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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신수단:상(서울 6백년만상:21)

    ◎봉화 19세기까지 가장 빠른 연락망/변방서 수도까지 12시간 걸려/근대우편제 1884년 도입 서울에 「벙거지꾼」이 모습을 나타낸것은 1884년 4월 22일. 벙거지꾼은 우체부를 가리키는 옛말로 신식 우편제도의 도입과 함께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부터 장안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편제도는 갑신정변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사랑을 받았으며 전자정보화시대에에 들어선 요즘도 그 역할과 중요성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초창기에 『양반집 사랑과 규방에까지 들어가 우편물을 전달하려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기사가 독립신문(1897년 7월3일자)에 실리기도 했으며 각 가구마다에는 요즘같은 지번이 없던 관계로 편지봉투에 「경문밖 청패고개 나쥬셔 올라온 양천허씨댁 입랍」이라고 쓰는등 주소가 불분명해 우편물이 잘못 전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당시 우체부는 보부상조합이나 한강 물지게꾼조합에서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했다. 갑오개혁 직후만해도 보름동안의 서울시내 우편물은 1백37통에 불과했으나 그 편리함이 점차 알려지면서 이들은 들일 하는 곳에 점심도 날라다 주고 친정집에 물건을 전달해 달라는 아낙네의 청을 들어주고 식사를 대접받는등 「인정배달부」역할을 겸하는등 대중속에 자리잡았다. 근대식 우편제도가 도입되기전 한양의 중요 통신수단은 봉화였다.19세기말까지만 해도 서울 남산타워 자리에 있던 봉수대를 중심으로 변방까지 이어졌던 봉화야말로 지역과 지역간의 교신을 가장 신속히 할 수 있는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대는 국가의 기간통신망이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인편뿐이었다.그 당시로서야 농경사회였던 만큼 서민들로서는 요즘처럼 다급히 소식을 전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급하다 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서울로 정했을 때 먼저 시작한 일 가운데 하나가 왜구와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한 봉수대를 새로 만들고 정비하는 일이었다. 세종때에 와서야 완료된 봉수대정비사업은 서울 목멱산(남산)봉수대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군사적 요충지 6백50여곳에 세워졌으며 봉화를 올리는 방식도 4거에서 5거로 늘어 났다.예를 들어 왜구가 나타나지 않으면 1거,나타나면 2거,해안에 접근하면 3거,아군과 해안에서 접전하면 4거,육지에 오르면 5거를 올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매일 올려지는 봉화가 변방에서 서울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2시간.전보나 전화가 없던 시절 이보다 더빠른 통신수단은 없었다. 서울에서는 강서구 방화2동 개화산,성동구 광나루북쪽 아차산,강남구 원지동 청계산의 봉수대터등에서 아직도 봉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봉화가 국방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시호통신이었다면 우역은 우편·통신기능과 숙박시설을 겸비한 동시에 개인의 이용이 가능했다. 선조 30년(1597년)에 도입된 파발제도는 통신만을 위주로 한 조금은 진전된 통신수단이었으며 말을 이용한 기발과 사람을 이용한 보발로 나눴다.기발은 25리마다,보발은 30리마다 참을 두었다.이로써 교지를 알리거나 장계를 올리는 공문의 빠른 전달이 가능하게 됐다.은평구의 역촌동이나 구파발은 바로 파발제도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 대마도의 오사키항/박성수(일본속의 한국문화:9)

    ◎왜구 본거지… 고려이래 약탈 일삼아/우왕때는 연27회 침범… 논의 벼까지 베어가/진노한 세종은 배 2백20척 동원,정벌 나서 일기도의 가쓰모토(승본)항도 왜구의 소굴이었으나 그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 곳은 대마도의 오사키(미기)항이었다.오사키항은 대마도의 윗섬과 아래섬을 갈라 놓고 있는 바다,아사마(천모)만에 있는 아주 작은 어촌이었다.백제산성을 보고 나서 이 모사키마을을 잠깐 둘러보았으나 그 옛날 조선 세종때 우리 정벌군이 이 마을을 공격한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언제 그랬나 할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다.단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이 이곳의 옛 호주 하야타(조전)가에 보존되어 왔다는 조선국고신이라는 문서 한장이었다. 「병조봉교피고이라 위승의부위」운운하는 우리나라 관이임명장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5백년전인 연산군때(1503년)것이다. ○벼슬 주어 달래고 왜구가 하도 심하니까 창무책의 하나도 대마도 왜인들에게 관직을 주어서 우리나라에 오면 쌀도 주고 장사도 할수 있게 해 준 것인데 이들을 가리켜 수직위인이라 했었다. 유명한 신숙주(1417∼1475)의 「해동제국기」를 보면 대마도의 지도를 그려놓고 모두 82개에 달하는 포구가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신숙주의 지도에는 대마도가 마치 등을 구부린 송충이처럼 그려져 있는데 보기에도 징그럽다.이 송충이의 털구멍마다 왜구의 소굴이 박혀 있어서 제각기 마음 내키는대로 우리나라 남해안은 물론 동·서해안까지 왕래하면서 약탈하였으니 견딜수가 없는 일이었다.우리나라 연해안을 약탈한 왜구의 소굴은 대마도에만 있지 않았다.멀리 구주땅의 여러 포구에서도 왜구떼가 몰려왔으니 이들 송충이의 공격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구는 고려말에 극성을 이뤄 그때문에 실제로 고려가 망하고 말았다.눈물의 왕 공민왕(1352∼1374)재위 23년동안에 크고 작은 왜구가 1백15회나 들락날락하였고 경상·전라도는 물론 경기·황해·강원·평안·함경도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심지어는 고려의 서울 개경근처까지 쳐들어와 수도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다음 우왕(1375∼1388)때에 이르러서는더욱 심하여 재위 14년동안에 왜구가 3백78회나 쳐들어 와 연평균 27회라는 이분야의 신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이무렵 우리나라 연해안의 여러 고을들은 『황량하게 텅 비었다』고 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불상·범종 훔쳐가 왜구가 어떻게 우리나라 고을들은 습격하였는가 하면 왜구는 처음부터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기분나쁘게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상륙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하였다.말하자면 치고 달리기 작전을 폈던 것이다.마치 서양의 바이킹같은 강도행위를 자행한 것인데 이때문에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왕조가 교체되는 정변을 겪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성계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워 특세하더니 끝내는 정변을 일으켜서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러면 대마도 왜구들은 무엇을 약탈하여 갔는가.주로 곳간에서 먹을 양식을 퍼가거나 곳간에 식량이 없으면 논의 벼를 베어다가 배에 싣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러나 왜구는 식량만 가져가는 예절바른 도적이 아니라 부엌의 그릇은 물론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 제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찰의 불상과 범종까지 들고 달아났다.대마도에 원통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에서는 본존이 고려불이라고 버젓이 자랑하고 있다.부처님만 고려제가 아니라 대웅전앞에 걸어놓은 범종까지 우리나라 것이니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다. 훔쳐온 것을 훔쳐 왔다고 이실직고할 그들이 아니다.고려왕이 바쳤다느니 조선왕이 하사하였다느니 그럴듯하게 둘러대기 마련이니 도적질당한 놈만 억울할수 밖에 없다. 왜구들은 물건만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납치하여 팔아 먹었다.이런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 오사키 어부들은 우리를 낯선 이방인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누구의 후손들인지를 너무나 잘알고 있다.15세기말 성종때의 학자 성현(성현)이 쓴 유명한 「용재총화」에 보면 왜 세종 원년(1419)에 우리나라가 대마도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려말에 특히 왜구가 잦았는데 우리나라 연해에 진(군사기지)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태조가등극한 이후에는 주요한 포구에 만호를 두어 수군을 상주하게 하였더니 잠시 잠잠해졌었다.그러나 그뒤 다시 왜구가 침노하여 와서 세종이 삼군에 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만7천명 출정 이처럼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은 왜구의 발본색원을 노린 일대 영단이었다고 할수 있는데 병력은 총1만7천명,배는 2백20여척이었다.총사령관 이종무가 중군장을 겸임하고 좌우군장이 그를 보좌하였다.공격목표는 바로 이 오사키항이었는데 길잡이가 대마도 사람이었다.우리 함대는 마산포와 거제도를 출발하여 그날로 이곳 오사키에 도착하였는데 처음에는 선발대 10척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곳 마을 사람들은 도적질 하러 떠난 자기네 배가 돌아오는줄로 알고 술과 떡을 들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탄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르고 헤어 스타일이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다.잇따라 수백척의 배가 들어오니 모두 기겁을 하고 산으로 달아났다.바로 그 현장이 오사키항인데 향토사학자 영류씨는 웃으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유를 보였다.그렇다.지금은 서로 웃으면서 그날을 회상할수 있으나 이곳에서 전사한 좌군장 박실을 생각하면 반드시 웃을 일만은 아니다.박실 장군은 우군장과 중군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총사령관 이종무의 큰 실수였다.만일 그가 박실의 좌군을 지원했더라면 대승을 거두어 왜구를 발본색원하였을 것인데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때문에 그뒤에도 왜구는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는 임진왜란을 당하고 말았다.
  • 일기도의 고려교/박성수 (일본속의 한국문화:8)

    ◎김방경장군이 1274년 왜병 섬멸한 곳/여몽연합군,대마도 이어 공격… 1천명 몰살/일제때 「원구순국비」 건립… 고려군존재 은폐 일기섬은 일본인들도 가보았다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절해의 고도다.그러나 그곳에 고려교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라 대마도에 간김에 들러보기로 했다. 고려교가 있다는 곳은 일기섬 북단의 가쓰모토(승본)항.그곳 향토사가 중상사행씨의 안내를 받아 먼저 산성에 올라갔다.본시는 대마도에 있는 백제산성이 아니었나 생각했는데 안내판에는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치기 위해 전초기지로 사용했다고만 적혀 있었다.이름하여 승본산성.이 산성에서 북쪽바다를 바라보면 대마도가 보이고 세섬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해주고 있는 가쓰모토항이 내려다 보인다.우리나라 기록인 「고려사」에는 이 항구를 삼즉포라 이름하고 있는데 위구의 소굴로 치부하고 있다.하늘은 푸르고 오징어잡이배가 힘차게 열을 지어 출항하는 광경이 어쩐지 왜구가 떠나가는 것같이 느껴졌다. 1274년 음10월 여몽연합군 9백척이 이 항구를 쳤다.그 상륙지점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해서 내려가 보았다.시내 한복판 길가에 「문영지역 원군상육지」라는 표석과 이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전몰기념비가 서 있었다.물론 대마도의 경우와 같이 1백년전 일제침략자들이 세워놓은 최근작이었다.바로 그 옆에 신공황후를 모셨다는 성모궁이 있어 이 지역 일대가 대한침략의 성지처럼 되어왔던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왜 그들이 고려군을 빼고 몽고군(원군)만 이곳에 쳐들어 왔다고 한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조선은 약하다고 선전해 놓았는데 그렇게 약한 조선군(고려군)이 여기까지 쳐들어 왔다고 하게 되면 곤란했을 것이다. ○왜장 평경륭 영웅화 그래서 몽고군만 쳐들어온 것으로 하면 그런 모순이 없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명치정권이 여몽련합군을 원구니 원군이니 하여 고려군의 존재를 말살해버린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항구로부터 차로 2∼3분 걸리는 고려교로 달려갔다.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자칫하면 사진도 못찍게 될까 걱정이 돼서 먼저 사진을 찍고 중상씨의 설명을 듣기로 했다.작은 구름이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문영지역 고려교 고전장」이라는 표석이 서있었다.대석이 없어서 약간 기울어진 것같았으나 바로 이곳이 우리 김방경장군이 적을 쳐서 전멸시킨 장소라 생각하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오랫동안 위구에 시달리기만 하다가 적을 응징한 자리.그리고 그 뒤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고려라는 이름.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그런데도 우리 국사책에 지워져 없는 역사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했다. 고려교 표석의 유래는 7백년전 지금은 없는 이 다리위에서 고려군과 왜군이 싸워 1천명의 왜군이 쓰러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 있다.「고려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자. 『몽한군 2만5천,우리 군사 8천 그리고 선장 수부등 6천7백명이 전함 9백척에 나누어 타고 단숨에 합포(지금의 마산)를 떠나 대마도를 치고 일기섬에 이르니 왜병이 해안에 진을 쳤다. 아군이 그들을 쫓으니 왜가 항복을 청하더니 다시 와서 싸우므로 몽고군이 쳐서 1천여명을 죽이고 이어 적을 쫓았다.이때 중군 김방경은 효시를 뽑아 소리를 크게 질러 호령하니 왜가 겁을 먹어 달아났다.왜병은 크게 패하여 시체가 산더미와 같았다』 김방경의 전공은 너무나 컸다.그래서 『몽고군이 잘 싸운다고 하나 고려군에 비길손가』하는 탄성이 나왔던 것이며 이곳에서는 그뒤 이 싸움을 고려교 전투라 치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치정부는 이 싸움을 신성고전장이라 이름을 바꾸고 고려군과 맞서 싸우다가 자진한 평경륭을 영웅화하였다.아울러 이때 같이 죽은 1천명의 시신을 기려 신성 천인총이라 하였고 신성 언덕위에 신사까지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고려교 표석옆에는 지금도 「원관순국충혼비」가 서있고 꽃다발이 생생한데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문영의역 신성고전장(현지정사적). ▲천인총­문영11연10월14일(1274)에 몽고군이 내습하여 상륙하였다.수한대 평경륭은 1백여기로 이틀동안 싸웠으나 원군이 너무 많아 전멸당하였다. ▲신성신사(평경륭의 묘)경륭은 고전끝에 자신의 거관인 신성에 패주하여 다음날 최후의 일전을 시도하다가 일주 모두가 성내에서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몽고군 1만명 익사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몽고군의 수탈과 삼별초의 항전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던 민식초목지실의 시대였다.그런 속에서 3만여명의 목수들이 징발당해 단 5개월만에 9백여척이나 되는 전선을 만들어 냈으니 스스로 일본정전같은 큰일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군사들은 물론 목수들까지 극도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특히 목수들은 몽고군의 횡포와 강압에 격분한 나머지 불양선함을 만들어내 몽고군이 타고 가다가 모두 수장되기를 바랐다.고려군은 이 사실을 알고 태풍이 불자 재빨리 튼튼한 배에 올라타서 대부분 생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몽고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라 1만3천여명이 물귀신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따라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때 불어닥친 바람은 신풍이 아니라 고려목수들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고려교와 신풍의 왜곡된 현장 일기도는 아직도 안개속을 헤매는한일관계처럼 시정되지 않은채 오늘을 살고 있다 할 것이다.
  • 여몽연합군 일 정벌(일본속의 한국문화:7)

    ◎“원구 3만명에 결사항거” 표석 곳곳에/대마도주 종조국,“80기로 맞섰다” 용전 과장/일제 군국주의자들,증오심 부추기려 미화 13세기말,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백여년전인 1274년에 몽고군과 고려군이 연합하여 대마도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우리는 이 사건을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이라 부르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통상 문영·홍안의 역이라 부르고 있다.이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은 대마도와 일기도 그리고 북구주의 박다였다. 여기서는 사건을 좀 더 강하게 원구의 내습이라 부르면서 곳곳에 표석을 세워 그날의 참화를 잊지 않도록 환기시키고 있다.심지어는 위령비에다 신사까지 세워서 이날 이때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말썽 많은 동경 한복판의 정국(야스쿠니)신사와 같은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1274년에 도해 대마도 서해안에도 위령비와 신사가 있다고 해서 오늘은 그곳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소위 원구라는 호칭은 우리가 하는 위구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 하겠으나 일본은 단 한번 당한 침략인데도 곳곳에 기념물(?)을세워 놓고 있는 반면 우리는 수없이 당한 위구였는데도 단한곳 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다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만일에 우리가 위구고전장이라고 해서 절을 세운다고 가정하면 전국 도처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사찰 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그런데 왜 일본에는 이런 곳을 만들어서 요란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일까.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대마도에서는 제사를 지낸 뒤에 서북쪽 바다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행사가 반드시 있다고 하며 수년전에는 원구700주년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는 소문이다.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제잔재이며 이 잔재때문에 일본인들은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속의 한국문화를 솔직하게 시인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시신 두토막… 묘2개 엄원(이즈하라)에서 원구고전장이 있다는 소무전(고모타)마을로 가자면 이 섬의 진산인 백악산을 넘어가야 한다.백악산도 백두산이란 우리 민족고유어에서 유래하고 있다.도중에 차는 어동총이라는 곳에 잠시 머문다.「어동총」이란 무엇인가.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공격하였을때 항전하다가 죽은 제1대 도주 종조국의 무덤인데 그가 두 토막이 나서 시체가 두군데 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중의 하나가 이곳의 오동총이라고 하니 듣기에도 소름이 끼친다.비문에는 종조국공어동총이라 새겨 놓았으나 그 옆면에는 자신이 없는 듯이 『종조국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고 부기해놓고 있다. 다시 차는 고개를 넘어 해안에 닿는다.멀리 바다 건너에는 우리나라의 남해안이 바라보이고 작은 어선들이 항구에 들어선다. 항구에 들어서는 어선들이 마치 옛날 왜구들이 우리나라를 약탈하고 돌아오는 장면같이 느껴져 섬찢했다.물론 필자의 시대착오이긴 했지만 이 마을에다 지어놓은 소무용국신사와 또하나의 종조국어동총을 보는 순간 갑자기 지난날의 어린 시절이 눈앞에 다가섰다. 왜 그랬을까.바로 이 신사와 동체묘가 일본군국주의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이 섬 사람들은 7백년이나 지난 일을 기억할리가 없는데 명치유신 이후 이나라에 군국주의가 되살아나더니 케케묵은 신공황후라는 귀신의 삼한정벌설이 대대적으로 등장하는가하면 원구고전장 같은 곳이 만들어져서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기 시작했다.바로 그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본시 원구란 말은 없었고 명치유신이전에는 「이국합전」정도로만 불렀었다는 사실을 상기할때 원구고전장이란 말자체가 근대적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또 그보다 더 뚜렷한 증거는 이 신사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이다.하나는 일제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원구분전지도」라는 안내판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관광협회에서 만들어 세운 「원군침공요도」라는 안내판이었다.앞의 것은 한마디로 증오심을 유발하기 위한 문구로 가득차 있는데 반해 뒤의 것은 매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원구분전지도. 문영 11년 10월15일에 원군 3만여명이 선수를 서로 맞대고 쳐들어와 대마도를 포위하였다.수호대 종조국은 겨우 80여기로 그들과 싸웠으며 의용전사한 도민이 부지기수였다.적들은 살아남은 노유부녀들을 붙잡아서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새끼를 꿰매어 뱃머리에 엮어서 매달았으며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였으니 그 참상은 눈뜨고 볼수 없는 일이었다.적의 선봉은 그 나라의 중죄인들로서 이름하기를 생권군이라 하였으며 악랄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종조국은 일기당천의 용사들을 지휘하여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죽음에 임해서도 그는 눈을 부릅뜨고 적을 응시하며 쓰러졌다.종조국의 동생 마지윤도 함께 쓰러져 충사하였으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군은 오지 않았으니 오호라 슬프도다.명치29년 11월2일 종조국에 특지를 내려 종2위로 삼으니(천황의) 성은이 고골을 적시고 전국이 감읍하였다」 ○태풍에 배침몰,철수 누가 읽어 보아도 소름이 끼치는 글이요 제1대 도주 종조국의 용전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그러나 그때 종조국은 결코 일본천황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또 그런 종조국에 종2위라는 작위를 내린 해가 명치29년,즉1896년이었다.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한 바로 그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관광협회에서 만들어 세운 안내판의 글귀는 담담하기만 하다. 「원군침공요도 문영지역 ­문영11년10월에 고려군을 포함한 3만여명의 원군은 먼저 대마와 일기를 공격하고 10월19일 박다만에 이르러 이튿날 상륙하기 시작하였다.일본군은 주로 구주의 무사들이었는데 원군이 장궁독시와 철포와 같은 신식무기로 싸운데 반하여 일본 무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1대1로 싸울줄밖에 몰랐다.그래서 대패했는데 때마침 태풍이 불어 원의 군선이 거의 다 침몰하고 1만3천명의 군사를 잃고 고려로 철수하였다.이것이 문영의 역이다」 일제말기에 「신풍」이라는 자살부대를 만들어 10대 청소년들을 몰살시킨 역사를 일본인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원구때의 신풍이 다시 불지 않는 조작된 역사란 사실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런 역사 왜곡의 현장을 그대로 둔채 살아가고 있는 일본인들.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수 있단 말인가.
  • 만송원 뒷산 종가 묘역(일본속의 한국문화:4)

    ◎32대 7백년 통치 대마도주 집안 묘지/향나무 숲속 자리… 아래부터 웃분모셔 특이/청수산성은 조선 침략군 전진·병참기지로 만송원 원당을 보고 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수령 1천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사이로 이끼낀 돌계단이 놓여 있고 좌우에는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동묘지다.혼자 가라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애첩까지 함께 묻혀 바로 이곳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7백여년에 걸쳐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를 오간 32대에 걸친 대마도주들의 공동묘소다.일본에서도 단 세곳밖에 없다는 종중묘지인데 묘역에는 역대 도주는 물론 그 정실부인과 애첩들,그리고 그 피붙이들까지 모두 한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고 보면 고려때 우리나라에서 이 섬으로 건너간 송씨일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양식이 모두 왜식이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준다.가장 이색적인 사실은 아래위가 뒤바뀐 무덤의 서열이라 할 수 있다.이 공동묘지는 윗무덤(상어령실)과 가운뎃무덤(중어령실),그리고 아랫무덤(하어령실)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윗무덤에 19대 의지 이하 32대까지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그보다 아래에 자리한 가운뎃무덤에다 10대부터 18대까지의 선조들을 모셔놓았다.그리고 제일 아랫무덤에 이들 선조의 부인과 아이들을 묻어놓았으니 완전히 선후배가 꺼꾸로 자리한 꼴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마도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19대 종의지와 그의 아들 종의성은 임진왜란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일신해놓은 중흥의 명주로 알려져 있다.이 두 사람이 나오기 이전의 대마도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왜구들이 군웅할거하던 섬이었다.이런 대마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기록이 송희경이 쓴 「일본행록」이다.송희경은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한 이듬해인 세종2년(1420) 사신으로 일본 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렀다. ○왜군의 길잡이 노릇 그때 대마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배추빛(채색)으로 떠 있었다고 한다.배추빛이란 굶어서 얼굴이 누르스름하다는 이야기다.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본토가 모두 가난하여 도처에 해적들이 우굴거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 정도였다.송희경보다 50년 뒤인 1470년(성종2년)에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읽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일본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죽으나 사나 조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말 대마도는 갑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임진왜란 때문이었다.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자 종의지는 재빨리 왜장을 찾아가서 전승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명을 부여받았다.그러다 보니 결국 왜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조선으로부터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종의지는 먼저 대마도를 조선침략군의 전진기지요 병참기지로 제공했다.바로 이곳 이즈하라의 진산인 청수산에 남아 있는 산성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지은 것이다.북구주의 명호옥에서 일기도의 승본을 거쳐 대마도의 청수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군 루트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일본에서는 임란사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종의지가 다음에 한 일은 대마도민 2천8백명을 침략군 선봉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2천8백명이었다면 임란때의 왜군 총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마도군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침략 왜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번대와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번대,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용장정이 이끄는 제3번대가 그것이었다.이중에서 대마도군은 소서행장의 제1번대,그것도 최선봉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일로 서울로 북진해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던 대마도주 의지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 배신도 이만저만 배신이 아니었다.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본토의 왜장들은 조선의 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아는 사람은 오로지 대마도인뿐.그들은 이미 고려때부터 조선을 내왕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상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만일 이 고려인의 후예 종가놈이 완강하게 길안내역을 거절하였거나 아니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삼천포로 빠져 남한일대에서 헤매었을지 모를 일이다.만일 그랬더라면 왜란은 조기에 종결되었거나 그 피해 또한 그토록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임난후 쌀수출 중지 뿐만 아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대마도인의 접근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산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고 대마도에의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하게 되자 대마도경제는 일대 공황속에 빠지고 말았다.자업자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배신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마도주로서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까지 험악해진 조선과의 사이를 또 다시 교활한 속임수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서위조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기극인데 임란 이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과 8년만에 이루어졌다.이를일제침략 종식후 20년만인 1965년에 성립된 한·일국교정상화에 비한다면 배나 더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마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때 일본의 실권자 덕천가강은 단 한푼 배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 사죄하지 않은 상태로 앉아서 통신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대마도주는 일본 상전에게 두둑한 상을 받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배신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대마도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서 기울어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임란 전후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대마도 이즈하라 만송원(일본속의 한국문화:3)

    ◎임란침략 선봉장 종의지 아들이 건립/20대 도주 의성,선친 명복 빌기위해 세워/마룻바닥 구석에 약탈한 조선제기 전시 『살아서 대마도에 가서 부산을 단 한치만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가 4년간 억류당한 유학자 강항의 비통한 한마디다.강항는 돌아와서 유명한 「간량록」을 지어 남겼다.「간양록」을 읽지 않고서는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책이다. 대마도의 행정수도 이즈하라(엄원)에 가면 누구나 관광업소 제1호 만송원을 둘러보게 된다.본래 송음사라 이름지었다가 만송원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만송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도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침략앞잡이 종의지라는 19대 대마도주의 법호라고 한다.그 아들 종의성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 절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 이 만송원의 유래다.그런데 이 아들 의성 역시 임란후 국서(외교문서)를 위조하여 속임수로 한일국교를 정상화시킨 장본인이다.그러니 만송원으로 들어가는 한국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지은 뒤 화재를 만나 몇번이나 다시 지었다는 법당에는 일본막부 덕천가의 위패를 유리창속에 안치해놓고 앞의 마룻바닥 한 구석에는 조선국왕이 바쳤다는 이 절의 보물 삼구족을 마치 노획물이나 되는 듯 전시해놓았다.도대체 놓여 있는 자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경복궁서 훔쳐온 듯 일본막부 덕천일주을 신주처럼 모셔놓고 그 앞에 그것도 마룻바닥 한 구석에다 우리나라 왕실에서나 쓰던 성스러운 기물을 진열하였으니 말이나 되는 일인가. 거기다 더한 것은 조선국왕이 이 보잘것없는 섬의 도주에게 왕실에서 쓰는 기물을 바쳤다(여기 말로 공헌하였다)는 말투다.아마도 이 말은 일제때 조선을 얕잡아보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 추측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말은 바른대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조선국왕의 하사품이라든지,아니면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임진왜란 때 왜국의 선봉장으로 서울에 입성했을 때 경복궁에 들어가 훔쳐온 것이라든지 확실하게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 아닌가.왜냐하면 필자가 아는 한 우리측의 어느 기록에도 이런 성스러운물건을 대마도주에게 하사하였다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별로 기분이 좋지 않는 상태에서 만송원 법당안을 둘러보고 나면 그 뒷산이 청수산이라는 이즈하라의 진산에 올라가게 되는데 30여대에 걸친 종가들 일족의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가의 족보문제다.도대체 종가란 자들은 언제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임란 직후에 사상초유의 외침에 시달린 우리 조상들은 많은 임란일록을 지어 남겼다.그중에 화은 신경(신경,1614∼1653년)의 「재조번방지」란 책이 있다.이 책에 보면 대마도주 종가는 우리나라 송씨였다는 기록이 나온다.즉 신경은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가장 친근한 섬이라 하면서 그 이유를 『대개 대마도땅은 모래와 돌로 되어 있어 전적으로 우리나라와 교역하여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도주 종성장(12대)은 우리나라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섬(대마도)으로 들어가서 도주가 되어 성을 종으로 간 사람이다』 신경의 「재조번방지」는 매우 신빙성이 있는 책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대마도주 종가의 뿌리가 조선인 송가였다는 이 기록을 근거없다고 하여 일소에 붙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조선인 송씨가 조상 본시 일본 사람들의 습속이란 『성을 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온 우리네와는 달리 마음대로 갈고 고치는 사람들이므로 종가의 세계보를 그 어느 누구도 보증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송원에 모셔져 있다는 종의지란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하는 점이다.강항에 따르면 종의지는 『풍신수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데 있어서 향도노릇을 한 모사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 임란 이전에는 우리나라 쌀을 받아먹다가 임란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워 수길에게 영지를 얻어 일본쌀을 먹게 되었다고 그 배신행위에 격분하고 있다. 그러나 강항이 4년간의 억류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조국땅을 향해 대마도를 거쳐 오는데 이 이즈하라에서 의지의 참모역을 맡고 있던 심복부하 유천조신을 만나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대마도는 그때 임란 직후라 조선과의 교역이 끊겨 도민의 생계가 막막하던 때였다. 『이 섬은 한일 두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 수길(즉 일본)이 상국(즉 조선)을 침범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우리가 사전에 수길이 조선을 침략하리라는 정보를 귀뜀하여 주지 않았습니까.미리 침략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는데 우리로서는 그때 할일을 다했습니다.수길이 침략군을 동원하게 되자 약한 우리 대마도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봉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에 장차 조선이 강해서 일본을 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선을 위해 일본을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또 대마도는 과거 2백년간 위관의 소굴이었다고 하나 호남을 범한 일은 있으나 영남을 범한 일은 없습니다.우리 대마도가 조선의 영남을 지켜준 셈입니다』 ○임란발발 미리 알려 조신의 이 말 가운데 왜구의 방파제가 되어 조선의 영남지방을 지켜주었다는 마지막 말은 과장되어 있으나 임란 직전에 왜군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보를 조선에 알려준 사실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종의지와 조신은 임란 직전인 1590년에 우리 사신 황윤길과 김성일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었는데 돌아와서 두 사신의 보고가 엇갈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대비책을 강구하지 못했다.이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듬해(1591년) 5월 임란이 일어나기 꼭 1년전에 종의지가 홀로 배를 타고 부산 영도에 와서 『조선조정에 급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나를 서울에 가도록 하여 주시오.일본이 곧 쳐들어옵니다.대비하여야 합니다』라고 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이때 서울의 조정에서는 어리석게도 현지 관리의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아무 회답도 보내지 않았다.종의지는 열흘동안 기다리다가 실망하고 대마도로 돌아가고 말았다.이 사실로 미루어 그는 과연 조선인 종씨의 후손이 아니었든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 가깝고도 먼 섬 대마도(일본속의 한국문화:1)

    ◎조선통신사 뱃길따라 전파현장을 가다/부산서 50㎞… 조선사신 유적 곳곳에/임란후 통신사 12회·역관사 50회 파견/첫 경유지… 한·일 교유의 징검다리로/최근 역관사순난비 제막… 1703년 일행 112명 익사 비극 추모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문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그 대표적인 경로는 한반도의 남동부에서 대마도·일기도를 통한 것이었다.특히 조선시대 우리나라가 일본에 파견한 공식외교사절인 통신사는 부산∼대마도의 이즈하라∼일기도의 가쓰모토∼시모노세키를 거쳐 오고감으로써 이 경로를 「통신사의 길」로 여기기도 했다.대마도와 일기도는 이를테면 한일문화교류의 징검다리였던 셈이다. 이 문화전파로에는 아직도 체감되는 선인들의 숨결과 흔적들이 곳곳에 살아있다.광복 48주년을 맞아 현지에 남아있는 우리문화의 모습을 되새겨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집필은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맡았다. 대마도 최북단 언덕위에 서서 북쪽 바다를 건너다보면 부산 영도가 보인다.특히 밤에는 부산야경이 아름답다.불과 50㎞.우리 이수로 1백20리다.지도를 보더라도 대마도는 우리 경상남도 해안에 바짝 붙어 있다.그에 비하면 제주도는 훨씬 남쪽으로 처져 있다.이렇게 가까운 대마도를 누가 먼 섬이라 했던가. ○밤에는 영도 보여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어떤 일본인이 한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렀다.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아리송한 말을 일본인들이 애용하고 있다.누가 두 나라 사이를 가깝고도 먼 나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마치 한국 때문에 먼 나라가 된 것처럼 들리게 한 말이 바로 이 신조어다.그래서 필자는 이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대마도에 대해서만은 이 말을 사용하고 싶다.일의대수란 말이 있듯이 대마도는 띠처럼 좁은 한 줄기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마주보고 있다.대마도의 남쪽으로는 일본 구주땅이 있으나 그 거리가 85㎞이며 육안으로 보이지도 않는다.단지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섬 일기도가 있을 뿐이다.이 일기도가 대마도에서 50㎞다.따라서 대마도에서 일기섬은 육안으로 보인다.대마도 최북단언덕 위에 서서 필자는 엉뚱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한·일 양국사이에 이 대마도와 일기도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어쩌면 두 나라는 서로 남남으로 아무 애증관계 없이 지낼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서로 모르는 사이로 지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른다.서로 가깝다느니 멀다느니 할 것도 없고 「주는 것 없이 미운 나라」니 하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마도와 일기섬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2천년이나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바다를 건너 일본땅으로 이주해갔던 것이다. 이 섬이 보이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보이니까 배를 타고,거친 파도를 가르고 건너갔던 것이다.차라리 대마도가 좀더 한국측에 가까이 다가서 있어 대마도에서 일기도가 보이지 않았던들 더이상 남쪽으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2천년에 걸친 한일관계사를 돌이켜보면 서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의 현재 위치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섬으로 하여금 일본쪽으로 가든지 우리쪽으로 더 다가서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단지 현재 그 위치대로 과거의 잘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두 나라가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서로 굳게 다짐하자는 약속할 자유밖에 없다. ○애증관계 2천년 이러한 약속을 상징이나 하듯이 대마도 최북단 언덕 위에 최근 한 비석이 세워졌다.이른바 조선국역관순란지비가 그것이다.때는 1703년2월5일(음력).지금으로부터 꼭 2백90년전의 일이다.일단의 우리나라 역관사일행이 부산항을 떠나 저녁무렵 대마도 악포에 도착했다.악포란 대마도 최북단에 자리한 작은 포구인데 실제로 악어가 살았다고 해서 악포라 이름한 것이 아니라 악어처럼 무서운 파도가 몰아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이 악어의 입에 들어서기 직전 갑자기 황파가 몰아쳐서 정사 한천석이하 1백8명의 사절단이 수장되고 말았다.배안에는 정·부사를 비롯하여 상관 28명,중관 54명,하관 24명이 타고 있었고 그밖에도 안내역을 맡은 대마도 관리 4명이 동승했다. 요즘이라도 1백12명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큰 사건인데 하물며 당시로서는 여간 큰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그것도 민간인이 아닌 외교사절이었으니 대마도로서는 거국적인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역관사란 무엇인가.임진왜란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역관사를 보낸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누구나 대마도에 가보면 놀라는 일이지만 한마디로 산투성이의 섬이다.우리나라에 산이 많다고 하지만 대마도에 비하면 양반이다.대마도는 바위에다 엷은 흙으로 도배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위가 많은 섬이며 손바닥만한 평지에 집들이 밀집해 있는 보기에도 각박한 고도다. 이런 외딴섬이었기 때문에 한때는 왜구의 소굴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임란 이후에는 단절된 조선과의 무역관계를 하루속히 재개하여 우리나라 쌀을 수입해야만 했다.오징어가 잘 잡힌다고는 하지만 오징어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그래서 대마도주 종가는 임란후 10년만에 가까스로 기유약조(1609년)를 맺는데 성공하여 연간 2만섬에 달하는 많은 조선쌀을 얻어내게 되었다.이 쌀을 실어가기 위해 특별히 큰 운미선을 지어서 한 척에 2백가마씩 실어날랐으니 적어도 한해에 백척이상의 운미선이 대한해협을 오간 것이다. 이 2만섬이나 되는 쌀을 대마도 사람들이 다 먹지는 않았다.많은 양을 일본 됫박으로 다시 달아서 일본으로 팔아넘겨 폭리를 취했다. 그러니 이 쌀의 전매무역만 하더라도 대마도로서는 우리나라에 큰 은혜를 입은 셈인데 후술하는 바와 같이 임진왜란때 큰 배신행위를 했다.그래서 그런지 임란후의 우리나라 통신사 기록을 보면 대마도의 노련한 뱃사공 말까지도 믿지 않고 우리나라 사공의 말을 듣고서야 부산항을 떠났다. 통신사는 임란이후 2백년동안에 모두 12번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도 그럴 것이 통신사일행의 총인원이 5백명에 이르고 있는데다가 서울에서 일본의 강호(현재의 동경)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한번 갔다하면 그 비용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물론 이 비용을 일본측이 부담하는 것이었다고는 하나 우리측으로서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19세기초 왕래 끊겨 그래서 인원수를 대폭 줄여서 1백명으로 하고 여정도 대마도의 청중(현재의 엄원)까지로만 하는 약식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인데 이 사절을 역관사라 이름했던 것이다.이 약식사절은 무려 50여회나 파견되었다고 하니 적어도 4년마다 한번 꼴로 대마도에 파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마도는 임진왜란에서 일제침략기에 이르기까지 한일 두나라의 징검다리역할을 수행하였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 남해안은 평온할 수 있었다.부산쪽을 건너다보면서 서 있는 조선국 역관사지비문에는 이런 글귀가 보인다 『강호시대 엄연한 쇄국체제 하에서도 일본이 유일하게 정식국교를 맺은 나라는 조선이었다.그때의 한일외교는 양국간의 신의를 바탕으로 한 선린외교였다.이제 바야흐로 고조되고 있는 한일교류의 새로운 조류를 맞이하여 지난날 두 나라 교류의 지침이던 「성신지교린」의 이념이 되살아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지당한 말이다.한일간에 통신사와 역관사가 오가던 시절에 누구보다도 우리측에서 신의와 성신을 강조하였었다.일본측의 빈번한 불신행위로 인하여 부산에 성신대를 지어 그들에게 보이기까지했었다.그러나 1811년 마지막 통신사가 대마도를 방문한 이후 부산과 악포를 있는 해협에는 뱃길이 끊기고 다시 정한론을 부르짖는 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른바 명치유신정부는 대마도의 대한외교교섭권을 박탈하고 도주 종가를 도쿄에 유폐시켰다.대마도는 다시 절해의 고도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우리를 안내해준 영류혜구씨(대만문화재협회회장)는 이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왜 대마도공항에 KAL기가 오지 못하는지 의아하다는 것이다.제주도를 일본관광객에 개방했듯이 일본도 한국을 믿고 대마도를 한국관광객에 개방해야 될 것이다.그 길만이 대마도가 가깝고도 가까운 섬이 되는 길일 것이다.
  • 최무선함(외언내언)

    우리나라에 왜구가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부터였다.그러나 그때는 그 수가 별로 많지 않아 피해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그러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왜구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그 중에서도 고려말 약 40년간은 왜구들에 의한 피해가 특히 컸다. 당시 무관이던 최무선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위해 화약과 총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그는 오랜 기간 노력한 끝에 중국사람 이원으로 부터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워 마침내 이를 제조하는데 성공한다.서기 13 77년(우왕 3년)10월의 일이다. 이때부터 그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에선 화포·신포와 화전·철령전등 발사물,그밖에 질려포·철탄자와 로켓무기인 주화등 18가지에 이르는 각종 무기들을 생산했다. 그는 서기 1380년(우왕 6년)에 왜구가 5백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지금의 금강하구인 진포로 쳐들어오자 원솔 나세와 함께 이들 무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격파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이때 놀란 왜구들은 그 후 30여년간 다시는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경남 거제도에서 어제 우리 해군의 세번째 잠수함이 진수됐다.배의 명칭도 고려때 국난극복에 크게 공헌한 최무선의 이름을 따 「최무선함」이라 했다.우리도 이제 본격적인 잠수함시대를 연 것이다.반갑고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일 HDW사의 기술지원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우리 기술진에 의해 건조된 「최무선함」은 1천2백t급의 현대식이다.내년 가을 실전배치될 이 배는 현재 세계 각국에 배치돼 운용중인 같은 급의 잠수함중 성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북한이 보유한 「W급」「R급」보다 수중속력·기동성·공격능력면에서 월등하다고 한다.우리 해군사에 크게 기록될 금자탑이다.박수를 보낸다.
  • 광개토왕비(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0)

    ◎비문 「내도해 파」해석·날조설로 논란/재일 사학자 이진희씨 “위가 석회 바르고 새글자새겨” 주장/“「후→위」「불공인」→「내도해」로 바꿔치기”/한국/“고구려가 바다건너 위격파” 해독/일본/“위가 백제·신라 지배했다” 억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멸망(668년)한 뒤 1천2백여년동안 세인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그러나 이 비는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순간에 한국·일본·중국의 사학계를 뒤흔들어 놓고는 1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비의 베일을 벗지 않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왕의 사후 2년인 414년 세워졌다.자연석을 깎아 만든 높이 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1천7백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가 1880년 무렵 청나라 농부에 의해 발견된 뒤 맨 처음 비문을 연구,발표한 측은 일본 육군참모본부였다.참모본부 소속 사학자들은 비문의 내용중 광개토대왕 5년(396년)의 치적을 새긴 부분,흔히「신묘년기사」라고 부르는 32자를『백잔·신라 구시촉민 유래조공 이위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나 이위신민』(□는 해독불능)이라고 해독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백잔(백제)신라는 옛날부터(우리=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다.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등을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즉 일본이 4세기말 한반도에 진출,백제·신라를 지배했다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발표는 당시 한반도및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 사회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이후 부분적인 수정을 거치긴 했지만 일본 학계는 현재까지도 이 학설을 정설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 주장에 대해 국내 학자의 반론은 상당히 뒤늦게 제기됐다.1930년대 말 정인보가 일본측이 해독한「신묘년기사」32자의 정확성은 인정하되 그 해석을 전혀 달리하는 새 학설을 내놓은 것이다.그는 기사중「내도해 파(바다를 건너 격파하다)」부분에 대해,그 주체를 위라고 해석한 일본측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비문의 내용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것이므로「내도해 파」라는 동사의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로 봐야 한다』면서「이위…」부분을「왜가 신묘년에 쳐들어 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의 본거지를 쳐 백제·신라와 함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정인보설은 그 뒤로 남북한 학계의 비문 해석에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한일 양국 사학계를 정작 놀라게 한 폭탄선언은 1972년 일본에서,한국인 학자에 의해 나왔다.재일사학자 이진희가「광개토왕릉비의 연구」라는 저서에서『비문을 처음 탁본한 일본참모본부가 비에 석회를 바르고 일부 글자를 바꿔쓰거나 새 글자를 새기는등 의도적으로 비문을 날조했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이진희설을 이어받아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81년『신묘년기사중「위」자는 비문에 새겨진 다른「위」자와 전혀 모양이 달라「후」를 변조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발표했다.그는 또「내도해」도「불공 인」을 바꿔치기한 것이라면서 전체내용을「백제·신라가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자 고구려가 백제·왜구·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새롭게 해석했다. 한일 양국의 학설이 이처럼 맞서 있는 가운데 중국 학계도 이에 가담,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문 연구에 나서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지 1백여년.그러나 긴 세월의 무심이 섭섭했던지 광개토대왕은 후손들에게 마저 아직 진실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
  • 과학1호 로켓(외언내언)

    고려말과 조선초의 발명가였던 최무선은 개성의 관문인 예성강에 중국상선이 닿기만 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려 나갔다.중국의 화약제조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였다.그러기를 10년만에 중국인 염초제조기술자를 만나고 1377년 한국 최초의 로켓 「주화」를 만들어 냈다.3년후 침입한 왜구의 배 5백여척을 전멸시키는데 이 주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그의 아들 최해산은 조선시대 세종때 그보다 성능이 2∼3배 좋은 「신기전」을 만들어냈다. 순수 국내기술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관측로켓인 「과학1호」의 발사(4일)성공은 부자2대에 걸친 집념의 한국 로켓 개발사를 상기시킨다. 인류 최초의 로켓인 중국의 화전(1232년)이 오늘의 최첨단 로켓으로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과학자들의 집념과 땀이 있었다.영국의 콘그레브는 최초로 금속 몸체의 로켓을 개발했고(1800년)소련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우주공간으로의 로켓」이란 논문을 통해 액체연료 로켓의 이론과 다단계 로켓의 개념을 제시했으며(1903년)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고다드는 최초의 액체추진 로켓 발사(1926년)에 성공했다.이어 독일의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소의 우주미사일과 군사미사일의 원형이 된 근대로켓의 시조 V­2 로켓을 개발해 냈고(1942년)다시 아폴로 우주선의 달착륙을 가능케한 3단 우주왕복로켓 새턴5 로켓을 만들어 냈다. 오늘의 최무선, 우리의 베르너 폰 브라운은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유장수박사팀과 서울대 삼성항공등 3개대학 5개기업의 연구인력들이다.그들의 오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고체추진 1단로켓인 「과학1호」의 성능은 빈약하다.6백여년전 선각자의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지 않은 탓이다. 첨단과학기술이 결집돼 과학기술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국가적 정책지원이 강화되었으면 한다.
  • 심수경/백성과 더불어 살고 대의 좇아(역사속의 청백리)

    조선 중기의 명신 심수경(1516∼1599)은 당대의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는 의병을 일으켜 지휘할 정도로 무예에도 능통했다.또 평생을 대의를 좇아 살았다. 그는 명종때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관찰사를 지낸 뒤 청백리로 뽑혔으며 도승지를 거쳐 75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심수경이 개경류수로 임명됐을 때의 일이다.당시 개성에는 미신이 성행,귀신을 섬기는 사당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이들은 승려 보우를 신임,불교에 빠진 문정왕후의 배경을 믿고 혹세무민하는 등 그 폐해가 극심했으나 관에서조차 감히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수경은 미신의 병폐를 염려하는 유생들과 힘을 합쳐 잡귀를 받드는 사당을 불사르고 무당을 잡아 가두었다.이에 명종을 수렴청정했던 문정왕후가 격노,진상규명과 함께 사당철폐에 앞선 모든 사람들을 잡아들이도록 했다.그러자 심수경은 「모든 일은 내가 했으며 유생들은 잘못이 없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스스로의 죄상을 적어 보냈다.이를 전해들은 명종은 앞장 서서 문정왕후를 설득,그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막았다. 그가 한양에 소환됐다가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개성으로 돌아오자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개성을 떠나자 백성들은 개성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선비정신을 기리는 선정비를 세웠다.그는 단순한 관리로 재임한게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살고 대의명분을 좇아 행동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문관이었지만 왜구 토벌에도 참가,그 공로로 도승지로 승진했다. 한번은 명종이 문무백관들을 무장에 모아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무예를 겨루게 했다.이날 심수경은 다섯발 가운데 네발을 과녁에 적중시켰는데 무장들조차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이에 명종은 그를 「파목」(전국시대 말엽의 조나라 명장인 강파와 이목을 지칭)에 비유하며 가선대부로 즉석에서 승진시켰다. 그는 또 일생동안 「견한잡록」 「귀전창수」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 관·민합심「강진 병영면사」펴내/고대∼조선시대 해상교역·군사 요충지

    ◎산재한 성터·유적 발굴,옛 긍지 되살려/“지방자치단체서 향토문화뿌리찾기 뜻깊은 일”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은 지명에서 알수 있듯이 조선5백년동안 호남지역의 군수권을 통괄하던 병마절도사의 잔지가 위치한 군사요충지였다.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역사속에 뿌리를 내린 향토문화의 현장이 곳곳에 산재돼 있다. 최근 이같은 병영면의 향토사를 담은 「강진군마을사­병영면편」이 강진군과 병영면 그리고 강진문화원의 공동작업끝에 발간됐다.향토문화뿌리찾기가 활발한 요즘 이같은 면단위사를 지방자치단체에서 펴낸 것은 뜻있는 작업으로 평가된다. 강진군 병영면은 마한­백제­통일신라­고려­조선에 이르는 역사적 변천을 거쳐 오늘날 12개 법정리에 22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는 해상교역과 군사요충지로 유명한 지방이다.여말선초에 걸쳐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이 지역보호를 위해 1417년(태종17년) 광산현에 있던 병마절도사의 영이 옮겨와 이후 전라도군수권을 통괄하는 사령부로 당시 50여 군·현의 병권을 장악했던 곳이다.병영성터,공적비군,남장대,북장대등 당시의 유적이 지금도 남아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또 이곳은 을묘왜변(1555년),임진왜란(1592년),정유재란(1597년),동학난(1894년)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화를 입은 호남지방의 수난의 고장이기도 했다. 「병영마을사」는 이같은 병영면의 연혁과 지리적 환경,문화적 성격,자료편을 모은 총설편과 12개 마을의 각사 그리고 이 지역 출신인사들의 글을 모은 병영면예찬,병영면에 내려오는 마을문서등 모두 4백35쪽으로 짜여졌다.특히 이 책은 강진군과 병영면등 자치단체가 지원하고 강진군문화원과 민간에서 운영하는 탐진향토문화연구회가 발간의 주축이 되어 만든 관민합동작품이라는데 의미가 있다.자료수집과 탐문작업에 마을주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참여한 점 또한 남다르다. 이번 작업을 통해 군사요충지로서의 병영면이 갖고 있는 모습뿐아니라 효자와 열녀를 장려하는 전래풍속,인품·학식·덕망있는 사람을 동수장으로 모셔 중요 일을 결정한 동수장제도,수십년동안의 마을품앗이역사를 기록한 진세봉상책등 타지역에서는 보기힘든 습속을 찾아내는 성과도 거뒀다. 김갑현병영면장은 발간사에서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적과 전설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를 않아 안타까웠다』면서 『이번 마을사발간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야 할 숙원인 병영성복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 임진왜란때 전함 판옥선(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13)

    ◎명종10년에 개발… 조선 수군의 주력함/갑판이 2층,노군·전투원 일 분담 가능 임진왜란때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한 주력함은 판옥선이다.판옥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전인 명종10년(1555)에 개발되었다.우리나라가 왜구를 막기 위해 소형경쾌선 제작에 주력하고 있을 때,일본의 선박이 대형화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발해낸 함선이 바로 판옥선이다.판옥선은 단층의 종래 군선과는 달리 갑판을 2층으로 설비한 혁신적 전함이었다.종래의 군선은 노를 젓는 노군과 포와 활을 쏘는 전투원이 단층의 갑판에 한데 어울려 있었기 때문에 노를 저으면 포를 사용치 못하고,포를 사용하면 노를 젖지 못함으로써 전투효율이 낮았다.또한 배안에 뛰어들어 육박전을 능사로 하는 왜군이 한명이라도 배 안에 뛰어들면 선내 전체가 동요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판옥선은 노를 젓는 노군을 아래층 갑판의 보호된 장소에 배치시켜 노를 젓는데 전념하게 하고,포를 쏘고 활을 당기는 전투원을 상갑판 위 넓고 높은 장소에 배치하여 발사하는 포탄과 화살의명중률을 높게 하며,적군이 배안으로 뛰어들 수 없게 한 것이었다.임진란 때 조선 수군에게 패한 왜군의 수군장들은 전기에서 조선의 군선들(판옥선)이 성벽과 같이 높아서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다고 했다.판옥선은 선형의 참신성 외에도 일본의 군선보다 월등한 화기를 적재할 수 있었고 선체가 강인하여 왜선을 충돌·파괴시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때 일본군선은 안택(아다케) 관선(세키부네) 소조(고바야)등 세종류가 있었지만 그 어느것도 판옥선의 전술적 우수성에 미치지 못했다.충무공 이순신은 판옥선의 우수성에 대하여 『왜군이 수전에 패한 것은 그들이 수전에 능숙치 못한 때문이 아니고 군선이 견고하고 장대하지 못하여 대포를 안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평가하였다.이 평가는 판옥선을 실전에 참여시키고 그것을 사령한 충무공의 견해이니만큼 판옥선의 역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전투인원 1백64명을 승선시킨 판옥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후 상당기간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하는 주력 함선으로서 바다의 수문장 임무를담당하였다.
  • 문헌안의 거북선 사실입증 첫걸음

    ◎이순신장군의 「한산도대첩」 등 실증/거북선 실물 인양 가능성 크게 높여/「귀함 별황자총통」 인양의 의미 임진왜란 당시의 대포였던 별황자총통(총통)의 발견은 조선조 전사(전사)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문헌상에만 기록돼 있어 실체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총통이 거북선의 주포였음이 확인됨에 따라 가까운 시일안에 거북선의 잔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까지 갖게 하고 있다.황자총통발견의 의의와 사료로서의 가치·인양과정등을 알아본다. ▷전문가 평가◁ 이번에 발견된 별황자총통(별황자총통)에 대해 문화재 전문위원 조성도씨(해군사관학교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사는 물론 조선후기의 무기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국보급으로 평가했다. 거북선에 장착됐던 것으로 보이는 이 총통의 현장실측평가작업에 참가했던 조씨는 『그동안 거북선에 관한 사료(사료)는 상당수 있으나 거북선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총통의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또 『이 총통에 새겨진 제조연대와 발견장소가 임진왜란때의 거북선과 왜국 수군이 싸우던 격전지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제까지 남아있는 조선조의 보물급 대포 16종보다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제작시기만 보더라도 기존의 대포들과는 달리 이 총통은 당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 제작연도를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게다가 「거북선에 장착됐다」는 내용의 명문이 남아 있어 지금까지 문헌상으로만 보존돼오던 거북선의 실체를 입증해주고 있다. 총통이 발견된 해저지점에 대해 그는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둔 곳이며 이장군의 뒤를 이은 2대 수군통제사 원균이 일본군에 대패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총통에 새겨진 귀함황자경적선 일사적선필수장이라는 내용의 칠언시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조선수군의 굴하지 않는 정신을 후세에 남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총통이 거의 원상태로 남아있는 것에 대해 『발견지점에는 모래 자갈층이 30㎝두께의 퇴적층을 이루고 있어 부식을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바다는 조개·기타 유기물질에 의해 퇴적속도가 빨라 침몰된 거북선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지닌채 퇴적층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양경위◁ 고색이 창연한 황자총통에는 귀함이라는 총통의 소속함정과 만력 병신(만력 병신·1596)이라는 제조일시가 명기되어 있어 거북선의 주포임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인됐다. 해군은 지난89년 노태우대통령의 지시로 그해 8월 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을 해군사관학교에 창설,3년동안 심해잠수요원과 탐사정·소해정·시추장비등을 투입해 탐사작업을 벌인 결과 이번에 거북선과 관계되는 실증자료를 처음으로 발굴하게 됐다. 발굴단은 그동안 8차례에 걸친 정밀탐사를 통해 거북선이 매몰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백87㎦의 해역중 30%인 54·5㎦를 탐사완료하고 앞으로는 한산도와 당포 근해를 집중 탐사할 계획이다. 발굴관계자들은 이번에 총통이 발견된 한산도해역은 임진왜란당시 대해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총통이외의 다른 유물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모두 3척이며 임진왜란이 끝난뒤에도 10여척을 건조한 기록이 있어 당시 수군이 활동하던 남해와 서해에는 거북선이 분명히 매몰되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이미 4백년이 지났으며 침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고 당시의 해안선도 항구의 축조와 매립 등으로 크게 바뀌어 바닷속의 거북선을 인양하기란 한강밑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탐사반원들은 총통발견을 계기로 거북선발굴작업이 크게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외국에서도 지난 60년대에 덴마크와 네덜란드에서 1천2백년전의 바이킹배 3척을 인양한바 있고 70년대에는 영국에서 6백년전의 목제군함을 원형그대로 인양한 적이 있다. ▷총통◁ 총통이란 고려시대와 이조시대때 왜구를 격퇴·섬멸하기 위해 무기로 사용했던 화전·화통·화포등의 화기를 총칭한다. 「공민왕5년(1356)에 총통을 사용해 전을 발사했다」는 고려사 병지의 기록으로보아 14세기 전반부터 이미 유통식 화기인 총통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원나라에서 전래된 총통은 이조 세종때 서북변경 개척의 적극화로 각종 화기와 화약의 수요가 급증하게 됐고 이에대한 제조기술이 향상되면서 조선화포중에서 가장 큰 천자총통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화포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화포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조선 특유의 형식으로 규격화하는 일이 진행됐다. 총통의 구경에 따라 가장 큰것은 천자,그다음이 지자,현자,황자로 나누었다. 천자문의 맨처음 구인 천·지·현·황순서로 크기를 정한 것이다. 구경 15∼16㎝의 천자총통과 13∼14㎝인 지자총통은 현재 육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2∼13㎝인 현자총통은 해사박물관,구경 11∼12㎝의 황자총통은 현충사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발견된 황자총통에 「별」자가 있는 것은 총통의 위력을 강화한 「특」이라는 뜻이다. 황자총통의 사정거리는 약8백보(1천21m)이며 철환과 화살 또는 유황으로된 화염탄등을 실탄으로 사용할 수 있다.
  • 문무왕 수중릉/“동해 지키리라”/호국전설 간직

    ◎기암괴석·십자수로 어울려 장관/감은사·사견대등 사적지도 즐비/경주해안서 180m… 피서철 맞아 관광객 북적 피서철에 다가서자 경북 경주군 양북면 봉길리의 대왕암이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대왕암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문무왕(재위 661∼681년)의 수중릉.해안에서 1백80여m 거리에 있는 이 해중릉이 발견된 것은 지난 67년의 일이다. 대왕암은 해변가에서만 보아도 성지임을 알수있는 4개의 기암괴석이 연봉을 이루어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둘레가 2백m쯤 되는 이 바위섬은 내부에 동서남북으로 십자수로가 나있어 파도가 끊임없이 들락날락한다.그 한 가운데에 수중못이 만들어져 있고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모양 화강암덮개돌이 얹혀 있다. 이 수중릉은 아직 내부를 개봉하지 않아 정확히는 알수 없으나 학자들은 이 덮개돌밑이 바로 대왕의 유골을 봉안한 납골처로 추정하고 있다.수중릉의 십자수로는 물이 고이지 않고 항상 새물을 넣어 살아있게 함으로써 결국 유골을 영생케 하는 구실을 한다는 해석이다. 이 문무왕수중릉은 삼국통일전만해도 왜구의 침입로였던 동해구 앞바다에 자리하고 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 기록에 따르면 이 수중릉은 『내뼈를 바다에 장사지내라.그러면 내가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리라』는 선친의 유언에따라 아들 신문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왕암은 또 수중릉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감은사,오른쪽엔 이견대와 삼각형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토함산 석굴암의 부처님 이마에 박혀있는 보주도 바로 대왕암 앞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의 빛을 받아 내부를 환히 비추게 설계되어 있다는 설명이고 보면 당시 이 대왕암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이견대는 문무왕이 용으로 변하는 모습이 보였다는 곳으로 후대 신문왕이 부왕의 넋을 기려 수시로 참배했으며 지금의 건물은 고증을 거쳐 지난79년 복원한 것이다. 대왕암에 얽힌 전설도 많다.그 가운데서도 감은사의 큰종을 왜구들이 약탈해 가다 대왕암 근처에서 격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파손되어 결국 약탈에 실패했다는 전설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현재 사적 1백58호로 지정되어있는 문무대왕릉은 경주에서 울산쪽으로 37㎞쯤 떨어져 있다.더욱이 생선이 많이 잡히는 감포를 이웃하고 있어 관광의 맛을 더해 준다.경주를 관광한 다음 대왕암↓감포↓포항을 거쳐 동해안 고속화도로를 달릴수 있으며 대왕암↓울산↓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이나 부산으로 향할수도 있다.시간적 여유가 많으면 감포나 이웃 해변가 마을에서 민박을 하며 바다낚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 애향심으로 쓴 소설가의 부산역사

    ◎최해군씨,「부산항­부산의 정체와 이면」 펴내/바다통한 외세영향 충실히 기술/연대기형식 탈피,사건위주 전개 내륙 중심이 아닌 바다 중심의 시각에서 쓰여진 부산사가 한 소설가에 의해 출간됐다.항도 부산을 무대로 삼은 장편소설 「부산포」(전3권)를 지난 87년 출간한 소설가 최해군씨(67)가 이번에는 바다를 통한 외세의 영향을 충실히 반영한 부산지역사 「부산항­부산의 정체와 그 이면」(도서출판 지평간)을 펴낸 것. 이번에 나온 「부산항」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며 최대 항구도시인 부산시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한 결과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즉 지금까지 부산지역의 역사서로 나와 있는 것은 부산시사편찬위원회가 행정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펴낸 「부산시사」(전6권) 뿐이었으나 이번 「부산항」은 관주도의 역사편찬과는 다른 시민속에서 우러나온 역사기술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최씨는 『우리나라의 지방 도시는 불행하게도 독자적인 기록을 갖고 있지 않다.따라서 지방사를 쓰려고하면 중앙의 역사에서 되베껴 와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적인 부산사 「부산항」은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불거져 나온 반도의 동남단 바닷가라는 지리적 조건과 그 바다로 인해 국제성을 띤 시대적 조류를 끊임없이 받아 왔다는 사실을 집필의 동기로 삼고 있다. 「부산항」에 나오는 부산의 역사는 다분히 왜구 또는 일본과의 갈등이 중심을 이룬다.즉 왜구­왜관­왜란­개항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뚜렷하다. 최씨는 이 책을 내는데 부산시가 펴낸 「부산시사」(전6권)과 20세기초 내한한 일본인 도갑현경이 쓴 필사본 「부산부사원고」(전6권)과 함께 이곳 저곳을 발로 뛰며 모은 자료와 책자를 참조했다.「부산항」은 정사 바깥의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최씨가 밝혀낸 새로운 사실도 있다.일본이 개항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앗아간 것은 사금이라는 것이 일본측의 자료를 통해 드러난 것.부산과 원산항을 통해 사금을 밀수해 갔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최씨는 부산지역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9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또 그는 문학계 창작활동으로 89년 우봉문학상,90년 한국소설문학상도 수상했다.그는 90년 부산의 외형적인 모습을 소개한 「부산의 맥」(전2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 원로학자 김재근씨,저서 「거북선」서 처음밝혀

    ◎“임란때 거북선길이는 21.5m”/너비 7.36m로 정조때것보다 작은 규모/“철장식을 붙인 목선… 철갑선 아니다” 임진위란 발발 4백주년을 맞아 당시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거북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성과가 칠순이 넘은 노학자에 의해 최근 단행본으로 발표됐다. 한선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원로조선공학자 김재근서울대명예교수(72·학술원 부회장)가 30여년간의 연구결과를 정리한 책 「거북선」(정우사간)을 충무공 이순신 탄신 4백47주년(4월28일)에 즈음하여 펴낸 것. 김교수는 이 책에서 임란당시 거북선의 크기를 처음으로 밝혀내 눈길을 끈다.즉 임란당시 거북선은 선체의 길이가 21.5m,저판의 길이 15.3m,선체의 너비 7.36m,상장의 너비 9.2m,노의 수는 14자루로 정조대의 거북선 크기보다는 약간 작다는 주장이다.이는 광해군 당시 한선의 크기·치수가 나와있는 문헌들을 근거로 추정해낸 것이다. 김교수는 또 이 책에서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소나무로 만들어진 철장식이 된 목선으로 임란 당시 주력 군선이었던 판옥선을 바탕으로 개량된특수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거북선철갑선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오직 일본문헌뿐이며 정조때 충무공 관련자료들을 모아 편찬한 「이충무공전서」등 한국사료에는 한군데에도 언급된 곳이 없어 신빙성이 없다면서 대신 거북선은 상갑판에 왜구의 접근을 막기 위해 칼송곳을 꽂고 선수부와 상장의 요소요소를 철로 장식하고 보강한 특수전함으로 오히려 「장갑선」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김교수는 또 「난중일기」「당포파왜병장」「이분의 행록」등을 들어 임란 당시 해전에서 활동한 거북선은 모두 세 척뿐이었다는 최영희전국사편찬위원장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이밖에 「영귀선」「방답귀선」「순천귀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북선 세 척의 건조장소를 비교적 상세하게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지난 57년 「대학신문」에 「구선고」라는 글을 발표한 뒤 줄곧 한선을 연구해온 김교수는 20년전부터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해 만든 특수전선이라는 주장을 펴오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이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판옥선은 비전투원인 노군을 집안에 들여놓아 전사들이 상갑판에서 방해받지 않고 싸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종전의 군선에 비해 몸집이 월등히 크며 16세기에 개발돼 임란때 거북선과 함께 맹활약을 했던 우리 수군사의 대표적인 군선이다. 김교수는 『거북선이 당대의 판옥선과 똑같은 방식으로 건조되었으나 상갑판을 없애고 그 대신 둥그런 개판을 덮어놓은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거북선은 튼튼한 송재를 써 구조부의 치수도 넉넉하게 잡는 한선구조법의 기본적인 특성에 따라 아주 강건하게 건조돼 이와 같은 강인한 선체구조로 적의 선단속에 뚫고 들어가 적선을 충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반면 판옥선은 포의 발사 위치가 상갑판에 있어 명중률이 높아 적을 멀리 떼어놓고 발포할 수 있어 서로 상이한 역할을 담당했었다고 밝혔다. 김교수는 현재 거북선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는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지만 예를 들어 거북선에 비치됐던 비품목록등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라고 말했다.그는 그러나 요즘 젊은 학자들이 한문을 잘 몰라 원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연구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72세라는 나이에 전문서를 펴내게 돼 무엇보다도 기쁘다』는 김교수는 그동안 「조선왕조군선연구」「거북선의 신화」「우리배의 역사」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으며 앞으로도 세계의 희귀한 배들을 소개하는 「배이야기」등 책 2∼3권정도는 더 펴낼 계획이다. 『거북선은 우리겨레의 탁월한 창조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앞장섰던 무적함인 만큼 긍지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거북선에 대한 불필요한 신화나 수수께끼를 갖고 이를 자랑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거북선과 같은 민족적 유산은 좀더 성의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며 일반국민들이 거북선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마지막으로 『임란당시 해전에서의 승리가 단순히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거북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이보다는 우리 수군의 우수한 전통과 조직,판옥선과 같은 뛰어난 전선과 일본수군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우리 수군의 우수한 화포술이 합쳐져 이루어낸 결과』라고 강조했다.
  • 지일이 극일/송복 연세대교수(세평)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도대체 우리와 일본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 주고 받는 호혜관계인가,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일방적 봉사관계인가. 역사를 돌아 보면 마치 우리는 일본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처럼 되어있다. 그들이 미개한 때는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전파해서 깨우쳐주는 구실이나 하는 나라로,그것도 모자라면 대륙의 문물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다리구실까지 해주는 나라로,또 그것도 모자라면 우리 연안을 무인지경으로 노략질하던 왜구들의 약탈장소나 돼주는 나라로­. 그러나 이 정도는 고려때까지이고,조선조에 들어서면 아예 그 구실과 역할의 양태로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진다. ○미래 장담할 수 있는가 자기들끼리 분열해 싸움을 일삼다 통일이 되니 이젠 그 통일된 힘의 시험장소로,혹은 통일된 제 세력들의 내부압력을 바깥으로 분출시키는 외부발산장소로 우리를 초토화시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 중간상인들과 무역하던 사카이지방 조총상인들의 안팔린 조총소화장소로 우리를 이용한 것이 임진왜란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17세기이후 평화로웠던 얼마간의 시기도 있었지만 일본은 내내 위협의 적이 됐고,마침내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 후발 일본 자본주의를 보다 빨리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구실을 하는 장소로 바뀐다. 그들의 야욕을 충족키 위해 청일전쟁을 벌일 때는 그 전쟁의 싸움터로 그들 나라가 아닌 우리가 돼 주었고,잇따라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우리는 그들 승전의 주배후지가 됐다. 드디어는 식민지까지 돼서,뿐만 아니라 대륙침탈의 병참기지까지 돼서,무소불위로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가장 악랄한 수탈의 대상자가 돼 주었다. 45년 원자탄을 맞고 참담한 패배자로 무조건 손을 들었을 때는 이제야말로 그 잔인 무극의 나라가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 물러가나 했더니,난데없이 6ㆍ25가 터져서 그들 부흥의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물러간 지 5년도 채 못돼,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상잔을 벌이면서까지 전쟁의 폐허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 됐다. 가장 잔인했던 적을,그것도 치가 떨리도록 증오했던 적을 1백만명이상의 사상자를내면서까지 구해준 것이 우리의 6ㆍ25였다고 한다면 6ㆍ25야말로 일본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를 죽인 전쟁이다. 일본에 대해선 우리야말로 살신성인의 나라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가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원수를 구해준 나라가 있던가.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는 매년 40억달러이상의 적자를 내면서까지 일본의 물건을 사주는 나라가 돼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나라가 된 그 일본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우리 기업가가 밤낮없이 뛰고 있고,우리 노동자가 살을 에이면서까지 불철주야 일하고 있는 격이 돼있다. ○우리 힘으로 청산해야 도대체 우리는 일본에 어떤 나라인가. 우리 역사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일본을 살찌우기 위해서,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는 나라인가. 우리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고 우리의 역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일본은 언제나 기껏해야 「통석의 염」에 불과하다. 그들의 사고를 속에는 호혜의 염이란 있을 수 없고,호혜의 염이 있을 수 없는한 「통석」아닌 「통한의 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일어날 수 없는 그들을 보고 우리의 한을 달래는 말을 받아 낸다고 해서 그 내실이 바뀔 리 없고,그 내실이 바뀔 리 없는 한 그 일본을 위해 존재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과거역사가 미래에도 그 구실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아니 더할나위 없이 요구되는 것은 그 과거의 역사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청산하는 것이다. 통석의 염이든 통한의 염이든 뼛속에 깊이 간직하면서 과거는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다시 거론해서 이렇게 반성해라 저렇게 사죄하라 한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본을 볼 때마다,그리고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 더이상 이제 더이상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극일의 앙다짐이 있어야 한다. 일본은 명명백백 자진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나라가 아니다. 일본은 명명백백 과거역사의 패턴을 패턴 그대로 지속시키려는 나라다. 지속시키려 하는 그만큼 그 일본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교포들의 지위를 바로 잡아 줄 리 없고,우리를 위해서 그 과거 역사와는 다른 패턴을 가지라고 기술을 순순히 이전해줄 리도 없을 뿐아니라,더더구나 우리 부에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는 무역역조를 스스로 나서 시정해줄 리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고 우리가 주도를 해서 우리가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일본을 알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 오래전 그 일본이 우리를 배워서 우리를 좌지우지 했듯이 거꾸로 우리가 일본을 배워야 그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다른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역사시대이후 대소 전쟁을 수도 없이 치르면서도 이상하게도 나라사랑 마음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다. 뼈에도 안 박히고 살에도 안 박히는,입발림만의 나라사랑만 무성해 있다. 더구나 중상층의 경우 자기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나라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완벽히」 잊고 있다. 대일 무역역조를 시키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 가운데 도대체 누구인가.수입개방이야 피할 수 없어 한다해도 그 물건을 안 사쓰는 양식과 양심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사랑 마음이 있다면 그 양식 그 양심이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 상품이 질이 낮다해도 남의 것을 안 사쓰는 정신,그래서 내수용 수입을 한푼이라도 줄이는 생활자세 그것이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이며 그것이 오늘의 대국 일본을 만든 장본이다. ○「나라사랑」 본받을만 일본은 미국처럼 통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 통이 큰 미국도 불리하니 우리에게 개방하라고 수없이 압력하지 않던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일본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작은 기술로 오직 나라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의 대국이 됐다. 자기를 돕지 않는 자는 하늘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를 일으키지 않는데 어느 하느님이 자기를 일으켜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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