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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일본 와카 시인 손호연 여사

    유일한 한국인 와카(和歌·일본 단가) 시인 손호연 여사가 22일 오전 7시30분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80세. 손 여사는 60여년 동안 단가 2000여 수를 지었다.지난 98년 일왕이 주재하는 ‘신년어전가회’에 초청받는 등 일본에서 최고의 단가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지난해 10월 한일양국의 상호이해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일본 외무대신 표창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단가집 ‘호연가집’‘제1무궁화’‘제5무궁화’를 남겼다. 유족으로는 이승훈 리인터내셔널 회장 등 1남 4녀.빈소는 서울아산병원.발인은 24일 오전8시.(02)3010-2295
  • 와카시인 손호연씨 日외무성 표창

    한국인으로는 유일한 일본 와카(和歌)시인 손호연(孫戶姸·79)씨가 한·일전통문화를 양국에 두루 소개해 상호이해를 넓힌 데 대한 공로로 일본 외무대신의 표창을 받는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9일 오전 10시 대사관저에서 표창 전달식을 갖는다고 밝혔다.와카는 통상 31자의 짧은 시로 일본에서는 ‘국시’(國詩)로 불린다. 연합
  • [1950년대 지구촌 신익희선생 여행기](4)

    *동아시아 거쳐 귀국길에. 태국의 수도 방콕에 도착한 것은 7월27일 이른 아침이었다. 국회의장 푸떠촌 파차맥,국무총리 피볼송 그람,외무대신 나라디힙,경제대신 와댁한 등을 만나서 한국 전쟁에 출병한 데 대한 감사를 표했다.한국 전선에서 부상한 군인들을 수용한 육군 병원을 방문해 위로했는데 태국 군인들이 한국말로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나라는 300만명이나 되는 화교가 모든 상권을 장악해 태국 국민과 마찰을 빚을 염려가 있다.태국 정부도 중국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방콕시내에 근대식 상점촌을 건축하고이곳에는 태국민 외에는 입주를 불허하고 있으나 그들의 경영 능력으로 보아 중국인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시내 도처가 중국인 촌으로 형성돼 한자간판을 붙인 것이마치 광동(廣東)이나 상해(上海) 시가를 지나는 듯하였다. 나는 이곳 화교의 유력자인 소송금(蕭松琴)을 찾았다.이미작고한 그의 부친 소불성(蕭佛成)은 일찍부터 이 나라 화교의 영수(領袖)이며,중국 혁명의 국부인 손일선(孫逸仙·손문)의 동지였다.손문은 중국 혁명을 지도하면서 동남아시아를여행할 때 자주 이 집에 와서 숙박했다.나는 일찍이 손문과소불성의 입김이 밴 곳을 오래 거닐면서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밤새 비행하여 8월2일 호주의 거항인 시드니에 도착했다.지난달 31일까지 머물렀던 싱가포르는 매우 더웠으나 이곳에 오니 외투를 입지 않으면 외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추웠다. 8월4일 수도 캔버라에서 외무대신 캐시씨,차관 푸린솔씨를만나서 한국 국민을 대신해 감사를 표했다.특히 푸린솔씨는유엔의 주한 호주대표로서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한국 전선에서 희생된 무명 용사의 묘지도 찾았다.전쟁기념관에는 2차대전때 획득한 전리품이 있었는데 시드니 근해까지 들어왔다가 포획된 일본 잠수함 한척도 있었다. 8월6일 수상 비행기로 8시간 비행한 끝에 뉴질랜드(新西蘭)의 수도 웰링턴에 도착했다.뉴질랜드의 정부 각료와 야당 당수 등과 오찬을 했다.환영사와 답사가 오간 뒤 애국가를 불렀다.원주민인 마오리족이 많이 사는 로타르와에 갔다가 온천에 들렀다.원주민들이 원시적으로 만들어 놓은 온천이라자유롭게 즐기기에 좋았다.계란을 온천물에 쪄서 먹었다.필리핀(比律賓)에 도착한 것은 8월14일이었다.오랫동안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다.과연 차기 대통령 선거를 별사고 없이 잘 치를 수 있을지 민주주의의 시험대로서 세계인이 주시하는 곳이다. 마닐라항에는 우뚝 솟은 검은 군함의 돛대가 보이니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죄악적 잔해를 보는 듯했다. 8월18일 타이베이(臺北)로 날아왔다.장개석(蔣介石)씨와는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청년 장교라는 말을 듣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백발이 성성해 ‘백두옹(白頭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인생은 수레바퀴와 같다는 탄식을금할 수 없다.5억의 국민이 자유를 잃고 붉은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내심이 한시도 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한·중 관계를 ‘동생사공감고(同生死共甘苦)’라고하였다.이 말은 결코 외교상 어투나 구두선(口頭禪)으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충심에서 우러 나오는 말일 것이다. 8월23일 일본에 도착해 도쿄에 있는 거류민단과 동포들이경영하는 공장을 시찰했다.특히 이번 동포 위문길에서 장래세계 무대에 등장해 마음껏 발휘할 우리 민족의 천부적 재산이요,원천인 강인한 생활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커다란 위안이 되었다.40여년전 내가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공부할 때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고 가슴에 깊은 한을 품었다.오사카에 가니 한복을 입은 우리 동포들이 엿판을 메고 전전유리(轉輾流離)해 가난함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신록이 푸르던 5월18일 본국을 떠나서 가을이완연한 9월19일에야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내리니 만 4개월동안 5대주 26개 우방국을 친선방문,불욕민명(不辱民命·백성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정리 안동환기자 sunstory@
  • [대한광장] 백범의 은인 강화사람 김주경

    우리는 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많은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활약의 이면에는 이름없는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런 인물로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였던 강화의 의인 김주경을 들 수 있다.김주경은 자는 경득으로 원래 강화관아의 서리였다.1866년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이 강화에 3,000명의 별무사를 양성하고 섬 주위에석루를 쌓고,진무영을 세우던 때,김주경은 군수품 창고지기 일을 맡고 있었다.김주경은 어릴 때부터 사람됨이 호방하여 독서는 아니하고 도박을 일삼았는데,강화 포구의 고깃배들을 돌아다니면서 투전을 하여 수십만냥을 벌었다. 그 돈으로 각 관청의 하급관속들을 매수하여 전부 자신의 지휘명령을 받도록 해놓고,원근에서 용기와 지략이 있다는 사람은 모두 식구로 만들었다.그는 양반이라 해도 비리를 저지르면 가차없이 혼을 내주었다. 김주경은 백범 김구가 치하포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인 쓰치다를 처단하고,인천 감옥에 갇히자 김창수(김구의 본명)의 구명을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거한 김구의 가상한 뜻에 동감하여김구를 살려내기 위하여 한규설(당시 외무대신)을 찾아갔고,7,8개월 동안 김구의 석방을 위한 소송비용으로 그의 전 재산이 바닥이 났다. 그는 재산이 다 탕진되자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을 탈취하여 해적질을 계획하였다.이것이 강화군수에게 알려지자 노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김주경은 김구를 탈옥시키기 위해 지하조직을 만들기도 했다.여기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후에 모두 노령 서북간도 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편 인천감영 감옥에서 탈출에 성공한 김구는 강화 김주경의 집에 찾아가석달 동안 서당을 열고 그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했다.일설에 의하면 김주경은 강화를 떠난 후 10여년 동안 붓파는 행상을 하면서 수만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성사치 못하고 객사하였다고 한다.김구의 독립운동에는 김주경과 같은 실천적인 협력자가 있었다.1947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는 강화 남운통에 있는 김주경의 셋째 동생 진경의 집을방문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그 집이 바로 46년 전 김구가 변성명하고 그의 사랑에서 석달 동안 사숙을 열었던 곳이었다.이날 한말 이동휘가 세운 합일학교 운동장에서 김구선생 환영회와 강연이 있었는데,김구는 김주경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8월은 광복절이 있는 달이며,민족을 생각해볼 달이다.독립운동을 하는 데는3가지가 있어야 한다.이념과 지도부 형성과 조직,인적·물적 후원 등이다. 김주경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백범 김구를 도와 자기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방략을 찾아 매진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백범은 김주경을 평하기를 “강화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양반 중에는 이건창이요, 상놈 중에는 김주경”이라 했다. 강화에는 우리가 찾아볼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광성보,초지진,덕진진 같은 전적지와 함께 강화학파의 이건창의 생가나 또한 민중으로 의인의 삶을산 김주경의 집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서굉일 한신대교수·국사학
  • 日 NHK, KBS 8·15특집 다큐 방영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로 유명한 일본 NHK가 13일 지난해 KBS가 8·15 특집으로 방송한 다큐를 방송한다.방송내용도 그동안 일본 방송에서 다룬 적이 없는 태평양전쟁 전범을 그린 ‘태평양전쟁,최후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다. 태평양전쟁 개전과 종전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종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일명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목돼 스가모 형무소에서옥사했다.그러나 도고는 문민외교관 출신 외무대신으로 전쟁에 반대하며 종전 무렵에는 연합군의 항복 권유를 일본 천황이 수락토록 한 평화주의자였다.그는 400여년전인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의 후예이기도 하다. 일본 NHK는 지난해 KBS가 ‘태평양전쟁…’을 8·15특집으로 방송하자 정수웅 감독의 인터뷰와 함께 이를 위성방송 뉴스를 통해 소개하는 등 관심을 보여왔었다. 전경하기자 lark3@
  • [대한시론] 백년전의 세 金씨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학] 세 김씨라는 말만 들어도 독자들은 넌더리를 내겠지만,나는 지금의 얘기를하려는 것이 아니라 백년 전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그때에도 3김이 있었는데 김옥균(金玉均,1851∼1894),김홍집(金弘集,1842∼1896),그리고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그들이다.하기야 그리 흔치도 않은 허(許)씨 셋이서 나라를 떡 주무르듯 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 인구의 22%를차지하고 있는 김씨가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이상할 것도 없지만 어쩌면 역사는 이토록 반복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역사는반복한다”고 말한 토인비의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세 김씨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너무 다른 길을 갔다.김옥균은늘 남보다 앞서 생각하고 과격하여 사상을 의심받았고 결국에는 잔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저자의 주검이 되었다.김홍집은 사람은 진국이었으나 무능하여 한 시대를 위기로 몰아넣고 결국 자신도 덕수궁 돌담길의 시체가 되었다.그리고 재승박덕(才勝薄德)했던 김윤식이다.그런데 내가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은 바로 세번째 김씨인 김윤식이다.명문청풍 김씨의 후손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장차 대제학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으며 젊은 날을 보낸 그의 전도는 그야말로 막힐것이 없었다.그는 영선사가 되어 청국으로 들어가 한·미 개국 교섭의 막후실력자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외무대신과 중추원 의장을 거쳐 그의스승의 기대대로 대제학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김윤식의 일생은 그 훗날이 문제였다.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긴자(銀座)에서 호강도 했고 한일합방이 되자 자작(子爵)의 칭호와 함께 합방축하금 5만원을 받았으며,시서화에 능해 그의 문집인 ‘운양집(雲養集)’은 1915년에 일본학사원 상을 받았으니,만약 그에게 후손이 없고 이 나라가 영원히 일본의 속방이 되었던들 그의 일생은 누릴 것 모두 누린 셈이요 욕되거나 후회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192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신문들은 한국의 셰익스피어가 서거했다고 법석을 떨었고,최남선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조사를 썼고,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위원회가 구성되어 그를 유월장(踰月葬)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그러나 그때가 일제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은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결국은 사회장이 취소되고 가족장으로 양주 땅에 묻혔다. 필주(筆誅)의 뜻을 아는지? 내가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의 재주이다.그는 너무 오래 살았고,늙어서도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세속을 탐냄으로써(老貪) 그의 살아 생전의 공을 모두 묻어버렸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김옥균인들 허물이 없었을까만 그는 국가를 개혁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허물을 덮었고,김홍집은 한창 일할 쉰 넷에 죽었으니 한이야 없을까만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윤식은 김옥균보다 두 배를 더 살고 욕을 열 배로 더 먹었으니 옛 성현의 말씀대로 ‘오래 산 것이 욕(壽則多辱)’이었다.왜 가장 늦게 태어나 가장 이른 나이에 가장 먼저 죽은 김옥균은 역사의 사면을 받았는데 가장 먼저 태어나 가장 오래 살다가가장 늦게 죽은 김윤식은 그토록 욕을 먹는것일까? 첫번째 김씨는 너무 과격했으나 역사에 공적을 남겼고,두번째 김씨는 다소무능했으나 자신을 탐하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역사에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지만,세번째 김씨는 그 경륜이 일세를 풍미했으나 너무 때묻었기 때문에역사의 오명을 벗을 길이 없다.그런데 나는 지금 김윤식을 필주하는데 왜 자꾸 김종필의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지 참으로 이상하다.원내 교섭단체가 뭐기에….
  • 韓·日 어협 해석‘1년째 설전’

    한·일 어업협정에 따라 상대국 배타적 경제수역(EEZ)내 어획쿼터를 정하는 원칙 중 ‘3년후 등량(等量)’의 적용시점을 놓고 두 나라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25일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지난 98년 11월28일자의 일본 외무대신 서한에 일본어로 ‘어획할당량의 합계는 1999년부터 3년에 일본국에 대한 어획할당량과 등량으로 한다’는 구절 중 ‘3년에(3年で)’의 해석을 놓고 양국이 협정이 발효된 지 1년이 지나도록 논란을 벌이고 있다. 우리 측은 지난해 초 어업실무협상 당시 ‘3년 이후’부터 적용키로 명시한 점을 들어 협정발효 4년째인 2002년부터 어획쿼터 등량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일본측은 ‘3년에’란 표현은 ‘3년째’를 의미한다며 당장 내년부터 이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양국은 지난 달 하순 올해 입어조건을 결정하는 막바지 어업실무협상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였으나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해양부 배평암(裵平岩)차관보는 “‘3년에’라는 애매한 표현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전통적인 조업실적을 인정,어민들의피해를 최소화한다는 등량원칙을 정할 때의 취지를 생각하면 불합리한 주장이어서 일본측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내년부터 등량원칙을 적용할 경우 일본 EEZ내에서 우리 어선이 잡을 수 있는 어획량은 일본의 어획쿼터인 9만t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게 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다. 올해 우리 측이 할당받은 일본 EEZ내 어획쿼터는 99년보다 2만t정도 줄어든13만1,000t이다. 함혜리기자 lotus@
  • 8·15특집 풍성… 해외취재물 눈길

    8·15를 맞아 방송사마다 다채로운 특집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KBS1TV는 2차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지목돼 옥사한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최후의 외무대신,도고 시게노리’를 두차례로 나눠 15일과 22일 방송한다.도고 시게노리는 국제신의와 평화를주창하며 태평양전쟁을 반대했던 인물.이 다큐는 그가 정유재란 때 일본에끌려간 조선 도공 후예란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도고 시게노리의 옥중수기 ‘시대의 일면’을 바탕으로 정수웅PD가 8개월간 세계 곳곳을 누비며 혼자촬영과 연출,구성을 맡았다. KBS1TV는 또 15일 오후 8시 ‘일요스페셜-소설가 이문열의 공개편지:북의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를 방송한다.월북한 아버지 이원철씨를 만나기 위해중국 옌지(延吉)로 떠난 소설가 이문열씨의‘50년만의 부자 상봉’을 다룰예정이었으나 이원철씨가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내용을 수정해 방송한다. KBS 1TV가 9일부터 방송하는 대하 다큐멘터리 ‘해방’도 눈길을 끌고 있다. ‘땅’‘무지’‘식민’‘독재’‘전쟁’ 등으로 주제를 나눠 지난 100년을정리한다. 이와 함께 15일 오후4시엔 각계 인사 6만여명이 독립문에서 판문점까지 61㎞에 걸쳐 인간띠를 이루며 통일을 염원하는 행사인 ‘이제 우리손 잡아야한다’를 생중계한다. MBC는 15일 밤10시35분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550만 해외동포를 연결하는 특집 ‘21세기 한민족 네트워크’를 대표적인 특집으로 내보낸다.러시아 중국일본 미국 멕시코 프랑스 독일 등에 사는 교포의 생활상을 2개월간 밀착취재했다.전대협 의장을 지낸 임종석씨가 프랑스와 독일 취재를 맡아 이채롭다. SBS는 13일 오후3시 특집 다큐멘터리 ‘트럭섬의 비명’을 방송한다.남태평양 트럭섬은 1차대전 초 일본이 점령해 2차대전까지 사용한 기지.이 곳에 끌려가 기지공사를 한 한국인 징용자가 1만여명에 이른다.이들은 44년 2월 미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된 이후 일본의 최종 항복까지 500여일간 굶주림과 싸웠다.차별과 학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과 함께 종군위안부 거주지와 생체실험실 현장 등이 소개된다.15일 밤12시10분에는 남북이산가족 상봉50년사를 정리한 ‘남북이산가족,그 희망과 좌절의 기록’을 보여준다. EBS는 13일과 14일 밤10시40분과 15일 밤10시30분 역사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역사,한반도의 왜’를 내보낸다.왜가 한반도에 존재했던 정치세력이며,광개토대왕의 남하정책에밀려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왜의 실체를 규명한다. 이밖에 한국남자와 일본 여자의 사랑을 그린 MBC ‘미치코’(13일 밤 10시)와 일본 경찰서장 아내와 노총각 바우의 사랑을 그린 SBS ‘아키코의 꽃신’(13일 오후1시) 등도 특집으로 기획됐다. 허남주기자 yukyung@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는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가운데 포함됐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는 왜 재심대상에 오른 것일까. 임시정부시절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일제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오히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사람이다.일찌기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없다.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이종욱은 1920년 6월29일 청년외교단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돼있다.무슨 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얘기는 역전된다.이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중 하나였다.이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7대 조선총독으로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종회(宗會) 의장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이듬해 37년에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당대 불교계의최고권력자로 부상했는데 그 뒷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발발 1주일만인 7월15일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이틀 뒤 그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며칠뒤 조선내 각 절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또 8월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다음날에는 경성 부민관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했다.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으로 창씨한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종욱은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총본산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현 曹溪寺)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단의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41.8.18)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 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1941.12월호)며 총독부의‘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 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또 조선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000원을 갹출,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내 1,500여 사찰에 12월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이종욱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당국에 헌납했다.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하달하기도 했다. 43년 8월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학병권유 대열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종욱은 8월17일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고 이어 9월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승권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의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됐으며 51년 동국대 재단 이사장,52년 7월에는 제4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해방후7년만에 이종욱은 일제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고 사후에는 건국훈장과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이제는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鄭雲鉉 jwh59@
  • 친일의 군상:19/을사5적 李根澤 일가(정직한 역사 되찾기)

    ◎代이어 日帝에 충성한 을사 5적 집안/한때 친러파… 大勢 기울자 日에 영합/을사조약 체결 앞장 공로로 요직 역임/충주로 피신한 명성왕후에 생선 잡아바치며 환심 사/왕후 死後 고종에 접근 경찰·군부 실력자 부상/을사조약 체결 과정 자랑 곁들여 설명/부엌서 듣고있던 하녀 식칼내던지며 “흉적” 호통 반민특위가 해산을 1개월 정도 앞둔 49년 7월 하순 어느날.당시 공주중학교 현직교사 한명이 반민특위로 붙잡혀 왔다.이름은 李元九,나이는 37세,죄명은 반민법 제4조 2항 위반.그는 부친 李昌薰이 일제로부터 받은 자작(子爵)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그러나 조사결과 그의 부친 이창훈은 해방후인 1947년 4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따라서 그가 일제때 부친의 작위를 습작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결국 그는 불기소로 풀려났다. 벌써 50년도 넘은 이야기다. 지난 가을 ‘공주갑부 金甲淳’ 취재차 공주를 방문한 기자는 우연히 공주에서 이들 부자(父子)를 만나게 되었다.두 사람 뿐만 아니라 이창훈의 부친을 비롯해 이 집안 4대를 한꺼번에 만났다.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후손이 제법 잘 단장한 자리에 차례대로 모두 누워 있었다. 그러면 이 집안의 ‘자작 벼슬’은 원래 주인공이 누구인가? 이창훈인가? 그의 부친인가? 그의 부친이다.‘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이근택이 바로 이창훈의 부친이자 자작의 주인공이다.부자가 자작을 지낸 이 집안의 친일내력을 더듬어 보자. 李根澤(1865∼1919)은 원래 충북 충주사람으로 집안은 대대로 무인가문이었다.본관은 전주(全州).이근택이 출세 줄을 잡은 계기는 좀 특이하다.그가 아직 서울로 올라오기 전인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민비(명성왕후)는 고향인 충주로 피난을 갔다.마침 이근택은 민비의 친정 이웃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매일 민비에게 생선을 잡아다 바쳤다.당시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민비로서는 이 일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환궁후 민비는 이듬해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남행선전관’에 임명하였다.1884년 무과에 합격한 이후 그는 10년간 지방관으로 근무하면서 중앙무대 진출을 모색하였다. ○명성왕후 유품 우연히 얻어 이근택이 대한제국기에 중앙무대에서 요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고종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한번은 그가 우연히 일본상점에 들렀다가 비단으로 만든 띠(帶) 하나를 발견하였다.화려한 수를 놓아 만든 것이 첫 눈에 보아도 기품이 있어 보였는데 군데군데 검붉은 흔적은 핏자국이 완연했다.순간 그는 이 허리띠가 민비의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거금 6만냥을 주고 사서 고종에게 바쳤다.고종과 태자는 비명에 간 민비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듯이 반가워 했다.이 일로 그는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독차지하였고 날로 벼슬은 높아졌다.대한제국기에 그는 경무사·경위원 총관·헌병사령관·원수부 검사국장 등을 지내면서 경찰·군사부분에서 최고의 실력자로 행세했다. 한편 대한제국 초창기 이근택은 친러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우선 출세의 은인인 민비를 일본사람들이 시해했기 때문에 일본과는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또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본 까닭도 있었다.조선내에 친일세력부식에 혈안이 돼 있던 일본측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급기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내 친러파 대신들을 매수·회유키로 방침을 세웠다.여기에 제일 먼저 걸려든 사람이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무대신 서리였던 李址鎔이었다.그는 단돈 1만원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매수돼 궁중의 비밀을 낱낱이 하야시에게 보고하는 첩자노릇을 했다.일제는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은 李容翊을 일본으로 납치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산이 보이자 한국내에서 그들의 기세는 갈수록 당당해졌다.정부대신들 가운데서도 일본쪽으로 기우는 자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이근택 역시 친러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일본세력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그는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감을 잡고 이를 틈타 또다른 출세를 계획하였다.당초 친러파였던 그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그는 일본공사관으로부터 기밀비로 30만원을 받고 그 댓가로 궁중의 기밀사항을 정탐하여 이를 일본측에 제공하였다.1905년 9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는 군부대신직에 올랐다.이무렵 그는 완전한 친일파가 되어있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그 공로로 이듬해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을 받았다. ○잠자다 자객에 피습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퇴궐한 이근택은 집안식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조약체결 광경을 설명하면서 “내가 오늘 을사5조약에 찬성을 했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終身)토록 혁혁(赫赫)할거요”라고 자랑하였다.순간 부엌에서 식칼(饌刀)로 도마를 후려치는 소리가 나더니 한 계집종이 마당으로 뛰쳐나오며 호통을 쳤다.“이 집 주인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으리오”하고는 그 길로 집을 나가버렸다.계집종이 집을 나가자 이어 오랫동안 같이 지내오던 침모(針母)도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5일자·제86호). 일개 계집종이 이러했을 진대 민중들의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다.조약체결 이듬해 2월 그는 취침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13군데나 자상(刺傷)을 입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거의 회를 쳐놓다시피 한 그를 한성병원에서 한 달만에 살려낸 것이다.그를 치료한 주치의는 나중에 2등 태극장을 받았다. 한번 친일로 들어선 그의 친일행각은 1910년 ‘한일병합’때까지 지속됐다. 병합후 일본정부는 공로자들에게 공적에 따라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공채(公債)로 주었다.이근택은 같은 을사오적인 權重顯·朴齊純 등과 함께 훈1등 자작(子爵,4등급)과 매국공채 5만을 받았다.병합후 그해 10월 중추원 고문으로 취임한 그는 1919년 12월 17일 사망하였다.그의 작위는 장남 李昌薰이 이듬해 2월 20일 습작(襲爵),해방때까지 유지하였다.그 역시 일제하 몇몇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는데 말하자면 대(代)를 이어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된 셈이다. ◎’3형제 매국노’/李根澔­李根澤·李根湘/日帝시대 통틀어 최초/죽은뒤 자식이 작위 습작 이근택은 형 李根澔와 동생 李根湘 등 3형제가 ‘한일합병’후작위를 받았다.이근택은 자작,형과 아우는 각각 남작을 받았다.일제시대를 통털어 3형제가 작위를 받은 경우는 이 집안이 유일하다.또 이들의 사후 작위는 모두 자식들이 습작하였다. 이 집안의 ‘스타’는 단연 이근택이다.이근택이 출세길에 들어서자 형제들이 뒤이어 벼슬길에 올랐다.1892년 진사에 급제한 동생 이근상은 군부 주사를 거쳐 1906년 궁내부 대신이 되었다.다시 시종원경과 구한국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그는 ‘한일병합’때 훈2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일제하에서는 중추원 고문과 식산은행 감사를 지냈다.1920년 1월 사망하자 그의 작위는 장남 李長薰이 그해 5월 10일자로 습작하였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하여 경무사,충청·전라·경기 감사,교육참모장,법부대신을 역임하고는 1906년 시종무관장을 지냈다.병합때 훈1등 남작을 받았다.그의 작위는 아들 李東薰이 습작하였다.습작자까지 포함하면 한 집안에 귀족이 6명이나 나온 셈이다. ‘조선귀족열전’을 편찬한 오무라(大村友之丞)는 이들을 두고 “3형제가 모두 왜목림(倭木林) 가운데 3회(會)로서 대신에 올라 일문의 성망을 현양하고 권세를 장악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고 했다.그러나 당시 세인들은 나머지 두 형제를 포함해 이 집안 5형제를 ‘5귀(鬼)’라고 불렀다고 한다.
  • 고종의 강제 퇴위(秘錄 南柯夢:26)

    ◎“천리 거역땐 변고”… 이완용 잇단 傳位협박/이토 사주업고 매국노들 음모 미리 눈치챈 정환덕 황제께 비밀리에 봉서/일본군,함녕전 포위하고 기관총까지 설치 위협/사면초가 고종 마침내 조칙/‘섭정’으로 일격당한 일제 강제 양위식으로 퇴위시켜 그러나 이토 미간에도 풍진이… 이토 히로부미는 역시 교활한 여우였다.‘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던 그는 차제에 숙원사업으로 남아있던 고종의 양위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1907년 7월3일 먼저 고종황제에게 “음험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였으니 차라리 당당하게 선전포고 하시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고 위협하고 3일뒤에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헤이그 밀사는 일본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행위이니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선전(宣戰)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그리고나서 “당신 책임하에 고종을 양위시키시요”라고 명령했다.정환덕은 이 음모를 미리 알고 고종에게 은밀히 알려 드렸다. 하루는 강창희씨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근간에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증응 임선준 이재선 등이 한적한 곳에 모여서 비밀리에 의논하는 것을 엿들었더니 바로 전위변혁(傳位變革=황제를 바꾸는 일)음모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극히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그러니 대감이 먼저 황제께 아뢰어 이 일을 미리 아시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가 조석지간에 망하게 되었습니다.황제에게도 참화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나 이를 어떻게 하실지 걱정만 됩니다”고 하였다.그렇지만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 마당에 이것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돼 드디어 글을 써 봉함하고 서상궁으로 하여금 비밀리에 상감께 드리도록 했다. 주상께서는 봉서를 보신 뒤 긴 한숨을 내쉬며 서상궁을 불러 은밀히 하교 하시기를 “이 일을 어찌 조처하면 되겠는가.정환덕에게 속히 대답하라고 일러라”하시었다. 이에 나는 상서하기를 선위(禪位)하시는 문제는 주상폐하의 확고한 용단으로 결정하실 일이며 또 이 문제는 폐하의 집안일이신지라 소신이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다만 금년 정미(丁未)년은 폐하의 역수(歷數,즉 운수)가 끝나는 해이온데 만일에 이를 거역하신다면 성상의 수명에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위하신다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우니 이런 난감한 일은 폐하께서 직접 조처하실 일이지 신이 감히 입을 열 처지가 못됩니다.참으로 황공하여 다시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선전포고란 헛소리요,공갈이었다.고종이 이 말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이완용과 송병준이 무엄하게도 대궐의 문턱을 넘어 들어와서 “양위하셔야 합니다”고 아뢰자 호통을 치며 이를 물리쳤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대신들은 함녕전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서 전위(傳位)문제를 주달하였다.“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이미 44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동궁 전하(융희를 일컬음)의 성년(聖年)도 벌써 40이 가까웠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상폐하께서는 동궁전하께 선위하심이 천리(天理)를 따르고 중의(衆議)를 저바리지 않으시는 것으로 압니다.감히 말씀드립니다”고 하였다.이에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경들은 모두 여러대에 걸쳐 나라의 두터운 은총을 받은 신자(臣子)들이다.만일 전위의 의논이 있었다면 상소를 올려도 되고 간쟁(諫爭)을 하여도 가하거늘 어찌 무두무미(無頭無尾:밑도 끝도 없이)졸지에 여러사람이 궁궐에 들어와 전위를 강권하는가.이게 무슨 도리인가.비록 경들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전위문제는 짐이 먼저 알아서 할 일이다.그러나 아직 짐의 정신과 기력이 쇠하지 않았고 동궁의 나이 40이 가깝다고는 하나 몸이 약하고 견식이 아직 미흡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결행하지 못한 것이다.물러가 짐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가하다.절대로 강제로 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다.이에 이완용 등은 감히 다시 권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며칠 뒤 저들은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함녕전 대청에 들어와서 엎드려 말씀드리기를 “폐하께서 끝내 천리를 거역하시면 밖에서 부터 혹시 불칙한 변이 있을지 모릅니다”하였다. 이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밖에서부터 불칙한 변이 있다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하셨다.여러 사람이 소리내 주달하기를 “폐하의 운명이 이미 다 되고 하늘의 운수도 동궁에게 돌아갔으니 전하께서는 속히 전위하시어 천지신명에 따르고 옥체를 보존하는 것이 가하실 것으로 아옵니다.또 세계 열강들의 공론도 속히 전위하시는 것이 좋다고 하오니 폐하께서 빨리 용단을 내리시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고 하였다. 그들은 ‘세계공론’이라는 있지도 않은 허튼 말을 하고 있었다.이토는 이때 일본정부로부터 “저 놈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받고 있다고 공언하였다.다시말해 고종의 목을 베어 가져가겠다는 폭언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이토는 일본군을 동원,덕수궁 대한문을 밀고 들어가서 함녕전을 포위한 뒤 기관 총 4문을 설치하고 고종황제를 위협했다.또 남산에도 포대를 설치,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문자 그대로 전쟁상태였다.이같은 상태에서 고종황제는 마침내 조칙을 내리니 바로 1907년 7월19일 오전 3시였다. 짐이 대통을 이은 뒤 생민은 도탄에 빠지고 사직은 위태로워 망할지 모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환란과 재난이 없는 해가 없었던 것은 치안유지에 실패한 탓이었으며 짐이 부덕한 탓으로 그 화가 2천만 국민들에게 미쳤다.지금 뉘우친들 무엇하겠는가.세부득하여 동궁에게 전위한다.천지신명과 종묘사직에 성심으로 이를 고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 조칙은 양위조칙이 아니었다.나라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섭정(攝政)조칙이었다.놀란 것은 이토였다.또 한번 고종황제에게 얻어 맞은 것이다.그는 황급히 본국으로 전보를 쳐 일왕이 고종의 양위를 축하한다는 전보를 치게했고 이튿날 오후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거행하였다.그뒤 고종과 순종은 덕수궁과 창덕궁으로 격리돼 떨어져 살게 되었다. 대체로 태상황(고종)께서 신황제(순종)와 식탁을 같이 하고 침실을 함께 하신지 34년이다.그런데 하루 아침에 서로 떨어져 사시게 되었으니 부자간의 정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토의 하수인으로 공을 세운 이완용은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인사행정을 자행하였으니 그 여독은 오늘에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 신황제가 즉위한 뒤 개각을 단행했으나사실은 모두 저들이 멋대로 조각한 것이었다.총리대신에 이완용,내부대신에 송병준,탁지부대신에 고영희,군부대신에 이병무,궁내부대신에 이재선,외무대신에 조중응 그밖의 경무사(警務使)와 13도 장관,360주의 군수들까지 모두가 저들의 친족들과 인아(사돈),그리고 사돈의 사돈까지 줄줄이 차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고종 황제에게 이겼다고는 볼 수 없다.정환덕이 이토의 관상을 보았는데 그의 양미간에 풍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몇해전 이토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을 때 잠시 돈덕전(敦德殿)에서 보았는데 겉으로는 영웅같이 보였으나 가슴속에 끝없는 흉계를 갖고 있었고 양미간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진(風塵)이 드러나 있었다.
  • 日 기업 韓國 투자유치/정부·기업 본격 세일즈

    ◎12개 기업 방문 활동/日 수상 등에 협조 요청 정부와 민간기업이 일본기업의 한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본격적인 세일즈 활동에 나섰다. 14일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16일부터 사흘간 일본 미야자키 현에서 열리는 제 30차 한·일 경제인회의에 吳剛鉉 무역정책실장을 파견,대한투자유치 활동을 펴기로 했다. 정부가 투자유치 활동을 위해 1급을 일본에 파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吳실장은 한일 경제인회의에 참석하는 金相厦 대한상의 회장 등과 함께 15일 일본 수상과 외무대신,통상대신을 예방하고 신정부의 투자유치책과 오는 5월로 예정된 일본의 대한 투자환경조사단의 방문준비 등을 설명할 예정이다. 吳실장은 이 기간중 가와사키중공업,도시바 등 12개 기업을 방문,▲세제감면 ▲공장부지임대료 인하 ▲원스톱서비스체제 ▲노동시장유연성 제고 등 변화된 투자여건 등을 설명하고 일본기업의 한국 투자를 희망하는 150개 한국기업 명단과 투자가능분야 및 조건 등을 담은 리스트를 함께 배포할 예정이다. 劉常夫 포철 회장도 이 기간중신일본제철,스미토모 금속,일본강관,가와사키 제철,고베제강 등 일본 고로 5사 및 미쓰비시상사,닛산자동차,닛쇼이와이 등 일본내 주요 철강재 수요업체 최고경영층과 회동을 갖고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한다.
  • 극단의 시대/에릭 홉스봄 지음(화제의 책)

    ◎20세기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눠 진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부터 소련이 무너진 1991년까지의 세계사를 서술.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80)은 이 책에서 20세기를 파국시대(1914∼1945),황금시대(1945∼1973),붕괴시대(1973∼1991) 등 3단계로 나눠 진단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스페인,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3국,스위스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가 참가했을 만큼 총력전으로 전개됐다.1914년 영국과 독일이 전쟁에 돌입하자 영국의 외무대신 에드워드 그레이는 화이트홀의 불빛을 바라보며 “유럽 전역에서 등불이 꺼져가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홉스봄은 이 파국의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대목으로 공동의 적인 파시즘에 대항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기묘한 동맹을 꼽는다.황금의 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후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시기다.그러나 경제적 번영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엄청난 사회적·문화적 변동이다.농민층의 급격한 감소나 가족의 위기 등이 그 예다.홉스봄은 73년 오일쇼크와 함께 시작된 붕괴의시대를 대량실업과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얼룩진 ‘산사태의 시기’로 규정한다.한편 홉스봄의 이러한 20세기 해석은 지나치게 유럽중심적인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도 없지 않다.이용우 옮김 까치 전2권 각권 1만2천원.
  • 「학교종이 땡땡땡」 출간차 귀국/김메리 할머니 특별 인터뷰

    ◎“요즘 부모들 「가르침없는 자유」 주는게 문제”/「뭐든지 배워라」 어머님 말씀 내인생의 좌표/우리교과서 만들며 작곡… 50년 애창 큰 보람/20년만 젊어도 그림 배울텐데… 서울신문 초대에 감사드려요 □대담=임영숙 문화부장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 국민에게 애국가 다음으로 친근한 노래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할머니(92·미국 뉴욕거주).격동의 한 세기를 현대여성도 엄두를 못낼 도전과 모험으로 치열하게 살아 온 「영원한 젊은이」이기도 하다.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의 출판기념회와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김할머니를 2일 임영숙 문화부장이 만나 보았다.〈편집자 주〉 ­자서전을 단숨에 읽었습니다.재미있고 감동적이더군요. 『고마워요.할 이야기가 많아서 「속 학교종이 땡땡땡」을 써야 할까봐요.처음엔 영어로도 쓰려고 했는데….우리 딸 귀인(조귀인 미국 뉴욕타임스 매거진 편집국장보)이가 「학교종이 땡땡땡」을 영어로 다시 쓰기로 했어요.미국에서도 책이 나올거예요』 숙소인 남산의 힐튼호텔을 찾은 이날 상오,김할머니는 진분홍 꽃무늬가 돋보이는 하늘색 옷에 같은색 스카프,브로치를 단 흰 털실 베레모 차림으로 햇볕 가득한 방에서 일행을 맞이했다.뉴욕에서 서울까지 13시간의 비행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한 자세에 웃음을 잃지 않고 80여년전의 일까지 하나하나 기억해 얘기하는 모습은 거의 「소녀」에 가깝다.아직도 마음은 25∼29세라고 말했다. ○남산 신사참배 “생생” 『일제때 저 남산언덕배기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했어요.한달에 두번씩 신촌에서 이화학당 학생들 20여명이 함께 걸어와 저기서 절 한번하고 또 신촌까지 걸어갔습니다.지금 남산을 보니 그때 가슴아팠던 것이 사라지는군요.아주 시원해요』 ­한국이 많이 변했지요. 『나쁜쪽으로 보다 좋은쪽으로 변화가 더 많아요.이제 남은 것은 북한이 문제인데 통일도 곧 될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불리는 「학교종」의 가사가 원래와 달라졌다고 어제 공항에서 말씀하셨는데… 『아동문학가 윤석중씨가 나중에 바꾸었어요.문법상 문제가 있다면서.그래서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 「내가 한국에만 있었어도 가만두지 않았다」고 항의를 해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죠.그러나 지금은 좋아졌어요.그리고 올해부터 미국 뉴욕주 국민학교 음악책에 「학교종」이 실리는데 종소리가 「딩딩딩(Ding)」으로 번역돼 좀 우스워요.』 ­해방직후 이화여전 음악과장 시절 현제명 김성태씨등과 음악교과서를 만들면서 20여곡을 작곡하셨다는데 「학교종」말고 다른 작품은 남아있지 않습니까. 『당시 교과서가 있으면 찾을 수 있을텐데 안타까워요.1950년 미국에서 내 손으로 직접 써서 출판한 「한국민요집」은 아직도 미시간의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학교종」이 지난 95년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교사용 지도자료에만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매우 섭섭해 했다. ○김규식씨가 사촌오빠 ­「학교종이 땡땡땡」을 읽다 보면 나이와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삶을 사는 선생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구한말 명문가의 규수로서 결혼하기 싫다고 만주로 도망가고,이화여전을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미국유학을 떠나 전공인 영문학대신 음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귀국후 이화여전 음악과장이 됐다가 학칙을 어긴 고위층 자녀 학생을 유급시킨 일로 말썽이 나자 음악과장 자리를 박차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 화학과 미생물학 석사가 돼 49세부터 미국 병원실험실에서 임상병리사로 일하고,정년퇴직후 70세가 넘은 나이에 평화봉사단이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고,80세에 서예를 새로 배워 전시회를 열고….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살면서 어머니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어머니는 늘 나에게 무엇이든 배우라 하셨어요.도둑질 빼고 무엇이든지요.항상 남을 도우라는 말씀도 하셨어요.또 그 시대의 여성치고는 개방적이어서 내가 하려는 일이 옳으면 막지 않으셨어요.소학교때 선생님의 얘기도 가슴 속에 살아 있어요.한 사람이 나뭇가지에 올라갔는데 그 나뭇가지가 약해서 부러지러 하자 빨리 그 옆의 든든한 가지로 옮겨 살았다는 거예요.우리의 삶도 「좀 더 나은길」을 찾아 부단히 움직야 합니다』 ­지금도 새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다 했는데 한가지만 아직 못했어요.그림 그리는 일이예요.79세때 뉴욕대학 평생교육 과정에 들어가 3년간 소설 쓰는법도 배웠어요』 ○공부하고 싶어 만주로 ­어린시절 이름은 지금과 달랐지요. 『셋째딸이라 해서 삼식이었지요.그러나 기독교신자인 어머니가 메리(Mary)라고 부르셨습니다.아버지(김익승)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일본유학을 한 뒤 일본어,영어에 능통해 외무대신까지 지냈고 김규식박사가 사촌오빠됩니다.보통학교를 나온 뒤 배화학교를 다녔으나 졸업반이던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졸업은 못했지요.그러나 그때 교사들이 잡혀가 보통학교 졸업반 학생이 임시교사가 됐어요.나도 15세 되던 해 논산의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는데 17,18세나 되는 남자학생들이 가득찬 학교에 도착하니 「아기선생 왔다」며 놀려대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까지 살아 오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만주에 3년간 있을때 였어요.논산에서 6개월만에 올라 오니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하시더군요.당시 궁중전의였던 다섯째 삼촌이 고종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을 역이용한 일본인들때문에 만주로 떠나게 돼 영어사전 하나만 달랑 챙겨들고 따라갔어요.삼촌의 병원 일을 도우면서 영어사전을 통째 외우고 교회에서 풍금반주를 하기도 했는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74세에 아프리카 봉사 ­만주에서 돌아 와 이화학당에 입학하셨을 때의 동급생이나 후배들 얘기 좀 해주시죠. 『이화학당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는데 그때 동기중 이기붕씨의 부인이 된 박마리아가 있어요.1,2등을 다투는 라이벌이었죠.하지만 이씨와의 결혼은 내 중매로 이루어졌어요.게다가 한 학년 밑에는 모윤숙 백낙준씨의 부인이 된 최이권 등이 있었는데 이들도 여간 극성이 아니었어요.학생회장도 선배인 우리들을 제치고 서로 맡겠다고 난리였어요』 ­미국으로 다시 떠나서 뒤늦게 전공을 바꾸신 이유는….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였어요.70세까지 병원 실험실에서 일했어요.75년 남편(조오흥)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 벙원에서도 정년퇴임 하고 나자 이제는 또 무얼할까 하다가 74세가 되던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에 지원,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떠났어요.2년동안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80년 4월 라이베리아에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으로 돌아왔지요』 ­대단하십니다.건강유지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음식과 운동이예요.매일 동네를 3블록씩 산보하고 비가 오는 날은 집안에서 자전거등 운동기구로 운동을 해요.아침은 과일주스나 과일,보리죽과 볶은 가루에 우유를 타서 먹든지 달걀반숙을 먹어요.점심은 좀 양이 많은데 7첩반상으로 차려먹죠.맵지않게 만든 김치와 깍두기,생선,나물무침,전을 즐기지요.돼지고기,닭고기는 안 먹고 일주일에 세번 생선국,두번 야채국을 먹어요.외식은 안해요.또 뇌세포 생성을 돕기 위해 매일 TV 교양프로의 토론을 보며 받아쓰기도 하지요.아직 돋보기도 안쓰고 바느질도 직접 해요.지난 89년 뇌일혈로 한때 쓰러졌던 적이 있어요.그때도 기억력,시력을 그대로 유지해 의사가 「신비하다」고 말했어요.지난해 기억력테스트를 해보니 25∼29세 연령의 기억력으로 나오더군요.「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우리 옛말의 그 정신으로 삽니다』 ○주일학교 교사 맹활약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지금은 주일학교에서 한국인 어린이들의 교사로 일해요.「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도와주면 좋은 인물됩니다」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 우리말,영어로 가르쳐주기도 하죠.월요일이면 하루종일 드러누워야 할 정도로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가르치는 동안에는 생기가 나요.20년만 젊다면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텐데…』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노래를 배우고 자라는 우리 어린이들과 부모님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어린이들이 가짜 동물,식물만 보면서 놀잖아요.그게 못마땅해요.자연에서 진짜 동물,식물을 보면서 놀아야 배우는 것도 많아요.그리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유는 무제한으로 주지만 지도를 안하는 것 같아요.지도하면서 자유를 주어야합니다』 ­서울에 얼마나 머무실겁니까 『2∼3주일 있을 생각이예요.떠나기전에 서울신문을 방문하겠습니다.서울신문에서초대 해 줘서 고마워요』〈정리=서정아 기자〉
  • 「학교종이 땡땡땡…」작곡가/재미 김메리 할머니 자서전 출간

    ◎13세때 첫 교사생활… 90평생 남위해 봉사/근대화의 격랑 헤쳐온 삶 진솔하게 드러내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해방후 우리 손으로 처음 만든 교과서,그 가운데 초등학교 1학년 음악책에 실렸던 동요 「학교종」은 여지껏 애창되는 노래이다. 요즘도 노래 자리에서 사람들이 「학교종이 땡땡땡…」을 부르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된다.그럼에도 이 노래를 작곡한 김메리할머니(92·미국 거주,미국이름 Mary Kimm)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김할머니의 자서전 「학교종이 땡땡땡」이 최근 출간됐다(현대미학사 펴냄).이 책에는 90여 인생을 자기계발과 이웃사랑으로 치열하게 산 한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김메리는 1904년 서울에서 김익승의 셋째딸로 태어났다.아버지가 대한제국 외무대신을 지냈고,해방정국에서 이승만·김구와 함께 민족 지도자로 추앙받은 김규식이 4촌오빠인 명문가 출신.「메리」는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이다. 평생 자기 공부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남을 가르치는그의 삶은 어려서 시작된다.배화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가 논산의 한 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할 때의 나이는 열세살.김메리는 『새 선생이 온다고 교장과 학생들이 마중나와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나 「아기 선생」노릇은 여섯달만에 끝나고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그러자 집에서는 결혼을 서둘렀고,김메리는 삼촌을 따라 만주 용정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3년을 보낸다.귀국후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친 그는 1930년 미시간대학으로 첫 유학을 가 거기서 전공을 피아노로 바꾼다. 이후 남편이 되는 조오흥씨와의 만남,석사학위 취득과 귀국,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부임,약혼자의 뒤따른 귀국과 결혼으로 이어진다.남편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해야 했고,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산가족이 된다. 해방이 되자 김메리는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편수에 참여,「학교종」을 비롯한 동요들을 작곡한다.해방된 조국의 모교에서 후진양성에 애쓰던 그는 어느날 음악과 학과장 자리를 떨쳐버리고 다시 미국길에 오른다.남편과 합쳐야 하는데다 새로운 학문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가졌기 때문. 이때부터 평범을 거부하는 그의 치열한 삶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웨인대학에서의 화학·미생물학 공부,칠순 나이에 평화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의 2년 활동들이 그것.아울러 미국에서 한국민요집을 발간하거나 서예전을 갖는등 한국문화 홍보에도 애쓴다. 지난 89년 뇌일혈로 쓰러졌던 김메리할머니는 젊은이 못잖은 의지로 건강을 회복했다.국내에서 자서전을 출간한 것과 관련,5월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이용원 기자〉
  • 양식없는 가토 일 자민당 간사장/강석진도쿄특파원(오늘의 눈)

    독도문제로 한일관계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오고 가는 말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는데.갈등을 겪고 있을수록 말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국가의 이미지를 고려할 때도 그러하고 본질논의가 흐려질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양국관계가 말로 인한 감정때문에 회복이 더뎌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정치계의 실력자 가토 고이치(가등굉일) 자민당간사장의 지난 12일 발언도 실망과 유감의 수준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그는 한 강연에서 독도문제에 언급하면서 「김영삼대통령」이 아니라 「김영삼이라고 하는 대통령」이라고 일본어 표현상 상대를 무시하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재일동포들은 공인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라고 분노하고 있다. 그는 연립여당 대표단의 방한이 무산된데 대해 『이케다 외무대신이 「다케시마는 일본영토다」라고 말한 것만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화가 나버려 대표단을 오지 말라고 했다』고 김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뒤 『지도자들간에는 의견이 달라도 대화를 계속한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훈계조로 엄포성 발언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그가 「이 아픈 날 콩밥하듯」 남북관계가 경색돼 있던 지난해 한국의 머리를 뛰어넘는 대북접촉으로 갈등을 야기시켜온 것을 잘 안다.그의 주위에는 정체가 석연찮은 인물들이 대북 접촉에 주요역할을 맡고 있다는 비판이 늘 있어왔다.인도주의를 내세워 한국정부를 곤경에 몰아넣고 남북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그의 움직임과 관련,이곳 외교가에서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늘 의문이 제기돼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강연에서 그는 9월 방한 파티에서 김대통령이 따뜻한 눈길 한번 안주었던 것이 못내 서운했던지 「이상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느니 나중에 측근에게 일부러 무시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느니라며 묵은 감정을 끄집어내 인신공격성 발언을 늘어놓기도 했다.시비곡절을 떠나 예의에서 일탈한 발언을 공개된 장소에서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의 자질과 양식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을 반박한다/신용하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일합방 국제법상 원천적 무효” 과거 일본의 총리와 정치인들이 한반도 침략과 관련한 망언을 수없이 되풀이해왔지만,최근 무라야마 도미이치 현총리의 망언을 대하고는 더욱 커다란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무라야마 총리만은 이전의 총리들과는 다른,양식을 갖춘 인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그가 왜 그런 발언을 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각종 조약을 맺은 것은 당시의 국제공법에 비쳐서도,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전히 불법적인 것이다. 우선 을사5조약을 보자.일제는 1904년 2월8일 대규모의 일본군대를 한반도에 불법 상륙시키고,러일전쟁을 도발했다.주권국가인 대한제국의 아무런 승인도 없이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합법인가,불법인가.더욱이 남의 나라 강토에서 외국과의 전쟁을 도발해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만든 것이 합법인가,불법인가. 당시 일제는 러일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은,2개 사단의 대한제국주차(주둔) 일본군을 보내 대한제국의 수도와 조정을 장악했다.1905년 11월17일일제는 바로 이 주차군으로 대한제국의 궁궐을 포위,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의 국제공법에 따르면,전제군주국가가 외국과의 조약을 맺으려면 황제가 승인,비준하는 서명날인이 있어야 한다.또 입헌군주국과 공화국에서는 황제의 서명날인에 의회의 동의가 추가돼야 조약이 체결되는 것이다.그런데 과연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인 광무황제가 을사5조약에 서명,날인을 했는가. 당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황제의 자문기구인 어전회의가 2차례 열렸다.황제가 참석한 1차 회의에서 조약체결안은 만장일치로 부결됐다.그러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주차군사령관은 황제가 참석한 회의라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며 황제를 배제시킨채 2차 회의를 열어 조약체결에 찬성하도록 강요했다.이때도 총리대신서리인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하자 일본군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연행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이런 상황에서 5명의 반역자가 일본군의 무력에 굴복한 것이다.그러나 그 회의는 자문회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아무런 구속력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또일본은 당시 외무대신 박재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고노스케가 서명한 조약안을 황제에게 추인받으려 했으나,광무황제는 끝까지 서명날인하지 않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이 을사5조약이 성립된 것처럼 대외에 공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1906년 2월1일에는 한양에 일본통감부를 설치했다.식민지화를 위한 정지작업이 시작된 것이다.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조약이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한 일본통감과 통감부는 전적으로 불법이다. 또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당시 일제의 이러한 불법행위에 대해 대한제국 전역에서 국민들이 항일의병을 조직해 무력항쟁을 했다는 사실이다.일제가 불법적인 무력으로 국권을 빼앗으려 하니 생명을 걸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당시 축소발표된 일본군측의 통계로도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14만1천6백명의 의병이 참가한 2천8백60회의 전투가 벌어져,1만6천7백명의 의병이 사망하고 3만6천7백70명이 부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일제는 1910년 8월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하는데,그 조약문도 일본 정부와 통감부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서명을 강요한 것이다.당시 서명자는 일본의 데라우치 통감과 대한제국의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다.그러나 통감 설치를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데라우치 통감의 서명은 국제공법상으로 원천적인 무효인 것이다.한일합병조약 뿐만 아니라,일본통감이 내린 모든 명령과 지시,법규등은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실제로 2차대전 종전을 전후한 카이로 선언,포츠담 선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등에서 국제사회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으로 맺은 조약은 전부 무효라고 선포했으며,1945년 8월10일 일제는 항복하면서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수락을 통보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을사5조약과 한일합병조약은 불법적인 것이고,이를 일제가 무력으로 강제집행한 것에 불과하다. 무라야마 총리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이제라도 『한일합병조약이 법적으로 유효했다』는 발언을 취소하고 한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 한림대과학원 국제학술심포지엄

    12∼13일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현승종) 주최로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국제학술 심포지엄은 21세기의 한국이 선택할 이념과 정책 및 동북아시대의 한·미·일 3국의 「경쟁과 협조」관계를 집중 조명했다.이번 심포지엄에 참여한 와다 하루키(화전춘수)도쿄대교수와 이정걸중국사회과학원 동구중아연구소 부소장이 각각 「일본의 대한 정책 이념」및 「중국의 대외정책과 한중관계」라는 주제로 발표한 논문을 간추려 본다. ◎전후일본의 대한정책 변화/과거 한반도진출 비판세력 늘어/와다 하루키 일 동경대학교 교수 전후 일본정치의 흐름은 보수와 혁신의 정치조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문제는 보수의 내부,혁신의 내부의 차이를 구별하는 일이다. 전후 일본의 보수본류는 요시다 시게루(길전무)가 개척했다.자유당총재로서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각각 5차례 역임한 요시다는 전후 개혁기에서 부터 강화 독립에 이르기까지 일본정부의 중심이었다.요시다는 재일한국인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요시다의 보수본류는미일관계의 처리에 모든 주의를 집중한 반면 조선 한국 대만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없이 낡은 관념에 기초한 나머지 사무적인 대응을 보였다. 보수방류의 대표는 기시 노부스케(안신개)다.기시는 57년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을 겸직했으며 59년에는 관방장관이 되었다.기시는 구보타(구보전관일낭)발언을 철회했고 한일회담의 재개에 합의했다.기시는 그러나 재일한국인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한국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재일한국인의 북한행을 허가했다.기시에 이르러 보수본류는 경제주의로 경도되었다.그리고 보수본류의 경제주의는 시나 에쓰사부로(추명열삼낭)의 아시아주의와 결부해 한일회담을 타결시켰다. 보수본류측에서 생겨나고 있는 흐름을 주도하는 사람으로는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전총리대신을 들 수 있다.미야자와는 82년 관방장관으로 있을 때 일본의 교과서문제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 대한 담화에서 「반성과 결의」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다.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도 미야자와내각에서 비로소 제기됐다.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는 총리대신이 된 뒤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침략전쟁」,「잘못된 전쟁」이라고 발언했다.호소카와는 곧 좌절했으나 그의 위치는 신보수 리버럴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는 또 다른 신보수의 흐름을 대표한다.오자와는 33년에 낸 「일본개조계획」에서 「보통국가가 되자」라는 슬로건을 주창했다.여기에 대해 신당 사키가케(선구)를 창당한 다케무라 마사요시(무촌정의)는 일본은 어디까지나 비군사적인 형태로 국제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보수적 지식인 가운데서도 도쿄대 문학부장과 총장을 역임한 하야시 겐타로(임건태낭)와 교토대교수를 지낸 이노키 마사미치(저목정도)처럼 과거 일본의 진출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중국 대외정책과 한중관계/선린우호관계 개혁추진에 큰 도움/이정걸 중 사회과학원 부소장 중국의 대외정책은 일정한 이론에 의해 지도돼왔다.이 이론은 중국 지도층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국가이익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결정됐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50년대에는 좌익 일변도의 정책이었고 60년대는 반미반소 정책,70년대는 범세계적 반소 통일정책,80년대이후에는 각국 자주독립 평화 외교정책으로 발전돼왔다. 5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 이론은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과 승리만을 위한 정책노선이었다. 중국은 이에 따라 50년대초 조선전쟁에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이는 자신의 안전 확보는 물론 미국의 「전쟁정책과 침략정책」을 반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중국의 이같은 정책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기치 아래 제3세계와 함께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당시 중국은 한국을 제3세계로 분류했으나 조선반도의 특수한 정세와 한국·대만간 외교관계 때문에 양국관계는 정상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외교노선이 수립된 이후 중국의 한국에 대한 적개심은 분명히 감소되기 시작했고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견해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80년대들어 다시 대외정책을 조정,중국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국내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국제환경특히 주변환경을 평화스럽고 안정되게 창조하고,사회제도나 이데올로기의 같고 다름을 이유로 우적관계를 논하지 않으며,평화공존의 원칙위에서 모든 국가와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고,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가 이룩해낸 모든 선진문명의 결과를 흡수·이용하는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는데 두었다. 이제 한국이 중국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살펴보면 최소한 다음 3가지를 확언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은 중국의 중요한 인접국이기 때문에 양국이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으로 하여금 국내개혁을 도모하고 평화적이고 안정된 주변환경을 조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두번째는 한국은 신흥공업국가로서 경제·과학기술상 잠재력이 크기 때문에 중국의 대외개방추진에 있어 중요한 합작대상이 되고 마지막으로 한국의 문화·역사·전통등이 중국과 유사해 한국 현대화의 성공은 중국에 특수한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중양국이 선린우호관계와 상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킬 것이라는 전망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것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0)

    ◎길림시절:9/「유길학우회」 활동의 허구/“이준·안중근의 독립투쟁 비판” 주장/27년엔 공산당 영향력 없어 불가능/종교타파 주도자,자신서 여선생으로 바꿔 회고록에서는 길림소년회와 유길학우회가 한 사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⑴조기회…아침마다 지구별로 열었다.일요일은 모든 회원들이 북산에 가거나 그 밑의 운동장에 가서 체육경기를 했고 가창행진도 하였다. ○“노동이 낫다” 인식케 ⑵종교타파…김일성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을 시켜 종교를 믿는 학생에게 하루종일 하느님에게 빵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였다.그 다음에 여선생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밀 이삭을 주워 그것으로 빵을 만들게하여 먹을 것을 얻는 데는 「하느님」보다 노동이 낫다는 것을 인식시키도록 하였다.또 소년회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소년 애국가」·「조선인 길림소년회가」같은 혁명가요를 보급하였다. ⑶국어강습…27년 여름에는 중국소학교에 다니는 소년 등 우리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20일동안 국어를 가르쳤다.「조선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란 구호를 내걸었는데 계영춘·김원우·박소심이 강의에 출연하였다. ⑷과외활동…용담산 원족,강남공원 야유회,문화유적 참관,강연회,토론회,학습회,웅변대회,독서발표회,노래보급,연예공연 등을 다양하게 조직하였다. ⑸비밀활동…강남공원·북산 등에서 야유회의 간판을 가진 비밀회의를 많이 하였다.북산의 약왕묘 지하실은 그들의 전용 회의실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⑹강연…오동진·이탁 등 정의부 지도자들은 국치일(8월29일),3월1일,단군 탄생일(10월3일)등 주요 기념일에 교포들과 청년학생들을 모아 놓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자주 조직하였다.김일성도 연설했다. ⑺토론회…27년 여름에 손정도네 예배당에 유길학우회 성원들을 모아 놓고 이준의 방법이 옳은가,안동근의 방법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가졌다.이 토론회를 계기로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는 테러나 청원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진로가 탐구돼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⑻계몽사업…소년회원들까지 동원하여 강동·육대문·신안둔·대황구와 같은 농촌마을에 나가 농민들의 일손을 도와주면서 그들을 계몽하였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활동」의 실태를 분석해 보자. 첫째로 손정도의 예배당에서 당시의 학생들이 일제 요인을 향한 테러나 강대국을 위한 청원의 방법으로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고 토론했다는 것은 민족주의운동 진영에 공산주의 사조가 침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종래는 김일성 자신이 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종교타파 문제가 이번 회고록에서는 그 주인공이 「조선인소학교」의 여선생으로 바뀌었다.이 학교는 일본기록이 말하는 「신개문 밖의 예배당에서 경영하는 유치원」이다.공산주의 사조는 당시 유치원 선생에까지 파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부 계통” 입증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29년 께가 아니면 생길수가 없다.김일성이 주장하는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지방에서는 민족주의진영 세력이 압도적이었고 조선공산당의 영향은 아직 그 내부에까지 침투되지는 못하였다. 셋째로 국어강습은 회고록 본문을 읽어보면 김일성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대신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인 서울상해파의 간부 박소심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 사실은 29년에 서울상해파가 국어강습을 지도했고 그들이 계영춘,김원우 등 정의부 좌경분자들을 강사로 끌어들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로 오동진,이탁 등 정의부의 지도자가 강연했는데 이런 강연을 김일성도 했다고 하고 있다.이것은 그가 국민부 계통이었다는 것을 실토한 대목이다.소년회장으로 있었던 29년 무렵 그가 소년들 앞에서 「강연」을 한 것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다. 다섯째로 29년 당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여러 종파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과외활동,비밀모임,대중 계몽사업을 벌였다.그들은 민족주의 단체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썼다. 이 때문에 국민부 인사들은 혹은 좌경화되고 혹은 「반동」으로 몰리고 동족상잔의 가지가지 비극이 연출되었다.정의부계통의 청소년들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김일성도 그런 소년의 한 사람이었다. 회고록의 기술을 분석해보면 이상과 같다.그러나 회고록은 이러한 진실을 계속 외면하고 29년 께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선상에 나타난 일련의 현상을 27년에 끄집어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 총영사 질겁” 과장 『조선인길림소년회,조선인유길학우회,마르크스 레닌주의 독서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길림일대에서는 「ㅌ·ㄷ」성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새세대의 혁명역량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다. 길림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총영사까지도 이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활동에 주의를 돌리게 되었다.길림 일대에서 새로운 혁명세력이 등장하여 그것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데 질겁한 총영사는 자기나라 외무대신에 보낸 공식 보고문에서 그 대오가 조직력이 강하다는 것과 장차 무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으니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①「세기와 더불어 1」241면 이하 ②같은 책 2백46면
  • “한­일 합방조약 무효”/북,대일수교회담때 새 근거 제시할 듯

    ◎일지 보도 【도쿄=이창순특파원】 북한은 5·6일 이틀동안 북경에서 열릴 일·북한국교정상화회담에서 보상문제와 관련,「1910년 한일합방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입증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요미우리(독매)신문이 31일 일본외무성소식통을 인용,보도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부당성을 지적해온 북한은 제2차 한일협약 원본에 당시 대한제국의 박재순외무대신과 일본의 임권조 주한공사의 날인은 있으나 통치자였던 고종황제의 서명이 없기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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