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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감…말 말 말

    ■고속철은 단군이래 최대의 천덕꾸러기다 한나라당 안경률(安炅律·건교위)의원이 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시 8조원에 이르는 부채를떠안게 된다며. ■개성에 연탄공장을 지어 주자 민주당 김택기(金宅起·산자위)의원이 단기에 실현가능한 남북 에너지 교류사업을 제시하며. ■민족영산 태백산에 대한 미군의 폭격훈련은 민족정기와 국민정서에반한다 한나라당 박승국(朴承國 ·국방위)의원이 강원도 태백산 일대전술 폭격장의 소음 문제를 제기하며. ■정보통신부 발표때마다 왜 주가가 바닥을 치나 한나라당 최병렬(崔秉烈·과기정위)의원이 정통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결정으로 정보통신기업 주가가 급락을 거듭하고 있다며. ■마마·호환(虎患)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터넷 음란·폭력 사이트다민주당 김희선(金希宣·과기정위)의원이 청소년에게 노출된 동영상인터넷 음란·폭력물을 노트북으로 직접 시연해 보이며. ■정부가 구한말 일본 외교문서 조사사업에 지원하고 있는 1억5,000만원은 일본 외무성 관련 문서 5만권을 복사하는 데만 드는 비용 30억원에도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민주당 김성호(金成鎬·통외통위)의원이 한국관련 일본 정부문서의 체계적인 연구 필요성을 강조하며.
  • 러시아 ‘천년의 예술’ 정수 한눈에

    러시아 역사와 문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국내 최대 규모의 러시아 유물전이 열린다.화제의 전시는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KBS,롯데와 러시아의 이타르타스 통신사가 공동주최하는 ‘러시아,천년의 삶과 예술’전. 한·러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러시아를 방문한김대중 대통령에게 이타르타스 통신사측이 한국전을 제의해 이뤄졌다.미술작품을 비롯한 문화예술품 550여점이 선보인다.7월8일부터 9월30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서울전에 이어 광주(10월16일∼11월29일,국립광주박물관),대구(12월15일∼2001년 1월28일,국립대구박물관),부산(2001년 2월13일∼3월31일,부산시립미술관)에서 순회 전시된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에르미타쥬 국립박물관·트레차코프 국립미술관 등러시아 26개 미술관 및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것들로, 그중엔 국보급도 적지않다.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러시아 성상화(聖像畵,icon)와 로마노프왕조의유물.비잔틴 미술에 뿌리를 둔 성상화는 러시아가 세계미술사에 남긴 가장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그러나 성상화는 19세기까지만 해도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다.성상화가 미술사적인 연구대상이 되고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마티스·칸딘스키·야블렌스키·샤갈·루오 등 많은 미술가들이 성상화로부터 자극받았다.이번 전시에는 ‘카잔의 성모’‘‘성모 우밀례니예’ 등 성상화가 출품된다.“러시아 이콘화야말로 진정으로 참된 민족미술”이라고 찬탄한 화가 마티스의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다. 러시아 역사는 황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박했던 민중의 삶과는 달리 황실은 중앙집권체제 속에서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화려하고 우아한 문화를 일궈냈다.특히 17세기부터 러시아혁명기까지러시아를 통치해온 로마노프왕조(1613∼1917)의 유물은 러시아 황실의 영광을 그대로 보여준다.러시아 제국시대의 훈장인 성 안드레이 성상 훈장,러시아 황제의 옥좌와 보석류,은덮개 복음서 등 200점에 이르는 물품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회화도 비중있게 소개된다.아방가르드의 경향은 1912년 샤갈,말레비치,타틀린 등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혁명의 예술,예술의 혁명’을 주창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10월혁명 이후 “거리는 우리들의 붓,광장은 우리들의 팔레트”라고 부르짖던 시인 마야코프스키에 의해 열기를 더해갔다.포스터는 물론 차체나 선박에 그림을 그려 넣은 선동열차,선동기선 등도 미술의 중요한 무대가 됐다.이번에 선보이는 아방가르드 작가의 작품으로는 말레비치의 ‘추수하는 여자’‘사모바르’‘블랙 스퀘어’,포포바의 ‘회화의 건축술’‘봄’ 등이 있다. 전시에서는 이밖에 19세기 후반 제물포항에 기항했던 러시아 함정 모형과 한·러 근대기 외교문서,베베르 공사의 조선(한국)정세보고서 등도 공개된다. 입장료는 성인 8,000원,중·고생 6,000원,초등생 4,00원.(02)759-7550. 김종면기자
  • 민주 8월말 전당대회 확정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1일 청와대에서 서영훈(徐英勳)대표 등 민주당 간부들로부터 당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전당대회 8월말 개최 건의를 받고 “당에서 잘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정동영(鄭東泳)대변인이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어 향후 당운영에 대해 “서 대표가 리더십을 발휘,당을 잘단합시키고 서 대표 중심으로 당을 꾸려가라”고 지시,전당대회에서 서대표의 유임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민족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국민에게알리고 국론을 통일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면서 “평양선언(6·15 남북공동선언)은 합의문이나 공동성명보다 높은 최고단계의 외교문서”라고 강조했다. 강동형기자 yunbin@
  • 명지대 기록과학특수대학원 국내 첫 개원

    몇년전 한일어업협정 체결에 관계했던 모 인사가 사망한 후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어업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헌책방에 나돈 적이 있다.이 문서는한동안 헌책방 선반에 나뒹굴다가 리어카에 실려 한 사료수집가에게 팔려나갔다.과거 공공기록물 관리가 엉망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통치사료는 청와대나 정부기록보존소가아닌,전직대통령들의 사저가 보관소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최근 공공기록물 보존·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한 대학에서 기록전문가 양성을 위한 전문대학원을 국내 최초로 개원했다.그동안 ‘찬밥’ 대우를 받아온 기록물 보존·관리업무가 이제 학문의 대상으로 떠오른것이다. 명지대(총장 송자)는 금년도 신학기 기록과학대학원(원장 유경득)을 개원하고 기록관리학과·문화재보존처리학과·큐레이터양성학과 등 모두 3개 학과에 32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이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학과는 기록관리학과. 우리사회에서 공공기록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제고되기 시작한 것은 ‘공공기록물 관리법’제정에 이어 지난 98년 6월 (사)국가기록연구원(원장 김학준·이사장 유영구)이 출범하면서 부터다.연구원에는 안병욱(가톨릭대·한국사),방기중(연세대·한국사),하용출(서울대·외교학),김유경(경북대·서양사),김태수(연세대·문헌정보학),서현희(신라대·문헌정보학)교수 등 130여명의 전문가들이 상임연구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연구세미나,소식지 발간,시민아카데미활동 등을 통해 연구활동과 대외홍보를 병행해 왔다. 연구원은 이듬해 4월 명지대와 공동으로 한국기록관리학교육원을 발족시켰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아키비스트(기록전문가)양성기관인 셈이다.교육원은역사학,문헌정보학 석사 이상자들을 모집,1년간의 교육 끝에 지난달 59명을졸업시켰다.이들의 졸업논문 59편은 국내외의 기록관리제도 연구,지방기록관·대학기록관의 사례연구,아키비스트 양성제도 연구 등을 주제로 다뤘는데기록관리학의 불모지인 우리의 현실에서 큰 수확이라 할만하다. 한편 이번에 새로 출범한 기록과학대학원은 기록관리학과 이외에 문화재보존처리학과,큐레이터양성학과 등을 두고 있어 문화재 복원·보존및 박물관,미술관 전문학예사도 양성할 계획이다.외국의 경우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미국의 텍사스대학·캘리포니아대학 등에서 이와 유사한 학과를 두고 있으나 독립된 특수대학원으로는 국내외를 통틀어 명지대가 처음이다.기록관리학과 김익한(41) 주임교수는 “공공기록물은 국가재산인 동시에 대표적인 공공 역사자료”라면서 “이번 대학원 개원이 한국의 ‘기록문화’ 인식제고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측은 1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원기념 강연회를 열었는데 김학준 국가기록연구원장과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기록문화의 발전방안과 박물관,미술관 등 문화시설 진흥책에 대해 각각 특강을 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뉴 밀레니엄의 전개] ‘남북통일’ 각국 언론사 시각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새로운 세기 세계 평화를 향한 관건이자 필수명제다.새 세기에도 한반도는 지척으로 다가올 통일과업 앞에서 남과 북이,그리고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축을 벌여나가는 격전장이 될 것이다.북한의 개혁개방,남북통일이라는대단원의 막은 새 세기 어느쯤에 이뤄질 것인가.새 세기 한반도 주변에서 펼쳐질 기상도를 워싱턴의 대한매일 특파원과 서울에 나와있는 각국 주요 언론사 특파원의 시각을 통해 집중 진단해본다. ◆미국 시각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의 대 한반도정책은 동북아시아지역의 안정과평화유지라는 대명제에 따라 이뤄진다. 최근 북한과 이뤄진 일련의 완화조치들은 이 커다란 대의명제 하에서 조직되고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월의 대북경제제재 완화조치와 올해초를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북미고위급회담 등은 한반도지역의 안보와 평화유지라는 명제를 가장 극명하게보여주는 정책실행의 단면이다. 단기적으로 핵의혹을 해소하고 계속되던 미사일 발사실험의 유예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당면한 미사일·핵확산금지에 더 초점을 둬 한국의 한반도 통일이라는 최종목표와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기도한다. 어쨌든 그동안 북한의 핵의혹과 미사일발사 위협 등이 간헐적이나마 꾸준히이어진 미국과 북한과의 협상에서 다소 해소되거나 정지된 것은 새해 한반도지역의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이게 한다. 미국은 99년 한해동안 계속된 설득끝에 결국 북한이 대화의 장에 임할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최근 북한은 외무성 성명에서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클린턴 행정부와는 대화를 연기할 수 밖에 없다”고 했지만 북한의 대화의지는 강렬했다는 것이 미국의 평가이다.국무부의 한 고위관리는 “북한이 이번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북한의 미국과의 대화는 체제를 위협하는 계속된 극심한 식량난 해소를 위해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노린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북한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지난 수년동안과 같은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대화의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당분간 북한은 미국과는 물론 경제적·외교적 실익을 노린 한국과의 직접적인 대화 역시 비록 형태는 달리할지라도 속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구체적으로는 북미 고위급회담이 새해 첫 북미관계의 하이라이트로 떠오를것이다.북한측에서 아직 고위급회담을 위한 대화 준비가 덜 됐다는 분석이있지만 어쨌든 북미회담은 미국이 북한을 국제사회에 이끌어내고 체제의 완만한 변화를 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인 북미수교의 첫단추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고위회담을 반드시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성과는 어느 선까지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하고 있다. [hay@] ◆중국 시각 20세기 지난(至難)했던 한반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금세기로 넘어왔다.그러나 21세기를 맞아 한반도 정세에 고무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크게 보아4가지다. 첫째,북한과 미국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북한의 경제제재를 완화한데 대해,북한측이 미국과양측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북·미 고위급 회담에 동의하고 미사일 발사실험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적극 호응하고 있다. 둘째,긴장완화를 통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한국·미국·북한·중국간의 ‘4자회담’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지금까지 6차례에걸친 회담의 성과로 볼때 4개국은 협상 시스템을 계속 가동할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북한·일본관계도 해빙 조짐이 무르익고 있다는 대목이다.지난해 12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한 일본 초당파의원단이평양을 방문,북한측과 7년동안 중단됐던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수교협상을 벌이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이와 함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도 최근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해제하겠다고 화답했다.북·일 관계정상화 회담의 개최는 얼어붙었던 양국관계가 서서히 풀릴 가능성을 예고하고있다. 넷째,남북 민간교류와 경제합작 사업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금강산관광,현대그룹의 공업단지 조성,남북 농구대회,남북 가수공연,남북교역의 증가 등은 남·북한 민간 및 합작교류의 성과를 의미한다.이는 앞으로 남북한 관계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적 토대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취약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99년 6월 남북한간의 서해교전이 잘 설명해준다.한반도는 동북아의 잠재적 화약고로 남아 있다.수십년간 적대시하면서 대치해온 데다 계속된 상호간의 제재 및 통제정책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어렵게 하고 위기를초래할 수 있는 복병이다. [가오하오룽(高浩榮) 중국 신화통신 서울특파원] ◆러시아 시각 한반도는 종말을 고한 20세기 중 가장 극적인 일들이 많았던,끊임없이 정치적 대립과 격동을 경험했던 지역 가운데 한 곳이다.러시아는 한반도와 역사적 지리적으로 인접한 탓에 지난 수백년 동안 한반도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에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21세기와 새 천년의 시작은 양국간 국교정상화 10주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지난 10년동안 서울과 모스크바는 상호관계에서서로 다른 경험을 해왔다.그러나 대체적으로 한·러관계라는 기관차는 현재가속도를 얻고 있으며 ‘친밀한 우호관계’라는 이름의 역(驛)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양국간의 정치관계에서 특히 중요했던 대목은 지난해 옐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간 정상회담을 꼽을 수 있다.이는 97년 12월과 98년 8월의 한국과 러시아 경제위기 이후 다소 냉랭했던 관계를 정상화시켰다. 또한 이고르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예브게니 셀레즈뇨프 국가두마(하원) 의장의 방한 등 다른 공식적 접촉도 있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보브린 아이스 발레단의 성공적 내한공연과 타간카극단의 공연 ‘아프간’에 대해 언급하고싶다.이 비극의 내용은 관객의 마음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듯하다. 새해는 양국 지도층의 방문 뿐아니라 무역,경제,과학 및 기술협력 회의 등 많은 교류계획이 있다.한국 음악애호가들이 올해도 볼쇼이 오페라의 공연을 즐기기를희망한다.양국관계 10주년 기념 한·러포럼 계획도 있다. 한·러우호협회 의장인 비탈리 이그나텐코 이타르 타스통신 사장과 후원단체들이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중인 양국관계 역사를 포괄하는 외교문서,공예품과 귀중품,19세기 양국 조정의 전통의상 등을 보여주는 전시회의 서울 개최를 추진중이다.이는 러시아 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소중한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볼때 한반도를 둘러싼 새해 정세는 원만한 양국협력 하에 전개될 것으로 전망한다. [블라디미르 쿠다호프 러시아 이타르 타스 서울지국장] ◆일본 시각 올해 한반도 정세를 푸는 키워드는 ‘대화’다.북한내부에서 대화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어 한반도에 곧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큰 흐름을 볼 때 대립이나 긴장을 초래하는 요소는 적고 북한 및 주변국을 둘러싼 토론의 장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이런 흐름을 구체적 성과로 연결시키는 일이 가능한지가 초점이 될 것이다. 우선 북한과 미국을 살펴보자.지난해 9월 베를린에서 열린 북·미회담에서북한 고위관리의 방미에 대해 합의했다.방문시기,논의내용은 명확하지 않지만 방문이 실현된다면 미국의 대북(對北) 경제제재도 한층 완화돼 국교정상화까지 내다본 대화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지난달초 일본의 초당파 의원단이 북한을 방문하고 올해안에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는데 합의했다.일본도 예상치 못했던 큰 진전이었으며 얼어붙었던 양국이 관계개선을 향해 적극적인 의사를 나타낸 것은 의미가 있다. 물론 98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북·일관계가 급속히 차가워진 것처럼 양국이 다시 어색해질 가능성도 적지않다.일본인 납치 의혹이나 미사일 발사의 전면중지 등의 조건을 일본측에서 제기하면 북한은 식민지배때의 보상금 등을 내걸어 대화는 간단히 중단될 것이다. 단지 북한은 최근 경제재건에 중점을 두고 있어 일본으로부터 식량지원이나 경제협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고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국교정상화교섭은 예상외로 빨리 진전할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남북한의 대화는 지난해 6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차관급회담이 결렬된 이후 끊긴 상태다. 총선이 있는 올해도 당분간 북한과의 대화는 어려울 것이다.6월의 차관급협의에서도 한국정부가 먼저 비료를 보내는 대폭적인 양보를 하면서도 회담을 일방적으로 거부당하는 등 북한측 외교전략에 휘말려 국민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기 때문이다.현시점에서 대화를 재개한다면 야당측에게 절호의 공격요인을 제공할 따름이다. 그러나 좋은 요인도 있다.남북간 경제분야의 교류가 진행되는 일이다.대화재개의 토대가 될 것이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담 직후 인 지난해 9월18일 임기중에 반드시 한반도 냉전구도를 종식시킨다고 강한 결의를 표명했다.이런 의미에서 4월 총선이 끝난뒤 다시 한번대화재개의 태동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고미 요지(五味洋治) 일본 도쿄신문 서울특파원
  • [외언내언] 푸에블로호의 운명

    동·서 냉전시절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뻔한 큰 사건으로는 60년대 후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70년대 후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꼽을수 있을 것이다.그중 미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반도를 전쟁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다.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23일 낮1시45분 동경 127도 54분 북위 39도 25분 공해상에서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아래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중령인 함장을 비롯한 6명의 미해군장교와 수병 75명,민간인 2명을 포함한 총 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해군 사상 106년만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1968년 2월2일 세번째 가진 비밀협상에서 미국이 영해침입을 시인,사과하는 조건으로 승무원은 송환한다는 데 합의함으로써 사건발생후 11개월만인 12월23일 82명의 생존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게 되었다.선체와 장비는 북한에 몰수되었으며 보상금 지불에 관한 내역은 알려지지 않은 채 떳떳하지 못한 타결을 보았다는 후문을 남겨놓았다.옛소련의 정찰용 U­2기 격추와 함께 미국의 정보활동사에서 가장 불미스런 일로 꼽히는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의 진상은 30년이 지나 공개된 외교문서에서도 결국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미국의 대북침략의 증거물로 보존해 왔으며 90년대부터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 전시상품으로 이용하기도 했다.한때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갈뻔 했던 애물단지 푸에블로호가 이제는 경제난을겪고 있는 북한의 외화벌이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아닐 수 없다.북한은 지난해 김정일(金正日)총비서의 지시에 따라 원산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나포 31년만인 지난 10월말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놓았다.푸에블로호가 대동강으로 옮겨진 이후 북한은 각계각층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푸에블로호 견학을 통한 반미(反美)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평양방송은 11월 한달동안 1만5,000여명 이상이 푸에블로호를견학했으며 반미사상을 강화하고 김정일 최고사령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고 보도했다.북한이최근 푸에블로호를 이용해 반미사상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주민들의 사상일탈을 방지하고 김정일체제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정략적의도로 볼 수 있다.또 대미협상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어 내겠다는 압력수단으로 이해된다.아무튼 60년대 말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왔던 푸에블로호는 30년이 지나 아무 쓸모 없는 고철신세가 된 지금까지도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서 기구한 운명을 이어가고 있다. [張淸洙 논설위원 csj@]
  • [기고] 韓·日국교정상화 美입장

    한·일 국교정상화는 제1공화국에서도 미국의 적극적인 제의와 권유를 통해 논의됐지만 한국인의 반일 감정 및 어업문제 등이 얽혀 한국정부로서는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사안이었다. 제2공화국 수립 후 미국은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권유한다.이는 미 국무부 한국 관련 자료에 포함된 당시 한·미·일 3국간에 오간 외교문서에서 확인된다. 미 국무부는 ‘7·29총선’으로 민주당 집권이 확정된 1960년 8월15일 주한·주일 양쪽의 미대사관에 같은 전문을 보낸다(A).한·일회담 재개가 중요하면서도 긴급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양국 정부가 가능한 한 빨리 도쿄나 서울에서 실질적인 협상을 재개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는 한국정부의 움직임을 국무부에 줄곧 보고한다.8월20일 장면(張勉)총리가 첫 기자회견에서 외교정책에 관한 질문을 받자 “미국의 지원이 무한정 계속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며,따라서 한국은 일본·서독 등과의 경제외교를 강화함으로써 경제발전에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B)는 내용이 그 첫번째다. 이 자리에서 장 총리는 한·일 양국이 과거의 구태의연한 태도와 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열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표명했다.이어 8월25일에는 정일형(鄭一亨)외무장관이 공식 발표한 장면정부의 일곱가지 외교지침 가운데 네번째로 ‘한·일관계 정상화’가 들어 있다고 보고한다. 바로 다음날 매카나기 대사는 장 총리와 단독면담을 갖는다.그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장 총리에게 요청한다.이와 함께 매카나기는 최소한 평화선(일명 이승만 라인)을 위반했다 나포된 일본 선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협상은 시작해야 할 것 아닌가.그러면 그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일본과 협상을 열어 점진적으로 한·일관계 정상화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권유한다. 장 총리는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음을 분명히 한다.그러면서도 평화선과 연계된 어업협정을 비롯한 산적한 현안과 관련해서는‘대일 감정’을 신중히 고려해야한다고 설명한다.이어 일본 민간인 단체와의 비공식적인 접촉을 제안한다.이를 통해 일본정부의 진심을 확인한 다음‘한국은 일본과 기꺼이 협조관계를 맺고 싶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순으로서서히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막후 노력에 힘입어 드디어 9월6일 일본 외무장관 고사카가한국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방한하였다.그 방한은 냉각된 한·일관계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한·일 외무장관들은 경제 관계 개선과 한·일회담 재개는 물론 양국간 문제에 전반적인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이해를 높였다. 그 합의를 바탕으로 한·일간 협상은 진전돼 61년 4월11일에는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긴급히 요청받은 기술지원과 거액의 개발지원금을 장기 차관 형태로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할 정도로 결실을 거두었다(C). 그러나 ‘군사혁명’을 맞음으로써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 역시 경제발전 계획들과 함께 기약할 수 없는 미래로 넘어가게 되었다.
  • 中·日정부 보관 한국자료 공동활용

    동아시아 각국의 국가기록보존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관계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정부기록보존소는 13일부터 14일까지 정부 대전청사에서 열리는 동아시아기록보존협력기구(EASTICA) 이사회에서 소장자료 상호 활용방안을 협의한다고12일 밝혔다. 이번 회의에서는 기록물을 효율적으로 조사·활용하기 위한 ‘기록물교환위원회’와 기록물의 공동이용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기록물자동화위원회’운영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예정이다. 이번 회의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일본·몽골·마카오·홍콩 등 6개국의 정부기록보존기관 관계자가 참석하지만,북한은 회원국이면서도 참석하지 않아자료교류에 참여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동아시아 각국의 기록보존기관에는 한국관계 기록물이 상당수 소장돼 있는것으로 알려져 왔으나,그동안 정부차원의 활용대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특히 중국의 국가기록보존기관인 당안관에는 임오군란 당시의 대원군 납치,개항 이후 조선의 외교문서 및 항일활동기록 등 방대한 한국관련 기록물이 소장돼 있다. 일본의 국립공문서관에도 명치유신 이후 정부 각 부처의 한국관련 정책 수립 및 집행과정에 대한 문서가 다량 소장돼 있다. 또 몽골·홍콩·마카오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대한 조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새로운 한국관련 자료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기록보존소 관계자는 “회의가 끝나는 대로 각국의 기록보존기관에 연구원들을 파견해 자료를 조사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면서 “각국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활용이 시작되면 한국 근대사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동아시아기록보존협력기구는 지난 93년 창설됐으며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6개국 및 북한 등 7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4)경제개발 5개년 계획(中)/아이젠하워

    張勉정부는 집권 직후인 1960년 9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곧바로 미국에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것이 ‘한국의 경제개혁 비망록’(Aide Memoire on Economic Reform Measures in Korea)이다. 25쪽 분량인 이 문서는 구성상 통상적인 외교문서와는 큰 차이가 있다.張勉정부는 단순히 원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실정과 이에 따른 경제개발 필요성,5개년계획의 윤곽,그리고 張勉정부의 개혁의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한국은 지금 ▒노동가능 인구 940만명 가운데 130만명이 실업자이고 ▒농촌인구의 65%는 가난과 저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3년간(1957∼1959년) 무역적자는 연평균 3억4,800만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기적인 경제개발이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미국이 원조를 해준다면장면정부도 국군 5만명 감축,일본과의 국교정상화,환율 정상화 등을 이루겠다고 약속했다.말하자면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개혁을 해나갈 터이니 대신경제 지원을 해달라’는 식이었다. 실무자로서 비망록을 작성한 李起鴻(당시 부흥부 기획국장)은 “외교문서에 공무원 봉급을 현실화해 공직사회 부패를 없애겠다는 다짐까지 했으니 자주독립 정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린 문서였다”고 회고했다.그는 張총리에게 결재받으러 갔더니 힘없이 그러나 인자한 표정으로 몇마디 묻고는 사인하더라면서 “張총리가 그 내용에 공감했다기보다는 金永善재무장관을 믿고 결재하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굴욕적이기까지 한 ‘경제개혁 비망록’이 꼭 필요했을까.그 무렵은 국가재정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상태였고 게다가 李承晩정권의 실정(失政)으로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60년 8월6일 許政과도정부가 발표한 李정권의 ‘외화 낭비’규모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낭비액’은 미화 3억3,000만달러,영국돈 286만4,000파운드,일화 1억4,600만엔 등이었다. 이 비망록은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요악이었을 것이다. 金永善장관과 車均禧부흥부 사무차관은 미국을 방문,10월4일 비망록을 허터 국무장관에게 수교한다.이 문서는 국제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유력한 경제지인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윌슨 편집국장이 직접 한국에와 金永善장관과 李起鴻국장·李漢彬재무부 예산국장 등을 인터뷰해 그 내용을 10월27일자 커버스토리로 싣는다. ‘도약을 위한 한국의 탄원’이란 이 기사에서 윌슨은 “일단의 젊은 관료들이 체면불구하고 미국에 매달려 경제적 도약을 하겠다고 공개 탄원했다”고 보도했다.아울러 한국의 사회상이 한심스럽지만 희망을 가지고 경제발전을 지켜볼 만하다고 기대를 걸었다. 나라의 체면마저 저버린,그래서 도리어 張勉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더욱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비망록은 1983년 11월에야 외교문서로 정부에 정식등록된다.부흥부에서 작성해 총리의 결재를 받고 재무장관이 미국에 전달할 때까지 외무부의 손을 전혀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만큼 파격적인 외교문서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지원에 관한 張勉정부와 미 행정부간의 협의는 순조롭게,그리고 바삐돌아간다.60년 10월13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경제회담에서 한국은 4억2,100만달러를 61∼65년에 걸쳐 원조해 달라고 미국에 정식 요청한다.이 액수는‘경제개혁 비망록’에서 한국이 밝힌 5개년계획의 미국측 지원규모 그대로다. 이 회담에서는 또 환과 미국의 달러화 환율을 61년부터 1,000대1로 끌어올리기로 합의한다.11월26일에는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張총리를 방문,비망록에서 밝힌 요청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는 허터 미 국무장관의 공한을 전달한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는 친한파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관심에도 크게 힘입었다는 사실이 최근 발굴된 미국 외교문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별도기사 참조] 張勉정부는 미국의 경제지원을 얻느라 부단히 애쓰는 한편 국내에서도 기업인과 국민에게 장기 경제개발의 당위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대표적인 예가 60년 12월5일부터 닷새 동안 열린 ‘종합경제회의’다. 정부가 경제정책에 관한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자 마련한 이 회의에는 경제·기술·언론·학계 인사들과 각 지방 독농가까지,당대의 오피니언리더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張총리는 “4월혁명의 진정한 과업은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한줄기찬 경제발전 없이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강조하고 “새해부터는 실업과 민생문제에 적극 대응해 나갈테니 온국민이 자조자립의 정신으로 동참할수 있게끔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金永善장관의 발언은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金장관은 한국이 경제면에서 북한보다 3∼5년 뒤져 있음을 산업별 수치를들어 솔직히 밝히고 “북한과의 경제전쟁에서 뒤떨어진 현실을 극복하려면땀과 피,희생과 인내,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불과 몇달 전까지 ‘반공’을 국시로 내건 李承晩정권 하에서 언제라도 ‘북진통일’이 가능하다고 믿던 국민에게는 이보다 더한 충격이 없었을 것이다.이와 함께 ‘金永善 발언’은 ‘국민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화를 통해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張勉정부의 기본방침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종합경제회의에서 간사로 일한 金立三(77·전경련 고문)은 지금도 “張勉정부는 경제발전에 관한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그점에서는 張勉정부가 자유당정권은 물론 5·16 군사정부보다도 월등히 앞섰다”고 평가했다. 1961년으로 해가 바뀌면 민간 경제계도 한국경제협의회를발족하는 등 경제개발에 동참할 채비를 갖춘다.아울러 산업개발위원회가 준비하는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 안이 완성 단계에 이른다. 李容遠 ywyi@ - 아이젠하워 한국경제 큰 관심… 개발 적극 독려 1960년 9월은 張勉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공표하고 ‘경제개혁 비망록’을준비하는 등 숨가쁘게 돌아가던 때다.이 무렵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일시 귀국한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한국문제,특히 경제개발에 관해깊이 상의한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 정부문서간행처(USGPO)가 발행한 FRUS 18권 691쪽에 수록된 자료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의록’(A)에서 확인할 수 있다.아이젠하워는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52년 12월과 두번째 임기중인 60년 6월 등 두 차례 방한한 친한(親韓)인사다. 9월14일오전 9시 아이젠하워를 만난 매카나기는 “한국에서 많은 진전이있었고,張勉정부는 잘 해나가고 있다”고 보고한다.또 “파벌싸움이 있기는하지만 이는 동양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이어 본인이 이번 방문에서 확실하게 추가원조를 얻어올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기대한다고도 보고한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 스스로 경제 단계를 끌어올리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이 듣기 싫어하겠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는 한 주권국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한국의경제발전이 시급함을 재차 강조했다. 그 무렵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1960년 8월12일 파슨스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가 매카나기에게 보낸 편지(B)에 잘 나타나 있다. 파슨스는 “한국사회와 경제를 자유롭고 안정되게 유지한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은 적어도 공산주의자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며,크게는 한국에서 사회정의와 경제발전을 실현함으로써 아시아에 자유세계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사회에 늘 존재하는 불화와 반목,광범위한 혁명적잔재의 위협을 극복하고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가 제시한 ‘도약단계’로 전환하도록 지도와 격려,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우리의 공산주의 경쟁자들에게 그들의 방식을 시도할 기회를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파슨스의 관점에서도 엿보이듯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기조는 냉전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나 張勉정부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까닭은 ‘李承晩독재’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張勉정부야말로 미국이 자유세계의 모범생으로서 키울 만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전상숙(梨大강사·정치학박사)
  • 3·1절에 보는 베델의 한국사랑

    1904년 창간된 순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베델(裵說)과 신채호등 항일언론인들이 펼친 구국운동이 TV영상을 통해 조명된다.3·1절 80주년을 맞아 KBS 1TV ‘역사스페셜’(토 오후 8시10분)은 ‘3일간의 재판-영국인 베델을 추방하라’를 특집으로 내보낸다.재판은 AP통신에서 특파원을 보낼정도로 국제적 화제를 모았다.이 프로는 90여년 전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3일동안 계속된 공판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시작된다.‘국내 최초의국제재판’이었던 당시 재판의 피고는 베델이었고 죄목은 ‘한국민 선동죄’였다. 이에 앞서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20일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된 직후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명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리자 같은달 27일 이를 영문으로 번역,호외를 발행하는 등 민족의 소리를 대변했다.당시 1만 3,256부로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했고 영문판까지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여론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베델은 영국인이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신문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베델이 한국에 온 것은 1904년 2월.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자격이었다.‘경운궁의 화재’를 특종보도했던 그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등 지사적 언론인들과 자주 접촉하다 스스로도 항일 정신을 갖게 됐다. 이런 사실은 일본과 영국의 외교문서에 기록된 베델의 흔적을 추적한 결과확인됐다.자료들은 베델의 ‘처리’를 놓고 영·일 간에 빚어진 외교적 마찰과 베델의 한국 밖 추방결정 과정 등을 알려준다. 담당연출자 김형석PD는 취재과정에서 베델의 한국사랑과 선각자들의 활동에 “감탄했다”면서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프로제작 때 가장 신경을 기울인 부분은 법정의 재현 장면.법정에서 시작해 법정에서 끝나기 때문에 자칫 ‘재미’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였다. 이를 위해 버츄얼 스튜디오(가상공간)에서 진행자가 3자적 관점으로 재판을지켜보는 연극적 방식을 채택,시청자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피고석의베델은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연기자 대신 확대한 사진을 활용했다. 베델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도 공개된다.1909년 베델이 서울에서 숨지자 한국인들이 보낸 조문편지 묶음 등이 그 것.편지에는 유림과 농부,동경유학생 등 각계각층의 애통해 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있다. 취재 뒷이야기도 많다.베델의 며느리 도로시여사(82)는 시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도로시여사는 당초 ‘촬영 절대불가’를 조건으로 취재에응했다. 이에 따라 김PD는 카메라 뚜껑도 열지 못했으나 이튿날 도로시여사의 자녀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많이 알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도로시여사를 설득해 비로소 촬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PD는 “베델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표현외에 달리 형언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許南周yukyung@
  • 나라도장 ‘국새’ 37년만에 재탄생

    나라도장인 국새가 37년 만에 새로 태어났다.손잡이가 거북 모양에서 봉황으로 바뀐 새 국새는 2월부터 사용하게 된다. 행정자치부는 “62년말에 제작된 현재의 국새는 해마다 1만6,000여 차례 이상 사용해 인면(印面)이 손상된 데다 재질이 은으로 되어 있어 국새의 품격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 제기돼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새로 만들었다”고 밝혔다.새 국새는 봉황이 무궁화 꽃잎을 함께 물고 구만리 창공을 웅비하는 모습으로 돼 있다.21세기에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국가지도자와 온 국민이 하나가 돼 화합·협력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금으로 제작하던 과거 전통을 되살려 금·은·구리 등을 합금해 18금으로만들었다.인면의 크기는 조선왕조 때의 국새 크기와 비슷한 가로·세로 10.1㎝씩이다.무게는 현재의 국새보다 다소 무거운 2.15㎏이다. 서체는 훈민정음 판본체와 한글창제 뒤 최초의 작품인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 등의 서체를 참조해 만들었다. 국새는 사무관 이상의 국가공무원 임명장이나 훈·포장증,외교사절의 신임장,중요 외교문서 등에 사용하는 관인으로 국가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朴賢甲
  • 金대통령 이름 영문표기 정정요구 묵살

    ┑워싱턴 崔哲昊특파원┑“한국 대통령의 이름은 ‘김태충’입니다.” 세계 제일의 정보기관이라고 자랑하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만드는 인터넷웹사이트인 World Factbook에는 한국의 대통령 이름을 김대중(Kim,Dae-Jung)이 아닌 ‘김태충(kim Tae-Chung)’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CIA는 주미대사관이 2∼3차례에 걸쳐 사실관계를 설명하고 Dae-Jung으로 정정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현재 외교문서상이나 각국의 모든 언론에서는 Dae-Jung으로 표기하고 있다. 미 언론에서도 김대통령의 애칭은 ‘DJ’이다. CIA가 지난 14일 주미대사관에 보낸 정정요구에 대한 회신에는 ▒맥퀸-라이샤워 표기법상 Tae-Chung이 올바르며 ▒김대통령 자신이 예전에 그렇게 써달라고 요구했다고 얼토당토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 CIA는 이외에도 한국 독립연도가 정부수립해인 1948년이라고 써놓는가 하면,지난해 5월에 바뀐 주미대사의 이름을 李洪九대사가 아닌 朴健雨 전대사로그대로 두다가 최근에야 이를 정정하는 등 오류 정정에 인색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hay@
  • 정부 외교문서 공개

    지난 68년 1월 23일 발생한 미해군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사건 직후 한·미 양국이 대응방식을 놓고 첨예한 신경전을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이같은사실은 ‘생산·접수후 30년 경과 외교문서의 공개' 규정에 따라 외교통상부가 13일 공개한 ‘1·21 무장공비 침투와 푸에블로호 납북 관련 외교문서'에 담겨있다. 당시 한·미 갈등은 1·21사태에 대한 미국의 소홀한 대처에서 비롯됐다.미국은 1·21 청와대 기습사건을 단순한 무장공비 사건으로 취급했다.백악관국가안전보장회의도 열지 않고 주한미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이 문제를위임,한국의 대북 강경대응을 억제하는데 주력했다. 이틀후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자 1·21사건과 연계처리하자는 한국의 주장을 무시하고 미국은 북한과 비밀협상에 나서 승무원 송환을 위한 판문점회담을 성사시켰다.푸에블로호의 유엔 안보리 상정과 관련,한국은 안보리 상정은 북한에게 선전장을 차려주는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미국은 남북한의 동석을 요구,갈등을 빚었다.사건 발생 열흘이 지난 2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주한미대사에게 “1·21사건과 푸에블로호를 똑같이 중요시한다”는 각서를 썼다.각서에는 물론 판문점 북·미회담에 한국군이 참석 못해 유감이란 우리의의사도 명시됐다.또 사건 종료직후 미국은 대북 사과문 합의 경위를 담은 해명서를 한국에 전달했으나 한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돌려보냈다. 한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 프랑스,태국,콜롬비아,남아공,에티오피아 등한국전 참전 16개국을 대상으로 대북규탄과 한국지지 성명을 얻어내려 했으나 미국의 소극적 자세로 실패했다.한국은 또 미국정부가 북한에 의한 억류선원을 중시,1·21사건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인데 대해 항의하고 그 대가로 군사원조 확대를 요청했다.3월 28일 주미대사관이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는 미 국방부 차관보가 하원외교위에 나가 한국군 전투태세 개선을 위해 69년 군사원조예산 4억2,000만달러 전액의 승인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 사장 裵說의 재판:1(대한매일 秘史:1)

    ◎韓·英·日 이목 집중시킨 ‘역사 드라마’/피고 대한매일사장 배설·원고 통감 이토/증인 편집책임자 양기탁·의병장 민종식/美 유학 마치고 돌아온 金奎植 통역맡아/당시 한국상황 상징적대표 총 등장 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에 정론직필로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는 현대사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숨겨져 있다. 대한매일은 재창간을 기념하여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한국외대 鄭晉錫 교수(언론사)의 집필로 연재한다. 70년대 대한매일 영인본 제작 실무를 맡았던 鄭교수는 영국 공공기록보관소에서 방대한 외교문서를 찾아냈고 한·일 자료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등 대한매일 연구에 몰두해왔다. 대한매일신보사의 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 대한매일은 사장이 영국인 배설(裴說)이었으므로 사내에 일본경찰이 들어올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인(일본 순사)을 개에 비유한 경고문을 신문사 정문에 걸었을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한매일의 용기 있는 논설과 보도 태도로 보아 일본인 순사를 개로 빗댄 글을 써 붙였음직도 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한매일은 일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당시에 발간된 영국의 데일리 미러는 영국 국기가 한국인 편집장 양기탁을 보호하는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보도했다. 이와같이 대영제국의 치외법권이 허용된 신문이기는 하였으나 용기 있는 신문에 불어닥친 시련도 거세었다. ○용기있는 신문에 시련도 거세 1908년 6월15일 오전 10시. 서울 정동에 있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을 피고석에 앉힌채 재판이 열렸다. 배설에 대한 재판은 그 한해 전에 이어 두번째였다. 재판이 열린 영국 총영사관은 오늘의 대한매일­프레스센터 빌딩의 맞은편 덕수궁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영국 대사관 건물이다. 재판이 열리던 무렵은 전국에서 의병들이 무력으로 항일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일본군 2만여명이 의병을 진압하려는 작전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책임을 물어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직후,군대를 해산하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의병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전개되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서방 기자로는 유일하게 산속까지 들어가서 의병을 직접 취재했던 캐나다 출신 영국기자 맥켄지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남루한 차림으로 싸우는 의병들의 처열한 투쟁에 감동되어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배설의 재판은 한국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였던 한­영­일 3국이 관련된 특이한 국제재판이었다. 재판 진행과정은 역사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고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당시 한국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피고 배설을 비롯하여 상해에서 이 재판을 위해 한국에 왔던 판사 보온과 검사 윌킨슨,일본 고베(神戶)에서 온 변호사 크로스는 모두 영국인들이었지만,통감 이등박문을 대리하여 고소인의 자격으로 참석한 사람은 통감부의 제2인자 서기관 미우라(三浦彌五郞)였으며,증인으로는 대한매일의 실질적인 제작책임자인 총무 양기탁,의병장이었던 민종식을 비롯하여 궁내부 전무(電務)기사,그리고 평민도 있었다. 영어 통역을 맡았던 사람은 당시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金奎植)이었다. 일­영어 통역은 히시다(菱田) 박사가 맡았고,한­영어 통역 마에마(前間恭作)는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외교관으로 ‘조선의 판본(板本)’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고베에서 발행되던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이 “동양 역사상 처음” 열리는 재판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재판 광경은 기이하고도 이색적이었다. 법관과 변호사는 영국 법정의 격식대로 백색의 꼬불꼬불한 가발에 육중한 법복 차림이었고,통감부를 대표하여 나온 미우라는 금실로 수놓은 제복의 정장이었다. 나중에 증인으로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흰 두루마기에 상투 틀고 갓 쓴 사람과 단발로 머리를 깎은 사람도 있었다. 통역 김규식은 서양 예복인 프록코트(연미복) 차림이었다. ○기이하고 이색적인 재판광경 연출 방청석에는 지방 거주 선교사도 상경하였고 각국의 주한 외교관과 서양 여자들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재팬 크로니클은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더글러스 영이라는 기자를 서울로 특파했고 AP통신도 특파원을 보내어 이를 취재할 정도로 이 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컸다.
  • 농림해양수산위/國監 하이라이트

    ◎‘한­일 어업협정 문안 공개’줄다리기/김 장관,의원 요구에 “독도는 우리땅” 선언/배타적 경제수역·어업협상 분리 비판도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의 28일 해양수산부 국정감사는 독도 청문회를 방불케 했다.야당측은 처음부터 독도 영유권을 포기했다고 집중포화를 터뜨렸고,여당의원들은 국민정서상 민감한 문제임을 감안,정부측을 위해 적극적인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金泳鎭 농림해양수산위원장이 개회선언을 하자마자 한나라당 李海龜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가서명된 한일어업협정 문안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포문을 열었다.이어 尹漢道 權五乙 朱鎭우 李佑宰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잇따라 일본어와 영어로 된 협정문안 공개를 요구했다.이에 尹鐵相 金珍培 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들이 “진행중인 외교문서는 공개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반박,업무보고가 1시간 동안이나 지연되기도 했다. 한나라당 金淇春 의원은 “정부가 무인도에 대해서는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포기했다”면서 “그럴 바에야 왜 170억원이나 들여접안시설을 만들고 상주민까지 뒀느냐”고 공격했다.金의원은 이어 “일본과 베네주엘라,미국등은 우리 독도보다 작은 섬에 대해서도 EEZ를 적용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자민련의 李完九 의원까지도 “일본의 노련한 외교술에 말려 들어 일본측 주장대로 어업협상과 배타적 경제수역 협상을 분리,논의한데 이어 공동수역 주장까지 받아들였다”고 정부를 비판했다.반면 裵鍾茂 의원(국민회의)은 정부가 관광상품을 만드는 등 독도개발에 적극 나서 영유권을 다져야 한다고 제안을 했다. 야당측의 공세가 고조되면서 辛卿植 의원(한나라당)의 요구에 따라 金善吉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선언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 韓·日 경협강화 최대성과 꼽아/金 대통령 訪日 외교 여론조사

    ◎“과거 사죄수준 나아졌다” 65% 국민들은 金大中 대통령의 한·일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로 30억달러 차관도입 등 한·일 경제협력강화(41.6%)를 꼽았으며,그 다음이 일본의 과거사 사죄 및 외교문서화(30.9%),일본 대중문화 개방(12.5%)순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청와대가 전문여론조사 회사인 코리아리서치에 의뢰,지난 12일 전국 성인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한 결과,확인됐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사죄수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나아졌다’와 ‘나아진 편’이라는 응답이 65%,‘과거와 비슷하다’가 29%로 사죄수준이 과거에 비해 크게 진전된 것으로 평가했으며,30억달러 차관 도입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83%가 만족감을 표시했다.재일동포의 처우개선 검토방안에 대한 평가 항목 역시 74.1%가 만족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문과 행동계획의 실효성을 묻는 질문에는 ‘실효를 거둘 것이다’는 응답이 36.3%,‘선언적 의미에 그칠 것이다’가 39.4%로 드러나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또 일본 천황호칭 사용에 대해선 여전히 반대(52%)가 찬성(35%)보다 많았다.다만 천황 호칭 문제의 경우 지난달 22일 조사에 비해 찬성과 ‘모름 또는 무응답’이 각각 3.7%와 3.6%포인트 늘어난 반면 반대는 7.4 %포인트 줄어 천황 호칭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일황의 방한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0%가 찬성,압도적으로 지지했으며,58%가 일황의 방한이 양국간 월드컵 공동개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응답자의 81%가 이번 방일 성과에 대해 매우 만족하거나 만족하는 편이라고 답했으며,대통령의 외교능력에 대해서는 ‘매우 잘했다’와 ‘잘한 편이다’는 평가가 85.2%로,‘못한 편이다’와 ‘매우 잘못됐다’의 8.6%보다 무려 10배 가까이 많았다,
  • 새로운 韓·日 협력 관계를 위해/오코노기 마사오(기고)

    지난 8일 도쿄(東京)에서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1965년 6월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및 제협정을 실질적으로 수정,보완했다. 한일기본조약 관련문서에는 “한국국민에게 식민지배로 많은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의 인정도 없고 “통절(痛切)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도 없다.미래 한일협조를 위한 ‘행동계획’도 물론 없다.식민지배가 종결되고 53년,한일조약이 체결되고 33년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외교문서에 명기된 것이다. 이번 선언은 한마디로 “과거를 잊어서는 안되지만 앞으로 정치와 경제 체제를 함께하는 인접국으로서 적극적인 협력을 해나가자”라는 결의 표명이자 행동지침인 셈이다.21세기를 향한 파트너십을 강조한데 큰 의의가 있다. ○‘과거청산’ 이상적 형식 金大中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과 절묘한 행동력으로 이를 해냈다.일본의 용기있는 대응도 칭찬할 만하다.역사문제에 대해 金대통령은 공식적으로 한차례도 사죄를 요구하지 않았다.일본측이 스스로 표명하고 한국측이 그것을 평가,합의하는 이상적 형식을 취한 것이다.두 나라 국민 모두를 만족시켰다. 두 나라는 지금 과거에 발목을 잡혀 있을 여유가 없다.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경제분야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나 국제적 금융불안에 직면한 일본과 한국은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산업구조조정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기업이 안고있는 부실채권과 우려되는 노사분규,일본기업의 내부사정,양측의 심리적인 갈등 때문에 일본의 대한(對韓) 직접투자나 기술협력은 여전히 위축된 상태다.이번에 합의된 일본수출입은행으로부터의 30억달러 융자는 그동안 경제교류가 활발했었다면 불필요했을는지도 모른다. 안전보장분야에도 일본과 한국은 긴밀한 협력이 요구된다.대포동 개량형 미사일에 의한 인공위성의 발사는 일본 국민에게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실감케했다.북한 체제붕괴가 현실화 됐을 때 한국과 일본은 과연 단독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이러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동북아시아의 다각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두나라는 공동협력하지 않으면안된다. ○韓·日 안보대화 주목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 금기시 해온 한일 안보대화와 방위교류의 강화,대북(對北)정책에의 공동보조가 ‘행동계획’에 구체적으로 명기돼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일본측에서 보면 두 나라 정상이 유엔을 비롯,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공헌과 역할의 증대’에 합의한 부분은 중요하다.한국이 미래에 일본의 유엔상임이사국 진출에 양해를 해준 것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와 이를 계기로 국민 차원에서 이뤄질 다양한 교류는 미래를 향한 두나라 국민의 ‘공동작업’에 목표를 제시한다는 의미도 띠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21세기 한일 우호를 상징하는 일황의 한국 방문이 순조롭게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일본형 모델 재고해야 이러한 새로운 한일협력 체제는 서로가 추구해야 할 국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한국이 그동안 일본형 모델을 쫓아 산업규모의 확대를 통해 경제대국을 추구했던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한국에 맞는 산업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고 경제 기술 복지문화의 균형이 잡힌 스웨덴형이어야 하지 않을까.일본도 ‘한국과의 화해’를 통해 국제성을 지닌 경제대국의 새역할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양국 교류 章典 도의적 구속력/공동선언의 효력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의 단초는 지난 3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당시 일본 총리가 金大中 대통령에게 보낸 방일 초청 구두메시지에서 비롯됐다.이어 5월에 열린 외무장관 회담에서 양국은 파트너십 선언 작성에 최종 합의했고 5개월여에 걸친 실무협의 끝에 양국 교류의 장전(章典)이 탄생하게 됐다. 양국 사이의 포괄적인 협력 원칙을 담은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최근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외교문서 형식.‘공동비전’,‘협력 20 조치’,‘협력을 위한 공통과제’ 등으로 포장은 달리돼 있지만 알맹이는 비슷하다.이전의 유명한 예는 오랜 앙숙 관계였던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2차대전 직후 체결된 파트너십 선언.그 뒤 양국관계는 이 합의에 기초해 우호협력 관계로 전환됐다. 우리나라가 이같은 파트너십 선언을 채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金泳三 대통령 때도 여러 나라와 ‘동반자적 관계’를 맺었지만 주로 말에 머물렀을 뿐 이처럼 문서로 종합정리하지는 못했다.반면 일본은 이번이 5번째 사례다.지난 93년 미국과 처음 채택한 뒤 96년 독일과 프랑스,지난 1월에는 영국과 잇따라 파트너십을 맺었다.그러나 일본이 아시아국가와 이런 문서를 작성하기는 우리가 처음이다. 파트너십 선언은 국제법상 강제성은 없는 정치적 선언이어서 지키지 않더라도 법적 책임은 없다.하지만 도의적 책임까지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실상 어느 정도의 구속력은 있다.
  • 韓國 70년대 核개발 추진/美 압력으로 중단 확인

    ◎美 관련문서 비밀 해제/美 다양한 압박… 朴 대통령 두차례 ‘저항’/“劾재처리시설 팔지 말아라” 佛에도 압력 【워싱턴=崔哲昊 특파원】 한국은 지난 74년부터 76년까지 프랑스로부터 핵 재처리 기술을 도입,핵무기를 독자보유하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미국 압력으로 중단한 것으로 27일 확인됐다. 지난 24일자로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포드 행정부의 비밀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朴正熙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위해 프랑스로부터 플루토늄을 생산할수 있는 핵연료 재처리 플랜트 도입을 추진했다. 한국정부는 이와함께 록히드사로부터 미사일 고체연료와 로켓모터 설계 도입계약을 맺는 등 북한을 공격할 수 있는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상업적 원자력 분야의 협력 중단 및 차관제공 중단 등으로 위협,한국정부의 핵무기 개발을 막았다. 또 프랑스 등 기술제휴국과의 외교 교섭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핵 재처리 플랜트 도입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두차례나 거부한 끝에 76년초 미국 대표단 내한을계기로 미국의 차관 및 지급보증으로 고리 2호기 원자로를 도입,평화적 핵 협력관계를 맺고 핵무기 개발계획을 중단했다. 70년대 한국정부의 핵개발 계획과 미국의 외교적 압력이 정부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주한 미국대사관과 국무부 및 백악관간을 오간 비밀 외교문서의 주요 부분. 75년 5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서울,도쿄,오타와(캐나다),파리 및 빈(오스트리아)의 미 대사관에 ‘한국 핵무기 개발 저지를 위한 외교 지침’을 시달했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은 “10년안에 한국이 핵개발에 성공할 것이며 80년대 초면 그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앞서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75년 3월 스나이더 주한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한국이 10년내에 제한적인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보유할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한국의 핵개발 포기와 핵확산금지조약(NPT)가입을 위해 압력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이 전문은 “한국의 핵보유는 북한과 일본에 영향을 주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핵무기 지원을 보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한국이 핵을 보유하게 되면 朴正熙정부가 대미 군사력 의존에서 탈피,한·미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도 외교경로를 통해 한국에 핵 재처리 시설을 판매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또 영국,캐나다,소련,서독,일본 등과 비밀회의를 갖고 핵관련장비와 기술의 수출통제를 추진했다.
  • 헤이그 특사 파견(秘錄 南柯夢:24)

    ◎“이준 열사 피뿌리며 救國자결” 소문/4,000년 역사­500년 조선 당당히 알리지만 열강들은 쳐다보기만/약소국 울분 누르며 ‘오냐 이한목숨 죽어…’/일제,施政改善 핑계로 덕수궁 관리들 모두 쫓아내고/고종은 ‘행여 國運 도움될까’ 누각동 移居 준비하는데…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手決)도 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에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침략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황상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聖朝)에 없었던 일이다. 그후 2년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44)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해 한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그 뿐인가.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癸巳)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조선 전국이 공포에 쌓여 바람소리 학울음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뒤 갑오년(1894)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들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이어 을미년(1895)에는 왜적이 중궁(中宮=명성황후)을 시해하였다.병신년(1896)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그 뒤 무술년(1898)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1904)년에는 러일전쟁,1905년 을사5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7개월만인 1906년 6월 어느날 한 통의 외교문서가 고종에게 전달되었다.이것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보내온 초청장이었다.화란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이 얼마나반가운 소식인가. 니콜라이황제가 고종황제의 뜻을 알아서 보낸 것이었을까.고종은 즉시 극비리에 외교사절을 임명하였다.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조직해 위임장을 써 이준에게 전달했다. 어느날 밤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직접 돈2만원을 하사하시었다.물론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헤이그)에 도착하였다.해아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엄숙하게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준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의관과 문화는 우리와 달랐고 그 위의(威儀)는 산과 바다와 같았으니 마치 신왕(神王) 신제(神帝)가 노는 것 같아서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했다.모두가 후한 봉급을 받고 고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은빛 훈장을 달고 어깨와 팔뚝에는 금줄로 누볐다.또 얼굴에는 금테안경을 쓰고 한결같이 남만격설(야만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을 하니마치 까마귀떼가 모인 것과 같았다. 이런 곳에 멀리 조선의 일개 백면서생이 참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니요,받아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이준의 사람됨이 8척이나 되는 키에 위엄이 당당하여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그래서 각국 대표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중략).이때 이준이 4천년 역사와 조선왕조 5백년의 내력을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진술하였다.그러나 가부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모사는 사람이 하고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것인가. 본래 서양사람들은 성질이 느리고 의심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 평생 하는 짓거리가 바위아래 노불(老佛)같고 구멍속의 긴 뱀과도 같으니 무슨 의리로 남의 나라를 구해 주겠는가.이에 이준은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一死報國)이 낫다고 생각,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각국의 대표들의 의관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죽었다.이날 해가 빛을 잃고 푸른 하늘이 캄캄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의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이 전해져 이준의 충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위대하고 장하도다.이상은 내가 이준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울분끝에 순국한 것은 190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우유부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준열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항일독립의지을 굳게 다졌다. 한편 일제는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앉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란 명분을 걸고 덕수궁의 고종에게 수발을 들었던 모든 궁중 관리들을 밖으로 쫓아냈다.정환덕도 쫓겨나 고종과는 서신으로 통신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사령부가 명령하기를 덕수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시종들은 궁밖으로 나가라고 하여 나도 대궐을 물러나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서상궁을 통해 극비리에 봉서(封書)를 보내셨으니 나는 3일이 멀다고 봉서를 받아 보았다. 폐하께서 정환덕에게 분부하시기를 “지난 10년동안 궁 안의 대소사를 너와 더불어 상의해왔는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너를 만나 보지 못하게 하는 구나.저들이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 우린들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서상궁으로 하여금 통신하게 할 것이니 경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서울에서 대기토록 하라”고 하시었다. 정환덕이 그래서 서대문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국인 왕대유(王大有)가 찾아와서 고종의 이거(移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청국인 왕대유는 본시 풍수지리에 밝기로 유명하였다.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고종황제께서 지금 어거(御居)하고 계신 덕수궁 함녕전 터를 보면 북악산이 조금 멀어 정기가 미치지 못하고 남산은 너무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정년(丁年 1907)에 수(數)가 다하고 경년(庚年 1910)에 국토를 잃게 되고 무년(戊年 1918)에 식록(食祿)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니 지금 당장 경복궁으로 폐하의 어거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못하면 화변(禍變)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술년 7월 이화(李花)가 떨어진다느니 방부과인구혹다화(方夫戈人口或多禾=國移라는 뜻)라는 말이 떠돌고 있어 불안한 판이라 주상에게 이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국고가 탕진되어 창졸간에 경복궁을 수리해 이거할 수가 없다.그러니 차차 형편을 보고 시행하기로 하자”고 하시었다. 이 말에 이거를 결심하였던가.하루는 고종이 정환덕에게 은거할 집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상감께서 봉서하시었는데 꼼꼼하게 풀칠한 봉투를 뜯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지금 시국이 막다른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만일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도 잠시 피신할까 생각하고 있다.길성(吉星)이 비추는 곳에 몇 칸의 집을 구입해 준비하여 두라”하시었다.그래서 명을 받들어 팔문생사방(八門生死方)에 따라 누각동(樓角洞) 가장 한적한 곳에 50여칸의 집을 사서 미리 준비했다. 고종이 몰래 집을 지금의 적선동 근처 누상동에 은신처를 구해두었다는 사실은 필자도 금시초문이다.물론 이 50칸 집이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통감부가 자리잡았던 남산이 일제 침략을 의미하였다는 사실,그리고 북한산이 침략을 막아주는 큰 기둥이었던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9월16일자 ‘南柯夢’23회 글 앞부분에 “1905년 1월17일 을사오조약”이라 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조약”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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