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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에게/ “문화재의 제한공개는 불가피”

    -마당 ‘비원 유감’(대한매일 11월26일자 15면)을 읽고 황주리님이 언급한 창덕궁의 제한공개와 관련,지적한 사항에 대하여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취지와 배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중요한 문화재가 많이 있으며,조선 왕조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아름다운 후원은 원림과 정자 연못 괴석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적인 명원(名苑)이다. 창덕궁은 이러한 문화재적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창덕궁은 1960년부터 1976년까지 자유관람을 실시했지만,문화재와 원림이 훼손되어,1976년부터 1979년까지 일반공개를 중지하고 복원공사를 마친 뒤 현재와 같이 제한공개하게 된 것이다. 창덕궁은 현재 언어권별로 하루 23회 안내원에 의한 안내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특히 후원은 궁궐의 제한된 인원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으로 많은 사람을 수용하면 생태 환경이 급격히 파괴될 것이다.참고로 일본의 계리궁(桂離宮) 등 외국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은 시간 지역 인원 등에 대해 제한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현재의 관람제도가 야기하는 관람객의 불편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고자 관람제도의 개선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음을 밝힌다. 김치기 문화재청 궁원문화재과장
  • 기고/ ‘서울의 신화’ 살릴 국제축제를

    축제란 문화라고 하는 기름이 활활 타고 있는 현장이다.부족국가 시절에는 부족국가 단위별로 무천(舞天),영고(迎鼓),동맹(東盟) 등의 축제가 있었다.삼국시대와 고려시대,조선시대에도 변이된 양상을 띠면서 그 맥이 유지돼 왔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왕조의 터전인 서울에도 축제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고 어느 산,어느 신을 주인공으로 했을까? 적어도 고려시대의 팔관회까지 민족신을 중심으로 한 축제판이 벌어졌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이태조도 민족신화의 뿌리를 잃지 않고,서울의 안산(案山)이요 주작(朱雀)에 해당하는 남산 정상에 국조(國祖) 단군을 위시로 한 여러 신을 모신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지어 국태민안을 빌고 산 이름까지 목멱산이라 명명했다.조선조 중기까지 국가에서 봄,가을로 초제(醮祭)를 지냈고 큰 신을 모셨기에 국사당제(國師堂祭)라 일러왔다. 서울 남쪽에는 목멱신사가 있고,북쪽에 백악산신사(白岳山神祠)가 있어 좌우대칭의 신화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남쪽의 남산은 남신(男神)이요 북쪽의 백악산(일명 북악산)은 여신(女神)으로 부부의 관계이니,태백산이 남신이고 함백산이 여신인 강원도 태백시의 신화적 구조와 일치한다. 조선조 초기와는 달리 중기로 접어들면서 유학에 젖은 이들은 민족신의 위상마저 부정하고 있었으니,‘백악산 정녀부인신과 남산 국토신 신화’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조선중기 문인 권필(權·1569∼1612)은 어렸을 때 북악 꼭대기에 올라가 놀다가 “도대체 조그마한 산신이 무엇이기에 이 대명천지에 뭇사람들이 우러러 믿는단 말인가.”라며 객기가 들었는지 신사 안의 정녀부인 신위 화상족자를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만다.뭇사람들이 줄지어 찾아와 굽실거리는 모양이 기이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해서 그렇게 한 짓인데 그날 밤 꿈에 흰 저고리에 청색치마를 두른 나이 어린 예쁜 처녀가 나타나서 화를 잔뜩 낸 채 나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딸로 하느님 지시에 따라 일하는 국토란 남자신에게 시집온 정녀부인이다.하느님께서 고려의 운세가 다 되어 이씨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국토신으로 하여금 남산에 날아와서 조선을 튼튼히 지키게 하고 나를 각별히 여기 백악으로 내려 보내셔서 남편과 함께 나라를 지키게 하셨다.이제 2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어린 아이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니 원수를 갚겠노라.”하고 사라진다. 꿈결이지만 정녀부인의 화상 그대로라 불안한 느낌이 평생 구석에 남아 자리하였다.오랜 세월이 흐른 후 권필은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한 궁류시(宮柳詩)를 썼는데,그 시화를 입고 함경도로 귀양가게 되었다.그날 저녁 동대문 밖 여관방에서 술 한 잔하고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정녀부인이 나타나서 “이제 나의 원한을 풀게 되었노라.”하며 등을 돌려 사라지니 권필은 그날밤 숨을 거두고 생을 마감하였다. ‘국조오례의’ 길례에 목멱산 제사에 관한 의식과 삼각산과 백악산 제사에 관한 의식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삼각산 신화와 백악산 신화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삼각산 신은 다름아닌 환인(만경봉),환웅(인수봉),단군(만경봉)을 뜻한다.원래 흥왕지지(興王之地)가 되려면 흰돌로 된 산이어야 한다.백두산이 있고 백운대가 있는까닭도 이 때문이다. 원래 서울이란 단어는 삼각산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이들 세 산은 쇠뿔처럼 생겼거니와 ‘좌전’(左傳)에 나와 있듯이 쇠뿔을 잡는다는 것은 천하를 얻는다는 뜻이다.셔블→세블→서울로의 음운이행변화도 이로 말미암는다.나라지킴이로서의 3신의 직계신이 남산신이요 정녀부인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아무튼 서울신화의 원형은 목멱산 신화와 삼각산·백악산 신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필자는 신화 없는 축제는 축제가 아니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서울의 축제는 한국의 축제다.‘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이들 신화를 잘 살린다면 축제의 국제화도 별반 문제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 김선풍 중앙대 교수 민속학
  • [이경형 칼럼] ‘옥쇄정치’는 下手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비리 특검법 거부에 맞서 국회 일정을 전면 중단하고,단식 투쟁에 들어갔다.한나라당 의원들은 26일부터 등원을 거부하고,전국적으로 장외 투쟁에 나섰다. 과거에도 야당 총재나 재야 인사의 단식 투쟁은 심심찮게 있어 왔다.그러나 당시에는 반민주-민주 대결 구도에서 소수 야당이 국회 다수당을 장악한 독재 권력에 항거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치는 처절한 싸움이었다.그래서 국민들도 극한 투쟁을 벌이는 야당의 ‘옥쇄(玉碎)정치’에 소리 없이 공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한나라당이 결행한 국회 보이콧에 이은 단식·장외 투쟁은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물론 국회가 재적 의원 3분의2가 넘는 찬성으로 특검법을 정부에 넘겼는데도 검찰이 수사중이라는 이유로 노 대통령이 이를 거부한 것 자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이유가 옹색하다는 점은 인정된다. 한나라당은 국회 의석(272명)의 절반을 훨씬 넘는 149석을 가진 그야말로 거대 야당이다.한나라당이 하기에 따라서는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시시콜콜히 견제할 수 있고,필요하면 입법 권능을 통해 정부의 정책 집행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다. 다른 야당은 특검법의 재의결 추진을 찬성한다는 의사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재의 자체를 거부하고,의원직 사퇴서를 일괄 작성하여 당 지도부에 제출하는 등 극한 투쟁을 펴는 것은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재의결을 추진할 경우 다시 재적 3분의2 찬성을 이끌어 낼 자신이 없다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한나라당이 새해 예산안 처리,이라크 추가 파병,카드사 위기,부안 사태 등 산적한 국정 현안을 내팽개치고 장외 투쟁을 벌이는 것은 결국 그들 스스로에게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원내 과반수 제1당의 정치적 행태가 겨우 민생을 볼모로 하는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해서야 누가 공감을 하겠는가. 설령 최 대표의 주장대로 노 대통령이 “가장 도덕적인 것처럼 포장을 해왔지만 모두 거짓이었고,추악한 본색이 드러날까봐 특검을 거부했다.”고 치더라도 ‘단식 투쟁’으로 풀 일은 아니다.지난번과 같이 다른 야당 의원들을설득하여 3분의2 찬성을 얻어 특검법을 재의결하는 노력을 폈어야 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의 하나는 문제를 푸는 방법이 너무나 극단적이라는 것이다.노동 현장의 분신 자살,위도 방폐장 건설 대결,농업 개방 등 자유무역협정 체결 문제 등에서 보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거나 견해가 확연하게 다를 때는 우선 힘으로 본때를 보여야 돌파구가 생긴다는 것이다.이 같은 ‘미신’이 지금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한나라당이 펴고 있는 등원 거부,단식 등 극한 투쟁은 시청 앞 노동자 시위 때,쇠파이프·화염병이 진압봉과 어지럽게 교차하는 잘못된 시위 문화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차라리 옥쇄는 할지언정 굴복은 하지 않는다는 과거 왕조시대의 선비정신을 이런 식으로 계승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적대감,높은 자와 낮은 자의 불신,권력자와 백성간의 괴리 등 모든 분열적인 요소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전부가 아니면 전무(全無)’의 극한 정치 문화와도 무관치 않다. 흔히 정치를 대화의 산물,협상의 결과물이라고 하는데도 우리 정치 현실이 힘의 대결,기(氣)싸움처럼 변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단식,장외 투쟁과 같은 ‘쇼크 정치’는 단기적으로 대단히 효과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정치를 더욱 황폐화시킬 뿐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하루빨리 대화 채널을 가동하여,국민을 더이상 짜증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제작 이사 khlee@
  • 다시 태어난 경복궁 민족의 정기 세우다

    조선왕조의 임금이 직무를 보던 정전(正殿)이자 경복궁의 상징인 근정전(勤政殿·국보 제233호)이 3년 10개월간의 긴 보수 끝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재청(청장 노태섭)은 14일 오후 고건 국무총리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등 정부 및 문화예술계 인사들, 시민등 3만 8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1월부터 총 72억원을 들여 보수공사를 진행해온 근정전의 준공식을 개최했다. 경복궁 근정전은 국가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1395년(태조 4년)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867년(고종4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궁궐 건축물.대원군이 중건한 이후 130여년간 개·보수 없이 유지돼오다 지난 90년부터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추진 중인 경복궁 복원사업의 하나로 보수를 해 이날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복원된 근정전은 기존 건축물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낸다는 원칙에 따라 원래 사용됐던 목재 그대로 국내 육송을 썼고 단청도 기존 문양을 모사해 원형을 그대로 재현했으며,시멘트로덮여 있던 바닥의 시멘트를 모두 제거하고 옛날 바닥재인 전돌을 다시 깔았다.그러나 건물을 지탱하는 4개의 기둥인 고주(高柱)만 국내에서 높이 11.5m,지름 67㎝의 육송을 구하지 못해 미국산을 사용했다. 문화재청은 당초 이 근정전의 보수공사를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공동개최에 맞춰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훼손과 부식상태가 심해 준공일자를 늦췄다.새로 단장한 근정전에서는 당시 왕의 집무 모습이 재현되며 조선 후기 정조 때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렸던 대조회 의식을 그림으로 기록한 ‘정아조회지도(正衙朝會之圖)’의 모습도 재현돼 상시전시될 예정이다. 한편 문화재청이 오는 2009년까지 총 1789억원을 투입해 20년 계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경복궁 복원사업은 이날 근정전 복원 완료로 50%의 공정을 마쳤다.현재 어진 봉안과 제사를 지내던 태원전 권역의 4단계 공사에 들어가 있으며 마지막 단계인 광화문과 기타 권역공사를 남겨놓고 있다. 글 서동철기자 dcsuh@ 사진 손원천·안주영기자 angler@
  • [마당] 지도자의 눈물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상륙한 태풍 ‘매미’가 엄청난 피해를 주던 날 노무현 대통령은 뮤지컬 관람을 했다.대통령의 행위에 대한 찬반 토론이 벌어졌고,일부 비판 여론 속에서 청와대는 “국민들께 송구스럽다.”고 유감을 표명했다.대통령도 한 인간이며 대통령직도 직업의 하나인데 일할 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쉴 시간에 쉰다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이러한 인식이 자리잡은 상황에서 대통령이란 직업을 생각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은 현대적이며 기능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문제는 다수의 국민들이 전근대적이게도 직업적 대통령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국정에 무한책임을 지는 총체적이며 초인적인 대통령을 원한다는 데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가끔 임금이 육선(肉饍:고기 반찬)을 들지 않아,신하들이 고기 반찬 드시라고 애원하는 대목이 나온다.임금이 육선을 들지 않는 이유는 궁중의 흉사 또는 가뭄과 같은 국가적 재해가 있을 때이다.“하루는 왕이 영조와 함께 앉아 있었다.강관(講官)이 삼남(三南)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말하였는데,왕이 이 말을 듣고 이날 저녁 반찬에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다.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왕이 대답하기를,‘때마침 굶주리는 백성들이 생각나 측은한 생각이 들어 차마 젓가락이 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순조편) 여기서 왕은 정조이다.이 기록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노여움으로 죽은 마당에 어떻게든 할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들어야 했고,따라서 애민정신을 가장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근본적으로 정조의 행위는 조선시대 제왕의 애민정신에서 비롯한다고 할 것이다.임금이 솔선수범하고 근신하여 국가적 위기를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최근 출판된 ‘CEO 히틀러와 처칠,리더십의 비밀’이란 책을 보면,1940년 9월 독일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런던 외곽의 이스트 엔드를 처칠은 신속하게 방문한다.그곳에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상처받은 시민들을 위로한다.이때 처칠의 눈물은 패배자의 눈물이 아니라 지도자의 국민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눈물이었고,그 눈물은 영국인들의 대독 항전의지를 결속시켜 결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다수의 유권자들은 선거운동 기간에 배우 문성근의 찬조 연설 때 눈물을 훔치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고,그 눈물에서 인간 노무현의 역경과 그의 정서적인 측면을 유추했었다.그 눈물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였을 것이다.만약 태풍이 전 국토의 30%를 초토화시키고 지나갔던 직후 대통령이 뮤지컬 관람을 하던 그 시간에,반대로 대통령이 신속히 재해지역을 방문해 피해 주민들의 손을 잡고,그들의 불행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해 따뜻한 눈물을 흘렸더라면,재난 극복에 대한 국민의 의지는 더욱 강건해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었을 때 임금이 고기를 먹는다 해도 그 양이 얼마나 되었겠는가.처칠이 위기 상황에 눈물을 흘렸다 해도 그것은 몇 그램의 수분과 염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국민에게 큰 힘이 된다.한 국가의 지도자는 그 구성원들의 모든 불행에 가슴 아파해야 한다.태풍으로 인한 재난뿐만 아니라,수능 점수가 모자라 자살한 여고생에 대해서도,신용카드 빚으로 인해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서도,생활고로 하루에 평균 두 명이나 자살하는 세태에 대해서도,한국의 대통령은 가슴 아파해야 한다.진심으로 가슴 아프지 않더라도 눈물의 상징을 이해해야 하며,그것을 정치의 기술로 응용해야 한다.프로페셔널의 정치가 보고 싶다. 하 응 백 문학평론가
  • [씨줄날줄] 정치인 의자

    우리 정치에서 정계은퇴는 크게 의미가 없다.부패혐의로 구속되거나 은퇴선언으로 정치일선에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지만,의정단상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는 역전의 전사들이 부지기수다.하긴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기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등장과 퇴장을 거듭해온 과거 3김정치가 그러했고,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미래도 지금은 분명 복귀불능처럼 보이나,아무도 모른다.정치는 살아숨쉬고 민심은 조석변(朝夕變)이다. 조병화 시인은 그의 시 ‘의자’에서 세대교체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세대교체가 정치세계에서는 지난한 일임을 몰랐던 것일까. 권좌는 좀처럼 스스로 내어놓기 어렵다.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조선시대 때도 신하들의 양위 주청(讓位 奏請)은 대역죄에 해당했다.지난주 22년간의 총리직을 마감하고 떠난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전 총리와 엊그제 마지막 간부회의를 주재하고총리직 사임과 정계은퇴를 선언한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의 결단은 그래서 돋보인다.우리 박관용 국회의장도 17대 총선 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해 귀감이 되고 있지만,정치인에게 물러나는 것은 정녕 사약 같은 것은 아닐는지. 그래서 10년 넘게 앉은 자신의 의자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크레티앵 총리의 은퇴선언 세리머니가 가슴에 와닿는다.의자는 원래 권위의 상징물로 이집트 고대 왕조시대의 왕좌에서 기원된 것이다.특히 제18왕조의 투탕카멘의 의자는 동물의 다리모양을 하고 금·은·상아 등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해 왕좌의 원형이 됐다.영화 글레디에이터를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장군이었다가 뒤에 황제에 오른 막시무시의 옥좌는 전체가 상아로 만들어져 유명하다.막시무스는 이 옥좌에서 최후를 맞는다.그러니까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덧칠한 것이다. 18세기 들어 일반화됐지만,의자의 권위는 이처럼 크다.오죽했으면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1971년 트럭 암살기도로 생긴 고관절 장애 때문에 의자를 조금 높였는데,이를 놓고 권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겠는가.국회 의자는 빙빙 돌아가나 고정되어 있어 옮기기가 어렵다.결국 의자가 아니라 앉을 사람을 바꿀 수밖에 없다. 양승현 논설위원
  • 칭기즈칸 통해 읽는 몽골제국 흥망성쇠

    ‘몽골제국이 남긴 최초의 세계사’ 운운하는 상찬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칭기즈칸기’(라시드 앗 딘 지음,김호동 역주,사계절 펴냄)는 서가의 가운뎃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히 가치있는 책이다. 저자는 몽골제국의 구성국가들 가운데 13∼14세기 지금의 이란 일대를 지배한 일 칸 왕국의 재상.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만큼 몽골제국의 역사 전반은 물론이고 중국·인도·아랍·투르크·유럽·유대 등 동시대 주변 민족들의 역사까지 두루 집대성할 수 있었다.사가들이 그의 집사(集史)를 ‘최초의 세계사’라 추켜세우는 건 그래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가 번역한 책은,몽골제국사를 칭기즈 칸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입체적으로 훑는다.칭기즈 칸의 일대기는 물론이고 그의 조상들의 사적,그의 어록이나 유·무형의 유산에 이르기까지 요모조모 규모있게 서술했다. 책의 주된 내용은 제국의 초석을 다진 칭기즈 칸의 일대기.그의 일생을 6개 시기로 나눠 그때그때 주변정황이 어떠했는지를 해설한다.중국,중앙아시아,서아시아,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당시 주변국 왕조의 통치방식이나 주요 사건들을 병렬서술하는 방식이다. 몽골제국 건설과정에 참여한 부족들의 이야기를 담아 지난해 출간된 ‘부족지’(部族志)가 ‘집사’의 1부라면,이번 책은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앗 딘이 당시 왕실의 비기(秘記)로 알려진 ‘금책’(金冊)이란 문건을 저술에 활용했다는 사실 또한 역사서를 한결 풍성하게 만든다. 후속권인 ‘칭기즈 칸의 후계자들’은 내년에 나올 예정이다.3만 2000원. 황수정기자 sjh@
  • 책 / 한자에 도전한 중국

    /오시마 쇼지 지음 /장원철 옮김/산처럼 펴냄 중국 근대문학의 원조로 불리는 작가 루신은 “한자를 폐지하지 않으면 중국은 망한다.”고 했다.그런가하면 마오쩌둥은 1940년 ‘신민주주의론’을 발표하면서 “문자는 반드시 일정한 조건에서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고,말은 민중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마오쩌둥은 그 후에도 한자를 점차 폐지하는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 로마자 사용을 기본으로 하는 표음화운동을 추진했다.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 중국에서는 한자의 자체(字體)를 간략화해 획을 줄인 간체자(簡體字)가 쓰이며,한자를 대신하는 표음문자로 로마자가 통용되고 있다.중국문화의 핵심인 한자는 역사의 부침 속에 어떤 도전을 받아왔으며 또 그 도전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한자는 누가 만들었는가 ‘한자에 도전한 중국’(오시마 쇼지 지음,장원철 옮김,산처럼 펴냄)은 은나라 도읍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견된 이래 3000여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정립돼 온 한자의 면면한 전통을 통사적으로 살핀 인문교양서다.중국어학을 전공한 저자(니쇼가쿠샤대 교수)는 먼저 ‘한자는 누가 만들었는가.’라는 해묵은 문제부터 짚어나간다.한자의 창조와 관련된 이야기로는 새끼줄로 매듭을 지어 의사소통을 하다 일이 점차 복잡해지자 성인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성인설’과 눈이 넷 달린 황제의 사관(史官)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창힐설’ 등을 들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조자(造字)전설에 불과하며 실제로 누가 한자를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한자도 진화 한자는 시대에 따라 여러 진화 단계를 거쳤다.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는 이사의 건의에 따라 나라마다 각양각색이던 한자의 서체를 통일,소전(小篆)이라는 국가 공식서체를 제정했다.그러나 진전(秦篆)이라고도 불린 소전은 곡선의 획이 지나치게 많아 관청에서 사무를 처리하기에 불편했다.때문에 직선을 기본으로 한 보다 실용적인 예서(隸書)가 관리들의 문자로 쓰이게 됐다.국가에서 정한 ‘황제의 문자’인 소전과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간의 문자’인 예서가 나란히 공인된 것이다.갑골문으로부터 130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한자가 비로소 지배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예서는 시대가 바뀌면서 다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데 이 과정에서 한자의 자형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을 겪었다.자획과 편방(偏旁)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온갖 난잡한 자체가 통용됐다.남북조시대의 학자인 안지추는 그의 저서 ‘안씨가훈’에서 당시 ‘한자의 아노미상태’를 소상히 밝힌다.“…북조에서도 쟁란의 영향으로 서풍이 비루해지고 게다가 멋대로 만든 조자(造字)도 횡행해 그 난잡함은 남조보다도 심했다.…경(更)자와 생(生)자를 붙여 소(蘇)자로 쓰고,선(先)자와 인(人)자를 붙여 노(老)자로 썼던 예가 경서나 그 주석서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하다.” 중국 문화의 정점으로 부동의 지위를 누려온 한자는 청조가 멸망을 눈앞에 둔 시점부터 위기를 맞는다.외국문화를 접하고 근대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한자개혁론이 제기된 것이다.한자의 표음화 시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청말에서 중화민국 초에 걸쳐 한자의 표음 신문자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인물로는 단연 왕조가 꼽힌다.그는 일본의 가나를 본떠 한자의 일부분을 채택한 ‘관화자모(官話字母)’란 표음문자를 만들었지만 후원자인 원세개가 실각하면서 전습되지 못했다.한자를 표음화하려는 시도는 한자에 음주(音注)를 달도록 한 ‘주음자모(注音字母)’로 이어졌으나 이 또한 타이완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문화혁명 이후 한자개혁론은 에스페란토화운동,라틴화 신문자(로마자화)운동 등 한층 급진적인 양상을 띠었다. ●구시대적 유물인가, 미래형 문자인가 한자는 이미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 쓰기 어렵고,독음을 알 수 없으며,글자 수가 많다는 등의 비판을 받아왔다.한자는 과연 청산되어야 할 문자인가,아니면 그 어떤 문자체계보다도 억센 생명력과 장점을 지닌 ‘미래형’문자인가.현재 사용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언어인 한자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녹색공간] 산감스님의 불끄기

    불교를 이야기할 때 놀라운 사실 하나는 붓다의 성스러운 일생이 항상 숲과 함께였다는 점이다.그는 숲속에서 태어나고,깨달음을 얻고,숲속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마침내 숲속에서 열반에 들었다. 1600년 한국불교도 숲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신라 말 구산선문도 깊은 산 숲속에 자리했고,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산에 기대어 생사를 걸고 있다.전통적으로 수행자들이 지은 숲속의 절집들은 숲을 지키는 산막(山幕)으로서의 오랜 역할을 다했다.절숲이 건강하게 남아 있음은 절집이 숲을 지켜온 내셔널 트러스트의 산막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숲속 수행자들은 각 지방의 기후풍토에 맞는 숲을 유지해 국토를 푸르게 하는 데 공헌했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로부터 나무와 꽃을 들여와 우리 숲의 다양성을 이룬 숲의 전령사들이었다.은행나무며,배롱나무며,파초며…. 수행자들의 숲을 위한 노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지금도 큰 절집에는 ‘산감(山監)’제도를 두고 숲을 지키고 있다.산감은 ‘산감독(山監督)’의 준말로,총림과 같은 큰 사찰에서 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맡긴 소임이다.산감 소임은 대중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맡는데,주로 사람들의 도벌을 막고,숲을 돌보고,산불을 감시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에너지 다변화로 사람들이 나무를 때지 않게 되고,숲 또한 솎아 주어야 할 만큼 울창해지면서 산감 소임도 한동안 유명무실해졌다.그래서 산감은 일없이 사하촌이나 드나들며 마을 개구쟁이들과 노는 게 소임이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산감스님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개발지상주의에 의해 사찰의 자연환경이 날로 망가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예전에는 작대기 하나 들고 마을사람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 그만이었지만,지금은 그게 아니다.거대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중차대한 소임으로 바뀌었다. 낙동정맥 천성산은 내원사라는 비구니 사찰이 신라 원효 때부터 지켜온 산이다.거기 가녀린 비구니 스님들이 천성산 자연을 지키기 위해 좌충우돌 설쳐대는 거대한 공룡 정부와 몸으로 맞서 싸우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추운 겨울 도보를 시작으로,천성산 지키기 삼보일배,정부 과천청사에서의 일인 시위,성명서 발표,일일 삼천배 등을 이끌고 있는 산감 지율스님의 뒤를 이어 종교를 초월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산감이 되고자 줄을 잇고 있다. 천성산과 사패산이 몇 해째 산불에 타고 있다.예전에 산불이 나면 몰래 나무하다가 들켜서 산감에게 곱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너나없이 열일 제쳐두고 발 벗고 나서 불을 끄러 산으로 올라갔다.그 숲이 거기 있어야 자신들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을 지키는 일은 개인적 이해타산에 따라 찬반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자연을 지키는 일은 그 어떤 정치적 입장에도 우선하는 가치다.숭유배불의 살벌했던 조선왕조도 사찰의 자연환경만은 함부로 훼손하지 않았다.오히려 곳곳에 금표(禁標)를 박아 지켜주었음을 우리 시대는 상기해야 할 것이다.노 정권은 ‘재신임’ 운운하는 정치적 도박판에 환경문제를 ‘돈 놓고 돈 먹기’식으로 내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김 재 일 두레 생태기행 대표
  • 말말말˙˙˙

    조광조야말로 개혁의 상징이었고 카리스마를 갖춘 특출한 지도자였던 만큼 그에 맞는 의무를 다했어야 했다.그런데 개혁은 편협하고 과격하며 과속이어서 성공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 리더십’이라는 책을 낸 오인환 전 공보처장관,한 인터뷰에서 현 상황과 조광조시대의 개혁을 비교하며-
  • 사회 플러스 / 美수능교과서 “한국사 오류 수정”

    국내 네티즌들의 노력으로 미국 최대의 SAT(대학수능시험) 교과서에 기술된 한국사 관련 오류가 수정될 것으로 보인다.네티즌 1만 200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 바로알리기 사이버 민간기획단 ‘반크’(www.prkorea.com)는 14일 미국의 SAT 교과서 출판사인 ‘맥그로 힐’이 내년 교과서 개정판 발간 때 한국사 관련 오류를 고치겠다는 서한을 보내왔다고 밝혔다.현재 세계사 부문의 출제에 주로 사용되는 미국 교과서에는 조선을 청나라의 영역으로 표시하거나 한국 왕조가 중국 왕조의 도움으로 왕권을 유지했다고 기술하는 등 한국사를 중국 속국의 역사로 소개하고 있다.
  • 책꽂이

    ●지전(智典)2-전한·후한편(렁청진 지음,장연 옮김,한길사 펴냄) 양한(兩漢)시대,즉 유방이 통일한 전한과 왕망의 신(新)왕조 그리고 삼국지의 무대가 된 후한시대 영웅호걸들의 지혜를 담았다.건달이며 무뢰한이었지만 뛰어난 인재들을 얻어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백만대군을 거느린 최고의 명장이었지만 자신보다 못한 임금을 섬기다 토사구팽당한 한신,융통성 없이 충성을 바치다 황제에게 제거당한 주아부 등의 이야기가 실렸다.2만 4900원. ●카산드라(마리 구도 엮음.정희경 옮김,이룸 펴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예언가 카산드라의 상징전통과 현재적 의미를 설명.카산드라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딸이자 트로이전쟁을 일으킨 파리스의 누이.아폴론의 구애를 받기도 하고 트로이 전쟁 전리품으로 아가멤논의 정부가 되기도 한다.트로이 전쟁의 희생물로 그리스에 노예로 끌려온 그녀는 미래에 대한 탁월한 예지능력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종국엔 카산드라의 예언은 불길한 일의 시초로 여겨지게 된다.1만 2000원. ●프리다 칼로(헤이든헤레라 지음,김정아 옮김,민음사 펴냄)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전기.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와 트로츠키의 연인이자 열렬한 스탈린주의자,아스텍 문화의 신성한 여사제였으며 오늘날엔 페미니스트의 우상으로 자리매김돼 있다.일곱 살 때 앓은 소아마비와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를 당한 그는 서른다섯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프리다는 사람들에게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가에서 ‘보그’지의 표지모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얼굴로 기억된다.이 책은 프리다의 전설 아래 감춰진 진실을 밝힌다.1만 5000원. ●삶의 정치,소통의 정치(박승관 등 지음,대화출판사 펴냄) 박승관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는 논문 ‘숙의 민주주의와 시민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인간의 개인성 개발과 공동체 건설에 기여하는 시민성 형성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분석.박 교수는 이 숙의 민주주의를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로 이해하고,이의 균형적인 발전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9500원.
  • [씨줄날줄] 청자 보물선

    또 보물선이 발견됐다.군산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를 가득 실은 화물선이 확인됐다.부르는 게 값이라는 고려청자가 인양된 것만 667점이요,또 수천점이 차곡차곡 포개져 있다니 보물선임에 틀림없다.이번 고려청자 역시 완도 유물과 비슷하게 11세기,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빚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그런데도 가마에서 갓 구워낸 자기처럼 윤기가 반지르르하고,고려청자 특유의 신비한 기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놀랍다.1000년 세월을 어둠의 바다 속에서 시달렸건만 본디 모습을 전혀 잃지 않았으니 왜 아니겠는가.조금 높이 들어 떨어뜨리면 조각조각 부서지는 그 연약함 어디에서,1000년 세월을 어루만지듯 견디는 저력이 나왔을까.세상을 정복하는 창칼이라면 1000년은 고사하고 1년인들 제대로 견뎠을까.치렁치렁 매달고 다니며 거드름을 피웠을 금은 보화인들 풍파의 1000년을 버틸 수 있었겠는가.청자를 빚어낸 흙의 놀라운 신비일 것이다.사람은 흙으로 빚어졌다는 신화며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어렴풋이 이해할것 같다. 이번에는 보물선을 만들었던 나무들이 다수 확인됐다고 한다.14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보이는 예전의 목포 앞바다 보물선과 함께 고려 시대 선박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생각해 보면 이것 또한 청자 못지않은 귀한 자료일 것이다.고려는 고구려에 이어 황제를 자청했던 나라가 아닌가.민족적 역량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요 만주 벌판을 되찾겠다는 북방정책을 기치로 내걸었던 야심만만한 나라였다. 그러나 군산 앞바다 보물선이 서해를 항해하던 1000년 전의 고려는 시련을 맞고 있었다.19세 나이에 성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7대 목종은 관리의 봉급 체계를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하며 국정에 안간힘을 썼다.하지만 건국에 공을 세웠던 호족들의 세력 다툼을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경륜마저 부족해 태후의 치마 폭을 벗어나지 못했다.끝내는 정변을 당해 29세의 아까운 나이에 비운을 맞는다.1000년 전 고려 청자를 보노라니 옛날의 역사가 자꾸 뇌리를 스친다.고려청자를 매만지며 선조들의 시행착오를 반추하는 기회도 가졌으면 좋겠다. 정인학 논설위원
  • 책 / 부처, 통곡하다

    “경주박물관 앞마당,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있는 화단가,목잘린 부처들이 나란히 앉아…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시인 정호승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앉아계시는 목 없는 부처님들을 보고 이런 시상(詩想)을 떠올렸다. 반면 소설가 정동주는 같은 장소의 같은 부처님들을 친견(親見)하고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경주박물관 마당의 안내판에는 지금도 이렇게 씌어있다고 한다.“조선시대 성리학을 받드는 유생들이 불상의 목을 베고 불상의 몸을 훼손하여 우물 속에 던져넣어 버렸는데 뒷날 이를 발굴했다고….” 정동주가 쓴 ‘부처,통곡하다’(이룸 펴냄)는 글자 그대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불교탄압사(史)이다. 그는 전국 어디를 가나 찾아볼 수 있는 ‘망가진 불상’들을 보면서 누가,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의문을 풀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반년 넘게 읽었고,산중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귀중한 문헌과 증언들도 모았다. 길고 긴 박해의 역사 가운데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대목만 가려 정리한 것이 이 책이라는 것이다.말미에는 조선 불교 박해를 위해 유생들이 올린 107편의 상소문도 실었다. 지은이는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사적 제105호 칠백의총(七百義塚)에서부터 이의를 제기한다.1592년 8월1일 의병장 조헌이 지휘하는 의병 700명과 승려 영규가 이끄는 승병 800명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청주성을 수복한 뒤 8월18일 금산으로 진격하여 처절한 혈전을 벌인 끝에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그럼에도 역사는,800명의 의승군은 간데 없이 조헌의 뒤를 따른 700명의 의병만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명종대의 고승 보우는 제주로 유배된 뒤 참살됐다.그가 주석하던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최근의 발굴조사에서도 화재로 폐사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나아가 한 유생은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그곳에 죽은 아버지를 묻었다. 훗날 대원군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충남 예산군 덕산에 이장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대원군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라는 말에 가야산 자락에 있던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그 자리에 묘를 썼다.오페르트가 분묘 도굴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무덤이다. 조선시대 내내 종이를 만들어 정부 및 지방 기관에 바치는 것은 사찰과 승려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어려운 부역이었다.그러나 공공기관뿐 아니라 왕실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지방의 호족과 탐관오리들까지 사찰에 종이부역을 가중시켰다.그 결과 승려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나는 절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1790년의 한 장계는 뜻밖에도 “승려를 머물러 살게 할 대책과 사찰을 소생시킨 방도”를 논의하고 있다.불교에 가한 박해를 참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부역을 부과하기 위하여 속된 말로 ‘키워서 잡아먹자.’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정동주는 “사찰출입을 금지한 법률이 서슬 퍼렇게 존재했음에도 사찰은 종교적 위엄을 더하고 숫자를 늘려갔다.”면서 “조선 유교정치의 불교 탄압 정책이 유생들의 주장을 대변했는지는 몰라도,국민들에게 필요한 정치는 아니었다는 역사의 교훈이며,좋은 정치란 어떤 것인지를깨닫게 해주는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 조선왕조 ‘마지막 왕손’ 전주에 정착/전주시 ‘테마 한옥촌’ 운영자로 뽑힌 이석

    “어머님의 품에 안긴 것처럼 포근함을 느낍니다.삶의 터를 마련해주신 전주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손 이석(본명 李瑛吉·62·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씨가 이씨 조선의 발상지인 전주에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됐다. 전주시는 최근 교동 한옥마을에 조성된 ‘테마 한옥촌’의 민박시설 두채의 운영자를 심사한 결과 이 가운데 한 채의 운영자로 이씨를 후원하기 위해 구성된 황손후원회가 선정됐다고 24일 밝혔다. 이로써 지난 6월부터 추진됐던 조선조 마지막 왕손의 전주 정착이 결실을 보게 됐다.운영자는 앞으로 2년간 임대형식으로 이 민박시설을 운영하게 된다.이 가옥은 대지 70평에 건평이 34평으로,본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본채는 이씨의 숙소와 조선 왕조들이 사용한 유물들을 전시하는 ‘황실 유물전시관’으로 이용되고,사랑채는 한옥체험 민박시설로 활용하게 될 예정이다. 시는 이를 위해 이 한옥을 개·보수한 후 내년 3월 이씨를 입주시킬 계획이다.이씨는 이곳에서 전주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조선역사 알기’,‘황실 다례 및 예법 익히기’,‘전주,황실음식 체험’,‘전주 술맛 익히기’ 등 전주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설명하는 문화유산 해설사 역할을 하게 된다.전주시 관계자는 “이씨 왕가의 발상지인 전주 한옥마을에 조선왕조의 혈통을 잇는 황손이 정착하면 전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이 부각되고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67년 ‘비둘기 집’을 불러 왕족가수로 널리 알려진 이씨는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義親王)의 열한번째 아들로, 그동안 서울 등지에 살면서 조선말기 왕가에 얽힌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해 왔다. 중3때인 55년 의친왕이 타계하면서 생활이 곤궁해져 61년 미8군 밤무대에 서면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기복이 많은 가요계 생활동안 8차례나 자살을 시도했고,7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89년 귀국했다. 이씨는 “전주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불면증도 없어지고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며 “태종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에 들어서면 지금도 조선왕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이제야 긴 방황에 종지부를찍게 됐다.”고 활짝 웃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남해안 50년새 18번 ‘해일 쑥밭’/‘사라’ 이후 37개 경로 분석

    지난 50년간 한반도와 주변을 거쳐간 태풍 130여개 가운데 해일을 유발해 연안 피해를 가져온 것은 37개로 집계됐다. ▶관련기사 10면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8개는 이번 ‘매미’처럼 남해안을 관통하거나 남해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남해안 전역에 직접적인 대규모 해일 피해를 입힌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국립방재연구소 해일연구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밝혀졌다. ●남해안은 상습 해일 피해지역 올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경남 해안지역은 59년 태풍 ‘사라’ 때는 물론,87년 ‘셀마’와 지난해 ‘루사’ 때에도 모두 유사한 해일 피해를 겪었다.전문가들은 이번 태풍 ‘매미’가 가져온 피해의 80% 이상이 해일에 의한 것이라는 데 주목,체계적인 해일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기상전문가들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매년 여름 태풍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 특성상 해일은 일상 재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해일은 원인에 따라 지진해일과 폭풍해일로 나뉘는데,우리나라에 주로 피해를 주는 것은 여름철 태풍에 의한 폭풍해일이다. 특히 만조기에 겹쳐 일어나는 해일은 해수면을 더욱 높여 방파제와 연안 시설물을 파괴하고 대규모 인명피해를 가져오기 쉽다.대표적인 게 1959년 9월 태풍 ‘사라’로 무려 849명에 이르는 사망·실종자와 2533명의 부상자를 냈다. ●해일에 취약한 한반도 지형 해일 피해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44차례나 등장한다.명종 때인 1557년 6월 해일은 전라,충청,경기,황해,평안도 등 서·남해안 전역에 피해를 입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1790년 9월 충청 해안에 내습한 해일은 116명의 사망자를 냈다.해일이 잦았음을 알게 해준다. 이처럼 대규모 해일 피해가 끊이지 않는 것은 한반도가 해일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지형·기후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해일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폭풍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열린 ‘V’자형 만(灣)에 큰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방재전문가들은 “재난은 갈수록 대형화되는데 방재시스템은 50년에서 달라진 게 없다.”면서 “방재당국은 아직도 해일에 의한 피해를 파도나 풍랑에 의한피해,혹은 기타로 분류할 만큼 정확한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마산 유영규 이세영기자 sylee@
  • “고려때 꽃피웠던 寫經 원형복원이 꿈”/24년 사경작업 외길 김경호씨

    평생을 단 한 가지 목표에 매달려 사는 것은 쉽지 않다.그것이 남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욱 힘겨울 수밖에 없다.그러나 그렇게 일궈낸 삶은 훨씬 더 값지다.사경(寫經)연구가 김경호(41)씨는 일찍부터 불모의 영역인 사경에 눈을 떠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는 인물이다.그냥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새 장르의 문화재를 복원해 의미와 가치를 알리고 전파해야 하는 필생의 사업이 됐다. “사경은 고려 청자보다도 더욱 가치있는 문화재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그 원형 복원 노력과 연구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라는 김씨는 “사경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독보적인 우수성을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흔치 않은 문화재”라고 거듭 강조한다. 김씨는 중학교 때부터 불교 경전을 한자 한자 그대로 옮겨 쓰는 사경을 시작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고교시절 출가해 1년간 행자생활을 했으나 부모의 만류로 귀가해 어렵사리 고교를 졸업했다.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사경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입학했지만,기본 자료조차 없는 실정을 개탄해 사라진 문화재의 원형 복원에 고군분투해 왔다.고교 시절부터 치면 24년간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고려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 원 조정에서 많게는 한 번에 100명씩 고려에 관리를 파견해 사경을 제작해 갔다고 한다.사경 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됐지만 전성기인 고려시대의 사경은 서예,회화,금은공예 등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월등한 종합예술로 꽃피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과거 그토록 번성했지만 국내엔 옛 사경을 추적할 만한 기초 자료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그에 비해 일본에선 오래 전부터 사경연구가 활발히 전개돼 왔지요.” 그동안 국내 박물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신통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일본측 자료에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그런 점에서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통일신라기 사경인 국보196호 ‘대방광(大放廣)불화엄경’은 주목할 만한 유물이라고 강조한다.‘대방광불화엄경’은 연대가 분명한 사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먹으로 쓴 것이면서도 표지 그림과 경 내용을 설명하는 변상도를 금은으로 그려 당시 금은 공예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잘 보여준다.무엇보다 통일신라기인 일본 천평(天平)시대에 전국적으로 흥했던 일본 사경의 모태가 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일본은 우리로부터 사경을 받아 꽃피웠지만 오히려 그것을 건네준 한국에선 그 의미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형편.내로라하는 일본 사경 연구가들의 정통 사경이라는 것에서조차 원전에서 벗어난 오·탈자와,원 형식과는 다른 모순을 적지 않게 발견한다는 김씨.그의 자부심은 그냥 말만 앞세운 게 아니다.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가리지 않고 사경과 그 기록이 있는 곳이면 빼놓지 않고 발품을 팔아 슬라이드로 정리해놓은 것만 해도 3만여점.지난해 10월엔 자신이 직접 작업한 사경을 중심으로 사경의 모든 형태와 해설을 붙인 교본격인 사경집을 내기도 했다. 6차례의 개인전을 포함해 20여회의 전시를 열면서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지난 6월에는 한인미주이민 100주년을 기념해LA로터스갤러리에 초대받기도 했다.내년 봄 미국 현지 교인들이 뉴욕 전시를 추진 중이며 일본측에서도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김씨는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우수한 우리의 사경을 원형 그대로 살려내 발전시키는 것에 가장 힘을 기울인다.표지와 발제,경전,변상도로 구성된 양식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실제로 그의 사경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경전 선택과 원본의 오·탈자를 확인하는 대교 작업부터 작업의 전체 틀과 맞물릴 변상도 구상,닥종이와 금가루에 아교물을 입히고 푸는 데 이어 선을 긋는 계선과 경문쓰기,변상도 그림과 표지,금을 입힌 글자의 광내기인 연마작업…. 요즘엔 한국사경연구회(02-733-8334) 회원들이 자신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 게 큰 힘이 되고 있다.사경연구회는 동양미술사학과 출신들과 사경에 뜻을 가진 학자,승려들과 함께 지난해 결성했다.서울 연희동에서 서예학원을 운영하는 부인의 수입이 사경작업의 모든 재원이다. 연세대 사회교육원에서 일반인 대상의 강의를 맡고 있고 동아문화센터에도 출강하고 있지만,이는 사경을 알리는 절실한 수단에 불과하다.동국대 대학원에서 사경에 관한 석사 학위 논문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서예지 등에 사경을 알리기 위한 기사 연재에 매달리느라 쉽지 않다. 사경 작업을 할 때는 며칠 밤낮을 지새우기 일쑤.사경에 몰두하다 보면 1∼2시간 정도만 의자에 앉아 눈을 붙여도 거뜬하지만 작업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아프다는 김씨.그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나에게 맡겨졌다.천직으로 안다.”며 주섬주섬 사경 도구를 챙겼다. 김성호기자 kimus@
  • 양양 송이축제 / 솔향기 ‘그득’

    “솔내음 그윽한 자연산 송이 맛이 그만입니다.” 설악산 초입의 아름드리 소나무숲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생하는 강원도 양양산 송이가 도시인과 외국인들을 유혹한다.해마다 9월말∼10월초에 열리는 양양송이축제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수분 함량이 적어 육질이 단단하고 솔내음 향기가 최고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저칼로리 식품으로 콜레스테롤 감소와 고혈압 예방은 물론 암세포 억제효과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고급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조선시대 세종때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했고,중종 때는 송이를 선물하는 것은 최고의 정성이라고한 조선왕조실록 기록만 보아도 송이버섯의 진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송이축제가 열리는 동안 인구 3만 남짓의 양양읍내는 온통 축제분위기다.양양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에서 전세기 3∼4대가 취항할 예정이고,거리마다 마임과 북춤,행위예술 등 길거리 이벤트가 장관을 이룬다.일본에서만 줄잡아 1000∼1500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와 설악산 초입의 송이 산지를 가득 메운다.이들은 송이채취 체험행사뿐 아니라 일본과 양양군 간의 다채로운 문화교류행사도 선보인다. 양양 조한종기자
  • ‘조선시대 옥새’ 이렇게 생겼네

    고려·조선시대 때 빈번히 사용됐지만 백성들은 거의 볼 수 없었던 왕의 도장인 옥새가 전통기법 그대로 복원,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지난 19일부터 31일까지의 일정으로 인천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옥새-오백년 조선옥새의 비밀’전.전통 옥새전각 장인인 민홍규(50)씨가 옛 기법 그대로 복원해낸 고종황제 시대의 옥새 29점,금장 12점,도자기인장 11점,목인 3점,도식그림 10폭,옥새함 2개 등 총 130점이 나와있다. 민씨는 대한제국의 국새 제작자인 황소산에 이어 조선조의 옥새 전각을 계승한 정기호 문하에 16세에 입문하여 전통제작법을 전수받은 인물.일제시대 때 소멸된 ‘대한국새’ 등 옥새 5과를 복원하는 등 전통 옥새의 복원에 공을 들여왔으며 현재 경기도 이천에서 옥새전각연구소와 설성 문화서당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중인 옥새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이전 조선왕조가 중국의 변방국 입장에서 사용했던 거북이 모양 국새에서 벗어나 용의 모양으로 제작한 국새인 ‘대한국새’와 ‘황제지보’‘황제지새’.조선왕조는 중국과의 사대관계로 인해 거북 모양의 국새를 사용했으나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선포 후 이전의 옥새를 폐지하고 용모양의 옥새를 새로 제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성호기자 kimus@
  • 책꽂이

    ●한 달이 행복한 책(유린 지음,오늘의 책 펴냄) 행복은 몇몇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가슴 훈훈하게 하는 사랑과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행복은 깃든다.진정한 행복은 으레 그렇듯 우리의 소박한 일상에 있다.저자는 가장 커다란 행복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낸 다음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7500원. ●전쟁 속의 여인들(사오도메 가쓰모토 지음,지명관 옮김,소화 펴냄) 유대인 절멸정책의 선봉이었던 SS(나치 친위대)대장 하이드리히가 체코의 부총독으로 부임한 뒤 암살당하자 히틀러는 체코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조치에 들어간다.그중 대표적인 것이 리디체마을의 학살이다.이 책엔 인간의 광기 그 끝을 보여주는 나치의 리디체마을 학살,미군에게 무차별 공습을 당한 일본 여성들의 증언,일본에 의한 난징과 충칭에서의 대량학살 이야기 등이 실렸다.6000원. ●애덤 스미스 구하기(조너선 B 와이트 지음,안진환 옮김,생각의 나무 펴냄)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국부론’이지만 스미스 자신은 인간의 행복과 덕성의 근원을 탐구하는 ‘도덕감정론’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스미스는 인간관계보다 부를 우선으로 치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곤 했다.시장경제의 필수사항인 신뢰와 도덕,덕성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이 이 ‘경제이론소설’ 곳곳에서 부활한 스미스와 주인공 번스의 대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1만 3000원. ●난세 1.2(이보가 지음,강성위 등 옮김,일송-북 펴냄) 중국 청왕조의 몰락과정을 다룬 역사소설.청말에 쏟아져나온 ‘견책소설’의 선구다.견책소설이란 청말 사회나 관계의 수많은 병폐를 폭로하고 비판한 소설을 일컫는다.각권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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