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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출산 자락 천연 요새 활용한 조선시대 호남의 육군 사령부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월출산 자락 천연 요새 활용한 조선시대 호남의 육군 사령부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4대문·8개 치성·군기고 등 확인남쪽의 금강천이 해자 역할 수행중심부 넓은 들판서 군량미 보급제주 포함 광범위한 군사 업무 총괄평소 1000명 군관ㆍ역졸등 머물러마천목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일제강점기 마을이 들어서며 훼손1997년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전남광주통합특별시 강진군에 병영면이 있다. 짐작처럼 병영(兵營)이 있었던 고장이다. 병영이란 글자 그대로 군대의 주둔지를 뜻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병영은 병마절도사가 머무는 지역 사령부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실제로 병영은 전라도병마절도사가 지휘하는 전라도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된 군사도시였다. 경상남도 통영시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를 땅이름으로 물려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병영은 호남의 중심 고을 가운데 하나였지만 오늘날에는 광주에서 영암을 거쳐 남해안 지역을 잇는 간선도로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다. 병영에 가려면 나주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영암읍을 지나 쌍정제 호수가 끝나는 곳에서 장강로로 갈아타고 월출산 자락의 구불구불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장강로는 영암과 강진 병영, 장홍을 잇는 835번 지방도를 가리킨다. ●병마절도사가 머무는 지역 사령부 병영은 만만치 않은 산줄기가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고장이다. 그럼에도 분지를 형성한 중심부엔 군량미 보급이 가능했을 넒은 들이 펼쳐져 있다. 남쪽에는 금강천이 흘러 생활 및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자연 해자 역할도 수행한다. 천연 요새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이런 자연 환경 때문에 호남지역 육군 사령부가 들어섰을 것이다. 처음 병영을 찾은 것은 역사가 아니라 음식 때문이었다. 백련사 가는 길이었다. 20년이 훨씬 넘은 옛날이다. 그때도 병영의 원조 돼지불고기 식당은 밋있는 전라도식 가성비 백반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후 갈수록 이 식당의 대기줄이 길어지자 주변에 비슷한 메뉴의 음식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이곳이 남도음식거리로 지정됐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지금은 ‘병영돼지불고기거리’가 조성돼 손님을 맞는다. 이번 병영길은 1박 2일로 일정을 짰다. 고속도로를 달려 장흥 탐진강변의 정남진토요시장에서 저녁으로 장흥삼합을 먹었다. 장흥한우, 득량만 키조개, 표고버섯이라는 이 고장 3대 특산물을 함께 구우니 맛이 없을 수 없다. 이튿날은 강진읍내에서 나주 못지 않는 맛의 곰탕으로 아침을 들었다. 쉬엄쉬엄 차를 몰았는데도 병영에 도착해 원조 식당의 대기표를 뽑았더니 1번이었다. 그리고는 병영성 안팎을 차근차근 둘러봤다. 조선 초기에는 전라병영성 역할을 광주 광산구 송정동의 고내상성(古內廂城)이 맡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군사행정 체제를 미처 개편하지 못한 시기에 해당할 것이다. 내상이란 각도의 치소(治所)에 있는 병영을 뜻한다. 전라병영성은 충정공 마천목(1358~ 1431)이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있던 141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당시 마천목의 직함은 ‘전라도병마도절제사 겸 판나주목사’였다. 전라도 지역 육군 최고 지휘관이 나주목의 행정 책임자인 목사를 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광주에 있던 전라병영을 잠깐 나주에 두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병영의 원조 돼지불고기 식당 유명 병영성 이전은 왜구의 발호와 깊은 관계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왜구가 침범하면 평지의 치소를 버리고 산성으로 올라가 버티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런데 조선은 치소에 석성(石城)을 쌓아 왜구를 격퇴하는 적극적인 국방정책을 편다. 연장선상에서 내륙의 병마도절도사영을 해안지역으로 전진배치했다. 1416~1417년 이른바 내상 재배치가 이뤄진 배경이다. 전라병영 이전과 함께 경주의 경상좌병영을 울산, 오늘날의 예산 덕산인 이산의 충청병영을 서산 해미로 옮긴 것도 이 때다. 전라병영의 새로운 터전은 도강현이 있었던 땅이었다. 당시 도강현과 남쪽의 탐진현을 합친 것이 강진현이다. 짐작처럼 도강현과 탐진현에서 한글자씩을 따서 고을 이름을 새로 지었다. 전라도병마절도사영은 전라도는 물론 제주도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많은 병력을 유지할 보급 능력이 필수적이었는데 이 고을이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전라병영성은 도강현의 옛 치소를 재활용했다. 전라병영성은 1555년 을묘왜변 당시 해남 달량진으로 침범한 왜구에 함락되기도 했다. 병영성은 1581년 보수가 마무리됐지만 1597년 정유재란으로 다시 파괴됐다. 전라병영이 1599년 강진에서 장흥으로 이전했을 만큼 병영성의 훼손은 심각했던 것 같다. 병영성 내부를 발굴 조사한 결과 현재 남아 있는 관아 등 건물 터는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대대적으로 중건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 장흥의 병영은 1604년 강진으로 돌아갔다. 이곳만한 입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정에선 외적에게 함락됐던 전력을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환원 결정이 내려진 배경에는 강진에 20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뿌리 내린 군수품 보급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병영은 평싱시에도 1000명 남짓한 군관 아전 역졸 장인이 머물고 있었다. 유사시 병력은 수천명, 최고 1만명으로 늘어난다.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는 보급은 필수적이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병영은 이미 거대한 소비시장이었다는 것이다. 병영상인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북에는 개성상인, 남에는 병영상인’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병영성을 새로 쌓을 때부터 공출 인력이 대거 투입됐던 만큼 먹거리 등의 대량 공급 기능은 필수적이었다. 성곽 완성 이후에는 지역 중심 상권으로 떠오르면서 거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병영상인은 1894년 전라병영이 폐영 될 때까지 한양·동래·평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앞서 고려시대에는 지역 상인들이 강진 청자를 중국·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과도 거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병영성 동문 앞에는 하멜기념관 병영성 동문 앞에는 2007년 개관한 하멜기념관이 보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 헨드릭 하멜(1630~1692)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에 표류해 13년간 남짓 머물렀다. 하멜이 탄 스페르베르호는 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인 바타비아를 떠나 오늘날의 대만인 포르모사를 경유한 뒤 일본 나가사키로 다시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 해안에 표착했다. 한양에 머물던 일행은 청나라 사신에게 뛰어들어 송환을 호소한 사건 때문에 전라병영성으로 옮겨살게 된다. 하멜 일행이 7년 안팎 머문 병영에는 이들의 흔적이라는 담장도 남아 있다. 얇은 돌을 기울여 촘촘히 쌓고, 다음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방식으로 빗살무늬를 만들었다. 병영에서는 ‘하멜식 담쌓기’나 ‘네덜란드식 담쌓기’라 부른다. 병영에는 ‘하멜이 고향의 담 쌓는 방법을 주민들에게 알려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담장은 2006년 ‘강진 한골목 옛 담장’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내부에 마을이 들어서며 완진히 훼손된 전라병영성을 정비해야 한다는 논의는 1991년 시작됐다. 그 성과로 1997년에는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성곽과 해자, 내부 건물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벌어지고 단계적인 복원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전라병영성은 둘레 1060m, 높이 3.5m 안팍의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이었다. 동·서·남·북 4대문과 8개의 치성, 병사 집무시설, 군기고 등도 확인됐다. 지금 전라병영성은 4대문과 성벽 대부분이 제모습을 찾았고 내부도 일부 정비된 상태다. 하지만 군영 시설을 어디까지 복원하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4월 ‘강진 전라병영성축제’ 열려 해마다 4월에는 ‘강진 전라병영성축제’가 열린다. 이 때 만큼은 병영성 내부가 축제장으로 변모한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나면 돼지불고기거리 식당에 외지인들이 줄을 설 때도 병영성 주변은 쓸쓸하기만 한 모습이다. 여전히 전라병영성의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매력있는 문화도시로 떠오른 강진은 물론 나주·영암·장흥 일대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병영도 한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땀흘린 뒤 먹은 원조 돼지불고기백반은 당연히 맛있었다. 호남 지역 역사의 흔적을 돌아보는 탐방길은 훌륭한 먹거리가 있어 더욱 즐겁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사색의 길 14.8㎞… 전쟁을 끝내는 길은 정말 사랑일까[올레길에서 만난 벅차오름]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사색의 길 14.8㎞… 전쟁을 끝내는 길은 정말 사랑일까[올레길에서 만난 벅차오름]

    식산봉&대수산봉 올레길 코스 중 가장 묵직한 사색의 길새들과 공존하는 오조리 내수면 연안습지산불감시 컨트롤타워 대수산봉의 야경나를 마주하던 시간 끝에 만나는 혼인지 수국 “사랑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항의 정신을 기록하는 사람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8)가 지난해 봄 제6회 제주4·3평화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는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악(惡)에 맞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신화의 섬 제주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표작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여자들의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여자의 전쟁은 우리가 알던 전쟁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잔혹하며 더 실제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사람을 죽이고 엉엉 울어버린 소녀, 첫 생리가 있던 날, 적의 총탄에 다리가 불구가 돼버린 소녀, 전장에서 열 아홉 살에 머리가 백발이 된 소녀, 딸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들고도 밤낮을 딸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늙은 어머니…. # 전쟁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정말 사랑 말고는 길이 없을까2026년 7월, 전쟁은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중동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총성이 멈추지 않는다. 제주올레 2코스로 향하는 길에서 기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리터당 2000원을 훌쩍 넘긴 기름값 앞에서 픽업 트럭은 ‘기름 먹는 하마’ 였다. 그 픽업트럭을 몰고 서쪽 끝 모슬포에서 동쪽 끝 성산포까지 가는 건 마치 돈을 도로에 뿌리면서 지구 반대편을 횡단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주 사람들은 남북으로 한라산을 넘는 일보다 동서로 횡단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서쪽으로 이사 가는 걸 꺼릴 정도다. 이방인의 나라처럼 멀고, 낯선 곳이기 때문이다. 그건 서쪽 사람들도 매한가지다. 사는 방식도 다르다. 바람의 섬이자 화산섬 제주는 그나마 서쪽 땅은 비옥한 편이지만 동쪽은 척박했다. 오죽했으면 ‘동쪽 사람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그만큼 동·서는 달랐다. 큰 맘 먹고 가야 하는 땅이다. # 제주올레 27개 코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사색의 길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 오조리 철새천국매우 이기적인 이유로 이기적인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며 광치기해변에서 다시 신발끈을 조여맨다. 올레 1코스가 제주 동부의 절경과 역사, 바다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화려한 길이라면 2코스는 걷는 재미보다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길이다. 제주올레 27개 코스, 437㎞ 가운데 가장 묵직한 사색의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치기해변을 출발해 오조리 내수면 습지와 식산봉, 대수산봉, 혼인지를 거쳐 온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4.8㎞. 화려한 관광지보다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과 들판,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풍경과 마주하며 걷는 길이다. 광치기해변을 떠난 길은 곧 오조리 내수면 둑방길로 이어진다. 아침 햇살이 수면 위로 번지면서 물비늘이 보석처럼 반짝반짝거린다. 성산일출봉에서 떠오른 해가 가장 먼저 비춘다는 오조리마을이다. 새들이 먼저 말을 걸고 바람이 먼저 대답한다. 그 모습을 묵묵히 성산일출봉이 한 폭의 수채화로 지켜보는 듯 하다. 오조리 연안습지는 제주 동부 해안의 대표적인 습지다. 멸종위기종 저어새를 비롯해 황새, 원앙, 고니 등이 찾아오는 철새 도래지다. 24종의 법정보호종이 서식한단다. 육지와 섬 사이에 모래가 쌓여 형성된 독특한 지형 덕분에 생태적 가치도 높다. 연안습지 보전에 대한 오조리 주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해양수산부는 오조리 내수면 연안습지 0.24㎞를 2023년 12월 22일 습지보호구역으로 제주에선 처음으로 공식 지정했다. 새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조리에서 가장 낯선 풍경은 어쩌면 새들의 침묵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새들과 공존하는 마을이다. 아니 공존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마치 시 한편처럼 다가오는 식산봉 정상… 세미 맹그로브 황근 군락지올레길 2코스에서 만나는 첫번째 오름은 식산봉(바오름). 둑방길 끝에 자리한 식산봉은 높이 60m 남짓의 작은 오름이다.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제법 흥미롭다. 고려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시절, 마을 주민들이 오름 정상에 낟가리를 높이 쌓아 마치 군량미를 보관한 군영처럼 위장했다. 왜구들은 산더미 처럼 쌓인 군량미를 보며 병사들도 그만큼 많을 것으로 착각해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식산봉(食山峰)이다. 작은 오름 하나에도 제주 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러나 또다른 유래는 봉우리에 장군석이라는 바위가 있어바위오름이라 불리다가 ‘위’가 탈락해 바오름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정상에 오르니 젊은 시절 폭풍같은 사랑을 했던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시 한편처럼 다가온다. 식산봉 바닷가에는 밀물과 썰물로 인해 소금기가 있는 젖은 땅이 있다. 염습지다. 특히 이곳은 멸종위기 야생식물이자 세미 맹그로브라 불리는 황근 집단 서식지가 눈에 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준 노란 무궁화같은 꽃. 1코스에서 만나지 못했던 강중훈 시인이 올레 연재를 신문에서 보고 문자가 왔다. 그는 ‘어느 논객이 철학을 이고 지며 걷다 지쳐 눈물 흘리고, 그 눈물 말라 소금밭이 된 종달리에서 그대가 찍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잡으렵니다. 그 길 지나면 나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의 당신을…’ 말과 함께 오조리 황근꽃 사진을 전송했다. 오조리 포구에선 인기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 촬영지인 창고에서 연신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도 만날 수 있다. 오조리 내수면을 두고 식산봉과 쌍월동산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 밤하늘에 달이 뜨면 내수면에도 달이 투영되어 동시에 두개의 달이 비춘다하여 쌍월동산이라 불렸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던 이곳 주민들은 뱃일을 나가거나 먼 길을 떠날때 옥돔과 삶은 계란, 밤등을 가져와 무사귀환을 기원했단다. #성산읍 산불감시 컨트로타워 대수산봉… 수백척의 갈치잡이 야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용천수 족지물을 지나 올레길 화살표를 따라 아기자기한 오조리마을을 벗어나면 고성오일시장이 나오고 고성리 마을 뒤편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대수산봉 입구가 나온다. 올레길 2코스에서 만나는 두번째 오름이다. 간세다리엔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둔 고성리 두개의 오름 중 큰 오름인 큰물뫼’라고 적혀 있다. 정상에 서면 1코스 시흥부터 광치기까지 아름다운 제주 동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섭지코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라고도 소개하고 있다. 고도는 137m에 불과하지만 경사가 만만치 않다. 여름 햇살 아래 오르막을 걷다 보면 어느새 숨이 차오른다. 성산일출봉과 우도, 섭지코지, 신양해변, 멀리 한라산까지 한눈에 펼쳐져 어쩌면 제주 동부 해안의 풍경을 가장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처갓집에 왔다가 눌러 앉은 제주사람보다 더 사투리를 잘 쓰는 산불감시원 전양배(69·정읍)씨를 정상에서 만났다. 그는 이곳을 “성산읍 산불감시의 컨트롤타워”라고 소개했다. “여기선 동부 오름들이 다 보여요. 연기만 올라와도 금방 확인할 수 있죠.” 360도 시야가 열려 있는 최고의 전망대여서 성산읍 일대 8개 산불감시초소를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대수산봉에서는 지미봉과 대왕산, 용눈이오름, 두산봉, 모구리오름, 독자봉 등 성산 일대 주요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형적 장점 때문에 오래전 봉수대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대수산봉의 또 다른 매력은 사계절 다른 풍광이다. 전 씨는 “2월 말에서 3월 초에는 유채꽃이 피면서 가장 아름답고, 8~9월에는 갈치잡이 어선들이 밤바다를 밝히는 모습이 장관”이라며 “성산포 앞바다에 수백 척의 갈치잡이 배가 불을 밝히면 바다가 온통 불빛으로 물든다”고 소개했다. 이 때문에 야영객이 몰리는 것은 고민거리라고 전한다. 그는 “원래 이곳은 야영이 금지된 곳이지만 근무가 끝난 뒤 일부 관광객, 특히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텐트를 치고 숙박하는 경우가 있다”며 “관리 인력이 없는 야간에는 안전사고와 산불 위험이 커질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인증샷 찍는 열풍이 이곳 대수산봉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밭담길… 나를 마주하는 가장 길고 긴 시간 끝에 만난 수국정원 혼인지대수산봉을 내려가면 풍경은 단순해진다. 밭길과 농로, 돌담과 들판이 이어진다. 가장 긴 사색의 길이기도 하다. 뚜벅이들이 가장 많이 지루함을 느끼는 밭담길이다. 하지만 어쩌면 2코스의 진짜 매력은 여기서 시작된다. 눈길을 붙잡는 절경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 자신에게 향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밭담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가장 큰 사치다. 제주올레안내센터에선 외진 구간에서는 동행 걷기나 안심콜 서비스를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은 아름답지만 혼자 걷기에는 다소 긴 구간이 이어진다. 긴 사색 끝에 만나는 곳은 탐라국 신화가 살아있는 혼인지다. 삼신인이 바다 건너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연못이다. 제주의 건국 이야기가 시작된 장소인 셈이다. 고즈넉한 연못을 둘러싼 숲길을 걷다 보면 제주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수천 년 이야기를 품은 섬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혼인지의 여름은 수국 때문에 더욱 매혹적이다. 파란 꽃길과 신화 속 연못이 어우러져 마치 신비스런 정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혼인지 연못따라 펼쳐지는 수국의 향연을 보면서 어쩌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사랑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알렉시예비치의 말에 폭풍 공감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사색의 길 14.8㎞는 온평포구 앞에서 7시간 만에 멈췄다. 이 기획은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관광공사 지원으로 제작됐습니다
  • 뱀의 등줄기를 닮은 섬, 통영 사량도 [두시기행문]

    뱀의 등줄기를 닮은 섬, 통영 사량도 [두시기행문]

    푸른 통영의 바다 위에 뱀처럼 길게 누운 섬, 사량도는 뭍사람들의 발길을 쉼 없이 유혹하는 마법 같은 곳이다. 행정구역상 통영시에 속하는 사량도는 크게 윗섬인 상도와 아랫섬인 하도, 그리고 수우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이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연간 20만 명의 여행객이 찾는 이곳은 산과 바다, 그리고 넉넉한 섬 인심이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활기가 넘친다. 봄부터 가을까지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단연 윗섬의 지리산이다. 본래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산이라는 뜻에서 지리망산이라 불리던 이곳은 2002년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릴 만큼 빼어난 암릉미를 자랑한다. 낚시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아랫섬이 천국이다. 1년 내내 볼락과 도미, 감성돔이 입질을 기다리는 갯바위 포인트가 즐비해 전국에서 낚시꾼들이 찾아든다. 사량도의 매력은 험준한 바위 봉우리 끝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있다. 돈지리를 기점으로 지리산과 불모산을 거쳐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종주 코스는 약 6.5km로,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산행길이다. 특히 통영 8경 중 하나인 옥녀봉에 오르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절경에 누구나 이 섬을 사랑하게 된다. 산행 후에는 사량도 유일의 대항해수욕장에서 흘린 땀을 씻어내기 좋다. 고운 모래와 푸른 물빛을 자랑하는 이곳은 샤워장과 야영장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여름날의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섬의 정취를 더 깊이 느끼고 싶다면 사량대교를 따라 이어지는 상도와 하도의 일주도로를 달려보는 것도 좋다. 드라이브를 하다 운이 좋으면 산자락을 따라 이동하는 산양 무리를 마주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고, 덕동항 근처 포토존에서 사량대교를 배경으로 여행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다. 아울러 진촌마을 뒤편에 자리한 통영 최영장군사당은 왜구를 무찌른 장군을 기리는 유서 깊은 장소로, 섬 주민들의 오랜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사량도를 찾는 방법은 통영의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인 가오치항에서 배를 타고 진촌마을로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섬에 발을 들이면 식당과 카페, 관광안내소 등이 밀집해 있어 여행의 시작을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다.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섬답게 이곳 식당가에서 맛보는 해산물 물회는 그 신선함이 남다르다. 섬 곳곳에 자리한 마을마다 민박집과 음식점이 따뜻하게 여행자를 맞이하며,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소나무 숲길과 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고구마, 양파밭은 도보 여행객들에게 더없이 평화로운 여정을 선사한다. 사량도 여행을 마친 후 뭍으로 나오는 길에는 통영의 매력을 알뜰하게 더 챙겨보는 것도 좋다. 남망산조각공원에 위치한 야간 디지털 테마파크인 디피랑은 동피랑과 서피랑의 사라진 벽화들을 아름다운 야간 경관으로 재탄생시켜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더할 나위 없다. 수국이 만발하는 이순신공원은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산책하기 좋고, 산양읍의 나폴리농원에서는 편백 숲을 맨발로 거니는 힐링 체험을 통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털어낼 수 있다. 편백 효소길을 걷고 족욕으로 마무리하는 시간은 사량도에서 보낸 역동적인 여정을 차분하게 갈무리해 준다.
  • ‘영남알프스’ 풍광 거느린 영남루…  조선 선비 된 듯 시가 절로 샘솟네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영남알프스’ 풍광 거느린 영남루…  조선 선비 된 듯 시가 절로 샘솟네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700명이 1만 8700명 왜군에 맞서군사요새 ‘작원관’엔 그때 결기가 … 조선 3대 누각 명성 찬란한 영남루당대 문인 468인 974수로 절경 기려독립군들도 민주화 열사도 읊조려민족 혼 담긴 밀양아리랑 노래비도경남 밀양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다. 태백산맥에서 뻗은 산줄기가 북서쪽 화악산으로 이어져 고을의 진산을 이룬다. 북동쪽은 가지산·천황산·운문산이 밀집해 있고 남서쪽으로는 열왕산과 영취산, 남동쪽으로는 향로산과 금오산이 자리하고 있다. 일대 해발 1000m 안팎의 산을 묶어 오늘날에는 영남알프스라 부르기도 한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밀양의 읍치는 동쪽·서쪽·북쪽을 에워싼 산줄기를 배경으로 낙동강 지류 밀양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아늑한 곳에 자리잡았다. 밀양은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의 핵심 거점 도시였다. 주변의 산과 강은 역설적으로 밀양이 교통의 요지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높은 산의 굴곡과 넓은 강의 흐름이 자연적으로 육로와 수로를 밀양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북쪽의 대구와 청도, 남쪽의 부산과 김해, 동쪽의 경주, 서쪽의 창녕에서 뻗어 나온 길이 한데 모인 곳에 밀양이 있다. 산이 좋고 물은 맑은데 물산이 풍부해 사람이 모여들면 문화는 발전하기 마련이다. ●높은 산·넓은 강에 육로와 수로 집중 밀양의 지리적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작원관을 찾아가야 한다.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탄다면 삼랑진나들목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작원관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에서 문경 조령관에 버금가는 병목 구간이었다. 작원관은 낙동강 변의 잔도(棧道), 곧 벼랑길에 설치된 검문소이자 군사적 거점이었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밀양부사 박진이 700명 남짓한 밀양군사를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만 8700명 왜군 정예부대와 맞서 북상을 늦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왜란을 어린 시절 경험하고 병자호란 때는 예조참판으로 고초를 겪은 택당 이식은 작원관을 지나며 다음과 같이 감회를 읊었다. ‘겨우 수레 하나 지나갈 협소한 잔도 / 거룻배 거꾸로 밀고 오르는 층층의 여울 / 어량(魚梁)을 통과하면 그대로 바다 통하지만 / 섬 오랑캐 장사꾼도 더이상은 못 오르네 / 예로부터 뜻밖의 환란 막아 낸 험한 요새 / 기개세(氣蓋世)의 호걸에게 맡겨야 하고말고 / 임진년 그때 일을 어찌 차마 말하리요 / 그럼에도 생취(生聚)는 갈수록 쓸쓸해지누나’ 작원관이 밀양의 관문이었다면 밀양은 조선의 관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밀양읍성은 삼랑진로에서 이어진 중앙로를 타고 남쪽에서 접근하면 그 전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삼문동(三門洞)에서 밀양읍성이 있는 내일동(內一洞)은 이제 밀양교로 건널 수 있다. 삼문동은 밀양강이 한 바퀴 휘감아 도는 일종의 하중도 모습을 하고 있다. 옛날 이름은 수월리(水越里)였다는데 글자 그대로 큰비가 내리면 물이 넘쳤던 땅이었던 듯싶다. 내일동은 1895년 갑오개혁으로 설치된 부내면(府內面)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읍성과 관아가 있던 지역을 흔히 부내라 불렀는데 읍치의 내부라는 뜻이겠다. 일제강점기 밀양읍성 내부 지역이 여러 개의 동으로 분화하면서 내일동과 내이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밀양교에 접근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영남루는 밀양의 상징과도 같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울산 태화루와 함께 ‘영남 3루’의 하나로 꼽혔다. 영남루는 밀양강, 촉석루는 남강, 태화루는 태화강 언덕에 지어졌다. 그런데 영남루와 촉석루는 대동강의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히기도 했다. 실제로 밀양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영남루의 풍경도 좋지만, 누각 마루에 올랐을 때 펼쳐지는 주변 풍광은 더욱 일품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누각의 하나라는 찬사가 과장이 아니다. 밀양을 찾은 날은 최고기온이 섭씨 33도를 가리켰는데 영남루에 오르니 강바람에 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마루 위에 둘러앉은 탐방객이며 시민들의 표정도 밝기만 했다. 영남루와 밀양강 사이에는 밀양읍성의 성벽과 여장(女墻)이 있다. 여장이란 성벽 위에 수비병이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돌출되게 쌓은 구조물이다. 밀양강을 따라 밀양읍성의 남쪽 성벽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읍성은 동쪽 아동산(衙東山)과 북쪽 아북산(衙北山)을 거쳐 서쪽에서는 해천(垓川)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밀양강 변까지 이어졌다. 아동산과 아북산은 관아의 동쪽과 북쪽에 있는 산이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해천은 이름처럼 밀양읍성의 해자 기능을 하는 물길이었다. 그런데 밀양읍성은 성벽을 쌓은 뒤 해자를 팠다기보다는 기존의 물길을 자연적인 해자로 활용하도록 설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영남루에서 아동산으로 고개를 돌리면 무봉사(舞鳳寺)가 보인다. 대웅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영남사의 부속암자였다는 무봉사의 오랜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영남사가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소실되자 무봉암이 무봉사로 승격했다. 명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영남사 폐사는 왜구 침입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아졌을 것이다. ●1479년 높이 9척·둘레 4670척 완성 왜구 피해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성종실록은 1477년 ‘바닷가 성보(城堡)는 빨리 쌓아야 하고, 내륙 성보 또한 불가불 쌓아야 한다. 왜인이 경유하는 낙동강 변 읍성은 더욱 시급하다’며 밀양을 언급한다. 축성을 독려한 결과 밀양읍성은 1479년 높이 9척에 둘레 4670척으로 완성됐다. 영남루 자리엔 애초 금벽루(金璧樓) 혹은 죽루(竹樓)라 불리던 영남사의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누각을 새로 세우며 옛 절 이름을 따 영남루라 불렀다. 조선시대 들어 1460년(세조 6년) 중수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37년(인조 15년) 다시 지었다. 밀주관(密州館)으로 불린 밀양부 객사의 연회용 누각이 곧 영남루였다. 밀주관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된 현재의 영남루는 1844년(헌종 10년) 중수한 것이다. 영남루와 그 주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밀양 문화, 나아가 영남 문화의 보고다. 영남루에 올라 제영시(題詠詩) 한 편을 남기는 것은 밀양을 지나는 문인이나 관료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나 다름없었다. 영남루를 직접 찾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상상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 ‘영남루시운’(嶺南樓詩韻)엔 문인 412명의 한시 559수와 산문 11편이 담겼다. 임진왜란 이전에 모은 작품이 이 정도라니 놀랍다. 영남루 제영시의 작자는 당대 한다 하는 문인관료를 망라하고 있다. 얼핏 훑어봐도 이색, 문익점, 하륜, 권근, 정인지, 서거정, 김종직, 주세붕, 이황, 김성일, 류성룡, 이덕형, 김창흡, 김천택 등의 이름이 보인다. 지금까지 전하는 영남루 제영시는 468인이 지은 974수에 이른다. 작자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341인, 시호를 받은 사람은 111인이라는 연구도 있다.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자부심도 무리가 아니다. ●맑은 국물 토렴한 ‘돼지국밥의 고장’ 영남루에서 무봉사로 오르자면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밀양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이 고장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그것도 보존에 급급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다. 항일운동기에는 독립군과 광복군 노래로, 한국전쟁기와 민주화운동기에도 새로운 가사로 어두운 시대를 헤쳐 나갈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밀양 관아는 밀양읍성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관아의 내삼문인 응향문(凝香門)이 멀리서부터 보인다. 담장 앞에 늘어선 선정비가 이 고을이 가진 간단치 않은 역사를 상징하는 듯하다. 관아 내부로 들어서면 동헌인 근민헌(近民軒)의 모습이 당당하다. 밀양도호부는 1895년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밀양군이 됐다. 밀양도호부 관아도 밀양군청으로 바뀌었다. 이후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무소로 쓰이다 201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밀양은 돼지국밥의 고장이다. 관아 앞 새마을시장을 비롯해 시내에도 맛집이 있지만, 밀양 사람들은 창녕과 경계를 이루는 무안면 소재지를 ‘밀양 돼지국밥의 발상지’로 여기는 듯하다. 소뼈를 곤 맑은 국물에 돼지고기를 넓고 얇게 썰어 토렴한 국밥에 얹는 것이 밀양식이다. 이 고장을 찾으면 밀양식 돼지국밥도 경험해 보기를 권한다. 어디서든 돼지국밥이 화제로 떠올랐을 때 할 말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평택시,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해군함정 ‘이대원함’ 명명 공동 건의

    평택시,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해군함정 ‘이대원함’ 명명 공동 건의

    경기 평택시가 정해왜란(1587년)의 영웅 충렬공 이대원 장군의 숭고한 호국 정신을 기리고 국가 안보 의식을 북돋우기 위해 시의회 및 관내·외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해군 차기 주력함정에 ‘이대원함’ 명명을 건의했다. 공동 건의에는 평택시와 평택시의회, 장군의 사당(쌍충사)이 있는 전남 고흥군의 ‘녹도진 쌍충사 모충회’, 장군의 본관인 ‘함평이씨 대종회’ 등이 동참했다. 충렬공 이대원 장군(1553~1587)은 평택시 포승읍 출생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라좌도 녹도만호로 부임해 정해왜란 당시 손죽도 앞바다에서 밀려오는 왜구에 맞서 사흘 동안 결사적인 전투를 벌이다 순국했다. 당시 이 장군과 군사들의 결사 항전은 왜군에게 전라도 진격이 불가능함을 각인시켜 침략 경로를 변경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조선 조정이 전라좌수영의 함대와 군사 전력을 대대적으로 보강함에 따라 훗날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결정적인 방어 체계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택시는 해군 제2함대 사령부가 소재한 대표적인 대한민국 안보·국방 도시이나 정작 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호국 무장(武將)의 이름이 명명된 주력함정이 없다. 정장선 평택시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절명시를 남기며 충절을 고백했던 이대원 장군의 군인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 장병들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며 “장군이 목숨 바쳐 지켰던 남해 바다를 ‘이대원함’이 되어 다시 누빌 수 있도록 해군 측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확충사’와 묘역,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어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에 보존되어 있다.
  • 옛 모습 잃은 조선 수군 본부… 바다는 옛 영광 기억할까[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옛 모습 잃은 조선 수군 본부… 바다는 옛 영광 기억할까[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길이 3440m 교동대교 2014년 개통대룡시장 ‘레트로 감성’ 관광객 북적화개산 정상 북녘땅 손에 잡힐 듯읍성 둘레 430m, 현재 남문만 복원 농가 마당에는 당시 석재 나뒹굴어안해루 돌기둥은 잡초들이 휘감아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길이 3440m 교동대교는 2014년 완공됐다. 인천시 강화군의 양사면과 교동면을 연결한다. 교동도에 들어가려면 대교 입구 검문소에서 출입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절도 있으면서도 친절한 해병대 초병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주면 차단기가 열린다. 전에는 ‘민통선 임시출입증’도 내주었는데 절차가 간소화됐나 보다. 그래도 통행량이 많은 휴일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대교에 올라 오른쪽으로 손에 잡힐 듯 황해도 땅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런 절차가 수긍이 가게 마련이다. 교동대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강화 창후리포구에서 교동도 월선포구까지 배를 타야 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만큼 만조 때 15분이면 닿을 수 있는 뱃길이 간조 때는 물 빠진 갯벌을 돌아가느라 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교동대교를 건너 계속 달리면 대룡시장이 나타난다. 교동면사무소가 있는 시장 주변은 이제 교동도에서 가장 활기찬 거리가 됐다. 교동대교가 완공되기 전 주말이면 상인들이 육지에 사는 자식을 만나러 나가느라 시장은 텅 비곤 했다. 하지만 교동대교 개통과 함께 대룡시장이 ‘레트로 감성’으로 관광객을 모으기 시작한 이후에는 육지 자식들이 주말이면 섬으로 들어와 부모를 돕는다. ●예성강 하구이자 한강 관문에 자리 교동도는 섬 전체가 비옥한 농지로 둘러싸여 있다. 교동면사무소 주변에서 바라보면 넓은 평야 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교동도는 과거 세 개의 섬을 연결하는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하나의 섬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오늘날 교동평야라 불리는 벌판이 옛날에는 갯벌이었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1960~1970년대에 이르는 간척사업으로 오늘날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고구저수지가 1976년, 난정저수지가 2006년 조성되면서 1000년에 육박하는 간척사업이 완성됐다. 교동도는 고려의 도읍 개성으로 이어지는 예성강 하구이자 조선의 수도 서울로 들어서는 한강의 관문에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외적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로 일찌감치 떠올랐다. 삼남 지방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나르는 조운선도 교동도를 지나야 개성이든 서울이든 닿을 수 있었다. 왜구로부터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교동도를 수군 기지로 활용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대대로 송도, 곧 개성의 해양 세력이었음에도 독립된 병종(兵種)으로 수군의 성립이 매우 늦었다. 1380년(우왕 6년)이 되어서야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진다. 교동도는 앞서 강화도를 피란 수도로 삼았던 시대에도 당연히 중요한 군사기지였지만 남은 기록은 빈약하기만 하다. ●파도 영향 없고 외적 방어에도 용이 다만 조선왕조실록 태종 2년(1402년) 기사는 해도도통사 출범 시기 교동 수군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고려가 경신년(1380년) 전라도 정예 수군을 교동과 강화에 이주시켜 토지와 호적을 주고 왜구에 대비하게 했는데, 지금은 도망하거나 여러 고을로 흩어진 사람이 161명’이라는 내용이다. 전투력이 강했던 전라도 수군 병사들에게 땅을 나눠 주면서 교동도에 자리잡게 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동도 주민 가운데는 이들의 후손도 없지 않아 있을 듯싶다. 교동읍성은 교동대교에서 대룡시장을 지난 뒤 한동안 직진해 가면 나타난다. 교동면사무소를 중심으로는 화개산 너머 남쪽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교동읍성이 있는 읍내리(邑內里)는 동쪽으로 강화도, 남쪽으로 석모도에 가로막혀 있다. 큰 바다에 곧바로 노출되지 않아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외적의 공격에도 방어가 용이한 조선시대 수군진의 전형적 입지다. 화개산 정상에는 유사시 통신 수단인 봉수대의 자취도 남아 있다. 조선왕조 출범 직후 교동 수군은 강화 수군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1409년 태종실록에는 ‘경기좌우도 수군절제사에게 강화 부사를 겸하게 하고, 경기우도 도만호에게 교동 현령을 겸하게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경기도는 1391년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는데 1402년 좌도와 우도를 통합해 경기좌우도라 했다. 경기도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1414년이다. 경기좌우도 수군절제사라는 벼슬의 배경이다. 교동읍성은 1629년 남양부 화량진에 있던 경기 수영을 교동으로 옮기면서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은 경기 수영의 이동과 함께 교동현을 교동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이때 화개산 북쪽의 교동현 관아를 교동읍성으로 옮기고 경기 수영과 통합한 것이다. 정묘호란을 겪으며 경기 수군의 주적이 남쪽 왜구에서 북쪽 여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교동현 관아는 낚시터로도 유명한 고구리저수지가 있는 고읍리(古邑里)에 있었다. 고읍리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산리와 합쳐지면서 한 글자씩 딴 고구리가 된 것이다. ●경기·충청·황해도 3도 수군 관할 조선은 1633년 경기·충청·황해도의 3도 수군을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을 교동읍성에 설치한다. 통어사는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교동도호부사라는 긴 직함을 갖게 됐다. 앞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는 조정이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만들어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를 겸하게 한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후 통영에 자리잡은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좌우수군과 전라좌우수군, 충청 수영을 관할했다. 충청 수군이 통제영과 통어영에 모두 속했던 것은 흥미롭다. 남쪽에서 왜적이 발호하면 통제사 지휘를 받고, 북쪽에서 오랑캐가 침입하면 통어사 지시를 받은 것이다. 읍내리 남향 언덕의 교동읍성은 둘레가 430m로 읍성으로도, 수영성으로도 규모가 크다고 할 수는 없다. 과거에는 옹성을 두른 동문·남문·북문과 치성·해자가 있었다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제 모습을 잃었다. 유량루(庾亮樓)라 편액한 문루가 있는 남문이 유일하게 복원돼 읍성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남문의 아치 모양 홍예석에는 삼도통문(三道通門)과 남루(南樓)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홍예석만 남아 있던 남문과 문루를 발굴 조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처럼 복원한 것이 2017년이다. 교동읍성의 남문 주변은 이제 말끔하게 정비됐다. 하지만 탐방객의 눈에 들어오는 역사의 흔적은 이것뿐이다. 관광객이 “교동읍성은 딱히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리뷰를 남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남문만 보고 발걸음을 돌리기보다 내부로 들어가 왼쪽 성벽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기를 권한다. 남문 지붕 곁으로 바다가 펼쳐진 풍경에서 역사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이 왜 이곳을 수군본부로 삼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도권 대표 역사문화 자원 복원을 읍성 내부는 흔한 농촌 마을 풍경이다. 그럼에도 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면 역사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마을 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석재를 제법 정성들여 다듬은 우물이 보인다. 이집저집 농가 마당에도 수영성 시절 건물에 쓰였음 직한 석재들이 나뒹군다. 언덕으로 오르는 경사지에는 잡초가 휘감은 한쌍의 장주초석도 보인다. 안내판에는 안해루(晏海樓)의 돌기둥이었다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통제영과 통어영은 수군의 양대 지휘본부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18세기 통어영은 거북선을 포함해 군선 227척, 통제영은 550척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규모의 차이는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오늘날 통제영이 있던 통영과 통어영이 있던 교동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섬이라는 특수성에 북한과 가까운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제 모습 회복을 더디게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교동대교가 놓인 이후 교동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대룡시장은 물론 북녘땅이 환하게 바라보이는 화개산 정상에 세워진 전망대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교동읍성을 비롯한 수군의 유산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역사문화 자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교동 삼도수군통어영이 최소한의 옛 모습이라도 되찾을 수 있는 복원 계획이 하루라도 빨리 마련됐으면 좋겠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일본에 빼앗긴 ‘고려의 미소’…복제본으로 648년 만에 귀환

    일본에 빼앗긴 ‘고려의 미소’…복제본으로 648년 만에 귀환

    고려 말 왜구에 약탈당했다가 국내에 돌아왔으나 법적 분쟁 끝에 일본으로 반환된 충남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제 불상이 부처님 오신 날을 일주일 앞두고 고향에 봉안됐다. 충남도는 17일 서산 부석사에서금동관음보살좌상 복제본 봉안식을 개최하고 불상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고려 충숙왕 때인 1330년 서주(서산의 고려시대 명칭) 도비산 부석사에서 보권도인 계진 등 32인이 제작했다. 불상은 내부 ‘결연문’(結緣文)을 통해 제작 시기·장소·목적이 명확히 확인된다. 높이 50.5cm, 무게 38.6㎏의 금동 작품으로 고려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불상은 1378년 왜구의 약탈로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간논지(觀音寺)에 보관돼 왔다가 2012년 10월 국내 문화유산 절도단에 의해 한국으로 반입됐고, 서산 부석사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하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2023년 10월 간논지 측의 취득시효 완성 인정 판결을 최종 확정했으며 불상은 지난해 5월 일본으로 반환됐다. 봉안된 복제본은 원본과 같은 성분과 기법으로 제작됐다. 불상 복원 사업을 추진한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간논지의 공식 복제 허가와 일본 기업이 제공한 3차원(3D) 스캔 데이터를 바탕으로 1330년 제작 당시 불상 표면의 미세한 굴곡까지 정밀하게 복원했다. 또 전통 청동 주조 분야 장인이 불상 본체를 제작하고 전통 도금 방식인 개금 기법을 적용해 청동 표면에 옻칠한 뒤 순금박을 입혔다.
  • 14세기 일본으로 간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원품으로 제자리

    14세기 일본으로 간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원품으로 제자리

    고려 말 왜구에게 약탈당한 충남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700년의 세월 만에 복원품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원장 장기승)은 17일 오전 10시 서산 부석사에서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복원품 봉안식을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7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나 복원품의 모습으로나마 제자리를 찾은 이 불상의 봉안식에는 지역 불교계와 문화유산 관계자, 한일 협력 기여자 등 30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서주(瑞州) 도비산 부석사에서 보권도인 계진 등 32인이 조성한 불상이다. 불상은 내부 ‘결연문(結緣文)’을 통해 제작 시기·장소·목적이 명확히 확인된다. 높이 60cm, 무게 약 40kg 금동 작품으로, 당시 고려 불교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연구원에 따르면 불상은 14세기 왜구의 약탈로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対馬)시 간논지(觀音寺, 관음사)에 보관돼 왔다. 2012년 10월 국내 문화유산 절도단에 의해 불상이 한국으로 반입됐고, 서산 부석사가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하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23년 10월 대법원은 간논지 측의 취득시효 완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최종 확정, 불상은 2025년 5월 일본으로 반환됐다. 연구원은 도민의 문화유산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역사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기 위해 복원 사업을 추진했다. 소장기관인 간논지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 끝에 복제 승인을 받았다. 2025년 7월 6일 다나카 셋코 전 간논지 주지가 직접 부석사를 방문해 복제 승인서와 3D 스캔 데이터를 전달했다. 연구원은 화상 흔적이 남고 보관(寶冠)과 좌대(座臺)가 소실된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복제하는 대신, 동시기 고려 불상 양식에 대한 고증과 성분 분석 결과를 토대로 1330년 조성 당시의 완전한 모습을 되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장기승 원장은 “원본 불상은 일본에 있지만, 복원품은 원본과 동일한 크기와 성분·전통 주조 기법으로 제작됐다”며 “1330년 이 불상을 조성한 32인이 발원한 자비의 서원은 복원품 안에도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 숙주나물에 억울하게 이름을 빼앗긴 남자, 조선의 천재 신숙주 [한ZOOM]

    숙주나물에 억울하게 이름을 빼앗긴 남자, 조선의 천재 신숙주 [한ZOOM]

    숙주나물은 녹두 싹을 틔워 기른 채소다. 특유의 아삭한 식감과 담백한 맛 덕분에 만두소부터 나물, 볶음 요리까지 우리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수분 함량이 높아 쉽게 무르고 변질되는 탓에 신선도 유지가 무척 까다로운 식재료이기도 하다. 이 친숙한 나물에 ‘숙주’라는 이름이 붙게 된 배경을 두고 많은 이들은 단종을 배신하고 세조의 편에 선 변절자의 대명사, 신숙주(申叔舟, 1417~1475)를 떠올린다. 쉽게 상해버리는 이 나물처럼 지조 없이 행동한 그를 비난하기 위해, 백성들이 나물에 그의 이름을 붙여 짓이겼다는 설이다. 과연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가짜 뉴스’일 가능성이 높다. ●‘숙주나물’ 이름에 숨겨진 시대적 투사 조선시대 문헌 어디에도 이 나물을 ‘숙주나물’이라 부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숙주와 나물을 연결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이용기가 편찬한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다. “세조 때 신숙주가 여섯 신하를 반역으로 고발하여 죽였으므로 이를 미워하여 나물 이름을 숙주라 한 것이다. 만두소를 만들 때 이 나물을 짓이겨 넣으며 신숙주를 나물 이기듯 하자 하여 숙주라 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 하나 어찌 사람을 죽이고 영화를 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기록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남는다. 오히려 당대 발간된 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1923)나 이광수의 『단종애사』(1929)처럼 신숙주를 악인으로 묘사한 대중 문학의 유행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대적 울분이 역사 속 인물에게 투사된 결과인 셈이다. ●5개 국어를 구사한 ‘조선판 사기 캐릭터’ 우리가 기억하는 ‘변절자’의 프레임을 걷어내면, 신숙주는 당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탁월한 천재였다. 1438년, 21세의 나이에 생원시와 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하고 문과 복시까지 통과한 그는 1447년 문과 중시에서도 최상위 성적을 거두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오늘날로 치면 약관의 나이에 행정고시를 통과하고, 30대에 이미 국가 수석급 인재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능력은 학문에만 머물지 않았다. 한국어를 비롯해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등 5개 국어를 동시통역 수준으로 구사하는 언어의 귀재였다. 26세 때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주와 담판을 벌여 왜구의 침입을 막은 ‘계해약조’를 체결했고, 훗날 북방 여진족을 정벌한 문신 장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종의 절대적 신임 속에 집현전 학자로서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의 실무를 진두지휘한 주역이 바로 신숙주였다. ●명분과 현실 사이, 그가 짊어진 비난의 무게 세종은 승하 전, 병약한 문종과 어린 손자 단종을 걱정하며 신숙주를 비롯한 중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그 맹세를 꺾고 수양대군의 손을 잡았다. 성삼문 등 사육신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하며 그에게 동참을 권했으나 신숙주는 거절했다. 명분상으로는 옳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냉철한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거사를 밀고한 이는 신숙주가 아닌 김질(金礩)이었다. 그럼에도 왜 유독 신숙주만이 이토록 혹독한 비난을 받는 것일까. 정인지나 최항 등 함께 세조의 편에 선 집현전 학자들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세종의 기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이 “국가 대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자”라며 문종에게 직접 천거했던 ‘시대의 기대주’였기에, 배신의 낙인은 더 깊고 뼈아프게 새겨졌다. ●유언으로 남긴 평화, 그리고 남겨진 질문 1475년, 58세로 생을 마감하며 그의 마지막 유언은 성종에게 남긴 “일본과 화평을 잃지 마소서”였다. 평생 일본의 정세와 문화를 연구해 집대성한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는 이후 수백 년간 조선 외교관들의 필독서가 됐다.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도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나물 이름에 박제된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만약 그가 명분을 쫓아 사육신과 함께 ‘사칠신(死七臣)’으로 기록됐다면, 조선의 외교와 학문적 성취는 또 어떤 길을 걸었을까. 역사의 가정 앞에 자못 궁금함이 깊어진다.
  • ‘신라 천재’ 최치원 당나라 뱃길 오른 곳…“덧없는 삶 서럽구나” 술잔 기울이던 곳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신라 천재’ 최치원 당나라 뱃길 오른 곳…“덧없는 삶 서럽구나” 술잔 기울이던 곳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백제→고구려→555년 신라 영토로당과 본격 교류로 삼국통일 출발점원효대사도 당 유학길에 올랐다가‘일체유심조’ 깨닫고 발걸음 되돌려테뫼식 산성·포곡식 산성 결합 형태조선시대도 서해안 방어 전진기지 경기 화성시의 동쪽은 동탄신도시 중심의 인구 밀집지역과 삼성전자가 대표하는 첨단 공업지역으로 개발된 모습이다. 반면 화성시 서쪽은 자연과 역사가 조화를 이루는 수도권의 대표 휴양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전곡항, 제부도, 궁평항, 화성호는 ‘서해안 관광벨트’를 이루어 휴일이면 교통체증이 빚어질 만큼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화성시청은 서해안 휴양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의 중간지점이라고 해도 좋을 남양읍에 자리잡고 있다. 남양읍은 고려 및 조선 시대 남양도호부 관아가 있었으니 지역 행정 중심지로 유서 깊은 역사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양도호부 형장이 있던 남양성모성지에 최근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은 문화공간으로도 각광받는다. 당성(唐城)은 서해가 바라보이는 구봉산에 자리잡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성은 신라의 대(對)중국 교류 전진기지였다. 한반도 동남쪽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비로소 당나라와 본격 교류할 수 있게 됐다. 당성의 존재 때문이다. 그러니 신라에 당성은 삼국통일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해가 바라보이는 구봉산에 자리 당성은 일찍이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다. 이때 이름은 당항성(黨項城)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풍납토성을 빼앗긴 백제는 오늘날의 공주 웅진으로 천도한다. 고구려는 당항성 일대를 당성군(唐城那)이라 불렀다. 진흥왕이 555년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신라 영토가 됐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759년 이 지역의 이름을 당은군(唐恩郡)으로 바꿨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나라가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한다는 의미겠다. 그런데 새 이름은 신라 사회에서 인기가 없었다. 이 시기 각종 기록은 하나같이 당성이라고 썼다고 한다. 고려가 출범하며 당은군은 당성군으로 돌아갔다. 당성은 12세기 익주(益州)로 승격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남양도호부가 됐다. 종3품 부사가 다스렸으니 위계가 높은 고을이었다. 당성은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서해안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당성은 발굴 조사에서 해발 165m의 구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결합된 형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테뫼식이 산 정상을 둘러쌓았다면 포곡식은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이다. 학계는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을 통일신라가 포곡식 산성으로 규모를 키운 것으로 본다. 지금 보이는 당성 성벽은 통일신라가 당은군 시절 확장한 이후 양상을 반영한다. 당성에 오르면 사방이 거칠 것 없이 트여 있는 정상부에 망해루(望海樓) 터가 있다. 삼국시대 군사적 목적의 장대를 고려시대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고려는 당성을 지방행정의 중심지, 곧 치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당성의 해상교통 기능은 새로운 수도 송악에서 가까운 예성강 하구 벽란도로 넘겨주기 시작한다. 결국 당성의 치소 기능도 고려 중기 이전 오늘날의 남양읍으로 옮겨갔다. 팔각정을 비롯해 망해루 남쪽 평탄지에서 확인된 다양한 형태의 집터도 치소 시절의 흔적이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개척하고도 제2수도 충주에서 남한강 수로로 곧바로 이어지는 인천 언저리를 항구로 쓸 수는 없었다. 북쪽에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서 중국 동해안을 오가는 배는 조선시대에도 육지가 보이는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라는 고구려 때문에 이 뱃길도 이용할 수 없었다. 결국 신라는 북쪽 고구려와 남쪽 백제 사이의 안전지대인 당성에서 서해를 건너는 직항로를 이용했다. 먼바다로 나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와 당나라 수도 장안을 잇는 최단 거리 교통로였다. ●경주~장안 잇는 최단거리 교통로 당성이 신라시대 중국을 오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용하는 해양교통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857~?)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다가 귀국했으니 오가는 길 당성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던 진성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좌절하고 유랑하다 당성에 닿았다.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경주의 궁궐에서 얼굴을 익혔던 악공을 만난다. 그 역시 효공왕이 즉위하면서 따돌림을 당하자 당나라로 가던 길이었다. 최치원은 악공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이란 성했다가도 쇠퇴하니 덧없는 삶이 참으로 서럽구나…. 선왕을 뵈올 수 없으니 이 몸도 그대와 눈물 흘리네’라는 시를 써서 건넸다. 원효대사(617~686)가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되돌린 곳도 당성 언저리일 것이다. 앞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625~702)는 한 차례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가로질러 요동으로 가다 변방 수라군에게 붙잡혀 신라로 추방됐다. 두 사람은 661년 다시 유학길에 나선다. 송나라 승려 찬녕(919~1001)이 엮은 ‘송고승전’에 이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로 가는 경계인 해문(海門)에서 큰 배를 구해 바다를 건너려 했다. 중도에서 폭우를 만났다. 길옆 토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의 습기를 피했다. 날이 밝아 바라보니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궂은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밤도 무덤에서 머물렀는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전날은 땅굴이라 생각해 편안했는데, 오늘 무덤에 의탁하니 뒤숭숭하구나.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구나.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어떤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외치고는 바랑을 메고 돌아섰다. 깨달음을 얻고자 당나라에 가려고 했지만, 원효는 배에 오르기도 전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송고승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가 없다.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이야기는 북송의 연수(904~975)가 지은 ‘종경록’에 등장한다. ‘원효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는데, 마침 그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어딘지를 두고는 직산설과 평택설도 있다고 한다. 모두 경주에서 당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자리잡은 고장이다. 하지만 극적인 스토리가 힘을 발휘하려면 오도(悟道)의 현장은 당나라 가는 배에 막 오르기 직전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당성설이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20세기 각종 간척사업에 멀어진 바다 지금 망해루 터에 서면 바다까지는 제법 멀어 보인다. 20세기 각종 간척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과거에는 당나라를 오가는 배가 정박하던 포구가 멀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의 당성에 대한 묘사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당성은 바닷가에 일산처럼 우뚝 솟아 / 개펄이 빙 둘러서 안팎으로 이루었다.’ 화려한 햇볕가리개, 곧 양산 같은 모양으로 당성이 바닷가에 솟아 있었다는 뜻이다. 망해루에선 화량진과 마산포도 바라보인다. 고려 말부터 주변에 왜구가 출몰한 것은 삼남에서 걷은 세곡을 도성으로 옮기는 조운선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청구도’에 고려 공민왕 때 왜구가 화량에 침입했음을 적어 놓았다. 조선은 경기수군을 좌도 수군과 우도 수군으로 나누었다. 우도 수군의 본영은 도성으로 이어지는 한강 하구의 교동도에 두었다. 좌도 수군의 본영이 바로 화량진이었다. 마산포는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간 항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앞서 3000명 남짓한 청군은 군함 3척과 상선 2척에 나누어 타고 마산포에 상륙했다. 이렇듯 마산포는 개항기까지 서해안의 핵심 국제항 역할을 했다. 시화호 개발 사업 이전까지 마산포는 소래·사리와 함께 경기만의 3대 포구로도 각광받았다. 하지만 1987년 간척 공사가 마무리되자 어민이었던 마산포 주민들은 졸지에 농민이 돼야 했다. 당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고자 포도를 심은 것이 지금은 송산포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화성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 [서울광장] 중국인 해적왕 동상이 일본에 세워진 까닭은

    [서울광장] 중국인 해적왕 동상이 일본에 세워진 까닭은

    왜구란 당연히 일본의 해적집단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서면 성격이 달라진다. 중국인이 지도부를 이루는 새로운 왜구가 나타난 것이다. 바다를 이용한 서양과의 교섭이 시작되면서 왜구집단에 포르투갈인이 가담했다는 중국 기록도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인도 이 왜구집단에 포함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가정(嘉靖) 왜구라고도 부르는 16세기 왜구의 두목이 중국인 왕직(?~1559년)이다. 가정은 명나라 세종(재위 1522~1566년)의 연호다. 명나라가 해상무역을 금지한 것이 가정 왜구가 등장한 이유의 하나로 꼽힌다.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도 이들의 소행으로 본다. 60척 남짓한 배에 나눠 탄 왜구는 전라도 해안과 제주도를 휩쓸었다. 지난 주말 일본 규슈 북서쪽의 항구도시 히라도를 찾았다. 가톨릭 전래 현장을 둘러본다는 핑계로 이 고장 음식을 즐겨 보자는 친구들과의 가벼운 여행이었다. 히라도에선 성당 구경만큼이나 재미있는 것이 왜구의 재발견이었다. 관광지도에 ‘대항해시대 성아래 마을’이라 적은 것도 한때는 국제도시였다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히라도는 이제 영화가 사라진 시골 소도시 분위기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남아 있지 않은 옛 항구의 모습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히라도성이 바라보이는 히라도 중심가는 역사의 거리라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듯 보였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상선이 경쟁하듯 찾아든 16~17세기 대표적 인물들의 동상이 줄지어 있었다. 일본에 가톨릭을 전파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이 ‘히라도를 빛낸 외국인’ 반열에 오른 것은 당연하다. 하비에르는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해 전도 활동을 펼쳤지만 곧 추방됐고 새로운 거점으로 삼은 곳이 히라도다. 일본에 선교가 다시 허용된 이후 히라도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성당이 세워지고 지금도 많은 성지순례객이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 있는 역사 도시에서 하비에르 성인의 동상과 해적왕 왕직의 동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나 같은 한국인 관광객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 시각에서도 왕직은 조정의 금령을 어기고 마쓰우라 번주의 비호를 받으며 히라도에서 암약한 밀무역상인이자 해적 두목일 뿐이다. 반면 히라도에서는 왕직을 명나라가 해상무역을 봉쇄하고 서양 무역선이 활동 범위를 넓혀 간 난세(亂世)에 국제무역을 활성화한 실력자로 인식한다니 간극은 크기만 하다. 왕직과 조선은 더 깊이 얽혀 있다. 일본에 조총이 처음 들어간 것은 1543년이다. 가고시마 남쪽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인들이 상륙해 조총을 비싼 값에 팔았다. 이 조총이 임진왜란 초기 거침없는 승전을 일본에 가져다준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조총을 전해 준 포르투갈인들이 탔던 배가 왕직 세력의 해적선이었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고 한다. 을묘왜변이 호남과 제주에 대한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한양으로 북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왕직이 한반도를 해적왕국의 근거지로 삼으려 했다는 주장에는 과장이 섞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해상교역 요지로 제주의 입지는 탐을 내고도 남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을묘왜변은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하는 계기도 제공했다. 왜구는 약탈 대상 선박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전법을 구사했는데 전투력은 강하기만 했다. 결국 조선은 왜구가 배에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판옥선의 규모를 키우게 된다. 나아가 왜선이 아예 접근을 하지 못하게 원거리에서 화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훗날 이순신 장군의 승리 공식이다. 왕직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평가는 당연히 오늘날에도 완전히 엇갈린다. 실제로 대척점에 있는 두 나라의 상반된 역사 인식은 해적왕 한 사람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왕직을 보면 ‘공통의 역사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히 정치적 구호에 그칠 것 같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일본, 특히 규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히라도를 일정에 넣기를 권한다. 역설적으로 극단적 관점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 상호 이해의 작은 출발선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 동아시아 최고 풍광 품은 ‘물의 나라’[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동아시아 최고 풍광 품은 ‘물의 나라’[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천하제일 명승지…군사 요충지 충남 보령이라면 누구나 대천해수욕장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길이가 3.5㎞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은 대천을 일찍부터 서해안을 대표하는 휴양지로 명성을 날리게 했다. 보령은 서해를 방어하고 삼남에서 도성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는 수군 사령부가 있던 고장이기도 하다. 오서산에서 발원한 광천천이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오천의 충청수영성이 그것이다. 군선 정박지 선소(船所)엔 이제 형형색색 낚싯배만 가득하다. 하지만 ‘천하제일의 명승’으로 불리며 숱한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던 영보정(永保亭)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광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역사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충청수영성과 오천항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보령을 찾는다면 충청수영성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자연은 물론 역사와 문학의 즐거움도 함께 누리는 품격 높은 여행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충청수영성의 모습은 규남 하백원의 ‘해유시화첩’으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화순 선비 하백원은 1842년 보령의 다섯 선비와 더불어 일대를 유람하고 그 감상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시화첩을 펴면, 수영성 내부에는 영보정을 비롯한 건물이 들어차 있고 지금은 터만 남은 충청수영의 수호사찰 한산사(寒山寺)도 하구 너머에 보인다. 바다에는 몇 척의 배도 떠 있는데 거북선의 모습을 강조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규남은 수차의 일종인 자승차(自升車)를 고안하고, 당시 전라도관찰사 서유구에게 수리에 활용하도록 건의했다는 실학자다. 2015년 복원된 영보정에 오르면 수편의 제영시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정 같은 곳에서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운문으로 짓는 것이 제영시다. 읍취헌 박은(1479~1504)의 ‘영후정자’(營後亭子)도 그중 하나다. 읍취헌은 갑자사화로 불과 25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은 인물이다. 파직당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였던 장인 신용개를 찾아 충청수영에서 열흘 남짓 머물 때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충청수영성과 주변의 풍광을 문학성 높게 표현한 작품으로 후세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름다운 풍경들 詩로 남아 ‘영후정자’에는 수영성 주변을 택국(澤國·물의 나라)이라는 표현으로 운하의 고장인 중국 소주와 연결 짓는 대목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 나오는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떠올리게 했다. 소주의 옛 이름이 고소(姑蘇)이고 고소성은 곧 소주의 고대 성곽을 가리킨다. 소주의 한산사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 고소성은 이렇게 충청수영성의 별칭이 됐다. 옛 시인들은 수영성 앞바다도 소성강이라 불렀다. 수영성이 자리잡은 동네는 지금도 소성리다. 충청수영은 충청도수군절도사영의 줄임말이다. 충청도 수군의 총대장인 절도사가 있는 본부라는 뜻이다. 관할구역은 북쪽으로 아산만에서 남쪽으로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른다. 충청도 수역은 전라도와 경상도 평야 지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자 육로 수송으로 돌아갔지만 세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조선은 조운을 재개했다. 왜구의 가장 중요한 약탈 대상인 조운선을 보호하려면 충청도 수군을 강화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외교 1번지…조선 수군의 핵심 기지 고려시대 왜구가 날뛸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이 육군의 보조기능에 그쳤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지역 사령관인 도절제사를 두면서 수군 강화 의지를 보였다. 수군도절제사는 세종시대 수군도안무처치사로 바뀌었다가 세조시대 수군절도사라는 이름으로 정착한다. 충청수영은 ‘연려실기술’(1776년) 기록 이후 본영과 함께 소근포진, 안흥진, 평신진, 마량진, 서천포의 5개 수군진으로 운영됐다. 소근포진과 안흥진은 태안, 평신진은 서산, 마량진과 서천포는 서천에 있었다. 충청도 서해안은 고대부터 선진문물이 중국으로부터 가장 먼저 들어오는 통로였다. 백제가 웅진(공주)에 이어 사비(부여)로 잇따라 천도하면서 보령지역 포구의 역할도 전과 달라졌을 것이다. 서해로 나가는 출구에 자리잡은 오늘날의 오천 대회이포도 국제항구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학계는 본다. 고려시대 거란의 방해로 송나라를 오가는 항로가 북로에서 남로로 옮겨지면서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대회이포 서쪽 고만도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빈관이 설치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고란도에 침입해 병선 6척을 불사르는 한편 선장(船匠)을 죽이고 조선관(造船官)인 홍주부사와 결성·남포 감무를 사로잡아 갔다’는 기록이 있다. 1272년(원종 13년)의 일이다. 고란도는 그 위치나 역할로 볼 때 고만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고만도는 국가적 외교 공간이자 핵심 수군 기지였다. 더불어 고만도가 국가적 차원의 조선소 역할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도 안면도를 포함한 충청도 서해안의 소나무는 병선·조운선 및 궁궐 건축 재료로 특별히 보호됐다. 왜군 방어 해상 보루…배낚시 메카 조선왕조가 출범하자 태조는 1396년 고만도에 수군 첨사를 배치한 데 이어 곧 수군 사령 부를 대회이포로 옮긴다. 큰 바다가 가까운 고만도는 왜적이 대규모로 침입하면 방어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군도안무처치사는 보령현 서쪽 대회이포에 머무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충청수군 사령관을 당상관으로 임명한 것은 그 이전인 듯하다. 충청수군절도사는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사와 삼도수군통어사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좌·우수군과 전라좌·우수군, 충청수군을,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수군과 황해수군, 충청수군을 총괄했다. 외적이 남쪽에서 침입하면 통제사, 북쪽에서 공격하면 통어사 지휘를 받는 것이 충청수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청수사 최호가 이순신 장군에 이은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명령에 따라 투입된 칠천량에서 전사한 것도 이런 수군 체계를 보여 준다. 조선과 왜의 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이후 충청수영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운선의 안전한 항해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조운선 관리 책임은 수군절도사의 참모인 우후에게 맡겨졌다. 우후는 1669년(현종 10년)부터 조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3월부터 9월까지 아예 원산도에 상주했다. 우후에겐 세곡선을 호송하고 기상 변화에 따라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난파한 조운선의 곡식을 수습하는 역할도 주어졌다. 조운선을 통제한 관아의 흔적은 원산도의 가장 큰 포구인 진촌에 남아 있다. 19세기 들어 우후에게는 이양선을 경계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원산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 오봉산에선 외적 침입을 신속하게 충청수영에 알리던 봉수대의 유구도 확인됐다. 진촌에는 수군 우후 최창호 등을 기리는 공덕비도 남아 있다. 대천과 원산도를 잇는 보령해저터널이 2021년 개통됨에 따라 조운선 통제와 이양선 경계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됐다. 오천항은 ‘배낚시의 메카’로도 불린다. 연중 다양한 어종이 잡히지만 4~5월 주꾸미 시즌과 9~10월 갑오징어 시즌에는 주변에 교통체증이 빚어질 만큼 많은 낚시객이 몰린다. 낚시를 즐기지 않더라도 오천항에선 다양한 제철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도 잠수기 어업 본거지이기도 한 오천에서 갖가지 키조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병인박해 순교 성지…5인 성인으로 충청수영성을 둘러보고 오천항의 맛을 즐겼다면 2㎞ 남짓 떨어진 갈매못 순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로·위앵 신부, 황석두·장주기가 참수된 충청수영성의 형장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체포된 다블뤼 등은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들을 굳이 충청수영성으로 데려가 처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양한 분석이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군문효수(軍門梟首)로 바다를 이용한 천주교와의 교섭을 경고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섯 순교자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 경북도 문화유산자료 지정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 경북도 문화유산자료 지정

    포항시 소재 석조보살좌상이 경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15일 포항시는 ‘포항 임허사 석조보살좌상’이 경북도 문화유산위원회 최종 심의를 거쳐 도 지정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북구 흥해읍 임허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지역에서 산출되는 불석을 사용했다. 신체 비례와 의복 주름 표현에서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의 형태적 특징이 함께 드러난다. 복부의 W자형 주름과 안정된 하반신 비례는 조선 후기 석조불상의 전형적 양식을 보이고 있다. 보살좌상으로 조성됐다가 후대에 지장보살좌상으로 변용되면서 사찰 신앙의 변화와 존상의 활용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불상을 소장한 임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이 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포항의 예비문화유산 중 앞으로도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는 대상을 발굴해 국가유산으로 지정·승격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송상현의 기개, 지키지 못한 성… 그 언덕엔 아픔이 있다[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송상현의 기개, 지키지 못한 성… 그 언덕엔 아픔이 있다[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부산을 찾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수단은 단연 지하철이다. 부산은 오늘날에도 세계로 열린 창이듯 유사 이래 대일(對日) 국방과 외교의 최전선이었다. 임진왜란 초기 분전의 역사가 어린 부산진성, 동래성, 다대진성은 물론 외교와 교역 창구였던 초량 왜관을 부산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지하철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자갈치시장과 광복동을 지나는 지하철 1호선은 부산의 역사를 관통한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동래로 간다. 행정구역으로는 부산시 동래구다. 과거 부산은 동래도호부의 일개 면이었으니 주객이 뒤바뀐 꼴이다. 동래성을 돌아보려면 언덕길도 올라야 하는 만큼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야 한다. 동래의 재미에서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동래시장 초입 소박한 식당의 가성비 밀면에 감탄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부산 출신 친구들이 왜 동래복국을 되뇌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본격적인 동래성 탐방은 수안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지하철 1호선 동래역에서 지하철 4호선으로 갈아타고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 동래에서 가장 번화한 수안역사거리는 동래교차로라 불린다. 역사적인 이름을 가진 충렬대로와 명륜로가 이곳에서 교차한다. 충렬대로는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93위의 선열을 모신 충렬사를 지난다. 명륜로는 동래부 향교가 있는 명륜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동래성 탐방을 비극의 역사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 수안역은 성벽에서 50m 남짓 떨어진 서남쪽 해자가 있던 자리다. 해자란 성 밖에 물길을 파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물이다. 2005년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동래성 전투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왜군에 희생된 동래부 관민은 5000명에 이른다. 수안역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에선 당시 전투가 역사책 내용보다 훨씬 참혹했음을 알려 준다. 임란 초기 참혹했던 동래성 전투송상현 “죽어도 길 빌려줄 수 없다”왜군에 맞섰던 관민 5000명 희생수안역에서 7번 출구로 나선 다음 충렬대로를 따라 낙민역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조선군이 왜군에 맞섰던 동래성 남문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송상현은 전세가 기울자 당상관의 관복인 붉은색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입고는 죽음을 준비했다. 당시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는 왜군에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고 했던 송상현의 기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동래시장을 알리는 푯말을 따라 걷다 보면 동래부 관아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 동래장터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동래만세거리이기도 하다. 망미루(望美樓)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라 편액했으니 관아 정문에 해당한다. 망미루는 일제강점기 일본 상인의 개인 정원이었던 금강공원으로 뜯겨 가는 불행을 겪었다. 2014년 관아 주변으로 다시 옮겨왔지만 길이 새로 나고 건물이 들어차면서 제자리에 복원하지 못하고 지금의 옹졸한 모습이 됐다.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은 동래부의 특별한 군사적 위치를 보여 준다. 독진은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군사권을 행사했다. 이전에도 동래부에는 정3품 부사 아래 판관이 군사행정을 보좌했다. 그러다 1655년(효종 6년)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독립한 것이다. 동래독진대아문도 금강공원으로 옮겨졌다가 돌아왔다. 애초 동래부 관아는 동래도호아문, 동래독진대아문, 동헌인 충신당이 일렬로 자리잡은 당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제 송공단(宋公壇)으로 간다.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제단이다. 송상현이 죽음을 맞았다는 정원루 자리에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다. 정원(靖遠)이란 ‘멀리 있는 왜인들을 바로잡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송공단은 동래부 관아의 부속시설이었다. 하지만 지금 송공단과 관아 사이는 동래시장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시장의 개성을 살린다면 탐방객에게도, 상인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송공단은 순절한 이들 기리는 제단동래시장 건물에 막혀 관아와 단절역사적 의미 부여해 개성 살렸으면송공단을 나서 서북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으면 동래구청이 지척이다. 동래성의 서쪽 담장 내부에 해당한다. 동래구청은 옛 건물을 헐어낸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어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다. 수안역처럼 지반공사를 하다 사창(司倉)을 비롯한 관청의 부속 시설과 온돌·우물 등 생활 유적이 대거 출토됐다. 동래구청 지하에 유적전시관이 들어서 흔적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승용차로 동래관아 일대를 둘러보고 싶다면 동래구청 건물과 바로 옆 주차타워에 차를 세우기를 권한다. 관아와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면 주차할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구청 주차장은 당연히 주차요금도 큰 부담이 없다. 문제는 동래구청유적전시관이 많은 탐방객이 찾을 토·일요일과 휴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리서 찾은 손님들이 섭섭하지 않도록 동래구가 개선 방안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동래성은 고려시대 처음 쌓았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동래성을 1021년(현종 12년) 수리했고 1387년(우왕 13년)에는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래의 입지를 보면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왜구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성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최초의 축성은 발해의 옛 땅에서 발호한 동여진 해적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여진 해적은 동해안은 물론 한반도 동남부를 넘어 대마도와 일본 규슈 일대에도 진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래부 화원 변박이 1760년(영조 36년) 그린 ‘동래부 순절도’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동래성은 임란 이후 방치됐던 것을 1731년(영조 7년) 북쪽 마안산 구릉을 따라 크게 확장했다. 애초 평지성의 성격이었던 동래성에 산성의 개념을 결합해 수용 인원을 늘리고 방어력도 높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성은 성벽의 아랫부분만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반면 영조 당시 확장한 마안산 성벽은 북문과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등 상당 부분 복원이 이루어졌다. 북문에서 가까운 성벽 내부에 있는 복천동고분군의 존재는 동래가 일찍부터 금관가야 세력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복천동에서 중국과 일본의 토기가 다수 출토된 것은 동래가 가진 지정학적 성격을 상징한다. 복천동고분군은 잘 정비돼 있고 복천박물관의 전시는 국립박물관이 부럽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다. 그럼에도 넉넉한 주차장까지 모두 무료다. 동래부, 조선시대 일본 사신 관문왜란 때 현으로 강등됐다가 복귀정3품 문관 부사 임명해 외교 대응동래부는 조선 초기에는 동래현이었다. 일본 사신의 관문으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1547년(명종 2년) 도호부가 됐다. 하지만 왜란 때 가장 먼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동래는 다시 현으로 강등됐다. 하지만 1599년(선조 32년) 동래도호부로 복귀한다. 종3품 당하관을 보임하는 다른 도호부와 달리 동래부사에 정3품 문관 당상관을 임명한 것은 외교 기능 때문이었다. 일본과 관계된 내용이라면 경상감사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장계를 올렸다. 일본 사절이 왜관에 도착하면 돌아갈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보고하고, 회답을 받으면 다시 왜관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왜관은 조선 영토에 설치된 외국인 거류지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커진 국력을 업고 동래부 관리의 통제를 무시하는 일본인이 늘어난다. 급기야 1872년 일본 외교문서에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로 일본법이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듬해 실각하는 대원군 정권이 통제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행정력이 개입하면서 오히려 조선 관리의 출입이 제한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치외법권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동래성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런 치욕의 역사를 애써 잊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달리자, 말의 기운 깃들지니

    달리자, 말의 기운 깃들지니

    병오년, 말띠 해에 강렬한 말의 기운을 받으면 한 해가 술술 풀릴 것만 같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는데, 기왕이면 말의 기운을 듬뿍 받을 여행지를 가고 싶다. 그래서 찾아봤다. 말띠 해에 어울릴 곳들이다. 전북 진안 마이산말의 귀 닮은 마이산 비경 첫손 꼽을 곳은 ① 전북 진안군 마이산(馬耳山)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이 이 일대를 지나다 말(馬)의 귀(耳)를 닮았다며 마이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태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에 얽힌 전설도 있다. 고려 말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이성계가 꿈에서 국가를 잘 경영하라는 계시와 함께 금척(금으로 된 잣대)을 받는데, 그 꿈을 꾼 곳이 바로 마이산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잔치 때마다 추던 몽금척(夢金尺)이란 춤도 이성계가 마이산에서 금척을 받은 내용이 소재다. 마이봉 아래 600년 넘은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또한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진안 사람들은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 1만원권 지폐 밑그림인 일월오봉도가 마이산과 주변 산군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섯 개의 봉우리와 해, 달이 그려진 일월오봉도는 왕이 앉던 어좌 뒤 병풍 그림으로 쓰이는 등 조선 왕조의 표상으로 통했다. 조선을 세운 이와 그의 후손이 마이산과 얽힌 인연을 생각하면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산을 제대로 느끼려면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주변에 견줘 독특한 산세가 한결 도드라져서다. 부귀산에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산 중턱까지 승용차로 간 뒤, 10분 남짓 산을 오르면 된다. 진안군청 옆 성산정, 익산~포항간 고속도로 진안휴게소 전망대 등도 마이산 전망 포인트다. 전북 순창 인계면 마흘리천마가 날아오르는 ‘명당’ 마이산처럼 높은 산만 찾을 일이 아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소문난 명당 터는 외려 낮은 산에 있다. 가장 유명한 ‘말 명당’은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馬屹里)다. 특히 ② 김극뉴(1436~1496)의 묘가 포인트다. 풍수를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 천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마등공’(天馬登空)의 명당이라 불린다. 안내판이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 마을 이름인 마흘리는 ‘말 같이 우뚝 솟았다’는 뜻이다. 마을 뒷산은 두 개의 봉우리가 연달아 이뤄진 모양이다. 작은 봉우리 이름이 용마산(龍馬山)이다. 말 모양의 지형에서 명당 자리는 콧구멍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김극뉴의 묘가 바로 이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높고 낮은 봉우리 2개가 연달아 이어진 곳을 마체(馬體)라 부른다. 말안장처럼 생긴 봉우리란 뜻이다. 옛사람들은 말안장에 오르는 것을 벼슬을 한다는 의미로 여겼다. 공교롭게도 마체 앞의 콧구멍 자리에 묘를 쓰고 난 뒤 광산 김씨 집안에서 벼슬을 하는 이가 줄줄이 나왔다고 한다. 견강부회의 느낌도 있지만, 광산 김씨가 이후 국반(國班 ·전국구 양반)의 반열에 올라선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북 장수 승마레저파크승마 체험으로 말 기운 듬뿍 전북 장수는 오래전 가야 무사들이 활동했던 이른바 ‘전북 가야’의 고도다. 장수에는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곳곳에 존재한다. 가야 고분군이 발견된 곳이 마봉산(馬峰山), 발굴된 최초의 가야 유물이 말 편자다. 여기에 말 테마파크인 ③ 장수승마레저파크도 있다. 승마 체험 등 레저와 말 박물관 등의 문화 시설, 숙박 시설 등을 갖췄다. 깡통 열차와 카트 투어, 말 먹이 주기 체험 등도 즐길 수 있다. 몽골 전통가옥인 게르 형태의 펜션도 있다. 서울 중랑구 용마산도심 속에서 즐기는 일출 서울 중랑구에도 ④ 용마산이 있다. 용마(龍馬)란 용의 비늘이 온몸에 덮인 말을 가리킨다. 경북 경주시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天馬圖)처럼 하늘을 날아다닌다. 용마산 아래 면목동(面牧洞)은 조선시대 궁중의 말을 키우던 목마장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 주민들이 용마(龍馬) 한 마리 내려주십사하고 하늘에 빌던 곳이 용마산이다. 도심과 가까운 데도 산양과 마주칠 정도로 자연이 잘 보존돼 있고, 대중교통으로 접근도 수월하다. 지난해 새로 개장한 ‘용마산 스카이워크’에서 맞는 수도 서울의 일출도 장관이다. 대구 달성 마비정 벽화마을말의 슬픈 전설이 머문 곳 말의 전설이 전하는 곳도 많다. ⑤ 대구 달성군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은 거의 사람에 견줄 만큼 의인화한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이 마을 대나무 숲에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숫말 ‘비무’와 몸에서 빛과 향기가 퍼져 나오는 암말 ‘백희’가 살았다. 어느 날, 천리마를 구하기 위해 이 마을에 온 마고담이라는 장수가 백희를 비무로 착각하고는 ‘화살을 건너편 산으로 날리는데 화살보다 늦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백희가 화살을 따라잡지 못하자 마고담은 단숨에 목을 벴고, 백희의 주검을 마주한 비무는 구슬피 울며 종적을 감췄다. 훗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마고담이 정자를 지어 둘을 기렸다. 그 정자가 마비정이다. 마을을 감싼 토담을 따라 그려진 다양한 벽화가 인상적이다. 마비정 아래 인흥마을에도 볼거리가 많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남평 문씨 세거지다. 날아갈 듯한 처마의 한옥들과 돌담길, 오래된 나무들이 단박에 이방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기 고양 원당 종마목장말 따라 걷는 산책길 산책하기 좋은 곳 하나 덧붙이자. ⑥ 경기 고양시 원당 종마목장이다. 드라마 촬영지, 인증샷 명소로 알려진 곳인데, 원래는 경주마와 기수를 양성하는 한국마사회 경마교육원이다. 1997년부터 목장 일부를 산책로와 피크닉 공간으로 개방했다. 지하철 3호선 원흥역을 기준으로 차로 약 6분, 도보로 35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목장 옆은 서삼릉(사적)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잠든 능과 말이 노니는 목장이 낮은 울타리 사이로 공존하는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다.
  • [씨줄날줄] 나로도

    [씨줄날줄] 나로도

    조선왕조실록에 나로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42년(세종 24년)이다. 왜인(倭人) 9인이 나로도에 도착한 것을 발포 수군이 체포했다는 기록이다. 나흘 뒤엔 왜인 38인이 4척의 배에 나눠 탄 것을 여도 수군이 사로잡았다는 내용도 보인다. 호남 남해안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만큼 조선시대 전라도 흥양, 곧 오늘날 고흥엔 전라좌수영 핵심 수군기지가 모여 있었다. 서쪽부터 녹동항이 자리잡은 녹도진을 비롯해 발포진, 사도진, 여도진이 그것이다. 나로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발포진, 동쪽에는 사도진이 있었다. 발포진은 이순신 장군이 1580년(선조 13년) 처음 수군 지휘관이 돼 만호로 부임한 인연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도진의 지휘관은 첨사 김완이었다. 칠천량해전에서 수세에 몰리자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왜군의 포로가 됐던 인물이다. 그의 기억은 ‘용사일록’(龍蛇日錄)에 담겼다. 육지와 다리로 이어진 나로도는 내나로도와 외나로도로 이뤄졌다. 남쪽 외나로도엔 나로우주센터, 북쪽 내나로도엔 국립청소년우주센터가 있다. 수도권에서 나로우주센터에 가는 건 쉽지 않다. 남해안고속도로 고흥나들목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한다. 나로도에 우주기지를 세운 것은 남쪽일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적도에서 가장 빠른 만큼 우주선은 남쪽에서 발사할수록 궤도 진입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국토 최남단은 해남이고, 그 남쪽엔 완도가 있지만 청산도를 비롯한 섬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반면 나로도 남쪽은 거칠 것 없는 망망대해다. 나로도를 찾은 여행길엔 11개 교량으로 이뤄진 ‘섬섬길’의 절경을 즐기며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건너가도 좋겠다. 다만 그 초입 사도진과 여도진의 옛터가 흔적도 찾지 못할 만큼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첨단 과학기술과 아름다운 자연에 더해 역사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는 관광 명소로 고흥의 잠재력이 사장되지 않기를 바란다.
  • [김민식의 알 수 없어요] 배 이야기, 트럼프의 선물

    [김민식의 알 수 없어요] 배 이야기, 트럼프의 선물

    빨간 모자를 쓴 트럼프가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를 구호로 다시 워싱턴에 입성했다. 1월 대통령에 취임하더니 이제 마스가다. 마가에 조선(Ship building)의 S를 넣었다. ‘미국 조선산업을 다시 위대하게’. 그러고는 앞뒤 없이 중국 조선산업 봉쇄에 착수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로 경주에 온 트럼프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양국 정상의 짧은 인사말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조선 협력’을 한 번 언급했는데, 트럼프는 두 번이나 하더라. 장팔사모 휘두르듯 막 질러대는 트럼프로 짐작했더니 아니었다. 조선산업에 대한 트럼프의 집착. 그는 역사의 변동을 아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선사 이래 인류는 배를 만들고 선단을 유지해야만 그 문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시대와 지리에 상관하지 않고 제 문명들은 목재자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나무로 배를 건조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나일강 하구 델타의 곡물을 페니키아로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삼나무 원목을 싣고 왔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집트 문명전’에는 이집트인의 생활 도구 등이 놓여 있었다. 전시물을 살피니 삼나무 무늬결이 또렷이 보였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삼나무다. 이미 기원 전 2500년 페니키아 문명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갤리선을 건조했고, 지중해를 그들의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역사를 짚어 보면 동아시아 일대 해안가에도 삼나무 배가 무시로 출몰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규슈에서 건조된 왜구의 똑딱배도 삼나무로 만든 것이다. 삼나무는 소나무보다 훨씬 가벼우면서도 물에 잘 썩지 않아 선박 건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종이다. 다시 서구 역사 이천년을 헤아려 보자. 문명의 이동은 조선산업의 흥망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구 문명 천년을 배 이야기만으로 펼칠 수 있는 도시가 있으니 바로 베네치아다. 대서양이 개척되기 전 베네치아 공국은 동지중해를 장악했고 십자군 전쟁도 그들의 수송선이 주도했다. 베네치아에는 산업 역사에서 칠백년 장수 기업으로 기록된 국영 조선소 아스널이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배경으로도 그려졌던 그 장소는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이후 16세기 조선산업의 패권이 베네치아에서 네덜란드로 차츰 이동한 것은 오늘날 국제 간의 제조업 시프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네덜란드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산 저렴한 목재로 배를 건조하는데 베네치아 인근 지역은 수백 년 지속된 남벌로 목재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있었다. 17세기에 이르자 조선산업의 패자는 네덜란드로 그다음은 영국, 20세기엔 미국으로 이동했다. 선박의 주 소재가 목재에서 철로 바뀌며 또 대변동이 시작됐다. 이십 세기 후반은 일본, 한국, 중국 동아시아 삼국의 시대였다. 이 삼국 조선 산업의 추이는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어서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막강 한국의 조선도 최근 중국의 도전에 뒤뚱거렸다. 조선산업의 성쇠를 보며 젊은 시절 합판을 팔러 미국의 전통 조선소가 있던 볼티모어와 보스턴을 헤집고 다녔던 때가 어제처럼 떠오른다. 이미 미국 동부 지역에 그 위대한 조선소는 없었고 빅토리안 붉은 벽돌 건물, 깨진 유리창, 벽에는 바스키아가 그린 듯한 페인트 낙서만 어지러웠다. 일본 여행길에 만난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도 다르지 않았다. 세월아, 여기에서 이차대전 최대 전함 ‘무사시호’를 만들었다니. 산업의 재편이 국가와 지역 경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미국과 일본의 오랜 조선소를 보면서 실감했다. 중국의 경쟁력에 직면해 한국의 조선이 망연자실할 즈음 트럼프가 등장하더니 마스가! 조선산업 없이 글로벌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트럼프는 알고 있다. 그는 미국이 일 년에 잠수함 한 척을 겨우 건조할 때 중국은 칠백, 한국은 삼백 척을 건조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미국과 중국의 첨예한 대결 속 미국이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 손을 벌릴 곳은 울산과 거제도뿐이다. 온 자유세계가 트럼프로 인해 머리를 싸매는데 한국은 전화위복. 조선업이 있기 때문이다. 배는 문명을 낳는다. 김민식 내촌목공소 고문
  •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고창의 역사·문화와 사랑에 빠진다

    조선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고창의 역사·문화와 사랑에 빠진다

    역대 최대 규모 ‘감성형 참여 축제’조선시대 생활·문화 직접 체험 기회 답성놀이·강강술래, 관광객에 인기모든 군민 함께하는 거리 퍼레이드드론이 펼치는 ‘빛의 군무’도 장관고향사랑기부제 특별 이벤트 진행 매년 음력 9월 9일(중양절)을 전후해 개최되는 ‘고창모양성제’. 국내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전북 고창군 고창읍성(모양성·사적 145호)을 소재로 제등행진, 강강술래, 답성놀이 등 다채로운 행사와 유익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고창의 대표 축제다. 고창군은 ‘제52회 고창모양성제’가 오는 29일부터 5일간 성대하게 열린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고창모양성제는 고창읍성, 꽃정원, 전통예술체험마을, 고창그린마루 일원에서 ‘고창愛(애) 빠지다, 모양愛 물들다’를 주제로 고창의 역사와 문화에 빠지고 모양성의 정취에 자연스레 물드는 감성형 참여 축제로 꾸며진다. 올해 모양성제는 축제 공간을 더욱 넓히며 규모와 완성도를 동시에 높였다. 역사문화 중심지인 고창읍성을 비롯해 꽃정원의 가을 정취, 전통예술체험마을의 감성 체험이 어우러져 ‘한곳에서 즐기고, 오래 머무는 축제’로 진화했다. 이는 지난 반세기를 이어 온 모양성제의 노하우가 집약된 결과다. 고창군은 올해를 ‘모양성제의 완성판’으로 선언하며 콘텐츠, 공간, 운영 등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할 예정이다. ●올해 ‘고창읍성 쌓기 챌린지’ 첫선 고창모양성제는 올해 조선시대 전라도의 고창고을을 재현하며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고창읍성 축성 연도(1453년)를 딴 ‘리턴즈 1453 존’은 조선시대 생활상과 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체험형 역사 공간으로 꾸며졌다. 고창읍성의 장터 문화를 그대로 재현한 ‘모양장터’에선 전통 의복, 수공예품, 향토 음식 등을 체험하고 구매할 수 있으며 실제 주모가 관람객을 맞이해 막걸리와 안주를 권하는 조선풍 체험형 선술집인 ‘모양주막’도 운영된다. 또 ‘모양다실’에서는 차를 우리며 마음을 가다듬는 전통 다도 체험이, ‘모양도화서’에서는 ‘폭싹 속았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풍의 초상화를 남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올해 첫선을 보이는 ‘고창읍성 쌓기 챌린지’와 ‘힘쎈 사람 선발대회’는 역사적 의미를 체험형 경쟁으로 풀어내며 관람객들의 참여를 이끈다. 세대를 이어 온 답성놀이와 강강술래도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특히 “답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이라는 전설이 유명하다. 윤달 답성놀이는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와 극락왕생한다는 치성의 마음이 담겨 모양성과 함께 후대에 이어져 내려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도는 주간 답성놀이 참여자들이 모양성의 경관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룰 전망이다. 가을 달밤 한지 등을 들고 수많은 사람이 성곽길을 걷는 야간 답성놀이를 통해 가을밤의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또한 주 무대 광장에서 5개 지역농협의 농가 주부 모임 회원들이 색색의 한복을 입고 펼치는 강강술래 경연은 높고 맑은 가을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야간 경관조명, 고창의 밤 물들이다 고창읍성 성곽을 배경으로 한 드론라이트쇼와 야간 경관조명, 빛의 길을 따라 이어지는 ‘소망등 달기’가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특히 29일 개막일 밤에 예정된 650대의 드론이 펼치는 빛의 군무가 가수들의 다양한 공연, 불꽃놀이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룰 예정이다. 인기 가수의 초청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개막식 때는 가수 김희재, 박지현, 김태연의 공연, 31일에는 기리보이, DJ 박명수와 함께하는 ‘모양나이트’, 다음달 1일에는 멜로망스와 체리필터가 함께하는 ‘MZ페스타’, 폐막식인 2일에는 황가람과 최백호의 공연으로 만추의 계절을 물들인다. 패밀리존에는 에어바운스 4종, 어린이 당근마켓, 영어문화축전 등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확대되고 읍성 내부에는 어린이를 위한 친환경 놀이터와 다양한 포토존이 구성된다. 청소년을 위한 ‘MZ 퀴즈 대격돌’, ‘청춘 나빌레라’, 전국 단위 ‘청소년 댄스페스티벌’도 열린다. 야간에는 ‘강강술래 달BAM댄스’, ‘모양나이트’, ‘MZ페스타’가 연이어 펼쳐져 세대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밤을 만든다. ●무사고·무바가지·무일회용품 실천 고창읍성은 서해안으로 공격해 올 왜구들에 대비해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 당시 호남 지역과 제주도까지 19개 고을의 백성들이 힘을 합쳐 쌓았다. 아직도 1684m 성곽길 주변에는 구간별 책임 고을을 새긴 표지석이 남아 있다. 고창군은 매년 음력 9월 9일 추수가 마무리되면 읍성 광장에 모두 모여 한 해의 고생을 격려하고,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역사문화예술 축제인 모양성제를 열고 있다. 이처럼 화합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14개 읍면,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근로자까지 함께하는 거리 퍼레이드도 진행된다. 올해는 ‘우린 누군가의 히어로’를 주제로 각 읍면의 개성을 살린 의상과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1.5㎞의 도심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행렬 도중 복주머니를 관광객에게 선물하며 ‘주민 참여와 화합의 행렬’을 연출한다. ‘무사고·무바가지·무일회용품’ 3무(無) 실천을 목표로 축제장 내에서는 다회용기 사용을 확대해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읍내 상가와 연계한 동리단길 테마거리와 금토끼 야시장을 운영해 지역 소상공인의 참여를 확대하며 먹거리 부스, 직거래 장터, 한우 팜파티 등 로컬푸드 중심의 상생형 장터를 마련한다. 이를 통해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 가능한 관광 모델이자 주민과 함께 성장하는 지역형 축제로 만들어 가고 있다. ●10만원 이상 기부자 추첨해 선물 고창군은 올해 모양성제를 고향사랑기부 확산의 기폭제로 삼겠다는 포부다. ‘고향사랑기부제 특별이벤트-고향사랑愛 물들다, 모양성제愛 빠지다’는 전국 각지의 기부자들에게 모양성제 개막을 알리고 고향사랑기부제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마련됐다. 축제 개막 전인 28일까지 진행되는 이벤트에서는 고창군에 10만원 이상 기부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100명을 선정, 추가 답례품 고창마켓 1만원 상품권을 제공한다. 고창군은 모양성제 관광객 증가와 고향사랑기부제 활성화 효과를 기대한다. 고창군 관계자는 “이번 고향사랑기부제 특별이벤트가 기부자들이 고창의 대표 축제인 모양성제에 함께 참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고창군 고향사랑기부제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 심덕섭 고창군수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에 걸맞은 축제 보여 드릴 것”

    심덕섭 고창군수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에 걸맞은 축제 보여 드릴 것”

    “조선시대 3대 읍성(고창, 해미, 낙안)의 가치와 자긍심을 지켜 온 전북 고창군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진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심덕섭 고창군수는 지난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창의 모양성제는 약 580년 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창 지역에서 쌓은 모양성(고창읍성) 축성 정신을 기리는 고창군의 대표 축제”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 고창’ 브랜드에 걸맞은 다채로운 행사와 유익한 체험이 가득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창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가 인정한 7개 주요 프로그램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세계유산 고인돌을 비롯해 세계자연유산 갯벌과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농악, 세계지질공원 전북서해안권, 기록유산 무장포고문 등이다. 고창군은 이를 활용한 관광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심 군수는 “세계유산도시의 강점과 기회 요인을 살려 지방인구 소멸 시대에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지역의 변화와 발전의 터전을 만들어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창 모양성제는 대표적인 역사문화 축제다. 심 군수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것 중의 하나가 모양성제의 하이라이트인 답성놀이”라며 “답성놀이가 열리는 날에 형형색색의 고운 한복을 입고 머리에 돌을 인 채 성곽길을 도는 여인들의 모습은 아주 장관”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모양성제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 더욱 활짝 피어나 읍성에 경관조명이 켜지고 색색의 소망등에 불이 들어오면 낭만적”이라며 “많은 분이 고창 모양성제에 꼭 한번 구경 오셔서 보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한국인 맞다”…안예은, 황당 루머에 ‘분노’ 법적 대응 시사

    “한국인 맞다”…안예은, 황당 루머에 ‘분노’ 법적 대응 시사

    가수 안예은이 국적과 관련한 루머에 “한국인이 맞다”고 해명했다. 지난 16일 안예은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피드백이 늦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말도 안 되는 댓글을 계속 달길래 ‘굳이 대응해야 하나’ 하다가 오늘 아침까지 열심히 댓글 다는 것을 보고 ‘뭔가 하긴 해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라며 사진 여러 장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에는 악플러의 댓글이 담겼다. 악플러는 “일본을 너무 좋아하는 안예은의 정체성이 궁금해 안예은을 검색해 봤다. 초, 중 졸업 기록이 없네. 한국인 맞냐?”, “토착 왜구”라며 근거 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안예은은 “악의 가득 찬 댓글 사이에 제 친구의 죽음이 언급된 것을 봤다”며 “‘진짜 이건 아니다’ 하고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모아서 올렸다”라고 밝혔다. 그는 “저를 일본인으로 아시는 것 같다.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국인이 맞다”며 “일본의 음악과 만화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한국의 흥과 한,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를 알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안예은은 “왜 그렇게 토착 왜구에 집착하는지 알게 됐다. 악플러들의 엄청난 분노가 ‘순흥 안씨 토착 왜구설’이라는 인터넷발 소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며 황당함을 드러냈다. 이어 “분노가 영 가라앉지 않는다면 ‘8호 감방의 노래’를 들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보는 것을 추천한다”며 “독립운동가분들이 실제로 형무소에서 불렀던 노래 가사가 발굴돼 한국인 안예은이 멜로디를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안예은은 어린 시절 한복을 입은 사진이나 2002년 월드컵 응원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 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저보다도 소속사 쪽에서 훨씬 먼저 움직여 증거 자료를 미리 수집해줬다”며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지난 2016년 SBS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 시즌5’를 통해 데뷔한 안예은은 ‘홍연’, ‘문어의 꿈’, ‘능소화’, ‘창귀’ 등을 발매하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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