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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나일혁명/이목희 논설위원

    일부 역사학자들은 문명 서진론(西進論)을 주장한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인류문명이 에게해를 거쳐 그리스·로마로 이어졌고, 다시 서유럽과 미국 등 서쪽으로 중심이 옮겨갔다는 것이다.5000년전 처음으로 절대왕조를 만들어 2000년 이상 중·근동 패자로 군림했던 나라가 이집트다. 로마의 침략을 받아 줄타기외교를 하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로 생을 맺은 후 세계역사에서 이집트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하지만 중동·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작은 나라가 아니다. 인구가 7000여만명이고, 땅넓이는 한반도의 5배에 이른다. 유엔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늘릴 경우 아프리카 대표로 후보군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 1952년 청년장교 나세르가 ‘이집트혁명’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국왕을 쫓아냈다. 이후 사다트와 무바라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군출신 인사들이 장기집권하고 있다. 대통령은 임기가 6년이지만 연임제한이 없다. 사실상 단일후보로 출마함으로써 무바라크의 24년 통치가 이어져왔다. 올 가을 대선을 앞두고 무바라크는 직선제를 수용했으나 대통령 출마자격은 여전히 까다롭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키파야’를 앞세워 연일 시위를 벌이고, 정부는 이를 막느라 고심하고 있다.‘키파야’는 ‘충분히 했다’는 뜻의 아랍어로, 이승만정권 당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야당 구호와 비슷하다. 아랍·아프리카의 지도국 이집트가 민주혁명을 이룬다면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레바논, 키르기스스탄에 이어 벨로루시, 몽골로 민주화 열기가 확산되고 있지만 이집트가 갖는 비중은 격이 다르다. 인류문명이 태동한 나일강의 민주혁명이 동서남북으로 퍼져갈 수 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물론 북한 김정일도 영향권이다. 무바라크는 북한과 가까워 남북 중재역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미국이 민주주의증진법 입법에 앞서 바람만 잡는데도 이처럼 격랑이 일고 있다. 미국은 냉전시대에는 ‘친미(親美)’를 우선시했다. 정통성이 약한 권위주의정권이 다루기 편했던 측면이 있다. 소련이라는 주적(主敵)이 없어진 지금,‘친미’를 넘어 정치체제까지 ‘미국화’시키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의 전략과 시대적 추세가 맞아떨어지고 있는 국제상황에서 우리도 눈을 크게 뜨고 국익을 챙겨야 한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盧대통령 “국제문헌·지도서 일제잔재 청산”

    盧대통령 “국제문헌·지도서 일제잔재 청산”

    동해를 일본해로 사용하고 있는 등의 잘못된 국제표기를 우리의 주권회복 차원에서 바로잡는 외교전이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아울러 독도,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등에 범정부 차원으로 대처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29일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전세계에 존재하는 각종 지식정보자료, 문헌이나 기록에 남아 있는 식민지 잔재를 정리하고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문제는 지식정보 영역에서 우리 주권을 회복하는 의미를 갖는다.”면서 “따라서 국가가 적극 나서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국제 문헌이나 인터넷, 학술자료에 기록돼 있는 표기의 문제라든지, 과거 일제식민지 침탈과 관련한 사실이 왜곡돼 기술된 게 상당히 있는 만큼 이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이라면서 “여기에는 동해 표기도 바로 잡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민간 사이버 외교 사절단인 반크(VANK)는 국제기구와 국제적인 언론사 등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역사를 잘못 기술한 사례들을 낱낱이 조사해 놓고 있다. 반크 홈페이지(prkorea.com)에 따르면 미국 CNN방송이나 유니세프, 유엔, 비즈니스 위크, 국제수로기구(IHO) 등은 동해를 일본해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 의회 도서관은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 부분만을 강조해서 기술하고 있고, 미 항공우주국(NASA)은 조선왕조를 이씨왕조로 기록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는 고 손기정 옹을 일본 이름인 ‘기테이 손’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동안 반크가 추진해온 잘못된 국제표기 시정작업은 앞으로 하찬호 국제지명(地名)대사를 중심으로 해 정부 차원에서 외교적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에게 “청·일, 러·일 전쟁 등 역사를 다시 공부해주기 바란다.”면서 “자주국가로서 신사참배, 독도, 교과서 문제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대응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와 관련,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이날 청와대 브리핑에 올린 글에서 “일본의 독도 침탈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전략적 계산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추진됐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1904년 5월 고종황제를 협박해 러시아로부터 울릉도 산림채벌권을 박탈한데 이어 같은 해 9월에는 군함을 보내 독도를 탐문조사하고, 망루 설치가능성을 점검했다는 것이다. NSC의 이같은 글은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최근 ‘독도를 편입하면서 강제력을 행사한 사실이 없다.’고 보도한데 대한 정면반박인 셈이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책꽂이]

    ●조선의 마음:문학으로 읽는 조선왕조사(신봉승 지음, 선 펴냄) 누구나 접근이 쉽도록 문학적인 감성으로 조선의 역사를 풀어낸다. 창업부터 대한제국의 궤멸까지 철저한 실록을 바탕으로 한 56편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1만 5000원. ●세계의 역사교과서(이시와타 노부오·고시다 다카시 편저,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펴냄) 일본의 두 역사학자가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조장하는 자국의 교과서와 이를 만든 이들의 왜곡된 역사관을 정면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전쟁과 식민지 지배란 테마를 중심으로 한국·중국·싱가포르·독일·미국 등 11개국의 역사교과서를 비교분석했다.1만 3000원. ●산다는 것의 의미(김형석 지음, 마음향기 펴냄) 원로 철학자이자 연세대 명예교수인 지은이가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듯 쓴 철학 에세이. 삶의 의미, 친구, 사랑과 결혼, 성공, 돈, 죽음 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삶의 비전을 이야기한다.9000원. ●목수(신응수 지음, 열림원 펴냄) 열여섯 살에 목수의 길에 들어서 46년째 대목장의 길을 걷고 있는 외길 장인의 나무와 고건축 이야기. 나무의 생과 나무를 다루는 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목수의 생을 진솔하게 담았다.1만 800원.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출판 펴냄) 20세기의 독창적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는 지은이가 나폴리, 모스크바, 베를린, 파리 등 전 생애에 걸쳐 겪은 대도시의 매혹과 경험을 명쾌하게 풀어냈다.1만 6000원.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의 북한(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따뜻한손 펴냄) 한국 근·현대사에 정통한 석학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정치학자인 지은이는 6자회담을 둘러싸고 불거진 북·미 양자간 갈등의 근원이 이미 오래전의 한국전쟁에 있음을 설파한다.1만 4500원. ●패션의 유혹(조안 핑켈슈타인 지음, 김대웅·김여경 옮김, 청년사 펴냄) ‘패션’을 사회현상으로 파악하고, 사회학, 문화연구, 젠더, 미디어 문화인류학, 역사학, 미술, 복식사, 기호론에 이르기까지 거시적인 시각에서 패션 전체를 조망한다.1만 5000원. ●대한민국은 받아쓰기중(정재환 지음, 김영사 펴냄) 우리말 지키기 운동에 앞장서온 방송인 정재환이 생활현장속의 생생한 사례를 엮어 낸 우리말 교양서. 상점 간판에서부터 게시판, 광고판, 자장면집 차림표, 인터넷, 방송 자막까지 자주 만나게 되는 왜곡된 언어·문자환경을 고발한다.9900원.
  • [월드이슈-유럽 ‘다빈치 광풍’] ‘다빈치 투어’까지… 바티칸 속수무책

    [월드이슈-유럽 ‘다빈치 광풍’] ‘다빈치 투어’까지… 바티칸 속수무책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의 역사스릴러 소설 ‘다빈치 코드’를 둘러싼 논란의 수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내용의 진위를 둘러싸고 성서 역사가들이 한바탕 논쟁을 벌인 데 이어 표절 논란에까지 휩싸인 이 소설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해 온 가톨릭 교계가 침묵을 깨고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논쟁에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들까지 가세하고 있어 파장이 커지고 있다. |파리 함혜리특파원| 바티칸이 이 소설에 대해 공식 반박 입장을 밝힌 가운데 교계에선 강경 대응과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가톨릭 교계의 논란 지난 17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 강당에서는 제노바교구 주재로 다빈치 코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는 강당 좌석과 복도·창문 밖까지 수백명이 운집해 이 소설에 대한 높은 관심을 단적으로 입증했다.“예수가 진짜 결혼을 했습니까?”“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기를 가졌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교회가 여성의 역할을 무시해 왔습니까?” 질문공세를 받으며 이날 토론회를 주재한 사람은 제노바 교구 대주교이자 차기 교황으로 유력시 되고 있는 타르치시오 베르토네(70) 추기경. 지난 15일 라디오 바티칸을 통해 이 책을 ‘수치스러운 거짓말’‘거짓의 성’으로 비유하며 “읽지도, 사지도 말 것”을 주문한 인물이다. 베르토네 추기경은 이날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왜곡된 이야기를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소설의 파장을 경고하기에는 너무 늦은감이 있지만 우리 신자들, 특히 젊은이들을 비판적 경각심으로 무장시키고 싶다.”면서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 논박하는 목소리를 낸데 교계 내부에서 많은 반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베르토네 추기경이 다빈치 코드에 대한 신도들의 ‘보이콧’을 주문한 것과 달리 상파울루의 호세 마리아 핀헤이로 주교는 이 책을 금서(禁書)로 여길 것까지 없다는 입장이다. 역시 차기 교황 후보로 주목되고 있는 핀헤이로 주교는 베르토네 추기경의 목소리를 교황청의 공식적인 목소리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책을 읽더라도 사리분별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는 “사람들이 소설 속에 담긴 사실과 허구적 요소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며 “책을 읽지 못하게 할 것까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교계에서 이 책의 출간 2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공식대응에 나선 것은 이 소설의 놀라운 성공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사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여 혼동을 초래하고, 특히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성서 대신 ‘다빈치 코드’를 기독교 역사 안내서로 사용하는 것에 경악해 왔다. ●표절 시비와 광고 패러디 논란 레바논에선 이 책에 대한 판매를 금지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인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 빈치시에서는 성서의 진실에 이의를 제기한 소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모의재판이 예술전문가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기도 했다. 또 프랑스의 청바지 제조회사 ‘마리테 프랑소와 저버’는 소설에서 코드 분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다빈치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광고물을 제작했다가 법원의 게시 금지령을 받았다. 여자 예수를 등장시키고 예수의 제자 2명이 청바지를 입고 가슴을 드러낸 채 서로 안고 있는 이 광고물에 대해 법원은 “믿음에 대한 근거없는 공격행위”라며 신성성 훼손을 내세우며 소송을 제기한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손을 들어줬다. 표절 논란도 거세다. 영국 작가 마이클 바이젠트와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은 자신들이 지난 1982년 발간한 논픽션 ‘성혈과 성배’의 구성을 댄 브라운이 통째로 가져다 사용했다며 다빈치 코드 발행사인 더블데이사와 모회사인 랜덤하우스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인기 이런 논란 속에서도 ‘다빈치 코드’의 위세는 여전하다. 오히려 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새롭게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며 출판사측은 즐거움을 감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3월 프랑스어판을 출간해 170만부 판매를 기록한 JC 라테스 출판사의 홍보 담당자 에릭 디빌은 “교황청이 반박을 한 것이 오히려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켜 판매에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 “다빈치 코드 삽화 제작본 출간,‘천사와 악마’(댄 브라운이 2000년 출간한 책)의 번역 출간과 맞물려 교황청이 훌륭한 홍보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 출판사는 다빈치 코드 덕분에 창사 40년 만에 돈방석에 앉았다. 디빌은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의 진위여부에 대해 “단지 소설일 뿐”이라며 “암호해독과 비밀결사, 종교, 추리성 등이 어우러진 데다 소설의 대부분이 파리를 무대로 하고 있어 프랑스 독자들의 반응이 식을 줄 모른다.”고 말했다. 소설의 무대인 유럽은 ‘다빈치 코드’의 인기 덕분에 관광업계도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소설에 푹 빠진 독자들은 파리에서 런던·스코틀랜드까지 소설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과 소피 뇌브가 성배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 거쳐간 장소들을 여행하며 소설 속의 무대들을 살피는 즐거움을 맛본다. 미술사·종교 등에 정통한 가이드와 함께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찾는 패키지 상품 ‘다빈치 투어’를 통해 소설 속의 미스터리를 풀며 여행한 관광객은 이미 2만여명을 넘는다. 내년에는 영화까지 개봉될 예정이다. 소니픽처스는 310만달러에 판권을 매입, 오는 6월 제작에 들어간다. 론 하워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톰 행크스와 오드리 토투, 장 르노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lotus@seoul.co.kr ■ ‘흥행 대박’ 원인은 허구와 실제의 환상적 결합 “미래의 소설은 모두 추리소설이 될 것.”한 추리작가의 지적은 다빈치 코드의 ‘흥행’ 성공 요인을 압축한다. 주인공 랭던은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를 연상시키며 유럽 각국을 오가는 빠른 전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이런 통속성을 극적으로 채색한 것이 가톨릭 교계의 음모를 둘러싼 논쟁적인 메시지와 이를 파헤치기 위해 동원된 예술사와 건축사, 종교철학, 기호학 등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 딸을 두었으며 이 혈통이 메로빙거 왕조로 이어졌고 교황청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시온수도회 수장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암굴의 성모’ 등에 여성성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코드를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교황의 적통(適統)을 은폐하려 했던 바티칸 비밀결사 ‘오푸스 데이’가 실존하며 현 교황청 대변인 나발로 발스를 비롯, 차기 교황 후보 일부가 이 결사 회원이란 주장은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게 한다. 미국에서만 700만부가 팔려나간 것을 비롯, 전세계 44개국에서 변역돼 2500만부가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다빈치코드, 진실과 거짓 |파리 함혜리특파원| 작가 댄 브라운은 “주인공 로버트 랭던 등 등장인물을 제외하고 예술과 건축, 밀교의식, 비밀결사에 관한 모든 내용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다.”고 했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프랑스의 역사 전문지 ‘이스토리아(Historia)’는 3월호에서 특집으로 ‘다빈치 코드의 해독’을 다루며 내용의 진위를 파헤쳤다. ●템플 기사단 기사단의 역사는 11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에서 성배를 보호하는 임무를 띤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1차 십자군전쟁 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물들을 소유하며 재물과 권력을 확보했다. 초창기 로마교회와 왕실은 이들 기사단에 우호적이었지만 권력이 커지면서 갈등 관계로 번져 1307년 10월13일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시온 수도회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후손을 보호해 귀족혈통(메로빙거 왕조)을 만들었다는 이 수도회는 ‘가톨릭 교리와 전통 보존 연합 기사단’이라는 부속 명칭을 갖고 있다. 사브와지방의 생줄리앙 앙 제느브와시에 등록번호 KM94548로 1956년 6월25일 등록됐다. ●비밀 문서 시온수도회에 관한 문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1975년에 ‘4 LM 1249’라는 번호로 등록되어 있고 열람도 가능하다. 중세당시 기록은 찾기 힘들고 1967년에 정리돼 타이핑된 문서다.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시온 수도회 회원은 1093명이며 7계급으로 구분돼 있다. 비밀문서는 시온수도회가 템플기사단의 비호세력이라고 주장했다. ●피에르 플랑타르 소설속 소니에르 루브르박물관장의 모티브를 제공한 시온수도회의 마지막 기사단장인 플랑타르는 1920년 3월18일 파리에서 태어난 실제 인물이다.17세에 학교공부를 그만두고 성당에서 생활하며 종교생활에 심취했다. 히틀러 추종자로 극우파 성향의 종교단체 활동을 했다.1942년에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는 잡지 ‘정복’을 발간했다. lotu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호남의 길지 호남엔 여느 도 못지않게 길지가 많다며, 성질 급한 독자들은 내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런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정감록’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모태로 삼는 까닭에 그 두 산부터 설명을 시작해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대시킨 것뿐이다. ‘남격암’에 가장 먼저 언급된 호남의 길지는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이다. 덕유산 아래서도 무풍(舞豊) 북쪽에 있는 동굴 옆 음지가 으뜸이라 했다. 그곳은 어떠한 환난도 피할 수 있는 명당이라 한다.‘피장처’에선 약간 다른 곳을 지적해, 덕유산 남쪽의 원학동이야말로 숨어 살기 적당하다 했다. ●덕유산 부자마을 한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덕유산의 성격을 흙산이라 보았다. 지리산과 성질이 같은 것으로 본 것인데 남격암과 마찬가지로 산의 북쪽에 있는 무풍에 주목한다. 이중환은 바로 그 옆의 설천(雪川)도 길지로 간주한다. 그는 남사고가 무풍을 복지(福地)로 파악했던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덕유산의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무풍의 바깥쪽은 온 산이 비옥해 부자 마을이 많다. 이는 속리산 이북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사고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도 덕유산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과연 그렇다네. 실로 덕이 넉넉한 산이 덕유산이요, 풍요로움을 기꺼워하다 못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곳이 무풍이라네. 우리나라 12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덕유산. 그 주산은 향적봉(香積峰·1614m)이요, 산세의 흐름이 유장해 무풍의 삼봉산(1254m)에서 흘러내린 용맥이 수령봉(933m), 대봉(1300m), 덕유평전 (1480m), 중봉(1594m), 무룡산(1492m) 삿갓봉(1410m), 남덕유(1508m)까지 무려 100리를 굽이쳐 흐르며 영호남을 갈랐다네. 충청, 경상, 전라 3도를 굽어보는 향적봉에 한번 올라보게. 가까이는 북으로 적상산을 발치에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을 바라보네. 서쪽을 둘러보게나. 운장산, 대둔산이 버티고 서있어. 남쪽은 어떠한가. 남덕유를 코앞에 걸어두었네. 지리산 반야봉도 가물거리네. 동쪽을 어찌 빠뜨릴쏜가. 저 멀리 가야산과 금오산이 보이지 않나? 향적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옥 같은 샘물줄기가 한참을 흐르다가 구천동 33비경을 만들어 놓았도다. 요즘은 북사면에 무주 리조트가 있다지. 서남쪽의 칠연계곡도 큰 장관일세. 봄의 덕유산은 칠십 리 깊은 계곡에 붉은 철쭉꽃이 불타오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온 산을 적시네.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꼬까옷을 입히지. 겨울이면 설화를 피운 고목이 고요한 은세계를 더욱 빛낸다네. 참 아름다운 곳이야! 길지란 대부분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하며 은근히 풍요로운 곳에 있기 마련이네.” 덕유산에 대한 남사고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나는 이쯤에서 줄이기로 했다. ‘남격암’은 호남의 명산 내장산(內臧山)도 길지로 손꼽는다. 이른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라는 내장산은 가을 단풍 하나로만 전국에 유명하다. 이 산의 단풍은 30여종의 나무들이 토해낸 붉고 노란 빛깔이 어우러진 전원 교향악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풍에만 혹할 뿐이나 실은 난세를 피할 길지로서 이만한 곳이 무척 드물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던 왕조실록이 내장산에 옮겨져 잠시 화를 피했다. 그 때 만일 내장산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왕조실록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장산은 과연 길지로다.‘피장처’는 내장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담양 추월산도 숨을 만한 곳이라 추천한다. 추월산은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사이에 걸쳐 있는데, 구한말 호남의병운동의 한 거점이었다. ●길지 변산에 웬 도둑 떼가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호남 굴지의 길지는 부안의 변산(邊山)이야.” 남사고는 그렇게 주장한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만일 제주도가 다른 나라 땅이 되고 말면 일은 그릇된다고 했어. 이는 왜 그런가? 제주에서 배를 타고 북상하면 전남 강진, 영광, 또는 전북 부안에 곧장 뱃길이 닿을 테니 위험할 수밖에. 어쨌거나 내 생각은 그래. 기왕 변산을 찾았다면 그 동쪽 계곡까지 들어가라. 하지만 그 산을 빠져나가지는 말라! 언제는 속리산 이북으로 가지 말랬다가 이젠 또 변산 동쪽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니, 자네들이 좀 헷갈리겠군. 내 말의 뜻은 그만큼 속리산 이남이 길하고 변산이 좋다는 말이야.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참 이상한 노릇이지만 좀 조사해본 결과 문학속의 변산은 도둑의 소굴이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주인공 허생이 변산의 도둑 떼를 인솔해 무인도로 떠나간 걸로 돼 있다.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난(戊申亂·1728년)’ 무렵 변산의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도 불리는 무신난의 주체는 남인(南人)·소론(少論)·소북(少北)의 연합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집권층인 노론(老論)을 몰아내려고 난을 일으켰고 거기에 전국 각지의 도둑들·서얼·상민·천민들이 상당수가 가담했다. 호남 여러 고을의 빈농들과 변산의 도적들도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빈농은 자칫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히 도적 무리에 포섭되었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산의 도둑 떼는 허생의 영도 아래 각자 배우자와 소 한 마리씩을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 곳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 외국과 무역에 종사 하는 등 유족한 삶을 누린다. 변산 도둑들의 입장에서 볼 때 허생은 다름 아닌 ‘진인’이었다. 혹자는 허생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이상향으로 도둑들을 이끌고 숨었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현실에 순응하며 합법적인 개혁을 꿈꾸던 연암 박지원에게서 허생 이상의 주인공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닐까? 그야 어쨌거나 허생전에 변산이 도둑의 소굴로 설정된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변산은 골짜기가 깊고 사방으로 뻗어 있어 은신에 적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산이 길지로 손꼽혔다. 하지만 도둑 떼들이 이러한 자연 조건을 적극 이용한 결과, 조선 후기엔 그들의 요새로 둔갑하기도 했다. 남사고는 말하기를,“변산이 중요한 까닭은 그 산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좀더 깊은 연유가 있었지.”라며 매우 의미심장하게 운을 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기회를 마련해 경청하기로 한다 ●조계산의 ‘십팔공’ ‘남격암’은 전라도의 또 다른 길지로 조계산(曺溪山·887m)을 예로 든다. 전남 승주군에 있는 이 산엔 고찰(古刹) 송광사(松廣寺)가 있어, 산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절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를 올라가면 천자암(天子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이 암자의 오른편에 곱향나무 두 그루(천연기념물 제88호)가 우뚝하다. 높이가 12.5m, 가슴높이쯤에서 둘레가 3∼4m나 되는 거목인데, 나무에 얽힌 유래가 특이하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 이 절에 머물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중국에 건너가 황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다음 그 인연으로 왕자 하나를 제자삼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천자암에 오른 그들은 나란히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차츰 거목으로 자랐단다. 보조국사 일행의 도력도 만만치 않지만, 조계산의 지력도 여간 왕성하지 않은 모양이다. 워낙 명산에 자리잡은 까닭에 송광사의 “松”자는 길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 글자를 해체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돼,18명의 국사가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조국사를 비롯해 모두 16명의 국사가 나왔다 한다. 앞으로 2명이 더 나오게 돼 있는데 그때가 되면 모든 중생에게 불법이 바로 전해져 용화세계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유추되듯, 조계산은 최고수준의 길지라 미륵세상의 도래를 약속하는 곳이 된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곧게 뻗어 내린 용맥이 서해바다를 눈앞에 두고 멈춰선 곳에 한 길지가 있다.‘남격암’이 말한 월출산(月出山)이 그곳이다.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불쑥 솟아오른 월출산은 단순히 많은 큰 산의 하나가 아니다. 산 이름 그대로 달맞이하는 산이라서, 이 산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달 신앙의 대명사로 우뚝 솟았다. ●왜적도 못 들어온 팔령산 월출산에서 좀더 남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남단의 길지 팔령산(八靈山)이 웅자를 드러낸다.‘남격암’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나라의 지세를 논할 때 섬이 바라보이는 남쪽은 절대적으로 피할 일이다. 다만 한 예외가 있어 팔령산이 바로 좋은 산이다.” 남사고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소백산 줄기가 고흥반도 동쪽까지 내려오다 끝맺음을 한 것이 바로 이 팔령산이야. 정상의 봉우리가 모두 8개인 산이지. 팔영산(八影山)이라고도 부른다네. 예전엔 팔전산(八顚山), 팔형산(八兄山), 팔봉산(八峰山)으로도 불렸어.‘택리지’에서 이중환은 이 산이 마치 섬처럼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고 했어. 일찍이 내가 복이 있는 땅이라고 기술했다고도 썼어. 기특한 내 후배 이중환은 늘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말을 곧잘 인용한단 말이야! 아는 대로 임진왜란 때는 왜선이 고흥반도를 타고 침입하려고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어. 이게 다 팔령산의 지기(地氣)에 힘입은 거야. 고흥의 옛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팔령산의 넷째 봉우리인 사자봉이 대단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치닫는 형상이라고 할까. 사자봉의 혈(穴)은 국왕의 옥쇄인데 마지막 봉우리에서 그만 미완성으로 끝나 여간 아쉽지 않아. 일제시기 그 놈들이 조선의 맥을 끊어버리려고 팔봉에다 큰 쇠막대를 깊이 박았어. 그 놈들은 한국 사람들을 미신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뒤가 켕겼는지 갖은 못된 짓을 다했어. 이제 와선 멀쩡한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하지를 않나. 가소롭기 짝이 없어! 한데 말이야, 당시 그 놈들이 혈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바람에 그 뒤 고흥선 진짜 장군이 나왔다고들 하지.” 팔령산이 명산이란 소문은 진작 전국에 널리 퍼졌다. 각지의 무당이 몰려와 무속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난리가 닥치면 산 속 깊이 은신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삼십년 전엔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가 이 산에 본거지를 두고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기도의 길지 “나는 주로 속리산 이남인 하3도(충청, 경상, 전라)에서 길지를 찾았지. 속리산 이북인 중부지방엔 별다른 길지가 없다고 보는 편이야. 영산인 태백산에 가까운 강원도 남부지역에 한두 군데 있을까 말까. 그 외엔 사실 주목되는 곳이 하나도 없는 셈이야. 정감록에서도 말했을 걸. 오대산 이북은 몹시 흉하다고 말이야.” 그러나 ‘피장처’와 ‘두사총비결’엔 중부지방의 피난지가 다수 언급돼 있다. 우선 ‘피장처’에 따르면 양주 산내촌에서 북쪽으로 80리를 들어가면 길지가 있다 했다. 또한 양근 소설촌의 북쪽 40리쯤에서 좀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은 길지가 있다고도 했다. 요새 설곡리(雪谷里)라 불리는 곳 말인데 고려 말 임제종(臨濟宗)을 개창한 명승 보우(普愚)가 설곡리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여주의 사전촌에선 장수와 정승이 나온다고 했고, 광주 율평 동쪽에 있는 동굴은 난리 때 여덟 성씨가 함께 숨어 살 곳이며 장차 56대 동안 장수와 정승이 출생할 곳이라고 했으니 굉장한 명당이다. 또한 ‘피장처’엔 이천 북면의 광복동, 가평의 대아, 도성 등도 피난할 만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인천의 영종도 역시 복지라 했다. 오늘날은 국제비행장이 들어선 영종도는 고려 말부터 단 한번도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무사했다는 것이다. ●중국 지관 두사총이 손꼽은 길지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중국에서 왔다는 지관(地官) 두사총이 쓴 비결로 알려진 ‘두사총비결’에도 경기도의 길지가 두어 군데 언급된다. 그 중 하나는 화약산이다. 가평에서 36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산이 바로 그 산인데 부근엔 집다리골 휴양림도 있어 쉬어 갈 만하다. 그밖에 포천의 도성산도 길지로 말해진다. 도성산은 길가에 가까워 산세가 얕다는 평을 듣지만 전쟁의 기운이 미치지 않고 간사한 기운도 침범하지 못한다고 믿어진다. 고려가 망했을 때 어느 선비는 도성산 밑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충절을 맹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선비가 지조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도성산의 지기 덕분이라 한다. ‘두사총’은 강화의 마니산(467m)도 길지라 일컫는다. 인천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에 있는 이 산은 강화섬에서 가장 높다. 마니산은 한반도 남쪽의 한라산, 북쪽의 백두산까지 거리가 똑같아 주목된다. 마니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머리를 뜻한다.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이름이 그렇게 됐다. 마니산이 길지로서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 때문이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높이 5m의 자연석을 포개어 만든 이 단의 기단부는 원형이며 그 상단은 네모꼴이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란 고대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 단이 축조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고려 때부터 국가가 제관을 파견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황해도의 길지 북부지방엔 길지가 없다는 게 ‘정감록’의 근본 주장이다. 이와 달리 ‘피장처.’는 황해도 곡산의 명미촌을 길지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명미촌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해 희령과 잇닿은 경계 지점에 숨으면 어떤 난리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격암’은 “수양산(首陽山·899m)은 백미(白眉)의 난을 당하면 물 마른 개울의 물고기처럼 되느니라.”라고 했다. 수양산이 좋긴 해도 눈썹 흰 사람이 난리를 일으키면 도리어 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수양산은 황해남도 벽성군(碧城郡)과 해주시(海州市)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격암이 거론한 서북지방의 유일한 길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일본의 역사왜곡

    [논술이 술술] 시사 키워드 /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파문이 해결되기도 전에 일본이 한국 역사를 더욱 왜곡한 교과서를 펴낼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한·일 외교관계가 냉각되고 있다. 일본의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식민 통치를 미화한 역사 교과서는 우익계열의 출판사인 후쇼샤(扶桑社)가 검정을 신청했고 결과가 다음달 초 나올 예정이다. 일본 교과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사를 왜곡 기술해 왔는데 이번 교과서는 더욱 개악한 내용이다. 특히 새 교과서는 독도의 전경 사진을 추가하고 ‘한국과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다케시마’라는 설명을 달고 있어 독도의 영유권까지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독도 문제와 더불어 국민들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강력히 대응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정·관계 채널을 통해 우려와 유감을 표시하고 일본 정부가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갖고 검정 작업을 해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 배경과 과정 일본은 패전 후 천황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일부 우익 지배층은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황국사관의 부활을 꿈꾸고 시도해 왔다. 황국사관이란 일본이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아시아 각국을 멸시하며 정복 정책을 펴 나가기 위한 바탕이 되는 사관이다. 왕이 태양신의 자손이고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의도적으로 조성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1955년 우익 보수 성향의 자민당이 영구적인 집권 체제를 갖춘 뒤 일본의 우익주의는 일부가 아닌 전 국민적인 일본 정권의 이념이 되었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처음으로 역사 교과서 문제가 도마에 오른 것은 1982년 교과서 파동 때다. 한국과 중국 정부를 비롯한 각국은 강력하게 항의했고 일본은 일단 후퇴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층의 우익 성향은 사라지지 않은 채 일본 사회를 계속 이끌고 있고 패권주의와 정복욕을 버리지 않았다.1990년대 들어 우경화·국수주의화 경향은 더 강해져 일본 제국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여론 몰이를 하게 됐다. 수상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며 군국주의 부활에 앞장섰다. ●일본의 한국사 왜곡 사례 일본의 교과서에서 이미 왜곡, 기술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고대 일본이 이미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고 갑오 농민 봉기나 혁명도 난리 폭동으로 비하했으며 러일 전쟁의 승리가 백인에 대한 승리로 아시아 민중을 위한 것으로 부각시켰다. 특히 을사조약 강요를 완곡하게 표현했다. 또 한국 병합의 합법성을 강변했으며 한국인의 항일 투쟁을 축소 왜곡하고 일제의 징병, 징용과 조선 민족 말살 정책을 축소 은폐했다. 전범 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했으며 침략 전쟁을 아시아 민족 해방 전쟁으로 정당화했다. 이와 함께 침략 전쟁에서 자행한 만행인 남경 학살 같은 중대 사실의 삭제하거나 축소했다. ●후쇼사 교과서의 왜곡 내용 1. 러일전쟁=러시아가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했고 극동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일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술한 부분은 일본의 단정적 주장이며 근거가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본은 이번에도 러시아 위협론을 강조하며 개전의 책임을 러시아에 떠넘기고 전쟁을 시작하게 된 자국 내부 문제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2. 한국병합=‘병합 이후 근대화를 진행했다.’는 주체를 일본에서 조선총독부로 바꿔 구체화했다.2001년 신청본과 검정본에서 볼 수 없었던 ‘근대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조선 침략 사실을 노골적으로 미화했다. 3. 종군위안부 피해여성 =2001년판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를 부정해 신청본에서조차 싣지 않았다. 4. 강제동원=교과서는 2001년과 마찬가지로 ‘종군 위안부’ 사실 자체를 다루지 않았다.2001년도에 비해 일제 정책들의 강제성을 언급하지도 않았다.‘여러가지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하였다.’나 ‘창씨개명이 강제로 사용하게 됐다.’는 내용이 모두 빠져 있다. 5. 대방군=황해도 봉산지역에 있었다는 게 통설인 대방군을 ‘중국 왕조가 조선반도에 설치한 군으로 중심지는 현재 서울 근처’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사가 중국이 설치한 군현에서 시작됐음을 주장하기 위한 의도로 판단된다. 6. 임나일본부설=‘야마토 조정의 외교정책’ 아래 ‘조선반도의 동향과 일본’이라는 제목을 ‘야마토 조정과 동아시아’로 수정하고 소항목으로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를 설정해 일본의 임나 지배와 출병을 확실하게 서술했다. 7. 조선반도와 일본=2001년과 마찬가지로 조선을 ‘일본을 향하여 대륙으로부터 하나의 팔처럼 돌출된 반도’라고 기술했다. 또 ‘조선이 러시아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 방위가 곤란해 조선의 근대화를 원조했다.’는 기술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러시아로 떠넘기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일본의 이런 왜곡에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나서야 한다. 일본 정부에 역사 왜곡 사례를 정정해주도록 강력히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선 대일 추가 문화개방을 중단하고 진행 중인 협력 관계도 중단하는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또 국제 회의를 통해 역사왜곡 사실을 알리고 세계 여론에 호소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중국이나 북한과 연계해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 나아가 국내에서는 객관적인 사실(史實)에 대한 연구에 더욱 힘쓰면서 한편으로는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中·日 지진 7이상 되면 한국 느낀다”

    ‘리히터 규모 7’ 대전 대덕연구단지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진연구센터 강익범 책임연구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에서 리히터 규모 7 이상됐을 때 한국에서 진도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1983년과 93년 일본 혼슈 아키다현 근해와 훗카이도 오쿠시리섬 북서해역에서 강진이 발생했다. 리히터 규모로 7.7과 7.8을 각각 기록한 강진이었다. 이들 지진은 1000㎞쯤 떨어진 삼척, 속초 등 강원 해안에 1시간30분 만에 ‘쓰나미’를 몰고와 피해를 입혔다.83년에는 사망 1명, 실종 2명에 건물 44동이 침수나 붕괴됐고 선박 81척이 부서졌다. 피해액이 3억 7000만원에 이르렀다.93년에도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35척의 선박이 부서지고 어망이 찢어지는 등 3억 9000만원의 피해를 봤다. 20일 한국에서 진도가 느껴진 후쿠오카 지진도 7.0이다. 대략 10년 만에 다시 이웃나라의 강진이 우리나라에서 감지된 것이다.10년의 강진 주기에 대해 강 책임연구원은 “우연일 뿐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중국의 강진발생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을 비교, 중국 지진이 한국에서 감지된 것으로 기록된 때는 조선시대에만 8차례로 집계되고 있다.1548년 9월13일 발해(리히터 규모 추정치 7),1597년 10월6일 발해(7),1668년 7월25일 산둥반도(8.5),1679년 9월2일 하북(8),1846년 8월4일 동대양(7),1852년 12월16일 동대양(7),1853년 4월14일 동대양(7),1888년 6월13일 발해(7.5) 등이다. 이 때 한성(서울)과 함경도 등 조선 전국에서 진도를 느꼈다는 기록이 있고 모두 리히터 규모 7을 넘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시론] 이 몸이 죽어 죽어…/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중등학교 시절, 우리 세대가 자주 외우던 시조 가운데 고려말의 충신, 포은(圃隱) 선생의 ‘단심가(丹心歌)’가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인용하자면 “이 몸이 죽어죽어 일 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내용으로 가히 섬뜩한 공포감을 자아내게 할 만큼 왕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시조였다. 이 무렵의 우리들은 선조들의 이같은 충절의 미덕을 맹목적으로 추앙하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마치 왕이나 국부처럼 칭송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충절에 대한 이 맹목적 흠모의 교육 탓일까. 오늘의 대통령을 포은이 노래한 봉건 왕조의 왕으로 착각해서인지 몇 주전 노무현 대통령과 국민의 대표들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노인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해프닝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다. 오늘의 가치관에서도 충절이란 물론 존중되어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예컨대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국민에 대한 것이지 한 특별한 개인에 대해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국의 대통령도 허물이 있거나 국가 이익에 심각하게 반하는 행위를 저지른다면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는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이다. 충절이란 존중되어야 할 덕목이긴 하지만 이렇듯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오랜 전통을 이어온 유교적 가치관의 영향 때문일까. 유럽사람들과 달리 우리들은 충(忠)뿐만 아니라 충에 유사한 행위들도 유달리 높이 사는 관습적 사고에 젖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 중 하나가 ‘소신’이라 부르는 어떤 정신자세이다. 오죽하면 ‘소신에 죽고 산다.’는 말까지 생겼으랴. 물론 소신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예컨대 정당하고 올바른 신념에 대한 소신은 가능한 한 실천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충절이 그러하듯 소신 또한 한사코 고수하는 일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오늘의 시대-민주주의 시대-가 그러하다. 봉건주의와 달리 민주주의는 한 개인의 통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 모두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 구성원 각자가 지닌 각기 다른 생각, 다른 신념들이 조정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성원을 구성하는 각자는 그 지적 수준, 정서적 감수성, 인격, 능력, 성별이 어떠하든 모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 판단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 참여자의 한 사람일 뿐인 어떤 자가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무작정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하려 한다면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하물며 그 같은 소신을 가진 자 바로 인간이며, 하늘 아래 인간이란 그 누구든 완전치 못함에랴. 최근 우리 사회에는 이렇듯-그 주장하는 바 신념이 옳든 옳지 않든-죽음을 불사하고 자신만의 소신을 관철하려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는 듯하다. 엊그제 아수라장이 된 민주노총 총회가 그러하고, 몇 주전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 건설을 중지하라며 한 스님이 죽기 살기로 벌였던 단식투쟁이 그러하고, 몇 달전 새만금 방조제 공사에 반대, 마치 종교 의식처럼 전국토를 종단하여 포퓰리즘에 불을 지른 종교인들의 삼보일배가 그러하다. 그들의 상대가 어떤 태도로 그들을 대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들의 주장이 과연 최선의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소신을 무작정 관찰하려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 누구나 귀를 활짝 열고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에 의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옛 성현도 말하지 않았던가.“귀 있는 자 들어라.” 오세영 서울대 인문대 교수·시인
  • 서울대 법대 백충현 명예교수 인터뷰 전문

    서울신문은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킨 16일 국제법 전문가인 서울대 법대 백충현 명예교수로 부터 조례의 부당성,우리 영토인 독도의 법적 근거,향후 우리의 대응 등에 대해 인터뷰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영토 문제는 우리나 일본이나 내부에 서 쉽게 하나로 의견이 통일된다.그 러다보니 학술적으로는 국민 감정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먼저 시마네현 조례안 통과에 대해서 말해보자.시마네현 영토편입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지역 차 원에서 할 것이 아니다.시마네현 관할에 들어왔다는 조례를 만들 수 있는 전제는 독도가 일본정부의 영토이어야 하는 것이다.1905년 1월 28일 일본 중앙정부에서 독도를 영토에 편입했다.영토편입이라는 것이 무엇이 냐.이전에는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었으니까 영토를 편입하는 것 아니겠느냐.즉 당시 1월 28일 영토 편입은 이전까지는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을 얘기한다.그러므로 이 문제는 전제가 이미 모순이었고,때문에 시마네현이라는 한 지역에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예전에 일본의 한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이 당시 현대국제법에 맞게 고치기 위해서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이라고 주장하길래 “그럼 일본은 독도 말고 다른 섬은 없느냐.다른 섬은 왜 당시 영토편입을 논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니 아무 대답도 못했던 적이 있다. -그럼 일본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냐는 문제를 따져보자.일본 것이 아니라고 해서 꼭 한국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먼저 최소한 제3국의 것은 아니어야 한다.이제까지 독도와 관련한 문제에서 일본과 한국을 제외한 나라는 영토권을 주장하는 나라가 없다.그래서 독도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다. -다음은 한국의 영토인 근거에 대해 따져보자.먼저 고문서상의 문제다.서 기 512년 신라의 영토로 처음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이 등장한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영토 승계가 됐다는 것이 실록이나 한·일 고지도에 적혀 있다.거기에는 양국 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다음은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이다.일본은 1849년 프랑스 선박에 의해서 독도가 발견됐을 때 ‘량꿔(liancourt·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도 영토 편입 및 대하원’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즉 당시 독도가 이제까지 어느 나라 땅도 아니었으며 먼저 선점하게 되었으니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다.하지만 앞서 말했던 고지도나 일본 문서에 이미 일본은 독도가 한국땅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다수 있다.즉 조선의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토를 편입한 것은 침략행위가 되고 이는 국제법적인 효력이 없다. -즉 한국의 영토인데 일본이 편입시켰다면 남의 나라 영토를 침략했다는 게 된다.그래서 국제법 위반이다.그럴 때 일본 측이 한국 땅인 줄 몰랐다고 나오는데 우리가 줄기차게 다녔고 지도에도 나왔으니 몰랐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시마네현 영토에 관한 문제를 따져보자.일본에 과거 태정관이라는 우리 총리실에 해당되는 최고기관이 있었다.1877년에 일본 시마네현에서 어부들이 독도 쪽에 어업을 가려한다고 하자 태정관에서 ‘울릉도와 외 1도’는 조선에서 말하는 우산국의 일부이니 신라에 복속된 다음에 계속해서 조선의 영토다.그러니 일본 사람은 가지말라고 명령했다.이는 일본에서 맨 처음으로 유권해석한 것이다.그래서 통항금지시켰다.이는 일본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따져봐야 할 문제가 국가가 변할 때는 영토가 같이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이는 발해가 우리 영토였지만 승계를 못 받아서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닌 것과 같다.하지만 독도는 고려 를 거쳐서 세종실록이라든지 연산군 왕조실록들을 보면 신라시대 때부터 울릉도와 우산이 다같이 우리 영토로서 승계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영토로서 증거력을 가지고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다.영토 문제 다루는 비변사에도 기록이 있다.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 조선왕조에는 계속 승계되어 왔다. -일본이 문제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1430년 세종 때부터 우리나라가 300년정도 동안 공도정책을 썼던 것이다.공도정책이란 전방에 있는 일부 섬이 조세 면탈자,병역기피자들이 가서 살면서 가끔 외적 침탈의 선봉 이 되기도 해서 아예 그 섬에 사람 들을 살지 못하게 했던 정책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을 살지 못하게 비워뒀다.당시에는 변방에서 별로 쓸모가 없는 지대였기 때문이다.그러다 1880년대 일본 사람들이 자꾸 거기로 가고 선박이 와서 지도도 만들고 하는 것을 보고선 방치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그러면서 다시 우리 주민들도 많이 들어갔다.우리가 비워 두는 사이에 왜구들이 나무도 베어가고 행패도 부리고 고기도 잡아가고 했었다.그래서 1882년 공도정책을 파기하고 직접 적극적인 관할을 하기로 한다.그래서 적극적으로 관할하려면 도감을 두는 수준보다 격상시켜서 1900년 칙령 41호로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도감이 관할하지 않고 군수를 두겠다고 한다.울진군과 격상시켜서 독립된 군으로 만든다.이때 독도인 죽도를 석도로 표현한다.일본은 이 공도정책 자체가 영유권 포기라고 주장하는 데 이는 터무니없다.공도정책이라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자체가 바로 통치권 행사의 증거다. -또 고종 황제가 우리가 관할하는 지역이니 측량을 하자며 1898년 양지아문을 만든다.서양 지도 전문가를 불러서 지도 전문가 30명을 양성한 뒤 대한여지도와 대한전도를 만든다.1899년 나왔다.그 지도에 울릉도,우산 이렇게 섬이름까지 넣어서 조선 영역을 표시했다.우리 관에서 만든 영토 지도다.고종 황제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땅을 법령상에 표기한 것이다. -1953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망뀌에 및 에끄레 후(Minquiers and Ecrehos) 영토분쟁이 있었다.당시 영국의 영토로 결정됐는데 서로의 주장을 가른 근거는 국가가 영토로서 그 주권을 행사한 직접 증거로 입법을 했다든지 행정적 조치를 취했다든지 영토지도를 가지고 있다든지 등의 증거였다.우리에겐 대한전도가 대표적인 영토지도였으며,칙령 41호가 입법조치이다.군수 를 파견한 것이 행정조치이다.즉 우리는 이미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측이 자꾸만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영토분쟁 지역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은 1905년 영토 편입도 이미 언급했다시피 영토가 아니기때문에 편입한 것이므로 근거가 되지 못하고 고기잡으러 남의 땅에 간 것이 자기 네 땅이라는 증거도 아니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일본 국가 기록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막부 시절 다카하시,이 노 등이 만든 지도도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 포함된 것이 없다.오히려 적극적으로 조선의 영토라고 표기됐다.보통 일본의 기록 문서나 영토 지도를 볼 때는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거나 아예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오늘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조 례로 결정한 것은 중앙정부의 불법 조치를 합법조치로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고 불법하고 효력이 없다.시마네현 문제는 국내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일본은 문서 자료를 자꾸 감추고 있지만 우리 외교부는 25년전 일본 아세아 역사 자료센터에서 입수한 자료를 착실하게 갖추고 있다.결국 일본이 내심으로는 꿀리니까 큰소리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우 리가 불리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국제 사법재판소 가도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그리고 시비건다고 다 국제사법 재판소 가지 않는다.우리는 국제사법 재판소 갈 일이 없다.우리는 100% 우리 것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일본이 센카쿠열도 등 은 죽어도 자기들 것이니까 국제사법재판소 가자고 말하지 않지 않느냐.일본이 독도 문제에선 유독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려고 의도하는 것은 결국 독도 문제에선 우리가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 하는 것이다. -2차대전 끝나고 나서 대일평화조약 등에서 독도 문제가 거론된 것은 본질이 아니다.대일평화조약은 일본과 연합국과의 조약이지 한국과의 조약이 아니다.당사국인 우리나라가 관여되지 않은 조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미국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인식을 가졌다고 하는 건 문제가 없다.2차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도 독도는 우리 것이기 때문에 2차 대전 관련 평화조약과 독도 문제는 관계없다. -물론 지금 정세를 이해는 하지만 이번에 국회에서 너무 감성적으로 ‘독 도 이용 특별법’ 만든다고 하던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우리 땅이면 그냥 갔다오면 되는 것 아니냐.변방 이니까 연평도 등과 같이 국방상의 이유때문에 못갈 수도 있지만 제주도 가는 데도 특별법이 필요하겠느냐.독도를 특별취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국민정서는 당연히 이해한다.하 지만 이번에 외교부에서도 반기문 장 관이 독도 문제는 영토 문제고 주권 문제니까 거기에 도전하는 것은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강경하게 천명하고 있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봐야한다. -일본이 자꾸 한마디씩 던지는 것은 분쟁으로 이끌어 내려는 전략에 불과하다.일본 측의 한 마디만 나오면 주한 일본대사관에 가서 화형식하고 하면 NHK 등에서 몇 시간식 방영해서 일본 내에서 이용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응해서는 안된다. -지금 국민적으로 감정이 격앙되고 있는데 물론 그 감정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해두면 된다.국제사법 재판소에 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아주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국가의 영유권에 관한 조사도 하고 충분히 준비하면 일본이 이길 수 있는 근거는 없다.
  • [여의도in] 김원웅 “우리도 대마도 영유권 주장하자”

    [여의도in] 김원웅 “우리도 대마도 영유권 주장하자”

    ‘독도도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신경전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이 ‘대마도 되찾기’ 공세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일본측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공세적인 맞대응 성격이 짙다. 김 의원은 최근 언론과의 잇단 인터뷰에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보다도 우리나라가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훨씬 더 명료하다.”면서 “독도와 마찬가지로 대마도를 걸어서 영토분쟁지역화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왕조가 공식적으로 발행한 모든 지도에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돼있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도 한때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적도 있다.”고 영토분쟁지역이 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근거까지 제시했다. 이와 함께 김 의원은 정부에 ‘독도의 유인도(有人島)화’를 제안했다. 그는 “일반적인 보통의 우리 국토로서 스스로가 자리매김을 해놓아야만 국제사회에서도 공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조선 세종때 대마도를 정벌한 적도 있고 매년 식량을 보태준 적도 있지만, 우리와의 공식적인 관계 자체가 단절된지 아주 오래 지났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클레오파트라는 대학자였다”

    |런던 연합|비운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빼어난 미모가 아니라 위대한 지성으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로마의 대표적 장군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14일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클레오파트라를 ‘성적 매력’으로 가득 찬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으로 묘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세 아랍학자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아랍학자들은 수많은 문헌에서 단 한차례도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으며 화학, 의학, 철학, 수학, 건축학에 이르는 방대한 분야에서 그의 업적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다. 런던 유니버스티 칼리지의 고대이집트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오카샤 엘 달리 박사는 저서 ‘이집트학:잃어버린 천년’에서 “아랍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를 ‘대학자’로 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일강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대수로를 설계한 것도 클레오파트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BC 69년 태어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어는 물론 로마어, 그리스어 등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해 통역없이 외교사절과 대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 “세종과 장영실 석연찮은 결별에 주목”

    밀리언셀러 ‘풍수’로 기억되는 작가 김종록(42)은 지난 10여년 세월 장영실과 사귀었다. 동래 관기의 아들로 노비 출신에서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오른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작가의 새 소설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전2권, 랜덤하우스중앙)는 장영실의 일대기를 얼개삼아 소설적 재미를 존존하게 얽어냈다.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생몰연대조차 정확치 않은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기란 쉽지 않았다.“조선역사 전체를 통틀어 장영실이 활약했던 15세기가 가장 자부심에 넘쳤던 시기”라는 작가는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장영실이 작은 실수 때문에 왕에게 내침당한 데 대한 의문으로 소설을 시작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연려실기술’‘동문선’ 등 관련기록이란 기록들은 죄다 뒤져 공부했다. 최대한 사실(史實)에 근거하되 읽는 맛을 위해 약간의 추리기법을 섞기도 했다. 예컨대 장영실이 돌에 새겼으나 없어지고만 천문도의 행방.“당시 조선에 천문과학이 밀린 중국이 요즘으로 치면 ‘핵사찰’식으로 그 돌을 빼돌렸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장영실의 극적인 삶을 재구성했다.“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있는 ‘천상열자분야지도’는 태조 4년에 새긴 것,1687년 숙종 13년에 다시 돌에 새긴 천문도의 원본 역시 태조 4년때의 것이었다.”며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음을 강조했다. “가벼운 글읽기가 대세인 시대에 문학, 역사, 철학이 어우러진 소설을 내놓아 기쁘다.”는 작가는 앞으로 천지인 삼재사상을 담은 소설(오다선생 행장기)을 또 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8)-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두향의 무덤 앞에 서 있는 표석에서도 두향과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인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향이 단양 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토정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경계인 옥순봉을 양보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표석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 문장은 분명한 오기이다.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의 호는 성암(省菴)이지 토정(土亭)이 아니다. 토정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냄으로써 토정이란 호가 붙었던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이지함(李之)을 가리킨다. 이지함은 바로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사람으로 역학, 수학, 천문, 지리에도 해박하였던 기인이었으며,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였다.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에게 글을 배웠고, 이지번역시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지번은 고려조의 대학자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단양에 내려와 구담에 집을 짓고 한세월을 보냈던 은사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이지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조 8년(1575 12월1일). 전 내자시정(內資侍正) 이지번이 사망하였다. 이지번은 목은 이색의 후예인데, 어릴 때부터 침착하여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들자 다리를 찔러 피를 받아 약에 타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상중에 몹시 슬퍼하였고 한결같이 가례를 따라 행하였다.…(중략)…성균관의 추천으로 재랑이 되었으나 사은하고는 출사하지 않다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사평이 되었다. 아들 이산해는 어릴 적에 신동으로 일컬어졌는데, 윤원형(尹元衡:당시 최고의 세도가)이 자기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으려하자 지번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아우 지함과 함께 단양의 구담에 내려가 은둔하여 살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소박한 생활을 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를 즐기니, 사람들이 그를 구선(龜仙)이라 불렀다. 이황이 그와 벗하여 도학을 권면하였다. 금상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하였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왕조실록’에 실려진 내용대로 은사였던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을 청풍군수로 제수케 추천했던 사람이 바로 이퇴계. 그러므로 이지번과 그의 아우 이지함은 이퇴계와 두향의 사랑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풍수에 밝은 토정 이지함은 형에게 구담봉 부근에 명당이 많은 것을 말하여 가족의 무덤을 다섯 개나 이장함으로써 당대가 지나기도 전에 아들이 영의정에 오르게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는 만큼 이곳일대를 사랑하였는데, 이지번은 항상 푸른 소를 타고 강가를 오르내리며, 구담과 오로봉 사이에 칡넝쿨로 큰 줄을 만들어 가로지르고 학모양의 탈것을 만들어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다니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신선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지번 이름 앞에 동생 이지함의 호인 ‘토정’이 명기된 것은 분명한 오기인 것이다.
  • 이석, 전주대 강단 선다

    의친왕(義親王)의 열한번째 아들로 조선왕조 마지막 황손인 이석(본명 이해석)씨가 4일 전주대 사학과 교양강좌 객원교수로 임명됐다. 이씨는 이번 학기부터 매주 화·목요일 두차례 학생들을 상대로 일제 강점기 황실 모습과 광복후 황실 몰락, 황실 가족사 등 한국 근대사와 조선황실 문화 등에 대해 강의한다.
  • ‘세이부 스캔들’ 고이즈미에 불똥

    |도쿄 이춘규특파원|증권거래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전격 체포된 일본 세이부(西武)철도그룹 쓰쓰미 요시아키 전 회장의 ‘끝없는’ 추락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 정치권으로 불똥이 튈 조짐이다. 무분별한 회사재산 남용, 왕조적인 회사지배 등의 혐의로 여론의 무차별 폭격을 받고 있는 쓰쓰미 전 회장은 고이즈미 총리의 출신 파벌인 모리파와는 전신격인 옛 후쿠다파 시절부터 30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민당 내에서는 선친의 인맥을 계승, 옛 후쿠다파는 물론 옛 다나카파(옛 하시모토파), 호리우치파 등 주요 파벌들과 연을 맺었다. 야당들과도 연을 맺고 있음은 물론이다. 정치권과 세이부의 커넥션이 점차 조명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모리파 사무실은 쓰쓰미 전 회장 소유인 도쿄 세이부 계열인 아카사카프린스호텔 안에 있다.2003년에만 사무실 비용 등 8000만엔을 지불했다고 언론들이 전했다. 프린스호텔은 정치자금 모금 파티장으로 유명하다.2003년에는 자민당 파벌 중 옛 하시모토파, 모리파, 호리우치파, 야마자키파, 다카무라파 등 8개 파벌이 이 곳을 이용했다. 무엇보다 고이즈미 총리와 쓰쓰미 전 회장의 인연은 각별하다.2001년 4월 취임 이래 쓰쓰미 전 회장과 6차례 만나 식사를 하거나 가족동반으로 마술쇼를 보았다. 취임 이래 휴가 등을 위해 프린스호텔을 270일 정도 이용했다.2003년 7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의 정상회담 때는 하코네 프린스호텔을 택했다. taein@seoul.co.kr
  • [문화단신]

    ● ‘국립고궁박물관’ 올 8월 개관 문화재청 궁중유물전시관은 경복궁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 들어서는 왕실박물관(가칭)의 명칭을 공모한 결과 ‘국립고궁박물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시대를 비롯한 왕조시대의 격조 높은 궁중유물을 전시해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과 연계한 문화공간 및 관광명소로 조성될 계획이며, 오는 8월 개관 예정이다. ● ‘한국 세시풍속 자료집성’ 발간 조선 전기의 문집에 나타난 세시풍속 관련 자료를 추출해 번역한 ‘한국세시풍속 자료집성-조선전기 문집편’이 발간됐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시풍속 연구 활성화를 위해 추진중인 한국세시풍속 자료집성 시리즈의 하나로, 조선 전기 세시풍속의 유래와 변화상, 당시의 생활사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신종교의 개벽사상엔 정도령이 숨쉰다 이십일 쯤 전 나는 뜻밖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정감록 산책을 빠짐없이 읽고 있다는 원불교 교무 김정원(가명 53세)씨의 글이었다. 그 뒤 우리는 수십 차례 전자우편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는 사이 나는 김 교무가 계룡산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오늘은 김 교무와 주고받은 글을 대화체로 편집해 원불교와 계룡산의 관계를 정리해볼까 한다.‘교무’란 물론 원불교의 성직자다. 전자우편에서 나는 김 교무에게 이렇게 물었다.“원불교는 동학 및 증산교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신종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원불교의 경전 ‘대종경’을 읽어본 바로는 다른 신종교들에 비해 신비적, 주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원불교의 그런 특성은 계룡산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나타나겠지요?” 김 교무의 답은 이랬다.“먼저 우리 원불교에 대해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교조) 선생과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증산교조) 선생과 한 가지로 구한말 일제하라는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대에 민중을 이끄신 분입니다. 이 분들이 세운 민족종교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을 공유합니다. 개벽의 주체는 한국이요, 장차 세계의 도덕적·문명적, 그리고 정치적 중심지가 될 나라도 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교대하는 시기입니다만 곧 묵은 시대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옵니다.‘정감록’에서 말한 정도령 시대가 옵니다. 우리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는 새 시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바야흐로 동방에 밝은 해가 솟으려 하는 때이니, 서양이 먼저 문명함은 동방에 해가 오를 때에 그 광명이 서쪽 하늘에 먼저 비침과 같은 것이며, 태양이 중천에 이르면 그 광명이 시방 세계에 고루 비치게 되나니 그 때야말로 큰 도덕 세계요 참 문명 세계니라.” 우리가 좀더 수련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서양이 우리보다 나아 뵈지만 결국 동서양은 한가지입니다. 미국에 대해 기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백:교무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벽사상이란 것은 원불교 고유의 사상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예부터 전해온 미륵신앙 즉, 미륵불이 세상에 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연다는 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미륵신앙은 ‘정감록’의 등장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도 같습니다. 정감록에선 정도령이 계룡산 아래 새 세상을 펼친다고 했는데, 정도령이 바로 미륵 아닌가요? 많은 신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미륵불 또는 정도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륵과 정도령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김:그건 옳은 판단이라고 봐요. 증산만 해도 후천개벽을 선언한 분인데 그 제자들은 증산을 미륵불로 보거든요. 그러나 우리 원불교의 입장은 다릅니다. 미륵불과 용화회상에 대해 소태산은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다.” 미륵불이란 특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진리가 크게 밝혀져 곳곳에 부처가 가득 찬 세상이 용화세상입니다. 원불교의 2대 교조 정산종사는 ‘근실(勤實)한 세상’이 바로 용화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백:착실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바로 용화회상이라고요? 그렇담 원불교에선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왕을 무어라 설명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원불교에선 정감록 자체를 엉터리라며 근원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불교는 신비적·초월적인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요. 김:정감록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원불교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소태산은 정도령을 鄭씨 성을 가진 특정인물이 아니라 ‘바른 지도자’라고 보았어요. 정도령과 함께 전개될 이상세계란 것도 새 왕조는 아니고 ‘밝은 세상’이라고 했어요. 정감록의 예언은 장차 참되고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움직이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백:교무님 말씀을 듣고 자료를 좀더 찾아봤습니다. 정산종사는 계룡산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했더군요.“계룡산에 정씨 왕이 난다는 것은 닭이 울면 날이 새고 바른 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다.”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정산이 말하는 ‘바른 법’은 무엇일까요? 종교를 가리킨 것 같지요. 정산의 주장대로라면 민중이 염원한 계룡산 정진인은 바른 종교의 등장이고, 바른 종교란 원불교란 말씀입니까? ●‘불종불박(佛宗佛朴)’의 예언 백:교무님이 답을 안 하시는군요. 전 사실 이렇게 짐작했습니다. 원불교에선 미신이나 이적 같은 것을 조금도 안 믿는 것 같으니까, 계룡산 같은 것은 원불교의 입장에서 무의미할 것이라고요. 원불교 교리에 따르면, 착실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밝은 세상이 바로 미륵의 용화회상, 개벽된 세상 아닙니까? 그렇담 계룡산이든 지리산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생각되는 거죠. 김:백 소장님은 이런 얘기 혹 들어보셨나요? 1936년 4월21일 소태산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찾으셨는데 그 때 각석(刻石) 하나가 화제가 됐습니다. 신도안 대궐 터에 있던 이상한 바위인데 기이하게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이태조가 신도안에 대궐 터를 닦으면서 운반해 놓은 것이라 하고, 거기 새겨진 글씨는 무학대사의 필적이란 전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귀를 이렇게 해석합니다.“장차 불법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는데, 그 때 주세불(主世佛)은 박씨”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신도안은 정치적 의미의 새 도읍이 아니라, 새 불국토의 중심이 될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원불교에선 계룡산 신도안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백:소태산은 자신을 그 전설의 주인공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요? 그가 신도안에 수도 도량을 지으라고 명령했다면 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네요. 김:소태산의 속성(俗姓)이 박씨여서 저희들은 그 바위를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계룡산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선배 교무는 이렇게 말했어요.“지구의 축이라는 계룡산, 일찍이 무학대사가 이곳에 도(道, 종교)의 도시(都市)가 열릴 것이라 예언했던 세계의 수도 계룡산, 그래서 그런지 지명조차 갑사(甲寺), 신원사(新元寺), 상도리(上道里)가 있는 계룡산. 그 곳에 원시반본(原始反本)하여 상원갑(上元甲)의 시대가 예고된 곳이 아닌가.” 계룡산은 세계의 수도, 지구의 축이 될 것입니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 세상이 펼쳐질 곳, 세계종교의 중심으로 예정된 성지가 계룡산입니다. ●“어서어서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백:조사를 해봤더니 1959년 10월 정산종사의 주도로 당시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64번지 신도안 대궐터의 불종불박 바위 뒤에 있던 초가 1동을 원불교 측이 매입했더군요. 거기서 2㎞ 떨어져 있던 원불교 남선교당도 아마 그 곳으로 옮겨졌지요. 김:그건 그랬어요. 정산종사가 신도안 ‘불종불박’ 땅을 매입하라고 하셔서 그리 된 것입니다. 사실 원불교의 어른들은 모두 신도안에 다녀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산종사는 직접 다녀오신 일이 없었지만 신도안의 역사를 환히 꿰뚫고 계셨습니다.1961년 10월 정산종사가 열반에 앞서 3대교조가 될 대산종사에게 “지체 말고 어서 어서 신도안에 들어가 터를 잡아라.” 하셔 대산종사는 신도안에 정양을 하며 삼동원의 터를 닦았습니다. 백:제자들에겐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명령했지만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는 교무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정산은 신도안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만 생각했을 뿐 실지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요? 김:전혀 잘못된 추측입니다.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어요. 어느 땐가 풍수에 밝은 제자를 보내 신도안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라고도 했습니다. 신도안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 제자가 돌아와 보고했습니다.“제가 계룡산 상봉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신도안은 천하제일의 귀(貴)한 터였습니다. 정상에 올라 신도안을 굽어 보니 그 산세가 만조백관이 조공을 바치는 형국이었습니다. 다만 너무도 아쉽게 시루봉 하나가 휙 돌아서 있어 어떤 사람들은 역적봉이라 부릅니다. 시루봉을 싫어봉이라고도 합니다. 자세히 따져 보면 신도안은 농사도 잘 안 되고, 천하에 빈(貧) 터입니다.” 이 말을 정산은 몹시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정산은 계룡산이 명산 중의 명산임을 굳게 믿으셨어요. 그래서 3대 교조 대산종사는 계룡산을 가리켜 정산의 높은 덕을 상징하는 산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정산은 구도 수행하던 시절 가야산에서 ‘격암유록’의 갑을가를 얻으셨다 해요. 그 가운데 “상도(上道)에 가야 큰 스승을 만난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상도란 지명이 계룡산에 있어요. 상도는 지명이자 진리의 시작이며 진리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대산은 그런 내력을 다 알아 계룡산과 정산종사를 연계시킨 겁니다. 백:저도 글에서 읽었습니다만 대산의 계룡산 사랑도 대단했더군요.“싫어봉이니 역적봉이니 그런 소리 당최 하지 마라. 성인을 맞이하려고 돌아선 형국이 아니냐. 영성봉(迎聖峯)이라 하거라.”라고 했다고요? 김:1962년 7월 대산종사는 계룡산 상봉을 오르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억조창생개복처(億兆蒼生開福處) 천불만성발아지(千佛萬聖發芽地)” 즉, 계룡산은 억조창생의 복을 여는 땅이니 천명의 부처, 만명의 성인이 나올 곳이란 뜻입니다. 원불교에선 큰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도안 경영에 힘쓴 결과 1970년대 원불교의 신도안 삼동수양원은 5만 8000평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습니다. ●불교부흥을 예언한 정감록 백:이쯤에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이래 원불교의 지도자들은 계룡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계룡산이 장차 불교 부흥의 성지가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고요. 김:맞습니다. 불교부흥은 ‘정감록’ 예언의 핵심입니다. 정산종사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정감록에 이런 말이 있다. 왕씨는 나를 벗 삼고(王氏我友), 이씨는 나를 노예 삼고(李氏奴我), 정씨는 나를 스승 삼는다(鄭氏師我) 하였는데 이는 불교를 두고 한 말이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친불, 조선은 억불이었는데 다가올 세상은 숭불(崇佛)이란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정산종사는 정감록이 예언한 미래 세상을 불교 세상으로 보신 겁니다. 또 이런 말씀도 남기셨어요.“도교가 하늘이라면 불교는 땅이며 유교는 사람이다. 지금은 땅에서 올라오는 세상이다. 불교 세상이다.” 앞으론 불교가 세상 도덕의 중심입니다. 백:원불교에선 신도안에서 대규모 선교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야학을 운영해 생활 개선, 문맹 퇴치, 미신 타파 운동을 했고, 그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도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기에 따라선 마치 원불교가 신도안을 접수하려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접수라뇨? 나쁜 뜻으로 볼 일이 아닙니다. 원불교는 신도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새 운수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정감록 신자들을 깨우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미신이고, 그런 미신으론 밝은 세상을 절대 일으키지 못합니다. 생활이 우선 근실해야지요. 신도안 주민 가운데 무려 850명이 처음 7년 동안 원불교의 야학에서 올바른 가치를 배웠습니다. ●“계룡대 옮기면 우린 다시 들어간다” 백:그러나 원불교도 결국 신도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1983년 7월27일 제5공화국 정부는 신도안의 전주민에게 이 지역에서 철거하라는 통고를 했지요. 이른바 ‘6·20사업’이었습니다. 신도안 일대에 군사기지 ‘계룡대’가 들어서기로 확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신도안이 세계종교의 중심이 될 거란 정감록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간 것 아니겠습니까? 김:매사를 그렇게 성급하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1959년 정산종사가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앞으로 30년 후에는 신도안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과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9년,‘6·20사업’으로 신도안 주민들은 모두 철수했고 육·해·공군 참모본부가 들어섰습니다. 실제로 엄청 변한 거지요. 백:요컨대 원불교가 신도안에 건설한 삼동원의 꿈은 백일몽이 된 거죠. 김:성인의 말씀을 범부의 안목으로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계룡산 신도안에 원불교도들의 염원이 실현됩니다. 천하를 뒤흔드는 권력의 위세도, 지금 여기 살아 숨쉬는 육신도 수명에 한계가 있으나 소중한 꿈은 한계를 벗어납니다.5공 정부의 무모한 계획으로 삼동원을 포기할 당시 원불교는 조건부로 매매계약에 서명했습니다. 언젠가 군사시설이 철거될 때 최우선 순위로 원불교 측에 반환해 달라고 명시했습니다. 백:신도안 땅은 이를테면 특정한 공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거기 너무 집착하는 것도 일종의 미신이 아닌가요? 김:서산에 해가 지면 동산에 달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미륵불의 용화 세상에 대한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도안의 꿈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제 통일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냉전시대의 음해와 대립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저 하늘에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부처님의 원만한 정법이 이 세상을 평화로 이끌 것이고, 계룡대도 물러날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백:계룡산 신도안이 정법을 상징한다, 정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한때는 그저 새 왕조의 도읍터로 인식됐고, 그러다가 대한독립의 상징, 나아가 세계 중심국가를 향한 염원, 후천개벽의 근원지로 풀이되던 신도안. 현실적으론 중요 군사시설이 위치한 곳인데 이곳을 원불교에서는 용화세계의 구심점으로 보는군요. 원불교에 이르러 정감록에 관한 해석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겨집니다. 참, 요즘 계룡대를 이전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는군요. 부디 성불하십시오. (푸른역사연구소장)
  • 삼국·고려시대 무예의 모든 것

    ‘당나라 사신이 신라의 쇠뇌 기술자를 데리고 가 나무쇠뇌를 만들게 하여 화살을 쏘았는데 30보 나갔다. 당나라 황제가 “내가 듣기에 너희나라에서 쇠뇌를 만들어 쏘면 1000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이냐?”하고 묻자 “재료가 좋지 못한 때문이니, 만일 목재를 본국에서 가져오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신라본기6(문무왕 9년)에 나오는 기록으로 당시 신라의 쇠뇌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케 해준다. 한국의 무예와 무기, 전술 등은 이처럼 신라본기 등 우리 문헌은 물론 중국, 일본의 문헌에도 상당량 언급되어 있는데, 국립민속박물관이 이들을 발췌해 정리하는 작업에 나서 최근 ‘한국무예사료총서’를 냈다. 1차로 발간된 것은 총서1 ‘삼국시대편’과 총서Ⅱ ‘고려시대편’ 2권. 삼국시대편은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 한국의 문헌 6책, 사기·한서·후한서 등 중국 문헌 32책, 일본서기 등 일본문헌 7책 등 총 45책에서 무예와 관련된 사료를 발췌해 번역했다. 고려시대편은 한국문헌(22책)을 중심으로 총 31책에서 관련 자료를 발췌 정리했다. 책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무치주의(武治主義) 이념과 상무적인 정신을 강조하면서 실전에 대비한 전투기술을 권장했다. 궁술을 비롯한 기마술, 검술, 창술, 부월술, 노술(弩術), 수박(手搏), 각저(角抵), 축국(蹴鞠) 등의 다양한 무예가 크게 발달했다. 특히 고구려는 기마술과 맥궁(貊弓)을 기반으로 주변민족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숙신의 단궁(檀弓), 말갈의 각궁(角弓) 등을 흡수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궁술을 구사하게 되었다. 또한 기병전술과 보병전술을 혼합하여 싸우는 전술체제가 발전했으며, 검술과 창술이 무예에서 분리되어 춤으로 발전한 사례도 확인된다. 고려의 통일로 한국무예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후삼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고려왕조는 대내적인 안정을 위해 유교이념을 받아들이고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종래의 무치주의를 문치주의로 전환시켜 나갔다. 발해의 멸망으로 북방민족과 국경을 맞닿게 됨으로써 무예와 전술 또한 이에 대비해 성곽이나 산악지역을 거점으로 적을 방어하기 위한 궁술과 노술이 발달된다. 이때 수질노, 팔우노 등 다양한 노의 종류가 등장하고, 궁술로 관리를 뽑는 궁과(弓科)도 등장한다. 각희(角戱), 각력(角力) 등으로 기록된 씨름이 군사훈련으로 시행되고, 민간 놀이로 분화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총서 발간작업을 주관한 심승구(한국체대 교수) 한국무예연구소장은 “한국 무예는 한민족의 출발과 그 궤를 같이한다.”며 “그동안 관련 문헌이 워낙 다양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어 내용을 알기가 어려웠는데 이번 총서 발간으로 한국 무예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소설가 김별아 ‘화랑세기’속 요부 ‘미실’ 출간

    작가 김별아(36)가 1500년 전의 여인을 불러냈다. 새 작품 ‘미실’(문이당)은 신라시대의 요부(妖婦) 미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얽은 장편소설이다. 지난해 말 국내 문학상 사상 최고상금인 1억원의 세계문학상을 따내 문단의 시샘이 쏠렸던 작품이다. 왜 ‘미실’이었을까. 소설집 ‘꿈의 부족’(2002년) 이후 3년 만에 내민 장편의 여주인공이 하필이면 왜 우리 역사 최고의 팜 파탈이었을까. 역사의 먼지를 헤집어 소환해낸 주인공에게 작가의 애정은 유별나다.“미실은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도 어느 한쪽 꿇리지 않고 당당한 인물이었어요. 요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한 몸에 끌어안고 살았던.‘모성’과 ‘욕망’이 충돌하지 않고 한 인물 속에서 용해된 여성 캐릭터를 구현해 보고 싶었죠.” “남성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이 늘 모성과 욕망의 어느 한쪽 이미지로만 치우치는데, 그 극단적 묘사법은 옳지 않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기운명에 굴하지 않은 주체적 여성 미실(549∼606)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백 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수식될 만큼 미색이 빼어났던 여인. 진흥·진지·진평 등 3대 신라왕을 섬긴 데다 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네 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태자 동륜(진흥왕의 아들)과도 염문을 뿌리며 왕실을 주물렀던 역사 속 인물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뛰어난 미모로 본능에 충실했으면서도 운명에 굴하지 않는 ‘현대적’ 여성상”은 소설에 제대로 녹아났다. 왕실에 색(色)을 바치는 전문여성집단 ‘대원신통’에서 태어난 미실은 어려서부터 온갖 기예와 미태술을 익힌다.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의 눈에 들어 입궁한 뒤 곧 권력다툼에 휩쓸려 밖으로 내쳐진다. 화랑 사다함을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왕실의 부름으로 다시 입궁한다. 이후 미실은 스스로 권력을 움켜쥐려는 욕망을 실현해 간다. 작가의 설명처럼 “권력을 키워 가는 과정에서도 아이를 8명이나 낳으며 모도(母道)를 충실히 걸었던 독특한 여성상”을 묘파하는 데 소설은 전력투구한다. ●용어 하나하나 史實에 맞춰 사용 작가는 이 소설에 3년여를 공들였다.“중국 후한의 장수 삭매의 사랑과 운명을 무협소설풍으로 그린 단편 ‘삭매와 자미’(소설집 ‘꿈의 부족’)를 쓸 무렵 역사 소재 소설을 구상했다.”며 “그러나 역사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쓰겠다는 원칙을 세웠었다.”고 말했다.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꽃 이름, 고사성어 하나까지 시대적으로 들어맞는 것인지 따졌을 정도다. 신라시대에 나올 수 없는 용어들은 추려냈다. 때로는 고어투의 문체가 적당히 끼어들어 소설에서는 고졸한 맛이 난다. 최근 여성 작가들이 황진이·나혜석 등 역사인물들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경향이 아이디어 빈곤 때문이 아닌지 짐짓 물었다. 대답은 솔직했다.“인정할 부분”이라더니 힘센 변명 한마디를 덧붙인다.“요즘처럼 빨리 돌아가는 현실에선 소설의 ‘영원성’을 포착해 내기가 힘드니까.” 받아 놓은 큰 상금은 대체 어디에 쓸 거냐는 질문에 “열살짜리 아들과 9월쯤 캐나다로 날아가 한 2년 지내다 오겠다.”며 엉뚱한 소리다.“죽을 때까지 쓰는 게 삶의 목표”라니 작가의 좌표에서 발을 빼려는 계산은 아닐 테고. “역사소설을 좀더 써보겠다.”고 한다. 청계천 복원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주문한 조선시대 배경의 소설을 준비하느라 요즘은 조선왕조실록에 푹 빠져 지낸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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