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왕조
    2026-06-07
    검색기록 지우기
  • 반화
    2026-06-07
    검색기록 지우기
  • 포옹
    2026-06-07
    검색기록 지우기
  • 35만원
    2026-06-07
    검색기록 지우기
  • 출항
    2026-06-0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476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살펴보니 세종 압록강~두만강 확장은 가짜 4군6진 설치 일부 신도시 세운 것 현 국정·검인정교과서 ‘기재 오류’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현행 국사 교과서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역사, 즉 ‘가짜 역사’를 추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조선의 북방강역도 마찬가지다. 현행 교과서는 모두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4군 6진을 개척해서 조선의 북방강역이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고 쓰고 있다. 세종 전까지 조선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까지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박근혜 정권 때 만든 중학교 국정교과서는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에게 4군6진을 설치하게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의 주민을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영토를 개척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현행 검인정교과서도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삼화출판사)는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출판사만이 아니라 모든 검인정 교과서가 마찬가지다. 교과서 편찬 기준이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조선의 북방강역에 대한 1차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은 조선의 북방강역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태조실록’은 태조 4년(1395) 12월 14일자에서 “의주(義州)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공주(孔州)에서 북쪽으로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읍(邑)을 설치하고 진(鎭)을 두어…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라고 쓰고 있다. 태조 이성계 때 이미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읍과 진을 두어 다스렸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 때 압록강~두만강까지 국경을 확장했다는 현재의 교과서 내용에 대해 ‘가짜 역사’라고 수없이 말하고 있다. 세종 때 최윤덕이 개척한 4군의 끝이 여연(閭延)이고 김종서가 확장한 6진의 끝이 경원(鏡源)이다. 그러니 현행 교과서의 논리대로라면 최윤덕, 김종서의 북방 개척 이전까지 여연과 경원은 조선의 강역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태조실록’ 4년 12월조는 여연이 이미 태조 이성계 때 조선 강역이었다고 쓰고 있고 같은 ‘태조실록’ 재위 7년(1398) 2월 3일자도 ‘경원부는 부사(府使) 1명을 두고 영사(令史) 10명, 사령 20명 등을 둔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원은 태조 이성계 때부터 이미 부사를 파견해 다스리던 조선 강역이었다. ‘태조실록’ 7년(1398) 2월 16일자는 동북면도선무사 정도전이 경원부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는 등 태조 때 이미 조선 강역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태종과 영락제의 국경조약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북방 경계가 압록강~두만강도 아니라는 점이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1년(1392) 7월 28일 즉위 조서에서 “국호는 그전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儀章)과 법제(法制)는 한결같이 고려의 고사(故事)에 의거한다”고 말했다. 고려의 의장과 법제를 계승했다는 말은 고려의 강역도 계승했다는 뜻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서 정종·태종·세종 등은 모두 고려의 북방 강역이 현재의 요령(遼寧)성 심양(瀋陽) 남쪽 철령(鐵嶺)과 흑룡강(黑龍江)성 목단강(牧丹江)시 남쪽 공험진까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태종은 이 국경선을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다시 확인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4년(1404) 5월 19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과 왕가인(王可仁)을 명나라 수도 남경에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국경선 획정을 다시 요구했다. “밝게 살피건대(照得),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의 주(州)인데,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태종은 명나라 영락제에게 공험진 남쪽 땅에 대해서 설명했다. 고려 고종 45년(1258) 12월 고려의 반역자 조휘와 탁청 등이 압록강 북쪽~두만강 북쪽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자 원나라에서 그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지만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공험진 이남을 본국(本國·고려)에 다시 소속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후 명나라가 심양 남쪽 지금의 진상둔진(陳相屯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자 고려 우왕이 재위 14년(1388) 밀직제학 박의중(朴宜中)을 명 태조 주원장에게 보내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다시 속하게 하고 공험진부터 철령까지는 본국(고려)에 다시 속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명 태조 주원장이 “철령 때문에 왕국(고려)에서 말이 있다”면서 철령~공험진까지를 그대로 고려 강역으로 인정했다는 설명이었다. 태종은 김첨에게 압록강 북쪽 철령과 두만강 북쪽 공험진이 본국(本國·고려 및 조선) 강역이라는 시말을 자세히 적은 국서와 지도까지 첨부해서 영락제에게 보냈다. ●여진족들의 귀속권 문제는 압록강 북쪽~두만강 북쪽에 사는 여진족들의 귀속 문제였다. 여진족들이 세운 금(金)나라가 원나라에 붕괴된 이후 국가가 없었으므로 명나라에서 여진족들도 사는 이 지역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삼산(參散) 천호(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 등 여진족 10처 인원(十處人員)이 살고 있었다. 처(處)란 여진족들로 구성된 집단 거주지역을 뜻한다. 이역리불화는 이화영(李和英)이란 조선 이름도 갖고 있었는데 조선 개국 1등 공신이자 이성계의 의형제였던 이지란(李之蘭)의 아들이었다. 태종은 이 여진족들은 조선에서 벼슬도 하고 부역도 바치는 조선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은 비록 여진 인민의 핏줄이지만 본국 땅에 와서 산 연대가 오래고…또 본국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賦役)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의 남은 인민들을 전처럼 본국(本國·조선)에서 관할하게 하시면 일국이 크게 다행입니다.” 국서와 지도를 가지고 명나라에 갔던 김첨이 돌아온 것은 다섯 달 정도 후인 태종 4년(1404) 10월 1일이었다. 김첨은 영락제의 칙서를 받아 돌아왔다. “상주(上奏)하여 말한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을 살펴보고 청하는 것을 윤허한다. 그래서 칙유한다.”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 인원이 사는 요동땅이 조선 강역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선도 철령과 공험진이라는 사실이 영락제에 의해 재차 확인되었다. 태종은 조선과 명의 국경선이 심양 남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로 확정된 사실을 크게 기뻐하고 계품사 김첨에게 전지(田地) 15결을 하사했다.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재위 8년(1426) 4월 근정전에서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유생들에게 내린 책문(策問·논술형 과거)에서 “공험진 이남은 나라의 강역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서 강역을 지켜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 서술하라고 명령했다. 세종 때에야 조선의 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는 현행 국정·검인정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라면 100% 낙방했을 것이다. ‘세종실록’ 21년(1439) 3월 6일자에 명 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본국(조선)에 소속된다”고 했다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 북쪽 철령부터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까지였다. 최윤덕, 김종서 등은 조선 강역 내에 일부 신도시를 세운 것이지 강역을 확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이케우치 히로시가 조작한 고려, 조선의 북방강역을 교과서로 가르치는 나라, 역사학자가 아니라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도 크게 부끄러워하고 분노해야 할 일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교육부 등 당국자들의 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 [퍼블릭 뷰] 피라미드의 기적처럼… 믿음·열정이 국가 난제 풀 열쇠다

    [퍼블릭 뷰] 피라미드의 기적처럼… 믿음·열정이 국가 난제 풀 열쇠다

    고대문명이 남긴 7대 불가사의 중 으뜸은 이집트 피라미드다. 카이로 인근 기자에 우뚝 서 있는 이집트 고왕조 시대 쿠푸왕 피라미드는 4600년 전(BC 2560년경) 세워진 것이다. 그 옛날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건축물을 세웠는지 알 수가 없다. 오죽하면 외계인이 세웠다는 주장까지 있을까.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수만 명의 노동자가 10여년간에 걸친 작업을 통하여 피라미드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피라미드 인근에서 당시 노동자들에게 지급한 급료(주로 소금과 맥주 등 현물)가 빼곡하게 기재된 석판이 발견되어 고고학자들의 설명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수만명이 10여년간 쌓아올린 피라미드의 기적 이집트 남부 룩소르에 있는 신왕조(BC 1567~BC 332) 파라오(왕) 지하 무덤은 피라미드와 아주 다른 모습이다. 신왕조 시절 파라오는 왕위에 오르면 돌산에 터널을 뚫고 자신이 사후에 묻히게 될 무덤부터 건설했다. 도굴꾼들의 약탈이 빈번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지하에 묘소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간 발굴된 60여 개의 파라오 지하무덤은 그 규모와 내부구조, 치장의 수준이 모두 상이하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거나, 오래 집권한 파라오일수록 규모가 크고 화려한 지하 무덤을 보유한다. 반대로 재위 기간이 짧은 파라오의 무덤은 작고 내부도 초라하다. 고왕조 피라미드는 신왕조 지하 무덤보다 1000년 이상 앞서 세워진 것인데도 그 웅장함은 물론건축학적 가치가 크게 앞선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룩소르 지하 무덤 내부는 예외 없이 그림과 상형문자로 채색되어 있음에 반하여 피라미드의 석실과 내부 회랑에는 그림이나 상형문자가 전혀 없다. 왜 그럴까? 어느 이집트 전문가는 룩소르 파라오 무덤의 빼곡한 그림과 상형문자를 커닝 페이퍼라고 설명한다. 고왕조의 파라오는 신과 동급이었다. 그들은 사후에 신과 만나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1000여년 후 신왕조의 파라오는 신보다 인간에 훨씬 가까웠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입구에서 만날 신과의 면접에서 자칫 실수할까봐 답변에 참고하고자 자신의 치적을 상세히 기록한 커닝 페이퍼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열정을 낳고 열정을 기적을 낳는다. 피라미드는 현대과학으로도 풀기 어려운 불가사의이지만, 신이 살 집을 짓는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열정을 다하여 피라미드라는 기적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가 신이라는 믿음을 잃은 후대 이집트인들은 기적을 창조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심지어 지하무덤을 만드는 초기에 파라오가 사망하여 중도에 대충 덮어 버린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마지못해 하는 일의 결과는 부실하기 그지없다. # 한국 경제발전·민주화 ‘할 수 있다’ 투지로 이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는 신앙에 버금가는 믿음과 열정의 산물이다. 불과 수십 년 전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불굴의 투지로 불과 수십 년 만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성취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기자 피라미드의 주인인 쿠푸왕과 동시대를 살았던 단군도 오늘날 한국의 모습을 본다면 후손들을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 남북 관계는 중대기로에 서 있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또한 인구 고령화와 신생아 감소, 빈부격차와 각종 사회갈등의 심화, 환경문제 등 해결해야 할 국내 문제도 산적해 있다.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 # 새 시련의 시대… 다시 한번 믿음·열정 필요한 때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열정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모두를 열광하게 했던 동계올림픽 국가대표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성원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국가적 난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이 다시 기적을 이룬다는 믿음을 갖고 무한한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모두가 적극 성원했으면 한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내륙 위치한 남원, 곳곳에 왜구가 할퀸 상흔 … 황산엔 승전의 역사

    전북 남원 시내에서 순창으로 방향을 잡아 시내를 막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타난다. 만복사가 있던 자리다. ‘춘향가’의 몇몇 고전소설 판본에는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관아로 행차하기에 앞서 만복사를 찾아 노승들이 춘향을 위해 재를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은 김연수제 판소리 ‘춘향가’에도 있다. 춘향을 월매가 만복사에 시주하고 불공을 드린 공덕으로 낳은 자식으로 그리고 있다.잘 알려진 대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금오신화’의 한 편으로 ‘만복사저포기’를 남겼다. 저포(樗浦)는 윷놀이다.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내기를 해서 이긴 다음 아름다운 처자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같은 사흘을 지내고는 헤어진다. 이 처자는 왜구에 죽은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줄거리다.소설 속 여주인공이 부처님에게 바친 축원문에는 당시 사정이 담겨 있다. ‘지난번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왜적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노략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쳤습니다.…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흩어졌습니다.’지금 만복사에 가면 텅 빈 마당에서 높이 1.6m의 당당한 석제 불좌(佛座)를 만날 수 있다. 소설에서도 양생이 불좌 뒤에 숨어 아름다운 처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이 불좌가 아닐까 싶다. 매월당과 시대를 초월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최척전’을 지은 현곡 조위한(1567∼1649)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 휘하에서 종군한 인물이다. 이 소설은 최척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여성 옥영의 사랑이야기를 뼈대로 정유재란 당시 남원이 왜군에 함락됨에 따라 가족이 붙들려 가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과 기적적인 재회를 그렸다. 소설 속에서 최척은 만복사에서 가까운 동네에 산다. ‘춘향전’이 조선 후기 남원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면 ‘만복사저포기’와 ‘최척전’은 각각 조선 초기와 중기 왜적의 침입에 따른 살육과 파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남원은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산 기슭이다. 왜구의 세력은 단순한 해적 수준을 크게 넘어섰다. ‘만복사저포기’가 묘사한 대로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극성을 부렸다. 특히 14세기 후반기 피해가 가장 커서 고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계는 고려시대 왜구의 발생을 크게 두 시기로 나누고 있다. 1223년 현재의 김해인 금주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1265년까지 10차례 이상 침입했는데, 대부분 선박 2~3척 규모였다. 왜구는 1350년부터 연안뿐 아니라 내륙에도 출몰한다. 해안 조창에서 걷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이 공격 목표가 되자, 고려가 세곡 운송의 상당 부분을 육운(陸運)으로 전환한 것이 이유의 하나가 됐다. 대형 선단을 이룬 왜구는 개경이 지척인 강화 교동도에도 출몰했고, 조정은 천도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왜구는 태조가 즉위한 뒤 5년 동안에만 53차례나 침입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시대 왜구의 남원 침입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척이 진포에 배를 매고 하삼도에 들어와 연해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선은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신우’라 했다. 왜구가 충청·전라·경상도를 휩쓴 참상은 ‘만복사저포기’와 매우 닮아 있다. 당시 고려는 금강 하구 진포에 정박한 왜구의 선단을 최무선 장군의 화포로 모두 불사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퇴로를 잃은 왜구는 지금의 충북 옥천과 경북 상주, 경남 함양을 떠돌며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한다. 이어 남원으로 몰려들어 운봉 인월역 황산에 진을 친 왜구를 당시 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섬멸한 것이 황산대첩이다. 황산대첩비는 1577년(선조 10) 이 싸움의 현장에 세운 것이다. 만복사는 남원 시내 서쪽에 자리잡고 있지만, 황산대첩비를 찾으려면 자동차를 타고 시내에서 동쪽으로 20분쯤 달려야 한다. 이성계가 어린 두목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끈 왜구를 무찌른 현장이다. 당시 지명 인월(印月)은 이후 인월(引月)로 바뀌었다. 부처의 교화가 세상 곳곳에 비친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에서 따온 듯한 불교적 이름이 황산대첩 당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두운 밤 보름달을 끌어올려 왜구를 물리쳤다는 설화 속 의미로 대체됐다. 황산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수난을 겪는다. 조선총독부는 ‘학술상 사료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이라면서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라고 했다. 결국 1945년 1월 폭파됐고, 지금의 비석은 1957년 복원한 것이다. 그러니 대첩비는 받침돌과 지붕돌만 옛것이다. 하지만 파비각(破碑閣)에 비석 조각이 남아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훨씬 커졌다. 1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이성계는 대첩 이듬해 함께 싸운 원수와 종사관들의 이름을 이곳 바위에 새겼다. 일제는 이 글씨도 정으로 쪼아내 지금은 알아볼 수가 없다. 황산에 승전의 역사가 있다면 남원 시내에는 패전의 역사가 곳곳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곡창 호남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를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한 왜군은 정유재란을 벌이면서 전라도를 먼저 점령하고 북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이끈 왜군 5만 6000명은 1597년 8월 13일 남원을 공격했다. 남원성은 전라 병사 이복남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000명 군사가 지키고 있었다. 남원 백성들까지 모두 1만명이 합심해 싸웠지만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하고 1612년(광해군 4) 사당을 세웠다. 지금의 만인의총은 옛 남원역 근처에 있던 것을 1964년 옮긴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을 남원성의 흔적은 시내에서 만인의총으로 가는 중간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옛 남원읍성의 서북쪽 모서리에 해당한다. 시내 남문로 골목 안에 있는 관왕묘도 왜란의 흔적이다. 남원싸움 이듬해 명나라 장수 유정은 대군을 이끌고 왔는데, 1599년 자신들의 수호신인 관우의 사당을 지었다. 성 동문 밖에 있던 것을 174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관왕묘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담 너머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사설] 5번째 전직 대통령 검찰 소환, 국민은 참담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어제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됐다. 그는 검찰 청사의 포토라인에 서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면서 “저는 오늘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참담한 것은 전직 대통령이 또다시 검찰에 불려 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국민이었다. 그는 전두환·노태우·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검찰 조사를 받는 다섯 번째 전직 대통령이 됐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는 현실은 그 자체가 헌정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전 대통령은 검찰에 출두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말을 아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도 밝혔다. 내심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이라는 주장을 펴고 싶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조사가 있었던 만큼 얼마간의 정치보복 논란은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양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그리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검찰 출두 과정에서 그 흔한 지지자들의 시위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상징적이다. 이른바 권력형 비리를 사법처리하는 과정에 정치적 의지가 개입됐는지 아닌지는 누구보다 국민이 더 잘 판단한다. 지금 이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범죄 혐의는 뇌물수수, 직권남용, 횡령·배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등 20개 남짓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잘못된 관행도 없지 않음을 국민은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일국의 통치자가 저질렀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혐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매관매직이 실제 이루어진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난다면 정치보복 주장에 손을 들어줄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전 대통령의 경우에도 법원의 확정 판결 이전까지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럴수록 이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 최대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전 대통령 진영은 검찰 수사 결과를 재판에서 뒤집을 수 있는 법리(法理)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사실을 그대로 밝혀 법원이 아니라 국민의 판단을 먼저 구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것이 전직 대통령이 취해야 마땅한 자세라고 본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다만 바라는 것은 역사에서 이번 일로 마지막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온 국민의 바람이기도 하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통치권의 남용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낳는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나아가 이 전 대통령의 사례는 취임 이후는 물론 이전에도 극도의 도덕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결국 우리 정치 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 [해외에서 온 편지] 캐나다 주류 된 亞이민자들, 뿌리는 하나로 통한다

    [해외에서 온 편지] 캐나다 주류 된 亞이민자들, 뿌리는 하나로 통한다

    믿기 어려운 다양성의 나라 인도 근무를 거쳐, 카라쿰(검은 사막)으로 덮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3년 근무를 마치고, 지난해 12월 북미 대륙을 미국과 공유하고 있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연안 토론토에 부임했다.인도 근무 시 인도 아요디아국 공주가 한반도로 가서 가야국 김수로 왕과 결혼하고 김해 허(許)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들었다. 현재 김해 허(許)씨 자손들이 매년 인도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 근무 시에는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흉노 왕자가 중국에 볼모로 가서 김(金)씨의 시조가 되고, 그 후손들이 한반도로 가서 신라에서 박(朴)씨와 석(昔)씨에 이어 김(金)씨 왕조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반도에 뿌리내렸던 몽골·투르크·인도계 그러던 중 2016년 초에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큰 지진이 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뜬금없이 충청도의 곰나루(熊津)가 연상되었고, 남해안 진도에서 출발한 해류가 도착하는 일본 가고시마 인근에 구마모토가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오래전 학교에서 ‘곰’(熊)의 아들 단군의 자손이 만주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계속 남하하여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백제를 건국하고, 일부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이주하였다는 역사를 배운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12월에 부임한 캐나다는 인구가 3688만명인 나라로서, 국내총생산(GDP)이 1조 6400만 달러를 상회하고 경제규모는 세계 10위이며, 풍부한 천연자원과 고부가가치의 제조업이 경제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키워가면서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캐나다 전체에 24만명의 재외동포가, 캐나다의 경제·문화 중심지인 토론토에는 재외동포 12만명이 정착하고 있다. 캐나다는 과거 16세기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최초로 진출하였고, 18세기에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함으로써 영국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이후 캐나다 개발을 위해 영국은 중국인과 인도인을 이주시켰으며, 계속해서 유럽과 아시아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였다. 현재 영국계와 프랑스계가 다수이나, 중국계 및 인도계가 100만명이 넘으며, 이탈리아와 우크라이나 및 필리핀 이민자도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 미국과 같이 캐나다도 국가를 유지하고 부강하게 하는 데 이민의 기여가 큰 나라이다. 캐나다 부임 이후, 한인 동포들을 자주 만나 곰의 자손 몽골계, 투르크계 김(金)씨, 인도계 허(許)씨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 모두가 이주민으로서 정착하여 그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에 기초해 몽골계는 고구려와 백제를 세우고, 투르크계는 신라에서 김씨 왕조를 열고 통일신라 및 고려에서도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인도계는 김해 김(金)씨와 함께 가야의 연립정권을 형성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 24만명 후손들도 한·캐나다 경협 등 기여 기대 몽골계, 투르크계, 인도계의 후손들이 이제는 캐나다에 와 있다. 캐나다 인구 3688만명 중 24만명밖에 안되지만, 과거 조상이 그랬듯이, 이주 성공 사례를 많이 만들고 캐나다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훌륭한 캐나다의 일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과 캐나다 간의 통상 증진은 물론 각종 경제협력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캐나다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노력에 부응하여, 한반도의 평화정착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는 데 과거 이주 성공사례의 후손들이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해 본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전하, 기침(起寢)하셨습니까?…창덕궁(昌德宮)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전하, 기침(起寢)하셨습니까?…창덕궁(昌德宮)

    “임란 전 임금들은 권위적인 경복궁보다 훨씬 인간적인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창덕궁을 선호하여 창덕궁에 기거하는 일이 많았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조선의 실질적인 법궁(法宮)은 아마도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昌德宮)이었다고 하여도 별다른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만큼 임란 이후 왕족들의 각별한 처소로 사랑받은 곳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조선의 색깔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곳,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옛이야기 가득한 한양도성 옛 궁궐, 창덕궁으로 가 보자.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고도 불리운 창덕궁(昌德宮)은 각종 전각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경복궁과는 달리 무언가 허전하면서도 바람길 잘 통하는 여유가 돋보이는 곳이다. 비록 역사의 풍화 속에서 군데군데 이가 빠진 주춧돌 몇 개는 짝이 안 맞더라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집터임에는 분명하다.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생을 마감한 순종황제의 비, 순정효황후 윤비를 비롯하여 영왕 이은(李垠), 영왕비 이방자 여사,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인 덕혜옹주가 눈감은 1989년까지 조선 왕실 마지막 삶의 안식처로서 그 역할 단단히 한 곳이 바로 창덕궁이었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창덕궁은 애당초 임금들의 거처로 사용될 운명을 안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태종 5년(1405), 경복궁에 뒤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 창덕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재위 3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뒤 이듬해 정도전의 주도로 경복궁을 세운다. 그러나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제 손으로 이복동생의 목을 베었던 태종으로서는 경복궁의 지세(地勢)는 가히 반갑지는 않았다. 더구나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혼이 남아 있는 경복궁에서의 잠자리는 결코 편할 리 없었으리라. 이에 태종 11년(1411)에는 진선문, 금천교, 돈화문 등 여러 전각이 들어서면서 궁궐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이후 임란이후 광해군 원년(1609)에 인정전이 복구되면서 실제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에서 모든 정사를 맡아 보게 되었다. 1907년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한 후 내처 황궁으로서의 공식적인 위상도 지니게 된다. 후일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도 등록이 될 만큼 조선 왕실의 대표 처소로 자리매김하여 지금까지 내려 오고 있다. 창덕궁(昌德宮)에서의 발걸음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흘러가는 맛이 분명 있다. 북악산 응봉 산자락에 포근히 기대어 만든 전각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눈으로라도 느끼게 해준다. 현재 창덕궁(昌德宮)에는 1609년에 재건된 돈화문을 비롯하여, 궐내각사, 금천교, 국보 225호로 지정된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을 비롯하여 왕실의 거주 공간이었던 낙선재 등이 관람객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왕실의 비밀 정원이었던 후원도 방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부용지, 불로문과 옥류천 등 한양 도성 내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뒤뜰도 만날 수 있다. <창덕궁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너무나 당연하다. 경복궁과 더불어 조선의 실질적인 법궁이었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과 천천히 봄나들이 삼아 인사동 길을 따라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지하철 :종로3가역(1,3,5호선) 6번출구에서 도보로 10분 / 안국역(3호선)에서 3번출구에서 도보로 5분. 버스 : 7025,109,151,162,171,172,272,601 4. 감탄하는 점은? - 낙선재의 소소한 아름다움. 넓직한 길,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경복궁보다 관람객들이 많지 않은 편. 평일 나들이를 권유. 6. 꼭 봐야할 전각은? - 낙선재, 인정전, 돈화문, 후원 7. 관람 예상 소요시간은? - 여유를 가지고 돌아본다면 2시간 남짓. 8. 홈페이지 주소는? - www.cdg.go.kr/default.js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덕수궁, 경복궁, 창경궁, 종묘, 운현궁, 청와대, 조계사, 삼청동 거리, 인사동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창덕궁 나들이의 핵심은 후원 방문이다.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관람 신청을 하기를. 반드시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권유. 주차 시설이 주변에도 찾기 힘들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이경형 칼럼] 비핵화 입구 찾았다

    [이경형 칼럼] 비핵화 입구 찾았다

    북핵 결빙이 경칩(6일)을 지나자 풀릴 기미가 보인다. 그동안 미로를 헤맸다. 북한의 비핵화로 가는 길의 입구를 찾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단을 맞아 북·미 대화의 ‘통 큰’ 단초를 제시했다. “미국과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 “한ㆍ미 연합훈련의 예년 수준 진행은 이해한다”, “대화가 지속되는 동안 핵실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는 없다”고 밝혔다. 북·미 대화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비핵화 대화는 아니더라도 미국은 북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해 곧 테이블에 마주 앉을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도 “아주 긍정적”이라며 “지켜보겠다”고 했다. 정의용 특사 단장은 “미국에 전달할 추가적인 북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통남봉미’(通南封美)를 견지해 왔던 북한이 ‘통남통미’(通南通美)를 위해 미측에 ‘진정성 있는 징표’를 제시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남북 간에도 화해의 봄꽃이 필 것 같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4월 말 판문점 남측 구역인 ‘평화의집’에서 정상회담을 갖기로 하고, 그 이전에 정상 간 핫라인을 가동키로 했다. 김 위원장이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도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을 확약했다고 한다. 과거 북한의 수없는 대남 도발을 돌이켜 볼 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구심이 가셔지지 않는다. 북한이 세습 3대의 봉건 왕조이긴 하지만 선대와는 여러 모로 리더십 스타일이 다른 ‘젊은 지도자’의 언급이니만치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다. 앞으로 북·미 대화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속도감이다. 북핵을 둘러싼 지난 25년간의 북·미 협상 실패 원인은 ‘시간 끌기’였다. 북한이 은밀한 핵 개발을 위해 기만전술을 구사한 탓도 있지만, 북핵 개발의 위험을 저평가했던 미 역대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로 방치한 탓이 크다. 김 위원장은 “체제 안전이 보장되면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비핵화의 로드맵은 결국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 장치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북한이 핵·미사일의 추가 도발을 중단하면 미국은 북·미 대화를 통해 핵 동결을 확인하는 핵 시설의 사찰과 단계적인 불능화에 이어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의 폐기로 가는 로드맵을 만들 것이다. 미국은 각 단계마다 북한의 조치에 상응한 ‘선물’을 제공해야 하는데 과연 이 준비가 돼 있는지는 미지수다. 북한이 선호하는 선물 꾸러미에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축소나 연기, 특히 항공모함,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감축 혹은 유예,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과 제재의 단계적 해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불가침조약, 북·미 수교, 주한미군 철수 등이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동북아 안보 유지의 핵심 요소다. 북·미 국교가 수립되면 북한한테도 결코 불리하지 않다. ‘선물’ 하나하나가 동북아 정세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된다. 그렇다고 ‘선물’을 고르면서 상대방에게 약을 올려 세월을 허송하면 비핵화의 출구는 끝내 찾지 못할 것이다. 김 위원장이 미국더러 한 “대화 상대자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말의 함의를 새겨야 한다. 남북 관계 진전과 비핵화 프로세스는 같은 속도로 가야 한다. 남북 화해 협력 무드가 너무 빨리 달아오르면 한·미 공조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키로 한 것은 남북 관계의 급진전을 예고하는 것이다. 남한의 예술단 등의 평양 답방이 이뤄지면 민간단체의 방북 러시, 인도적 지원, 사회문화적 교류가 봇물 터지듯 할 것이다. 미 행정부는 북·미 대화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것이다. 미 정보기관 수장들도 회의적이다. 북한의 분명한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기까지는 유엔안보리 제재 및 미국의 독자 제재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제재의 지속 여부와 단계적 완화 방법을 싸고 한·미 간에 이견을 노출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의 중매자뿐 아니라 비핵화 로드맵 협상의 페이스메이커 역할도 해내야 한다. khlee@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고려는 함경남도 남부까지?… 총독부 학설로 끌어내린 2000리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고려는 함경남도 남부까지?… 총독부 학설로 끌어내린 2000리

    역사학은 사료로 말하는 학문이다. 검경의 수사나 법원의 재판이 증거로 결정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료는 크게 1차 사료와 2차 사료로 나눈다. 1차 사료가 당시에 쓴 직접 증거라면 2차 사료는 1차 사료를 가지고 쓴 저술 등으로서 간접 증거다. 당연히 1차 사료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고려사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가 기본적인 1차 사료다. 고려와 같은 시대였던 나라들의 정사(正史)인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 등도 1차 사료다. 또한 고려 인종 원년(1123)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도 직접적인 목격담이니 1차 사료다. 고려사에 대해 연구할 때는 이런 1차 사료들이 기준이 된다.●윤관의 9성이 함경남도? 박근혜 정권 때 만든 국정교과서나 현행 검인정 교과서를 막론하고 고려의 북방 경계는 압록강 서쪽에서 함경도 원산 부근의 함흥평야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국고 47억원을 들여 만들다 폐기된 ‘동북아역사지도’와 ‘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는 서북방에 북계(北界), 동북방에 동계(東界)라는 두 행정구역을 두어 관할했는데 이들은 동북방 동계의 북쪽 끝을 함경남도 남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만주는커녕 한반도도 3분의2밖에 차지하지 못한 작은 나라이고, 이들에게 세뇌된 대다수 국민은 그렇게 알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들은 예종 2년(1107)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9성이 함흥평야 부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원(元)나라가 설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종 45년(1258)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이 지역의 화주(和州) 등을 들어서 몽골에 항복하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는데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함경남도 영흥)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가 쌍성총관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함흥평야 부근이 윤관의 9성 지역이자 쌍성총관부 지역이란 주장이다.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모든 1차 사료는 달리 말하고 있다. 인종 원년(1123)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에 맞닿고, 북쪽은 거란의 옛 땅과 접하고, 동쪽은 대금(大金)과 맞닿는다.” 고려 서쪽 강역은 압록강이 아니라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수이(遼水)에 맞닿는다는 것이다. 서긍이 말하는 요해(遼海)는 바다가 아니다. ‘금사’(金史) ‘지리지’는 동경로(東京路) 산하 징주(澄州)를 ‘본래 요해주’(遼海州)라고 말하고 있다. 요해에 대해 중국 학계는 요동반도 남단의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시로 비정한다. 고려 북방 강역의 서남쪽은 지금의 랴오닝성 하이청시이고 서쪽은 랴오수이(遼水)라는 것이다. 요동반도 대부분이 고려 땅이라고 당대의 송나라 학자가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고려 동쪽은 금(金)나라라고 말했다. 함경남도 남부가 고려의 동계라면 금나라는 동해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 고려에 직접 왔던 송나라 사신의 설명은 국정·검인정 교과서의 설명과 전혀 다르다. 그럼 ‘고려사’는 무엇이라고 말할까.●조선 사료가 말하는 고려의 동계 ‘고려사’ ‘지리지’는 동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 이남에서 삼척 이북을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고려 동계의 북쪽 끝이 공험이라는 것이다. 과연 공험은 지금의 함경남도 남쪽 부근일까. ‘고려사’ ‘지리지’는 “평장사 윤관이…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는데, 공험진(公鎭)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윤관이 쌓은 9성의 가장 북쪽이 공험진 선춘령인데, 그곳에 고려 땅이라는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공험진 선춘령이 고려 강역의 북쪽 끝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함길도 길주목 경원(慶源)도호부’조에서 두만강가에 있는 경원에서 북쪽 700리가 공험진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함경도 회령(會寧)도호부의 ‘고적’(故跡)조는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비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춘령 :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在豆滿江北七百里). 윤관이 땅을 넓혔는데 여기까지 와서 공험진에 성을 쌓고 드디어 고개 위에 비석을 세워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겼다. 비석 사면에 모두 글씨가 있었는데 호인(胡人·여진족)들이 다 지워버렸다.” 당대에 쓴 모든 1차 사료는 고려 북방 국경인 공험진 선춘령에 대해 두만강 북쪽 700리라고 말하고 있다. 함경남도 남부라고 말하는 사료는 하나도 없다. ●더욱 심해지는 총독부 역사관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을 2000여리 남쪽의 함경남도 남쪽으로 바꾼 장본인은 일본인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와 이케우치 히로시 등이다. 이 두 식민사학자가 조선총독부와 만주철도의 돈을 받아서 윤관의 9성을 함흥평야 부근이라고 왜곡한 것을 한국 사학계가 지금껏 추종해서 정설(定說)이라고 우기는 중이다.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라면서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에서 함경남도 남부까지 고려 강역 2000여리를 가져갔다. 고려 예종과 윤관 그리고 고려 군사 14만여명이 지하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다. 이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고려 북방강역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 끌어올리면 된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난 2월 8일 한국고대사학회(회장 하일식) 등 14개 학회는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를 감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연구소가 국비로 고려 국경을 두만강 북쪽이라고 연구해서 발표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고려 북쪽 강역이 함경남도 남부라고 그린 ‘동북아역사지도’ 사업 재개를 요청했고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도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22일 사업 재개를 선언했다. 감사원 앞에서 정요근 덕성여대 교수는 고조선연구소의 연구 내용이 “고려왕조의 영토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동북 3성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까지 뻗어나갔다는 허황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면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그러나 누구의 말이 “허황된 내용”인지 공개 학술토론을 제안하면 일체 거부한다. 지금을 총독부 세상으로 생각하고 감사원을 움직여 총독부 학설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감사원 앞 시위처럼 한국 역사학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장면도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의아해하는 것은 적폐청산 목소리가 드높은 새 정권 들어서 이들이 더욱 기세등등해졌다는 점이다. 국민에게 ‘새 정권이 설마’ 하는 믿음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
  • [씨줄날줄] 초수 행궁/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초수 행궁/서동철 논설위원

    올해는 세종대왕(1397~1450) 즉위 600주년이다.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충북 청주시가 내년 가을까지 초정 행궁을 복원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행궁이란 임금이 머무는 임시 궁궐이다. 오늘날 초정(椒井)의 세종 당시 땅이름은 청주목 초수(椒水)였다. 세종실록에는 ‘물맛이 호초(胡椒)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라 한다’는 대목이 보인다.세종은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다. 팔다리가 붓고 아픈 각기병과 피부병이 늘 그를 괴롭혔고, 당뇨병에서 비롯된 안질도 심각했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당시 세종은 온천과 광천수의 효과에 적지 않게 의존했다. 세종은 1444년 초수 행궁에 123일에 걸쳐 다녀갔다고 한다. 태조를 비롯한 조선왕조 초기 임금들은 고려의 역대 왕들처럼 황해도 평산 온천을 자주 찾았다. 세종은 1433년 충청도 온수현에 행궁을 짓고 행차를 시작한다. 오늘날의 온양온천이다. 이후 온양은 조선 왕실의 가장 중요한 온천이 됐다. 하지만 임금의 행차는 왕비와 세자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은 물론 조정 대신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규모가 컸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오가는 길 주변 백성도 행차에 필요한 물품을 대고 노역을 제공해야 했으니 고초는 컸다. 세종이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온천을 찾는 데 집착한 것도 이 때문이다. 1438년 “경기도에서 온천을 찾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해당 읍의 칭호를 승격시킬 것”이라고 공표한다.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온천이 있음에도 신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부평부를 부평현으로 강등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데 청주목 행궁에 행차하던 해, 초수가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나온다는 소식에 세종은 또다시 “초수가 충청도에는 다 있는데, 어찌 본도(本道)에만 없겠느냐”면서 “만약 초수를 보고 알리는 사람이 있거든 상을 주기로 하고, 마땅히 도내 각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찾아보게 하라”고 경기도 관찰사를 채근하기도 한다. 초수 행궁은 1448년 불타고 만다. 4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세종은 실화(失火)한 사람을 국문한다는 소식에 “지금 농사일이 바쁘니 속히 놓아 보내라”고 했다. 초수 행궁의 옛 모습을 되살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복원의 근거가 없다는 것은 문제다. 행궁 자리가 어디인지조차 모른다. 정조 때 그려진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를 모범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그림을 보면 왕의 침전과 목욕 시설을 제외한 부속 시설은 모두 초가일 만큼 거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행궁을 기대해 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청나라 강희제의 도자기 경매…예상가 276억원

    청나라 강희제의 도자기 경매…예상가 276억원

    전 세계에 오직 3개만 존재하는 극히 희귀한 청왕조시대의 도자기가 적어도 2,560만 달러(한화 276억 원)에 팔릴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홍콩 소더비 측은 1720년대 강희제가 사용한 청 왕조시대 도자기가 오는 3일 경매된다고 밝혔다. 지름 14.7cm의 이 분홍빛 도자기는 중국 자기로는 드물게 수선화를 포함한 꽃과 법랑채로 장식돼 있다. 니콜라스 차우 소더비 아시아 부회장은 “중국 자기 수집가들의 치열한 경매 현장을 보게 될 것”이라면서 "중국 자기 역사상 최고가에 판매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소더비에 따르면, 이 자기는 신기술과 재료를 들여온 예수회의 도움으로 베이징 자금성 내의 도자기 작업장에서 만들어졌다. 한편 지난해 10월 송나라 시대의 1,000년 전 도자기가 중국 자기 경매 최고가인 3,770만 달러(약 407억원)에 팔린 바 있으며 이는 2014년 명 왕조의 자기 경매가 3,605만 달러를 넘는 기록이었다. 장관섭 프리랜서 기자 jiu670@naver.com
  • [열린세상] 인면조는 어디로 갈까/황두진 건축가

    [열린세상] 인면조는 어디로 갈까/황두진 건축가

    몇 년 전 케이팝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다. 논의 과정에서 소위 진정성에 대한 고민이 제기됐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역시 케이팝 아이돌 스타를 직접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연을 통해 팬들을 만날 수 있는 빈도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첨단 영상으로 그 모습을 재현한다고 해도 허상일 뿐 실제는 아니다. 그 간극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해 공연에 사용했던 무대 소품을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다. 스타들이 직접 사용했던 진품이므로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막상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특별히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대부분 그냥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그 직전에 진행된 국제 순회공연의 각종 소품이 경기도의 어느 창고에 아직 남아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이들은 폐기되는 운명을 밟지 않고 많은 팬에게 기쁨을 주는 전시물로 활용됐다. 아마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자료 관리, 즉 아카이빙의 개념이 케이팝에 성공적으로 적용된 사례다. 언젠가 이 자료들만 따로 모아 방대한 전시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미 이런 전시 가능성을 보고 한국을 찾아오는 해외의 전시 전문가들도 있다. 한국을 기록의 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조선왕조실록’ 등 일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기록에 대한 개념이 오히려 희박한 편에 속한다. 도시연구가 손정목 교수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훗날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을 우려, 조직적으로 공공 기록을 파기하는 당시 공직사회의 관행에 대해 증언했다. 건축계만 해도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최초의 한국인 근대 건축가들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본인들도 자신에 대한 기록을 충실히 남기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60, 70년대에 지어진 건물에 대한 기록을 찾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면 후대에 물려줄 것도, 역사로부터 배울 것도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인면조가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서사,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각적 매력, 그리고 상당히 정교한 만듦새 등이 큰 매력이었다. 첫 대면에서의 낯섦과 충격은 이내 호기심으로 변했고, 결국은 다들 즐거워하며 그 존재를 반기게 됐다. 국내외의 여러 보도를 종합해 보면 인면조를 포함한 85가지 인형의 기획과 기본 디자인은 먼저 한국에서 진행됐다. 이어 세부적 디자인과 구동 메커니즘 등 그다음 단계의 작업은 뉴욕 브루클린의 니컬러스 마혼이라는 인형 전문가의 손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인형을 최종 제작한 것은 말레이시아의 한 팀이었다. 국내외를 망라하는 글로벌한 시스템적 접근이었다는 점에서 케이팝과의 공통점도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고분 벽화에 인면조를 그려 넣은 고구려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문헌에서 인면조를 언급하고 또 이를 연구해 온 수많은 사람도 빼놓을 수 없다. 한마디로 시대를 꿰뚫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집단창작물 인면조는 수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존재가 됐다. 그 평화와 축원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번에 등장한 인면조는 고구려 벽화에 이은 또 하나의 역사적 존재가 됐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면조는 어디로 갈까?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첫 골을 만들어 낸 퍽은 현장에서 즉시 회수돼 국제아이스하키연맹 명예의 전당으로 직행했다. 인면조가 행여 폐기 처분돼 쓰레기가 되거나, 상자 속에 처박혀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그런 선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안심할 수도 없다. 위에서 이야기한 케이팝 소품들처럼 어디에선가 소중하게 보관되고 기록되고 또 활용돼야 마땅하다. 국가적 문화기관들이 이를 확보하기 위해 올림픽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볼 만도 하다. 기록의 중요성, 이것이야말로 고대로부터 긴 시간을 넘어 다시 우리를 찾아온 상서로운 존재 인면조가 던지는 또 다른 문명적 메시지다.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고려ㆍ조선 모두 섬긴 ‘수재’… 새나라 문장의 기틀 다지다

    조선 유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학자이자 조선 최초 문형(文衡·대제학)으로 칭해지는 걸출한 문장가 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 사람들은 동시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에게 열광할 뿐 왕조가 교체하는 격변기에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 초기 안정적 기반을 다지는 데는 양촌의 역할이 누구보다 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과거에 급제한 까마귀 소년 고려 공민왕 때 얼굴이 유난히 검었던 청년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까마귀라고 불렀고, 스스로도 작은 까마귀라는 의미의 ‘소오자’(小烏子)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이 18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에 합격한 셈이다. 공민왕이 급제자들의 면면을 살피다가 갑자기 그 과거를 주관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돌아보며 “아니, 이렇게 젊은 자도 급제시켰는가”라고 노기에 가까운 불평을 했다. 장차 크게 쓰일 그릇이라는 이색의 극찬을 듣고서야 왕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그 젊은이가 바로 양촌 권근이었다. 이후 양촌은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왕조의 교체기에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 양촌은 1389년(창왕) 38세 되던 해에 탄핵을 받은 이숭인(李崇仁)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편당으로 몰려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됐다. 이후 약 1년간 이곳저곳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유배생활은 많은 제약을 받지만, 경우에 따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일 수도 있다. 바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오로지 학문과 저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대표적인 사례다. 양촌의 저술도 이 시기에 주로 완성됐다. 1390년 7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익산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양촌은 초학자들이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담긴 유학의 기본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림과 설명을 곁들인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그 앞부분에 실린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4도인 ‘대학도’에 그대로 전재하고 있을 정도로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11월 홍수로 인해 사면받아 풀려났으나, 그는 다시 충주의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의 주석 작업에 몰두했다. 54세 때인 1405년(태종)에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마지막으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완성했다. 겸손하게 ‘자신의 얕은 견해’라는 의미의 ‘천견’(淺見)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 경전 주석서다. 특히 유학 경전 주석의 독자적인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큰 저술이다. 이런 학문적 업적은 결코 짧은 시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벼슬살이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학문적 성과가 유배라는 일종의 휴식을 계기로 꽃피게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려의 신하, 조선에 몸을 맡기다 양촌은 개국 소식을 듣고도 1년 가까이 양촌에서 은거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양촌의 아버지 권희(權僖)를 통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양촌은 할 수 없이 계룡산에 행차했던 이성계에게 나아갔다. 그곳에서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개국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이성계의 덕을 송축하는 ‘풍요’(風謠)를 짓기도 했다. 애초에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개국에 함께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새로운 왕조와 함께하겠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실망감이었다. ‘축수록’(逐睡錄)이라는 야사에 “당시 선비들이 평소에 공을 종주(宗主)로 여겼었는데, 그때 이후로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신원에 가장 공이 컸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포은과 비교하며 변절(變節)이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이런 시각은 조선 후기까지 계승돼 유학에 끼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공자(孔子)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지 못하고 말았다.#황제가 시를 내리다 비슷한 시기에 건국한 명나라와 조선은 초기부터 기세 싸움이 있었다. 이른바 ‘표전’(表箋)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 표전은 국왕이 황제에게 올리는 일종의 외교 문서다. 평소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이 거슬렸던 명나라 태조는 1396년(조선 태조)에 조선에서 보낸 표전의 표현을 문제 삼아 표문의 작성에 관여한 정도전을 명나라로 들여보내라고 독촉했다. 의도를 눈치 챈 삼봉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자 45세의 양촌이 자원해 명나라로 들어가 대신 용서를 구했다. 그를 가상하게 여긴 황제가 학사들이 모인 문연각(文淵閣)에 머물게 하고 시를 지으라 명했다. 양촌은 모두 24수를 지어 올렸는데 18수는 여정과 조선의 역사, 절경을 읊었다. 6수는 명나라와 태조의 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감탄한 황제는 그를 ‘수재’로 칭하면서 직접 시 3수를 지어 하사하고 융숭하게 대우했다. 외교 문제도 자연히 잘 해결됐다. 이 당시 양촌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훗날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사신 유사길(兪士吉)이 왔을 때 국경에서 양촌의 안부를 물었고 연회에서 양촌이 술을 권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받는 등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나라의 문장을 주관하다 관각(館閣), 즉 예문관과 홍문관은 주로 왕실 의식, 외교 문서 등 국가의 공식적인 제술(製述)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문학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이 배속되는데 그 수장인 대제학은 문형(文衡), 주문(主文)이라 해 국가에서 특별히 우대하였고 문신들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로 생각했다. 양촌은 조선 최초의 문형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의 국가적인 문 대부분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관각체(館閣體)는 권근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 정조(正祖)의 평가에서 양촌의 문학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관각체는 수식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서정적인 문장에 비해 다소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느낌을 준다. 관각체 비중이 높은 양촌의 문장에 대해서도 자연히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양촌의 문장이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시의 경우는 꾸밈없이 평담하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진가는 다음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봄날 성남(城南)에서의 즉흥시 봄바람에 어느덧 청명절이 다가오니 / 春風忽已近淸明 가랑비 부슬부슬 늦도록 개질 않네 / 細雨??晩未晴 집 모퉁이 살구꽃은 온통 필 듯한데 / 屋角杏花開欲遍 이슬 머금은 몇 가지가 내게로 기울이네 / 數枝含露向人傾 정도전은 이 시를 보고 “시어가 천지조화를 빼앗았다”고 극찬했다. #수성(守城)의 군주를 보필하다 조선은 삼봉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국가의 각종 시스템은 물론 궁궐의 이름까지도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과언은 아니다. 양촌은 목은 문하에서 삼봉과 동문수학했다. 둘 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고 경세 능력도 출중했다. 서로를 존경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정치적으로 선택한 길이 달랐다. 이는 두 사람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다. 개혁적인 성향의 삼봉은 창업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고, 보수적인 가문에서 성장한 양촌은 수성 군주를 보필하는 쪽이 적성에 맞았다. 삼봉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고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촌은 태종을 도와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쪽에 더 치중했다. 결과적으로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누구의 업적이 더 뛰어났던 것일까.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창업 시기에는 삼봉이 곧 양촌이었고, 수성 시기에는 양촌이 곧 삼봉이었기 때문이다.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성과평가실장
  • 고대 이집트서 역모죄로 죽은 ‘절규하는 미라’ 공개

    고대 이집트서 역모죄로 죽은 ‘절규하는 미라’ 공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해 이른바 ‘절규하는 미라’로 불리는 고대 이집트 왕족의 미라 한 구가 대중에 공개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이집트 국립박물관은 고대 이집트 제20왕조의 2대 파라오(재위 BC 1186~BC 1155) 람세스 3세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운 뒤 역모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왕자 펜타웨어로 추정되는 ‘절규하는 미라’를 한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미라는 1886년 람세스 3세의 묘역에서 발견됐지만 다른 왕족들과 달리 비문도 없이 홀로 불결함을 상징하던 염소 가죽에 덮여 있어 그 죽음을 두고 오랫동안 수수께끼에 쌓여 있었다. 이에 따라 한때 ‘정체불명의 남자 E’로도 불렸던 이 미라는 DNA 감정 결과, 람세스 3세와 거의 일치해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 파피루스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펜타웨어 왕자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람세스 3세의 두 번째 아내였던 티예와 함께 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람세스 3세가 이 암살 계획으로 사망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왕의 미라에는 목을 찔린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AFP 연합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국내 최대 석불 ‘은진미륵’ 국보 승격

    국내 최대 석불 ‘은진미륵’ 국보 승격

    고려 제4대 왕 광종(재위 949∼975)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국내 최대 석불 ‘은진미륵’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1963년 보물 제218호로 지정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고 13일 밝혔다.충남 논산시 은진면에 위치한 미륵보살이라는 뜻의 별칭인 ‘은진미륵’으로 널리 알려진 이 불상은 높이가 18.12m에 달해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미륵보살은 석가에 이어 미래에 출현하는 부처로, 우리나라에서는 현세를 구원하는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됐다. 이 불상에 대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의가 쓴 ‘용화회소’, 고려 문신 이색의 ‘목은집’,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남아 있는데 기록을 종합해 보면 968년쯤 고려 왕실의 지원을 받아 승려 조각장인 혜명이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좌우로 빗은 머리 위에 커다란 원통형 보관(寶冠·불상에 얹는 관)을 쓰고 있고 한 손에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체구에 비해 크고 넓적한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다. 압도적인 크기에서 느껴지는 육중함은 고려 왕조의 권위와 상징을 드러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비례와 균형미를 중시하고 표현면에 있어서 섬세하고 우아함을 추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맞지 않는 신체 비례나 당당하게 표현한 눈매 등 대범한 미적 감각이 두드러지는 불상으로서 국보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에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국보 지정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동북공정으로 자신감 얻은 中…국가 차원 역사영토 확장 야심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동북공정으로 자신감 얻은 中…국가 차원 역사영토 확장 야심

    ●거꾸로 가는 중국의 역사 연구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총리는 1963년 6월 28일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을 만나 중국에서 “도문강(圖們江·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만주는 한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비판한 내용과는 거꾸로 만주는 물론 북한 땅도 자신들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문제가 심각한 것은 이런 주장이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그간 여러 공정(工程), 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티베트와 신강 위구르 지역을 영구히 차지하는 데 목적이 있고 나아가 만주는 물론 북한 강역까지 중국사의 범주로 편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2002~2007)은 이런 여러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동북공정을 통해 만주는 물론 한사군(漢四郡)을 근거로 지금의 북한 강역까지 중국의 역사영토로 편입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1996~2000)을 진행했다. 그전에 중국은 주(周·서기전 1046~771)나라부터 확실한 역사로 인정하고 하(夏)·상(商·은)나라는 전설 상의 왕조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하상주단대공정 끝에 하는 서기전 2070~1600년까지 존속했고, 상은 서기전 1600~1046년까지 존속했다고 주장했다.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2004~1015)이란 더 큰 프로젝트도 있었다. 하·상·주(夏商周) 이전의 전설 시대였던 삼황오제(三皇五帝)까지도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그 일환으로 산서성(山西省) 양분(襄汾)현에서 도사(陶寺) 유적을 발굴했는데, 이를 중국 고대 세 성왕(聖王)이라는 요·순·우(堯舜禹)의 첫 번째인 요 임금의 왕성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국’(中國)이라는 개념이 도사 유적에서 생겼다고 시기를 대폭 끌어올렸다. 그간 중국이라는 개념은 주나라 때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분지의 중원(中原)지구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해 왔던 것을 대폭 끌어올린 것이다. 국사수정공정(國史修訂工程·2010~2013)도 있었다. ‘사기’(史記)부터 ‘청사고’(淸史稿)까지 중국 역대 스물다섯 왕조의 정사(正史)를 25사(史)라고 하는데 이 전부를 다시 수정해서 발간하는 프로젝트다.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국이 가장 신경 쓴 것은 한국이었다. 많은 부분에서 한국 상고사와 상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학계가 반발은커녕 중국의 논리, 심지어 동북공정까지 추종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중국은 자신감을 갖고 중화문명전파공정(中華文明傳播工程·2016~2020)을 진행 중이다. 2016년 3월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소장이자 우리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회의 대의원인 왕웨이(王巍)가 2016년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회의,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제기한 프로젝트다. 간단히 말해서 그간 여러 프로젝트로 새로 쓴 역사를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선전하는 공정이다. 중화문명전파공정의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보자. ‘중화문명의 형성’(中華文明的形成)이란 100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대대적으로 방송하고, 100권짜리 ‘중화문명’을 편찬해 일반인에게도 대대적으로 보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큐멘터리와 책자들을 중국 내 소수민족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번역해 각국 대사관·영사관에 배포하고 전 세계에 있는 공자학원(孔子學院)을 통해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어린이용 그림책과 만화책도 만들고 소학교는 물론 중등학교 및 대학교 교재로도 제작해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새로 만든 역사를 주입시키겠다는 방대한 계획이다. 이 모든 것이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차원에서 진행된다.●탄치샹의 ‘중국역사지도집’ 그런데 중국이 이런 역사 새로 쓰기를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탄치샹(譚其驤·1911~1992)이란 역사지리학자를 주목하면 중국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체계적으로 역사 새로 쓰기에 나섰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학제 간 칸막이를 설치하면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단절시켰지만 중국은 다른 모든 나라들처럼 역사학과 지리학이 함께 간다. 1930년 광저우(廣州)에 있는 지난(暨南)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탄치샹은 옌징(燕京)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1957년부터 1982년까지 상하이 푸단(復旦)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역사지리가 전공인 탄치샹은 사회과학원 역사지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는데 ‘역사상 중국과 중국의 역대강역’(歷史上中國和中國歷代疆域)에서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중국 역사강역의 범주에 대해 “청나라 왕조가 통일을 완성한 이후 제국주의가 침략하기 이전의 판도가 중국의 범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족(漢族) 왕조인 명나라가 아니라 만주족(여진족) 왕조인 청나라를 중국사의 판도로 설정해야 만주 전역과 지금의 티베트와 신강 위구르 지역까지 계속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탄치샹의 필생의 성과는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전8권)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이 지도집의 편찬을 시작했는데 문화대혁명 때 잠시 지체되었다가 1969년 다시 추진했다. 1973년 초고를 완성하고 내부간행물로 회람하다가 1982년 공식 간행했다. ‘중국역사지도집’은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 때부터 서기 313년 서진(西晉) 때까지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차지했다고 그려 놓았다. 낙랑군 등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2002년부터 시작한 동북공정은 ‘중국역사지도집’에서 만든 이런 논리를 국가 차원의 연구로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역사 왜곡은 어렵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동북아역사지도’ 내에서도 서로 부딪친다. 역사 왜곡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식민사학처럼 사료를 무시한 채 우기기만 하는 ‘무늬만 학문’이라면 모르겠지만 탄치샹은 중국의 사료를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낙랑군이 섰는데, 그곳이 평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탄치샹은 한사군에 대한 기초사료인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서’, ‘지리지’는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王險城) 자리에 ‘요동군 험독현’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요동군 소속의 험독현은 요동에 있어야지 지금의 평양에 있을 수는 없었다. 탄치샹은 1988년 ‘석문회편(釋文滙編) 동북권(東北卷)’을 편찬했다. ‘중국역사지도집’의 내용을 글로 설명하는 이론서다. 탄치샹은 이 책에서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험독현은 후한(後漢) 때 요동속국(遼東屬國)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요동속국에 소속된 각 현은 모두 요하(遼河) 서쪽에 있었는데, 험독 한 현만 조선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에 세운 요동군 험독현은 요하 서쪽에 있어야지 ‘조선(한)반도’ 내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문회편 동북권’과 ‘중국역사지도집’은 요동군 험독현을 지금의 요녕성 태안(台安)현 동남쪽 20리의 손성자(孫城子) 지역으로 그렸다. 조선총독부의 ‘위만조선의 도읍지=낙랑군=평양’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한서’, ‘지리지’의 내용을 부분적으로나마 따른 것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고대사학계 및 역사 관련 국책 기관들에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과거 홈페이지에 “위만조선은 그 왕성인 왕험성이 현재의 평양시 대동강 북안에 있었는데…”라고 버젓이 써놓고 있었고 지금도 그런 논리를 고수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요녕성 안산시에 있었다는 왕험성을 한국이 평양이라고 우기는 희한한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역사 문제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여전히 정상적인 국가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中 “한자, 갑골문 전부터 있어” …역사 비틀기 중국은 산서성(山西省) 도사(陶寺) 유적을 가지고 수많은 역사 새로 쓰기를 하고 있다. 동이족 국가인 은(殷·상)나라의 갑골문(甲骨文)이 한자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도사 유적에서 나온 편호(扁壺·항아리)에 쓰인 글자가 ‘문’(文) 자와 ‘요’(堯) 자라면서 은나라보다 훨씬 앞선 이때 이미 한자가 생겼고, 중국은 역사 시대에 돌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관상대(觀象臺)도 있었다면서 4700년 전에 하늘을 관찰했다고도 주장한다. 중국이 왜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역사 새로 쓰기에 나서는지 주목하고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 [연극리뷰] 황정민 100분 원맨쇼…욕망에 찌든 악인들의 용광로

    [연극리뷰] 황정민 100분 원맨쇼…욕망에 찌든 악인들의 용광로

    10년 만에 연극 무대 복귀 성공 배우 정웅인·김여진 ‘원 캐스트’ ‘나는 기형이고, 미완성이고, 반도 만들어지지 않은 채 너무 일찍이 이 생동하는 세계로 보내져 쩔뚝거리고 추한 나의 모습에 곁에만 지나가면 개들도 짖는다 (…)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날을 즐기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없기에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차드 3세’에 나오는 절규다. 눈에 띄는 건 ‘나는 악인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는다’라고 한 대사다. 리차드 3세가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악인이 된 인물임을 드러낸다. 선천성 척추측만증 때문에 ‘꼽추왕’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리차드 3세는 영국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가 죽은 후 튜더 왕조 시대가 열렸다. 역사가들은 리차드 3세에게 조카들을 살해한 ‘왕위 찬탈자’라는 악인 이미지가 각인된 건 튜더가의 정통성을 지지했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힘이 지대했다고 본다. 실제로 리차드 3세는 셰익스피어 희곡 중 연극·드라마·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진 작품으로 꼽힌다. 지난 6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리차드3세’는 셰익스피어의 의도에 충직하다. 10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한 천만 배우 황정민이 타이틀 롤 리차드 3세를 맡아 전율할 만한 광기어린 연기를 펼친다. 스크린·브라운관의 전천후 배우 정웅인과 김여진, 소리꾼 정은혜, 뮤지컬 배우 김도현, 박지연 등 13명 전원이 ‘원 캐스트’로 참여해 무대 위 팀워크도 출중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황정민의, 황정민에 의한’ 연극이다. 전체 100분 16장으로 구성된 공연 내내 황정민은 원맨쇼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쏟아낸다. 황정민은 대사뿐 아니라 독백을 쏟아내고, 무대 위 변사 역할까지 맡아 등장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해설하는 등 극의 도입부부터 클라이맥스까지 끌어간다. 그러다 보니 그의 비중이 전체의 80%가 넘는다. 처음 대본을 본 황정민이 그 특유의 표정으로 ‘나 이 대사 다 못 외울 것 같다’고 농을 했을 정도였다. 각자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 군상이 촘촘하게 설계된 원작보다는 리차드 3세의 악행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큰형 에드워드 4세(정웅인) 급사 후 섭정에 오른 리차드 3세는 둘째 형, 어린 조카들을 청부 살해하고 형수이자 정적인 엘리자베스 왕비(김여진) 가문을 숙청하며 영국판 수양대군으로 ‘피의 군주’가 된다. 작품에서 리차드 3세는 점점 악인으로 변모하며 극적 긴장을 높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신체적 열등감과 권력욕에 절은 인물로 상정돼 그가 얼마나 악인인 지를 증명하는 데 서사가 할애된다. 그러다 보니 ‘희대의 악인’ 캐릭터가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리차드 3세만 돋보여 선·악 이분법으로 단순화하기에는 복잡한 ‘욕망 덩어리들’인 다른 등장 인물들이 수동적 존재로 머문다. 대형 스크린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시각 효과와 무대 구성은 뛰어나다. 고전적 풍미를 살리면서도 현대적 미학을 구현하는 데도 충실하다. 특히 영화처럼 장면이 속도감 있게 전환되는데도 빈틈이 없다. 16장에서 무대 자체가 ‘거대한 관’이 돼 리차드 3세와 함께 사라지는 장면에서는 탄성을 내뱉게 된다. 다만, 피를 부르는 악행과 욕망이 충돌하는 비극적 장면 곳곳에서 청부살인자, 사형집행인, 병사들의 과장된 액션과 ‘코믹 코드’는 엉뚱하다 못해 몰입을 방해한다. 오는 3월 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3만 3000~8만 8000원. 1544-1555.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문경근의 서울&평양 리포트]북, 어차피 원격 협상 가능한데 김여정 보내는 이유는?

    [문경근의 서울&평양 리포트]북, 어차피 원격 협상 가능한데 김여정 보내는 이유는?

    북한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이자 ‘북한판 괴벨스’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는 이유는 뭘까. 북한 특성상 누가 협상자로 내려와도 당국의 아바타일 뿐, 모든 지시는 평양에서 원격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굳이 ‘김씨왕족’ 가운데 하나인 김여정을 내려보낸 것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이를 두고 여러가지 관측이 나오지만 대표적인 것은 남북 분단이후 물밑에서 치열하게 다투었던 한반도의 ‘적자론’에 기인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은 스스로 한반도의 적통이자, 맏형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남한에서 일부 북한 추종자들이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친일파들이 세운 나라’라고 폄하하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일본을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진정한 ‘민족해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 남한을 가리켜 ‘미국 등 외세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규정하고 당연히 ‘한반도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다’고 내외에 선전하고 있다. 때문에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적장자 ‘북한’을 대표하는 김씨왕조의 일족이 참가함으로서 다시금 한반도의 대표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지적이다. 다음으로는 여타 국가와 다르게 남한에게는 뜨거운 환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2년 김정은 집권이후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국가인 점은 맞지만, 자신들이 주장하는 핵보유국 지위에 걸맞는 대접을 받은 적은 없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15년 9월 중국의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돌 열병식에서 받은 굴욕이다. 김정은을 대신해 우방국을 찾은 최룡해는 열병식이 열리는 천안문 망루에는 올랐지만, 말석에서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곁에서 열병식을 관람했다. 반세기 전인 1954년과 59년 열병식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이 마오쩌둥 주석 바로 옆자리에서 섰던 데 비하면 ‘격세지감’이었다.이런 대우는 북한에게 상당한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북한은 받은 모욕감 만큼이나 중국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안을 통과시킨 중국을 맹비난하며 양국 간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김정은을 대신해 내려오는 김여정을 극진히 환대할 것으로 판단된다. 벌써부터 김여정의 의전을 어느 급에서 대우해야 하나를 두고 고민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김여정의 북한 내 위상은 ‘명목상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훨씬 웃돌고 있다. 특히 국제무대에 데뷔하지 못한 김정은이 평창 올림픽을 찾는 21개국 정상급 인사 26명의 앞에 자신을 대신하는 김여정을 세움으로서 정치·외교적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 다음으로는 김여정의 방한을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남북 관계의 전환기로 만들고 싶은 정부로서는 ‘바지사장’인 김영남 보다는 김여정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란 해석이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물론 북한이지만,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라는 상징성 측면에서 ‘일거삼득’을 할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도 “북측의 이번 고위급 대표단 구성은 외교안보라인은 배제하고 국가간 중요한 국제행사인 올림픽에 북한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인 것”이라며 “이번 올림픽에서 북미대화엔 관심이 없고 남북관계 개선만 목표로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이 밖에도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방한한다는 전망도 북한·통일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북한이 보수정부 약 10년 간 쌓인 남북 간 병목현상을 정상회담이라는 ‘일괄타결’식 해법으로 제시할 수 도 있어서다. 북한은 남한이 감당할 수 없는 제안을 던져 놓고, 이를 이용해 최소한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남북 경협과 인도적 식량 지원 등을 댓가로 요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북한으로서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간 관계 개선은 사활이 걸린 문제다. 남북 간 화해·협력의 마지막 걸림돌인 핵과 미사일을 북한이 실제 포기할지는 미지수지만, 이를 협상장에 들고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소장은 “북한이 협상장에서 모든 논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던질 경우 남측으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일 것”이라며 “그 테이블 안에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김여정의 방문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안팎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이유다. 야당을 비롯한 보수층에서 평창 올림픽이 북한한테 이용만 당했다는 비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김여정의 방한을 남북 관계 개선의 촉매제로 활용해야 할 숙제가 정부 앞에 놓였다. 이래저래 청와대가 고민할 일도 많아졌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2017년, 너도나도 빌려간 ‘채식주의자’

    2017년, 너도나도 빌려간 ‘채식주의자’

    지난해 공공 도서관 이용자가 가장 많이 빌려 본 책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였다. 비소설보다 소설의 대출 빈도가 더 높았다.국립중앙도서관은 전국 660여개 공공 도서관의 2017년 대출 자료 약 5700만건을 분석한 결과를 7일 발표했다. 한국 소설로서는 최초로 2016년 영국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가 2만 2565건을 기록해 1위에 올랐다. 한강의 인기에 힘입어 그의 또 다른 작품 ‘소년이 온다’도 1만 3242건으로 8위에 올랐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도서와 작가의 미디어 노출 빈도가 대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2016년 대출 순위가 58위였지만, 작가가 방송에 출연하고 영화도 개봉하면서 지난해 6위로 급상승했다. MBC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한국사 강사 설민석이 쓴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9위를 차지했다. 전반적으로는 소설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만 678건)이 2위를 기록했다. 정유정이 쓴 ‘종의 기원’(1만 5231건)과 ‘7년의 밤’(1만 4271건)은 각각 4위와 6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페미니즘 열풍을 불러온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5위를 기록했다. 비소설로는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가 3위(91만 6103건),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이 7위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과 맞물려 2016년 500위권밖에 있었던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김훈의 ‘남한산성’이 50위 안팎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공공 도서관 도서 대출자는 6대 4 비율로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 특히 40대 여성은 전체 도서 대출량의 22.3%로, 도서관을 가장 자주 이용하는 계층으로 나타났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김여정 방남에 외신도 떠들썩

    김여정 방남에 외신도 떠들썩

    BBC “김씨 왕조·백두혈통 중 방남 첫 인사” ..CNN “펜스 미 부통령, 북 정치인 회동 가능성”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고위급대표단 단원으로 방남하는 데 대해 미국 언론을 포함해 외신들도 7일 큰 관심을 보였다.미 CNN 방송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남과 더불어 김여정의 참석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잠재적 돌파구를 위한 희망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CNN은 이어 비슷한 시기 방남이 예상되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이번 주 북한 정치인들과 회동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을 시사했다고 소개했다. AP 통신은 김여정의 방문은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려고 올림픽을 이용하려는 야망을 보여준다는 요지의 전문가 분석을 옮겼다. 또 스페인 EFE 통신은 이번 소식을 두고 북한 집권 김씨 일가를 뜻하는 이른바 ‘백두혈통’ 일원의 첫 방남에 의미를 부여하며 “김여정의 역사적 방문”이라고 표현했다. 이 통신 역시 펜스 부통령의 방문과 김여정의 방남이 일치할 것 같다고도 전했다. 영국 BBC 방송은 김여정의 방남은 매우 이례적이라면서 “김씨 왕조” 중에서 처음으로 남한을 직접 방문하는 인사라고 썼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미래 대비하는 국가지진위험지도

    [홍태경의 지구 이야기] 미래 대비하는 국가지진위험지도

    지진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규모’는 지진에서 방출된 에너지를 측정해 계산한다.규모가 클수록 강한 지진이며 지진 규모 1의 차이는 에너지 32배 차이에 해당한다. 지진 규모가 클수록 강한 지진동이 발생하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지진 피해 기록을 보면 규모와 피해가 비례하지는 않는다.2011년 규모 9.0의 동일본 대지진은 31만명이 목숨을 잃은 2010년 규모 7.0 아이티 지진에 비해 1024배나 강한 지진이다. 그럼에도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인명피해는 2만여명에 그쳤다. 실제 인류가 겪은 큰 지진 피해들은 규모 7 내외의 지진에서 많이 발생했다. 규모 7가량의 지진은 세계적으로 매년 20회가량 발생하는 비교적 흔한 지진이다. 규모 7이 넘는 지진도 많다. 1900년 이후 규모 8.5 이상의 초대형 지진은 17회 있었다. 이런 초대형 지진들을 제치고 규모 7 정도의 지진이 더 큰 피해를 남기는 이유는 지진의 위치 때문이다. 지진 피해는 지진 규모와 함께 진원 깊이, 전파 거리, 지표 지질에 따라 달라진다. 진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지진동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아무리 큰 지진이라도 멀리서 발생하면 영향이 미미할 수밖에 없다. 2016년 발생한 규모 5.8 경주 지진은 지난해 일어난 규모 5.4 포항 지진보다 강한 지진이었다. 그러나 포항 지진은 인구밀도가 보다 높은 지역에서 발생하고 진원 깊이가 더 얕았을 뿐 아니라 지표를 덮고 있는 신생대 3기 퇴적지층 내에서 지진파가 증폭돼 피해가 더 컸다. 이렇듯 특정 지역에서 예상되는 최대 지진동은 발생 가능한 지진의 위치와 해당 지역의 지표 지질에 달려 있다. 또 최대 지진동의 발현 주기는 그 지진동을 유발하는 지진들의 재래주기에 달려 있다. 최대 지진동의 발현 주기와 크기를 전국적으로 계산한 결과물이 국가지진위험지도이다. 특정 지역에서 예상되는 지진 피해는 예상 지진동 크기와 함께 해당 지역의 지진동 취약성에 따라 변한다. 같은 지진동이 발생하더라도 인구 밀도, 도시 크기, 건물 분포, 건물별 내진 성능에 따라 피해 정도에 차이가 날 수 있다. 결국 지진 피해는 지진의 크기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여건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긴 재현주기를 갖는 큰 지진동에 대해 지역별로 어느 정도의 내진 성능과 대비를 해야 하는지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몇 십 년에 한 번씩 재현될 가능성이 있는 지진동까지 대비해 건축물 설계나 내진 성능 구축에 반영할지는 많은 논쟁이 따르기 마련이다. 긴 재현주기를 고려할수록 예상 지진동의 크기는 증가하기 마련이고 이에 대비하려면 많은 사회적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구밀도와 도시 규모를 고려하지 않고 예상 지진동의 크기만을 고려해 전국적으로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도 논의가 필요하다. 이렇듯 향후 발생할지 모를 지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 지진화산재해대책법에 따라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5년 주기로 국가지진위험지도가 제작되고 있다. 경주·포항 지진을 반영한 새로운 국가지진위험지도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새 지도는 향후 지진재해 저감을 위한 정책 마련에 중요한 기초자료로 쓰일 것이다. 하지만 활용 가능한 지진 정보가 충분치 못해 고려할 수 있는 재현주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짧은 기간 축적된 정보로는 긴 기간을 주기로 발생하는 지진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외 조사를 통한 단층의 운동 이력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같은 역사서에 남아 있는 지진 기록들은 한국처럼 지진 관측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다. 선조들이 남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지진과 같은 치명적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상들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