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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언대] 안타까운 기러기아빠의 비극/최진규 충남 서산시 서령고 교사

    며칠 전 또 한 명의 ‘기러기 아빠’가 세상을 등졌다.이번에 숨진 사람은 억대 연봉을 받는 은행의 중견 간부로,외동딸의 유학에서 비롯된 외로움이 빌미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자식 교육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가족의 가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가족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로 생존의 의미를 부여하기에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1만 5000명에서 2만명의 새로운 ‘기러기 아빠’가 탄생하고 있다니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공황까지 감수하면서 처자식과 생이별한다는 말인가? 그만큼 이 땅의 교육여건이 열악하다는 방증이다.학교에 들어가기 무섭게 아이들은 입시 경쟁에 휘둘려야 하고,부모들은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에 짓눌려야 한다.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각종 학원과 과외로 하루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천신만고 끝에 들어간 대학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전공보다는 취직공부로 4년을 보내야 하고,대학을 졸업하고도 마땅한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10년 넘도록 공부한 영어는 외국인을 만나면 주눅부터 드니 무슨 재주로 이 땅의 교육에 희망을 걸겠는가? 해마다 늘어나는 ‘기러기 아빠’는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의 붕괴는 물론이고 무역수지 악화의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유학과 연수비 명목으로 지급된 대외 비용이 자그마치 18억 5220만달러로 3년 만에 2배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소중한 달러가 자식들의 유학비용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격언처럼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이런 교육열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었음도 잘 알고 있다.그러니 자식교육에 대한 우리 부모들의 지극 정성을 탓할 수만은 없다.문제는 이 땅에서 낳은 자식들을 오죽하면 외국까지 보내겠느냐는 그 절박한 심정의 이해에 있다.그만큼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환부가 크고 깊다는 뜻이다. 교육 주권을 수호한다는 미명아래 국수주의에 사로잡힌 교육관으로는 국가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교육이라고 시장경제의 원리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우리 교육에도 희망의 빛이 보인다면 외국에 나갔던 자녀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이제라도 우리 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우물안 개구리 식의 ‘안방 교육’이 지속되는 한,‘기러기 아빠’의 안타까운 사연은 계속될 것이다. 최진규 충남 서산시 서령고 교사˝
  • 새 시집 발간 준비중인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

    “요즘 학생들은 팬터지소설을 즐겨 읽는 것 같아요.아마 권선징악과 휴매니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저도 요새 들어 판타지 소설을 무척 좋아하게 됐습니다.” 사랑시의 대명사처럼 통용되는 시집 ‘홀로서기’의 저자 서정윤(47) 시인.그는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과 함께 80년대 국민적 시인으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시집으로는 유례없이 ‘홀로서기’가 2년 전에 300만부 넘게 팔렸다.이후 한동안 뜸하다.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는 현재 대구 영신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다.1학년 담임을 맡았지만 1∼3학년 국어과목을 가르치는 올곧은 ‘스승’의 길을 걷고 있다.학생들이 ‘시 한수’를 부탁하면 “시는 사랑이고 그리움이다.”라며 그저 웃기만 한다.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사인 좀 받아오라고 하던데요.” 하며 떼를 쓴다. 서씨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무협지를 좋아했던 학생들이 요즘 들어 팬터지소설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말했다.복선을 깔고 있는 복잡한 철학적·문학적 소설보다는 단순한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란다.까닭에 그도 팬터지소설을 좋아하게 됐다.최근에 ‘바람의 마법사’‘이노센트’‘묵향’‘가제나이트’ 등을 읽었다.학생들과 좀더 가까워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TV프로그램 ‘일요일 밤에’의 브레인 서바이벌 뮤직(개울가에서 올챙이 한마리가…뒷다리가 쏙,앞다리가 쏙…)을 핸드폰 벨소리로 다운로드를 받은 이유도 그래서다. 그는 “요즘 학생들은 상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나 한번 가르쳐주면 잘 따라준다.그런 과정이 너무 순수하고 착하다.”라고 말했다.그가 ‘팬터지’에 빠진 또 하나의 이유.문학적 채찍을 가하자는 차원이다.지난 2002년 11월 ‘홀로서기’ 300만부 돌파 기념으로 시선집을 낸 이후 아직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작품요? 장르에 관계없이 쓰고 싶은 것을 쓸 따름입니다.시,수필,우화,소설 등 닥치는 대로이지요.또 새로운 의욕도 생겨나고요.” 그는 요즘 붕어낚시를 자주 간다고 했다.경산 인근의 저수지나 냇가를 찾아 낚싯대를 드리운다.한동안 적막하고 얄밉게끔 입질이 없으면 그는 절로 펜을 들어 메모를 한다. 이렇게 해서 쌓여진 작품 하나,우화집 ‘내가 만난 어린 왕자’가 최근 새로 완성됐다.작품 둘,일상적이고 생활주변의 단상들을 모은 수필집도 완성됐다.작품 셋,시 역시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쓰는 날짜를 꼭 정한 것은 아니지만 3일에 1∼2편의 시를 쓴다.여전히 ‘사랑’과 ‘외로움’을 키워드로 그리움의 서정성을 된장 담그듯 질그릇에 담고 있다고 했다.올 가을 그 뚜껑을 기어코 열겠단다.수필과 우화집은 3년 만이고 시집은 4년 만에 출간하는 셈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시 묘미는 쉬운데 있다고 한다.그는 영남대 3학년 재학시절 ‘영남대 교지’에 ‘기다림은/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좋다…/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홀로서기를 익혀야 한다’는 시를 발표했다. 이후 ‘홀로서기’라는 말이 편지나 일상에서 단골로 인용되는 문화코드가 됐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젊은 연극 두번째 ‘즐거운 인생’

    ‘범진’은 노총각 고교 음악교사다.혼자서는 밥을 먹지 못해 거울을 친구삼아 숟가락을 들고,외로움에 지쳐 장난 전화를 걸기도 한다.술에 취해 옛 애인의 집에 찾아가서도 행패를 부릴 용기조차 없다.반면 범진이 가르치는 ‘세기’는 불우한 환경속에서도 남을 웃기는 개그맨이 꿈인,스승보다 어른스러운 제자다. 오는 12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올리는 연극 ‘즐거운 인생’은 자의든 타의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 두 남자를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예술의전당이 기획한 ‘젊은 연극 시리즈’두번째 작품으로,지난 2001년 연극 ‘이(爾)’로 동아연극상,서울공연예술제 희곡상 등을 휩쓴 극작가 겸 연출가 김태웅(40)이 3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인생을 ‘즐거운’ 인생으로 승화시키는 매개체는 음악이다.극중 범진은 TV 전국노래자랑에서 노래부르며 정말 즐겁고 행복해하는 ‘미스 김’을 보며 “자신이 정말 즐겁고 좋아서 하는 음악이 부처의 음악이고,그 사람이 부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누추한 일상에서 희망을 건져내는 작은 몸부림과 깨우침이 부처라면 음악은 그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존재라는 것.음악은 무대를 넘어 객석에까지 밀려온다.극 중간쯤 객석이 강의실로 바뀌면서 관객과 배우들이 함께 어우러져 음악놀이를 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그의 전작들이 그렇듯 ‘즐거운 인생’도 ‘웃음’이라는 코드로 주제의 무거움을 희석시킨다.김태웅은 “힘든 삶이지만 그 삶을 견디면서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즐거운 인생”이라면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희열을 막는 사회 구조에서도 즐거움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광대들처럼 극중 인물 범진과 세기를 통해 그런 생명력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범진역으로는 ‘이’에서 연산군 연기로 동아연극상을 수상했던 김내하가,세기역에는 신예 박정환이 출연한다.범진과 세기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로 발전하면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범진의 애인 선영역은 박미현이 맡았다.30일까지 (02)580-1300. 이순녀기자˝
  • ‘다운 어린이’ 가정에 희망 띄워요

    “가영이가 이젠 세발자전거를 아주 잘 탑니다.다른 아이들이 신나게 자전거를 탈 때 속이 상해서 숨어 울기도 했고 그까짓 세발자전거 때문에 가영이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는데.지금 가영이의 자전거가 씽씽 제 앞을 지나갑니다.” 네살배기 가영이가 남들 앞에서 보란듯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굴리던 날.가영이의 어머니 홍남희(37·충남 천안시)씨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인터넷에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제 또래 아이들은 쉽게 타는 세발자전거지만 선천성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가영이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태어난 지 45개월이 지났지만 성장속도는 3살 수준에 언어능력과 지적능력도 조금 뒤처진다. 재작년부터 홍씨는 ‘가영이네’(gynam67.hihome.com)라는 가족 홈페이지를 만들어 인터넷에 육아일기를 싣고 있다.가족일기에는 딸이 뒤늦게 입을 떼고 ‘엄마’라고 불렀던 순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게 된 날까지 가영이가 자라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년이 넘게 아이의 발육상황과 선천적 특성,교육에 대한 정보까지 꼼꼼히 적다보니 내용이 어느덧 책 한 권을 묶어낼 정도의 분량이 됐다. 첫째딸 희라(9)가 인터넷을 이용할 줄 알게 된 뒤에는 조그만 손으로 자판을 두드려가며 동참했다.얼마 전에는 홈페이지 페이지뷰가 3만을 넘었다.방문자들은 주로 다운증후군 아이를 가정에 둔 부모들이다.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이들은 온라인에서 질병에 대한 정보를 찾아 교환하고 가족의 아픔과 외로움,희망까지도 함께 나눈다. 얼마 전 가영이는 ‘다운증후군 아동의 조기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책의 표지모델로 발탁됐다.모델(?)로서의 첫 데뷔를 축하하는 글들이 홈페이지에 이어지고 있다. 가영이네도 사실 딸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2000년 여름 둘째딸 가영이가 태어난 날 분만실에서 나온 의사는 아버지를 불러 “혹시 다운신드롬(Down Syndrome)이라는 말 들어 본적 있나요?”라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내 아버지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당장 몸조리를 하는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걱정이었다. 결국 가영이 아버지는 “폭발할 것만 같은 심정입니다.제발 도와주세요.”라며 사단법인 다운회 홈페이지(www.down.or.kr)에 글을 남겼고, 그뒤 하나둘씩 다운증후군 자녀를 둔 부모들로부터 격려와 도움의 연락이 왔다. 주위의 따뜻한 도움 속에 가영이 부모는 딸의 현실 앞에 바로 서게 됐고,이제 인터넷을 통해 같은 아픔을 겼고 있는 가정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그때의 고마움 때문인지 아직 가영이네 홈페이지에는 당시 도움을 주었던 다운증후군 부모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요즘 홍씨의 바람은 가영이가 빨리 말을 배우는 것이다.아이는 간단한 문장과 단어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이 한창 재잘대는 것에 비하면 언어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홍씨는 “아침이면 야무지게 가방을 메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모습에 눈물이 난다.무슨 반찬을 먹었는지,뭘하고 놀았는지 말하지는 못하지만 밝고 건강하게 세상과 어울려준다면 만족하겠다.”고 했다.비록 마음속 이야기를 다 말하지 못해도 가영이의 마음 속에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그려지고 있음을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오늘도 가영이 가족은 인터넷에 희망을 실어보낸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캐나다 선상학교 22일 한국 방문

    “배 안에서 곧 도착할 세계 곳곳을 공부하고 뭍에 내려서 체험을 합니다.선상(船上)학교의 개념은 그런 것입니다.” 지난 22일 인천항 1부두에 캐나다 선적의 413t급 범선 콩코디아호가 닻을 내렸다.39명의 캐나다와 미국 학생들을 싣고 도착한 이 배는 캐나다의 유명한 선상학교 ‘클래스 어플로트(Class Afloat)’. 선상학교는 고등학교 2∼3학년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1학기(4개월)∼2학기(8개월) 동안 배를 타고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를 방문,문화와 역사 등을 체험하는 일종의 대안학교이다.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 학력이 인정되며 교장과 교수진이 있는 것은 일반 학교와 같지만 선장과 갑판장 등이 동행하는 것이 다르다.1984년 개교 이후 한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 “항해 중에는 선상교육,정박한 뒤엔 현장체험”이라는 존 사스필드(60) 교장의 말처럼 학생들은 한국 방문에 앞서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를 공부했고 23일 판문점에 이어 한국전쟁 당시 캐나다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경기 가평 지역도 방문했다. 23일 오후 판문점을 둘러본 캐머린 프레릭(19)은 “판문점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잊지 못할 것”이라면서 “자유로운 분위기의 캐나다와 미국 국경 풍경과는 너무 달랐다.”고 말했다.데이나 메이어(18·여)는 앞서 방문한 중국 상하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한국 체류는 26일까지 4박5일 일정. 97년 선상학교에서 2학기를 보냈던 인연으로 이번 방문단의 통역을 맡은 캐나다 교포 새라 김(24·여·한국명 김미소)은 “학생들은 배라는 공간에 함께 살면서 외로움과 단체생활의 어려움을 배운다.”고 말했다.국내 한 여자 프로농구팀의 통역으로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그는 그때의 경험이 큰 힘이 된다고도 했다. 다양한 체험에 비례해 수업료는 비싼 편으로 어지간한 사립대학 등록금 수준이다.그래서 참가자 대부분이 상류 또는 중산층 자녀들이다. 지난 2월6일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출발,2003∼2004 2학기 과정을 시작한 학생들은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브루나이,베트남,중국 등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26일 일본 히로시마를 향해 출국하면 6월23일 캐나다 빅토리아항에 도착,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새영화] ‘투스카니의 태양’

    할리우드 로맨틱 드라마에서는 대개 몇 가지의 반복되는 공식이 읽힌다.우선 청춘남녀가 주인공이되 이름만으로도 관객동원이 가능한 톱스타여야 하며,달콤한 당의정을 입혀 20대 관객의 감수성을 집중 공략한다는 게 그 대표적인 것이다. 23일 개봉하는 ‘투스카니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은 그런 편견을 깬다.인생을 진지한 시선으로 볼 줄 아는 젊은 관객,할리우드 로맨틱 드라마들이 새털처럼 가볍다고 불평해온 중년층을 두루 껴안을 사려깊은 드라마다.1980년대 청춘스타로 스크린을 누빈 다이앤 레인이 오랜만에 주연으로 등장,원숙미를 자랑한다. 그녀의 역할은 베스트셀러 작가 프랜시스.바람난 남편에게 어이없이 이혼당하고 집까지 뺏긴 뒤 친구 패티(산드라 오)가 건네준 항공티켓으로 무작정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이혼의 상처와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던 그녀 앞에 문득 사랑이 찾아온다.그러나 운명이라 믿었던 새 애인 마르첼로와의 만남도 그의 변심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의 각본을 썼던 오드리 웰스의 감독 데뷔작.여성감독의 속살 같은 감수성이 화면에 그대로 묻어나는,이미지가 풍성한 작품이다.이탈리아의 화사한 태양광선으로 시종 명도가 높은 화면은 여행가이드북에서 퍼낸 것처럼 수려하다.화면 가득 올리브 농장이 펼쳐지는 대목 등은 여성관객들의 ‘소녀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드라마의 틀거리도 짜임새 있다.행복하리라 믿었으나 만삭에 이혼당하고 프랜시스를 찾아온 패티,부모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해 애태우는 이탈리아 처녀와 폴란드 청년의 사랑이야기 등이 교직된다.인생의 불가해성과 사랑의 오묘함을 차분히 관조하게 되는 건 그런 규모 있는 이야기 구성 덕분인 듯하다. 황수정기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9)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下)

    흔히 진주를 한국 인권의 고향이라 말한다.1862년 류계춘과 그의 동지들이 주도했고 한국 최초의 농민 생존권 투쟁이 된 ‘임술년 농민항쟁’과 1923년 ‘형평사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03년은 형평운동 80주년이었고,지난 1993년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다.백정해방운동을 백정이라는 특수 신분의 해방 운동으로 기념하는 데 그치지 말고,보다 폭넓은 인간의 불평등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계기로 삼자는 뜻이었다.인권문제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형평기념탑을 세우고,인권 문제에 관한 국제 회의도 열어 70년 전 일제 때에 시작된 형평운동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을 논의하였다.일본에서는 일본의 백정에 해당하는 부락민(部落民) 다수와 부락민의 인권과 차별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부락민의 생존권을 돕고 일본사회의 차별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락해방인권연구소 관계자들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강상호와 장지필의 이름과 생애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그 이전에는 국내의 극히 적은 연구자들에 의해 간신히 이름과 생애가 이야기되고 있었을 뿐이었다.다행스럽게도 강상호는 진주를 대표하는 부자이며 명문가 출신인데다 후손들이 진주 지역에 살아 있었기에 그에 대한 연구 자료는 풍부한 편이었다.그러나 장지필의 경우에는 그의 후손들이 살아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예들은 공식참배 안해 형평운동 70주년 국제 행사 이후 한 해에 두 차례씩 일본 부락민들이 강상호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일본 부락민들의 강상호 무덤 참배 때마다 안내자로 참석해온 필자는 올봄 그의 아들 강인수씨와 둘이서만 참배를 했다.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 최초의 인권해방운동 선구자는 차도 옆에 누워서 자동차 굉음과 흙먼지,행인들이 내던지는 오물,그 보다 더 심한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게 삭아가고 있었다.아들은 여유없는 그의 노년을 부끄러워할 뿐 말이 없었다.한국의 백정 후예들이 강상호 무덤을 공식적으로 참배했다는 이야기도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이 역시 안타깝다. 형평사 운동이 시작되던 1923년 당시 한국에는 40여만 명의 백정들이 살고 있었는데,백정의 원류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때 생겨난 전쟁 포로나 귀순자들이라고 한다.그들은 고구려로 온 뒤 주로 변방에서만 살았는데,‘삼국사기’는 이들이 모여 살았던 곳을 부락(部落)이라 불렀음을 적고 있다.‘280년(서천왕11)에는 숙신을 공격하여 주민 600호를 옮기고 항복한 부락 예닐곱 곳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원래 부락은 흉노족이 사막지대에서 떼를 지어(部) 천막을 치고 정착한 곳(落)을 의미했다.고려 때는 고구려에 복속당한 북방 유목민들의 후예인 수척(水尺),양수척(揚水尺),화척(火尺)들이 살던 곳을 부락이라 불렀다.이런 예를 두고 볼 때 부락은 원주민과 다른 족속이 집단을 이루고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겠다. 일제 식민지 이후 총독부는 한국 민속을 파괴하고 마을이나 산의 지명을 바꾸는 것으로 정체성을 소멸시키려 하였다.그 과정에서 한국 고유어인 ‘동네,마을’ 대신 ‘부락’을 쓰게 하였는데,일본의 부락과 부락민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 멸시당하듯이 한국인 전체를 부락,부락민으로 취급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백정들의 거주지를 부락이라 불렀던 것과 일본의 부락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이라 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인들의 생활언어도 사용못해 당시에 백정들은 갓 대신 패랭이를 써야 했고,상투머리엔 반드시 검은 띠를 둘러 백정임을 표시해야 했다.백정 여자들은 언제나 검정색 물들인 치마를 입어야 했고,비단옷이나 양반들이 입는 두루마기며 도포를 입어서는 안되었다.기와집에 살 수 없었으며 세 칸 이상의 넓은 집은 갖지 못했다.또,백정들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고,혼인할 때 신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신랑은 말을 탈 수 없었다.서당이나 향교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글을 배워서도 안되었다.죽은 뒤에도 상여에 관을 얹지 못하며,거적대기에 말아 매장하되 일반인 무덤보다 높은 곳에는 봉분을 짓지 못했다.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일반인 소년이나 아이에게 백정은 존댓말을 써야 했고 공공장소를 지날 때는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뜀박질하여 지나가야 했다.이러한 법이나 관습을 어길 경우에는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일반인으로부터 처벌받아야 하고,같은 죄를 다시 범한 백정은 중형에 처해졌다.심지어 일반인들의 생활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금했다.백정들의 삶은 온갖 금지와 차별의 울타리 안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정마을은 전국 주요 행정관청이 있는 곳에 만들어졌는데,각 지방관아와 병영에서 필요로 하는 육류와 피혁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였다.특히 향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봄·가을에 있는 공자와 유교 선현들께 올리는 제사 음식 중에 반드시 필요로 하는 육류와 육류를 가공하여 만든 제수를 공급받기 위해 백정을 꼭 필요로 했다.따라서 숙종 연간만 하더라도 백정은 일종의 관노비였다.그 후 조선사회 신분제도와 경제토대의 붕괴로 지방 토호들이 백정을 사노비화하면서 백정들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백정들은 철저한 문맹과 궁핍으로 최하층민의 가련한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백정들에게는 무거운 의무만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없었다. 강상호는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임을 절감했다.그리고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질타하였다.인간은 평등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사는 삶이야말로 고귀하다고 외쳤다.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며,미래를 위해 인간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1923년 봄 진주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 시작되었다.이 운동에는 백정 출신들과 함께 일반 지식인들도 참여함으로써 신분차별의 철폐가 민족해방보다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새로운 생각을 낳았다.형평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일제히 환영하면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전국적인 사회 문화 운동의 출발지가 서울이 아닌 진주라는 작은 도시라는 점과 운동본부 및 핵심 지도부 인물 대부분이 지역인들이라는 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백정자식 양자로 들여 취학시켜 강상호·장지필 등 본부 임원들은 각각 순회 지역을 나누어 돌면서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백정들의 군중 집회에 참석,축사를 하거나 앞으로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다.백정들은 수백년 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폭발시켰지만 폭력 사태로는 나아가지 않았다.철저한 온건 노선을 지키면서 모든 조선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눈물 겨운 장면을 만들어냈다.민족 해방을 부르짖는 것도 아니고,어떤 사회적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집회도 아닌 오직 천한 신분 백정도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선언과 맹세의 집회다보니 일본 경찰도 적극 단속할 수는 없었다. 형평운동이 본 궤도에 올라 백정들의 생활 개선과 교육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차별의 벽은 백정들이 일반인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만약 백정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일반인들이 모두 동맹 휴학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강상호는 그때 두 명의 백정 자식을 양자로 들여 직접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등 일반 지식인들이 먼저 백정 차별을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듯 들불처럼 확산되는 형평운동은 그때 막 한국사회에 상륙한 사회주의 노선과 다른 몇몇 사상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면서 점점 예기치 못한 혼란 속으로 빨려 들었다.강상호는 장지필과의 계속되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백정도 떳떳한 조선인으로 대우받는 것이 어쩌면 민족해방보다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형평운동에 자신과 전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국가나 사회보다 인간이 소중하다는 그의 사상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그는 심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죽었다. 굳이 형평운동이 아니더라도 인간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진주 촉석공원 앞 그의 작고 외로운 무덤 앞에 술 한 잔을 올리고 강상호란 이름을 불러 보면 어떨까.
  • [김영희 이혼클리닉] 동거중 남자친구가 결혼하자는데…

    서른살된 전문직 여성으로 남자친구와 2년째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결혼하지 않기로 했는데,남자친구가 마음을 바꿔 아이를 갖고 싶다며 결혼을 재촉합니다.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남자친구하고 헤어지기도 싫습니다.어쩌면 좋을까요? -장민정 한 조사에 의하면,남녀 네티즌 470명을 대상으로 동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전체의 61%가 ‘반대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고 합니다.반대하는 이유로는 ‘성(性)적으로 무책임할 수 있기 때문에’‘헤어지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결혼의 신성함이 퇴색되기 때문에’‘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사회적 인식이 아직은 부정적이기 때문에’‘전통적인 정조관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등 순이었고,반면 동거에 찬성한다는 응답자의 39%는 ‘결혼에 앞서 보다 신중한 결정을 위해’‘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에’‘생활비 절약’‘호기심 때문에’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장민정씨.남자친구와 2년째 동거하고 있다면 짧은 세월이 아니네요.독신으로 살지 않을 생각이라면 결혼할 나이가 꽉 찬 것 같습니다.‘결혼은 해도 후회,안 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많은 미혼 남녀들이 “결혼 하는 게 좋을까요.안 하는 게 좋을까요?”하고 난감한 질문들을 해오는데 저는 이런 비유를 해 봅니다. 옛날에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한 후,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 물었더니 대답이 제 각각이더랍니다.집체만한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손으로만 더듬어 본 장님들이라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지요.또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결혼하는 게 좋을까요?”하고 묻는다면 “결혼하세요,정말 좋아요.”할 것이고,불행한 결혼으로 마지못해 살고 있는 사람은 “아이고….하지 마세요.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요.”하겠지요.우스갯소리로 결혼은 ‘복권당첨’과 같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민정씨.동거와 결혼은 근본부터가 다릅니다.동거는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절실하지 않으니 의무감 또한 없고 싫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여성들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동거가 남자는 손해 볼 것 없다는 인식들을 하고 있어 여성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일부 젊은 층에서 서구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동거를 유행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자유 분방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사람들도 동거를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일부 계층의 일부사람들에 불과하지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혼이 급증하다 보니 살아보고 결혼하겠다는 신중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 이불 덮고 몇 십년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게 부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춘 남녀는 결혼을 합니다.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저축을 하고….결혼은 미래가 있지요.민정씨.누군가 나를 챙겨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구속일 수만은 없습니다.결혼을 하면 백 가지 고민이 생기고,결혼하지 않으면 단 한 가지 행복도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르니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를 단정키 어렵지만 상식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기로 했던 남자 친구가 마음을 바꿔,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싶다고 했다면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을 많이 사랑하게 됐나 봅니다.주변에 이혼한 친구들을 보고 ‘이혼공포증’으로 결혼하기가 두렵고,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고 싶고,남자 친구하고 헤어지기도 싫다는 생각인데….떠나보내고,또 새롭게 만나고,화살처럼 빠른 게 세월이랍니다. 민정씨.독신으로 살며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도 많습니다만,이제 당신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남자친구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그를 떠나 보내줘야겠지요.나이 들어 외롭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상담 의뢰는 인터넷 서울신문,www.seoul.co.kr ‘김영희 이혼클리닉’에서 받습니다.˝
  • [김영희 이혼클리닉] 동거중 남자친구가 결혼하자는데…

    [김영희 이혼클리닉] 동거중 남자친구가 결혼하자는데…

    서른살된 전문직 여성으로 남자친구와 2년째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결혼하지 않기로 했는데,남자친구가 마음을 바꿔 아이를 갖고 싶다며 결혼을 재촉합니다.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남자친구하고 헤어지기도 싫습니다.어쩌면 좋을까요? -장민정 한 조사에 의하면,남녀 네티즌 470명을 대상으로 동거에 대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전체의 61%가 ‘반대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고 합니다.반대하는 이유로는 ‘성(性)적으로 무책임할 수 있기 때문에’‘헤어지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결혼의 신성함이 퇴색되기 때문에’‘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사회적 인식이 아직은 부정적이기 때문에’‘전통적인 정조관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등 순이었고,반면 동거에 찬성한다는 응답자의 39%는 ‘결혼에 앞서 보다 신중한 결정을 위해’‘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기 때문에’‘생활비 절약’‘호기심 때문에’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장민정씨.남자친구와 2년째 동거하고 있다면 짧은 세월이 아니네요.독신으로 살지 않을 생각이라면 결혼할 나이가 꽉 찬 것 같습니다.‘결혼은 해도 후회,안 해도 후회한다.’고 합니다.많은 미혼 남녀들이 “결혼 하는 게 좋을까요.안 하는 게 좋을까요?”하고 난감한 질문들을 해오는데 저는 이런 비유를 해 봅니다. 옛날에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한 후,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 물었더니 대답이 제 각각이더랍니다.집체만한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손으로만 더듬어 본 장님들이라 대답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지요.또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결혼하는 게 좋을까요?”하고 묻는다면 “결혼하세요,정말 좋아요.”할 것이고,불행한 결혼으로 마지못해 살고 있는 사람은 “아이고….하지 마세요.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어요.”하겠지요.우스갯소리로 결혼은 ‘복권당첨’과 같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민정씨.동거와 결혼은 근본부터가 다릅니다.동거는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 절실하지 않으니 의무감 또한 없고 싫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지만,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여성들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동거가 남자는 손해 볼 것 없다는 인식들을 하고 있어 여성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일부 젊은 층에서 서구 문화를 잘못 받아들여 동거를 유행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자유 분방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사람들도 동거를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일부 계층의 일부사람들에 불과하지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혼이 급증하다 보니 살아보고 결혼하겠다는 신중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한 이불 덮고 몇 십년을 살아도 알 수 없는 게 부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춘 남녀는 결혼을 합니다.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싶고 집을 장만하기 위해 저축을 하고….결혼은 미래가 있지요.민정씨.누군가 나를 챙겨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구속일 수만은 없습니다.결혼을 하면 백 가지 고민이 생기고,결혼하지 않으면 단 한 가지 행복도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다르니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를 단정키 어렵지만 상식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기로 했던 남자 친구가 마음을 바꿔,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고 싶다고 했다면 같이 사는 동안 당신을 많이 사랑하게 됐나 봅니다.주변에 이혼한 친구들을 보고 ‘이혼공포증’으로 결혼하기가 두렵고,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고 싶고,남자 친구하고 헤어지기도 싫다는 생각인데….떠나보내고,또 새롭게 만나고,화살처럼 빠른 게 세월이랍니다. 민정씨.독신으로 살며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도 많습니다만,이제 당신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남자친구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그를 떠나 보내줘야겠지요.나이 들어 외롭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상담 의뢰는 인터넷 서울신문,www.seoul.co.kr ‘김영희 이혼클리닉’에서 받습니다.
  • 물오른 연기꾼 김래원

    요즘 탤런트 겸 영화배우 김래원(23)은 봄비에 쑥쑥 몸피를 키워올리는 죽순같다.풀릴 듯 풀릴 듯 감질나던 ‘인기 보따리’가 어느 순간 풀리나 싶더니 스크린으로,안방극장으로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다.MBC 수목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비극남이 되더니 2일 개봉하는 코믹멜로 ‘어린 신부’(제작 컬처캡미디어)에서는 색깔을 180도 바꿨다.일찍이 조부들끼리 정혼해버린 통에 울며 겨자먹기로 여고 1년생과 결혼하는 대학생 역이다. 그와 마주앉자마자 궁금해졌다.첫 시사회날 기자회견장에서 “정말 즐거운 영화였다.”는 말을 왜 그렇게 남발했었는지.대박 터뜨릴 자신이 있냐고 넘겨짚으니 쑥스러운 모양이다.“그 전날 밤에 마신 술이 덜 깨서 좀 알딸딸하기도 했다.”며 머쓱해 하더니 “그래도 가장 편한 마음으로 찍은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웃는다. 여유가 많다.소리없는 웃음하며,급할 것 뭐있냐는 듯 자주자주 쉼표를 찍는 말투하며.TV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서 경민이 그랬듯 건들건들 우스갯소리도 곧잘 할 것 같은 인상.그런데 사실과 다르단다.‘연예계 밥’을 먹은 지 7년.“여전히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떨리고,내성적이어서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고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고백을 한다. 새 영화에서는 기름기 쫙 뺀 착한 새 신랑이 됐다.여고생 신부(문근영)를 막내 여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주며 잠시도 한눈 파는 일 없는 바른생활맨.신부가 학교숙제로 힘들어하면 날밤을 새워 대신 해결해주는,멋지고 자상한 ‘오빠’ 캐릭터다. “이번 시나리오를 욕심낸 이유는 한가지였어요.주인공 캐릭터의 색깔은 정해졌는데 색칠할 여지는 그대로 남겨진 것 같아서요.배우에게 캐릭터를 색칠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즐겁고 유익한 경험이거든요.” ‘앗싸,김밥 꼬다리∼’ 가장 강도높은 코믹 대사도 그의 애드리브이다.신부가 학교 야구부 선배를 위해 김밥 도시락을 싼 줄도 모르고 부스러기를 주워먹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에선 폭소가 터진다.한편두편 작품수가 늘 때마다 한뼘두뼘 자신감이 붙어가는 건 연기생활 최고의 즐거움.‘낭만 고양이’를 신나게 불러제치는 노래방 장면에서는 대본에도 없는 고양이 분장을 했다. 진짜 연기자가 돼간다는 확신이 드는 요즘이다.영화 막판에 TV드라마 ‘사랑한다 말해줘’의 초반촬영이 겹치는 통에 웃다가 울다가 ‘온탕냉탕’ 연기에 진땀을 뺐다.“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않겠다.”더니 금세 “그래도 그 덕분에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배웠다.”고 고쳐 말한다. “슬퍼도 눈물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이에요,제가.실제로 지금까지 엉엉 소리내서 울어본 기억도 없고요.고향인 강릉을 떠나 농구선수로 중1때 서울로 유학을 왔어요.혼자 객지생활을 하며 외로움을 이겨낸 방법이 울지 않고 슬퍼하기였던 것 같네요.” 유난히 눈물신이 많았던 드라마의 초반부는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순간이 도전이었다.이제 후반부는 울분에 억눌렸다 한꺼번에 폭발하는 캐릭터로 돌변해야 한단다. 인터뷰 말미에 팬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기다렸다는 듯 재미있는 대답이다.“특이한 제 이름,예명이 아니란 사실을 꼭(기사에) 넣어주세요.” 한자로 올 래(來)자에 물 원(沅).귀빠지자마자 증조부가 지어주신 의미심장한 본명이란다.이참에 확인해볼 사실 또 하나.연예계 패션리더란 소문이 진실이냐고 물었다.“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에요.옷 세 벌로 한해를 버틴 적이 있는데요.신발도 딱 두 켤레.더울 땐 슬리퍼,추울 땐 워커면 그만이죠.” “연기말고는 뭐든 대충대충인 성격에 짬만 나면 혼자 낚시가는 게 취미”란 그의 말끝에 그림 한장이 그려진다.카메라를 비켜나는 순간 무장해제하는,느릿느릿 넉살좋고 소탈한 이웃 하숙집의 대학생.김래원 매력의 ‘숨은 1인치’다. 황수정기자 sjh@˝
  • “로버트김 조기귀국 돕겠다”中서 풀려난 석재현씨 후원회가입

    “비록 수감기간과 죄명은 다르지만 한국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느낌은 같았기에 수감 중 다짐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고 싶습니다.”중국에서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도운 혐의로 1년2개월 수감생활을 한 끝에 지난 19일 풀려난 프리랜서 사진작가 석재현(34)씨가 7년째 미국에서 수감 중인 로버트 김(64)을 돕고자 부인 강혜원씨와 함께 ‘로버트 김 후원회’(회장 이웅진)에 최근 가입했다. 이들의 후원회 가입은 지난해 7월 이 후원회장이 강씨에게 위로 전화를 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석씨는 2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감옥에서 외로움과 싸운 처절한 경험이 조국을 위해 일하다 감옥에 갇힌 로버트 김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선뜻 동의했다.”고 말했다.또한 “체포 직후 조사과정에서 우리 외교관을 접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족 면회도 9개월만에 이뤄졌다.”면서 로버트 김의 조속한 석방과 조기 귀국을 위한 정부의 성의와 관심을 촉구했다.미국 버지니아주 윈체스터 교도소에 수감 중인 로버트 김은 오는 7월27일 석방되지만 이후 3년간 보호관찰 처분을 받게 돼 조기 귀국은 불투명하다. 석씨는 “어떤 역할을 맡을지 정하지는 않았지만,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직업을 활용해 로버트 김의 조기 귀국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석씨는 다음달 5일‘로버트 김 돕기 범국민지원센터’ 출범식에 참가,축사를 한다. 김효섭기자 newworld@˝
  • 홀로 노인들 “이젠 홀로 아녜요”

    서울 강북구(구청장 김현풍)에 사는 홀로노인들은 외롭지 않다.이웃 주민들이 외로움을 달래주고 불편을 덜어주는데 적극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수유3동 주민자치센터는 4일부터 동사무소에 ‘독거노인 빨래방’을 설치하고 운영에 들어갔다.혼자사는 노인들이 이불이나 겨울옷 등을 빨기 어려워 이를 도우려는 것이다. 빨래방 운영에 필요한 대형 세탁기는 수유3동 이복근 구의원이 기증했다.세탁물의 수거와 배달은 이 마을 새마을문고 회원 20명이 자원봉사자로 나선다.그야말로 ‘사랑의 세탁소’가 운영되는 셈이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홀로노인 74명은 앞으로 월·목요일 주2회에 걸쳐 빨래방에서 옷가지와 생활용품 등을 깨끗하게 서비스받는다. 앞서 미아2동에서는 지난 1월 새마을부녀회·적십자봉사회·주부환경봉사단 회원들이 홀로노인들과 1대 1 결연을 맺고 매일 안부전화를 걸고,김치 등 밑반찬을 제공하는 등 정성껏 보살피고 있다.강북구의 모든 동장들이 홀로노인들의 생일날 축하 떡을 직접 전하며 안부를 물어온지는 오래됐다. 강북구는 올해 경로당 5곳을 더 짓고 어린이집과 경로당이 자매결연을 맺도록 해 노인들이 어린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게 할 계획이다. 이동구기자 yidonggu@˝
  • [여자가 본 여자] (상)일상에서

    “쯧쯧,여자들이란….” 남성들의 이 말 속에는 비하와 비난이 그득하다.여성들도 말한다.“저 여자,왜 저래?”,“저 여자 정말 (꼴보기)싫어!”.이는 남자들이 “저 남자 싫다.”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왜 여자가 싫을까.남성들이야 자신과 달라 이해할 수 없어서 경원시할 수도 있다고해도,여성이 여성이란 사실을 콕 찍어 비난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물론 여성들도 여성을 전혀 이해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여자 팔자가 다 그렇지.”라는 여성 비하를 담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일상에서,직장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여성들 사이를 흐르는 거리감의 정체를 상,하로 나눠 해부해 본다. ‘시샘이나 하는 소인’이란 여성에 대한 편견은 유교에 뿌리하고 있는 것같다.칠거지악·씨받이·남아선호 등 여성을 억압하는 갖가지 풍습은 결국 이 땅의 여성들을 무능하게 만들었다.늘 약자는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본 편견의 말을 거리낌없이 여성들은 차용하면서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을 보고 건너편 여성을 경멸한다. ●고부 갈등은 삼각 관계인가 여자가 싫은,싫을 수밖에 없는 연결고리는 고부 갈등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시어머니의 ‘심술’.이는 결혼생활을 ‘매운 시집살이’로 바꿔놓는다.20대 여성들이 모이면 주제는 ‘시집 흉’이고,30대는 ‘과외’라든가. 결혼을 하고나면 “나도 친정에서는 귀한 딸이었다.”는 넋두리가 연습이라도 한 양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바로 며느리로서 받게 되는 불평등 때문이다.그 불평등은 남성인 남편보다는 여성인 시어머니로부터 시작되게 마련이다. 김성자(68·서울 도봉구 수유6동)씨는 호된 시집살이를 이야기하면 지금도 어젯일인 양 넋두리가 나온다.“가난한 집안의 큰딸이라 7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도 하고,동생도 키워 웬만한 고생엔 이골이 났지.그래도 17살에 시집 가서는 시어머니의 구박 때문에 못 살겠지 뭐야.이혼이나 가출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고 몇 차례나 아이를 들춰업고 목 맬 생각을 했는지 몰라요.그때마다 아이의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살았지.새벽같이 일어나 일해도 내 입에 들어가는 보리밥 한덩이를 아까워하는 시어머니를 내가 45년이나 모셨어.돌아가시면서는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씀해주시더만.나는 시집와서 웃음을 아예 잃어 버렸어요.요즘같은 세상이었으면,나…안 살았어.” ‘시어머니 노릇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김씨,그러나 그의 며느리 윤자혜(47)씨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어렵다.“시할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유난했던 것은 저도 알아요.그래서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안됐고,잘 해드리고 싶어요.하지만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세요.‘무거운 것,아비에게 들게 하지 마라.’는 등 아들을 남편마냥 섬기시지요.나는 아들을 내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킬 생각이에요.그게 마음대로 될지….” 고부 갈등은 여전히 부부 갈등의 중요한 요소이자,이혼의 중요 변수가 되고 있다.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상담소의 이혼통계 가운데 가장 많은 이혼 사유가 되는 6호 사유(민법 제840조 6호)를 보면,고부갈등은 4.1%정도이지만 여기에 시가와의 갈등(2.6%),생활양식차이(0.9%),혼수시비(0.2%),마마보이(0.1%) 등을 합치면 8%에 이르는 내용들이 시가와 연결돼 있다.여기서도 시어머니로 대표되는 시가와의 갈등관계가 부부갈등의 중요한 원인임을 확인하게 된다.”고 일러줬다.한 남성을 사이에 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가히 ‘삼각 관계’라 할 만하다. ●남자가 되고 싶어 프로이트에 따르면 3∼5세의 여자 아이들은 자신에게는 오빠나 아버지가 갖고 있는 성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남성을 부러워 하는 한편 자신에게 남성 성기를 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한다고 한다.그래서 딸은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여 반감을 갖는 경향이 생긴다는데,이를 ‘엘렉트라 콤플렉스’라 한다. 정신분석학자 이론의 틀에 우리를 가둘 필요는 없겠다.그러나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겪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느낀 여성은 자신만은 여성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이기심을 갖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나는 여자로 살기 싫어.”라는 외침과 “여자가 싫다.”는 말은 어쩌면 동의어인지도 모른다. 폭력 가정에서 자랐던 김순진(가명·42)씨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어머니를 늘 구박했던 폭군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김씨.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먼저 떠오른단다.“아버지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엄마가 불쌍하기도 했고….그러나 내 속마음은 아버지보다 엄마가 더 싫었어요.고교시절까지 사회적으로 문제없는 아버지가 유독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만은 이렇게 이상하게 된 것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어머니 탓이란 생각을 했고,어머니의 태도가 못마땅했어요.지나고 보니 폭력에 의해 어머니는 판단 능력을 잃었던 것인데….그래서 난 내가 여자인 것도 싫었고,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요.”그는 결혼생활이 10년이 넘으면서,이제야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자신은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해도 남편의 가부장적인 태도 때문에 상처받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던 지난 시대의 내 어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사셨을지 조금은 알겠어요.” 사춘기의 딸들이 어머니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어낼 때면,어머니들은 말했다.“너도 살아봐라.”.어머니의 말씀처럼 ‘(결혼해서)살아본’ 딸들은 이제사 여성의 지난했던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해란 ‘여자의,어머니의 희생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 일뿐,여성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더욱이 성숙해졌다고 지난 시대의 여성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요즘의 딸들은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경제력을 갖지 못한 채 살았던 어머니의 딸들은 “절대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반면 일하는 어머니 때문에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생각하는 딸들은 “어머니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다.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선택하기보다 ‘어머니와 다른’ 삶을 택한다.반항하듯. 이혜정(4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씨는 결혼 후 병치레가 심한 아이를 위해 교사생활을 접었다.“아플 때,엄마가 내 곁에 없었던 외로움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미련없이 직장을 떠났어요.엄마로서의 역할이 가장 크다는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겁니다.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제 행동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열심히 사신 내 어머니에 대해 왜 나는 긍지를 가질 수 없었을까,이제 돌이켜 보면 내 겉은 여자이지만 속은 남자인 채 살아온 것 같아요.”이씨는 중2 딸이 “나는 직장을 가진 멋진 엄마가 더 좋은데 1등만 했다는 엄마가 왜 직장도 없느냐?”고 물으며,자신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한단다.“내 삶이 ‘전면 부인’해야 할 만큼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그것이 딸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동서,따지고 보면 남인데… 결혼한 여성들이 겪는 갈등 중 하나는 동서와의 갈등이다.어떤 의미에서는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보다 더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부유한 집 출신으로 결혼할 때 시어머니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동서가 시집온 후 시어머니로부터 적잖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김진숙(38·서울 서초구 서초동)씨,그는 “‘동서’가 가족이냐.”고 물었다. “솔직하게 동서는 남이지 않아요? 전통 사회에서야 시집가면 친정 식구와는 모두 떨어졌고,한 울타리에서 설움받는 존재였던 동서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일 뿐,현대 사회에서 동서지간을 가족으로 묶는 것은 우스운 것이죠.그러니 이 정도 떨어져서 서로 좋게 지내면 되는 것이지,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한 것 같아요.” 4남매의 장남과 결혼해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킨 정유선(51·경기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씨는 아직도 큰아들네에서 얻어서 동생들에게 주려고 애쓰는 시어머니의 행동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남편이 어렵게 자랐지만,사회에 나와 빨리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리 어려움 없이 우리는 집사고,재산불리고 살았어요.그래서 동생들에게도 잘 하려는 남편 마음에 맞춰 왔어요.하지만 이젠 동생들도 40대에 들어서면서 자리잡았는데도 여전히 시어머니는 내게 ‘뜯어서’ 동생들에게 갖다주는 게 낙이죠.그러면서 늘 나더러 욕심 많다고 흉보고….나 이렇게 말하면 나쁘지요? 하지만 제 속마음이에요.” 부모에게는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자식’이지만,엄연히 며느리에게는 ‘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성들은 알고 있다.다만 입에 올리면 나빠지기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할 뿐.이 역시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서와 친자매 이상 가깝게 지낸다는 여성들도 있긴 했지만,이들도 ‘새로 만난 친구’정도라는 개념일 뿐,그것을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부정의 뜻을 밝혔다. ●남성의 눈으로 보면 “여자는 참 이상해” ‘공자가 죽은’ 이 시대에 여전히 우리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고스란히 신봉하고 있다.남성들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비판하지만,정작 여성들의 시각 역시 남성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철저하게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바라본다. 이에 대해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명쾌한 답을 한다.“내가 여성학을 배운 39살 이전에는 내 주위에는 온통 ‘이상한 여자’투성이었다.그러나 내가 여성을 알고,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성들은 온통 당당하고,겸손하고,자신만만하면서도 결코 오만하지 않은 여성들이었다.그 여성들을 알게 된 것이 행복하다.여성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남성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성을 보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생기는 것이다.” 허남주기자 hhj@˝
  • 말말말˙˙˙

    스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청소년 가운데 일부는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과도한 스타 숭배는 일부 대인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일 수 있다.-영국 레스터대학 존 몰트비 박사,청소년들의 스타 숭배는 외로움이나 불안감 때문이라며-˝
  • [우리 결혼해요]김기룡(31)·고영실(30)씨

    현재 직장인 하이마트에 입사한 지 만 2년째 되는 해였다.생각해 보니 일이 좋고 사람이 좋아서 시간은 쏜살같이 잘도 지나갔지만 왠지 모르게 외로움이 항상 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아마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싶었고,또한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주말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2002년 가을이었다. 그곳에서 까만 머릿결에 큰 눈의 그녀를 보았다.아주 잠깐.하지만 한눈에 들어왔던 그녀는 잠시 보였을 뿐 그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이후로 나도 모임에 잘 나가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날이었다.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내게 전화가 왔다.좋은 사람이 있으니 소개해 주겠단다.마지못해 연락처를 받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었다.야근하다 통화를 하는데 느낌이 너무 좋았다.계속 알고 지내던 사람과 통화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2003년 1월22일 홍대 부근.퇴근후 맥주 바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너무 놀랐다.그녀였다.까만 머릿결에 큰 눈의 그녀였다.나는 그날 취하고 말았다.처음이었다.처음 만난 이성 앞에서 그렇게 취하기는….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플라워맨(flowerman)’이 되었다.그전에는 가장 늦게 퇴근한다고 해서 ‘하이마트 지킴이’였다.거의 매일 꽃을 사들고 그녀를 보러 갔다.다른 어떤 것보다 꽃이 좋았다.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정작 가장 좋아한 사람은 회사 지하 꽃집 아주머니였지만…. 나는 그녀를 매일 봤다.야근이 있으면 12시라도 택시 타고 가서 얼굴보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일을 했다.회식이 있는 날엔 취했어도,늦게라도 그녀를 보고 갔다.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와 얼마후 결혼한다.빙장께서 건강이 좋지 않긴 하셨지만 작년에 갑작스레 돌아가셨다.장례식장에서 나는 사위가 되었다.‘막내 사위 김기룡’으로. 아버님 계신 대전 현충원에 갈 때도 회사 지하에서 꽃을 샀다.처음엔 국화를 드렸고,다음엔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극락조화를 함께 준비했다.그날 나는 늦었지만 말씀드렸다.“아버님,우리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하늘에서 많이 축복해 주세요.귀연  막내 사위 올림.”˝
  • [조정래의 세상보기] 김성호·박찬호 두 젊은 영혼에게

    당신은 뜻밖에 패배를 했습니다.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담담하고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그건 신선하고 신선하고 또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이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첫 연입니다.김성호 의원과 박찬호 선수 두분,당신들이 최근에 보여준 모습을 바라보며 이 시가 새롭게 가슴을 울립니다.당신들이 겨울 대나무처럼 시퍼렇게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입니다. 김성호 의원,당신이 국회의원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에서 패배를 아무런 사족 붙이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문득 놀랐습니다.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당신의 얼굴은 아무런 꾸밈도 당황함도 없이 편안하고 담담했습니다.사진기의 정직하고 냉정한 투시력은 인간의 위장된 감정까지도 여지없이 담아내는데 말입니다. “비록 후보가 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이 선도하는 정치개혁에 기여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런 당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저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런데,다음날 신문에 난 당신의 인터뷰를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예,제가 선출될 줄 알았지요.” 그래서 국민경선에 나섰던 것인데 당신은 뜻밖에 패배를 했습니다.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담담하고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그건 신선하고 신선하고 또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이었습니다.우리의 정치판에서 그런 ‘신사적’인 모습은 실로 처음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지난 수십년에 걸쳐서 외국 정치인들이 패배에 승복하고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그 흔쾌한 모습을 우리한테서도 볼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해 왔습니까.더구나 당신의 모습이 한층 돋보이는 것은 시민단체들에 의해 낙선·낙천자들 명단이 발표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낙선·낙천의 대상이 된 국회의원들은 하나같이 변명해대고 불만을 터뜨리고 욕을 하기 바쁘지 당신처럼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김성호 의원,당신의 아름다운 뒷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젊은 당신은 이 땅의 모든 정치인들의 참다운 스승입니다.당신의 인생은 찬란한 승리의 빛에 감싸여 있습니다.어디서나 꿋꿋하시기를. 박찬호 선수,당신의 요즈음의 심경을 헤아려보며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린 말이 있습니다.앞으로 얼마나 잘할 거라는 장담의 약속은 못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하겠다고.결국 끈질긴 놈이 살아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홈페이지에 남겼다는 글의 이 부분에 당신의 외로운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요즘 당신이 겪고 있는 외로움은 작년 귀국 때 겪은 외로움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릅니다.성적이 부진해서 돌아온 당신에게 조국의 매스컴들은 너무나 싸늘했습니다.당신이 승승장구할 때엔 박이 터지도록 앞을 다투던 매스컴들은 간곳이 없었습니다.그 약삭빠른 표변에 당신이 상처라도 크게 입었으면 어쩌나 하고 마음이 쓰였습니다.당신은 야구에서는 우뚝한 큰 선수이지만 각박한 인생사를 소화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입니다.내가 늘 걱정하는 내 아들보다 한 살이 어리니까요. 당신을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인간적 차별까지 뚫고 세계적 선수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노동자들에 힘입어 부자가 된 기업인들도 그 이윤의 사회 환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거부하는 세상에서 당신은 오로지 당신 혼자의 몸을 학대하듯 단련시켜가며 어렵게 번 돈을 귀국할 때마다 내놓고는 했습니다.그 아름다운 실천은 성자를 능가하는 모습입니다. 재기를 다짐하는 당신의 굳은 의지가 다시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그러나 당신은 지금 세월이 지배하는 체력의 한계 앞에 직면해 있음도 잊지 말기 바랍니다.세월의 잔혹한 힘을 이겨낼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그 힘에 순종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또 하나의 아름다움입니다.그리고,새로운 삶의 길은 얼마든지 또 있습니다.당신은 최선을 다한 승자이며,우리의 자랑스러운 모범입니다.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 [조정래의 세상보기] 김성호·박찬호 두 젊은 영혼에게

    당신은 뜻밖에 패배를 했습니다.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담담하고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그건 신선하고 신선하고 또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이었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첫 연입니다.김성호 의원과 박찬호 선수 두분,당신들이 최근에 보여준 모습을 바라보며 이 시가 새롭게 가슴을 울립니다.당신들이 겨울 대나무처럼 시퍼렇게 젊은 나이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입니다. 김성호 의원,당신이 국회의원 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에서 패배를 아무런 사족 붙이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문득 놀랐습니다.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당신의 얼굴은 아무런 꾸밈도 당황함도 없이 편안하고 담담했습니다.사진기의 정직하고 냉정한 투시력은 인간의 위장된 감정까지도 여지없이 담아내는데 말입니다. “비록 후보가 되지는 않았지만 열린우리당이 선도하는 정치개혁에 기여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런 당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저럴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런데,다음날 신문에 난 당신의 인터뷰를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예,제가 선출될 줄 알았지요.” 그래서 국민경선에 나섰던 것인데 당신은 뜻밖에 패배를 했습니다.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담담하고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그건 신선하고 신선하고 또 신선한 충격이고 감동이었습니다.우리의 정치판에서 그런 ‘신사적’인 모습은 실로 처음 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지난 수십년에 걸쳐서 외국 정치인들이 패배에 승복하고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그 흔쾌한 모습을 우리한테서도 볼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해 왔습니까.더구나 당신의 모습이 한층 돋보이는 것은 시민단체들에 의해 낙선·낙천자들 명단이 발표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낙선·낙천의 대상이 된 국회의원들은 하나같이 변명해대고 불만을 터뜨리고 욕을 하기 바쁘지 당신처럼 겸허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김성호 의원,당신의 아름다운 뒷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젊은 당신은 이 땅의 모든 정치인들의 참다운 스승입니다.당신의 인생은 찬란한 승리의 빛에 감싸여 있습니다.어디서나 꿋꿋하시기를. 박찬호 선수,당신의 요즈음의 심경을 헤아려보며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여러분들에게 약속드린 말이 있습니다.앞으로 얼마나 잘할 거라는 장담의 약속은 못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은 하겠다고.결국 끈질긴 놈이 살아남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홈페이지에 남겼다는 글의 이 부분에 당신의 외로운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요즘 당신이 겪고 있는 외로움은 작년 귀국 때 겪은 외로움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릅니다.성적이 부진해서 돌아온 당신에게 조국의 매스컴들은 너무나 싸늘했습니다.당신이 승승장구할 때엔 박이 터지도록 앞을 다투던 매스컴들은 간곳이 없었습니다.그 약삭빠른 표변에 당신이 상처라도 크게 입었으면 어쩌나 하고 마음이 쓰였습니다.당신은 야구에서는 우뚝한 큰 선수이지만 각박한 인생사를 소화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입니다.내가 늘 걱정하는 내 아들보다 한 살이 어리니까요. 당신을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인간적 차별까지 뚫고 세계적 선수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노동자들에 힘입어 부자가 된 기업인들도 그 이윤의 사회 환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거부하는 세상에서 당신은 오로지 당신 혼자의 몸을 학대하듯 단련시켜가며 어렵게 번 돈을 귀국할 때마다 내놓고는 했습니다.그 아름다운 실천은 성자를 능가하는 모습입니다. 재기를 다짐하는 당신의 굳은 의지가 다시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그러나 당신은 지금 세월이 지배하는 체력의 한계 앞에 직면해 있음도 잊지 말기 바랍니다.세월의 잔혹한 힘을 이겨낼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그 힘에 순종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또 하나의 아름다움입니다.그리고,새로운 삶의 길은 얼마든지 또 있습니다.당신은 최선을 다한 승자이며,우리의 자랑스러운 모범입니다.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 [성인우화] 외로운 두더지

    두더지는 혼자였어.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오래 전에,두더지도 낯선 동물과 맞닥뜨린 적이 있기는 했었어.하지만…. 맨 처음에 만난 동물은 토끼였지.토끼는 아무 스스럼없이 두더지에게 깡충깡충 뛰어 왔어.그리고는 불쑥 앞발을 내밀었지. “만나서 반갑다.우리 친구 할래?” 그러나 두더지는 얼른 뒤로 물러났어. “넌 나랑 너무 많이 다르게 생겼어.몸은 너무 하얗고,눈알은 또 너무 빨갛잖아!” 토끼는 무안했어.그래서 말없이 숲 속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찌르륵찌르륵 멧새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지. “아,참 고운 목소리야! 어디서 나는 소리지?” 두더지는 갈참나무 가지에 앉아서 꽁지를 달싹이고 있는 멧새를 발견했어. ‘저런 새와 친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고운 노래를 들을 수도 있고 저 먼 세상 얘기도 해 줄 텐데….’ 두더지는 가슴이 벅차올랐어.그렇지만 다음 순간 중얼거렸지. “치,저 새는 나를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거야.난 노래도 못하고 날 줄도 모르잖아? 어쩌면 날 멍청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두더지는 공연히 돌멩이를 걷어찼어.그 바람에 멧새는 날아가 버리고 말았지.쓸쓸해진 두더지는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면서 온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어. “아,배고파! 지렁이 녀석들은 다 어디 갔어?” 두더지는 먹이를 찾기 위해 땅바닥에 고개를 킁킁거렸어.그때 멧돼지가 나타나 뿔을 내밀었지.뿔에 걸려있던 통통한 지렁이가 흔들거렸어. “야,이거 너 먹을래?” 두더지는 멧돼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 “넌 참,친절하구나.그렇지만 왜지? 어째서 내게 따뜻하게 구는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냐구?” 기가 막혔어.멧돼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꿈벅거렸지. 그 다음에 만난 동물은 고슴…,그래 고슴도치라고 했지.온몸을 뾰족한 침으로 둘러 쓴 그 동물은,보기보다 무척 싹싹했어. “나랑 같이 놀자.난 참 심심해.” 고슴도치는 한발 바짝 다가섰어. “왜 이래?” 두더지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풀쩍 물러났지. “너랑 안놀아.네 가시에 찔리면 어떻게 해?” 고슴도치가 원래 다정한 성품이라든가,침을 창처럼 세우는 경우는 공격을 당할 때뿐이라는 것을,두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거야.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고슴도치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두더지는 오래도록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앉아 있었어.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재잘거리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지.두더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 “안녕하세요!” “안녕!” “아저씨 안녕!” 꼬마 땃쥐들이었어.여섯 마리나 되는 꼬마 땃쥐들이 엄마 땃쥐의 허리에 한 줄로 줄줄이 매달린 채 저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소리친 거야.이렇게 밝고,쾌활하고,거리낌없는 목소리를 들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으응,그,그래…” 엉거주춤 땃쥐 가족의 인사를 받은 두더지는 허둥대기 시작했어.이 반가운 마음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거든.망설이던 두더지는 기껏 이렇게 물었어. “너희들은 그렇게 희한한 꼴로 어딜 가는 거냐?” 사실,앞선 녀석의 허리 언저리를 꼭 물고 한 줄로 졸졸 움직이는 땃쥐 가족의 모습은 조금 우습기도 하지.하지만 그렇다고 해도,희한한 꼴이라니! 아니나 다를까,멋쩍어진 꼬마 땃쥐들은 공연히 찍찍 수선을 떨고 엄마 땃쥐는 샐쭉 삐쳐버렸어. ‘무례한 두더지 같으니라구! ’ 엄마 땃쥐는 콧등을 움찔거리며 흥,콧방귀를 뀌었지.그리고는 찬바람 소리가 나게 휙,돌아섰어.엄마 등에 줄줄이 매달려있던 새끼들이 으악,으악,소리를 질러댔지.땃쥐 가족은 두더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도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어. 밤이 되었지.두더지는 땅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았지.하늘엔 별이 가득했어. ‘아,나는 혼자야!’ 두더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지.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어.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고.두더지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어.외로움을 잊으려면 차라리 몸이라도 바삐 움직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그래서 두더지는 밤새 일을 하기로 했어.느릿느릿 지렁이를 잡기 시작했지. 한 마리,두 마리,세 마리…. 두더지는 굴을 파고 지렁이를 차곡차곡 쌓아 놓았어. 삼십마리,사십마리,오십마리…. 이제는 정말 아무도 두더지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어.두더지는 점점 더 외로움을 탔지.몰래 땅을 파고 들어가 혼자 웅크리고 있기도 하고,눈이 침침해지도록 밤마다 울기도 하면서. 지금도 두더지는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어.아무도 없는 땅속에서 하루종일 애꿎은 지렁이만 잡아대면서. 파랑새 어린이의 ‘외톨이 두더지’에서 ●작가의 말 이렇게 지렁이를 잡아다 쌓아놓곤 하는 두더지가 꽤 많다고 합니다.그 자료를 읽으면서 저축을 하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바람직한(?) 교훈 대신,외로움을 잊기 위해 일벌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아무래도 제가 친구와 사귀는데 서툰 두더지와 더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50세에 제2도약 꿈꾸는 연극인 윤석화

    ‘윤석화(尹石花)’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연극 하나로 그렇게 큰 스타가 됐을까.’라는 물음을 곧잘 던진다.팔자가 드센 석화(石花)여서? 농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1975년 20살때 ‘7.5평 아파트를 확 부숴버리고 미국에 가버릴거야.’하며 짐 싸들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엉엉 울면서 시작된 ‘질곡’의 연극인생이다. 어느새 나이 50줄(음력 1955년12월生)에 들어선 그가 요즘 새로운 도전과 선택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주위에서 ‘윤석화 정도의 내공을 쌓았으면 이제는 국제무대를 평정해야 되지 않느냐.’하는 권유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당당히 승부를 걸어볼 생각도 있습니다.그럴 경우 2년 가량 이 땅을 비워야 하고 또 저를 만나고 싶은 관객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그는 최근 미국 연극계의 거장 로버트 윌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2000년 서울연극제에서 국내 초연돼 호평을 받았던 연극 ‘바다의 여인’(헨릭 입센 원작)을 세계 무대에 올리자는 제안이었다. ●해외서 `국산파´ 성공 꼭 보여줄 것 지난 2일 오후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객석빌딩 입구에서 외출에서 돌아오는 윤씨를 만났다.1층 소극장 정미소에서 공연중인 연극 ‘19그리고 80’의 배우·스태프 10여명과 함께 ‘안면도의 MT’를 다녀오는 중이었다.때마침 동행한 사진 기자가 밖에서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자 윤씨는 “나이 50이에요,배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잠시후 4층의 객석 접견실로 들어서자 윤씨는 핸드백 속의 담배부터 얼른 꺼내 물어 ‘후-’하고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그 속도가 빠른 것으로 보아 하루 1갑은 족히 피는 것 같았다. 담배 종류는 가리지 않고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피운다고 했다.예나 지금이나 준비성이 별로 없다는 그는 “오늘 아침 화장을 할 때에도 미처 준비해간 화장품이 없어 동행한 언니한테 잠깐 빌려 기초화장만 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왜 윤씨를 가장 ‘보보스’(Bobos)다운 인물로 꼽는지 짐작케 했다.‘보보스’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앞 글자를 딴 말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서 개성과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해외 진출은 제 생애에서 이루어야 할 도전이자 희망입니다.로버트 윌슨의 제안으로 좀 더 빨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러나 ‘객석’ 운영 문제와 올 9월에 공연될 새로운 작품에 우선 몰두할 생각입니다.” 윤씨가 해외진출의 뜻을 두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현재 외국에서 성공한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대부분 ‘해외파’라는 점.그래서 순수 ‘국산파’가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당당히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단다.또 이보다 앞서 2000년 서울연극제에서 로버트 윌슨과 공연 후 세계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주위의 평가를 비롯해 그동안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런던에서 공연하자는 제의도 잇따랐다. 이같은 속내를 알고 있는 가까운 사람들은 “나이도 50인데 뭐,이제는 고생이라도 덜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리기도 하지만 50살에 새롭게 꿈틀거리는 정열을 어찌 누를 수가 있을까.‘인생 50’의 색깔을 보라색에 비유하는 그는 “보라색은 깊이와 환상이 있으며 또 온전한 블랙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라고 말했다. ●수민이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 지난 1992년 윤씨는 극단 산울림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10개월 동안 장기 공연하면서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으며,올 9월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가제)로 관객들을 새롭게 만날 예정이다.단순히 ‘딸’과 반대되는 ‘아들개념’이 아니라 아들과 딸을 다 포함한 이 시대의 부모가 던지는 또다른 휴먼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아이디어와 시놉시스(작품의 줄거리)를 자신이 직접 만들었으며 현재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대본 손질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11개월전 금쪽 같은 입양아들 ‘수민’이를 만나면서 시작된 ‘50살의 작품’이다. “수민이를 세계적 예술가로 키울 생각입니다.특히 피아니스트로 성장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윤씨는 잠시 ‘꿈’얘기를 꺼냈다.자신의 인생 고비때마다 엉뚱하게도 미국의 케네디와 존슨,박정희 전 대통령이 꿈에 나타나 피를 흘리면서 자신의 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오늘날의 ‘윤석화’를 있게 해준 작품(1983년) ‘신의 아그네스’에 출연하던 첫 날 밤에 이들과 피로 만나기 시작,히트작 출연때마다 ‘길몽’의 상대로 자주 등장했다. 피아노를 좋아해 만약 자식이 있다면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다고 평소 생각해온 윤씨는 지난해 초(어린 아들의 입장을 고려해 정확히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청) 꿈에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와 조우했다.리처드 기어는 근사하게 피아노를 치며 자신을 감동시켰다.그로부터 얼마 후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입양한 수민의 생일이 리처드 기어의 꿈을 꾸던 날과 일치된다는 사실이었다. ●포스터 붙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늘의 조화라고 생각한 윤씨는 요즘 수민에게 베토벤과 리스트 등의 피아노음악을 매일 들려주고 있다.또 틈틈이 집에서 같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아들에게 음감을 익혀주고 있다. “20대 철부지 처녀로 골목길 돌아다니며 열심히 연극 포스터 붙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모처럼 시간이 될 때면 좋아하는 만두를 빚으며 아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연극 때문에 늘 견디기 힘든 외로움의 연속이었다고 지난 세월을 술회한다. 그럴 때면 시인 황동규의 “그대가 바람부는 언덕을 보여주면 나는 거기서 쓰러지지 않는 갈대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는 시구절로 위안을 삼았다.더욱 힘들면 “그러니까 오래해!”라는 구히서씨의 꾸지람으로 견뎌냈다. “골프도 하고(100타 안팎) 헬스클럽에서 체력단련을 해 또다른 인생의 장기공연에 나설겁니다.” 김문기자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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