑과 당우 만이 덩그맣게 남아 있던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맞잡고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신계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일제기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의 ‘신계사지’와 1825년 남경 지환 스님이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에 전한다. 이 사료들대로라면 신라 법흥왕 5년(519년) 보운 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왕실의 통일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신(新)자를 따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창건 이후 김유신은 진덕여왕 7년(679년) 왕실의 기도를 올린 기념으로 사찰을 중건했고 통일 후인 679년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을 보수한 것으로 전한다. 고려기 국사까지 지낸 대표적 화엄사상가 탄문 스님이 보수했으며 서경천도론을 편 묘청에 의해 중창됐고 조선시대엔 나운(1709∼1782년), 대은(1780∼1841년) 스님 등이 주석하며 숱한 후학들을 배출했다고 한다.18세기 말 무렵엔 30여동의 전각들이 들어설 만큼 흥성했으나 일제기를 거치면서 유점사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란을 맞아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금강산은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물며 중생을 제도하는 곳으로 알려진 불교계의 성지다. 이곳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2000년. 남측 불교계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사찰 복원을 협의했으나 지지부진하다가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사찰 되살리기가 시작됐다. 목재며 기와 같은 자재를 일일이 남측에서 날라다 써야 하는 만큼 공사 진행은 무척 더뎠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단 세월의 켜만큼이나 달라진 남북의 전통건축 양식과 사고방식이었다. 현장에서 공사를 총지휘한 도감, 제정 스님은 “초창기만 해도 남북의 인부며 전문가들이 한 끼 밥을 같이 먹기에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전각에 들일 단청 하나를 놓고도 의견 차가 많아 몇주일씩 토의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것은 대웅보전과 만세루,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어실각, 칠성각, 종각, 축성전, 요사채 등 건물 11개 동. 요사채 한 동을 마저 짓고 주변정리를 끝내면 복원공사도 모두 마무리된다. 건물은 복원됐지만 원래의 전각 단청이며 주 불상들은 아직 갖춰지지 못한 상태. 일주문이며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모든 전각들이 일렬로 선 채 사찰 문을 대신하는 만세루를 내려다본다. 이 가운데 주 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 김규복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복원한 사진이 ‘조선고적도보’에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남한 사찰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엄하다. 뒷 외벽에 부처님 설법도와 전법도, 앞 벽에 부처님 칠불을 미장처리하지 않은 건식공법으로 붙였는데 남북 합작의 첫 단청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서쪽 끝의 어실각은 조선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 사찰에 사당이라니. 조선조 숭유억불 체제 아래 그나마 왕실의 사당을 모신 탓에 신계사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인근 표훈사의 본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려 초석과 기단석, 댓돌 등을 온전히 살려냈는데 모래, 황토, 석회를 다진 삼화토(三華土)가 생생하다. 문은 조선조 사당의 전형적인 형태인 삼문(三門) 형태를 띠고 있다. 어실각 바로 옆에 들어앉은 나한각도 특이한 전각.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외견상 한 건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한전과 조사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불교적인 시각으로 볼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부분. 어실각을 둘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지만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찰의 위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나한각과 나란히 앉은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며 바로 옆 축성전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 뒤 현신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곳. 임시로 불상을 봉안했지만 전국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서 내년 부처님 오신 날 원래의 모습대로 불상을 봉안할 예정이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구. 기단에 팔부중과 비천이 부조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쯤 생긴 것으로 금강산 3대석탑 중 하나로 꼽힌다. 빛처럼,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법을 중생에게 가장 빨리 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범종각도 대웅전 앞에 엄연히 자리잡았다. 삼층석탑의 옥개석이며 기둥돌, 대웅전 기단석 등 범종각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발굴 유물들도 눈길을 끈다. “신계사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으나…야수적 폭력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터만 남았다.-국보유적 제95호 신계사터” 북측이 신계사 터에 세운 표지석 명문이다. 남과 북의 불교계가 사찰 복원의 원(願)을 세우기 한참 전 새겨진 명문이지만 남북 불교계가 합동 작업을 벌여 복원해놓은 신계사의 명문답게 새로 고쳐써야 할 것 같다. kimus@seoul.co.kr ■ 창건설화 들어보니 신계사의 명칭이 언제부터 ‘神溪’로 굳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창건 당시 원래의 이름은 ‘新溪’였다고 한다. 많은 사찰이 창건이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듯이 신계사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신계사 앞 개울에는 알을 낳기 위한 연어 떼가 몰렸다고 한다. 당연히 연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바로 앞에서 살생(殺生)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절집에서 그냥 놔둘리 없었음은 빤한 일.“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신계사 창건주인 보운 조사가 결국 주문으로 방편을 써 고기 떼를 푸른 바다(동해)로 몰아내었고 그 바다까지 계곡물이 이르러도 고기 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운 조사가 용왕에게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요청했는데 신통하게도 그때부터 이곳에서 연어 떼를 볼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란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설화가 다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게 각색된 이야기쯤으로 돌릴 수 있지만 설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어 흥미를 더한다. 2003년 11월 신계사 대웅보전 발굴 조사 때 수습된 평기와가 그것. 기와의 등에 물고기가 새겨졌는데 물고기 문양이 들어 있는 기와 유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멀리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전남 목포의 구시가지인 양동 127 언덕배기에 오똑하니 서있는 석조건물 양동교회(담임 목사 정기대·등록문화재 제114호).1910년 신자들이 유달산의 돌을 옮겨다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다. 개항기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전진기지로 부각된 목포에서도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호남의 중심적인 신앙유산. 지금은 목포 신시가지가 번성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도 자연스레 옮겨갔지만 100여년간 원래 자리에서 옛 모습을 잃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해온 양동교회의 신앙적 자부심은 여전하다. 개항기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포에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것도 역시 선교사였다.‘양동교회 100년사’ 등 기록에 따르면 1893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 몇몇이 호남지역 선교기지를 낙점하기 위해 군산 무안반도 등지를 오가며 전도활동을 한 것이 이 지역 개신교 전파의 시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당시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기세에 잠시 활동을 멈췄지만 세상이 안정되면서 전남 나주를 선교기지로 만들기 위해 배유지·하위렴 목사를 파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주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이 강했던 곳. 당연히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선교사들이 나주 신앙터 건립을 위해 사들였던 부지를 팔아치우고 옮겨온 곳이 바로 목포다. 당시 목포에는 이미 바깥에서 들어온 신자들이 퍼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활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97년 지금의 양동교회 자리인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양동교회의 시작이다.1년 만에 신자가 30여명이나 생겨났으며 1906년에는 당회를 구성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었다. 신앙의 씨앗을 뿌린 배유지 선교사는 1905년 광주로 떠나 양동교회의 건립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양동교회 건물을 세운 것은 1909년 당회장으로 청빙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윤명식 목사. 조선인 목사가 담임 목사를 맡은 것은 당시 한국 전체에서 네번째, 호남지방에선 처음이었다. 윤 목사는 당시 돈 7000원을 들여 그 이듬해 마침내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06평 규모의 교회를 세워놓았다. 신앙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인 목사와 신자들이 직접 올려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인 것이다. 교회 본당 건물의 주춧돌과 외벽 석재들은 모두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다 썼다고 한다. 교회에 들어서면 정면 오른쪽에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86년 처음으로 목포지역 교회가 모두 모인 가운데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후 선교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선교기념비다. 함석 지붕을 인 교회 본당은 원래 사방의 크기가 똑같은 정방형으로 세워졌으나 1982년 교회 정문 앞에 있던 종각을 헐고 본당 정면에 종탑을 들이는 바람에 앞쪽 공간이 조금 늘어나 125평의 규모가 되었다. 종탑 머릿돌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이사야 56장)구절이 새겨져 있다. 본당 출입문도 원래는 양측에 두 개, 정면에 두 개가 있었는데 종탑을 세우면서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다. 네 개의 문을 만든 것은 남녀 신자들이 각각 다른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 이 출입문의 위쪽 부분이 모두 태극 문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등나무 넝쿨이 태극 문양을 가리는 바람에 일제 경찰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신자들은 귀띔한다. 당시 교회를 세운 목사와 신자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신자는 300명 정도. 양동에서 대를 이어 사는 고령층 교인들이 많지만 신앙처를 바꾸지 않은 채 오래도록 적을 두고 있는 인근 지역의 신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신자 수와 교세를 감안할 때 목포 지역 350개 교회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은 20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양동교회 제21대 담임 정기대(44) 목사는 “초기와 달리 양동교회의 역할이 분산됐지만 목포 주민들과 교인들 사이에선 한국인 목사를 담임으로 모신 호남 최초의 자립교회이자 신앙 중심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목포의 3·1운동… 그 중심에 선 교인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목포에서도 20일과 4월 8·9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4월8일의 이른바 ‘4·8 만세운동’은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며,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양동교회가 있었다. 당시 청년·시민들의 시위 움직임에 호흡을 맞춰 3월1일 이전부터 별도의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해온 기독교인들은 바로 양동교회의 주요 신자들. 장로였던 곽우영을 비롯해 집사 서기견·서화일, 정명여학교(양동교회가 세운 미션스쿨) 한문교사였던 강석봉이 그들이다. 당시 매일신보 등 기사에 따르면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기독교인들은 이날 새벽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집집마다 돌린 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가지에서 일제히 시위를 시작했다. 시가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뒤덮였고 시위에서 체포된 80여명이 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특히 양동교회 집사 서기견은 시위 현장에서 일경의 칼에 맞은 상처와 혹독한 고문 탓에 출감 직후 사망했다. 검거된 시위자 중 40명이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1∼3년의 징역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일 오후 1시15분쯤에 목포 창평정 근처에서 별안간 4명의 야소교학교 여생도가 몰려나오며 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을 경관이 잡아 본서로 인치하였는데….”(4월11일자 매일신보)/“8일밤에 야소교 경영의 여학교 졸업생 약 40명이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관헌이 출장하여 제지하고 주모자를 잡았다더라.”(4월12일자)/“목포는 지난 8일 이래로 불온한 형세가 되어 각 상점은 오전 중에 철시하고 그 이튿날 9일에도 오전중 폐점하였는데, 양일간에 관헌의 활동으로 선동자 20여명을 포박하고 일변 군대가 오는 등….”(4월14일자) 특히 20일자 기사는 “금월 8일 이래로 소요사건에 관계된 남궁혁·김영주·곽우영·서화일·배치문…외 32명은 경찰서 취조를 마치고 17일에 검사국으로 넘어왔는데, 당일은 조선인 군중이 약 1000명이나 재판소에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검사국 취조를 마치고 감옥으로 넘어갈 때에는 울음소리가 자자하며 일시 목불인견의 비극을 이루었더라….”라고 기록해 당시 시위사건과 관련한 목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양동교회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과 그로 인한 교인·가족들의 희생과 고난도 당연히 비례했다.
  • “폐교같던게 한달만에 새학교로…”

    “학교가 달라졌어요. 구청장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지난 7일 오후 맹정주 서울 강남구청장 앞으로 큰 상자가 하나가 전달됐다. 이 상자에는 강남구 봉은초등학교 학생 960여 명이 맹 구청장에게 쓴 감사의 편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방학이 끝나 한달여 만에 등교한 학생들이 달라진 학교 모습에 감동을 받아 쓴 편지였다. 전교생 1008명인 이 학교 어린이들 거의 전부가 감사의 편지를 쓰다시피 했지만 알고보면 사연은 아주 간단(?)했다. 계단의 틈이 벌어지고, 외벽의 칠이 벗겨져 폐교처럼 보였지만 예산 부족으로 학교가 손을 못대고 있던 것을 강남구가 예산을 지원, 계단은 보수해주고, 외벽을 새로 칠해 줬기 때문이다. 강남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인도와 차도가 구분돼 있지 않아 사고의 위험이 높던 학교앞 도로에 보행도로를 내주었다. 이들 사업에 들어간 돈은 고작 6000여 만원. 강남구는 연간 50여억원을 들여 75개 초·중·고교를 선별 지원하고 있지만 이번과 같은 감사편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년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한 남학생은 “개학을 하고 보니 한 달도 안된 듯한 새 학교가 됐다.”며 “나는 한 학기만 다니면 졸업하지만 동생들을 생각하니 정말 좋다.”고 썼다. 1학년 한 어린이는 “계단을 고쳐줘서 너무 고맙다.”면서 “감기 조심하라.”는 안부도 덧붙였다. 학생들의 편지에는 ‘키 크는 데 도움이 되는 농구대를 설치해 달라.’‘냄새나는 화장실을 고쳐달라.’는 등의 애교섞인 부탁도 적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편지에 감동을 받은 맹 구청장은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서로가 감동하게 되고 사회가 훈훈해진다.”면서 이 편지들을 구청 1층에 전시토록 했다. 구 관계자는 “강남구에 있는 각급 학교의 경우 강남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역차별’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교육청의 예산지원이 적어 시설물 보수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예산 여건이 좋지 않지만 앞으로도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강남구는 올해 30여개 학교 지원을 위해 교육경비로 55억 6000여 만원을 편성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8) ‘한국천주교 순교1번지’ 전동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8) ‘한국천주교 순교1번지’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박해와 그로 인한 희생의 흔적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전북 전주는 그 가운데서 참수·능지처참 등 극형으로 목숨을 잃은 초기 희생자가 유난히 많아 ‘순교의 땅’으로 통한다. 그 ‘순교의 땅’ 전주에서도 전동성당(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주임 김준호 신부, 사적 제288호)은 최초의 순교자를 낸 ‘순교 1번지’에 세워진 호남의 모태 본당이다. 호남 지방의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웅장한데다 곡선미가 빼어나 ‘호남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회자되는 성당. 그러나 화려한 명칭과는 다르게 초기 한국천주교의 절절한 사연이 담긴 신앙 증거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전동성당은 전주 시내에서 전북도청을 관통하는 남문로의 남쪽 끝부분에 오똑 앉아 있다. 초기의 성당들이 대부분 구릉지에 세워진 흐름에서 비켜 평지에 세워진 몇 안 되는 성당이다. 맞은편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놓은 경기전이 있고 동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엔 고려 때 쌓은 전주성의 남문인 풍남문이 우뚝 서 있다. 거듭된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은 ‘풍남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이 처형당한 곳도 이곳이다. 한국의 초기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분주폐제’(焚主廢祭,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와 ‘대박청원’(大舶請願, 선교사를 데려오기 위해 서양선박을 불러들임). 전라도 진산(지금의 충남 금산)에 살던 윤지충은 1791(신해)년 5월 모친상을 당한 뒤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해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했는데 이는 당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른바 ‘진산사건’. 결국 두 사람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풍남문 밖’인 지금의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되어 9일간 풍남문에 내걸렸다. 이곳 신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혹한에도 선혈이 응고되지 않았다.”는 기적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탄생한 것이다.‘대박청원’은 호남의 부호이면서 천주교를 가장 활발하게 전교했던 ‘호남의 사도’ 유항검이 중국에서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한 사건. 유항검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켰다.”는 이유로 대역무도죄와 사학괴수로 몰려 1801년 역시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권상연이 순교한 지 100년이 지난 1891년 봄 두 사람의 순교 터에 본당 터전을 마련해 전교를 시작한 호남의 모태 본당.1908년 초대 주임인 프랑스의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 완공됐다. 당시 일제 통감부는 전주에 신작로를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보두네 신부가 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윤지충·권상연·유항검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현장의 돌을 주춧돌로 사용해 순교지와 ‘신앙의 요람’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성당 지하에는 당시 썼던 주춧돌이 성당을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다. 공사에는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으로 벽돌을 구웠고, 석재는 전북 익산 황등산의 화강석을 마차로 운반해 왔다. 목재는 지금의 치명자산에서 벌목해 사용했다고 한다. 전주 시내뿐만 아니라 인근 진안, 장수, 장성 등지의 신자들이 밥을 지어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 공사를 거들었다. 그렇게 해서 성당봉헌식이 열린 것은 1931년.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무려 23년이 걸린 것이다.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에 비잔틴 풍의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12개의 창이 달린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이 성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초기의 적·회색 벽돌색이 그냥 남아 있는 성당 내외벽도 인상적이다. 내부 공간은 서울 명동성당에서처럼 공중 회랑에다 자연채광이 되도록 많은 창을 내었다. 그래서인지 명동성당은 ‘아버지 성당’, 전동성당은 ‘어머니 성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성당 양측 벽면 18개 창 가운데 신자석을 향한 12개의 색유리창에는 성인품에 오른 103위 한국 순교자 중 전주 숲정이와 서천교에서 희생된 7명의 성인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권상연, 유항검과 유관검,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자인 유중철·이순이, 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와함께 제대 주위에는 예수의 탄생부터 수난·부활·승천·성령강림·성모승천을 보여주는 색유리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가장 아름다운 교회’라는 명성에 걸맞게 신자들의 순례지는 물론 영화계와 결혼을 앞둔 커플들의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강재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일부분과 영화 ‘약속’중 주인공 박신양·전도연의 결혼식 장면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1937년 전주교구 설립과 동시에 주교좌 성당으로 격이 오른 전동성당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점령당해 전라북도 인민위원회와 차량 정비소·보급창고로 사용되면서 제대와 성당 내부가 파괴되었다.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1980년대엔 전라북도 지역 ‘민주화의 성지’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동편 2층 회랑이 전소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북한군에 의해 파괴된 십자가의 길 14처를 복구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차례 보수 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마룻바닥은 1973년 인조석으로 교체되었고 유리창은 1975년에 개수됐다.1992년부터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 부식된 벽돌을 새 벽돌로 교체했고 성당 양측 벽면 창문 18개도 유리화로 새단장했다. 원래 있던 담장도 헐어 시민들이 언제든지 자유롭게 찾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kimus@seoul.co.kr ■ “얇은 얼음위 걸어가는듯… 유혹 이겨낼수 있도록 기도” 전주는 숱한 순교자를 낸 ‘순교의 땅’으로 유명하지만 그가운데서도 동정부부 유중철·이순이는 빼놓을 수 없는 ‘순교자의 꽃’으로 자주 회자된다. 이 동정부부는 세계 천주교사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 외국에까지 알려져 있다고 한다. 유중철은 ‘호남의 사도’로 불리다 전주 남문 밖에서 처형된 유항검의 맏아들이고, 이순이는 조선 태종의 14대손으로 지봉 이수광의 8대손인 이윤하와 권일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 신앙심이 두터운 가계에서 자라난 두 사람은 중국에서 들어온 주문모 신부에 의해 동정부부로 연을 맺었다. 호남 지역 전교길에 나섰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유항검의 집(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일명 초남이)에 머물던 중 유항검의 장남 중철이 동정으로 살겠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고 혼사를 주선한 것이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이듬해 초남이 유항검의 집에 내려온 두 사람은 4년간 동정 부부의 생활을 하다가 신유박해 때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20세의 나이에 전주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 이순이가 참수되기 직전 옥중에서 친정 어머니와 언니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동정부부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 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두 사람은 동정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4년을 오누이처럼 지냈습니다. 그런 중에 육체적인 유혹을 근 십여 차례 받아 하마터면 동정서약을 깰 뻔했어요.”(어머니에게)/“육체적인 유혹이 심해서 마음이 두렵기가 얇은 얼음 위를 걸어가는 듯, 깊은 물가에 서 있는 듯했어요. 주님을 우러러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지요. 주님의 도우심으로 간신히 그 유혹을 떨쳐 동정을 온전하게 지켜내었습니다.”(언니에게) 두 사람이 4년간 동정부부로 살았던 유항검의 집은 유항검 일가가 참형으로 순교한 뒤 조정에 의해 헐려 연못으로 변했다. 조선시대 중죄인에게 가해지는 파가저택(破家宅)이 된 것이다. 지금 그 터에는 작은 웅덩이 하나가 남아 있어 천주교계에서 성지로 가꾸고 있다. 유항검과 유중철·이순이 동정부부의 무덤은 전주 교동의 치명자산(중바위)에 있으며 여기에는 국내 신자뿐만 아니라 외국인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100m 상공 ‘붉은 악마들’

    100m 상공 ‘붉은 악마들’

    “어이, 그렇게 붙이면 박지성 입이 삐뚤어지잖아. 옆으로 좀 당겨봐. 아니 아니, 거긴 F-15번 자리지….” 8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을지로3가의 대기업 본사.33층 건물 서쪽 벽면에서 곤돌라에 탄 설치기사 5명이 초대형 현수막을 붙이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축구대표선수 이영표와 박지성이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으로 가로 28m, 세로 48m 크기. 스티커처럼 된 230개의 조각그림을 한 장씩 외벽에 갖다붙이는 필름형 현수막 설치작업. 멀리서 보면 널따란 벽에 조각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옥상으로부터 25m 이상 내려왔지만 아래로는 여전히 120m가 남았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수많은 조각들을 붙이다 보면 실수도 있을 법한데 기사들은 헷갈려하지 않는다. 미리 실측을 한 뒤 건축도면에 따라 정확히 재단하고 번호까지 매겨뒀기 때문이다.“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경력 10년이라는 기사는 “4㎝ 굵기 로프에 매달릴 때도 있는데 이건 약과”라고 했다. ●건물 위 폭염, 상상을 초월 월드컵 개막을 하루 앞둔 8일에도 그들은 지상 100m 상공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울 도심의 회색 빌딩들을 ‘월드컵색’으로 꽃단장하는 현수막 시공기사들. 현수막을 걸 때에는 통상 로프나 곤돌라·크레인을 이용한다. 요즘처럼 일이 몰리는 ‘대목’이면 기사들은 로프작업을 선호한다. 박금산(37)씨는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해야 돼 위험하긴 해도 능률면에선 곤돌라나 크레인이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로프를 탈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바람. 땅에서는 별 것 아닌 초속 8m 정도의 흔들바람만 불어도 20층 상공에서는 사실상 작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강변 여의도와 마포 등지는 현수막 기사들에게 악명 높은 곳이다. 위험한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게 한여름 뙤약볕이다. 기사들 대부분 올해 유난히 빨리 온 폭염에 많은 고생을 했다.“높은 곳이라 시원하겠다는 건 아무 것도 모르는 소리예요. 한낮 유리에 반사되는 복사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고통, 당해보지 않고는 모르죠.” 건물 위에 올라갈 때에는 불필요한 물건은 동전 하나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100m 이상에서는 실수로 떨어뜨린 동전 하나가 저 아래 보행자에게는 ‘총탄’이 될 수 있다. ●“목숨걸고 버는 소시민의 특수” 대형 현수막은 ▲천으로 된 일반형 ▲비닐재질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망사형(mesh) ▲그림을 바로 건물 외벽에 붙이는 필름형 등 3가지다. 요즘에는 망사형이나 필름형 현수막이 인기가 많다. 강석원(44)씨는 “필름형은 도배하듯 붙여나가야 돼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건물 안에서 밖을 보기가 쉽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11시20분, 퍼즐이 드디어 제자리를 잡으면서 이영표와 박지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 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굵어지면서 기사들의 손이 더욱 바빠진다. 유리벽에 접착 성분이 있는 필름을 붙여나가야 돼 비가 오면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굵어지지 않았다. 정오를 약간 넘기면서 작업이 끝났다. 이틀동안 만 18시간 만이었다. 전문 현수막기사 들은 하루에 20만∼30만원 정도를 받는다.20층 이하 건물은 20만원 선이지만 더 높아지면 단가가 높아진다. 일종의 위험수당인 셈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데다 부착부터 보수, 철거까지 다 해주는 걸 생각하면 많은 돈도 아니란다. 강씨는 “다른 사람들은 월드컵 마케팅으로 얼마나 버는지 몰라도 우린 일당으로 먹고 산다. 땀 흘린 만큼 번다는 면에서는 특수치고는 꽤나 서민적인 것 아니냐.”며 껄껄 웃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건물 겉 통째 광고로 덮어라”

    |파리 함혜리특파원|리츠호텔과 최고급 보석상들이 즐비한 파리의 방돔광장에 여성의 상반신을 담은 초대형 광고판이 등장했다. 방돔광장과 평화거리(Rue de la Paix)의 모퉁이에 설치된 300㎡ 크기의 이 광고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석 제조상 ‘부슈롱(Boucheron)’이 건물 보수공사기간을 활용해 외벽에 설치한 것이다. 검은 마스크를 들고 있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파리에서 건물 외벽을 활용한 초대형 광고가 뜨고 있다. 특히 유명 브랜드들 사이에서 공사 중인 건물 외벽을 광고판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부슈롱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보석상 쇼메와 뷜가리, 유명 시계점 파텍 필립도 부슈롱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건물 외벽을 대형 스크린을 감싸 광고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돔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캉봉 거리와 생토노레 거리에서도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로베르토 카발리의 대형 광고판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다. 역시 이 건물도 보수공사 중이다. 유명 식품점 푸케(Fouquet)는 오는 가을 샹젤리제에 초대형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지난 16개월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건물외벽에 2200㎡ 크기의 대형 광고를 내걸어 톡톡히 재미를 봤다. 특수 인쇄된 대형 그림은 스위스의 예술가 프랑수아 바르투가 그린 것으로 제작비만 60만유로(약 7억원)가 들었다. 푸케의 소유주인 바리에르 그룹의 도미니크 데세뉴 대표는 “공사 중인 건물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외벽을 광고판으로 활용하면서 오히려 광고효과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광고트렌드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루이뷔통의 샹젤리제 매장. 루이뷔통은 지난 3년 동안 공사중인 건물 외벽을 초대형 가방 모양으로 장식해 화제가 됐었다. 건물외벽 광고전문 대행사인 아템의 앙투안 로크빌 대표는 “건물 보수공사에 들어가는 유명 브랜드들 2곳 중 1곳은 대형 광고판을 설치할 정도로 보수공사 중인 건물외벽을 활용한 초대형 광고판 설치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00년이 넘는 건물들이 즐비한 파리에서는 항상 어디에선가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아주 훌륭한 광고수단이 된다.”고 덧붙였다. lotus@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 대웅전

    ‘한국불교 1번지’ 조계사(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 대웅전. 일제치하 불교 총본산으로 세워져 지금은 조계종 직할교구본사 본당의 위상을 갖는 건물이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책에 따라 막혀 있던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면서 불교계의 중지를 모아 건립된 불당으로, 단일 목조건물론 국내 최대 규모. 조선후기 전통사찰 불전과 궁궐 양식이 혼합된 대웅전에는 일제에 시달렸던 우리 민족의 한과 암울했던 시절 불교중흥을 위한 불교계의 염원이 함께 서려 있다. ‘4방에 계단을 둔 단층 석조 기단위 정면 7칸, 측면 4칸의 평면에 외부 22개의 평주, 내부 12개의 고주를 세워 다포계 단층 팔작지붕을 얹은 155.7평 규모의 남향 불전.’ 조계사 대웅전 앞에 서면 법당은 물론, 기단과 공포(拱包, 처마 끝을 받치는 기둥머리에 맞추어댄 나무쪽)의 크기에 압도당한다. 조선후기 불교 건축양식에 충실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조선왕조의 궁전보다 더 장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있다. 우선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단. 높이가 160㎝에 이르는 단층 석조인데 경복궁 근정전을 포함해 어느 궁전의 기단보다도 높다. 다음은 공포.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짠 다포계로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궁전보다 안팎으로 2출목씩이나 더 많을 만큼 장중하다. 대웅전 천장 높이는 자그마치 8.5m. 대웅전 디자인을 비롯해 곳곳에 스며있는 궁궐 양식도 눈길을 끈다. 외벽 큰 기둥을 받친 장초석은 경복궁 집옥재(1873년)의 것과 비슷하며 기단 전면에 일렬로 배치한 석조 동물상 중 해태상도 궁정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이다. 불전에 궁궐양식을 쓴 것은 당시 불교계가 얼마만큼 이 건물을 중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건립을 맡았던 도편수와 부편수는 모두 궁궐 재건공사를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도편수 최원식은 1920년대 창덕궁 대조전 재건 공사를 총지휘한 도편수로 대웅전 건립을 위해 경복궁과 덕수궁을 여러 차례 시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 설계 담당이며 관리직들은 모두 이왕직(李王職) 영선과 소속 일본인으로 돼 있었으나 사실상 대웅전 건립은 모두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불상을 모신 불단도 폭 14.57m, 높이 2.3m의 초대형.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강원도 홍송으로 교체했다. 불단 크기에 비해 불상은 왜소한 편. 불전 건립때 도갑사의 것을 개금해 모신 것인데 오는 10월쯤 대웅전 동편에 들어서는 영산전으로 옮겨지며 대신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등 17자 크기의 대형 삼존불이 봉안된다. 석가불좌상 뒤편, 즉 후불벽에는 1978년 새로 봉안된 천불도와 목각탱이 걸려 있다. 대웅전 정면은 전혀 벽이 없이 모두 장엄한 꽃판문과 꽃판창으로 처리했는데 벽 안쪽에는 천부중·신중, 바깥쪽에는 최근에 그려진 불전도가 장엄되어 있다. 바닥은 원래 다다미가 깔려 있었으나 최근 불단과 함께 강원도 홍송으로 바꿨다. 그런데 조계사의 원래 이름이 ‘태고사’였고 대웅전도 증산도 원류인 민족종교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十一殿)’을 옮겨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먼저 태고사는 일제하에서 한국불교를 지켜내려는 당시 불교계의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이름. 일제의 민족말살책에서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사찰령을 시행한 데 이어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댄 게 바로 총본산 건립이다. 식민지 시절인 만큼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총본산 설치에 총독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나름대로 한국불교의 맥을 지키기 위해 불교계가 뭉쳤다.1935년 8월 전국 31본산주지회의 이후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란 대표기관을 설치한 데 이어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을 갖는 사찰을 세운다는 원칙아래 인근 각황사 교당 개축에 뜻을 모은 것이다. 각황사는 지금의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있던 한국 최초의 불교 포교당. 이 각황사를 헐어 지금 조계사 자리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는데 새로 대웅전을 건립하고도 그 명칭을 확정짓지 못하다가 고심끝에 한국불교의 법통을 태고 보우에서 찾는다는 뜻에서 삼각산(현 북한산)의 태고사로 정해 총독부에 신청한 것이다. 태고사는 전국승려대회 이후 소유권 다툼이 법정으로 비화한 끝에 1975년 6월에야 명칭이 조계사로 변경되었다. 그러면 왜 하필 보천교 십일전을 옮겨왔을까. 아무래도 당시 신도가 12만명에 불과했던 불교계 형편상 기존 건물을 옮겨짓는 것이 비용절감에 긴요했고 무엇보다 보천교가 일제에 강하게 맞서 일제에게도 위협적인 종교란 점에 착안했던 것 같다. 조계사 대웅전은 단순히 불교의 한 가람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천교는 한때 신도가 2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컸다.1928년 당시 전북 정읍의 보천교 본소는 2만평 부지에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내장사 대웅전 같은 건축물이 45채나 들어섰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특히 십일전은 일제가 남산에 설치한 조선신궁(神社)에 대응해 지은 건물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뒤 일제는 대대적인 보천교 말살에 나서 결국 십일전을 강제로 헐값(1만 2000원,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30전)에 사들였는데 불교계가 이것을 매입해 옮긴 것이다. 대웅전 기둥과 대들보는 십일전의 것을 그대로 옮겨 세웠으며 형태도 사실상 십일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계사 대웅전이 낙성된 것은 1938년 10월25일. 건립엔 총 17만원이 소요됐으며 기술자는 목공 7000명, 와공(瓦工) 200명을 포함해 6500명, 인부는 6만 5000명이 동원됐다. 당시 만해 한용운은 ‘총본산건설의 재인식’(1938년 ‘불교’ 신제17집)이란 글에서 대웅전의 규모를 말하면서 “만일 이 건물을 신축하자면 최소한도 100만원은 초과치 아니하면 안 되겠다고 하니 얼마나 훌륭한 집인가.”라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19∼20세기를 통틀어 한국 최대의 건축불사(佛事)였던 셈이다. 조계사는 지난 2004년부터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전통사찰 양식에 충실한다.”는 원칙을 세워 기둥과 지붕 등 기본 골격과 구조물은 변형하지 않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바뀌어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천장을 민반자로 완전히 바꾸면서 천장에 있던 그림들이 모두 철거됐고 자개 장식의 불단도 완전히 바뀌었는가 하면 새로 봉안될 3존불 위에 전통양식의 닫집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장식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이강근(48) 경주대 교수(미술사학)는 “전통사찰 양식도 중요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 문화재의 구조물들을 교체하는 것은 역사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큰 오류”라고 말한다. 이 대웅전 해체 보수공사를 시작으로 4년 안에 조계사에는 종각과 보제루·영산전이 새로 들어서 환골탈태하게 된다. 경내에 있는 여관 현대장도 헐려 그 자리에 24시간 개방형 시민선방이 세워진다. 조계사 주지 원담(48) 스님은 “조계사는 서울 중심에 위치한 대표적인 신중도량으로 한국불교의 견인차 역할을 계속 하게 될 것”이라며 “그러나 한국불교 1번지의 위상에 맞지 않게 사찰 형태가 초라하고 급하게 지은 대웅전도 전통 사찰양식에서 비켜난 부분이 많아 해체보수를 통해 한국불교 고유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kimus@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

    [김성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

    1898년 서울 목멱 자락인 종현(鐘峴)에 우뚝 세워진 ‘한국 천주교의 얼굴’ 명동성당(중구 명동 2가1, 사적 제258호).60대 후반을 넘긴 세대에겐 지금도 ‘언덕 위의 뾰족집’으로 통한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45년 해방 후부터였고 원래 이름은 당시의 지명을 딴 ‘종현성당’.1900년 이전 세워진 건물 중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것이면서 가장 순수한 고딕양식의 이 성당은 ‘뾰족집’이란 별명에 걸맞게 전형적인 고딕양식을 띠고 있다. 고딕은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하면서 로마교황의 권력이 증대하고 그리스도교가 융성하던 12세기 프랑스에서 완성된 건축양식. 교회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한 앙천(仰天)의 구조가 특징이다. 명동성당 역시 경사지 구릉의 산봉우리를 깎은 정상부에 자리잡아 주변을 내려다보고 있고 진입로와 성당의 높이가 약 13m의 고도차를 가져 확연히 드러나는 위용을 갖추고 있다. 뾰족한 아치와 궁륭천장, 기둥에 의해 구획되는 6칸의 회중석 공간과 교차부, 두 칸의 익랑(翼廊), 두 칸의 성단(聖壇) 구조의 삼랑(三廊)식 라틴십자형 내부공간이 고딕양식의 전형이라면 단순한 외관과 견고한 벽체의 구조체계와 공법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다. 대부분의 중세 유럽 성당이 서쪽 입구를 둔 동서배치였던 데 비해 정북에서 30.5도 서쪽으로 기울어진 북북서쪽 입구를 가진 남북배치형태는 파격이다. 규모는 건축면적 427.14평, 연면적 612.65평에 외곽길이 68.25m, 외곽 폭 29.02m, 건물높이 23.48m, 종탑높이 46.70m. 그런데 명동성당은 왜 하필 이곳에 세워졌을까. 그것은 성당을 건립한 선교사들이 당시 높은 곳에 교회를 세우는 전통을 고집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인근 명례방이 한국 최초의 순교자를 낸 천주교회의 태동지임을 의식해서였다. 흔히 한국천주교의 특징은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자생적 신앙’으로 요약된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한게 1784년. 한국천주교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이승훈은 현재의 명동 부근인 수표교 근방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베풀고 신앙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이 신앙공동체가 성장해 당시 명동일대인 명례방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신앙집회가 열렸지만,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는 형벌과 고문끝에 1786년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이후 100여년간 한국 천주교는 신도 1만여명과 성직자 10여명이 순교하는 고초를 겪었다. 명동성당이 세워진 종현(鐘峴)은 이처럼 한국 최초 교회의 발상지이며 최초의 순교자였던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 옆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조정에서는 성당터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성당터가 조선왕궁을 내려다보고 있고 특히 조선조 임금들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의 주산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정과의 부지 소유권 분쟁이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결국 교회가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아 성당 건립이 이루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천주교를 적대적으로 대했던 정부가 차꼬를 푼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많은 종교시설들이 들어서게 된다. 1898년 축성후 다섯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쳤으며 지금은 외벽공사가 한창이다. 성당 내에는 제구, 가구를 포함하여 많은 고정구조물이 있는데 성당 축성과 함께 마련된 대리석 주제대와 벽돌조의 부제대, 성상과 14처 등을 제외한 모든 게 완공 이후 제작 설치됐다.1920년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성성 25주년 기념으로 제작 설치된 강대부분은 해체되어 독서대와 목조제단으로 조립되어 사용되고 있다. 닫집은 강대와 같이 철거되어 주교좌 상부에 설치되었다. 파이프 오르간 역시 뮈텔 주교의 주교성성 25주년을 기념하여 전국의 신자들이 모금한 성금 2만원으로 설치됐지만 미국제 전자식 파이프오르간으로 대체된 뒤 현재의 독일 보슈사 파이프 오르간으로 재설치되었다. 복자제대와 79위 복자상본은 1925년 복자시복 때 시설된 것이다. 건립 당초의 14처는 1963년 무렵 다른 작품으로 교체되었으며 원래의 것은 수유리성당에 보관되고 있다. 바닥도 원래 마루바닥에 의자가 없었지만 1950년대 말 장궤의자가 도입되었다. 일제강점기와 정부수립, 전란기를 거치며 현대사의 중심 공간 역할을 했던 명동성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군사정권에 맞선 ‘해방구’가 되어 1987년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명동성당은 다시 태어나려 한다.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사제들 사이에 “본연의 신앙 터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주변의 문화시설을 아우르는 문화특구 지정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이창영(45·가톨릭신문사사장) 신부는 “한국 천주교의 심장이랄 수 있는 명동성당은 교회의 의도와는 다르게 정치·사회적으로 이용된 경우가 많다.”며 “현대사회에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기 위해 초기 교회의 신앙을 바탕으로 생명존중과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 명동성당은 어떻게 건립됐나 최초의 순교자를 낸 명례방을 중심으로 창설된 이 땅의 신앙공동체는 처음 북경교구에 소속됐다가 1831년 로마교황청에 의해 조선교구로 설정됐고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이 신설교구의 전교를 맡겼다.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성당 부지매입에 나섰고 1887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된 뒤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작업이 시작됐다. 조정과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기공식은 1892년 5월8일에 가서야 있게 된다.6년간에 걸친 공사 비용은 성당 축성 직후의 독립신문 등 기사를 볼 때 당시 돈으로 약 6만달러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립비는 부지 매수비용을 포함해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에 의한 것이었으나 신도들의 노력봉사와 성금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은 대부분 조선 정부에서 기와를 굽고 있던, 진흙땅이 있던 용산 한강통 연와소에서 제작해 조달했고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는 청나라에서 초빙했다. 완공까지에는 인부들의 잇딴 사상과 자금난에, 블랑주교와 설계자인 코스트 신부의 사망까지 겹쳐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다.1890년부터 1932년까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기록한 일기에선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읽혀진다. 마침내 성당이 위용을 드러낸 것은 1898년 5월29일. 주한외교사절과 조선 정부의 고위관리들,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 한국 신부들과 신자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한 축성식이 열렸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글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공직초대석] 국립공원관리공단 산사나이 4인

    [공직초대석] 국립공원관리공단 산사나이 4인

    일년 열두달 가운데 열달을 산중에서 보내는 사나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산은 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한, 삶의 터전이다. 산에 살고 산에 죽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듯싶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능선 한 가운데쯤 자리잡은 해발 1340m 벽소령 대피소. 국립공원관리공단 소속 우동제(44) 대피소장과 허성(32), 이성우(31), 박종규(27)씨가 근무하고 있다. 마침 산불예방을 위한 통제기간(3월1일∼5월15일)이어서 탐방객의 발길은 끊어진 상태다. 휘이∼잉 불어오는 거센 바람소리만 그득할 뿐이다. 고적감 그 자체. 우 소장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근무한 지 20년이 지났다. 한때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도 잠깐 근무했지만 지리산 품으로 되돌아왔다.“드넓은 지리산이 그리워서…”라고 했다. 이성우씨도 비슷하다. 서울 강남의 조경회사에서 근무하다 “산이 좋아서” 이곳 오지생활을 택했다. 허성씨는 산중 생활 2년째, 그리고 막내 박종규씨는 이제 막 보름이 지난 신출내기다. 할 일은 많다. 입산이 통제된 요즘엔 성수기에 대비해 시설물을 보수·점검하는 일에 매달린다. 나무로 지어진 대피소 건물이 비바람에 훼손되지 않도록 화창한 날을 골라 외벽에 기름칠하는 것도 큰 일이다. 탐방객이 쓰는 이불을 빠는 것도 이 즈음이다. 수백채의 이불을 꾸러미로 만들어 놓으면 헬기로 날라 산아래에서 세탁한다. 등산로를 돌며 바람에 날려온 비닐봉투나 담배꽁초 같은 쓰레기 청소 역시 빠지지 않는 일과다. 그래도 요즘엔 쓰레기가 한결 줄었단다. 우 소장은 “탐방문화가 참 많이 좋아졌다.10여년 전만 해도 쓰레기를 줍느라 종일 땅만 보고 걸었을 정도”라고 했다. 성수기엔 몸도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탐방객 이부자리 정리부터 시작해 실내 청소를 하는 데만 꼬박 3시간 넘게 걸린다. 오후는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다. 밀려드는 탐방객에게 숙소를 배정해 주고, 간이매점에서 이런저런 물품을 팔거나 때때로 벌어지는 탐방객들 사이의 다툼을 중재하기도 한다. 산이 좋아서 선택한 근무지지만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치밀 때도 있다. 과음으로 술 주정을 부리는 탐방객 탓이다. 허성씨 말처럼 “술 마시고 잠도 못자게 하면서 행패를 부릴 때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을 정도”지만 그래도 참고 지낼 도리밖엔 없다. 가장 중요한 업무는 조난당한 탐방객을 구조하는 일이다. 구조요청은 해질녘에 가장 많이 들어오는데, 사유도 갖가지다. 발목을 접질렸거나, 하산길에 힘에 부쳐 탈진하는 사례가 많다. 탐방로가 좁아 여럿이 달라붙을 수 있는 들것 사용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몇 시간동안 업은 채로 험한 산길을 내려 갈 수밖에 없다. 무릎이 저리고 땀이 쏙 빠지는 일이지만 보람은 크다. 조난객과 인연을 쌓아가기도 한다. 미혼인 허성씨는 “지난해 구해준 여성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연락이 온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맥빠지는 ‘구조요청’도 있다.“랜턴이 없다.”거나 “건전지가 다 떨어졌다.”는 사람들이다. 할 수없이 장비를 갖춰 출동하지만,“기본장비도 갖추지 않고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 허탈할 뿐”이다. 우 소장은 “매표소에서 되돌려보내기는 하지만 아무런 장비없이 굽높은 구두를 신고 오는 여성들도 있다.”면서 “지리산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전문 산악인도 안심할 수 없는 곳”이라며 철저한 사전준비를 당부했다. 이들이 산아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은 열흘에 이삼일이 고작. 나머지는 고스란히 산에 바쳐진다.“외롭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빙그레 웃음만 되돌려보낼 뿐이다. 글 사진 지리산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대림산업은 지난 1976년 상장 이후 주주들에게 기업 이익을 돌려주고 있다. 건설업체 가운데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배당을 한 기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30여년 동안 배당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대림이 오랜 전통을 지켜온 명실상부한 전문 건설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출발했던 현대건설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늘린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단순 제조업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림산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림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니다. 단지 정통 건설 기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림산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정미소에서 건설 명가로 성장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수암은 이 때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림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대림의 태동은 1939년 부평에서 목재와 건자재상으로 문을 연 부림(富林)상회에서 출발했다. 초기 부림상회를 이끈 주인공은 3명.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 사촌형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로 알려졌다. 사촌지간은 각각 1만 5000원씩 출자했고, 원장희씨는 1만원을 출자했다는 것이다. 이석구는 풍림산업 이필웅 회장의 부친. 결국 대림과 풍림의 뿌리는 부림상회로 같다.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 사세를 키웠고 광복 이후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 건설업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대림산업·현대건설·삼환기업 등이었다. 49년부터는 건설업이 목재업을 앞질러 주력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란민 수용소를 짓는 등 군 시설 공사를 맡았고, 한국경제 재건기를 거치면서 굵직한 공사를 따냈다.58년 시작된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건설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시설 현장마다 대림의 깃발이 나부꼈다. 60년에는 풍림산업을 인수, 자회사 형태로 두었다. 서울 영동·잠실·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하철 시대를 여는데도 대림은 처음부터 참여했다. 동시에 해외공사 수주를 늘리는 등 사세를 키웠다. 54년에 설립한 서울증권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99년 구조조정차원에서 소로스에 매각했다. 지금은 지분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다. 대림통상은 아예 동생 재우씨에게 떼어줘 형제간 사업 분리를 마무리지었다. 대림요업 역시 98년 매각하면서 지분을 대림통상에 넘겼다. 창업주가 생전 계열 분리를 통해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남기지 않았다. ●난형난제(難兄難弟)…운경 이재형 대림산업을 말할 때 흔히 고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을 끌어들인다. 수암 이재준 창업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받으며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면모,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말을 아끼는 점에서 같았다. 운경은 자유당·공화당 시절 내내 골수 야당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운영하는 대림은 자주 곤욕을 치렀다. 대림에서 정치자금을 대주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대림은 수시로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민정당 시절에도 운경과 수암, 그리고 이준용(67) 회장은 형과 동생, 백부와 조카라는 혈연 빼고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운경이 정치한다고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림 역시 운경에게 베풀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로 철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2세대, 건설업에 유화부문 키워 양대축 형성 수암 이재준은 열아홉 되던 해 수원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과 결혼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장남 준용(현 대림산업 회장)을 낳은지 4년만에 세상을 떴다. 창업주는 박영복 여사와 재혼, 차남 부용(전 대림산업 부회장·61)을 얻었다. 단출하게 두 아들만 두어 경영권 이양 등에서 큰 불협화음이 없었다. 이 회장은 부친과 달리 정규 교육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는 등 학자풍의 엘리트였다. 그러면서 한경진 여사와 결혼하고 66년부터 대림산업 사무실에 출근했다. 경영 참여와 관련,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해외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명예 회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78년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업계는 이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79년에는 사장에 오르면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동생 부용씨는 상무로 승진했다.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부문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 회장은 여기에 유화부문을 더해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대림산업은 66년 베트남 진출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 이래 중동건설붐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외건설 맥을 유지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건설공사 등도 대림의 손을 거친 건축물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림은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86년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87년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란 캉간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림이었다. 그런데도 대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속죄양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림 역사상 최대 위기였다. 대림은 그 뒤 국내 아파트 공사, 관공서 건물, 평화의 댐공사 등 굵직한 일감을 따내면서 덩치를 키웠으나, 사업 다각화 등으로 몸집을 불린 다른 업체와 달리 한 우물만 고집, 업계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 ●3세대, 건설·유화 오가면서 경영 보폭 확대중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대림산업 부사장은 건설과 유화부문을 오가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지난 7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미국 덴버대 경제학과를 나와 부친과 동문을 이룬다.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95년 대림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에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 삼호 1.85%, 비상장 종합물류 회사 대림H&L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분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 다양한 경험 축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혼맥 1세대는 평범,2·3세대는 화려 이재준 창업자는 조선 선조대왕 7번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9대손이다.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수암의 집안은 늘 북적댔다. 생가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오고 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여섬지기 자작농 겸 지주였고 서울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의 덕목을 키워나갔다. 창업주 세대는 대부분 평범한 가정과 연을 맺었다. 큰 누이는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도 작은 사업가에 시집을 갔다. 형님 이재형 전 국회의장 역시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수암도 예외는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배필을 맞았다. 아래 동생들도 일반적인 가문과 결혼을 올렸다. 하지만 막내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결혼에서는 국내 굴지의 재계와 혼인을 맺는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차녀 구자혜(68)여사와 결혼하면서 대림과 LG는 사돈의 연을 맺는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줄곧 LG그룹 경영에만 참여하고 있다. 자녀들도 명문가문과 연을 맺었다.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장인이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과는 한다리 건너 사돈지간이다. 이준용 회장의 형제로 이어진 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관계, 재계 혼맥이 형성된다. 이 회장은 1965년 연애끝에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 여사와 혼인했다. 장인인 한순성씨는 천안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가에서 두 사람의 연애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남 이부용 전 대림산업부회장도 경희대 출신의 이선희 여사와 결혼, 재계 인맥을 쌓는다.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만났으며 장인이 서울주철회장과 헌정회 이사를 지낸 이종수씨다. 이 회장의 백부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 집안에서 큰 며느리를 맞았다. 이어 큰 딸은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작은 사업가와 결혼했던 둘째 고모 고 이임출의 딸은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아들과 혼인을 맺었다. 숙부 이재연 아시안스타회장은 오세중 세방회장과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집안에서 며느리를 얻었다. 3세에 들어서 재계 혼맥은 더욱 두터워진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34) 여사와 결혼했다. 장모가 구자경 회장의 큰 딸 구훤미 여사,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고김화중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연애결혼했다. 이로써 대림산업은 LG가와 두번째 혼맥을 만들었다. 차남 이해승씨의 부인 김경애 여사는 전 미국 미주리대 김현영 박사의 딸이다. 3남 이해창(34)씨의 부인 최영윤(30) 여사는 같은 건설업종인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큰딸이다. 초창기 우리나라 토목 건설산업을 일군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연애결혼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은 청첩장에 결혼 일자만 표시하고 장소, 시간은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만 알리고 식장 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윤영(33)씨 남편은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이 회장 집에서 모인다. 이 회장은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땐 아침 일찍 자식들 집을 찾곤 한다. ●전문 경영인, 업계 최장수 베테랑 대림산업㈜ 이용구(59) 사장은 6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1년 대림에 입사, 해외·주택 영업 담당 임원, 기획조정실장, 행정본부장, 사우디 사업본부장, 공사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정통 건설맨. 몇 안되는 해외건설 전문가로, 국제감각이 탁월한 국제신사로 알려져 있다.35년간 이 회장과 함께 하면서 임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하는 등 이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대림산업의 한 축인 유화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CEO는 한주희(53) 대표이사 부사장.80년 입사해 관리, 기술기획 및 영업 핵심 업무를 맡았다. 대림 코퍼레이션 기획 담당 임원, 대림 H&L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국 전문가로 바이어 협상에 있어 귀재로 평가받는다. 고려개발㈜ 오풍영(63) 사장은 95년 관리인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넘게 장수하는 최고경영자.ROTC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대림산업에 근무하다가 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로 옮겨 기획·재무부문을 담당했다. 관리인 취임과 동시에 경영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당초 2007년까지 계획됐던 법정관리를 9년 앞당겼다. ㈜삼호 신일철(56) 사장은 현장중심 경영자.2001년부터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81년 입사하기 전 금융기관과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기획, 예산, 재경 등을 담당하다가 임원 승진 이후 인사, 자재, 안전 등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업계 최상위 수준의 안전경영을 하고 있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 H&L을 동시에 맡고있는 박준형(53) 사장은 76년 대림 석유화학에 입사한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역군. 유화 부문 공장장, 구조조정 담당 임원, 석유화학사업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림코퍼레이션은 석유화학 주력 무역회사, 대림H&L은 유화 부문 물류 회사.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조정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했다. 대림콩크리트공업㈜ 서봉삼(61) 사장도 장수 CEO.2000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0년 대림산업 입사 이후 주요 건설 현장을 누볐다. 상·하 구분없이 조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CEO로 평가받는다.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협력을 강조한다. 오라관광㈜ 김부경(57) 사장은 국내 최대 관광지인 제주에서 512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국제적 수준인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83년 오라관광에 입사, 국내·외 판촉, 객실 운영 등 회사의 주요 업무를 두루 거쳤다. 제주도 관광업계의 산증인. 제주관광협회 부회장, 제주지역골프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대림 I&S 김영복(46) 사장은 38세에 임원,40세 대표이사 등 대림그룹내 최연소 기록을 두루 갖고 있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해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났다.81년 대림산업에 입사,4년 6개월간 쿠웨이트 현장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대림그룹의 디지털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대림자동차공업㈜ 박노균(57) 사장도 2000년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73년 대림산업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과 대림엔지니어링 재무담당 이사 및 행정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장경영을 중시해 수시로 지방 사업장을 둘러본다. 외환위기 이후 이륜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로 인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웹텍 창업투자 이대영(50) 사장은 금융 전문가.79년부터 94년까지 은행, 레이니어은행, 한미은행,JP모건, 한국신용정보에서 근무하고 화동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95년 대림엔지니어링 국제금융 이사로 인연을 맺어 대림산업 구조조정 담당 상무로 있다가 99년부터 웹텍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chani@seoul.co.kr ■ ’닮은꼴’ 창업주 父子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명예회장과 이준용 회장은 여러 면에서 닮은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고집쟁이라는 점에서 같다.66년 된 회사지만 건설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건설이 제자리를 잡을 즈음해서 확장한 분야라고 해봤자 유화 부문 정도다. 덩치를 키우는 것을 자제한 것도 닮았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대림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회사다. 하지만 옳다싶으면 금방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장점도 지녔다.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을 줄도 몰랐다. 창업주는 인사 청탁에 있어서는 매우 완곡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청탁해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빽’이나 동창생을 찾아다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청와대에서 들어온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그는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경영일선에서 물러서 있을 때면 몰라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예회장과 현 회장 모두 쉽게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이어져 형제간 독립된 사업을 일구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친인척이 배제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친인척들로부터는 ‘남남만도 못한 회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은 “대림은 대주주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뒤따라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친인척 경영에 있어서 창업주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 회장의 동생 부용씨는 대림산업 부회장을 지냈지만 지금은 대림산업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 전 부회장은 대림통상 지분을 놓고 숙부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chani@seoul.co.kr ■ 李회장 부부 ‘남다른 문화사랑’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옆에 위치한 대림미술관.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유난히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림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점심 때는 주변 사무실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단골 관람객이다. 대림 관련 업체들은 단체로 다녀간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문화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이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준용 회장 부부가 문화예술에 갖는 관심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 회장은 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탄생할 때부터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대외 직함을 좀처럼 갖지 않으려는 이 회장이지만 10년넘게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문화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경진 여사의 역할도 크다. 한 여사는 대림미술관을 맡아 대림의 문화공헌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대림이 120억여원을 출연해 문을 연 사진매체 전문 미술관.93년부터 대전에서 운영해 온 한림미술관이 모태인데 2003년 서울로 옮겨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인 뱅상 코르뉘와 루브르 미술학교의 장 폴 미당 교수가 설계했다. 대지 253평에 지상4층, 연면적 366평 규모다.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관 설립 때 한번 출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림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미술관이 자립운영을 해나가기에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시를 관람토록 장려하고 경영전략회의나 송년회 등 사내 각종 모임을 미술관에서 열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친숙도는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고 제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림이 개발한 아파트 외벽 디자인은 미술저작권 등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조형물들이 건축분야의 저작권에 등록되는데 비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분야의 저작권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외벽디자인이 적용된 역삼 e-편한세상의 경우 외관의 차별화로 주변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은 문화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결국 다른 업체와 다른 품질 경쟁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누리마루 APEC하우스

    누리마루 APEC하우스

    쪽빛 바다와 금빛 햇살에 빛나는 오륙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걸려 있는 한 점 조각구름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18일부터 개최되는 APEC정상회의때 21개 참가국 정상들의 2차회의 장소와 기념촬영장, 정상회의 선언문 발표장 등으로 사용될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바라다본 ‘바다 풍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지난달 건물 내부 비품 설치 작업과 산책로, 주변 환경정비 등 마무리 공사 등 손님들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이 건물은 부산시가 지난해 9월 착공에 들어가 1년여 만에 완공했으며 지상 3층(연면적 905평)규모의 타원형으로 티타늄 코팅, 아연강판 소재의 둥근 지붕에 외벽은 전망을 고려해 전체가 유리로 시공됐다. ●외벽 전체가 유리… 쪽빛 바다·오륙도·광안대교 한눈에 건물을 지탱하는 12개의 기둥은 우리나라 전통 정자를 본떴는데 부산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회의장 건물 옆에는 전통양식의 담으로 둘러싸인 정자와 태극문양이 그려진 쪽문, 해송과 약재식물을 위주로 한 정원이 들어서 있다. 또한 울창한 동백섬 해송 숲 사이로 각국 정상들이 거닐며 담소를 나눌 산책로에는 호랑이(한국), 판다(중국) 등 각국을 상징하는 동물 등이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건물 3층에는 정상회의장과 대기실, 휴게실 등이,2층에는 연회장 등이,1층에는 지원시설으로 꾸며졌다. 연회장 옆에는 우리 대청마루 형식의 테라스를 설치해 각국 정상들이 이곳에서 광안대교와 해운대 앞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정상회의장 내부도 우리 전통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 중점을 뒀다. 3층 회의장 내부 천장은 석굴암의 돔을 형상화했고 벽면은 격자문살과 청자의 전통문양을 소재로 한 실크벽지로 마감해 절제와 안정감을 추구했다. 회의장 대기실에는 훈민정음 원문으로 만든 액자가 눈길을 끈다. 특히 회의장 3층 입구 로비 벽면에설치된 ‘12장생도’는 압권이다. ●8억원 ‘12장생도´ 등 전통공예 우수성 과시 전통칠기 장인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붙여 제작한 이 작품은 정상들에게 우리 전통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굳이 금액으로 따지자면 시가로 8억원에 달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회의장 건물은 각국 정상의 안전을 위해 폐쇄회로TV와 금속탐지 검색설비, 빔센서, 내방객 추적관리 시스템 등 최첨단 보안시설을 갖추고 있다. 두께 21㎜의 복층 외벽 유리에는 방탄필름을 부착하는 등 고도의 안전장치들이 구비돼 있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이미 국내·외 인사들의 내방을 통해 역대 정상회의장 가운데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1000년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동백섬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시는 역사적인 이 건물을 정상회의가 끝난 뒤 3개월가량 원형을 보존, 시민들에게 개방한 뒤 최고급 회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순수 우리말인 누리(세상, 세계)와 마루(정상, 꼭대기) 그리고 APEC 회의장을 상징하는 APEC 하우스를 조합한 이름이다.‘세계의 정상들이 모여 APEC 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전통과 현대 첨단기술의 조화와 더불어 천혜의 절경이 어우러져 역대 APEC회의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1차정상회의가 열리는 해운대 벡스코(부산국제종합전시장)의 정상회의장과 각료회의장, 프레스센터, 국제방송센터 등도 최근 공사가 완료됐다. 세계 정상들이 첫 정상회의를 갖는 벡스코 컨벤션 홀은 개·보수 공사가 지난 10월 모두 끝나고 정상들이 찾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회의장 내부 벽면은 고려청자문양의 실크 벽지로 장식하고 국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다섯봉우리의 산과 물결치는 파도, 아름드리 소나무)´ 를 설치해 정상이 모여 회의하는 정상회의장임을 표현했다. 바닥은 근정전 답도의 당초문양과 구름문양 등을 사용해 조선시대 궁궐의 전통 이미지를 살렸다. 바닥 한가운데는 조선시대 부산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제작한 ‘해시계복제본’을 설치해 우리나라가 정보기술(IT)강국임을 나타내도록 했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컨벤션홀 천장에는 참가 21개국을 상징하는 조명라인이 설치됐다. 이는 지구의 경선과 위선을 형상화한 빛의 선으로 부산이 21개국 정상이 모여 있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비에는 우리문화와 자연,IT산업 등을 홍보하는 영상물과 디지털 정원, 디지털 병풍, 디지털액자 등 IT 조형물이 설치됐다. 또 삭막함이 흐르던 벡스코 콘크리트 광장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공연장과 함께 화단이 조성된 친수공간이 손님을 맞는다. 글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사진 부산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신진상가 등 2곳 시설현대화

    서울 종로구(구청장 김충용)는 신진상가와 동대문 종합시장 D동 상가를 2005년도 재래시장 시설현대화 사업 대상 상가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구는 이달 초 무등록시장이었던 신진상가에 대해 재래시장 인정서를 교부했으며 각 상가 상인회와 사업추진에 대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신진상가는 다음달 초부터 5개월간 시·구비 10억 2300만원, 민자 9700만원 등을 투입해 시장통로 아케이드와 휴게실을 새로 만든다. 점포간판·노점좌판 정비, 하수관 개량 등도 함께 이뤄진다. 동대문 D동 상가에는 총 10억 5800만원을 투입, 셔터박스 개보수·간판정비, 에스컬레이터 보수, 외벽 및 정문보수 등의 상가건물 리모델링을 실시한다. 구 관계자는 “내년 3월까지 두 곳 시장의 시설 현대화사업이 완료되면 청계천변 재래시장의 시설현대화사업이 모두 마무리되는 셈”이라고 말했다.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지금 부산에선] ’APEC회의 D-200’ 손님맞이 분주

    [지금 부산에선] ’APEC회의 D-200’ 손님맞이 분주

    오는 11월 중순에는 세계의 이목이 항구도시 부산으로 쏠린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아시아·태평양지역 21개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아태경제협력체(APEC)가 11월12일부터 19일까지 8일 동안 부산에서 개최되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부산을 찾는 것은 개항 이래 처음이다. 부산시는 ‘함께하는 APEC’‘도약하는 부산’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APEC 개최에 따른 부산시의 준비상황, 기대효과 등을 짚어본다. 부산의 관문인 김해국제공항 주변과 시내 주요 간선도로 등에는 꽃동산과 화단 등이 조성되는 등 도시미관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또 정상들이 묵는 숙소 및 회의장이 들어서는 해운대 일대와 시내 주요시설물 등에 대한 정비 및 보수 공사도 한창이다. 시는 5월 한 달간을 환경정비의 달로 지정하고 대대적인 환경정비를 추진하는 한편 도시미관을 흐리는 입간판과 에어탑, 애드벌룬, 현수막, 벽보, 전단 등 불법 유통광고물 등에 대해 자진 철거토록 지시했다. ●정상회의장 등 주요시설 공사 순조롭게 진행돼 해송이 우거진 동백섬 끝자락에 위치한 APEC 2차 정상회의장 ‘누리마루 APEC 하우스’ 건물은 골조공사가 끝나고 지붕공사와 외벽작업이 진행 중이다. 티타늄 코팅 아연강판 재질의 둥근 지붕에 전망을 고려해 외벽은 유리로 시공되며 12개의 기둥으로 건물을 지탱하게 된다. 오는 10월 완공 예정이며 현재 공정률이 40%에 이르고 있다. ‘누리(세계, 세상), 마루(정상, 꼭대기)’의 뜻을 갖고 있는 이 정상회의장은 지상 3층 규모로 전통 정자의 개념을 현대적 양식으로 표현했다. 첫번째 정상회의가 열리는 해운대 벡스코 컨벤션홀도 정상들을 맞이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집기 등 각종 편의시설 교체 작업과 내부수리 작업을 하고 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꾸미고 출입문은 한국의 전통미를 살린 나무문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정상들이 첫발을 내딛는 김해국제공항도 운항정보안내시스템(FIDS)을 한국어·영어·중국어·일어 등 4개 언어가 나오는 전자식 방식으로 교체하는 등 시설 개·보수 작업을 대부분 끝냈다. 이밖에 정상들이 묵는 숙소인 해운대와 서면 등 특급 호텔들도 인테리어 공사와 함께 시설 및 안전보안에 대한 집중 점검을 벌이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D-200일을 맞아 대대적인 시민 참여행사 개최 부산시는 시민참여 분위기 확산을 위해 통역, 안내요원, 행사지원, 아름다운 도시 가꾸기, 질서계도,APEC 교통봉사대 등 5개 분야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 시는 이를 위해 지난 2일 정상회의 D-200일을 맞아 5월 한 달 동안 APEC 시민참여 활동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또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시단위 28개, 구·군 단위 72개 등 모두 100개의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부산시 교육청도 지역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해 ‘APEC 우리가 해냅니다.’라는 책자를 발간, 부산지역내 유치원 및 초·중·고교와 유관기관에 보급,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18,19일은 자가용 2부제가 실시되며, 첫날인 18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됐다. 부산시 APEC 준비단 이경훈 단장은 “시설 공사 및 환경정비 등 모든 준비상황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오는 7월쯤 21개 참가국 관계자들과 합동으로 준비상황을 총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APEC은 정치적으로 부산을 홍콩·싱가포르항에 맞서는 해양 비즈니스 거점도시로 거듭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1만여명 취업·고용유발 효과 부산시 산하 연구기관인 부산발전연구원은 APEC 개최에 따른 부산지역 경제적 파급효과가 6700억원이 넘고 취업 및 고용 유발효과가 각각 6000여명과 4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부산시 APEC 준비기획단은 정상회의에 앞서 고위관리회의·각료회의가 열려 각국 정상을 비롯해 행사기간 동안 관료와 기업인·언론인 등 6000여명이 부산을 찾을 것으로 예상한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미리보는 ‘정상회의 풍경’ APEC 정상들은 무슨 술로 건배를 하고 어떤 전통의상을 입을까. 국제회의 석상에서는 관례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약한 ‘포도주’를 건배주로 사용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도주와 도수가 비슷한 국내 전통술이 건배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검토되는 술은 2002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의 건배주로 사용된 ‘선운산 복분자’(산딸기)와 부산에서 생산되는 상황버섯 발효주인 천년약속, 화랑(찹쌀), 천국(국화꽃) 등으로 알려졌다. 정상회의 때 건배주가 사용되는 것은 2차례 정도.11월18일 1차 정상회의가 열리는 벡스코 연회장 만찬과 19일 동백섬에서 열리는 2차 정상회의 오찬 장소에서 사용될 공산이 크다. 만찬 때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의장 자격으로 회원국 정상들에게 건배를 제의하게 된다. 행사기간 동안 제공되는 음용수는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생산하는 고도 정수처리된 수돗물인 ‘순수’가 사용될 전망이다. 시는 APEC 정상회의장을 비롯한 각종 회의장에 병입 수돗물인 ‘순수’를 공급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의전용 차량은 현대자동차와 BMW가 선정됐다.APEC 정상회의 준비기획단은 현대자동차가 21개 회원국 정상 의전용으로 ‘에쿠스 4.5’ 등 모두 240여대의 차량을,BMW그룹 코리아가 정상들의 배우자와 각료급 대표단 등을 위해 160여대의 차량을 각각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정상들이 기념촬영 때 관례적으로 입는 개최국 전통의상으로는 조선시대 왕이 입었던 곤룡포를 비롯해 마고자, 두루마기, 배자 등이 물망에 올라 전문가들이 선정작업을 벌이고 있다. ■ 허남식 부산시장 “APEC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부산을 세계적인 도시의 반열로 끌어올리겠습니다.” 허남식(56) 부산시장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APEC이야말로 항도 부산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한 단계 성숙된 도시로 만드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숙박·교통시설 현장 등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현안을 직접 챙기고 있다. 또 손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도시 환경정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허 시장은 23만여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APEC 봉사단이 최근 발족하는 등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고 말했다. 또 시민과 함께하는 APEC을 위해서 질서 청결 친절 등 자발적인 APEC 손님맞이 세계 시민운동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APEC 개최를 부산발전과 연계해 극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행사기간 동안 각국 기업체 정상들을 초청해 신항만,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등 산업 시찰과 투자박람회를 개최, 부산의 잠재력을 알리고 투자유치를 적극적으로 실시할 생각이다. 허 시장은 APEC 개최로 부산이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산의 이미지가 향상되는 등 장기적으로 부산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는 만큼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부탁했다. ■ APEC 경호단장 김희웅 총경 “APEC 경호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지난 3월 발족, 본격 가동에 들어간부산경찰청 APEC기획단 김희웅(52·총경) 단장은 “APEC 참가 정상들의 안전과 경호가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호업무에는 연인원 2만여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되는데 이는 창설 이래 최대 규모다. 그는 “각국 요인들이 김해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바로 경호업무에 들어가며, 이동 동선에 따른 단계별 경호계획을 수립해 놓았다.”고 전했다. 특히 1,2차 정상회의장인 부산 벡스코와 해운대 동백섬의 누리마루 APEC하우스를 비롯해 숙소, 이동 도로 등에 대해서는 일일이 현장 확인작업을 거치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점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국제정보기관, 국정원 등과 수시로 국제 테러분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등 테러에 대한 대비책도 완벽히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는 8∼9월에는 최종 점검을 위해 실전모의 훈련도 가질 계획이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상임위원회 탐방](5)-교문위

    [상임위원회 탐방](5)-교문위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초등학교의 평가방법 등 새로운 교육방침을 발표했다. 이런 교육청의 업무를 비롯해 서울시의 교육·문화업무를 감시·감독하는 곳으로 서울시의회 교육문화위원회가 있다. 위원회에는 김충선 위원장을 비롯해 김갑룡, 김종화, 박덕경, 서인종, 이광국, 이일희, 이은석, 이정선, 유승주, 장기만, 장영호, 김명숙, 박래학 의원 등 14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행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서울의 교육현안과 문화 서울을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높여가고 있다. 지난해 행정사무감사에서 나열성에 그치는 하이서울 페스티벌 등을 서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행사로 전환할 것 등 총 231건을 지적하고 개선했다. 또 서울시내 사립 초·중·고교에서 운영하는 통학버스의 상당수가 미등록 차량으로 밝혀져 탑승학생에 대한 안전대책을 조속히 마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2005년도 교육비 특별회계심사에서는 시급성이 뒤지는 학생·교원의 금강산 통일체험교육 등 6개 사업의 비효율성을 지적해 175억 1228만원을 감액조정하고 상대적으로 교육여건이 열악한 동북중학교의 교실외벽 균열보수비 등 12개 사업을 증액편성했다. 올해는 강남·북간 불균형으로 인한 교육격차 해소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강북 뉴타운지역에 자립형 사립고를 시범유치해 고교평준화로 인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지역간 불균형 해소에 일조할 계획이다. 특히 학교간 교육격차를 좁히기 위해 교육여건을 선진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고 공교육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월성 교육제도’를 도입하는 등 의회 차원에서 다각적인 교육제도를 연구·검토한다. 문화부문에서는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을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전통의 도시, 문화경쟁력을 갖춘 세계적 문화도시로 끌어올리는 것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을 방침이다. 김충선 위원장은 “교육·문화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인프라 사업을 확충하고 자발적인 시민참여가 가능한 역동성있는 교육·문화정책을 이끌어 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청계천 복원 보조 맞춰 인근 재래시장 새 단장

    청계천 복원 보조 맞춰 인근 재래시장 새 단장

    내년 청계천 복원공사 완공을 앞두고 인근 재래시장도 속속 새 단장을 마치고 있다.청계천 완공 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동인구를 ‘산뜻한 재래시장’으로 끌어들여 ‘청계천 시너지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완공 후 급증할 유동인구 겨냥 서울 종로구(구청장 김충용)는 최근 청계천에 인접한 재래시장 중 처음으로 동대문종합시장 환경개선사업을 마무리했다.지난해 12월 공사를 시작한 지 8개월 만이다. 이번 공사에는 서울시와 구예산 10억 4000만원과 민자 2억 6000만원 등 총 13억원이 투입됐으며 건물 외벽 리모델링,화장실 개·보수,건물 내 휴게실 조성 등이 이뤄졌다. ●동대문종합시장은 이미 완공 특히 동대문종합시장 측은 시와 구의 지원 외에 별도로 민자 6억여원을 추가로 조성해 자체적으로 시장 진입로 포장 공사,배수로 공사,경계석 교체 공사 등을 실시하는 등 환경개선에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동대문종합시장측 관계자는 “경기가 어려운 때에 청계천 복원은 상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면서 “자체적인 시장 환경개선사업은 상인들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대문종합시장을 필두로 2006년까지 종로구 관내 청계천 주변 재래시장 8곳에 대한 정비가 연이어 계획돼 있다. ●2006년까지 8곳 환경개선 먼저 오는 10월까지 광장시장과 광장골목시장 개선사업이 마무리된다.현재 시장 전체에 아케이드(비가리개)설치작업이 90%이상 완성된 상태며 노점상들의 좌판도 일률적으로 제작될 예정이다.또 시장 주변 7곳에 시장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만들 계획이다. 내년 상반기에는 동대문종합상가 중 D동 상가와 동문시장,통인시장에 대한 개선 사업이 진행되며 하반기에는 신진상가 환경개선사업이 예정돼 있다.마지막으로 2006년도에는 종로세운상가와 세운상가 가동에 대한 정비가 이뤄진다. 재래시장 환경정비사업은 무허가 노점상들을 양성화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 특별법에 따라 자치단체의 막대한 지원이 따르는 사업인 만큼 무허가 노점들을 위해 예산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 사업추진 관계자들의 기본입장이다.따라서 법인이 없는 재래시장측에서는 ‘상점가진흥조합’을 구성해야 하는데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업자등록이 필요하다. ●최대 걸림돌은 무허가 노점상 그러나 일부 무허가 노점상들은 사업자 등록을 하게 될 경우 부담해야 할 세금 문제나 자치단체의 통제를 받게 된다는 점,공사기간 중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점,환경개선 사업시 민자부담금을 일정정도 갹출해야 한다는 점 등을 꺼려 아예 환경개선 사업 자체를 반대하기도 한다. 종로구 관계자는 “광장 골목시장의 경우 설득반 협박반으로 거의 모든 노점상이 양성화됐다.”면서 “재래시장 환경 개선 사업 중 가장 힘들고 중요한 것이 노점상들을 설득하는 작업”이라고 털어놨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생존 몸부림’ 전국 재래시장 탐방] 특화된 쇼핑센터로 활로 찾는다

    재래시장이 특화로 승부를 걸고 있다.대형 백화점과 할인매장에게 빼앗긴 고객들의 발걸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다.경기불황까지 겹친 상황에서 재래시장의 생존을 위한 자구노력은 눈물겹기조차 하다.리모델링은 기본이고 상품권 발행,관광 패키지,인터넷 쇼핑몰 활용 등 새로운 마케팅 기법들을 총 동원하고 있다.각 지자체도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재래시장의 몰락을 방관하기 어려워 예산을 지원,현대화를 돕고 있다.더 이상 좌판에 물건을 놓고 손님들을 마냥 기다리는 곳이 아님을 선언한 재래시장의 현주소를 살펴본다. ●쇼핑센터로 탈바꿈시킨 재래시장 서울시 광진구는 지난해 8월부터 노유동 노룬산 골목시장에 대한 리모델링에 착수,현대화된 쇼핑센터로 탈바꿈시킨 뒤 최근 준공식을 가졌다.쾌적한 쇼핑공간 확보를 위해 120m에 달하는 전천후 아케이드를 설치했으며,재래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쇼핑용 손수레를 배치하고 조명·방송시설도 설치해 대형 할인점 못지 않은 편리함을 갖췄다.정영섭 광진구청장은 “재래시장의 환경개선사업은 매출을 30% 이상 끌어올릴뿐 아니라 주변건물의 자산가치도 상승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시는 국비·시비 등 272억원을 지원해 지난해까지 179개의 재래시장 가운데 68개에 대한 리모델링 작업을 펼쳤으며,올해는 부전시장 등 30개 시장에 1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시장들도 자체적으로 전문화를 모색해 부산진시장은 포목 등 혼수용품,부산전자종합시장은 가전제품,부전시장은 농산물,자갈치시장은 수산물,평화시장은 의류,자유시장은 신발 등으로 특화 운영하고 있다. 판매에 인터넷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활발하다.부산국제시장은 전자상거래를 위한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으며,부산진시장은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의류·한복·속옷 등 혼수용품 관련 20여개 상가는 점포별로 e-쇼핑물을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등록하는 상인들도 늘고 있다.부산진시장에서 캐주얼의류 상가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인터넷쇼핑몰 옥션 등록 후 매출이 3∼4배 늘어났다.”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매장을 동시에 운영하는 상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전자상거래에 영화관건립으로 몸부림 내년부터 울산 중구 성남동 주요 상가 거리에서는 비오는 날에도 우산없이 쇼핑을 즐길 수 있다.울산 중구는 상권 활성화를 위해 성남동 주요 상가거리 3곳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공사를 추진,올해안에 모두 마칠 예정이다. 먼저 보세거리 118m에 사업비 8억 7500만원을 들여 아케이드와 바닥에 대리석을 설치하는 공사는 지난해 11월 시작해 다음달 10일 완공된다.구 관계자는 “아케이드 설치와 함께 7개씩의 상영관을 갖춘 최신식 영화관 2곳이 성남동에 오는 8월부터 잇따라 준공될 예정이어서 구도심의 상권 활성화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경북 안동시의 경우 20억원을 들여 올해 말까지 풍산읍 안교리 풍산시장을 지역특산품을 취급하는 5일장으로 특화시킬 계획이다.이곳에서는 하회탈,풍산한지,안동한우,영가주,안동소주 등 특산물 수십종을 판매한다.또 헛제사밥과 잉어찜,안동찜닭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도 입주시켜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오가는 관광객들이 이용하도록 할 방침이다.의성군은 최근 1억 3500만원을 들여 의성읍 도동리 일대 시장을 ‘마늘전문시장’으로 탈바꿈시켰으며,고추 생산지로 유명한 단촌면에는 ‘고추전문시장’을 만들 계획이다. ●풍물시장·주말시장으로 고객 유치 전남도는 156개 재래시장 가운데 80개에 대해 2008년까지 3065억원을 투입,현대화시키기로 했다.이 가운데 목포 동명어시장,여수 종합수산시장,담양 청죽시장,고흥 동강시장(참다래·유자),고흥 녹동시장(수산물),함평 해보시장(돗자리),영광 고추시장 등 7곳은 2007년까지 406억원을 들여 특화시장으로 키운다.나주시는 57억원을 들여 지난해 5월 이창동에 풍물시장을 열어 기존 영산 5일시장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영호(49) 상우회장은 “풍물시장이 열린 뒤 손님이 이전보다 20% 가량 늘었다.”고 강조했다.장흥군은 장흥읍 재래시장에 70억원을 들여 연말까지 환경개선사업을 펼친 뒤 전국 처음으로 토요일마다 문을 여는 ‘주말시장’을 열기로 했으며,함평군은 오는 4월까지 함평시장의 장옥을 독특하게 꾸며 손님을 맞는다. 초가집 형태에서부터 기와집,60∼70년대식,현대식 장옥 등으로 짓고 있다. 강원도는 대형마트에 밀려 신음하던 재래시장을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양양시장번영회는 최근 17억 4000만원을 들여 양양재래시장 환경개선사업을 끝냈다.그동안 77개 점포에 대한 내·외부 수리와 어시장정비,주차장포장,화장실 개·보수,휴게실 설치 154개의 간판 교체 등 리모델링 작업을 했다. 번영회는 앞으로 친절운동과 시장상품권 발행,봉투공동제작 등을 통한 자구책 마련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홍천중앙시장도 새롭게 재정비됐다.지난해 3월부터 환경개선사업비 19억 6000만원을 들여 건물외벽 창호 옥상을 개보수했으며,좌판과 상·하수도를 정비하고 전기·통신·소방시설과 간판을 교체하는 등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했다.홍천중앙시장은 벽돌슬라브 지상 2층 건물로 점포 124곳에 209명의 상인들이 입점해 있다. 정리 김학준·이동구기자·전국 kimhj@seoul.co.kr˝
  • [각당 전략통에 듣는다] 자민련 김학원 선대위원장

    “이번 선거는 ‘부패 대(對) 반부패’ 구도가 되어야 합니다.” 자민련의 김학원 선대위원장이 밝히는 자민련 총선전략이다.그는 “돈 먹고 싸움하는 썩은 부패정치세력을 몰아낼 자격있는 정당은 자민련뿐”이라면서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주면 한나라당·열린우리당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향도’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아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다른 불법자금도 많았는데 자민련은 이런 불법자금으로 정치를 하지 않은 ‘늘푸른 정당’”이라며 “탄핵 대 반탄핵이라는 블랙홀에 빠져들면 안되고 부패 대 반부패로 심판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민주노동당보다 정당 지지도가 낮게 나오는 등 예사롭지 않은 정치상황 때문일까.마포당사 외벽에 내걸린 ‘다시 한강의 기적을 시작합시다.’라는 대형 플래카드와 당사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사즉생의 각오로,한표 한표 모아’라는 구호를 바라보는 당직자들 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각제 개헌을 핵심공약으로 내건 자민련은 이번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등록이 1차 목표다.김 위원장은 “총선에서 과반수 정당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는 말로 필승결의를 다졌다.“한나라당은 지지도 하락으로 인한 분란에다 부패한 정당이라 어렵고,민주당은 지지도가 더 많이 빠졌지 않느냐.”면서 “열린우리당도 좌경·급진 이미지가 있어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열린우리당을 집중공격했다.“여당은 신행정수도 이전을 계기로 표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실제 수도를 이전하려는 강한 의지는 자민련밖에 없다.”고 두 당을 대비시킨 뒤,“1년 내 입지를 선정한다고 밝혔으나 이를 올해 말까지로 늦추었고 대통령은 통일수도로 개성이나 판문점을 거론했지만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은 서울을 지적했다.”고 정부 내 혼란상도 꼬집었다. ‘보수당 이미지로 개혁열풍을 돌파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젊은 유권자들이 꼭 젊은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경륜과 경험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끌고 가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박현갑기자 eagledu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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