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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 겸재/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겸재 정선은 우리 회화사상에서 화성으로 떠받들어야 할 위대한 화가이다.삼천리 금수강산으로 불리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데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성공한 분이기 때문이다. 겸재가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의 국시로 천명됐던 주자성이학이 이미 율곡 이이에 의해 이기일원론으로 심화 발전돼 조선성이학이라는 우리 고유사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때였다.이에 당시 지식층들은 이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 고유색을 현양해가고 있었으니 문학에서는 한글의 가사와 소설,시조가 출현하고 한문의 진경시문이 유행하며,글씨는 한석봉체와 동국진체라는 조선 고유색 짙은 서체가 창안돼 널리 유포되는 등이 그것이었다.이런 시대분위기 속에서 어떤 천재 화가가 나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와 어울리는 고유의 우리생활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그 당연한 열망에 부응하여 출현한 천재화가가 바로 겸재였다. 겸재는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부근의 백악산(북악산)아래에서 탄생하여 오십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고 다시 옥인동 20번지 부근으로 이사하여 삼십여년을 살았다.따라서 그는 서울에서도 가장 경치가 빼어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평생 살다간 셈이다.그런데 이곳은 율곡을 비롯해서 오계 성혼,송강 정철,구봉 송익필등 율곡학파의 핵심인물들이 살던 곳으로 이후 대대로 율곡학파들이 터잡아 사는 곳이었다. 겸재가 태어날 당시에는 육창으로 불리는 김창집의 육형제가 중심이 돼 이곳에서 율곡학맥을 계승하며 조선고유책을 선도해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삼연 김창홉은 성리학은 물론이고 제반 학문과 예술에 박통한 일세통유로 조선 고유문화인 진경문화 창달에 솔선하던 분이었다.겸재는 그 삼연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선성리학의 근본 경전인 주역을 비롯한 칠서에 통달하고 역대 시문과 서화법을 익히고 나서 타고난 그림 솜씨로 우리 산천을 그려내는데 적합한 화법의 창안에 골몰하게 된다.그 결과 겸재는 그가 사는 동네의 빼어난 경치를 사생하고 역대 명화들을 임모하며 임천고치와 같은 고전적 화론들을 정독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북방산수화법의 근본인 필묘와 남방산수화법의 근본인 묵법을 주역의 음양조화 원리에 따라 이상적으로 종합해내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화법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다.이것이 겸재 진경산수화법이다. 겸재는 특히 36세때 금강산을 여행하며 이 화법을 실험해 보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후 84세까지 사는 동안 그 화법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화법 수련을 거듭하여 65세를 전후한 시기에 확연히 일가를 이루어내고 80세 전후한 시기에는 묘상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니 이념산수 출현의 역사적인 전과정을 그의 일생동안에서 모두 보여주는 셈이다.
  • 한민족­한국민족/형성시기는 언제

    ◎역사문제연,민족기원·정체관련 토론회서 처음 대두/“주체의식 싹튼 개화기이후”가 지배적/통일신라 후반으로 보는 전근대설도 한국민족 개념의 형성과 적용시기를 놓고 학계가 논란을 벌이고 있다.이는 최근 역사문제연구소가 주관한 한국민족의 근원및 정체에 관련된 토론회에서 제기됐다.한민족과 한국민족을 서로 다른 개념으로 파악한 가운데 학계가 처음으로 부각시킨 이 토론회에는 역사학은 물론 정치학,철학,인류학,언어학 분야의 학자들까지 대거 참여했다. 이 토론에서의 발제는 서울대 노태돈교수(한국사)의 「한국민족의 형성시기에 대한 검토」와 서강대 박호성교수(정치학)의 「유럽 근대민족형성에 관한 시론」등 두편.노교수는 한국민족 형성에 관한 논의에서 주된 고찰대상 요소로 공통의 언어·문화·혈연·지연·민족의식·국가및 경제를 들었다.또 민족형성의 시기와 관련,일반민들의 민족공동체에 대한 공속의식(공촉의식)을 기준으로 개화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갑오개혁에 이르는 일련의 개화기를 전후해 전근대민족과 근대민족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제시했다. 박호성교수는 근대민족및 민족국가의 성립은 신분질서의 타파,국민주권의 수용,국민언어의 창안등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전제하고 민족개념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민족사적 특수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따라서 국가경제체제의 발전양상으로 볼때 한국민족은 근대이후에 형성된 한 현상으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행된 토론에서 정창렬교수(한양대 한국근대사)는 주민들이 자기집단에 대한 헌신성을 갖고 주체적으로 움직인 시기가 개항이후이기 때문에 그 시기는 한국민족 형성기로 파악했다.그러나 아직까지 한국민족은 두개의 국민국가,두개의 국민경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주진오교수(상명여대 한국근대사)는 대한제국의 봉건적 수탈이 강화되면서 충성의 대상이 왕조국가가 아닌 국민국가 나아가 민족국가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그래서 한국민족은 독립협회 단계에서 구체화되고 자강운동 단계에 들어와 비로소 형성됐다는 근대형성설 논리를 폈다. 이와는달리 이종훈교수(성균관대 정치학)는 전근대형성설을 주장,한국민족의 형성을 통일신라후반으로 잡았다.고조선을 비롯한 인접국가들의 형태는 씨족연합이나 부족국가 형태였지만 삼국시대초에 부족연합상태가 되고 이어 삼국통일후 종족연합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다가 고려기에 들어 민족국가가 형성됐다는 것이다.임형택교수(◎고전문학)도 한국민족은 동아시아세계에서 중국·일본 그리고 동북의 여러민족과 관계를 맺고 대결하는 가운데 민족의 주체를 지켜왔던 역사적 특수성을 들추어냈다.그 바탕은 민족적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임교수는 이러한 점을 고려,한국민족의 근대형성설을 반대하고 나섰다. 역시 토론에 참가한 임지현교수(한양대 서양사)는 한국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17세기에는 혈연이나 언어 문화적 공통성이 강조됐다면 20세기후반에는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보다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따라서 민족형성 논의가 거시적 안목의 통일논의로 확대돼야할 필요성을 제시했다.
  • 유물에 담긴 조선왕조의 권위/궁·능·원 17곳 4천점 수집

    ◎덕수궁 석조전서 23일부터 상설 전시 조선조 5백년의 격조높은 왕실문화를 보존 연구할 궁중유물전시관이 오는 23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문을 연다. 궁중유물전시관이 들어설 석조전 동관은 지상 3층 건물로 연면적 1천2백47평 규모.이가운데 전시공간은 2층과 3층의 7백84평으로 순수 전시면적은 3백20평이다. 궁중유물전시관은 그동안 가려지고 왜곡되어 전해진 조선왕실의 생활상과 유물을 체계적으로 전시 공개함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위해 세워졌다.그리고 단순한 전시기능뿐 아니라 왕실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및 사회교육기능을 갖추어 조선왕실의 역사를 오늘의 교훈으로 되살린다는데 의의를 두고있다. 전시관이 수장키로 한 유물은 그동안 5대궁과 12곳의 능·원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왕실 유물 3만6천여점 중에서 엄선한 4천여점.이가운데 각분야별 대표유물 5백여점을 상설전시하게 된다. 이 전시관의 개관은 조선왕조의 역사적 사실과 업적을 바탕으로 왕실의 생활을 깊이있게 이해시키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그 제도안에 투영된 사상과 예법을 살려냄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역사적 자각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전시관 설립 의도이기도 하다.전시장은 주제별로 2층과 3층에 각각 5개실씩 10개실로 나누어진다.2층 은 이론적 측면에서 역사를 개괄하고 왕실생활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3층은 왕실의 생활상을 사실적 종합적으로 이해할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에따라 2층의 제1실에서 5실까지는 조선시대의 정치제도와 문화·과학·오례의등 왕실의 의례와 궁궐건축,궁중에서의 의생활과 식생활의 이모저모를 유물과 모형을 통해 알수있도록 했다. 제6실부터 제10실이 들어서는 3층에는 어진과 어보등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과 왕실의 공예품 그리고 각종 서화류의 유물이 개관 기념전의 성격으로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전시관측은 앞으로 한해에 최소한 2차례이상 기획전시실에서 주제별 특별전시를 할 예정이다. 전시관측은 전시실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람객을 하루 1천5백명으로 제한하고 단쳬관람도 허용치않을 방침이다.이에따라 전시관입구에는 자동번호표부여기를 설치해 순서대로 입장시키게 된다.덕수궁입장료외에 전시관에 들어가기위한 별도의 입장료는 받지않는다.
  • 청백리 조경선생 문집 발간

    ◎인조4년 급제,우참찬까지 지내/시가·소·일 견문기 동사록 등 수록 조선 중기 청백리의 사표로 추앙받던 용주 조경선생(1586∼1669)의 각종 시문·서한·여행기등 생전의 저술을 한데 모은 문집이 후손들에 의해 발간됐다.모두 4권으로된 「용주선생문집」은 3권까지는 선생의 글을 모았고 나머지 한권은 조선왕조실록등에 실린 선생에 대한 기록과 우리나라와 일본학자들의 논고를 모은 것이다. 선조19년 출생한 조경은 소년기에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을 겪었으며 인조4년(1624) 사마시 급제 이후 인조반정 병자호란등 격동기에 관리로 봉직하면서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다.따라서 이는 당시 우리 조정의 움직임이나 중국 일본과의 국제관계등을 파악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보고 느낀 견문록인 동사록은 그의 대표작.이 가운데는 그가 당시 일본의 문부대신격이자 도쿠가와 막부의 실력자이던 임도춘과 오랫동안 친교를 나누며 오간 서한을 공개하고 있다.그 편지마다에는 상무보다는 문치로백성을 다스릴 것을 간곡히 권유하는 내용들이 있어 당시 일본측의 순화와 조선과의 선린관계유지에 그가 많이 기여했음을 알수 있다. 이에앞서도 그는 1636년 병자호란때 사간으로 있으면서 척화를 주장했고,이듬해에는 일본에 청병하여 청군 격파를 상소하는등 명의존 외교 탈피및 일본과 선린의 새외교론을 펴왔다.대제학·형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1648년에는 우참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8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그는 헌종때 영의정에 추서되었고 숙종때는 청백리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원래 문집은 총23책으로 돼있었으나 6·25동란으로 4책이 행방불명 됐던 것을 한양조씨 찬성공파 10대손인 학윤씨(76)가 백방으로 수소문끝에 고려대 도서관에서 발견,현대적 장정으로 완간케 됐다.이 책에는 시가가 5백48수,왕께 올린 각종소 76건,묘지명 제문등 80편,기타 40편과 또 동사록에 1백10편등 모두8백54편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고 있다.
  • 극단 무천,창단기념 「숨은 물」 공연/4일부터 한달간 성좌소극장서

    ◎침탈·변절의 역사속서 이땅 지킴이의 정신 조명 극단 무천이 오는 4일부터 한달동안 성좌소극장에서 정복근씨의 새작품 「숨은 물」로 창단공연을 갖는다.서울 창단기념공연에 앞서 지난달 30일부터 11월10일까지 도쿄,교토,고베등 일본 3개도시 순회공연을 호평속에 마친 극단 무천은 이번공연을 통해 뒤늦게 우리 연극팬에게 정식 신고하는 셈이다. 연극 「숨은 물」은 침탈과 변절로 점철된 역사속에서도 이땅과 사람들을 지켜온 지킴이의 정신을 오늘의 시각에서 접근한 작품.장마다 심문자·변절자·피의자가 등장해 3각구조를 이루며 7명의 배우가 장마다 역할을 바꾸는 역할극과 옴니버스형식을 동시에 띤다.신라의 삼국통일시기와 이성계의 고려왕조 전복시기,구한말 일제침략기를 각각 배경으로 시대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차지한 심문자와 변절자,역사의 대세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피의자가 등장한다. 지난해 국립극단의 「사로잡힌 영혼」과 송년연극「동지섣달 꽃본듯이」를 연출했던 김아라씨가 연출을 맡아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시도하고 있다.중진배우 신구씨를 비롯해 최재영 유영환 정규수 노영화 방은진 지춘성등이 출연한다. 탈춤과 수벽치기,북장단등 다양한 볼거리가 관객과 3면으로 만나도록 설치된 무대위에서 펼쳐지며 특히 북소리와 아리랑을 변주한 피아노연주가 이뤄내는 절묘한 조화는 관객의 심금을 울리기에 손색이 없다. 공연시간 하오7시30분(금·토·일 하오4시30분 7시30분).문의 745­1214.
  • 하와이 원주민 주권회복운동(세계의 사회면)

    ◎내년 미합병 1백돌 앞두고 전개/클린턴 대통령당선으로 더욱 고무/수십여개단체서 자치권획득 추진/“미서 분리하자” 일부주장엔 기득권층 반대 무력으로 빼앗긴 옛 주권을 되찾자는 원주민들의 주권회복 운동이 관광명소인 미국 하와이에서 일어나고있다. 토착민인 「카나카 마오리」인들이 미국에 의해 하와이왕국이 붕괴된지 1백주년이 되는 내년 1월 17일이 다가옴에따라 이같은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이들은 빌 클린턴이 차기 미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더욱 고무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미국에 합병됐기 때문에 하와이인들은 인디언들과는 달리 법적으로 자치권을 가질 수 없다』고 반대해온 부시행정부와는 달리 민주당은 정강에서 자치권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방정부에 의해 아직도 유일하게 미국토착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 원주민들은 1백20만 하와이주 인구의 20%에 가까운 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하와이가 미국에 합병되는 출발점이 된 것은 1893년 1월 17일.미국이 1백62명의 해병대를 보내릴리우카라니 여왕을 쫓아내고 독립적인 하와이왕조의 대를 끊어버린 것이다.그뒤 하와이는 1900년 미국에 합병됐고 1959년 미국정부는 하와이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수난의 역사로 점철돼온 하와이 토착민들이 이같은 운동을 추진하고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미국이 저지른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반감이 아직도 짙게 깔려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들 토착민들은 그들의 자랑스런 문화가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으로 전락되고 있고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부유한 일본인들의 골프장으로 둔갑되고 있는데 대해 거부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오늘날 하와이 관광수입은 미연방정부의 두번째로 큰 수입원이 되고 있다. 현재 하와이 원주민들은 하와이를 완전 독립시키거나 자치권을 획득하는 두가지 흐름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이같은 운동을 벌이기위해 조직된 단체는 수십개나 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하와이대학의 한 교수는 『대통령과 우리의 대표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이들 문제를 직접 협상해야한다』면서 『미국이 과거 하와이에서 저지른 범죄를 재판할 계획도 갖고있다』고 말했다.또 호놀룰루에서 개업하고있는 엘리자베스 마틴변호사는 『나쁜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면서 『미국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훌라춤을 추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중산층을 비롯한 상당수의 토착민들은 최근들어 하와이를 미국으로부터 분리시키자는 주장에는 반대하고있는 입장이다.사회보장제도등 이미 누리고있는 각종 혜택을 잃게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대신 이들은 토착민들이 스스로 정책을 결정하는 자치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현재 하와이에서 이같은 운동을 가장 강력히 벌이고 있는 단체인 「칼라후이 하와이」는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재판관들로 구성되는 사법제도등을 갖추는 것등을 내용으로 하는 자치안을 이미 마련해 놓고있는 상태다. 이 단체 의장인 트래스크씨는 『모든 하와이인들은 마음속으로는 독립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분리돼버리면 토착민들에게 아무런도움도 되지못한다』면서 『우리의 목표는 분리가 아니라 경제적인 자립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든 민족자존심으로 무장된 하와이 토착민들의 주권회복운동이 미국의 하와이침공 1백주년을 앞두고 감정적인 차원으로까지 치닫을 조짐을 보이고 있어 미연방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 원광대 「동북아고대문화…」 학술회의서 새 학설

    ◎“고구려­만주혼강 토착세력이 세워”/청동·철기문화 수용후인 1C쯤 출현/부여인건국설 고고학근거 발견안돼 고구려의 기원문제가 새로운 각도로 제기되고 있다.이는 고구려 건국지역인 중국동북3성 일대에 대한 고고학적 학술성과의 공개와 함께 이 지역이 개방되고 있는데서 비롯됐다.이 문제는 한·중·일·러시아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김삼용)가 최근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도 심도있게 다뤄졌다.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이번 국제학술회의 주제는 「동북아고대문화원류와 전개」.모두 22개 발제 가운데 고구려와 관련한 발제는 3개나 됐다.특히 이송래교수(미노스웨스트크리스천대)의 「고고학적으로 본 고구려건국 이전의 환인­집안지구의 문화사회성격」이 주목을 끌었다.그는 이 발제를 통해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알려진 문헌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구려왕조의 주체세력이 누구였는가를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새롭게 규명했다. 이교수는 먼저 고구려의 기원을 부여와 연관시켜온 학설에 부정적 견해를 제시하고 나섰다.그 이유는 이를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할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따라서 광개토대왕비문이나 「삼국사기」가 기술한 고구려 건국 내용속에는 몇가지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이를테면 부여의 한 왕자에 의해 고구려라는 왕조가 세워질수 없다는 것이다. 왕국은 물론 국가단계의 사회는 결코 진공상태에서 갑자기 출현할수 없다는 것이 이교수의 지론.한 국가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사회적 정치적 힘이 뒤따라야 한다는 이교수는 특히 고구려와 부여의 민족을 서로 연결시킬수 있는 고고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무덤형태만 보아도 부여는 돌널무덤(석관묘)이 주류를 이루는데 비해 고구려에서는 전혀 다른 돌묻이무덤(적석총)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를 형성한 주체세력은 누구인가.이교수는 혼강유역에서 신석기문화를 지켜온 사람들로 보았다.이 지역의 신석기문화를 BC3세기께까지로 편년하면서 비록 신석기문화이긴 했지만 정체된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신석기시대 전시기에 걸친 문화혁신을 통해 BC3세기께에 접어들면 이미 상당한 힘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또 오늘날 중국 길림성 환인시와 집안시를 구심점으로한 이들은 청동기문화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환인과 집안의 청동기문화를 단동과 연관시켰다.특히 거미줄모양을 새긴 청동거울(동경)과 청동투겁창(동모)은 두지역 출토품이 일치할뿐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다르다는 이교수는 이지역 출토품인 연나라의 화폐 명도전 역시 단동을 통해 수용된 철기문화로 풀이했다.이러한 문화수용의 압력은 북중국에서 요동으로 진출한 연나라 세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으로 그 시기는 대개 연나라 소왕대(311∼279BC)로 잡았다. 환인·집안지역의 청동기·철기문화는 자연발생적 문화가 아닌 이른바 2차적 문명형성이기는 하나 대단한 사회역량이 축적되어 결과적으로 지역간의 교역,집약농경,인구증가를 가져왔다는 것이 이교수의 견해.이를 입증하는 유적과 유물로 환인·집안지역에서 각종 석기와 함께 발굴된 성읍성격의 토성지와 초기돌묻이무덤,각종 철제농기구들을 꼽았다. 이교수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세기께에 출현한 것이 고구려이고,그 이전 환인·집안지역에서 신석기문화 전통을 간직한 가운데 청동기·철기문화를 수용한 세력이 바로 선고구려라고 주장했다.결론적으로 고구려는 2차 국가형성의 고전적 표본이라는 것이다.
  • 이순신의 거북선/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배:19)

    ◎속도·화력서 왜선 압도,돌격선으로 명성/학계연구 바탕 복원… 내부구조는 미상 거북선은 임진왜란때 조선수군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조선의 승리를 가져오게 한 전선의 일종이다.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배이면서도 그 실체가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배이다.전쟁기간중에 거북선 건조의 필요성을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북선의 제도는 승첩에 더욱 요긴한 것입니다.적이 꺼리는 바가 이 거북선에 있고 강사준의 보고도 그러합니다.거북선이 부족하면 밤낮으로 더 만들어 대포·불랑기·화전 등을 많이 싣고 바닷길을 막아 끊는 계책을 하는 것이 곧 위급함을 구제하는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또한 거북선이 해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거북선 제도는 배위에 판목을 깔아 마치 거북등처럼 하였는데 위에 십자모양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사람들이 통행하게 하고 그밖에는 모두 칼끝·송곳같은 것을 벌려 꽂았다.앞은 용머리같이 하고 입은 총구멍으로 썼다.뒤에는 거북꼬리를 만들었다.꼬리밑에는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도 각각 여섯개의 총구멍이 있으며,싸우는 군사나 뱃사공은 모두 그 속에 숨어 있어 사면에서 총을 쏠 수 있고 앞뒤나 옆으로 나는 것같이 빨리 나들었다.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서 송곳·칼끝이 보이지 않게 하여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에 찔리게 되고 화포를 한꺼번에 쏘면서 적선속을 횡행하면 아군은 피해가 없고 적들은 거북선이 지나간 곳마다 헤쳐지고 쓰러졌다』 거북선이 남해 해상에서 적진을 헤집고 다니면서 왜선을 격침시킬 수 있었던 것은 왜선보다 빠르고 화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의 승리를 호국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여러 곳에서 거북선 복원을 시도한 바 있다.학계의 연구업적을 기초로 하여 복원한 거북선들은 모두 실제 전투상황에 나타난 기록과 비교할 때 속력과 화력구사면에서 기록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또한 겉모양은 실제의 거북선에 가까울지 몰라도 선내의 구조에 대해서는 추측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해군에서는 거북선을 비롯한 임란유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해전유물 발굴단을 발족시켜 해저탐사를 해온지 여러해가 되었다.문헌연구와 병행하여 실증적인 탐사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빠른 시일내에 좋은 결과가 있어 4백년전 용맹하게 적선단으로 돌진하여 무수한 왜선을 격파시켰던 거북선의 신비가 현실로 나타나기를 기대하여 본다.그리고 한글과 한자의 복합어인 거북선도 이제부터는 순수한 한글인 거북배로 통칭되었으면 하는 소망도 있다.
  • 조선왕조실록 내년까지 완간/세종대왕기념사업회,마무리 작업

    ◎4백13권중 3백30권 완료/90억들여 25년만에 한글로/사용원고지 90만장… 40층높이 조선왕조실록의 번역사업이 25년만에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내년에 모두 한글로 완간된다. 지난 68년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25대 4백72년동안의 왕조실록의 국역사업을 민족문화추진회와 공동으로 벌여오고 있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실록전체의 90%이상의 국역을 마친 상태여서 내년에 모두 4백13권으로 구성된 국역본전체의 번역·발간을 완료하게 될 것이라고 14일 밝혔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3백30권이 번역발간된 상태이며 광해군및 영조·정조·순조등 4대 임금에 관련된 실록 83권만 남겨두고 있다. 임금 대신의 언행과 정사(정사)·민간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와 사건까지도 자세히 기록돼 있어 「조선민족의 일기」라 불리는 이 책을 보면 그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한 예로 영조34년 11월11일자에는 외간남자가 자신의 옷을 훔쳐갔다 붙잡히자 집안의 명예와 정조를 더럽혔다며 자살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또 경남 합천에서선비 조후창의 아내 염씨가 집안에 둔 면포와 윗옷을 염씨를 연모한 같은마을 서생 윤후신에게 도둑맞은것을 알게되자 칼로 배를 그어 자살한 사건도 자세히 쓰여져 있다. 왕조실록을 한글로 옮기는 대작업은 65년무렵부터 당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이사였던 외솔 최현배선생등이 주축이 돼 추진,68년 첫 번역에 착수했다.국내최대의 국역사업인 이 작업에는 지금은 모두 고인이 돼 버린 두계 이병도,노산 이은상,국어학자 정인승,동양사학자 동빈 김상기,이관구씨등이 번역·감수에 나서는등 원로사학자들의 숨결이 담겨있으며 이들이 타계하자 정재각(전동국대총장)·차주환(단국대 명예교수)·강만길씨(고대교수)등 후학들에게 이어져 진행되고 있다. 책 1권을 발간하는데 든 비용만 해도 평균 2천1백만원꼴로 완간하는데에는 거의 90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게 된다. 또 우리말로 옮기는데 사용된 원고지도 90만여장으로 쌓아놓으면 40층 건물의 높이와 맞먹는다. 초기부터 번역·감수에 참여해온 이재호씨(75·전부산대교수)는 『하루 10시간이상씩을 꼬박매달려도 원고지 30장이상을 메워내기 어려웠다』면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펄떡펄떡 살아숨쉬는 조상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완간을 계기로 그동안 3백∼6백부씩만 인쇄해 대학도서관과 연구기관에 한정 배포하던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을 일반인들도 접할 수 있도록 문고판과 요약판 발행사업도 계획중이다.
  • “유권자에 더 가까이”/3당후보 주말행보

    ◎“포항을 동북아 핵심공업도시로”/YS/달동네 찾아 소외층 생활고 청취/DJ/잇단 당원대회… “경제대통령” 목청/CY ○“나도 어부의 아들” ▷민자당◁ 김영삼총재는 14일 하오 포항지구당개편대회에 참석,근로의욕 저하와 부정부패 등 이른바 「한국병」치유를 통한 경제재도약을 역설하며 지지기반 확산에 진력. 김총재는 이날 포항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이지역 당원및 유권자의 대다수가 포항제철 및 관련산업 종사자임을 의식,『땀흘리는 사람이 잘사는 사회,씨뿌린 자가 거두는 사회가 「신한국」의 요체』라면서 「근면한 근로자상」재정립을 통한 신한국창조를 거듭 강조하는 등 연설시간의 상당부분을 경제재건문제에 할애.김총재는 또 『포항에 신소재·정밀화학 등 미래산업단지를 조성해 오는 21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중심공업도시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면서 ▲해양자원 개발 ▲화물유통단지 확충 ▲맑은 물 공급 등 지역개발 공약을 제시. 그는 특히 『중립내각 구성으로 관권선거의 우려는 사라졌으나 가장 걱정스러운 일은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금권선거 풍조』라고 전제,『우리 모두가 이번 대선에서 누가 돈을 많은 쓰는 후보인지를 살피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며 국민당에 대한 공세를 계속. 김총재는 이에 앞서 포항제철 및 연관산업체인 조선내화 공업사,죽도어시장등을 둘러보고 근로자·어민대표들로부터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등 유권자와의 「피부접촉」에도 진력. 김총재는 이날 박태준전포철회장이 외국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포철을 방문,직원식당에서 근로자 5백여명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민자당을 떠난 박전최고위원을 『「포철신화」를 창조한 분』이라고 치켜세우면서 『박전회장은 포항제철의 명예회장으로서 포철을 대표해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리라고 믿는다』는등 박전최고위원과의 「연대」관계 불변을 애써 강조. 김총재는 이어 포항 수협을 방문 어민 대표와의 간담회를 갖고 『나도 여러분과 같이 어촌에서 태어난 어민의 아들이기에 어촌발전에 남다른 관심이 많다』면서 『우리 어촌이 겪고있는 제반 어려움에 종합적으로 대처하고,21세기 해양의 시대에 미리대비해 해양산업부를 신설하겠다』고 약속. ○조찬기도회 참석 ▷민주당◁ 김대중대표는 이날 서울 힐튼호텔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가진데 이어 신길동의 달동네를 방문하는등 서울에 머무르며 분주한 득표활동. 김대표는 이날 상오 기독교의 각 종파 목사 3백여명과 가진 조찬기도회에서 『어려운 소외계층과 국민,더 나아가 세계를 위해 성실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며 지지를 호소. 김대표는 이어 영등포구 신길동 황금선씨(67·여)의 무허가주택을 방문,황씨가족·세입자가족및 반장등 주민들로부터 서민생활의 어려움을 듣고 『어려운살림을 하는 사람은 집주인이건 세입자이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면서 『큰 길뿐만이 아니라 좁은 뒷골목에까지 따뜻한 빛이 비치는 정치를 하겠다』고 위로. 김대표는 또 도시서민정책전문가인 제정구의원,국회노동위원장인 장석화의원과 함께 이 마을의 한빛교회에서 주민 1백여명과 도시 서민주택정책에 관한 간담회를 갖고 민주당의 서민주택정책을 설명. 김대표는 『이제 우리나라는 의·식·주 가운데 먹고 입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으나 주택문제는 매우 심각하다』면서 『앞으로 대형주택의 건설은 민간업자에게 맡기고 정부는 20평내외 서민주택건설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 김대표는 이날 하오에는 성균관을 방문,유림들에게 『정도전의 「인심즉 천심」이란 사상은 조선왕조 5백년의 통치이념이 되었다』면서 『이러한 한국 유교의 훌륭한 전통을 살리기 위해 집권하면 유교방송국을 설립하겠다』고 약속. 김대표는 이날 저녁에는 여의도 63빌딩에서 미국 가톨릭대학에서 수여한 명예문학박사학위의 취득 축하식을 개최. ○고 박 대통령 극찬 ▷국민당◁ 정주영대표는 이날 구미프린스호텔과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열린 구미지구당(위원장 강구휘)창당대회와 강원지역 3대국민운동실천 당원결의대회에 잇따라 참석,양금청산과 「경제대통령론」을 내걸고 득표전을 활발히 전개. 정대표는 이날 구미지구당 대회에서 이 지역이 박정희전대통령의 고향임을 의식,『박전대통령은 항상 국민들을 잘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노심초사 해오신 진정한 「경제대통령」』이라며 극찬한뒤 『박전대통령과 나는 20여년전 경부고속도로를 세계에서 가장 싼값으로 건설했다』고 박전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 정대표는 『그러나 당시 야당인사들은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극력반대했었다』고 지적하고 『소위 위정자라면 최소한 5∼10년은 내다볼 안목은 있어야 한다』면서 양금씨를 성토. 이에 앞서 정대표는 이곳 상모동에 있는 박전대통령의 생가를 방문,고박대통령 내외의 영전에 분향.정대표는 이어 원주대회장에 참석,『강원도의 발전을 위해 ▲영동고속도로 4차선 확장▲동해∼울진 철도부설 ▲양양공항 확충 ▲국립공원 관리권 시·도로 이관시키겠다』고 공약을 제시하며 몰표를 호소.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2)

    ◎출생비화/「1912년 4월15일」의 의문들/중학동차 임춘추는 14년생으로 회고/날짜도 음력·양력 밝히지 않은채 기술/태어난 곳도 만경대 아닌 대동군 칠골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변경하고 날조한다. 1989년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고 난 이후 한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틀림없이 소련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북한에서는 그가 「백두산 밀령」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우상화위해 변경 이로 미루어 보면 김일성 자신의 출생과 성장도 사실보다는 「우상화」위주로 변경되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번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나는 아버지 김형직의 맏아들로 망국 이태 후인 임자년(1912년)4월15일에 만경대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우선 김일성은 그 생일이 4월15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음력을 양력으로 고친 것인가,아니면 전혀 다른 날짜인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북한에서 발간된 역사사전에는 김일성의 사촌동생인 김원주가 1927년 9월22일에 태어났다고 하면서 이 날짜가 음력 8월27일이라고 밝히고 있다.그런데 그보다 15세 먼저 난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체 그러한 언급이 없다.이 점은 김형직이나 그의 동생 김철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봉건사회였던 조선왕조가 망한 직후 태어났다면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 밝혀야 마땅하다.이런 점에서 그의 생일이란 날짜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김일성이 정말로 1912년에 태어났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카기(고목건부)란 일본의 원로신문기자가 있었다.그는 일본 매스컴에서 북한을 「북조선­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호칭하도록까지 한 철저한 친북한파였는데 나중에는 김일성의 어용 전기를 써주기 위해 평양에 가서 직접 취재하는 열성까지 보였다. 다카기는 김일성의 내력을 알기 위하여 당시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임춘추와 만난 일이 있었다.그는 1912년생이라는 임춘추로부터 은을 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춘추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보았더니 나이는 그보다 두어 살 아래인데 김성주라는 학생이 있었다」 1912년 생인 임춘추가 다카기에게 김일성은 자기보다 두어살 아래라고 하였다면 그는 12년생이 아니라 14년생 정도로 된다.따라서 김일성이 1912년 생이라는 것도 상당한 의문을 남기게 되는 대목인 것이다.김일성은 사실은 1914년 생이면서 12년 생으로 행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냥 믿기는 힘들다. 김일성이 유일독재체제가 아직 미완성이던 1958년,북한의 역사학자 이나영은 「김일성 원수는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빈농가에서 탄생하여 그후 고향인 만경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본명은 김성주)」라고 적었다.또 1961년에 나온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도 그렇게 쓰고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해가 만약 1912년이라면 이해에 부친 김형직은 평양숭실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는 만경대에서 편도 40리 길을 통학하고 있었다. 한편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친정은 그 부친 강돈욱이 후에 장로가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그는 1906년 전에 살던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었는데 현재 칠골에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 집을 보면 그는 결코 빈농은 아니다.그는 또 하리교회와 창덕학교를 짓는데도 주동이 되었다. 한국의 풍습으로는 부인이 첫 아이를 낳을 때 친정에 가는 것은 보통 일이었다.부자집 친정에서 강반석이 첫번째 해산을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대개 친정서 출산 그러나 김일성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자기가 꼭 만경대에서 태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한 모양이다.김일성의 이름 문제도 이번 회고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김성주 이외에 김성주로도 김성주로도 표기되어 있다.또 김일성 자신은 그 어느 표기도 다 자신의 이름이라 하고 있다.예를 들면 김성주는 평양의 조선 혁명박물관에 걸려 있는 일제기록의 사진판에 보이며 김성주는 조선전사에 역시 사진판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주가 본명이라고 추측되는 유력한 자료로는 해방직후 만경대에 직접 가서 취재한 한재덕이 남긴 글이 있다.거기에는 김일성 3형제를 김성주,김철주,김영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14면 ②「김일성,조국에로의 길」고목건부저 1982년,일본,채류사간,26면 ③「조선민족해방투쟁사」리나영저,336면 ④평전 22·23면 ⑤「세기와 더불어 1」9면 ⑥「김일성장군개선기」74·75면
  • 창덕궁/왕조의 숨결 심처 곳곳에/내전 전각들엔 왕가의 위엄서려

    ◎지형맞게 조경… 비원자연미 일품/옥류천일대 출입통제… 관람시간도 시간별 제한 모처럼 바람 쐬러 시내 바깥에 나갔다가 교통체증에 기분전환은 고사하고 울화만 뻗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울 시내 안에도 기분전환의 바람을 속에 품고있는 장소가 많다.고궁탐방은 구태의연해 보이지만 고궁 문턱을 넘어서면 생각이 차츰 달라진다.비원이 뒤에 들어앉아 있는 창덕궁은 시외나들이의 차선책으로 찾았던 마음을 열렬한 경배자의 그것으로 바꿔놓는다.조선왕조는 사라졌지만 오백년동안 가꿔지고 가다듬어졌던 왕궁의 바람은 매혹의 마력을 안고 있다. 고궁의 매력은 역사적 배경에서 먼저 솟아난다.창덕궁은 잇대어 자리한 창경궁과 함께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궐로 불려졌다.태종 초년에 창건되었으나 초기의 임금들은 대부분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아 이궁에 머물렀다.그러나 성종과 연산군은 주로 이곳에서 지냈으며 임진왜란으로 정궁인 경복궁은 물론 창덕·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1)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중건돼 경복궁이 1867년(고종4) 중건되기 까지 2백50년 넘게 조선왕조의 법궁 자리에 있었다.여기서 인조반정,장희빈,사도세자 뒤주참사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경복궁이 일사불란한 직선 구도의 위용을 펼치는 데 반해 창덕궁은 곡선의 은밀함이 천천히 깊어지는 형세이다.같은 구중궁궐이라도 창덕궁에선 나선형의 심처로 이끌려가는 기분이다.그리고 창덕궁의 구중심처는 왕의 침전인 평지의 내전이 아니라 표고 90m미만의 동산에 조성된 10만평의 후원인 비원이다. 창덕궁은 근 15만평에 이르러 5대궁궐중 제일 넓지만 지세가 굴곡지고 경관 또한 한결같지 않아 탐방객들을 늘 깨어있게 한다. 이런 취향에 맞게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이 한가운데에 있지않고 남서쪽 모퉁이에 나있다.정전인 인정전과 내전일곽인 희정당 대조전 등의 초입은 일제시대인 1912년 일반에 공개되면서 많은 변형과 훼손이 가해진 곳이다.그러나 돈화문은 광해군,선정전은 인조,인정전(국보 225호)은 순조 때 각각 재건돼 오늘에 이른다.내전 건물들은 19 17년 화재이후 다시 지었고 19세기 때의 3분의1규모에도 미치지 못한다.그러나 전각과 전각이 원래의 특징인 복도구조로 쭉 연결된 외관은 답답한 가운데서도 왕의 처소다운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건물군 뒷쪽에 계단형식으로 정원을 꾸민 화계가 나타나면서 비원이 열린다.비원은 부용지,연경당,반도지,옥류천부근 등 대충 4구역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가장 깊숙한 곳인 옥류천 부근은 출입금지되어 있다.창덕궁의 건물들이 인위적인 대칭구성에서 벗어나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도 속에 놓여 있듯이 비원도 여기저기를 손질해 인공적으로 꾸민 게 아니라 동산의 자연미를 살려 드넓고 다양한 풍치의 정원을 일으켜 세웠다.관상수를 부러 가져다 심지 않았고 나무에 전지를 하지 않았으며 따로 꽃밭도 만들지 않았다.인조 때부터 세워진 28개동의 누정이 1백여종의 나무 사이사이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길잡이◁ 창덕궁·비원은 3년동안 일반에 폐쇄된 뒤 79년부터 안내원의 인솔하에 제한관람하게 되어있다.9시부터 1시간단위로 하오4시까지 입장하며 이와따로 외국어안내가 중간중간 있다.비원까지의 주관람로는 2.2㎞로 1시간 10분이 소요된다.입장료 1천8백원(어린이 9백원).
  • 복원된 메이플라워호/배(역사속 바뀌어온 모습을 좇는다:17)

    ◎길이 40m·폭 8m·배수량 365t인 캐릭선/플러머스부두에 전시,역사교육장으로 영국은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로 1534년에 로마 교황청을 배척하고 영국 국교회를 형성한 후 계속해서 종교 문제 때문에 소란스러웠다.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이 장로교적 캘빈주위를 지지하자 교회의 부유함을 반대하면서 도덕적 생활까지 주장하는 집단이 등장하였다.이러한 면에서 청교도로 불리던 이 집단은 기존의 주교들과 지배층으로부터 억압을 받았으며,『주교도 필요없고 왕도 필요없다』라는 구호를 제창함으로써 심한 박해를 받았다.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조하에서 박해를 견디다 못해 17세기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순례이민을 가기 시작하였다.1620년 9월26일 1백2명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사우샘프턴을 출항,아메리카 대륙으로 출발하였다.견디기 힘든 선상 생활 도중에 그들은 종교적 규범을 지킨다는 「메이플라워맹약」을 맺었으며,67일간의 항해끝에 11월11일 코드만에 도착하였다.그러나 북위 42도나 되는 추운지방이었기 때문에 절반이사망하였다. 생존에 성공한 청교도들은 뉴 일글랜드 지방에 플리머스(Plymouth)라는 마을을 세우고 또 이근을 흐르던 강에 메이플라워호의 선장 이름을 따서 존스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이때부터 청교도들은 깊은 신앙심과 고도의 절제력을 갖고서 식민지를 대척하기 시작하였다.자신들의 목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대학이 오늘날 하버드 대학인데,이러한 연유로 이 지역은 미국의 정신적 고향 역할을 하고 있다. 메이플라워호가 어떤 제원을 가졌던 선박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단지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대항하는데 사용되었던 낡은 보급선이라는 설과 폴란드에서 건조한 최신형의 선박이라는 설이 전해져 올 뿐이다. 미국과 영국은 이런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955년에 공동으로 이 선박을 복원,건조하여 메이플라워 Ⅱ호로 명명하였다.이 선박은 길이 약 40m,폭 약 8m,홀수 약 4m,배수량 약 3백65t의 제원을 갖고 있는 캐릭선이었다.이 배는 17세기의 순례이민자들이 사용한 항로를 따라 1977년에 항해하여 대서양을 횡단한 후 오늘날 그들이 세운 도시인 플리머스의 부두에 매어져 있다.미국은 청교도들의 주거 양식을 그대로 복원하고 그곳에 메이플라워 Ⅱ호를 전시하고서 미국민의 역사와 정신의 교육장으로 사용하는 동시에 관광지로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조선왕실터 강화서 찾았다/서울대연구팀,1만8천평규모 유적 발견

    ◎17∼18세기 건립… 외침대비,행궁으로 축조/병인양요때 소실된 전각 등 왕실소재 확인 폐허속에 방치돼온 조선왕조의 행궁(행궁·임금의 별궁)등 왕실터가 최근 서울대 규장각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관장 한영우 국사학과교수)연구팀은 지난15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일대를 답사하고 이지역에서 1만8천여평 규모의 조선시대 왕실터를 확인했다.규장각팀이 확인한 유적은 조선왕조가 잦은 왜란·호란으로 유사시 왕실로 사용하고 국가 주요기밀문서및 자료를 보관할 목적으로 17∼18세기에 걸쳐 건립했던 행궁과 외규장각(외규장각)등 궁전건물터 등으로 돼있다. 규장각팀의 이같은 왕실터 확인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외규장각등 왕실의 소재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냈을 뿐 아니라 당국의 무관심속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수확으로 평가됐다. 이지역은 조선조 고종3년인 1866년 병인양요때 건물 내부의 주요 도서가 프랑스 수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건물들이 불에 탄뒤 페허로 방치돼있다가 1977년정부의 강화도 전적지 성역화 사업때 극히 일부인 2천7백여평만이 「고려궁지」로 복원돼 사적133호로 지정됐다. 그당시 당국은 조선시대의 자료는 고려하지 않은데다 구체적 사료없이 구전에 의존하여 고려의 대몽항전을 기념하는 「고려궁지」를 건립하는 바람에 정작 조선왕조의 왕실과 전각들은 「고려궁지」의 울타리밖으로 밀려난 채 방치돼왔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당시 이곳 지방관아건물 2채만이 복원돼있다. 규장각팀이 이번에 발견한 지역에는 조선왕조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돌계단과 주춧돌,「왕자샘」으로 알려진 우물터가 잡초속에 파묻혀 있고 돌계단 바로 위에는 일제때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기술학교건물이 모선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서있다. 한교수는 『강화도는 선사시대이래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서 각 시대의 유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조선시대에는 특히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서 왕실차원에서 대역사를 벌여 왕궁과 전각을 짓는 등 제2의 수도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그러면서 『그당시 강화도수령이 거주하던 전각은 고려궁지내에 복원돼 있는데 정작 왕실터가 내버려져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규장각측은 가까운 시일내 이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등 유적지 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강화도 문화원의 향토사연구위원인 홍재현씨(78)는 『현재의 고려궁지와 그 주변땅에는 왕실과 전각등 10여채의 건물이 조선왕조에 의해 건립됐으나 병인양요때 모두 불타버렸다』면서 『구체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일대 조선왕실터의 조사나 복원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에대해 『77년 성역화사업때 고려궁지터에 초점을 맞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했다』면서 『현재의 고려궁지터 주변에 조선왕실터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만큼 학술적 검토를 거쳐 사적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 천진기예단/중국기예 진수 국내 첫선

    ◎한­중 수교기념,새달 6∼22일 서울88체육관서 공연/상상 초월한 균형감각·유연성/「눈속임」 철저배제,실제기술 연출/「촛불선녀」「춤추는 물」「자전거 묘기」 등 19가지 펼쳐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고유의 기예서커스가 국내에 선보인다.중국의 천진기예단이 한중수교를 기념하여 내한,내달 6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24회에 걸쳐 공연를 펼친다.관람료가 1만∼5만원으로 다소 부담스럽지만 흥행 위주의 쇼적인 냄새가 짙은 서양 서커스와는 차원이 다른 동양의 곡예연희를 구경할 좋은 기회이다. 천진기예단을 초청한 광고전문업체 대홍기획은 이번 공연이 중국공산혁명이후 최초의 직접공연을 통한 민간차원의 한중교류라고 강조하고 있다.또 최근 우리의 관심거리로 급부상한 중국인들의 정서를 즐기면서 이해하는 한마당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중국기예의 역사를 살펴보면 상당하게 설득력있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에 기원한 중국기예는 진한시대에 이르러 완성된 예술형식으로 궁정과 시정 모두에서 활발히 공연되었고 특히 역대중국황제들은 기예관람을 가장 큰 오락거리로 애호했으며 해외사신들을 위해 황궁에서 대규모의 공연이 펼쳐지곤 했다.봉건왕조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중국기예는 다른 전통예술과는 달리 예술적 가치가 널리 선전되고 보다 고양되는 행운을 누렸다.수천년에 걸쳐 일반 서민에 의해 싹트고 발전돼온 토속성과 함께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이 중국신정부의 예술관에 부합돼 집중적으로 육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서양서커스가 스릴과 눈요기의 연기에 치중한 반면 중국기예는 「눈속임」를 철저히 배제한 연기자의 실제기술을 통해 관객들을 사로잡는다.상상을 초월하는 균형감각 완력 유연성 등이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고난도의 기술연출이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중국이 올림픽에서 다이빙이나 체조에서 발군의 기량을 뽑내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현재 중국전역에는 백개를 넘는 기예단이 구성되어있고 이중 천진 북경 상해 무한기예단이 탁월한 연기력을 자랑한다.이들 기예단은 인민에 봉사하기 위해 지방공연을 자주 가질뿐 아니라 지금까지 전세계 70개국에 걸쳐 4백회 이상의 해외공연에 나섰다. 특히 천진기예단은 지난 85년10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1백회의 공연을 선사했었다.연기자 35명등 50명으로 이루어진 이번 공연단이 약 2시간에 걸쳐 선보일 세부종목은 모두 19가지.손 다리 머리를 이용하여 타고있는 10개의 촛불을 들고 연출하는 촛불선녀,밧줄양끝에 달린 사발에 물을 붓고 회전하는 춤추는 물,남녀연기자가 원주와 사다리로 공중곡예를 벌이는 공중쌍나비,아홉개의 의자를 일렬로 쌓고 여섯명이 물구나무를 서는 물구나무의자,20근이나 되는 항아리를 머리와 어깨에서 자유자재로 굴리는 항아리묘기,자전거묘기,접시돌리기 등이다. 공연기간내 화 수 목요일에는 1회(하오 7시30분),금 토 일요일에는 2회(하오 3시 7시)씩 공연이 있다.문의 724­8711∼9.
  • 중국,「대중화경제권」 첫 지지/일 등 주변국 반발 우려도 언급

    ◎중·홍콩·대만·성항 연계 【대북 DPA 연합】 왕조국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은 경제개발을 위해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를 묶는 이른바 「대중화경제권」을 창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같은 구상이 일본과 같은 이웃나라들로부터 반발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것으로 대만의 CNA통신이 27일 보도했다. 이 통신은 왕주임이 26일 중국을 방문한 대만 무역 사절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전하고 중국이 대중화경제권 창설을 지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중국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의 또다른 고위 관리도 중국이 대만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의 무역블록들로부터 압력을 받고있어 각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대중화경제권 창설구상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에 대한 각국의 반응을 고려해야한다고 말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 아 여성연극인들 도쿄 집합/새달 8일까지 자국 연극현황 소개

    ◎김아라씨의 극단 무천 「숨운 물」 초청공연 제1회 아시아 여성무대예술인대회가 오는 27일부터 11월8일까지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열린다.「여성」과 「연극」이라는 공통분모에 「소수」라는 상황까지 공유하고 있는 이들 아시아 국가 여성 연극인들은 자국의 연극현황과 전망에 대해 논의한다. 아시아 여성연극회의 실행위윈회 주최로 열리는 이번 대회 참가범위는 한국과 일본,중국등 동아시아국가들과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등 동남아시아국가들,그리고 인도,스리랑카등 서남아시아국가들의 여성 극작가와 연출가.우리나라에서는 극작가 정복근씨와 연출가 강유정,김아라씨가 참석한다.또 지난 5월 창단한 김아라씨의 극단 무천은 이번 대회에 극단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돼 극작가 정복근씨의 신작 「숨은 물」을 무대에 올린다. 이번대회는 크게 연극의 형식적인 측면과 주제적인 측면으로 나눠 세부적인 토론형식으로 진행될 예정.특히 각국의 서로 다른 여건으로 인한 연극제작상의 특수성등이 집중적으로 소개·논의될 전망이다.지역을 불문하고 여성 연극인들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예술에 대한 비전과 각국의 문제성등을 서로 나눔으로써 아시아 지역에서의 연극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한편 이번대회를 계기로 세계 규모의 여성연극인대회와는 별도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한 여성 연극인들의 모임을 정례화할 것이 확실시 되고있다. 이번 대회기간동안 도쿄 시부야 잔잔소극장에서 모두 8회공연을 하는 극단 무천은 도쿄공연이 끝나면 장소를 교토와 고베로 옮겨 일본 3개도시 순회공연에 나선다.공연작품 「숨은 물」은 침탈과 변절로 점철된 역사속에서도 끊임없이 이땅과 그안에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한 지킴이들의 정신을 오늘의 시각에서 그려낸다.우리의 전통과 실험성이 접목된 무대로 일본 관객들에게 새로운 연극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작품은 매장(모두 3장)마다 반복되는 심문자와 변절자,피의자라는 대립적인 삼각관계를 주요 구도로 한다.각 장은 삼국통일시기,이성계의 고려왕조 전복시기,그리고 구한말 일제침략기를 시대배경으로 하고있다.연출가 김아라씨는 『이번 무대를 통해 「숨은 물」의 의미,다시말해 역사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나라와 민족을 보호하는 지킴이의 정신을 극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시도했다』고 말한다.이에따라 탈놀이와 구전동요,사물놀이및 수벽치기등 우리의 전통연희와 무예,여기에 무대에서 직접 연주될 피아노선율등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있다. 이번 작품에는 신구 최재영 유영환 정규수 노영화 방은진 지춘성등 모두 7명이 출연한다.육태안씨가 전통무예지도를,박은하씨가 연주지도를,박동우씨가 무대를,그리고 강은구씨 작곡과 피아노연주를 각각 맡았다.
  • 개혁·세대교체로 새 활로 모색/중국 「14전대」 뭘 다루나

    ◎등소평이론 당지도 노선으로 채택/혁명원로 퇴진·개혁파 중용 등 인사개편 12일 북경에서 개막되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는 21세기를 향한 중국의 장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때보다 중대한 정치행사로 꼽히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동구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마저 등진 공산체제를 계속 유지시켜 나갈 수 있을지,그 생존방식을 찾아내려는 모임이라는 평가마저 나오고 한다. 아직까지는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제창한 「사회주의시장경제」이론이 중국공산당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이 이론은 경제분야에선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하되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일당독재체제를 존속시켜 나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시말해 동구 소련등의 체제붕괴를 거울삼아 자본주의 방식으로 생산력을 제고함으로써 망당망국의 위기를 벗어나 사회주의체제를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이에따라 이번 당대회는 등소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이론을 당의 지도노선으로 채택하게 된다.그 동안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중국공산당의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였으나 이번 당대회에서는 여러가지 주변정세의 변화에 따라 등이론으로 당 노선이 변경되는 것이다. 등소평이론의 핵심은 지난 1월하순 등이 직접 남부 경제특구지역을 순회하면서 밝힌 이른바 남순강화에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자본주의적인 경쟁과 시장원리를 도입해 사회주의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이다.이를 위해 개혁개방을 보다 철저히 실시하고 사회주의이념에 얽매이는 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해왔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혁명1세 원로들이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은퇴한다는 것도 또다른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보수파의 대부로 당고문위주임인 진운과 국가주석 양상곤,전인대상무위원장 만리등 원로들이 현직에서 물러나고 이들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고문위원회까지 폐지키로 했다.대신 양국가주석을 조장으로 하는 고문소조를 만들어 원로들의 의견을 종합,당에 건의하는 통로를 마련해줄 계획이다. 원로들이 물러간 자리에는 이른바 제4세대로 불리는 45세이하의 젊은 일꾼들이 등용될 것으로 보인다.이들은 지난 78년 등의 개혁개방정책실시이후 대학교육이나 외국유학 경험을 가졌고 직장생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개혁세대들이다.이같은 젊은이들은 이번 대회에 참석하는 대표 1천9백89명중 20%에 가까운 3백91명으로 발표되고 있다.중국신문들은 이밖에도 전체대표들의 평균연령이 53세로 종전보다 젊어지고 있으며 대졸이상학력도 5년전의 13차당대회때보다 11.5%포인트나 높은 70%에 이르러 대표의 지식층화도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당대회에서는 정치보고를 통해 등소평이론을 당의 지도사상으로 선언하는 사실에 걸맞게 앞으로 5년동안 당을 이끌어갈 수뇌부인사는 대부분 개혁파로 채워질 것 같다.그러나 당내 화합을 이룬다는 등의 지시에 따라 보수파와 개혁파간에 어느정도 타협을 본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강경보수파인 이붕총리를 유임시켜 강택민총서기와 함께 강­이체제를 유지키로 한 사실을 들 수 있다.당의 권력핵심인 정치국상무위원의 경우 종전 6명에서 7명으로 숫자를 늘리는데는합의했으나 정확한 구성인원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 타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10일까지 나온 정보로는 강택민·이붕·교석·이서환등 4명은 유임이 확실하고 대표적인 보수파인 송평·요의림은 물러나는게 분명하다.다만 새로 들어올 3명의 상무위원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점인데,추가화·주용기·전기운등 부총리와 군부의 유화청·양백빙,이밖에 호금도티베트당서기·정관근정치국후보위원·이철영정치국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정치국원으로는 위에서 거론된 상무위원후보들외에 지방당 서기들인 오방국(상해) 담소문(천진) 호금도(티베트) 사비(광동성)등이 확정적이고 국무원에서도 전기침·왕조국·나간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15명인 정치국원이 20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 “한·소와 국교… 국경문제 관심 가질때”(저자와의 대화)

    ◎「한국국경사연구」 펴낸 영토문제연구모임 토문회 양태진회장/1758년 백두산 정계비 건립 당시 기록 토대/광복후 북한과 중·소간 국경협약문도 수록 『올해는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지 2백80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리고 단절됐던 중소와의 외교가 수립된 의미있는 해이기도 합니다.그래서 우리나라 북방지역의 국경,영토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정책적 대응이 보다 절실한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무처 정부기록문서관리소 기록관리과장직함으로 영토문제연구학자들의 모임인 토문회를 이끌고 있는 양태진회장(53)이 30년에 걸쳐 천착한 국경·영토연구총서시리즈의 완결판「한국국경사연구」를 최근 펴냈다.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서는 방치되다시피한 북방국경문제를 「한국변경사연구」(1989),「한국영토사연구」(1991)등 일련의 저작활동과 함께 끝맺음하는 저자 집념의 산물로 평가되고 있다. 『국경사연구는 백두산정계비건립에 참가했던 인사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상황을 생생하게 기술한 정계비건립과정을 담았어요.또 토문강을 경계로한 설책에 관해 사실적으로 고증함으로써 동위토문에 대한 한중간 해석상의 차이를 해소하는 자료를 제공하는데 의미를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특히 두만강하류의 국경 경계표인 토자비가 2번이나 옮겨 세워져 북방영토와 국경상의 손실,민족적 굴욕을가져왔다는 지금까지 국내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공개했다. 또 1800년말부터 청조가 간도지역거주민을 정책적으로 축출해 왔음을 알려주는 비시라는 공고문을 일본의 간도외교관계문서더미를 뒤진끝에 찾아 수록하는 개가를 올렸다.저자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지인들의 국경의식고조와 정계비문 해석및 국경선 설정에 따른 감계담판당시 청측의 억지 논리에 대해 현지답사와 「북여요선」등 역사적 사실을바탕으로 대응하고 있다.이밖에도 광복이후 베일에 가려졌던 북한과 중소간의 국경관할문제관한 협약문,국경침범사건사례등 귀중한 사료도 실었다. 『영토사연구분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것이 관천사료입니다.따라서 조선왕조실록 동문휘고 통문관지 증보문헌비고등 각종 관찬문서의 국경,영토관련사항을 발췌,정리 수록함으로써 사료의 정확성과객관화를 기했습니다』 그는 이번 「한국국경사연구」발간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1902년 변계호적안」과 「근세북방국경관련사료초록집」등 2권도 새로 묶어 펴냈다.국제법상 영유권분쟁에 있어 거주민의 수효와 이들의 의사가 상당한 작용을 한다는 점에 눈을 돌렸다.이렇게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만주지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 변계이주민 5천여명의 호적을 정리 수록하는것은 중요한 일.왜냐하면 영토사연구에 매우 의미심장한 인적상황자료가 된다는 생각에서 이 일에 전념을 쏟았다. 『우리의 북방국경 영토문제는 1백년동안이나 사실상 방치 돼온 셈입니다.최근에야 비로소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당사국들과 국교를 맺었지만 이로인한 이해와 갈등은 점증될 것으로 예견할 수가 있죠』 저자는 특히 중국이 최근 새로운 영해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고 소련도 시베리아지역및 두만강하구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이는 18∼19세기에 밀어 닥쳤던 한반도와의 국경,영토분쟁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견해때문이다.
  • 고도 부여/백마강 굽이굽이 백제향기 물씬(주말여행)

    ◎부소산 오르니 낙화암이 반기고/절경에 취하면 3천궁녀 환영이…/정림사지5층석탑 이르면 여심은 절정 산이 거기에 있어 산을 오른다지만 거기에 있는 건 산이나 자연만이 아니다.강토의 옛 왕궁과 왕국이 여기저기서 우리의 발길을 기다린다. 잊었던 역사의 고도를 찾아가는 길은 산을 탈 때보다 평탄하다.그러나 백제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길잡이가 되어줄 유물 유적이 다른 왕조에 비해 드물고 조촐한 까닭이다.그러나 백제가 우리에게 잃어버린 왕국일 리는 만무하다.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이 자리잡았던 충남 부여읍을 찾는다.그럴사한 복제품을 빚어볼 밑바탕마저 대부분 멸실된 형편이지만 흔적과 흔적을 이어가면 백제의 숨결이 모아진다. 이 숨결은 희미하나 분명 복제품이 아니었다.부여읍에서 북쪽으로 30여㎞ 위에 있는 공주시내를 가로지르는 금강이 이 애잔한 숨결의 첫 판막을 연다.고구려에 금싸라기 한강유역을 뺏긴 백제는 475년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538년 사비(부여)로 재천도 했다. 부여땅을 적시면서 금강은 백마강으로 불린다.660년 신라·당 연합군에 패망하기까지 후기백제는 금강에 운명의 닻을 던졌지만 이 닻은 백제를 권토중래시키기엔 힘이 모자랐던 셈이다. 그래선지 금강은 한강에 비해 속절없이 부드러운 인상이다.부여 사비왕궁의 진산인 부소산과 맨살을 부딪치며 흐르는 백마강에 이르러선 이 느낌이 극도로 고양된다.부드러움이 극에 이르면 젊은 꽃잎이 스스로 떨어질 수도 있으리라.여기가 낙화암,3천 궁녀가 강물로 투신한 곳이다. 부여에 입성하면 누구나 맨먼저 부소산 절벽의 낙화암에 발을 디뎌보고 백마강 유람선에 오른다.부소산은 높이가 고작 1백6m에 그치고 군데군데 가설된 영일루 반월루 백화정 사비누 등의 누각은 일제시대나 해방후 작품이지만 백마강과 낙화암의 전설적인 만남이 있기에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그러나 부여에는 왕궁은 물론 흔한 중창 사원건축 한동 없다.커다란 초석이 즐비해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소산 남쪽 기슭에 대신 국립부여박물관이 번듯하게 서있다.고대 건물을 하나도 닮지 않은 외양이 처음엔 눈에 거슬리지만 한참 지나면 원형이 멸실된 백제건축이나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 잡혀질 듯하다. 박물관 전시품은 눈여겨 볼만하다.특히 도기류의 독특함과 기와·전 문양의 선진성에 주목하라고 전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부소산에 등을 돌리면 부여읍이 널찍하게 펼쳐진다.읍내 외곽에 위치한 능산리 고분군과 동남리 궁남지가 손짓한다. 뭔가 미진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읍내 중심지에 위치한 정림사지 5층석탑을 참관한다.통틀어 3기뿐인 삼국시대 제작 탑파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아 1천4백년전 건립당시의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거기에 정림사터는 담장을 두른 경내가 1만평에 달하지만 5층탑과 고려시대 불상외에는 다른 건조물이 일체 없다.삭막하고 허허롭게 여겨지던 넓은 공지가 5층탑의 건축미에 공명돼 꽉 차오른다. 1천년을 건너뛴 백제와의 교감이다 ▷길잡이◁ ○…서울∼부여행 버스는 양재동 남부터미널에서 20분마다 출발한다.천안 대전 논산 등의 터미널에서도 부여행 버스가 5∼10분 간격으로 있다. ○…부여박물관은 일요일에 문을 여는 대신 월요일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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