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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중 고고학(외언내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 이집트를 점령하고 나일강 하구에 새 도시를 세우도록 명령했다.이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9년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그의 신임을 받던 무장 프톨레마이오스 지배아래 들어간 이집트의 수도가 된다.그리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가 되며 유클리드의 기하학,헤로필로스의 해부학도 이 도시에서 꽃핀다. 3백년간 계속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의 여왕이 7명이나 있었다.그 마지막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에 이어 지중해 세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 오른 로마의 정복자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했다가 안토니우스가 그의 정적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자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는 전설을 남겼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수중탐사반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왕궁과 안토니우스의 저택 잔해·술항아리·포장도로등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유물들을 수천점 인양했다고 외신은 전한다.긴 방파제로 받쳐지고 있는아름다운 항구가 2천년이 흐른 지금에도 양호한 상태로 수중에 보존돼 있어 탐사반은 클레오파트라의 손이 닿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열주들을 만져보며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수중고고학에 의해 역사와 전설에 얽힌 고대 이집트도시 알렉산드리아가 2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알렉산드리아 해저에서는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에 축조됐다가 13세기에 대지진으로 사라진 뒤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온 파로스등대의 잔해가 올해초 인양된 바도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도 신안 해저유물 발굴(1976∼1984)이후 수중고고학의 중요성이 대두됐지만 지나친 성급함이 가짜 「별황자총통」 사건만 불러 일으켰다.꾸준한 투자와 관심으로 수중고고학을 육성해 장보고 충무공의 찬란한 발자취를 비롯,우리의 해양역사도 되살려야 할 것이다.
  • 클레오파트라 왕궁 잔해 인양

    ◎불 고고학자들 3천5백회 수중탐사 끝 성공/알렉산드리아의 「2천년 신비」 풀릴 전망 【알렉산드리아(이집트) AP 로이터 연합】 프랑스 고고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수중탐사반이 클레오파트라(BC 69∼30)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BC 82∼30)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2000년 전의 알렉산드리아 유물 인양에 성공함으로써 오랜 세월 해저에 묻혀온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신비가 벗겨질 전망이다. 프랑스 해양고고학회의 프랑크 고디오 회장은 3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포함한 16명의 유물 탐사반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항구 동쪽 수중 5∼6m 지점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왕궁과 안토니우스 저택,사원 등의 잔해들을 인양했다고 밝혔다. 고디오 회장은 대부분 프톨레미 왕조(BC 323∼30) 유물들인 회색 화강암 열주(줄지어 늘어선 기둥)와 동상,술 항아리,포장도로,방파제 등 수천점의 인양에 성공함으로써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기술에 의존해 온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왕궁터 등에 대한 옛 이론들이 잘못된 것임을 밝혀냈다고 발굴 의미를 설명했다. 고디오회장은 『긴 방파제로 받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가 20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양호한 상태로 수중에 보존돼 있다』고 말했다.탐사반은 지난 4개월 동안 위성 장비인 전지구 위치 파악시스템(GPS)을 이용해 3천500여 차례의 수중 탐사를 벌여왔다.
  • 조선시대 나한도(한국인의 얼굴)

    ◎수행정진 몰두하는 눈동자 날카롭되 오만하지 않아 고려왕조가 운명을 다하고 나서 조선이라는 왕조가 새로 들어섰다.그런데 새 왕조가 연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고려에 비해 격이 좀 낮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유교를 추켜세우고 불교를 눌러버린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은 그림을 포함한 불교미술의 퇴락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모지에서도 꽃은 더러 피었다.호암미술관 소장 나한도첩(보물 593호)의 나한상은 조선 초기 불교회화의 꽃이다.그 붓놀림이 대담한 나한상을 보노라면,마치 현대회화의 데생이 연상되었다.그것도 나한의 인상을 순간적으로 잡은 크로키형식의 데생이어서 생동감이 넘쳤다.어디 한부분 막힌 데가 없이 휘돌아간 붓끝으로 선묘를 이루어냈다.절묘한 필법이다. 나한 얼굴을 보면 나이가 그리 들지 않았다.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나한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그래서 눈의 초점을 맞추느라 눈 사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또렷한 눈매를 했을 뿐더러 눈동자도 빛났다.나한이 날카로워 보이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눈매와 높은 콧대 때문일 것이다.그러지 않아도 작은 입을 너무 꼭 다물어 더욱 작아졌다. 그렇다고 나한이 오만한 것은 아니다.법력을 얻고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날카로워진 것에 불과했다.머리 골격은 달걀형이라 귀골티가 났다.무슨 사연으로 출가했는지 모르나,절밥 공양을 든 지는 꽤 오래된 듯싶다.귀는 그동안에 부처귀를 닮아서인지 크고,실하게 그려놓은 귓밥은 귀고리로 착각되었다. 이 나한도의 묘미는 그림의 선을 짙고 옅은 농담의 먹물을 써서 처리했다는데 있다.먼저 옅은 색 먹물로 밑그림 초를 잡고,그 위에 짙은 색 먹물을 써서 마무리한 그림이다.그렇다고 밑그림을 그대로 덧씌운 것은 아니다.오히려 밑그림을 무시한 채 진한 색깔로 그림을 완성시켜 선묘화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먹의 농담은 결국 밝고 어두운 상태를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그러고 보면 나한도는 전통 몰골법 그림인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학포 이상좌(1465∼?)로 압축되었다.허목(1595∼1682년)이 그림내용의 대강을 쓴 발문에 그 이름이 나온다.명종때 사람 어숙권이지은 「비관잡기」를 보면 이상좌의 출신성분은 노비로 되어 있다.그러나 그림을 잘 그려 중종임금이 노비의 신분을 벗겨주고 도화서 화원으로 등용했다는 것이다.당대 내로라는 인물들이 이상좌의 그림을 예찬한 글도 많다.〈황규호 기자〉
  • 중국 통사 「사기」 국내 처음 완역/도서출판 까치 전7권 펴내

    ◎소장학자 60여명 참여 2년만에 번역 마쳐/신문소설로는 서울신문이 최초 연재중 중국 한무제때의 역사가 사마천(BC 145?∼BC86?)이 편찬한 중국 최초의 세계사적인 통사 「사기(전7권·도서출판 까지)가 국내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사기」는 상고시대의 황제로부터 전한의 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그 주변민족의 역사를 포괄해 기술한 것으로,역대왕조의 편년사인 「본기」 12권,연표인 「표」 10권,부문별 문화제도사인 「세가」30권,개인의 전기집인 「열전」 70권 등 모두 130편으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사기」는 「열전」을 중심으로 작가 김병총씨에 의해 평역된 이후 서울신문에 연재소설로는 처음 소개되고 있으며 완역이 이뤄지기는 이번이 처음.정범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를 중심으로 60여명의 소장 학자들이 참여해 2년여만에 번역을 마쳤다. 「사기」는 역대 중국 정사의 모범이 된 기전체의 효시로 본래 명칭은 「태사공서」.「태사공서」가 「사기」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당나라 때부터다. 사마천은 10세때 이미 옛 전적을 탐독하기 시작했으며,청장년 시절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의 풍습과 역사적 인물들의 기문일사를 수집하는 등 「사서」찬술의 기초를 쌓았다.사마천의 「사기」를 쓰게된 데는 대대로 사관을 배출해온 전통적인 관료가문 출신으로 천문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 벼슬을 지낸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이릉사건으로 한나라 무제의 미움을 사 치욕스런 궁형까지 겪었지만 사마천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구명하고,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을 이룩한다』는 신념 하나로 「사기」를 완성했다.집필을 시작한지 15년,이때 사마천의 나이는 55세였다. 「사기」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본기」는 세계와 역대 제왕들의 통치이념을 서술한 연대기이며,「표」는 도표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연표다.또 「서」는 봉건사회의 사회적 규범과 제도적 법식에 대해 서술하고 논평한 책이며,「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주왕실의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고 봉국을 세습한 제후들이 발호하던 봉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흥망성쇠의 역사다. 국내독자들이 비교적 친숙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사기」의 마지막 부분을 이루는 「열전」.고대로부터 한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제왕과 제후를 제외한 다양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전기형식으로 엮은 것으로 인물묘사가 생생해 전기문학의 전범으로 꼽힌다.또 「열전」의 끝 편인 「태사공자서는 「사기」의 체재와 내용,규모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있어 「사기」전체의 총론구실을 한다. 이번 완역본에서는 무엇보다 동자이음의 독음을 통일시키는데 주의를 기울였다.예를 들어 「적」자는 「적」으로도 「책」으로도 읽는다.또 인명으로 사용될 때는 대부분 「책」으로 읽힌다.이 책은 이처럼 단어의 유래를 찾고 원음을 추적,한서번역본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오류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는데 또다른 미덕이 있다.〈김종면 기자〉
  • 파키스탄 탁실라:하(세계 문화유산 순례:11)

    ◎거대한 수투파엔 혜초의 숨결이… 그 넓은 고원지대 탁실라의 옛 이름은 탁사실라(Taksasila)다.탁사는 석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고,실라는 도시를 의미했다.굳이 의역하면 「돌의 도시」라고나 할까.탁사실라라는 고유명사는 1918년에 발굴한 은판,새김글씨(명문)에서 확인되었다.은판에는 다르마르지카(Dharmarjika)라는 새김글씨도 함께 나와 탁실라 근본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실라의 유명한 수투파(불탑)유적 가운데 하나인 다르마르지카는 은판 새김글씨에 나오는 고유명사 그대로다.은판은 오늘날 다르마지카로 부르는 수투파 유적에서 실제 출토되었다.유적은 탁실라박물관 동쪽 냇물 건너에 있다.수투파 다르마르지카는 아주 거대했다.두 층의 원형돌기단위에 쌓아올린 수투파는 우리나라 경주 천마총만큼 크고 높아서 야산처럼 보였다. 그 수투파 가장자리 공간을 좀 비워두고 자리잡았던 예불당들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수투파 원둘레 바깥을 따라 빙 돌아간 예불당 건물터들은 정연했다.그 잔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수투파 뒤뜰에는 승려들이 살았던 돌담벽 승방들이 벌집마냥 들어앉았다.촘촘한 승방들을 몇차례나 손가락을 펴고접어 헤아리다 그만두었다.그까짓 폐허를 헤아려 무엇하랴.불교가 융성했던 시절,독경소리가 요란했을 다르마르지카에는 정적이 흘렀다. 다르마르지카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시대 유적으로 보고 있다.그의 치세기(BC 269∼232년)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수투파 1만8천기를 쌓았다고 한다.물론 전설적 기록이기는 하나,다르마르지카에서 아쇼카왕의 불심을 보았다.다르마르지카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왕의 사원」이다.과연 왕의 사원다운 다르마르지카는 탁실라의 또다른 수투파유적 쿠나라스 등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했다. 탁실라고원의 불교역사는 퍽 오래되었다.이는 자울리안산 높은 언덕에서 오랜 세월을 버티어온 사원유적 자울리안(Jaulian)역사를 들추어 보면 알 수 있다.간다라지방을 먼저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가 그토록 깊고넓은 인더스강을 기어이 건너 자울리안을 공략하지 않았던가.서력기원이 아직 멀기만 했던 BC 325년쯤의 일이다.아쇼카왕 이전에 벌써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그러고 나서 만난 돌계단을 다시 올라 자울리안에 다달았다.절집 승가람마가 분명한데,여기 사람들은 자울리안대학이라 부르면서 인도 나란다에 비유했다.불교교리나 경전은 물론 다른 여러 학문을 가르친 교육기관이 자울리안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정복자 알렉산더는 점성술,수학,의학 따위의 학문적 지식과 심지어는 병법까지 자울리안에서 빼내갔다. 자울리안은 돌을 쌓아 만든 석조건축물 가람이다.가람 자리가 산등성이라서 그런지,앞뜰은 옹색했다.몇 걸음을 걸어서 뜰을 비켜서자 수투파를 봉안한 불당이 나왔다.메인 수투파를 중심으로 키 작은 수투파들이 옹기종기 들러리를 섰다.진흙반죽에다 작은 불상들이 들어갈 감을 조각하여 말린 뒤 대개 세층으로 쌓아올린 수투파는 걸작의 예술품들이었다. 불당에서 승방을 향한 골목 한쪽으로 작은 방들이 따라 붙었다.석굴이 연상되는 방에 불상이 띄엄띄엄 좌정했다.홀로 앉은 이들 불상은 단독불상이 출현한 1세기말 이후 작품일 것이다.그러나 온전한 불상이 거의 없다.어떤 테라코타 불상 하나는 머리가 달아났는데,배꼽이 뚫려있다.성치 않은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때문에 배꼽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비록 목이 달아난 부처일지라도 이타행만큼은 실천하는 모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승려 혜초(AD704∼787년)도 그 옛날 자울리안을 다녀갔다.이 책에 기록한 탁사국은 탁사실라일 것이다.그는 책에 쓰기를,「탁사국에 가면 절도 많고,승려도 많다」고 했다.구도여행에 지쳤던 혜초가 하룻밤 발을 뻗고 누웠을 승방도 자울리안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해거름에 탁실라박물관 근처 레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저녁식사 카레라이스에 앞서 요구르트와 쌀가루를 섞어만든 죽 키르가 식탁에 올랐다.고타마 싯달다가 고행에서 나오자,한 처녀가 그에게 바쳤다는 유미죽이 연상되었다.「대장엄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릴리프로 표현한 탁실라 출토품 불전도가 탁실라박물관에 있다. ◎여행 가이드/이슬라마바드서 약 40㎞/승용차 하루 전세 한화 3만원 고대유적이 광범위한 지역에 널린 탁실라는 파키스탄 라발핀디현에 속한다.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40㎞,현소재지 라발핀디에서는 35㎞가 떨어져 있다. 고대의 불교유적과 도시유적 말고도 국립탁실라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하루일정으로 돌아보기가 어렵다.그래서 탁실라에서 숙박을 하든가,아니면 이슬라마바드를 거점으로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탁실라박물관 바로 앞에 레스트 하우스가 있으나 소규모다. 이런 현지사정을 고려해서 이슬라마바드에 묵는 사람이 많다.이슬라마바드에서 탁실라를 왕복하는데 드는 승용차대절비는 기름값을 포함,하루 40달러(한화 3만원정도).이슬라마바드에는 국제체인의 관광호텔과 국영호텔 등 숙박시설이 많다.문의는 인더스 가이드(전화 92­42­872975).
  • 파키스탄 탁실라:상(세계 문화유산 순례:10)

    ◎ADI세기 간다라미술 태동지/BC2세기 도시 「시르캅」 주인 5차례 바뀌어/실크로드서 인도가는 길목 이민족 침략 찾아/초기불교 불상대신 불탑 실내에 위치… 규모 작아/「쌍두취불탑」 기단장식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풍 오늘의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을 선점한 종교는 불교다.그러나 지금 파키스탄에는 불교가 종교로 존재하지 않았다.다만 불교의 흔적들이 거대한 유적군으로 여기저기 남아있을 뿐이다.불교미술사의 첫머리를 찬란하게 장식한 이들 유적은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하나가 펀자브주 라발핀디지방의 탁실라(Taxila)다.수도 이슬라마바드를 출발한 승용차가 채 한시간을 못달려 도착했다.탁실라박물관으로부터 탁실라 전역이 유네스코가 선포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설명을 듣고나서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그러니까 유네스코는 탁실라를 온통 한 덩어리로 싸잡아 대단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한 것이다. 산악이 동·서·북을 감싸고 돌아가다 남쪽을 터놓아 마치 삼태기처럼 생긴 고원지대에 자리한 탁실라.동쪽 사르다산과 북쪽 자울리안산 사이 계곡에서 발원한 개울물이 제법 깊었다.그 산자락과 계곡 어디 하나 이름붙지 않은 곳이 없다.그리고 비르마운드를 비롯,자울리안,모라모라드,시루스크,잔디알,시르캅,사르아이코라,다르마지카,기리 같은 숱한 유적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서깊은 탁실라의 역사를 후세에 증명한 유적은 시르캅(Sirkap)이다.기원전(BC)2세기쯤에 건설되어 기원후까지 존속한 이 도시유적은 탁실라 제2의 도시였다.이보다 훨씬 앞선 도시유적 비르마운드가 있으나 고고학적으로 역사를 뒷받침하기에는 좀 미흡했다.그러나 시르캅은 영국인 고고학자였던 존 마샬경이 옛 사람들의 생활터전을 땅속에서 찾아내는 고고학 발굴조사에서 도시의 주인이 적어도 다섯 차례이상 바뀐 사실을 밝혀냈다. 시르캅은 탁실라박물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자두 과수원을 낀 마을길을 얼마간 달려 시르캅에 다달았다.두어 사람 어른키를 재려하는 성곽이 길을 막았다.오늘날도 출입구로 사용하는 성문은 서쪽에 나 있다.그래서 성안의 간선도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연결되었다.어림잡아 너비가 20여m나 되어 보이는 도로가 시원하게 도시유적 한복판을 지나갔다. 이 도시를 처음 세웠던 사람들은 그리스인이다.오늘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서쪽의 박트리아왕국을 식민지로 거느렸던 그리스인들이 BC 2세기 전기에 건설했다.도시는 바둑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었다.지금도 계속 고고학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시르캅의 도시규모를 당장은 정확히 알 수 없다.현재 드러난 도시규모는 대략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1.7㎞이나 발굴구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도시유적 한복판 간선도로 양쪽엔 네모 반듯반듯하게 돌을 쌓아올려 지었던 집터가 즐비했다.규모가 좀 작은 일반시민들의 주거용 집자리 사이로 터를 보다 넓게 잡은 차이티야당(Caitya당)자리가 보였다.초기불교에서는 수투파(불탑)는 예배의 대상이었다.그래서 예배장소에 수투파를 안치했다.그런 탓에 차이티야당은 넓을 수 밖에 없었다.도시유적안의 수투파는 다른 야외수투파처럼 크지 않았다.그저 자그마하게 만들어 앙징스러운 유적으로 남아있다. 시르캅에서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머리 두개의 독수리가 있는 쌍두취불탑이다.이 불탑의 기단은 중앙계단을 사이에 두고 좌우 정면에 코린트식 둥근기둥이나 네모기둥을 세워 벽 공간을 각각 세등분한 형태를 취했다.그리고 좌우 양쪽 세공간에다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시아풍 건물출입구 모양의 감을 만들어 장식해놓았다.두 머리를 가진 쌍두독수리는 서아시아풍의 출입구문위에 조각되었다. 그러고 보면 쌍두취불탑에는 그리스,서아시아,서남아시아라는 모티브가 서로 다른 문화가 혼재한 것이다.이들 세 지역의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쌍두취불탑은 불분명했던 탁실라역사를 그런대로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었다.특히 쌍두독수리는 스키타이의 일족인 샤카족의 심벌이었다.그래서 쌍두취불탑을 세운 시기는 샤카족시대 후기부터 파르티아족시대 전기로 추정되었다.대개 기원후(AD)1세기 전기로부터 중기에 이르는 시기다. AD1세기는 탁실라를 답사하는 동안 매우 주목할만한 시기였다.불교미술이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바로 1세기였던 것이다.이전에는 수투파가예배대상이었기 때문에 불교미술,더 나아가 불상은 전혀 조성되지 않았다.그것은 아마 경전에 근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장아함경」이 기록한 「이 몸이 명을 다한 뒤에는 나를 볼 수 없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불상조성을 가로 막았을 것이다. 어떻든 불교미술이 탁실라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이른바 간다라(Gandarah)미술이 출현하는 것이다.간다라미술은 파키스탄 북부 일대와 아프가니스탄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 중심축을 이루었다.이들 지역은 실크로드에서 인도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이라서 늘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다.박트리아족과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침략,샤카족 지배와 파르티아족시대,쿠산왕조시대가 번갈아 거쳐갔다. 그런데 불교미술은 헬레니즘 양식을 짙게 받아들였다.불교미술이 출현은 했지만 불상이 곧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부처가 없는 불교미술로 출발한 것이다.이를테면 시르캅 도시유적 출토 릴리프 「헌화공양도」는 꽃을 받을 대상이 없는 가운데 연꽃다발을 든 사람들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 부처가 대중들과 더불어 불전도에 등장했지만 부처의 차별화는 그 다음 단계에 이루어졌다.부처의 키를 대중들보다 크게한다든가,자리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릴리프들이 시르캅유적 땅속에서 나오고 있다.
  • 병사들의 산화를 애도하며(사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공비소탕을 하던 소중한 우리 젊은이들이 적탄에 쓰러지고 있다.이 분하고 원통한 죽음의 대가를 그들은 무엇으로 치를 것인가.얼마나 더 죄를 지어야 그들의 악행은 끝날 것인가. 굶고 헐벗는다기에 우애를 발휘하여 옛날 동족살해의 전쟁범죄도 접어두고 쌀이며 담요,어린아이 먹을 거리를 정성스레 실어보낸 바로 그 뱃길로 야반에 쳐들어와 이렇듯 꽃다운 목숨을 앗아가는가.그 죄업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걸핏하면 굶주린 인민을 「자살훈련」시켜 소모품삼아 내던지는 「주체사상왕조」의 세습독재와 우리는 다르다.법의 수호를 받으며 인권과 자유를 누리는 국민이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지원한 떳떳한 군인들이다.그 귀한 목숨이 시대착오적 가공의 모험주의와 그 수하가 펼치는 최면술에 빠져버린 공비집단에 의해 이렇게 스러져가는 일이 분통스러워 통곡한다. 아직도 다 소탕하지 못한 잔당이 수풀 우거진 깊은 산속에서 횡행하고 있으니 우리의 또 다른 희생을 부르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군인간 아들의 모든 부모마음을생각하며 잔당이 빨리 소탕되도록 마음졸이며 빈다. 22일 저녁에 우리는 KBS­TV가 비쳐주는 북의 잠수함이 좌초한 물속을 보았다.공비들이 필사의 탈출을 벌인 흔적이 너무도 생생했다.은혜를 악으로 갚는 무리가 기왕에도 숱하게 드나들었다는 물길에서 이번에 이런 좌초를 하게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이렇게라도 그들의 악행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섭리가 이런 벌을 내렸을 것이다. 또 이런 방법으로라도 안보불감증에 걸려 당면한 안보상황에서 환상을 보는 정신 못차리는 우리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주저 없이 몸을 던져 조국을 지킨 젊은이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준 교훈에 옷깃을 여미며 분단된 조국에 태어나 짧게 살다가 통한의 죽음을 한 병사들의 영전에 엎드려 명복을 빈다.
  • 요행 좋아하는 정치인들(이동화 칼럼)

    얼마전 어느 무속인이 예언서를 내고 화려한 출판기념회를 가져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그 자리에는 정·재계 등 각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도 참석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김일성사망 예언이 맞아떨어졌다고 해서 일약 유명해진 그 무속인은 이미 정치일정 등 한두해를 내다보는 예언서를 낸적이 있었다. 그 내용중 맞지 않은 것들이 여러가지 드러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에 참석한 것은 영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이리라.이책을 포함하여 일부 역술인들이 이른바 대권점괘풀이를 책으로 쓰고 서문에는 대학교수가 추천사를 써준 것까지 있다.점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 대권의 향방을 놓고 무당 점쟁이 도사 등이 각광을 받는 것은 이상한 한국적 현상이다.우선 국민들이 대권에 관심을 많이 갖게되니 뭐든지 「대권」「대권」해야 팔린다.역술인들도 대권얘기를 해야 팔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들은 집필과 방송출연 등으로 드러내놓고 활동무대를 마련하고 있어 점술붐을 확산시키고 있다. 전에는 미신이라고해서 그런 책이있더라도 서점에서 뒷전에 보이지 않게 두었으나 요즘에는 드러내놓고 가장 잘보이는 곳에 잔뜩 진열해놓고 있다.방송도 국민의 관심이 많아졌다는 이유를 들어 무속인이나 역술가를 자주 출연시키고 있어 역술문화가 번지는데 기여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가.그 근저에는 오랫동안 점술문화가 서민들의 그림자속에 살아있었고 그것이 허무맹랑한 일확천금의 꿈이 확산되는 최근의 사회분위기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또 다른 직접적 이유는 이런 것에 초연해야 할 사회지도층에서 오히려 역술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사실 우리 정계·재계의 유력인사들 중에는 점을 신봉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총선이나 대선 지방선거등 모든 선거를 앞둔때면 이른바 유명하다는 역술원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어왔다.과거 여당의 어느 최고위원은 헬리콥터를 동원해 지방의 관상쟁이를 찾아나선 것으로 유명했다.어느 야당총재는 얼마전 유명한 지관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왕기가 서린 터에 가족묘원을 마련했다는 보도가 나와 화제가 됐었다.어느 그룹 총수도 모든 일정을 점술가의 조언에 따라 결정했으나 구속된 적이 있다. 군출신인 전직대통령들도 주요 정치행사의 택일은 점술가들에게 물어 결심하는 경우가 적지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물론 외국에도 그런 예들이 있다.필리핀의 마르코스 전대통령이 운세좋은 날로 아예 호적상 생일조차 바꿔버렸다든가,심지어 미국의 레이건전대통령 역시 부인낸시여사가 점성가에게 받은 일정대로 움직였다고 해서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 또 조선왕조를 연 이태조가 한양을 새도읍지로 정할때에도 풍수지리의 대가들인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이견에 끼여 고심하다가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아래 왕성을 지은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이처럼 역술에 의지하기에는 동서고금이 없어 보인다.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인은 그도가 심하다. 정당공천때나 총선거때마다 점집을 찾아 자신의 운명은 물론 예상경쟁자의 신상명세까지 들고와서 그들의 운명과 자신을 비교해 달라는 촌극을 벌이는가하면 대선을 앞두고는 「누가 당선될 것 같으냐」「어느쪽에 줄을 서야 되느냐」는 문제까지 묻고다니는 정치인이 하나둘만이 아니라니 한숨이 나올 일이다. 정치인들이 역술에 빠지는 것은 우연의 요소에 의지하려는 비합리적이고도 비과학적인 태도로 비난받아 마땅하다.이런 정치인은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해야 할 민주주의정치의 지도자로서 자격이 부족함을 의미한다.미신에 의존하는 수준으로 어떻게 복잡다기한 국정을 이끌어 나갈수 있겠는가.국가대사,특히 중요한 정치일정을 역술에 많이 의존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개정통합선거법에서 각급선거일자를 명문규정한 것은 여러 다른 이유와 함께 부끄러움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한 일이다. ○ 정치는 냉정한 이성의 바탕위에서 신념과 용기를 갖고 해야지 요행이나 바라는 자세를 갖고는 안된다.또 사회지도층,특히 정치인들이 역술에 의존할때 그 파급효과는 모든 국민에게 미칠수 밖에 없음을 자각해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그러면 사회분위기도 미신보다는 과학이,요행보다는 성실한 노력이 평가되는 쪽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다.한국이 점의 나라가 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 한양대 정민 교수,「한시미학 산책」 내

    ◎「당시」와 「송시」는 뭐가 어찌 다른가/한시 350여수 24가지 이론으로 풀어/「가슴」으로 쓴 당시는 화려한 색채 배어/「머리」로 쓴 송시는 운치와 서늘한 향기 송나라의 문인 엄우는 『시란 말은 끝났어도 뜻은 다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시의 언어는 모름지기 범종의 울림과 같이 유장한 여운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그런만큼 시는 제대로 읽기 어렵고,진지하지 않은 독자들은 고개를 돌리기 일쑤다.더군다나 한시는 장르상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부 전문 연구자들의 학문적 관심사에 그칠뿐 일반의 폭넓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이 시대,한시는 진정 골동품적 가치만을 지닌 빛바랜 문화유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최근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학과)가 펴낸 「한시미학 산책」(솔 출판사)은 한시의 효용가치를 의심하는 이같은 우문에 종지부를 찍고 한시의 높고 깊은 정신세계에 동참할 것을 권한다. 월간 시전문지 「현대시학」에 지난 94년부터 2년여동안 연재한 글을 묶은 이 책은 한시 3백50여수를 예로 들면서 24가지에 이르는 한시미학 이론을설명하는 흥미있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동양의 예술정신은 본래 다변과 요설을 싫어한다.대신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중히 여긴다.언어와 언어가 만나 부딪치며 발하는 순간순간의 광채,그 속에 살아숨쉬는 행간의 의미를 붙잡아내는 것이 한시감상의 요체다. 이 책은 주역에 나오는 「입상진의」,즉 언어로 뜻을 온전하게 전할 수 없다면 형상으로써 뜻을 전달하라는 말로 한시의 묘미를 풀이한다.하나의 예로서 인용되고 있는 것이 송나라 때 관사복이 지은 「담명월조무흔」이라는 시구다.『둔덕 가득 흰구름은 갈아도 끝이 없고/못속의 밝은 달은 낚아도 자취없네』 「언제나 흰구름 자옥한 둔덕,그 구름을 밭삼아 다 갈아볼 날은 과연 언제인가.못위에 동두렷이 떠오르는 밝은 달은 제아무리 낚아채도 한량이 없네」정도의 뜻이다. 한시란 이처럼 뭔가 꼬집어 말하려 하면 사라져버리는 느낌,분명히 있긴 한데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노래한다.하지만 그 노래는 흔히 「말하지 않고 말하는」수법에 의존한다.때문에 난해할 수밖에 없다.「입상진의」의 거울에 비춰 읽어야 비로소 한시 특유의 깊은 멋을 느낄 수 있다는 명제는 그 지점에서 한층 빛을 발한다. 한시에는 한시 문화권에서만 통용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어휘들이 많이 등장한다.남포,절류,추선,의루,문적,동리 등이 두드러진 예다.정교수는 「한시의 정운미」란 글을 통해 단순히 사전적인 뜻을 넘어선 이같은 시어들의 함의를 밝힌다.남포와 절류는 이별을,추선은 버림받은 여인을,의루와 문적은 그리움을,동리는 세상을 피해 사는 고상한 선비의 거처를 상징하는 의미로 자주 쓰인다는 게 그의 설명.따라서 한시를 바로 읽기 위해서는 함축적인 시어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이 책은 또한 당시와 송시의 대비점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문학비평 현장에서 사용되는 당시니 송시니 하는 말은 왕조개념이 아니라 시의 성향을 말하는 풍격용어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그런 전제에서 볼때 당시와 송시는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이와관련,정교수는 『당시는 작약이나 해당처럼 짙은 꽃과 화려한 색채가 있는 반면 송시는 한매나 추국처럼 그윽한 운치와 서늘한 향기가 있다』는 중국시인 무월의 말을 빌어 설명을 대신한다.요컨대 당시가 묘사적이고 서정적인 경향의 「가슴으로 쓴」 시라면,송시는 사변적이고 철리적 성향이 강한 「머리로 쓴」 시라는 얘기다. 한시는 한자를 표현수단으로 하지만 이미 우리의 정서와 가락으로 귀화,우리 문학화된 소중한 지적 유산이다.한시미학에 관한 본격 담론을 시도하고 있는 이 책은 생경한 서구 문예이론에 주눅들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시문학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뜻깊은 결실임에 틀림없다.
  • 대만 외교부장 극비 아주 순방

    ◎미수교국과 관계개선 모색… 중 반발 예상 【대북·홍콩 로이터 연합】 장효엄 대만 외교부장은 연전 부총통 겸 행정원장이 우크라이나를 비밀리에 방문해 중국을 격분시킨지 2주만인 3일 목적지가 확인되지 않은 외국 방문길에 나섰다. 일간지 연합만보는 장부장이 「대만과 외교관계가 없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를 방문할 것이라고 보도했으며 대만 정부 자금으로 운영되는 대만TV는 장부장이 개인적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홍콩의 성도일보는 이날 장부장이 인도네시아를 방문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장부장은 지난 8월 남미 순방때 고립외교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중이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올해 하반기에는 동남아의 미수교국을 방문하고 내년초에는 서남아시아의 미수교국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었다. 대만은 중국의 고립화정책으로 아시아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는데 장부장의 이번 방문은 또다시 중국의 분노를 살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중국은 연전 행정원장이 지난 8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자 격분해 우크라이나에 고위급 사절단을 파견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이와관련,중국은 이날 국무원 대만공작판공실의 왕조국 주임에 대한 대만측의 초청에 대해 대만이 우선 고립 탈피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이 판공실 대변인은 왕주임이 지난주 대만 기업인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던 고청원 대만 전국공업총회 이사장의 초청을 수락할지를 묻는 질문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왕주임의 방문이 이뤄질 경우 그는 지난 49년 국공내전 종식 이후 대만을 방문하는 최고위 중국관리가 된다.
  • 「임나일본부설」 CD에 수록/미 MS사 오류 시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96년 발행한 CD롬 백과사전 「엔타르카 엔사이클로피디어」에 「가야왕조가 일본 야마토 일족에 의해 지배당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기술한데 대해 사과하고,오는 10월에 발행되는 97년판부터 수정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고 외무부가 30일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부정확한 내용을 백과사전에 기술해 한국민을 욕되게 하고 한국의 국가 종주권에 의문을 제기한데 대해 심심한 사과를 한다』면서 『본사는 가야가 야마토 일족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 “고문서토대 국학연구 본격화”

    ◎정신문화연구원,제4기 진흥연구사업 계획 발표/「장서각」 고자료 등 단순 수집정리서 탈피/번역·주석작업 중점… 실질적 뒷받침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원장 이영덕)이 고전적 조사연구와 고문서 수집을 토대로 영인본 발간 등 국학자료의 본격적인 출판을 골격으로 한 제4기(97년 5월31일까지) 국학진흥연구사업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국학진흥사업은 정문연이 지난 93년부터 교육부의 특별지원아래 장서각자료 연구를 비롯,전국에 흩어진 고문서와 근대사자료를 수집·발굴·정리하는 정문연의 가장 핵심적인 연찬사업.이가운데 「장서각 고자료 연구사업」은 구 왕실도서관이었던 장서각의 도서가 어떻게 수집 보관돼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함께 그 장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다.지난 해까지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이재 황윤석(이재·1729∼1791년)의 초서로 된 일기를 탈초,정리한 「이재난고」 두권을 발간했으며 장서각 소장 금석문 탁본자료 정리와 함께 장서각 도서의 해제를 준비해와 「장서각의 역사와 자료적 특성」,「구결자료집」등 국학연구에 귀중한 새 자료들을 발굴 정리해 출판했다.또 「고문서 조사연구사업」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고문서를 수집 정리해 소장자 중심으로 「고문서집성」을 발간하는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완할 수 있는 생활자료의 의미를 갖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지금까지 20여만점을 수집해 이가운데 극히 일부 자료만 영인,출판해놓고 있다. 정문연이 제4기에 추진할 사업들은 이같은 작업의 연속선상에서 실질적으로 한국학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료제공측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우선 「고전적 연구조사」에서는 지난해 집필된 해제원고를 정리보완해 간행하는 한편 장서각 소장 금석문 탁본자료를 영인,인쇄해 상세한 해제를 붙여 두권으로 간행한다는 계획.이와 함께 장서각 자료중 희귀본,유일본으로 지목된 「희현록」「석운일기」「예기대문언속」「낙점)」「증보 만병회춘」중 두권을 택해 영인하면서 구두와 해제를 붙여 출판하고 「이재난고」 3권을 간행,탈초한다. 「고문서 조사연구」사업으로는 충청남북도와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서원 향교 사찰및 사가에 소장된 고문서 전적류를 최대한 조사·수집·정리하며 이미 조사된 전남과 경상남북도에 대한 추가조사를 벌여 3만여점을 조사·수집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또 수집자료를 평판작업과 분류·목록·문서번호 부착과정을 거쳐 마이크로필름화해 출판작업에 대비한다는 계획이다. 정문연 정구복(자료조사실장)교수는 이와 관련,『지금까지의 국학진흥 사업이 주로 고문서 수집차원인 1차사업에 치중해왔으나 이같은 작업이 한국학 연구의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선 본격적인 해제와 번역,주석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면서 『정부와 대학,지방 향토사학자,사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해솟는 땅’ 연해주/노희상 다물민족연구소 이사(굄돌)

    서울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8월초의 연해주 해변가 백사장에는 반라의 러시아인으로 붐비고 있었다.예로부터 해삼위라 불려왔지만 그 의미는 「해솟는 땅」이다.부동항 획득을 위해 남진정책을 편 러시아가 청과 18 60년 북경조약을 체결,할양받고 「동양의 지배자」라는 뜻으로 명명한 블라디보스토크는 연해주 주도로서 군항이라기보다는 무역항이자 휴양지로 제법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발해왕조의 동경용원부·솔빈부·정리부·안변부·안원부가 있던 연해주에는 발해와 여진족의 문화가 살아 있어 찾는 이를 숙연케 한다.아르세뇨박물관과 여러 성터에 가보면 조상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또 연해주는 3·1운동 이전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창의회」 「십삼도의군」 「권업회」등이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곳에는 1914년에 「대한광복군정부」가 정식건립되어 이상설·이동휘가 정·부통령에 피선된 곳이다. 고로 연해주는 발해 이후 1천3백년이 지난 19세기말부터 도강한 선조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60여년간 일궈낸한민족의 삶의 터전이다.지금 블라디보스토크시내 자유공원이 한인이주자의 본거지인 신한촌 자리이고,해변을 따라 아무르만을 거슬러올라가면 개척리·석막리등 한인의 거주지가 펼쳐지지만 아무 표시가 없어 가슴이 아프다. 1910년대 연해주에는 이동휘 선생이 이끄는 5천여명의 「고려혁명군」이 포진하여 일제와 마적단과 싸워 땅을 지키면서 볼셰비키정부를 도와 한인자치를 도모하였다.그러나 1922년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후 한인단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어 급기야 37년부터 40여만명의 동포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고 그 자리에 백계러시아인이 이주함으로써 인종교체가 이루어진,우리에게는 빼앗긴 땅인 셈이다. 광대무변한 들판엔 벼 한포기 보이지 않는데,텃밭에서 캐낸 감자 몇개를 팔기 위해 길가에 나앉은 하얀 피부의 꾀죄죄한 노인들의 모습이 이 땅의 풍광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 파키스탄/모헨조다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5)

    ◎BC 2,500년에 세운 완벽한 계획도시/벽돌 8천만장 소요 추산… “인더스문명의 꽃”/대욕탕에 상·하수시설… 도로는 벽돌포장/기능별로 구역 배치… 요새유적이 중추 인더스문명의 꽃 모헨조다로.파키스탄 신드지방 라르카나에 있다.카라치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신크리를 우회하여 2시간만에 모헨조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황토지대에는 벌써 불볕이 깔렸다.그래서 메마른 문명의 구릉모헨조다로는 말 그대로 「죽음의 언덕」처럼 보였다. 비행장에서 4∼5㎞쯤은 될까.그리 멀지 않았다.모헨조다로 초입의 요새유적은 약간 경사진 비탈에 흙을 돋우어 만든 인공언덕 기슭을 깔고 앉았다.작열하는 불볕을 이기지 못하고 고운가루로 바스러진 황토흙과 벽돌이 어울린 모헨조다로의 색깔은 붉었다.인더스강이 범람하면서 밀어붙인 황토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모헨조다로는 애초부터도 붉은색 도시였다. 그 요새유적 어귀에 모질게 자란 가시나무 한그루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신드말로 간디라는 가시나무는 그런대로 불볕을 가려주었으나,유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곧 시작되었다.높이 21m에 지나지 않는 인공언덕의 벽돌계단이 극악스러운 더위로 해서 코밑으로 바싹 다가왔다.그리고 정상에 올라 진흙과 벽돌을 섞어 만든 거대한 탑파(수투파)를 만났다. 요새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기 딱 알맞았다.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D배너지도 모헨조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으니까….실제 AD 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한 점을 발굴해냈다.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그러니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어떻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를 붙였다.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요새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다.인공의 언덕,다시 말하면 토루가 있기때문에 요새로 불리는 이 유적은 도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정상에 올라서면 동남과 동북쪽으로 펼쳐진 주변 도시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새유적(SD구역)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중요한 건물은 큰 욕조가 있는 대욕탕이다.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치되었다.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가 완벽했다.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내는 배수 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대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방들이 따로 있다.깨끗한 물을 늘상 공급받아 몸을 청결하게 가꾼 성직자들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대욕조를 돌아보고 나서 눈길을 끄는 건물터 하나가 골목 건너에서 기다렸다.네 개의 통로가 난 건물안에는 벽돌 스무남은장씩을 포개 쌓은 주춧대가 늘어 섰다.그 주춧대는 지붕 버팀기둥 자리였을 법한데,건물안 홀 넓이는 26㎡를 헤아렸다.고고학자나 문명사에 관심을 둔 전문가들은 이 건물을 종교집회를 위한 성소로 보았다.이 성소건물은 모헨조다로의 다른 블록 DK지역에서 발굴한 족장의 저택과 함께 도시사회의 통치기능과 체제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기도 했다. 모헨조다로를 와서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위대한 도시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그까짓 벽돌을 쌓아 건설한 도시가 별 대수로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BC 2500년쯤 도시계획에 의한 완벽한 도시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모헨조다로 사람들 말고 다른 많은 종족들은 기껏해야 움집 정도를 짓고 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요새유적(SD구역)과 그 밑의 도시유적 DK구역,노동자 거주유적 HR구역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방수처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너비가 10m에 이르는 큰 도로에는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벽돌을 모로 뉘어 깔았다.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고고학자들이 계산해낸 숫자는 자그마치 8천만장이다.벽돌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세 종류가 생산되었다.가장 큰 세로 28㎝,가로 16㎝,두께 9㎝짜리 벽돌은 나무로 구웠다.나머지 작은 규격품 벽돌을 굽는 데는 곡물의 껍데기 왕겨를 땔감으로 썼다.이들 벽돌은 건축용도에 따라 사용되었다.오늘날 건축자재용 벽돌강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나 벽돌공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헨조다로와 버금하는 파키스탄의 다른 문명유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모헨조다로보다 더 상류에 위치한 인더스강 지류 라비강 북쪽 연안의 하라파 유적의 수난이 그것이다.영국식민통치시대 파키스탄 초기철도건설 당시 하라파유적의 벽돌이 공사용 자재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다.그 이후 문명유적임이 확인되어 지금은 모헨조다로 유적과 더불어 두 개의 큰 인더스문명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정오를 넘긴 구릉지대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그러나 내친 걸음이라 모헨조다로박물관에서 내준 랜드로버로 인더스강쪽을 향해 달렸다.2㎞쯤을 실히 가서 강물이 범람할 때 도시 한 블록을 흔적없이 삼켜버린 폐허지대에 다달았다.비록 폐허라 할지라도 모헨조다로를 보다 분명한 문명유적으로 부각시킨 많은 유물들이 1898∼99년 사이 여기서 출토되었다.파키스탄 독립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여러 돌인장,소가 끄는 달구지 따위의 테라코타 조각품들,무늬도자기와 민무늬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소 달구지에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의 그 넓은 길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감했다.그리고 돌인장에는 설형문자가 나오거니와 큰 선박 그림을 새겼다.이들 모헨조다로의 인장은 파키스탄보다 먼 서역수메르에서도 출토되었다.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아주 일찍 고유문자를 쓰는 가운데 큰 배를 부려 장거리 해상무역로를 개척했다는 증거가 아닌가.그래서 모헨조다로에는 영원한 문명의 빛이 어려있는 것이다.
  • 만혼추세… 어버이들 속은 끓는다(박갑천 칼럼)

    옛사람들은 혼인을 서둘렀다.그래서 10대 자녀들을 혼인시켜 놓고있다.평균수명 낮은 시대라서 대이을 핏줄 봐야겠다는 버둥질이었던 듯하다. 민며느리와 민사위도 있었다.어린 며느리감 사위감을 미리 데려다키워 맺어주던 일이다.본디는 혼인비용과 관계되는 습속이었다지만 나중에는 「노동력」으로 이어지는듯해 보인다.조선초기에도 10세 전후의 혼인은 많았던듯 「조선왕조실록」(세종 6년조)은 『12세이하 처녀에 대한 혼인을 금한다』고 기록해 놓았다.이러한 조혼에는 중세서양사회 같은 정략결혼도 있었던 것이리라. 풍조가 그러했으니 10대후반으로 들어서면 「노처녀」다.「동패낙송」에는 그런 노처녀 다섯자매를 시집보낸 해고 이광정 얘기가 쓰여있다.그가 양주목사를 지낼때다.이좌수의 다섯딸이 「사또놀이」라는 걸 한다.이놀이에서 가난하여 자기들을 시집 못보내는 저희아버지를 사또가 불러내어 혼뜨검내는 대사가 날카롭다.괘사스런 이 놀이광경을 지켜본 매사냥꾼이 이광정에게 말하자 그는 그들이 놀이하면서 들먹인 집안으로 시집보낸다.홍만종의 「명엽지해」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여기서는 어버이 여읜 세자매로 나오고 그들은 오빠 최생 집에서 산다.맏이 스물다섯이요 다음은 스물둘,막내가 열아홉이다.「동패낙송」자매들도 그또래였으리라.여기서도 세자매가 저희오라비 족대기는 「원놀이」하는 것을 포수가 듣고 원님에게 알려서 뜻대로 혼인시켜주고 있다. 이런 옛일을 생각하자면 오늘날에는 색다른 사또놀이가 날마다 열기를 뿜어야 할것 같다.얼마전 통계청이 전국가구 2%를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결과를 볼때 그렇다는 말이다.20∼29세 미혼남자 비율이 90년의 77.5%에서 95년에는 80.5%로 늘었고 여자의 경우 50.8%에서 56.0%로 늘었다지 않은가.30대도 13%(남),4.8%(여)로 나타난다. 조선초기의 괴짜 광진자 홍유손은 김시습과 친했다.「지봉유설」이나 「일사유사」에는 그가 76세에 늦장가들어 80세에 아들을 낳은 것으로 돼있다.그건 그야말로 기인의 기인다운 만혼에 만산이었다고 하겠다.하지만 오늘의 만혼이나 독신주의흐름은 다르다.강한 개성의 성취욕 때문인것도 같고 경제자립을 못 이뤄서인것도 같으며 경제능력에 따르는 편의(이기)주의 같아뵈기도 한다. 노처녀 노총각 자식 구듭치는 어버이들이 속타는건 예나 이제나 달라진게 아닌데.〈칼럼니스트〉
  •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세계기록유산 신청”/문화체육부 추진

    문화체육부는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신청키로 했다고 25일 밝혔다. 문체부는 이날 국회 문화체육공보위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유네스코가 기존의 세계자연유산과 문화유산에 이어 새로 기록유산을 추진하고 있어 이에 따라 기록유산등재를 신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훈민정음 등은 유네스코 기록유산의 최초목록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문체부는 전했다.
  • 스페인/알람브라궁:상(세계 문화유산 순례:3)

    ◎기독교도 땅에 꽃핀 이슬람문화 결정체/시에라 네바다 산맥 배경/낮은 언덕위 「붉은성」 한채/적·청·녹·황금색 타일/손마디 크기로 벽면 장식/정원·방 곳곳 「물의 미로」/인공연못은 미의 극치/내궁 124개 돌기둥 사이 「사자의 정원」은 “천상” 서양문화의 토양에 심어진 동양의 문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있을까.기독교도들의 땅 스페인 영토에 건너와 두고온 고향,사막에의 향수를 달래듯 피워낸 이슬람문명은 과연 어떤 색의 꽃일까.스페인인들 스스로 「이베리아반도의 진주」라고 부르는 알람브라궁전을 찾아가는 발길은 그래서 내내 설레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태양과 정열의 나라라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남으로 1시간 30분을 내려가 코르도바시에서 버스로 갈아탄 뒤 다시 3시간.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드문드문 키작은 올리브나무와 사과나무들이 서있고 얕은 구릉이 간간이 보이는 전형적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경이 펼쳐진다.마침내 그라나다시.이 작은도시의 한쪽 구석에 만년설을 머리에 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작은 언덕들 위에 알람브라궁은 서 있었다. 8세기초 회교도인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은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이베리아반도 전역으로 알라의 왕국을 건설해나갔다.이후 스페인의 기독교세력이 국토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남으로 쫓기던 회교도들은 마지막으로 이 그라나다에 와서 요새를 튼튼히하고 최후의 결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기독교세력에 함락된 여러 도시들에서 흩어져나온 이슬람교도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몰려들었다.이렇게 모인 각처의 재주꾼들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최후를 눈앞에 두고 유언장을 쓰듯 비감한 손길로 빚어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가 바로 이 알람브라궁이었다.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은 번성하던 왕조의 웅대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니다.넉넉지 못한 건축재료를 가지고 시간에 쫓기며 한 왕조가 마지막 숨을 몰아가며 빚어낸 최후의 유작인 것이다.그래서 알람브라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이며 퇴폐적이고 세기말적이다. 알람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란 뜻.횃불이 비치면 붉게 빛나는 성벽에서 유래한 말이다.이름의 유래가 말하듯 처음 이곳은 성채였다.이후 궁전과 정원이 지어졌다.그래서 지금 알람브라는 성벽과 궁전,그리고 헤네랄리페라고 불리는 정원의 3부분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성벽을 따라서는 작고 아담한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알람브라궁에 3개월간 머물며 「알람브라 이야기」를 써서 유명한 스코틀랜드 작가 워싱턴 어빙의 이름을 딴 호텔에 여장을 푼뒤 곧장 궁으로 향했다. 아치 출입문을 지나 궁의 중심부로 들어서면 「정의의 방」이다.당시 행정은 곧 정의를 세우는 일.그리고 그 정의를 세우는 주체는 바로 알라신이라고 믿었다.정의의 방 천장은 원래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 알라의 지혜가 곧바로 통하도록 했다.벽면은 적·청·녹·황금색의 타일을 손마디 크기로 쪼갠뒤 꼼꼼히 붙여만든 전형적이 이슬람 장식이다.타일의 무늬는 세가지의 요소가 결합돼 있다.기하학적인 도안과 나무·화초를 추상화한 도안,그리고 「알라만이 승리한다」등 알라의 위대함을 기리는 서예체의 아랍어 글씨를 써놓았다. 정의의 방을 나서 옆의 궁으로 들어섰다.뜰에는 길이 50m 정도의 장방형 인공연못이 만들어져 있다.시에라네바다산에서 자연적인 수압을 이용해 물을 끌어와 만든 연못주위에는 허리까지 오는 도금양(도김양)나무들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여행객들을 맞는다.연못의 물은 마치 오아시스의 야자수처럼 왕궁의 기둥들을 비추고 있다.이슬람인들에게 있어 물을 다스리는 것은 곧바로 부의 상징이었다.술탄들은 사막에서 온 사신들에게 이 연못을 보여주며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다음은 알람브라의 꽃이라 불리는 사자의 정원.오직 왕과 처첩들만이 출입했던 궁의 가장 내밀한 곳이다.정원은 작고 섬세하게 만들어 마치 한폭의 레이스장식을 보는 것 같다.정원 한가운데 12마리의 사자상이 떠받치고 있는 돌분수가 있고 사자들은 입을 통해 소리없이 물을 뿜어내고 있다. 정원 주위를 둘러싼 건물은 모두 1백24개의 돌기둥이 하늘로 떠받들고 있다.술탄은 이 수많은 방에 모두 32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재미있는 것은 방의 구조.방 한가운데도 작은 분수대가 하나씩 마련돼있어 사자분수대에서뿜어져 나온 물들이 사방으로 난 작은 수로를 따라 방안의 분수대를 돌아나가도록 설계돼 있다.겨울철 이동식 난로로 방을 덥힐때 가습기 역할을 하는 분수라고 한다. 가습기 분수가 설치된 방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천장을 갖고있다.꼭 벌집모양을 한 석고조각이 천장을 뒤덮고 있는데 이 벌집속에 빼곡히 들어찬 방의 수가 모두 4천4백개라고 안내인은 설명한다. 미로같은 내궁을 벗어나 궁을 되돌아보면 오만가지의 전설들이 미풍에 실려 아치문과 담벽을 넘나드는 것같다.그 바람을 타고 19세기 스페인의 기타연주가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알람브라의 추억」의 맑은 기타선율이 들려오는듯하다.내궁 밖은 「천국의 정원」이란 뜻을 가진 왕의 휴식처인 헤네랄리페 정원.마치 수로처럼 가늘게 난 연못 가운데를 따라 분수가 줄지어 서 있고 이 물의 미로 사이사이로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꽉 들어차 있다.안내인은 나스르인들이 알람브라를 너무 천국에 가깝게 만들자 알라는 마침내 이들을 이곳에서 쫓아내려고 결정했다는 전설을 들려준다. 1492년 남진하던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왕과 그의 부인 이사벨라여왕이 알람브라를 공격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나스르왕조의 마지막왕인 보아브딜왕은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눈물을 뿌리며 궁을 떠났다.그가 눈물을 뿌리며 넘었다는 알람브라궁 맞은 편의 작은 언덕을 사람들은 지금도 「무어인의 한숨」이라고 부른다.알람브라궁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김일성 찬양보다 북 개혁 촉구해야(박화진 칼럼)

    『한때 일본에서도 대학시절 「자본론」「유물론」「변증법」따위 마르크스·엥겔스 저서들을 읽고 진보적사상에 심취해보지 못한 사람은 지식인 대열에 끼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그러나 오늘의 사정은 매우 다르다.대학가서점에서 마르크스·엥겔스 전집들이 사라진지 오래다.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부 한국대학생들만,러시아나 중국에서도 외면당하는 파산선고의 마르크스 사상과 이론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이해가 가지않는다』 옛공산권 붕괴와 개혁이 한창이던 시절 어떤 서울주재 일본신문특파원이 쓴 글의 한토막이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옛소련이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만든 위성국의 하나다.그 종주국의 공산주의체제는 붕괴된지 오래며 아시아공산권의 대부였던 중국과 베트남,몽골까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는데도 자본주의 도입은 커녕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공산체제를 고집하고 있는 북한이다.사회주의체제가 옛소련이나 중국과는 달리 북한에만은 그들이선전해온 「지상천국」을 건설해 주었기 때문인가.그렇다면 세계는 물론 우리도 당연히 따르고 배워야할 일일지 모른다.고르바초프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강조한 적이 있지만 이념과 체제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수 있도록 하기위한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북한이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지상천국아닌 지옥을 방불케 하고있지 않은가.연이어지는 탈북자,북한 여행자 증언 가운데 절반을 과장이라해도 오늘의 북한은 지옥중에서도 상지옥이란 말이 훨씬 어울린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먹을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일가족 동반자살이 잇따른다』는 탈북귀순자 정순영씨의 9일 증언에 많은 우리국민은 연민과 충격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든 책임은 과연 누구와 어디에 있는 것인가.옛소련과 동구 그리고 아시아공산권에서 실패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체제 50년의 결과이며 그체제를 도입하고 주도한 장본인으로 지난 8일 2주기가 지난 김일성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김일성을 찬양하며 재평가해야 한다는 성명이 북한정권아닌 한국 대학생단체에서 나왔으니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부 좌경학생집단에 지나지 않으면서 한국의 전체대학생을 대변하는양 「한국대학총학생연합」(의장=정명기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란 거창한 과장단체명을 쓰고있는 이른바 「한총련」이라는 단체의 성명이다.『김일성주석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해방후 한반도에 들어와 친일파청산과 「새사회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며 이북사회를 50년간 이끈 지도자로서 정당하게 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개인숭배의 김씨세습왕조 건설을 위해 민족분단을 강요하고 6·25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으며 오늘의 북한을 「공포와 굶주림의 동토공화국」으로 전락시킨 것을 「새사회건설」의 노력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니,아직은 배우는 학생들이라지만 말문이 막힌 국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범국민적 분노와 개탄을 샀던 김일성사망조문 파동이후 기세가 꺾였던 일부 좌경학생들의 김일성찬양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최근의 미묘한 내외정세 전개와 관련이 있는것은 아닌가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식량지원등 미국의 대북 관용태도와 총선등을 통한 러시아및 동구 사회주의세력 부활 움직임등에 고무되고 그에 편승한 교활한 국민기만의 행동일지 모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면 허황된 환상과 미망에서 하루속히 깨어나야 한다.미국과 우리의 북한지원이나 관용은 한반도안전을 위협할수 있는 북한의 갑작스런 파멸을 가능한 막으며 질서있고 자발적인 민주화 개방·개혁의 연착을 돕고 유도하기위한 것이지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체제 고수를 돕기위한 것이 아니며 동구나 러시아총선의 사회주의 세력부상도 부진한 개혁성과에 대한 불만과 채찍의 의사표시이지 공산독재체제의 복귀에 대한 지지증대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으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2천만 북한동포를 도우려 한다면 조문파동에서 보았듯이 결과적으로 남북관계를 방해하고 동결시킬 김일성 재평가·찬양 성명발표같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 북한의 조속한 민주화 개방·개혁과 민족화합에의 동참을 촉구하고 유도하는 일에 먼저 발벗고 나서야 할것임을 한총련 학생들은 조속히 깨달아야 할것이다.〈심의·논설위원〉
  • 사람은 알몸에 향수를 느끼는가(박갑천 칼럼)

    영화에서 벗기는 장면이 나오더니 근자에 들어서는 연극무대에서도 벗는 모습을 보여 논란을 불러일으킨다.그런가 하면 외국여자의 홀랑벗은 「야외예술행위」가 화제를 모으기도 한다. 그런 터에 얼마전에는 「누드모델협회」가 창립기념식에 이은 행사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는 「누드쇼」를 펼쳤다.언론이 이를 「국내 첫누드쇼」라 표현한 것은 이상야릇한 술집에서 는실난실 벌인다는 그것과는 다른 「공적인 의미」를 부여한 때문이었으리라.어쨌거나 「첫」이 있으면 두번세번…은 쉬워지는 법.어디서 무슨 이름의 누드쇼가 벌어질 것인지. 호사가들은 『스트립쇼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한다.허리를 걸쌍스럽게 돌려대는 그라인드춤도,배의 근육을 산드러지게 움직이는 아라비아풍 벨리댄스도 「골동품」화했다는 뜻.1968년 『인체의 어떤 부분도 외설로 보지 않는다』는 외설소설 「퍼니힐」에 대한 뉴욕순회재판의 판결이 그 갈림길을 이룬다.그로부터 스트립쇼는 환상적 분위기의 핫발레나 음악극 「헤어」,앙글라극 「오,캘커타」 등에 자리를 뺏긴다.전14경의 「오,캘커타」는 발가벗은 남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걷고 노래하고 춤추고….「헤어」도 출연자 모두가 발가벗은 채 대합창을 한 모양이다.이런 바깥세상에 비길 때 잠시의 쇼 하나 가지고 「화제」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도 있다. 하기야 이승의 모든 생명은 발가벗고 태어난다.다만 사람은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나무」열매를 먹고부터 치부를 가려온다.그렇게 가리기는 해도 알몸에 대한 향수를 원초적 본능으로서 지닌다는 것일까.고대올림픽이 알몸으로 치러졌다는 것도 그와 관계될 듯하다.그것은 오르시포스라는 스파르타선수에서 비롯됐다지만 그때는 미인선발대회나 남성미경연대회도 알몸으로 치렀다고 전해진다. 발가벗은 모습(특히 여성의)이 사람에게 기쁨을 안긴다는 것은 동서고금이 같은 것 아닐지.은의 주왕이 잔치벌여 알몸 남녀가 쫓고 쫓기는 걸 즐긴 까닭이 거기에 있다.부르봉왕조의 필립2세가 생크루성에서 벌인 「아담잔치」도 그것이다.1501년의 만성절때 알렉산드로6세 법왕의 아들 체자레가 바티칸궁에서 벌인알몸의 향연 또한 부러운 듯 입에 오르내려온다.「지혜의 열매」란 걸 안먹었어야 하는 건데. 「국내 첫누드쇼」에는 취재진·사진작가·화가 등 2백명외에 20여명의 유료관객이 있었다고 한다.최고 30만원의 자리값을 치른 사람들.그들은 「예술」을 느낀 것일까.30만원의 몇배를 낸다해도 못가서 안달인 일부 「심미안」들은 지금 쩝쩝거리고 있으렷다.〈칼럼니스트〉
  • 목은 이색/생애·업적 대대적 재조명

    ◎20일 세종문화회관서 6백주기 기념 학술발표대회/성리학의 기초마련… 실천윤리 강조/이성계 부름 마다한 불사이군의 충신 고려말의 대학자이자 문호·충신으로 이름높은 목은 이색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목은선생 서세(세상을 떠남) 6백주년 기념학술발표대회」가 20일 상오 9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고병익 전 서울대총장이 대회장을 맡은 이 학술대회에는 이우성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비롯,역사·국문학·유학등 각분야 원로·중진교수 26명이 분야별 주제발표와 토론에 나서 목은의 우뚝한 삶을 종합평가한다. 윤사순 고려대교수는 미리 배포한 논문 「목은의 사상사적 위상」에서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비판함으로써 고려를 불교사회에서 성리학사회로 전환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본격적인 성리학시대를 여는 데 이바지한 당대의 유종』이라고 규정했다. 윤교수는 비록 목은이 불교신앙의 우수성을 함께 인정해 조선시대 일부선비로부터 배척받았지만 목은의 사상은 옛것을 이어받아 새로움을 연 것이라면서 목은을 당대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또 금장태 서울대교수는 「목은 유학」의 특징을 ▲무신정권이래 유행한 문장해석중심의 사장학에서 벗어나 실천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리학 관점에서 사서오경을 일관되게 해석해 한국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한 데 있다고 분석했다.따라서 목은이야말로 『고려말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와 이론적 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성리학파의 종장』으로서 『그의 유학사상은 한국성리학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신천식 명지대교수는 목은이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신축된 뒤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을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서 시험관을 6차례 맡아 권근·이숭인·맹사성등 고려말. 조선초의 명신·학자 1백32명을 배출하는등 교육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목은의 역사적 위상을 종합한 이문원 중앙대교수는 『목은은 학자와 정치가·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라고 추앙했다. 이교수는 특히 『고려를 통틀어 산문으로는 익재 이제현, 시인으로는 목은을 꼽는다』고 소개하고 그가 남긴 시 6천31수는 질적으로도 고려 최고라고 평가했다. 목은은 본관이 한산으로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여말 3은으로 불리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중국 원나라의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해 문명을 날렸다. 귀국해 성균관 대사성,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나 조선 개국후 이성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혔다. 시호는 문정공.청주 신항서원등에서 제향하고 있다. 한편 그의 후손은 그가 남긴 시조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를 새긴 시비를 올해 안에 그가 숨진 여주땅에 세울 예정이다.이 시조는 러시아 최고의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가 번역한 「한국고전시」에도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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