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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6·25 참전 사과 고집 안했다”

    “한국대표단은 중국의 1950년 한국전쟁 참전에 대한 유감표시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중국측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고집하지 않고 쉽게 포기해 협상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지난 92년 한·중 수교 당시 실무협상 대표였던 장루이제(張瑞杰·76) 전 중국 본부대사는 중국의 6·25 참전이 수교 협상의 의제로 제기됐지만 한국 대표단이 이를 고집하지 않아 협상의 빠른 진척이 가능했다고 밝혔다.“이미 역사는 흘러갔다.1950년에는 당시의 사정이 있었다. 앞을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한국측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번 꺼내본 것이었지 문제삼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중 수교과정에서 한국이 이 문제를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비난이 지금도 있는 가운데 협상 당사자가 이처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처음이다. 장 전 대사는 지난 5일 중국 외교부 산하 인민외교학회(회장 루추톈)와 21세기 한·중교류협회(회장 김한규) 공동 주최로 중국 후난(湖南)성 웨양(岳陽)시에서 열린 ‘5차 한·중 지도자 포럼’에서 이같은 수교 비화를 소개했다. 그는 46년 동안 외교부에서 일한 원로 외교관. 당시 스리랑카 대사를 마치고 본부대사로 근무 중이었다. 평양에서 출생, 고등학교 때까지 16년 동안 북한에서 보내고 30여년을 평양대사관과 외교부 조선처에서 근무한 경력 덕에 자연스럽게 실무회담 주역을 맡았다.●한국이 강력한 수교요청 `일사천리´ 진행 “수교협상은 92년 5월 중순에 시작해 보름 간격으로 3차례 열렸다. 별다른 장애물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3일씩 열렸으니 결국 9일간의 회의로 수교가 결정된 셈이다. 한국측이 첫번째 협상부터 직설적으로 수교를 요청하는 등 강력한 수교 의사를 밝혔고 중국은 두 나라 관계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데 동의한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전했다.” 당시 협상 수석대표는 형식상 두 나라 외교부 차관이 임명됐지만 실제 협상장에선 장 전 대사와 권병현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이 이끌었다. 그는 “베이징의 외교부 실무자나 국가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수교는 대세라고 판단했다.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도 ‘한국과의 관계를 열어 나가라.’고 지원했다. 그러나 첫 협상때엔 수교가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북한 때문에 주저하고 있었던 게 중국측 분위기였다.1차 협상이 끝난 뒤 중국의 결심이 내려진 것이다.92년 5월 말이었다.”고 밝혔다. 2차 회담땐 구체적인 수교 조건이 나왔다. 중국측은 타이완과의 단교, 관련 조약들의 폐기, 타이완 대사관의 중국 인계 등을 제기했다.“별다른 마찰없이 역사상 보기 드물게 빠르게 진행됐다. 마지막 3차 회의에선 문서작업이 이뤄졌다.”●김일성 “하는 수 없지 않은가” 냉랭한 반응 첸치천(錢其琛) 당시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 평양으로 날아가 김일성을 만나 “중국이 이미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란 냉랭한 김일성의 승인을 받아온 것은 7월.8월24일 베이징에서 두 나라 외교장관간에 수교협정이 서명됐다. “1·2차 회의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의 14호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3차 회의는 서울 워커힐호텔의 별장식 객실에서 진행됐다.” 한·중 수교의 주역이지만 외교관 대부분의 기간을 북한관계에 종사했다.“1966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문화대혁명 때엔 북·중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북한은 문화대혁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옛 소련편에 서 있었다.” 78년 중국 개혁개방 이후 북·중 관계가 정상화되자 실무자로서 그는 덩샤오핑, 리셴녠(李先念),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 10여년 동안 5명의 지도자들의 북한행을 모두 수행했다. 북·중 회담에서 중국측은 중국의 개혁개방의 진전 상황을 김일성에게 설명했고 북한측은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너희 어디 잘 되나 봐라.’란 식의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개혁 가능성과 관련,“의식이 너무 굳어있고 자본주의에 대해 지나친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서 “김정일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고 인민들은 힘들지만 참을 수 없는 단계는 아니고 중국·한국 등 국제사회의 원조로 최저 생활을 상당기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웨양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9월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일제 강점기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소앙(1887∼1958)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경기도 파주 태생으로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선생은 1917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의제로 제출해 통과시켰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했으며 임정 국무원 비서장,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 창당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핵심간부로 활동했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사상적 분열과 지도 이념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1920년대 후반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이라는 이른바 ‘삼균주의’를 창안,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으로 정립했다.1948년 4월 단독정부 구성에 반대해 김구·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했다. 1950년 5·30 총선 당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돼 제 2대 국회에 진출했으나 6·25 전쟁으로 납북돼 1958년 9월 순국했다.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외교문서 공개-베트남戰] 새로 알려진 것들

    26일 공개된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에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話) 등이 여럿 포함돼 있다. ●“제주도, 미군기지 될 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5월27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국방 각료회담에서 최영희 국방장관은 주일 미군기지의 한국 유치 의사를 피력했다. 일본이 철거를 요구하는 미군기지를 한국으로 옮긴다면 필요한 토지까지 제공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하지만 닛즈 당시 미 국방차관은 “막대한 예산이 드는 일이어서 간단하게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듬해 6월3일 서울에서 열린 2차 국방 각료회담에서는 이전 대상 지역이 ‘제주도’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임충식 국방장관은 회담에서 “오키나와기지를 제주도로 옮긴다면 공군 및 해군기지를 만들어 주겠다. 이 경우 여러가지 면에서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적극적인 입장을 밝혔다. 패커드 차관이 “제의를 염두에 두고 세계적인 기구를 포함해서 연구를 해나갈 것”이라고 답했으나 이후 이 제안은 특별히 진전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 “정보 수집차 북파 공작원 보내겠다.” 1차 각료회담 때 한국측은 정보 수집력 보강을 위해 북한지역에 공작원을 침투시키겠다는 의사도 피력했다. 최 장관은 “제3국이나 일본, 자체 수단 등을 통해 대북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나 앞으로 더욱 강화해야 한다.”며 “국제법 때문에 현재는 공작원을 북한에 보내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는 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브라운 주미대사가 정색을 하면서 “첩보원을 북한에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묻자 최 장관은 “내가 헌병사령관 당시 첩자를 보낸 일도 있고 사진도 찍은 일이 있다. 한국은 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와 관련, 국방부는 1951∼1994년 1만 3000여명의 북파 공작원이 양성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너무 싼 파월 국군 몸값 당시 파월 한국군의 해외 근무수당을 보면 준장∼중장이 일당 7∼10달러였고 이병∼병장은 1.25∼1.80달러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이병의 월급이 1달러가 채 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조금 더 많다. 하지만 함께 근무했던 타 국군에 비하면 매우 낮았다. 태국군의 경우 한국군보다 최고 1.5배(장성급)의 해외근무수당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이 미군 1인의 전쟁관련 전체비용을 1만 3000달러, 필리핀 비전투요원은 7000달러, 한국군은 5000달러로 잡았다는 통계도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각국별 해외근무수당은 해당국의 국민소득 등을 감안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교부,“미측이 대선 때문에 종전 분위기 띄우고 있다.” 철군 논의가 한창이던 1971년 4월 한국 외무부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미국 정부가 1972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에게 월남전의 종말이 가까워 온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국내(미국) 정치적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미국이 앞으로 월남에 대한 협력체로 참전국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 등도 참여시켜 미국의 책임을 경감시키려 하고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외교문서 공개-베트남戰] 美, 파병비용 690만弗 ‘미군장비’로 떠넘겨

    [외교문서 공개-베트남戰] 美, 파병비용 690만弗 ‘미군장비’로 떠넘겨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정당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군 파병이 한국 경제 도약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26일 공개된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에는 우리 정부가 참전을 계기로 미국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지원받기 위해 전방위 외교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악착 같은 경제·군사외교,‘조금이라도 더’ 당초 우리 정부는 브라운 합의각서를 통해 한국군의 베트남 증파 선행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차관 제공과 전쟁물자·용역의 한국 제공, 한국군 장비 현대화 지원 등을 약속받았다. 특히 1966년 10월24∼25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전 참전 7개국 정상회담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각오는 각별했다. 회담 11일 전인 13일 외무부는 유양수 주필리핀 대사에게 긴급 타전을 했다. 필리핀이 이번 회의가 평화를 모색하는 회의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인 만큼 군사적인 정세의 검토 및 전쟁 노력의 강화 방안이 반드시 의제에 포함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베트남 사태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토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것만을 위해 정상회담이 소집됐다는 식의 해석에는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 정부는 주최국인 필리핀이 제시한 회의의 가명칭인 ‘마닐라 평화회의(Manila Summit Peace Conference)’에서 Peace를 빼도록 훈령을 보냈다. 필리핀측이 마르코스 당시 대통령을 ‘아시아의 지도자’로 부상시키기 위해 베트남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베트남전에 따른 군사·경제적인 반대급부가 많은 우리 정부가 강한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다. ●미측, 파병비용 정산방식 매끄럽지 못해 파병비용 등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입장과 달리 미측은 부대비용 등 일부를 매끄럽게 정산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부는 브라운 각서에 근거해 1970년 7월부터 이듬해 6월30일까지 소요된 추가경비 690만 달러(당시 원화 27억 8700만원)를 현금으로 조속히 지급해 달라고 미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미 국방부는 1972년 11월 주한미군에 훈령을 보내 미지급액 상당의 미군 잉여장비를 한국측에 이양하겠다는 답을 보내 왔다. 결국 수 차례 토의 끝에 우리측은 미측의 헬기 3대,U-21 경비행기 1대 등 430만 달러어치의 군 장비를 취득가의 56%로 계산해 넘겨받았다. 또 64만 달러어치의 전투식량(K-Ration)을 대미 채무변제시 상쇄키로 했으며, 잔액 200여만 달러는 미8군 재고훈련탄을 받기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합의했다. 베트남전 종전으로 미측이 부담해야 할 강제퇴역 한국군의 일시 퇴직금 27억원 가량도 한국측에 전달되지 않았으며, 파월장병의 귀국비용은 태국군에는 귀국 이후 2개월 분이 추가지급됐으나, 한국군에는 지급되지 않았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英 수수께끼 피아노맨 실토 “자살 시도하다 사기극”

    |런던·베를린 외신|4개월 전 영국 남동부 켄트 해안에서 흠뻑 젖은 정장 차림으로 발견됐던 수수께끼의 인물 피아노 맨은 20살의 독일인이라고 독일 외무부가 22일 확인했다. 영국 언론들에 따르면 피아노 맨은 지난 19일 간호사에게 “나는 독일인이다.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다 직장을 잃었으며 기차를 타고 영국에 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에 발견됐으며 병원에 도착했을 때 피아노가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라 피아노를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혔다. 프로급으로 알려진 피아노 솜씨도 건반 하나를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피아노 맨은 20일 비행기편으로 아버지와 두 여동생이 있는 독일로 돌아갔다. 180㎝가 넘는 훤칠한 키에 우수에 가득 찬 표정을 한 피아노 맨은 그동안 말과 기억을 모두 상실한 인물 행세를 해 영국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 파키스탄, 핵장착용 미사일 시험발사

    |이슬라마바드 연합|파키스탄이 11일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크루즈 미사일을 전격적으로 시험 발사했다. 파키스탄 군부는 이날 핵 및 재래식 탄두 장착이 가능한 크루즈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으며 라이벌인 인접국 인도에는 이날 실험에 대해 사전 통보해주지 않았다고 밝혔다.군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파키스탄은 이번 실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크루즈 미사일을 설계하고 개발할 능력을 갖춘 정예국가 그룹에 가입했다”. 고 밝혔다.‘바부르(Babur)’라는 이름의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500㎞이며 시험 발사는 이날 오전에 실시됐다. 군부는 이 미사일이 저고도로 레이더를 피해 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파키스탄은 최근 인도와 미사일 시험발사를 사전에 통보하기로 합의한 바 있지만 파키스탄 군부는 크루즈 미사일 시험발사는 이 합의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파키스탄 외무부의 모하메드 나임 칸 대변인도 “탄도 미사일 시험발사의 사전 통보에 대한 (인도와의) 합의는 크루즈 미사일 시험발사의 사전통보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는 또 뉴델리가 아직 이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인도측은 이날 시험발사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이란핵 ‘기회는 48시간’

    이란 핵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보수 강경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6일 취임사를 통해 “주권 포기를 강요하는 다른 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 이란 정부는 전날 유럽연합(EU)의 평화적 핵 이용에 관한 제안을 거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9일 소집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긴급 이사회에 앞서 극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이란 핵문제는 유엔 안보리로 넘어가 이란에 경제적 제재가 가해지고 이란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무기로 이에 강력히 맞설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국제 유가가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우려마저 있다. 하미드 레자 아세피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6일 성명을 내고 EU 타협안은 “최소한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것이라고 깎아내리며 이를 거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또 어떤 경우에도 핵 주권의 핵심이 되는 농축권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다른 나라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외교정책의 근간이지만 이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외세는 단호히 배격하겠다.”고 공언했다.특히 주권을 해치는 어떤 결정에도 따르지 않겠다고 밝혀 국제사회가 제재를 가할 경우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지난해 11월부터 8개월 넘게 EU를 대표해 협상을 벌여온 영국과 프랑스·독일은 미국과의 사전 교감 아래 지난 5일 ‘평화적 핵 이용은 용인하되 핵무기 생산기반이 될 수 있는 핵연료의 자체 조달, 즉 우라늄 농축권만은 허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보기 좋게 이란측으로부터 거부당한 것이다. EU는 농축권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핵연료를 이란에 장기 공급하고, 평화적인 핵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서방과의 전면적 관계개선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로선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EU나 굴욕적인 협상을 거부한 이란 모두 스스로 핵 위기의 돌파구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취임사는 협상 여지를 더욱 좁혔다는 평가다. 안보리 회부에 맞춰 이란은 조제(粗製) 우라늄광을 농축하기 용이한 육불화우라늄(UF-6) 가스로 변환하는 이스파한 핵시설 가동 착수라는 초강수로 맞불을 놓을 것이 우려된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EU “이란 평화적 核이용 보장”

    유럽연합(EU)은 5일 이란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할 경우 핵의 평화적 이용 및 서방과의 전면적 관계개선을 보장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양보안을 제시했다. 미국의 용인 아래 이란에 제시된 EU의 양보안이 이란 핵위기를 타결하는 결정적 전기가 될지는 물론, 북한에 대해선 핵의 평화적 이용을 불허한다는 미국의 정책에 변화 가능성이 있을지도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스테판 드 라인크 EU 대변인은 “이란이 핵무기로 전용하지 않고 투명하게 관리한다면 평화적 핵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가 입수했다고 보도한 제안서 요약본도 “경수로나 실험용 원자로 건설과 작동을 제외한 핵 연료 사이클을 중단한다는 구속력있는 약속을 하면 향후 몇년간 핵연료 공급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제안이 포함돼 있다. 세실 포조 디 보르고 프랑스 외무부 대변인도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에 대한 이란의 권리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적 기준을 지킬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양보안에는 핵연료를 서방이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란의 평화적 핵 개발을 용인할 것이며 중앙아시아 석유, 가스의 주요 수송로로 지원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안서 작성에 간여한 서방 외교관들은 전날 뉴욕타임스(NYT)에 이란이 핵 개발을 포기하고 인권증진과 테러 척결에 협조하면 핵 관련 기술 제공과 교역 특혜, 안전 보장 등 광범위한 서방과의 관계 회복이 약속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란이 EU 양보안을 곧바로 수용할지 여부는 속단할 수 없다. 하미드 레자 아세피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48시간 안에 국가안보최고회의(SNSC)에서 제안서 내용을 검토하고 최종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전날 NYT와 인터뷰에서 제안서 내용을 미리 전해들은 이란의 고위관리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35개국이 참가하는 가운데 이사회를 열어 이란 핵문제를 논의한다.박정경기자·외신 olive@seoul.co.kr
  • 이란, 당근 노린 核가동 위협

    유럽연합(EU)과의 협상을 위해 지난해 11월 이후 우라늄 농축 등 모든 핵관련 활동을 중단했던 이란이 1일 이를 재개하겠다고 위협함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4차 6자회담이 1주일째 돌파구를 열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란의 벼랑끝 전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이란의 핵동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EU가 불가침 협약을 비롯,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북한과의 형평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저준위 농축 우라늄은 원전 연료로 사용될 수 있지만 고준위일 경우 핵폭탄 제조에 이용될 수 있어 미국은 평화적 이용을 공언하는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알리 아그하 모하마디 이란 국가안보최고위원회(SNSC) 대변인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이스파한 원전의 봉인을 1일 제거하겠다는 내용의 서류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란은 평화적 핵이용을 위한 활동까지 포기할 경우 EU가 제공할 수 있는 반대급부를 정리한 제안서가 지난달 31일 시한까지 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EU는 “8월 초라고 했지 1일이라고 날짜를 박은 적은 없다.”고 맞섰다. EU 25개 회원국을 대표해 이란과 협상을 벌여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이른바 ‘E3’는 이란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다음 주 제안서를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국 외무부는 이란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며 이란의 위협은 “불필요하고 파괴적인 조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이 핵활동을 재개할 경우 EU는 IAEA 이사회에 긴급회의를 요청한 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 이란 제재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선 지난 4월 E3와의 협상을 수용하기 직전 이란이 비슷한 전술을 구사한 데다 이란측 협상 대표인 알리 아그하 모아메디가 “유럽과 협상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라고 거듭 밝힌 점을 들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지난달 24일 뉴욕 타임스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을 위반해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에 대해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 것은 “다른 나라에도 유사한 위반행위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신문은 “인도를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함으로써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세게 밀고 나가고 당분간 제재를 견딘다면 지위와 군사력을 인정받고 보상도 받을 것이라는 점을 가르켜주는 것과 다름없다.”는 조지프 시린시온 카네기재단 연구원의 발언을 전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이란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지원과 낡은 여객기의 부품 구입 허용 등과 같은 당근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만약 이란에 이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할 경우 비슷한 요구를 하고 있는 북한에도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될지 모른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반대국가 어린이 기금 46만弗 취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확대 개편안을 둘러싸고 일본과 독일·인도·브라질 등 이른바 ‘G4’가 재정지원을 미끼로 일부 회원국들에 지지를 강요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G4는 상임이사국을 6개국 늘리되 거부권은 부여하지 않으며 여기에다 비상임이사국 4개국을 추가하자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해 놓은 상태다. 마르첼로 스파타포라 유엔주재 이탈리아 대사는 26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G4가 가난한 나라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개발원조를 이용하는 것은 공갈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스파타포라 대사는 “이 문제는 ‘이라크 석유-식량 프로그램’의 비리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불안한 스캔들로 비화할 것”이라며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 장 핑 유엔총회 의장에게 진상규명을 위한 독립위원회 구성을 요구했다. 그는 또 “G4 가운데 한 나라는 지난 25일 ‘안보리 개편안과 관련해 G4가 아닌 다른 편에 선다.’는 이유로 특정 국가에 지원하기로 약속한 46만달러의 어린이 기금을 무효화했고, 약속한 또 다른 프로젝트도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고 폭로했다. 해당 국가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외교관들은 “G4 가운데 특히 독일과 일본이 경제지원을 대가로 자신들의 유엔 개편안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독일과 일본은 지난해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가난한 나라들에 총 163억달러를 지원했다. 이에 대해 오시마 겐조 유엔주재 일본대사는 “그런 주장은 타블로이드 신문에나 나올 만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독일 외무부도 “근거없는 주장이며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키스탄 공사 무니르 아크람 등은 “외교관들이 ‘일본과 독일의 강요’라고 묘사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라면서 “아난 총장에게 건네줄 수 있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보도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교황, 테러희생국 위해 기도 ‘이스라엘 제외했다’ 구설수

    |바티칸시티 연합|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각국의 테러를 언급하면서 “고의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이 25일(현지시간) 바티칸 주재 외교사절을 소환했다. 취임 3개월을 맞은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는 꾸준하게 유대인들과 접촉해 왔으나 지난 24일 이탈리아 북서부의 알프스 휴가지에서 한 발언 때문에 이스라엘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의 “살인을 일삼는 손”을 하나님이 붙잡아 살인을 못하도록 기도하면서 이집트, 영국, 터키, 이라크에서 최근 발생한 테러들에 대해서는 언급했으나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공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교황이 고의로 지난주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테러를 규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우리는 새 교황이 가톨릭과 유대인의 관계를 중요시하겠다고 밝힌 만큼 다르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밝혔다.이어 교황이 “다른 테러에 대해 비난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도” 비난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교황을 수행 중인 호아킨 나바로 발스 교황청 대변인은 이 문제에 대해 교황청 사절이 “이스라엘 정부에 답변을 해주었다.”고 한줄짜리 성명을 발표했으나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 [북핵 6자회담 D-1] 각국 수석대표 면면

    |베이징 김수정특파원|베이징 4차 6자회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미·중·러 수석대표들의 데뷔무대란 점이다. 그들의 역할, 재량권에 따라 회담 성패가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석 대표단 변수 또한 크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표는 부시 2기 정부 출범과 함께 지난 1월 주한 미 대사로 있다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자리를 이어받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24일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기자들에게 “우리는 이번 회담에서 측정할 수 있는(measurable) 진전을 이룩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적극적 행보로 국내에선 ‘힐사모’(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까지 생겨났다. 주한 미 대사관 홈페이지엔 6자회담을 앞두고 힐 차관보를 응원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지난 9일 베이징에서 북한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만나 4차회담 개최를 이끌어냈다. 부시 대통령이 이후 “자네만 믿는다.”고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고, 우리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와 폴란드 대사 시절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지난 1월 이수혁 차관보의 뒤를 이은 송민순 차관보는 한미행정협정(SOFA)을 체결한 추진력의 소유자. 힐 차관보에게 북·미 베이징 접촉전 “북한에 직접 가서라도 상황을 타개하라.”고 채근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다. 의장국인 중국측 조율사는 2대 주한 대사를 지낸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1∼3차 회담까지 중국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왕이 외교부 부부장과 지난해 9월 주일 대사자리를 맞바꿨다. 일본 역시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성 경제국장이 새로 데뷔한다. 러시아 대표는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외무부 차관. 지난해 6월 3차 회담에서 데뷔했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2차때부터 참가, 수석대표 가운데 6자회담 경험이 제일 많다. 김 부상은 1990년대 초부터 백남순 외무상 등을 수행하거나 직접 회담 대표로서 미사일회담과 금창리회담, 베를린회담 등 대미 외교 현장에서 뛴 베테랑이다. crystal@seoul.co.kr
  • 태국진출 기업 稅부담 경감

    빠르년 내년 1월부터 태국에 투자한 국내 기업의 배당·이자·사용료 소득에 대한 최고세율이 현행 10∼20%보다 5∼10%포인트 낮아진다.태국에서 조세감면을 받아도 세금을 낸 것으로 간주, 국내 기업의 법인세 납부때 그만큼 감면해 주는 간주외국납부세액공제제도(TSC)를 5년간 허용키로 하는 등 태국 투자 국내 기업의 세부담이 줄어들 전망이다. 재정경제부는 11일 태국과 제2차 조세조약개정 실무회담을 갖고 이같은 내용에 완전합의, 양국 외무부 장관의 서명과 국회동의를 거쳐 빠르면 내년 1월1일부터 적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태국이 앞으로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역외금융센터와 같은 제도를 도입한 뒤 이를 통해 역외펀드가 우리나라에서 투자소득을 얻을 경우, 역외펀드는 이중과세 방지를 규정한 조세조약 혜택에서 배제돼 국내 세법에 따른 과세가 이뤄지도록 했다.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이라크주재대사 끝내 피살 이집트, 바그다드공관 폐쇄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무장단체 ‘이라크의 알 카에다’가 지난 2일 바그다드에서 납치한 이라크 주재 이집트 대사 이합 알 샤리프(51)가 끝내 살해됐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이라크 정부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입장을 밝혔지만 이집트 외교부가 바그다드 주재 공관을 잠정 폐쇄키로 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이집트는 이라크 주재 외교관 보호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해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다. ‘이라크의 알 카에다’는 7일(현지시간) 웹사이트에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샤리프 대사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모습을 담은 짧은 동영상을 공개한 뒤 그를 처형했다고 밝혔다고 AP통신 등이 8일 보도했다.이 단체는 또 성명에서 “미국이 배후에 있는 이라크 정부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응징하기 위해 앞으로 최대한 많은 외교관들을 처형하겠다.”고 경고했다. 하루 전인 6일에는 “이집트가 ‘유대인 및 기독교인’과 동맹하는 배교(背敎) 행위를 했기 때문에 납치한 외교관을 처형하겠다.”는 성명을 냈었다. 이집트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 정부에 협력, 이슬람을 배신했기 때문에 이집트 외교관을 처형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이라크 저항세력이 외국 공관장을 살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집트 외교부는 샤리프 대사가 살해됐다고 확인했지만 아직 이라크 정부로부터 결정적 증거를 넘겨받지는 못했고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이번 사건으로 이집트가 이라크 공관을 잠정 폐쇄키로 함에 따라 이라크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백악관의 지원을 받아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에 외교관 파견을 공식 요청해온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대통령은 알 카에다 등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공표했지만 외교관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아랍·이슬람권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뒤 상당수가 단교했다. 이라크 외무부에 따르면, 이라크 내 외국 공관은 현재 46개로 이집트 공관을 포함,14개가 아랍ㆍ이슬람권 공관이다.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알카에다 “이집트대사 억류중”

    이라크에서 외교관들을 겨냥한 공격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라크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무장세력의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무장단체 ‘이라크의 알 카에다’는 6일(현지시간) 이라크 주재 이집트 대사 내정자인 이합 알 샤리프를 납치, 억류하고 있다며 웹사이트를 통해 샤리프의 운전면허증과 외무부 직원증 등을 찍은 사진들을 공개했다. 이들은 이어 “이집트가 ‘유태인과 기독교인’과 동맹하는 배교(背敎) 행위를 했기 때문에 납치한 외교관을 전사들에게 넘겨 처형하겠다.”는 성명을 웹사이트에 게재했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샤리프는 지난 2일 바그다드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된 뒤 연락이 끊겼다. 이집트는 아랍권 국가 중 처음으로 이라크 정부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알 샤리프를 파견했다.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뒤 이라크와 단교했다. 이집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납치된 샤리프의 생사 확인과 구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5일 바그다드에서는 하산 말라라 알 안사리 이라크 주재 바레인 대리대사가 괴한들로부터 총격을 받아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었다. 무하마드 유니스 칸 이라크 주재 파키스탄 대사가 탄 차량도 총격을 받았다. 사흘 새 외교관을 노린 공격이 3건이나 발생하자 이라크 정부 대변인은 “주변국들과 동맹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좌절시키려는 테러집단의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과 새 이라크 정부가 이슬람권 국가들과 외교관계 강화에 나서자 저항세력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진그룹 (1) 창업 趙회장 일가

    “당신, 이야기(베트콩 습격으로 한진직원 5명 사망) 들었소? 내 두말도 안하겠소! 우리 운전수들 군인 출신이오. 방어용으로만 할 테니 M16을 지급해 주시오.”(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너 미쳤냐? 어떻게 민간인에게 군대 소총을 나눠주라는 거야.”(찰스 마이어 꾸이년지구 사령관) “돈 벌러 와서 죽을 수는 없지, 우리도 방어는 해야 할 거 아냐.”(조 전 부회장) “미스터 조, 이건 사이공 사령부도 모르는 일이오. 당신과 나만 아는 일이오, 알겠소?그리고 절대 먼저 쏘지 마시오.”(마이어 사령관)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이 자서전에서 밝힌 이 대화는 한진이 사지인 베트남 정글에서 어떻게 달러를 벌었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해방둥이’ 한진이 ‘수송보국’의 길을 걸은 지 60년. 이런 피와 땀들이 모여 오늘날 육·해·공을 아우르는 ‘세상의 길’을 개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라잡이’에는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서있었다. 길이 있는 곳에 ‘한(韓)민족의 전진(進)’, 한진이 있다며 전장으로, 바다로, 하늘로, 수송 외길을 걸어온 고 조 회장. 이 때문에 한진그룹의 23개 계열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5대양 6대주에서 한민족의 영토를 세계로 넓히고 있다. ●전장에서 성장한 한진 “형님이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베트남에 갈 때입니다. 돈 될 만한 사업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던 중훈 형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베트남 꾸이년지역의 풍경에서 바로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냈습니다. 항만을 보니, 화물이 꽉 찬 배가 50척이 몰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만 본 것이 아니라 배들이 짐을 실은 채 마냥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죠.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형님은 갑자기 창문에서 휙 돌아앉아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고 합디다. 다른 사장들이 쳐다볼까 싶어 큰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조 전 부회장은 한진의 베트남사업 첫발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진의 화물수송사업은 전후방이 없었던 베트남에서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빗발치는 전장을 오가며, 뚝심과 오기로 밀어붙였다. 베트콩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직원들이 공포에 떨 때는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런 고생끝에 주어진 과실은 너무나 달콤했다. 한진이 1966년부터 5년간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무려 1억 5000만달러.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한 가용외화가 5000만달러 남짓이었으니, 한진이 베트남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진은 베트남 특수로 당당히 재벌 반열에 들어선다. 고 조 회장은 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대진해운을 설립했고, 그해 9월에는 삼성물산으로부터 동양화재를 5억 7000만원에 인수했다. 또 68년 2월에는 한국공항,8월에는 건설회사인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을 세웠다. 이어 인하대학교도 인수했다. ●부실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 고 조 회장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기이자 도전을 맞이한다. 다름아닌 항공사업이었다. “청와대로부터 호출이 왔었습니다. 어느 정도 짐작가는 내용이었죠.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 김성곤 공화당 의원 등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만년 적자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독촉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형한테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도 불안해서 저도 형님과 같이 청와대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게 소망이라는데 형님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조 전 부회장) 고 조 회장은 결국 69년 ‘말 많고 탈 많았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항공공사는 당시 프로펠러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보유했지만, 전체 좌석수는 점보기 1대보다 적었다. 또 27억원의 부채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임원들은 ‘베트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부실 항공사에 모두 쏟아붓게 됐다.’며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고 조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국제선 개척으로 이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36년 후 대한항공은 화물수송 세계 1위, 보유 항공기 113대, 매출 7조 2000억원(지난해)이라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주에겐 은퇴란 없다” 트럭 한 대로 국내 최대의 운수그룹을 일군 고 조 회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지 않고, 현장을 챙길 정도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정열적인 경영자였다. 그가 모언론 인터뷰에서 “창업주에게 은퇴란 없다.”고 한 말은 그의 성격과 일 욕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 조 회장은 또 ‘남이 닦아놓은 길을 뒤쫓으며 훼방하는 얌체사업’을 싫어했다. 모르는 사업에 뛰어들어 ‘문어발식’ 확장도 자제했다.‘낚싯대를 열개, 스무개 걸쳐 놓는다고 해서 고기가 다 물리는 게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르는 사업을 하기보다 수송 전문화에 더 집중했다. 주변에서 ‘돈 버는’ 무역회사를 만들자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고 조 회장은 그때마다 “우리가 무역회사를 하면 많은 무역회사들이 우리의 경쟁자가 될 텐데 그들이 우리 비행기를 타고 우리에게 화물을 맡기겠느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1920년 부친 조명희옹과 모친 태천즙 여사의 4남4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뚝딱거리고 어질러 놓기를 좋아했던 둘째아들에게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고 조 회장은 45년 광복 직후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설립, 수송 외길의 첫발을 내디뎠다. 고만 고만하던 한진상사가 두각을 낸 것은 56년 미군부대 화물 수송을 맡으면서다. 이때 맺은 미군과의 인연은 한진 성장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찰리 조, 보따리 좀 싸봐” 조중건(영어명 찰리) 전 부회장은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의 동생이라기보다 사업 동반자이자, 유능한 참모였다. 조 전 부회장은 통역과 포병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한 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수송학을 전공했다. 59년에 귀국한 그는 바로 한진에 합류했다. 조 전 부회장의 본격적인 활약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휘됐다. 고 조 회장이 1965년 베트남을 시찰한 뒤, 조 전 부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니가 가서 보따리 좀 싸봐.”이 말은 한번 기획을 잘 해서 사업으로 만들어 보라는 ‘조 브러더스(중훈·중건 형제)’의 은어였다. 조 전 부회장은 미군 인맥을 활용해 중장비 조달 등의 악조건을 뚫고 베트남 꾸이년항의 미군 용역과 수송작업을 따냈다. 계약금액은 790만달러. 조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베트남 수송사업을 돌아볼 때 그것은 참으로 100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사업이었다.” 조 전 부회장은 또 고 조 회장을 도와 70∼80년대 대한항공의 성장사를 주도했다. 국제노선 개척을 위해 당시 소련과 중국 등 적국까지 넘나들며, 대한민국의 하늘을 넓혀 놓았다. 항공노선과 관련된 에피소드 한토막. 그는 88년 서울올림픽 선수단 수송을 위한 부정기 항공 노선을 뚫기 위해 혈혈단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구소련 국영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사장과 항공청 장관, 체육부 장관을 만나 설득에 들어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하루는 그들이 조 전 부회장을 한 궁전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사우나탕과 보드카로 조 전 부회장의 진을 빼기 시작했다. 수십번 반복된 행동으로 조 전 부회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력으로 계속 버티며, 협상을 주도해 나갔다. 동이 틀 무렵 조 전 부회장은 그들의 수장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고 조 회장의 막내동생인 조중식(70) 전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 부회장은 미국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한진에 입사했다. 당시 새로운 건축공법인 H-빔 공법으로 서울 소공동 KAL빌딩 설계 및 시공을 했으며, 중동 특수 때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많은 공사를 따내기도 했다. ●조씨가, 명망가로 사통팔달 한진 조씨가의 혼맥은 명망가 집안이 두루 포함돼 있다. 관·재·학·법조계 등으로 폭넓게 뻗어있다. 또 연애 결혼보다 유난히 중매 결혼이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창업주인 고 조 회장은 1944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82) 여사와 결혼했지만, 그의 동생들과 자녀들은 당대의 유력 인사의 자녀를 배필로 맞았다. 고 조 회장과 김 여사는 슬하에 4남 1녀(현숙·양호·남호·수호·정호)를 뒀다. 장녀인 조현숙(60)씨는 68년 숙부인 조 전 부회장의 중매로 당시 엘리트 법조인인 이태희(65·현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서울지방법원 판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 변호사는 흥아타이어 감사를 지냈던 이상묵씨의 장남으로 서울대 법대와 미국 하버드대 법학박사 출신이다.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은 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인 명희(56)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 고 조 회장과 이 전 차관이 한 모임에서 아들·딸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가 인연이 돼 사돈간이 됐다. 조 회장 얘기다.“양가에서 혼담이 오가던 중에 장모님이 예비 사위 얼굴을 보기 위해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사진을 보고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군제대 후에 바로 결혼하게 됐습니다.” 당시 양가의 통혼은 운수기업과 주무부처인 교통부의 고위층 집안이 맺어졌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조 회장의 장인인 이 전 차관은 76년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인하대와 국민대, 중앙대 총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계 인사로 활약했다. 조남호(54) 한진중공업 회장은 김원규 전 교육감의 차녀인 영혜(54)씨와 우연히 테니스코트에서 만나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조양호 회장은 “다른 형제는 해외에서 공부하다 보니 집안에서 혼사를 챙겼지만 둘째는 국내에서 대학을 나오다 보니,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애를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수호(51) 한진해운 회장은 조씨가가 국내 재벌가와 혈연으로 얽혀지는 첫번째 다리를 놨다. 조 회장의 처가가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집안이기 때문이다. 부인인 최은영(43)씨의 모친이 신 회장의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 여사다. 신 여사의 남편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이다. 조정호(47) 메리츠증권 회장은 87년 구자학 아워홈 회장의 차녀인 명진(41)씨와 혼인했다. 이 결혼으로 한진 조씨가는 재계 혼맥의 주류로 편입된다. 장인인 구 회장이 LG 구씨가이기 때문이다. 또 삼성 이씨가와도 바로 연결된다. 구 회장의 부인인 이숙희 여사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차녀다. ●방계 혼맥도 장관 사돈 많아 고 조 회장의 형제자매 혼맥도 전직 장관 가문부터 평범한 집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상실 전 상공은행장의 3녀인 영학(68)씨와 결혼해 1남 3녀를 뒀다. 장남인 진호(43)씨는 이종남 전 감사원장의 장녀인 경아(35)씨와 인연을 맺었다. 장녀인 윤정(41)씨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장남 정훈(44)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쌍둥이인 주은(38)씨는 미혼, 주연(38)씨는 김태효(38) 성균관대 교수와 결혼했다. 조씨 가문의 장자인 고 조중렬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최학희(80) 여사와 결혼,2남 1녀를 뒀다. 장손인 조지호(57) 한양대 교수는 이병호 전 상공부 장관의 장녀 숙희(56)씨와 혼례를 올렸다. 차남 건호(53)씨는 재미동포인 윤주덕 내과의사의 딸 영태(51)씨를 아내로 맞았으며, 장녀인 인숙(59)씨는 문영호(66) 전 동부제일병원 내과과장과 혼인했다. 영호씨의 부친은 제일은행 이사를 지낸 문재관씨다. 고 조 회장의 첫째 여동생인 조정옥(82) 여사는 전윤진(89) 전 동양화재 감사와 인연을 맺었으며, 둘째 여동생 조정원(80) 여사는 박두진(78)씨와 혼례를 치렀다. 셋째인 조도원(77) 여사는 박태원(79) 전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과 결혼했으며, 막내인 조경숙(75) 여사는 재미교포 외과의사인 박소회(78)씨에게 시집갔다. 고 조 회장의 막내 남동생인 조중식 전 한일개발 부회장은 교육자 집안 출신인 김복수(68)씨를 아내로 맞았다. golders@seoul.co.kr ■ “떠날때는 ‘쿨’ 하게” ‘2인자’ 조중건, 조카 경영권승계 앞두고 야인으로 역사적으로 2인자의 삶은 불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1인자를 향한 욕심이 화(禍)를 불러들인 탓이었다. 반면 드물게 성공한 2인자는 맺고 끊음이 명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런 점에서 성공한 2인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는 1996년 조카들의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될 시점에 미련없이 대한항공을 나와 야인으로 돌아갔다. 오너가(家)의 일원이기보다 전문경영인으로서 행동했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았던 것이다. 1인자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까. 조 전 부회장이 한때 하와이에 머무는 것을 놓고 일각에서는 형제간의 ‘힘겨루기’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또 조 전 부회장이 일정 기간 대한항공의 ‘수장’을 맡다가 장조카인 조양호 대한항공 사장(현 회장)에게 물려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받을 것으로 판단한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세간의 예측과 달리 조 전 부회장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하와이로 떠났다. 조 전 부회장은 훗날 이같이 전했다.“형제간이라도 언젠가 헤어질 거면 기분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조카들의 앞길을 막는 것은 보기가 안 좋았다. 또 한국에 있으면 언론 인터뷰를 하게 되고,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형(고 조중훈 회장)에게 누를 끼칠까봐 신경이 쓰였다.”시쳇말로 어차피 헤어질 거면 ‘쿨하게’ 떠나고 싶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은 “96년 초 작은아버지께서 물러나시기를 원하셨다.”면서 “선친도 그동안 숙부께서 고생하셨던 것을 잘 아셨던 만큼 섭섭지 않게 해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럼 조 전 부회장이 생각한 2인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형이 대한항공의 ‘선장’이었다면, 나는 ‘일등항해사’였다. 선장은 모름지기 새로운 곳을 향한 모험심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배를 움직이는 것은 일등항해사다.2인자는 항상 해결사 역할을 해야만 했다. 성공확률은 거의 50% 이하였다.” 그는 그렇다고 무조건 ‘예스맨’이 2인자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조 전 부회장은 고 조 회장이 정부로부터 부실기업을 인수할 때마다 형에게 수없이 대들었다.“형, 하지 마시오. 밑빠진 독에 물붓기요.”그러나 조 전 부회장도 끝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최단 기간에 부실 기업을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고 조 회장이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언제나 조 전 부회장의 몫이었다. 그는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전면에 나선 총수가 그저 ‘이러 저러하니, 알아서 만들어봐.’라고 화두만 획 던질 뿐일 경우가 많다. 물론 1인자에게는 1인자의 고뇌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입장에서는 작은 일 하나 때문에 며칠을 헤매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는 그럼에도 2인자의 삶이 만족스러웠다고 회고했다.“2인자들은 1인자가 꾸는 꿈에 덩달아 취해 열정을 다해 일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은 육·해·공의 종합물류 기업이라는 꿈을 내게 보여줬다.” golders@seoul.co.kr ■ 역대 정권과의 인연 1999년 4월2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쳤다. 민간기업에 대한 청와대의 이같은 조치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빌미를 제공한 것은 대한항공. 대한항공기의 잇단 사고가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더구나 국적항공사의 항공 사고는 국가 이미지에 미치는 악영향이 적지 않았다. 한진그룹 조씨가(家)로서는 처음으로 맞는 정권과의 갈등이었다. 한진 조씨가와 역대 정권과의 인연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에서 국내 여느 재벌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가 우호적 관계였다면, 김대중 정권때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고 조 회장은 국적항공사 대표라는 신분과 특유의 사교성, 부지런함 덕분에 역대 정권의 핵심 인사와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이 때문에 사업상 ‘손해본 장사’도 많았다. 고 조 회장은 리스크를 떠안으면서도 정권이 요청한 부실기업을 잇따라 인수했다. 대한항공공사(현 대한항공)를 비롯해 대한선주(현 한진해운과 합병),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를 떠안았다. 동시에 미국, 일본, 프랑스 등 해외 인맥을 활용, 민간 차원의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 30여년간 한진그룹의 ‘2인자’였던 조중건(73) 전 대한항공 부회장도 과거 군경력을 바탕으로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그렇다고 인맥을 활용해 특혜를 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밝힌 대목이다. “1953년부터 2년간 미국 포병학교 교관 생활로 400여명의 기간 장교들과 많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중략)나는 박정희 대통령과 매우 친근한 관계였고 나를 친아우처럼 아껴주셨고, 가끔 당시 혁명 주체들이 내 형(조중훈 회장) 집에서 모여 회의를 했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이권과 청탁으로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나 형은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은 신기루와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98년 DJ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씨가는 서서히 ‘쓴맛’을 보기 시작한다. 대통령 전세기의 경쟁 입찰제 도입은 그 신호탄이었다. 이어 국세청 조사인력 240여명이 동원된 3개월간의 한진그룹 세무조사는 조씨가를 무척 당혹스럽게 했다. 이처럼 DJ정권이 대한항공에 대해 강하게 ‘칼자루’를 휘두른 이유는 뭘까.1차적으로 DJ정권 출범 이후 크고 작은 대한항공측의 사고 탓이었다. 대한항공의 문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 훼손이라는 것이 정부의 시각이었다. 여기에 과거 조씨가가 보인 ‘반DJ 행보’도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세무조사 이후 대한항공은 노선권 배분 차별 등 정부로부터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나 법보다 감정을 앞세운 정부의 무리수도 적지 않았다. 사법부는 대한항공이 잇따라 제기한 노선 배분 소송에서 정부 결정을 뒤엎는 판결을 속속 내렸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푸틴·후진타오 “우리가 남이가”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과 러시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1일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중·러 정상회담을 갖는다. 두 정상은 양국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하고, 경제협력과 시베리아 송유관의 다칭(大慶)유전 통과 등 양국 현안과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방안 등 지역ㆍ국제 정세를 논의할 예정이다. 러시아 외무부는 전세계 안보와 국제 테러에 대한 대응 방안, 유엔 개혁 문제 등도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30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주석은 “최근 양국간 전략적 파트너십이 강화되면서 긍정적인 진전과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1일 후 주석은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중·러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두 정상은 지난 5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60주년 기념행사에 이어 한달여 만에 재회, 양국간 긴밀한 ‘우의 관계’를 과시한다. 중·러는 지난 2일 40년에 걸친 국경선 협상을 마무리짓고 사상 최고의 우호ㆍ협력시대를 맞고 있다. 후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세계질서 선언’을 공동 발표할 예정이어서 그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선언문은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국제질서의 다극화를 촉구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이 2006년을 ‘러시아의 해’로 정해 러시아가 2007년을 ‘중국의 해’로 선포한 것에 대해 답례했다고 보도했다. 또 2004년 210억달러에 달했던 중·러 교역규모를 2010년까지 600억∼800억달러로 확대할 방침이다. 후 주석은 모스크바 방문에 이어 4∼5일 카자흐스탄을 방문, 상하이협력기구(SCO) 제4차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6∼7일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열리는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에 초청국 정상 자격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러시아와 중국간 사상 첫 합동군사훈련이 오는 8월18일부터 25일까지 육·해·공군 병력 8000여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3단계로 나눠 실시된다고 러시아 국방부가 29일 밝혔다.oilman@seoul.co.kr
  • 이라크서 피랍 佛여기자 석방

    |파리 AFP 연합|지난 1월 이라크에서 납치됐던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의 플로랑스 오브나 기자가 피랍 5개월여 만에 풀려났다고 프랑스 외무부가 12일 밝혔다. 함께 납치됐던 이라크인 통역 후세인 하눈 알 사디도 석방됐다. 오브나 기자의 가족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오브나의 건강은 양호한 상태”라고 말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나눴던 157일간의 긴 고통이 끝났다.”면서 “오브나 석방을 위해 위험하고 어려운 작업을 한 관료들과 군 관계자들에게 감사한다.”고 TV 방송을 통해 밝혔다. 리베라시옹에서 18년 동안 일해온 오브나 기자는 1월5일 바그다드에서 납치됐다.
  • 헬무트그레취 빈 모차르트협회장 인터뷰

    헬무트그레취 빈 모차르트협회장 인터뷰

    |빈(오스트리아) 최광숙 특파원|“내년 오스트리아에서는 1년 내내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차르트가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빈과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 모두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공동 논의 끝에 비슷한 프로그램이 중복되지 않도록 합의를 봤습니다.” 헬무트 그레취(61) 빈 모차르트협회 회장을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모차르트협회는 모차르트 연구 및 관련 사업을 벌이는 모임으로 전 세계 80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답게 피아노와 트럼펫, 음표 등이 재미있게 그려진 카키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위해 특별히 이 넥타이를 골랐다.”고 했다. 2006년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 ●빈·잘츠부르크는 벌써 들썩 그 때문에 오스트리아 빈과 잘츠부르크가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 양 도시는 서로 ‘모차르트는 우리 사람’이라며 엄청난 예산을 투입, 각종 음악회는 물론 기념 사업 등을 경쟁적으로 펼치는 분위기다. 그레취 회장은 “두 도시는 상처받는 경쟁을 하지 않는다.”면서 “경쟁을 한다면 건전한 경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모차르트는 당시 잘츠부르크의 최고 권력자와의 불화 때문에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서 활동하며 ‘피가로의 결혼’ 등 불멸의 걸작을 만든 만큼 빈이 더 중요한 도시”라며 은근히 빈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빈이 모차르트와 인연 더 깊어” 그레취 회장은 “내년 3월부터 빈의 알바티나 박물관에서 모차르트가 살던 곳과 그의 곡이 초연된 장소 등에 대한 사진 자료 등 모든 모차르트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전시되고 오페라 국립극장에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만을 공연하는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빈 시는 내년 행사를 위해 이미 2,3년 전에 미국인 피터 샐라스를 예술감독으로 영입,7000만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각종 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 21개국서 기념전시회등 계획 그는 이어 “국내뿐만 아니라 내년 유럽을 비롯, 브라질 등 21개국에서 모차르트 전시회 등을 동시에 열기로 오스트리아 외무부와 내무부가 합의를 보고 이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한국 모차르트협회에서도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bori@seoul.co.kr
  • 납북 유공자 故 고창일 선생 16년 늦게 현충원 위패 봉안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후 초대 외무부 차관과 외무부장관 서리 등을 역임한 고 고창일(1892년생) 선생의 위패가 뒤늦게 현충원에 봉안된다.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정부는 1989년 고 선생을 비롯해 조소앙, 김규식, 안재홍 선생 등 총 12명의 납북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인정,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이들의 위패를 봉안했었다. 하지만 당시 고 선생은 뚜렷한 이유없이 봉안 대상에서 빠졌다. 최근 가족들과 함께 현충원을 방문한 고 선생의 손자 용환(55)씨는 조부의 위패가 없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가보훈처에 수차례 이의를 제기, 이를 바로잡게 된 것.‘김규식파’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는 고 선생은 6·25 전쟁 초기 김규식, 원세훈 선생 등과 함께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납북됐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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