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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지구촌 신익희선생 여행기](3)

    *유럽서 서남아시아로. 7월8일 터키(土耳其)의 이스탄불에 도착했다.이곳부터는 아시아(亞細亞)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파리가 날아다녔다.진미(珍味)인 ‘라크’ 술도 맛보았다. 케말 파샤는 신(新)터키의 건국 영웅으로 전 국민이 숭배한다.파샤는 존칭이고 케말이 이름이다.평소 존경하던 분이라묘지를 참배하고 꽃다발을 바쳤다.묘지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터키는 소련과 흑해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다.지중해진출을 노리는 소련이 언제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올지 몰라방비를 게을리할 수 없다.이 점이 한국과 흡사하다.흑해의저편으로 소련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었다. 아프리카(亞弗利加)로 건너가 에티오피아를 찾았다.이 노정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더운 지방이라 유행병인 황열병(黃熱病·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다.주사 효력이 나오려면 12일을 기다려야 하니 20여일이 훌쩍 지날 것이다.7월13일 수에즈 운하를 넘어서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했다.이집트의 새로운 영도자인 나기브 장군을 만났다.나기브장군은 오랜 왕조를 없애고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세상은 그를 스트롱맨(strong man)이라고 부르나 만나 보니까 아주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그의 첫 인상에 매료돼손을 붙잡고 “이집트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시고 세계 인류와 한국을 위해서도 일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그도 감격한 듯 “나도 아시아 사람이오”라고 말했다. 7월14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했다.공항에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비서장인 워크가 마중나와국빈 초대소로 안내했다. 이튿날 황제를 만났다.우리를 환영하는 호의와 정성이 의의(意義)가 뜻깊게 생각되었다.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데황제는 이탈리아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 국명)’를 침략했던 때부터 국제연맹에 가서 호소하다가 배척당한 이야기 등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흘렸다.한시를 한수 지었다. 兵家勝敗未可期 包羞忍恥是男兒 今日邂逅非遇然 兩人心事兩人知 “전쟁에서는 이기고 지는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사내 대장부는 부끄러움과 인내,수치심을 가슴에 담았다.오늘 이렇게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두 사람이 서로의 심사를 느끼고있다”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둘러보니 황제 주변에 누런개(黃犬),검은개(黑犬),흰개(白犬) 등 5∼6마리의 작은 개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녔다.황제는 애견벽(愛犬癖)이 있는 듯하였다.이 나라에는 사자가 많다.나라의 상징도 사자다.황가(皇家)의 동물원에는 작은 놈,큰 놈 등 20여마리의 사자가 있다.제일 오랫동안 가두어 둔 놈이 12년인데 크기가 굉장했다.사자를 철창살로 가두고 창살 밖에 큰 도랑을 팠다.내가 그 앞을 지나가니 사자가 대들었는데 재미가 있었다.파키스탄의 수도 카라치에 도착한 것이 7월24일이었다.인도의 네루 수상도 현안인 카슈미르 문제(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북동부의 국경 카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싼 양국의 분쟁)를 상의하기 위해 카라치를 방문했다. 네루의 환영 다과회에 참석했다.네루는 제2차 대전중에 중국 중경(重慶)에서 만난 일이 있다.네루 수상에게 “한국을원조하는 각 우방에 사의를 표하러 다니는 중”이라 말하니“여기서 그대를 만났으니 뉴델리에는 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네루는 언제나 전 아시아의 영도자를 자처하는 것 같다.소련 사람들이 국민혁명 전의 중국에 대해 “박테리아가 아무리 많아도 소독약 한방울이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인구가 많다고 깝죽대고 돌아다니면서 백성은굶어죽거나 말거나 관심없이 헛된 말만을 늘어놓는 네루 선생을 보고 좀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카라치로부터 타일랜드(泰國)의 방콕으로 가는 길에 뉴델리를 지나기는 했으나 인도 당국자를 만나 볼 흥미조차 없었고 뉴델리 비행장에 내리자 너무 더워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그래서 막바로 타일랜드로 발길을 돌렸다. 정리 안동환기자 sunstory@
  • [대한광장] 정조와 정치개혁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후 세손을 이미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시켜 보호했다.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세손의 지위는 변동없게 한 것이다.사도세자를 제거한 집권 노론(老論)은 세손의 즉위를 막기 위해 갖은노력을 기울였으나 영조의 보호로 실패해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정조다.그런데 정조의 즉위 일성은‘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란 것이었다.이 말은 노론이 아버지의 원수이자 조선 발전을 위해 반드시 개혁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정조가 보기에 노론은 임금인 황숙(皇叔:경종)을 독살하고,선왕(영조)을 그릇된 길로 이끌었으며,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수구세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 뿌리를 따지면 노론은 인조반정(1623)부터 정조 즉위때까지 무려153년을 집권하는 동안 남인과 소론을 모두 제거한 거대 정당이었다. ‘개혁은 당위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정조는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해 문무의 젊은 개혁세력을 길렀고 서얼들을 등용해 개혁의 외연을 넓혔다.그리고 노론 강경파인벽파는 배제하되 온건파인 시파는 끌어안아 노론을 분열시키는 한편 재위 12년 2월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특배(特拜)해 남인들을 정치개혁의 주축으로 삼으려는 뜻을밝혔다. 그러자 노론은 정조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12년말 이인좌의 난(영조 4년)때 영남 선비들이 난에 저항해 싸운 기록인 ‘무신창의록’을 간행해 영남 남인들을 신원하려하자 노론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임금의 시신(侍臣)인 승지와 사관이 왕명 봉행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정조는“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꾸짖었으나 이 무렵 신하들은 이미 국왕의신하가 아니라 소속 당의 당인(黨人)들일 뿐이었다.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위 13년 양주 매봉산에 묻힌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해 현륭원으로 높이는것으로 정치개혁의지를 과시했다.그리고 이인좌의 난 이래등용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을 끌어안기 위해 재위 16년에 무려 1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도산서원에서 별시(別試)를 열어영남 유생 둘을 급제시켰다. 현륭원을 이장한 때부터 사망하는 재위 24년까지 정조는 11년간 무려 12차례나 현륭원에 행차했는데,이는 단순히 묘소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애민의군주임을 과시하는 대중정치의 장이었다.백성들은 앞다투어관리들에게 당한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 호소는 그대로 정치개혁의 명분이 되었다. 왕조국가의 국왕은 공화국에서는 국민이다. 지금의 국민은옛날의 정조처럼“오늘날 국가에 국민이 있는가 신하(정치가·관료)가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나라 세금을 선거자금으로 이용하는 대죄를 저질러도‘국법’은‘당(黨)’앞에 무력하니‘기강’ 이설리 없는 것이다. 정조는 즉위 당일부터‘사도세자의 아들’임을 표방하면서개혁에 나섰지만 재위 24년이란 길다면 긴 기간에도 이를 완성하지 못한 채 승하(1800)하고 말았다.그의 사망과 더불어정권은 다시 노론의 손에 들어가 곧바로 대대적인 개혁세력사냥인 신유박해(1801)가 발생한다.이후 노론은 나라 자체를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망국에 이르게 했다. 해방 후 최초의 정권 교체로 확보한 기간이 5년, 개혁을 완수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인가? 아니면 개혁세력을 기르려는 눈에 띄는 시도도 별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개혁 성공을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인가? 정조의 실패에서 연속성의중요성을 배우길 바랄 뿐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지진 잦아지는 한반도 “”원전 안전 보장없다””

    인도가 지진으로 대재앙을 맞고 있는 가운데 국내 원자력 발전소(원전) 등의 내진(耐震)설계 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서울대 지진공학연구센터 김재관(金在寬·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팀은 31일 ‘성첩(城堞·성벽 위에 낮게 쌓은 요철형 담장)모델의 진동대 실험과 역사 지진의 세기 평가’라는 논문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지진의 평균 세기는 0.3∼0.4g(g=중력가속도의 단위)로현재 원전 내진설계 기준인 0.2g(리히터 규모 6.3정도)보다 높아 큰지진이 나면 원전도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현재의 내진 설계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부의 지원을 받아 특별연구과제로 조선시대의 지진을 조사해 온 김교수팀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1,417건의 기록을 바탕으로 북한산성 성첩의 옛 축조 기법으로 석재를 쌓은 뒤 인공 지진을발생시켜 피해 정도를 실험했다. 그 결과,과거 우리나라 지진들의 세기는 유효최대 지반가속도(실제피해를 유발하는 지진의 세기)가 0.3∼0.4g으로 지난 95년 일본 고베대지진(0.42g), 40년 미국의 엘 센트로 지진(0.38g)의 세기와 비슷한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국내 내진 설계는 88년에 도입됐다.건축법상 일반 빌딩은 6층 이상,1만㎡ 이상의 경우 0.11∼0.2g,원전은 0.2g를 기준으로 건축되고 있다.0.2g는 과거 국내 지진 중 가장 강했던 36년 쌍계사 지진(리히터규모 5)에 견딜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한반도 주변 일본과 대만은 내진설계 기준이 각각 0.4g와 0. 2∼0.4g 등으로 우리나라보다 월등히 높다.특히 원전의 경우 미국은최고 0.5g로 설계돼 있으며 프랑스는 0.2g이나 최대한 원전을 지상과분리시키는 ‘지진격리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97년 21차례,98년 32차례,99년에 37차례 등 지진 발생 건수가 점차 늘고 있어 이미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김 교수는 “고베의 지진기록을 입력해 인공 지진을 일으켰더니 문헌에 나오는 규모의 가상적인 피해가 발생,조선시대에도 고베와 비슷한 대지진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됐다”면서 “기존의 원전도 주요 부분에 지진격리장치를 설치하거나원전 구조물에 특수 보강재를 덧씌우는 등의 안전설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균관대 건축학과 이동근(李東根) 교수도 “국가 경제력이 약했던과거의 원전은 건설비 절감 등을 이유로 상대적으로 안전성이 소홀히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력 원자력건설처 함영승(咸永丞·56)부처장은 “원전의 내진 기준은 0.2g이지만 0.3g 정도 지진에도 견딜 수 있어 현재의 기준은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과 관계자는 “내진설계는 원자로 중심 반경 320㎞ 이내의 과거 지진자료 및지질특성 등을 조사해 설계 지진값을 결정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말했다. 국내 원전은 고리,영광,울진 등에서 16기가 운영되고 있으며 4기가건설 중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중국 군주정치 성공사례 분석 2권

    만주 여진족이 한족(漢族)을 다스린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淸)나라의기틀을 다진 강희제(康熙帝)와 그의 넷째아들 옹정제(雍正帝)는 여러면에서 대조적이다. 강희제는 관대한 정치를 편 인간적인 군주인 반면 옹정제는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였다.어느 쪽이 바람직한 통치자의 길일까.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와 일본의 동양사학계 거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쓴 전기 ‘강희제’와 ‘옹정제’(이상 이산)는 그 장단점을 음미하게 해준다. 강희제는 병자호란 25년 후인 1661년 만7세 때 즉위해 무려 61년동안국경을 넓히고 인두세를 동결하는 등 화려한 업적을 쌓은 덕에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자식 문제만이 골칫거리였다. 자녀 56명 중 절반이 성인이 되기 전에 숨졌다.유일한 적자인 둘째를 2세 때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보스로 크면서 안하무인이 되는 바람에 두차례나 폐위시켜야 했다. 옹정제(雍正帝)는 45세 때 제위에 올라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이다.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실천했다.13년동안 새벽4시부터 밤12시까지 일하며 초인적인 정력으로 의지를 펴나갔다. 백성들의 고통 위에서 관료들이 명성과 실익을 동시에 누리는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보스들을제거하고 새 인재들을 발탁했다.밀정을 통해 관료들을 감시하며,관료들과 천자가 직접 의견을 주고받는 주접(奏摺)제도를 적극 활용했다.매일 수십통을 읽고 답장을 써야 했다.신하의 알현 신청은 거절하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강희제는 먼 곳까지 원정과 사냥을 즐겼으나 옹정제는 하루만 쉬어도일이 밀리기 때문에 베이징 밖으로 나가볼 여유가 없었다.지방관들에게 근무지 수당인 양렴은(養廉銀)을 주되 그 외에는 한푼도 취하지못하도록 했다. 여론이란 유력자들의 이익 대변에 불과하다며,명령을내릴 때 도리에 맞는지만을 생각했다.황태자도 일찍 책봉하지 않았다.그러나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혼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은옹정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그가사망하자 관대한 정치가 되살아났다.옹정제의 개혁 덕택에 청조는 100년이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독재도 잘만 하면 좋은 정치가 될 수 있겠지만,선의의 독재를 경험한대중은 독재가 아니면 다스려질 수 없도록 틀지워진다는 역설적인교훈을 저자는 도출해낸다. 김주혁기자 jhkm@
  • [대한광장] 삼각산과 북한산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본 것이 초등학교 때인가 싶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련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조 때문이었다.병자호란 당시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했다가 결국 청나라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김상헌(1579∼1652년)이 지은 시조이다.김상헌이 포박되어 끌려가면서,서울쪽을 돌아보며 비통한 심정을 읊은것이다. 서울에서 청나라로 가려면 지금의 무악재를 넘어 구파발을 거치고,통일로를 따라 임진강을 건너 북상해야 한다.이 길에서 돌아보는 서울쪽 삼각산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하다.하늘을 찌를 듯 또떠받칠 듯 솟아 있는 세 봉우리.백운봉·인수봉·만경봉이 있었기에,우리의 선조들은 이 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다.곧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산 이름은 삼각산이었다.대부분의 서울 시민과 경기 일원 주민도 삼각산이라고 불렀다.70년대에는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되더니,80년대부터는 어느덧 북한산으로 통용된다.지금은어떤 등산객에게 물어도 ‘북한산 간다’하지 ‘삼각산 간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본명은 사라지고 별명 또는 일명이 본명이 되어 버린꼴이다. 이것은 1983년 삼각산과 도봉산을 함께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삼각산의 역사와 지리적 배경을 도외시했거나,행정당국의 편의주의에 의해 산의 고유한 이름까지 달라진 결과를낳았다고 할 수 있다. 삼각산은 1,000여년 전인 고려 성종(993년)때에 이미‘삼각산’으로 정착되어 불렸다.그 이전 삼국시대에는 ‘부아악’이라고 했다.삼각산 기록이 처음으로 나오는 문헌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이다.‘삼각산 이북도 또한 고구려의 옛땅입니다’라고 서희가 고려 성종에게 아뢴 말에서이다.또 목종9년(1006년)기사에도 ‘목종이 숭교사에 있던 현종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 살게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뿐만아니라 고려 숙종때 만든 ‘삼각산 중흥사반자’명문,‘태고사 원증국사 탑비’의 비문,충혜왕5년(1344년)에 제조한‘중흥사청동누은향로’의 명문들에서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표기되어 있음을확인한다. 조선시대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은 확고부동하게 정착된다.‘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대동지지’등 역대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여러 선비의 문집과 기행문에서 모두 삼각산으로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본명이 돼버린 ‘북한산’은 어떤 역사적 근거로하여 이름붙은 것일까.‘비류와 온조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라는 ‘삼국사기’백제기사의‘한산’이 그 효시가 된다.그러나 이 한산은 특정한 산이름이 아니라,백제 건국 당시의 ‘한강유역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이 여러 사학자들의 설명이다.따라서 북한산은 한강이북 지역으로,남한산은 한강이남 지역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역사지리 연구가 김윤우씨는 그의 ‘북한산 역사지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백제 건국초에 고구려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남하한 비류와 온조등의 백제 건국집단이 한강유역 일대를 ‘한산’이라 일컫기 시작한 것으로…엄밀히 말해서 삼국사기의 북한산은 곧 ‘한강이북의한산지역’이란 의미의 말이다.’ 서울시가 펴낸 ‘서울의 산’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한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등에 보이며,이는 한강·한수·한양·한성 등의 지명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서울의 옛이름은 한산·북한산·북한산성·북한성·한양등으로 기록되어 있다.북한산은 처음부터 산이름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서울지방 옛이름인 한산의 북쪽지역을 가리킨 지명에서 비롯된것임을 알 수 있다.’ ‘북한산’이라는 이름보다는 ‘삼각산’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정겹게 느껴진다.‘3개의 뿔로 된 산’이라는 뜻의 삼각산이,우리가 항상 바라보는 시각적 체험과 형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반면 ‘북한산’은 체험의 눈이 아닌 관념뿐이며,어딘가 사대주의적 냄새마저 풍긴다.도봉산에 등산하러 가면서도 ‘북한산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후세들이 행여 삼각산과 도봉산의 이름을 잃어버리지않을까 걱정된다. 이성부 시인
  • World Digest/ ‘케네디 왕조’의 잔영 ‘조지’ 폐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존 F 케네디2세가 창간한 정치잡지 ‘조지(George)’가 오는 3월호를 끝으로 폐간된다.95년 법조인에서 출판인으로 변신한 케네디 2세가 세인의 관심 속에 창간한지 6년,그가 죽은지 1년반만이다. 광고난 등 경영상 어려움이 주 이유.창간 동업자로 케네디 2세 사망 이후 케네디 지분을 인수,운영해오던 아세트 필리파치 매거진사의잭 클링거 회장은 5일 ‘조지’의 직원들에게 폐간을 선언하고 3월폐간호는 케네디 2세가 인터뷰한 기사를 게재,특별 ‘헌정판’으로꾸미겠다고 밝혔다. ‘조지’의 폐간이 미국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한 것 같다.미 언론들의 경쟁적인 ‘조지’ 폐간 보도는 마치 케네디 ‘왕조’의 마지막 신화 잔영(殘影)이 걷히고 있다는 분위기다. ‘조지’는 38살로 인생을 마감한 케네디 2세가 마지막까지 혼신을기울인 ‘분신’.슈퍼모델 신디 크로포드를 조지 워싱턴으로 분장시킨 사진을 창간호 표지로 싣고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장 인터뷰를 과감히 싣는 등 무거운 정치저널리즘을 탈피하려 시도한 그는 97년 9월호에서 자신이 직접 누드모델로 나서기도 했다.자신의 이미지에 흠집을 날 것을 우려,주저했으나 판매고를 높여야 한다는 아세트측 제안에 응했다는 후문.‘조지’에 담은 열정이 그만큼 컸다는얘기다. 급작스런 사망 이후 미 국민들은 케네디 2세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을 ‘조지’를 통해 느끼려 했다.창간 후 하락하던 구독률이 사망직후 150%나 급증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들의 시들해지는관심은 어쩔 수 없어 지난해 상반기 구독 증가율이 13.8%로 떨어졌다.연초 대비 광고량이 반감,결정적 타격을 가했다.지난해 적자는 1,000만달러.케네디 2세가 죽지 않았다면 더 일찍 폐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故)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재클린 여사의 아들,피플지(96년)가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뽑은 우상,63년 아버지의 영결식장에서 천진난만하게 거수경례를 하며 미국인들을 울린 미국의‘왕세자’신화가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1월의 읽을만한 책’ 10권 발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www.kpec.or.kr)는 ‘미녀와 야수,그리고 인간’(김용석·푸른숲)과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김경수·가람기획) 등 10종을 1월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발표했다.
  • ‘삼국사기’ 진가 인정돼 복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 대학자뇌천(雷川)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2001년 1월의 문화인물로선정됐다고 문화관광부가 28일 발표했다. 경주가 본관인 김부식은 예종·인종 조에서 재상을 지내고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시인으로도 이름 높은 당대의 정치가·학자·문인이다.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해 고려왕조 안정에도 기여했다. 인종 때 신진관료 8명과 함께 ‘삼국사기’50권을 편찬해 한민족 고대사를 후세에 전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1925년 사론(史論)‘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을 발표,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독립사상 대 사대주의의 결전으로 해석한 이래 김부식은사대주의의 대표 격으로 비난받아 왔다.또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국가기원을 낮춰 잡느라 고의로 ‘삼국사기’를 믿지 못할 사서,김부식을 역사왜곡자로 매도해왔다. 그 결과 김부식은 오랫동안 사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최근 몇년새 ‘삼국사기’초기 기록이 인정되면서 김부식 자신도 새로조명을 받게 됐다.따라서 이번의 문화인물 선정은 일종의 ‘복권’이랄 수 있다.이와 관련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새해 1월19일 연구원 대강당에서 기념학술대회를 개최한다.경주 김씨 대종친회도 1월29일 세종호텔에서 학술대회를 열며 ‘김부식과 삼국사기’란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부활한 과거‘ 찬란한 유물 한눈에…동양문명 기획전

    동양문명의 찬란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규모 기획전이열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전’(19일∼내년 2월13일,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과 ‘중국황제유물전’(22일∼내년 3월4일,63빌딩 특별전시관)이 화제의 전시다.교과서 도면이나 외국 유명 박물관에서나접하던 유물들을 직접 대할 수 있는 자리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전’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고대 유물 720여점을 보여준다.메소포타미아는 수메르,바빌로니아,앗시리아,신바빌로니아 등 4개 왕조에 걸쳐 4,500년간 지속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수메르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수메르문명은 기원전 3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전시품 중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뱀신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함무라비 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흙벽돌,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적인 영웅 길가메쉬의 상징으로 사용된 황소부적,경제활동 문서로 쓰인 수메르어 점토판,눈 신상,점토못 등이 포함돼 있다.또 도시 한가운데 높이쌓아 만든 ‘지구라트’는 모형으로 보여준다.지구라트는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을 일컫는 것으로,탑꼭대기에는 신방이 있어 통치자와 여사제가 해마다 성혼례를 치뤘다. 이번 전시는 수메르시대 조각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수메르조각은 원통형의 환조가 주를 이루지만 봉납석판은 당시 조각으로는드문 부조양식이다.인장조각술이 발달한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수메르인들은 단단한 부싯돌이나 구리도구를 사용해 최초로 원통형 인장을 만들었다.그들은 점토판에 상거래를 명시하고 원통형 인장을 굴려경제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미술자문을 맡은 중앙대 예술대 신현중교수는 “조그만 원통형 돌에 현대 기술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미세한음각을 해 넣은 것을 보면 수메르시대 조각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알 수 있다”며 “원통형 인장은 사유재산권의 존재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했다. 예술의전당과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한 이번 전시는 스위스 제네바 HM컬렉션측과의 계약에 의해 이뤄졌다.98년 ‘다윗의 도시와 성서의 세계’전을 진행한 안성림씨(고대근동박물관 건립위원회 상임위원)가큐레이터로 나섰고,근동학을 전공한 조철수교수(서강대 신학대학원)가 학술자문을 맡았다.관람료는 어른 5,00원,초중고생 3,000원.(02)587-0311. ‘중국황제유물전’에서는 5,000년 중국 황실의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호흡할 수 있다.이번 전시는 중국 황실유물 해외전으로는 최대의규모.선양(瀋陽)고궁박물관,톈진(天津)예술박물관 등 중국의 5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대 황실의 대표적 유물 151점이 출품된다.전시장은 ‘정사관’‘전쟁관’‘생활관’‘서화관’‘이벤트관’등 5개의 주제관으로 구성된다.정사관에서는 명(明)13릉에서 출토된 황제금관과 황후의 보석장식 봉관(鳳冠) 등이 전시되며, 서화관에서는 길이가 20m나 되는 건륭제 황제행렬도 ‘만호조천도’,명 선종의 ‘소행낙권도’,서태후와 마지막 황제 부의의 글 등을 볼 수 있다.전쟁관에서는 황제의 금갑옷과 장마안(仗馬鞍·말안장),보검,팔기군 갑옷등이 전시된다.생활관에서는 황실 의상,상아부채 등이 소개된다. ‘중국황실유물전’은 전시에곁들여 중국 전통 예인들이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했다.경극 특유의 화려한 분장술과 무대의상을 가까이서 감상할 있는 선양경극원의 ‘패왕별희’공연,밀가루 반죽으로 삼라만상을 빚어내는 ’면소공예’,풀잎과 짚으로 각종 동물과 곤충을 만들어내는 ‘초편공예’등 전통공예품 제작시연 등이 대표적인 프로그램.손으로 문지르면 분수처럼 물이 튀어 오르는 황실용세수대야 분수동분(噴水銅盆)’도 눈길을 끌 만하다. 입장료는 어른 8,000원,중고생 6,000원,유치원·초등생 5,000원.인터넷(www.63city.co.kr)에서도 볼 수 있다.(02)789-5663-5김종면기자 jmkim@
  • 조선 궁중무용의 정수 다시 본다

    정재(呈才)는 원래 대궐 잔치 때 행한 모든 재예를 가리키는 말이다.하지만 요즘은 궁중무용의 대명사로 쓰인다.한국의 전통 궁중예술인 정재를 집대성한 인물은 조선 후기 순조 때 전악(典樂,장악원 정육품 잡직의 하나)을 지낸 김창하.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1월의 문화인물이기도 하다.정재연구회와 사단법인 창무예술원은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정재발표회를 마련했다.27,28일 오후 7시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리는 ‘만수무강 하옵소서’가 화제의 무대다. 궁중무용은 본래 철저하게 유교적인 질서와 법도에 맞춰 추던 춤이었다.왕조의 창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 의식무(儀式舞)가 김창하에의해 비로소 순수한 예술의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이번 무대는 무엇보다 김창하 조선정재의 원형을 재현하는데 역점을 뒀다. 이와 관련,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향악정재와 당악정재의 관계다.중국에서 전래된 당악정재는 중국예술이고,조선에서 창작된 향악정재는 우리 민족의 예술이라는 도식적인 해석은 옳지 않다.당악정재 중에도 창안된 것과 수입된 것이 있을뿐 아니라 당악정재의 내용과 형식이 변해 향악정재와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수무강 하옵소서’는 조선조 순조 29년 연경당에서 순조의 보령 40세를 축하하기 위해 베풀어진 정재 가운데 여섯 가지 춤을 재현한다.만수무,박접무,춘앵전,가인전목단,무산향,장생보연지무가그것으로 모두 무병장수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공연장 로비에는 김창하와 그 시대의 정재에 대한 문헌기록,궁중 행사를 기록한 의궤,진연도(進宴圖),진찬도(進饌圖) 등이 전시돼 있어일반의 이해를 돕는다. 김종면기자 jmkim@
  • 삼국사기 ‘진실’인가 ‘사기’인가…KBS1 ‘역사스페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진실인가,사기(詐欺)인가. 1145년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 등 11명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는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유일한 책.고대 삼국연구에 기초가 돼 ‘고대 역사로 들어가는 창’,‘고대사의 바이블’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내용이 틀린다’,‘편찬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이다’등의 비판을 받으며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8일 오후8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이같은 학계의 논란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보는 시간을 마련한다.국내 사학자들의논쟁은 바로 280년경 중국 사람 진수가 쓴 ‘삼국지 한전’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고대 삼국의 모습을 다르게 그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3세기 한반도는 70여개의 소국으로 나눠졌고 권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을 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묶여있었다.이것은 이제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통설이다.반면 ‘삼국사기’에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이미 1세기 후반에 여러 지역을 통합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어 정면 배치된다.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풍납토성의 탄소 동위원소를 통한 연대측정 실험결과가 기원전후로 밝혀지면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제와 신라가 3세기 이전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해 있었다’는‘삼국사기’초기 기록에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일본 역사계의 대부라 불리는 ‘츠다 소이치’씨.그가 논문을 낸 1919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천황 중심의 역사관이 정립되던 때이다.그는 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혹시 고대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 하기위한 포석은 아니었을까?제작팀은 이밖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식,월식 등 수많은 천문기록 조작주장에 대해 “최근 천문학계가 최첨단의 기술로 연구한 결과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보다 ‘삼국사기’에 적힌 천문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반론을 편다. 제작을 맡은 우종택PD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조선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책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허윤주기자 rara@
  • MBC 스페셜,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비 줄리아

    역사의 소용돌이는 때로 전혀 이방인인 듯한 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휩쓸어 버리는 법. 17일 밤11시5분 ‘MBC스페셜-줄리아의 마지막 편지’편은 미국인으로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비가 됐던 줄리아 리 얘기다.한반도가 어디붙어있는 지 모른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줄리아는 MIT공대에 유학중이던 고종황제 손자 이구를 만나 혼약하게 되면서 한민족 격변사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온 셈. 그 줄리아가 지난 9월 77세 중풍든 몸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한국방문길에 올랐다.남편이었던 이구를 만나려는 것.58년 7살 연하 황세손과 결혼해 신혼단꿈에 젖은 것도 잠시,이국인을 못마땅하게 여긴 종친회에 의해 82년 이혼당한 뒤 쫓겨나다시피 하와이로 돌아와 말년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하와이에서 한인 양로원이나 남편이 지은 이스트웨스트센터 방문 등으로 그리움을 달래던 줄리아가 모처럼 작심하고 돌아온 한국은 그러나 마냥 따뜻하지 않다.줄리아는 이미 이곳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져버린 인물이었으며 종친회의 냉대속에 남편과의 재회에도 실패한다.몰락해간 왕조를 증언해줄 450점의 사진,왕가 문장과 유물 등을덕수궁 박물관에 기증하고 시아버지였던 영친왕의 묘소를 찾는 것이고작,한달만에 하와이로 돌아가고 만다. 이 프로는 줄리아의 이같은 방문길을 내내 동행하면서 역사의 희생자인 한 여인의 입을 빌어 당시를 증언한다.황세손이었음에도 결혼패물 하나 해줄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던 왕가,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원치않던 결혼을 당해야 했던 영친왕의 비극적 스토리,왕가 여인들의거처인 낙선재에서 쓸쓸하게 사라져간 윤비,이방자여사,덕혜옹주 등에 대한 회상 등. 3년전 제작진이 최초 접촉했을 때만 해도 고운 모습이 사라진 것을보이기 싫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던 줄리아는 풍을 맞은 뒤 한층 초라해졌지만 이번에는 카메라 앞에 나섰다.스스로 사연많은 개인사에 대한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을까. 제작을 담당한 이종현 PD는 “한국 근현대사는 가치관에 혼란을 줄만큼 격변을 거듭해왔음에도 우리는 서글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은근슬쩍 지워버리고 넘어온 게 부지기수다.줄리아를 통해 이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 [대한시론] 광해군을 위한 변명

    젊었을 적에 센케비치의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서 네로(Nero) 황제의 비인도적인 정사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그러나 훗날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아 봤더니 네로가 로마 시를 불태우면서 시를 읊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고,따라서 그는 그의 학정을 침소봉대하기 위해 역사학자들이 곡필한 희생양이었다는 것을알고서는 더욱 황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역사 곡필이 어디 네로뿐이었겠으며 어찌 고대의로마뿐이었겠는가.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많은 원혼(怨魂)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했다가 역신으로 몰려 김부식(金富軾)의손에 죽은 묘청(妙淸),세종대왕의 옥체를 걱정한 것이 오히려 한글창제를 반대했다는 누명으로 바뀐 최만리(崔萬理),이순신(李舜臣) 현창사업의 희생양이었던 원균(元均),문중 사학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죄인처럼 기록된 김성일(金誠一)….이들은 아마 저 세상에서 눈을감지 못하고 아직도 원혼이 구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학을 공부하는나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역사의희생양은 광해군이다.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슬픔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는 늘 고독하고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그러다가 젊은 나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에서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는 백성을 어루만지며 왜병을 물리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어린 나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체험했고,국력이 약한 나라의 백성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뼈저리게 느꼈다.서자의 몸으로 온갖 우여곡절과 음해를 겪은 후 왕이 되었을 때그는 꿈도 많고 야망도 있는 젊은이였다. 그의 첫번째 꿈은 왜란으로황폐화된 조국의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국고는 바닥이 났으며생산성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경작지를 개간하여 국가의 재원을 확충하고,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대동법(大同法)을 실시케 하여 민생의 안녕을 도모했으며,허준(許浚)으로 하여금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쓰게 하여 질병에 허덕이는 백성을구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왜란으로 인해불타 없어진 많은 서적을 복간(復刊)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아‘신증동국여지승람’이며 ‘용비어천가’가 모두 이때 되살아났다. 위와 같은 공적 이외에 정치가로서 광해군의 제일의 업적은 외교였다.그는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하는 그 미묘한 시기에 국경을 튼튼히 함은 물론 탁월한 외교술로써 국가 안보를 튼튼히 했으며,일본과의 조약(己酉條約·1609)을 체결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3각관계에서굳건한 입지를 구축했다.그런 그가 퇴위하자 곧 병자호란이 일어났다.광해군을 아무리 비하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외환이 없었으며,그 시대의 국방과 외교가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튼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시대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그는 외치에 몰두하면서 점차 내치를 소홀히 했다.그것이 그만의 실수는 아니며 당시의 정파 싸움 때문이었다고 변명할수도 있다.소북파는 사사건건 정사의 발목을 잡았고,그를 둘러싸고있던 대북파에는 “그게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충신이 없었고,모두가 자신의 보신과 영달에만 눈이 멀어 광해군을 혼군(昏君)으로 몰아갔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 불효한 것도 사실이고, 이복동생인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어디 그 사람만의책임이며,조선왕조에서 형제를 죽인 왕이 어디 그 사람뿐이었겠는가. 그게 잘한 일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부덕했던 사람도 그처럼 혹평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이 야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즉,정치란 우선 안을 다스리고 밖을 보아야 한다.가정이고,조직이고,나라고 따질 것없이 안이 화목하지 않고 행복한 법이 없다.관자(管子)의 말처럼 안에서 의식(衣食)이 풍족해야 밖에 나가 예절을아는 법이다.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는 왜 광해군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이토록 더해지는 걸까. 신복룡 건국대대학원장·정치학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3)의열단 자취 남은 南京·廣州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강소성 성도 남경에 내렸다.중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이라 부른다더니 아침부터 사우나실처럼 후꾼후꾼했다.양자강이 가까워 고온다습하기 때문이었다.남경은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강남의 중심 구실을 했고 삼국시대에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이래 10개의 왕조가 왕도로 삼은 곳이다.근대에 와서도 태평천국의봉기군이 청나라 정규군과 서구열강에 대항해 싸울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았다.중일전쟁때도 임시수도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양민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시절,우리 선열들의 항일운동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남경대학.그곳에 항일전쟁사의 걸출한 인물 여운형(呂運亨)과 김원봉(金元鳳)이 다닌 금릉(金陵)대학 캠퍼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조국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무력항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금릉대학을 중퇴하고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그러나 그곳의 교육은 중국 명문대학을 다닌 그를충족시키지 못했다.그는 길림으로 가서 저 유명한 암살 폭파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만들고 수많은 테러공작을 감행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1세였다. 30대 장년이 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테러공작을 지양하고 군대조직을 계획했다.뒷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였다.그는 스스로 광동성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이 학교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뒷날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와 진광화,그리고 민족시인 이육사이다.김원봉의그런 활동은 거의 남경에서 이루어졌다.황포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중국의 첩보기관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대표였던 등걸(騰傑)이 그를 도왔다. 남경대학은 우리 대학들과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넓고 녹지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플라타너스·팽나무가 지천이었다.시 인민정부가 발행한 백서를 보면 가로수가 40만 그루라던가.금릉대학 캠퍼스는 예스러운 품격을 지닌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푹신한 네모꼴의 잔디밭을 두고 3동의 건물이 둘러앉아 있었다.그 앞쪽에 뚝 떨어져서 대례당(大禮堂)이란 간판이 붙은 회당 건물이 있었다.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곳이 이 대학의 강당이라 했으니 이것이 틀림없을 듯싶은데 전면이 일부 개축되어 있다. 남경대학을 나온 취재팀은 얼음이 섞인 생수병을 들이키며 의열단원들이 묵었던 명양가(鳴羊街)와 화로강(花露崗)을 찾아나섰다.한상도교수의 논문 ‘재중한인군관학교연구’를 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20일 남경교외 탕산(湯山)의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원에서 개교했고,교관들은 남경성내 명양가 호가화원(胡家花園)에서 묵었다.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명양가와 화로강은 이어진 골목이었다.김원봉에게 호의적이었던 부호 호대해(胡大海)는 자신의 장원 호가화원에 김원봉을 식객으로 묵게 했고,김원봉은 자신의 의열단 동지들을위해 근처 화로강에 머물게 하면서 혁명간부학교 교관들의 숙소도 마련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컸을 듯한 호가화원은 퇴락된 채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그 옛날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음직한연못가의 팽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문득 ‘지절시인’ 이육사가 떠올랐다.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 명단 26명 가운데 육사(陸史)라는 가명으로 실려있다.그가 이 연못에서 올곧은 의지로 시를 썼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연못가에서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한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해오라기 한 마리가 긴 부리로우렁이를 찍어올리고 있었다. 남경에는 백범 김구가 만든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도 와 있었다.‘김구구락부’로 더 알려진 테러공격 비밀결사였는데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安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호가화원의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이 목장영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일러주기에 찾아갔으나 새 아파트단지 입구에 붙은 ‘목장영’이라는 간판을 본 것만으로만족해야 했다. 취재팀은 저녁 비행기로 광동성 광주로 날아갔다.우리 항일투쟁사에 큰 몫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광주 백운(白雲)공항에서택시를타고 달리는 동안 필자는 중국의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네온사인이 현란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깨끗한 중형차들이 질서있게 차선을 지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세련되어 보였다.건물의 외형까지도 첨단화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하기야 북경,상해에 이어 중국 3대도시이며 1인 평균 생산액이 전국 1위인데다 백년전부터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고 홍콩과 가깝다보니 그럴 것이었다. 광주는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손문이 혁명을일으켜 ‘호법(護法)정부’를 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광주봉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정복자’이다.우리의 항일투사들도 이곳에 와서 크고 작은 자취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포군관학교(본래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이다.수많은 우리 항일투사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손문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한 결과탄생했다.국민당측의 장개석이 교장을,공산당 측의 주은래가 정치주임을 맡았는데 그로 인해 학생들도 양분되었고 그곳에 재학중이던 한인청년들도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갈라서는 결과가 되었다.그들의 입학은 1924년의 3기생들로 부터 시작되는데 유명한 이는 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김원봉 등이다.그밖에 남경과 무한에 있던 분교를 졸업한 이도 많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 교관요원들도 있었다.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러시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양림(楊林.본명 金勳),1922년 의열단원으로 상해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던 오성륜(吳聲輪),뒷날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庸健),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한 박효삼,이빈(李彬),양달부(梁達夫),김원봉,채원개(蔡元凱)등이다.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도 교관이었다고 하나 연구가들의 실증은 없다. 취재팀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군관학교를 찾아갔다.광주시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珠江)의 제방을 따라 보리수가 싱그럽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대절한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20분쯤 걸려 도시의 동남쪽에 있는 장주도(長州島)로 건너갔다.섬 거의 전체가 해군부대 주둔지였는데 황포군관학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보존,복원되어 있었다.우리나라의 중고생들이 극기훈련,야영훈련을 가듯 남녀 학생들이 입영훈련을 받고 있다.김원봉이 생도시절 중국인 생도 등걸과 우정을 쌓으며 토론을 한 곳은 어디일까.필자는 그런 상상을 하며 강의실,생도 숙사,강당,연병장 등을 돌아보았다.발길을 돌려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김성숙(金星淑)과 김산이 졸업한 중산대학은 필자가 돌아본 십여개의 전통있는 중국의 대학들 가운데 건축미가 가장 돋보였다.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인데 깨끗하게 보존되어고상하면서도 웅장한 품격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중국 광동성)■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경복궁 주차장 어찌하오리까”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경복궁 안에는 ‘궁궐 제모습 찾기’와는거리가 먼 세 개의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그리고 중앙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주차장이다. 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2009년까지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계획이다.중앙박물관은 2003년 용산에 새 건물이 세워지면 조선왕조역사박물관으로 용도가 바뀐다.왕조역사박물관도 경복궁 완전 복원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왔다. 그러나 주차장만은 2009년 마무리될 경복궁 1단계 복원계획에 언급이없는 것은 물론 후속 복원에 따른 검토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앞으로도 조선왕조 정궁의 역사성을 대책없이 훼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경복궁 박물관이 새삼스럽게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극심한 교통난때문이다. 최근 경복궁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삼청동길은 주말은 물론평일에도 관람객들이 타고 오는 차량들로 극심한 정체가 빚어진다. 교통경찰관들도 삼청동에서 동십자각으로 이어지는 편도 2차로의 1개차로는 아예 관광버스와 승합차들에게 내어주고 주차를 묵인한다.이렇다 보니 경복궁이나 두 박물관을 찾는 내외국 관광객들은 물론 삼청동길을 통행하는 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1,931평 넓이의 경복궁 주차장이 문을 연 것은 지난 85년.지상에 버스 48대와 승용차 31대,지하 1·2층에 각각 승용차 110대와 88대를수용할 수 있다.적지않은 규모지만,수요에는 크게 못미친다.서울시민들에게는 대중교통을 이용토록 유도한다지만 수학여행 온 학생들,나아가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까지 진입이 어려운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그럼에도 주차난은 앞으로 심해지면,심해졌지 저절로 풀려가는 일은결코 없을 것이다.지금도 교통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경복궁 2단계 복원계획을 세우며 주차장을 아예 없애는 결정을 내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왕궁안의 주차장’을당연시 여긴다면 모를까,경복궁을 복원할 계획이라면 늦었지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문화관광부를 중심으로 ‘경복궁 안’을 책임지고 있는 문화재청 뿐 아니라 ‘경복궁 밖’을 관리하는 서울시등 관계기관이 함께 모여 주차장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리더여, 원칙과 중용의 덕을 갖춰라”

    최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최고경영자(CEO)는 예수’라는 내용의 책이 화제가 된 가운데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위기관리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지혜 경영을 강조하는 책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패튼리더십’의 저자로 잘 알려진 앨런 액슬로드가 쓴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남경태 옮김,위즈덤하우스 펴냄).뉴욕타임스가 지난 1,000년간 최고지도자로 선정한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실용적’ 국가경영으로부터 뽑아낸 136가지의 교훈이 실렸다. 화폐가치의 하락,극심한 인플레이션,종교분쟁으로 인한 내분,대국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위협….16세기 초반의 영국은 누가 봐도 파산직전에 놓인 유럽의 후진국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위기상황 속에서 로마 이후 최대의 세계제국이 탄생했다.그것을 가능케 한 인물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였다.저자는 반역죄로 몰려 어머니 앤 볼린처럼 런던탑에서 처형될 위기에 처해있던 시절부터 1558년 튜더왕조 5대왕에 올라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번영을 이루기까지의 엘리자베스 1세의 시련과 영광을 리더십 항목별로 묶어 정리했다. ‘급진적인 변화를 조심하라’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에 오르면서 자기 자신이 신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교도를 핍박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은 메리 1세의 체제와 당장 결별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메리 1세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을 빼고는유능한 신하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하지 않으면 남들이 대신 만들어준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왕이 또 다시 여자인 것에 경악을금치 못했다.이들을 사로잡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성모 마리아를연상케 하는 ‘처녀여왕(Virgin Queen)’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종교개혁 이후 성모 마리아는 예배의 중요 대상에서 빠졌고,여전히 구교 예배절차에 익숙하던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다. ‘규칙을 변경하거나 철폐할 때를 알아라’ 엘리자베스 1세는 해적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함께 계속되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위협에맞서 영국이 갖고 있는 조건을 최대한 활용,레버리지 원리를 이용한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했다.즉 전면전을 피하고 사략질로 적의 공급로를 무력화시킨 것이다.이것은 당시의 정세를 명철하게 판단한 독창적인 발상으로 평가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무엇보다 원칙을 중시하고 중용을 꾀했던 계몽군주였다.동시에 때로는 거짓약속 등 술수에도 능했던 마키아벨리형 군주이기도 했다.어쨌든 여성이 공직에 오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국왕이 돼 쓰러져가는 나라를 대제국으로 일으켜 세운 점은 영원히 기억될 만하다.특히 광속의 변화 속에서 나날의 위기를 경영해야하는 현대의 리더들에게 엘리자베스 1세가 던지는 교훈은 각별한 데가 있다. 김종면기자 jmkim@
  • 오늘 단기 4333년 개천절 되짚어 본 단군

    ‘단군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신화의 우상인가 아니면 역사적 실체인가’최근 언론사 사장단과 문화계 인사 등 남측 인사들의 잇따른 북한 단군릉 방문을 계기로 강단 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의 논쟁이 다시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또 단군학회는 2일 단기4333년 개천절을 앞두고 단군을 중심으로 한 상고사 관련 교과서 개정을 위한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어 학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가열되는 단군논쟁은 지금까지와는 색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단군이 신화적 존재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실체를 규명해야 하며 그것이 민족구심을 위한 사상정립의 대안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요체다. 우선 실체 규명의 차원에서 일고있는 단군실재론 재조명론은 주류학계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한다.현행 초·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반영되고 있는 주류 학계의 고조선 건국과 단군조선의 기원,강역에 대한 기술이 수정돼야 한다는 주장이다.이들은 ▲초·중학교 교과서가단군의 건국과 관련 “곰이 웅녀가 돼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화된 내용만을 싣고 있고 고교 교과서에선 ▲고조선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규정하며 ▲한반도의 청동기를 기원전 10세기로 보면서 단군 건국은 기원전 24세기(2333년)로 적고 있음은 모순이라고 말한다.기원전 2500년경의 역사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고고학적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는데도 이같은 기술이 나오고있는 것은 주류 학계가 일제의 황국사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재야학자들 사이에선 단군조선의 세력범위에 대해서도 만주·한반도 일대에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있다. 이같은 논의는 최근 북한의 접근방식과 맞물려 더욱 확산되고 있다. 북한의 학계는 단군이 민족의 시조임을 부정했으나 단군릉에서 5,011년 전의 단군유골이 출토됐다며 93년 단군릉발굴보고를 내고,94년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재건,공개했다.이후 관련유적과 기념물을 정비하면서 매년 전 학계를 동원해 단군과 상고사 학술회의를 개최해오고있다. 남측 학계는 이에대해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시각이주류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남북간 관련정보를 공유하고 양측 주장을 검증할 공동연구의 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지않게 제기되고있다. 또다른 논의는 단군의 역사적 실체를 재해석,민족통일과 세계의 미래에 기여할 보편적인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단군은 학파와 종교를 초월해 공유할 수 있는 민족 정체의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같은 단군의 실체규명에 대한 논의는 더욱번져나갈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최근 논의가 ▲학문으로의 기본요건에 충실해야하고 ▲단군의 모습을 시대과제에 맞게 재해석,민족성원들을 실천의장으로까지 이끌어내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동력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즉 민족에 대한 애정은 덕목이 될 수있지만 그 애정이 과학적 엄격성을 약화시키는 명분이 돼선 안된다는것이다. 한말·일제기의 단군은 저항민족주의의 요구에 부응했지만지금은 다르다는 지적이다. 현재 단군에 대한 인식은 혼란 그 자체다.강단 학자들 간 뿐만 아니라 ‘강단학계’와 ‘재야학계’,그리고 국민들의 편차가 너무 크다. 실제로 최근 월간 ‘뉴휴먼丹’이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54%가 단군을 역사속의 실존인물,34%가 신화속의 인물이라고 답했다.종교별로도 개신교신자는 32%만이 실존인물이라고 한 반면 비개신교 신자는 50∼68%가 실존인물로 보고있는 것으로 나타나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영훈 교수(정치학)는 “지금의 단군연구는 전체적으로 만연한 혼란상 정리를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며 “학계는 엄격한 사료를 근거로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문을 여는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연찬의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교과서에 나타난 단군. “1970년대 시험문제를 1990년대 교과서 내용에 근거해 채점한다면정답이 바뀌거나 문제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도 적지않다.지난 20∼30년 동안 국사교과서의 무책임성을 교정하지 않고 되풀이 한다면 언젠가는 이 문제로 소송이 벌어지는 사태도 올 것이다” ‘한국 상고사의 쟁점-국사교과서 개편방향과관련하여’를 주제로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천절 기념 학술토론회에서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주제발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우리나라는 국사교과서를 1974년부터 국정으로 편찬하고 있다.정교수의 지적은 그동안 우리 국사교과서가 다루어 온 상고사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문제점은 고조선 및 단군에 대한 기술에서도적지않게 나타난다. 인문계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고조선의 중심지를 놓고 74년판은“고조선의 옛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면서 지도에 낙랑을 평양지역에 표기함으로써 중심지가 평양지역임을 나타냈고,이런 서술은 82년판까지 이어졌다.90년판부터 “고조선은 랴오닝(遼寧)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군장사회들을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발전하였다”고 하여 중심지가 이동해왔음을 밝혔다.96년판부터는 “초기에는 요령지방에 중심을 두었으나,후에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을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고 이를 분명히했다. 단군이 고조선의 건국자인가 하는문제를 놓고도 미묘한 차이가있다.74년판은 그저 단군신화가 존재했고 단군신화가 고조선사회를이끌어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했다고만 언급했다.그러나 82년판에 단군왕검은 제정일치 시대의 족장이었다고 적음으로써 고조선의 건국자가 단군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연대를 소개했다는 것은 상당한 진전으로 평가되지만,단군왕검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해석함으로써,고조선의 건국시조로 분명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이같은 서술경향은 90년판과 96년판에도 이어지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북한 단군릉 답사기. 98년 11월 첫 방북취재 중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위치한 단군릉을 방문했다.북에 오기 전에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능입구에 도착한 순간 그 규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눈부신흰색 화강암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그 정상에는 피라미드를연상시키는 단군릉이 우뚝 솟아 있었다.그런데 능 입구에 모서리 일부가 떨어져 나간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높이는 2m 정도.1936년에 세워진 ‘단군릉 기적비(紀蹟碑)'였다.비석에는 수많은 한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일제가 이 곳에 위치한 단군릉을 파괴하자 이에 분노한 뜻있는 조선인 인사들이 단군릉 수축기성회(修築期成會)를 조직,단군릉을 보존 관리하기 위한 기금을 모았는데 성금을 기부한사람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 있었다.기자는다시 한번 놀랐다.그러면 일제하에서도 이 곳에 단군릉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는 말인가.해설 강사는 일제하 뿐만이 아니라고 했다.조선시대에 간행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숙종·영조·정조 조에 강동의 단군묘를 수리,관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이다.또한 단군릉 주변의 지명도 대박산(밝은 산),단군호,단군동,아달동 등 단군과 관계있는 것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북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평양 단군릉의 실재 여부를 두고 논쟁이 많았는데 김일성 주석이 단군릉으로 알려진 강동군의 작은 무덤을 실제로 발굴해 진위를 과학적으로 밝히라는 교시를 내렸다. 역사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한 결과 사람의 뼈가 나왔는데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었다.유럽의 전문 연구기관에 의뢰해서 전자스핀공명법으로 뼈의 연대를 추정한 결과 5011년전(오차 267년)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와 이 뼈를 단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화강암 계단을 올랐다.계단은 무려 279개.돌계단 중간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대문처럼 세워져 있었고 양쪽 끝으로는 단군의 네 아들과 여덟명의 신하상이 능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모두 눈부신 흰색 화강암들이었다.279개의 계단을 다오르자 한 변이 50m, 높이 22m,9층 계단식 무덤인 단군릉이 위용을드러냈다.1994년에 준공되었음을 기념해서 모두 1,994개의 화강암 돌로 짜맞추었다고 했다.이처럼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 건축하는 것은북의 건축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단군릉의 모양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퉁거우의 장군총을 본뜬것이라 했다.무덤의 네 모서리에는 코끼리 만한 돌호랑이상이 세워져있었고, 그 앞에는 높이7m의 비파형 동검이 서 있었다.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다.능 뒤쪽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었다.안으로 들어가보니 이곳에서 발굴된 86개의 단군과 그아내의 뼈가 나무관 내부의 밀폐된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빛과 습기·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유골은 참관시키지 않는다고했다. 평양 단군릉에 대해서는 실재성에 대한 근거도 있고,또 그에 대한반론도 있다.이 문제는 앞으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합동연구로 밝혀내면 될 일이다.또한 북이 ‘민족의 시조' 단군릉을 그처럼 거대하게개건한 것은 ‘평양'이 아니라 ‘민족'을 내세우기 위함이라고 보는 편이 보다 합리적인 시각일 것이다. 평양 신준영기자 junyoung@
  • 신간 맛보기

    ■청사(淸史)(임계순 지음,신서원 펴냄)는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이란부제와 함께 1616년부터 약 300년간 만주족의 흥기부터 멸망까지를저술한 단대사.한양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750여쪽에 걸쳐 청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및 대외관계 변천을 세밀히 정리·분석하고 있다. 중국 25왕조중 마지막 왕조로서 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소수민족에 의해 건립된 청조가 다수 한족을 268년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시스템설명이 관심을 끈다. 50여개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19세기 중반이후의 몰락 등을 꼼꼼히 살피고 있으며 청대에 관한 중국과 일본의 자료와 함께 서양에서출판된 많은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3만2,000원■국제금융·외환정책론(이재웅 지음,다사랑 펴냄)은 대학이나 대학원에 재학중인 학생이 일차적 독자인 전문서적이지만 학생이 아닌 경영·무역 실무종사자와 일반인들도 관련 부문의 최근 흐름을 익히기위해 읽을만 할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다. 환율 및 외환정책을 귀납적인 방법으로 일본, IMF위기의 동남아 및한국을 예를 삼아 분석한다.은감원 부원장보와 고려증권 부사장,고려종합경제연구소장을 거쳐 서강대 초빙교수로 있는 저자의 14편 논문을 싣고 있는데 국내외 금융정책,외환정책, 국제 재무전략과 기업 지배구조 분야순으로 정리했다.2만2,000원■논어의 문법적 이해(류종목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논어’에는노(魯)논어와 제(齊)논어,고(古)논어의 세 가지가 있다. 노논어는 지금의 ‘논어’와 마찬가지로 20편이고,제논어는 22편,고논어는 21편이었다고 전한다. 이 책은 ‘학이(學而)’에서 ‘요왈(堯曰)’에 이르는 20편의 내용을 문법적으로 분석,설명한 교양서다.사서오경을 읽을 때 번역문에만의존하거나 원문의 몇몇 중요한 어휘들을 통해 문장의 대의를 파악하는 데 그치는 한글세대들도 이해하기 쉽게 문장의 얼개를 밝혔다. 아울러 ‘논어’가 철저한 인간중심의 성경임을 일러주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2만5,000원■투덜이의 영화세상(이대현 지음,다할미디어 펴냄) 열에 아홉은 ‘영화마니아’를 자처하는 세상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재직중인 이대현씨는 평면적 평론 대신영화담당기자로서 현장감 넘치는 영화가의 크고작은 이슈들을 글로정리했다. ‘우리 영화,우리 감독’ ‘시네마 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시네마천국은 없다’ ‘이대현의 스크린파일’ 등 책은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최근 한국영화의 작품성과 제작경향, 주요 영화인들의 현주소 등을두루 짚어보기에 좋은 책이다.9,800원
  • “송시열의 꿈은 사대부만의 국가”

    “송시열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黨益)을 지키는 데목숨을 걸었다.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다.그러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하다” 역사평론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한국사의 최대금기’로 꼽히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신화 벗기기에 나섰다. 최근 출간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에서 그는 송시열을두고 북벌론자니 소중화론자니 하는 것은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공허한 찬사”일 뿐이라고 혹평한다. 송시열은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신돈이나 정도전,정여립 등을 들기도 하지만 생전에 혹은 죽은 뒤에 송시열에 집중됐던 논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000번 이상 등장한다. 송시열은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숙종 때를 제외하고는 역모가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가 없고 국문(鞠問)도 하지 않을 만큼대신을 우대한 조선에서 그는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사당했다.여기서 죄인들이란 서인,좁혀 말하면 노론에 속한 당인들을 가리키는 말.그러나 송시열은 죽은 뒤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유학자로서 최대의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됐다.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도 누리고 있다.하나의 신화가 된 것이다.저자는 이 ‘조선 최대의 당쟁가’를 한 시대의 파탄을초래한 일개 정치가의 자리로 끌어내린다. 저자의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현행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교과서에서는 송시열을 송준길,이완과 더불어효종을 도와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려 삼전도 치욕을 갚자는 북벌정책의 중추 인물로 그리고 있다.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오도다.이 책은 송시열이 겉으로는 북벌을 외쳤지만 실제로는 북벌에 반대한 인물임을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낱낱이 밝힌다. 송시열이 살았던 당시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됐다.조선의 신분질서로는 더이상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양반의 특권은폐지돼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주자학은 주희가 남송시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그 기능을 다한 학문이었다.저자는 이 주자학을 정치에잘못 적용한 데에 송시열의 비극이 있다고 강조한다. 송시열은 주자학의 의리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 즉 소중화(小中華)사상을 주자학의 조선화로 생각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명분론이라는 것이다.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를 위해서는 사대부 중심의 중세유학을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유학으로 바꾸고,왕가와 사대부가의 예가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天下同禮)가 아니라 사대부가와일반백성이 같다는 의미의 천하동례를 내세워야 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논어’ 위정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송시열에 대한 평을 대신한다.“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김종면기자 jmkim@
  • [발언대] 종묘내 필름판매소 설치한적 없어…

    대한매일 8월30일자에 실린 위동환씨의 ‘종묘필름판매소 음료자판기 꼴불견’ 제하의 독자투고와 관련,잘못된 부분이 있어 올바로 알려드리고자 한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사적 12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으며,지난 95년 12월9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따라서 우리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아끼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재로평가돼 해마다 많은 내·외국인이 찾고 있다. 그러나 투고자가 지적한 조립식 가건물 필름판매소는 종묘에 설치한 적이 없다. 또한 음료자판기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하여 한 때 설치하였으나,사적지의 경관에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어 올해 2월21일 이미 철거하였다.다시 말해 현재 종묘 내에는 음료자판기는 물론,어떠한 판매시설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덧붙여 종묘에서는 문화재 보존관리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화기반입 및 취급,음식물 반입 및 취식,상행위,음악 및 가무,집회 및 시위,드러눕기 등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종묘의 관리담당자로서 종묘에 대한 격려와 성원에 감사드린다.문화재는 관리자의 성실한 관리도 중요하지만,관람객 및 국민 여러분의관심과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이자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보다 더 잘 보존,관리하기 위하여는 종묘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종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무 한 포기,돌 하나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다루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종묘관리소장 우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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