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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배후 이슬람 ‘살라피스트’는

    이슬람권 전역으로 확대되는 반미(反美) 시위의 배후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살라피스트’가 있다고 미국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가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FP는 이집트 카이로 주재 미국 대사관 훼손 사건과 리비아 벵가지 주재 미국 영사관 습격 사건은 이들 지역에서 태동한 ‘살라피 운동’에서 비롯됐다면서 시위 현장에 알카에다가 종종 사용하던 검은색 깃발이 내걸리고, 살라피스트의 상징인 턱수염을 기른 시위자가 많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집트 수니파 계열의 살라피스트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호스니 무바라크 전 정권 아래서는 숨죽이며 지내왔다. 그러나 살라피스트가 창당한 이집트의 알누르당은 9개월 전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자유정의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아랍어로 살라프(salaf)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동조자를 의미하는 ‘선구자’나 ‘선조’라는 뜻으로, 살라피스트들은 7세기 이슬람 순수주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최근 말리에서 레바논까지, 또 인도 카슈미르에서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는 등 이슬람권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세력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FP는 지적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美, 12·12쿠데타 6년前부터 전두환 군지도자로 주목”

    “美, 12·12쿠데타 6년前부터 전두환 군지도자로 주목”

    미국은 12·12 군사쿠데타 발생 6년 전인 1973년에 이미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군부의 잠재적 지도자로 주목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31세였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차세대 지도자로 지목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72년 12월 18일 미 국무부의 지시에 따라 1973년 3월 30일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 보고한 8쪽 분량의 비밀전문에 기재돼 있으며, 재미 블로거 안치용씨가 최근 전문 사본을 공개했다. 2일(현지시간) 확인한 이 비밀전문의 제목은 ‘한국의 잠재적 지도자 리스트’로 정·관계, 언론계, 학계, 군부 등 분야에서 모두 84명을 망라하고 있다. 명단에는 정인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과 함께 이건희 ‘중앙일보 이사’가 포함돼 있다. 이 회장은 잠재적 지도자로 거론된 84명 중 최연소였으며, 이맹희씨 등 형들을 제치고 이병철 회장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미국이 예견한 셈이다. 하비브는 서종철(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대장, 강창성 육군 보안사령관, 진종채 수도경비사령관 등 고위 장성과 함께 준장급인 전두환 제1공수여단장과 김복동(노태우 전 대통령 처남) 준장을 차기 군부 지도자로 평가했다. 전문이 작성된 시점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군부 내 비밀조직인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나 전 전 대통령 등 회원들의 운명이 풍전등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이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전 전 대통령 등 하나회 핵심멤버들을 비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인으로는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철승·김용태·박준규·조윤형 의원 등이, 관계에서는 노신영·함병춘·최광수·박종규·김만재·이건개·강인덕씨 등이 포함돼 있다. 언론계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총애가 두터웠던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 박권상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상만 동아일보 발행인, 신상초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기영 한국일보 발행인, 남재희 서울신문 편집국장 등이 명단에 올랐다. 학계에서는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이한빈 숭전대 총장 등이, 종교계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등이 꼽혔다. 한편 1963년 5월 7일 당시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작성해 국무부에 보고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김현철 내각수반이 버거 대사에게 박정희 의장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방미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에 따르면 김 수반은 버거 대사를 만나 육 여사와 자신의 아내가 사적으로 미국을 방문한다면 한국 여성단체들의 활동을 미국에 알리고 미국의 유사활동을 살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버거 대사는 “이 방문이 순수한 시찰인지 진정성에 의심이 들며 부분적으로 한국의 고위공직자 아내들도 외국의 고위공직자 아내처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박 의장의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보고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일본인이 ‘독도 한국땅’ 지도 공개[동영상]

    일본인이 ‘독도 한국땅’ 지도 공개[동영상]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이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고(古)지도 소장가인 한 일본인이 독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돼 있거나 일본 영토로 표기돼 있지 않은 고지도 여러 장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오사카의 공립학교 교사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고지도를 수집해 온 구보이 노리오(69)는 28일 “더 이상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본인이지만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구보이가 공개한 지도 중에는 ‘수정 소학일본지도’(修正 小學日本地圖)가 가장 의미가 크다. 국민에게 자국의 영토를 정확하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지리교과서에 게재돼 있는 지도로 문부성이 1901년에 발간했다. 문부성의 검정을 거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담은 교과서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정영미 박사는 “이 지도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지도에는 일본 영토를 상세하게 작은 섬까지 색칠로 표시해 놓았지만 당시 일본에서 부르던 마쓰시마(松嶋)로 표기한 울릉도는 색칠하지 않아 ‘조선’ 땅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독도는 그려 놓지도 않아 당시만 해도 자국 영토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함께 공개한 ‘대일본국 전도’도 의미가 있다. 일본 내무성이 1880년 11월에 발간한 지도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본 영토를 표시한 지도다. 이 지도에는 오키나와와 오키섬 등을 상세히 그려넣었지만 독도와 울릉도는 싣지 않았다. 당시의 도쿄와 교토를 상세하게 표기할 정도로 정밀도가 뛰어난 지도인데도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점을 인정해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노기와 가오루가 1895년에 제작한 ‘일본 전도’에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복속시킨 타이완을 새 영토라고 표기했지만 독도는 표시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제작한 지도 이외에 구보이는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 서양인들의 지도도 공개했다. 이탈리아인 시볼트가 1840년에 작성한 한국과 일본 지도에는 한국을 노란색으로 ‘2개’의 울릉도와 같은 색으로 칠했고, 일본은 갈색으로 표시해 구분했다. 울릉도를 두개 표시한 것은 프랑스 탐험선과 영국 탐험선이 각각 발견한 뒤 다른 이름을 붙여 별개의 섬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한편 독립기념관도 이날 ‘독도는 한국 땅’임을 입증하는 근대 일본의 역사·지리교과서 7점을 공개했다. 일본 정부가 직접 제작한 초·중·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확인하는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사카 이종락특파원 서울 문소영기자 jrlee@seoul.co.kr
  • “우익 공격 각오…진실 감춰선 안돼”

    “우익 공격 각오…진실 감춰선 안돼”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각오하고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사실이 수록된 지도들을 공개한 구보이 노리오(69)는 “가장 가깝게 지내야 할 한국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면서 “더 이상 영토와 관련된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본인이지만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교사로서 재직하는 동안 고지도를 수집해 왔다. 다음은 일문일답. →최근 한국과 일본의 외교 갈등을 어떻게 보나.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로 선린외교를 나누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영토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승부가 나지 않고 양쪽의 감정만 상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를 바로 보고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내가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을 공개했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의 근원은 무엇인가. -지난 1905년 러·일전쟁 전만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 지도에서는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땅으로 표기한 지도들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독도의 군사 전략적인 중요성을 깨닫고 당시 일본 군부가 시마네현을 내세워 독도를 편입하는 형식으로 각종 지도에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도를 둘러싼 양국의 영유권 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1904년 11월 20일에 일본 해군 군령부가 군함 쓰시마를 이용해 독도 상륙조사를 실시했다. 1905년 1월 5일에 정찰 결과를 해군성 수로부장에게 보고했다. 독도에 거주자가 없다는 사실과 일거에 독도 영유화를 꾀하자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비을 337호-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로 정리됐다. 이것을 계기로 독도를 영토에 편입하고 다케시마라고 이름을 짓는 한편 시마네현 소속 오키섬 소관으로 결정했다. →일본 내무성이 발간한 대일본국 전도에도 독도는 기재돼 있지 않은데. -그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대일본 제국의 내무성은 당시 정부를 말한다. 지리국, 지지과에서 작성된 것인데 일본의 국토의 범위를 이 정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수많은 작은 섬도 전부 포함했는데 독도가 이 지도에 빠진 것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지도에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북방영토(쿠릴열도) 전체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고 있는데 독도를 뺀 사실은 한국 영토라고 인정한 사실이 명확하다. 당시 일본의 ‘자연지도’, ‘교통지도’에는 일본 영토에는 색칠을 했지만 한국 영토인 독도에는 무색으로 기재해 구별했다. 오사카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아베 “집권땐 고노담화 수정” 韓 “스스로 한 반성을 부정”

    독도 파문에 이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를 비롯한 일본 여야 수뇌부들이 연일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고 사죄 반성한 ‘고노담화’ 수정을 공식화하면서 노골적인 과거사 왜곡에 착수한 것이다. 급격하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강경 외교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당분간 양국 관계가 급격히 냉각될 것이란 분석이 적지 않다. 노다 총리에 이어 아베 신조 전 총리도 28일 위안부 공세에 가세했다. 그는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고, 내가 총리가 된다면 미야자와 담화와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등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담은 그동안의 일본 정부 입장을 모두 고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야자와 담화는 1982년 역사교과서 파동시 미야자와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 정부가 책임지고 교과서 기술을 시정하겠다.”고 밝힌 내용으로 일본은 이에 근거해 교과서 검정 기준에 ‘근린 제국 (배려) 조항’을 집어넣었다. 1993년 고노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는 내용이고, 1995년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이 전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총체적인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 것이다. 오는 10월이나 11월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자민당이 2009년 민주당에 내준 정권을 되찾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다음 정권에서 실제로 과거사 사죄 담화가 수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에 조태용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전시 여성 인권을 유린한 중대 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동원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것은 과거 사과의 반성을 무효화하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악화일로로 치닫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 쟁점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문제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양국의 시각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 법적인 책임이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1996년과 2003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여성폭력 특별보고관 보고서와 1998년 맥두걸 유엔 인권소위 보고관 보고서 등에 적시된 것처럼 위안부 문제는 국제사회가 인정한 보편적 인권의 문제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일본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 외에 법적 책임은 없다.”고 맞서고 있다. 우리 정부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배상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이 협정으로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1주년(30일)을 맞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역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관련이 있다. 헌재 판결의 핵심은 청구권 협정에 대한 양국 간 해석이 엇갈린다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앞으로 일본 정부에 강한 압박과 국제 외교전을 병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세웠다. 일본과 양자 차원의 협상을 계속하면서 유엔 총회나 인권이사회 등을 무대로 국제사회를 향해 지속적인 문제 제기를 계획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협상의 출발점”이라며 “지난 1년간 두 차례의 양자회의를 제안하는 등 모든 외교채널을 동원해 200차례 가까이 일본과 접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며 일본의 무성의를 지적했다. 한편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도 이날 전체회의를 열고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죄 및 피해배상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성노예 착취를 자행한 것은 인류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범죄 행위임을 강조하고, 일본 정부에 책임 인정과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죄와 법적 피해배상을 촉구했다. 서울 오일만·김효섭기자 도쿄 이종락특파원 oilman@seoul.co.kr
  • 하시모토 “위안부 강제성 인정한 ‘고노담화’가 문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요구를 계기로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첨예한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일본 우익 정치인들도 들고 일어섰다. 일본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최근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연행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 데 이어 24일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문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시모토 시장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오사카 시청을 방문해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 철회와 사죄를 요구하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하자 “군이 위안소를 공적으로 관리했다는 것과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며 “고노 담화는 애매한 표현으로 일·한 관계를 악화시킨 최대의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은 1993년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관여했고, 위안부 모집이 강제적으로 이뤄졌다고 인정했다. 또 다른 우익 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이 강제로 매춘시켰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며 “(고노 담화가)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강제성을)인정해 일·한 관계를 망쳤다.”고 비판했다. 이시하라 지사는 이와 함께 중국과 일본 간에 영유권 분쟁이 빚어지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10월쯤 상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사설] 日 ‘임진년 막장외교’ 접고 이성 되찾아야

    일본의 독도 대응이 점입가경이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어제 독도·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와 관련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의 주권을 침해하는 사안이 발생해 매우 유감스러우며,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의연하고 냉정·침착하게 불퇴전의 결의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불법 상륙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던 데서 한걸음 더 나간 것이다. 우리는 주권 운운한 노다 총리의 발상이 매우 위험하고 우려스럽다고 본다. 이성을 잃은 일본의 대응은 노다 총리뿐이 아니다. 정치인과 내각 모두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의원(하원)은 어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에 항의하는 결의안을 민주·자민당 주도로 채택했다. 한·일 외교전의 심각성은 일본 외교관들마저 독도 갈등의 첨병으로 나섰다는 데 있다. 한국 외교관이 일본 외무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세계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전시에도 있을 수 없는 유치한 일본 외교의 수준을 보여 준 것이다.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의 발언도 전혀 외교관답지 않다. 연내 예정했던 한국 국채 매입 계획을 유보하겠다는 아즈미 준 재무상의 태도는 누가 봐도 감정적이고 소아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 관계가 이 지경까지 온 데는 일본 국내 사정 탓이 크다고 하겠다. 10%대의 낮은 지지율로 10월 총선을 치러야 하는 노다 내각이 막가파식 외교를 펴고 있는 셈이다. 소비세 인상 법안을 억지로 밀어붙인 후유증으로 노다 총리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위축돼 있다. 민주당 의원 50명은 탈당해 신당을 창당했고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된 상황이다. 독도와 센카쿠 열도로 한국 및 중국과 영토분쟁을 일으켜 지지율을 회복하고 총선을 치른다는 계산이라고 한다. 노다 내각과는 당분간 이성적이고 냉정한 대화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릴레이 망언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 아래 한시적으로 대화를 중단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은 적절한 조치로 본다. 사태 해결의 열쇠는 일본이 쥐고 있다. 일본은 사태를 더 이상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일본 정부는 하루빨리 막장 외교를 접고 이성을 되찾기 바란다.
  • 통일연구원장 ‘독도 주변 자원 한·일 공유론’ 논란

    독도 영유권 문제로 한일 간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김태우 원장이 독도 주변 해양 및 해저자원의 양국 공유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해 논란이 예상된다. 김 원장은 23일 연구원 홈페이지에 게재한 ‘한·일 외교전쟁 조속히 매듭지어야’라는 현안분석 기고에서 “양국 모두에게 손실을 가져다주는 ‘보복-재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가야 한다.”며 항구적 해결방안 모색을 주장했다. 특히 일본이 한국을 중요한 이웃으로 인정하고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 등을 전제로, “일본이 독도 육지와 인접 영해에 대한 한국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주변 해양 및 해저자원은 양국이 공유하는 방식을 협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또 동해 명칭과 관련해 “바다의 명칭을 보다 중립적인 명칭, 예를 들어 ‘창해(滄海·Blue Sea)’ 같은 것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부에서 김 원장의 제안이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독도 공동영유론’과 비슷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이날 저녁 홈페이지에서 문제의 글을 삭제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시론] 한국외교의 구조적 비관론과 신뢰 회복/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시론] 한국외교의 구조적 비관론과 신뢰 회복/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이어진 2011년 한국 외교의 화두는 북한과 중국을 한 축으로 하고 한국-일본-미국을 다른 축으로 하는 한반도 ‘신냉전’ 시대의 도래였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방한 불필요’ 발언, 일본 민주당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으로 이어진 2012년의 화두는 ‘신냉전’ 체제의 내부 균열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한·미·일 간의 공고한 안보공조체제가 요구되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최근의 동북아 상황은 한국외교의 비전 부재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감소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과 이익을 주장하고 이해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한국 외교에 대한 구조적 비관론을 경계해야 한다. 구조적 비관론의 핵심은 한국 외교의 태생적 한계론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 한국 외교의 발목을 잡아 한국이 국제정치에서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한국 외교의 기본전제는 자국 이익 추구임을 잊지 말자는 타당한 조언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한국 외교에 대한 소극적· 폐쇄적 태도는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외교가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화라는 큰 파도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 변화의 파도를 적절히 타고 넘느냐는 외교력은 정부의 능력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교의 구조적 비관론이 위험한 이유는 일단 자국 외교에 대한 무기력증이 퍼지기 시작하면 외교는 더이상 국익의 대외적 추구 수단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 도구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정권 말기에 시도한 ‘충격외교’는 정권의 정통성을 회복하거나 대중의 지지도를 높이는 기대효과를 달성하기보다 공들여 구축했던 대외협력관계만 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많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장담했던 김영삼 정부는 이후 일본 하시모토 정권과 어업협정 개정 샅바싸움에서 어선납포외교에 당하고 아시아 통화위기 때에는 일본 측에 지원을 요청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에도 국민의 정책 지지가 정권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도 방문 다음 날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3.6%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 지지도는 6월 31.4%, 7월 28.2%로 떨어지다가 8월 16일 31.5%로 약간 회복했다. 하지만 58% 이상은 여전히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최근 한·일 간 ‘외교전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외교는 기본에 충실한 외교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켰다. 외교는 내치의 수단이 아니라 바깥세상(外)과 사귀는(交) 일이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사귐이 깊어지고 지속되는 데 있어 가장 큰 자산은 신뢰다. 이명박 정부는 그간 견지해 왔던 보편주의의 언어로 설명하던 외교정책 기조를 임기 말 들어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급선회해 한국 외교에 대한 신뢰와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했다. 한·미동맹을 대북 억지력에 기초한 군사동맹에서 범세계안보에 기여하는 가치동맹으로 격상하고, 북한 인권문제를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인권의 보편적 틀에서 논의했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원리에 입각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글로벌 코리아’ 외교를 주창해온 이명박 정부는 최근 노무현 정부의 신일본독트린과 비슷한 주권외교로 선회했다. 결국 한국 외교의 지속성과 신뢰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2월 대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건 새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한국 외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노력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올림픽과 나-이병효] 태권도, 살아남으려면…

     24년 전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 취재기자 방담에서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올림픽에는 왜 ‘뒤로 달리기’가 없나? ‘깽깽이발로 뛰기’는? 수영에는 자유형, 평영, 접영, 배영, 혼영이 모두 있는데…. 육상은 흑인이 휩쓸어도 수영은 백인이 독점하니까 육상 인구보다 수영 인구가 훨씬 적은데도 수영에 금메달이 꽤 많이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올림픽에서 남미 국가 수리남의 앤소니 네스티가 100m 접영에서 금메달을 따낸 첫 번째 흑인이 됐지만 그 뒤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에 오른 흑인 선수는 모두 미국인으로 단 둘에 불과했다.  일주일 전 막을 내린 런던올림픽에 걸린 메달을 살펴보면 종목의 편파성이 도드라진다. 우선 수영에 주어지는 금메달만 34개다.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와 미시 프랭클린은 이번 대회에서 각각 4관왕이 됐고, 펠프스는 역대 올림픽에서 모두 18개의 금메달을 땄다. 한 사람이 이처럼 많은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개인의 우수성을 보여준 결과이지만 달리 보면 비슷비슷하게 겹치는 종목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50m 자유형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고, 남녀 모두 6개의 금메달이 걸린 혼영은 존재 이유 자체가 모호하다. 10종경기나 근대5종처럼 전인적 능력이 중요하다면 5종수영을 하면 될 것이 아닌가.  수영에서 모두 9개국이 1개 이상의 금메달을 얻고, 미국이 16개의 금메달을 거머쥔 데 반해 육상에서는 모두 23개국이 1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더욱이 육상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 종목일 뿐 아니라 전차경주, 승마, 복싱, 레슬링, 5종경기와 함께 고대올림픽 종목이기도 했다. 또한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이많은 금메달을 따냈어도 자메이카, 케냐, 에티오피아 등이 복수의 금메달을 얻는 한 선진국에만 유리한 종목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육상에 걸린 47개 금메달은 타당성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정말 우스운 것은 카누(금 16개), 사이클(금 18개), 조정(금 14개), 요트(금 10개) 등 선진국이 독점하는 종목이다. 말이 좋아 선진국이지, 실은 유럽 및 유럽 이민국가들이 금메달을 독차지한 종목들이다. 모두 58개의 금메달 가운데 비유럽 국가라고는 요트에서 금메달을 하나 따낸 중국과 사이클에서 각각 하나씩 따낸 남미 콜롬비아와 카자흐스탄이 있을 따름이다.  세계적으로 경기 인구가 적은 이들 종목에 이처럼 많은 금메달이 걸린 것은 올림픽이 유럽에서 시작됐고, 유럽이 규정을 제멋대로 정해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격(금 15개), 펜싱(금 10개)도 원래 유럽 강세 종목들인데 최근 한국(사격 3개, 펜싱 2개)과 중국(사격 2개, 펜싱 2개)이 치고 올라오면서 판도가 바뀌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계속 이런 추세로 올라오면 사격과 펜싱의 세부종목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농반 진반’도 들린다. 승마(금 6개)는 유럽 국가들이 우승을 독차지한 종목인데 메달 수가 비교적 적은데다 고대 올림픽의 역사성 때문에 축소하자고 하기는 곤란할 듯하다. 체조(금 18개)와 역도(금 15개)는 모범 종목이라 할 수 있다. 체조는 중국(5개), 러시아(3개), 미국(3개) 등 3강 외에도 한국, 일본, 루마니아 등 7개국이 금메달 1개씩을 수확했고, 역도(금 15개)는 중국(5개), 카자흐스탄(4개), 북한(3개) 등 3강과 이란, 폴란드, 우크라이나가 하나씩 땄다.  결국 각국의 올림픽 메달 경쟁은 엘리트 스포츠 투자와 우수 선수 육성 등에 앞서 자국에 유리한 종목이 올림픽에 채택되도록 유도하고, 또 최대한 많은 메달이 걸리도록 로비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가 서울올림픽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한차례를 제외하고 종합 10위 안에 들 수 있었던 것은 ‘메달밭’ 양궁에 단체전이 도입되고 태권도가 정식 종목으로 승격된 데 힘입은 바 크다. 스포츠 외교력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개최국의 종목 선정을 좌우하고, 종목 채택이 성적을 결정하는 것이 염연한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태권도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이후 정식 종목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IOC 안의 ‘표 싸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채점 및 경고제도 변경, 경기장 크기 축소 등 경기 룰을 바꿔서 태권도를 재미있게 만들고, 전자호구를 도입해서 판정의 정확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림픽 종목 퇴출 여부와 관련한 ‘스포츠 외교전’의 구도를 잘 파악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번 대회 태권도에서 한국이 금1, 은1의 부진한 성적을 올린 것은 대단히 유감이고 장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 전혀 아니다. 다만 한국을 포함한 8개국이 금메달을 하나씩 나눠 갖고 가봉, 아프가니스탄, 태국 등 21개국이 메달을 획득한 것은 ‘태권도 지키기’ 캠페인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모쪼록 세계의 태권도인들이 소극적 방어보다는 적극적 공세로 나가 태권도를 올림픽 종목으로 지켜내고 나아가 무도의 으뜸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스포츠칼럼니스트 bbhhlee@yahoo.co.kr
  • “美, 위키리크스 마녀사냥 중단하라” 어산지, 두달만에 모습 공개

    에콰도르 정부로부터 망명허가를 받은 폭로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41)가 미국 정부를 겨냥해 위키리크스에 대한 마녀사냥을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어산지는 19일(현지시간)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 1층 발코니에 나와 이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6월 영국 정부의 스웨덴 강제 송환을 피해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한 지 두 달 만이다. 그는 “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요구했다.”면서 “미국은 비밀 외교 전문을 공개한 위키리크스에 대한 마녀 사냥을 끝내라.”고 밝혔다. 어산지는 이어 위키리크스에 국무부 외교전문을 넘겨준 미 일병 브래들리 매닝의 석방을 촉구했다. 그는 망명을 허가한 에콰도르 정부와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자신의 망명 결정을 지지한 남미 국가들에 대해서도 “용감한 나라들이 정의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또 징역형을 받은 러시아 펑크밴드 푸시 라이엇을 들어 “자유를 탄압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는 단결되고 단호한 저항도 있음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10분에 걸쳐 준비해온 성명을 모두 낭독한 어산지는 자신을 기다려준 지지자들을 향해 양쪽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앞서 영국 정부는 대사관에 들어가 어산지를 직접 체포하겠다는 뜻을 에콰도르 대사관에 전달했다. 이에 에콰도르 정부는 “영국의 위협은 국제법을 무시한 어리석은 행동”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했고, 곧이어 남미국가연합(UNASUR)의 긴급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면서 영국과 남미 간의 외교 갈등이 불거졌다. 한편 크리스틴 흐라픈손 위키리크스 대변인은 발표에 앞서 “스웨덴 정부가 어산지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산지는 그동안 자신이 스웨덴으로 추방되면 재판 없이 신병이 미국으로 넘겨져 간첩 혐의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앞서 어산지는 2010년 8월 스웨덴에서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같은해 12월 런던에서 체포된 뒤 스웨덴으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보석허가를 받아 지난 6월 19일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해 망명을 신청했다. 2007년 개설된 위키리크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군사기밀 9만건을 포함해 수십만건의 비밀정보를 유출해 세계 외교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어산지 망명 허용’ 英·남미 외교전으로

    에콰도르 정부가 16일(현지시간)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요청한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면서 이를 둘러싼 남미와 영국 간의 외교 갈등이 재점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브라질 외교부는 이날 “남미 지역 국제기구인 남미국가연합(UNASUR)이 에콰도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19일(현지시간)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긴급 외교장관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UNASUR 회원국인 우루과이의 루이스 알마그로 외교장관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산지에 대한 망명 결정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며 영국 경찰이 영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머물고 있는 어산지를 체포할 때의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좌파 성향의 중남미 국가연합인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과 ‘미주기구’(OAS) 역시 리카르도 파티노 에콰도르 외교부 장관의 요청에 따라 긴급 외교장관 회의를 열 계획이다. UNASUR는 지난 3월 파라과이에서 열린 외교장관 회담에서 남대서양에 위치한 포클랜드 섬을 둘러싼 영유권 논란과 관련해 아르헨티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 회의에서도 UNASUR가 에콰도르 정부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이 나오면서 또다시 남미와 영국이 마찰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조희선기자 hsncho@seoul.co.kr
  • ‘어선포격’ 러 강경대응에 中 “차분 대응” 한발 후퇴

    불법 조업을 하던 중국 어선에 대한 러시아의 포격으로 중·러 간 갈등이 외교전으로 비화하자 중국이 한 발 물러섰다. 중국 외교부의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21일 외교부 사이트를 통해 성명을 내고 “동해에서 발생한 러시아의 중국어선 나포 과정에서 어민 1명이 실종된 사건은 돌발적이고 개별적인 사안으로 양국은 중·러 우호 정신을 토대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면서 “양국 국민이 이번 사건을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바라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국은 지난 15~16일 러시아 해역에서 불법조업 중이던 자국 어민을 러시아 당국이 총격전을 통해 나포한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사건을 ‘다반사’로 일어나는 자국 어민의 불법조업으로 규정하며 의미를 축소하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총격 과정에서 어민 1명이 바다에 빠져 실종된 것으로 드러나자 외교부 청궈핑(程國平) 부부장(차관급)이 주중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난폭한 법 집행’ 운운하며 강력 항의했다. 이에 러시아 측이 불법월경을 저지른 선장 2인을 기소하며 맞대응에 나서자, 중국이 러시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설득에 나서고 있다. 국민들의 반 러시아아 감정이 지나치게 고조될 경우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손상될 수 있는 만큼 수위조절에 나선 것이다. 훙 대변인은 “중국은 러시아 측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엄정 교섭을 제기했다.”면서 “유사한 사안이 재발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양국은 긴급대응 및 협력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씨줄날줄] 실패한 국가/구본영 논설위원

    북한이 또다시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다. 엊그제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발표한 ‘실패한 국가’ 50개국 중 2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비영리단체 ‘펀드 포 피스’가 FP와 함께 세계 177개국을 대상으로 인권·사회·경제·정치적 요인 등 12개 항목을 조사한 결과였다. 조사에서 핀란드·스웨덴·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가장 안정적인 국가들로 꼽혔다. 한국은 ‘실패국가 지수’에서 북한의 95.5점에 비해 훨씬 낮은 37.6점이 매겨져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군에 자리잡았다. 반면 북한은 ‘한계에 도달한 나라’로 지목됐다. 북한보다 더 실패한 나라는 다수 국민이 ‘생계형 해적질’로 연명하는 소말리아 등 21개국에 불과했다. 북한정권이 실패했다는 진단은 새로운 뉴스도 아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부터 불거져 나왔던 얘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가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려 놀라울 정도다. 북한체제는 1990년대 말 많으면 300만명의 주민이 아사했다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도 건재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면 김정은의 허약한 지도력으로 인해 급변사태를 맞을 것이란 관측도 ‘희망사항’에 불과한 인상이다. 하긴 세계사를 통틀어 백성의 굶주림이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한때 강성했던 로마제국이나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그랬다. 궁핍이나 폭압 통치에 따른 주민의 반발 때문이 아니라 내부 분열과 무모한 전쟁으로 무너지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에서 5·16이나 12·12와 같은 군사정변이 더는 일어날 수 없는 요인들이 농담처럼 제기된 적이 있다. 휴대전화 보급과 서울의 교통난이 그것이다. 이집트와 리비아 등 중동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의 성공 배경도 휴대전화의 힘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럴싸한 진단이다. 북한 세습정권도 지금처럼 휴대전화나 인터넷을 철저히 통제하는 한 상당기간 존속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섣부른 북한 붕괴론이나 세습정권 안정화론 모두를 경계해야 할 듯싶다. 북한체제가 단기간에 경착륙(crash)할 가능성도 낮지만, 연착륙(soft landing)할 공산 또한 적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고장난 비행기처럼 ‘비틀거리며 나는’(muddling through) 북한체제를 상대로 한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다. 북한의 점진적 개혁·개방을 유도하면서 만일의 급변사태에도 조용히 내부적으로 대비하는 게 최선의 대안이 아닐까.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강제소환 몰린 어산지 에콰도르에 망명 신청

    강제소환 몰린 어산지 에콰도르에 망명 신청

    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40)가 남미의 에콰도르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현재 영국에 있는 그는 성폭행 혐의 탓에 스웨덴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해 있다. 리카르도 파티노 에콰도르 외무장관은 19일(현지시간) “어산지가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면서 “에콰도르 정부는 망명 신청을 수용할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어산지는 이날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찾아가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다. 그는 짧은 성명을 통해 “(망명)요청을 검토하고 있는 에콰도르 대사관과 에콰도르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호주 출신인 어산지는 자신이 성폭행 혐의 때문에 런던에서 스웨덴으로 송환되거나 처벌을 피하려 모국으로 돌아간다면 각국 정부에 의해 결국 다시 미국으로 보내질 것을 우려하는 듯하다. 어산지의 위키리크스는 2010년 11월부터 25만건이 넘는 미국 외교전문을 폭로해 국제 외교가에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559년전 터키를 캐는 이 남자 김형오

    [김문이 만난사람] 559년전 터키를 캐는 이 남자 김형오

    역사를 알면 인생의 재미가 열 배는 더 있다. 교훈이 있고 아픔이 있고 느낌이 있다. 산다는 것은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우러져야 한 인생의 스토리를 얘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 하나. 콘스탄티노플을 아는가. 대다수는 얼추 알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왜? 그속에 진정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을까. 역사책에는 비잔틴의 최후 도시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비잔틴은 동서양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중요한 역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스티븐 런치먼이 지은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의 서문을 잠깐 들여다본다. ‘역사가들이 좀 더 단순했던 시절, 그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중세가 끝나는 특징적인 사건으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끝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장벽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중세가 근세로 바뀌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탐험가들이 해상로를 개척하여 세계 경제를 바꾸어 놓게 한 것은 비잔티움의 쇠망과 오스만튀르크족의 승리였다. 비잔티움 학문이 르네상스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에궁, 뭐든지 설명이 길면 감동이 없는 법이다. 이쯤에서 감칠맛을 그만두자. 김형오 전 국회의장. 그가 쓴 ‘길 위에서 쓴 희망편지’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끈다. ‘1947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대학원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다. 국무총리실,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공직을 수행했다. 1992년 14대 국회부터 국회의원 직분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09년 3월에 발간된 책이니 과거형이다. 이젠 국회의원이 아니다. 기자 출신이고 수필문학가로 등단한 문인이라는 게 오히려 낫겠다.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이란 옷을 벗어던지고 나서 어떤 생활을 할까 궁금하다. 알고 봤더니 역사를 캐고 있다. 그것도 동서양을 아우르는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사에 대해 열심히 삽질하고 있다. 김 전 국회의장을 지난 4일 오후 서울신문 인터뷰룸에서 만났다. 늘 넥타이를 맨, 꽉 낀 정장 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가벼운 옷차림의 그를 보니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정치인이라는 냄새를 빡빡 씻었다고나 할까. 악수를 하면서 그는 “국회의원을 그만두니까 넥타이를 안 매게 됩디다. 아주 편해요.”라고 한다. 또 이어진다. “요새는 신문도 잘 안 보게 되고 정치 뉴스도 안 보고 참 좋다.”며 웃는다. 그를 만난 이유는 19대 국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홀연히 터키로 출국한 것 때문이다. 왜 불출마 선언을 했으며 터키는 또 왜 갔는지 등이다. 요즘 터키에 흠뻑 빠져 있다. 그것도 이스탄불, 다시 말해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다. 2009년 1월 국회의장 신분으로 터키를 방문했다. 우연히 군사 박물관에 잠시 들렀을 때 놀라운 충격을 받은 뒤 콘스탄티노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저를 전율시킨 것은 오스만튀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함대를 이끌고 갈라타 언덕을 넘어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해상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쳐 놓은)쇠사슬을 돌파하지 못하자 배들을 산으로 끌고 천혜의 요새인 성곽으로 진입합니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저는 비잔틴의 몰락과 오스만튀르크의 부상 등에 대해 역사적 지식이 부족했던 점을 부끄러워하게 됐고 이후 터키를 다섯 차례 다녀오면서 그 깊이에 매료됐습니다.” 지난 4월 16일 출국했다. 2일 귀국하기까지 47일간 터키에 머물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터키 최고의 명문 국립대학 보아지치대학교 방문교수로 초빙돼 이 대학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지냈다.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과제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무슨 과제? 그것은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를 캐는 작업이다. 그는 여기에서 화해와 공존을 상징하는 의미로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을 합성해 ‘이스탄티노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터키에서 머무는 동안 대외 활동, 그러니까 강연이라고 해두지요. 그 대학에서 한국정치의 60년 역사를 강의했습니다. 아주 재미있어하더군요. 처음에는 30분을 약속했지만 나중에 질의응답까지 포함해 1시간 40분가량 됐습니다. 북한 갔던 일, 미국 스탠퍼드에서 강의했던 일 등 동아시아를 비롯한 한국의 정치역사를 얘기했습니다. 반응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그가 열심히 캐는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는 어느정도일까. 현장 방문 수차례, 자료수집 완료, 초고 정리 끝이란다. 올 가을쯤에는 반드시 팩트 위주의 두꺼운 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말 그대로 개봉박두. 현재 이와 관련된 책은 스티븐 런치먼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과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등이 있다. 전자가 팩트에 비중을 둔 책이라면 후자는 소설 형식을 빌렸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 그 정복전쟁은 지상전, 지하전, 해전, 공중전, 심리전, 첩보전, 외교전 등 모든 전략과 전술이 총동원된 전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사의 물결이 확 바뀌었지요. 오스만튀르크가 그쪽을 장악하자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를 열어야만 했고 콜럼버스의 항로, 아프리카 희망봉의 항로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저작물에 한 권을 보태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인간성과 리더십에 초점을 두려 합니다.” 특히 그는 오스만튀르크가 고구려와 흉노, 그리고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는 뿌리를 함께 깔면서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서양 역사에서 관심을 덜 받고 있는지도 밝힐 예정이다. 그에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터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물었더니 “우리의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인물로 추앙받는다.”고 했다. 아울러 “14살에 왕이 됐다가 왕좌에서 내려와 19살에 다시 왕이 돼 21살에 철옹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사실이 매우 흥미진진하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 젊은 왕이 아버지의 아버지도 못 이룬 업적을 해냈다는 점은 참으로 역사적인 것이라고 역설한다. “오스만튀르크로 인해 유럽은 200여년 동안 길을 잃어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실크로드의 지점이자 종점이었지요. 그래서 유럽이 항해시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오스만튀르크는 그걸 모르고 있다가 다시 서양한테 당하게 됩니다. 이를 거울 삼아 우리는 글로벌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또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아등바등 싸우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 질문하고 싶었던 ‘불출마 선언’의 이유를 말한다. “내 나이 65살입니다. 60살이 지나면서 한 달이 다릅니다. 100페이지 되는 책을 읽고 돌아서면 금방 50페이지밖에 생각이 안 나고, 일주일이 지나면 10페이지로 줄어듭니다. 지난해 8월쯤인가 그래요. 국회의장까지 한 제가 국회의원을 한 번 더 하면 제 이력에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했지요. 그러면서 제가 쓰고 싶은 글, 국회의원을 더 하면 영원히 못 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은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또한 4월 6일부터 5월 29일까지, 술탄 메흐메트 2세하고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대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5월 29일이 비잔틴 최후의 날이지요. 하여 모든 생각을 접고 터키로 갔던 것입니다.” 다시 비잔틴 최후를 얘기한다. 당시 60여일 동안 벌였던 전투에는 세계 전투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첨단 무기들이 총동원됐다는 것이다. 배를 끌고 언덕을 넘은 것도 그렇지만 헝가리인이 구상한 최대의 대포 등 흥미롭게 들여다볼 대목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는 “술탄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인간적 캐릭터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면서 이런 부분에 중점을 두고 집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흥망성쇠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것은 어떤 것인지도 담을 것이란다. “저는 다시 종군기자가 된 셈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559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가는 기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날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뜁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새누리당 당원이니까 새누리당에서 되겠지요.”라고 답했다. 대선 주자들에 대한 약평을 부탁했더니 “생각 안 해 봤다. 지도자는 뭐든지 겸손하고 당당함의 덕목과 타이밍이 있어야 국민들이 따르지 않겠느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울러 19대 국회에 대한 바람을 물었더니 “폭력이 없어야 한다. 막말도 폭력의 빌미가 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he is… 1947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1966년 경남고를 졸업하고 1971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왔다. 1976년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75년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1982년 대통령 비서실을 거쳐 1992년 14대 국회의원 당선되면서 이후 15,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9년 수필가로 등단했으며 한나라당 부산시지부위원장(2000), 한나라당 17대 총선 선거대책본부장(2004), 한나라당 사무총장(2004), 한나라당 원내대표(2006), 대한민국 국회의장(2008)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돌담집 파도소리’,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등 다수가 있다.
  • [씨줄날줄] 광개토대왕과 칭기즈칸의 만남/울란바토르 이도운 논설위원

    지난 22일 저녁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로 가는 비행기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세계에서 몽골로 가는 항로는 단 세 곳뿐이다. 베이징, 모스크바, 그리고 서울. 한국과 몽골은 역사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몽골을 동북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측면에서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시각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지난 23일부터 이틀간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동북아역사재단과 몽골과학아카데미의 공동학술회의가 그런 움직임을 대표한다. 이번 회의는 두 나라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공동대응한다는 취지로 열린 것이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국화하는 것처럼 몽골의 칭기즈칸과 원 제국도 중국사에 편입해 가고 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올해가 칭기즈칸이 탄생한 지 850년이 되는 해이자, 광개토대왕 사후 1600년이 되는 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과 몽골 간의 협력은 동북아에서 어떤 임팩트를 가져올까.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울란바토르에서 만난 몽골인들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중국인”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에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두 나라의 협력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래서 몽골의 외교전략은 중·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완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러의 영향력을 완화해 나가기 위해 선택한 파트너가 미국과 인도, 호주, 일본, 한국이라고 현지의 외교소식통은 말했다. 북한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몽골은 한때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려는 시도도 해봤다. 그러나 북한 측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양이나 몇 마리 더 보내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학술회의에 참석한 양국의 학자들도 두 나라 간의 정치적 협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 측의 한 참석자는 “몽골은 물론 베트남과도 동북공정에 대응한 학술회의를 해보니 결과적으로 (미·중·일·러로 좁혀진) 우리의 시야를 확대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태로 주 몽골대사는 “우리나라가 중앙아시아의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들에 다가가는 데 몽골이 아주 좋은 통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동북아라는 개념으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입지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울란바토르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치고받는 中] 일본과 태평양 패권 쟁탈전

    중국과 일본 간 환태평양 패권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놓고 영유권 분쟁이 진행중인 가운데 중국과 일본이 이번에는 태평양의 도서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은 태평양 진출을 위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태평양 도서국에 약 6억 달러를 지원하며 공을 들여왔다. 일본 정부는 25·26일 이틀간 오키나와에서 ‘태평양·섬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태평양·섬 정상회의는 일본 정부가 태평양제도 포럼(PIF)에 가입한 호주와 뉴질랜드 등 각국 정상을 초청해 1997년부터 3년에 한 차례씩 열고 있으며 올해는 14개국과 1개 지역 정상을 초청했다. 태평양·섬 정상회의는 그동안 인프라 정비와 인적교류, 환경문제, 재해 발생시 지원 등을 주요 의제로 다뤄왔는데, 올해에는 이례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해양의 안전보장을 처음 논의한다. 일본은 태평양 도서국과 국방 교류 문제도 다룰 예정이다. 특히 이번 회의에는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가 처음으로 참석해 관심을 모은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 하기 위해 일본과 공동 보조를 맞추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진다. 중국과 일본은 이 밖에 유엔이 최근 일본의 대륙붕을 새로 인정한 것과 관련해 오키노토리시마를 기점으로 인정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월말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의 권고를 토대로 “오키노토리시마가 일본의 대륙붕의 기점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일본 주장은 근거가 없다.”며 진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 본토로부터 1500㎞나 떨어진 오키노토리시마를 섬으로 인정할 경우 환태평양 해역에서 중국 해군의 활동에 제약을 받을 것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는 다음 달 권고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할 예정이다. 일본 정부는 내용이 공개가 되면 대륙붕 인정과 관련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중국과의 해양 영토 분쟁에 위기를 맞을 전망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중국 ‘황옌다오 戰線’ 강경파 세 여인 선봉

    중국 ‘황옌다오 戰線’ 강경파 세 여인 선봉

    국제적인 비난을 감수하며 황옌다오(黃巖島·필리핀명 스카버러 숄) 영유권을 놓고 연일 강공책을 펴고 있는 중국의 대(對)필리핀 외교전을 여성 외교관들이 이끌고 있어 눈길을 끈다. 외교부 푸잉(傅?) 부부장(차관급)과 주아세안(동아시아국가연합) 퉁샤오링(?曉玲) 대사, 주필리핀 마커칭(馬克卿) 대사가 필리핀과의 일전에서 여풍(女風)을 주도하는 3인방으로 꼽힌다. 아시아 담당인 푸 부부장은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번 외교전에선 시종 강경한 태도로 필리핀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8일 주중 필리핀 대사대리를 초치한 자리에선 “필리핀이 긴장을 고조하는 행위를 하는 데 대해 중국은 대응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며 무력 협박도 불사했다. 1998년 필리핀 대사를 지낸 바 있어 필리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평이다. 푸 부부장은 네이멍구(?蒙古) 후허하오터(呼和浩特)가 고향인 소수민족(몽골족) 출신으로 부부장(10명) 중 홍일점이다. 베이징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외교부 번역실에서 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江澤民) 등 역대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통역을 전담하며 잔뼈가 굵었다. 중국 외교 사상 여성으로 처음 서방국가(영국)의 대사직을 맡았고, 아주국(아시아국) 국장 재직 당시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을 진두지휘했다. 주아세안 대사인 퉁샤오링도 강경 노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중국 농업부가 16일부터 황옌다오 일대에 휴어기를 선포한다고 밝히자 “휴어 기간 중 필리핀 어선이 황옌다오 일대에서 조업할 경우 중국은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월 주필리핀 대사로 취임한 마커칭은 이번 사태로 가장 큰 압박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필리핀과 중국의 협상 창구로 연일 물밑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여풍이 가능한 것은 중국 외교부에 여성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이 중국 외교부에 확인한 결과 지난 1월 현재 중국의 대사 160명 가운데 여성 대사는 11명이며, 대사직을 지내고 본부로 돌아와 재직 중인 여성까지 합하면 전체 여성 고위 외교관은 푸 부부장을 포함해 총 33명이다. 외교부 전체 공무원(5200여명) 가운데 여성(1600여명)의 비율도 30%에 이른다. 한편 외교부에 이어 부총리급인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까지 나서 필리핀 옥죄기에 나섰다. 전날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의에서 “필리핀과 같은 작은 나라도 큰 나라를 괴롭혀선 안 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반면 중국이 황옌다오 일대에서 휴어기를 설정한 것과 관련, 주변국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 정부의 휴어기 설정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며 정면 대응 방침을 분명히 해 영유권 분쟁이 동남아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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