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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 존망 위기 어찌 몸 아끼랴”…육순 老시인 구국 순절의 칼[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국가 존망 위기 어찌 몸 아끼랴”…육순 老시인 구국 순절의 칼[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고경명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바람을 읊고 이슬을 날리며 은하수를 뛰어넘고 안개를 올라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도성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그에게 의병을 모으기 위한 격문(檄文)을 요청했다. 고경명은 그만큼 대(大)문장가인 동시에 호남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고경명의 간절하면서 감동적인 격문은 이르는 곳마다 뜻있는 사람들의 궐기를 이끌었다. 60세 노(老)시인은 붓을 쥐던 손에 칼을 잡고 의병장이 됐다. ●간절하고 감동적인 마상격문 ‘임진년 6월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 도 수령과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급히 통고한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몸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강 한복판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것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마상격문(馬上檄文)의 한 대목이다.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전라도 21개 지역 61명의 사림 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된다. 6월 1일 한양을 향해 출발한 6000명의 호남의병은 전주에 이르렀을 무렵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고자 훈련을 하며 잠시 머무른다. 고경명이 다시 북상을 시작하면서 6월 24일 지은 것이 마상격문이다. 글자 그대로 ‘말 위에서 지은 격문’이라는 뜻이니 그만큼 급박한 위기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고경명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고 마상격문에 적은 그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왜적을 공격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전라도 광주 제봉산 아래 압보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가 있다. 1601년 세웠고, 1603년 사액됐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사우 철폐령에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살아남았다.포충사는 지금 로제와인색 배롱나무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포충사가 자리잡은 제봉산은 해발고도 165.5m로 높지 않지만 나지막한 곡선이 아름답다. 짐작처럼 제봉이라는 고경명의 아호는 이 고향 마을의 뒷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고경명의 무덤이 있는 전남 장성 영천리의 오동촌 뒷산 역시 제봉산이다. 장성 제봉산은 고경명의 무덤이 옮겨진 뒤 그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 제봉의 정기가 고경명을 낳고 다시 그의 의기가 장성 제봉에 이식된 셈이다. ●“시 가운데 그림이” 明도 인정한 시인 고경명은 26세이던 1558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에 이어 홍문관 부교리, 부수찬, 교리에 이르는 5년 동안은 평탄하게 승진했다. 하지만 당대 대표적 외척의 한 사람인 이량이 사림의 탄핵으로 실각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량의 전횡을 논죄하는 데 참여한 제봉은 관련 정보를 당사자에게 유출했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곤 곧 파직됐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조정에서 쓰임을 받지 못했다. 대신 낙향한 제봉은 호남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산수를 유람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시인으로 크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으로 향리에서 한가롭게 머물던 시절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봉은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곧바로 종계변무주청사 김계휘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書狀官)이란 외교 문서의 기록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당대 명나라 문신 장응회(莊應會)는 고경명의 시를 두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는 것 같아서 원진(元)·백거이(白居易)·위응물(韋應物)·유우석(劉禹錫)과 비교해 명나라와 조선의 표준을 세울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봉의 시가 명나라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고경명은 이후 서산군수와 종부시 첨정, 한산군수, 사복시 첨정,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에 임명됐지만 곧 파직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임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듬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수성전(守城戰)을 벌이다 전사한다.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제봉은 임진년 초 “올해는 장성(將星)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장수(將帥)가 이롭지 못하겠다”며 국가의 환란을 예고했다. 장성은 북두칠성의 두 번째 별 천선(天璇)을 가리킨다. 고경명이 추성관 추대 직후 지은 격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나는 경전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한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무릇 우리 도내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격문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해 울면서 분연히 궐기했다. 고경명이 개연히 의병장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고경명은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 보고와 함께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서해 뱃길로 조정에 전달토록 한다. 의병군은 6월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긴 데 이어 27일 은진으로 북상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황간·영동의 왜적이 금산을 점령한 데 이어 장차 곡창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를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휘하 장수들이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을 정벌하자고 다투어 청하자 제봉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군사를 돌린다. 의병은 9일 진산을 거쳐 금산성의 초입에서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당시 금산의 왜군은 전주를 공격하려다 이치에서 황진 장군의 조선군에 크게 패하자 물러나 금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금산 전투의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때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동틀 무렵 고경명은 다시 곽영과 군사를 진격시켜 각각 북문과 서문을 공격했다. 왜적이 군사를 총동원해 약해 보이는 관군진영을 공격하니, 관군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고 의병도 대오가 무너지며 흩어졌다. 이때 제봉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이 자기 말을 타게 하고는 걸어서 따라갔다. 또 다른 종사관 유팽로는 대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수정실록은 이들의 최후를 이렇게 적었다. ‘이에 경명이 팽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고는 안영과 함께 경명을 에워싸고 있다가 모두 전사했다. 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큰아들 고종후는 복수군(復讐軍)을 조직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해 순절한다. 고경명의 시신은 40일 만에 찾아 금산 산중에 묻었다가 10월 화순 흑토평에 장사지냈고, 1609년 3월 임금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인 장성 오동촌 산 아래로 이장했다.
  • 대(大)시인, 붓대신 칼을 들어 국가를 보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대(大)시인, 붓대신 칼을 들어 국가를 보전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고경명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사람이다. 그의 시는 ‘바람을 읊고 이슬을 날리며 은하수를 뛰어넘고 안개를 올라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도성을 점령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그에게 의병을 모으기 위한 격문(檄文)을 요청했다. 고경명은 그만큼 대(大)문장가인 동시에 호남을 대표하는 지성이었다. 고경명의 간절하면서 감동적인 격문은 이르는 곳마다 뜻있는 사람들의 궐기를 이끌었다. 60세 노(老)시인은 붓을 쥐던 손에 칼을 잡고 의병장이 됐다. ‘임진년 6월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 도 수령과 백성들과 군인들에게 급히 통고한다.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 국방이 튼튼치 못한 틈을 타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경명은 비록 늙은 선비지만 나라에 몸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강 한복판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자기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마상격문(馬上檄文)의 한 대목이다. 고경명은 1592년 5월 29일 담양 추성관에서 전라도 21개 지역 61명의 사림 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라좌도 의병장에 추대된다. 6월 1일 한양을 향해 출발한 6000명의 호남의병은 전주에 이르렀을 무렵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을 판단하고자 훈련을 하며 잠시 머무른다. 고경명이 다시 북상을 시작하면서 6월 24일 지은 것이 마상격문이다. 글자 그대로 ‘말위에서 지은 격문’이라는 뜻이니 그만큼 급박한 위기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고경명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어찌 감히 하찮은 제 몸만을 아끼려고 하겠느냐’고 마상격문에 적은 그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왜적을 공격하다 장렬하게 순절한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전라도 광주 제봉산 아래 압보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이다. 이곳에는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종사관 유팽로와 안영을 기리는 포충사(褒忠祠)가 있다. 1601년 세웠고, 1603년 사액됐다. 1865년 대원군의 서원·사우 철폐령에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살아남았다. 포충사는 지금 로제와인색 배롱나무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포충사가 자리잡은 제봉산은 해발고도 165.5m로 높지 않지만 나지막한 곡선이 아름답다. 짐작처럼 제봉이라는 고경명의 아호는 이 고향마을의 뒷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고경명의 무덤이 있는 전남 장성 영천리의 오동촌 뒷산 역시 제봉산이다. 장성 제봉산은 고경명의 무덤이 옮겨진 뒤 그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광주 제봉의 정기가 고경명을 낳고 다시 그의 의기가 장성 제봉에 이식된 셈이다.  고경명은 26세이던 1558년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에 이어 홍문관 부교리, 부수찬, 교리에 이르는 5년동안은 평탄하게 승진했다. 하지만 당대 대표적 외척의 한 사람인 이량이 사림의 탄핵으로 실각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량의 전횡을 논죄하는 데 참여한 제봉은 관련 정보를 당사자에게 유출했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곤 곧 파직됐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조정에서 쓰임을 받지 못했다. 대신 낙향한 제봉은 호남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며 산수를 유람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시인으로 크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역설적으로 향리에서 한가롭게 머물던 시절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봉은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곧바로 종계변무주청사 김계휘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書狀官)이란 외교 문서의 기록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당대 명나라 문신 장응회(莊應會)는 고경명의 시를 두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는 것 같아서 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위응물(韋應物)·유우석(劉禹錫)과 비교해 명나라와 조선의 표준을 세울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제봉의 시가 명나라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고경명은 이후 서산군수와 종부시 첨정, 한산군수, 사복시 첨정,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에 임명됐지만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임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듬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에 맞서 영웅적으로 수성전(守城戰)을 벌이다 전사한다.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제봉은 임진년 초 “올해는 장성(將星)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장수(將帥)가 이롭지 못하겠다”며 국가의 환란을 예고했다고 한다. 장성은 북두칠성의 두번째 별 천선(天璇)을 가리킨다.고경명이 추성관 추대 직후 지은 격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나는 경전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한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무릇 우리 도내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신경(1613~1653)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격문이 이르는 곳마다 사대부들이 감격해 울면서 분연히 궐기했다. 고경명이 개연히 의병장에 올라 늙고 병든 것을 사양치 않으니, 응모하는 자가 날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고경명은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 보고와 함께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서해 뱃길로 조정에 전달토록 한다. 의병군은 6월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긴 데 이어 27일 은진으로 북상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는데 황간·영동의 왜적이 금산을 점령한 데 이어 장차 곡창 호남의 심장부인 전주를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휘하 장수들이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을 정벌하자고 다투어 청하자 제봉은 당초 계획을 바꾸어 7월 1일 연산으로 군사를 돌린다. 의병은 9일 진산을 거쳐 금산성의 초입에서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당시 금산의 왜군은 전주를 공격하려다 이치에서 황진 장군의 조선군에 크게 패하자 다시 물러나 금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금산 전투의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때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과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동틀 무렵 고경명은 다시 곽영과 군사를 진격시켜 각각 북문과 서문을 공격했다. 왜적이 군사를 총동원해 약해 보이는 관군진영을 공격하니, 관군 선봉장인 영암군수 김성헌이 말을 채찍질해 먼저 도망치자 관군이 크게 패했고 의병도 대오가 무너지며 흩어졌다. 이때 제봉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자 종사관 안영이 자기 말을 타게 하고는 걸어서 따라갔다. 또다른 종사관 유팽로는 대장이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에 말을 채찍질해 어지러운 군사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수정실록은 이들의 최후를 이렇게 적었다. ‘이에 경명이 팽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했다. 팽로가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하고는 안영과 함께 경명을 에워싸고 있다가 모두 전사했다. 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도 달려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큰아들 고종후는 복수군(復讐軍)을 조직해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해 순절한다. 고경명의 시신은 40일만에 찾아 금산 산중에 묻었다가 10월 화순 흑토평에 장사지냈고, 1609년 3월 임금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인 장성 오동촌 산 아래로 이장했다.
  • ‘우리말글 말살’VS‘공용화와는 달라’…부산 영어 상용화 논란

    ‘우리말글 말살’VS‘공용화와는 달라’…부산 영어 상용화 논란

    부산시가 추진하는 ‘영어 상용화 도시’ 조성에 대해 국어단체가 “우리 말과 글을 말살하는 정책”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하며 즉각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시는 영어 사용을 강제하는 ‘공용화’와는 다르다며 논란 진화에 나섰다. 한글문화연대 등 76개 국어단체와 34개 부산지역 시민단체는 29일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영어 상용화 도시 조성 정책을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부산시의 영어 상용화 정책을 두고 “억지 영어 사용 환경을 조성해 영어 능력을 키우겠다는 발상은 시민에게 불편을 주고 짜증을 안길 뿐이다”면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려고 우리 시민에게 불편을 감내하라는 것은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부산시의 영어 상용화 도시 조성 정책은 박형준 부산시장의 공약으로 ▲영어 공교육 혁신 ▲시민 영어역량 강화 ▲영어 상용 환경 조성 ▲공공부문 영어 상용 선도 등 4가지 전략으로 추진된다. 시민이 영어를 배우기 활용하고 쉬운 환경, 외국인이 부산에서 업무를 보거나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국어 단체는 “부산시가 영어마을을 다섯 곳이나 운영하고, 어린이 복합 문화공간인 ‘들락날락’을 영어 체험장으로 삼겠다고 하는데, 어린이에게 공부 부담을 안기고 조기 영어교육 열병을 퍼트릴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또 공공기관이 영어 사용에 앞장서는 데 대해 “서울 서초구가 2008년 공무원 영어회의를 추진했다가 행정 업무의 기획과 추진에 방해가 돼 이미 실패한 실험으로 끝났다. 영어 상용도시 정책은 영어 남용도시로 귀결될 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부산시는 영어 상용도시 조성 정책은 모든 소통과 문서 작성을 영어로 하는 ‘영어 공용도시’와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영어 상용화 정책은 한국어 사용을 기본으로 하고, 특정한 환경에서만 영어를 추가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둔 정책이라는 설명이다. 공문서의 영어 병기는 외국인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시정 홍보자료나 투자유치과, 외교통상과 등 외국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제한된 부서에서 생산하는 문서에만 시행한다고 밝혔다. 시는 최근 영어상용화추진 전담팀을 구성했고, 부산시교육청과 협의해 전문가 지원단을 구성할 계획이다. 또 영어 상용화 도시 관련 세부 추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 용역에 이달 중 착수할 계획이다. 이윤재 청년산학국장은 “다른 지자체에서 추진했던 정책을 참고해 영어 상용화 정책의 대상과 활용 범위 등을 신중하게 고민하겠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도 함께 만들어가는 등 한글과 더불어 가는 영어 상용화 정책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 박진 “한중 인적교류 회복해야”… 왕이 “디커플링 함께 반대해야”

    박진 “한중 인적교류 회복해야”… 왕이 “디커플링 함께 반대해야”

    한중 양국이 미중 패권 경쟁과 북핵, 대만해협 위기 등 여러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맞은 수교 30주년 기념식에서 소통 및 협력 강화를 선언하며 결속력 다지기에 나섰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이웃’이자 지역 안보 공동체로서 서로의 필요성을 재차 확인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서울 포시즌스호텔에서 주한 중국대사관이 주최한 한중 수교 30주년 공식행사 축사를 통해 “과거 제조업 중심의 상호보완적 분업 협력이 미래 첨단 분야 호혜적 경쟁으로 구조적인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며 “한중 관계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지혜와 통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박 장관은 한중 관계가 격화된 미중 전략경쟁, 미러 갈등 등의 영향권 아래 놓인 상황을 가리키며 “‘탈냉전의 격변기’에서 30년이 지난 세계는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안보·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박 장관은 한중 경제협력을 질적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전략적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적교류 역시 “1000만명 회복은 물론 2000만명 시대를 함께 열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 장관은 축사의 일부를 중국어로 하고 중국어 건배사도 제안했다. 참석자들은 케이크 커팅을 한 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찬을 함께 했다. 같은 시간 베이징 댜오위타이 17호각 팡페이위안에서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가 주최한 수교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당시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과 천치첸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문서에 서명한 상징적인 장소다.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축사에서 공자의 ‘삼십이립’(三十而立)을 인용하며 “사람이 서른살이 되면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는 기개를 가져야 하듯 중한 관계도 그렇게 발전해야 한다”며 “우리는 일관되게 상호 융합을 추진해 중한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하고, 첨단 제조, 빅데이터, 녹색 경제 등 분야에서 협력을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디커플링에 함께 반대하고 자유무역체계를 함께 지키며 공급망의 완전성과 개방성을 함께 수호해야 한다”며 미중 갈등을 겨냥한 듯한 언급도 했다.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와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도 수교 30주년 기념 축전을 교환했다. 양국의 전직 정부 인사, 학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한중 관계 미래발전위원회는 앞서 이날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한중 고위급 대화 ▲군사 분야 전략적 소통 강화 ▲신산업 분야 협력 등을 제안했다.
  • 프놈펜 외교장관회의서 만난 남북…“조건 없는 대화” “여건 조성 먼저”

    프놈펜 외교장관회의서 만난 남북…“조건 없는 대화” “여건 조성 먼저”

    박진 외교부 장관이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가 열린 캄보디아에서 북한 안광일 주아세안대표부 대사 겸 주인도네시아 대사를 만나 “조건 없는 남북 대화”를 제안했다. 안 대사는 ‘여건 조성이 먼저’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6일 외교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박 장관은 앞서 4일 캄보디아 프놈펜 츠로이 창바 컨벤션센터(CICC) 행사장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안 대사와 마주쳐 인사를 나눴다. 당시 박 장관은 안 대사에게 “조건 없는 남북 대화가 필요하다”면서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해서 비핵화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안 대사는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취지로 짧게 답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박 장관은 안 대사에게 “아세안 전문가로서 합리적인 분이라고 들었다”며 “최선희 외무상에게 취임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북한은 코로나 여파로 지난 5일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최 외무상 대신 안 대사를 파견했다. ARF는 북한이 참가하는 유일한 역내 다자안보협의체이기도 하다. 한편 북한 매체는 윤석열 정부가 마련 중인 북한 비핵화 로드맵 ‘담대한 계획’이 과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비핵·개방 3000’의 재탕에 불과하다며 비난했다.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는 7일 담대한 계획에 대해 “10여년 전 남조선 각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흡수통일문서로 지탄받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진 이명박 역도의 비핵·개방 3000을 적당히 손질한 것”이라고 폄훼하며 “윤석열 역도가 이를 다시 꺼내 든 것은 얼빠진 자의 해괴한 추태”라고 비아냥댔다.  
  • 신인호 안보실 2차장 전격 사의…“일신상의 이유”

    신인호 안보실 2차장 전격 사의…“일신상의 이유”

    국가안보실 신인호 2차장이 전격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7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신 차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하기 어렵다며 사의를 표명했다”고 말했다. 신 차장은 대통령실 내부에서 건강 문제로 사의를 표명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 차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예비역 육군 소장 출신인 신 차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안보실 핵심 보직인 2차장으로 발탁돼 국방 분야 업무를 맡아왔다. 신 차장은 지난해 윤석열 캠프의 외교안보 자문위원으로 합류한 바 있다. 육군사관학교 42기로 임관해 독일 육사(석사)를 거쳐 준장 때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위기관리비서관을 역임했다.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었다. 김 전 장관처럼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해 일명 ‘독사파’로 불린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뒤에는 26기계화보병사단장과 육군교육사령부 전투발전부장을 끝으로 2020년 예편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실 근무 당시 대통령 보고와 지시 시간을 조작한 혐의(허위공문서작성 등)로 검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 [사설] 유죄 확정 ‘대통령기록물 폐기’, 손보는 계기 돼야

    [사설] 유죄 확정 ‘대통령기록물 폐기’, 손보는 계기 돼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공방으로 시작된 ‘사초 실종’ 사건이 논란 발생 10년 만에 사법부의 유죄 확정 판결로 종료됐다. 대법원 2부는 어제 대통령기록물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등의 손상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문재인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의 재상고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방은 2012년 10월 정문헌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새누리당은 사초인 정상회담 회의록이 고의로 폐기·은닉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참여정부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백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감추려고 회의록 초본을 삭제했다며 이들을 다음해 11월 불구속 기소했다. 1, 2심에선 무죄가 선고됐으나 2020년 12월 대법원은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을 열람했을 때 사실상 결재를 한 것이고, 이에 따라 회의록 파일이 첨부된 문서 카드는 노 전 대통령의 결재를 거친 대통령기록물로 봐야 한다는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파기 환송심은 지난 2월 두 사람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두 사람의 불복으로 이뤄진 이번 재상고심의 판단도 같았다. 대통령기록물 폐기는 국기 문란 행위다. 재발 방지를 위해 둘쭉날쭉한 대통령기록물 관리 규정과 비공개 요건을 손질해야 한다. 이번 판결은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의혹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행정부가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기록물을 폐기하더라도 언젠가는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이다.
  •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쌓은 중국 이야기… 그의 서가는 대륙 펼친 ‘역사 놀이터’다 [김언호의 서재탐험]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쌓은 중국 이야기… 그의 서가는 대륙 펼친 ‘역사 놀이터’다 [김언호의 서재탐험]

    2012년 ‘중국인 이야기’를 써내기 시작하면서 저자 김명호(전 성공회대 교수)는 “40년 가까이 중국은 나의 놀이터였다”고 했다. “책·잡지·영화·노래·경극과 새벽 시장, 크고 작은 음식점 돌아다니는 것이 나의 행로였다.” 중국 근현대사 주역들의 사상과 행동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중국인 이야기’는 현재 제9권까지 출간됐다. 중국을 자기 바깥마당처럼 드나드는 김명호가 아니고는 써낼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이야기로 풀어내는 중국사 내가 김명호 교수를 본격적으로 대면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2009년 4월이었다.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의 인문출판인들이 동아시아 출판공동체·독서공동체의 실현을 모색하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의 여강(麗江)회의에서였다. 중국 측이 김 교수를 초청했던 것인데, 그때 나는 “그래,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야!”라고 소리쳤다. 전 22권의 ‘이이화·한국사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을 펴내면서, 나는 ‘중국인 이야기’를 궁리하고 있었다. 대형의 ‘이야기’ 3부작 기획이었다. 여강 이후 나는 김명호 교수를 매일처럼 만나고 있다. 그에게 몇 시간이고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방대한 독서세계에 빠진다. 만나지 못하면 전화를 건다. 30분, 한 시간씩 통화가 이어진다. 심야를 가리지 않는다. 여강 이후 독서인 김명호와 출판인 김언호가 만나고 통화한 횟수가 수천일 것이다. 나의 ‘출판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가 김명호다. 어느 날 밤늦게 전화 걸면 북경(北京)에서 받는다. 대만에서, 홍콩에서 받는다. 책 보러 왔다 한다. 그의 일상적인 중국체험이다. 중국의 역사와 인물, 인문·예술과 놀고 있다. 김명호의 이야기마당에 나는 고수가 된다. 추임새로 그의 이야기를 받아 낸다. ●‘난독의 시대’ 김명호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계시는 서울 효자동 한옥 사랑방에서 청전 이상범 화백, 윤제술 국회 부의장 같은 어른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서가엔 한적(漢籍)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수십 권에 이르는 ‘증국번가서’(曾國蕃家書)가 서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의 ‘가서’가 그렇게 중요한 책인 줄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적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를 중학교 때 읽었다. 세종문화회관 그 자리의 시민회관에서 열린 함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강연도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을유문화사가 펴낸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읽었다.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한국전쟁까지 쏟아져나온 진보적인 책들을 읽으려 했다. 서울신문사에서 출간된 홍명희의 세로쓰기 ‘임꺽정’을 완독했다. 현암사에서 펴낸 ‘최남선전집’과 신구문화사의 ‘한용운전집’, 일지사의 ‘조지훈전집’을 읽었다. 신구문화사의 베스트셀러 ‘한국의 인간상’, ‘세계의 인간상’을 읽었다. 신구문화사의 ‘전후세계문학전집’과 ‘전후한국문학전집’은 표지와 장정이 참 현대적이었다. ‘탐구신서’를 탐독했다. 김명호에게 1960년대는 ‘난독’(亂讀)의 시대였다. 1970년대 대학 시절부터는 역사·사회과학 책들을 읽었다. 이기백·천관우·송건호·강재언·리영희·김열규가 그 저자들이었다. 일제 말 ‘조선과학사’를 써낸 민족사학자 홍이섭의 난삽한 ‘한국사의 방법’을 읽었다. “이병주 소설 좋아했습니다. ‘산하’ 재미있지요. 책머리에 실린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이병주가 아니면 생각 못할 메시지가 아닐까 했습니다. ‘행복어사전’도 좋았어요. 이병주 소설 하면 역시 ‘지리산’과 ‘관부연락선’이지요. ‘지리산’은 진주에서 읽어야 해요. 서울에선 그 맛이 나지 않아요. 난 노신의 소설보다 ‘잡문’을 좋아하는데, 북경의 겨울밤에 읽어야 노신을 더 느낄 수 있습니다.” 1980년대는 금서의 시대였다. 출판인들과 책들이 권위주의 권력과 싸우던 시대였다. “금서들 거의 다 읽었습니다. 신동엽의 ‘금강’도 읽었습니다.”●중국으로 이끈 앙드레 말로 독서인 김명호는 어떻게 중국을 만났을까. “‘을유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정복자’를 읽고 중국공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두 소설은 홍콩·광동 파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공부해야 했다. “1970년대 초 청명 임창순 선생이 개설한 태동고전연구소에 가서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파고다 공원 근방에 있었지요. 봉은사로 가서 동초 이진영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습니다. 뚝섬 나루터에서 배 타고 봉은사로 건너가는 공부길이었습니다. 봉선사에 계시던 운허 스님도 만났지요. 1970년 초부터 1972년 2월 군입대 전날까지 봉은사를 다녔는데, 그때 봉은사에서는 ‘팔만대장경’ 국역작업이 진행됐고, 운허 스님이 역장(譯長)이었습니다. 제대 후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2년간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1980년대에 김명호는 주말이면 홍콩과 대만에 가서 살았다. 경상대에서 6년, 건국대에서 4년을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격동하는 중국대륙을 읽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방학 땐 아예 거기 가서 놀았다. 홍콩은 중국을 체험할 수 있는 자유지대였다. 중국대륙의 내면을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정보와 이론을 담아내는 다양한 잡지들을 접할 수 있었다. 1989년 4월 15일 북경의 천안문(天安門)광장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6월 4일 진압이 끝나는 천안문광장은 붉은 피가 흘러넘쳤다. 한국지식인들을 비롯한 많은 국외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예측했다. “난 중국공산당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동안 읽고 관찰한 결과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고 확신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민국시대는 중국문화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의 사상가·혁명가·문학가들의 문집·전집을 주력해서 읽었다. “‘장개석일기’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장개석은 죽기 전날까지 일기를 썼는데, 늘 반성한다면서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교수 사직하고 서점인이 되다 1990년 3월 1일, 서울 동숭동에 대형 중국전문서점이 문을 연다. 1992년 8월 24일 중국대륙과 수교하기 한참 전이었다. ‘북경삼련’과 ‘홍콩삼련’에 이어지는 ‘서울삼련’이었다. 교수 김명호는 학교를 사직하고 서점인이 됐다. “1980년대 내가 홍콩삼련을 드나드는 것을 그쪽에서 주의 깊게 보았던 것 같아요. 많은 책들을 구입하면서 한 번도 할인해 달라 하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특별한 손님이었던가 봐요. 하루는 동수옥(董秀玉) 대표가 날 보자고 했어요. 그날 동수옥 대표의 안내로 각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동수옥 대표와 깊은 만남이 이루어지지요. 나에 대한 그의 신뢰와 권유로 서울삼련을 열게 됩니다.” 한중문화교류사에서 한 차원을 높이는 서울삼련의 개관으로 한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출판의 깊이와 넓이를 서울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됐다. 개관하면서 서울삼련에 비치된 책이 8t 트럭 20대나 되는 분량이었다. 해마다 5~6회씩 책을 들여왔으니, 엄청난 양의 서점이었다. 해외에 있는 중국서점 가운데 책의 수준과 규모 면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다. 안목 있는 연구자·지식인·예술가들에게 서울삼련의 등장은 가히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화가 서세옥·송영방·정탁영,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용희가 단골이었다. 수교가 되면서 중국과의 내왕이 자유로워졌다. 1999년 큰 적자를 내고 문을 닫지만, 서울삼련은 중국의 중요 인사들이 방한하면 으레 들르는 코스가 됐다. 비치된 책들의 수준을 중국인들도 놀라워했다. “서울삼련의 10년은 참으로 귀중한 기회였습니다. 전설 같은 중국의 예술가·지식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점을 방문하는 중국인사들과 ‘문화친구’가 됩니다. 화가 황영옥(黃永玉), 서예가 계공(啓功)과 황묘자(黃苗子), 사상가 이택후(李澤厚), 만화가 정총(丁聰) 같은 거장들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지요. 중국인들의 심연을 알게 됩니다.” 북경의 지화사(智和寺)에 보존돼 있는 ‘건륭판 대장경’의 탁본을 1억원도 더 주고 수입했다. 책 자체가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에 법보(法寶)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함께 ‘동방의 유이(有二)’한 존재다. 지금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김 교수는 서점을 닫으면서 ‘건륭판 대장경’을 승가대학에 시주했다. 서점의 재고들을 반품하지 않고 7개 대학에 기증했다. ●저자 김명호와의 특별한 여행 김명호 교수는 지금 파주서재 말고 서울에 제2의 서재가 있다. 상도동엔 서고가 있다. 서울삼련을 끝낸 후 다시 컬렉션한, 엄청난 수준의 책들이다. 나는 김 교수에게 ‘중국인 이야기’를 끝내면, 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로 ‘중국책 특별전’을 해보자고 하고 있다. ‘중국인 이야기’ 제1권을 펴낸 그해 여름, 나는 ‘중국인 이야기’ 독후감 대회를 열고 재미있는 독후감을 보내 준 독자들과 북경을 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저자 김명호 교수와의 특별한 여행이었다. 그는 북경의 뒷골목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저명한 정치가·예술가·지식인들이 어느 골목에 살았는지. 유서 깊은 사가(史家) 골목을 걸으면서, 이 집은 한때 국가주석이었던 화국봉(華國鋒)의 집이고, 그 옆집이 외교부장 교관화(喬冠華)가 살던 집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외교관들이 드나드는 식당 ‘열빈’(悅賓)에 가서 식사할 수 있었다. 열빈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제1호 민간식당’이다. 북경의 구석구석을 서울처럼 아는 김명호는 그래서 ‘중국은 나의 놀이터’라고 말한다. 장대한 역사공간에서, 책들의 숲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문협(文俠) 김명호의 이야기를 우리는 더 듣고 싶어 한다. 한길사·한길책박물관 대표
  •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삭제, 논란 10년 만에 유죄 확정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삭제, 논란 10년 만에 유죄 확정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을 삭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참여정부 관계자들이 논란 10년 만에 최종 유죄 판단을 받았다.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된 이후 첫 처벌 사례다.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8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손상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79)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65) 전 통일부 장관(당시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의 재상고심에서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녹취록 초본을 한글파일로 작성해 청와대 통합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시스템’의 전자기록인 문서관리카드에 첨부한 뒤 이를 인식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혐의를 받았다. 1심과 2심은 해당 문서관리카드는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검토·수정을 지시하며 결재를 하지 않았기에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0년 12월 해당 문서관리카드가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한다며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은 “문서관리카드는 노 전 대통령이 내용을 확인한 후 ‘열람’ 버튼을 눌러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됐다”며 “공용전자기록 손상죄 성립에는 영향이 없다”고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정문헌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말하면서 불거졌다.
  • 대법,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유출 의혹’…‘사초 폐기’ 유죄로 마무리

    대법,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유출 의혹’…‘사초 폐기’ 유죄로 마무리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을 삭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참여정부 관계자들이 논란 촉발 10년 만에 최종 유죄 판단을 받았다.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된 이후 첫 처벌 사례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8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손상 혐의로 기소된 백종천(79)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65) 전 통일부 장관(당시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의 재상고심에서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은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초본을 한글파일로 작성해 청와대 통합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시스템’의 전자기록인 문서관리카드에 첨부한 뒤 이를 인식불가능한 상태로 만든 혐의를 받았다. 1심과 2심은 해당 문서관리카드는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검토·수정을 지시하며 결재를 하지 않았기에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그러나 대법원은 2020년 12월 해당 문서관리카드가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한다며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서울고법은 “문서관리카드는 노 전 대통령이 내용을 확인한 후 ‘열람’ 버튼을 눌러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됐다”며 “미완성의 문서라고 하더라도 공용전자기록 손상죄 성립에는 영향이 없다”고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법리 오해 등 잘못이 없다고 보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10월 정문헌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말하면서 불거졌다.
  • [속보] ‘2007년 남북회담 회의록 삭제’ 백종천·조명균 유죄 확정

    [속보] ‘2007년 남북회담 회의록 삭제’ 백종천·조명균 유죄 확정

    2007년 ‘NLL 포기’ 발언 삭제 혐의1·2심 무죄→2020년 대법 파기 후 유죄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폐기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참여정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 관계자들이 논란 촉발 10년 만에 두 번째 대법원 판단 결과 유죄를 확정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8일 대통령기록물법 위반과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를 받은 백종천(79)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65) 전 청와대 안보비서관 재상고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 논란, 통일부 국감서 나와 재판 시발점이 된 회의록 폐기 논란은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2012년 10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정문헌 당시 의원이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말하면서 나왔다. 새누리당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고의로 폐기·은닉됐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2013년 참여정부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을 감추려고 백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이 회의록 초본을 삭제했다고 보고 그해 11월 이들을 불구속기소했다. ● ‘e지원시스템’으로 결재 상신 조사 결과 조 전 비서관은 2007년 10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작성한 뒤 당시 청와대 통합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시스템’으로 ‘문서관리카드’를 생성하고 회의록 파일을 첨부해 노 전 대통령에게 결재 상신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회의록 파일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 다음 ‘회의록 파일의 내용을 수정·보완해 e지원시스템에 올려 두고, 총리·경제부총리·국방장관 등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의 의견 파일을 문서관리카드에 첨부해 조 전 비서관에게 보냈다. ● 종료 선택 않고 검토 처리, 정보 삭제 조 전 비서관은 ‘종료 처리’ 항목을 선택하지 않은 채 2008년 1월 문서관리카드를 ‘계속 검토’로 처리했고, 이후 e지원시스템에서는 문서관리카드 정보가 삭제돼 인식이 불가능해졌다. 검찰은 이 대목을 두고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대통령기록물’로 생산된 문서관리카드를 무단 파기한 것이라며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했다. ● 쟁점, 문서관리카드의 대통령기록물 여부 재판의 최대 쟁점은 문서관리카드를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는지였다. 1심과 2심은 무죄 판단을 내렸다. 회의록 초본에 노 전 대통령의 결재가 없어 이를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 서명 생성에 ‘공문서’ 성립 판단 그러나 2020년 12월 대법원은 두 사람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회의록 내용을 e지원시스템으로 확인한 뒤 문서관리카드에 서명을 생성했는데, 이는 회의록이 첨부된 문서관리카드를 ‘공문서’로 성립시킨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노 전 대통령이 수정과 보완을 지시하기는 했으나 이미 회의록의 내용을 열람하고 내용을 확인했다는 점과 문서의 성격·내용 등을 감안하면 문서관리카드는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이에 따라 지난 2월 이들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은 판결에 불복해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 [씨줄날줄] 조선총독 관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조선총독 관저/서동철 논설위원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에 따라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인 외부(外部) 청사에 자리잡았다.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한다. 통감부는 청사와 관저 신축에도 나선다. 통감부 청사는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르네상스양식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 1907년 2월 완공됐다. 서울 중구 예장동 일대다. 주변에는 1893년 지은 공사관 건물도 있었다.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공사관은 통감 관저로 바뀌었다. 통감부는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총독부는 남산의 통감부 청사와 관저를 물려받아 쓰다 1926년 경복궁 흥례문권역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다. 이와 함께 경복궁 후원 건물의 일부를 철거하고 새로운 총독 관저를 지어 1939년 9월 낙성식을 갖는다. 일제는 용산에 또 다른 총독 관저를 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서쪽의 미군 121후송병원 자리다.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 주도해 1909년 완공했다. 하세가와는 1916~1919년 제2대 조선총독도 지낸 인물이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당시 유행하던 네오바로크양식으로 매우 화려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이 관저는 주로 연회 장소로 쓰였다. 경복궁 관저는 일본 전통 구조의 2층집이었다. 집무 공간인 1층은 서양식이었지만, 생활 공간인 2층은 다다미를 깐 일본식이었다. 생활 공간엔 일본인들이 목욕할 때 쓰는 커다란 무쇠솥도 있었다. 제9대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자 각종 문서는 물론 다다미를 비롯한 관저 집기까지 모두 훼손했다고 한다. 이름을 되찾은 경무대는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 관저로 쓰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야 비로소 이승만 대통령을 주인으로 맞는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고, 노태우 대통령 시절 구 본관을 헐고 관저와 본관을 분리 신축해 오늘에 이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구 본관의 모형 제작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논란이 한창이다. 하지만 구 본관은 새 대통령이 입주할 때마다 증축과 구조 변화가 뒤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시절을 모델로 하느냐에 따라 논란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증폭될 수도 있다.
  • 박범계 “법무장관 1인 지배 시대” 한동훈 “옛 민정수석실 위법이냐”

    박범계 “법무장관 1인 지배 시대” 한동훈 “옛 민정수석실 위법이냐”

    ‘소통령’으로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문재인 정부 마지막 법무부 장관이었던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5일 법무부 산하 인사정보관리단을 놓고 정면충돌했다. 한 장관은 국회 정치·외교·안보·통일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박 의원이 ‘인사정보관리단의 인사 검증은 정당한 규정이 없다. 외향은 법치를 띠고 있지만 법치가 아닌 법치농단’이라고 지적하자 “과거 박 의원께서 근무했던 민정수석실에선 어떤 근거로 검증했나. 인사 검증은 대통령 인사 권한을 보조하는 것이므로 대통령실 의뢰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과 관련해 동의를 받아 1차 검증을 하는 것”이라며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박 의원이 ‘법무부 장관이 국무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을 검증하는 1인 지배 시대’라고 재차 비판하자 한 장관은 “객관적 판단 없이 기본적인 자료를 대통령실에 넘기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간 밀실 업무를 부처 통상 업무로 전환한 것”이라며 “이 업무는 새로 생긴 게 아니라 과거 민정수석실에서 계속해 오던 업무다. 제가 이 일을 하는 게 잘못이라면 과거 민정수석실에서 했던 인사 검증 업무는 모두 위법”이라고 맞받았다. ‘왜 법무부 장관이 대법관, 헌법재판관까지 검증해야 하나’라는 물음엔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직위가 아니므로 검증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 권영세 “탈북민 의사 반한 강제북송, 2019년 ‘어민북송’이 유일”(종합)

    권영세 “탈북민 의사 반한 강제북송, 2019년 ‘어민북송’이 유일”(종합)

    “헌법 가치 훼손한 매우 잘못된 결정”“北가지 않겠단 의사 확인시 수용해야”우상호 “MB·박근혜정부 때 북송 공개할까”“강제북송, 대통령 아닌 다른 사람이 했다면 통치행위로 볼 수 없어”“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사만 확인되면 수용해야”“담대한 계획, 북한의 안보 우려까지 포함한 계획”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25일 2019년 11월 나포 5일 만에 강제 북송된 탈북어민 북송 사건을 두고 “(탈북민) 의사에 반해 강제로 북송된 유일한 케이스로 안다”라고 밝혔다. 권 장관은 이날 국회 정치·외교·안보·통일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지난 5년간 탈북 어민 북송과 같은 강제북송 케이스가 있었는가’라는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권 장관은 당시 탈북 어민을 북송한 정부의 결정을 두고 “분명히 잘못된 조치”라면서 “기본적인 헌법 규정과 헌법 가치를 훼손한 매우 잘못된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북쪽으로 귀환하겠느냐, 대한민국에 남겠느냐’ 하는 (탈북민의) 의사를 확인해서 정확히 얘기해 ‘북쪽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의사만 확인된다면 통일부는 대한민국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부연했다.“강제북송, 대통령 아닌 자가 북송 지시했다면 통치행위 아냐” 권 장관은 ‘탈북어민의 강제북송을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나’라는 질문에는 “통치행위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지, 안보실장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다른 사람이 (강제북송을 지시)했다면 통치행위로 볼 수 없다“고 대답했다. 앞서 국민의힘 ‘국가안보문란 실태조사 태스크포스(TF)’ 단장인 한기호 의원은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TF 회의에서 “증언에 의하면 우선 16명이 살해됐다는 문재인 정권의 발표는 허위”라면서 “김책시에서 이 16명은 탈북하려던 다섯 가구의 주민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어이가 없다. 말이 되느냐”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돌려보낸 숫자가 몇십 명이 된다. 하나하나 맞불을 놔야 하나. 이 문제로 정쟁을 그만하기 바란다. (아니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의 케이스를 공개하겠다”고 반박했다. 한편, 권 장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밝힌 대북정책 개념인 ‘담대한 계획’의 구체적 내용과 관련해서는 “북한이 핵을 실질적으로 포기할 경우 경제적 지원을 담대하게 하겠다는 부분”이라고 답변했다. 이어 “북한이 안보 상황을 우려해 핵을 개발한다고 하는데 한미가 북한을 침략할 이유도 없는 만큼 이를 다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런 부분까지 포함한 계획이 담대한 계획”이라고 덧붙였다.대통령실 “북송 관련 인수인계 없었다’“놀라울 정도로 북송 자료 없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은 이날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과 관련해 전임 문재인 정부 청와대 안보실로부터 인수·인계받은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용산 청사 브리핑에서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실이 (해당 사건과 관련해) 합동신문(자료)이나 SI(특별취급정보) 열람이 가능했다면 어민의 귀순 의사 진정성을 어떻게 판단했고 해당 (북송) 과정 문제점을 어떻게 인지했느냐’는 물음에 “그것은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인수·인계받는 과정에서도 전혀 포함되지 않았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 문제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간 이후 관련 자료가 국가안보실에 혹시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검찰에서 조사 중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결과를 기다려보는 게 낫겠다”고 덧붙였다.검찰, 나포 당시 해군 장교 소환 조사‘귀순’자 고의 삭제 혐의 서훈 고발  한편 검찰은 당시 어민들이 탄 선박 나포 과정에 관여한 해군 장교를 소환하며 수사 기초 다지기에 주력하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3부(이준범 부장검사)는 이날 해군 A소령 등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고 있다. 검찰은 A소령을 상대로 2019년 11월 2일 탈북 어민이 탄 북한 선박을 나포할 당시 해상 경계 작전 수행 상황, 신병 제압 후 동해군항으로 압송할 당시 상황 등 전반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11월 7일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우리 해군은 그해 10월 31일 북한 어선에 탄 민간인들이 살인사건에 연루됐으며 북측이 작전을 수행 중이라는 내용을 특수정보(SI)를 통해 인지하고 남하 가능성을 고려해 경계 작전을 강화했다.이 어선은 같은 날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남하한 뒤 퇴거 조치에 따라 북쪽으로 넘어갔다가 11월 2일 다시 NLL을 넘었다. 해군은 이들이 귀순 의사도 밝히지 않고 지속해서 우리 영해로 넘어오자 나포했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해 어민들이 우리 군에 나포된 지 5일 만에 당시 정부가 이들의 귀순 의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과정 전반을 살펴보고 있다. 당시 북송 의사 결정 라인에 있던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줄줄이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서 전 원장은 탈북민의 신병 처리를 결정하기 위해 통상 보름 이상 진행하는 중앙합동정보조사를 단 3∼4일 만에 종료시키고, 통일부에 전달한 보고서에 ‘귀순’ 등의 표현을 고의로 삭제한 혐의로 고발됐다.
  • [2030 세대]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김현집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역사·철학과

    [2030 세대]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김현집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역사·철학과

    1963년, 서베를린 사람들은 불안했다. 통일 전 독일 지도를 보면 서베를린은 동독 한가운데 떠 있는 섬과 같았다. 소련의 흐루쇼프는 이곳을 장벽으로 둘러싸 서방으로의 이동을 통제하려 했다. 탈동독자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6월, 존 F 케네디는 (후에 길이 남을 그의 손꼽히는 연설을 위해) 베를린에 도착한다. 미국 대통령의 약속을 기대하며 모인 서베를린 사람들은 40만명에 달했다. “아직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베를린에 와서 보십시오.” 서베를린은 자유의 상징이고 서방의 운명은 서베를린과 함께한다고 케네디는 확신한 것이었다. 관중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다. 그의 연설이 이어진다. “2000년 전, 최고로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시민이다’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입니다.”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ich bin ein Berliner!) 이 말을 굳이 독일어로 하기 위해 영어식 발음을 적어 놓은 케네디의 메모가 남아 있다. 케네디는 아내 재클린과 달리 언어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말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최고의 웅변가 키케로의 연설에 처음 등장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 말 한마디면 법적 보호가 보장됐다.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성경을 좀 아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의 덕을 봤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성난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밝힌다. 그의 몸을 묶었던 사슬이 풀리고, 심문하려 했던 군인들은 물러났다. 19세기에는 ‘로마 시민’ 정신을 영국이 이어받았다. 돈 파시피코는 아테네에 살던 유대인이었다. 어느 날 유대인을 혐오하던 폭도들이 파시피코의 집을 약탈하고 불태운다. 경찰은 보고만 있다. 파시피코는 결국 영국 정부에 보호를 요청한다. 왜? 그는 1784년 영국령인 지브롤터에서 태어난 영국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의 자국민을 지키기 위한 대응은 단호했다. 영국 왕립 해군 함대가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를 봉쇄하고 아테네를 폭격할 듯이 대포를 겨눴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후에 수상이 된) 파머스턴 경이 의회에서 열변했다. “로마인이 모욕으로부터 자유로웠듯이, 영국 시민은 그가 세계 어느 땅에 있든지 영국이 지켜보는 매서운 눈빛과 강한 팔로 그를 불의와 폭거에서 보호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신뢰가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아테네는 파시피코에게 4000파운드를 보상하기로 한다. 문서가 손실된 탓에 결국 150파운드만 줬지만…. ‘파시피코 사건’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100년 동안 영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나의 몸값은 나를 낳아 준 부모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시민이다.
  • 검찰, ‘서해 공무원 피살·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국정원 압수수색(종합)

    검찰, ‘서해 공무원 피살·탈북어민 강제북송’ 사건 국정원 압수수색(종합)

    검찰이 2020년 9월 서해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뒤 북한군에 끌려가 해상에서 총격 사살된 뒤 시신이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 사건과 2019년 11월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과 관련해 국가정보원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국정원, 박지원·서훈 검찰에 고발박지원 “보고서 삭제 지시한 적 없다”서훈은 미국 체류 중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구 국정원에 검사와 수사관 등을 보내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압수수색은 서해 공무원 사건을 수사 중인 공공수사1부(이희동 부장검사)와 탈북 어민 북송 사건을 수사하는 공공수사3부(이준범 부장검사)가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국정원은 이 두 사건과 관련해 지난 6일 박지원·서훈 전 국정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박 전 원장은 2020년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 씨가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됐을 때 첩보 관련 보고서 등을 무단 삭제한 혐의(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를 받고 있다. 서 전 원장은 이와 별도로 2019년 11월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탈북자 합동 신문을 조기 종료시킨 혐의(국가정보원법상 직권남용, 허위 공문서 작성)를 받는다. 검찰은 이러한 국정원의 고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최근 국정원 관계자들을 고발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공수사1부는 지난달 16일 이대준씨의 자진 월북 가능성을 뒤집은 언론 브리핑을 한 윤형진 국방부 국방정책실 정책기획과장(대령)을 이달 11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하기도 했다.국정원 서버에 남은 정보 생산·삭제기록직원 간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내용 대상 이날 압수수색은 이 두 갈래 수사에서 두 전직 국정원장의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하려는 차원이다. 국정원 서버에 남은 정보 생산·삭제 기록과 직원 간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내용 등이 주요 압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이 자체 조사를 거쳐 이례적으로 직접 전직 원장들을 고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검찰의 압수수색은 과거와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관측된다. 검찰은 이날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관련 자료를 분석한 뒤 전·현직 실무자들과 간부 등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소환 조사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원장은 사건 관련 보고서 삭제를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서 전 원장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진행 정도에 따라 수사 대상이 문재인 정부 청와대 고위직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尹대통령, 이대준씨 모친 빈소에 화환후보 시절부터 사건 진상규명 약속  윤석열 대통령은 전날 이대준씨 모친 김말임씨 빈소에 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시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씨 사건의 진상규명을 약속했다. 취임 후 정보공개 청구 재판에서 항소를 취하하는 등 유족의 요구를 수용해왔다. 국민의힘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태스크포스(TF) 단장을 맡은 하태경 의원은 페이스북에 장례식장에 조문한 사실을 전한 뒤 “오랜 병마로 요양원에 계셔서 아드님의 죽음도 모르셨다고 한다”면서 “고 이대준씨 모친의 영정 앞에서 반드시 아드님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우리 국민의 죽음을 방치하고 월북몰이로 마녀사냥한 사람은 그에 상응한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대통령실 “탈북어민 북송, 진실 낱낱이 규명하겠다” 대통령실은 또 이날 ‘탈북어민 북송’ 당시 사진들과 관련, “윤석열 정부는 자유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강인선 대변인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만약 귀순 의사를 밝혔음에도 강제로 북송했다면 이는 국제법과 헌법을 모두 위반한 반인도적·반인륜적 범죄행위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한 이유”라며 이렇게 말했다. 강 대변인은 “2019년 11월 7일 오후 3시 판문점에 도착한 탈북 어민 2명이 북송을 거부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겼다”면서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은 ‘귀순 의사가 전혀 없었다’던 문재인 정부의 설명과는 너무나 다르다”라고도 지적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입장 발표 배경에 대해 “참혹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분들이 많을 것”이라면서 “그에 대한 포괄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통일부 “탈북어민, 보호 요청 있었다”“피해 예상 탈북어민 북송 분명히 잘못” 탈북어민 북송사건은 2019년 11월 2일 북한 선원 2명이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탈북해 귀순 의사를 밝혔으나 조사 5일 만인 7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강제 북송한 사건이다. 당시 정부는 북한 주민 2명이 16명을 살해한 뒤 시신과 살인도구 등을 모두 바다에 버렸다고 발표했다. 살해 가담자 1명은 북한에 체포됐다고 국정원은 밝혔다. 이들이 북에서 타고 온 15m 길이(17t)의 오징어잡이배에서 가혹 행위를 하는 선장을 죽인 뒤 처벌이 두려워 잠을 자던 16명을 2명씩 차례로 불러내 40분 간격으로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자백해 추방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검역당국에 따르면 북한 주민이 타고 온 배와 선원의 옷 등은 나포 당일인 2019년 11월 2일 국가정보원의 요청으로 그날 오후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의해 즉각 소독됐다. 정부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소독 차원이라고 해명했지만 당시 야당(현 국민의힘)에서는 증거인멸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남겨진 진술 외에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은 사라졌다. 당시 정부는 탈북 어민들이 귀순 의사가 없거나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언급했었다. 2019년 탈북주민 귀순 배·옷국정원 요청으로 나포 당일 즉각 소독김연철 “그들 귀순 의사 표명했으나일관성 없어 신뢰 없다 판단해 추방” 앞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북송 당일(2019년 11월 7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들은 우리 해군에 진압된 직후 귀순의사를 표명했으나 일관성이 없어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추방했다”고 밝혔다. 귀순의사의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정원도 이들이 나포 과정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넘나들며 도주해 해군이 나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11일 조중훈 통일부 대변인은 당시 탈북 어민들이 귀순 의사를 밝혔는지를 통일부가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묻자, “2019년 11월 국회 보고 당시 통일부는 ‘선원들이 (자신들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는 취지를 서면으로 작성해 제출했다’는 내용을 국회에 보고한 바 있다”고 답해, 사실상 어민들이 귀순 의사가 있었음을 통일부가 인지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통일부는 탈북 어민이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고, 북한으로 넘겼을 경우에 받게 될 여러 가지의 피해를 생각한다면 탈북 어민의 북송은 분명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부가 공개한 강제북송 당시 10여장의 사진에는 안대를 한 채 북송을 위해 판문점에 도착한 탈북주민 2명이 북한군을 본 순간 죽음 예감한 듯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고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머리를 찧어 자해를 하는 장면이 담겼다. 귀순 의사가 없었다는 정부 의견과는 사뭇 다른 대응으로 논란이 일었다.  
  • “北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유엔에 제소” 與 유엔인권사무소 방문

    “北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 유엔에 제소” 與 유엔인권사무소 방문

    하태경 “책임 및 진상규명 유엔과 협력”유엔北보고관 “유족, 정부 상대 알권리 있다”“북한은 이번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해야”여당이 2020년 9월 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뒤 북한군에 의해 피살돼 시신이 불태워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해 유엔에 진상 규명과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제소하기로 했다.  국민의힘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사건 진상조사 태스크포스(TF)’의 위원장을 맡은 하태경 의원은 이날 오후 종로구 서린동 서울유엔인권사무소 방문에 앞서 취재진과 만나 서해 피격 사건을 유엔에 제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 의원은 “유엔인권사무소 온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엔이 한국 정부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두 번째는 앞으로 책임 규명 및 진상 규명과 관련해 유엔 쪽에 제소할 것인데, 그에 대해 어떻게 협력할 건지 논의하겠다”고 설명했다. 앞서 토마스 오헤나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은 2020년 9월 서해에서 북한군 총격에 피살된 고 이대준(사망당시 47세)씨 유족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알권리가 있으며, 북한은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언급했었다.하태경 “문재인 정부 안보실,‘월북가능성으로 알려라’ 지침” 앞서 하 의원은 지난 1일 해수부 공무원 서해피격 사건과 관련,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외교부 등에 숨진 이대준씨의 ‘월북 가능성’을 알리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하 의원은 국회에서 전문가 초청 간담회를 열고 서욱 전 국방부 장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서주석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을 ‘3서’(徐)라고 거론하면서 “정부 각 부처가 월북몰이를 주도한 증거 자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 의원은 “(2020년 9월) 24일 국가안보실에서 외교부와 전 재외공관에 뿌리라고 내린 지침서에 ‘극단적 선택 가능성보다 월북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리라’는 지침이 있고, 저희 눈으로 다 확인했다”고 했다. 이어 “서주석 당시 안보실 1차장은 (월북몰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라면서 “해경은 이런 안보실 지침과 국방부 기본 각본을 전제로 이대준씨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미지를 덮어씌우려고 적극 노력했다”라고 덧붙였다.“피격 장소,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북에 경고만 했어도 사살·화형 못했다” 이날 간담회에선 현장 시뮬레이션도 이뤄졌다. 사건 당시 문재인 정부와 청와대가 제대로 대처했다면 이대준씨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했다고 TF는 설명했다. TF는 시뮬레이션에서 숨진 이대준씨가 발견된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쪽 3㎞ 해상은 남쪽에서 접근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위기관리센터장을 역임한 김진형 전 해군 군수사령관은 간담회에서 “연평도 근해에는 항상 해군 고속정 등 군함은 물론 해경함까지 다수 배치돼 있어 합참과 정부에서 명령만 내리면 언제라도 현장으로 출동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김 전 사령관은 “정부와 합참이 실종자 확인 즉시 인근 해상으로 해경함을 보내 북측에 경고만 했더라도 절대 함부로 우리 공무원을 사살하거나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수 TF 위원은 “고속정엔 최소 5㎞ 이상까지 전달되는 대북마이크가 있다. (실종된) 3㎞ 거리면 확성기로 목소리를 내면 (북한에) 들린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어 “함정에 설치된 서치라이트와 영상 촬영 장비로 찍었다면 북한에서도 우리 국민이 보고 있는데 총살이나 화형을 시킬 수 없지 않았겠나”라고 꼬집었다.‘서해 피격 공무원’ 유족, 靑 인사 고발“文민정실 지침으로 월북 조작 판단” 2020년 9월 당시 해경은 이씨가 실종된 지 8일 만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군 당국과 정보당국이 감청한 첩보와 그의 채무 등을 근거로 “이씨가 ‘자진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건 2년여 만에 지난달 16일 발표한 최종 수사결과에서는 “월북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입장을 바꿨다. 대준씨의 유족인 형 이래진씨는 유족을 대표해 지난달 22일 서울중앙지검에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김종호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철 전 민정비서관을 ‘월북 프레임’의 주도자로 지목해 공무집행방해, 직권남용, 허위공문서작성 혐의 등으로 처벌해달라며 검찰에 고발했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인 김기윤 변호사는 고발 기자회견에서 “국방부는 2020년 9월 27일 국가안보실로부터 지침을 하달받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면서 “국가안보실에서 하달한 월북 관련 지침이 있어서 (이씨의 표류가) 월북으로 조작된 것인지 파악하고자 서 전 실장을 고발한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또 “해경이 ‘자진 월북’이라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배경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침이 있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민정수석실이 해경에 내린 지침으로 인해 월북 조작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김 전 수석과 이 전 비서관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공무원 친형 “文 직접 사과해달라”“누가 어떤 근거로 지시해 유족 유린했나”“진실 은폐, 인권 유린… 진실 밝혀질 것” 이씨는 월북했다고 단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2년 전 조사 결과를 뒤집은데 대해 해경이 유감의 뜻을 밝힌 지난달 16일 “정권이 바뀌니 180도 다른 내용으로 발표를 한다”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주셨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오늘 오전 해경과 국가안보실에서 여러 차례 연락이 와 정보공개소송에 대한 항소를 취하한다는 말과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면서 “지난 2년여간 해경에서 억지 주장으로 인권을 유린해 왔으니 앞으로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 해경이 도박빚으로 인한 자진 월북이라는 결론을 내리자 유족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공무원의 살해 상황 등이 포함된 자료들을 공개해달라고 해경과 청와대에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했지만 법원의 공개 판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항소했다.
  • 신좌파 반전 시위대 정부기능 마비 노려… 촘스키·하워드 진 등 세계적 석학들 동참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

    신좌파 반전 시위대 정부기능 마비 노려… 촘스키·하워드 진 등 세계적 석학들 동참 [이상돈 명예교수의 지금의 미국 알려면 1970년대 읽어라]

    라오스 작전에 반전운동 재점화 상원 본회의장 폭발물 ‘쾅’ 혼란 25만명 워싱턴DC에 운집 예상 도로 점거 공무원 출근 방해 계획 존 케리 주도 참전용사들도 참여 의사당 앞 훈장 던지는 퍼포먼스 경찰, 1만 2000명 불법 체포·구금 미국 기본권 역사에 큰 오점으로베트남 전세를 반전시켜야 하는 닉슨 대통령은 라오스 내의 북베트남군 요충지를 공격해서 호찌민 루트를 차단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1970년 12월 의회는 미 지상군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진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닉슨은 마지못해 이에 서명했다. 따라서 라오스 작전을 수행하려면 미군은 베트남 영토 내에서 포격과 항공 지원을 하고 남베트남군이 국경을 넘어 40㎞를 진격해야만 했다. ●재앙으로 끝난 라오스 작전 1971년 1월 말, 닉슨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1968년에 철수한 케산 기지를 다시 확보해서 헬기 착륙장 등 후방시설을 건설했다. 남베트남군은 해병대, 공수부대, 레인저 부대 등 1만 7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라오스로 진입했다. 하지만 이런 작전을 사전에 파악한 북베트남군은 병력 6만명을 동원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남베트남군을 포위해서 공격했다. B52 등 폭격기가 1만회 출격을 해서 폭탄을 퍼붓고 헬기가 1만6000회 출동해서 근접 지원을 했음에도 남베트남군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만 했다. 북베트남군의 대공포화로 헬기 108대가 격추되고 200여대가 다시는 날 수 없게 손상을 입었으며, 공·해군 항공기 7대가 격추되는 등 미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케산 기지에 남아 있던 미군도 남베트남군 잔여 병력과 함께 철수하고 말았으니 이 작전은 재앙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군이 독자적으로 잘 싸웠다고 발표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라오스 작전이 알려지자 한동안 잠잠했던 반전 운동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해 3월 1일, 워싱턴DC 의사당 상원 본회의장 아래층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급진 폭력단체인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자신들이 폭발물을 터뜨렸다고 발표했다. 1969년 가을 모라토리엄 시위를 주도했던 신좌파 인물들이 다시 연락을 취해서 5월 1일 메이데이를 기념해서 워싱턴 DC에서 대형 집회를 갖기로 했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던 모라토리엄 집회와는 달리 이번에는 워싱턴에 있는 정부기관이 기능하지 못하도록 다리와 도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의회 건물이 공격을 받은 상황에서 이런 정보를 입수한 법무부는 리차드 클라인딘스트(1923~ 2000) 차관 주재로 FBI 및 워싱턴DC 경찰과 함께 대책반을 운영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것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면서 강경한 진압을 지시했다.●참전용사들의 반전 시위 베트남에 참전했던 장병들이 전역 후에 만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참전용사 모임’(VVAW)도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들은 전쟁에서 겪었던 경험을 공유하면서 더이상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의견을 워싱턴에서 표명하기로 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메콩강 작전에 고속정 정장으로 참여해서 훈장을 받은 존 케리(1943~)가 이 모임을 주도했다. 이들은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워싱턴 몰 광장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잡았고, 경찰은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참전군인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것인데, 조지 맥거번(1922~2012) 상원의원 등이 이들을 후원했다. 맥거번은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게 된다. 상원 외교위원회 윌리엄 풀브라이트(1905~1995) 위원장은 존 케리를 증인으로 출석시켜서 이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4월 22일, 케리는 보도진과 청중으로 가득 메워진 상원 위원회에서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설명하면서 “닉슨이 전쟁에서 패배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도록 누군가 전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무의미한 전쟁을 당장 끝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 그를 향해 청중은 박수를 쳤고 언론은 그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다음날 참전용사 800여명이 의사당 건물로 행진을 했고,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받은 훈장을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참전용사들의 시위 현장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육군 장교 콜린 파월(1937~2021)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두 차례 복무한 파월은 당시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훈장을 던져버리는 모습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았다. 콜린 파월은 그 후 순탄하게 승진해서 합참의장이 되어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다. 존 케리는 그 후 상원의원을 지내고 2004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뒤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다.●메이데이 집회와 경찰의 반격 신좌파 단체가 주도한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한 4만명은 웨스트포토맥 파크에 자리잡고 반전 가수들의 록 음악을 들으면서 5월 3일 월요일부터 워싱턴 시내로 향하는 다리와 도로를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미국 전역에서 이 시위에 참석하러 25만명 이상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됐다. 이번 시위는 공무원들의 출근을 방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닉슨 대통령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군대를 동원하라고 지시하고 캘리포니아 샌클레멘츠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향해 떠났다. 무장한 육군 공수부대와 해병대 병력이 백악관 등 주요 기관과 교통 요지를 지키기 위해 워싱턴DC로 진입했다. 워싱턴 경찰은 이들에 대한 집회허가가 취소됐다면서 2일 정오까지 파크에서 철수하라고 통보했다. 대부분 시위대는 파크를 떠났으나 남아 있던 수백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5월 3일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워싱턴 DC 경찰 병력 5000명이 시위대 검거에 나섰다. 웨스트포토맥 파크에서 철수한 시위대와 전국 각지에서 뒤늦게 도착한 시위대는 워싱턴 곳곳에서 교통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거의 전원이 검거됐다. 3일 하루에 7000명 이상이 검거됐고 4일과 5일에도 검거가 이어지면서 총 1만 2000여명이 이 시위로 구금됐다. 이들은 워싱턴 콜로세움과 스타디움에 무더기로 수용돼 며칠 동안 고생을 했고 대부분은 과태료를 내고 풀려났다. 하지만 이들을 검거한 법적 근거는 불확실해서 결국에는 불법적 구금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과거의 시위와는 달리 메이데이 시위대는 교통을 방해하는 등 폭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무려 1만 2000명을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이 체포해서 구금한 이 사건은 미국의 기본권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전국에서 메이데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해서 워싱턴에 모였는데, 보스턴에서는 메사추세츠공대(MIT)의 언어학자 놈 촘스키(1928~)와 보스턴 대학 역사학 교수 하워드 진(1922~2010) 등이 같이 왔다. 이 일행에는 대니얼 엘스버그(1931~)라는 MIT의 선임연구원도 있었다. 하버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해병 장교로 군 복무를 한 엘스버그는 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핵 전략을 다루면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랜드연구소와 국방부에서 일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된 그는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지시로 작성된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공개하고자 했다. 랜드연구소에 비치된 이 문서를 복사한 그는 이를 몇몇 의원들에게 갖고 갔으나 비밀문서인 탓에 의원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그는 뉴욕타임스를 찾아갔다. 뉴욕타임스는 닐 쉬핸(1936~2021) 기자에게 기사를 작성토록 했고,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내보내서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중앙대 명예교수
  • 나토, 신속대응군 8배 증강…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

    나토, 신속대응군 8배 증강…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9~30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중국·러시아 견제의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나토가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고자 신속대응군(NRF) 규모를 지금보다 8배 가까이 늘리기로 했다. 새로운 ‘전략 개념’에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27일(현지시간) AP통신에 따르면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사전 기자회견에서 “현 4만명 규모의 NRF를 30만명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새 전략 개념에 담으려고 한다”며 “냉전시대 이후 나토 집단 방어에 있어서 가장 큰 개편”이라고 강조했다. 나토의 전략 개념은 미래 10년간의 목표와 가치를 정의하는 핵심 문서로, 주요 안보 도전과 이에 대응하려는 정치·군사 임무를 담는다.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러시아와 인접한) 발트해 연안 국가에 배치된 나토 전투 부대도 대대에서 여단 수준으로 승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하자 나토는 2017년부터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폴란드에 4개 대대(8000명)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이 정도로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한발 더 나아가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중국을 처음으로 나토의 새 전략 개념에서 다룰 것”이라고 선언했다. 중국을 규정할 단어의 수위를 두고 미국과 영국은 ‘우려 대상’ 이상의 강력한 표현을 요구하지만 독일과 프랑스가 반대해 ‘구조적 도전’ 정도로 타협할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통신은 설명했다. 나토에서 전략 개념이 마지막으로 개정된 것은 2010년이다. 당시 러시아는 적이 아닌 ‘파트너’였고, 중국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12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위협’으로, 중국은 ‘도전’으로 정의될 전망이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처음으로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이것만으로도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압박 신호”라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을 ‘구조적 도전’으로 규정하려는 나토의 움직임을 두고 “중국의 발전은 누구에게도 도전이 아니다”라면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도발적인 발언을 유포하는 것을 즉각 중단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고 비판했다. 한편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이틀째인 이날 정상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화상회의를 갖고 우크라이나에 295억 달러(약 38조원)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에 보복 관세를 매겨 이 수입을 우크라이나 복구에 쓰고, 러시아 방산업계에 대한 추가 제재도 착수하기로 했다.
  • “아무 잘못 없는데 왜 해경 사과해?” 문재인靑 출신 민주 의원들 [이슈픽]

    “아무 잘못 없는데 왜 해경 사과해?” 문재인靑 출신 민주 의원들 [이슈픽]

    ‘서해 피격 공무원 사과’ 해경 지도부 사의에 “정부·여당 야비… 분명 배후 있을 것”“해경·군, 사과·사의 표명할 이유 없다”“문재인 정부는 매 순간 투명하게 최선 다해”“尹과 국힘이 정치적으로 비극 써먹으려 해”유족, 靑인사들 검찰에 고발 “월북 프레임 짜”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24일 해경 지도부가 북한군에 의해 총살 당한 뒤 시신이 불태워진 ‘서해 피격 공무원’ 사건에 대해 ‘자진 월북’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수사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왜 사과하고 사의를 표하느냐. 분명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직격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오히려 사건을 왜곡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치졸하다 못해 야비하다”고 맹비난했다.  “文 지시 따라 투명하게 공개했다” 민주당 의원 13명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고 “당시 해경과 군은 각각의 영역과 능력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성실히 수색하고 조사에 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경과 군 당국이 사과하고 사의를 표명할 이유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는 피해자의 실종 신고가 접수된 이후부터 수색과 첩보 수집, 종합적인 정보 분석, 북한의 만행 규탄, 우리 해역에서의 시신 수색 작업까지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면서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정부가 알게 된 사실들을 투명하게 국민들께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은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왜곡과 선동으로 문재인 정부의 잘못을 부각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써먹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이들은 “군의 SI 정보와 해경의 수사 결과는 자기들 손에 있으면서 남 탓만 하고 있다”면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안보자산 공개의 어려움을 이용해서 전임 정부 공격의 소재로 활용하는데 급급한 정부 여당의 행태는 치졸하다 못해 야비한 짓”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성명에는 고민정, 김승원, 김의겸, 김한규, 민형배, 박상혁, 신정훈, 윤건영, 윤영덕, 윤영찬, 이장섭, 정태호, 진성준 의원(가나다순) 등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출신 의원 15명이 참여했다. ‘서해 피격 공무원’ 유족, 靑 인사 고발“文민정실 지침으로 월북 조작 판단” 피격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사망당시 47세)씨는 2020년 9월 서해 북단 소연평도 인근에서 실종된 뒤 북측 해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다. 북한군은 이씨를 사살한 뒤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해경은 이씨가 실종된 지 8일 만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군 당국과 정보당국이 감청한 첩보와 그의 채무 등을 근거로 “이씨가 ‘자진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하지만 지난 16일 사건 2년여 만에 발표한 최종 수사결과에서는 “월북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입장을 바꿨다. 대준씨의 유족인 형 이래진씨는 유족을 대표해 지난 22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과 김종호 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광철 전 민정비서관을 ‘월북 프레임’의 주도자로 지목해 공무집행방해, 직권남용, 허위공문서작성 혐의 등으로 처벌해달라며 검찰애 고발했다. 유족 측 법률대리인인 김기윤 변호사는 고발 기자회견에서 “국방부는 2020년 9월 27일 국가안보실로부터 지침을 하달받았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면서 “국가안보실에서 하달한 월북 관련 지침이 있어서 (이씨의 표류가) 월북으로 조작된 것인지 파악하고자 서 전 실장을 고발한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또 “해경이 ‘자진 월북’이라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배경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침이 있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민정수석실이 해경에 내린 지침으로 인해 월북 조작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며 김 전 수석과 이 전 비서관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공무원 친형 “文 직접 사과해달라”“누가 어떤 근거로 지시해 유족 유린했나”“진실 은폐, 인권 유린… 진실 밝혀질 것” 이씨는 월북했다고 단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2년 전 조사 결과를 뒤집은데 대해 해경이 유감의 뜻을 밝힌 지난 16일 “정권이 바뀌니 180도 다른 내용으로 발표를 한다”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주셨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오늘 오전 해경과 국가안보실에서 여러 차례 연락이 와 정보공개소송에 대한 항소를 취하한다는 말과 함께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면서 “지난 2년여간 해경에서 억지 주장으로 인권을 유린해 왔으니 앞으로 더 많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 해경이 도박빚으로 인한 자진 월북이라는 결론을 내리자 유족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공무원의 살해 상황 등이 포함된 자료들을 공개해달라고 해경과 청와대에 정보공개청구를 요청했지만 법원의 공개 판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항소했다.故공무원 아들, 文에 친필 편지“왜 이런 고통 주나…아빠 명예 돌려달라” 피격 당시 고2였던 대준씨의 아들은 문 대통령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서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 대한민국의 공무원이었고 보호 받아 마땅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면서 “나라의 잘못으로 오랜 시간 차디찬 바다 속에서 고통 받다가 사살 당해 불에 태워져 버렸다”고 비통해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당시 8살)과 저와 엄마는 매일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면서 “한 가정의 가장을 하루 아침에 이렇게 몰락시킬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지적했다. 아들은 “수영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마른 체격의 아빠가 38㎞를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서) 갔다는 것이 진정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면서 “평범한 가장이자 가정적인 아빠였다. 동생은 출장 간 줄 안다”고 원통해했다. 아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현 상황을 누가 만들었으며 아빠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 이 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아빠를 지키지 못했는지 묻고 싶다”면서 “대통령님, 저와 엄마, 동생이 삶을 비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아빠의 명예를 돌려달라”고 호소했다.유족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 청구”“공수처 이첩 말고 檢 직접 수사해달라” 유족 측은 해당 사건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에 이첩하지 말고 검찰이 직접 수사해달라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자를 고발한 사건을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공수처장이 수사한다면 이는 유족에 대한 2차 가해”라면서 “만약 공수처가 수사를 맡게 되면 유족은 적극적으로 반대의견을 밝힐 생각”이라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 등에 대한 추가 고발 가능성을 두고는 “지난달 25일 대통령기록관을 상대로 관련 기록 정보공개를 청구했다”면서 “정보공개 여부에 대한 회신을 보고 추가 고발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민단체 서민민생대책위원회 역시 서욱 전 국방부 장관과 이인영 전 통일부 장관,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단체는 문재인 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이들이 자국민의 사살 첩보를 입수하고도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고, 책임 회피를 위해 피해자를 월북자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은 고발 사건을 공안 사건을 담당하는 공공수사1부(최창민 부장검사)에 배당해 내용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전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연루된 만큼 검찰이 따로 특별수사팀을 꾸릴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씨의 유족은 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찾아가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관련 정보 공개를 정식 요청하기로 했다. 또 해양경찰청장에게는 고인이 자진 월북했다는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 연루된 관계자들의 징계를 요청하는 한편, 중간수사 결과 발표와 관련된 수사자료 및 자문 의견서 등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도 진행할 방침이다.국방부 “靑 지침 하달 받아 시신 소각‘확인’서 ‘추정’으로 최초 발표 변경” 국방부는 사건 당시 언론 브리핑과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북한군 대화 내용을 언급하며 북한군이 공무원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시신을 불태우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밝혔었다. 윤형진 국방부 정책기획과장은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피살된 공무원이 월북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해 국민들께 혼선을 드렸다”면서 “보안 관계상 모든 것을 공개하지 못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사건 직후 안영호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은 국방부 브리핑실에서 북한의 한국 공무원 살해 후 시신을 불태웠다며 “북한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은 청와대로 전통문을 보내와 해상에서 부유물에 매달려 있던 해당 공무원에게 총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 시신을 불태우진 않았으며 코로나19 방역 우려로 부유물을 소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국방부는 이날 배포 자료에서 “2020년 9월 27일 청와대 국가안보실로부터 사건 관련 주요 쟁점 답변 지침을 하달받아 ‘시신 소각이 추정되며, 정확한 사실확인을 위해 공동조사가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최초 발표에서 변경된 입장을 언론을 통해 설명했다”고 말했다. 처음에 시신 소각 ‘확인’이라고 했다가 청와대의 지침을 받아 ‘추정’으로 입장을 바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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