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왕조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매진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gtx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483
  • 골프성화(외언내언)

    골프는 흔히 인생의 축도에 비유된다.평생에 느낄 희망·질투·수양·배반등 온갖 감정을 단 몇시간에 압축시키기 때문일까. 인생은 축소화된 골프라는 말도 있다.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가장 치기 힘들게 만들어진 지팡이로 조그마한 공을 쳐서 공보다 더 작은 구멍에 넣는』 이 경기가 섹스보다 중요하다고 응답한 미국기업체 중역들이 12% 라는 최근 조사결과도 있다.이에 따르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거나 조퇴해 골프를 친 일이 있다는 응답자도 55% 나 됐다. 조그마한 백구의 운명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그것도 단 한번밖에 때릴 기회가 없다는 스릴과 상쾌함 때문인지,아니면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묘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골프는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광적인 애호자들이 대를 잇고 있다. 8백년의 역사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골프의 발상지는 네덜란드.스코틀랜드에 넘어들어가서는 국민들이 궁술은 제쳐두고 골프에만 몰두,국방에의 위협을 우려한 국왕 제임스2세가 15세기 중엽 금지칙령을 선포했을 때는 이미 골프병이 골수에 사무친 후였다고 한다.버나드 쇼가 『영국 에드워드왕조시대 상류층의 전형적 자본주의자적 광기』라고 한 것을 보면 골프열은 단순한 유행병은 아닌 듯하다.우리나라의 골프인구는 약 1백50만,개장된 골프장만도 1백개에 이르는 급격한 증가추세다.김영삼대통령이 스스로 재임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한 말에 따라 자제되고 있는 공무원들의 골프가 최근에 와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일하는 사회분위기의 조성을 위해 공무원들이 정신을 차려 일하자는 게 참뜻일 텐데 굳이 골프를 쳐도 좋다는 대통령의 말을 받아내려는 일부공직자 골퍼들의 집요한 성화를 보는 것 같다. 스스로 떳떳하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치면 될 일이지 금지한 일도 없는 대통령을 상대로 해금을 재촉하는 「눈치보기」도 딱하고 거기에 역성 드는 이들도 싱겁게 보인다.
  • 한용운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3·1운동 주도한 저항시인/불교대표로 참여… 선언문 배포 지휘/출옥후 신간회·비밀결사 만당 결성/「님의 침묵」등 시 3백편·소설 「죽음」「흑풍」 남겨 만해 한용운선생(1879∼1944)은 토지·조세·신분문제등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에서 민란의 불길이 일던 봉건왕조말기에 태어났다.선생은 청년시절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동학혁명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24세때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출가했다. ○동학혁명에 가담 입산한 지 10년만인 1913년 선생은 자유·평등사상에 기초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불교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선생은 이 유신론에서 번잡한 각종 의식을 없애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자는 혁신적 주장을 펼쳤다. 선생은 같은해 10월 친일승들이 모여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을 통합하자 이를 친일매불행위로 규정한 뒤 승광사에서 전국승려궐기대회를 열고 임제종을 창립,큰 호응을 얻어냈다. 선생은 이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현대적으로 정리,불교대전을 펴냈으며 처음으로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계몽활동에 뛰어들었다.당시 지식인으로 명망이 높던 최린·최남선·현상윤등도 이 잡지발간에 적극참여,암울한 식민무단통치시대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횃불역할을 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부터다. 3·1운동에 초기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선생은 당시 유림과 불교계의 포섭을 맡았다.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뒤 독립선언 하루전인 2월28일에는 독립선언문 3천장을 인쇄소인 보성사사장 이종일로부터 넘겨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전달,다음날인 3월1일 시내에 배포하도록 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대해서는 선생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수정해 삽입했다는 설과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설이 나누어 있다. ○옥중에서도 태연 1919년 3월1일 하오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었다.선생은 이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게 돼 책임이 막중하다』며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과 보석을 요구하지 않는등 당당한 대응을 하자고 행동강령을 제시했다.민족대표들은 모임이 끝나자마자 일경에 모두 체포됐으며 선생은 옥중에서도 수도승답게 태연한 모습을 지켰다. 선생은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논설을 통해 『자유·평등·평화는 민족의 자존과 세계평화로 이어지는 대강령이며 이번의 조선독립선언은 국가를 창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때 치욕을 겪고 있는 고유의 독립국이 다시 복구되는 것임』을 설명했다. 3년여 옥고를 마치고 가출옥한 선생은 청년교육과 훈련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1924년 불교청년회회장으로 취임,대중불교건설에 앞장섰으며 「유심」등 신문잡지를 통해 『청년들에게 역경은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이 땅의 젊은이들은 나라가 없다고 좌절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1927년 좌우합작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결성에 참가했으나 2년 뒤 이 단체가 광주학생의거 진상보고민중대회를 가지려다강제해산됨에 따라 1930년 청년불교도들이 결성한 비밀항일독립운동단체인 만당의 당수로 취임,와해되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설립 수포로 이와 함께 1926년 이상재·이승훈·조만식선생등 30여명과 조선민립대학설립 기성회를 구성,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일제가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경성제대를 설립하는 바람에 대학설립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문학사에서 3·1운동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꼽히는 선생은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에 모두 3백여편의 시를 실었다.또 소설로는 「죽음」「흑풍」「철혈미인」「박명」등을 남겼다. 선생이 시와 소설에서 쓴 「님」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5세인 1933년 재혼한 선생은 방응모등의 후원으로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집을 지을 때 사람들이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했으나 마주보이는 총독부건물이 보기 싫다고 끝내 북향으로 집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변절자 면담거부 선생은 뜻을 끝까지 같이 한 동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리를 간직했으나 변절자에게는 단호히 단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만주에서 대한통의부총장을 역임한 김동삼선생이 일경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시고 5일장을 치르며 눈물을 아끼지 않았으나 3·1운동당시 동지이던 최린이 변절,창씨개명을 하고 믿아오자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조선 전국이 감옥이라고 여긴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심우장 냉방에서 꼿꼿이 앉아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족이 배출한 위대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이며 여성해방론자이기도 한 선생은 44년6월 입적,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근대사의 여명기에 태어나 선각자적 삶을 통해 민족정신의 새벽을 연 선생에게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거리:상/시전 있던 종로는 상업의 중심지(서울 6백년 만상:15)

    ◎“사람 구름처럼 모인다” 운종가로 불려/현재 세종로인 육조거리엔 관청 자리 서울에는 세종로·종로·청계천로·태평로 이렇게 고유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가 5백개가 넘는다. 6백년전 서울이 한양이란 이름으로 처음 수도로 정해질 때만해도 이름을 가진 거리는 3개에 불과했다.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광화문네거리를 중심으로 지금의 세종로에 해당하는 육조거리,지금의 종로인 운종가,을지로쪽을 일컫는 구리개 혹은 동현. 하기야 당시 한양의 상주인구가 5만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고 보면 3개의 거리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를 일이다. 「육조거리」가 거리이름에서도 바로 읽혀지듯 이·호·예·병·형·공조등 6개 행정부처가 자리한 정치의 거리였다.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궁궐·종묘·사직·관아·문묘등을 건설한 다음 도성을 축조해갔다.이때 태조는 통치의 근간이 되는 6조를 궁궐인 경복궁에서 지금의 광화문네거리 사이에 배치했다. 폭 1백m로 국내에서 가장 넓은 6백m의 이 거리에는 정부제1종합청사를 비롯,문화체육부·미대사관·국세청·체신부와 한국통신공사등이 자리잡아 정치의 거리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6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흔히 「육조앞」이라고도 불리던 이 거리는 일제때 「광화문통」으로 바뀌었다가 해방후에는 반만년 역사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다 해서 세종로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한양을 대표하던 거리는 지금의 종로인 운종가였다.그당시에 사람이 모이면 얼마나 모였으랴만 그래도 사람이 구름처럼 모인다 해서 운종가라고 이름을 붙였다니 옛날은 옛날이었나 보다.지금의 종로는 광화문네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거리를 이르지만 한양시대 운종가는 창덕궁 동쪽 문 그러니까 지금의 종로3가끝까지였다. 그 가운데 중심지는 통금시각의 시작과 해제를 종소리로 알리기 위해 당시 가장 번화가인 운종가에 커다란 종을 만들어 매달아놓은 종루였다.맨처음 종루가 지어진 것은 태조의 한양천도 4년후인 1938년4월로 처음에는 청운교 서쪽,그러니까 지금의 파고다공원옆에 있었다.그러다 42년후인 세종 22년(1440년)에 지금의 종각자리 부근으로 옮겨 지었다고 옛문헌들은 전한다.그후 종루를 재건축하면서 2층으로 지어 그 밑으로 사람이나 말들이 통행하도록 했다고 한다.세종조의 종루는 임진왜란때 불타 세번째 다시 지어지고 운종가에서 조금더 안쪽으로 옮겨 지어 현재 종각(보신각)자리를 지키고 있다. 운종가와 종로가 한양과 서울을 대표하는 거리가 된 것은 「경제의 거리」였고 그래서 언제나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나중에는 정치·경제·문화의 구심점 몫까지 도맡은 데서 연유한다.또 운종가가 6백년동안 끊임없이 「경제의 거리」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은 것은 조선왕조가 지금 말로 대단위유통단지를 조성했기 때문이다.궁궐에 이어 도성축조까지 마무리되면서 새 왕조로서 토대가 굳건해지자 3대왕 태종은 즉위 12년(1412년)째부터 2년여에 걸쳐 광화문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와 종루에서 남대문 사이에 길양옆으로 2천6백33칸의 행랑을 건설했다.행랑은 관청에서 세운 상설점포로 관청에 세금을 내고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해서 시전(시전)행랑이라 했다.성종실록에서는 운종가를 「지역은 좁고 사람은 많아 간사한 무리가 속이고 빼앗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차마가 꽉 메워 사람이 많이 상한다」고 묘사해놓고 있다. 이같은 「경제의 거리」로서 종로의 명성은 1920년 파고다공원옆에 미니백화점격인 동아부인상회가 들어선 이후 1922년 종각네거리의 화신백화점시대를 거쳐 70년 초반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70년대 중반부터 한강이남이 집중개발되면서 서울의 상권을 강남쪽으로 많이 빼앗겼지만 아직도 내로라하는 금은방·주단포목점·지물포와 서점만은 종로에 자리잡고 있어야 최고로 쳐주는 세상인심만은 여전하다.
  • 일본서 본 「YS한국」의 변화/요코노기 마사오

    ◎민주화 후퇴 할수 없는 정치구조 구축/쿠테타·정보정치의 부활 가능성 없애/재산공개·실명제로 구조적 부패척결/개혁과 경제실리 조화가 남은 과제 김영삼대통령의 등장은 한국의 「권위주의체제」가 「민주주의체제」로 바뀌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라는 의미가 있다.한국의 민주주의체제로의 전환이 군출신 대통령으로부터 야당출신 대통령으로 인계되어 지금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전통을 바탕으로 볼때 문민정권의 탄생은 그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것 같다.그것은 외부의 관찰자에게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정치적 변화였다. 대통령선거중 김영삼후보의 선거공약은 「깨끗한 정치」와 「강력한 지도력」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김후보는 「정통성있는 문민정권」이 탄생하여야만 그러한 선거공약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오랜 무가정치의 전통을 갖고있는 일본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웠다.일본 역사에서는 무력의 뒷받침이 없는 정권이 장기집권한 예가 없었기때문이다. 그러나 5백년 조선왕조시대의 문관정치의 역사를 갖고 유교문화의 정통성 개념을 물려받은 한국에서는 김후보의 논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거기에는 지금까지 군출신이 대통령이었다는데 대한 강한 위화감이 존재했던 면도 있다. 김대통령의 등장에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할수 있다.그러나 김대통령이 탁월한 지도력를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때문만은 아니다.문민정권의 탄생을 「강력한 지도력」으로 전환시킨 것은 취임후 1년간 계속된 깨끗한 정치를 위한 일련의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이 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김대통령은 국민의 높은 지지와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배경으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 강력한 지도력를 확보했다.그것은 비범한 정치적 능력이라 할수 있다. 한국의 정치구조에서는 국민의 높은 지지가 있을 경우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문민대통령은 군출신 대통령보다도 더욱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수 있는지도 모른다. 김대통령은 문민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의식,군출신인 전두환·노태우대통령 양정권과의 차별화에 진력했다.김대통령은 그러한 차별화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사회질서를 회복하려 했다고 할수 있다.대통령취임식 연설에서 ▲부정부패 일소 ▲경제활성화 ▲국가기강확립을 3대 목표로 내세운 것은 그러한 논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수 있다. 새로운 정권발족후 김대통령이 단행한 일련의 과감한 개혁은 그 심도와 범위,지속성등에서 국민의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스스로의 재산공개로부터 시작한 부정부패의 적발은 정치가·고급관료뿐만 아니라 군부·경찰·검찰·법원의 고위간부로까지 파급됐다.또 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는 경제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바야흐로 「청교도 혁명」과도 같은 개혁분위기가 한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이러한 개혁은 김대통령의 개인적 지도력에 의해 추진됐다는 커다란 특징이 있다.김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정치헌금을 일체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개혁의 선봉에 섰다.매스컴에 「문민독재」라든가 「인치주의」라는 표현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역사적 사명의 관점에서 볼때 일련의 개혁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군과 정보기관의 정치개입 시스템에 외과수술을 가해 쿠데타와 정보정치가 부활할 가능성을 없앤 구조적 개혁이다.한국의 민주화가 후퇴할수 없는 정치구조를 정착시켰다고 할수 있다.그것은 군출신 대통령으로서는 불가능한 개혁이다.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부패에 정면도전한 것도 중요한 개혁이다.김대통령이 주창하는 「신한국의 창조」는 의식과 제도의 양면에서 한국사회의 도덕성을 회복,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제·사회활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그것은 일상생활을 통해 장기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지만 김대통령의 개혁은 그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그러나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계기로 국민의 관심은 경제로 옮겨지기 시작했다.그때부터 「개혁」보다 「실적」,「도덕성」보다 「실리성」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당시의 여론조사를 보면 금융실명제에 대한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APEC정상회담과 쌀시장 부분개방은 또 국제문제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개혁논의」로부터 「정책논쟁」으로의 방향전환을 촉진시켰다.사실 APEC회담은 그때까지 내정에 전념해온 김대통령의 국제외교무대에의 데뷔를 의미하며 쌀시장 부분개방은 자유무역의 이익을 누리는 한국으로서는 피할수 없는 국제적 채무이다. 한국정부는 물론 그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김대통령은 지난해 9월 국회연설에서 『우리는 민족의 독립과 국가의 민주화를 향해 달려온 도덕적 힘이 있고 전쟁의 폐허로부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경제적 저력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두가지의 힘을 합해 신한국을 창조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두가지 힘중 하나인 「한강의 기적」은 군사정권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 APEC정상회담후의 국회연설에서 『과거를 청산하는 개혁과 함께 미래를 향한 개혁,국제화를 위한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일본총리와의 경주회담을 통한 한·일관계의 개선과 다음달로 예정된 김대통령의 일본·중국 방문은 「미래지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김대통령은 물론 앞으로 남은 4년의 임기중에도 개혁의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국민도 그것을 계속 지지할 것이다.그러나 앞으로 김대통령의 진가는 경제운영과 국제문제의 처리를 통해 시험받을 것으로 보인다.한국의 경제를 어떻게 활성화시킬 것인가,북한의 핵개발을 어떻게 저지,남북한의 공존을 정착시킬 것인가등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김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강력히 추진해온 과감한 개혁조치가 각광을 받는 시기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개혁과 실리를 조화시키는 긴 안목의 노력이 앞으로 필요하다고 할수 있다.
  • 시인 이근배 그산하에 가다(동학의 함성을 찾아서:1)

    올해 2월10일은 동학혁명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가렴주구의 만석보 수세가 그 도화선이 되었다.18 94년 이날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관아를 쳐들어간 것이다.전봉준을 우두머리로 한 미완의 혁명이었지만,그 정신은 우리의 자아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외세에 대한 민족자존의 역사요,부패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의 항거이기도 했다.서울신문사는 동학혁명 1백돌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격동의 현장에 취재팀을 보냈다.거기서 이근배시인은 대서사시를 쓰고,동행한 기자는 역사를 엮었다. ◎횃불 타오르다/「풀뿌리 혁명」 100년 서사시로 돼새긴다 해가 뜬다 둥둥 배들평야에 해가 뜬다 황토재에 해가 뜬다 갑오년의 해가 뜬다 전봉준의 해가 뜬다 흰옷 입은 백성들아 뜨는 해를 보아라 이 기쁜 설날 아침 가슴에 뭉친 설움일랑 털어버리고 천지신명께 비는 마음으로 뜨는 해를 보아라 오백년 왕조의 기둥뿌리는 썩어가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 설날이 와도 먹을 것이 없는데 해는 떠서 무엇하나 꽝꽝 얼어붙은 배들평야녹이려 해가 뜬다 더냐 황토재 몰아치던 눈보라 쓸어내려 해가 뜬다 더냐 고을마다 백성들 피고름 짜내는 고부 군수 조병갑이 같은 탐관오리 천벌주려 뜬다 더냐 난리 난다 난리 난다 쥐불처럼 번지는 소문 틀어막으려 해가 뜬다 더냐 오냐 오냐 알겠다 다섯자 남짓 작은 키에 상투 쫓은 전봉준이 전라도 정읍땅 새집 마을 한 귀퉁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눈 부릅뜨고 앉은 전봉준이 일어서라는 해로구나 때가 왔다 때가 왔다 일러주는 해로구나 아니다 아니다 전봉준이의 해는 백성이다 전봉준이의 하늘은 백성이다 전봉준이는 백성들의 가슴속을 본다 그 끓어오르는 설움을 본다 나라를 살리려는 붉은 마음을 본다 전봉준이는 산을 본다 들을 본다 이나라 백성들 말고 누가 이땅을 밟으랴 왜놈들이 어디라고 넘보느냐 양놈들이 어디라고 기웃거리느냐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내야 한다 갓 마흔살 녹두 전봉준이 일어선다 서마지기 논밭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글방샌님 전봉준 동네 아이들 네댓 가르치고 무덤자리 골라주며 끼니를 이어가던 외톨배기 전봉준 남들 보기에는 그러했겠지만 사실은 녹두만큼 작은 덩치속에 해를 하나 품고 있었다 새 세상을 껴안고 있었다 백성들이 주인인 나라 백성들이 하늘 대접을 받는 나라 배달의 자손끼리 오손도손 깨를 쏟으며 사는 나라 전봉준은 새 나라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어둠속을 헤매이며 빛을 모으고 있었다 동학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1893년 계사년 음3월 초열흘은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스물아홉번째 제삿날이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이 날을 맞아 보은 속리산자락 장내 마을에 전국 동학교도들을 집결시키라는 통유문을 팔도 각읍 접주들에게 내린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재앙이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척왜양창의」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려고 대의로 일어선다 드높이 올린 깃발아래 2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충의대접주 손병희 충경대접주 임규호 청의대접주 손천민 금구대접주 김덕명 정읍대접주 손화중… 보은 장내 집회가 있은지 열달 전봉준은 어둠속에서 불씨를 피우고 있었다 정읍,금구,부안,태인을 오가며 곳곳에 불씨를 묻어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갑오년 음 정월 마침내 횃불에 불을 붙일 날은 밝아오고 있었다. ◎보은집회는 고부봉기의 “전야제”/사회변혁 시도한 세력의 애타는 몸짓/사상적 구심점 잃은 민중의 호응받아/보은에서 고부까지 약사 한국사에서 19세기는 조선왕조가 해체되는 시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통치기강은 해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농민전쟁과 변란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까지 기승을 부렸다.여기에 이양선이라는 외국배들은 협박에 가까운 통상요구와 함께 약탈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즈음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급기야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돼 황제가 피란을 떠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실학도 역부족이었다.그러자 기층사회에는 정감록같은 도참사상과 후천개벽설이 구석구석 퍼져나가 술렁거렸다. 수운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 대응책을 구하고 나선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동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서학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민중사상의 다양한 요소를 복합적으로 수용했다.그러나 최제우 당시 동학은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래서 동학혁명이란 곧 「사회변혁세력이 동학을 정치·사회운동으로 활용코자 했던 몸짓」으로 평가한다.19세기 변혁운동을 이어받고 있던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계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최시형의 북접계와는 달리 현실투쟁이 그 목표였다.전봉준계는 이를 위해 북접계를 끌어들여 남·북접이 연계되어 일본과 서구제국을 배척한다는 척왜양의 대중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서 1893년3월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던 보은집회가 그것이다.북접이 남접의 뜻에 호응해「척왜양창의」를 내건 평화적 집회였다.그러나 같은 시간 전봉준의 남접계는 전라도 금구에서 따로 집회를 가졌다.보은의 교도들과 합세한뒤 제물포로 올라가 직접 위와 양을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금구집회도 4월2일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막을 내렸다. 1890년경 입교한 전봉준의 지도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세력이 조직화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1893년4월 금구집회 해산에서부터 1894년2월 고부봉기까지는 바로 혁명의 기운을 결집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혁명이 싹이 튼 땅/「척왜양창의」 깃발 흔적 간데없고/충북보은군 장내마을 가는길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는 동학혁명의 전야제라 할만한 보은집회가 열렸던 곳이다.보은에서 상주가는 길을 따라 20분쯤 달리다보면 면사무소와 농협을 표지판으로 쉽게 찾을수 있는 전형적인 면소재지이다. 장내는 현재 1백5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요즈음의 지리감각으로는 왜 이곳에서 그같은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다.그러나 장내는 남으로는 영동,동으로는 상주,서로는 옥천·대전,북으로는 청주가 모두 1백여리 상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마을에서는 이제 서쪽의 옥녀봉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삼가천을 경계로 농성하던 2만 동학교도들의 주문외는 소리와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깃발의 흔적은 찾을수 없다.다만 속리산 쪽을 향해 마을을 2백∼3백m쯤 벗어난 왼쪽 논 사이에 남아있는 동학교도들의 얕은 돌성만이 지나간 역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마을을 가로지르는 삼가천 너머에 있는 선씨 문중 아흔아홉간 고옥은 옥녀봉과의 절묘한 구도로 찾는 이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 다리:상/구릉·계곡따라 80여개 산재(서울 6백년 만상:10)

    ◎영제­옥천­금천교 궁중위험 갖춘 “조형예술”/세종때 건립 수표교는 치수의 지혜 엿보여 다리는 떨어진 두곳을 잇는 매개체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단순히 지나는 곳만이 아닌 「만남」의 중심이요 무대인 것이다. 그해 신수가 좋아진다고 믿으며 정월 대보름달 아래서 청춘남녀들이 즐긴 다리밟기와 불가에서 절을 지을 때 속세와 불국토,즉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믿고 다리를 함께 놓은 것에서 다리의 이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다리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강이나 개천 또는 언덕과 산을 쉽고 편하게 건너거나 넘기 위해 놓여진 것이다.오늘날 토목학자들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 가운데에 가장 길고 큰 것이 다리이기에 다리를 「토목구조물의 꽃」이라 일컫는다.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서울은 한복판에 청계천이 흐르는등 구릉과 계곡이 많아 다리 역시 많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서울에 얼마나 많은 수의 다리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선조 고종때를 전후해 작성된「한경식략동국여지승람」 「수전지도」 「서울지도」등에 따르면 서울에 산재해 있던 다리는 성안 76개,성밖 10개등 대략 86개로 알려지고 있다.경복궁의 영제교를 비롯,창경궁의 옥천교,창덕궁 금천교등 궁궐안 다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다리들은 정전에 이르는 외당앞에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위에 건설된 것이어서 단순한 다리기능외에 다양한 조형미를 연출한 예술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제교는 다리바닥의 가운데가 높은 어도이고 좌우는 낮은 삼도로 이뤄져 신분에 맞게 다니도록 했다.폭이 10.2m로 어가의 행렬이 지나는데 꼭 맞고 난간과 멍엣돌에는 재앙을 막고 왕조를 지키기 위해 귀면이나 석수를 조각했다. 영제교는 새 왕조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경복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원래 근정전앞 총독부청사 뒤쪽에 있었으나 일제가 총독부건물을 지으면서 헐렸다 지난 74년 복원됐다. 궁중다리 가운데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옥천교 역시 삼도로 되어 있으며 중앙의 벽면에 삼각형 모양의 귀면을 조각해 벽사시설을 했다.창덕궁 금천교는 1411년에 공조판서 박자청이 감독한 현존하는 궁안의 돌다리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난간 밖으로 내민 멍엣돌에 용두상이 조각돼 있다. 그러나 시정의 일반시민들의 귀에 가장 익은 다리이름은 아마도 수표교일 것이다. 수표동 43번지와 관수동 152번지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이 다리는 1420년 세종때 건설될 당시의 이름은 마전교였다.그러다 세종 23년에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리 돌기둥에 「경진지평」넉자를 새겨 수표석을 세워 수량을 측정하면서 수표교로 불리게 됐다.청계천복개에 따라 철거된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안에,수표는 홍릉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졌다 현재는 여주 영릉에 보존돼 있다.이 다리는 교각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네모와 육모기둥의 석재를 2단으로 세워 우리 조상들의 이수·치수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서울의 다리로 살곶이다리를 빼놓을 수 없다.한자말로는 전곳교인 이 다리는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남쪽에 위치한 돌다리로 살곶이앞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폭 5.95m,길이 75.75m로 조선시대에 세운 교량으로는 가장 긴 살곶이다리는 세종 21년(1439년)에 가교공사를 시작했으나 진척이 지지부진하다 착공 60여년만인 성종 14년(1483년)에야 승려들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완성했다.기록에는 『스님이 살곶이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하였다』고 전한다.대원군때 경복궁을 지으면서 모자라는 석재를 보충하기 위해 살곶이다리의 석재 절반을 갖다 쓴데다 1920년 장마에 떠내려가 폐교상태였다 지난 77년 서울시가 복원했다. 이름없는 수많은 다리와 달리 한강에 다리가 생겨나고 서울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한강교량의 건설이 서울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게 되면서 다리는 통행로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다.
  • 일제향수(외언내언)

    일제 식민지지배의 총본산이던 옛 조선총독부청사는 우리에겐 치욕의 현장이며 수난의 상징물이다.해방후에는 중앙청으로,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운명은 이미 결정이 나있는 상태.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말까지 완전철거하기로 돼 있다. 1916년6월에 착공,10년만인 26년10월 준공된 총독부건물은 『동양최대의 석조전을 짓겠다』는 일제의 주장대로 4만7천평의 대지위에 동서로 2백42칸,남북으로 1백42칸의 웅장한 규모에 내벽을 대리석으로 치장하는,당시에는 호사를 극한 건물이었다.영국의 인도총독부건물보다 규모가 더 크다고 했을 정도. 영구적인 조선의 지배를 노려 세워진 총독부청사는 태어날 때부터 악의와 음해로 가득차 있었다.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의 맥을 끊기 위해 터잡은 자리가 근정전앞뜰.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도 헐어냈다.경복궁안의 수많은 전각과 회랑이 철거되었고 일부 자재는 일본 세도가들의 정원장식용으로 빼돌려지기도 했다.또 석조전의 위용으로 경복궁을 가려 조선왕조의 잔영마저 조선인의 시야에서멀어지게 한 것이다. 지난해 8월 구총독부청사의 철거가 확정된 이후 국립박물관을 찾는 일인관광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사라지기 전에 건물을 구경하고 기념촬영을 하려는 단체관광객들이라고 한다.일제의 옛 영광을 확인하려는 우월감의 발로가 아니길 바란다.최근 일본내에서도 일부지식인들이 『20세기초 기념적 건축물』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심스러운 보존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같다. 얼마전 서울시장의 기자회견자리에서도 일본특파원들에 의해 같은 주장이 제기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발상에는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시대의 향수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게 아닐는지.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 결정된 철거에 이러한 주장은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의 논리」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겨울의 민속박물관/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세계의 수도가운데 6천년 문화의 젖줄인 큰 가람이 도시 한복판에 흐르고 30분내지 1시간 거리에 아름다운 산과 농촌을 가진 곳은 서울 이외에는 없다. 뚜렷한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어 생물의 성장이나 인간의 감성을 여유있게 만드는 우리나라는 축복된 나라이다. 그중에서도 박물관은 여유와 휴식의 공간이자 좋은 안식처이다.온가족이 같이 나들이하여 학교나 가정,사회에서 이야기로만 듣던 문화의 현장을 느끼는 곳이다.감독과 교사와 배울 의무가 없는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미래의 지식과 정보를 보고 느끼고 즐기고 문화를 재생산하는 창조적 공방이 박물관이다. 향원정의 연못가에서 보는 고대건축 양식의 국립민속박물관은 아름답다.역사의 저수지로서,왕조문화와 서민문화가 만나는 사회교육장으로서 민속여행의 지평을 열어주는 현장이다.아이들에게 할머니,아버지 세대를 이어주는 생활의 맥박으로서,우리민족의 삶을 재현시킨 고대문화의 샘터로서 개관10개월만에 3백50만이 찾은 서울의 명소이다. 계절별로 펼쳐지는 불우청소년 공예방,태권도·시낭송·춤 등 문화체육이 어우러진 어린이잔치,세대에서 세대를 잇는 할머니·손녀공예교실,도심속의 농촌인 사계절 텃밭과 우리민속놀이가 준비된 쉼터,봉산탈 한마당,우리가락 민요교실,토요학술잔치 등이 여가를 즐기려는 소박한 서민을 만나고 민족의 문화샘터로서 내일을 준비한다. 그래서 우리의 겨울은 약간 춥지만 박물관의 겨울은 문화의 향기로 따뜻하다.향기가 있는 박물관의 겨울은 바쁘다.3백50만 관람객에게는 전시설명도 해주고 1천만이 다녀가면 대폭교체될 신선한 전시,역사탐구의 조사연구,시급히 기록·정리해야할 5만점의 자료·유물전산화 등이 기다린다. 바깥 날씨와 국제환경이 춥다고 전문의사가 없는 병원 문을 열 수는 없다.문화교육기관인 민속박물관의 연구,사회교육,유물정리 등의 문화산업을 엄동설한에 떨게해서는 35만의 관람객이 앞사람의 뒷머리만 보고 가게 된다. 이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60명의 문화재 병원 의사의 시급한 충원은 94년 상반기에는 어떤일이 있어도 보강되어 봄박물관의 준비를 하여야 한다.
  • 장터:상/조선왕조 천도후 종로에 시전 설치(서울 6백년 만상:7)

    ◎2천간 규모… 관주도 독점상권 형성/어물 등 6개조합… 육의전으로 불려/남대문밖 칠패·동대문 배오개장터 유명 예나 지금이나 장터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가장 진하게 스며있는 곳이다. 「남이 장에 가니까 씨 오쟁이 떼어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터에는 모두를 설레게 하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애환도 많고 또 풍성함의 이면에는 가난한 자의 한숨도 흐른다.한편에서는 흥정이 깨져 고성이 오가고 바로 곁에서는 또 만병통치약장수의 사탕발림 달변에 폭소가 터지기도 한다.소박한 시골아낙들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후리려는 야바위꾼과 소매치기들도 설쳐대는 천태만상의 곳이 바로 장터다. 오만가지 인간군상들이 서로 얽혀 어깨를 비벼가며 사는 장터는 한마디로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수 있으며 그래서 장터의 역사는 곧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대변한다.서울 장터의 역사는 한양천도 가까이로 거슬러 올라간다.천도를 단행한 조선왕조는 궁궐과 관아를 지어 정도의 기틀이 어느정도 잡히자 곧 상가건설에 착수,정종 원년(1399)부터 태종 14년(1414)까지 4차례에 걸쳐 2천간 안팎의 시전을 세웠다.현재 보신각이 있는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로 연건동과 광화문우체국,남북으로 을지로2가와 안국동에 걸쳐 자리잡은 이들 시전의 관허상인들은 관에 임대료인 행랑세를 내는 대가로 독점판매권(금란전권)을 거머쥐었다.이때부터 종로거리는 전국 최대의 상거래지역으로 자리잡게 되고 인조 15년(1638)에 이르러서는 이들 시전상인들이 취급품목별로 입·면포·내외어물·지·저포·청포전등 6개의 조합을 만들어 육의전으로 불리면서 18세기 초까지 조선의 상권을 지배한다. 이들은 성안 사람들의 생필품을 조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로 관의 보호를 받아가며 관수품과 중국에 보내는 진공품의 공급기능을 맡았다. 이들 종로의 시전상인들이 관주도의 상거래를 장악해가는 동안 지방에서는 닷새장제도가 생겨나고 서울에서도 성문근처를 비롯한 도성내 곳곳에 자연발생적으로 장터가 생겨났다.그 대표적인 것으로 동대문근처 배오개장(이현·현 광장시장자리),남대문밖 칠배장(현 봉래동일대)이 있다.이 두 장터의 형성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종로에 시전이 자리잡힌 무렵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들은 오늘날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모태를 이루면서 동시에 서민장터의 쌍벽이 되어 한국 상거래사의 한장을 이룬다. 서울의 물산시장을 가리켜 「동부채칠배어」라는 말이 있다.이는 동대문근처 배오개장에는 과일·채소가 많고 남대문밖 칠패에는 생선이 많아서 생긴 말이다.또 「왕십리 미나리장수는 목덜미가 검고 마포 생선장수는 얼굴이 새까맣다」는 말도 유행했다.왕십리 미나리장수는 아침햇살을 등지고 동대문으로 향해 목덜미만 검게 타고 마포 생선장수는 반대로 햇볕을 안고 남대문으로 향해 얼굴이 타서 나온 말이다. 처음 배오개와 칠패장의 상거래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시전의 금난전권 행사로 상설점포를 갖지 못한데다 그 위세에 눌려 상품마저 마음대로 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장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당시의 장터에서는 오늘날 서울시내 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목격되는 단속반과 노점상들의숨바꼭질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사회현상의 변화가 더뎠듯이 상업활동의 변화도 느린 속도로 진행됐다.그러나 18세기에 들면서는 저자거리에도 한바탕 돌풍이 일었다.인구의 증가로 시장규모가 커진데다 금속화폐의 유통으로 상거래형태가 보다 복잡해지자 관주도 상업활동은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시전상인들의 위세에 눌리면서도 꾸준히 부를 축적해온 사상들은 이 때를 맞아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에 정면으로 도전,마침내 정조 15년(1571) 신해통공조치로 시전상인들의 모든 특권을 철폐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에따라 18세기 중반부터 서울 상권의 무게중심은 종로로부터 성밖 나루터와 남대문·동대문의 양대장터로 옮겨가게 된다.바야흐로 장터의 남대문·동대문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 문화적 문맹/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민속문화란 국민이 따르는 삶의 방식이요,가치이고 태도이다.생활에 있어서 취하는 방식이 물질문화이고 정신에 있어서 선택하는 행동이 가치요,사회적으로 표현된 양식이 사회적 행동이고 태도다. 그간 우리는 문화를 내적의미 추구보다 외적 형식추구,질적인 정신보다는 양적인 물질폭으로 오도하여 왔기 때문에 문화의 공백내지 부재현상을 맞고 있다. 정신의 피폐는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서산대사의 부도와 역사를 이야기 해주는 고분의 도굴을 일삼는 망나니 도굴범과 이를 방관하는 국민들로 나타난다.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면 찬란한 백제문물의 극치인 6세기 후반 금동용봉봉래산 향로 역시 엿 사먹을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다.김치맛을 좌우하는 젓갈이,조사연구할 전문인력이 없다면 한국에서는 썩은 생선이 되고 일본에서는 이를 연구하는 맛깔스런 토하젓으로 역수출하게 된다. 현재 민속박물관은 연면적 1만7천평 건물대지에 1일 1만4천명의 관람객이 방문한다.청소원 4명과 방호원 10명이 17개의 개방된 전시실을 관리한다.2만점의 유물과 3만점의 정리해야할 자료를 선담연구원 4명이 맡고 있으며 30개 민속연구분야를 4명의 연구원이 꾸려나가려니 생산적 자료제작과 유물관리는 불가능하다.더구나 국제화·개방화에 따라서 문화상품수출에 대비하여 자료축적의 혁신은 커녕 있는 자료를 정리할 가내 수공업 정도의 수준도 못벗어 나고 있다.한국의 12명 민속연구원과 비교되는 일본 역사민속박물관,오사카 민족학박물관의 1백20명의 연구원은 컴퓨터로 왕조실록,동국여지승람을 색인화하여 한국문화 재침략(?)의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 작은 정부는 훌륭한 선택이고 이 시대의 명제이다.하지만 민족의 정신적 기반인 새로 신설된 문화기관은 우선적으로 인재를 공급하여 준 후 추상같은 정밀업무 진단을 통하여 비대한 행정조직의 죽일 부분과 키울부분을 판단,선별하라는 것이 정원동결의 참된 의지라고 생각된다.대통령의 말씀자료를 잘못 해석하는 문화적 문맹인들의 의견이 지배적 관행이 되는 한 국가백년대계인 문화입국은 백년을 지체하게 된다.
  • JP의 촛불은(외언내언)

    민자당 김종필대표가 새해들어 「정치화두」를 시리즈로 엮어내고 있다.신년 휘호인 「상선여수」(앞을 다투지 않는 물처럼 사는게 제일 좋다는 뜻)에 이어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충성론」이 시비를 불러 일으키더니 엊그제는 어떤 모임에서 자신의 역할을 촛불에 비유해 「촛불론」을 피력했다는 얘기다. JP의 탁월한 조어력은 정평이 있다.63년초 공화당창당 1주일전 내부반발로 창당준비위원장을 내놓고 외유를 떠나며 썼던 「자의반 타의반」은 30년간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유신과 3선개헌에 관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할때도 그 상표를 원용했을 정도다.80년초 3김시대가 반짝했던 서울의 봄때의 「춘래불사춘」,87년 정치재개후 「유신잔당」공격때의 「유신본당」이 80년대에 나온 그의 작품. 90년대에는 내각제파동때 당시 김영삼대표를 겨냥해 「나는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지않는다」고 한 말,그리고 작년에는 개혁강풍을 빗대어 내놓은 「온고이지신」과 역사의 「기승전결」론이 화제작이다. 중학교때부터 하루에 책한권을 읽었다는 풍부한 독서량이 조어의 원천이 됐음직하지만 직설을 피하는 성격이나 그의 낭만적 기질과 연결짓는 사람들도 있다.그보다는 풍운의 정치와 인생역정과,누구보다 권력의 생리를 잘아는 「2인자」로서의 독특한 위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왕조식 어법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그래도 그시대의 주제를 함축하는 용기가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보수주의의 한 맥을 쥐고 있는 그의 존재는 안정감과 균형감의 지렛대이며 최소한 우리정치사의 살아있는 화석이라는 시각이다. 「밤이 되면 더 밝게 세상을 비추는 촛불」의 역할을 자임한 그의 뜻이 궁금해진다.「결국 해는 서산에 진다」고 했을때 참석자들이 쳤다는 박수의 뜻을 알것 같기도 하다.훅 불면 꺼지는게 또한 촛불이니 주어진 실권으로 구석구석을 비추는 촛불역할부터 먼저 하라고 말할 사람들도 많을것 같다.
  • 모택동·등소평 관계분석/중국현대사 큰사건 풀이

    ◎솔즈베리저 「… 황제들」 번역서 출간/두사람의 인간면모·고뇌 상세묘사/“왕조시대 황제같은 통치자”로 평가 지난달 26일은 모택동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전후해 중국 곳곳에서는 모택동추모행사가 성대하게 열려 중국의 현대사를 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이에 곁들여 「혁명의 천재이며 중국 건국의 아버지」인 모택동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성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부국의 선각자」인 등소평(90)을 놓고 누가 더 위대한가를 비교하는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공산당이 개최한 「모택동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등소평이 「일부러」 예년보다 한달 빨리 북경을 떠나 휴가길에 올랐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은 중국혁명을 함께 이끈 동지이면서 혁명후에는 현대화방법론을 놓고 심하게 갈등한 정적사이였다. 그 두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중국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풀이한 책이 「새로운 황제들」이란 제목으로 나왔다.(다섯수레 간) 지은이 해리슨 솔즈베리는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특파원을 지낸 구소련및 중국문제전문가로 지난 84년에는 모택동과 홍군이 50년전 치른 대장정코스를 되밟아 중국오지를 7천4백마일 여행했다. 이와 함께 모택동과 등소평의 가족,측근은 물론 적대세력과도 폭넓은 인터뷰를 함으로써 모와 등의 인간적인 면모,각 사건에 맞닥뜨렸을 때 그들이 겪은 고뇌,그리고 택한 행동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솔즈베리가 본 모와 등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는 모택동이건,등소평이건 역대 중국의 통치자들과 한치도 다름없는 「황제」라고 평가했다. 왕조시대의 황제들이 고전과 사서에 의존해 백성을 다스렸듯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얇은 베일 뒤에 숨은 모와 등도 똑같은 통치이데올로기를 사용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모와 등은 「새로운」황제라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그러나 「황제」라는 칭호가 억압적인 통치자의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11세기에 편찬된 사서 「자치통감」에 나오는 『폭력을 방지하고 해악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보호하며,선행을 보상하고 악행을 벌함으로써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자,이런 사람이라면 가히 황제로 불릴만하다』는 대목을 인용,그들의 역할을 긍정했다. 이 책은 발간이후 전문가들로부터 「모와 등 두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기술을 통해 중국현대사를 전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역은 박병덕전북대교수와 박월라씨(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설 지역정보센터 중국담당)가 나누어 맡았다.
  • 풍수/남산이 누에머리… 잠실에 뽕나무 심어(서울 6백년 만상:3)

    ◎백두산기 응집된 국토의 중핵이 한양/전국 산수의 정기 모인 북악이 중심부 남산의 형상은 누에머리와 흡사하다.그 남산의 지기를 왕성하게 만들기위해 입쪽인 지금의 잠실에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다.사평리로 불리던 이 땅은 그래서 잠실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서울을 대표하는 숭례문,흔히 말하는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거나 광화문앞에 물짐승인 해태 석상을 세워둔 것도 모두 풍수에서 유래한다.숭례를 세로로 세워놓고 보면 불길을 제압하는 모양이요 물짐승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모양의 화산인 관악산의 불길이 한양 혈터인 경복궁에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 준다고 믿은 풍수에서 비롯됐다. 한양땅 지금의 서울은 한마디로 풍수에서 말하는 탐랑목성래용의 천하대길 명당이다.역성혁명으로 어렵게 왕위에 오른 이태조가 종묘사직과 자손만대의 평안을 약속받기위해 심사끝에 정한 도읍지이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의 한 맥이 수백리를 내달아 솟아올라 도봉산 만장봉이 된다.여기서 남서쪽으로 달려가다가 우뚝일어선 것이 삼각산 백운대요,남으로 내려온 지맥이 백악(북악산)이다.동·남·서 세방향이 강이고….여러 강이 얽힌 사이에 위치한 백악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조선의 지리학자 이중환이 펴낸 「동국산수록」은 「국토지맥의 원천인 백두산 기가 응집된 국토의 중핵이 한양이며 그 가운데서도 북악은 중심부」라고 한양 맥세를 설명하고 있다. 한양의 도시건설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청룡은 동쪽의 낙산(종로구 동숭동일대 뒷산),백호는 서쪽의 인왕산,주작은 안산인 남산과 조산(주산과 마주보는 손님산)인 관악산이라는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의 풍수지리적 해석의 틀속에서 이루어졌다. 정도 당시 정도전등 이론주의자와 무학대사등 실용주의자들은 풍수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무학은 정도전등과 달리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은 남향이 아닌 동쪽으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만약 무학의 주장이 받아들여 졌더라면 서울중심부와 주요도로는 세종로(당시 관청들이 늘어서 있던 육조거리)가 아닌 종로3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서울의 중심은 서북쪽에 덜 치우쳐 보다 균형적인 공간배열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북악을 주산개념으로 볼때 서울은 두가지 약점을 갖는다.그 하나는 주산 북악이 규모가 작은데다 손님격인 관악산이 훨씬 크고 높다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경복궁을 주궁으로 하는 서울이란 터는 운명적으로 손님,즉 외세의 간섭·신하의 모반·하극상 사건을 잉태하고 있다는 풍수지리적인 해석에 도달한다.또 서쪽의 우백호인 인왕산 맥에 비해 장손을 상징하는 좌청룡 낙산지맥이 너무 짧고 빈약해 조선왕조내내 맏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오히려 이례적이었다는 해석이다.이 때문에 4대문중 동대문만이 「지」자를 더 넣어 흥인지문 4글자로 만들었으며 여느곳과 달리 전투를 위한 옹성으로 동대문을 쌓은것도 지세의 허약을 보완하고 동쪽의 외세(일본)의 기운을 막아내라는 뜻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풍수지리는 전쟁을 위한 병법에서 나와 도시개발·건축등 민간생활에 응용된 것으로 땅을 살아있는 생명,유기체로 보았다.이런관점에서 볼때 북악산근처는 머리,세종로등 관청가는 가슴,용산과 강남쪽은 복부가 된다.또 여의도는 서울의 지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경비원이며 시녀역할인 나성이 된다.이러한 위치때문에 국회와 증권으로 상징되는 경제가 북악 즉 정치의 시녀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속설도 있다.청와대의 터가 풍수적으로 좋은 터가 아니며 상징적으로도 높은곳에 밑을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상태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풍수지리적으로 이렇듯 기가 뭉쳐있는 북악과 경복궁사이인 속기처에 일제총독의 숙소와 총독부를 지은 것은 기가 몸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목을 꽉 움켜잡고 있는 형상이다.국토의 핵심지에 점령자의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는 왕조와 국가의 멸망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한양이라는 천년왕도로서의 권위와 신비가 모든 백성들의 가슴속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바로 그러한 사건으로 일제도 그점을 노렸을 것이란 해석이다. 오늘의 풍수전문가들은 실용과 경관적인 아름다움이 풍수지리의 양대 기둥이라고 말한다.자연적 입지가 인간들의 심성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 구주의 나고야성박물관(일본속의 한국문화:13·끝)

    ◎“조선정복” 풍신수길의 야욕 그대로 보는듯/섬뜩한 비문 “바다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역사의 아이러니” 거북선·일 판옥선 나란히 임진위란이 아직 끝나지 않고 풍신수길이 살아 있을 때 어리석게도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강화조약을 맺자고 현해탄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1596년 8월.임란 발발 4년만의 일이었다. 일행이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구주 본토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 언덕 위에 거대한 성벽이 치솟아 있고 한 복판에 5층 누각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나고야(명호옥:낭고야)성으로서 풍신수길의 소위 「조선정벌」전진기지였다. 나고야성 5층 누각 위에 올라서면 멀리 일기·대마 그리고 조선본토까지 보인다는 곳이다.이곳에 최근 기념박물관이 섰다고 해서 가보았다.이름하여 명호옥성박물관.개관 2개월만에 3만명이 다녀갔다면서 서곡관장이 기뻐하고 있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만 침략전쟁을 반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방민의 여론이 결국 이겼습니다』 ○군국주위자가 새겨 먼저 나고야성지 위에 올라서서 북쪽바다를 바라보았다.『한국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바다를 건너다 보니 정말 두 나라는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그러나 아직도 일제때 일본군의 해외정벌 성지로서 세워놓은 기념탑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었다.어떤 광신적인 군국주의자가 새겨놓았는지 「태합께서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시다」라는 글이 보인다.태합이란 바로 풍신수길을 두고 한 말이다.아무리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글귀이다. 성지에서 내려오면 새로 완성된 박물관 건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열실을 둘러보고 느낀 소감이 『아직도 한일 두 나라가 보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에는 큰 시각차가 있다』는 것이었다.4백년이나 지난 옛날 사건이 이토록 오래오래 상흔을 남길 줄이야 아무도 몰랐으리라. 박물관 진열실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거북선 바로 옆에 똑같은 크기로 일본 수군 판옥선이 전시되어 있는데 두 배는 서로 싸우지 않고 나란히 사이좋게 서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제3국인이 이 진열실을 일별하면 어느 쪽이 침략자이고 어느 쪽이 피침략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일본인들이 볼 때는 특히 불쾌하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3만명이 다녀간 이유를 알것 같았다.만일 우리나라에 이런 박물관을 지었다면 이렇게 형편없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없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복강(후쿠오카)에는 아직도 진주성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성지와 임란때 납치해온 당인(가라비토 즉 한인)정이 남아 있다.그들 한인들은 도공도 아니요,아무것도 아닌 무고한 농민들이었다.임란때 끌려간 우리 동포들 말고도 후쿠오카 땅에는 불과 50여년전 이곳 탄광에서 혹사당하다 죽어간 너무나 많은 한국청년들의 넋이 있는데 지금도 위령제 한번 지내주지 않은 채 한국관광객이 드나들고 있다. ○임란직전 국력 비슷 임란이 끝난 뒤 서둘러 국교정상화를 했다가 큰 손해를 본 조선정부.배상금과 송환인을 받기는 커녕 매년 30만냥이란 거액의 돈을 대마도에 지불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가엾은 조선왕조의 국력과 외교력.그때를 생각하면 임란이 우리나라에 준 타격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간단히 말해서 15세기말 임란이 일어나기까지는 한일 양국의 국력은 비등비등했었다.그러나 난이 끝난 뒤 두나라 국력의 격차는 1대3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일제침략을 받은 뒤에는 그 격차가 1백분의1,2백분의1로 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그런데도 한일관계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하겠는데 바로 신정초에 일본의 친지(정명으로 해 두겠다)로부터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작년 일본의 호소카와(세천)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새삼스레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발언을 했습니다.사죄발언 자체는 평가받을만한 일이나 다른 일면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마십시오.즉 금후에 예상되는,보다 대담한 (일본)자위대의 해외파견에 대한 다른 아시아 여러나라의 비판을 미리 막아 두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서 호소카와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자민당계세력이 왕년의 매파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장차 4,5년 안에는 꼭 일을 저지를 작자들』이라고 경고하였다.호소카와의 얼굴 생김새로 보아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고 속단할수 있다.그러나 한일관계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임란이 끝난 뒤 2백년간 통신사라는 평화의 사절단이 현해탄을 건넜다.그러나 그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시대」였다고 회고하는 사람은 없다.1894년 갑오위란이라는 또하나의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시대로 치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으로 광복 50주년,일제패망 반세기를 맞는다.광복후 한 시대를 넘기면서 작금 돌아가는 국제관계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강하다.한국에도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는 국제주의라고 하는 달콤한 슬로건에 현혹되어 이 나라는 동양 3국중 하나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명호옥 언덕 위에서 본 비문:『태합(풍신수길)이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란 글귀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필자만의 기우라 비웃을수 있는 것일까.
  • 남북국시대(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6·끝)

    ◎발해는 만주지배한 「한민족국가」/「고구려계승」 주변국인 신라·일본서도 인정/무덤의 양식·숱한 유물 등 고고학서도 입증 신라는 676년 3국을 통일한 뒤 935년 신흥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또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거란에게 망했다. 「남북국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즉 698∼926년의 2백28년 동안을 뜻한다. 우리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은 최근 몇년사이의 일이다.이는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최근에야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발해가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며 신라·일본등 주변국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역사서인「속일본기」759년 기사에는『고려국왕 대흠무가 국서를 보냈다』는 부분이 나온다.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년)하기 전으로 고려국왕은 고구려왕을 의미한다. 또 대흠무는 발해의 제3대 문왕(737∼793년)의 이름이다.따라서「속일본기」의 기사는 발해의 문왕이 고구려(고려)의 왕을 자처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고 일본측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 조정이 발해사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불렀다든지 발해의 음악을「고려락」으로 표현하는등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본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인정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딸)의 무덤이다.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석실묘)인데다 무덤의 천장이 말각천장의 구조로 돼 있는등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을 그대로 실현했다.이밖에도 현재 발굴된 숱한 발해의 유물들이 문화면에서 고구려를 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를 뒤이은 한민족의 국가임이 확실한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등 역대 왕조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3국의 항쟁­신라에 의한 통일­고려의 계승­조선의 역성혁명」을 한국사의 주요흐름으로 강조해 온 점을 들 수 있다.이같은 입장에서는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발해가 한국사의 곁가지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발해 멸망후 그 본거지인 만주의 동북부일대가 민족의 주활동무대에서 벗어난 점도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인 요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이와함께 당의 야욕을 무력으로 물리쳤다는 사실은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을 추구했다든가 그 결과 국토통일이 대동강이남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도 분명하다. 만주는 발해가 멸망한 뒤로 지금까지의 1천여년동안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그러나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수천년간 우리의 땅이었다. 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민주사의 일부를 회복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 정도 유래/계룡산·무악과 최종경합(서울 6백년 만상:2)

    ◎태조,민심수습 위해 한양천도를 결정/구세력 반발속 무학대사·정도전 주도/고려때부터 고지소문… 개경·평양과 함께 3대도시 서울은 어떻게 서울이 되었을까. 서울은 조선의 수도가 되기전부터 「국조연장의 땅」으로 불렸다.고려때부터 국가와 왕조의 위업을 연장시켜줄 길지라는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예비국도」의 대접을 받아왔다.고려 숙종은 1099년에 친히 한양에 행차해 지세를 둘러보고 도성개창도감을 두는 등 천도준비를 하기도 했으며 우왕도 1382년부터 중신들과 함께 반년씩 옮겨와 정사를 보았다.1390년 공양왕때는 개성이 지력이 쇠했다는 이유로 한때 임시수도가 된적도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떠나 새 수도인 한양에 도착한 것은 즉위 2년2개월뒤인 1394년11월29일(음력 10월28일)로 지금으로부터 6백년전 일이다. 한양이 수도가 되기까지는 왕실의 강력한 천도추진에도 불구하고 일반백성과 중신들의 이견과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천도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왕실과 구귀족의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태조등 왕실은 천도를 통해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들의 경제적·군사적 능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이같은 우려에 천도에 따른 경제적 부담까지 져야하는 중신들은 풍수지리를 앞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을 수도로 만들기 위해 왕실과 줄다리기를 벌인다.이 사이 태조는 계룡산일대와 무악일대(현재의 연희동·신촌부근),한양등 3곳을 직접 방문하는등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바삐 움직인다.천도 자체에 대한 반대론 뿐아니라 천도장소를 놓고도 풍수지리학적으로 의견이 분분할뿐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이 때문에 1393년말에는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관한 책을 모아 정리하는 음양산정도감이라는 관청이 만들어져 풍수지리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태조의 맨 처음 천도희망지는 한양이었다.사실 한양은 수도인 개경·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도시였을 정도로 기반이 잡혀있었다.태조는 즉위 직후인 1392년10월 최고행정기관이던 도평의사사에 빠른 시간안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그러나 배극염·조준등 대부분의 중신들은 성벽과 궁궐등의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태조의 「즉각 천도」령을 좌절시킨다.1393년1월엔 중신중 한명인 권중화가 주장한 계룡산천도론이 받아들여져 10달동안 신도시건설이 진행되다 하륜등의 무악천도론에 밀려 중지된다.무악천도론 역시 중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천도계획자체가 표류하기에 이른다.태조실록은 『여러 재상의 천도반대에 대해 임금께서는 언짢은 기색으로 개성으로 돌아가 소격전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당시를 적고있다. 다급해진 태조는 이어 한양으로 행차,고려의 남경구궁(지금의 청와대자리)을 둘러보고 주위의 의견을 물은뒤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만한 곳이다.더욱이 조운이 통하고 길과 땅도 고르니 인사에 편함이 있다.』고 말하며 무학대사등의 지지를 얻어낸다.정도전과 무학대사등이 대세를 몰아 다른 중신들의 한양천도지지를 얻어내자 태조는 행여 그들의 마음이 바뀔세라 건설공사도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천도를 단행한다. 천도당시 별다른 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한성부의 객사를 왕궁으로 이용해야 했다.관아와 관리들은 민가를 점유해 임시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천도 이듬해인 1395년 가을에 들어서야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되고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당시 천도가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이런 어려움을 뚫고 옮긴 수도도 태종이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방번·방석형제등을 죽이는 왕자의 난 직후인 1399년 정종원년에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1401년 재천도하는 우여곡절의 한 막을 더하게 된다. 한양정도에 관해서는 무학대사와 왕십리,정도전과 무학의 도시배치논쟁,탐랑목성래용설등 이씨의 한양주인설등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이 적지않다.실상 태조실록등 정사도 무학에게 의지하는 태조의 태도와 그의 영향력을 비교적 잘 그려놓고 있다.그러나 일반에 전해지듯 한양정도가 무학등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는 한양이 당시 수도로서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갑술년 아침에/대모신의 심장이여 천룡으로 비상하라

    겨레의 영원한 어머니인 영원한 대모신인 국토, 그 가슴의 심장을 우리는 서울이라 불러 왔다. 북한,도봉의 소슬한 봉우리들 그대 어깨죽지도 솟고 한가람의 푸른 물길 그대 숨결로 맥동하였으니, 해와 달 그리고 뭇 성좌와 6백년의 성상이 그대를 에워 돌고 도는 사이 겨레의 역사,그 비장한 운행 또한 그대를 더불었으니 아! 서울이여, 이제 새로운 6백년,그리고 6백의 세기,그 무량의 억겁을 새 천시를 얻은 천룡으로 비상하라. 나라의 개벽은 곧 서울의 개벽이었다. 그것은 고조선,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조에 다다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나라가 세워지면 서울을 새로이 닦았으니,재(성)를 쌓고 담을 두르고 궁궐을 짓고 하여 일러서 「서울」이라고 하니,이가 곧 나라의 기틀이었다. 고조선에서나 고구려에서나 「정도」는 하늘의 뜻이었다.사람이 함부로 할 일은 아니었다.하늘이 점지한 터에 하늘나라의 본을 따서 하늘의 의지며 솜씨대로 서울은 이룩되었다.고구려 건국신화가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이 사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골령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걸리고 그 속에서 몇날 몇일 두고 나무 베는 소리,다듬는 소리를 위시해서 온갖 집짓는 소리 들리니,백성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기자 동명왕은 그것은 곧 하늘이 자신을 도와 성을 쌓는 소리라고 풀이했다』 이 신화의 문맥은 한 나라의 도읍의 창건은 곧 하늘의 작업이요 공사임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그런 점에서는 고조선의 서울이었을 「신시」또한 다를 수 없다.오죽하면 그 터전을 일러서 「신들의 고을」이라고 일렀을라고…. 이 정신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서울에 바친 찬가인 「화산별곡」은 「화산남한수북,조선승지백옥경」이라고 서울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백옥경은 하늘의 서울,달속의 궁궐이 아니던가.백옥경은 단순한 미사려구가 아니다. 고조선 이래의 전통을 받들어서 하늘 뜻대로 조선왕조가 오늘의 서울에 정도한 뒤 이미 6백의 성상이 흘렀다.위로 천명을 우러러 아래로 광명정대하여 홍익인간하는 것,그 이념에 서울이 헌신한지 6백년의 세월이 흘렀다.앞으로도 이 이념이 달라질리는 없다. 그 사이 서울은 민족의 역사가 스스로 겪는 아픔의 크기만큼 자라간다는 것을,몸소 고뇌와 비창과 맞선 열정의 부피만큼 발전해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이 점은 서울이 6백년의 대단원을 눈앞에 두고 나라를 빼앗긴 오욕,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서울은 그로써 6백년을 마무리할 기틀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것은 6백년 서울의 역사의 「도미의 장식」이었다.아세아의 한 중핵이자 세계속의 서울로 비약할 도약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별곡은 서울을 「용이 하늘을 날면서 지은 형세」라고 하였지만 이제 한반도안에 웅크리고 있던 용은 동북아를 품에 안고 세계를 향해서 비상해야한다.이제 서울은 세계를 향한 천시를 누리고 천명을 받들어야 한다.그리하여 지구촌의 광명정대가 되어 범지구적인 홍익인간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서울은 지난 6백년을 잠룡으로서 은인자중해 온 것이다.그러나 드디어 때가 왔다.아세아의 잠룡은 마침내 「세계의 천룡」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세계의 빛 세계의 의로움이 되어야 한다.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기에서 서울이 누려 마땅한 천명이다. 화산별곡은 「의로움을 잇고 또 이어서 또 펴고 또 펴서 천지가 편안함을 누리고 사방세계가 하나같이 통합될 태평」을 서울에 부쳐서 축수하고 있거니와 그 창업의 정신이 간직했던 웅지가 이제 바야흐로 실천되어야 한다.한반도의 옛 화산은 이제 세계의 새 화산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또다른 천명을 서울은 감당할수 있어야 한다.그것은 겨레를 위한 천명,민족사를 위한 천명이다.통일 한국의 수도 서울이 될 그 지엄한,지상의 거룩한 천명이다. 새로운 세기의 서울이여,세계의 천룡으로 비상하라.남북의 용으로 날아라 .그리하여 「후천」개벽하라. 이제 그 천시가 왔음을 우리들은 다짐하노니 서울이여,우리의 천룡이여,우리의 소원을 가납하라.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낙산·인왕·목멱·백악산 경계로 도성형성/한양에서 서울까지 성장과정

    ◎면적 15㎢·인구 5만으로 출발/강남지역 일제말까지 경기도/49년 특별시 승격… “1천만” 거대도시로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것은 1394년 11월29일(음력10월28일).정도 당시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백악산등 4대산을 경계로한 성벽안 도성과 성저십리라 불린 성밖 10리까지였다. 넓이는 15.2㎦가량으로 지금의 40분의 1가량.한양의 일부면서도 도성과는 구별되던 성저십리는 동으로 왕십리와 청량리,남으론 한남동,서로 용산 마포,북으로는 세검정과 종로구 부암동일대에 이르렀다. 한성부의 영역이었던 한강 북쪽과는 달리 한강진 용산 서강 양화진과 강남의 송파 삼전도 동작진등은 중요 상업거점으로 성장한다.삼남지방의 곡식과 8도의 물산 대부분이 서해와 내륙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수송됐다.이에따라 서울주변의 강촌들은 수송·창고·수탁판매·숙박업등이 집결,경강상이란는 상가를 이룬다.특히 양화·노량·동작·송파·한강진등 5개진은 읍단위 행정관청과 관리들이 파견된 상업및 전략적 거점이었다. 강남의 전역은 조선말기까지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했다.그 때도 지금과 같은 이름이었던 우면산 남태령 관악산등은 과천현에 속했으며 강남이 서울에 일부로 포함된 것은 일제말이 되어서였다. 박석고개와 은평구 진관외동 일대는 경기도 양주목의 신혈면이었고 태릉에는 동북지역으로 가는 역사가 설치돼 있었다.지금의 구리시는 미음읍. 정도당시 인구는 대략 5만명 안팎.조선왕조실록은 태종9년 1409년의 한성부의 호수를 1만1천56호로,세종10년 1428년에는 1만8천5백22호 10만9천3백72명의 백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600년대 기록은 양반이 전체인구의 10%였고 상민이 15%,75%는 노비라고 전한다. 한강이 서울을 양편으로 나누듯 한양 중심에는 지금은 복개돼 자취를 찾기 어려운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이를 경계로 북쪽은 양반들이,남쪽은 중인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청계천이남 을지로일대는 서민주택촌.경복궁에서 광토현(현재 광화문네거리)까지 이어진 폭35m의 대로 양쪽에는 이조·예조등 각종 관아가 밀집돼 있었고 광토현에서 동대문까지 폭35∼18m도로변에는 1414년까지 공랑(관에서 세운 상설점포)3천간이 들어선 상업중심지였다.일제가 점령하면서 서울의 종로일대는 한국인 거주지,을지로∼남산기슭∼용산∼원효로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나누었다. 한양은 그때도 역시 교통의 중심지였다.서울과 지방은 6대간선도로인 의주로,경흥 서수나로,평해로,동래로,강화로,제주로(해남∼노량진을 잇는길)로 이어졌고 동북지역과는 금화∼금성∼철령∼안변∼원산로로 연결됐다. 미군정하인 46년8월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선포된 서울은 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됐다.면적도 경기도일부를 편입시켜 63년 5백93㎦,73년엔 6백5㎦로 확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남산/민족의 기상 충정의 표상(서울 6백년 만가:1)

    서울이 나라의 으뜸도읍으로 정해진지 6백년.태조 이성계가 당시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서울은 무수한 변화속에서도 수도의 위치를 의연히 지켜왔고 이제 세계속의 큰 도시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6백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시리즈로 소개,수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해 본다. ◎옛이름 목멱산… 태조읍후 개명/고종때 공원지정… 일반인 휴식처로/“제모습 되찾기” 올해부터 본격착수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우리민족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아온 남산. 세월에 따라 그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남산만큼 우리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도 없을 것이다.왕권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충직하고 현명한 백성들에게 믿음직한 충정의 표상이었으며 민족수난기에는 목숨을 바쳐 지켜야할 국가 이상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이 품어안고있는 소나무의 변하지 않는 푸르름은 우리기상의 본보기 이기도 했다. 서울사람치고 남산을 보지않고 하루를 지나는 사람은 없으며 서울을 찾는 사람중에 남산을먼저 보지않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해발 2백65m의 남산은 야트막하고 봉우리도 둥그스름한데다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해 온국민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왔다. 정상에서 동서로 2.7㎞,남북으로 2.1㎞ 뻗어 오늘의 행정구역으로는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성동구 왕십리쪽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다.면적은 1백2만9천3백여㎡. 조선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한갓 작고 평범한 구릉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처음 역사의 무대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부터다.이때까지만 해도 인경산으로 불리다 서울 남쪽 끄트머리에 있다하여 남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남산의 본래명은 목멱산으로 목멱이란 옛말「마뫼」의 한자음 표기이다.「마뫼」는 남쪽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1910년 고종황제는 남산을 백성들의 공원으로 정해 일반에 공개,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친필로 한양공원이란 석비를 써 하사했다. 이 석비는 지금도 구통일원 자리에 남아있다. 그러나 남산은 한강 이남의 개발과함께 서울이 남쪽으로 넓어지면서 남쪽 끄트머리에서 어느틈엔가 한복판으로 옮겨 앉았다. 일찍이 한양의 남쪽 방패로 시인묵객의 풍류와 일반인의 휴식처로 사랑받아오던 남산은 근세에 들면서 여기저기에 흠집이 나기 시작했다.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해 일본인이 지금의 예장터일대에 거류하면서 부터다.일제는 현 안기부자리에 통감부를,수방사 자리에는 헌병사령부를 설치했는가 하면 1926년에는 정상에 모셔졌던 우리민족의 표상이던 국사당을 폐쇄하고 수천그루의 벚꽃을 심는등 민족정신의 혼을 말살하는 상징물로 남산을 이용했다. 안타깝게도 남산훼손은 광복후 우리손에 의해서도 계속됐다.지난 57년부터 3공때인 75년까지 36차례의 공원용지해제로 중앙방송국·남산방송소·외국인 임대주택단지·타워호텔등 갖가지 대형 건축물들이 산허리를 깍아내고 들어앉았다. 다행히 시는 올해 정도 6백년을 맞아 남산복원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키로해 웅장하지는 않으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옛모습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았다.외인아파트는 내년에 헐리며 산의 경관을 헤쳐온 정상의 서울타워와 숭의학원등도 늦어도 2000천년까지는 모두 철거된다.철거작업이 이미 끝난 수방사자리엔 남산골이 조성돼 옛정기를 확인할 수 있는 한옥등이 들어서게 된다. 외세의 침탈속에 그리고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상처받았던 남산이 제모습을 되찾으면 서울의 고풍스런 운치는 한결 돋보일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