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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시론] 신지식인과 국가발전

    역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사회가 방향을 잃고 흔들릴 때,또는 국가가 지향해야할 목표를 상실했을 때 우리는 역사로부터 산 교훈과 경험을 배울 수 있다.환란으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국민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다.그러나 IMF 이후에 세워야할 나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IMF 이전 모습으로의 환원을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세계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지금 세계는 지식과 정보가 중심이 된 지식기반사회(knowledge-based society)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따라서 IMF후에 세워야 할 나라의 중심개념은 지식기반국가가 되어야 한다. 지식기반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선 정부도 지식정부로 거듭나야 하고,산업구조도 지식기반 산업위주로 재편되어야 하며,기업경영도 지식경영을 도입해야 한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현장에서 지금까지의 의식과 관행에서 벗어나 일하는 방식을 개선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농사꾼이건,가정주부이건,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개인의 생산성이 올라가야 국가의 경쟁력도올라갈 수 있다. 필자가 만난 신지식인의 예를 들어보자.몇년전 국내 대기업 연수원에서 강의요청을 받고 가는 길이었다.흔히 대기업에서는 초청강사들이 연수원에 오고가는 길에 렌터카를 보내 이용하게 한다.그런데 그 기사는 다른 기사와 다른 데가 있었다.보통 기사들은 연수원에 도착하면 강사가 강의를 마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내게 강의장에 들어가도 괜찮은지를 묻고 강의실 맨 끝에 앉아 열심히 강의내용을 듣고 메모했다.돌아가는 길엔 차안에서 오늘 강의내용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고 확인했다.지금 그 기사는 연수원의 일류강사가 되었다.학력은 초등학교 4년 중퇴에 불과하지만 일류 대학교수와 나란히대기업 연수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행동특성을 갖는 신지식인을 무수히 만나볼 수있다.신지식인들의 활동이 왕성할때 우리 역사는 항상 전성기에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있다.어떤 의미에서 한국역사의 전환기를 이끌었던 주체들은 대부분이 신지식인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들은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새로운 지식을 수용,정체에 빠진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불교수용에 앞장섰던 지식인 승려,통일신라 말기에 등장하여 신라재건의 꿈을 꾸다 좌절을 겪고 고려건국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던 육두품 지식인들,고려후기에 성리학을 도입하여 부패한 고려왕조를 비판하며 조선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대부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집합적인 수준에서 ‘신지식인의 인간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집단을 들자면 역시 조선후기의 실학파 지성인들일 것이다.실학은 17세기이후 조선사회의 사회적 모순과 기존의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실생활에 기반을 둔 새로운 학풍을 가리킨다.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으로 실용지학(實用之學)을 연구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영·정조시대는 문화부흥,국가재건의 분위기가 팽배했고 당대의 발명품들이 모두 이때 나왔다.영조와 정조는 낙후된 조선을지식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군주로 평가된다.특히 정조는 규장각을만들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식을 관리하고 정약용,박제가 같은 실학파 지식인들을 직접 이끌었다.그 결과 많은 신지식인들이 출현하게 됐고 이들이 조선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을 제공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국가위기 극복의 명제를 안고 있다.이런 세기적 전환기에는 신지식인과 같은 철학과 행동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훗날 역사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묻는다면 신지식인운동으로 국난을 극복했던 시기로 역사에 기록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金 孝 錫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 [각료에세이] 열린 마음으로-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

    ‘세발(細足)낙지’를 ‘세발(三足)낙지’로 오해하는 도회지 사람들이 더러 있다.그런가 하면 포장마차에서 안주를 주문하면서 ‘산(生)낙지’를 ‘산(山)낙지’로 발음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다.둘 다 바다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코미디다. 내 고향 목포에서는 숟가락을 쥘 나이만 되면 꿈틀거리는 세발낙지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다리(세 개가 아니라 여덟 개다)를 ‘전체적으로’ 쭉 훑어 순간적으로 정렬시킨 뒤 통째로 단숨에 삼키는 아이들이 많다.목포는 천상 항구다. 조선왕조 500년 통치이념은 유학이었다.유학 숭상에는 이 고장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예 산에다 ‘유달(儒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유달산 정기 속에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해 공부와 공직수행으로 보낸 나날이수십 년에 이르렀다.크게 보면 목포도 한국이므로 국가에 바친 내 나름의 작은 봉사도 고향에 대한 헌신이 되리라 견강부회해 보지만,아무래도 애향(愛鄕)의 관심과 열정이 미흡했다는 반성이 든다.가끔씩 밤차를 타고 내려가 어쭙잖게 경제강의를 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다. 문일석의 시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 ‘목포의 눈물’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한다.이 노래가 나온 1930년대 목포 앞바다에는 동력선이 거의 없었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사정은마찬가지였다.‘동양의 나폴리’에 어울리지 않게 목포항은 오랫동안 상대적인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근년 들어 서해안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오늘날에는 다소 발전하고 있지만 1번 국도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남서해안의 거점도시로서 기능을 갖추자면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문향(文鄕)이자 예향(藝鄕) 아닌 고향이 어디 있으랴만 필자의 고향에는 박화성문학기념관,남농기념관,해양유물전시관,향토문화관,농업박물관 등이 빼곡이 들어서서 자존심을 뽐낸다.건립을 추진중인 난영기념관까지 완공되면‘트로트 메카’의 위용도 한결 빛날 것이다.그뿐인가.시민 성금으로 90년대 초 새단장한 유달공원에는 한국 최초의 조각공원을 비롯해 달성공원,체육공원이나란히 조성되어 시민들의 높은 문화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오랜만에 유달산에 오르며 ‘유달산공원조성기념비’에 새겨진 권일송 님의 시를 읽어본다.“굽이치는 다도해를 발 아래 거느리고 영겁
  • [대한광장] 끈질긴 부패의 역사

    맑고 깨끗한 세상의 건설은 한낱 이상에 불과한 일인가.세상이 언제까지 이처럼 썩고 병든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차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부패 문제임은 국민모두가 공감하는 바다.그 동안 지겨울 정도로 부패척결이다,공직자 사정이다 하면서 기발한 수단과 방법을 죄다 동원해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오죽하면 전통적으로 상부상조의 문화적 향기가 스민 축의금이나 조의금까지 부패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 과장급 이상 공무원은 부조금을 받을 수 없게 하겠다는 정책 발상을 했겠는가.이를 감안한다면 우리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부패의 뿌리는 그만큼 깊고 질긴 것이다. 실학자 다산선생은 자기가 살던 세상을 “온 세상이 부패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天下腐已久矣)라 하여 썩고 부패한 지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라고 진단하였다.더구나 부패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썩고 문드러졌다”(腐爛)는 극단적 수사를 동원하여 당시 사회의 극심한 부패 실상을 아프게 고발하였다. 이는 부패가 이미 역사적이고 관행적인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고질화했다는뜻이다.언젠가 외국 잡지에서 한국을 포함한 중국 등 아시아 각국에서는 부패가 ‘풍습적’(habitually)으로 행해진다고 쓴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기사가 실감나게 다가왔는데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그러한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 아닌가. 옛날 중국 한(漢)나라때 일이다.궁녀 중에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천하절색이 있었다.얼굴도 미인이지만 품행까지 방정하여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궁녀였건만 끝내는 북방 흉노족의 추장에게 팔려가는 기막힌 처지를 당한 비운의 주인공이다.당시 황제들은 화공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다음,그것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총애하였다.황제의 사랑을 기다리는 궁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생긴 간택 방식이었다.그런데 못생긴 궁녀들은 자신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화공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다.평소 미모에 자신이 있던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화공은 그녀의 얼굴바탕은 예쁘게 그려주었지만 안면에 점을 찍어 곰보로 만들어 버렸다.이 때문에 왕소군은 추녀로 낙인 찍혀 흉노로 팔려갈 수밖에 없었다. 뇌물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사실과 달리 이처럼 현격하게 벌어지니 어떻게뇌물질이 끊어지겠는가.뇌물로 인하여 추녀도 미녀가 되고 미녀도 추녀가 되는 것이 한(漢)나라 때부터라면,2,0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뇌물의 역사(?)가 아니겠는가.자,그렇다면 그러한 효과를 지닌 뇌물의 역사를 누가,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해결해야 할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동양의 현인들은 청빈(淸貧)한 삶을 그처럼 강조했고,청백리들을 왕조마다 예우했건만 뇌물은 없어지지 않았고,부정과 부패는 줄어들지 않았다. 다산은 부패한 세상의 교정을 위해서 두 가지 원칙을 제안했다.하나는 인간의 의식개혁이요,둘은 법과 제도의 개혁이다. 다산은 의식개혁을 위해 공직자의 청렴정신과 청백리 정신을 수없이 반복해 강조한 바 있다.이제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천 가능한 법제의 개혁을마련하여 부패방지의 기초를 세우고,공직자들이 국가에 정성을 바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을 심어줄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을 모색해야할 것이다.부패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나라,이제는 그 부패의 질긴 역사 고리를 끊을 때가 왔다.온 국민이 힘을 모으고 지혜를 짜내어 이번만은 반드시 이 작업을 성과 있게 만들어내자. [朴錫武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 퇴출위기 비인기학문 정부서 보호한다

    동국대 강사 조현설(38)씨는 설화조사차 몽골·티벳지역을 방문했다가 뜻밖에 이 지역 건국주역들의 설화가 단군·고주몽의 설화와 흡사한 사실을 발견했다.돌아와서 북방지역의 신화·설화 비교연구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게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자신의 연구를 담아줄 ‘그릇’이 우리사회에는 없다는현실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문화재 가운데 인간문화재처럼 당국이 ‘보호대상’으로 지정하여 계승,발전시키는 것이 있듯이 학문분야에서도 이처럼 당국의 ‘보호’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대중적인 인기나 사회적 수요는 적지만 학문적 가치는 물론 민족문화 계승,기초학문 배양차원에서 계속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인,소위 ‘보호학문’이 바로 그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이사장 박석무)은 최근 학문의 종(種) 다양성을 유지하고 학문간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보호학문’분야 지원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박석무 이사장은 “최근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인문계열 학문을 비롯해 비인기 분야 학문들이 고사 직전 상태에 놓여 있다.시장논리 속에 퇴출당하고 있는 일부 학문에 대해서는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보호가 절실하다”며 보호학문분야 지원의 필요성을 밝혔다. 재단측이 보호대상학문의 예로 들고 있는 한국학 분야는 우선 한국 종교사·음악사·기술사·민속사·음식사·생활사·법제사·의약사·복식사·전쟁사·수학사·과학사·건축사 등.주로 종래의 왕조사·정치사 위주의 연구에서 소외된 분야들이 대부분이다.이밖에도 한지(韓紙)연구·신화(神話)학·한국식물학·화폐학 등 미세한 분야까지도 지원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분야는 비단 한국학 분야 뿐만이 아니다.전통학문 가운데 잊혀져 가는학문을 보호,육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연과학·기술과학·응용과학 등 학문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재단의 정출헌 전문위원은 “현재 재단 내부에서 보호학문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결정한 것은 없다”며 “인문·사회·자연계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지원자들의 신청을 받아 학문적 가치,사회적 의의 등을 검토한 후 보호대상 범위와 분야를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정 위원의 이같은 설명은 재단측이 보호학문 대상분야를 미리 결정하여 공표할 경우 지원자들이 자칫 위축감을 느끼거나 지원분야가 한정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재단은 보호학문분야의 지원을 위해 교육부와 협의를 거쳐 금년예산으로 5억원을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다.연구자 1인에게 월 100만원꼴로,40명가량을 지원할 예정이다.지원방법은 연구비 지원과 강의지원 등 다양한 형태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박 이사장은 “올 첫사업의 성과를 봐서지원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며 “교육부도 이번 사업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신청 접수기간은 6월 30일부터 7월 13일 까지.(02)3460-5592,학술진흥재단홈페이지(http://www.krf.or.kr) 참조. 정운현기자 jwh59@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르니에 네이스컨스 벨기에 대사

    벨기에 정부는 다이옥신 오염파동과 관련,안전성 확인 전까지 벨기에 농·축산물의 한국 유입 금지조치를 감수해 나갈 것이며 한국정부의 안전성 확인조치에 모든 협조를 다할 것이라고 르니에 네이스컨스 주한 벨기에 대사가 26일 밝혔다. 네이스컨스 대사는 이날 대한매일과의 특별인터뷰에서 벨기에서도 기존 생산 제품에 대한 검사가 진행중이며 모든 농·축산물 생산시설에 대한 조사도 며칠 안에 끝나는등 안전도 강화와 입증조치가 취해진 상태라고 말했다.다음은 다이옥신 오염파동과 양국 관계 등에 관한 주요 일문일답. 벨기에 농·축산물에 대한 우려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일부 잘못된 보도와 달리 한국에선 다이옥신에 오염된 벨기에 농·축산물은 발견되지 않았다.오염발생 가능시점에 있던 제품에 대해선 조사를 진행중이다.이미 EU(유럽연합)회원국들은 6월12일 이후에 생산된 제품에 대해선 수입을 재개했다. 벨기에 정부가 늑장대응을 했다는 비난이 있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미칠지 정부도 알지못했다.전혀 예기치 못한전례없는일로서 대처에 미숙함이 있었다.한국정부에 뒤늦은 통보를 사과했다.벨기에의 두 인접국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가장 먼저 통보했고 그 다음으로 EU국가와 한국을 포함한 비(非)EU국가 순으로 사실을 통보했다.통보시기를 3단계로 차별을 둔 것은 잘못이었다. 지난 13일 실시된 총선에서 41년간 집권했던 중도좌파 연립정부가 참패했다.다이옥신 파문과 관련있나. 벨기에인들은 전통적으로 질좋은 농·축산물 생산국이란 사실에 자부심을가져왔다.국민총생산에 20% 가량이 이 분야와 관련을 갖는다.이 사건으로 경제성장률이 0.5%정도 떨어질 전망이다.2∼4%의 낮은 성장률의 유럽국가로선강한 지진이나 원자탄투하를 당한 것 같은 손실을 입었다.그러나 국가이미지와 자부심에 상처를 준점은 더 뼈아프다.선거결과를 정부의 관리감독능력과신뢰에 ‘배신’당한 국민이 ‘분노의 심판’을 내렸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다이옥신 파동을 어떻게 수습하려하나. 안전도 조사로 오염된 물량은 한정된 양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해당 국가들이 원하는 제품과 방식으로조사할 수 있도록 협조하고 있다.오염 제품이특정 시기에 한정된 물량만 만들어진 것임을 소비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일반문제로 넘어가 한국과의 관계를 평한다면. 정치·경제적으로 좋은 상태다.61년 공식수교했다.2003년이면 벨기에왕국과 조선왕조의 관계수립 100주년을 맞는다.이를 계기로 격상된 동반자관계를이룩하겠다는 계획이다.청소년 상호방문,한국전 참전 사망자를 기리는 스테인글래스 제작및 성당안치 등의 행사도 준비됐다.2000년 중순 필립 황태자의 방한,같은해 10월 서울서 열리는 아시아·유럽회의(ASEM)참석을 위한 총리방문이 예정돼 있다. 북한과의 관계는. 공식적인 관계는 없다.그러나 지난해 12월 북한은 브뤼셀에 대사관 개설 등을 포함한 정식 외교관계수립을 요청하는 등 관계개선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벨기에 정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상태다.최종결정을 위해 다른 EU회원국들과 이 문제를 협의중이다. 투자지로서 북한은 가치가 있나. 지난해 EU투자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투자지로서의 조건을 타진했다.각종 제약이 많고 기반시설이 미비,아직 매력있는 곳은 아니다.최근 한 벨기에 기업은 북한에 회사를 설립했다가 도산해버렸다.각종 제약요소 때문이었다.그러나 북한측이 제약요소를 줄인다면 많은 가능성과 기회도 있다는 점에서 EU국가들의 주시를 받고 있다. 한국은 투자지로서 어떤가. 최근 조건이 많이 개선됐다.그러나 아직 시장개방 분야에선 가야 할 길이멀다.하청관계,내부거래,기업간의 계열화 등은 외국인의 눈에 ‘개방이 부족한 분야’로 인식된다.한국기업의 해외매각과 관련,적정가격보다 감정적인가격을 고집한다는 평이다.기업의 회계방식에도 이해못할 점이 많다. 코소보사태에 대한 역할은. 벨기에는 외교적 해결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유고공격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의 일원으로서 참여했다.유고의 경제재건에 대한 참여정도는 새정부가 결정할 것이다.NATO 활동에 벨기에의 분담률은 대략 3% 가량이다. 이석우기자
  • [굿모닝 새천년 패러다임을 바꾸자](7)대립을 넘어 相生시대로

    IBM과 애플은 미국의 대표적인 컴퓨터 회사이다.그러나 두 회사의 경영전략은 판이하게 다르다.애플은 매킨토시라는 PC를 생산하면서 순혈주의를 고집했다.컴퓨터의 부품생산에서 완제품 조립까지 모든 과정을 독점했고,심지어모니터까지 자사가 공급하는 것만 쓰도록 했다.반면 IBM은 문호를 개방했다. 모니터와 본체 등 모든 부품을 교환해 쓸 수 있도록 호환성을 높였다. 이에따라 이용자들은 호환성을 이용,PC를 업그레이드하는 등 성능을 향상시킬 수있었으며 부품업체끼리의 경쟁으로 부품의 질도 높아졌다. 후발주자이던 IBM이 애플을 앞서 나간 것은 물론이다.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이후 애플도 IBM PC용으로 개발된 일부 프로그램을 매킨토시에서 쓸수 있게하는 등 호환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 근대 이후 지구역사는 투쟁과 갈등으로 점철됐다.정(正)과 반(反)이 투쟁과정을 거쳐 합(合)이 된다는 헤겔의 변증법,환경에 적합한 적자(適者)만 생존한다는 다윈주의가 지배한 사회였다.이러한 약육강식의 논리를바탕으로 세계 열강은 다투어 영토를 확장하기에 바빴고 급기야는 두차례의 세계 전쟁으로 비화됐다.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투쟁과 갈등,대립,혁명의 원리는 여전히 지구를 지배했다.그 결과 한쪽에서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지만 반대편에서는 식량이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또 탐욕스러운 개발욕구는 숲과 산,강을 마구 파헤쳐 놓았다.훼손된 환경은 우리들이 먹고 마시는 물과공기를 오염시키며 부메랑처럼 그 대가를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다.문명과자연이 상생(相生·Both All)의 길을 찾지 못하고 대립적인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이같은 ‘정글의 법칙’은 21세기의 정보통신사회,지식사회에선 더이상 통용될 수 없다.컴퓨터와 인터넷,디지털 등 정보화 시대의총아들은 폐쇄성을 거부하고 개방,열린 사회를 지향한다.거미줄처럼 뻗어있는 정보통신망은 세계 각국의 안방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국경의 장벽을 제거한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이어령위원장은 “다가올 새 천년은 너죽고 나살고 식의파괴의 패러다임이 아니라너살고 나살고의 상생체제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문턱을 높이는 ‘애플’이 아니라 ‘IBM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생체제는 이미 여러곳에서 감지된다.유럽연합(EU)으로 정치적 결속력을다진 유럽은 올 초 유로통화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경제적 통합을 가속화시켰다.뒤늦은 깨달음이지만 도로로 잘리워진 산허리에 다시 동물들의 이동통로가 만들어지고 강가에는 물고기의 생존과 산란을 위해 콘크리트 벽 대신 수초가 심어진다.통합전산망을 운영하는 항공사들은 승객의 주문을 대지 못할경우에는 경쟁 항공사로 안내해주는 것에 익숙해졌다.고양이와 개처럼 으르렁 거렸던 현대·대우·기아 등 자동차 3사도 자재와 부품,고객서비스 등을통합 관리하는 ‘초고속 전자상거래(CALS)프로젝트’를 구축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배타적인 경쟁이 공멸을 가져올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새천년의 전환점에 왜 상생이 화두로 등장하는 것일까. 상생은 말 그대로 함께 사는 것이다.대립과 갈등,투쟁과 전쟁이 아니라 융합하고 화합하고 관용하고 용서하는 것이다.화해와 용서의 정신은 바로 휴머니즘으로 가는 밑거름이다.인간이 기본인 인본주의는 새천년의 화두가 아니라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한 키워드일 것이다. 임태순기자 stslim@- 밀레니엄 탐방-‘相生’테마 무대공연 활발 문화예술계에서 ‘상생’은 굵직한 테마로 자리잡고 있다.다양한 장르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미술·문학 작가나 무대예술 연출가들은 이미 ‘상생’을주제로 다양한 실험작들을 발표했거나 시도하고 있으며 문화 소비자들도 작품속에 드러난 ‘상생’의 의미를 시대의 당연한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는분위기다. ‘상생’의 의미가 문화예술계에서 이처럼 폭넓게 수용되는 것은 테마 자체가 문화예술의 영역 안에 담겨지기에 훌륭할 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의 공감대 형성에도 손쉽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상생’의 메시지 전달은 특히 무대예술에서 두드러지는데 민족춤위원회가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렸던 ‘민족춤제전’과 서울예술단이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매주 금요일 상설공연하고있는 가무악‘상생-비나리99’ 공연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이 가운데 민족춤위원회의‘민족춤제전’ 공연은 인류가 생긴 뒤 동서양을 이어온 정보의 역사를 나흘간에 걸친 춤으로 꾸민 옴니버스 무대.정보문명과 새 밀레니엄을 무용언어로풀어낸 것으로 관객들은 출연진의 춤과 몸짓 자체가 정보전달에 빼놓을 수없는 수단이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마지막날 공연은 사이버 공간에 서있는 인간이 상생 존중의 길을 찾아 순례에 나서는,‘상생’의 의미를강조한 독특한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다.이 작품은 지난 15일 부산 경성대 콘서트홀에 이어 오는 9월17∼18일 청주 예술의전당 무대에 다시 오른다. 또 서울예술단의 가무악 ‘상생-비나리99’는 철저하게 상생의 의미를 강조한 공연.근현대사에서 당면했던 어려움을 영상과 마임,춤으로 해석하면서 이념의 갈등,지역간 감정을 상생의 개념으로 해결하자는 내용을 담았다.구체적으로는 액막이를 바라는 서민의 마음을 비나리굿으로 풀어냈다.서울예술단이아픔으로 점철된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의비전을 제시한다는 뜻에서 기획한 장기공연으로 지난 4월부터 시작해 10월15일까지 예정돼 있다. 아울러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있는 사물놀이단인 사물놀이 한울림도 상생을 강조하고 있는 단체.이들이 세계인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아우르기 위해 벌이고 있는 공연예술·연구교육·음반기획사업에 상생의 정신이 들어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성호기자kimus@- 밀레니엄 포인트-한국인은 지나치게 흑백사고에 젖어있나 상생(相生)의 시대를 열어 가자는 주장에는 늘 ‘한국인이 지나치게 흑백사고에 젖어 있다’는 지적이 따르곤 한다. 한국인은 정말로 흑백사고에 깊이 물들어 있을까. 대답은 제각각이다.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들도많다. 한국인들이 극단적인 사고로 흐른다는 지적은 외국인들로부터도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 왜 그렇게 됐을까. 문화계의 팔방미인으로 불리워지는 이어령(李御寧)교수는 그 시초를 조선조의 유교 사상에서 찾는다.조선조의 유교사상이 극단화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최근 베스트 셀러에 오르 내리고 있는 ‘공자가 죽어야나라가 산다’는 꽤 ‘극단적’인 제목의 책에서도 주장되고 있다. 유교 특히 주자학은 아주 좁은 범위 안에서의 서로 다른 주장 말고는 거의모든 사고,사상,해석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부쳤다.권력 다툼은 곧잘 교리 싸움으로 포장됐다.중재자나 중간자가 설 땅은 매우 좁았다. 이런 극단적인 사고가 국가를 쇠잔하게 만들고 말았지만 조선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우리에게는 다양한 사고를 키울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일제 시대는 지식인들에게 친일이냐 저항이냐의 선택을 강요했고 해방후에는 사회주의냐 반공이냐를 선택해야 했다.백범 김구(金九)를 비롯한 민족 지도자들의 죽음은 중간자가 우리나라의 정치와 사상 공간에서 차지할 땅이 거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이어지는 남북분단과 독재는 남이냐 북이냐,민주 투쟁이냐 아니면 독재에붙어 영달을 꾀하느냐의 선택만을 남겨 놓았다.민주화의 주장 속에서는 개발의 공이 안 보였고 개발의 논리에서는 민주화는 잠꼬대 취급을 받기일쑤였다. 이와 관련 이교수는 신한국인이라는 저서에서 “심지어 종교까지도 한국에들어오면 엄숙해지고 엄격해진다”면서 “이념이 착색되면 아주 극단화된다”고 말한다. 서동철기자 dcsuh@
  • 고령 가야대학교에 ‘日 개국터’ 비석 세운다

    경북 고령 가야대학교에 이곳이 일본 천황가의 출신지임을 알리는 비석이 선다.가야대는 오는 28일 오전11시 교정에서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비 제막식을 갖고 오후에는 강당에서 강연회 및 토론회를 갖는다. 고천원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지명으로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가야대가 비석을 세우는 이유는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이 바로 고천원으로추정되기 때문이다. 고천원을 고령으로 비정(比定)하는 학설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두루 제기되었다.지정학적으로 보면 가야는 한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일본과 가깝고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술된 일본 신들의 계보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두 신에서 시작된다.국민대 총장을 지낸 이종항교수는 이자나기(伊邪那崎)와 이자나미(伊邪那美)는 대가야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진아시(伊珍阿鼓)와 동일인이며 이자나기는 천부(天父)신,이자나미는 지모(地母)신이라고 했다.또 이자나기의 딸로서 일본 국조신으로 추앙받는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의 손자로 일본 개국신인 니니기노미코도(邇邇藝命)는 고천원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부산일보 동경지사장 최성규씨는 ‘일본왕가의 뿌리는 가야왕족’이라는 논문에서 ‘다카마노하라(高天原)’의 ‘다카마(高天)’는 고유명사로서 곧 ‘다카마(高靈)’에서 온 말이고 ‘노’는 조사,‘하라(原)’는 장소를 뜻한다고 했다. 일본 연구자 아라 에이세이(荒榮誠)는 일본 건국신의 하나인 다가미무수비노미코도(高皇産靈尊)가 가야의 고령출신이고 ‘高靈’과 ‘皇産’(천황을 산출한다)의 두글자로 구성됐다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일본 쓰쿠바대학 명예교수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박사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 수사노오노미코는 성질이 난폭해 고천원에서 추방된 뒤 신라국에서 살았다며 고천원을 신라 서쪽에 인접한 나라인 대가야,곧 고령으로 비정했다. 가야대 이경희 총장은 신화를 상상의 세계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신화형식으로 빌려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가야는 일본왕조형성에 깊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동상 제막식이 끝난 오후에는 마부치 교수가 고대 한일 문화교류에 관해 주제발표를 하고 향토사학자 김문배씨,가야대 엄경호교수,이종항 전 국민대총장 등이 토론을 벌인다. 임태순기자 stslim@
  • ‘불교미술 원류’ 간다라 미술 서울 나들이

    ‘2,000년 불교미술의 원류’ 간다라 미술의 정수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됐다.예술의전당은 7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전당내 미술관에서 ‘간다라 미술대전’을 마련한다. 간다라는 힌두쿠시와 카라코람 산맥으로 둘러싸인,지금의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평원지역.이곳은 동서 문명의 교차로이자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다.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이 간다라 지방에서 씌어졌고 대승불교의 논사(論師)들인 마명·무착·세친 등이 이곳 출신이다.혜초·현장과 같은 고승들이 구법순례를 떠나던 곳도 간다라다. 간다라미술은 기원 전후 무렵부터 간다라 지방에서 발달한 그리스·로마풍의 불교미술을 말한다.간다라미술은 기원후 1세기 쿠샨왕조 시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지금의 페샤와르에 도읍을 정한 호불왕(護佛王)카니슈카 시대에는 더욱 번성해 서역지방에서부터 동아시아 전역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쳤다.간다라미술은 불탑과 조각이 주를 이룬다.회화는 남아 있지 않다.간다라미술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불상.불상은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그때까지 부처는 보리수나 스투파,법륜(法輪),보좌(寶座) 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됐을 뿐이다.이러한 무불상시대를 거쳐 부처는비로소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됐다.이것이 간다라불상이다.그리스 신상(神像)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불상은 머리카락이 물결모양의 장발이며,눈언저리가깊고 콧대가 우뚝해 서양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이번에 전시되는 간다라불상은 고답적인 예배용 불상과는 사뭇 다르다.‘도리천으로부터의 강하’‘마야부인의 꿈’‘탄생’‘궁중생활’‘첫 설법’‘열반’ 등 부처의 일생에 기초한 사실적인 조각들이 선보인다. 간다라 조각은 기원후 1세기경 석조상으로 출발했다.그러나 4∼5세기경에이르러 소조상(塑造像)으로 바뀌었다.이 소조불상은 색깔이 가미돼 한층 우아한 모습을 보인다.간다라미술은 반가사유상과 관련해서도 커다란 의미를지닌다.반가사유상은 좌우균형을 중시해온 동양조각의 전통에서 보면 균형을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인체조각이발달하지 못한 동아시아에서는 소화하기 힘든 양식이다. 이같은 반가사유 자세의 인체조각 역시 기원후 2세기경 간다라에서 처음 시작됐다.간다라 지방에서는 자연주의적인 헬레니즘 인제조각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기때문에 반가사유상 양식이 가능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키스탄의 국보급 간다라 유물 121점이 소개된다.카라치파키스탄 국립박물관을 비롯해 이슬라마바드 박물관,탁실라·스와트·페샤와르·디르 고고박물관 등 5개 박물관에서 작품을 냈다.입장료는 일반 8,000원,중고등학생 6,000원,초등학생 4,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인천도시가스회장…조선후기 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기증

    이종훈(李鍾勳)인천도시가스㈜ 회장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별자리 그림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크기가 112.5×80㎝인 이 별자리 그림은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조선왕조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1395년(태조 4년)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오차를 교정한 뒤 돌에 새겨 완성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刻石·덕수궁 소장)을 종이에 베껴 색칠한 것으로 한국 고대 천문기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태조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 소주에 남아 있는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1247년 완성)에 이어 현존하는 천문도로는 세계 두번째이지만 정확성 등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국 것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돌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안에 표시된 별자리는 290좌(座),1,467개에 달한다. 임태순기자 stslim@
  • 영친왕 부부 유품 44점 국내 반입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王) 이은(李垠 1897∼1970)공과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 1901∼1989)여사의 유품 44점이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문화재관리국은 18일 “지난 달 2일 하라 슈오코(原秋櫻子·65)씨가 소장하고 있던 의류 24점과 장신구를 비롯한 영친왕 부부의 유품 44점을 국내로 들여왔다”고 말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따르면 지난 3월10일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하라씨가 주일한국문화원에 “소장품을 기증하겠다”고 의사를 밝혀 와 문화재관리국 전문가들이 3월19일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한 뒤 한국문화원에 보관해 오다가 이번에 반입한 것이다. 이번 민간기증으로 국내로 들여온 유품 중에는 영친왕이 지난 63년 귀국하기 전에 일본에서 병석에 있을 때 입었던 명주저고리와 바지,아들 진왕자(晉王子)의 것으로 보이는 망토및 수(繡)귀주머니,이방자 여사가 입었던 평상복 등이 포함돼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 유품들은 1920년대를 전후한 왕실복식에서 1980년대까지 왕가의 근세복식으로 이어지는 궁중복식의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이 유품들은 기증자의 이모인 하라 노부코씨가 이방자 여사에게서 직접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라 노부코씨는 의상디자이너로서 일본 궁내청에서 이방자 여사의 양재교육을 담당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지난 97년 그가 사망하면서 조카인하라 슈오코씨가 물려받아 보관해 왔다. 문화재관리국은 “지난 91년 5월 양국 정부간 협상으로 궁중의복을 비롯한영친왕 부부의 유품 227점을 돌려 받은 바 있지만 개인 기증은 드문 경우다”면서 “앞으로 우리 문화재를 갖고 있는 외국의 개인이나 기관들의 기증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 유품들은 7월18일까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서 ‘일본인 하라슈오코 기증 영왕·비 생활소품전’이란 이름으로 전시된다.
  • [김삼웅칼럼] 5·18 진혼곡

    소돔과 고모라시는 의인 열사람이 없어서 멸망했다지만 까레시는 여섯명의의인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 현대사의 군사정권시대에 광주민주항쟁이 없었다면,그들 의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현대사는 정신적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되었을지 모른다. 마치 사육신의 의혈(義血)이 조선왕조의 건강성을 유지해온 역설과 비유될수 있겠다. 군사정권시대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그들은 대부분이 일방적인 사법살인·암살·테러·의문사·고문치사의 희생자들이다.그러나 광주항쟁은 폭력집단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된 차이가 있다. 오늘(18일)은 광주민주항쟁 19주년이다.학살자와 부상자·‘시민군’이 살아 있는,그래서 어느 측면 현재진행형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동시대인들에게 194명의 사망자와 1,059명의 부상자를 낸광주학살은 불의와 폭력이 판치는 반이성의 시대로 각인된다. 고려 100년 동안 11명의 무신이‘칼로 칼을 갈고,피로 피를 씻는’폭력의논리가 지배한 이래 8백년 후 이 땅에서는 또다른 무인시대가 열리면서 반이성의 광란이 칼춤을 추었다. 고려 무신들은“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남김없이 죽이라”면서 학살을 일삼았고,나중에는 어용문인들만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현대의 무인정권도 비슷했다.무자비한 학살과 양심세력을 묶어놓고 그들을 추종한 반민세력과 어용문사들이 한시대를 주름잡았다. 아카시아꽃 향기로운 80년 5월,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고 꽃 한송이 꺾지 못하는 여린 학생과 시민들이,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찍어 죽이는학살자들을 상대로 무장항쟁에 나선 것은 나약한 시대의 양심의 불꽃이고 저항의 횃불이었다. 돌이켜보면 동학의 피울음,의병의 한맺힘,독립군의 애국혼,4·19의 민권의식이 합쳐서 마침내 광주민주항쟁의 불꽃이고 횃불이 되었던 것이다.우리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혼이요,당당한 저항의 맥박이었다. “내 손에 숨진 그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어떤 벌이라도 달게받을 각오가 돼 있습니다.”그동안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비밀경찰 책임자로킬링필드 대학살의 실무총장 두크(본명 카잉케프예프)가 최근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 말이다.그는 20년 만에 정체를 드러냈다.기독교인으로 변신한 이 학살자는‘죄값을 받겠다’고 뒤늦게나마 참회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스페인내전의 장본인 프랑코는 독재와 학살을 참회하면서 내전 당시 전몰자의 계곡에서 사망한 수십만명 장병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대사원을 세우고,숨지기 전에 그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지금‘전몰자의 계곡’은 용서와 화해의 성지가 되었다. 얼마 전 5·18 관련 단체 회원 250여명이 당시 진압부대를 차례로 방문하여 용서와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부상자회와 구속자회·유족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가해자들을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편 것이다.우리는 여기서 광주항쟁의 민주와 평화정신의 맥락을 거듭 살피게 된다.가해자들이 여전히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으로 규정하고‘폭동 진압’ 자긍심을 느낀다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용서와 화해의 손길은 바로 까레의 의인정신과 연결된다 할 것이다. 5·18 당시 현장에 달려간 뉴욕타임스 기자는“광주시민들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폭동(Violence)이 아니라 봉기(Insurrection)였다.나의 판단은 광주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보면서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썼다.민중봉기·민주항쟁을 폭동으로 호도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자들은 역사에대한 바른 안목을 갖고 뒤늦게나마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캄보디아의 두크나 스페인의 프랑코보다 못한 학살자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지역색 조장이‘오역죄(五逆罪)’라면 양민학살과 참회를 모르는 죄는 무슨죄에 해당될까.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기념관건립지원을 통해 역사적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이 기회에 5공세력도 피해자들이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펼 때 진정으로 참회하면서 지역화합과 IMF극복에 동참해야 한다.그리하여 20세기의 불행했던업보를 모두 풀고 화합의 새 세기를 맞아야 한다.광주의 영령들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
  • 특별기고-가정과 국가

    ‘한 집안에 인(仁)이 있으면 그 나라에 인(仁)이 일어난다.한 집안에 물러서 양보하는 일이 있으면 그 나라 전체가 양보의 정신이 넘치게 된다.백성을 다스리고 덕을 미쳐야 할 군주가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분쟁이 끝나지 않는다.’(一家仁 一國興仁,一家讓 一國興讓,一人貪戾 一國作亂) 이 고전적 교훈은 가정과 국가의 관계,그리고 가정과 지도자의 인격형성의관계를 극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셨다.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 창조주께서 동거할 이브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가정은 그 구성원인 가족들의 만남이 있는 곳이며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실현되는 곳이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외부 세계와 사회적 접촉을 시작하기 전가정에서 타인과의 교제를 시작하는가 하면 인격 형성의 틀을 잡아간다.그리고 가정에서 받은 교육과 사회적응력을 따라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고 사회 일원으로서 삶을영위해 나간다.그러니까 가정교육이나 분위기가 허술했던 사람들은 사회 적응도가 낮게 되고 가정교육이나 인격형성 훈련이 제대로 된 사람들은 사회 적응도나 기여도가 높게 마련이다. 그것은 곧 집안에 인(仁)이 넘치면 국가에도 인(仁)이 흥하게 된다는 논리와 맞물린다.그리고 양보와 덕을 배우지 못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이 어느날갑자기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는 덕을 베풀지 못하고 나라를 혼란에빠뜨린다는 논리에 상부한다. 이준경은 조선왕조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사람이다.그의 어머니는 이수정의 부인인 신씨였다.이준경은 어머니인 신씨에게서 다섯 살 때 소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갑자사화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시골로 귀양을 갔다가 연산군이퇴위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귀양에서 풀려났다.그 때 그의 나이 아홉살이었다.신씨는 준경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왔으나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자 친정으로 내려갔다.신씨는 거기서 준경에게 엄한 교육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준 교훈 한 구절.‘옛말에 이르기를 과부의 아들은 소견이없다고 했다.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나에게 의지하여 배우며 살아왔다.만일 네가 작은 행실이라도 잘못하면 세인에게 버림받을 것이니 아무쪼록 학업에 힘써 집안의 가업을 추락시키지 말도록 하여라’.이준경은 훗날 학문과 덕을 쌓아 영의정을 지냈다. 현모 신씨의 가정교육이 훌륭한 인재를 키워낸 옛 이야기이다.IMF사태 이후 우리나라의 가정들은 보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경제활동과 함께 가정의 대들보 노릇을 하던 가장들이 ‘머리숙인 남자’로 전락하면서,그리고 경제 폭풍으로 인한 가정붕괴와 가족해체 현상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면서 가정의 기존 가치와 의미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가족관계나 가정의 존재 의미가 경제보다 더 소중함에도 경제적 조건 때문에 가족 해체의 비극이연달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이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린다.가정 도덕이 붕괴되면 국가질서가 붕괴된다.그래서 가정은 국가의 모판이며 사회구성의 원점이 된다.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루빨리 가정의 원상을 회복해야 한다.전투적 가정분위기를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바꿔야 한다.비록 호랑이는 육식동물이지만 제 새끼를 먹지 않는다(虎毒不喫兒)는 말이 있다.든든한 가정의 기초는 사랑과 이해,협력과 인내이다. 가정이란 지구상 유일한 혈연공동체이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작은 국가이다.가정의 평화는 곧 국가의 평화를 낳고 사회를 안정과 평화의 세계로 이끌어간다.가정의 평화는 서로의 책임을 공유할 때 성립된다.무책임 아래 평화나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부모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할 때,자녀는 자녀로서책임을 다했을 때 이상적 가정의 구현은 가능케 된다.우리 모두 책임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
  • 本報 김삼웅주필 ‘왜곡과 진실의 역사’ 출간

    ‘망국병’인 지역감정의 뿌리는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통설이다.그 8조는 충청도 일부와 호남지역은 산형지세가 거꾸로 거슬러 도참설의 ‘산수배역론(山水背逆論)’에 해당되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것이었다.왕건은 과연 이같은 내용을 후세에 남겼을까?사실은 그렇치 않다.문제의 ‘8조’는 바로 위작(僞作)된 것이다. 그동안 친일파문제 등 ‘역사바로잡기’에 전념해 온 언론인 김삼웅씨(대한매일 주필)는 최근 출간한 ‘왜곡과 진실의 역사’를 통해 이를 밝힌다.‘훈요’는 왕건이 죽은 뒤 즉각 공개되지 않고 8대 임금 현종 때 최항(崔沆)의집에서 뒤늦게 발견됐는데 그는 왕건의 한반도 통일로 백제유민의 급부상과반대로 경주 출신들의 기득권 상실이 우려되자 급기야 백제출신들의 차별을골자로 한 내용으로 ‘훈요’를 변조했다는 것이다. ‘왜곡과 진실의 역사’는 우리 역사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면을 가감없이드러내 보인다.우선 ‘조선’이란 국호문제.‘조선’이란 국호는 단군조선이래 가장 오랫동안 사용돼 왔으나 근세 조선왕조의 ‘조선’은 중국 천자의 명을 받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사대주의의 전형이라는 것이 필자의 설명이다.출생에서부터 영욕을 거친 이 명칭은 해방후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좌조선 우대한,남대한 북조선’으로 편이 갈리는 등 남북 정치집단의 상징조작으로도 작용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특히 이기주의·천무(賤武)사상 등으로 인재를 키우지 않은 우리의지난 역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계유정난때 수양대군의 손에 비운의 생을 마감한 김종서,태종의 외손자로 약관 26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청태종도 아까와 죽이지 않았다는 임경업 장군,시대에 앞서 서양문물을 탐구한 소현세자,북방9성(城)을 축성한 고려의 명장 윤관 장군 등.이들은 모두 정치적 견해차나 음모로 희생양이 돼 청운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반면 지난 역사속에서 처세에 능한 간신배들이 승승장구한 ‘배반의 역사’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려 무신정권하의 이규보 일파,조선조 세조때의 정인지·신숙주 등의 삶이 그것이다.저자는“사육신의 패배가 우리 역사에서 악의 세력이 승자가 되는 전통으로 굳어졌다”며 그러나 “사육신의 죽음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의(義)를 되살렸다”는 함석헌의 역사관을 탁견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사 왜곡문제도 저자가 눈여겨본 대목중의 하나다.한국사에 대한 사마천과 토인비의 역사왜곡·편견을 지적함과 동시에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역사왜곡,조선조 예종·성종의 사료인멸,또 일제하 총독부의 고대사 관련 사료말살과 역사왜곡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 만신창이가 된 우리역사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동방미디어 7,500원 정운현기자 jwh59@
  • 특별기고-국정 국사교과서는 유신잔재

    1970년대를 살아본 사람이면 박정희정권의 ‘유신’시대가 얼마나 암흑시대였는가 알고도 남을 것이다.오죽 했으면 독재권력의 핵심,중앙정보부장이 ‘유신’ 핵심부의 대통령과 그 경호실장을 살해했겠는가. 현대사회에서 정치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을 잘 아는 일이지만 ‘유신’ 독재의 독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유신’정권이 이른바 국적 있는 교육 운운하면서 그때까지 검인정이었던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국정으로 한 것도 그 하나였다. 제국주의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괴뢰 만주국 장교 출신 박정희정권이 이른바 친일 콤플렉스를 감추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체성이니,국적 있는 교육이니,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면서 국사교육을 강화한답시고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고 대학의 교양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했다.‘유신’정권의 이같은 횡포에 대해 학계의 극히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으나 저지할 수 없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당시 문교부 편수관이 와서 국정화하는 국사교과서의한 부분을 집필하라기에내가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학자들도 모두 집필을 거부할 것이므로 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집필자를 못 구해서도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그러나 얼마 후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져 나온 것을 보고 얼마나 세정에 어두운가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대학의 교양 국사과목은 필수과목에서 풀려갔지만,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김영삼 문민정부시대도 김대중 국민의 정부시대도 그대로 국정인 채로 있다. 일일이 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민주주의 국가라 자처하는 나라치고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그 예가 거의없지 않은가 싶다.이웃 일본의 경우 역사교과서의 검인정마저도 거부하면서 투쟁한 학자들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크게 진전시키겠다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유신’ 잔재 국정 국사교과서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유신’ 잔재를 구시대의 유물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있는 일은 더욱 어불성설이다. 조선왕조와 같은 전제군주시대에는 국가기관으로 춘추관이 있어 왕조사로서 국사를 편찬했다.잘 알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이니 하는 것이 모두 그렇게 해서 편찬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시대에는 국가기관이 국사를 편찬해서는 안된다.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또 쓰는 일은 어디까지나 민간 학자들의 소임이다. 국사를 국가기관에서 편찬하는 일 자체가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가 되지 않을 수 없다.국가기관은 다만 역사자료를 충실히수집하고 간행해서 민간 학자들이 이용하게 해주면 된다.국립사료관이나 문서관이면 된다는 말이다. 군사독재시대에는 그랬다 해도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 정부에 와서도 중·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가 국정인 채로 있고 그것을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말해 보면 무엇보다도 국사학계 그리고 집권층 및 교육 관료들의 의식 부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할 때 어느 역사학회도 반대성명 한 장 낸 일이없었다.그런 역사학회니까 ‘유신’정권이 무너진 지 20년이 넘도록 국사교과서가 국정인 채로 있을 수 있고,역사학계가 그러니까 집권층이나 교육 관료의 역사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면 그만이겠지만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 [金三雄 칼럼] 민주와 개혁은 양립되는가

    우리는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안고 있다.대표적으로는 고려시대의 묘청과신돈,조선 건국기의 정도전,중기의 조광조·율곡·정조,후기의 전봉준·대원군·고종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한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혁은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이들 중에는 국왕을 비롯한 권력자도 있고 학자와 개혁사상가도 포함된다. 개혁의 추진에 있어서 가장 무난한 방법은 권력자가 스스로 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다.이 경우 피를 흘리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두번째는 개혁사상가들의 뜻을 받아 권력자가 추진하는 옆으로부터의 개혁이다.상당한 불안과 정쟁의 요인이 따르는 방법이다.마지막은 개혁운동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혁명적 방법이다.자칫하면 내란 또는 정변으로 이어지고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①은 정조와 대원군,고종의 개혁정치를 들 수 있고 ②는 신돈,정도전,조광조,율곡 ③은 묘청과 전봉준의 경우를 든다. 묘청은 서경천도·칭제건원 등 획기적인 자주국가 건설을 주창하다가,신돈은 무신란과 원(元) 간섭기를거치면서 득세한 권문세족에 맞서 개혁작업을시도하다가,정도전은 신권론(臣權論)으로 집약되는 국정쇄신을,조광조는 훈구세력의 특권과 비리를 혁파하고 합리적이고 기능 위주의 관료체제 확립과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율곡은 10만 양병설 등 국방강화와 왕도정치를,‘탕평 군주’ 정조는 정치개혁을 총론으로 사회개혁과 경제개혁을 각론으로 하는 국정개혁을,전봉준은 척왜척양과 12개 폐정개혁,대원군은 서원철폐와 부패척결 등 갑오경장,고종은 황제권과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둔 광무개혁을 각각 추진했으나 대부분이 실패하거나 좌절되었다. 토인비는 문명이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을 밟는다고 주장했다.왕조나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쇠퇴기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개혁이나 경장을 서둘러야 해체의 비극을 겪지 않게 된다. 고려가 신돈의 개혁정치를,조선조가 조광조와 율곡의,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봉준의 개혁요구만이라도 수용했다면 ‘해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0여년의 군사통치유산과 김영삼 정부가 남긴 국가부도위기 그리고 남북대결과 지역갈등구조 등 그야말로 쇠퇴 또는 해체기의 국정을 맡아 ‘제2의 건국’의 개혁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사 대부분의 개혁작업이 기득권 보수세력의 도전에 의해 좌절되었듯이DJ개혁도 이들에 의해 크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현재의 기득세력은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대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거나 정경,정언유착을 통해 수혜를 받은 계층이다.이들은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더 연연한다.때문에 개혁에 도전적이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보수 기득세력은 또 그렇다 치자.입만 열면 개혁과 통일,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언론인·지식인,노동계는 어떤가.국난극복과 개혁의 당위보다는 지역,파벌,계층,집단이기주의를 우선한다.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오만과 독선에 빠지기 쉽고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비판은 도덕성과 정당성에서 비롯된다.독재·부패정권에 협력하거나 기생해온 지식인·언론인들의 오늘의 비판자세는 어떠한가.최근 칼럼 미게재에 항의하면서 신문사를 떠난 한 언론인은 “포악한 정권에겐 비굴하고 온건한 정권 아래선 교활하다”고 토로하면서 “과거 정권 아래선 능동적으로 나쁜 짓 하던 언론이 이제는 매사를 트집잡고 비판해.집권세력을 보는잣대는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해.하고 있는 것의 ‘동기’,집권자의 ‘능력’을 정확히 판단해야지”라고 말했다.이런 언론인이 ‘국민의 정부’ 아래서도 설 땅이 없는 것이 우리 언론풍토이고 지성계이며 개혁의 딜레마이다. 민주주의와 개혁이 공존하기는 쉽지 않다.4·19후 장면 정권과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이를 말해준다.DJ정부의 개혁작업이 주춤거리는 것도 반개혁 세력의 도전과 자율에 대한 악용에서 비롯된다. ‘자율’을 존중하되 악용·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개혁이 요구된다.남한 180만 실업자,북한 300만 아사자를 둔 민족적 재앙과 문명사적 쇠퇴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의 네트워크가 시급하다.우리에겐 실패한개혁의 역사를 되풀이할 여지가 없다. 김삼웅 주필
  • 소설로 파헤친 韓·日 고대사 수수께끼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다.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와 문화,언어에 대한 연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몇몇 문헌과 유물 자료 등에 겨우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일본은 더욱 심각하다.일본 고대사 연구는 ‘고사기’와 ‘일본서기’ 정도를참고하고 있을 뿐이다.일본인들은 고대 일본국가의 형성은 한반도로부터 이주한 사람들과는 관계없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일본 고대 국가는 야마토(大和) 왕조로부터 발생했다는 야마토 중심사관을 신봉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후세대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우다 노부오(宇田伸夫·48)의 소설 ‘백제화원(百濟花苑)은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지난 96년 일본에서 출간돼 화제를 모았던 이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이연승 옮김 디자인하우스. 우다는 일찌기 소설의 제목처럼 “일본은 백제의 꽃밭이었다”고 선언,일본 고대국가가 한반도 이주민과는 전혀 상관없이 발생했다는 야마토 중심사관을 전면부인했다.일본의 고대사가곧 천황의 역사임을 고려할 때 우다의 이런 주장은 무척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작가는 일본이 최초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는 계기가 된 다이카(大化) 개신의 비밀을 소설 형식으로 재현한다.주인공 나카노 오에(中大兄)는일본의 제38대 덴지(天智)천황으로 정적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뒤 다이카 개신을 단행,통일국가체제를 정비한 인물이다.소설은 무식한 가쓰라기(葛城)황자가 나카노 오에 황태자가 된 다음 이루카(入鹿)천황을 제거하고 천황이 되는 다이카 개신의 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다.7세기경의 고대 일본 조정을 다룬 이 작품은 무엇보다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파헤쳤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일본 천황가와 소가(蘇我) 백제왕조의 형성과정,백제의 일본진출사를 재현하는 등 일본이 숨기고 싶은 부분을 과감히 들춰낸 것.아스카(飛鳥)지역을 본거지로 해 오사카(大阪)까지 영역을 넓혀간 소가씨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의 후예로,백제궁을 짓고 백제대사(大寺)를 건축하는등 당시의 일본을 사실상 지배했다. 이들은 백제어가동아시아의 공통어가 돼야 한다며 황실의 국어로 공표했고왕의 명칭도 ‘대왕’에서 ‘천황’으로 바꿨으며 ‘일본’이라는 국호도 맨처음 사용했다.일본의 수도에서 가장 장대한 가람이 백제대사였고 곳곳의 절에 안치된 불상도 백제관음이었다는 점 등을 미뤄볼 때 백제인이야말로 일본의 지도자였다는 게 우다의 견해다. 우다는 또 삼국시대 언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도 보여줘 눈길을 끈다.일본 황실에서 가장 아름답고 품위있는 언어는 백제어였으며 그 다음이 고구려어,신라어였다는것.반면 왜어(倭語)는 아주 천박하고 저급한 언어로 간주됐다는 것이다.나아가 그는 한국인들이 쓰는 국어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어가 바탕이 됐으며 일본어는 일본고대국가를 건설한 백제어가 모태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 소설은 일본의 국자(國字)인 ‘가나’가 한글보다 600년 이상 빨리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사실적으로 밝혀주고 있다”며 “주인공인 나카노 오에,즉 덴지 천황은 한일 고대사의 전환점을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김삼웅 칼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80돌

    오늘(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하면서 독립전쟁을 선포한지 80주년이다. “백산(白山)에 이는 바람 천지도 시름짓고 푸른파도 구비치는 곳 구룡(龜龍)이 일어나 춤을 추는구나. 어두운 이밤은 언제나 새이려나.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치는 것을….”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임정에 내분이 생기자 25일간 단식끝에 목숨을 끊은 申圭植선생이 망명지에서 쓴 ‘한국혼’의 서두다. ‘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친’절망의 시대에 애국지사들이 이국땅 상하이에모여 임정을 세우고 나라찾기 전쟁을 벌인지 80성상이 흘렀다. 상하이에 임정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고국의 동포들은 노래불렀다. 자유민아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임시정부 만세불러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처 장관 국제연맹 여러 특사 만세불러라 우리 이미 이민족의 노예 아니오 또한 전제정치하의 백성 아니라 독립국 민주정치 자유민이니 동포여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망국 9년만에 3·1항쟁의 뜻을 담아 임정을 세우니 ‘일제 36년’은 국권상실의 측면에서 임정이전의 9년일 뿐이다. 임정은 물론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렇다고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라 ‘망명정부’일수는 없다. 임정은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면서 향후 27년 동안 줄기차게 독립전쟁을 벌였다. 무장·의열·외교등 모든 방법을 동원한 전쟁이었다. 식민지역사상 우리 임정처럼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면서 완전독립을 추구한 사례는없다.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 따위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완전독립’만을추구했다. 임정의 지도자들이 왕조시대 인물들인데도 복벽(復 )을 거부하고 민주공화체제를 지향한 것은 대단히 선각적이다.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빈부 및 계급없이 일체평등으로 함”(제3조) 등 ‘헌법’정신과 조항이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중 민주공화제 국가의 건설을추구하는 민주지향형이 244개(53%)인데 비해 계급투쟁형은156개(34%), 왕정복고형은 37개(8%), 군정추구형은 23개(5%)로 나타났다. 한민족의 민주지향성을 살피게 한다. 임정은 욱일승천하는 일제로부터 탄압과 회유, 국제열강의 외면과 냉대, 극심한 생활고와 재정난, 그치지 않는 노선 시비와 사상갈등 속에서도 민주공화제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항일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맡았다.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예컨대 李東輝중심의 좌파계열과 金元鳳중심의 의열단세력까지 포용, 거국적 항일투쟁 전선을 형성한 것은 임정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뒷받침한다. ‘한국독립’의 계기가 된 카이로선언이 가능한 것은 임정의 존재때문이다. 尹奉吉·李奉昌의사의 의열투쟁과 항일전선에 몸을 사른 지사들의 희생이중국을 움직이고 중국정부가 미·영 수뇌를 움직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임정의 최대 성과라 할 것이다. 해방후 국민사이에 이런 노래가 불려졌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소리 들린다/쿵 쿵 쿵 북소리 들린다/남대문을 열어라 동대문을 열어라/임시정부 들어온다 광복군이 들어온다.” 그러나 임정은 귀환하지 못했다. 임정의 귀국이 거부되면서 한국현대사는이념대결과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과 왜곡의 시대가 되었다. 임정수립 80주년, 해방 54년이 되는 20세기 마지막 임정 기념일에 독립지사들의 순결한 애국정신이 그립다. 남북이 갈리고 지역을 토막쳐서 이념과 이해로 대립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애국지사들의 영령앞에 부끄러워하면서, 임정정신이 국민통합과 환난극복, 남북화해의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
  • 승정원일기 국보 지정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우리 기록문화의 꽃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사진)가 국보로 지정됐다. 문화관광부는 9일 국보지정심의분과위원회(위원장 고병익)의 심의를 거쳐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승정원일기 3,243책을 국보 제303호로 지정했다고 밝혔다.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지금의 대통령 비서설)에서 매일 취급한 제반문서와 사건 등 국가 기밀을 기록한 것이다.임진왜란 이괄의 난으로 이전의 일기는 모두 손실됐고,인조 원년 계해년(1623년) 3월12일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8월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날까지 288년간의 분량만 남아있다.엄밀히 말해 지금 남아있는 ‘승정원일기’라는 이름의 기록은 1623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때까지의 3,045책만 해당되고이때 승정원이란 기구가 폐지됐기 때문에 이후에는 승선원일기나 궁내부일기,비서감일기,규장각일기(이상 198책)라는 이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金대통령, 유교지도자와 오찬

    金大中 대통령이 오늘의 충(忠)과 효(孝)에 대해서 설파했다.그것도 내로라하는 전국의 유교지도자들 앞에서,요즈음 인기리에 방영중인 ‘왕(王)과 비(妃)’라는 TV프로를 예로 들면서 ‘유교 및 충효사상의 21세기적 해석’을내렸다.金대통령은 “조선왕조는 세조이후 충효사상이 퇴색되고 왜소해졌으며,유림도 소소한 문제에 시비를 걸어 당파싸움을 일삼게 됐다”고 해석했다.그 이유로 세조가 왕인 단종을 죽이고(忠),아버지 세종대왕이 조카를 잘 보살피라는 당부를 듣지 않았다(孝)는 점을 들었다. 金대통령은 그러나 오늘날 충의 대상은 이제 국민이라고 했다.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조항을 상기시켰다.효도 핵가족,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여서 자신의 인권과 신념을 지키면서 효를 행하고 사회와 국가도 더불어 효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김삼웅 칼럼]한 우물 파는 신지식인 운동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목숨을 걸고 살 수 있는 어떤 이상,어떤 가치를 찾아내는 데 있다.”―키에르케고르의 말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 동안 어떤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며 사느냐는 대단히중요하다.성패를 떠나 자신만의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거기에 생애를 건다는 것은 보통 기쁨이고 희열이 아닐 수 없다. 인류문명사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설정한 이상과가치를 추구하면서 생애를 보낸 분들이다.한마디로‘한 우물’을 판 사람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헤겔의 변증법,칸트의 이성,다윈의 진화론,키에르케고르의 실존,니체의 절대자,베르그송의 직관,피히테의 자아,듀이의 경험론,제임스의 의식의 흐름,프로이트의 무의식,포드의 자동화,간디의 비폭력,김구의 독립,함석헌의 씨 ,임종국의 친일파,최명희의 혼불…. 한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는 각 분야에 전문가가 드물다는 점이다.인구나교육 수준으로 보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전문가가 쏟아질 만도 한데 그렇지 못하다. 조선왕조시대에는유학,그것도 주자학 일변도가 다른 학문과 기술자를 천시 하거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했다.이런 전통이 해방 후에는 우가 아니면 좌가 되는 단선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풍토에서 색다른 주장이나 논리가 설 땅이 없었다.그렇다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육성된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와 교육은 부화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아리처럼,오토메이션화한 부품생산처럼 일정한 틀 속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규격화된인간군(人間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생산된 인간군은 이해타산과 출세주의,강자에 대한 아첨과 기회주의,철저한 보신과 가족본위의 안일을 절대가치로 추구하면서 톱니바퀴와 같은기계적 합리주의자로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약삭빠르게 살아가고자 한다.머리가 좋고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출세주의에 눈이 멀어 아첨과 적당주의를 처세훈으로 삼는 철저한 속물 근성을 보인다.이들은 오로지 체제 순응과 제도화된 관행 속에서 더 큰 빵,더 높은 의자,더 짙은 향락만을 추구하려 든다. 이에 따라 정신과 영혼은 퇴화와 난쟁이화를 면치못하는데도 이를 알지 못한다. 전문가를 키울 줄 모르는 풍토가 되다 보니 획일적이고 아류(亞流)에 급급하는 사회가 되었다.학문은 총론 수준에 머물고,정치는 웅변 수준에 맴돌고,경제는 거품 속에,기술은 모방에 그친다. 우수학생은 일류대로,일류대생은 법대로,법대생은 고시촌으로 가고,각 분야에서 이름이 알려진다 싶으면 국회의원 하겠다고 여의도로 몰려간다.설렁탕팔아 푼돈 모으면 불고기집 내고,어디서 장사가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끼여들어 소나기식 덤핑으로 함께 망한다. 해외 진출도 그렇고,수출도 마찬가지다.기술개발을 하기 보다는 비싼 로열티를 주고 손쉽게 돈 벌려다가 왕창 무너진다.IMF는 이런 결과다. 金大中정권 1년 만에 달라진 풍속도 가운데 하나는 능력사회로의 진입이다. 목수와 탤런트가 교단에 서고 전통장인(匠人) 수십명이 교수가 되었다. 각계의 전문가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창의력과 실용성이 중시된다.99명의아류보다 1명의 창조자가 대우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일류대학의 권위보다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세계 소프트웨어의 황제가 된 빌 게이츠처럼 성공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공직 관직 대학 교직 기업 언론사를 막론하고‘철밥통’구조를 깨야 발전한다.하나의 주제,한가지 분야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 연구하고 시험하고 개발하는, 그리하여 국내 최고,세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정부와 자치단체와 각 기관이 지원해야 한다.정부는 그런 인재들에게 훈장을 주고 언론은그들을 크게 알려야 한다. 괴짜가 많은 사회라야 건강하다.출세 지상주의자들,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의눈에는 모자란 놈,패배자,낙오자 혹은 미친놈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꿈꾸는이상주의자들,일에 미치고 연구에 미치고 봉사에 미친 ‘신지식인’들이 당당하게 살아가고 보람을 느끼는 사회풍토를 만들어야 한다.정부의 제2건국정책과제인‘창조적 지식기반의 국가건설’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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