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국가의 책무와 정부개혁의 과제/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한때 신(神)에게서 모든 것을 구했던 인간은 이제 국가에서 모든 것을 구하고 있다.밤길을 가다 웅덩이에 발목을 삔 취객은 그 책임을 국가에 묻고 있다.이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대라며 국가를 윽박지른다.사랑하던 연인에게서 배신을 당한 사람은 한강철교 위를 기어 올라가 애인을 찾아내라고 고함을 질러댄다.바야흐로 국가의 무한책임 시대가 되었다.
김선일씨의 참변으로 정부에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일부 공직자들은 억울해 하는 것 같다.외교부장관은 “미국인이 이라크에서 납치돼 피살됐을 때 미 국무부에 비난전화 한 통 없었다.”고 하고,한 외교부직원은 “장관이하 전 직원이 사표 낼 준비가 되어있다.”고 이야기한다.국가의 역할에 대해 정부와 국민사이에 인식이 규준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고 과중한 역할기대가 정부에 요구되고,일방적 비판이 쏟아진다고 억울해하는 항변처럼 들린다.
그러나,필자처럼 국가시스템을 연구하며 정부와 공무원의 노고에 동정을 갖고 있는 사람도 김선일씨의 피살사건을 전후한 일련의 대책에 침묵하기 어렵다.파병을 결정하고 또 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외교국방 라인의 태도는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국가의 중대한 정책결정이 심층적인 분석과 치밀한 계획없이 얼마나 부실하게 이루어졌는지를 사후에서나마 엿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선,파병의 결정과정이 정확한 비용편익의 계산 하에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파병이 가져올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국가의 경제적 이익,한·미관계 등에 대한 기여와 또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예측하고 공론화하였으면 좀 더 현명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해서 예상되는 희생과 테러 위험에도 불구하고 파병이 필요한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결과로서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었다면,설혹 발생할 사태에도 충격과 분노가 이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병을 위해 제시된 ‘평화와 복구’의 명분,이라크 현지에 대한 인식,미국 내 여론과 대선일정에 따른 추가파병의 시점에 대한 전략적 접근,참수위협에 노출된 피랍상황에서의 대응은 상식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건 발생 후 TV에 출연하여 설명하는 당국자나 근거도 없이 정부를 엄호하는 여당의원의 수준은 방청나온 대학생의 논리와 깊이만도 못하다.그러한 시각과 깊이로써 파병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그 결정이 과연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한·미관계 때문에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말을 수용하는 경우에도,그 파병의 결정과정에서 어떠한 국익을 챙겼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일이 터지고 나서야 국가의 중대한 정책결정이 얼마나 치밀한 준비없이 이루어지는지를 다시 한번 목도하게 되었다.
사람 몇 명 바뀌는 문책인사로 끝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여기에는 도사리고 있다.아마도,세계에서 자국민을 가장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 중의 하나가 한국일 것이다.외국에 사는 교민과 유학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도대체,자국민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재외공관의 책무가 무엇이란 말인가.우리는 현재 세계 192개국 가운데 186개의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이 가운데 129개국에 재외공관을 두고 있다.이러한 양적 숫자에 걸맞지 않은 역할인식과 정보망,외교력의 수준을 개선해야 할 시점이다.
획일적인 고시를 통해 외교부에 들어온 외교관들은 획일적인 승진욕구에 사로잡혀 자신의 직무를 위한 역량계발을 소홀히 한다.또,무관,교육관,국정원 파견은 숫자에 비해 내용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적다.재외공관의 일차적 임무가 무엇이지를 명백히 하고,이것을 채용과 승진 등 인사제도에 반영하는 동시에,각 부처의 파견에 대해 정부개혁 차원의 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