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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행정] 책장사이 우리사이 익선동에 울려퍼진 아름다운 우리소리

    [현장 행정] 책장사이 우리사이 익선동에 울려퍼진 아름다운 우리소리

    “종로구의 ‘우리소리 도서관’에서 국악을 공부하고 체험한 어린이들이 우리 국악을 아끼고 나아가 훗날 명창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김영종 서울 종로구청장은 지난 14일 종로 1·2·3·4가 동주민센터 개청식에 나와 종로구의 17번째 구립 도서관인 우리소리 도서관 개관을 선포했다. 김 구청장이 민선 5기인 2013년 지금의 부지 매입을 시작으로 종로 1·2·3·4가의 동주민센터를 신규 건립하면서 우리소리 도서관도 함께 구축한 것이다. 센터는 연면적 1981㎡ 크기에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이며, 지상 4~5층을 우리소리 도서관으로 구분해 운영한다. 국악 도서관이 자리잡은 종로 익선동은 국악 명소로 통하는 곳이다. 조선왕조 왕립 음악기관의 후신인 이왕직 아악부가 위치했던 곳으로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가 설립돼 활동했으며, 지금도 돈화문 국악당, 사단법인 한국 국악협회, 국악기 상가 등이 밀집해 국악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 곳에 국악 도서관을 만든 것은 김 구청장의 구정 철학과 관련이 있다. 김 구청장은 종로가 ‘역사 1번지’라는 점에 착안해 전통을 지키는 개발을 하면서도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실제로 종로구는 2010년 김 구청장 취임 이후, 이전에는 하나도 없던 구립 도서관을 17개 건립하면서 지역 특색을 살리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생태특화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지상은 한옥이고 지하는 장서로 이뤄진 문화특화도서관인 청운문학도서관, 종로구 최초 한옥도서관이자 전통 특화 도서관인 도담도담 한옥도서관 등이 대표적이다. 열람실 위주의 성인 중심 도서관이 아니라 지역과 어울리면서도 아이들의 정서 발달을 함께 고려한 도서관들이다. 도서관은 겉모습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도서관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이번에 개관한 우리소리 도서관의 장서 수는 2500권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40%가 국악 관련 서적이다. 국악 특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여러 국악 관련 기관에서 자료를 기증받았다. 전문가 자문을 통해 국악음원 감상 시스템도 구축했다. 향후 자료를 계속 수집하고 관리해 우리소리의 아름다움을 널리 전한다는 포부다. 김 구청장은 “종로 1·2·3·4가 동주민센터와 우리소리 도서관은 주민들과 종로를 찾는 시민들에게 전통국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양질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이자 국악로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소리로 알아보고 예술혼 나눈 두 분 명인의 삶 다뤄 뜻깊죠”

    “소리로 알아보고 예술혼 나눈 두 분 명인의 삶 다뤄 뜻깊죠”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대금 명인 박종기(1879~1941)와 김계선(1891~1943). 국악사적으로 의미 있지만 대중적으로 낯선 명인들이 현대의 관객 앞에 소환된다. 새달 3~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돈화문국악당 무대에 오르는 음악극 ‘적로’를 통해서다.●음악에 깊은 조예… 사물놀이·마당극 전수 대금 산조의 창시자로 진도 아리랑을 창작한 박종기 선생과 현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의 간판스타였던 김계선 선생은 12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진한 우정과 예술혼을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적로’는 두 명인의 외길 인생을 통해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작품이다. 국악전문 공연장인 서울돈화문국악당 개관 1주년 작품으로, 공연계에서 내로라하는 배삼식 극작가, 최우정 작곡가, 정영두 무용가가 의기투합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전통 색 짙은 이야기를 현대 무용가인 정영두가 연출을 맡은 데 대해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연출을 제안한 김정승 서울돈화문국악당 예술감독이 들려준 이유는 간명했다. “그 어떤 연출가들보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 구성진 음악을 바탕으로 배우들의 몸짓이 정교하게 어우러져야 하는 게 관건인 터라 무용가 출신인 정 연출가의 역량이 한층 두드러질 것으로 봤다.●“전통 음악과 음악가들 존경해왔다” 얼마 전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만난 정 연출가는 주변의 기대에 대해 “띠동갑 두 예술가의 음악 인생을 무겁지 않게 나만의 색깔로 풀어내겠다”고 자신했다. 현대무용 ‘푸가’에서 안무를,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에서 연출을 맡는 등 주로 현대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지만, 그의 예술인생 역시 전통음악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중학교 때부터 사물놀이와 풍물놀이를 배운 그는 1992년 극단 현장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마당극을 배웠고, 선배들로부터 춘앵무, 승무, 탈춤, 밀양범부춤 등을 전수받아 몸에 익혔다. “현대무용가로 활동하는 중에도 바람곶, 앙상블 시나위, 꽃별 등 국악 연주가들과 꾸준히 함께 작업을 해왔습니다. 제가 감히 음악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전통 음악과 음악가들을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죠. 순간 사라지는 헛헛함을 채우기 위해 서로의 소리를 알아보고 예술혼을 나눴던 두 분의 삶을 다루게 돼서 제겐 뜻깊은 작품입니다.”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는 시간 될 것” 두 명인의 이야기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됐지만 같은 예술가로서 공감하는 지점이 많았다고 한다. “작품 대사 중에 ‘한 사람은 한 소리를 잊지 못해서 저승까지 가지고 간다’는 말도 나오는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저 역시 지난 25년간 제 주위를 지켜준 동료들 덕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버티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두 명인은 뛰어난 예술가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삶도 훌륭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생을 바치기로 하고 오로지 한길만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馬聯 압둘 할림 전 국왕 별세

    馬聯 압둘 할림 전 국왕 별세

    압둘 할림 전 말레이시아 국왕이 11일 별세했다. 89세. 프리 말레이시아 투데이 등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집권 여당연합 국민전선(BN)은 이날 오후 2시 30분쯤 압둘 할림 전 국왕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사인과 사망 장소 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압둘 할림 전 국왕은 영국 옥스퍼드대 워덤칼리지를 졸업하고 1958년 말레이시아 케다주의 최고 통치자인 술탄이 된 뒤 1970∼1975년과 2011∼2016년 두 차례에 걸쳐 국왕을 역임했다. 연방제 입헌군주국인 말레이시아에선 9개 주 최고 통치자들이 돌아가면서 5년 임기의 국왕직을 맡는다. 1957년 독립 이후 말레이시아 국왕을 두 번 역임한 사례는 압둘 할림 전 국왕이 유일하다. 현 국왕은 켈란탄주의 술탄 무하마드 5세가 맡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진품이라던 덕종어보, 이완용 아들이 제작한 짝퉁

    진품이라던 덕종어보, 이완용 아들이 제작한 짝퉁

    문화재청이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았다며 공개한 ‘덕종어보(德宗御寶)’가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확인됐다. 18일 CBS노컷뉴스 취재결과에 따르면 문화재청이 2014년 미국으로부터 환수받았다고 밝힌 덕종어보는 1471년 제작된 진품이 아닌 1924년 제작된 ‘모조품’ 임이 드러났다. 덕종어보 진품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덕종어보는 1471년 조선 성종이 아버지 덕종을 추존하기 위해 만든 의례용 도장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날 “해당 덕종어보는 1471년이 아닌 1924년에 제작된 것이 맞다”며 “당시 진품이 분실되자 따로 만든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환수 직전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후 1924년자 기사를 보고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문화재청은 2014년 12월, 미국 시애틀 박물관으로부터 덕종어보를 환수 받았다고 발표했다. 문화재청은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덕종어보 반환문제를 지난 7월부터 시애틀 미술관과 직접 협의를 진행했다”며 “2015년 3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증자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반환받아 국민에게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태조사를 벌여 덕종어보가 진품인 것을 확인했다”며 재차 진품임을 강조했다. 덕종어보는 1924년에 분실됐다. 이는 1924년 당시 언론의 보도로 확인됐으나 문화재청은 해당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진품을 반환받았다고 발표한 것이다. 게다가 문화재청이 진품이라고 발표한 모조품은 1924년 진품이 분실된 직후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지시해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항구는 일제강점기 조선 왕실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던 기관 ‘이왕직’에서 예식과장으로 재직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된 바 있다. 한편 문화재청은 19일부터 10월 29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Ⅱ에서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시를 열 예정이다. 특별전시 품목인 ‘덕종 상존호 금보(德宗上尊號金寶)’, 즉 덕종어보는 2015년 환수 문화재로 명단에 올랐다. 그동안 공식석상에서 1471년 제작된 진품이라 발표한 문화재청은 이번 전시회 자료에는 이를 슬그머니 ‘1924년 재제작품’으로 명시해놓았다. 2015년 환수 당시 ‘진품’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던 데 대해선 아무런 해명도 덧붙이지 않았고 특히, 친일파가 제작한 모조품이라는 사실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문제를 제기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혜문 대표는 “2014년 문화재청이 덕종어보를 시애틀미술관으로부터 돌려받았다고 해서 분실된 진품이 반환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1924년 도난 사건 이후 제작된 모조품을 반환 받고서는 그 경위를 해명하지 않은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해당 덕종어보는 1471년이 아닌 1924년에 제작된 것이 맞다”며 “당시 진품이 분실되자 따로 만든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와함께 환수 직전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후 1924년자 기사를 보고서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이항구가 제작한 사실에 대해서도 “그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일파가 만든 모조품임에도 특별전시회 품목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해당 사실을 파악 한 직후 이번 특별전시회를 통해 바로잡으려는 생각이었다”며 다소 황당한 답변을 내놨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년 전 환수한 조선왕실 ‘덕종 어보’…이완용의 차남 지시로 만든 ‘가짜’

    2년 전 환수한 조선왕실 ‘덕종 어보’…이완용의 차남 지시로 만든 ‘가짜’

    정부가 2015년 미국 시애틀미술관으로부터 돌려받은 ‘덕종 어보’가 조선왕실의 유물이 아닌 모조품으로 드러났다.18일 노컷뉴스는 문화재청이 진품이라고 발표한 모조품은 1924년 진품이 분실된 직후 친일파 이완용의 차남인 이항구가 지시해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항구는 일제강점기 조선 왕실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던 기관 ‘이왕직’에서 예식과장으로 재직했고,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문화재청은 환수 당시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죽은 아버지 덕종(1438∼1457)을 기려 1471년 제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사태로 문화재청은 권위와 신뢰도에 큰 타격을 받게 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날 “지금 남아 있는 덕종 어보는 일제강점기에 분실됐다가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며 “조선미술품제작소에서 분실 직후 다시 제작해 종묘에 안치했다는 기사를 확인했다”고 연합뉴스를 통해 밝혔다. 이 관계자는 “어보를 받아올 당시에는 재제작품인지 몰랐다”며 “다른 어보와 비교하고 분석한 결과, 15세기 유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덕종 어보는 성종이 아버지에게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이라는 존호를 올릴 때 바친 유물이다. 그러나 1924년 종묘에 사상 초유의 절도 사건이 발생하면서 예종 어보와 함께 모두 5점이 사라졌다. 덕종 어보가 진품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난해에도 제기됐다. 당시 이정호 한국전각협회 이사는 어보에 있는 글씨가 다른 어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 이사는 어보에 새겨진 공경할 경(敬) 자에서 입 구(口) 자 부분을 날 일(日)로 처리한 것은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각에서 사용하는 서체에 장식이 많기는 하지만, 입 구 자를 절구 구(臼) 자가 아닌 날 일 자로 쓰는 경우는 없다”며 “어보에 있는 따뜻할 온(溫) 자와 보배 보(寶) 자도 서체가 이상하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의 주장에 대해 문화재청은 덕종 어보가 진품이라고 밝혔으나, 1년 만에 입장을 뒤집어 오류를 인정했다. 이 덕종 어보는 19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다시 찾은 조선왕실의 어보’에서 공개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늘의 전통, 내일을 담다

    오늘의 전통, 내일을 담다

    전통이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어 현재에도 살아 움직이며 그것을 받아들여 다음 세대에 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 무엇’이라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민족학자인 장 푸이용은 정의했다. 전통이란 더이상 과거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바탕이 되는 가치 혹은 문화 그 자체라는 얘기다.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특별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새로운 고전: 전통, 오늘의 일상’전은 우리의 전통 공예가 어떤 수용과 변화의 과정을 거쳐 시대와 교유해 왔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일찍이 만들고 아끼다’, ‘어여쁘게 다듬어 사용하다’, ‘비롯되고 이어지다’ 등 세 가지 주제로 근대부터 현대까지 100여점의 공예품을 선보이고 있다. ●영친왕 나전찬합 등 근대화 수용한 공예품 선봬 ‘일찍이 만들고 아끼다’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거친 세월을 헤치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 했던 기록과 그 흔적들을 보여 준다. 1907년 설립된 최초의 전문기술교육학교인 공업전습소, 1908년 이왕가에서 공예전통의 진작과 공예를 통한 산업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만든 한성미술품제작소, 일제강점기에 운영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일본경질도기주식회사 등에서 제작된 근대 공예품들이 대거 선보인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사용하던 나전찬합, 은제 양주잔과 주전자, 청자해태 잉크스탠드 등 조선의 마지막 장인들이 근대화를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관립 공업전습소에서 1908년 만들어진 고려요 재현품이 공개된다. 아울러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으로 알려진 고 한창기(1936~1997) 선생이 디자이너 이상철과 함께 구상한 ‘쓸모 있고 아름다운 우리 세간’도 전시된다. 아름답던 우리 식기가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로, 결 고운 우리 목제 가구가 철제 캐비닛으로 빠르게 대체되던 1970년대 전통문화의 부활을 꿈꾼 이들이 내놓았던 유기로 된 연잎칠첩반상기, 우일요의 백자 칠첩반상기, 부곡도방의 다기세트, 백동식기 등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홍정실 입사장의 촛대와 향로, 금입사굽다리접시 세트도 소개된다. 홍정실 입사장은 “공예는 우리의 시대와 삶을 증거하고 후손들에게 전할 수 있을 때에 의미가 있다”면서 “전통을 체화하는 과정에서 전통공예는 활력과 생명력을 얻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유전자를 잉태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개량된 장독대·옹기 등 일상에 스민 작품 소개 ‘어여쁘게 다듬어 사용하다’에서는 의식주와 관련된 전통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보여 준다. 우리 공예문화가 아름답게 다듬어지고 일상에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삶의 공간이 얼마나 윤택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생활에 맞게 개량된 장독대와 옹기 외에 분청이나 옻칠, 방짜유기 등 전통 공예 기술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한 다기, 피처, 스트레이너 등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 선별한 공예작품들이 소개된다. ●시대 재해석한 장인들 통해 미래 문화 가늠 ‘비롯되고 이어지다’는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고 해석한 장인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오늘을 사는 전통, 전통에서 미래를 꿈꾸는 작업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 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국내 유일의 지우산(종이우산) 장인인 윤규상의 작품, 전통의 방식으로 비단신과 가죽신을 만드는 안해표 화혜장의 작품 등 재단법인 예올이 선정한 장인 8명의 공예작품들이 전시된다. ‘문화와 창조경제’를 주제로 지난 22~2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아셈(ASEM)문화장관회의를 기념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오는 7월 17일까지 계속된다. 관람은 무료다. 광주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허윤정 거문고로 되살린 80여년 전 우리 선율

    허윤정 거문고로 되살린 80여년 전 우리 선율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이 80여년 전 우리 선율을 복원한다. 국립국악원은 새달 3일 오후 8시 풍류사랑방에서 여는 ‘목요풍류’ 무대에 허윤정 거문고 독주회 ‘아악부 현금보 평조회상’ 공연을 올린다. 허윤정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한갑득류 거문고 산조 이수자로 고악보 연구를 통해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력을 인정받은 차세대 명인이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80여년 전 일제강점기에서도 궁중 음악의 명맥을 이어 갔던 1930년대 ‘이왕직아악부’의 악보 중 ‘거문고보’에 실린 ‘평조회상’과 ‘천년만세’를 연주한다. 특히 ‘평조회상’은 현재 전해지는 악곡과는 차이점이 있다. ‘평조회상’은 국악인이라면 평생 수련하는 대표 곡 ‘영산회상’을 완전 4도 아래로 이조(移調)시킨 곡이다. 본래 ‘영산회상’은 9개의 악곡으로 구성돼 있으나 현행 ‘평조회상’은 9곡 중 ‘하현도드리’가 제외된 8개의 악곡으로 구성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80여년 전 남겨진 이왕직아악부의 현금(玄琴·거문고)보에 전해지는 하현도드리를 복원 연주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다른 악곡들도 현재 전해지는 곡들의 일부 장단과 선율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국악 애호가라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허윤정은 “이번 공연은 전통을 재발견함으로써 이 시대 국악 레퍼토리의 또 다른 확장을 의미하는 무대”라면서 “이번 무대를 통해 소중한 우리 음악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석 2만원이며 예매는 국립국악원 및 인터파크 홈페이지에서 할 수 있다. (02) 580-3300.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숙대 부지 무상사용訴 2심 승소

    서울고법 행정5부(부장 조용구)는 15일 숙명여대가 “학교에 부과된 변상금 73억 8000여만원을 취소해 달라”며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심의 취지를 유지해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에 따라 숙명여대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국유지를 계속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앞서 캠코는 숙명여대가 국유지 2만㎡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2012년 4월 ‘2007~2012년분 변상금’ 73억 8000여만원을 부과하고 앞으로 매년 14억원의 대부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숙명여대는 1938년 이왕직 장관으로부터 학교 부지로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기간 제한 없이 토지의 무상 사용을 승낙받았다며 소송을 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처럼 캠코의 처분이 위법해 취소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원심은 “숙명학원은 이왕직 장관과 기한 없이 토지를 무상 사용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고 국가는 옛 황실재산법에 따라 이 계약을 승계했다”면서 숙명여대의 손을 들어줬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일제에 독살당한 맹수들… 그날밤, 동물도 사람도 울부짖었다

    [동물박사가 들려주는 동물이야기] 일제에 독살당한 맹수들… 그날밤, 동물도 사람도 울부짖었다

    1945년 7월 25일 이왕직(李王職·일제강점기 조선 황실과 관련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 회계과장이었던 일본인 사토는 느닷없이 직원들을 죄다 불러 모아 “사람을 해칠 만한 맹수류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미군이 창경원을 폭격할 경우, 동물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라는 지령을 일본 본토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극비리에 정체불명의 극약이 배부돼 먹이에 타 동물들에게 먹였다. 여느 때처럼 맛있게 저녁을 먹은 코끼리, 사자, 호랑이, 곰, 뱀, 악어, 독수리 등 21종 38마리가 조용히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녀석들이 죽던 날 밤 창경원 일대는 최후를 고하는 맹수들의 울부짖음이 처량한 곡소리같이 울려퍼졌고, 전 직원도 함께 울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그러나 결국 창경원에는 폭격이 없었기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된 동물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지금까지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비극은 비단 한국에만 일어난 게 아니다. 타이완과 만주에 있는 동물원들도 예외일 순 없었다. 일제 또한 미국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1940년대부터 여러 동물원의 동물들도 수난을 겪게 되는 잔혹사가 있었다. 미국과 힘겹게 전쟁을 치른 일본은 패전 쪽으로 기울자 본토에 있는 우에노 동물원, 고베 동물원, 오사카 동물원 등 여러 동물원 동물에 대한 조치계획인 ‘동물원 비상조치요강’을 발동했다. 여기에는 동물원이 공습을 받을 경우에 대한 조치 방법을 적어 놓았다. 먼저 위험 정도에 따라 동물종을 4등급으로 분류했다. 곰, 대형 고양잇과 동물과 코끼리·하마·들소 같은 대형 초식동물, 늑대, 하이에나, 개코원숭이, 독사, 왕뱀류는 가장 위험한 1종이다. 이런 동물들은 청산가리, 스트리키닌 등의 극약으로 살처분하거나 총살하도록 돼 있었다. 6·25전쟁 때도 참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애끊는 노력으로 전쟁 초기인 1950년 동물들은 다행히 목숨을 지켰지만 이듬해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를 할 땐 사육사들도 빠짐없이 짐을 싸야만 했다. 그해 3월 서울 재수복 뒤 창경원 동물원 풍경에 대해 옛 창경원 사육사는 이렇게 떠올렸다. “동물사는 모두 열려 있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낙타, 사슴, 얼룩말은 머리통만 남아 있었다. 여우나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굴과 돌 틈에 끼여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창경원은 일제에 의해 ‘한국 깎아내리기’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 놀이시설을 들여놓아 놀이터로 만들고 말았다. 조선시대 궁궐인 창경궁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제대로 된 동물원을 국민들에게 안긴 계기는 1977년 확정된 ‘서울대공원 건설계획’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상황에 비춰 대공원 건설은 엄청난 규모의 사업 구상이었다. 만약 그때 서울대공원을 건설하지 않았다면, 수도권 어느 곳이라도 지금처럼 좋은 위치에 대형 복합공원을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울대공원 건설계획에 따라 창경원에서 1980년부터 소속을 서울시로 옮긴 한국 동물원 역사의 증인이 바로 지난해 말 별세한 오창영(1928~2013) 초대 서울동물원장이다. 창경원 때부터 직위는 원래 관리직이 아니라 수의관이다. 1차적으로는 동물 진료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지만 고인만큼 야생동물에 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사람은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새롭게 조성될 동물원 디자인에 대한 구상과 더불어 각 동물사의 세부설계에도 크게 기여했다. 초기 서울동물원은 400여종에 이르는 동물을 대대적으로 수입했다. 창경원 당시엔 해외종, 국내종을 통틀어 모두 130여종에 불과했다. 오 원장은 기린, 사자, 하마 등 익숙한 동물 말고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동물들에게 한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국어학자, 생물학자, 식물학자, 대학교수, 동물원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열성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미에 서식하는 ‘자이언트 앤트 이터’(Giant Ant Eater·길이 50㎝를 웃도는 혀를 가진 희귀종)에겐 ‘큰개미핥개’라는 이름을 붙였다. ‘링 테일드 리머’(Ring Tailed Lemur·긴 꼬리에 선명한 테 모양의 검은 털과 여우처럼 생긴 얼굴 모양을 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원숭이)엔 ‘꼬리여우원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로선 아주 낯설었을 법하다. 오 전 원장에 뒤이어 곧바로 동물원을 이끈 인물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텔레비전 프로 해설을 오래 진행한 고 김정만(1934~2010)씨다. 그 또한 창경원에 수의사로 발을 들여놓았다. 본격적인 영상매체 시대에 각종 프로에 출연, 대중과 친해져 동물박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동물원의 위상을 드높였다. 오 전 원장과 함께 한국동물원계의 큰별로 불린다. 동물원 수준은 그 나라의 동물복지를 가늠하는 잣대다. 이런 맥락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았다. 어느 날 동물원장 윌리엄 래플리 박사와 대화하다가 오 전 원장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래플리 원장이 수의사로 일하던 젊은 시절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해서 며칠씩이나 동물원을 안내했단다. 두꺼운 스케치북에다 직접 손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동물사 구석구석의 시설들을 낱낱이 조사했는데 세부적인 질문이 얼마나 많았던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올해로 서울대공원은 개원 30주년을 맞는다. 여러 시설의 노후화 문제를 안고 있지만 노력한 점도 적잖다. 유인원관·열대조류관을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했으며, 올해 개관을 목표로 기존 맹수사 전시 지역을 ‘백두산 호랑이 숲’과 새로운 전시개념을 도입한 ‘소동물 트위닝(twinning) 전시관’으로 바꾸는 공사도 한창이다. 앞으로 외형적인 변화뿐 아니라 가장 안전한 동물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외부 전문가 자문을 통해 관리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바꾸는 혁신을 계획하고 있다. 선진국 동물원들처럼 종 보전 센터로서의 역할에도 더욱 충실할 것이다. 좋은 동물원을 만들려면 시민들도 함께 관심을 보여야 한다. 잘못된 게 있으면 실망과 비난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할 때다. 시민들의 요구를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새삼 다진다. vetinseoul@seoul.go.kr
  • 日 “조선왕실 투구·갑옷 소장”

    日 “조선왕실 투구·갑옷 소장”

    일본 국립박물관이 과거 일제가 강탈했을 개연성이 큰 조선 왕실의 투구와 갑옷 등을 소장하고 있다고 공식 인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궤에 이어 왕실 투구와 갑옷의 환수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도미타 준 도쿄국립박물관 학예연구부 진열품 관리과장은 23일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열린 한국 시민단체와의 간담회에서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익선관(翼善冠·왕이나 세자가 평상복으로 정무를 볼 때 쓰던 관)과 투구, 갑옷 세트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측이 익선관 등을 조선 왕실의 물품이라고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이 물품이 일본 측에 기증 등의 형식으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없는 만큼 강탈되거나 불법적으로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물건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사업가 오쿠라 다케노스케가 수집한 ‘오쿠라 컬렉션’ 1100여점에 포함된 것이다. 오쿠라의 아들이 1981년 7월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한국 단체인 ‘문화재 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은 “일제는 한·일 강제합방 이후 조선 왕실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며 “이왕직이 익선관 등을 기증했거나 반출했다는 기록이 없는데도 이 물건이 오쿠라의 손을 거쳐 도쿄 국립박물관에 있는 이유는 강탈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일본 국립문화재기구 관계자는 도쿄·교토·나라·규슈 등 일본 내 4개 국립박물관에 한반도에서 유래한 문화재가 4422점이 소장돼 있다고 밝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덕수궁 분수 물개상 출생비밀 밝혀졌다

    덕수궁 분수 물개상 출생비밀 밝혀졌다

    고종 황제의 처소 겸 집무실이었던 덕수궁 석조전의 원형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석조전 앞 분수의 물개 조각상에 얽힌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발견됐다. 석조전 분수는 1938년 일제가 석조전 서쪽에 이왕가미술관(현 덕수궁미술관)을 만들 때 조성한 서양식 분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래 공개된 1920~30년대 사진자료에 지금과 다른 형태의 서양식 분수가 이미 존재했고, 물개가 아닌 거북 조각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조각상 교체 배경과 의도 등에 대해 의혹이 제기돼 왔다. 물개 조각상을 누가, 언제 제작했는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재미 큐레이터 선승혜(40·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한국·일본미술 담당)씨는 26일 석조전 분수의 물개 조각상은 193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조각공예부문 심사위원이었던 일본 도쿄미술학교 쓰다 시노부 교수가 디자인했으며, 1940년 1~8월 사이에 설치됐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선씨는 논문 ‘한국 근대의 양식(洋式)취미-석조전 정원과 쓰다 시노부의 분수조각’에서 이왕직(일제 강점기 조선의 왕족을 관리하던 직제)이 분수를 개·보수하면서 쓰다 교수에게 새 조각상을 의뢰한 공문을 입수해 공개했다. 1938년 7월16일 작성된 공문은 분수 디자인의 사진과 크기를 보내면 오사카 주조소에 제작을 의뢰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공문에는 어떤 의도로 조각상을 의뢰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거북은 왕의 도장인 어새의 손잡이에 조각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서 “거북 조각을 물개 조각으로 대체한 것이 의도적인 것인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조선 왕조를 부인하고 권위를 크게 훼손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부고] 국악계 대부 만당 이혜구옹 별세

    국악학자 만당(晩堂) 이혜구옹이 30일 낮 12시25분 노환으로 타계했다. 101세. 서울대 음대 국악과 교수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한 고인은 국악을 학문으로 정립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평생을 바쳤으며 최근까지 서울대 음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악계의 큰 어른 역할을 했다.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성제국대 영문학과 재학 시절 이왕직아악부에 드나들며 국악과 인연을 맺었고, 대학 졸업 후 1932년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취직해 국악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 연구에 뛰어들었다. 광복 후 공보부 방송국장을 거쳐 1947년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임용된 그는 1959년 서울대 음대에 국악과를 신설, 초대 과장을 지내며 국악의 대학교육 시대를 열었다. 1974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이재숙 서울대 명예교수, 권오성 한양대 명예교수, 황준연 서울대 교수, 송방송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수천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1970년대 들어 만들어진 전국 20여개 국악 대학의 교수는 모두 그의 제자여서 국악과 졸업생은 모조리 만당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 후에도 서울대 명예교수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양대학교 등의 객원 교수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954년 한국국악학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음악연구’(1957년) ‘국역 악학궤범’(1980) ‘한국음악서설’(1967) ‘한국음악논고’(1995) 등 기념비적 저서를 내놓으면서 국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고인은 국악발전에 대한 기여로 생전에 대한민국예술원상, 국민훈장, 보관문화훈장, 금관문화훈장 등을 받았고 2001년에는 방송인 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기영 여사와 창복(안과의사, 재미), 영복(사업), 대복(전 창문여중 교장), 영숙, 영혜 등 3남 2녀가 있다. 국악계는 고인의 이런 업적을 기려 장례를 국악인장으로 치른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3일 오전 8시, 영결식은 오전 10시 서초동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열린다. 장지는 천안 목천읍 도장리 선산. (02)3410-6915.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건칠반 등 근대 공예유물 4건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건칠반(乾漆盤), 은제이화문탕기(銀製李花文湯器), 은제이화문화병(銀製李花文花甁), 유제화형촛대(鍮製花形燭臺) 등 근대 공예유물 4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25일 밝혔다. 근대문화를 표상하며 조형적 완결성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해 공예사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건칠반은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도쿄미술학교의 공예분야에서 유학한 강창규(1906~1977)의 1933년 작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단절 위기에 있던 건칠공예를 현대적으로 승화한 작가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은제이화문탕기는 표면을 망치로 두드리는 단조(鍛造)기법으로 제작한 은그릇으로, 덮개와 몸통에 대한제국의 황실 문장인 오얏꽃(李花)을 새겼으며 덮개에 ‘萬壽無疆’(만수무강) 글자를 금으로 박아 넣고 꼭지를 달아 실용성을 가미했다. 은제이화문화병도 오얏꽃 무늬를 붙였으며 기계로 생산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제작하기 위해 설립된 이왕직미술품제작소가 191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유제화형촛대는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등잔걸이 형태의 유기(鍮器) 촛대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품이며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일제가 궁궐 이렇게 훼손” 설계도면 첫 공개

    “일제가 궁궐 이렇게 훼손” 설계도면 첫 공개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신축·개조 사업을 통해 창덕궁, 덕수궁, 경복궁 등 우리 전통 양식의 궁궐이 어떻게 훼손되고 변형됐는지를 보여주는 설계도면이 무더기로 공개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1906년부터 1936년까지 작성된 궁궐 관련 도면 122종과 고종 황제 홍릉 조성 등 의례 관련 19종, 가옥 33종 등 총 174종의 원본 도면을 실은 ‘근대건축도면집’을 26일 펴냈다. 이 도면들은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의 지휘 아래 있던 궁내부와 이왕직에서 작성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다. 도면에는 창덕궁 인정전 주변의 행각(行閣)을 복랑(複廊)에서 전각 형태로 고치고, 주위에 복도를 신설해 알현소로 조성하는 계획이 담겨 있다. 또 순종황 제의 침전이었던 대조전 일원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자 그 자리에 서양식 침전인 내전양관을 지으려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창경궁 전체 평면도에는 창경궁을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 등 세 영역으로 개조하는 안이 포함됐다. 한중연 윤진영 연구원은 “일제가 궁궐 신축·개조사업을 실시하면서 궁궐의 기능을 완전히 무시한 채 편의에 따라 다른 용도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고종 황제의 홍릉 조성과정을 그린 도면과 순종 황제의 국장 자료 등이 포함된 의례 관련 도면은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황제릉 조성사업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또 가옥 관련 도면은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말까지 한성부의 주거모습을 명확히 파악할 수있는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일제 강점기에 진행된 황제릉 조성사업에 관한 사료인 순종 유릉의 정면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국내 무자년 올 한 해는 국내외 인사들의 부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선 한국문학계의 두 큰 별이 졌다.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 선생이 5월5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선생은 1969년 현대문학에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94년 8월까지 원고지 4만장 분량을 탈고,한국 현대 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웠다.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 새겨진 개인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짚어냈다.폐암 진단 후에도 치료를 거부한 채 원주 토지기념관에서 기거했다.유해는 고향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기슭에 묻혔다. 4·19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청준(69)은 7월31일 역시 폐암으로 타계했다.소설 ‘서편제’와 ‘이어도’에서 토속신앙과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묘사했다.실화가 바탕인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한센인 병원에 부임한 원장과 원생들 사이 갈등과 화해를 통해 자유,구원의 상관관계를 그렸다.생전에 25권 전집이 발간된 흔치 않은 작가이기도 했다.박경리와 이청준,두 작가에게는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국악계의 큰어른 성경린은 3월5일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보유자로 1986년부터 국립국악원 사범으로 재직해 온 궁중음악계의 산 증인이었다.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한 뒤 61년 국립국악원장을 지냈다.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후신인 국립 국악고등학교 교장직도 역임했다.후학을 위해 2000년엔 관재국악상 기금으로 1억 7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대중문화계는 스캔들성 궂긴 소식이 이어졌다.톱탤런트 최진실(40)이 10월2일 스스로 생을 마감해 연예계는 물론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최씨가 탤런트 안재환 자살 및 사채업 괴담의 악플에 시달렸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성론이 일었다.그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란 CF광고 멘트로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뒤 20년 넘게 꾸준히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어린시절,매니저의 죽음,야구선수 조성민과의 이혼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사후에도 아이들 양육권과 유산상속을 놓고 조씨와 가족들간 분쟁이 이어졌다.그의 죽음으로 사이버 모욕죄 입법이 추진되기도 했다.앞서 탤런트 안재환(36)은 9월8일 서울 노원구 주택가 골목 승합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지난해 11월 개그우먼 정선희와 결혼한 새신랑이자 서글서글한 이미지로 사랑받던 터라 그의 죽음은 의문부호였다.수사 결과 40억원의 사채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로 인해 고리사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타살설 및 정선희씨의 방송진행 중단 등 후유증이 이어졌다. 해양법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독도 전문가인 박춘호(78) 국제해양법 재판관은 11월12일 작고했다.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때 한·일 어업분쟁을 보고 해양법 연구에 발을 들였다.1996년 우리에겐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엔 사법기구 고위직에 한국인으로 처음 진출했다.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된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 재판관으로 당선됐고 2005년 9년 재선에 성공했다. 재계에서는 동성제약 창업주 이선규 회장이 8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3월17일).이 회장은 한국 제약산업 1세대로 ‘정로환’ 등 토종 브랜드를 히트시킨 주인공이다. 주요 기업의 안주인들도 잇달아 타계했다.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이자 구본무 회장의 모친인 하정임(85)씨가 1월9일 타계했다.여든이 넘도록 제사상을 직접 차리며 살림을 꾸렸다.두산가(家)는 9월16일 정신적 지주 명계춘(95)씨를 잃었다.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부인이자 18살에 30명이 넘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장남 용곤(두산 명예회장),2남 용오(성지건설 회장),3남 용성(두산 회장) 등 6남1녀를 키워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 김홍조(97)옹은 9월 말일 세상을 떴다.생전 멸치어장으로 큰 돈을 벌어 아들의 정치인생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정계에선 그의 멸치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으면 정치인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을 정도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손자이자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김병관(74)씨도 2월25일 타계했다.89년부터 동아일보 사장 겸 발행인을 맡으며 동아일보를 이끌었다.서울신문 사장 출신인 원로 언론인 장기봉(81)씨도 8월28일 유명을 달리했다.65년 신아일보를 창간했지만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종간을 맞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 소설가 홍성원(71·5월1일),조선왕조 마지막 무동 김천흥(98·8월18일)옹,정진숙(96·8월22일) 을유문화사 회장,춘향가 예능보유자인 오정숙(73·7월7일) 명창,중문학 개척자이자 독립투사였던 차주환 (88·12월2일)박사,탤런트 박광정(46·12월15일) 등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 해외에선 ‘러시아의 양심’ 솔제니친(89)이 8월3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옛소련 반체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그러나 73년 옛 소련의 인권탄압을 기록한 ‘수용소 군도´ 를 내놓으면서 반역죄로 강제추방당했다.그는 16년 만인 90년에야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했다.조국에 돌아간 뒤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조국 부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지난해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했다. 32년간 철권통치를 펼치다 88년 반정부 시위로 물러난 수하르토(1월27일)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86세로 숨졌다.한때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국제투명성기구는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제보자)였던 윌리엄 마크 펠트 전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은 12월18일 95세로 사망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영원한 반항아였던 배우 폴 뉴먼(83)이 9월27일 암으로 숨졌다.‘상처뿐인 영광’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58년 마틴 리트 감독의 ‘길고 긴 여름날’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85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컬러 오브 머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 10회나 올랐다.감독으로 나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을 연출하기도 했다.지난해 6월 그의 은퇴의 변은 “기억력과 자신감,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연기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벤허’와 ‘십계’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4월5일)은 84세를 일기로 숨졌다. 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88)경은 1월11일 세상을 떠났다.53년 5월29일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후 20세기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문명의 충돌’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81) 하버드대 교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타계했다.고인은 “이념은 가고 문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을 예견한 석학이다.비교정치,민주주의 분야에서 제3의 물결 등 17권의 저서,90여편의 논문를 발표했다.그러나 그의 서구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생 로랑(71·6월1일)도 하늘나라로 떠났다.그는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정장을 도입해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혁명가였다.가브리엘 샤넬,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이은 상업화 세대 전 마지막 오트 쿠튀리에(고급맞춤복 디자이너)다.이브생 로랑은 “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상이 존재한다.”고 한 블랙예찬론자이기도 했다. 정리 이재연기자 osacl@seou.co.kr
  • [부고] 원로 국악인 성경린옹 별세

    [부고] 원로 국악인 성경린옹 별세

    원로 국악인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씨가 5일 오후 경기도 분당 보바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97세. 국립국악원장(1961년)을 지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 보유자로 지정된 고인은 1986년부터 현재까지 국립국악원 사범으로 재직했다.1911년생인 고인은 19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해 아악부원 아악수와 아악수장, 아악사를 지냈으며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국악계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예능 보유자로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던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ㆍ1909∼2007)과 고인을 궁중음악 보존이라는 한길을 걸어온 큰 어른으로 여겨왔다. 고인은 2000년 국악진흥 발전에 공이 큰 후학들을 위해 1억 700만원을 ‘관재 국악상’ 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고인은 서울시 문화상(1960)과 대한민국 문화포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8), 대한민국 모란장(1972), 은관문화훈장(1990), 방일영 국악상(1998)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조선음악 독본´ ‘조선의 아악´ ‘한국의 무용´ ‘한국음악논고´ 등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아들 탁연(미국 거주), 딸 정희(주부)씨 등 3남4녀가 있다.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3호실. 발인은 7일 오전 10시.(031)787-1503.
  • [국악인] 정악피리의 외길을 걸어 온 김관희 명인

    [국악인] 정악피리의 외길을 걸어 온 김관희 명인

    이 세상에는 다재다능하여 이 일 저 일을 두루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직 한 길 한 우물만 파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사람은 중학교부터 피리를 전공하여 졸업과 동시에 국립국악원에 들어가 56세가 되도록 오직 한길 국립국악원 연주단의 일원으로 음악의 일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대학교수로 또는 다른 단체의 연주단원으로 직장을 옮겼지만 김관희라는 피리의 명인은 군복무기간을 제외하곤 국립국악원의 테두리를 한 시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국립국악원에서도 행정직을 맡으면 과장도 하고 원장도 바라볼 수 있지만 김관희는 오직 연주단에만 몸을 담고 근무해왔다. 그 대신 연주자로서 누릴만한 자리는 거의 다 누렸다. 합주단의 목피리(피리파트의 리-더)도 해 봤고 정악단의 악장도 해봤고 지금은 지도위원으로 있다. 국내의 각종 큰 무대는 물론이요 해외 연주 경험도 엄청나게 많다. 피리 독주자로 또는 단소 독주자로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하고 태평소나 생황의 연주자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근래에는 합주의 총지휘격인 집박을 하기도 한다. 온통 음악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음악 속이 훤-하고 연주기량 또한 대단하니까 그냥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합주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주위 후배들을 부분적으로 가르쳐가며 연주생활을 하게 된다. 본인은 악장이나 지도위원쯤 되면 으레 그래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긴 전통 있는 국립국악원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김관희(金寬熙)는 1951년생으로 1964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입소하여 피리를 전공하고 1970년 졸업하면서 바로 국립국악원에 들어갔다. 근무하는 중 ‘72년 군에 입대하여 ’74년까지 군대생활을 하고 ‘75년 1월에 복직한 이래 지금까지 국립국악원에 근무하고 있다. 군대생활 3년을 빼더라도 34년을 근무한 셈이다. 김관희는 피리가 전공이어서 김태섭, 이충선, 정재국 등을 사사했다. 특히 김태섭과 정재국을 철저히 사사하여 그들이 김관희 음악의 사표가 되고 있다. 6년 동안의 교육과정에서 이주환에게 가곡, 가사, 시조도 배우고 이창배에게 민요도 배웠다. 김천흥에게는 무용을 배웠고 박동진에게는 판소리를 배웠다. 그가 배운 성악들은 그 음악을 반주하는데 더 없이 좋은 자산이 되고 무용 역시 정재의 반주에 큰 도움이 된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처럼 그가 배운 여러 가지 실기들은 다 그의 피리음악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된다. 내가 보기에 가곡은 행세를 하지 않아 그렇지 실제 노래를 불러도 훌륭히 부를 만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악기연주자들이 그냥 악기의 음악만 하지 가곡이나 무용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김관희는 그렇지 않다. 악기 하는 학생들에게 가곡, 가사, 시조 같은 성악을 가르치고 정재도 가르치는 것은 옛날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 시절부터 해 온 관행이다. 1897년 770여명이던 궁중악인이 1907년 270여명으로 줄고 1917년에는 50여명만 남게 되니 당시 궁중음악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갖게 되어 1919년부터 아악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했다. 5년 주기로 모집하여 월급을 줘가며 가르쳤는데 김천흥은 2기 졸업생이고 성경린은 3기 졸업생이다. 그들을 가르치는 함화진 같은 당시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음악생활을 위해 전래의 궁중음악뿐만 아니라 가곡, 가사, 시조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여 전교생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민간에서 전승되던 정가란 이름의 가곡, 가사, 시조가 아악부의 연주곡목이 된 것이다. 김관희는 그런 음악을 철저히 배웠다. 그리고 계속 연주하며 활동했다. 요즘 젊은 연주자들에게 가곡반주 하라고 하면 대부분 악보를 봐야한다고 말한다. 악보 없이 외워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가 많지 않다는 말이다. 가곡은 반주 또한 훌륭한 음악이어서 악보 없이 멋진 음악을 만들어야 반주도 되고 노래와 함께 멋진 음악이 되는 것인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고 있으니 안타깝다. 이런 시대가 되니 김관희 같은 진짜 전통음악을 꿰뚫어 제대로 연주하는 음악가가 더욱 귀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참고로 김관희는 가곡 전바탕이나 영산회상 전바탕 등을 모두 악보 없이 옛날 악인들처럼 연주하고 수제천이나 보허자, 낙양춘, 여민락, 도드리 종류와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 등도 다 외워 연주한다. 수십 시간의 음악이 머리속에 있는 셈이다. 김관희는 정악피리와 함께 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대취타도 전공했다.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77년 6월에 대취타의 전수생으로 들어갔는데 지금은 피리정악 및 대취타의 전수조교를 하고 있다. 정재국이 예능보유자이니 옛날의 피리 스승이 지금은 피리와 대취타의 스승이 된 것이다. 대취타는 김관희가 전공한 피리 정악과는 음악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본래 대취타는 군대들이 주둔하는 영문에서 연주하던 음악이고 임금님이 사대문 밖을 행차할 때 연주하던 음악이다. 그래서 궁중에서 연주하던 다른 음악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런데도 김관희는 그런 음악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후진들을 지도하며 전수조교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는 정재국이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대취타만의 예능이 아니라 피리정악 및 대취타의 예능이 되었기 때문에 김관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음악적 기량이나 경력과 딱 맞아 떨어지는 종목이다. 그래서 김관희의 꿈도 장차 이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고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다. 전통음악의 외길을 걸어 온 사람들에게 인간문화재 칭호를 듣는 예능보유자는 더 없이 명예롭고 보람 있는 타이틀이기에 김관희도 꼭 그 반열에 오르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 [부고]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씨 별세

    [부고]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 김천흥씨 별세

    ‘한국춤의 역사’로 불리던 심소(心韶) 김천흥씨가 18일 오전 11시50분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98세. 고인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 들어가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해금·양금·아쟁을 배웠다. 고인은 순종 황제의 50세 경축연에서 춤을 춰 ‘조선시대 마지막 무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1940년까지 이왕직아악부에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을 공부한 뒤 대한국악원 무용과장과 국립국악원 예술사 등을 지냈다. 1941년 명인 한성준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하며 민속예술에 입문한 고인은 살풀이와 탈춤 등으로 범위를 넓혀 정악과 궁중무용, 민속무용을 두루 아우르는 보기 드문 예술인이 됐다. 고인은 궁중무용의 유일한 계승자로 1970년대 후반부터 40여가지 춤의 내용을 풀이해 공연하는 등 궁중무용 재현에 힘썼다. 이화여전 음악과 강사,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한국국악협회 이사 등으로 국악계와 무용계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보유자이자 제39호 ‘처용무’ 명예보유자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고인은 서울시문화상(1960), 대한민국 예술원상(1970), 국민훈장 모란장(1973), 금관문화훈장(2001)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정운·정완씨와 딸 정순·정원·정실씨 등 2남3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는 22일 오전 10시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국악인장으로 치러진다.(02)590-2609.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대한제국 황실비사/곤도 시로스케 지음

    ‘대한제국 황실비사’(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해설, 도서출판 이마고 펴냄)는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창덕궁에서 순종의 측근으로 일한 일본인이 쓴 회고록이다. 지은이 곤도 시로스케는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대한제국 황실 궁내부와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왕직에서 관리로 지냈다. 말이 관리이지 일본이 파견한 감시자에 다름 없었다. 어쨌건 그는 당시의 경험을 1926년 ‘조선신문’에 ‘창덕궁의 15년’이란 제목으로 연재했고, 같은 해 조선신문사에서 이것을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라는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이 책에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궁내부의 업무와 주요 관료의 면모, 이토 히로부미의 ‘궁중 숙청’의 실상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 1910년 경술국치의 과정과 순종황제의 굴욕적인 일본 방문기 등도 생생히 담겨 있다. 화재로 소실된 대조전의 재건축 과정 및 이곳에 그림을 그리게 된 친일화가들의 모습,3·1독립만세운동 당시 광화문과 덕수궁의 풍경 등은 오직 이 책에서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곤도 시로스케는 순종황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한일합병은 조선민중을 위한 것이고 식민지배는 정당하다.’는 왜곡된 역사 의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저변에 깔려있는 ‘문명개화한 일본이 조선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독자들은, 옮긴이가 걱정하듯 “화가 치밀어 올라 책을 집어던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찬찬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책처럼 대한제국 황실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긴 사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무미건조한 정사라는 점에서,‘매천야록’ 같은 야사는 풍문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모를 부족함을 느꼈던 독자라면, 이 책에서 궁중의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신빙성 있는 기술을 접하는 드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고려대 사학과 출신으로 일본어 번역·통역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옮긴이 이언숙씨와 부경대 사학과 교수인 감수자 신명호 교수는 지은이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주석으로 붙여 이해를 돕고 있다.1만 3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부고]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이강덕씨 별세

    창작 국악의 선구적인 작곡가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인 이강덕(79)씨가 6일 오전 2시 별세했다. 이씨는 이왕직아악부가 마지막으로 뽑은 6기생으로 피리와 거문고를 배운 ‘우리 시대의 마지막 궁정악사’의 한 사람이다. 국립국악원 국악사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악장, 한양대 음대 강사를 거쳐 지난해 3월13일 종묘제례악의 편경 연주로 명예보유자가 됐다. 이씨는 특히 1960년대 말, 불모지와 같았던 국악계에 관현악을 중심으로 한 창작곡을 다수 만들어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준 주역이다.유족으로는 부인 김규선씨와 아들 영재(인천시청 총무과)씨 등 1남3녀가 있다.빈소는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 발인은 8일 오전 7시.(02)2002-8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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