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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례/지재희·이지한 옮김

    예를 집대성한 경전인 삼례(三禮)중 하나인 ‘의례’(儀禮)(지재희·이지한 옮김, 자유문고 펴냄)가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삼례는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등 각종 인간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예(禮)를 집약한 경전으로 중국 전한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중 ‘의례’는 삼례중에서도 예의 근본을 다룬 것으로 각종 저술 등에 매우 자주 인용되어온 ‘예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다. 역대 왕조에서는 ‘임금의 죽음에 상복은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 등 ‘의례’의 해석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피와 죽음을 불러오는 등 곡절도 많았다.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 환경복원 원년] 종합생태지구로 거듭나는 ‘남산’

    [서울 환경복원 원년] 종합생태지구로 거듭나는 ‘남산’

    서울 용산에 사는 40대 회사원 이모씨는 남산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연초에 새로 만들어진 수복천약수터 근처 소나무 탐방로에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는다. 소나무숲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과 함께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 됐다. 즐거움의 백미는 우렁찬 개구리 울음소리.‘개골 개골’ 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릴적 시골 고향같은 착각에 빠진다. 올해는 남산이 ‘서울의 허파’로 자리매김한다. 소나무 탐방로가 한 곳 더 늘어나고, 생태 보호구역인 소규모생물서식공간이 새로 들어선다. 또 알에서 부화한 개구리들이 ‘여름 합창’을 선보인다. 청계천과 남산 두 ‘푸른 남매’가 2005년 서울의 환경 원년을 알리는 셈이다. ●남산의 얼굴 소나무 탐방로 2곳 개방 남산의 ‘얼굴’은 뭐니뭐니 해도 소나무다. 소나무는 바위 틈을 뚫고 나올 정도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그들 중에서도 남산 소나무는 크기와 푸른색 모두 최상급에 속한다.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한양을 감싸안은 남산이 푸르러야 왕조가 태평하다는 믿음에 전국에서 질 좋은 소나무를 옮겨와 심었다. 남산 소나무숲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난개발이 이뤄졌던 1950,60년대를 지나면서 많이 황폐해졌다. 하지만 1991년부터 서울시가 펼친 ‘남산 제모습찾기’ 운동의 결실로 현재는 5만여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1차 남산 소나무탐방로가 개방된 것은 2003년 10월. 국립극장 뒤편 200m 5000여평 규모로 지난 68년 철책으로 보호된 지 36년 만에 시민들에게 선을 보였다. 2차 탐방로도 개방된다. 서울시 공원녹지관리사업소는 이르면 오는 6월 남산 남측순환로 수복천약수터 주변 소나무숲을 5000만원 예산을 들여 탐방로로 꾸미기로 했다.1차 탐방로와 비슷한 규모다.“왜 한남동 부근 소나무숲만 개방하느냐.”는 용산 주민들의 ‘원성’이 배경이 됐다.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며 산책 올여름에는 정겨운 개구리 울음 소리를 소나무숲 사이를 걸으며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해 3월 사업소가 봄철맞이 청소를 하던 도중 서울타워 남서쪽 계곡과 야생식물원 연못에서 발견된 개구리알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스타’가 됐다. 개구리알을 퍼가는 시민들을 막기 위해 따로 공익근무요원까지 배치했을 정도다. 개구리알은 지난해 봄을 거치며 올챙이에서 개구리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여름에는 개구리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상당수의 올챙이들이 먹이사슬의 ‘숙명’에서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업소 송명호 기획홍보팀장은 “지난해 개구리를 먹고 사는 황조롱이와 뱀의 출현 빈도수가 예년보다 눈에 띄게 증가했다.”면서 “올해는 남산 기슭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규모 생물서식공간도 운영 올해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 생태 공간인 소규모생물서식공간도 남산에서 처음으로 운영된다. 인위적으로 보호되는 도심속 환경보전지구다. 소규모생물서식공간은 지난해 한남동에서 국립극장방향 오른쪽 야산 2300여평에 조성됐다. 고욤나무, 개쉬땅나무 등 23종 1만 3000여그루의 나무들이 심어졌다. 생태연못과 수로 등 자연 생태계의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시설도 설치됐다. 대신 들고양이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부종은 밖으로 내몰린다. 남산을 포함해 보라매공원 등 서울시내 4개 공원의 1만 7000여평이 지난해 소규모생물서식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올해는 수복천약수터 근방에도 추가로 만들어지는 등 2006년까지 매년 한개씩 남산에 들어설 계획이다. 사업소 홍보담당 온수진씨는 “남산에 사람이 아닌 동식물만 살 수 있는 생태 공간이 들어선 첫 성과”라면서 “비록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지만 ‘자연의 보고’ 남산의 생태적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예언으로 읽는 우리역사] 정감록 산책 작가의말

    까마득한 문명의 여명기로부터 동서양 어디서나 신탁(神託)과 점성술, 예언과 점이 위력을 발휘하였다. 서양문명의 정화(精華)인 ‘성경’에도 예언가의 음성이 도처에 메아리치고 있다. 예를 들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는 그와 동갑내기인 사내아이들이 헤롯왕에게 몰살당했다. 유대의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불길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헤롯왕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고, 드디어는 집단 영아살해를 저질렀던 것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치고 첨단 과학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고 있는 오늘은 어떠한가. 여전히 대중은 점과 예언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세대에 걸맞게 디지털화되어 편리하게 서비스된다.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 ‘토정비결’을 보거나 ‘오늘의 운세’를 알아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예언서라면 단연 ‘정감록’이 가장 유명했다.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이후 ‘정감록’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정치·사회·문화적 문제를 투시하는 거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국가권력이 특정한 몇몇 가문에 집중되자 왕조에 저항하는 불만 지식인들이 전국에 널리 형성되었다.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였는데, 그들이 ‘정감록’을 퍼뜨렸으며 체제전복을 위하여 많은 사건을 일으켰다. 세월이 흘러 20세기가 되었을 때 문득 나라의 운명은 기울어 한국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시대의 절망과 어둠을 이겨내려는 듯 대중은 다시 ‘정감록’의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 예언 가운데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위기로 내몰았던 절망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놀랍게도 새 시대에 거는 대중의 기대 역시 녹아 스며들어 있다. 새해부터 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예언문화의 향기를 따라가 보려 한다. 지금 빛바랜 ‘정감록’을 책장에서 꺼내 깨끗이 먼지를 털어내고, 알쏭달쏭한 예언에 새겨진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만날 채비를 하는 중이다. 끝으로 ‘정감록’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 대하여 한 마디 보태고 싶다. 어떤 종류든 새 예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이 맞느니 틀리느니 격론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나는 진위를 가리는 그런 식의 논쟁에 끼어들 생각이 별로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미래를 점치는 행위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누구와 다툴 마음도 없다. 미래가 깜깜해 뵈면 점이라도 쳐서 알아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딱히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이 배워 출세하고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다.1997년 외환위기 때 점술가들은 뜻밖에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회사의 경영자들이 자문을 구하러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평상시 같으면 체면 때문에도 그런 일이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 몹시 꼬이면 달라진다. 그러면 다들 예언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내 관심거리는 바로 예언을 둘러싼 대중의 사회심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백승종 푸른역사연구소장·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아시아 대지진] 해저지진으로 해일…주변국 큰 피해

    [아시아 대지진] 해저지진으로 해일…주변국 큰 피해

    인도네시아 ‘아체 지진’의 피해가 동·서남아 전반에 광범위하게 미친 것은 해저 지진으로 인한 해일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해일을 ‘쓰나미(Tsunami)’, 즉 ‘지진 해파(地震海波)’라고 부르는데 빌딩 만한 거대한 파도가 생기기도 한다. 이번 지진에서 발생지인 인도네시아 지역보다 스리랑카 등 주변국들의 피해가 더 큰 것도 해일의 급격한 이동 때문이었다. 집채 만한 파도들이 갑자기 연쇄반응을 일으켜 해안가로 밀어닥치는 바람에 해안가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미처 대비할 틈도 갖지 못한 채 변을 당했다. 특히 이번 지진은 전파속도가 빠르고 파장과 지속시간이 길어져 피해가 더 컸다. 바다 깊은 곳에서 해일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거대한 파도가 눈에 띄지 않지만, 얕은 바다로 올 경우 파고가 높아져 해안지역에 큰 재앙을 가져온다. 지진으로 인한 단층의 급격한 어긋남으로 해면에 요철이 생기고, 이에 따른 중력장파가 주위로 퍼져 나가면서 발생하는 것이 ‘쓰나미’다. 지진 해파의 80% 이상은 태평양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83년 5월 26일과 1993년 7월 12일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 해파의 여진으로 포항과 속초, 울릉 등지에 해일이 덮쳐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또 지난해 9월 태풍 ‘매미’가 몰고온 태풍 해일이 경남 마산 등 남부지방 일대를 덮치면서 수해를 일으켰었다. 역사적으로는 ‘증보문헌비고’에 1088년 해일이 처음으로 기록됐으며 ‘조선왕조실록’은 1392년부터 1903년까지 모두 44차례 해일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역사갈등 한·중·일 ‘연합’ 가능할까

    ‘동아시아’가 화두다. 세계적인 블록화의 바람에 유럽연합을 부러워하면서도 막상 ‘동아시아연합’을 들추면 대부분 “가능할까?”라고 반문한다. 과거를 두고 한·중·일 3국이 치열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에는 미·중간 갈등과 북핵문제가 미묘하게 겹쳐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단합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과거 기억을 더듬고 있다. 먼저 20명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주최로 지난 20일 열린 ‘근대전환기의 동아시아 삼국과 한국’ 학술회의는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파고 들고 있다. 개화기 러시아인이나 중국인이 쓴 조선여행기나 조선총독부 치안관계자의 육성녹음, 개화기에 각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잡지 등을 분석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추적했다. 이에 앞서 지난 16∼17일 15명의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세대 국학연구원 주최로 열린 ‘동아시아 지역구도:역사의 연속과 단절’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좀 더 시야를 넓혀 동아시아 관계를 조명했다. 우선 ‘명·청(중)-조선(한)-막부(일)’시대 조공·책봉체제의 재해석이다. 이전의 ‘정치적인 상하관계’에서 ‘경제적인 유인’으로 해석의 초점이 이동했다.18세기까지 세계최고의 부를 자랑했던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체제가 형성됐었다는 다소 파격적인 근거와 함께다. 또 조공·책봉체제는 정권안정을 위한 왕조끼리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 끼치는 영향력은 중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동아시아지역의 이익을 요구하고 나선 일본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뒤였던 20세기 후반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사실상 부활한다. 이는 전세계적인 냉전과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전쟁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세계경찰 미국은 일본에 역할분담을 요구했다. 이는 미국의 재정부담 증가와 급성장한 일본이 1차적 원인이었고 길게는 일본이 시장논리에 따라 중국에 근접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영·일동맹과 미·일간 태프트-가츠라조약의 부활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셈이다. 일본학의 권위자 하버드대 앨버트 크레이그 교수가 최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청 강연에서 일본을 ▲선진국 가운데 GNP대비 가장 최저의 군사예산을 가진 평화로운 나라 ▲일본이 다시 호전적 국가가 될 가능성은 0이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강대국에 빌붙는 사대,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균세, 스스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자강. 세가지 갈림길은 결국 개별 국가를 중심으로 본다는 점에서 19세기적인 사고라는 비판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상호작용, 협력의 제도화 노력, 민간연대나 운동 등을 통한 발전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의 진수’ 다시 한 번 더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의 진수’ 다시 한 번 더

    디스커버리 채널이 올 한해 동안 시청자에게 사랑받은 다큐멘터리들을 선정해서 다시 선보이는 새해맞이 특집 ‘더 베스트 오브 디스커버리’를 마련했다. 시청자의 재방영 요청과 시청률 조사를 바탕으로 선정된 주옥같은 다큐멘터리 9편을 27일부터 31일까지 오후 11시부터 2시간 동안 연속 방영하며, 새해 1월2일 낮 12시부터는 10시간 동안 한번 더 방송한다. 27일에 방영될 ‘일본전쟁에 대한 진실’은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던 ‘진실의 순간’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2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창적인 이야기를 담은 수작으로 꼽힌다.28일에는 에미상 수상 후보에 올랐던 ‘다이노소어 플래닛’시리즈인 ‘밸로시랩터의 생존여행’과 ‘파이로랩터, 포드의 여행기’ 등 2편이 방영된다.29일 ‘매달린 관의 신비’에서는 16세기 명나라 왕조의 대량학살로 인해 사라진 고대의 잊혀진 부족에 대한 전설에 대해 알아본다. 이어서 파푸아 뉴기니 서쪽에서 고립돼 살아가는 부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다큐멘터리 ‘신과 교감하는 인간’이 방송된다. 30일에는 인간의 경쟁 본능이 스포츠 경기에서부터 종족간의 경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승부에 대한 집착’과 ‘최종결과(Ultimates)’시리즈 중 ‘최종 폭발’을 방송한다. 마지막으로 31일에는 야생 호랑이를 다룬 ‘타이거 문(Tiger Moon)’과 ‘야생호랑이와 함께 하는 생활’ 이 방송된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고구려사 왜곡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고구려사 왜곡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으로 고구려를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하려는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 시도는 올 한해 가장 뜨거웠던 이슈중의 하나였다. 중국 정부는 올 4월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 부분을 삭제했으며 관영 언론들은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일제히 왜곡 보도했다. 중국 정부를 성토하는 우리 국민들의 여론이 뜨거워지자 중국은 지난 8월 외교부 간부를 우리나라에 보내 협상을 벌인 끝에 ‘고구려사 문제의 정치화 방지’ 등 5개 사항을 구두 합의했으나 한·중 두 나라 역사 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것은 다분히 통일 후에 전개될 수도 있는 정치적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포석용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우리도 중국의 이런 의도적인 행동에 맞서 체계적이고도 중장기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어떻게 왜곡했나 고구려는 분명 한국의 역사 속에 있는 나라다. 한민족의 조상인 예맥(濊貊)족이 세운 나라라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이를 부정하기 위해 ‘예맥족은 중국 소수 민족인 상인(商人)의 후손’이라는 가설을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는 한국사 속의 고대 독립 국가가 아닌 중국 지방 정권 정도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배경에는 물론 고구려가 현대 중국의 국경 안에 건국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또 다른 논거는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세자 책봉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고구려 왕들이 중원왕조에 공물을 바치고 인질을 보내 스스로 중국의 변방 정권을 자처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한다. 중국 학자들은 수·당의 고구려 원정에 대해 ‘지역정권의 실정을 응징하기 위한 소수민족 통제과정’이라는 논리를 갖다 붙인다. ●동북공정이란 고구려사 왜곡은 소위 동북공정의 한 부분이다. 동북공정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다. 중국은 2002년 2월부터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연구는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동북삼성의 성 위원회가 연합해 추진한다. 연구기간은 5년이다. 실질적인 목적은 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 특히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영토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왜 역사를 왜곡하나 고려대 최광식 교수는 “2001년 북한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를 통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한 것과 같은 해 재중동포에게 국적을 제공하려 한 남한의 움직임이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에 뛰어 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로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들 사이에 불고 있는 한국 바람과 북한의 유동적인 상황이 중국을 자극했을 것이다. 특히 두만강 북쪽 만주 지역인 간도 문제는 중국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조선시대부터 한국인들이 살아 온 이 지역은 우리 땅과 마찬가지다. 간도가 한국 땅이라는 근거는 옛 지도나 문서에 나타나 있으며 일제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중국의 영토로 귀속됐다. 국제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무효라고 할 수 있는 협약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범국가적으로 북한과 연계해서 대응해야 한다. 세자책봉과 공물 제공을 빌미로 삼는다면 백제와 신라도 중국사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우리 학자들은 ‘고구려 멸망 후 대부분의 유민들이 중국에 흡수됐기 때문에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도 고구려 지역에는 상당수의 주요 성들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박 논리로 든다. 또 고구려인들은 당나라 땅에 있으면서도 자의식을 갖고 있었고 당나라도 전쟁포로로 대접했다고 중국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한다. 또 적석총이나 지석묘, 비파형동검문화 등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문화를 고구려는 갖고 있었다. 이런 학문적인 근거를 갖고 정부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에 맞서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난하는 세계적 여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또 IT강국인 한국의 강점을 살려 중국의 역사왜곡의 현실과 올바른 역사를 전 세계 학계와 각국 네티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초·중·고교에서 국사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예상 논제 국가관과 정치 외교적인 식견을 묻기 위한 논제로 고구려사 왜곡이 논·구술 시험에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예상 논제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배경과 우리의 대처 방안에 대해 설명하라 ▲간도 문제에 대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국제적인 대응책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나 ▲동북공정의 허구성에 대해 논하라 등을 들 수 있겠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48)울산의 처용과 박제상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48)울산의 처용과 박제상

    ●악귀 내쫓는 처용은 해양문화의 소산 지금은 사라졌지만 연말이면 악귀를 쫓는 나례 풍습이 있었다. 붉은 탈을 썼으니 처용이 그 원조이다.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악귀를 내쫓았다. 이러한 유풍의 근원에 처용이 늘 버티고 서있다. 그 처용이 해양문화의 소산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처용을 만나려면 울산으로 가야 한다. 경주가 신라의 본향임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또 하나의 본향인 울산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공해에 찌든 땅으로만 알고 있는 울산이야말로 경주 감포와 더불어 신라가 동해로, 세계로 나아가던 출구였다. 울산에는 동해를 굽어보던 유서깊은 절터가 남아 있다. 오늘날 울산항으로 엄청난 국제적 물동량이 오고감을 생각해볼 때, 신라 천년의 출구 역할이 지금껏 이어진다고나 할까. 호젓한 문수산(옛 영취산)을 오르다보면 망해사지(望海寺址)를 만난다. 글자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는 절. 솔잎 냄새 풍기는 숲속에 부도 2기가 의연하게 서 있는데, 이 절이 세워진 내력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무도 유명한 망해사지와 처용설화가 그것이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졸지에 길을 잃어버렸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측근에게 물으니 일관이 답하되,‘동해 용의 장난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버려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이 명령하여 그 용을 위해 세죽나루 근처에 절을 세우라 하였더니 홀연히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곧 일곱 아들을 데리고 임금 수레 앞에 나타나 춤과 노래를 연주하였다. 그의 아들 하나가 임금을 따라와 국정을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그를 미인에게 장가들게 하였는데 역병 귀신이 밤마다 그 집에 가서 몰래 처용의 아내를 품고 잤다. 어느날 처용이 동경 밝은 달밤에 이슥히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었다.‘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는 것 어쩌리!’ ●처용의 아버지 ‘용’에 대한 해석 분분 용은 누구일까. 학자들마다 해석이 구구하다. 조금이라도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학자들은 저마다 구구한 해석을 내놓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용이 해상 세력과 관련있음이 분명하다. 울주에서 조금만 북상하면 문무대왕이 동해 용왕이 되길 꿈꾸었던 동해구(東海口)가 나오고, 동해 용왕이 드나들던 감은사지가 지척이다. 혹자는 용을 외국인, 보다 정확하게는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개운포가 국제무역항이었음을 고려할 때,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나 증거는 없다. 혹자는 울산 바닷가에 기반을 잡고 있던 해상 호족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처용암 조에도 ‘고을 남쪽 37리 개운포 가운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때 동해 용왕의 아들이 거기서 나왔으며, 모양이 기괴하고 가무를 좋아하여 사람들이 처용옹이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까지 전설처럼 처용암과 설화가 전승되었다. 고려시대에 학연대합설처용무 춤이 추어졌으니 역병을 쫓는 전통은 천년을 뛰어 넘어 이어진 셈이다. 설화 속의 역병도 단순한 전염병이 아닐 것이다. 당대의 ‘사회적인’ 역병을 은유한 것은 아닐까. 헌강왕조라면 신라가 돌이킬 수 없이 기울었던 때 아닌가. 처용은 역병을 물리치는 춤을 추고 있다. 처용의 춤은 흡사 무속의 악귀물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훗날 처용춤은 궁중정재로 편입되고, 민중 사이에서 제융의 역할을 도맡게 된다. 문헌기록상 무당으로 간주되는 신라 남해차차웅, 악귀를 쫓는 처용, 제액을 물리치는 제융 등은 한 가지를 뜻하는 다른 표현이 아닐까. 처용은 분명히 이두식으로 표현된 한자임에 틀림없다. ●공해 찌든 처용암에도 상록수는 우거져 망해사 바로 옆에는 늠름한 청송사 3층탑이 있다.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여 감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장중한 석탑이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문수사가 있으니 울산이나 부산 사람들이 영험하다 하여 쉬도 때도 없이 찾아든다. 삼국유사 전편을 통하여 영험한 문수보살은 노파로 변신해 기행을 일삼는다. 처용과 문수보살, 신라인이 창조한 인물군이 영취산을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청송사지와 문수사 가는 길은 지금이야 경관이 가려져서 바다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 신라인들은 국제항 개운포 풍경을 굽어보면서 이 산을 올랐으리라. 망해사지를 보았다면, 반드시 처용암을 찾아야 할 터인데, 아서라,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차마 찾아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황성동 세죽리 앞바다의 처용바위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고증하고 있건만 석유화학단지의 공해로 바다는 찌들고, 보상금을 받아 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다. 제를 지내는 당집의 나무도 시들어 처용바위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시비(詩碑)도 세워 두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나마 매립이 되어 처용바위 자체가 사라질 판인 것을.“매립이 되더라도 처용암만큼은 반드시 보존하는 방향으로 지킬 것”이라는 김광오 울산시 공보관의 말에서 그나마 작은 희망을 얻는다. 처용암이 있는 세죽나루는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를 상대로 하는 횟집들이 번창하기 시작했다.90년대 초반까지 동해의 온갖 횟감이 팔리던 횟집도 이제 서서히 문을 닫는 판국이다. 더 이상 지독한 냄새를 견디지 못해서다. 그러나 생명의 힘은 그토록 무서운 것일까. 처용암 위에 빽빽하게 들어선 팽나무 사철나무가 사철 상록의 잎그림자를 바다에 드리운다. 처용암 지척에는 상록수림으로 유명한 춘도도 있어 동백나무숲이 그대로 전해진다. 바다 경관이 무너졌음에도 나무들은 제 역할을 다하며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해마다 10월이면 처용암에서 울산의 문화축제인 처용문화제도 열린다. 처용제의를 비롯하여 처용콘서트, 처용합창제, 처용얼굴 그리기 등등 처용을 기리는 행사가 열려서 글 모르는 아이들도 울산에서만큼은 처용을 알고 있다. 공장으로 둘러싸인 개운포에 포로처럼 갇혀 있는 처용암을 보노라면 근대산업화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결단낸 그늘진 면을 보는 것 같아 무척 마음 아프다. ●박제상 그리다 돌이 된 치술령의 슬픈 전설 처용암에서 천년 전설의 현장이 무너졌음을 보상받고 싶거들랑 반드시 은을암(隱乙庵)으로 방향을 잡기 바란다. 왜국에 볼모로 잡힌 내물왕(柰勿王)의 미해왕자를 구출하고 대신 죽음을 당한 박제상을 그리다가 망부석이 된 전설이 전해지는 치술령 자락의 그 은을암이다. 공단의 매캐한 공해바람에 컥컥이다가 은을암으로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비로운 숲속에 들어서 있음을 알게 된다. 경주 남산으로 이어지는 치술령 능선에서 박제상의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배가 떠난 율포(栗浦)를 바라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돌이 되었다. 넋은 새가 되어 은을암의 동굴로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그 동굴에 제각을 짓고 용왕당이라 이름하여 모시고 있다. 국제항 율포와 용왕당이란 이름에서 바다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울산은 신라의 대외 창구로, 중국의 명주, 양주 등으로 곧장 도항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들 중국지역은 동남아에서 무역 주도권을 장악한 대식국(아라비아)상인들이 동진하여 붐비던 곳이었으니, 이들 아라비아인을 통하여 일찍이 신라의 존재가 세계에 알려졌다. 이들이 울산지방을 통하여 입국했을 가능성이 높아 처용이 이슬람상인이라는 가정법이 등장한 것이다. 박제상 일가의 충효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운위되어 삼강행실도에 등장하는 등 ‘따라야 할 모범’으로 규정됐다. 당대 지방장관 정도의 높은 직위에 있었을 박제상이 왜국에까지 가서 볼모를 빼내와야 했던 기록은 끊임없이 왜구의 약탈을 받아야 했던 신라의 어려움을 잘 말해준다.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고래물결 가이없네” 일본의 규슈는 한반도에서 가까웠기에 그들은 뻔질나게 한반도 해안을 들이쳤다. 선진 문물에 목말라했던 왜인들은 신라에서 문화 약탈의 원정을 꿈꾸었던 것이다. 해류상으로 규슈의 북단인 하카다(博多)나 시모노세키(下關) 등지에서 배를 들이밀면 고스란히 울산쪽에 닿았다. 울산은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침략하는 해상 루트였으며, 임진왜란때 왜군이 울산 학성에 왜성을 쌓고 버틴 것도 이런 역사문화적 배경을 지닌다. 오죽하면 문무대왕이 동해 용왕이 되길 자청했을까. 지배집단에서 박제상 일가의 충효는 시대의 사표로 선전되었으며, 치술신사에 배향되기도 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을 보면 한때 울주에 벼슬살이 하러 내려왔던 김종직이 한역했다는 치술령가가 나온다. 당시 울주에서 들은 노래를 다소간 윤색했을 것이다.‘치술령 머리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고래물결 가이 없네. 낭군이 가실 때에 다만 손만 흔들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이 끊어졌네. 길이 이별함이여, 죽은들 산들 어찌 서로 만날 때 있으랴.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다가 문득 무창의 돌로 화하니, 열녀의 기운이 천추에 푸른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렇지만 반드시 지배층의 의도대로만 박제상의 행적이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어 모권적인 무속신으로 재창조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민중들에게 ‘치술령의 영험한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다. 은을암에서 굽어보니 경주 남산까지 이어진 치술령 산자락 아래로 운무가 비끼고 어디선가 새가 날아들고 있다. 무심한 저 새의 혼에도 치술신모의 넋이 깃들어 있지 않을는가.
  •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염유의 말을 듣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글쎄요. 제가 스승에게 여쭈어 보겠습니다.” 자공은 그러나 직접적으로 공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간접적인 은유로서 의사를 타진해 보려한다.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와는 달리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이었으므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의 뜻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자공은 들어가서 공자에게 여쭈어 보았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현인들이시다.” “허지만” 자공은 말을 이었다. “현인들이심이 분명하였지만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백이와 숙제는 세상을 원망했을까요.” “원망하다니.”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인(仁)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어찌 원망하였느냐.(求仁得仁又何怨)”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나와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공은 공자에게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다만 주나라의 무왕이 천하를 통일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다 죽은 백이와 숙제의 예를 들어 공자의 속마음을 타진해 본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인으로서 인을 구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아버지 괴외를 무력으로 제지한 출공밑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인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특히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스승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에게 물었던 자공과는 달리 정공법으로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하신다면 선생님은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같으면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 잡겠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대답한다. “아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느닷없는 자로의 탄식에 의아해진 공자가 다시 물었다. “그것 때문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이 세상일에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만 생각하신다는 뜻이겠지요.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 잡아서 어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자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고리타분하게 만사의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는 스승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단순한 자로는 순간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여 말한다. “자로 너까지 이러할 수 있단 말이냐!”
  •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경기도 이천 시내를 벗어나 설성면 장천4리, 속칭 독정 마을에 이르면 가래나무가 인상적인 시골집이 하나 있다. 전통 옥새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옥새전각장 세불(世佛) 민홍규(51)씨의 집이다. 오죽(烏竹)과 어우러진 능진수원(能盡水源·생명이 다할 때까지 행한다)이라는 당호가, 집 주인이 하고 있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일러준다. 토불(土佛) 황식에서 시불(示佛) 황소산, 석불(石佛) 정기호로 이어지는 전통 옥새의 제작기법을 계승해 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를 이천 집에서 만났다. ●열여섯살때 ‘석불’ 정기호 만나 인연 “서울생활을 접고 이곳에 내려온 지 10년이 됐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이곳은 용터라고 할 수 있어요. 땅의 기가 세, 아무나 살기 힘든 터라고 하지만 창작활동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이지요.” 민씨는 자신의 작업이 방해 받을까봐 동네 면사무소에서 만들어준 ‘옥새 보러가는 길’이란 집 안내 팻말도 없애 버렸다고 한다. 옥새는 왕이 사용하는 도장으로, 중국 진시황제가 옥에 새긴 도장을 쓰면서 ‘옥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옥새는 도화원 화공이나 교서관·서자관 관원 중에서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인정받는 사람 한 명에게만 그 기술이 전수됐다. 위조를 막기 위해서다. 옥새의 전통을 외롭게 이어가고 있는 민씨로서는 그만큼 책임감이 클 수밖에 없다. 열 여섯 살에 석불 정기호를 만나 옥새와 인연을 맺은 민씨가 조선왕조 옥새 복원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5년 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국새를 만든 전각예술의 대가 석불이 1989년 세상을 떠나자 옥새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는 밤잠을 잘 수 없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어보의궤’, 규장각 문서인 ‘보인부신총수’등 옛 문헌을 뒤지며 옥새 제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더욱 몰두했다. ●옥새문화계승 우리나라밖에 없어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고종황제의 옥새를 찬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옥새는 곧 왕권이자 국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쓰던 73개에 이르는 옥새를 모두 빼돌렸다. 그중 절반가량은 현재 복원돼 있는 상태. 민씨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은 해인 지난 98년 일제 때 소멸된 옥새 5과를 경기도 박물관에 복원 기증한 것을 비롯,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옥새를 만들어 기증했다.“돈이나 명예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지킨다는 자부심만이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지요. 주위에서 나의 옥새 작업을 격려해 주는 분들이 쌀이며 가전제품이며 여러가지 정성어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전통방식의 옥새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옥새의 맥이 끊어졌고, 일본도 국보급 전각가인 고바야시 도완이 지적했듯이 전통 옥새의 주조기술이 전수되지 않아 재현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국가를 상징하는 옥새는 소중하게 보존 계승돼야 합니다.” 민씨는 먼저 옥새와 옥새전각장이라는 이름의 내력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선 고종 13년(1876)에 제작된 ‘보인소의궤’를 보면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을 보인(寶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을 보장(寶匠)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뀐 뒤 고종이 임금의 도장이 보인, 어보(御寶)등 옥새보다 낮은 격으로 불려왔음을 알고 칙령을 내려 옥새라고 품계를 올려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의 명칭도 보인을 새기는 보장에서 옥새를 ‘전각하는’ 옥새전각장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궁중문화 꽃이자 종합예술 옥새는 궁중문화의 꽃이자 명실상부한 종합예술이다.“옥새는 서예와 조각, 회화, 전각, 연금술, 도자기술, 주조기술 등 적어도 7개 분야를 모르고선 접근할 수 없다.”는 게 민씨의 말. 그런 점에서 민씨는 가히 ‘르네상스 맨’이라 할 만하다.1990년 현대서예협회를 만들어 글씨체 현대화운동을 주도한 민씨는 추상회화와 서예가 접목된 작품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예 작품에 나부를 그려 넣어 ‘문제작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스무살 무렵부터 시작한 목가산(木假山) 작업은 그의 예술가적 독창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두툼한 황유목(黃油木) 판에 부조 형식으로 새겨진 산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이다. 민씨는 최근엔 모필 대신 죽필(竹筆)를 즐겨 쓰고, 칡뿌리 끝을 두드려 만든 갈필(葛筆)작업까지 시도하고 있다.‘자연과 호흡하는 예술’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다. 또 예서와 행서, 초서, 전서, 해서 등 5체를 섞어 쓴 ‘녹서(綠書)’라는 새로운 서체의 병풍을 완성했는가 하면, 옥새가 묘사된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도 그리고 있다.“그러나 중요한 건 다시 옥새입니다. 창작의 고통과 희열은 옥새에 온전히 바쳐질 때 비로소 제값을 다할 수 있지요.” 민씨는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주조법을 계승하고 있다. 진흙용주(鎔鑄) 기법으로도 불리는 이것은 고대 주조기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만드는 옥새는 인뉴(印 )에서 더욱 빛난다. 뉴( )는 도장 위에 새겨진 조각을 가리키는 말로, 고대에는 이것으로 관인(官印)의 등급을 표시하기도 했다. 민씨는 최근 삼족오(三足烏) 형상의 손잡이가 달린,4㎏이 넘는 옥새를 4년여 만에 완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족오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해 속에 산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고구려 벽화에는 삼족오가 용이나 봉황보다도 그 위에 그려져 있어요. 격이 더 높다는 얘기이지요. 한 몸뚱이에 발이 세 개라 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동양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요. 삼족오는 태양의 상징입니다.” ●무형문화재 지정안돼 안타까워 어느새 옥새와 동의어가 된 세불 민홍규. 그에게는 요즘도 일본으로부터 귀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일본은 문화가 아니라 사람을 수입하려 합니다.” 그의 쓸쓸한 한마디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지금이야말로 살벌한 문화전쟁의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옥새는 아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민씨는 “문화상등국의 우선순위는 궁중문화의 보존과 대책에 놓여져야 한다.”는 유홍준 문화재 청장의 한 강연 내용을 들려주며 옥새문화는 결코 천민문화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돌이(小乭伊·옥새 제작용 망치)를 마치 자식인 양 대견스레 들여다보는 그에게서 장인의 체취를 느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요즘도 하루 두세 시간씩 자며 마당의 대왕가마를 지키고 또 옥새 관련 책들을 읽는다. 그 조그만 결실이 곧 ‘조선 옥새의 비밀-영새부(榮璽 )’(도서출판 인디북)라는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영새부!옥새여 영원하라.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22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므로 공자가 시경의 ‘하초불황편(何草不黃篇)’에 나오는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라는 구절을 인용함으로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을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였던 것이다. 외뿔소(). 모든 소는 두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외뿔소만은 문자 그대로 뿔을 하나만 갖고 있는 변종이며, 호랑이는 잘 알려진 것처럼 모든 짐승 중에 가장 거칠고 사나운 동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자신이 이처럼 거친 들판인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은 외뿔소처럼 균형 감각이 없는 독선적인 고집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호랑이처럼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갖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무서운 권력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자로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스승의 속마음을 깨닫지 못하였을 리가 없다. 이에 자로는 대답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아직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로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크게 실망한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그의 존재를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이것이 눈먼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마치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석이 있어야만 눈을 떠 심청이를 볼 수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바로 심청이며,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로는 그처럼 공자를 따라다녔으나 스승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편견 속에서 스스로 만든 우상, 즉 공자상(像)만 본 것이었다. 공자가 주장하던 어짐(仁)과 천도(天道)가 아직 행하여지지 못하였다고 대답함으로써 스승 공자를 미완성의 선생으로만 본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그럴까. 유(由:자로의 이름)야, 만약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받는다면 어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고난을 당했겠느냐.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 반드시 도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하였겠느냐.” 백이와 숙제. 이 두 사람은 고대중국의 전설적인 성인형제. 사기에 의하면 이들은 원래 고죽국의 두 형제였는데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다가 굶어죽은 절의의 인물이었다. 또한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폭군 주(紂)의 삼촌으로 주왕이 잔인무도한 폭정을 일삼자 ‘임금의 허물을 보고도 간하지 않으면 불충이요, 죽음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은 용기가 아닌 것이다. 간하여 따르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서 충성을 다하리라.’라며 계속 극간하였던 충신이었다. 이에 주왕은 화가 나서 ‘내가 듣건대 충신의 심장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하였는데, 진짜 충신인지 확인해 보겠다.’고 비아냥거리며 실제로 가슴을 째고 심장을 꺼내 보았던 의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대답을 자로가 이해하였음일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로는 여전히 공자상에 매달려 스승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 확인한 후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물러갔을 것이다. 자로 다음으로 불린 제자는 자공. 자공이 들어오자 공자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경에 보면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도가 그릇된 것일까. 우리가 어찌하여 그런 지경에 빠졌을까.”
  • [우리동네 이야기] 서울 동교동

    [우리동네 이야기] 서울 동교동

    서울 마포구 동교동은 상도동과 대척점에 있었던 지난 시절 우리 정치의 또 다른 상징이다. 가문·학벌·정치적 후광 등 모든 여건이 ‘상도동’에 비해 열세였던 ‘동교동’은 지역적·이념적 색채를 동원한 온갖 정치적 공격을 또 다른 지역색으로 맞서며 마침내 권좌를 차지했다. 하지만 함께 군부독재에 맞서온 ‘영원한 라이벌’ YS와 권력의 뒤안길까지 경쟁하려 했던 것일까. 가신층 내분, 아태평화재단 비리사건, 세 아들 비리연루 등의 오점을 남긴 탓에 IMF 조기졸업,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노벨평화상 수상 등 눈부신 업적을 평가절하당하는 것은 그에게나, 우리에게나 모두 아쉬운 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2년 3월 지인의 소개로 동교동에 자리잡아 1995년 12월 일산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다. 일산으로 이사한 배경에 대해 우석대 인문학부 김두규 교수는 저서 ‘우리풍수이야기’(북하우스,2003)에서 “소문에 의하면 동교동의 지기(地氣)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 하여 일산으로 옮겼다.”고 소개한다. 퇴임 후 DJ는 옛집을 새로 고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산 집이 계단이 많아 다리가 불편한 DJ에게 불편했고 동교동 자택의 상징성이 커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지하철2호선 홍대입구역과 양화로, 신촌로 등이 지나 교통이 편리한 동교동은 면적 0.69㎢에 1만 3265명(2003년 기준)이 산다. 홍익대가 근처에 있어 상권이 발달해 있고 양화로를 따라서는 오피스텔, 빌딩 등 업무시설이 밀집해 있다. 지금은 강남에 밀려 인기가 덜하지만 7∼8년 전까지는 전현직 고위공무원이나 법조인, 사업가 등 유력인사들이 이 지역 단독주택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옛날 이 곳은 연희동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여러 갈래로 나눠졌고, 한강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잔다리(작은다리)를 여러번 건너야 했다고 한다. 동교동이란 이름은 동쪽 잔다리를 한자로 줄여 만든 이름이다. 조선왕조의 별궁중 하나인 연희궁과 가까워 ‘궁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촌전화국(현 KT신촌지사) 부근에는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곳에 아기의 태를 버리면 무병장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DJ 자택 옆에 새로 들어선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02-2123-6890)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직 대통령 관련 전문학술기관을 표방한 도서관이다. 이곳을 방문하면 DJ가 소장한 재임시절 사료·도서 등의 자료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피라미드/미로슬라프 베르너 지음

    이집트 피라미드 하면 우리는 으레 사막에서 쓸쓸히 모래바람을 맞고 있는 사각뿔 모양의 구조물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 피라미드의 형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사각뿔 모양만 있는 게 아니다. 또한 피라미드는 단독건물이 아니라 여러 건축물로 이뤄진 전체 묘역의 일부분일 뿐이다. 피라미드가 죽은 자를 위한 황량한 공간이 아니라 일년 내내 축제로 떠들썩한 활기찬 삶의 장소였다는 사실도 우리에겐 낯설다. ●현재까지의 연구 총망라… ‘피라미드학’의 결정판 이집트사를 전공한 체코의 고고학자 미로슬라프 베르너가 쓴 ‘피라미드’(김희상 옮김, 심산 펴냄)는 지금까지 진행된 피라미드 연구 성과를 총망라한 ‘피라미드학’의 결정판이다. 저자는 기원전 3000년경에 형성된 이집트 왕국의 역사를 되짚어 내려가며 신왕국 이전 시기, 즉 기원전 1550년경(제17왕조 말기)까지의 대표적인 피라미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부터 5000년쯤 전에 시작된 이집트의 역사를 기이한 옛 무덤들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엄한 위용, 간결하면서도 조화로운 형태미의 극치…. 이집트 피라미드는 고대인이 보기에도 이미 하나의 ‘기적’이었다. 도대체 피라미드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든 것일까. 이같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많은 고고학과 이집트학 연구자들이 애를 썼지만 아직까지 속시원히 실체를 밝혀내고 못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모두 몇 개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제껏 발견된 피라미드 가운데 그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 것들도 적지 않다. 피라미드라는 말의 어원도 분명치 않다. 혹자는 피라미드의 높이를 표현하는 말인 기하학의 ‘페레무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그리스어의 ‘피르’(pyr, 불)에서 피라미드라는 단어가 나온 것으로 간주한다. 밀가루로 빚은 케이크를 뜻하는 그리스어 ‘피라미스’를 어원으로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피라미드 자체가 피라미드 복합체의 가장 중요한 건조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와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는 신전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피라미드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피라미드와 인접한 장제(葬祭) 신전, 하안(河岸) 신전, 주벽(周壁) 등을 포함하는 피라미드 복합체를 폭넓게 다룬다. 피라미드는 대체로 나일강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라미드의 묘역은 나일강 서안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이곳에 하안 신전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죽은’ 왕이 ‘살고 있는’ 사후궁전의 입구로, 인공운하를 통해 나일강과 연결되는 선착장 구실을 했다. 이 하안 신전으로부터 서쪽으로 오르막길 즉 참도(參道)가 이어지는데, 이 길은 장제 신전에까지 닿도록 돼 있다. ●흥미로운 피라미드 탐사 일화도 소개 책은 지난 세대의 탐사일화도 흥미롭게 들려준다.‘람세스’의 이름을 토대로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석해 낸 샹폴리옹의 감격적인 순간도 있고, 세켐케트 피라미드 발굴과정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뒀음에도 동료학자들의 몰이해로 나일강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집트의 젊은 고고학자 고네임의 비극도 있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쿠푸의 대피라미드 꼭대기에 국기를 꼽고 “프로이센이여 고결하라!”라고 외친 프로이센 탐사대의 에피소드는 차라리 한 편의 소극(笑劇)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처음 판독해 낸 샹폴리옹이 18세기 인물임을 감안하면 피라미드는 대략 48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침묵을 지켜온 셈이다. 이에 비해 이집트 연구의 역사는 200년 남짓이다. 그러니 피라미드의 실체를 밝혀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피라미드 한 기의 측량자료만 모아 놓아도 새로운 피라미드가 생길 정도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모든 피라미드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쟁쟁한 고고학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렙시우스, 로에르, 마리에트, 보르하르트, 피트리 등이 그들이다.2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퇴직 교원 491명 훈·포장

    정부는 지난 8월 말 명예·의원 퇴직한 교원 491명에게 재직연수에 따라 훈·포장 및 표창을 수여한다고 31일 밝혔다. 오제직(吳濟直) 전 공주대 총장 등 2명은 청조근정훈장, 남암순(南巖純) 서울쌍문초 교장 등 41명은 황조근정훈장을 받는다. 강정중(姜正中) 충북 청산고 교감 등 32명은 홍조근정훈장, 정송렬(鄭松烈) 전남 순천왕조초 교감 등 55명은 녹조근정훈장, 정순옥(鄭順玉) 대구 아양중 교감 등 83명은 옥조근정훈장을 수여받는다. 훈·포장 및 표창장을 받는 사람의 명단은 인터넷서울신문(www.seoul.co.kr)에 게재.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청조근정훈장 吳濟直(전 총장 공주대) 朴容燮(총장 한국해양대) ◆황조근정훈장 林英澤(교장 서울서교초) 南巖純(교장 서울쌍문초) 梁順玉(교감 서울용암초) 白永淑(교사 서울방이초) 金英淑(교장 서울서래초) 安泰煥(교장 대구신천초) 金圭光(교감 동대구초) 權鎰山(교감 광주전산고) 金永俊(교장 한밭고) 高龍根(교장 덕소초) 金昌鉉(교장 호원초) 趙南玉(교장 태장중) 郭哲永(교육장 안산교육청) 金義雄(교장 주문초) 金京用(교감 금천초) 鄭淵子(교사 목행초) 金鎭培(교감세광고) 朴偉文(교장 광신초) 金正泰(교장 둔포초) 梁鳳錄(교감 은진초) 金文成(교장 전주덕일초) 金寧一(교장 마령초) 黃吉澤(교장 전주송북초) 尹在星(교장 우석여고) 金和年(교장 안동동부초) 兪炳忠(교장 쌍림초) 朴亨武(교장 금천초) 金光雄(교감 박곡초) 林征雄(교장 북삼중) 李東仲(교장 산양초) 全琮燁(교장 부북초) 金忠周(교장 쌍계초) 李大坤(교장 북성초) 許宗武(교사 문선초) 韓英吉(교장 생초초) 吳昌生(교장 법환초) 裵仁鎬(총장 대구예술대) 金允求(교수 충북대) 尹用植(교수 한국방송통신대) 鄭吉雄(교수 동주대) 鄭斗永(교수 청주교대) ◆홍조근정훈장 朴鳳錫(교장 서울구로초) 河性淙(교육장 강서교육청) 林演植(교장 서울사당초) 孫德熙(교감 서울금호초) 洪性植(교장 서울교대 부설초) 趙明倫(교장 선화예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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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惠榮(교사인천병방초) 崔喜鎭(교사 북인천중) 金英熙(교감 대전어은초) 崔英逸(교감 남창고)崔明姬(교감 울산경영정보고) 李暎枝(교감 성광여고) 洪性贊(교감 덕도초) 崔如承 (교사 슬기초) 盧相英(교감 교문초) 金仁燮(교감 운암초) 李信姬(교사 은계초) 南仁淑(교사 서천초) 沈景澤(교감 청솔중) 權眞善(교감 내정중) 張日姬(교감 효자중) 崔德均(교사 풍덕고) 金富蓉(교사 치악중) 金善美(교감 평창중) 金時永(교사 봉명중)洪千義(교사 청운중) 都鍾煥(교사 덕산중) 李惠璟(교사 연무중앙초) 李誠蘭(교사 서산여고) 尹賢鐘(교사 천안동여중) 梁慶模(교사 홍동초) 曺美貞(교사 작천초) 金洪 (교사 지도초) 崔炳鎬(교사 나주동강중) 李民姬(교사 보성여중) 南貞美(교감 송정초)曺永哲(교감 길주초) 朴世東(교사 경산동부초) 黃成玉(교감 상주공고) 權容호(교사대흥중) 李慧星(교사 선산고) 金南一(교감 함안여중) 金洪泰(교사 함안대산고) 尹鉉璂(교감 금남고) 吳仙任(교사 의령여중) 高英心(교사 인화초) 李宅相(교사 남광초)李榮吉(교사 한림중) 李榮洪(교사 제주여상) 權秀英(교사 북촌초) 尹景民(교수 강원대) 朴靑山(교수 건국대) 朴志煥(교수 부경대) 李再源(교수 영남대) 金東奭(교수 영남대) 鄭華善(교수 영남대) 鄭宗祐(교수 전북대) 吳根鎬(교수 한양대) 尹大星(교수서울예술대학) 趙在善(교수 서울예술대학) 李知洙(교수 한국방송통신대) 金惠淑(교수 동주대) 崔美羅(교수 순천제일대) 張憲(부교수 순천제일대) 丁成玟(부교수 순천제일대) 吉熙星(교수 서강대)
  • ‘고대이집트’ ‘마야문명’ 등 출간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 자연, 예술에 관한 전문서적을 펴내는 출판사로 유명한 이탈리아 화이트스타 출판사의 ‘고대문명 시리즈’ 네 권이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는 지난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앙코르’ ‘고대 인도’ ‘고대 중국’을 낸 데 이어 이번에 ‘고대 이집트’ ‘고대 이스라엘’ ‘잉카 문명’ ‘마야 문명’ 등 네 권을 새로 출간했다.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과 사진을 풍성하게 담고 있는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 응접실 탁자나 거실 소파에 놓고 짬짬이 들여다보는 이른바 ‘커피 테이블 북’ 개념의 책이다. ‘고대 이집트’(알베르토 실리오티 지음, 박승규 옮김)는 파라오의 시대부터 이집트 아랍 공화국에 이르는 5000년 이집트의 역사를 다룬다. 나일 계곡에 언제 인간들이 발을 디뎌놓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략 기원전 4000년경 40여개의 도시국가가 세워졌고, 기원전 3500년경에는 상·하 두 왕국으로 통합됐으며, 기원전 3000년경에 비로소 통일왕국이 성립된 것으로 본다. 통일왕조가 세워진 뒤에는 30왕조가 흥망했다. 이 책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천년왕국의 신성한 땅 이집트의 종교와 삶 그리고 신들의 세계를 살핀다.‘고대 이스라엘’(사라 코차프 지음, 이영찬 옮김)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계 3대 종교가 만나는 문명의 교차점인 이스라엘 땅으로 떠난다. 요르단강을 따라 갈릴리 언덕을 넘어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네게브 사막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영토와 민족, 사적지, 예술품들을 보여준다. 책은 헤롯 시대의 예루살렘과 십자군 시대의 항구도시였던 악고, 로마시대와 비잔틴시대 벧산의 옛 영광을 재현했으며,‘성묘교회’ ‘바위의 돔’ 등 건축물들을 투시도를 통해 설명한다. ‘잉카 문명’(마리아 롱게나 등 지음, 고형지 옮김)은 기원전 3000년부터 잉카 제국이 몰락한 1533년까지 고원지대와 안데스의 설봉 사이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한 문명들의 역사를 다룬다. 벽돌 피라미드에서 기상천외한 석조도시, 월터 알바가 람바예케에서 발굴한 모체(Moche)의 무덤까지 흥미진진한 고고학 유적지들을 만날 수 있다.‘마야 문명’(마리아 롱게나 지음, 강대은 옮김)은 멕시코 문화의 영화와 몰락,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된 자취를 펼쳐보인다. 멕시코 남부, 벨리즈, 온두라스 그리고 엘살바도르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의 다양한 문화들은 오늘날 ‘메소아메리카 문명’이라 불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대 멕시코 문명이다. 책은 피에 굶주린 낯선 신들로 가득한 마야문명의 영광과 몰락의 흔적을 더듬는다. 각권 9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씨줄날줄] 지진 공포/오풍연 논설위원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이탈리아 나폴리.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폼페이에 도착한다. 과거 로마시대엔 어떤 도시보다 부유층의 리조트로서 인기가 높았다. 호화로운 별장에 수도, 포장로, 상점 등 기반시설도 완벽했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 인구는 2만명. 그런 도시에 큰 재앙이 닥쳤다.AD 63년 대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79년 8월24일엔 베수비오산이 대폭발했다. 이 거대한 도시는 지구상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1748년 한 농부에 의해 청동과 대리석 조각이 발견되면서 신화속의 도시는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이처럼 지진은 전체 도시를 삼키기도 한다. 사상자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20세기 이전에 일어난 지진은 피해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920년 중국 간쑤성(甘肅省)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23만명이 숨졌다. 당시 진도는 8.5였다.1923년에는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 진도 7의 대지진이 발생했다.9만여명이 사망하고 행방불명된 사람도 4만여명에 이르렀다. 그후 1931년부터 1980년까지 50년 동안 전세계에서 일어난 진도 7.0 이상의 지진은 490여 차례나 된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지구촌 곳곳을 강타했다.5대양 6대주에 지진 안전지대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안전한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1800회 가까운 서술이 있지만 지각의 특성을 밝히는 등 연구를 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평가다. 우리나라엔 1905년 인천에 처음 지진계가 설치됐다.1936년 7월4일 지리산 쌍계사 지진과 1978년 10월7일 홍성 지진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물론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활발한 지진활동이 있었으므로 낙관은 금물일 것이다. 일본 열도가 지난 23일 오후 발생한 ‘니가타 지진’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일본인들은 20여명 사망,2200여명 부상이라는 사상자 숫자보다 신칸센(新幹線) 탈선에 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고속열차가 개통 40년만에 처음 탈선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1명도 없었다. 지난 1995년 고베 지진 이후 설치한 강제 제동장치 덕분이라고 한다.KTX를 운행 중인 우리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LA타임스 ‘스캔들’ 격찬

    |로스앤젤레스 연합|지난 주 뉴욕에서부터 미국에 개봉되기 시작한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 남녀 상열지사(Untold Scandal)’는 18세기 조선이 그 배경이 됐을 뿐 프랑스 소설 ‘위험한 정사(Les Liaisons Dangereuses)’의 예기치 않은, 더 없이 훌륭한 버전이라고 22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격찬했다. 타임스 영화담당기자 케네스 트란은 이날 캘린더 섹션 영화비평에서 ‘스캔들’이 옛 이야기를 새로운 틀 안에서 잘 소화한 작품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트란 기자는 이재용 감독이 새롭게 해석한 ‘스캔들’은 확실히 예상치 못한 버전으로 지금까지 나온 비슷한 작품 가운데 어쩌면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점잖은 체하면서도 에로틱하고 놀랍도록 감성적이며 절묘하다는 것이다. 그는 ‘스캔들’의 (기존 영화와의)차이는 그 배경이 18세기 프랑스가 아니라 조선왕조 말기 한국으로, 프랑스혁명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적 도덕성과 사적 음탕함이 두드러졌던 시대라고 덧붙였다.
  • [수도이전 위헌 파장] ‘서울=수도 관습헌법 요건 되나’ 논쟁확산

    [수도이전 위헌 파장] ‘서울=수도 관습헌법 요건 되나’ 논쟁확산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개념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을 위헌이라 결정하자 법조계는 22일 법리논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결정문을 꼼꼼히 살펴보며 ‘새로운 법해석’‘관습법에 대한 오해’란 엇갈린 의견을 쏟아냈다. 관습헌법이란 헌법학계에서조차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는 개념인 까닭이다. 주요 쟁점별로 정리한다. ●관습헌법이 존재하는가 헌재 다수의견은 성문헌법에 모든 헌법사항을 빠짐없이 규율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관습헌법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사재판에서 법원이 관습법의 존재를 인정, 심리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헌재의 실무제요 93쪽 ‘위헌 법률심판의 심사기준’도 “명시된 법률뿐만 아니라 ‘헌법관습법’도 심판절차의 기준”이라고 규정, 관습헌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대다수의 헌법학자들도 어느 나라든 성문헌법을 보완하는 관습헌법이 존재한다고 입을 모은다. 명지대 김철수 석좌교수는 “국기나 애국가 등 헌법조항에는 없지만 헌법만큼 기본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관습헌법”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관습헌법은 공론화되지 않았지만 교과서적 개념”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대한변호사협회 김갑배 법제이사는 “민법은 법률에 없으면 관습법에 따른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헌법은 관습헌법에 대한 근거를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며 반박했다. 성균관대 김형성 교수도 “우리 헌법은 대통령, 국회의원 선출 등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어 관습헌법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법 한 부장판사는 “헌재 결정으로 관습법 체계인 영·미법계 정신과 성문법 체계인 대륙법계 정신이 막 뒤섞여 우리 헌법체계가 혼란을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울=수도’ 관습헌법인가 서울은 사전적 의미로 바로 ‘수도’의 의미를 지녔고,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된 이후 600여년 동안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기에 관습헌법에 해당한다고 헌재 다수의견은 설명했다.‘서울=수도’라는 개념은 오랜 전통에 의한 계속적 관행이고, 이 관행이 중간에 깨진 적이 없으며,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 국민적 합의를 얻고 있어 관습헌법의 요건을 모두 갖췄다는 것이다. 북한 등 70여개 국가가 헌법에 수도 위치를 규정한다는 점도 고려됐다. 그러나 법조계는 “국민이 ‘수도=서울’이란 개념을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미지수”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잇따라 내놓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헌재의 해석은 그동안 헌법학계와 판례에서 전혀 거론된 적이 없는 신생논리”라면서 “헌재의 자의적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경희대 정태호 교수는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에 서울특별시는 ‘수도로서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면서 “법률로 규정된 사항을 관습헌법이라 또다시 명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소수의견을 낸 전효숙 재판관도 “흔히 관습헌법으로 여겨지는 태극기와 한글의 경우도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과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서 규율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규정형식이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서울대 최대권 명예교수는 “태극기, 한글 등은 관습헌법으로 받아들여진 사항을 하위법률로 명시한 것뿐”이라면서 “국어를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꾸는 등 근본적 변화를 추구할 때 국민의 합의가 없다면 당연히 위헌”이라고 재반박했다.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의 개정절차를 따라야 하나 헌재 다수의견은 “관습헌법을 폐지하려면 성문헌법의 개정절차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다. 관습헌법이 성문헌법과 동일한 효력·지위를 지녔다는 이유에서다.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과 유권자 과반수 투표에 과반수 찬성으로서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 한 관계자는 “민법에서 규정한 관습법을 고치려면 법률 개정 요건을 갖춰야 하듯 관습헌법도 성문헌법 개정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헌법학자들은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에 대한 보완적 효력만을 지녔기에 국민적 합의나 법률개정 등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효숙 재판관도 “법률에 규정되지 않는 한 아무리 처벌할 필요성이 있어도 처벌할 수 없는 것처럼, 성문헌법에 규정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법적효력은 달라진다.”고 밝혔다. 성문헌법과 관습헌법이 동등한 효력·지위를 가질 순 없다는 것이다. 고려대 장영수 교수는 “헌법 130조 국민투표권 규정은 성문헌법의 개정을 전제로 한 것이지 관습헌법의 개정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면서 “헌재의 법리 전개는 적절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국회의 동의없이 국민투표 등으로도 얼마든지 관습헌법 개정이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변협 김갑배 법제이사는 “관습헌법이 성문헌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면 헌재가 언제든지 국회의 입법권을 제약할 위험이 있다.”면서 “이는 대의민주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강충식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책꽂이]

    ●문장기술(배상복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평소의 상식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하면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중앙일보 기자인 저자는 처음부터 잘 쓰려고 욕심을 부려선 글을 완성하기 힘들다며 일단 말하듯 줄줄 적어내려간 뒤 찬찬히 읽어보며 문제가 있는 부분을 고쳐나갈 것을 권한다.1만원. ●사기를 탄생시킨 사마천의 여행(후지타 가쓰히사 지음, 주혜란 옮김, 이른아침 펴냄) 사마천은 스무 살 때 장강에서 회수·산동·황하 유역을 여행했으며, 그 후에도 관리로서 혹은 무제를 수행하면서 한나라의 주요 지역을 거의 돌아봤다.‘사기’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일곱 번에 걸친 중국대륙 여행이 있었다. 이 책은 사마천의 중국대륙 여행이 ‘사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밝힌다.‘사기’는 중국 전설 속의 제왕인 황제 때부터 하·은·주의 3대, 춘추전국시대, 진왕조를 거쳐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까지 약 30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최초의 기전체 통사다.1만 2000원. ●캔터베리 이야기 연구(김재환 지음, 소화 펴냄)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의 미완성 운문 설화집. 캔터베리의 순교자 묘지를 참배하러 가는 순례자들이 여관에서 주고받았다고 하는 스물세 가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작품의 틀은 심한 격자결함(lattice deformity, 물질의 결정 안에 있는 원자의 배열이 규칙적이지 못하고 문란해진 현상))을 드러내는 등 현대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작품이다. 저자(한림대 교수)는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초서의 작가의식을 살핀다.1만 5000원. ●나는 학생이다(왕멍 지음, 임국웅 옮김, 들녘 펴냄) 중국의 대문호 왕멍(王蒙)의 인생철학 담론서. 왕멍은 열네 살의 나이로 중국혁명에 뛰어들어 지하당(공산당)에서 활동했지만,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파로 낙인찍혀 사막의 땅인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16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마침내 복권돼 문화부 장관까지 지냈다. 첫 장편소설 ‘청춘만세’를 비롯,‘볼셰비키의 경례’ ‘변신인형’ 등이 그의 작품.“인생은 명랑한 항해”라고 말하는 왕멍은 배움을 통해 인생을 통달하고 향유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말한다.9800원. ●퍼팅, 마음의 게임(밥 로텔라 지음, 원형중 옮김, 루비박스 펴냄) ‘게임 안의 게임’ ‘골프대회는 곧 퍼팅 콘테스트’라는 말처럼 퍼팅은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골퍼들은 퍼팅을 매우 두려워한다. 닉 프라이스, 데이비스 러브 3세, 존 댈리 등 세계적인 골퍼들을 상대로 정신적 조언을 해주고 있는 미국의 스포츠 심리학자인 저자는 세상에 완벽한 퍼팅 기술은 없다며 자신의 퍼팅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퍼팅은 퍼팅 스트로크를 할 때 머리와 신경계가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놓아두라고 말한다.1만 2000원. ●버즈 마케팅(메리언 살즈만 등 지음, 김상영 옮김, 사람과책 펴냄) 버즈(buzz)란 용어는 원래 벌이나 기계 등에서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엔 고객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에 열광해 일종의 신드롬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버즈 마케팅은 구전 마케팅과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생겨난 바이러스 또는 바이어럴 마케팅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책은 마케팅에서의 버즈 효과를 소상히 다룬다.1만 7000원.
  • [수도이전 위헌 파장] 憲裁결정문 요지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확인)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이상경 재판관)는 2004년 10월 21일 수도의 이전을 내용으로 하는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우리 헌법체계상 자명하고 전제된 불문의 관습헌법 사항을 헌법개정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어서 그 법률 전체가 청구인들을 포함한 국민의 헌법개정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이 결정은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는 김영일 재판관의 별개의견과 국민투표권을 포함한 청구인들의 기본권 침해의 가능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부적법 각하하여야 한다는 전효숙 재판관의 반대의견이 있는 외에는 나머지 재판관들의 의견일치에 의한 것이다. (1)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2004년 1월 16일 공포되어 같은 해 4월 17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법률에 근거하여 발족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7월 21일 주요 국가기관 중 중앙행정기관 18부 4처 3청(73개 기관)을 신행정수도로 이전하고, 국회등 헌법기관은 자체적인 이전 요청이 있을 때 국회의 동의를 구하기로 심의·의결하였다. 한편 8월 11일 위 위원회는 ‘연기-공주 지역’(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금남면, 동면, 공주시 장기면 일원 약 2160만평)을 신행정수도 입지로 확정하였다. (2)청구인들은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국민들로서, 위 법률이 헌법개정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수도이전을 추진하는 것이므로 법률 전부가 헌법에 위반되며 이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 납세자의 권리, 청문권, 평등권 등의 기본권을 침해받았다는 이유로 위 법률을 대상으로 그 위헌의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였다. 이 사건 심판의 대상은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2004년 1월 16일 제정 법률 제7062호, 이하 ‘이 사건 법률’이라 한다)이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이다.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2004년 1월 16일 법률 제7062호)은 헌법에 위반된다. 가. 이 사건 법률의 내용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수도는 국가권력의 핵심적 사항을 수행하는 국가기관들이 집중 소재하여 정치·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실현하고 대외적으로 그 국가를 상징하는 곳을 의미한다. 이 사건 법률은 신행정수도를 ‘국가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로 새로 건설되는 지역으로서……법률로 정하여지는 지역’이라고 하고(제2조 제1호), 신행정수도의 예정지역을 ‘주요 헌법기관과 중앙행정기관 등의 이전을 위하여……지정·고시하는 지역’이라고 규정하여(같은조 제2호), 결국 신행정수도는 주요 헌법기관과 중앙행정기관들의 소재지로서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가 되어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은 비록 이전되는 주요 국가기관의 범위를 개별적으로 확정하고 있지는 아니하지만, 그 이전의 범위는 신행정수도가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담당하기에 충분한 정도가 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 법률은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기관의 소재지로서 헌법상의 수도개념에 포함되는 국가의 수도를 이전하는 내용을 가지는 것이며, 이 사건 법률에 의한 신행정 수도의 이전은 곧 우리나라의 수도의 이전을 의미한다. 나. 수도가 서울인 점이 우리나라의 관습헌법인지 여부 (1)성문헌법 체제에서의 관습헌법의 의의 우리나라는 성문헌법을 가진 나라로서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전(憲法典)이 헌법의 법원(法源)이 된다. 그러나 성문헌법이라고 하여도 그 속에 모든 헌법사항을 빠짐없이 완전히 규율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헌법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간결성과 함축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형식적 헌법전에는 기재되지 아니한 사항이라도 이를 불문헌법(不文憲法) 내지 관습헌법으로 인정할 소지가 있다. 특히 헌법제정 당시 자명(自明)하거나 전제(前提)된 사항 및 보편적 헌법원리와 같은 것은 반드시 명문의 규정을 두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사항에 관하여 형성되는 관행 내지 관례가 전부 관습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고 강제력이 있는 헌법규범으로서 인정되려면 관습헌법의 성립에 요구되는 요건들이 엄격히 충족되어야 한다. (2)기본적 헌법사항으로서의 수도문제 국가의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지는 수도를 정하는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正體性)을 표현하는 실질적 헌법사항의 하나이다. 여기서 국가의 정체성이란 국가의 정서적 통일의 원천으로서 그 국민의 역사와 경험, 문화와 정치 및 경제, 그 권력구조나 정신적 상징 등이 종합적으로 표출됨으로써 형성되는 국가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수도를 설정하거나 이전하는 것은 국회와 대통령 등 최고 헌법기관들의 위치를 설정하여 국가조직의 근간을 장소적으로 배치하는 것으로서,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임과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3)수도 서울의 관습헌법성 여부에 대한 판단 (가)우리 헌법전상으로는 ‘수도가 서울’이라는 명문의 조항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서울은 사전적 의미로 바로 ‘수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어 한양이 도읍으로 정하여진 이래 600여년간 전통적으로 현재의 서울 지역은 그와 같이 일반명사를 고유명사화하여 불러온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서울 지역이 수도인 것은 그 명칭상으로도 자명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의 성립 이전부터 국민들이 이미 역사적, 전통적 사실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에 즈음하여서도 국가의 기본구성에 관한 당연한 전제사실 내지 자명한 사실로서 아무런 의문도 제기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 후에도 수차의 헌법개정이 있었지만 우리 헌법상으로 수도에 관한 명문의 헌법조항은 설치된 바가 없으나, 서울이 바로 수도인 것은 국가생활의 오랜 전통과 관습에서 확고하게 형성된 자명한 사실 또는 전제된 사실로서 모든 국민이 우리나라의 국가구성에 관한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수도 서울의 역사적 존속 경위 1)조선의 창건과 서울의 수도 설정·계속 서울은 일찍이 고려시대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어 고려의 이른바 삼경제를 이루는 지방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왕조의 창건 직후 곧 수도가 되었다. 한양, 즉 서울의 수도로서의 지위는 성종 때에 완성된 조선의 기본법전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에는 한성부가 경도(京都), 즉 서울을 관장한다고 명시하여 한성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법상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내용은 개정됨이 없이 조선왕조가 존속한 500여년의 장구한 기간동안 계속하여 국가생활의 기본적인 최고 법규범으로서 효력을 유지하였다. 2)일제강점시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의하여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는 상황이 시작되었으나 이후에도 경성부(京城府), 즉 서울은 우리나라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으며, 국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이 선언된 곳이기도 하였다. 비록 일제의 국토강점으로 인하여 국가조직이 와해된 상태에 있었지만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의 대외적인 상징성을 유지하였고 임시정부에서도 서울의 수도성을 당연한 전제로 하여 항일활동 조직을 편성하였으며 국민들의 의식도 변화가 없었으므로 서울의 수도성은 이 시기에도 사실상 유지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3)해방과 건국 이후 현재까지의 서울의 수도성 유지 해방 이후 서울이 수도인 것을 언급하는 법률조항들이 계속 존재하여 왔으나, 이들은 서울이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점을 이미 존재하는 규범적 전제로서 받아들이면서 이를 기준으로 수도 서울의 특별한 지위를 법률적으로 설정하기 위한 조항들이었고, 법률의 차원에서 서울이 수도인 점을 확정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이러한 입법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서울이 수도인 점에 대한 우리 국민의 전통적인 법적 확신이 확인된다. (다)그렇다면 수도가 서울로 정하여진 것은 비록 우리 헌법상 명문의 조항에 의하여 밝혀져 있지는 아니하나, 조선왕조 창건 이후부터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장구한 기간 동안 국가의 기본법 규범으로 법적 효력을 가져왔던 것이고, 헌법 제정 이전부터 오랜 역사와 관습에 의하여 국민들에게 법적 확신이 형성되어 있는 사항으로서, 우리 헌법의 체계에서 자명하고 전제된 가장 기본적인 규범의 일부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불문의 헌법규범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라)이를 관습헌법의 요건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인 것은, 서울이라는 명칭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래 600여년간 우리나라의 국가생활에 관한 당연한 규범적 사실이 되어 왔으므로 오랜 전통에 의하여 형성된 계속적 관행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계속성), 이러한 관행은 변함없이 오랜 기간 실효적으로 지속되어 중간에 깨어진 일이 없으며(항상성),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개인적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없는 명확한 내용을 가진 것이고(명료성), 나아가 이러한 관행은 장구한 세월동안 굳어져 와서 국민들의 승인과 폭넓은 컨센서스를 이미 얻어(국민적 합의) 국민이 실효성과 강제력을 가진다고 믿고 있는 국가생활의 기본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우리의 제정헌법이 있기 전부터 전통적으로 존재하여 온 헌법적 관습이며, 우리 헌법조항에서 명문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명하고 헌법에 전제된 규범으로서,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한다. 다.‘수도 서울’의 관습헌법 폐지를 위한 헌법적 절차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점에 대한 관습헌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법개정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성문의 수도조항이 존재한다면 이를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이 필요하겠지만 관습헌법은 이에 반하는 내용의 새로운 수도설정조항을 헌법에 넣는 것만으로 그 폐지가 이루어진다. 예컨대 충청권의 특정지역이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조항을 헌법에 개설하는 것에 의하여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은 폐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헌법규범으로 정립된 관습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과 헌법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에 대한 침범이 발생하고 나아가 그 위반이 일반화되어 그 법적 효력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상실되기에 이른 경우에는 관습헌법은 자연히 사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멸을 인정하기 위하여서는 국민에 대한 종합적 의사의 확인으로서 국민투표 등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고려될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에 이러한 사멸의 사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인 것은 우리 헌법상 관습헌법으로 정립된 사항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사정의 변화도 없다고 할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 개정의 절차에 의하여야 한다. 라. 국민투표권의 침해 여부 수도의 설정과 이전의 의사결정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기본적 헌법사항으로서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다. 또한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인 점은 불문의 관습헌법이므로 헌법 개정절차에 의하여 새로운 수도 설정의 헌법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실효되지 아니하는 한 헌법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 개정의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수도를 충청권의 일부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이 사건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헌법개정사항을 헌법보다 하위의 일반 법률에 의하여 개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헌법의 개정은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되어(헌법 제128조 제1항)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에 따른 국회의 의결을 거친 다음(헌법 제130조 제1항) 의결 후 30일 이내에 국민투표에 부쳐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만(헌법 제130조 제3항)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헌법의 개정은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만 하므로 국민은 헌법 개정에 관하여는 찬반투표를 통하여 그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이 사건 법률은 헌법개정사항인 수도의 이전을 위와 같은 헌법개정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단지 단순법률의 형태로 실현시킨 것으로서 결국 헌법 제130조에 따라 헌법 개정에 있어서 국민이 가지는 참정권적 기본권인 국민투표권의 행사를 배제한 것이므로 동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구인들이 제기한 다른 쟁점들에 대하여 더 나아가 판단할 필요도 없이, 수도의 이전을 확정함과 아울러 그 이전절차를 정하는 이 사건 법률은 우리나라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 사항을 헌법개정 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법률의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어서 그 법률 전체가 청구인들을 포함한 국민의 헌법개정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으므로 헌법에 위반된다. 이 사건 법률은 청구인들의 기본권인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 별개 의견의 요지이다. 수도이전에 관한 의사결정은 헌법 제72조가 규정하는 국방·통일 및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에 해당하므로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이 어떠한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의하는 행위는 자유재량 행위이다. 그러나 법치주의의 원리는 어떠한 공권력의 작용이라도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요구하므로 대통령의 국민투표 부의행위가 자유재량 행위라고 하더라도 재량권의 일탈·남용이 있는 경우에는 그 재량권의 근거 규범인 헌법 제72조에 위반된다. 대통령이 수도이전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지 아니하는 것은 헌법 제72조의 입법목적과 입법정신에 위배되고 자의금지원칙과 신뢰보호원칙에 반하므로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위헌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재량권을 적법하게 행사한다면 위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대통령은 수도이전에 관한 의사결정을 국민투표에 부칠 의무가 있다. 이에 국민은 위 대통령의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인 국민투표권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 법률은 국민투표에 의하지 아니하고 수도이전의 의사결정을 한 것이어서 국민투표를 확정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한다. 수도의 위치가 관습헌법 규범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가사 다수의견과 같이 관습헌법 규범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나아가 헌법 제130조보다는 헌법 제72조에 의하여 이 사건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함이 보다 타당하다. 가. 나는 다수의견의 논지는 우리 헌법의 해석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힌다. (1)우선 오늘날의 헌법에서 과연 한 나라의 수도의 위치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수도의 소재지는 국가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사항이었으나,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주된 가치로 하고 있는 우리 헌법은, 국가권력의 통제와 합리화를 통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실현하려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다. 수도의 소재지가 어디이냐 하는 것은 그러한 헌법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그러한 목적 실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항이라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헌법상 수도의 위치가 반드시 헌법 제정권자나 헌법 개정권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2)‘서울이 수도’라는 관행적 사실에서 ‘관습헌법’이라는 당위규범이 인정되기 어렵다.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자명하게 인식되어온 관행에 속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그것을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확신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들에게 수도의 위치가 성문헌법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는, 즉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 할 정도의 법적 확신이 존재하여 왔다고 볼 수 없다. 수도이전 문제는 최근에야 우리 사회의 주된 쟁점이 되었고, 이 사건 법률의 입법과정에서도 여야 국회의원들은 수도이전 사안이 국민의 헌법적 확신을 지니는 헌법사항이라든가, 그 개정은 헌법개정절차를 통하여야 하므로 입법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든가 하는 점에 관한 인식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사실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헌법적 당위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이다. (3)성문헌법을 지닌 법체제에서, 관습헌법을 성문헌법과 ‘동일한’ 혹은 ‘특정 성문헌법 조항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 성문의 헌법전은 헌법제정권자인 국민들이 직접 ‘명시적’ 의사표시로 제정한 것으로서 국가의 법체계 중 최고의 우위성을 가지며, 그 내용의 개정은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 점에서, 관습헌법과 성문헌법은 동일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성문헌법의 특징은 최고 법규범으로서 모든 국가권력을 기속하는 강한 힘을 보유하는 것인데, 이는 국민주권의 명시적 의사가 특정한 헌법제정절차를 거쳐서 수렴되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관습만으로는 헌법을 특징화하는 그러한 우세한 힘을 보유할 수 없는 것이다. 성문헌법 체제에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에 대한 보완적 효력만을 가진다. 성문헌법이 존재하는 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으로부터 동떨어져 성립하거나 존속할 수 없고, 항상 성문헌법의 여러 원리와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적 관행에 의해서 성문헌법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되고 성문 헌법전보다 불문적인 헌법의 관행 예가 우선하고 국가생활을 지배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법리는 관습헌법의 내용이 중요한 ‘헌법사항’이라 하더라도 동일하다. 국민들은, 설령 헌법제정시 자명한 사실이어서 성문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사항이 있더라도, 언제든지 그러한 사항을 성문 헌법전에 수록할 수 있는 헌법개정권력을, 자신의 대표자와 국민투표를 통하여 행사할 수 있고, 이로써 성문헌법의 효력을 가지게 할 수 있다. 마치 법률에 규정되지 않는 한 아무리 처벌 필요성이 있는 사항도 처벌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성문헌법에 규정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법적 효력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다수의견은 관습‘법률’이 아닌 관습‘헌법’은 ‘헌법’이므로 그 변경은 헌법 개정절차를 통해야 한다고 하나, 이는 형식적 개념논리만 강조된 것이다. ‘관습헌법’이란 실질적 의미의 헌법 사항이 관습으로 규율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며, 관습헌법이라고 해서 바로 성문헌법과 똑같은 효력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성문헌법의 강력한 힘은 국민주권의 명시적 의사가 특정한 헌법제정절차를 거쳐서 나왔기 때문인데, 관습은 그러한 명시적 의사나 특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인정되므로 성문헌법과 같은 효력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 다수의견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사항은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라고 하나,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와 한글의 경우도 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과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에서 규율되고 있는데, 그러한 규정 형식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수도와 같은 관습헌법의 변경을 헌법 개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의 개정은 ‘형식적 의미’의 헌법, 즉 성문헌법과 관련된 개념이다. 헌법제정권자가 헌법개정을 일반 법률 절차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를 거치도록 한 이유는, 헌법전에 규정된 내용이 주권자의 의지의 명시적 표명으로서 이를 함부로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헌법에 들어있지 않은 헌법사항 내지 불문헌법의 변경은 헌법의 개정에 속하지 않으며, 우리 헌법이 마련한 대의민주주의 절차인 법률의 제정, 개정을 통하여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국회가 수도이전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민의를 대변하지 않고 당리당략적으로 입법한 것이라면, 그것이 헌법과 국회법 절차에 위반되지 않는한, 그러한 입법의 궁극적 책임은 국회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여야 하는 대의기관에 불과한 이상 그러한 입법부를 구성한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다수의견의 논지에 따르면 아무리 국회가 이 사건 법률 제정과정에서 공청회와 청문회 등 충분한 국민의사 수렴절차를 거쳤고, 국회의원 전원일치로 법률이 통과되었더라도, 헌법 개정절차를 거치지 아니하였다는 형식적 이유만으로 위헌이 되는데, 그러한 결론이 타당하리라 보기 어렵다. (5)‘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변경은 헌법개정에 의해야 한다면, 이는 관습헌법이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입법권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습헌법에 대하여 국회의 입법권보다 우월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고 규정하며, 헌법에 달리 규정이 없는 한 국회의 입법권은 포괄적 대상을 지닌다. 입법권의 주체는 다름아닌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된 대의기관이며, 헌법은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대의제를 기본형태로 채택하고, 국민으로부터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표기관이 입법작용을 통하여 그 이념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수도이전과 같은 헌법관습의 변경의 경우, 별도로 이를 제한하는 헌법규정이 없는 경우 왜 국회의 입법으로 불가능한 것인지 실질적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많은 나라에서 의회가 국민투표 없이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데, 이는 의회가 다름아닌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주권의 대행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 법률은 투표의원 194인 중 찬성 167인(반대 13인, 기권 14인)으로 재적과반수와 출석 3분의2 이상의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었는데, 그러한 입법이 국민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였다는, 혹은 민의를 배신하였다는 정치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별도로 하고, 적어도 헌법적 측면에서 그것이 ‘국회의원들의 권한이 아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결론은 관습헌법으로서 국회의 헌법상의 입법권한을 부인하는 것이고, 이는 헌법을 변경하는 것이 되므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관습에 의한 헌법적 규범의 생성은 국민주권이 행사되는 한 측면인 것이다.’라고 하나, 성문헌법 체제하에서 국민주권의 행사는 저항권의 행사와 같은 특별한 예외가 아닌한 성문헌법의 테두리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국민의 의사인지를 확인하기 어렵고 국민들 간에도 특정 사안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 있으므로, 헌법이 객관적으로 규정한 제도화된 절차가 아닌 헌법 외적인 방식으로 ‘국민주권의 행사’를 인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헌법이 예정하지 않은 그러한 문제는 그것이 국가의 위기상황에 관련된 것이 아닌한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에 맡겨야 하는 것이다. (6)결론적으로 서울을 수도로 한 관습헌법의 변경이 반드시 헌법개정을 요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고, 헌법해석상 국회의 입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130조 제2항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나. 한편 나는 별개의견이 이 사건 법률은 헌법 제72조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하였다고 한 논지도 받아들일 수 없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에게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인지 여부에 관하여 재량을 주고 있는데,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그 재량 여부가 달라진다고 해석할 수 없다. 헌법 제72조가 대통령에게 과도한 재량을 주고 있어 국민주권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효과적인 제도인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현행 헌법상 위와 달리 해석할 만한 근거가 없다. 또한 그러한 재량은 헌법이 직접 부여한 것이므로, 행정법상의 재량권의 일탈·남용 법리는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행정수도의 이전 정책에 대하여 대통령이 국민투표 부의를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국민투표권이 행사되지 못했더라도, 이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이 침해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청구인들의 국민투표권 침해 주장은 권리의 침해 가능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부적법하다. 청구인들이 주장한 다른 기본권 침해 주장 역시 기본권 침해의 자기관련성, 직접성 혹은 현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기본권 침해’를 구제하기 위한 헌법소원절차에서 헌법재판소가 본안판단을 하기에 부적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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