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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조실록」 국내서 첫 출간/북한 민족고전연구소서 번역한 전4백권

    ◎여강출판사,북측과 출판권 계약따라 성사 북한에서 번역한 「리조실록」전4백권이 남북간 출판권계약에 의한 최초의 책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여강출판사(대표 이순동)가 「이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펴낸 이 책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1960년대에 착수하여 1991년12월31일 완간한 것. 이번에 전질이 영인돼 나온 것은 이대표가 지난 1992년1월23일 중국에서 이 책의 저작권자인 북한 민족고전연구소 윤춘현부소장과 직접 만나 「리조실록출판권설정계약」을 맺음에 따라 성사됐다. 여강출판사가 지난 7월 북한측과 최종 합의한 「리조실록출판권설정」내용은 1질당 보급가의 10%를 판권사용료로 한다는 것.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용료 지불이 불가능한 점을 감안해 여강출판사가 선임한 변호사가 해당금액을 적립·공증한뒤 지불조건이 마련되는대로 수탁금액을 사회과학원에 입금시키기로 했다. 여강출판사가 이번에 발간한 「이조실록」은 모두 5백질.가격은 권당 2만원씩 한질에 8백만원으로 북한측에 주어야할 저작권료는 4억원에 이르는 셈.출판사측은 현재 북한측과의 계약이행을 위해 우리정부 및 북한측과 다각도의 접촉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남쪽에서는 「조선왕조실록」,북쪽에서는 「리조실록」이라 부르는 이 실록은 조선시대 25대왕,4백72년간의 사실을 1천8백93권,8백88책(태백산본 기준)에 담은 방대한 역사책.남한에서는 아직 전질이 나와있지 않고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분담하여 1995년까지 4백41권으로 완간할 예정이다. 「리조실록」을 번역한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는 1954년 백남운등 역사학자들과 한학자들 중심의 「과학원 고전편찬위원회」로 조직된뒤 1963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편되어 현재 박사 12명과 준박사 50여명등 모두 1백50여명의 연구사가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는 지난해 일본에서 수입된 「리조실록」 10질이 성균관대를 비롯한 각 대학 및 국립중앙도서관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리조실록」은 북한측과 정식계약을 맺은 여강출판사외에도 A출판사가 국립대인 P대에서 유출된 원본을 영인한 복사판을 곧 시판할 예정으로있어 북한원전에 대한 저작권논쟁을 한바탕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철거 선후론(외언내언)

    구조선총독부 건물철거에 대한 반세기동안의 현안이 결말지어졌나 했더니 철거 선후를 둘러싼 열띤 공방전이 한창이다. 구총독부건물을 먼저 헐고 나중에 박물관을 짓자는 주장과 먼저 짓고 나중에 헐자는 주장이 맞물려 서울대 교수들까지 시기에 대한 찬반서명전등 양측 지지도가 팽팽하다. 먼저 철거해야 한다는 측은 5천년 찬란한 역사유물을 식민지청사로 쓰였던 치욕의 건물에 보관하는 것은 모순이며 이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는 민족의 오랜 숙원으로 정부의 철거결정 자체가 바로 그것을 해결하는 차원의 결단이라는 주장이다. 또 후철거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을 함부로 옮기는 것은 유물보존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박물관 부지선정·설계도 확정치 않은 상태에서 박물관 철거만 논의하는것은 잘못된 일이고 유물을 두번 옮기는 것보다 한번 옮기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양쪽 다 우리 문화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사랑으로 천번만번 고맙고 옳은 말이다.어쨌든 오랫동안 논란되고 유보되고 지체되던 총독부 건물을 철거키로 한것은 이미 국민적 합의가 끝난 일이다.이제 철거결정이 내려진 만큼 언제 허느냐,이를 헐면 박물관은 어디에 짓게 되며 짓는동안 유물은 어디에 보관하느냐만 남았다.물론 조금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당연히 감수돼야할 과정이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이전의 시비 이전에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 복원을 잊어선 안된다.그냥 박물관을 허는 것이 아니라 그자리에 경복궁을 다시 짓는 일이 중요하다.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표현으로 총독부건물의 존재를 인정하려 든다면 바로 그자리에 민족사의 상징인 경복궁이 있었고 경복궁 복원이야말로 우리의 허물어지고 짓밟혔던 역사를 회복시키는 민족적 자긍심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폭넓고 다각적인 의견 수렴으로 역사의 산교육장인 훌륭한 박물관을 기대해 보자.새집을 지어준다는데 유물이 훼손될까 이전을 꺼리는 것은 이전기술까지도 의심해야 된다는 우울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 고전의 보존(외언내언)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조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했다.규장이란 임금의 글씨와 그림을 뜻하는 말.창덕궁 비원의 부용정 일대에 세워진 규장각엔 세조의 친필 현액이 걸리고 역대 국왕의 시문·서화등이 보존됐다.이곳을 혁신정치를 위한 기획연구기관으로 활용,도서를 수집 발간하기도한 정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강화도 행궁에 비상용 서고,즉 외규장각을 짓는다.규장각을 만든지 5년만인 17 81년이었다.강화도의 외규장각은 「강도외각」이라고도 불리고 규장각은 궁궐 안에 있다 하여 「내각」이라 불리기도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약탈된 외규장각도서가 한불 정상회담 결과 규장각으로 돌아 오게 됐다.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의 규장각 귀환은 우리에게 일말의 불안감을 안겨준다.규장각 도서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일제의 조선강점후 조선총독부를 거쳐 경성제대로 이관됐다가 해방후 서울대가 관리를 맡게된 규장각은 연구관리인원과 예산부족으로 귀중한 자료들을 사장시키고 있는 형편.조선왕조실록,일성록등 5종 3천8백33책의 국보를 포함 총22만여점의 보관자료가 해제작업은 커녕 목록도 완전히 작성되지 않은채 서가에서 먼지를 둘러쓰고 있다.심지어 조선왕실의 인쇄원판 1만8천여장은 경복궁 보관 당시 묻은 비둘기배설물 조차 닦아지지 않은 상태다.자료의 영인작업은 겨우 20%에 머물러 있다.규장각 자료를 제대로 정리 연구하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그만큼 규장각은 우리 문화유산의 보고다. 문화재의 반환도 중요하지만 국내 문화재의 보존에도 눈을 돌려야 겠다.규장각뿐만 아니라 장서각과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희귀도서들도 관리부실로 2∼3년후면 보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될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정부는 물론 기업이나 개인들도 우리 문화유산의 보존에 적극 나서야겠다.
  • 지맥잇기(외언내언)

    임진왜란때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와서 놀란 것은 조그마한 나라에 인물이 많다는 점이었다.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조선의 풍수가 좋아서 그렇다는 해석이었다.이 많은 영웅호걸들이 뒤에 명을 위협할까 두려운 나머지 이여송은 풍수지리에 밝은 두사충(뒤에 조선에 망명)을 시켜서 명산의 요소요소에 쇳물을 부어 지맥을 끊었다고 한다.사실여부야 알수 없지만 이러한 전설은 전국 여러지방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민족은 일찍부터 땅에 지맥과 혈맥이 있음을 굳게 믿어왔다.고려말이후 성행한 풍수지이의 영향일 것이다. 그래서 지맥을 끊는다는 것은 우리조상들에게 상상할수도 없는 커다란 변고였다. 일제가 이땅에 철도를 부설할때 지맥이나 혈맥을 끊는다해서 도처에서 주민들의 결사반대에 부딪쳤던 기록도 보인다. 해체키로 최종결정된 구총독부건물만 해도 그렇다.식민지 통치의 상징으로 일제가 10년이나 걸려 완공한 이 건물은 조선왕조 5백년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면에,그것도 4백여칸의 전각을 헐어내고 세운 것이다.왕궁의 정기를 끊고 또 국민들의 시야에서 경복궁을 차단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경복궁터는 고려때부터 명당지로 지목되던 곳.일제는 경복궁 경내에 흐르던 명당수의 수로까지 바꿔놓았다. 지난 일요일 보은 속리산 문장대에서는 바위속에 박힌 쇠말뚝을 뽑아내는 작업이 벌어졌다.해발 1천m의 정상 바위틈새에 박혀 있던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지맥을 끊기 위해 박은 것이라 한다. 몇년전에는 서울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도 16개의 쇠말뚝을 뽑아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일이 있다.당시에도 『나라의 기운을 끊는 풍수적 주술행위』로 판명됐었다.과학적 근거가 없는 「지맥끊기」를 서슴지 않았던 일제였으니 식민지 영구지배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했을 것인가.오욕의 역사,그 편린을 우리는 녹슨 쇠말뚝에서 보게 된다.
  • “고구려인”“중국인” 논쟁(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5)

    ◎평남덕흥리 고적 묻힌 「유주자사 진」/“유주는 북경일대… 4C 고구려가 지배”/북한학자/“채색벽화 중국설화 표현… 중국인 분명” 중·일 학자 4세기 후반 고구려가 국토를 크게 넓혀 북경을 포함한 중국 동북부 일대를 지배했었을까.한국과 중국 양쪽의 어느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같은「사실」이 한 무덤의 발굴을 계기로 학계에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76년 평남 남포시 강서구역(옛 강서읍)덕흥리 무학산 기슭에서 발굴된 덕흥리고분은 찬란했던 고구려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었다.전실과 후실 2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이 석실분은,무덤 입구의 길인 선도(연도)와 내부통로인 묘도의 천장을 제외한 모든 벽면에 채색화가 그려진 벽화고분이기도 하다. 벽화는 무덤의 주인인「유주라사 진」이 유주소속 13개 군 태수로 부터 문안을 받는 장면,소수레에 탄「진」이 말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관내를 행차하는 장면등을 포함하고 있다.또 그의 일대기를 적은 묘지명등 6백여자의 먹글씨가 발견돼 4∼5세기를 걸쳐 살았던 한 인간의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진」은 □□(판독 불가능 글자)군 신도현 사람으로 건위장군·국소대형·요동태수·동이교위·유주자사등을 지낸 뒤 영락18년(광개토대왕 18년,408년)에 죽었다. 이같은 묘지명의 내용 중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이 그가「유주자사」를 역임했다는 부분이다.고구려 고분에 묻힌 인물이 유주를 관할하는 자사를 지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현재의 북경일대인 유주를 지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학설은 고분을 발굴한 북한에서 처음 나왔다.79년 북한학자 김용남은 논문을 통해▲신도현이 현재의 평북 운전·박천일대이며▲「진」이 역임한 관직이 모두 고구려의 벼슬이름 이므로「진」을 당연히 고구려 사람으로 보았다.그는 따라서『전연이 멸망해 북중국 일대가 혼란에 빠진 370년 무렵 고구려가 서쪽으로 진격해 유주를 점령,13군 75현을 두었으며 이때 진을 유주자사로 임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서 나왔다.김원용박사는「진」을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추정했다.그의고향인「신도」를 고구려의 땅이름으로 본 것은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하북성에 같은 지명이 있는만큼「진」은 중국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그는『진은 중국 왕조에서 유주자사까지 지낸 고위관리였으나 뒤에 고구려로 망명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논쟁은 결국「진」의 국적이 어디인가로 바뀌었다.그가 속한 나라가 곧 유주를 지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학계는 이후 ▲무덤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라는 점 ▲묘지명에는 유주에「13군 75현」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중국 왕조중에는 이처럼 군을 구성한 적이 없다는 점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83년부터는 중국 학계가,87년부터는 일본 학계가 논쟁에 가담해 한국 학계와 함께 일제히「진=고구려인」설을 부인했다.이들은 고구려의 유주점령을 기록한 역사서가 일체 없는데다 벽화 내용이 주로 중국의 설화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양쪽의 주장은 여지껏 팽팽히 맞서 있다.그러나 만약「진」이 중국인임이 밝혀진다 해도,그를 받아들여 호사한 무덤을 꾸며주었던 고구려의 국력과 관대함은 더욱 돋보일 뿐이다.
  • 외규장각고서 297권 돌아올듯

    ◎미테랑 “문화재반환” 표명 계기로 알아보면/불,강화도서 약탈… 국제법도 반환명시/직지심경·왕오천독국전은 대상서 제외 될듯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오는 14일 공식 방한을 앞두고 파리박물관에 보관중인 우리의 고문서 반환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미테랑대통령은 8일 주불 한국특파원들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발라뒤르총리가 국립도서관등 관계기관에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고 밝힌 것이다.프랑스대통령이 고문서 반환문제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그런만큼 반환되리라는 기대가 어느 때보다 높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직접 이 문제를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뭔가 복안이나 결심이 서 있었기 때문에 방한 시점에 맞춰 이 문제를 거론한 것 아니겠느냐는 지적이다.그러면서 아직은 정부가 나설 상황이 아니라는 조심스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먼저 프랑스정부와 국립도서관의 반환 방침이 정리되어야만 절차·목록등에 관한 외교적 접촉을 취할수 있다는 자세이다. 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반환될 경우 다른 나라로부터 연쇄적인 문화재 반환요구가 발생하는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여기에 반환에 따른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예컨대,한국학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도서나 다른 문화재와 완전교환 또는 영구 임대 형식으로 교환하는 방법,아니면 국립도서관에 일정액의 기금을 내고 영구 임대형식으로 반환받는 방법등 다양한 방안들이 검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어떤 고문서를 반환받을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현재 거론되고 있는 문서는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과 왕오천독국전 원본,외규장각도서 등이다.이들 문서는 모두 국내에는 없는 세계적인 희귀본이다.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고,왕오천독국전원본은 신라 고승 혜초가 쓴 인도여행기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등 동방의 풍물을 한눈에 볼수 있는 귀한 책자이다. 1백91종 2백97권을 통칭하는 외규장각도서는 조선왕조실록,왕실의 의전절차를 기록한 「의궤」등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를 정확히 파악할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그런데 반환 협상에 중요 요인이 되는 흘러들어간 경위가 제각각이다.고려 우왕 3년,즉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은 구한말 프랑스외교관이 수집해간 것으로 알려지고있다.왕오천독국전은 1908년 프랑스 탐험가였던 펠리오가 중국 돈황의 천불동을 탐사하면서 발견,자기나라로 가져간 것이다. 반면 외규장각도서는 조선왕실이 외침에 대비,강화도에 지은 행궁 도서관에 보관된 문헌들인데 1866년 프랑스 로즈제독이 약탈해 간 것으로 프랑스 기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문헌은 지난 75년 파리국립도서관 사서였던 박병선씨(여)의 노력으로 발견돼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경부고속전철 기종의 프랑스 테제베선정등으로 한·프랑스관계가 어느 때보다 돈독해지면서 다시 관심을 끌었고,미테랑대통령의 긍정적 입장 표명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정부의 한 관계자는 『반출경위로 볼때 반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외규장각 도서』라고 말했다.국제법은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원소유국에 반환토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 「효자동 사랑방」 오늘 문연다

    ◎역대 대통령비서실장 공관… 5백50평/서울변천사 한눈에… 국빈들 선물 전시 「효자동 사랑방」이 2일 상오 9시부터 일반에게 개방된다. 역대 대통령비서실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을 서울시가 다듬고 꾸민 효자동 사랑방은 5백50평의 부지에 2층 건물로 1층 문을 열면 서울6백년 전시실과 시정홍보실이 나온다. 5백99년전에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때부터 조선왕조 5백년의 변천,근·현대를 거쳐 오늘의 서울이 있기까지의 흐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2층으로 올라가면 단연 인기를 독차지할 국빈선물전시실이 나온다.이곳에는 그동안의 대통령들이 재임기간중 외국의 원수등으로부터 받은 선물들로 가득하다.모두 1백10종 1백98점의 희귀선물. 박정희,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과 김영삼대통령이 받아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3백70여점가운데 고르고 고른 선물들이 권역별로 전시돼 있다. 또 장신구들만 모은 전시관과 북한관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선물들은 넥타이핀·기념주화·브로치등에서부터 상아조각품·산돼지 이빨·주류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상대국의 민속품이거나 그 나라를 잘 상징할 수 있는 것들로 국가원수에게 보내진 물건들인 만큼 민속과 섬세한 공예를 알기에는 그만이다. 김영삼대통령이 취임 6개월여동안 받은 선물 52점가운데 8점이 전시돼 있다.나카소네전일본총리로부터 받은 「정치와 인생」한글판 책이 눈에 띈다. 북한관은 노태우전대통령이 연형묵북한총리로부터 받은 선물등이 전시돼 있는데 불로술·들쭉술·인삼주·자개원형함·은수저등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박정희전대통령이 태국총리로부터 받은 「승전고」.70㎝쯤 되는 상아뿔과 양끝에 징이 달려 있는 승전고는 사랑방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서울시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용시간은 매일 상오9시부터 하오6시까지 개방된다.월요일은 휴관.
  • 전 전대통령 대 국민 발표 전문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새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계신 이때,제가 새삼 재임중의 일에 관해 번거롭게 말씀을 드리게 된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 일기가 불순하여 농사마저 어려워져서 농민 뿐만아니라 많은 국민의 걱정이 더해가고 있는 터에,그동안 정부가 두번이나 바뀐 6∼7년전의 일이 또 다시 시비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대해 그저 민망할 따름입니다. 평화의 댐 건설은 제가 현직에 있을때 대통령으로서 정책판단을 하고 결정했던 일입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지난 수년간 국회의 본회의와 관련 상임위원회,특히 1988∼89년의 국회특별위원회 등에서 되풀이 다루어졌고 더러는 일부 정당차원에서의 조사도 있었던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평화의 댐 축조에 관계했던 공무원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필요한 자료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고있으며,저 자신도 1989년 12월의 국회증언에서 말슴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 정치권과 언론등에 의해 다시 평화의 댐에 관한 의혹들이 잇따라 제기되었고,저 스스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결과 많은 사실들이 왜곡인식되고 있으며,이것이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우려도 없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현상을 전직 대통령으로서 모른척 할 수 만은 없고,또 그것이 저와 관계된 사안인 만큼,이 기회에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하게 된 경위와 배경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역사를 돌아볼때,조선왕조 선조임금때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일본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고,율곡 이이선생이 10만양병을 제창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비록 국고가 다소 축이 나고 민생이 어려워졌을는지는 몰라도 왜적의 침입을 받아 수년간 전국토와 백성이 유린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파적 입장때문에 『침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잘못 보고한 통신부사의 말을 따른 결과 엄청난 국난을 자초한 셈이 된 것입니다. 만일 그때 10만의 군사를 길러 대비했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침략을 당했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세의 우리들은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영세중립국도 군대는 갖고 있고,수 백년간 전쟁을 모르고 살아온 나라들도 만일의 외침 가능성에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53년 휴전이래 북한의 전면남침이 없었다고 해서 40년동안 매년 국가예산의 3분의1을 방위비에 투입하여,북한의 전면전도발에 대비하도록 한 역대 대통령들의 정책판단이 단순히 「세금의 낭비」를 가져왔다고 비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옛말에 『한나절 싸움에 이기기 위해 1천일에 걸쳐 군사를 기른다』(양병천일 용어일일)고 했는데,9백99일동안은 전투가 없었다고 해서 공연한 정성과 시간을 투입했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국방문제는 본질상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이 금강산주변의 산악지대에 길을 닦고 도수터널 공사를 하는 등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국내외 관계기관으로부터 처음 입수한 것은 1986년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어 같은해 4월에는 북한의 방송이 금강산 발전소계획을 확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뒤 저들이 댐 공사의 착수를 공식 발표한 10월까지 수개월동안 북한의 동향과 의도를 면밀히 주시,분석한 결과 금강산댐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드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첫째 그들이 전력과 산업용수 확보를 위해 댐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화력발전소를 만들거나 다른 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전력생산단위가 3∼4배 높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댐이 완공되면 그들 주장대로 산업용수 확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댐 건설로 인해 금강군등의 농경지가 수몰되어 22만t 정도의 미곡감산이 예상되는 바,이것은 채산성이 안맞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경제성도 채산성도 없는 댐을 만들기 위해 그 험준한 지역에 인민무력부 주도 아래 수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해서 난공사를 강행하는 뜻은 분명히 군사적 목적 때문이며,그것은 우리에게 곧 수공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10만 병력의 상호감축을 제의했는데,이것도 감축된 병력을 댐공사에 투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으며,실제 그들은 5만명을 초기공사에 투입했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가 하는 사실과,또 그들이 우리에게 기상천외 하고 악랄한 도발과 위협을 얼마나 많이 되풀이 해 왔는가 하는 점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일입니다. 6·25는 물론 1·21사태,남침용땅굴,아웅산 암살 폭파사건,KAL기 폭파사건 등 전쟁광이나 할 수 있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바로 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전과가 있는 북한이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움직임을 보인다면,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 따져보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위에 열거한 사건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기는 커녕,모두가 우리의 자작극이라고 덮어 씌워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서둘러 착공한 금강산댐이 인위적으로 폭파되거나 사고로 무너질 경우 한강수계에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그들의 선의를 믿고 팔짱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설혹 「수공의도가 전혀 없다」는 그들의 말을 믿어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 1백% 확실한 것이 아니고,다만 1%의 의심이라도 남는다면,그리고 그 1%가 우리의 생존권에 위협이 된다면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으로서는 대응책을 찾아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는 북한공산집단이 방송등 그들의 선전매체를 통해 『서울올림픽을 결코 수수방관하지 않겠다』고 되풀이 위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고위당국자들이 「금강산댐을 만들어서 비상시에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 시내에서 물에 잠기지 않는 아파트는 하나도 없다」「남조선 것들이 올림픽한다고 우쭐대지만 금강산댐만 만들어 놓는 날에는 서울이 물바다가 될것」이라고 공언했다는 사실을 귀순한 북한관리들이 증언한 바 있습니다. 10여일 전에 귀순했다는 북한군 장교도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이 인민무력부에 대해 인민군의 전투 준비완성에 큰 몫을 할 금강산댐의 건설을 지시했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들이 귀순한 것은 제가 이미 퇴임하고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권안보를 위해 금강산댐의 수공가능성을 조작했다」고 비난 받는 저를 변명해주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오늘에 와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여러 이점들을 지난 몇년간 헛되이 흘려 보냈다는 반성이 있지만,어쨌든 서울올림픽이 우리의 국가발전과정에서 선진국 도약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울올림픽을 반드시 성공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당시 우리의 시대적 과제요 국민적 합의였습니다.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1986년에서 올림픽 때까지의 그 엄청났던 민족적 열의와 고조된분위기가 너무도 허무하게 사그라져 버린 오늘의 시점에서는 실감하기 어렵지만,그때 우리는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를 연달아 반쪽 올림픽으로 치른 국제올림픽 관계자들도 혹시나 서울올림픽마저 북한의 방해때문에 실패하지 않을까 크게 걱정하고 불안해 했습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소련을 비롯한 동구가 붕괴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북한의 호전적이고 경직된 자세는 변함이 없지만,1986∼87년 당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승천하는 용」이라는 찬사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던 우리와의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열세에 몰린 나머지 극도의 초조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운이 뻗어 오르던 그 소중한 시기에,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침략기도를 사전에 봉쇄하지 못해서 전쟁이 일어날까봐 애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안보를 확고히 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최악의 상황,있을 수 있는 모든 위협의 가능성까지 철저히 점검해야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정부가금강산댐에 관해 처음 발표할때 2백억t이라고 한 것은 정보입수 초기에 댐건설 현장으로 추정되는 위치의 지형자료등을 토대로 계측한 그 지역의 용적의 최대치라고 이해했으며,나중에 외국전문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와도 일치한 것으로 보고 받았습니다. 북한이 겉으로 내세우는 건설목적과 규모야 어쨌든 일방적 댐건설이 공유하천이용에 관한 국제관례에도 어긋나는 일인 만큼 정부로서는 공사를 중단하라고 여러차례 촉구하였습니다. 금강산댐이 그들 주장대로 전력과 산업용수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우리 쪽에서 전력을 공급하는등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는 대안도 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우방 여러나라는 물론 국제연합과 세계 대댐 학회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일방적이고 무모한 댐건설을 중지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제의를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하였습니다.그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전쟁을 각오하고 금강산댐 공사현장을 폭격할수는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피하게 정부는 대응댐의 축조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측이 공사에 관한 사항을 극비에 부치고 있어서 그 시점에서는 댐의 정확한 위치나 규모등을 모두 추정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따라서 우리측도 대응댐에 관해 실무자사이에 여러가지 다른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대응댐 공사를 2단계로 나누어 추진하자는 데는 쉽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1단계로는 우선 북한이 3억t 정도 가물막이 공사를 끝냈을때의 위력에 대비하는 규모로 댐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1984년 홍수때의 수량 9.4억t과 북한의 가물막이댐 3억t을 합쳐 12.4억t 정도의 수량이 될 것인바,이에 대응하는데에는 평화의 댐 5.9억t과 화천댐등 기존댐의 수위조절 저수량 7억t을 합친 12.9억t으로서 최소한의 응급책은 된다고 계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단계공사는 금강산댐의 최종적인 규모를 확인해가면서 그들의 공사 진도에 맞추어 추가하여 순차적으로 추진할계획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1단계 공사가 끝난 상태로 있는 평화의 댐이 물을 담고있지 않은 모습으로 있어서,일부에서는 「막대한 국민성금을 삼긴채 쓸모없이 서 있는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라고 비판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만,덩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것 자체가 평화의 댐의 본래의 「쓸모」인 것입니다. 발전을 하거나 산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댐이 아니라 유사시 북으로부터의 수공을 막는 일종의 「방벽」의 성격이 그 1차적 기능인 만큼 일반적인 댐의 모습과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최근 대전 엑스포 현장에서도 몇시간의 호우로 인해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었고,서울의 한강변은 몇년에 한번씩 홍수가 져 큰 물난리를 겪는것이 우리 실정인 것입니다. 1984년 홍수때에는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소양댐이 범람하고 파괴되더라도 수문을 열지않고 버텨야 하느냐,아니면 서울이 물바다가 되더라도 수문을 열어야 하느냐하는 심각한 기로에 섰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서는 2백억t이 아니라 수억t만 더 쏟아져내려와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으로부터 2백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70억t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거나 서울이 마비될 정도의 피해를 입게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단계 공사를 조기에 착공한 것은 북한이 초기에는 5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1986년 가을에는 15만명의 투입을 결정하는등 공사를 급히 서두르는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동향은 단기적 군사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은 곧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를 갖게 한 것입니다. 당국의 분석으로는 3억t 정도의 저수량인 가물막이 댐은 북한이 5개월 안에 만들수 있다는 계산이었고 따라서 정부로서는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 우기이전에 최소한 10억t 안팎의 수공만이라도 막을 수 있는 5.9억t 규모의 1단계 댐을 조기착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부 잘못 알려져 있듯이 공사를 하다가 흐지부지 중단된 것이 아니고,예정했던 1단계 공사는 당초 계획대로 1988년 6월에 완공된 것이며,현재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북한쪽의 공사진도에 따라서는 2단계 공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계획이 서 있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화천댐등 우리의 기존댐만으로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평화의 댐은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그것은 비현실적인 얘기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수공에 대비해서 우리의 댐들을 모두 비워놓고 있어야 하는데,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은 평화의 댐을 만드는 비용보다 더 많을 뿐 아니라 화천댐은 수공을 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지질학적 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듣기로는 지난해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이 금강산댐에 관한 교시를 발표하고 건설사령관인 인민무력부장에게 군병력의 집중투입을 지시하는등 직접 공사를 독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강산댐과 수공위협의 가능성은 분명히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평화의 댐이 지금은 우리의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서,또 평화의 댐을 건설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금에 와서는 실감할 수 없다고 해서 그때의 일들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속에 지난 일을 오늘의 상황과 기준에 서서 따질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단임의 실현으로 우리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부이양을 이룩하는 것이 저에게 부하된 최대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신념을 시종일관에서 지켜왔고 또 실천하였습니다. 평화의 댐 건설을 착공할 당시 저로서는 잔여 임기를 불과 1년 남짓 앞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시국이 다소 어려웠다고 하더라도,있지도 않은 북한의 위협을 날조해가면서까지 1년 남은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그렇게 허약하고 부도덕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저는 믿고 있고 또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6·25때 「맥아더」원수가 막료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해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일도 있듯이,최고결정권자는 국가의 이익과 백년대계등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부분적 진실에만 집착하기 쉬운 특정기관이나 특정인의 판단에 구애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댐과 관련한 사항도,모든 정보보고와 판단자료를 제가 검토하고 심사숙고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지시한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간절히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1988년과 1989년 국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기회에도 호소한 바 있습니다만,지난 날의 허물과 잘못은 모두 저에게 물어 주시고,이제는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미래를 지향하면서,보다 살기 좋고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데 매진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비록 재임중 과오도 많았고 부덕하고 불민한 이 사람이지만 그 점만은 국민 여러분께서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경제성도 없는 금강산댐을 빨리 만들라고 오늘도 인민무력부장을 다그치고 있는 김일성 부자가 그 대응댐을 만든 전직 대통령의 「저의」를 거듭거듭 따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안타깝고 답답해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덧붙여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제가 재임중에 정부와 공직자가 한 모든 일은 그것이 어떤 경로로 입안되어 어떻게 실행되었든,그것은 최종보고받고 결정하고 지시한 것은 대통령이었던 저였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비록 퇴임한 후인 지금에 와서도 모두 저에게 귀착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부 실무자나 전문가들의 보고,건의와는 다른 내용의 결정을 내린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두환씨 감사원 회신(전문) 1,본인은 1993년 8월16일자 귀원의 「평화의 댐 감사관련 질문서를」를 받고 본인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대응방법에 대하여 원로들과도 의견을 교환한 바 있습니다.그런데 법률적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준 분들은 대통령 소속하에 있는 감사원이 대통령의 정책결정의 배경·경위와 타당성에 대하여 직무감찰을 하는 것은 헌법 제97조와 감사원법 제24조의 규정내용에 비추어 볼때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밝혀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헌정사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선례가 된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귀하도주지하고 계시겠지만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써 행하여 지는 것이 원칙이며 평화의 댐에 관련된 정책결정 역시 관련 부처에서 작성된 문서로써 행하여 졌습니다. 따라서 귀원의 감찰활동상 필요한 자료와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보관중인 관련문서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 순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평화의 댐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는 지난 수년간 국회차원에서도 다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이르러 또다시 세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칫 정부의 안보정책에 대한 불신이 초래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본인은 대통령으로서 평화의 댐 축조를 결정한 배경과 경위에 대하여 모든 국민에게 아는대로 설명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별첨한 「평화의 댐에 관하여」는 이러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혜봉스님,「친일 불교론」 상·하 2권 펴내

    ◎일제하 불교계 친일행위 고발/「승려의 도성 출입금지」해제후 본격화/징용권장 논설 발표·군용기 5대 헌납 일제 치하 조선불교계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파헤친 「친일불교론」 상·하(민족사간)가 나왔다. 임혜봉스님(46)이 일제하 불교간행물과 신문등 각종사료를 토대로 2년동안의 노력끝에 펴낸 이 책은 불교계는 물론 종교계 전체에 자성의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졌다.1장에서부터 4장까지는 일제의 조선침략이 시작된 1876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조선불교계의 친일종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했다.이어 5장은 이회광 이종욱 권상로 김태흡 등 친일 거두 승려 4인의 행적을,6장은 불교계의 창씨개명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불교의 친일은 1895년 일본승려 사노(좌야전려)의 건의로 조선왕조의 「승려들의 도성출입금지」 규정이 해제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이후 조선총독부는 1911년 사찰령을 반포,조선사찰을 30본사로 분할해 불교계의 힘을 분산시키고 본사와 말사의 주지 임명권을 총독에게 부여함으로써 종무행정과 불교재산은 물론 교리까지 철저히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불교의 친일행각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본격화돼 1941년에서 1945년에 이른 태평양전쟁때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당시 불교계 인사 30여명은 황도불교라는 말을 들먹이며 징병을 권장하는 논설을 171 편이나 발표했다.또 1942년에는 군용기 5대를 「조선불교호」로 이름붙여 일본군에 헌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임혜봉스님은 『이 책을 쓴 것은 개인에 대한 단죄보다는 한국불교는 물론 한국민 모두가 이같은 모멸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되겠다는 뜻』이라고 집필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책을 낸 민족사측은 『지난해 7월 이책을 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당인물들의 후손이나 관련 인사들의 격렬한 항의와 위협으로 업무가 마비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발간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 총독부청사 철거의 역사적 의미/김정열 문화부장(데스크시각)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오욕의 상징물이 사라지게 됐다.그동안 철거와 보존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돼온 일제 총독부청사가 김영삼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마침내 헐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철거이후 이전복원이 아닌 완전 해체이다.민족의 숨통을 옥죄온 치욕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정문을 가로막고 세워진지 근 70년만의 일이다. ○일제잔재 상징물 데라우치 마사타케(사내정의)총독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산현유붕)정무총감등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이 경복궁 근정문 앞뜰에서 흙을 한삽씩 파던지며 자축한 때가 1916년 7월10일.「조선총독부신영」계획을 수립한지 6년뒤,1926년 10월1일 준공식을 갖기 10년 전의 일이다.일제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자 일제 잔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의 한반도 영구지배계획의 일환으로 이같이 태어났다. 연인원 50만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해 지은 이 건물은 그 크기가 당시 영국의 인도총독부나 네덜란드의 보르네오총독부를 능가하는 4만7천평의 대지에 동서로2백42칸,남북으로 1백42칸의 규모. 제국주의의 위용을 과시 하기에 충분한 이 건물로 인해 조선왕조의 상징이던 홍례문을 비롯,강녕전·교태전·문태전과 금천의 석교며 수각등 귀중한 민족유산은 무참히 유린당해야 했다. 더구나 일제는 풍수지리설에 입각,경복궁내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총독부 건물을 지어 민족정기를 끊고자 했음은 잘 알려진 일.서울의 주산인 북악산과 4괘중 주작의 위치인 남산을 잇는 지맥위에 산수의 교차가 이뤄지는 명당 자리에 왕궁을 짓누르는 고압적 건물을 지음으로써 민족사의 기맥을 차단하고 조선의 국맥까지 끊어 영원한 일제의 속국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청산 국민적 합의 식민통치를 영구히 고착화 하려는 일제의 이러한 음모는 총독부청사의 중앙머리부분이 일왕의 왕관을 뜻하고 있을뿐 아니라 건물의 배치가 일본의 「일」자를 본뜨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나 있다.또 북악산을 중심으로 총독부 건물 아래쪽에 위치한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은 부속건물과 연결해 보면 「본」자가 되며 총독부와 경성부청 두 건물의 위쪽에 위치한 북악산이 「대」자 모양 이어서 공중에서 보면 영락없는 「대일본」의 형상이라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총독부 건물을 가리켜 일본인에게는 황도주의·대국주의를 고취 시키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패배주의와 무력감및 열등감등 비교육적·반역사적 유물이 되어 있다고 개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더구나 식민잔재를 청산하자는 것이 국민적 합의의 도출임을 감안할때 착취와 억압,구금과 고문을 상징하는 총독부청사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지적돼왔다.혹자는 이번의 해체결정이 식민통치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의미 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또 철거에 따른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는등 현실적인 경제여건을 들어 부정적 시각을 보이는 이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이는 민족사 앞에 죄를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사 5천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키려는 의도로 지어진 대표적 상징물인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치욕의 건물에 조상들의 예지 어린 문화유산의 정수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었다.그것은 한마디로 민족문화에 대한 모독이었다. ○민족자존심 회복 일제잔재를 청산,민족의 정기를 새롭게 정립하고 얼룩진 민족사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그리고 정부가 추진하고있는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잃어버린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도 총독부청사의 해체는 불가피한 것이다.이제 그 결단이 내려졌다.잘못된 역사의 줄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취해진 이 빛나는 성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문민정부의 최대정책과제가 된 총독부철거가 가시화 될 경우 경복궁 복원은 물론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에 부합하는 새박물관 건립도 촉진될 것으로 기대된다.국혼확립의 의미를 새삼 반추해야 할 시점이다.
  • “북한­인왕­관악산 정맥 소생”/풍수학자들은 말한다

    ◎내친김에 서울시청도 빨리 헐어야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터에 자리잡은 일제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 볼때 「일」자 형태를 한것부터가 수도의 서울의 정기를 끊자는 속셈이었다. 또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치달은 우리나라 백두대간의 맥이 서쪽으로 뻗어나와 북한산∼인왕산∼관악산으로 이어지는 곳에 굳이 총독부건물을 지으려한 의도도 누누이 전해져온 우리나라의 정맥을 자르자는 의도였다고 풍수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불순한」꾐으로 지어져 67년동안이나 서울의 심장부에서 버티어 왔던 조선총독부건물(구 중앙청·현국립중앙박물관)이 드디어 헐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국민들은 물론 특히 풍수지리학자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다. 최근 풍수지리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직까지 그만둔 최창조씨는 『옛 조선총독부건물의 철거는 민족의 입을 풀어주는 쾌거』라고 찬사를 보냈다. 『풍수지리학상 일제 총독부 건물자리는 사람의 입에 해당되는 곳이다.온몸의 정기는 입을 거쳐서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일제는 의도적으로 총독부를 경복궁 앞자리에 지음으로써 민족의 입을 틀어막은 셈이었다.이번 결정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결국 민족의 입을 풀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악의 맥이 한강을 건너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서울시청건물(구경성부청사)은 「본」자 모양을 하고 있어 조선총독부건물의 「일」자 모양과 함께 일제의 검은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풍수학자들은 또 일제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의 기를 꺾기위해 백운대·인수봉·만경대 주변 곳곳에 박아 놓은 수많은 쇠말뚝 가운데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들을 모조리 뽑아내야 수도서울의 옛기운이 되살아날수 있다고 주장한다.
  • 고려 호족 고분/충주서 첫 발견

    고려왕조가 성립할 당시 권력형성의 바탕이 됐던 지방호족(호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분이 처음 발굴됐다. 건국대박물관 유적발굴단(단장 류태영 박물관장)은 29일 충북 충주시 단월동 산5의1 일대에서 통일신라 중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만들어진 고분 7기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무덤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정교한 톱니바퀴 무늬의 팔찌와 귀걸이가 발굴돼 이곳에 묻힌 사람이 당시 지배계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가야(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12)

    ◎한반도서 처음 벼경작… 철기·쌀 수출국/한반도서 처음 벼경작… 철기·쌀 수출국/문헌사료 절대 부족속 70년대들어 연구 활기 가야-.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으면서도 오랫동안 사가들에게 외면당한 나라.국내보다는 일본에서 관심이 높았던 나라.최근에는 유적발굴이 활발해 국내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나라.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 가야사 연구가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첫째는 문헌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을 들 수 있다.국내외 사료 가운데 가야가 등장하는 역사서는「삼국사기」「삼국유사」와 일본의「일본서기」,중국의「삼국지」「남재서」등에 불과하다.그러나 이들 사서도 대부분 자국과의 관계에서만 가야를 언급했을 뿐 가야사 자체를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다.그나마 11세기에 편찬된「가락국기」의 일부 내용이 삼국유사에 옮겨 실린 것이 유일하게 전해질 뿐이다. 또「임나일본부」설에서 보듯 가야의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다루려는 일본 학계의 공격적인 태도가 국내 학자들을 한동안 움츠러들게한 측면도 있다.그러나 70년대 들어 천관우의「복원가야사」가 나오면서 국내 학계의 연구도 활발해졌으며 특히 최근에는 옛 가야지역에 대한 유적발굴이 큰 성과를 거둬 사료부족을 보완해 주고 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여러가지 이름으로 나타난다.가야·가야·가야외에 구야(구사·구사)가라(가라·가양)가락등이 모두「가야」를 지칭하는 것이다.이밖에 일본서기등 일부에서는 임나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런 명칭들은 모두「가야」또는「가라」라는 음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인데 그 뜻에 대해서는 ▲갈래(분파) ▲강 ▲겨레등으로 해석하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가야는 삼한중 경상남북도 일대에 위치했던 변한의 소국들이 발전해 서기전후해서 연맹왕국을 이뤄 형성됐다(삼국유사에는 건국연대를 서기 42년으로 못박고 있다).연맹에 속한 가야제국의 수나 그 명칭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차이가 있어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대략 6∼12국 정도로 보고있다. 이 가운데 주요국가가 김해지방의 김관가야(별칭 구사·남가라),함안지방의 아라가야(안라),고성의 소가야,성주의 성산가야,고령의 대가야(가라),진주의 고령가야등이다. 이들 가야제국은 초기에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삼국및 낙랑,왜와 활발한 무역을 했다.주요 수출품은 이지역에 풍부한 철과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경작한 쌀등이었다.따라서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으며 당시의 수준 높은 문물은 가야무덤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4세기초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뒤로는 크게 약화됐다.5세기들어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 479년에는 중국 남재와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한다. 가야제국의 소국들을 연맹체로 결속시켰던 힘이 무엇인지,3국과 달리 연맹 형태를 끝까지 유지했던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왜와의 관계에서도,가야가 왜에 철기및 농경문화를 전달한 것은 분명하다.또 가야의 독특한 무덤형태나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시기적으로 100∼200년 늦게 일본 각지에서 발견된다. 일본왕조는 한반도에서 3국의 등쌀에 시달린 가야주민들이 대한해협을 건너가 세운 일종의 정복왕국이 아니었을까.가야는 아직도 짙은 역사의 안개 속에 묻혀 있다.
  • 무분별한 외화홍보… 외화낭비 심하다(건널목)

    ◎외국감독·배우 잇단 초청… 6·7월 10여명 다녀가/“작품성 땜질” 비판속 일부언론 과잉경쟁도 문제 ○…요즘 영화가의 새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영화 홍보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같이 신문이나 방송등에만 의존하지 않고 영화와 동명의 소설과 음반의 출간·발매는 물론 출연 배우들의 캐릭터가 그려진 문구류,의류,스포츠용품등의 판매가 일반화되고 있다.일부 영화사에서는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선보인 점보트론,즉 이동차량 전광판과 24시간 편의점에서의 광고등을 통해 영화 알리기에 총력전을 펼치기도 한다. 이같은 홍보는 관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또 흥행을 우선시하는 영화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홍보전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다.작품의 질보다는 홍보에만 신경을 쓴다든가,국산 영화의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든가 하는 지적들이 그것이다. 특히 최근 영화가에서 우려하고 있는 것은 외국감독과 배우를 초청하는 예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이 문제는 예전에도 제기된 것이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더 심화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7월까지 서울을 다녀간 외국배우와 감독들을 살펴보면 프랑스 영화 「비지터」의 감독 장 마리 프와레와 배우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마리안 샤젤,「클리프 행어」의 감독 「레니 할렌」,「슈퍼 마리오」에 출연한 보브 호스킨스,인조 공룡 굼바와 조종인원 3명,홍콩영화 「동방불패Ⅱ」의 임청하,왕조현등 10여명에 이른다. 또한 연기력은 떨어지지만 오스트리아식 「촌뜨기」영어와 근육질의 몸매로 「터미네이터」에서 「기계인간」의 전형을 보여줬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도 미국시장에서 흥행에 실패한 「마지막 액션 히어로」를 홍보하기 위해 방한할 계획으로 알려졌었으나 일정이 바빠 일본에서 체류하다 돌아갔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같은 외국배우등의 방한은 상당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단적으로 말하자면 외화를 홍보하는데 그토록 열심이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우리 영화계가위기상황이라는 것은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현실에서 홍보목적의 외국영화인 유치를 위해 거액의 외화를 낭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그들의 방한이 무슨 대단한 얘기거리인양 경쟁적으로 취급하는 일부 언론사와 방송사에도 책임이 있다.일부 외국배우등은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해 방송에 등장,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선전에 열을 올리는 것은 물론 CF를 통해 수입을 챙기기도 한다. ○…감독이나 배우를 막론하고 결국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때 이같은 문제들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최고의 광고는 영화의 질일 수 밖에 없다.작품의 질은 홍보가 아니라 관객들의 심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 뜻있는 영화인들의 지적이다.
  • 화장품 경제학(외언내언)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크고 검은 눈과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에서의 마릴린 먼로 금발은 미를 추구하는 뭇여성들의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다. 여성의 화장의 역사는 그 시초를 알수 없지만 BC 50년경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의 기발하고 대담한 화장기술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미모와 재지의 그녀는 붉은 산화철이 포함된 석간주로 두 빰을 붉게하고 손바닥엔 향기로운 헤너,눈썹은 방연광으로 만든 화장먹으로 그리고 눈꺼풀은 청금석,공작의 꼬리같은 초록빛 공작석으로 눈밑을 짙게 칠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분장한 클레오파트라는 강렬하고 개성있고 회화적인 화장만으로 고대 이집트 여왕의 영욕과 사치의 극치를 과부족없이 재현해내고 있다. 오늘날의 화장품은 그 종류만도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스틱류·크림류·파우더류·물약류에다 문지르고 뿌리고 뿜고 붓고 바르는등 사용법도 가지가지다.여성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수단방법도돈도 시간도 아끼지 않는다.그래서 화장품도 비쌀수록 잘 팔린다. 올 상반기 서울시내 각 백화점에서 팔려나간 외제화장품은 1백5억2천만원.지난해 같은 기간의 39억9천만원보다 무려 1백63%나 증가한 액수다.국산화장품은 지난해 47억9천여만원에서 23%밖에 늘지 않았다.역시 고급품·고가품 최고라는 결론이 나올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싼 화장품이 잘 팔린다고 해서 국산화장품의 고급화·고가지향은 어딘지 무리한 느낌이다.먼저 수출시장에 내놓아 성공하면 국내서도 자연 인기를 끌게된다.경제면에서도 지레 값만 올려놓고 내수로만 돌릴 경우 과소비와 물가상승을 초래할 우려도 있다. 19세기 영국 여성들은 화장안한 맨 얼굴에 홍조 띤 장미봉오리 입술,맑고 시원한 눈 그대로의 자연미를 과시한적이 있다.그때가 빅토리아왕조 최전성기임을 문득 상기하게 된다.질도 좋고 값도 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 청와대오찬 대화요지

    ◎“한국병,민족정기 바로잡지 못한탓”/김 대통령/한국학 해외자료수집등에 투자 필요/국사 대학필수과목으로 부활 시켜야/편찬위원 다음은 김영삼대통령과 국사편찬위원들이 23일 청와대 오찬에서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다. ▲김대통령=나는 역사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워왔다.역사는 우여와 곡절이 있지만 마땅히 흘러야 할 방향으로 흐른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해방이후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5·16,10월유신,12·12,광주민주화운동등에 대해 나름대로 새정부는 정치적평가를 내린바 있다.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국사편찬위 같은데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역사적평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먼 역사만이 아니라 가까운 역사에 대해서도 자신있는 평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여러분들이 현대사를 재조명 정리해 주어야 한다. 최근에 읽은 폴 케네디의 「21세기 혁명」은 60년대에 소득이 비슷했던 아프리카의 케냐와 한국이 지금은 몇십배 차이가 나는데 가장 큰 이유가 교육이라고 지적했다.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상운위원(전성신여대총장)=일본은 상품진출에 앞서서 문화·예술을 소개한다.문화행사뒤엔 또 꼭 일본상품을 내놓는다.우리도 측우기·도자기 같은 옛 과학기술을 먼저 소개하고 상품을 소개하면 전통있는 기술에 의한 상품으로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다. ▲박영석위원장=편찬위가 옛날 왕조의 춘추관때 처럼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지금은 사료편찬에 치중하고 있다.사료를 수집하고 한국역사를 연구하는데까지 기능이 보강돼야 한다. ▲고병익위원(전서울대총장)=편찬위가 각대학의 대학원들과 연계를 갖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김석희위원(부산대)=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중·러·일의 한국학 해외자료들을 수집,연구해야 한다.그런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김정배위원(고려대 부총장)=지난 6공정부는 대학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에서 제외시켰다.이를 필수로 다시 살려야 한다. 국사교과서를 다양한 역사관을 키울 수 있도록 검인정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이재용위원(숭실대)=국사교과서의 검인정화에 동감이다.해방후의 역사정리가 안돼있다.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 청산작업을 해야할 것이다.일제 식민지시대도 정리해야 한다.총독부건물을 빨리 옮기자. ▲정영호위원(한국교원대)=향토사연구가 대단히 중요하다.70년대에 각시·도에 문화재과를 신설해 향토사연구에 중추적 역할을 했는데 80년대 초에 이를 없애버렸다.그뒤 89년에 다시 문화예술과가 설치되었으나 전문요원이 없다.시·군단위에도 문화예술을 담당할 요원을 1명쯤 두도록 하자. ▲차문섭위원(단국대)=모든 대학에서 국사를 필수로 해야한다. 향토사개발도 중요하다.일본이 인간개조운동이 향토사연구에서 시작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15년전 일본서 정신대와 관련한 영화를 만들었을때 우리교포들이 우리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 거리를 나다니는 것 까지 싫어한 적이 있었다.부끄러운 식민지시대를 자꾸 들추는 것이 열등감만 심어줄 수도 있다.중국도 치욕적인 역사를 갖고 있지만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런 부분을 덮어 나가고 있다. ▲한영우위원(서울대)=우리나라는 문화대국의 자존심이 있다.세종때의 문예전성기,정조때의 문예부흥시대에 이어 지금 문민정부가 왔다.이는 3백년주기로 문화의 전성이 오는 것으로 봐야하고 그런 점에서 새정부가 문예부흥시대를 열것 같아 기대가 크다. ▲김대통령=한국병도 해방이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탓이다.이런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다면 현대사가 이렇게 왜곡되지 않았을 것이다.역사바로잡기를 더 연구해서 광복절 이후에 한번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
  • 박성수교수 주해 「저상일월」 상·하(서평)

    ◎근세 1백여년 가족·향촌사 집대성/세시·농사·예절·향토사건까지 담겨 일기는 역사연구에 있어서 1차적 사료이다.우리는 조선왕조시대 사관이 매일매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적은 「사초」가 역대왕조실록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을 기억하고있으며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더없는 자료였으며 매천 황현의 「야록」이 한국근대사연구에 필수적인 문헌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이같이 일기는 그 시대 역사적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저상일월」은 경북예천의 산골 큰맛질(현 경북례천군용문면대저동)에서 대대로 살아안 박씨가문 5대가 18 34년(순조34)부터 19 50년까지 117년간 쓴 대하일기이다.저상이란 큰물윗동네라는 뜻이며 일월은 문자그대로 세월을 뜻한다.이 일기의 원본은 시헌력에 깨알같은 글씨로 기록하여 42책이라는 방대한 분량이며 한문체의 순년체로 되어있으며 서술내용은 천기의 음청,세시의 풍흉,자가의 출입,농사의 경작과 수확,예절의 길흉과 이변,인이와 향토의 사건,조정·시중 및 포구항구에서 일어난 사건등을 기록하고 있다.그러므로 이 일기는 가주사이며 문중사이며 향촌사이며 나아가 시대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5대에 걸친 이 방대한 일기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교수가 주해를 하였으니 상권은 제1장 세도정치하의 시대상에서 제4장 밀려드는 개화의 물결까지,하권은 제1장 을사년의 대성통곡에서 제4장 일제의 발악과 8·15광복등 전8장으로 나누어 다시 일기내용에서 소제목을 뽑아 엮어놓았다.박교수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과 안목으로 소제목의 일기를 묶고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배경,일기내용의 분석,오류의 시정,용내의 구체적 설명,현재적 의미부여등을 주해하여 이 일기가 살아숨쉬는 생동감있게 만들었으며 한번 보면 끝까지 다 읽어야 눈을 떼게만들어 놓았다. 이 일기를 통하여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첫째 한 가문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이해할 수 있다.시골 반촌의 유가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과 그들이 본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통하여 100년전부터의우리 가정생활의 적나라한 모습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둘째 마을을 중심으로 살아왔던 우리 민족의 향촌사회사를 이해할 수 있다.향약·향규·동설등을 통한 상부상조의 모습,동제·당제등 민간신앙을 통한 정신세계를 살필수 있다.셋째 이 일기는 민중사로서 우리의 민족사의 폭을 넓혀 놓았다.5대가 관계에 진출하지않고 향촌에서 그때 그때마다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을 유가의 입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역사의 뒤안길을 보다 넓게 열어놓았다.
  • 해일(외언내언)

    「성난 파도같이」란 말이 있다.감당할수 없을만큼 무서운 위력의 경우를 가리킨다.인간의 경험이 만들어낸 표현이다.바다가 화를 내면 그만큼 강하고 무자비하며 무섭기 때문이다.그성난 파도의 가장 화난 모습이 곧 해일이다. 태풍에 의한것이 다카시오(고조)이며 지진에 의한것이 쓰나미(진파)다.쓰나미가 더 무섭다.일본용어가 말하듯 피해가 심한곳이 일본이다.가장 심했던 경우는 18 96년 태평양연안의 산리쿠(산육)해일로 진도 7.8의 인근해저 지진 18분후 덮친 20여m높이의 쓰나미가 2만7천1백여 인명과 9천여채의 가옥을 삼킨 기록이 있다. 12일밤 일본 북해도를 강타한 지진도 해저 진앙으로 성난 파도의 쓰나미해일을 일으켰다.4m나 되는 물언덕(해벽)이 3m의 방파제를 넘어 2백m내륙까지 덮쳤으며 모든것을 쓸어갔다는것이 피해가 가장 심한 오쿠시리(오고)섬 주민의 증언이다. 이 쓰나미해일은 일본뿐아니라 동해를 건너 우리해안까지 밀려와 해일경보를 내리게하는등 긴장시켰으나 위력이 크게 약화되어 15척의 선박침몰파손의 피해에 그쳤다.그렇다고 방심할 일은 아니다.쓰나미는 파급의 거리도 길어 발생지에서 수천㎞ 떨어진 곳에도 큰 피해를 내는경우가 많다. 60년 5월 남미 칠레인근 태평양해저에서 일어난 진도 8.5의 지진으로 생긴 해일은 시속 3백㎞의 속도로 태평양을 건너와 5m이상의 파고로 일본해안을 강타 1백39명의 인명피해를 낸적이 있다. 지진과는 거리가 먼 우리지만 지진의 나라 일본과 이웃하고 있으며 이번처럼 일본 인근 동해바다 해저는 지진빈발 해역이다.83년 일본동북지방 지진땐 우리도 많은 피해를 입은 기억이 있다. 영조17년(1741년)7월9일 강원도평해등 9개군에 성난파도가 덮쳐 수많은 인가와 배들이 부서졌다는 왕조실록의 기록도 있다.이웃일본의 지진도 피안의 불일수 만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4세기 후반 요서·산동지방 진출(온가족이 함께 보는 우리역사:8)

    ◎중국측 「송서」「양서」「북제서」등 사서에 기록/우리학자들 부정… 70년대에 교과서 수록 삼국 가운데 백제는 그 역사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되고 있다.고구려가 만주의 지배자로서 중국의 왕조와 패권을 다투었고,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데 비해 백제의 활약상은 두드러진 것이 없는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한 초기에 가장 왕성하게 대외활동을 벌인 나라는 백제였다는것이 정설이다. 백제는 4C 후반 근초고왕 때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동쪽으로는 가야의 여러나라를 사실상 복속시켰다. 또 바다 건너 중국 남조의 국가들과 국교를 맺었으며,요서·산동지방과 일본 일부지역에 직접 진출했다.당시 백제의 대외진출을 대표하는 사실이「백제의 요서및 산동 경략」이다. 5C 후반 편찬된 중국의「송서」백제전에는『백제략유료서 백제소치위지 진평군진평현(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했다.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양서」백제전에도『백제 또한 요서·진평 2군을 점거하고 백제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두 사서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백제가 요서지방(또는 요서지방내 요서·진평등 2개 군)을 점령해 군현을 세웠다」는 큰 테두리에서는 일치한다. 이와함께「북재서」후주기에「571년 백제 위덕왕을 동청주(현재의 산동반도 동남부)자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산동반도에서도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백제의 중국경략」이 기록상 명확한 데도 불구하고 국내 학계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19C 전반의 학자 한진서가「해동역사」에서 이를 부정한 이후 19 6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의 역사책은「백제의 중국경략」을 다루지 않고 무시했다. 부정론자들의 주장은「당시 백제가 바다건너 만리가 떨어진 요서에 군을 설치할만큼 강력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또 요서에 군현을 설치했다면,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중국 북조의 국가와 마찰을 빚었을텐데 북조측 사서에서는 그같은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음을 근거로 들고 있다.따라서 남조측 사서인 송서의 내용은 믿기 어려우며 송서를 옮겨 적은 양서등 다른 역사서들도 역시 믿을게 못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난 67년 서울대 김상기교수가 ▲백제가 당시 바다를 통해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맺고 일본에 진출한 점으로 미뤄 요서를 경략할만한 능력이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가 이에 맞서 요서에 진출했다」는 송서의 기록이 당시의 정세와 맞아떨어진다고 밝힌 이후「요서경략론」은 김철준·방선주·신영식씨등에 의해 꾸준히 보강돼 왔다. 국사교과서에는 이 내용이 70년대 중반부터 실렸다.다만 백제의 진출시기,점령기간등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려 있다.
  • 보은 장내리(한국의 종교성지:3)

    ◎구한 말 저항운동 「보은 취회」 벌인 곳 1893년 5월,2만7천여 동학도인들이 구한말 외세침략과 기울어져가는 국권회복을 위해 「보국안민 척왜양창」의 깃발아래 모여 최초의 민회인 「보은취회(취회)」를 벌였던 곳.오늘날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속리국민학교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천도교 2대교주 해월 최시형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이곳 집회는 앞서 교조 수운 최제우의 신원운동이 네차례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해 정월 이곳으로 대도소를 옮겨 교단사업을 펴기 시작한데서 비롯됐다.4월초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동학교도들은 28일 관아의 해산명령에 불복,5월17일까지 20여일간 옥녀봉 기슭에 길이1백보 넓이1백보의 반성을 쌓고 집회를 가졌다. 이들이 내건 요구사항은 「대신사신원·왜세배격·서정개혁·침학행위시정」등.따라서 이곳에서의 집회는 조선왕조체제하에서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또 이듬해 동학혁명과 그후 삼일운동의 물꼬를 튼 역사적 의의를 평가받고 있다. 보은취회의 정확한 위치는 학자들에 의해 최근 발견됐으며 천도교측은 대도소및성터를 복원하고 옥녀봉일대를 성역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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