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외동딸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4억원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정품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전장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참여
    2026-08-0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76
  •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꼭 찾아야 할 ‘122609’

    6·25전쟁에 참전했지만 끝내 가족의 품으로 오지 못한 국군전사자가 태극기 배지로 돌아온다.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8일 “유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전사자 12만 2609명을 기억하는 태극기 배지 달기 대국민 캠페인 ‘끝까지 찾아야 할 122609 태극기’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광운대 공공소통연구소가 처음 제작한 태극기 배지는 유해 발굴 작업 시 유해가 발굴되고 이를 담은 유골함에 태극기를 덮은 모습을 형상화했다. 광운대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직접 시민에게 배지 증정 활동을 했다. 사업추진위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를 대국민 공식 캠페인으로 확대 추진했다. 태극기 배지에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국군전사자를 상징하기 위해 1번부터 12만 2609번까지의 고유번호가 부여됐다. 1번 태극기 배지는 9일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서병구 일병의 외동딸 서금봉(70)씨에게 전달된다. 서씨는 갓난아이 시절 6·25전쟁이 발발하며 아버지가 입대한 탓에 태어나 한 번도 아버지를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 묻힌 서 일병의 유해는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입대한 남편을 기다리다가 전사 통지서를 받았던 서씨의 어머니는 남편의 유해를 찾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2016년 세상을 등졌다 . 태극기 배지는 9일부터 캠페인에 참여한 국민을 대상으로 배부를 시작한다. 김은기 사업추진위 공동위원장은 “이번 캠페인을 통해 남녀노소 모든 국민과 함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호국영웅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표할 수 있어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강한 승부욕 타고난 인싸력…영지 인기 이유 있지

    강한 승부욕 타고난 인싸력…영지 인기 이유 있지

    “승부욕이 정말 센 편이에요. 지고 싶지 않아 랩도 열심히 연습하고, 같이 공연하는 언니들을 제가 닦달할 때도 있어요.” 묵직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풍 같은 랩과 18세 여고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능숙한 무대. 지난해 서바이벌 ‘고등래퍼3’에서 최연소이자 첫 여성 우승자로 힙합계에 발을 들인 이영지는 1년 사이 선배들과 1대1로 대결해도 손색없을 만큼 크게 성장했다. 최근 엠넷 ‘굿 걸’에서는 ‘고등래퍼3’ 멘토였던 래퍼 기리보이를 꺾었고, MBC 웹 예능 ‘힙합걸즈’에서는 특유의 발랄함과 개그 감각까지 뽐낸다. ●너무 많이 떠들어서 생긴 허스키한 목소리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영지는 “혼자 무대에 오르면 부담이 크다”며 “언니들의 믿음에 부응하고 이기고 싶은 마음에 연습을 많이 한다”고 털어놨다. ‘고등래퍼3’에서 폭풍 성장한 것, ‘굿 걸’에서 든든한 막내가 된 것도 쉬는 시간까지 연습으로 채우는 노력 덕분이다. 한번 들으면 귀에 꽂히는 허스키한 톤도 타고난 게 아니다. “너무 많이 떠들어서 만들어진 후천적인 목소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래 목소리는 얇았는데, 친구들이랑 떠들다 보니 목이 계속 쉬었고 그게 굳어져 이런 목소리가 됐단다. 이영지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 나는 내 목소리가 좋았다”며 “큰 울림통에서 나오는 발성 덕분에 공연장에서도 목소리가 비트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언니들에게 접근 9명의 선배와 협업하는 ‘굿 걸’에서도 특유의 ‘인싸력’(친화력)을 발휘한다. “외동딸이어서 밖에서 친구를 만드는 게 익숙하고 원래 성격도 밝아요. 처음부터 틀에 갇히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새 학기에 친구를 처음 만나는 느낌으로 언니들에게 다가갔어요.” 남성 비율이 높은 힙합신에서 보기 드문 여고생 래퍼인 그는 10~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디스’나 혐오가 아닌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사가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이영지는 “제가 왜 인기 있는지 모르겠다”고 쑥스러워하면서도 “혐오는 잘못된 것이니 그렇게 할 생각과 의지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혐오로 들리거나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저도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가사는 제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려고 해요.”●코로나로 고생하는 친구들 힘냈으면 지난 1년간 음악을 듣는 태도도 변했다. 전에는 듣고 싶은 음악만 들었지만, 지금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듣고 대중이 원하는 요소를 찾는다. 가족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그는 “엄마랑 할머니가 ‘TV에 영지가 나오니 신기하다’고 하신다”면서 “크게 티는 내지 않으시는데, 집에 있으면 계속 제 노래를 틀긴 하신다”며 밝게 웃었다. 친구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내비쳤다. “학교에 가끔 가는데 친구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중학교 때는 메르스 때문에 고생하고, 지금은 코로나19로 너무 힘들어하거든요. 그 친구들에게도 제 목소리가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지기 싫어서 열심히 연습해요” 폭풍 성장한 ‘나는 이영지’

    “지기 싫어서 열심히 연습해요” 폭풍 성장한 ‘나는 이영지’

    ‘고등래퍼3’ 우승 후 음악 작업 열중‘굿 걸’ 무대 부담되지만 이기려고 노력“허스키한 톤? 너무 떠들어서 생긴 것 상처 줄 수 있는 가사보단 내 감정 집중코로나로 힘든 친구들에게 음악이 힘 되길”“승부욕이 정말 센 편이에요. 지고 싶지 않아 랩도 열심히 연습하고, 같이 공연하는 언니들을 제가 닥달할때도 있어요.” 묵직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풍같은 랩과 18세 여고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능숙한 무대. 지난해 서바이벌 ‘고등래퍼3’에서 최연소이자 첫 여성 우승자로 힙합계에 발을 들인 이영지는 1년 사이 선배들과 1대 1로 대결해도 손색 없을 만큼 크게 성장했다. 최근 엠넷 ‘굿 걸’에서는 ‘고등래퍼3’ 멘토였던 래퍼 기리보이를 꺾었고, MBC 웹 예능 ‘힙합걸즈’에서는 특유의 발랄함과 개그감각까지 뽐낸다. 최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영지는 “혼자 무대에 오르면 부담이 크다”면서 “언니들의 믿음에 부응하고 이기고 싶은 마음에 연습을 많이 한다”고 털어놨다. ‘고등래퍼3’에서 폭풍 성장한 것, ‘굿 걸’에서 든든한 막내가 된 것도 쉬는 시간까지 연습으로 채우는 노력 덕분이다. 한번 들으면 귀에 꽂히는 허스키한 톤도 타고난 게 아니다. “너무 많이 떠들어서 만들어진 후천적인 목소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래 목소리는 얇았는데 친구들이랑 떠들다 보니 목이 계속 쉬었고, 그게 굳어져 이런 목소리가 됐단다. 이영지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 나는 내 목소리가 좋았다”며 “큰 울림통에서 나오는 발성 덕에 공연장에서도 목소리가 비트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9명의 선배들과 협업하는 ‘굿 걸’에서도 특유의 ‘인싸력’(친화력)을 발휘한다. “외동딸이어서 밖에서 친구를 만드는 게 익숙하고, 원래 성격도 밝아요. 처음부터 틀에 갇히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새학기에 친구 처음 만나는 느낌으로 언니들에게 다가갔어요.” 다른 장르의 선배들과 함께 하는 것이 설레고 행복하다는 이영지는 “실력이 탄탄하고 멋진 언니들이 이를 악 물고 음악을 만드니까 잘 할 수밖에 없다”며 “격려가 기본이어서 분위기도 화목하다”고 전했다. 그의 꿈이 원래 래퍼였던 건 아니다. 친구들이 랩을 잘 한다고 해서 혼자 연습하다 방송에 출연했고 실력도 함께 성장했다. 지난 1년간 음악을 듣는 태도도 변했다. 듣고 싶은 음악만 듣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듣고 대중들이 원하는 요소를 찾는다. 가족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그는 “원래 엄마랑 할머니는 제가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으시는데 이번에는 ‘TV에 나오니 신기하다’고 하신다”면서 “크게 티는 내지 않으시지만 집에 있으면 계속 제 노래를 틀긴 하신다”면서 밝게 웃었다. 남성 비율이 높은 힙합신에서 보기 드문 여고생으로 10~20대 여성들의 높은 지지도 받고 있다. ‘디스’나 혐오가 아닌 내면을 솔직하게 표현한 가사가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이영지는 “제가 왜 인기 있는지 모르겠다”고 쑥쓰러워하면서도 “혐오는 잘못된 것이니 그렇게 할 생각과 의지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혐오로 들리고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저도 실수를 할 수 있으니, 가사는 제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려고 해요.” 집에서 5분 거리에 작은 작업실을 얻은 이영지는 ‘고등래퍼3’ 상금 1000만원 중 600만원을 장비 사는데 투자했다. 이 곳에서 틈틈히 곡을 만들고 다음에는 앨범으로 팬들을 찾을 계획이다. 내내 음악 이야기를 거침없이 꺼내던 그는 인터뷰 말미 친구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내비쳤다. “학교에 가끔 가는데 친구들이 너무 안타까워요. 중학교때는 메르스 때문에 고생하고, 지금은 코로나19로 너무 힘들어 하거든요. 그 친구들에게도 제 목소리가 힘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포토] 마스크 쓰고 졸업식에 참석한 日 아이코 공주

    [포토] 마스크 쓰고 졸업식에 참석한 日 아이코 공주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가 22일(현지시간) 도쿄 가쿠슈인 여자고등학교 졸업식에 마스크를 쓴 채 참석하고 있다. AP·로이터 연합뉴스
  • 가족도 몰랐던 천만장자…111억 기부하고 떠난 호주 독신 할머니

    가족도 몰랐던 천만장자…111억 기부하고 떠난 호주 독신 할머니

    호주의 한 80대 할머니가 가족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111억 원의 재산을 전액 기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뉴캐슬 지역언론은 19일(현지시간) 셰일라 우드콕 할머니가 15개 단체에 총 1400만 호주 달러(약 111억 원)를 남겼다고 전했다. 2018년 5월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우드콕 할머니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남편과 자녀 등 딸린 식구도 없었던 할머니는 홀로 여행과 원예를 즐기고 초콜릿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아 지냈다. 생활은 검소했고 또 단조로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1년 반 동안 보호자 역할을 한 사촌은 할머니에 대해 “매우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할머니가 살아생전 꾸준히 했던 활동 중 하나가 바로 자선사업이었다. 한 동물보호단체에는 30년간 35만 호주 달러(약 2억8000만 원)를 기부했다. 거액의 기부를 한 사실이 알려졌다가 자칫 홀로 사는 자신이 범죄에 연루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기부를 멈추지는 않았다. 할머니의 사촌은 “그녀 앞으로 지역사회단체의 감사 편지가 자주 날아왔다. 하지만 기부는 늘 은밀하게 이뤄졌다. 독신 여성으로서의 불안함이 있었다”고 밝혔다. 현지언론은 할머니가 40년 전부터 기부활동을 벌였으며 이 사실은 일부 자선단체만이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사촌 역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야 기부 사실을 알았다.은밀한 할머니의 기부는 죽어서도 계속됐다. 규모도 그 어느 때보다 컸다. 할머니가 지정한 15개 단체는 적게는 34만 호주 달러(약 2억7000만 원)에서 많게는 137만 5000호주달러(약 10억 9500만 원)의 기부금을 받게 됐다. 총 1400만 호주 달러(약 111억 원)에 달하는 기부금은 구세군과 적십자사, 월드비전, 항공의료기관, 동물보호단체와 청소년단체, 유방암 연구센터, 희소병 연구소, 심장병 단체 등에 돌아갔다. 할머니는 이 돈이 노숙자 주거 문제 해결과 닥터헬기 확충, 청소년 장학금, 유기견 보호 등에 사용되기를 바랐다. 가족들은 마땅한 직업도 없었던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놀라워했다. 목재 사업을 크게 하는 집안 외동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고, 사업이 확장하면서 대주주로 등극했지만,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기에 의문은 증폭됐다. 상속분이 있긴 했지만 많지는 않았다는 전언이다. 사망 이후에야 할머니의 재산 규모를 알게 된 가족들은 할머니가 상속분을 투자해 재산을 계속 불렸으며, 그 돈으로 40년간 자선사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할머니의 사촌은 “수입에 대해선 늘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돈이 있는 줄 몰랐다”라면서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있지만 유산이 사용되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뉴캐슬의 한 시의원도 “돌아가시면서 재산을 기부하는 분들을 많이 봤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수준”이라면서 “앞으로 이런 일을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며 할머니에게 감사를 전했다. 기부 사실만 알았을 뿐 액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자선단체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137만 5000호주달러(약 10억 9500만 원)를 지원받게 된 구세군 측은 “등골이 얼얼해질 정도로 놀라운 순간이다”라면서 “그녀는 우리 공동체의 축복”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이어 “가장 취약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구세군은 기부금으로 10명 안팎의 노숙자를 수용할 수 있는 긴급주택을 마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삶이 詩였던 아버지… 젊은이들이 그 정신 기억했으면”

    “삶이 詩였던 아버지… 젊은이들이 그 정신 기억했으면”

    종암동에 이육사 기리는 문화공간 마련 “특별한 해 아니어도 아버지 기억해 주길” 포승줄 묶인 아버지 모습이 마지막 기억 4살이었던 나에게 ‘다녀오마’ 하고 떠나 돌아가신 어머니 삶도 책으로 남길 계획“삶이 시고 마음이 독립이었던 아버지를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 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시인인 이육사(1904~1944) 시인의 하나 남은 혈육, 이옥비(79) 여사를 서울 성북구 종암동 ‘문화공간 이육사’에서 21일 만났다. 종암동은 이육사 시인이 1939년부터 거주하던 곳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청포도’를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17일 이곳에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작은 공간인 문화공간 이육사가 문을 열었다. 이 여사는 “크고 작고를 떠나 서울에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 자랑스럽다”며 “공간이 작다고 아버지 (위상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정신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공간을 마련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는 “종암동 외에 다른 곳에도 부탁을 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던 곳도 있었다”며 “초반의 어려움을 딛고 공간이 생긴 만큼 학생 등 많은 젊은이가 이곳에서 아버지의 정신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옥비’(沃非)라는 이름은 이육사 시인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예쁜 이름이지만 뜻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이 여사는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뜻”이라며 “욕심 없이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들어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육사 시인은 이 여사가 4살 되던 해인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 여사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청량리역 동대문경찰서에서 포승줄에 묶여 밀짚으로 된 용수를 쓰고 계신 모습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라며 “어렸던 나에게는 엄청 충격적인 모습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아버지 다녀오마’ 이렇게 내게 말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 여사는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틈만 나면 들려주셨다”며 “그땐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버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이야기가 없었을 뻔했다”고 밝혔다. 지난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만큼 이 여사는 평소보다 훨씬 바쁜 한 해를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독립 순국선열의 자손 중 다수는 이미 사망하고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저를 이곳저곳에서 불러 주셔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다”면서도 “특별한 해, 특별한 기념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찾아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쉼 없이 달려온 이 여사는 올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잊혀져 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 부족한 글솜씨나마 남겨 놓고 싶다”며 “아버지의 삶과 더불어 어머니의 특별했던 삶도 책으로 남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노르웨이 공주의 전 남편 아리 벤 극단 선택, 케빈 스페이시가 왜 나와?

    노르웨이 공주의 전 남편 아리 벤 극단 선택, 케빈 스페이시가 왜 나와?

    노르웨이 마사 루이즈 공주와 2002년 결혼했지만 2년 전에 이혼한 작가 아리 벤이 스스로 극단을 선택해 마흔일곱 삶을 접었다.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집필한 고인의 대변인은 성탄절에 노르웨이 NTB 통신에 그의 죽음을 알렸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노르웨이의 하랄트 국왕과 소냐 왕비도 성명을 발표해 고인이 “오랜 세월 우리 가족의 중요한 일부가 됐고 따듯하고 좋은 기억을 우리에게 남겼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를 알게 돼 기뻤다. 또 우리 손주들이 이제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것에 큰 슬픔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사실 결혼 때부터 벤은 마사 공주의 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비쳐졌다. 덴마크에서 태어나기도 했고 단편 ‘지옥만큼 슬퍼’ 등 몇몇 작품만을 발표한 상태였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약물에 취해 성매매를 한 동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 부부의 외동딸이자 맏이인 마사의 고집을 누구도 꺾지 못했다. 공주의 심리 치료를 맡은 그의 어머니가 뒤에서 조종한 것 아니냐는 입길도 뒤따랐다. 공주는 자신이 죽은 이와 대화할 수 있는 영매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우드(16), 레아(14), 엠마(11) 세 딸이 있지만 2016년 별거한 뒤 이듬해 이혼했다. 당시 마사 공주는 성명을 내 “우리 아이들이 누려야 마땅한 안식처를 더 이상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같은 해 12월 벤은 성추행과 동성애 편력 등 온갖 기행으로 명예가 실추된 할리우드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노벨 평화상 축하 공연 도중 자신을 추행했다고 고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스페이시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은밀한 부위를 만졌다고 주장했고, 스페이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사랑의 불시착’ 서지혜, 현빈 약혼녀 첫 등장 “평양 퀸카”

    ‘사랑의 불시착’ 서지혜, 현빈 약혼녀 첫 등장 “평양 퀸카”

    서지혜가 첫 등장부터 ‘레전드 미모’를 경신, 눈을 뗄 수 없는 아우라를 발산한다. 21일 방송되는 tvN 토일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극본 박지은, 연출 이정효) 3회에서는 레전드 미모를 과시한 서지혜의 첫 등장이 그려질 예정이다. 서지혜가 연기하는 서단은 평양 최고급 백화점 사장인 어머니의 외동딸이자 리정혁(현빈 분)의 약혼녀로, 러시아에서 10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친 첼리스트다. 뛰어난 스펙과 함께 평양의 워너비 ‘맵짠녀’로 불릴 만큼 남다른 패션 감각의 소유자다. 이번 3회에서 서단은 10년 만에 평양으로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송이의 화려한 꽃을 연상케 하는 럭셔리한 스타일링이 빛나는 가운데, 오랜만에 평양을 찾은 반가움과 기대감이 한껏 드러나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또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당당한 포스가 도드라지며, 여심과 남심 모두를 저격할 새로운 캐릭터의 탄생을 기대케 한다. 시선을 압도하는 서단의 압도적인 비주얼과 함께 결혼을 약속한 리정혁을 향한 ‘직진 사랑’이 펼쳐질 것이 예고돼 본방송 시청 욕구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 평양 트렌드를 주도하는 No. 1 퀸카 ‘서단’의 귀환으로 ‘사랑의 불시착’ 속 캐릭터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할지 안방극장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모두의 시선을 빼앗을 서단의 귀국은 21일 토요일 오후 9시 tvN 새 토일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3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청포도’ 고향 종암동서 기리는 이육사

    ‘청포도’ 고향 종암동서 기리는 이육사

    17일 오후 3시 이육사 시인의 정신을 기리는 동시에 지역 주민 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인 ‘문화공간 이육사’가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문을 열었다. 종암동은 이육사 시인이 1939년부터 거주하던 곳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청포도’를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성북구는 이육사 시인의 유고작인 ‘광야’가 처음 세상에 발표된 12월 17일로 개관식을 맞췄다. ‘문화공간 이육사’에는 이육사 시인을 기념하는 전시실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문화 커뮤니티 공간이 함께 있다. 성북구는 이 공간을 주민의 문화생활을 돕고 새로운 지역문화를 가꾸는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1층 ‘청포도 라운지’에는 주민 간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 마련됐다. 한쪽에는 도서 열람이 가능한 휴게실도 있다. 2층 ‘광야 상설전시실’에선 자료와 영상으로 이육사 시인의 활동과 작품을 접할 수 있다. 그의 유고시 ‘광야’가 세상으로 나오게 된 얘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전 연령대가 즐길 수 있도록 했다. 3층 ‘교목 기획전시실 및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시의성 있는 주제로 연 2회 기획전시를 개최한다. 평소에는 시민강좌, 영화 상영회, 문화행사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개관 기념 특별전 ‘식민지에서 길을 잃다, 문학으로 길을 찾다’도 개막한다. 또한 18일 오후 5시에는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의 특강이 열릴 예정이다. 4층 ‘절정 옥상정원’에는 이육사 시인의 친필을 넣은 기념조형물로 포토존을 만들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엄혹한 일제강점기 치하에서도 강철과 같은 신념으로 조국 독립을 의심치 않았던 이육사 선생과 한용운 선생이 성북구에 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은 45만 성북구민의 자부심이 됐다”면서 “그러나 한용운 선생의 유택 성북동 심우장에 비해 이육사 선생의 종암동 집은 아는 이가 적어 안타까워하는 성북구민이 많았는데 문화공간 이육사가 선생을 기리고 알리는 뜻깊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F1 전 회장 딸 가족, 휴가 떠나자마자 770억원 상당 보석 털렸다

    F1 전 회장 딸 가족, 휴가 떠나자마자 770억원 상당 보석 털렸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대회 포뮬러원(F1)을 40년간 이끈 버니 에클스턴 전 회장은 자신의 딸이 소유한 런던 저택에서 5000만파운드(약 771억원) 상당의 보석을 훔쳐간 절도 사건에 대해 내부자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밝혔다고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16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에클스턴 전 회장의 딸 태머라 에클스턴(35)은 남편 제이 버틀란드, 그리고 두 사람의 5살 된 외동딸 소피아와 함께 런던 서부 부촌인 켄싱턴 팰리스 가든스에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다. 내부에 방 57개가 있는 7000만파운드(약 1083억원) 상당의 이 저택 밖에는 곳곳에 폐쇄회로(CC)TV가 있고 이를 보안요원들이 24시간 내내 감시한다.그런데 태머라 에클스턴 가족이 지난 13일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러 유럽 최북부 라플란드로 전용기를 타고 떠난지 불과 몇 시간 뒤인 밤 10시40분쯤 세 명의 강도가 뒷담장을 넘어 정원을 가로지른 뒤 집안에 침입했다. 이들 도둑은 50분간 집안에 머무르며 부부가 각각 따로 탈의실 비밀공간에 숨겨둔 금고를 열어 8만파운드(약 1억2000만원)짜리 팔찌를 비롯해 귀걸이와 목걸이 등 5000만파운드 상당의 보석을 훔쳐 달아났다. 현지 경찰은 당시 CCTV실에 보안요원이 근무하고 있었음에도 침입자 감지 경보가 울리지 않거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점과 사건 직전 한 보안요원이 저택 부지를 벗어났던 일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버니 에클스턴 회장은 “딸 집의 모든 보안 사항을 고려해 볼 때 난 이번 사건이 내부자의 소행이라고 추측한다”면서 “딸이 라플란드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직후 생긴 이번 절도 사건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다방면에서 조사하고 있다고 밝히면서도 도둑들이 빈집을 찾아내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마구 확인하고 다니는 유명한 사건이 수차례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축구 선수 출신 존 테리가 2017년 프랑스 알프스로 스키 휴가를 떠나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에게 가족 사진을 게시한 뒤 그가 설리에 소유한 저택에서 40만파운드 상당의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털어가는 사건이 있었다.이번 사건 역시 인스타그램 스타인 태머라 에클스턴이 가족과 함께 전용기를 타기 직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40만 명이 넘는 팔로워들을 상대로 사진을 공유했기에 경찰은 이점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 사건이 발생한 주택가는 런던에서도 ‘억만장자들의 거리’로 불리는 부촌의 일부로, 주위에는 영국 대표 부동산 중계업체 ‘폭스턴스’의 창립자 존 헌트와 첼시 구단주로 유명한 러시아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 브루나이의 술탄(국왕) 그리고 중국 최고 부호인 왕지안린 완다그룹 회장의 저택들이 즐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365일 중 365일 출근한 사람” “외동딸 생일 한번도 못 챙겨”

    “365일 중 365일 출근한 사람” “외동딸 생일 한번도 못 챙겨”

    ‘김우중의 사람들’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어떻게 기억할까. 1995~1997년 김 전 회장의 수행비서 역할을 맡았던 정인섭 한화에너지 대표는 그를 “거짓말처럼 365일 중 365일 출근했던, 한국경제를 걱정하며 살았던 기업인”이라고 10일 회상했다. ●명절엔 아프리카 등 찾아 직원 격려 정 대표는 김 전 회장에 대해 “설날과 추석 등 한국 명절에 대우그룹 계열사 현장 중에 가장 오지인 우즈베키스탄, 아프리카 같은 곳만 골라 다니며 건설현장이나 공장 직원들 가족하고 함께 보낸 분”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 스스로도 “60년 근무한 기간이 남들 일한 두 배는 됐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한 번은 김 전 회장의 딸 선정씨가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는 내 생일에 한 번도 같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정 대표가 김 전 회장에게 “일도 좋지만 따님이 한 분인데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김 전 회장은 “네가 나중에 사장이 되면 너는 애들 생일을 챙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 세대는 너무나 가진 게 없고 못살아서 가족관계까지 희생하며 노력할 수밖에 없다. 앞세대가 고생해야 뒷세대가 살 수 있다. 가족과 떨어져 리비아 사막 가서 건물 짓는 이런 아버지 세대가 있어야 그다음 자식들 터전이 갖춰지지. 그러니 너희 세대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정 대표는 이런 김 전 회장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김 전 회장은) 한 달짜리 출장을 가도 양말 3개, 속옷 3개, 와이셔츠 3개 들고 갔다”며 “비행기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을 줄이려고 짐을 최소한으로 들고 다니고 매일 저녁 양말을 손수 빨곤 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정 대표가 “빨아드리겠다고 하자 ‘내 것은 내가 할 테니 네 것부터 하라’고 할 정도로 소탈했다”며 “음식을 가리면 장사꾼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출장지에서도 가리는 것 없이 음식을 먹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경영 손뗀 뒤엔 청년 해외 진출 독려 또 다른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관계자 역시 “기업 일에서 손뗀 후 김 전 회장은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는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사업)에 애착을 가졌다”면서 “한국의 수출 위주, 내수 중심 성장만으로 한국 경제의 미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성장 모델을 따라오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가서 은퇴한 실버 계층이 산업 부흥의 경험을 나눠주고 이끌어 줘야 한다는 지론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박경리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별세

    ‘박경리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별세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이자 김지하 시인의 부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25일 별세했다. 73세. 연세대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고인은 생전 국제대, 서강대,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으며 ‘조선시대 불화연구’, ‘신기론으로 본 한국미술사’, ‘한국불교미술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73년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으며 이듬해 김 시인이 민청학련 주모자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고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기까지 옥바라지를 했다. 1980년 무렵 강원도 원주에 정착, 2008년 박 선생의 타계 이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국내 문학 발전에 힘써 왔다. 2011년에는 박경리문학상을 제정하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현대조각공원에 박 선생의 동상을 세웠다. 지난 6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박경리 문학제를 열었다. 유족으로 남편 김 시인과 2남이 있다. 빈소는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 9시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인터뷰] 이상은, 5년 만의 신보… 젊어진 음악 깊어진 위로

    [인터뷰] 이상은, 5년 만의 신보… 젊어진 음악 깊어진 위로

    가수 이상은(49)이 젊어졌다. 그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온 사람이라면 이상은이 언제 늙었던 적이 있기나 하냐고 되물을 게 뻔하다. 1988년 당시 ‘담다디’로 데뷔했을 때도, 아티스트로 변신하고 음악적인 도전을 멈추지 않은 지난 20여년도 언제나 ‘젊은’ 뮤지션이었다. 그런데 5년의 신보 ‘플로’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라도 한 듯 청춘의 풋풋함마저 느껴진다. 그야말로 그에게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최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상은은 “새 음반에 대한 주변 평가가 너무 뜨거워서 놀랄 지경”이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젊은층이 들어도 좋아할 것 같다는 반응에 “프로듀서 김기정씨의 역량”이라고 공을 돌린 그는 “젊고 능력 있는 편곡자들을 연결해 줬고 그 덕에 20대부터 40대 이상까지 골고루 좋아할 것 같은 음반이 나왔다”며 여전히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은이 전곡 작사·작곡한 음악에,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음반의 완성도를 높였다. 싱어송라이터 이규호가 청아한 속삭임 같은 첫 트랙 ‘릴렉스’를, 가수 겸 바이올리니스트 강이채가 포근한 위로를 전하는 ‘일상 노마드’와 ‘오아시스의 밤’을 편곡했다. 가수 겸 음악감독 박성도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가을 수채화’에, 이능룡(언니네 이발관)은 타이틀곡 ‘넌 아름다워’와 ‘플로’에 새로운 색깔을 입혔다. 이들은 모던록, 포크, 팝, 일렉트로니카 등 다채로운 색으로 앨범을 칠했다. 함께 작업한 이들에 대해 그는 “어린 친구들과 소통이 너무 잘되다 못해 저한테 보컬코치를 하고 선배로 보지 않더라. 귄위가 하나도 없었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의 음악은 또한 한결 편안해졌다. 실험적인 시도보다는 말 그대로 ‘힐링’에 무게를 뒀다. 데뷔 후 처음으로 가진 5년의 긴 공백기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 건강 때문에 그는 충남 공주로 가 부모님 곁을 지켰다. “외동딸로서 어릴 때 못 부리던 재롱도 부렸다”면서 쑥스럽게 웃더니 “쉬다 보니 좋은 에너지가 모이더라”고 했다. “까칠한 것도 줄고 넉살도 좋아진 것 같고. 땅도 쉬어 줘야 영양분가 모이듯, 그 5년의 영양분가 다 들어가서 오로지 활동을 위해 낸 음반보다 좋은 기운이 담긴 것 같아요.”지난해에는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팬들과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태국의 한 섬으로 떠난 여행은 팬클럽한테 끌려가다시피 갔지만 “너무나 행복한 시간”으로 남아 있다. 이상은은 “출발할 때는 30~40대였는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다들 중학교 때 얼굴로 돌아가더라”며 즐거움을 짐작하게 했다. 올해 그는 색다른 경험과 의미를 쌓고 있다. 최근에는 어린 팬들이 가입하는 일도 생겼다. ‘담다디’ 시절 활동 영상이 ‘뉴트로’ 열풍을 타고 젊은 세대에서 인기를 끌면서다. 그는 “기존 40대 팬들이 10~20대 팬들을 환영해 주면서 재미있어 한다”고 팬클럽 분위기를 전했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27관왕을 달성하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벌새’와의 협업도 화제가 됐다. 앨범 발매에 앞서 미리 공개한 ‘넌 아름다워’ 뮤직비디오는 영화 장면들을 편집해 만들었다. “영화는 전혀 모른 채 가사를 써서 넘겼는데 ‘벌새’랑 잘 어울린다고 컬래버레이션 해 보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영화를 봤더니 흡인력이 대단하더라고요. 김보라 감독도 너무 좋다고 해 주셨고 결국 GV(관객과의 대화)에도 참여하게 됐죠.” 이상은은 “내 우울함을 음악으로 보여 주면, 가사에 신비한 언어를 써 보면 치유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착각이었다”고 털어놨다. “음악을 듣고 그냥 행복해지면 그게 치유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음악으로 위로와 휴식을 주고 싶습니다.” 그는 9·10일 서울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리는 단독공연을 마치고 나면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40대 후반에 일과 휴식의 균형이 중요함을 알게 된 그가 6개월간 일에만 몰두한 자신에게 주는 휴식이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어쩌다 발견한 하루’ 김혜윤, 예서 완전히 벗었다 “청순가련 만찢녀”

    ‘어쩌다 발견한 하루’ 김혜윤, 예서 완전히 벗었다 “청순가련 만찢녀”

    MBC 새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극본 인지혜, 송하영 연출 김상협 제작 MBC, 래몽래인)가 2회 시청률 3.6%(닐슨코리아 기준, 수도권 기준)를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2일 첫 방송에서는 부잣집 외동딸에 명문고 여학생인 은단오(김혜윤 분)가 남학생들의 시선을 느끼며 도도하게 걸어가는 장면이 등장, 범상치 않은 학원 로맨스물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평범하던 일상 속에서 자꾸만 기억이 사라지고 헛것을 보는 증상을 겪던 은단오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만화 속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에 빠졌다. 그뿐 아니라 은단오는 만화책 속에 그려진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그는 사랑 듬뿍 받으며 자란 금수저에 선천적으로 약한 심장, 10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가 약혼자라는 조건 등 자신의 모든 배경이 순정만화 여자주인공의 공식과 딱 들어맞는다는 걸 깨닫고 이 상황에 적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주인공 찾기에 본격 돌입, 주변의 여러 ‘남친 후보’들을 두고 귀여운 자뻑(?)에 빠지며 안방극장에 흐뭇한 웃음을 안기기도 했다. 은단오를 둘러싼 남학생들의 ‘만찢’(만화를 찢고 나온) 비주얼도 설렘을 유발하며 시청자들의 ‘심쿵’을 이끌어냈다. 자신에게 항상 무심하게 대하지만 오랫동안 은단오가 짝사랑해온 약혼자 백경(이재욱 분), 장난기 넘치고 애교 많은 성격으로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도화(정건주 분), 스리고 A3의 리더이자 서열 1위로 남자주인공 공식에 딱 들어맞는 오남주(김영대 분) 등 ‘남자주인공 후보’들이 추려지자 은단오는 누가 자신의 운명의 상대일지 상상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덩달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2회 말미에 뜻밖의 반전이 드러나 놀라움을 자아냈다. 당연히 주인공인 줄로만 은단오는 사실 스토리 속 엑스트라에 불과했고, 줄곧 그에게 도움을 받아온 여주다(이나은 분)와 오남주가 각각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었던 것. 자신의 행동이 두 사람의 러브라인을 위해 작가가 정해 놓은 설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은단오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또 주인공에게만 향하는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암전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초라한 모습은 반전을 극대화시키며 안방극장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처럼 첫 회부터 독특한 소재와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을 그려낸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청춘스타들의 독보적 케미스트리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원작의 스토리에 풍부함을 더한 인지혜, 송하영 작가의 완성도 높은 대본과 다소 복잡한 만화 속 세상을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풀어낸 김상협 감독의 연출력은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우며 극의 재미를 더했다. 특히 전작 ‘SKY캐슬’ 예서의 ‘전교 1등’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해 사랑스러운 여고생 은단오 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김혜윤의 연기력에 호평이 이어졌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방송 내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 키워드를 장악하며 10대, 20대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특히 기존의 ‘전교 1등’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해 사랑스러운 여고생 은단오 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김혜윤의 연기력에 호평이 이어졌다. 이날 방송될 3, 4회에서는 이름 없는 소년 ‘13번’(로운 분)의 등장도 예고돼 눈길을 끈다. 진부한 스토리와의 결별을 선언한 전무후무 청춘 로맨스의 탄생에 시청자들의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3일 오후 8시 55분에 3, 4회가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눈부신 웨딩드레스” 황지현, 연상의 사업가와 10월 결혼 [공식]

    “눈부신 웨딩드레스” 황지현, 연상의 사업가와 10월 결혼 [공식]

    배우 황지현이 10월의 신부가 된다. 소속사 브룸스틱 측은 20일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황지현의 결혼 소식을 전했다. 황지현은 오는 10월 3일 일산에서 연상의 사업가 예비 신랑과 웨딩 마치를 울린다. 두 사람은 오랜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다. 황지현의 결혼식은 가족과 친지,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하여 일산의 한 교회에서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다. 황지현은 소속사 브룸스틱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아름다운 약속을 하려 한다. 언제나 아름답고 주위에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축복해주시고 지켜봐달라”며,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감사드린다. 앞으로 배우로서 더 좋은 연기로 보답하겠다”라고 결혼을 앞둔 소감을 전했다. 브룸스틱 측은 “배우 황지현이 오는 10월 3일, 사랑하는 연인과 백년가약을 맺는다”라며 “좋은 인연을 만나 인생의 제 2막을 앞두고 있는 두 사람에게 따뜻한 축복을 보내주시기 바라며, 앞으로도 브룸스틱은 황지현이 배우로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황지현은 고교생 CF 스타에서 배우, 뮤지컬무대까지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다 7년간의 공백을 깨고 최근 방송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지난 2월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6’에서 미스터리 싱어로 출연, 거미, 박정현과 최종 무대를 소화하며 가수 못지않은 가창력으로 눈길을 끈 데 이어 SBS 일일극 ‘강남스캔들’에서 패션 기업 오너의 외동딸 강한나로 분해 러브라인의 한 축을 담당하며 갈등을 증폭시키는 캐릭터로 열연, 분야를 넘나들며 종횡 무진하고 있다. <배우 황지현 결혼 관련 브룸스틱 공식 입장> 안녕하세요. 브룸스틱입니다. 소속 배우 황지현 결혼 관련 공식 입장을 전해드립니다. 배우 황지현이 오는 10월 3일, 사랑하는 연인과 백년가약을 맺습니다. 예비신랑은 연상의 사업가로, 오랜 지인으로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여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황지현의 결혼식은 가족과 친지,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하여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 인생의 제 2막을 앞두고 있는 두 사람에게 따뜻한 축복을 보내주시기 바라며, 앞으로도 브룸스틱은 황지현이 배우로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세 옛 절의 향기는 여전… 정릉시대 구가하던 문예촌은 흔적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1차 정릉천 따라’ 편이 추석 다음날인 지난 14일 성북구 정릉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추석 연휴 주말을 북한산의 맑은 계곡물이 쏟아지는 정릉천에서 보냈다. 참가자들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북한산보국문역에 집결, 경국사에 들어가 고찰의 향기를 즐겼다. 주말이라 문을 열지 않는 명원민속관(한규설 가옥)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정릉천변은 1950~1970년대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정릉시대’를 구가하며 살던 ‘문예촌’이었다. 화가 이중섭·박고석·한묵·박세원·김병기, 소설가 박경리·박화성·박연희·박계주·최정희·계용묵, 시인 고은·조영암·신경림, 조각가 최만린, 작곡가 금수현·김대현, 극작가 차범석, 시사만화가 김성환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린 주부 참가자들에게 피로를 씻어 주는 해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정릉 박경리 가옥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박경리 가옥’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있고, 담벼락에 그려진 해바라기 그림과 책 표지가 길손을 안내한다. 그러나 ‘보국문로 29가길 11’이라는 도로명주소판이 붙은 집엔 서글프게도 ‘박경리’ 문패가 아니라 ‘서울 정릉 발도르프학교’라는 낯선 대안학교 간판이 걸려 있다.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지만 서울시가 예산 부족으로 매입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가자들은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을 자꾸 서성거렸다. 정비석의 ‘자유부인’ 속 댄스장이자 고급 요정이었고, 한때 신혼여행지였던 옛 청수장을 개조해 사용하는 북한산탐방안내소에 들어가 과거의 영화를 떠올렸다. 북한산 정릉골은 1971년 북악터널이 개통된 뒤 2007년 내부순환도로 국민대입구 램프가 추가 개통되기 전까지도 백악산~보현봉 자락이 장벽처럼 막아서서 개발의 손길을 거부하는 청정의 숲이었다. 청수장으로 대표되는 정릉유원지는 추억과 안식의 공간이었다. 정릉천을 따라 청수장으로 가노라면 경국사가 나타난다. ‘경국사적기’에 따르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청봉 아래에 있다고 해서 청암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릉의 옛 지명이 ‘살을 에듯 추운’ 사을한리이고, 정릉천이 청수라고 불리고, 청수장이 정릉유원지의 랜드마크가 된 배경에는 모두 청봉이라는 자연 지명의 힘이 작용했다. 청암사는 1546년(명종 1년) 문정왕후가 사찰을 중창하면서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경국사라고 개명했다. 1669년(현종 10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흥천사, 봉국사와 함께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지정돼 부흥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정릉이라는 능이 사라졌다가 260년 만에 부활한 것처럼 능을 지키는 3개 원찰의 이름이 모두 바뀌는 변고를 겪었다. 봉국사는 본래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사였지만 현종 때 ‘나라를 받든다’는 봉국사로 개명해 명맥을 이었다. 또 1409년 정릉이 정동을 떠나 정릉동으로 이장됐을 때 신흥암이라는 암자를 신흥사로 개창, 원찰로 삼았는데 1865년 흥선대원군이 흥천사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이름을 바꿨다.조계종 본산 흥천사는 신덕왕후가 처음 묻혔던 지금의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던 170여칸 규모의 대가람이었다. 태조가 죽은 지 9년 만에 능이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되고, 1510년 유생들이 이단을 없애 버린다며 불을 질러 폐사의 비운을 맞았다. 흥천사 종은 덕수궁에 남아 있다. 태종 이방원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만 모시고, 계모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방원의 앙갚음에 정릉동 정릉은 황폐화했다. 172년이 흐른 1581년(선조 14년) 신덕왕후의 후손인 강순일이 군역을 면제받고자 상소를 올린 것을 계기로 조정에서 정릉의 위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았다. 1669년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종묘에 배향되고, 능의 위상을 되찾았다. 정릉을 개수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소낙비가 내려 정릉골을 흠뻑 적셨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비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준 ‘세원우’라고 반가워했다. 조선의 사실상 첫 왕후인 신덕왕후를 모신 정릉 흥천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종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흥천사는 조선 첫 왕비와 마지막 왕비가 동시에 깃든 기구한 운명의 장소다. 정릉의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박고석이었다. 1955년 정릉에 자리잡은 박고석을 따라 부산 피난 시절 삼총사를 이뤘던 이중섭, 한묵이 가세했고, 청수장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집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이중섭이 죽자 유골은 삼등분됐는데 일부는 일본의 부인(이남덕)에게 보내고, 또 일부는 시인 구상에 의해 망우리 묘지로 갔다.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뿌려졌다. 북한산행의 기점 청수장은 1910년대에 세워져 일본인 별장으로 이용되다가 1945년 해방 뒤 민간인이 인수해 사용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엔 특수부대 훈련 숙소로 사용됐다. 그 후 고급 요정 ‘청수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댄스홀로 등장한다. 1974년 이후 제법 기품 있는 음식점,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3년 4월 2일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에 편입됐다. 개축 공사를 거쳐 2001년부터 북한산탐방안내소로 바뀌었다. 유럽풍 카페를 연상케 하던 청수장 본관만 남겨 두고 등산로와 맞닿아 있던 담과 부속 건물은 허물어 아담한 정원으로 꾸몄다.1950년대 후반 돈암동 셋방에 살던 박경리(1926~2008)는 1965년부터 2002년까지 정릉동 골짜기 집에 머물렀다. 이 집에서 1969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장편 대하소설 ‘토지’ 집필을 시작했다. 1980년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강원 원주로 이사할 때까지 삶의 터전이었다. 이웃사촌 박고석이 삽화를 그린 ‘노을진 들녘’은 1961년 10월부터 연재를 시작해 총 250여회를 이어 나갔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출간한 뒤 대표작 토지 1부 집필에 들어갔다. 정릉은 그의 대표작들이 잉태되고, 외동딸 김영주의 연애와 결혼이 이뤄진 행복한 장소였지만 고통도 담긴 곳이다. 피신해 있던 사위가 체포된 정릉 집은 차라리 유배지였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선생은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사위는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고/우리 식구는 기피 인물로/유배지 같은 정릉에서 살았다/천지간에 의지할 곳이 없이 살았다/수수께끼는/우리가 좌익과 우익의 압박을 동시에 받았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인간이 얼마만큼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뼈가 으스러지게/눈앞에서 보아야 했던 세월/태평양 전쟁 육이오를 겪었지만/그런 세상은 처음이었다/악은 강렬했고 천하무적이었다/아 참, 그 얘기는/저승에나 가서 풀어놔야지/그 끔찍한 사실들을/측천무후인들 믿을 것인가”라고 절규했다. 정릉시대의 쓰라린 편린이다.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이 없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기파랑, 2017년 간)에 실린 김형국의 ‘박경리, 포한이 원력이던 소설문학’에 따르면 “이전에 무덤 앞 상석에 당신 필체로 ‘박경리’라고 성명 석 자만 달랑 새겼다던데 나중에 다시 가족이 당신 이름도 빼고 그냥 민짜 상석을 놓아 달라 했단다. 고사로 치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를 말함이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썼다. 실제 통영 박경리기념관 선생의 묘소에는 상석 하나만 달랑 놓여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제22차 서울의 문학3(윤극영의 반달) ■일시 및 집결장소 : 9월 21일(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 구내 ■신청(무료)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1920년대 초 심산(心山) 김창숙이 중국 베이징 우당(友堂) 이회영 집에 찾아갔더니 그의 얼굴이 매우 초췌해 보였다. 심산이 “공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고 했더니 우당은 거절했다. 우당의 아들 규학이 말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치로 600억원대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은 죽는 날까지 빈곤과 싸우며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런 우당을 평생 뒷바라지한 사람이 부인 이은숙 여사다.이은숙은 1889년 8월 8일 충남 공주에서 고려 말 충신 이색의 후손인 한산 이씨 진규공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달성 서씨와 사별한 우당과 1908년 10월 상동예배당에서 혼례를 치렀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10대손인 우당은 노비를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들을 개가시키며 마흔 넘은 나이의 결혼식도 신식으로 치를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우당 6형제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해 1910년 12월 30일 모든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선택한 고행의 시작이었다. 이은숙과 출가한 딸까지 일족이 마차 10여 대를 타고 만주 벌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유하현 추지가였다. 우당 형제들은 먼저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을 지도하기 위한 경학사를 조직했다. 1911년 5월에는 광복군 양성의 본산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몇 해 만에 그 많은 재산도 바닥이 드러났고 곤궁한 생활이 시작됐다. “농사는 강냉이와 좁쌀, 두태(콩팥)고 쌀은 2,3백 리나 나가 사오는데 제사에나 진미를 짓는다. 어찌 쌀이 귀한지 아이들이 이름 짓기를 ‘좋다밥’이라고 하더라.”(이은숙, ‘서간도 시종기’)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져 놓은 다음 우당은 1913년 조선으로 잠입했다. 자금 마련 말고도 우당은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주에 남은 식구는 열셋이나 되었는데 양식은 강냉이밖에 없었다. “강냉이를 따서 3주가 되면 그걸 연자에 갈면 겨 나가고 쌀이 두 말도 못 되니 며칠이나 먹으리오.” 설상가상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 이은숙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남았다. 우당이 조선에서 체포된 소식이 전해졌다. 이은숙은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혼자 몸으로 대식구의 생계를 보살피는 고난의 세월을 이어갔다. 와중에 홍역으로 우당의 형 이석영의 큰아들이 사망하고 이은숙까지 같은 병으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이중고, 삼중고를 당했다. 우당이 돌아오지 않자 1917년 이은숙은 아들, 딸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고종이 승하하자 우당은 중국 베이징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이은숙도 곧이어 아이들을 데리고 따라갔다. 고난의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 우당의 집은 독립운동 본부이자 사랑방이었다. 우국 지사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좁은 집에 함께 지냈다. 어려운 살림의 책임은 이은숙에게 있었다. 적게는 10명 많게는 40여 명이 우당 집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세가 싼 집을 찾아 이사한 것도 1년에 수십 번이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 남편을 스승처럼 극진히 섬겼다. 1~2년은 동지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견뎠지만, 그 후 지원이 끊겨 먹을 양식이 없었다. 신분을 숨기고 지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돈을 벌 수도 없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絶火·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로다.” 만석꾼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기아를 겪게 된 것이다. 이은숙은 굶주리는 남편을 보고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 마음이 아팠다.우당은 그즈음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이을규 형제, 백정기, 정화암 등과 먹으며 굶으며 함께 생활했다. 단재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도 여전히 드나들었다. “짜도미라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나 사다 먹는 것으로…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것으로 연명하니…” 사정을 잘 아는 정화암 등은 약간의 돈을 주면서 “선생님 진지는 쌀을 사다 해 드리고 우리는 짜도미 밥도 좋으니 그것을 먹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에 김달하 사건이 터졌다. 김달하는 겉으로는 애국지사인 양 행동했지만, 사실은 밀정이었다. 그런데 김창숙이 우당을 김달하와 한패인 것으로 잘못 알고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은숙은 칼을 품고 찾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결기였다. 오해는 풀렸고 김달하는 항일 테러단체 다물단이 처단했다. 우당의 딸 규숙도 처단에 연루돼 근 1년 동안 중국 공안국에 구금당했다. 와중에 아들 규학의 딸 둘과 우당의 아들이 성홍열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언제나 굶는 극한의 빈곤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당과 아들, 딸을 베이징에 남겨두고 이은숙은 궁여지책으로 돈을 마련하고자 귀국했다. 1925년 여름이었고 임신한 몸이었다. 그 길이 우당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은숙은 귀국하자마자 다소간의 돈을 변통해 우당에게 보내주었다. 출산한 작은아들 규동을 품에 안고 친척집을 떠돌며 베이징 가족의 생계부터 먼저 생각했다.우당은 만주에 재만조선민주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또 톈진으로 가 아나키스트들과 파괴공작을 도모했다. 1926년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우당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상하이로 갔다.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두 딸은 빈민구제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도적을 만나 행장을 다 잃는 변을 당해 다시 톈진으로 돌아왔다. 우당은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연명했지만, 끼니를 거르기는 다반사였다. 국내에 있던 이은숙도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고무공장에 취직해 다니고 삯바느질과, 심지어 사대부 집안 딸의 몸으로 유곽집 삯 빨래를 하며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버는 대로 우당에게 보냈다. 굶으면서도 우당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상하이로 가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한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이어서 만주로 다시 가서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고자 했다. 여러 사람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다롄에서 배를 타고 가려다 해상에서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우당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했다. 65세 노인의 몸이었다. 일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12일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의 명백한 고문사였다. 딸 규숙이 우당의 신체를 봤는데 눈을 뜨고 있었고 안면에 선혈이 낭자했으며 중국식 의복에도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일생의 몸을 광복운동에 바치시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만고풍상을 무릅쓰고 다만 일편단심으로 ‘우리 조국, 우리 민족’ 하시고 지내시다가 반도 강산의 무궁화꽃 속에서 새 나라를 건설치 못하시고 중도에서 원통 억색히 운명이 되시니 슬프도다.” 비통한 심정을 이은숙은 축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은숙은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보고 1979년 12월 11일 90세에 서울에서 작고했다. 정부는 우당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은숙에게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꽃파당’ 고원희의 열일 행보 “이번엔 조선시대 신여성”

    ‘꽃파당’ 고원희의 열일 행보 “이번엔 조선시대 신여성”

    고원희의 열일 행보가 반갑다.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에서 조선시대 신여성 캐릭터로 색다른 연기를 선보일 예정이기 때문. JTBC 새 월화드라마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극본 김이랑, 연출 김가람, 제작 JP E&M, 블러썸스토리)에서 조선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되고 싶은 강지화 역을 맡은 고원희. 먼저 “완성도 높은 대본과 존경하는 감독님, 좋은 배우 분들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고 현장의 즐거움이 시청자분들께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소감으로 운을 뗐다. 코믹함과 진중함을 넘나들며 맡은 캐릭터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고원희가 차기작으로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사극이 가진 매력에 있었다. “첫 장편 드라마 데뷔가 사극이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였는데 마침 기회가 주어진 것 같아 주저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 이어 “무엇보다 탄탄하고 재밌는 대본과 지화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며 운명처럼 만난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고원희가 연기할 지화는 좌의정의 외동딸로 웬만한 사내들보다 학식이 깊고 살림에도 능하다. 너무 뛰어난 배경과 능력에 따라오는 콧대 높은 자존감이 유일한 단점일 정도. “지화는 야망 넘치는 여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의존하기보다는 스스로 그 자리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인물”이자 “조선 시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신여성”이라는 고원희의 설명은 조선의 프로야망러로 도도한 매력을 떨칠 지화의 이야기에 궁금증과 기대감을 동시에 상승시켰다. 하지만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지화에게도 남모를 상처가 있다. “항상 정갈하고 겉으론 완벽해 보이지만, 감정적으론 미성숙한 인물”인 지화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보다 섬세하게 캐릭터에 접근하고 있다고. “늘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채찍질만 하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 친구도 없다”는 그녀의 설명처럼 지화는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른 인물이기 때문. 이를 위해 “절제되어있지만 속은 요동치는, 그 디테일한 감정 연기에 중점을 두었다”는 연기 포인트가 어떻게 지화 캐릭터에 녹아들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또한, “최근 작품들에서 다소 빠른 템포의 연기를 보여드렸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정반대로 차분하고 무게 있는 연기를 보여드릴 예정”이라고 밝혀 매번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고원희의 또 다른 모습을 기대케 했다. 더불어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또 다른 메시지가 있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소확행’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조금은 각박한 일상에서 벗어나 ‘꽃파당’과 만나는 시간만은 즐거움과 행복함이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이 담긴 바람을 전했다. ‘조선혼담공작소 꽃파당’은 여인보다 고운 꽃사내 매파(중매쟁이) 3인방, 사내 같은 억척 처자 개똥이, 그리고 첫사랑을 사수하기 위한 왕이 벌이는 조선 대사기 혼담 프로젝트. ‘열여덟의 순간’ 후속으로 오는 9월 16일 월요일 밤 9시 30분 JTBC에서 첫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어쩌다 발견한 하루’ 김혜윤♥로운, 만화 속 로맨스 “심쿵 투샷” 공개

    ‘어쩌다 발견한 하루’ 김혜윤♥로운, 만화 속 로맨스 “심쿵 투샷” 공개

    배우 김혜윤과 로운이 MBC 새 수목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통해 청춘 커플로 변신한다. ‘신입사관 구해령’ 후속으로 방송되는 ‘어쩌다 발견한 하루’가 김혜윤(은단오 역)과 로운(13번 역)의 투샷이 담긴 스틸 사진을 공개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여고생 은단오(김혜윤 분)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을 이뤄내는 본격 학원 로맨스 드라마다. 김혜윤과 로운은 만화 속이라는 독특한 배경과 캐릭터 설정 속에서 독보적인 케미스트리를 발산하며 학원 판타지 로맨스의 새 지평을 열 것을 예고하고 있다. 김혜윤은 극 중 부잣집 외동딸이자 선천적인 심장병을 지닌 여고생 은단오 역을 맡아 활약할 예정이다. 어느 날 자신의 주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각한 은단오는 자신이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 만화 속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자신의 진짜 삶과 사랑을 찾기 위해 모험을 시작, 그 과정에서 13번(로운 분)을 만나며 두근두근 설렘을 부르는 심쿵 로맨스를 펼쳐 나간다. 특히 은단오가 이름 없는 캐릭터인 13번을 만나 의문의 실마리를 어떻게 하나하나 풀어 나갈지, 진정한 사랑과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증과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아름다운 배경 속 그림 같은 투샷으로 만화 속 한 페이지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김혜윤과 로운의 모습이 담겼다. 특히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로운과 아담한 체구로 귀여운 매력이 배가되는 김혜윤의 모습이 대비되며 역대급 피지컬 케미스트리를 자랑하는 커플로 눈길을 끌고 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오는 9월 방송 예정이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탈당… 건국 참여 -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빨갱이로 헐뜯는 것 볼까 봐 기사 댓글 못 읽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진보당 사건’ 압수수색으로 자료 사라져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60주기에 죽산정신 계승 청년들 참석 뜻깊어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