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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론] 쌀 지원 중단은 자충수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시론] 쌀 지원 중단은 자충수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2·13합의’의 이행이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 자금의 송금문제로 발목이 잡혀 있다. 이 때문에 급물살을 탈 듯하던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도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남북장관급회담은 다음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한 채 사실상 결렬된 상태로,‘2·13합의’ 이행과 대북 쌀 지원을 연계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가져온 결과다. 그런데 ‘2·13합의’ 이행과 대북 쌀 지원을 연계한 정부의 단견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는 청와대와 통일외교정책 책임자들의 안일한 정세 인식과 안목 부족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우선 쌀 지원을 ‘2·13합의’와 연계하고 있는 정부의 논리와 주장 자체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쌀 지원을 안 한다고 해서,BDA문제가 술술 풀려가고 북한이 굴복해 핵시설들을 폐쇄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한단 말인가.BDA 송금문제의 해결이 지연되고 있는 데는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BDA문제는 미 정부가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풀어야 한다. 미 정부의 전향적 자세와 결단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미 재무부 내 일부 강경파들이 미 국내법을 들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미 정부 스스로 이런 문제 하나 내부적으론 조정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면,‘2·13합의’ 이행은 물론 북·미협상과정에서 도출된 보다 중요하고 난해한 합의사항들을 앞으로 어떻게 이행할지 의문이다. 강경파들은 사사건건 국내법체제와 정책상의 원칙을 내세워 합의 이행을 방해할 게 뻔하다. 더구나 ‘쌀 지원 카드’가 북한에 대한 압력수단이 되지 못하고, 정책적 유용성도 없다는 것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때도 쌀지원을 중단하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 못한 것은 물론, 남북관계의 손상과 이산가족상봉 중단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처럼 실패한 카드를 다시 집어든 것은 감정적인 화풀이 수준이거나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밖에 안 된다. 또한 쌀 지원과 ‘2·13합의’의 연계는 스스로 손발을 묶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한반도문제 해결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주도권과 발언권을 상실하는 부정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BDA문제의 매듭이 풀린다면, 북·미관계 정상화 협상이 본격화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이다. 이런 ‘새판짜기’ 과정에서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정상회담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고 남북간에 공고한 대화채널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끌려 다닌다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굳이 남한과의 대화에 매달릴 이유가 없어진다. 미국과의 양자협상에만 진력할 것이다. 게다가 쌀 지원과 같은 인도적 문제를 정치군사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의 요구대로 “남북관계의 진전은 6자회담보다 반 발짝 뒤에서 가야” 하는 게 아니라, 반 발짝 앞서 나가 6자회담을 끌어주어야 한다. 북·미간 적대관계 청산과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약속한 2000년 10월의 ‘북·미공동코뮈니케’는 그보다 앞서 6월에 있은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이다. 남북관계가 크게 진전되면 미국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교훈이다. 이철기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23)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Ⅴ

    1623년(광해군 15) 3월13일 새벽, 광해군은 다급하게 창덕궁의 담을 넘었다. 내시의 등에 업힌 채 궁인 한 사람만을 대동한 초라한 몰골이었다. 자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반정군(反正軍)의 함성 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안국방(安國坊)의 여염으로 숨어들었다. 궁궐 담을 넘는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광해군’이 되었고,‘폐주(廢主)’,‘혼군(昏君)’으로 불리기 시작했다.‘쫓겨난 임금’,‘어리석은 임금’이란 뜻이다. ‘폐주’는 몸을 숨긴 지 하루도 못되어 체포되었다. 이윽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졌다. 유배지 제주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19년. 광해군이 ‘인생무상’,‘권력무상‘을 곱씹어야 했던 그 시간,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도 요동쳤다. ●인조반정, 성공하다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1623년의 쿠데타를 보통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반정’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른 곳으로 돌아간다(發亂世反諸正)’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모의는 162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서(李曙), 신경진(申景 ), 구굉(具宏) 등 무신들이 먼저 발의하고 김류(金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 문신들을 끌어들이면서 급진전되었다. 신경진과 구굉은 모두 능양군(綾陽君·인조)의 인척들이고 김류와 이귀, 최명길 등은 광해군대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西人)의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정변을 기도했을까? ‘인조실록(仁祖實錄)’은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사직이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정의 명분을 기록하고 있다.1613년 ‘은상(銀商) 살해 사건’에서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통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고, 곧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어났던 것이 결정적이었다.‘폐모논의’는, 그것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효(不孝)의 극치’이자 패륜으로 인식되어 광해군 정권에 치명타가 되었고, 반정 주도 세력에는 ‘거사’를 정당화하는 절호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거사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고변(告變) 때문에 거사 계획이 몇 차례나 누설되었지만 용케도 토벌을 피했다.1622년 가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된 이귀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려 했는데 기밀이 누설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에서 김자점(金自點)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광해군의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겨우 무마되었다. 1623년 3월의 거사 계획도 마찬가지였다. 거사 하루 전날인 3월12일, 북인(北人) 김신국(金藎國)은 자신이 입수한 서인들의 거사 계획을 정승 박승종(朴承宗)에게 알렸다. 곧바로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관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추국청이 설치될 무렵,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를 벌이려던 참이라 재가를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반정 주도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이윽고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했던 반정군은 3경 무렵 창의문(彰義門)을 깨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광해군, 폐위되다 인조반정의 거사를 이끌었던 반정군의 전력(戰力)은 사실 보잘것없었다. 병력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가 이끄는 7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그들이 기율이 있을 리 만무했다.‘일사기문(逸史記聞)’의 저자는,“웃고 떠들고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반정군이 그나마 대오를 갖추고 기율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장 이괄(李适) 덕분이었다. 그는 당시 광해군에 의해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려던 직전에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귀가 그의 장재(將才)를 알아보고 대장을 맡긴 것이었다. 이서 등 몇몇을 빼면 백면서생(白面書生)에 불과했던 반정군 지휘부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정군이, 광해군에 대한 경호를 책임지고 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정예병과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반정군은 창덕궁으로 거의 무혈입성(無血入城)했고, 광해군은 반역세력에 대한 진압 한번 시도하지 못한 채 궁궐의 담을 넘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항상 내부로부터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즉위 말년의 광해군이나 그의 측근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정치적으로 모두 문제가 있었다. 대북파의 핵심인 이이첨은 정치적 반대파인 서인과 남인(南人)을 모두 축출한 이후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광해군 또한 권간(權奸)이 되어버린 그를 불신하고 견제했다.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 6년 동안 자신의 경호 책임자인 훈련대장을 11차례나 교체했다. 평균 1년에 두 차례나 바꾼 것이다. 제대로 믿을 만한 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불신감의 표출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거사가 일어날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이흥립(李興立)은 반정군에게 포섭되었다. 광해군을 배신한 이흥립은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난입하는 것을 방관했다. 광해군은 또한 말년에 김개똥(金介屎)이란 상궁을 총애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귀, 김자점 등 반정 주도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이귀가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수차례나 들어왔음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비호 때문이었다. 말년의 광해군은 정치적 판단력에서 분명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폐위의 명분이 된 외교정책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부활했다. 인조는 반정 성공 직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그녀를 찾아뵙고 반정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인조에게 옥새를 넘기고 그의 즉위를 선언했다. 그로써 인조는 선조(宣祖)의 왕통을 잇는 계승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윽고 광해군이 끌려와 인목대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에 대한 그녀의 원한은 처절했다. 인목대비는 “10여년 동안 유폐되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을 기다린 것”이라며 광해군의 목을 베려고 시도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폐출된 임금이지만 신하들이 그에게 형륙(刑戮)을 가할 수는 없다.’고 결사적으로 방어했다.3월14일,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 10가지를 제시하고 그를 폐위한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반포했다. 당연히 ‘폐모살제(廢母殺弟)’가 먼저 언급되었다.‘궁궐 공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선왕조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쫓아낸 것’,‘뇌물로 인사를 단행하여 혼암(昏暗)한 자들이 조정에 넘치게 한 것’ 등의 ‘악행’들이 차례로 거론되었다. 인목대비는 이어 ‘외교 문제’를 언급했다.‘선조는 임진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명나라가 위치한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심하전역 때는 전군을 오랑캐에게 투항시켰고,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인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가 되게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한마디로 ‘재조지은을 배신했기 때문에’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광해군 시절의 대북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었다. 이이첨, 정인홍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조정으로부터 영구히 축출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거사가 성공한 당일, 인조가 도원수(都元帥) 한준겸(韓浚謙)에게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점이다. 박엽과 정준은 서쪽 관방(關防)인 의주와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의 지시대로 명 및 후금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하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처형한 것은, 향후 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이 바뀔 것임을 암시하는 조처였다. 바야흐로 인조반정의 성공과 함께 조선과 명,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국, 북핵외교서 대북설득력 잃어”

    “중국, 북핵외교서 대북설득력 잃어”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반중 분위기로 흐르는 등 북·중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최저점에 와 있다. 북핵외교에서 중국은 외교적으로 대북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스인훙(時殷弘) 중국 런민대(人民大) 미국연구센터 소장은 11일 북핵문제가 북·미 양자간 문제로 좁혀지면서 중국은 상대적으로 미국에 비해 소외되는 등 북핵 및 동북아문제에서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 소장은 2002년 북핵 위기 이후 중국은 이를 잘 대처하지 못해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영향력 약화를 초래했다고 총평하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지정학적 관점에서 중국의 전략상 변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중국의 저명한 중견학자가 자국 외교정책, 특히 북한 핵문제처럼 민감한 사안과 관련, 자국 정책이 실패라고 공박하기는 드문 일이다. 스 소장은 이날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니어(NEAR)재단 출범 기념 심포지엄에서 ‘끊임없는 딜레마:중국과 북한 핵문제’란 주제의 토론발표에서 이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는 “북·중관계는 지난 2002년 북핵위기 이후 50년 이래 계속 최저점을 치고 있다. 핵 및 미사일 문제에서 중국이 미국에 비해 소외되는 경향이 더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해 7월5일 북한의 미사일 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한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미국 부시 행정부는 리더십을 발휘, 대북관계에서 중국에 비해 우위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또 “영변 핵시설 봉인 및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에 동결된 북한자금 해제를 이끌어낸 2·13합의는 미국 공화당 강경파의 중국에 대한 힘겨루기에서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이라크 등 중동문제의 전략적 돌파구로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북핵문제를 북·미 양자간 문제로 집중하는 데 성공한데 비해 “중국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서 미국에 평화적 해결을 압박하지 못했다.”고 비교했다. 게다가 “북한의 김정일정권이 반중 분위기로 흐르고 있어 중국 안보 및 동북아 외교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전략상 변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동북아 한·중·일 균형발전론 전파를 목표로 설립된 니어(North East Asia Research)재단은 정덕구 전 산업자원부장관이 이사장을 맡았다. 또 이홍구 전 국무총리, 정종욱·황병태 전 주중대사, 유키코 후카가와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 고문으로 참여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씨줄날줄] 아베의 가정교사/황성기 논설위원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총리 시절 경제 분야를 빼고는 이렇다 할 가정교사나 브레인을 두지 않았다. 풍부한 정치경험과 ‘한마리 늑대’라는 별명의 소유자답게 옆에 조언자를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해 9월 정권 출범 전부터 조언 그룹을 두고 정국 운영에 밑그림을 그렸다. 일천한 정치 경력을 뒷받침해 줄 정책 제언자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지금도 정권의 후방에서 아베 정권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섀도 싱크탱크’ 5인방이다. 이토 데쓰오 일본정책연구센터 소장,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대 교수, 시마다 요이치 후쿠이현립대 교수, 니시오카 쓰토무 도쿄기독교대 교수, 야기 히데쓰구 다카자키경제대 교수가 그들이다. 보수 성향을 넘어 극우 컬러가 짙은 인물들이다. 이토는 홈페이지에서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추진을 “미국인의 천박한 정의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라고 비난했다. 나카니시는 역사왜곡을 주도했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이사를 지낸 인물. 저서 ‘일본문명의 황폐’와 아베 총리의 저서 ‘아름다운 일본으로’의 내용이 너무 비슷해 국회에서 아베 총리가 조롱 당한 바 있다. 시마다와 니시오카는 일본인 납치문제를 다루는 ‘구하는 모임’의 부회장들이다. 아베 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이 단체의 리더인 이들은 반북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야기 또한 새역모의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들을 훌쩍 뛰어넘어 아베 총리의 총괄고문 역을 하는 인물이 오카자키 히사히코(77) 전 태국 대사다. 현역 외교관 시절 기시 노부스케 총리, 아베 신타로 외상에 이어 3대째 아베 일족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2004년 자민당 간사장이던 아베 총리와의 대담집 ‘이 나라를 지키는 결의’를 펴내기도 했다. 그런 오카자키가 지난 5일 “위안부 문제는 별일 아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개 극우인사의 망언을 주목할 이유는 없지만 그가 아베 외교의 스승 격이니 뒷맛이 개운치 않다. 비뚤어진 역사인식을 지닌 인사들을 골라 그들에게 둘러싸인 아베 총리다. 그래서 지난 4월 미국 방문 때 했던 ‘위안부 사죄’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더욱 의심스러워진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동유럽 MD’ 미·러 氣싸움 가열

    |파리 이종수특파원|푸틴은 미국을 향해 날을 세우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부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체코 등 동유럽 미사일방어(MD) 순방에 나섰다. 이 와중에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중재하는 데 곤경에 처했다. 미국의 동유럽 MD 체제 구축을 둘러싼 미·러의 기싸움도 점입가경이다.6일(이하 현지시간)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열리는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러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핵전쟁’까지 언급할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다. ■ 러시아-”절대 안돼” ●푸틴 “北·이란, 美 공격할 로켓 없다” 푸틴 대통령은 3일 모스크바 인근 자신의 농장에서 가진 회견에서 미국의 MD 시스템을 겨냥,“북한·이란은 미국이 요격해야 할 만큼 (고성능)로켓을 확보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의 MD시스템 구축 명분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핵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발언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푸틴의 발언은 행동을 강행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기보다는 강력한 외교적 경고를 담고 있는 수사지만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란 평가다. 푸틴은 “미국이 계획을 바꾸지 않을 경우 ‘보복적 수단’이 취해질 것”이라는 경고까지 내놓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세계 전략균형을 흔들 것” “새 군비경쟁과 냉전시대를 초래할 것” “유럽을 ‘화약통’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까지 냉전 시대의 미·러 관계를 방불케 한다. ■ 미국-마이웨이 ●부시 “냉전 끝나… 러시아 적 아니다” 그렇지만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예정대로 4일 MD기지 설치를 협의하기 위해 동유럽 순방을 강행했다. 부시는 5일 “동서 냉전은 끝났고 러시아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해명하며 푸틴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부시 대통령은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대통령과 협의했고 G8회담 마지막 날인 8일 폴란드도 방문한다.4일 첫 방문지 체코에 도착한 부시를 맞이한 것은 수백명의 반미 시위대였다.‘부시는 반성하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대는 프라하 성 인근 대형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또 수백명의 학생들이 미 대사관 인근에서 반미 구호를 외치며 힐탑 성까지 행진했다. 체코 국민 61%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미사일 방어기지가 들어서는 데 반대했다.57%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체코인들은 MD 레이더 기지를 세우더라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통제 아래 둬야 한다며 미·러 대결을 부담스러워했다. ■ EU-눈치보기 ●EU, 중재안 마련에 속 태워 상황이 악화되자 발등의 불은 EU 회원국들에 떨어졌다.G8회담 참가국인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은 양국 갈등이 유럽정세에 악영향을 미칠까 중재안 마련에 가슴을 태우고 있다.EU 순회의장국이자 G8회담 주최국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조심스러운 자세로 상황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고 현지언론들은 전했다. 그녀가 이끄는 기독민주당 소속 칼-테오도르 주 구텐베르그 의원도 “지금은 푸틴을 자극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중재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말을 주의깊게 듣겠다. 솔직한 대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장 밥티스트 마테이 외무부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으로 초래된 우려를 완화하기 위한 깊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등 다급한 심정을 표출했다. 미·러 갈등에 결국 피해를 볼 당사자는 EU 자신들이란 생각이 EU 주요 국가들의 중재 행보를 재촉하고 있다고 현지언론들은 전했다. vielee@seoul.co.kr ■ 푸틴 최근 발언 ▲“미국, 동유럽 MD구축 강행땐 핵전쟁 촉발할수도”(6월 3일 서방 주요언론 회견) ▲“미,MD구축은 러시아 겨냥한 것”(6월 3일 서방 주요언론 회견) ▲“나는 간디 이후 유일한 민주주의자”(6월 3일 서방 주요언론 회견) ▲“미국이 군비경쟁 나서도록 러시아 자극”(6월 1일 서구 언론 기자회견) ▲“미국이 동유럽을 신무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5월 31일, 그리스 대통령 회동) ▲“자기 의사를 강요하는 외교정책은 제국주의”(5월 31일 기자회견) ▲“미국의 동유럽 MD 구축은 유럽을 화약통으로 만들려는 기도”(5월 30일 포르투갈 총리 회동) ▲“미국의 MD 구축은 새 군비경쟁 가속화 가능성”(5월 24일 오스트리아 대통령 회담)▲“인권을 중시하는 유럽연합이 왜 미국 관타나모 수용소 인권은 거론하지 않는가?”(5월18일 EU와 정상회담)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22)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Ⅳ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이 심하전역(深河戰役)에서 패하여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은 조선 조야(朝野)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한편에서는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들여 가두라는 아우성이,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항복 때문에 조선도 오랑캐가 되고 말았다는 비난이 터져나왔다. 명 일각에서는 조선군의 항복이 고의적인 것이라는 의구심과 조선에서 다시 원병을 동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광해군은 이 같은 안팎의 아우성을 잠재우고 패전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명 원정군의 실상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薩爾滸) 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1619년 3월1일부터 4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10만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후금군의 전사자는 고작 200명 정도였다. 청나라 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에서는 ‘이 같은 전과는 하늘이 후금을 도왔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적었다. 후금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예측했던 것처럼, 명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참패였다. 명군은 우선 병력에서 후금군을 압도하지 못했다. 명군 지휘부는 47만의 대군을 동원한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 순수 명군 병력은 10만이 채 되지 못했다. 당시 후금군은 6만 정도였다. 공격군의 병력이 수비군의 병력보다 3배 정도는 많아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병가(兵家)의 정설임을 고려하면 명군은 우선 원정군의 면모를 제대로 갖췄다고 하기 어려웠다. 명군 병사들의 자질 또한 열악했다. 원정군의 병력 가운데 상당수는 사르후 전역 직전에 끌어 모은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중에는 시정의 무뢰배나 비렁뱅이들이 많았다. 그들을 갑자기 훈련시켜 정예병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이 같은 병력 100만을 끌어모아도 적 한 명을 죽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였다. 갑자기 끌어모은 오합지졸로 후금의 철기(鐵騎)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명군의 무기와 화력 역시 문제가 많았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군을 지휘했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의 사령관 유정(劉綎)의 휘하에는 대포조차 없었다. 좌익중로군(左翼中路軍) 사령관 두송(杜松) 역시 조선군 화기수 300명을 끌어다가 선봉으로 삼았다. 변변한 화력을 갖추지 못한 채 객병(客兵)인 조선군 화기수들을 서로 먼저 끌어가려고 했다. 명군 지휘관들은 서로 전혀 인화(人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네 개 방면의 부대로 편제된 명군은 본래 3월1일을 기하여 일제히 허투알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약속했는데, 주력군인 좌익중로군을 이끌던 두송은 약속을 어기고 하루 일찍 출발했다. 공명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대는 후금군의 정탐에 걸렸고, 고지를 선점한 후금군의 돌격전에 말려 참패하고 말았다. 두송의 패배 이후 마림(馬林)과 유정이 이끄는 나머지 부대들도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광해군의 전후 수습책 병력, 병사들의 자질, 무기, 지휘관의 인화와 지휘 능력 등 승패를 결정하는 모든 측면에서 명군은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조선 내부에서는 패전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강홍립과 조선군에게 돌리고 있었다. 심지어 ‘명이 요동 전체를 누르하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순전히 강홍립 때문’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 신료들도 있었다. 전쟁 직후 명 조정과 요동에서는 미묘한 소문이 돌았다.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군이 고의적으로 후금군에게 항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투항한 강홍립이 후금 진영에 머물고 있는 사실에 의구심을 나타내고, 조선 조정이 강홍립의 가족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주시했다. 명은 강홍립의 투항을 계기로 조선이 후금 측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서광계(徐光啓)는 조선과 후금이 연결되는 위험성을 강조하고, 자신이 조선으로 가서 조선 군신(君臣)들에게 유시(諭示)하여 그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자청했다. 서광계는 임진왜란 당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키고, 조선을 다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야흐로 명의 압박이 다시 가중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의 의심을 불식시키고, 서광계 등의 재징병 요구를 막아내기 위해 부심했다. 그는 우선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의심을 차단하기 위해 김응하(金應河)를 현양(顯揚)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는 원정군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출전했다가 전사한 인물이었다. 후금군의 공격으로 진영이 함몰된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하고 싸우다가 순국한 용장이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을 빼들고 적과 맞섰고, 오른손에 화살을 맞자 왼손으로 칼을 바꿔 잡고 끝까지 저항하여 후금군조차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이 의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에 김응하를 모시는 사당을 짓도록 했다. 또한 그의 전공(戰功)을 찬양하는 시집 ‘충렬록(忠烈錄)’을 편찬했다. 편찬 이후 충렬록을 요동 지역까지 유포시켰다. 조선군 전체가 김응하처럼 용맹하게 싸웠다는 사실을 명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강홍립의 항복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명의 재징병 요구를 거부하다 1619년 4월 이후, 명에서는 조선을 설득하여 후금을 치기 위한 원병을 다시 동원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명 조정은 조선에 누차 사신을 보내 병력의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물론 그 명분으로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이 거듭 강조되었다. 오랑캐 하나를 제압하지 못하여 또 다른 ‘오랑캐’ 조선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것은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체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입장은 단호했다. 더 이상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화기수들이 심하전역에서 대부분 전사했다는 것, 거듭된 흉년 때문에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재징병 거부의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이 다시 군대를 보내면 누르하치는 의주까지 쳐들어 올 것이고, 의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명의 전략 요충인 뤼순(旅順)을 공략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제시했다. 그 같은 사태를 막으려면 조선은 평안도를 확실히 지키는 것이 최상이고, 그것이 궁극에는 명을 돕는 계책이라고 설파했다. 명의 재징병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의 단호한 태도는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광해군은 “나는 이미 출병 이전부터 패전을 예견했다.”고 상기시키고 자신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료들의 반발을 묵살했다. 그는 강홍립과 연락을 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홍립으로부터 밀서(密書)를 전달받아 후금의 내부 정세를 파악했다. 신료들은, 강홍립의 투항 직후 후금이 보내온 국서를 소각하여 명으로부터 의심을 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국서에 속히 응답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들을 질타했다.‘우리에게 털끝만큼도 믿을 만한 형세가 없는 처지에 고담준론(高談峻論)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오랑캐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신료들이, 출병과 패전 때문에 재정 상황이 어려워졌음을 들어 궁궐 건설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일축했다.‘궁궐 공사를 중단하면 누르하치의 목이라도 베어올 수 있느냐?’고 비아냥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병을 채근하여 패전을 초래했던 신료들에 대한 반감의 표시였다. 자신의 예측대로 맞아떨어진 심하전역 패전을 계기로 외교정책에 대한 광해군의 자신감은 커졌다.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고, 신료들의 궁궐 공사 중단 건의를 묵살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부작용을 부르는 법이다. 이미 폐모논의 때문에 광해군을 삐딱하게 보고 있던 재야의 신료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광해군에 대한 반감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하전역 이후, 외교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가열되는 와중에 인조반정의 조짐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프렌치 리포트] (28) ‘솔리다리테’의 힘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에서 보듯이 프랑스는 기존의 사회 모순에 저항하며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낸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권을 중시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한다. 프랑스 사회를 진보성향으로 만들면서, 민주주의가 꽃피게 만든 보편적 가치는 다름 아닌 ‘솔리다리테(solidarite)’ 정신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연대(連帶)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좀 어렵다. 시위 현장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단순한 명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동의 선(善)이나 인류애의 실천을 위해 함께 행동하며,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공동체 의식이라고 이해하는 게 옳다. 톨레랑스가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토양을 이루는 사회적 가치라면 솔리다리테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회적 동력이 된다. ●박애정신에서 파생된 솔리다리테 솔리다리테의 뿌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이념 중 하나인 박애(博愛)다. 박애란 인종적 편견이나 국가적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 전체의 복지증진을 위해 전 인류가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인권존중과 인류애까지 포괄한다. 박애정신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유전자처럼 심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혁명이 일어난 지 2세기가 넘었음에도 여전히 ‘솔리다리테’로 형질을 드러낸다. 지난해 연말 프랑스 사회를 뜨겁게 달군 ‘빨간 텐트 시위’는 솔리다리테의 힘과 프랑스인들의 박애주의를 다시 한번 입증한 사건이었다. 노숙자들의 고단한 삶을 가슴 아파하면서 이들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대우에 분노한 영화 제작자 장밥티스트 르그랑과 영화배우 오귀스탱 르그랑 형제는 몇몇 친구들과 ‘돈키호테의 아이들’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돈키호테의 아이들’은 사비 3200유로를 들여 텐트 100여개를 구입, 지난해 12월16일 아침부터 생마르탱 운하변에 텐트를 설치하고 노숙자들에게 개방했다.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노숙자들을 위한 텐트가 200여개로 불어나고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노숙자의 어려움을 직접 체험하려는 파리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텐트촌은 세계적인 화제의 장소가 됐다. 대선을 4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각 당의 대권 후보들이 텐트촌을 찾아 지원을 약속했다. 노숙자 정책이 정치쟁점으로 부각되면서 ‘돈키호테의 아이들’ 대표단은 사회연대 담당 각료인 카트린 보랭을 만나 ‘생마르탱 운하 헌장’을 건네며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주문했다. 이 문서는 노숙자들 주거 문제를 다루는 상시 기구를 개설하고 임시 수용시설 추가 설치 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정부는 ‘주거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했다. 지난 2월 하원을 통과한 새 법안에 따르면 2008년 말부터 정부는 노숙자, 빈곤 근로자, 아이들과 함께 소외된 편모들에게 거처를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 적절한 거처를 제공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 공공 주택 제공 요구에 관한 대처가 비정상적으로 지체되는 경우도 2012년 1월부터는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주거권을, 교육받을 권리처럼 법적 기본 권리로 보장한 것은 유럽에서 스코틀랜드에 이어 두 번째다. 솔리다리테는 프랑스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사회적 가치다. 프랑스가 무척 개인주의가 발달한 반면 인류애에 대한 인식이 개개인에게 강하게 각인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존경받는다. 노숙자 공동체 엠마우스를 창설한 ‘빈민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가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것도 사리사욕을 떠나 박애정신을 스스로 실천하며 한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라크 전 대통령에게 좀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라고 대놓고 쓴소리를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피에르 신부가 1949년 만든 엠마우스회는 현재 50여개국에 회원과 시설을 가진 국제적 단체가 됐다. 지난 1월 그가 94세를 일기로 서거했을 때 프랑스 온나라가 애도했다. ●인류애를 중시하는 사람들 솔리다리테를 얘기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콜리슈를 빼놓을 수 없다. 퉁퉁한 몸매에 약간 머리가 벗어져 외모가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프랑스인들 사이에는 인기가 있었고 심지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다. 콜리슈는 방송·영화 출연과 음반 취입 등으로 다양한 연예 활동을 하면서 1985년 ‘마음의 식당’이라는 뜻의 ‘레스토 뒤 쾨르(Restos du Coeur)’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일자리도 없고, 거처도 없이 떠도는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한 더운 식사를 식탁에 앉아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자는 것이다. 콜리슈는 가수, 영화배우, 코미디언 등 동료 연예인들을 규합해 콘서트를 열어 모금활동을 하는 등 활발하게 운동을 펴던 중 오토바이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음은 물론이다.‘레스토 뒤 쾨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비종교적 구호단체다.2007년 현재 4만 80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67만명에게 7500만끼의 식사를 제공했다. ●외교정책 전면에 나선 인권정책 프랑스는 시민사회답게 수많은 비영리 단체와 구호단체, 협회들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90만개의 구호단체나 협회가 있으며 매년 6만 5000개씩 새로 만들어진다. 전체 인구 4만 5000명에 불과한 앙굴렘이라는 도시에 2000개의 구호단체가 활동한다. 전체 노동력의 5%에 해당하는 130만명이 상근하고 있다니 고용효과도 크다. 최근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인도주의 구호 활동가 베르나르 쿠슈네르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1971년 ‘국경없는 의사회(MSF)’를 창설한 인도주의 의사로 1997년 보건장관과 코소보 행정관을 역임했다. 좌파인사인 그를 영입해 외무장관에 임명했다는 것은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끄는 새 정부가 인권 정책을 한층 강화할 것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lotus@seoul.co.kr
  • [서울광장] ‘외교 대통령’ 멋지지 않은가/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외교 대통령’ 멋지지 않은가/이목희 논설위원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외교관을 ‘외유 도우미’로 생각한다. 외국여행 때 공항부터 모든 일정을 충실히 챙겨줘야 욕을 않는다. 대사관저에서 폼나는 식사를 한번쯤 해야 한다. 접대받은 뒤 인식이 나아지면 좋으련만, 실제는 반대다. 수영장이 딸린 호화관저 생활, 수시로 즐기는 나이스 샷, 교민 위에 군림. 국회의원들이 눈치 봐가며 1년에 며칠 누리는 호사를 매일 향유하는 이로 외교관을 치부하기 십상이다. 대선주자 주변을 보자. 대사 출신과 외교안보 학자들이 포진, 거창한 외교정책 아이디어를 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주자진영에선 표를 가진 이익단체, 직능단체에 우선 눈이 간다. 당선 후에는 더욱 그렇다. 정권 인수위에서는 표를 몰아왔다는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커진다. 뺀질이(?) 외교관 집단은 손봐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쑤다. 취임 뒤 첫 외국순방을 다녀오면 대통령의 외교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하지만 국가원수로서 호화로운 의전, 현지 외교관들의 극진한 모심에 감복하는 수준이다. 지구촌의 중견국가로서 한국 외교가 나아갈 바를 제대로 깨달으려면 몇년이 걸린다.“외교기반을 확실히 만들자.”고 뒤늦게 의지를 다져보지만 막바지로 치닫는 임기에 후회가 남을 뿐이다.5년 단임제에서 외교 분야의 악순환. 대통령을 힘들게 학습시켜 놓으면 바뀔 때가 되니…. 정권초부터 ‘외교 대통령’ 소리를 듣는 지도자를 탄생시킬 수 없을까. 외교부는 무력해 보인다. 잦은 해외근무에 국내 로비기반이 취약하다. 재외국민 보호 미흡을 비롯, 난타당하느라 밥그릇 찾아먹을 여력이 없다.20여년전 외교부를 출입했는데 동북아 2과의 6∼7명이 중국 업무를 담당했다. 그후 한·중 수교 등 관계발전이 엄청났다. 그런데 지금도 과 직원이 7명이라는 얘기를 듣고 경악했다. 일본은 본부의 중국 담당이 50명에 이른다. 이제는 ‘한국이 살 길은 외교’라는 사실을 미리 체득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정결한 관저, 괜찮은 식사, 반질반질한 외양이 외교의 일환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지도자. 그를 바탕으로 외교강국으로 웅비할 청사진을 내놓는 지도자.‘외교 대통령’의 기본은 과감한 외교관 확충이다. 일본의 아베 내각은 앞으로 10년 동안 외교관 2000명 증원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올해에 외교관을 50여명 늘리고, 대사관 6곳을 신설하는 것으로 외교대국 행보에 돌입했다. 인도 역시 5년안에 외교관수를 배가하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도 비슷하다. 주요국들은 다른 공무원은 모두 줄이면서 외교관은 깜짝 놀랄 정도로 늘려가고 있다. 현재 우리 외교관 수는 1700여명. 한국보다 인구가 적은 캐나다 4700여명, 네덜란드·스위스 3500여명에 비하면 턱없는 숫자다. 외교차관도 겨우 2명이 되었으나 더 늘려야 한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은 차관을 6∼9명 두고 국제회의 대표의 격을 높이는 데 활용한다. 북한마저 7명의 부상(차관)을 임명, 외교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기회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무원 5만명 증원 등 다음 정권에서 되지 않을 내용은 치우고 외교관을 능력껏 늘려보라. 외교 문외한이란 비판은 비켜갈 것이다. 차기 주자들은 호기를 맞았다.“외교관 1000명 증원, 외교차관 5명 확대, 외교관 양성 대학원 설립, 전문가 문호개방으로 출중한 외교단을 만들어 국제사회를 누비겠다.”고 공약해‘외교 대통령’의 탄생을 전세계에 예고하기 바란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핵확산 도미노 이번엔 미얀마?

    ‘핵 도미노, 이번엔 미얀마 차례?’ 미국이 미얀마에 대한 러시아의 원자로 건설 등 핵 협력 사업에 대해 발끈하고 나섰다. 북한, 이란에 이은 핵확산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 톰 케이시 대변인은 17일(현지시간) “미얀마는 핵 프로그램을 운영할 만한 법률적 토대도, 안전 규정도 갖고 있지 못하다.”며 러시아의 핵 협력계획을 비난했다. 이날 BBC에 따르면 케이시 대변인은 “핵 연료의 도난 및 의도적 전용으로 핵 비확산 노력이 손상되고 환경적 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한다.”고 경고했다. 미얀마는 핵 연료 도난 등을 막을 수 있는 안전 절차나 구체화된 메커니즘도 없다는 점도 덧붙였다. BBC는 러시아와 미얀마의 이번 ‘핵거래’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적대적 혹은 억압적으로 여기는 소위 ‘불량 국가’‘실패한 국가’들에 러시아가 기꺼이 핵 기술을 주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나치 히틀러제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며 최근 미국에 더 노골적으로 각을 세우고 있는 러시아와 미국. 두나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핵확산금지조약(NPT)이 흔들리고 핵기술이 더 확산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는 지난 15일 미얀마에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해주고 300∼350명의 핵 기술자를 교육시켜주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협정에서 러시아 원자력청은 “연구용 원자로 건설·설계를 위해 미얀마측에 협조를 제공한다.”고 확인했다. 건설될 원자로는 10㎿급 연구용으로 핵무기로 전용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1988년 이래 미얀마 군사정권에 무기를 공급해오고 있다. 한편 이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얀마의 정책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며 외교·안보를 위협한다.”면서 “제재조치를 1년 더 연장한다.”고 밝혔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월드이슈] 토니블레어 ‘제3의 길’ 10년 평가

    [월드이슈] 토니블레어 ‘제3의 길’ 10년 평가

    |파리 이종수특파원|블레어는 가도 ‘블레어리즘’은 남는다? 영국 언론들은 지난 10일 공식 사임 의사를 밝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10년’에 대해 이라크 파병으로 빛이 바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블레어리즘’이라고 불리는 그의 10년은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당 개혁에서 시작해 영국, 잠자던 유럽 대륙을 깨운 블레어리즘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집중 분석해 봤다. “어떤 정권이든 실수를 하지만 ‘제3의 길’은 성공했다.” 토니 블레어가 선택한 ‘제3의 길’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런던 정경대 교수는 지난 9일 프랑스 일간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단정했다. 이어 그는 “신노동당은 중도 좌파로서 사회적 정의와 경제번영을 결합시키는 개혁 프로젝트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경제를 가장 중시한 모델” 블레어가 추진한 ‘제3의 길’은 시장 경제와 유럽의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을 결합한 것이다. 경제발전 없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블레어리즘은 경제 특히 공공서비스 분야 확충에 주력했다. 공공분야의 투자를 대폭 늘려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45.4%까지 늘렸다. 그 결과 10년 동안 7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취업률을 75%대까지 끌어 올렸다. 특히 교육·보건 분야에서만 각각 30만,22만 40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JP모건 체이스 은행의 경제분석가 말콤 바는 “영국의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공공 서비스를 확충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는 다양한 거시경제 수치에서 잘 드러난다.10년동안 경제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가 집권한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2.8%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 전망치는 3.25%다. 또 블레어시대 출범 직후인 1998년에 7.5%였던 실업률도 10년동안 4∼5%대로 내렸다. 인플레이션율도 2.6%에서 지난해 2.2%로 내렸다. 경제성장률과 인플레이션율은 선진7개국(G7) 가운데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의 발전상은 프랑스와 견줘보면 극명해진다. 프랑스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1%였다. 그나마 최근 들어 나아진 것이다. 실업률도 8.3%에 이른다. ●‘잠자던 유럽’을 깨우다 블레어가 주창한 ‘제3의 길’은 프랑스와 독일 등 ‘낡은 대륙’ 유럽을 흔들었다. 그의 등장 이후 시장경제 혹은 영국과 미국식 발전 모델을 추진하려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EU 순회의장국인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미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새 대통령도 후보시절 공공연하게 ‘영·미식 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측도 “사회당이 지향할 성공모델은 블레어 총리가 이끈 노동당의 변화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블레어는 또 유럽 통합에도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그는 “유럽연합(EU)은 영국의 미래와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2005년 크로아티아와 터키의 EU 가입 협상을 추진하는 등 유럽 통합에 박차를 가했다. 나아가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집행위원장과 함께 EU의 주축이던 프랑스와 독일을 변방으로 몰아내면서 대륙 통합과 시장경제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일 사민당의 유럽의회 의원인 엘마르 브로크는 “블레어는 유로존 가입과 EU헌법 채택에 주저했지만 유럽통합에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vielee@seoul.co.kr ■ 교육·빈곤퇴치 등 ‘삶의 질’ 대폭 개선 |파리 이종수특파원|블레어리즘 10년은 영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블레어가 비록 ‘이라크 파병’이라는 암초를 만나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국내 분야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10년 사이에 영국 국민들이 체감하는 변화로 공공 서비스를 꼽은 뒤 구체적으로 ▲교육 ▲보건 ▲빈곤퇴치 분야에서 삶의 질이 대폭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공교육 강화…아동문맹률 41%→21%로 이에 따르면 블레어가 비중을 둔 ‘빈곤과의 싸움’은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세금공제 정책 등으로 53%의 빈곤층이 혜택을 봤다. 또 세제시스템 개혁으로 어린이 3명 가운데 1명꼴이었던 빈곤 아동이 현재 60만명 이하로 줄었다. 다른 축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 확대다. 특히 ‘슈어 스타트’(빈곤 아동 구제정책)을 내걸고 3500여곳의 아동센터를 중심으로 아동 보육·건강·조기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22만여명의 인력을 늘려 공교육 강화에 나섰다. 급식여건 개선, 스포츠·문화 활동 등 방과후 수업 강화로 사립학교 의존율이 낮아졌다. 읽고 쓰기,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아동 비율도 59%에서 79%로 늘어났다. 병원·학교 환경도 크게 나아졌다.10년 전에는 환자나 학생들은 지붕이 낡은 건물, 심지어 2차대전때 지은 건물에서 진료를 받거나 수업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새 건물로 단장됐다. ●보건환경등 공공서비스도 눈부신 발전 이에 힘입어 국민들이 체감하는 공공서비스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공립 병원에 30만여명의 고용을 늘리면서 보건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년 전에는 공립 병원에서 한번 수술을 받으려면 6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국민이 28만 3800여명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99명으로 급감했다. 이에 따라 사립병원을 찾는 횟수도 줄어들고 사보험 가입 비율도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암·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크게 줄었다. 부수적으로 공무원의 위상과 처우도 많이 나아졌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민 70% 이상이 교사를 지망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또 노동시간 유연화, 유급 출산휴직제 등으로 여성 근로조건도 대폭 개선됐다. 블레어가 도입한 최저임금제의 혜택도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갔다. 이밖에 19세기 수준의 철도 사고 비율도 획기적으로 나아졌다는 분석이다. vielee@seoul.co.kr ■ ‘포스트 블레어’ 경제기조 안바뀔듯 |파리 이종수특파원|토니 블레어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은 사람이 후임 총리로 유력한 고든 브라운(57) 재무장관이다. 그가 다음달 24일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당수로 선출돼 총리가 될 경우 어떤 점에서 블레어리즘과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질지 주목된다. 현재까지 나온 유럽 언론의 전망을 종합하면 전반적으로 ‘브라운 시대’는 블레어리즘의 연장선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주된 이유는 그가 블레어의 ‘정치적 동지’로서 블레어리즘을 자리잡게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잉글랜드 은행 독립이다. 그는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 경제 논리에 맞게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잉글랜드 은행을 밀어붙였다. 경제정책에 이어 외교정책도 블레어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최근 좌파인 파비앙 소사이어트가 마련한 정견 발표장에서 “미국과 유럽의 가교 역할을 한 블레어 총리의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약간 비판적이던 이전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유와 기회균등, 특히 개인의 자유라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강력하면서도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블레어의 지지율 추락을 가져온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 데다 지금도 이라크 정부와 국민이 주둔을 원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영국 주둔군을 철수하면 ‘잘못된 행동’”이라고 밝혀 블레어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방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 핵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적 협력과 조율을 통해 풀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다국간 공동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북아일랜드식 해법’을 내놓았다. 두 국가를 모두 인정하면서 경제개발 지원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복안이다. vielee@seoul.co.kr
  • 한미 前당국자, 北고농축우라늄 ‘설전’

    “2002년 북한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사태에 대해 재조사를 해야 한다.”(양성철 전 주미대사) “당시 HEU에 대한 미측의 정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북한도 HEU의 존재를 시인했다.”(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 한·미 양국의 전직 고위 외교 당국자들이 14일 세종연구소와 브루킹스연구소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2007년 서울-워싱턴 포럼’에서 북한 HEU문제에 대한 진실게임을 벌였다. 설전의 주인공들은 지난 2000∼2003년 주미대사를 지냈던 양성철 전 대사와 북핵 6자회담 초기 미측 수석대표였던 제임스 켈리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 등 3명이다. 양 전 대사는 최근 미국 내 HEU 정보의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된 점을 들며 부시 행정부가 2002년 당시 북한의 HEU 현황을 과대포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HEU문제가 북·미 제네바합의를 해체할 만큼 큰 문제였는지, 북·미 관계를 악화시켜 핵실험까지 야기할 만큼 중요했는지 의문시된다.”며 “HEU문제는 언제라도 재조사를 해야 하며 당시 대북 외교정책 입안자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양 전 대사의 발언에 대해 켈리 전 차관보는 “미 행정부가 2002년 여름에 얻었던 HEU 관련 정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그 문제를 지금 이 자리에서 논의하긴 부적절하다.”며 응수했다.2002년 켈리 전 차관보와 함께 방북했던 스트라우브 전 국무부 과장은 “북한은 당시 HEU 프로그램을 추구했으며 우리는 북한 강석주 부상이 한 발언으로 비춰 HEU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반박했다. 한편 켈리 전 차관보는 기조발제에서 “한국사람들이 북한핵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북핵을 단지 미·북간 문제로 보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자 심각한 실수”라며 “남북관계 개선 계획들이 북한에 현금이나 보조금을 주는 형태로 운영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프렌치 리포트] (27) 나폴레옹·드골 그리고 사르코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번에 떠오르는 인물이 나폴레옹과 드골이다. 프랑스 어디를 가나 이들 두 사람의 거대한 그림자를 피할 길이 없다. 그만큼 나폴레옹과 드골은 프랑스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프랑스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였기에 두 인물의 지도력은 더욱 빛을 발했을지 모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대혁명 이후 혼란의 와중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제도 전반에서 근대국가로서 프랑스의 기틀을 다졌다. 샤를르 드골(1890∼1970)은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10년 만에 기적적으로 일으키고 프랑스를 독일과 맞먹는 공업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유럽통합의 주역이 됐다. 지나치게 강한 자아(自我),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한 탓에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강력하고 위대한’ 프랑스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1840년 12월15일 아침,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유해가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와 콩코드 광장을 거쳐 앵발리드(상이군인병원이라는 뜻) 앞 마당에 도착했다.10만명의 파리 시민들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지 19년 만에 파리에 돌아온 영웅 나폴레옹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센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앵발리드 지하에 안치됐다. 나폴레옹처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뛰어난 재략과 강력한 의지로 정상에 오른 전쟁영웅이지만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 몬 침략자이자 독재군주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찌됐건 그는 52년의 짧은 생애 동안 프랑스 역사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200년 전 나폴레옹이 만든 많은 제도들이 아직까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는 전국을 현(縣)이라고 불리는 98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었다.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이 행정단위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시켰으며 행정능률을 배가시켰다. 그는 또 수백년간 이어져온 방대하고 모순된 구법전과 법률을 재정비해 간결명료한 최초의 근대적 민법인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했다. 세습 귀족제의 폐지, 상속권의 평등, 인종차별 철폐, 결혼과 이혼의 자유 등을 규정한 이 법전은 나폴레옹 원정군에 의해 전 유럽에 퍼져 근대 유럽국가들의 법전편찬에 본보기가 됐다. 그는 국립 프랑스 은행을 설치하고, 전국에 세무소를 설치해 국가 재정을 확보했다.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만든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그만큼 프랑스를 변화시킨 인물은 없었다. 파리의 모습도 바꿔놓았다. 그는 파리를 통치의 중심지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범 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새로운 거리, 웅장한 건물, 분수대 등을 짓도록 했다. 그 중 하나가 파리의 상징물이 된 개선문이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4년 위대한 프랑스 군대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명령을 내려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슷한 외관의 마들렌 성당도 프랑스군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콩코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고, 그 뒤편의 방돔광장에 있는 청동제 원기둥은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노획한 1200대의 대포를 녹여 만든 것이다. 루브르가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들을 갖춘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 위상을 갖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및 이집트 원정 덕분이다. 프랑스에서 파리를 빼놓을 수 없듯이 나폴레옹 없이 프랑스 근대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프랑스의 마지막 거인’ 드골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프랑스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전쟁 중 영국에서 반(反)나치 항전을 지휘한 드골은 국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해 임시정부의 수반이 됐다.1946년 제 4공화국이 들어서고 전후 산업화가 시작됐으나 정쟁(政爭)이 그치지 않았다.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자신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드골은 스스럼없이 물러났다. 제 4공화국이 붕괴되기 직전 드골은 ‘조국의 구원자’로서 당당하게 복귀했다. 강력한 대통령제에 입각한 제 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1958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은 알제리를 비롯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평화적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식민지 문제를 해결했다. 프랑스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 프랑스는 일찍이 한번도 참된 프랑스였던 적이 없다.”며 국민들에게 ‘앞으로!’를 외쳤다.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효과적인 경제·사회 모델, 독자적인 외교정책이 어우러지면서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는 급속하게 안정됐다. 드골은 아데나워 독일 수상과 함께 독·불협력 시대를 정착시키고, 반미 자주외교를 펼치면서 핵무기 개발과 군수산업 개발에 전력했다.“우리의 운명은 기계가 결정한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첨단 항공우주기술, 초고속열차(TGV), 컴퓨터산업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1967년 영국을 제치고 세계 5대 산업국이 됐다. 그러나 학생과 노동자들이 합세해 일으킨 68혁명 여파로 1969년 4월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1970년 11월 드골은 세상을 떠났지만 영향력은 여전하다. 프랑스는 아직까지 제 5공화국 헌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시라크를 비롯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파출신들이 집권층을 장악하고 있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능력이 있는 직업공무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드골이 설립한 국립행정학교(ENA) 출신 엘리트들이 국정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샤를 드골 국제공항, 파리 중심가의 샤를 드골 에트왈 광장, 핵잠수함 샤를드골 호 등 그의 이름을 붙여 ‘마지막 거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역사는 흐른다. 최근 프랑스 전체를 뜨겁게 달궜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중도우파정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가 5공화국 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 세계화, 유럽연합의 확장, 이민 2·3세들의 통합문제 등으로 프랑스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사르코지가 과연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푸틴 “美는 나치 제3제국”

    ‘미국은 제3의 나치?’ 블라디미르 푸틴(얼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의 외교정책을 ‘제3제국(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의 독일)’에 비교하는 등 미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푸틴은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나치독일 격퇴 62주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 이같이 말했다고 10일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푸틴은 “전쟁 위협은 줄어들지 않았다. 모습만을 달리할 뿐”이라면서 “(나치 독일의) 제3제국 때처럼 이러한 새로운 위협들은 동일하게 인간 생명을 경시하고 있으며 예외적임을 주장하고, 세계에 대한 독재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미국을 향해 퍼부어 온 일련의 독설 시리즈 최신판인 셈이다. 푸틴은 이라크전, 동유럽 등에 대한 미사일방위시스템 구축,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영역 확대 등과 관련해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면서 미국에 적개심과 대결 자세를 드러내 왔다. 이날 푸틴은 “평화시기의 실수와 잘못에서 전쟁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우리는 전쟁을 잊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미국에 대한 경계심과 대비 태세를 강조했다. 이같은 발언에 대해 크렘린 당국은 구체적인 의미 부여와 설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크렘린 업무에 깊이 관여해 온 세르게이 마르코프 러시아 정치연구소 소장은 “푸틴의 발언은 미국과 NATO를 겨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가 자국의 영역 확대를 반대한 서방 국가들에 반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최근 들어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과 동유럽 지역에 미국이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있는 것에 ‘생존공간이 줄어들었다.’며 격분하고 있다. 전통적인 러시아의 영향권을 미국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고 있다는 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 NATO가 러시아 국경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압박하자 러시아의 자존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반발해 왔다. 한편 푸틴은 이날 “나치를 물리친 2차 세계대전의 숭고한 경험을 파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친미적인 에스토니아 정부가 옛 소련군 동상을 이전한 것을 간접 비난했다. 전승기념식을 마친 푸틴은 이날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순방길에 올랐다. 이번 순방은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자원 개발 참여 확대를 시도하고 있는 미국·중국 견제를 위한 주변국가 다독거리기용으로 알려졌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美네오콘 초청 특강 ‘눈길’

    한반도 평화모드 조성에 올인하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미국 네오콘 인사를 초청, 주목된다. 강기정·김재윤·서혜석·안민석·양승조·윤호중·이상경 의원 등 당내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미래포럼’이 대북 강경파의 수장격인 딕 체니 미 부통령의 전 외교정책보좌관인 스티브 예이츠를 초청한 것으로 9일 알려졌다. 스티브 예이츠 전 보좌관은 10일 국회에서 ‘차기 정권의 한반도 외교정책’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한다. 행사준비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상경 의원은 “이미 다른 단체의 초청으로 방한 중인 스티브 예이츠 전 보좌관이 한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 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혜석 의원도 “스티브 예이츠 전 보좌관을 네오콘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어떤 문제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면 열어 놓고 토론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체니 부통령의 최측근으로 함께 일했던 스티브 예이츠 전 보좌관은 중국 전문가로, 보수·강경 성향이지만 신보수주의자(네오콘)라기보다 실용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한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6개월 빨라진’ 부시 레임덕

    ‘6개월 빨라진’ 부시 레임덕

    2009년 1월까지 임기를 2년여 남겨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이 역대 대통령보다 6개월 이상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부시 행정부내 고위직의 사임 행렬도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딕 체니 부통령이 200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3일 시사주간지 타임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는 등 최근 지지율도 역대 최저인 28%로 집계되고 있다. 그의 레임덕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8일 AP통신 등 미 언론들에 따르면 최근 6개월 동안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등 국가안보 핵심 라인에서 사임을 발표한 고위직은 20명을 넘어섰다. 부시 대통령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도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등 고위직 전반에서 ‘탈출 러시’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뉴욕대학 폴 라이트 교수는 “이는 매우 많은 숫자로 공석인 자리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면서 “대규모 탈출 현상이 과거보다 6개월 이상 빨라졌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이유는 워싱턴 정계뿐 아니라 행정부 전반에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체니 부통령이 이번 대선에 출마하지 않는 게 확실시되면서 누가 승리하더라도 물갈이를 피할 수 없다는 전망이다. 체니 부통령은 수차례 심장수술을 받았고 심장박동기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신임을 받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현재로선 대선 출마를 고려치 않고 있다. 그녀는 “대선 출마에 관심이 없다.”고 강조하는 등 퇴임 후 대학으로 돌아갈 뜻을 내비치고 있다. 이라크 전쟁도 갈 길이 먼 부시 행정부의 발목을 잡는 수렁이다.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무대 뒤로 사라졌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민의 혐오감도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인 10명 중 6명이 이라크 전쟁을 실수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부담을 지게 되는 ‘전쟁 책임론’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정서도 한몫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 6개월 동안 12명이나 물러난 국무부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이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진단까지 나올 정도다. 톰 케이시 국무부 부대변인이 “(잇따른 사임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또 다른 기회를 찾아 떠나는 일상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역설했지만 위기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중론이다. 라이트 교수는 “라이스 국무장관이 아무리 뛰어도 부시 외교정책의 퇴조를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다시 불붙나

    ‘영국과의 결별’을 주장해온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지난 3일(현지시간)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되면서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문제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SNP는 스코틀랜드 의회 129석중 47석을 얻었다. 노동당은 1석 적은 46석으로 1955년 이래 처음으로 2당으로 전락했다. 보수당은 17석, 자유민주당은 16석, 녹색당은 2석을 차지했다. 알렉스 샐먼드 SNP대표는 그동안 “제1당이 되면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게다가 올해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 3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연내 의미있는 논의 진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독립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선 SNP가 스코틀랜드 의회를 완전 장악하는 데 필요한 과반수 의석 65석을 확보하려면 다른 정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 자유민주당 모두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또 SNP를 지지한 스코틀랜드 주민들 전부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원한다고 보기도 힘들다. 이라크전 참전과 친미 외교정책을 추진한 토니 블레어 정부에 대한 반발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더 타임스가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완전 독립을 원하는 스코틀랜드인은 22%였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의 정치전문가 사라 오츠는 “우리는 알랙스 샐먼드를 지도자로 둔 불안정한 소수 정부를 맞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차기 총선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잉글랜드 지방선거에서는 보수당이 무려 875석을 추가해 5113명의 지방의회 의원을 탄생시켰다.1978년 이래 가장 많은 숫자다. 노동당은 485석을 잃어 1803명 의원이 당선됐다. 웨일스 의회 선거에서는 전체 60석중 노동당이 3석을 잃어 26석을 차지했고, 웨일스 민족주의 정당인 플레이드 쿰리가 3석을 추가해 15석으로 의석을 늘렸다. 선거 전문가들은 집권 노동당이 블레어 총리 시대를 마감하는 이번 선거에서 참패했으나 여론조사 예상치보다는 결과가 좋아 선전했다고 분석했다.이순녀기자 연합뉴스coral@seoul.co.kr
  • [시론] 아베 방미와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곽재성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

    [시론] 아베 방미와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곽재성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

    지난해 9월13일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가 과거 일본 군국주의의 위안부 범죄를 비판하고 일본 정부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이제 역사적인 하원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번 결의안은 일본 군부가 젊은 여성들을 성노예 목적으로 예속화하고 납치하도록 허용했다고 규정하고, 위안부 문제는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의 하나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미 하원은 일본 정부에 대해서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과 일본의 젊은 세대를 제대로 교육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다. 2001년과 2005년에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제출된 바 있지만 일본 정부의 로비에 막혀 상정조차 되지 못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의안에 서명한 의원들이 80명에 육박하는 등 통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미 하원의 결의안이 통과되면 캐나다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도 이에 동참할 것으로 보여 위안부문제 해결에 있어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를 내는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의안 통과가 미국의 대일 외교정책 변화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우선, 일본 정부와 우익 정치인들이 이번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하거나 사과한 적은 있으나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은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자신의 망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되자 지난 3일에는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아베의 목표는 미국 내에서 뜨거워지고 있는 일본 비판 여론을 잠재우고 하원의 표결을 부결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편으로는 일본의 사과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최대한 부각시켜 물타기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부시 대통령의 현실인식도 미덥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베 총리의 솔직한 설명에 감사하며 아베 총리와 일본을 믿는다고 말한 후, 오늘날의 일본은 2차 대전 때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무리 외교적인 발언이지만 아베의 망언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사실 그 이유는 따로 있다. 아베가 일본의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에 대한 연장안을 각의에서 통과시켰고 미국과 협력해 이라크 지원을 계속할 것이라고 거듭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문제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난여론이 거센 가운데 정치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시에게 아베는 가장 원하는 선물을 안긴 셈이다. 이쯤 되면 두 지도자가 정치적 약점을 서로 보듬어주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미 하원 결의안이 통과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다음 수순은 이를 미국의 대일 외교에 적용시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로 부시 대통령이 대일 압박을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따라서 결의안 통과 시점에 즈음하여 미국 내의 여론 형성이 매우 중요하며, 이를 위해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정부, 언론, 시민사회가 구상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곽재성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외교안보연구원 겸임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7) 조선의 일본어 역관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7) 조선의 일본어 역관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으니, 큰 나라 중국은 섬기고, 동등한 나라 일본과는 이웃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정기적으로 외교 사신을 보냈으며, 사신을 보낼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그 나라 사람들과 말이 통할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이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일부 전문가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 가서 과거시험에 급제해 벼슬까지 얻을 정도까지 중국어에 능통했다. 조선왕조도 처음부터 명나라와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건국 이듬해인 1393년에 사역원(司譯院)을 설치했는데, 초기에는 중국어와 몽고어만 가르쳤다. 태종 15년(1416)에야 정식으로 왜학(倭學)이 설치되어 30여명이 배우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가는 길이 험한 데다 중국어 역관처럼 벼슬 얻을 기회도 적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었다. 조선왕조의 관제가 갖춰지자 ‘경국대전’을 간행했는데, 사역원에 정9품 왜학 훈도가 2명 배속되어서 생도들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었다. 일본인들이 왕래하는 부산포와 제포에도 왜학 훈도가 1명씩 배치되었는데, 매달 쌀 10말과 콩 5말을 녹봉으로 받았다. 역관들의 대우는 박했지만, 북경에 한번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근무했다. 한학(漢學) 역관은 9명이 따라가고, 왜학 역관도 1명이 따라갔다. 북경에는 해마다 서너 차례씩 사신이 갔다. 일본에는 이삼십년에 한번씩 가기 때문에, 왜학 역관은 북경에라도 따라가야 돈을 벌 기회가 있었다. 역관을 뽑는 역과에는 한어과, 몽어과, 여진어과, 왜어과의 네 가지가 있다. 왜어과는 세종 23년(1441) 이전부터 실시되었다.3년마다 돌아오는 식년시(式年試)는 자(子)·묘(卯)·오(午)·유(酉)자가 들어가는 해에 실시했으며, 왕이 즉위하거나 왕실에 경사가 있으면 증광시(增廣試)를 실시했다. ●왜어 역관의 교육과 선발 왜어과는 초시에서 4명을 뽑았다가 복시에서 2명을 합격시켰다. 문과처럼 성균관이나 춘당대에서 시험을 보지 않고, 사역원에서 보았다. 처음에는 문과 급제자처럼 홍패(紅牌)를 주다가, 나중에는 생원·진사시의 합격자처럼 백패(白牌)를 주었다. 역과에 응시하려면 우선 사역원에 입학했으며 전현직 고위 역관들이 추천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관을 많이 배출한 집안 출신들이 입학하기에도 유리했다. 사역원 왜학의 생도 수는 ‘경국대전’(1485)에 15명이었다가,‘속대전’(1746)에 오면 40명으로 늘어났다.‘경국대전’ 시기에는 1차시험인 초시에서 글씨쓰기(寫字)와 함께 ‘이로파(伊路波)’‘소식(消息)’‘노걸대(老乞大)’‘통신(通信)’‘부사(富士)’ 등 14종의 일본어 교재를 시험 보고,2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속대전’시기부터는 ‘첩해신어(捷解新語)’ 한 권만 시험 보았다. 잡과 이외에 기술관 취재(取才) 시험도 있었는데, 사맹삭(四孟朔 1·4·7·10월의 1일) 취재가 원칙이었다. 전공서와 경서, 경국대전을 시험하여 1등과 2등에게 체아직(遞兒職)을 주었다. 체아직은 합격자가 많다 보니 모두 현직에 임명할 수가 없어, 한 관직에 여러 명이 돌아가며 근무하고, 근무하는 동안만 녹봉을 주는 제도이다. 사역원 녹관이 29자리였는데, 교수와 훈도 10자리를 제외하면 체아직은 15자리였다. 그러니 수직대상자인 역학생도 80명, 별재학관 13명, 전직역관 약간명, 역과 출신 권지 19명을 합쳐 10대1의 경쟁을 해야 했다. ●실용 일본어 교재 ‘첩해신어’ ‘첩해신어’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외국어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회화책이다.‘경국대전’ 시기에 시험했던 교과서 10여 종은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속대전’ 시기부터 시험 보았던 ‘첩해신어(捷解新語)’는 언해본이다. 저자 강우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10년간 지내며 일본어에 능숙했다. 귀국한 뒤에 역관 교육을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은 통신사 일행이 부산을 떠날 때부터, 도쿄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고 다시 쓰시마에 도착할 때까지 필요한 대화들이 모두 실려 있다. 이태영 교수의 역주본에서 두 가지 상황을 인용한다. 첫 번째 상황은 부산포에서 일본 선장을 만났을 때에 주고받는 인사말이다. 객은 쓰시마에서 부산포로 온 일본 선장이고, 주(主)는 그를 맞는 조선 문정관(問情官)이다. 늘상 일어나는 일이므로, 역관은 이 책을 외우며 이 대화를 미리 연습해 두었다가, 일이 닥치면 그대로 활용하였다. (객)나는 도선주, 이 분은 이선주, 저 분은 봉진이도다. (주)정관은 어디 계신가? (객)정관은 배멀미하여 인사불성되어 아래에 누워 있습니다. (주)편지(문서)를 내셨거든 봅시다. (객)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깊이 들어있고 특별한 일도 없으니 내일 보시오. (주)그것은 그러하겠지만 편지(문서)를 내가 직접 보고 그대들의 성명을 알아 부산포에 아뢰어 장계할 것이니 편지를 내시오. (객)우리 이름은 아무개이도다. (주)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오. 편지에 한 자라도 어긋나면 어떤 사람에게 시켜도 좋지 아니하니 부디 내시오. (객)그렇게 합시다. 밤이 되었으니 우선 술이나 한잔하시오. (주)술은 잘 못 먹으니 주지 마십시오. (객)쓰시마에서는 그대는 술을 잘 먹는 사람이라 들었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도쿄에서 국서를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쓰시마에서도 잔치를 베풀며 풍류를 즐겼다. 주(主)는 조선통신사이고, 객은 쓰시마주인데, 역관들은 송별잔치에 조선 악공들을 초청하는 대화도 미리 연습해야 했다. (객)출선일은 십오일이 길일이오니, 모레 하직 잔치를 하니 미리 통지를 아룁니다. 그것으로 하여 늙은 어머니와 더불어 조선 풍류를 벽틈으로 듣고자 바라니, 풍류하는 사람을 남기지 말고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주)아! 출선일을 정하시니 기쁩니다. 잔치할 바는 되도록 사양하고자 여겼더니마는 그대로 매우 수고하시니 축원 아니하지는 못할 것으로 전부터 이르시므로 이러나 저러나 마땅할 대로 합시다. 또 풍류하는 사람은 어찌 항상 불러들이지 아니하시는가? 그날은 이르심에 미치지 아니하여(말씀하시지 않아도) 다 함께 가겠습니다. (객)오늘은 마침 날씨가 좋아 진실로 먼 길에 나랏일을 마치고 삼사를 청하여 하직하는 양 기쁨이 남은 데 없으되, 그렇지만 오늘에 다다라서는 섭섭하기 아뢸 양도 없으니 편안히 노시어 축원하십시오. 저 귀한 풍류들도 어머니가 듣고 매우 귀하게 여겨 기쁘구나 하니, 이것으로써 두 나라 편안한 음덕인가 하여 감격히 여깁니다. (주)아! 아! 극진한 잔치의 자리입니다. 진실로 이르시듯이 두 나라의 믿음으로 귀한 곳을 구경할 뿐 아니라 이런 접대에 만나 바다 위의 시름도 펴매 더욱 써 기쁘게 여겨 술들도 벌써 취하였으니 돌아가고자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도공의 후예들도 통역 맡아 일본에 도착한 역관들은 ‘첩해신어’ 뿐만 아니라 ‘왜어유해(倭語類解)’라는 어휘집도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았다.1763년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의 ‘해사일기(海日記)’ 12월 16일 기록에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이 나타난다. “두 나라 말이 서로 통하는 것은 오로지 역관에게 의지하는데, 수행하는 역관 열댓 명 가운데 저들의 말에 달통한 자는 매우 드무니 참으로 놀랍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왜학 역관의 생활이 요즘 와서 더욱 쓸쓸하고, 근래에는 조정에서도 별로 권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석 역관이 내게 이렇게 건의했다. ‘물명(物名)을 왜어(倭語)로 적은 책이 사역원에도 있지만, 그것을 차례차례 번역해 베끼기 때문에 오류가 많고, 또 저들의 방언이 혹 달라진 것도 있어 옛날 책을 다 믿을 수 없습니다. 요즘 왜인들을 만날 때에 그 오류를 바로잡아 완전한 책을 만들어 익히면 방언과 물명을 환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과 수작하기에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 사신이 상의하고 바로잡게 허락해 주어, 현계근과 유도홍을 교정관으로 정하고 수석 역관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는데, 완전한 책을 만들지 모르겠다.” 말은 몇십년마다 바뀌기 때문에,‘첩해신어’를 중간한 것처럼 ‘왜어유해’도 예전의 어휘집을 수정한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어휘집 ‘화어유해(和語類解)’ 마지막 장에는 1837년 10월에 묘대천(苗代川)에서 임진왜란 때에 포로로 끌려갔던 도공(陶工)의 후예 박이원(朴伊圓)이 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왜어유해’에 없는 어휘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사쓰마번(薩摩藩)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조선어를 잊지 않기 위해 공부했으며, 풍랑에 표류해 온 조선인들을 위해 통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어 교재들은 조선어와 일본어가 변해온 자취를 보여주기도 한다. ‘첩해신어’는 새로운 외국어를 빨리 이해할 수 있는 회화책이다. 저자 강우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10년간 지내 일본어에 능숙했다. 귀국한 뒤에 역관 교육을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일본은 배를 타고 가는 길이 험한 데다 중국어 역관처럼 벼슬 얻을 기회도 적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적었다. 또 이삼십년에 한번씩 가기 때문에 왜학 역관은 북경에라도 따라가야 돈을 벌 기회가 있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CIA, 그들에게 남은 건…

    개인적인 영락을 희생하고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뛴 첩보원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세계평화와 국가를 지켰다는 자부심일까, 아니면 세계를 주무를 수 있다는 심리적 우월감일까. 영화 ‘굿 셰퍼드’의 주인공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에게 남은 것은 의심과 회의뿐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선한 목자’가 되고 싶었던 윌슨은 “친구도 애국심도 잃었다.”고 내뱉는다. 유난히 충성심과 믿음을 강조했는데도 말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베테랑 요원인 그는 과거 시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문학도였다. 하지만 남다른 국가관을 갖고 있었던 그는 대학시절 비밀조직 ‘해골단’에 가입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첩보원의 길로 접어든다. 영화는 윌슨이 몇장의 흑백 사진과 녹음테이프를 전달받는 것으로 시작된다.1961년 쿠바의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던 CIA의 쿠바 침공작전이 정보 유출로 실패된 직후다.CIA는 내부 첩자 색출에 혈안이 되고 윌슨은 사진과 테이프 속의 주인공이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직감하고 그들을 쫓기 시작한다. 그가 내부 첩자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윌슨이 살아온 삶의 허상과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도 믿지 마라.” 그 자신이 수시로 되새기고 어린 아들에게조차 귀에 닳도록 한 이 말이 멍에가 될 줄이야. 이 영화에서 화려한 액션은 볼 수 없다. 대신 2시간47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한 CIA요원의 삶이 왜, 어떻게 피폐해지는지, 그와 더불어 미국 외교정책의 또다른 얼굴이 얼마나 추악했는지가 밀도있게 그려진다. 세계 2차대전 직후 CIA가 태동하는 시대부터 1960년대 냉전시대를 아우르는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넘나들어 상당한 집중도를 요한다. 큰 굴곡 없이 밋밋하게 전개되긴 하나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빠져들기 어렵지 않다. 실제 CIA 요원을 모델로 삼았으며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피그스만 공격을 비롯한 CIA가 개입했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등장시켜 리얼리티를 높였다. 현존하는 예일대의 비밀조직 ‘해골단(Skulls and Bones)’의 실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할리우드의 쟁쟁한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뇌하는 스파이 연기를 멋지게 소화한 맷 데이먼을 비롯해 앤젤리나 졸리, 알렉 볼드윈, 윌리엄 허트, 존 터투로, 조 페시 등이 열연을 펼친다. 물론 1960년대 미국의 모습과 패션을 감상하는 맛도 빠질 수 없다. 명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두번째 연출 작품으로 ‘대부’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제작을 맡았다. 두 거장의 만남은 지난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 예술공헌상 수상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는 19일 개봉,18세 관람가.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美, 에티오피아 北무기 수입 허용 파문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 정부는 에티오피아가 최근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는 것을 알고도 허용했다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 언론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유엔은 지난해 10월9일 북한의 핵 실험 이후 결의한 제재 1718호를 통해 회원국들에 북한산 무기 수입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에 미 정부의 그같은 행동이 적절했는가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지난 1월 말 탱크 부품과 다른 무기 장비를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에티오피아 선박이 북한의 항구를 떠났다는 사실을 백악관에 보고했다. 워싱턴의 관계당국은 이에 대해 토론을 벌인 뒤 에티오피아의 이번 무기 수입을 막지는 않되 추가적인 무기 구입은 하지 말도록 압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신문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지난해 10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려는 사실을 아디스아바바의 미국 대사관에 미리 알려줬다고 덧붙였다. 에티오피아는 2001년 북한으로부터 2000만달러에 이르는 무기를 구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번 무기 구입 규모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에티오피아의 무기운송 사실을 보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미 국방부의 일부 관리들은 정보 보고서에 탱크 부품 등이 수송되고 있음이 명시돼 있기 때문에 유엔 안보리 결의에 명백히 위반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 신문은 미 정부가 에티오피아의 무기 수입을 묵인한 이유는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의 이슬람 무장세력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에서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 싸우는 미국의 정책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어 이같은 무기 구입 허용이 이슬람 과격주의자와 맞서 싸우는 한편 북한의 핵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자금을 고갈시키려는 부시 외교정책의 원칙들이 충돌한 결과로 나온 타협안이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부시 행정부가 자신의 동맹국들이 북한과 거래를 하는데 예외를 인정한 것은 처음이 아니라고 지적했다.2002년 북한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싣고 예멘으로 향하던 선박을 스페인이 억류했을 때에도 미국은 당시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체포하는 데 협력하고 있던 예멘이 항의하자 배를 풀어주도록 요청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소개했다. 미 국무부의 숀 매코맥 대변인은 이에 대한 반응을 묻는 질문에 에티오피아의 무기 수송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미국은 안보리 결의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존 볼턴 전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에티오피아측이 수입한 북한 무기를 되돌려 주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볼턴 전 대사는 “소말리아에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지만 북한에는 전 세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핵무기 프로그램이 있다.”며 “미 정부가 이를 묵인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da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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