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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표 거북선 곧 복원·공개”

    “이순신표 거북선 곧 복원·공개”

    415년 전에 제작된 거북선(귀선·龜船)에서의 화룡점정은 무엇일까. 십중팔구는 용머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거북머리가 아닌 용머리를 달았을까.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1592년 6월14일)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신이 일찍이 섬 오랑캐의 변란을 염려하여 전선과는 다른 거북배를 만들었습니다. 이물에는 용의 머리를 달고, 그 아구리로는 대포를 쏘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거북이가 천년을 살면 용, 즉 ‘신귀’가 된다는 이야기(龜變化神龜)가 있다. 아울러 조자용씨가 소장한 ‘귀선도’에 보면 “신귀는 사신(四神)과 사령(四靈)에서 한자리를 차지해 벽사와 길상의 상징이 되어 용왕의 사자로서도 큰 임무를 맡았다.”라고 돼 있다. 따라서 거북선에 용머리를 단 것은 신귀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통 한선(韓船)기능 전승자로 국내 유일한 고대선박 연구가 이원식(73)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백제 사신선, 통일신라 교관선, 고려 완도선 등 지난 42년동안 36건의 고대선박을 연구·복원제작해 이 방면에 거의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거북선박사 1호’라는 공식명함을 하나 더 추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새로운 영역을 쌓았다. 지난 달 실시된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심사에서 그가 제출한 논문 ‘1592년 귀선의 주요 치수 추정에 관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 것. 학위수여식은 오는 2월21일. 여기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발표한 연구논문의 내용이다.2006년말 현재 역사 서적이나 교과서 등에 게재돼 있는 귀선도(龜船圖)나 정부 기관에 전시된 모형선은 ‘1795년식 거북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1592년 이순신 수군절도사가 창제한 거북선이 아니라 203년이 지난 1795년(정조19년)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의 ‘귀선지제’에 근거해 만들어졌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1592년에 일본군의 침략전쟁때 해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1592년식 거북선’에 대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아 연구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 소장이 연구한 대목이 바로 이 ‘1592년식 거북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왕성한 연구의욕으로 400여년 전의 베일을 어느정도 벗겨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았다. 강아지 세마리가 먼저 나와 꼬리치며 낯선 방문자를 맞이한다. 현관 입구에는 ‘한선 기능 전승자’‘원인고대선박연구소’라는 문패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때마침 그는 1592년식 거북선의 복원작업을 위한 설계도, 즉 선체 선도(線圖)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우선 1592년식 거북선이 1795년식 거북선과 다른 점을 비교해달라고 요청했다. 첫번째는 크기나 규모면에서 1795년식에 비해 전체적으로 30%정도 작은 것이 특징. 따라서 선체 전장의 길이가 1795년식(34.05m)보다 7m가량 작은 26.27m이고, 선체 선폭은 1795년식(9.15m)보다 1.9m 좁은 7.06m라는 것. 배 밑창에서 갑판까지의 깊이 또한 1795년식의 2.34m보다 다소 낮은 1.92m라고 설명했다. 두번째로는 대포의 포혈.1592년식의 경우 좌우측 각각 6개씩의 포혈이 있는 반면 1795식은 이보다 더 많은 10개씩이다. 또한 1592년식에는 없는 소구경포혈이 1795년식 거북잔등 부분에 설치돼 있다. 특히 용머리의 경우 1592년식은 대포를 발사했으나 1795년식은 유황염초를 피웠다고 했다. 아울러 1795년의 용머리 배치가 90도로 꺾인 반면 1592년식은 이보다 완만한 30∼40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이밖에 1592년식에는 거북잔등에 창을 꽂아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했으나 1795년식은 거북그림을 그려넣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이 소장은 밝혔다. 이같은 연구결과의 근거에 대해서는 “1592년 당시 이순신 수군절도사의 일기와 장계,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등 관련 전적(典籍)에 기록된 거북선의 주요수치와 기타 선박 관련자료 등을 참고했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그동안 대한조선학회지 등에 발표한 거북선 관련 선행 연구논문을 활용했다. 특히 전통한선의 제1번 기본치수가 되는 ‘1592년식 거북선의 저판치수자료’ 7건을 발굴했으며 이것이 1592년 거북선 주요치수 연구의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1592년식 거북선은 언제 복원될까. 이 소장은 현재 현대중공업 조선해양연구소에서 ‘한국 전통선박 복원 조사연구’ 프로젝트(책임연구원 민계식 부회장)의 사외연구원으로 몸담고 있다. 이 연구소는 자체적으로 전통 고대선박 복원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만 1795년식 거북선과 조선통신사선 등 정밀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소장이 현재 1592년식 거북선의 선도 및 공작설계도 작업을 마무리 중이서 이르면 올 봄 실험용 모형정도는 언론에 공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거북선연구에 대한 논의는 1958년 숭실대 최영희 교수의 ‘귀선고(龜船考)에서 처음 대두되었으며 1964년을 전후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소장 역시 이 무렵 한강유역과 서해안 및 남해안의 전통 한선의 조선기법을 채록하면서 고대선박 연구에 뛰어들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공고 4학년때 6·25가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입대했다가 공군사관학교 조종간부후보1기로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후 제약회사인 ‘한국화이자’에 기계담당 공무직으로 1963년 입사했지만 고대선박 연구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1965년에 ‘국방사학회’에 가입한 뒤 그해 첫 논문인 ‘귀선의 과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내친 김에 ‘원인(元仁)고대선박연구소’라는 민간연구소를 설립했다. 1969년에는 은사로 모시는 김재근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작고)와 함께 아산 현충사에서 최초의 거북선 복원작업에 들어갔다.1971년에는 인천대림조선소에서 처음으로 원형의 2분의1 1795년식 거북선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이 거북선은 극영화 ‘이순신’(김진규 감독)에 등장했다. 이후 거북선 복원에만 10여차례, 신라시대 전선(戰船), 장보고 무역선, 백제 사신선, 완도 고려선, 조선통신사선 등 30여 척의 고대선박을 복원, 박물관 등에 전시했다. 아울러 ‘한국의 배’‘고대선박 발달사’ 등 4권의 저서를 냈고 논문은 수십편을 발표했다. 그는 뒤늦게나마 정식 학위를 취득하려고 검정고시와 독학사 과정을 거친 뒤 2002년 해양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집념을 보였다.2004년 석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자 곧바로 박사과정을 밟았고 일주일에 2∼3일씩 부산과 용인을 오가며 노력한 끝에 이번에 그 결실을 보았다. “앞으로는 기존의 1795년식 거북선은 1592년식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하고 이에 따른 후속 작업은 매우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잘못 알려진 우리의 전통 한선에 대한 수정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해요.”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자손녀들을 만날 때마다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서울 출생 ▲50년 경기공고 4년 재학때 학도병 입대 ▲65년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설립 ▲69년 문화공보부 현충사 귀선 고증위원 ▲85년 한국과학사학회 정회원 ▲92∼96년 해군사관학교 해저유물발굴단 자문연구위원 ▲98년 대한조선학회 정회원 ▲2001년 독학사 검정고시 합격, 한국해양대학 장보고연구소 연구원 ▲04년 해양대 공학석사 ▲06년 공학박사 # 주요 상훈 전통한선기능 전승자(노동부장관 지정), 대통령 표창(01년, 한선기능전승 유공) 등 # 주요 작품실적 현충사 거북선(69년), 중앙정보부·해군사관학교 거북선(71년), 미국EXPO 거북선(84년) 등 수십여 작품. 그외 장보고 전선, 조선통신사선, 완도 고려선, 신라 교역선, 백제사신선, 통나무쪽배 등 30여 작품제작
  • 조선명가 안동김씨/김병기 지음

    우리는 안동 김씨를 흔히 하나의 가문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시조가 다른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 두개의 가문으로 나뉜다. 구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이 시조인 반면, 신안동 김씨는 고려 태조의 삼태사(三太師) 가운데 한명인 김선평을 그 시조로 한다. 세도정치로 이름을 떨친 안동 김씨는 신안동 김씨다. 신안동 김씨는 조선말 순조 이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 자리를 독차지하며 권력을 좌지우지했다.23대 순조비 순원왕후,24대 헌종비 효현왕후,25대 철종비 철인왕후 등 세명의 왕후를 연이어 배출해 왕실의 외척으로도 세도를 부렸다. 안동 김씨는 과연 세도정치로 나라를 어지럽힌 권문세족에 불과한가. ‘조선명가 안동김씨’(김병기 지음, 김영사 펴냄)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안동 김씨가 우리 역사의 어둠이자 동시에 빛이었음을 강조한다. 조선 정치의 최정점에 선 신안동 김씨는 왕을 막후에서 조종하며 조선의 역사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신안동 김씨의 가문사는 곧 조선의 정치사였다.‘조선은 김씨의 나라이지 이씨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안동 김씨는 비극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수항으로부터 김창집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 4대는 당파싸움에 휘말려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는 시대를 이끌어간, 자타가 인정하는 명문가였다. 안동 김씨는 조선왕조 사상 가장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집안의 하나이며, 나라의 위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절과 절의의 본가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김상용·김상헌 형제는 2상(二尙)이라 불리며 안동 김씨의 위상을 높였다. 책은 구한말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야기 등 독립을 위해 힘쓴 안동 김씨들의 사례도 소개한다. 안동 김씨야말로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데 앞장선 가문이라는 것이다. 배천 김씨로 독립운동가의 후예인 저자(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장)는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명문가가 적지 않지만 문중사(門中史)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며 “이는 문중사학이 가문의 영광에만 집착, 문중 인물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9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병자호란 다시 읽기] (2) 여진족과 만주1

    조선 사회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남긴 병자호란의 발발은 16세기 후반∼17세기 중반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이른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여파가 조선으로 밀어닥친 결과였다. 명청교체의 주역은 여진족(女眞族)이었다. 그들은 병자호란 7년 뒤인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먼저 여진족과 누르하치의 성장과정을 살펴본다. ●여진족, 만주, 그리고 한국사 여진은 상고 시기 숙신(肅愼),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던 퉁구스 계통의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발상지이자 활동무대는 우리가 보통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이었다. 만주란 과연 어떤 곳인가? 많은 한국인들은 만주 하면 먼저 고구려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말을 달리던 벌판이기도 하다. 해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을 찾고, 백두산 천지(天池)에 오른다. 한국인들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을, 그리고 천지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광’을 추억한다. 한국인들에게 이렇듯 각별한 의미를 지닌 만주는 지난 1000년 동안 그야말로 풍운의 땅이었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만주는 한국인들과는 멀어졌다. 이후 19세기까지 만주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 한족, 그리고 다시 여진족의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1945년 이후에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격전이 벌어진 뒤, 만주는 중국 땅이 되었다. 만주에서 일어나 대제국 청을 세운 여진족은 오늘날의 중국에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었다. 청나라가 차지했던 광대한 땅이 고스란히 오늘날 중국의 영토로 계승된 것이다. 명나라 시절, 한족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이자 ‘금수(禽獸)’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청은 1644년 명을 접수한 이래 영토를 확장하여 신장(新疆), 티베트, 내몽골 지역을 자신들의 판도 속으로 집어넣었다. 청나라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영토는 과거 명나라 시절보다 거의 40% 가까이 불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644년 베이징을 접수할 무렵, 여진족의 인구는 대략 50만, 한족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이후 여진족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자, 동시에 여진족과 청조 지배층의 정치적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날 만주에서는 700만 정도의 여진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고유의 말과 문자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상 한족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이다. 조선은 비록 병자호란에서 청에 항복했지만 한(韓)민족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자적인 국가와 민족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 홍타이지가 지하에서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병자호란은 비록 치욕의 역사였지만, 중국의 무시무시한 동화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부심만은 우리의 ‘엄청난 자산’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글을 이어간다. ●아구다(阿骨打)의 추억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신빈(新賓)에 있는 만족(滿族) 자치현(自治縣)에 가면 허투아라(赫圖阿拉)라는 성이 남아 있다. 이곳은 바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장차 청 제국을 건국하는 기반이 되었던 흥경노성(興京老城)의 옛터이다. 왕궁이 있었던 곳의 면적은 기껏해야 우리나라 시골의 여느 초등학교 넓이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 과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가 집무했던 한왕전(汗王殿)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왕성(王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허투아라성의 모습은 16세기 후반까지 중화제국 명의 지배를 받으며 만주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의 초라한 상황을 상징한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먼 조상들은 결코 초라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한 이후 여진족들은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만주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거란족은 요(遼)를 세워 10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만주와 화북일대를 차지하는 제국이 되어 남쪽의 송(宋)과 각축을 벌였다. 1115년 그런 와중에 여진족 내부에서는 아구다(阿骨打)라는 영걸이 나타났다. 그는 주변의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는데 국호를 금(金)이라고 했다. 훗날 누르하치도 나라 이름을 한때 대금(大金)이라 지칭했는데, 사람들은 보통 후자를 아구다가 세웠던 금과 구별하여 후금(後金)이라고 부른다. 아구다의 금은 이후 더욱 세력을 키워 요를 멸망시키고 1127년엔 한족 왕조 송을 양자강 남쪽으로 밀어냈다. 송의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은 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남송(南宋)은 금에 세폐를 바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족들에게는 굴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금은 비록 1234년 몽골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후 한족들에게 아구다와 금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368년 중원에는 다시 한족 왕조 명(明)이 들어섰다. 중원을 지배했던 몽골족의 원(元)나라는 베이징을 버리고, 북으로 도주하여 고비사막 방면까지 쫓겨갔다. 명은 다시 만주 쪽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하라 1279년 남송 멸망 이후 거의 백년 만에 중원을 되찾아 한족들의 자존심을 회복한 명의 여진정책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여진족을 통제하되 그들을 너무 강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게 ‘섬세하게’ 길들이는 것이었다. 명은 흩어져 있는 여진족들 사이에서 과거 아구다와 같은 패자(覇者)가 출현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렇게 되면, 여진족이 다시 커다란 세력으로 뭉치게 될 것이고 송나라가 겪었던 ‘끔찍한 경험’을 되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진족들을 뿔뿔이 흩어진 상태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명은 북으로 도망간 몽골의 원나라(보통 北元이라 부름)를 여진족을 이용하여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명은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고려한 셈이다. 그러려면 여진족이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명의 여진정책은 일종의 ‘딜레마’였다. 명은 고심 끝에 14세기 후반부터 만주의 여진족들을 분할지배 방식으로 통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명은 랴오허(遼河)를 기준으로 서쪽, 즉 오늘날 랴오닝성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구를 설치, 지역의 한족들을 직접 통치했다. 그리고 요동도사가 관할하는 산하이관(山海關) 부근부터 관전(寬奠)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변장(邊牆)이라 불리는 담을 쌓았다. 여진족들은 이 담을 넘어 서쪽으로 올 수 없었다. 랴오허 동쪽, 오늘날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에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구를 두어 여진족을 통치했다. 그 아래에는 위소(衛所)라는 기관을 두어 여진족 출신을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하지만 위소의 우두머리를 임명할 때나, 여진족 내부에서 분쟁이 생겼을 때에는 명의 지휘부가 개입했다. 여진족의 자치를 허용하되, 여진족 유력자들을 명의 행정체계에 포섭하여 통제하는 전형적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였다. 건국 직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명의 여진정책은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은 명 내부의 정치가 그런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만력제(萬曆帝)의 정치적 태만과 무능, 그에 더하여 임진왜란과 같은 명 외부의 격변까지 맞물리면서 여진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누르하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서울 청계천 도자(陶瓷)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광교부터 삼일교까지 벽면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청계천 반차도는 높이 2.4m, 길이 18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자벽화이다. 벽에 붙은 도자타일(30×30㎝)만 4960장이다. 반차도는 고증한 작품인 동시에 창작품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200년을 넘나들며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정조가 1795년 2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을 맞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과 현륭원(사도세자 무덤)을 다녀와서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나왔다. 이 책에 단원 김홍도 등이 창덕궁에서 광통교를 지나 화성으로 가는 왕의 행차 모습을 흑백 목판화로 그렸다. 1994년 한영우 전 서울대 교수가 목판화에 채색을 입혔다. 세월 탓에 색이 바랜 채색 목판화와 뒷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행렬도를 고증해 작품의 색깔을 하나하나 정했다. 가로 15m, 세로 18m의 반차도를 청계천 도자벽화로 확대 제작하면서 강석영 이화여대 교수가 채색의 명암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헌정 작가가 조선시대 백자를 재현해 타일 원판을 제작하고, 여기에 17가지 안료를 써서 인물 1779명과 말 779필을 그렸다. 도자를 빚어 굽고 채색하는 일은 모두 손으로 했다. 이로써 과거의 유물이 생명력을 지닌 현재의 미술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작품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정조는 왕의 가마 정가교(正駕轎)를 타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터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앞에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의 자궁가교(慈宮駕轎)에 이어 정조가 탔다는 좌마(座馬)가 보이지만 정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왕을 대충 작게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반차도는 한 폭의 풍속화이기도 하다. 나인의 웃는 표정, 찡그린 표정조차 생생히 살아있다. 작품을 제작, 기증해 도자벽화에 이름을 새긴 조흥은행도 이제 역사가 됐다. 신한은행과 합병하면서 그 이름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영우 교수는 “왕조의 위엄, 질서와 더불어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면서 “정조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독일 나치군이나 북한 인민군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고종·순종실록 완역 인터넷으로 본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두 황제인 고종과 순종의 통치기록이 완역돼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는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열람할 수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서비스에 고종·순종실록을 추가하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국사편찬위는 2005년 12월부터 조선왕조실록의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을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sillok.history.go.kr)를 통해 공개하고 있지만, 일제때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빠져 있었다. 왜곡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고종·순종실록은 국보뿐 아니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도 빠져 있다. 국사편찬위는 “두 실록은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규례에 맞게 편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심해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면서 “두 실록과 나머지 실록의 위상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두 황제의 실록이 조선왕조 마지막 순간의 통치자료인 만큼 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할 수 있는 고종·순종실록은 한문 320만자에 달하는 분량이다.원문에는 없는 17종의 문장 기호를 추가했으며 기존 조선왕조실록과 동일한 문체로 수정한 번역문을 함께 실었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미술사 용어 쉬운 말로 바뀐다

    미술사 용어 쉬운 말로 바뀐다

    박물관에서 ‘청자투각용두식필가(靑磁透刻龍頭飾筆架)’같은 안내카드를 읽으며 당혹감을 느꼈던 관람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쉽게 이해하라고 적어넣었겠지만,‘청자용머리 장식 붓꽂이’라는 뜻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용어 개선 작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박물관 시대를 앞두고 2004년부터 추진한 미술사 분야의 용어 개선 작업이 지난해 말 마무리됐다. 개선안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용어-미술사’도 8일 발간됐다. 용어 개선작업은 ▲중학생 수준의 관람객도 이해할 수 있는, 한글 위주 전시 용어의 정립과 ▲혼동되어 사용되던 전시 용어의 정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병용되거나 혼용되던 명칭은 고문헌을 검토하고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고려하여 하나로 정리했다.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 선생’과 ‘끝없이 펼쳐진 강산’으로 풀어쓰고 한자를 뒤에 써넣었다. 반면 ‘몽유도원도’처럼 처음부터 제목이 붙여졌거나 고유명사처럼 친숙해진 것은 한자이름을 앞세우고 ‘꿈 속에 여행한 복사꽃 마을’처럼 한글로 풀어쓴 제목을 뒤에 붙여넣었다. ‘영산회상도’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는 ‘나무위에 앉은 한 쌍의 까치’,‘모견도’는 ‘어미개와 강아지’,‘진두대주(津頭待舟)’는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이다. 청화백자를 일컬을 때 혼용되던 ‘靑畵·靑花·靑華´는 조선시대 국내산 청화백자를 가리키던 ‘靑畵’로,‘鐘´과 ‘鍾´이 혼용되던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 등의 사료에 근거해 ‘鍾’으로 통일했다. 붉은색으로 장식된 백자를 가리키는 진사는 진사(辰砂)라는 안료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화(銅畵)로 정리했다. 탱화(幀畵)라는 이름을 쓰지 않도록 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탱(幀)은 18세기 이후 불화의 화기에 제목과 함께 쓰고 있으나, 발음이 ‘탱’인지, 명확한 근거가 없어 당분간 탱 대신 도(圖)를 붙이도록 했다. 신중탱은 신중도, 감로탱은 감로도, 산신탱은 산신도, 시왕탱(十王幀)은 시왕도 등이다. 한편 금석문을 먹물로 찍어내어 판독을 쉽게 하는 탁본(拓本)은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큼 일반화된 용어이다. 하지만 탁본은 조선 후기에 주로 쓰이고 탑본(本)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표기하고 있는 만큼 탑본을 활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이 만든 용어개선안을 바탕으로 8차례 열린 자문회의에는 정양모·안휘준 전 현직 문화재위원장을 비롯해 김리나·한정희 홍익대 교수,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조선미 성균관대·이태호 명지대·정우택 동국대·박영규 용인대·이주형 서울대·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등이 참여했다. 작업을 주도한 중앙박물관 김영원 미술부장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검토하고 고민하고 토론했지만, 학자들이 선호하는 용어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가 너무나 달라 간격을 좁히는 일은 힘겨운 일이었다.”면서 “용어 개선 작업으로 더욱 선명해진 것은 이번에 정리한 것보다 몇 배로 검토, 정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라고 작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반달/최태환 수석논설위원

    동양화는 낙관 살피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의 아호뿐 아니다. 다양한 글귀가 담긴다. 그의 철학이나 정신의 깊이를 읽는 좋은 단초가 된다. 찬찬히 음미할수록 맛이 더 난다. 크기가 작아도 상관없다. 돋보기를 대면, 작가의 숨은 기운이 성큼 다가온다. 지난해 고궁박물관이 ‘조선왕조 인장전’을 가진 뒤 책을 냈다. 정조·헌종·고종 등 역대 군왕과 강세황·정약용·김정희·대원군 등의 글, 그림 그리고 낙관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운의 헌종이 다시 조명됐다. 후기 세도정치의 그늘에 가려 23세에 요절했지만, 그림과 글의 경지는 상당했다고 한다. 그의 호 ‘元軒’(원헌) 낙관은 군왕의 기개보다는 단아한 문인의 향이 진하다. 월북 화가 이석호의 낙관이 재미있다. 그의 작품전이 지금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호박 참새 포도 등을 소재로 한 향토색 짙은 채색 수묵화들이다. 낙관은 반달 모양이다. 그 안엔 한글 ‘내고향’이 담겼다. 북한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은 그지만, 향수는 떨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고향과 가족을 향한 그의 마음이 반달만큼 아련하게 다가온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0) 석가 진신사리 모신 오대산 상원사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0) 석가 진신사리 모신 오대산 상원사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9㎞쯤 떨어진 오대산 산록에 아담하게 앉은 상원사(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건물이래야 목조 문수동자좌상을 모신 주 전각 문수전에 딸린 영산전과 청량선원, 범종각 정도가 고작인 소박한 사찰이다. 가람의 규모가 작은 탓에 흔히 월정사의 ‘산내 암자’쯤으로 인식되지만 숱한 고승을 배출해온 1200년 신라 고찰이자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겐 ‘한국 최고의 범종’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으로 인해 잘 알려진 사찰. 불교계에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에,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문수신앙이 보태져 수행하는 운수납자(雲水衲子)와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지이다. 원래 오대산의 산명(山名)은 처음 산문을 연 개산조인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꿈속 게송을 받고 돌아와 절을 창건한 데서 비롯된 이름. 자장 스님은 중국 오대산에서 한 노 스님으로부터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 땅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말과 함께 가사와 발우 한벌, 부처님 정골사리를 받고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귀국해 월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상원사는 한참 후인 성덕왕 4년(705)에 두 왕자인 보천·효명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진여원(眞如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당시 오대산은 오류성중(五類聖衆), 즉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삼국유사) 당시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보천태자에게 신문왕의 후계를 권했지만 보천태자가 한사코 거부해 결국 효명태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여러 모습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세운 것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사다. 이 설화를 뒷받침하듯 지금도 오대산에는 상원사를 중심으로 중대 사자암, 동대 관음암, 서대 염불암, 남대 지장암, 북대 상두암(미륵암)이 포진해 있다. 이 오대 중에서 상원사가 있는 중대는 바로 오만 보살신앙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상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적멸보궁과 상원사동종.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란 뜻.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한다. 국내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 모두 다섯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는데 불교계는 상원사의 적멸보궁을 가장 먼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는 ‘천하의 명당’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정식 사리탑은 없고 최근 증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 뒤쪽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상징물이 서 있다. 문수전 앞 마당 작은 건물 안에 달려 있는 상원사동종은 종소리와 청동 합금, 주조기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종의 모범.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비천상을 비롯한 의장(意匠)과 우아한 문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종의 마멸과 훼손을 막기 위해 타종을 중단해 지금은 아쉽게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윤2월조와 경북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 6권´에 따르면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5년(725년)에 제작되어 안동의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조선 예종1년(1469년)에 이곳 상원사로 옮겨왔다. 죽령을 넘을 무렵 종이 너무 무거워 애를 먹던 중 종유(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돌려보내자 종이 수월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원래 종의 동서남북 사방 면에는 각각 9개씩 36개의 종유를 만들었는데 1개가 없어진 35개만 남아 있어 흥미롭다. 상원사에서 특이한 것은 불교 중흥기인 고려대엔 사찰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오히려 숭유억불책을 썼던 조선조에 왕실의 각별한 비호와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던 태종은 만년에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을 정도였다. 특히 세조와 관련된 흔적은 사찰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서울에서 상원사까지는 달포나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세조는 재위기간 중 3차례나 상원사를 찾았다고 한다. 상원사 주차장 앞에는 세조가 몸을 씻기 위해 의관을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가 지금도 서있다. 단종을 죽인 세조는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뒤 온 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병에 걸리자 오대산을 다니며 기도를 올려 병이 낫도록 발원했다고 한다. 어느날 오대산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우연히 지나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동자승이 등을 밀어준 뒤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격한 세조가 화원을 불러 그 동자승의 화상을 그리게 했는데 지금 문수전 오른쪽 외벽에 그 모습을 재현한 벽화가 걸려 있다. 문수전 안의 목조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도 그런 연유에서 조성해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3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조의 왕사인 신미 스님이 복을 빌기 위해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세조가 채색·쌀·무명·베와 철재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적었다는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도 왕실과 상원사의 관계를 짐작게 한다. 세조가 대(大)시주자로 앞장서자 왕비를 비롯한 궁인, 종실, 조정 신료와 전국의 수령방백들이 앞다투어 시주에 나섰던 사실을 보여준다. 문수전 앞 두마리의 고양이가 나란히 선 석조상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는 자신의 옷소매를 물고 늘어진 것을 수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 좌대 밑에 칼을 품고 숨은 자객을 찾아냈다고 한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의 고양이를 잘 보살피라는 뜻으로 묘전(猫田)을 하사해 상원사는 사방 80리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조의 원찰이 되었던 상원사는 안타깝게도 1946년 선원 뒤의 조실(祖室)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지금의 문수전과 청량선원 등 대부분의 전각은 모두 그 이후 복원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kimus@seoul.co.kr ■ 천고에 자취감춘 학이 머물렀던… ● 한암 스님과 상원사 상원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월 운봉 동산 등 역대 선지식(善知識)들이 주석하며 수행했던 유서깊은 곳. 이들 선지식 중에서도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은 채 ‘오대산 도인’으로 통했던 한암(1876-1951)스님은 상원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선승이다. 금강산에 유람갔다가 발심해 장안사 행름 노사를 은사로 출가한 한암 스님이 상원사에 든 것은 50세 때인 1925년. 당시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었던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오대산을 찾았다.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상원사 산 중턱의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무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 단풍나무가 서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된 것도 그 즈음이다. 일제시대 일본 조동종 사토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와 법거량을 한 끝에 “한암 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라며 떠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 일이 있은 뒤 상원사에는 한암 스님을 만나려는 일본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6·25전쟁 중에는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하자 법당에 앉아 “법당을 지키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라.”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국군이 어쩔 수 없이 법당 문짝만 뜯어내 불지르고 떠나는 바람에 상원사가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한암 스님은 이곳에서 보문 난암 탄허 스님 등 한국불교의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키워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좌탈입망(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 [사회플러스] 오대산본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일본 도쿄대가 반환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될 전망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월정사에 오대산본 실록을 보관, 전시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될 때까지 당분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키로 잠정 결정했다.”면서 “이를 위해 월정사측에 이미 양해를 구한 상태이며, 서울대 규장각측과도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라고 28일 밝혔다.
  • 2006년 지구촌 사라진 별들

    올해도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하던 사회 각계 인사들이 동시대인들의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등졌다. 해외에서는 독재자·인권유린자들이 많이 생을 마감한 것이 눈에 띈다. #정계 최규하 전 대통령이 10월22일 급성 심부전증으로 향년 87세로 세상을 떴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 집권 당시 8개월 동안의 증언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눈을 감아 79∼80년 격동기의 진실은 영원히 미제로 남게 됐다.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민관식씨도 1월16일 88세로 타계했다. 그는 3,4,5대 민의원,6대와 10대 의원을 지냈고, 대한체육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맡아 국내 체육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재야운동의 대부이자 5·18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었던 인권변호사 홍남순씨는 10월14일 94세로 영면했다. 한·일 국교수교의 주인공으로 ‘최연소 외무부장관’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은 11월18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5공화국 시절 야당인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낸 유치송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은 6월2일 82세로 숨졌다.조연하 전 국회부의장도 8월 유명을 달리했고,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과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낸 강창성 전 의원도 2월14일 76세로 별세했다. 열린우리당 구논회 의원은 11월15일 46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다.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박주천 전 의원은 12월2일 지병인 특발성 폐경화증으로 65세에 별세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사회계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지난 5월22일 집무 도중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2003년 한국인 최초로 선출직 유엔 전문기구 수장에 오른 그는 에이즈와 결핵 등 질병 퇴치와 예방, 각국 보건의료행정 지원에 애쓰며 세계 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11월26일에는 ‘거지왕’ 김춘삼씨가 향년 77세로 세상을 등졌다.20대에 전국의 거지를 통솔하면서 일약 전설적 인물로 떠오른 그는 거지구제사업을 벌이는 등 사회사업에도 큰 공헌을 했다. 지난 11월14일 화재를 진압하다 숨진 서병길(57) 소방관은 우리에게 살신성인의 정신을 깨우쳐 주었다. 첫 귀환 국군포로인 조창호(76) 예비역 중위는 11월21일 타계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문화계 “예술은 반은 사기”라는 말을 남긴 천재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1월26일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늘 새로운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예술을 해석하는 데 온 삶을 바쳤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말년에도 창작 활동을 이어갈 만큼 열정적이었다. 한국 최초의 ‘햄릿’역을 맡은 연극배우 김동원은 5월13일 90세를 일기로 타계, 자신의 바람대로 ‘영원한 햄릿’으로 우리 가슴에 남았다. “노력과 열정, 창의력, 그리고 최은희가 내 영화의 전부다.”라던 신상옥 감독은 4월11일 80세로 별세했다. 함북 청진 출신인 신 감독은 납북과 북한 생활, 탈북 등 크고 작은 인생의 굴곡을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켰다.‘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최고봉’으로 불린 극작가 차범석도 6월6일 82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팔순 때도 신작을 발표했을 만큼 쉼 없는 창작열로 젊은 후배들의 귀감이 된 그는 6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한국 개신교계의 큰 어른이었던 여해 강원용 경동교회 명예목사는 8월17일 89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평생을 우리 사회의 갈등을 걷어내기 위해 좌·우를 몸으로 껴안는 구도자의 삶을 걸었다. 한국 바둑계의 산증인 조남철 9단은 7월2일 83세로 타계했다. 그는 1945년 한국기원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했고 조훈현, 조치훈을 일본에 유학 보내 바둑 강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1980년 데뷔 이래 ‘회장님, 우리 회장님’‘탱자 가라사대’ 등 시사풍자 개그로 한때를 풍미했던 개그맨 김형곤씨는 지난 3월 46세의 한창 나이에 팬들과 이별, 아쉬움을 남겼다. ‘머나먼 쏭바강’ ‘왕룽일가’의 작가 박영한, 원로가수 신카나리아와 ‘불나비 사랑’을 부른 가수 겸 영화배우 김상국도 사랑했던 팬들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다. 국내 최고의 조선왕조궁중음식 전문가 황혜성씨는 12월14일 86세로 별세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경제계 한국 중공업 발전의 초석을 다진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7월20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첫째 동생인 그가 숨짐으로써 ‘영’자 항렬은 정상영 KCC 명예회장만 남게 됐다. 해운업계는 두 명의 별을 잃었다.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11월24일 79세를 일기로 타계한 지 이틀 뒤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52세에 지병으로 별세했다. #체육계 통쾌한 ‘박치기’로 1960∼70년대 국민들에게 기쁨을 줬던 ‘전설의 프로레슬러’ 김일(77)씨가 심장마비로 10월26일 삶의 링에서 내려왔다. 라이벌이었던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78)씨는 앞서 8월8일 지병인 파킨슨 병에 따른 흡인성 폐렴으로 별세했다. 프로축구 성남에서 K-리그 3연패를 이룬 차경복(69) 전 성남 감독이 10월31일 타계했고,1950∼60년대 대표선수를 지낸 뒤 축구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문정식(76)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도 12월25일 생을 마감했다.김형칠(47)씨는 12월7일 도하아시안게임 승마 종합마술에 출전했다가 낙마사고로 숨져 국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해외 미국의 지원으로 아옌데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뒤 17년간 공포정치를 편 칠레의 철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지난 12월10일 고문 등으로 사망한 4000여 피해자 가족들의 원망을 외면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9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보스니아계 무슬림 20만명을 학살해 ‘발칸의 도살자’로 불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은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기소돼 재판을 받던 중 지난 3월11일 옥중 사망했다. 독재자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도 최근 사망했다. 김선일씨를 납치·참수한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도 지난 6월7일 미군 공습으로 사망했고, 체첸 반군 지도자 샤밀 바사예프는 러시아군 공격으로 숨졌다. 지난 7월21일 여든에 사망한 캄보디아의 타목은 ‘킬링필드의 도살자’로 불렸다. 논쟁의 중심에 선 경제학계의 두 거목도 유명을 달리했다.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은 현대 자유주의 경제학의 정신적 지주이자 통화주의의 수장.11월16일 94세로 세상을 떴다. 그 대척점에 선 경제학자 존 갈브레이스도 앞서 4월29일 97세로 타계했다. 정부의 사회문제 개입을 적극 주장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가능케 한 미국의 외교안보 분야 관리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스타워즈’로 유명한 전략방위계획을 추진했던 캐스퍼 와인버거 전 국무부 장관이 지난 3월 88세의 나이로, 네오콘의 대모격이랄 수 있는 진 커크패트릭도 12월 8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백악관 안보 담당 핵심으로 미국 최초의 여성 유엔대사로 활동한 커크패트릭은 공산권 붕괴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미망인으로 킹 목사의 뒤를 이어 인권 운동에 헌신한 코레타 스콧 킹과, 세계 여성운동계의 ‘신화’였던 베티 프리단은 모두 2월에 각각 78세와 8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악어 사냥꾼’(사실은 동물보호운동가)으로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던 스티브 어윈은 지난 9월 촬영 중 가오리 꼬리가시에 심장을 찔려 마흔넷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골프계의 ‘살아 있는 전설’ 바이런 넬슨,1950·1960년 보스턴 셀틱스를 이끌며 통산 9회의 우승 기록을 갖고 있는 명장 레드 아우어바흐도 각각 9월과 10월에 사망했다. 회계부정 스캔들로 미 월가를 뒤흔든 엔론의 전 회장 케네스 레이도 지난 7월 선고 재판을 3개월 앞두고 심장병으로 돌연사, 끝내 명예회복을 하지 못했다.52년간 중국의 ‘국민 의사’로 불리며 의덕을 베풀어온 화이웨이가 지난 8월 73세의 일기로 사망, 중국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만인의 어머니’로 불린 미국의 배우 제인 와이어트도 10월 96살의 나이로 삶의 무대를 떠났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서울광장] 5년 정권과 不事二君/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5년 정권과 不事二君/이목희 논설위원

    정권 말기 고위공직자를 만나면 이래저래 개운치 않다. 정권이 천년만년 갈 듯이 억지로 코드를 맞추는 이들과는 대화하기 어렵다. 엊그제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여론과 동떨어진 발언을 한 뒤에는 더하다. 당당하던 초창기 위세는 간 데 없고, 꼬리 내리는 이들도 좋게 비치지 않는다. 안타까움은 다른 쪽에 있다. 정권과 관계없이 요직을 맡는 게 국가에 도움이 될 인재가 꽤 된다. 참여정부에서 고위직이었다는 이유로 한 묶음에 싸여 떨려나기에 아까운 이들이다.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 통일 때까지 난세를 살아간 풍도(馮道)란 인물이 있다. 다섯 왕조, 여덟 성씨의 열한명 군주 아래에서 30년 동안 고관을 지냈다. 재상 자리를 무려 23년이나 지켰다. 훗날의 역사는 그를 상반되게 평가한다. 처세의 달인, 지조없는 기회주의자, 변절자 등 간신 비슷한 평가가 첫번째다. 원만한 인격, 청렴결백, 박학다식에서 나온 행정능력을 지녔고, 분수를 지키며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공자묘 복원, 경전 목판인쇄, 거란의 대학살 최소화를 포함해 실질 업적도 있다. 풍도의 장점을 갖춘 공직자를 현재에서 찾으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떠오른다. 전두환 정권에서 총리 의전비서관에 발탁되면서 사실상 정무직의 길에 들어선 그다. 정치바람에 언제 잘리거나, 한직으로 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하지만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과 참여정부에 이르도록 그를 홀대한 정권은 없었다. 청와대 의전수석·외교안보수석·외교보좌관에 이어 외교장관까지 항상 집권자와 지근거리에 있었다. 정권을 초월한 경력을 바탕으로 유엔 수장의 영광을 안았다. 외교장관 시절 반 총장은 사석에서 “언제나 담벼락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전두환·노태우 등 군출신, 김영삼·김대중 등 전문정치인, 그리고 여러모로 독특한 노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현직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아니다 싶은 부분을 바로잡으려니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고위공직자 모두가 반 총장을 따라 하기는 힘들다. 다만 몇가지를 충족하면 적어도 서너 정권에서 요직을 이어갈 여지가 생긴다. 첫째, 시종일관 겸손하고 어느 편에도 과잉 줄서기를 말아야 한다.“대통령께 충성”을 외치며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안무치한 행태를 보인 공직자가 오래 갔던 경우는 없다. 차기대권 유력자 진영을 기웃거렸던 공직자 역시 한번은 잘 나갈 수 있어도 반 총장 같이는 못 된다. 둘째는 업무능력이다. 지금 한나라당 대권주자들이 여론조사에서 앞서가고 있다.10년 야당 생활을 벌충하려고 한나라당을 통해 한자리를 노리는 인사들이 부지기수다. 여야 누가 정권을 잡든 공직사회를 함부로 뒤엎으면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명박·박근혜 캠프에서도 무능력자, 기회주의자가 정치바람을 타려는 양상을 벌써 경계하고 있다고 들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은 이제 떨쳐야 할 용어다. 변절과 편가르기, 줄서기로 새 정권마다 붙으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업무영역에서 막바지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 어느 정권에서나 빛을 발하는 공직자가 되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스스로를 향해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과격한 발언이었지만 실제로 5년 단임 대통령이 국가의 영속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풍도의 좌우명으로 글을 맺는다.“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10) 위협받는 ‘가톨릭국가’

    [함혜리 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10) 위협받는 ‘가톨릭국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파리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샹젤리제 양쪽에 늘어선 가로수에는 수십만개의 조명등이 반짝이고 거리마다 설치된 형형색색의 조명등과 상점의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즈음 갤러리 라파예트와 프렝탕 등 고급 백화점이 위치한 오스만 대로와 상점가는 가족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기독교 축일인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오랜 전통이다. 직장을 위해, 학업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던 자녀들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부모님 댁을 찾는다. 온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거위간, 생굴, 칠면조 고기, 장작모양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으로 이어지는 성탄절 특식을 즐긴다. 밤을 새워가며 먹는다고 해서 레베이용(밤참)이라고 하는데 몇시간에 걸친 식사가 끝나면 각자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며 덕담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을의 성당에 가서 자정 미사를 드린다. 프랑스인들은 이렇게 가톨릭의 전통에 따라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세례나 결혼, 장례 등 많은 예식이나 관습들은 종교적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뿐이다. 인구의 82%가 로마가톨릭인 나라지만 정기적으로 교회나 성당에 나가는 사람은 여성의 14%, 남성의 9%에 불과하다. ●가톨릭 국가 맞아? 프랑스에서 종교는 곧 가톨릭을 의미할 정도로 가톨릭이 지배적이다. 인종적으로 프랑스인이지만 가톨릭 신도가 아닌 경우는 신교도들이다. 프랑스의 신교도는 16세기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거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따라서 프랑스에 남은 신교도는 95만명으로 2%선에 머문다. 이밖에 500만∼600만명(8∼9.6%)이 이슬람교도로서 대부분 북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다. 유대교가 75만명 정도, 불교가 40만명 정도다.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가톨릭 교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식 이름을 갖고,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당신의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당신의 인종이 무엇이냐?”고 용감하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종교와 관련해서 프랑스인에게 의미있는 질문을 하려면 “신자냐, 비신자냐?”를 묻기보다는 “실천교인이냐, 아니냐?”를 물어봐야 한다. 그러면 10명중 9명은 “나는 신자(croyant)이긴 하지만 실천교인(pratiquant)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믿기는 하지만 성당에 꼬박꼬박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슬람이나 유대교가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기도 하다. ●쇠퇴하는 로마가톨릭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가 된 기원은 메로빙거 왕조의 클로비스가 496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성직자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지지를 받아 프랑크 왕국을 탄생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로마 가톨릭에 기초한 유럽 탄생의 단초가 됐다. 프랑스에서 가톨릭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교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이뤄왔다. 특히 교육과 행정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프랑스에는 가톨릭 국가답게 정말 성당이 많다. 프랑스에는 3만 8000개의 교구가 있고 전국에 4만 5000개의 성당이 있다. 이들 교구 중 인구 500명 이하의 작은 교구도 1만 6000개나 된다. 파리 등 대도시의 광장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고딕식 주교좌 성당이 서 있다. 시골 어디를 가나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나 중심에는 가톨릭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 가톨릭 교회는 오래 전부터 마을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했다. 시청이나 면사무소와 같은 국가기관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에서 호적을 관리했다. 학생들의 지도도 가톨릭이 담당했다. 현재 프랑스의 행정단위 중 가장 기초단위인 코뮌(commune)이 모두 3만 6551개인데 이 행정구역도 가톨릭 교구를 중심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정교(政敎)분리와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성당을 정기적으로 찾는 사람이 매우 드물어 졌고 세력도 약해졌다. 웅장하고 유서깊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도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주일 미사에 가보면 빈자리가 수두룩하다. 성당을 찾은 교인들도 노부부나 할머니가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의 경우 종교와 거리를 두는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종교에 관심이 없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 상당히 많다. 국립통계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15∼24세인 젊은이들 중 종교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여자 43%, 남자 47%로 높게 나타났다.1996년 조사(여자 30.3%, 남자 44.7%)에 비해 종교에 대한 회의론자들이 남녀 공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갈등의 요인이 되는 이슬람 16세기 종교전쟁 당시 프랑스에서는 구교와 신교가 극렬하게 다퉜지만 현재 프랑스에서 사회 갈등을 유발하는 종교문제는 대부분 이슬람과 관련된 것이다.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무슬림(이슬람 교도) 인구 비율이 높은 편이다. 프랑스의 무슬림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예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출신이 70% 이상이다. 출신국별로는 알제리 35%, 모로코 25%, 튀니지 10% 등이며 이들은 주로 파리 릴 리용 마르세유 등 대도시의 외곽에 집단을 이뤄 살고 있다. 이민 2,3세들은 부모 세대의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을 갖고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도 프랑스에 완전 동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수많은 논란거리를 낳고 사회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슬람 머릿수건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을 학교에서 착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논란 끝에 채택된 것이나, 차별과 소외에 대한 불만으로 터진 2005년 가을의 교외지역 소요사태를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다. 무늬만 남은 가톨릭 국가에서 이슬람이 빚어내는 갈등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골신(骨新)/육철수 논설위원

    대의명분을 찾아내는 데는 정치인만한 귀재도 없을 듯하다. 늘 뭔가 새롭고 그럴듯한 걸 발굴해서 국민을 현혹하고 입맛에 맞춰야 지지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19세기 후반 일본의 위정자들은 막부통치를 종식하고 왕정복고에 대거 참여했다. 느닷없이 왕정을 다시 내세우자니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의 역서 시경(詩經)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구절이 ‘기명유신’(其命維新)이었다.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이어받을 때 써먹은 논리인데, 하늘의 명을 받아 옛 왕조를 새롭게 이어간다는 의미였다. 여기서 따온 게 ‘유신’(維新)이고, 명치유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유신이란 말은 ‘낡은 제도와 체제를 새롭게 고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여기엔 정치인들의 권모술수도 담겨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신논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벤치마킹해서 1972년 ‘10월 유신’의 모태가 된다. 당시 정권은 “한국인의 체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면서 ‘한국적 민주주의’(Koreanized Democracy)라는 제법 그럴싸한 조어를 만들어 냈다. 미국·유럽식 민주주의는 한국 실정에 맞지 않으니 한국식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가 새로운 것을 이어가기는커녕, 장기 독재의 수단으로 악용됐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에 된통 속아봐서인지, 요즘도 정치인들이 ‘신’(新)자를 갖다붙인 단어나 조어를 들먹이면 의심부터 생긴다. 참여정부를 관통하는 ‘혁신’도 그렇다. 행정혁신이다 혁신도시다 뭐다 해서 온통 혁신이 널려 어지러운데, 도무지 뭐가 혁신됐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런데 그 혁신도 모자랐던지, 그제 취임한 박명재 행정자치부 장관은 한 술 더 떴다. 그는 직원들에게 “혁신을 넘어 골신(骨新)·혈신(血新)을 하라.”며 고강도 변화를 주문했다고 한다. 가죽(革)만 아니라 뼈와 피도 새 걸로 바꾸라는 얘기다. 참 좋은 말이긴 하나, 혁신도 어려워 쩔쩔매는 판에 갈수록 태산이다. 새롭게 변한 다는 게,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어디 되는가. 지도자가 오랜 기간 소리소문 없이 변화에 솔선수범해야 아래쪽에서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법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궁중음식 무형문화재 황혜성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인 조선왕조 궁중음식 명예보유자인 황혜성 선생이 14일 낮 12시30분쯤 노환으로 별세했다.86세. 1920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부터 30년간 조선왕조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 선생으로부터 궁중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은 뒤 궁중음식 연구와 전승에 힘써 왔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 올해 8월 조선왕조궁중음식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숙명여대, 서울대, 명지대, 한양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도 애썼다. 장녀 한복려(59·궁중음식연구원장)씨와 차녀 복선(57·한복선식문화연구원장)씨도 요리연구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장남 용규(48·지화자 대표)씨와 3녀 복진(54·전주대 문화관광대학장)씨도 관련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이조 궁정요리 통고’ ‘궁중음식’ ‘생활요리’ ‘한국의 미각’ 등을 남겼다. 국민훈장 목련장,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선영이다. 발인 16일 오전 6시. (02)3410-6915.
  • [공연+새앨범]

    성탄과 연말연시를 앞두고 가수들의 공연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영원한 누님’ 하춘화는 오는 24,25일 서울 르네상스 호텔 3층 다이아몬드홀에서 ‘하춘화 노래 45 성탄 디너쇼’ 공연을 벌인다.45년동안 부른 히트곡들을 총망라할 예정이다.(02) 2222-8300.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는 인순이와 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 포크 빅3의 공연이 열린다.‘인순이 송년 디너쇼’는 22∼24일,‘포크 빅3 공연’은 20,21일 각각 열린다.(02)789-5353∼4. 발라드 황태자 테이는 ‘테이의 설레임(雪來林) 콘서트’를 직접 총연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오는 25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 감미로운 목소리의 남성 듀오 바이브는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2006 바이브 전국투어 앵콜 콘서트 - Forever Christmas’를 벌인다. 오는 25일 7시.(02)542-5903. 바비 킴의 ‘Made in soul’과 화요비의 ‘키스를 닮은 크리스마스’는 각각 23,24일 서울 장충체육관, 강산에와 안치환의 ‘과천에 가면’은 각각 24,25일 과천시민극장에서 열린다.(02)747-1252. ■ 일 디보 ‘SIEMPRE’ ‘언제나, 영원히’란 뜻의 로맨틱 파페라 그룹 일 디보의 새앨범.‘나이트 인 화이트 새틴’ 등 친숙한 파페라 11곡이 수록됐다. 내년 1월 26,27일엔 내한공연도 예정되어 있다.SonyBMG. 미술 ■ 김보민 개인전 24일까지 인사동 두아트 갤러리. 실력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있는 두아트에서 모시 위에 라인테이프를 붙이는 새로운 양식으로 차세대 동양화 작가로 떠오른 신인을 소개한다.(02)738-2522. ■ 이성근전 18일까지 인사동 상갤러리. 수묵을 원용한 천진하고 자유로운 일탈의 조형 세계를 맛볼 수 있다.(02)730-0030. 클래식 ■ 프라하 소년소녀 합창단 내한공연 7일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10일 3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뮤지컬 ‘어린왕자’의 주연 조세프 맥매너스 특별출연.3만 3000∼6만 6000원.(02)548-4480. ■ 소프라노 신영옥 2006년 송년 콘서트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테너 레오나르도 카팔보. 박상현 지휘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5만∼15만원.(02)522-9933. ■ 서울시합창단과 뉴욕 할렘싱어스가 험께하는 성탄송년음악회 11일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크리스마스 캐롤 모음과 흑인영가 모음.2만∼7만원.(031)932-8370. ■ 리빙 클래식 ‘러브 어게인’ 9일 5시 호암아트홀. 바이올린 양고운, 비올라 김상진, 첼로 유대연, 피아노 박종훈, 이야기 손님 김태우.2만∼3만원.(02)751-9607. 연극 ■ 아버지 31일까지 월∼금 7시30분, 수·토 3시·7시30분, 일 3시 서강대 메리홀. 러시아 예술인들과 함께 하는 세계명작 국내초연 시리즈 두번째작품. 연극의 나라 러시아의 지차트콥스키 연출, 윤주상 이혜진 등 출연.2만5000∼3만5000원.(02)744-0330. ■ 장두이의 황금연못 17일까지 수·목·금 8시, 토·일 4시·7시, 대학로 극장. 같은 기간 강남 유씨어터에서도 상영되는 영화 원작의 동명 연극을 장두이가 가족 코미디로 맛깔스럽게 연출, 박웅 장미자 등 출연.1만∼2만원.(02)2052-8705. 무용 ■ 화동, 조선 궁중무와 류큐춤의 어우러짐 12일 오후 7시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 조선 궁중무의 진수인 몽금척과 무산향, 한국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류큐왕조(현 오키나와)의 춤. 한국궁중복식연구원이 복원한 궁중복식도 전시. 정재연구회 10주년 기념공연.(02)6406-3306. 뮤지컬 ■ 마리아 마리아 8∼30일 화·목 8시, 수·금 3시·8시, 토·일 3시,7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한국 창작뮤지컬로 뉴욕 뮤지컬 시어터 페스티벌의 초청 공연 이후 업그레이드된 첫 귀국공연. 윤복희 허준호 강효성 소냐 등 출연.6만 5000∼10만원.(02)584-2421. ■ 명성황후 24일까지 화·목·금 7시30분, 수·토 3시,7시30분, 일 2시,6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1995년 첫공연 이후 수차례 개정을 통해 더욱 향상된 한국 창작뮤지컬의 힘. 이태원 이상은 조승룡 윤영석 등 출연.4만∼12만원.(02)575-6606.
  • [Book Review] “예언서, 평민엔 대안 이데올로기”

    14년째 정감록 등 예언서에 천착한 역사학자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예언서를 정리한 두 권의 서적을 한꺼번에 냈다. 한 권은 정통 역사서적이고, 다른 한 권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기법을 활용했다. 역사학자 백승종 전 서강대 교수의 신작 ‘한국의 예언문화사’와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푸른역사 펴냄)이 그것이다. ‘정감록’에서는 저자의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실감할 수 있다. 저자는 조선시대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영조·정조시대에 역모사건이 빈발했던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 9년(1733년)의 ‘김원팔 일가 남사고비결 역모사건’ ▲정조 6년(1782)의 ‘문인방 정감록 역모사건’ ▲정조 9년(1785)의 ‘문양해 정감록 사건’ 등 대표적인 3건의 역모사건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 사건에는 모두 예언서가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는 역모사건을 ‘거인’(성리학)과 ‘난쟁이’(예언서)의 대결로 봤고, 당시 난쟁이의 힘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고 해석했다. 왕조의 시각에서 서술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역적은 능지처참해 마땅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역적의 시각은 다르다. 영조와 정조는 패륜왕이고, 조선은 뒤엎어야 할 왕조일 뿐이다. 책에서 저자는 1인칭 시점으로 돌아가 역적이 되기도 하고, 다시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빠져나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충실히 묘사하기도 한다. 형사들의 추리기법을 빌렸지만 누가 범인인지, 왜 역모를 저질렀는지에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사건의 이면을 속속들이 검토해 역모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마음을 담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서술방식은 ‘역사가의 상상게임’이라고 부를 만하다. 저자는 “역사는 술이부작(述以不作·사실을 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닌 술이작(述以作·기록하되 제 생각대로 쓰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런 뜻에 충실한 역사를 써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는 역적의 입장에 서보기도 하고, 때로 왕도 흉내냈다.”(본문 14쪽)고 말했다. 다른 신간 ‘한국의 예언문화사’는 체계적·실증적이다. 사료를 꼼꼼하게 분석해 정감록의 뿌리를 찾는 한편 18세기 후반 정감록의 출현과 보급, 당시 정치적 예언서들의 내용 등을 차분하게 정리해갔다. 저자에 따르면 정감록을 비롯한 예언서들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일종의 대안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런 예언문화를 주도한 이들은 조선 후기에 성장한 평민 지식인들이었다. ‘한번 상놈은 영원한 상놈’인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예언서들은 마땅히 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저자는 예언문화가 결국 동학농민운동 등 신종교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분석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예언문화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모두 7편의 글이 실려 있는 ‘한국의 예언문화사’에는 한국 최초의 예언서인 ‘고구려비기’를 당나라측이 위조했다든가,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예언을 관리·통제했다는 등의 색다른 주장도 펼쳐져 있다. 예언서들이 민중의 입맛에 따라 가공·윤색됐다는 연구결과도 흥미롭다. 예언서의 밑바탕에 ‘미륵신앙’이 숨겨 있고, 예언서를 축으로 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정감록’의 모티브가 된 3건의 역모사건을 이 책에서는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있다.‘정감록…´은 1만 4500원, ‘한국의…´는 1만 65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獨수도원 겸재 화첩 돌아왔다

    獨수도원 겸재 화첩 돌아왔다

    국내 한 신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독일 수도원이 소장해온 조선시대 대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 21점이 80여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긴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베네딕도회 소속 경북 칠곡 왜관 수도원의 선지훈(46·분도출판사 대표) 신부는 22일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이 담긴 화첩을 지난해 10월22일 오틸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 영구임대 방식으로 인계받았다.”면서 “화첩은 현재 왜관 수도원과 가까운 모처에 보관 중이며, 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는 오는 2009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선의 화첩은 1925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당시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수집해간 것으로, 금강산 구룡폭포를 그린 ‘구룡폭(九龍瀑)’, 조선시대 이성계가 거주했던 함경도 함흥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 등이 포함돼 있다. 선 신부는 “1990년대 초 독일 유학 당시 오틸리엔 수도원에 묵으면서 화첩을 접했으며, 이후 적극적으로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면서 “수도원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교회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독일 수도원측이 반환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환수 직후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의 감정을 받아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국보·보물급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도록 권유 받았다.”며 “앞으로 지자체와 협의해 수도원 경내 박물관을 세워 그림을 전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 화첩은 미술사학자 유준영(71)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1970년대 독일 수도원에서 발굴, 학계에 소개한 뒤 도판으로만 알려졌을 뿐 실물이 돌아온 것은 80년 만이다. ‘북관대첩비’‘조선왕조실록’ 등에 이어 민간의 노력으로 이뤄진 우리나라 문화재 환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이순신 최대 적은 ‘선조의 의심’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에 대한 얘기의 초점은 한 곳이다. 왜 선조는 그토록 이순신을 의심했는가. 다큐전문 히스토리채널이 이 같은 의문을 다룬 2부작 다큐멘터리 ‘김훈의 로드다큐 선조의 땅, 이순신의 바다’를 마련했다.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의 인간적 갈등을 조명한 소설가 김훈과 함께 이순신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을 둘러보는 로드다큐다.23∼24일 이틀에 걸쳐 오전 8시, 오후 4시 두차례에 걸쳐 방영된다.이순신과 선조의 불화 원인으로는 흔히 신경질적이고 의심많았던 선조의 개인적 성품이 꼽힌다. 그러나 다큐는 16세기 조선사회 내부의 문제로 시선을 돌린다. 승승장구하는 명장이었기에 조선왕조의 치명적인 위험으로 떠올랐던 이순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조선의 정치지형을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큐는 임진왜란 7년동안 이순신이 남긴 많은 기록을 꼼꼼히 검토했다. 이순신은 너무도 유명한 ‘난중일기’를 비롯해 선조와 주고받았던 장계와 교지 등 13만자에 이르는 기록을 남겨뒀다. 이를 토대로 1부 ‘오늘 옥문을 나왔다’는 1597년 한산도에서 압송됐다 서울에서 풀려난 순간의 이순신을 다뤘다. 도대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선조와 이순신의 갈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추적한다.2부 ‘신의 몸이 살아있는 한’은 다시 복귀한 이순신의 심적 갈등을 다룬다.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배로 승전을 이어나가지만 선조는 이 승전 소식을 믿지 못하고 혹시 숨겨둔 병사가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무조건 의심한다는데 버틸 재간은 없다. 이순신의 가장 큰 적은 왜군이 아니라 선조의 의심이었다. 김훈은 선조와 16세기 조선시대를 잇는 충실한 안내자다.‘선조’라는 인물은 단순히 의심많은 왕이 아니라 이순신이 살아가야만 했던 그 시대의 상징이다. 이 둘의 갈등과 대립은 그렇기에 16세기 조선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했고 또 극복해야 했는가 하는 문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는 소설가 김훈이 세상과 만나는 방법이자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통한다.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충신 몇분의 위패 모셔져 있을까

    동작구는 ‘충절의 고장’이다. 충절의 고장으로 꼽히는 데에는 사육신공원이 큰 기여를 했다. 사육신공원은 한강대교와 노량진역 사이 노량진1동에 위치해 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사육신묘 일대 4만 9000여㎢를 성역으로 가꿔 놓은 공원이다. 갖가지 꽃과 녹음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동작구의 명소다. 하지만 사육신공원의 의미를 잘 알고 찾는지 궁금하다. 사육신 공원에는 과연 충신 몇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을까. 학생들이나 주민에게 물어보면 쉽게 여섯 분이라고 답하며 충신들의 이름을 댄다. 결론은 여섯 분이 아니라 모두 일곱 분이다. 우리가 사육신으로 알고 있는 분은 조선 세조2년(1456년)에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다 순절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선생 등 여섯 분이다. 일곱 번째는 김문기 선생인데, 당시 거사를 모의할 때 군중동원의 중임을 맡았다가 처형됐다. 사육신묘 조성 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 성삼문·박팽년·이개·유응부 선생만 모셨지만,1977년 서울시가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하위지·유성원·김문기 선생의 묘가 추가됐다. 이 때 서울시는 문교부에 ‘김문기 선생의 사육신묘역봉안여부’를 고증, 확인을 요청했고, 문교부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조사와 고증을 거쳐 사육신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상의 사육신과 남효온 선생이 쓴 육신전의 사육신 모두를 모시게 돼 일곱 충신의 묘가 봉안된 것이다. 사육신공원에서는 매년 10월9일 (사)사육신헌창회 주관으로 추모향제를 연다. 동시에 동작문화원 주관으로 사육신 추모문화제를 개최, 구민들에게 충효 고장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얼이 서린 사육신공원이 이제 구민 곁으로 좀 더 다가가게 된다. 공원의 3분의 1에 달했던 노량진배수지를 철거하고 내년 말까지 구민생활공간으로 조성한다. 사계절 초화원, 잔디스탠드 등의 편의시설과 녹지공간을 마련, 구민들의 쉼터 역할도 하게 된다. 동작구 문화공보과 김상배 과장
  • 中잠수함, 美항모 미행 발각

    중국 잠수함이 태평양에서 미국 항공모함 키티호크호를 미행하다가 발각돼 양측이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다고 워싱턴타임스가 13일 보도했다. 신문은 미 국방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중국의 ‘쑹(宋)’급 디젤 동력 재래식 잠수함이 키티호크호를 뒤쫓다가 지난달 26일 수면으로 올라오던 중 미국 정찰기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했다. 당시 양측은 서로 미사일과 어뢰 발사가 가능한 5마일(약 8㎞) 안에 있었다. 쑹급 잠수함은 러시아제 어뢰와 선박 공격용 순항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었다. 중국의 잠수함은 고대 왕조의 이름을 따 샤(夏)급, 한(漢)급, 쑹급, 밍(明)급 등으로 분류한다. 키티호크호는 항모 외에 수척의 구축함과 공격용 잠수함, 대(對)잠수함 공격용 헬리콥터,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전단을 이루고 정례적인 추계 훈련을 갖고 있었다. 미 관리들은 중국 잠수함이 자국 영해를 벗어나 태평양에서 미 항모 전단을 미행한 사례는 거의 드문 일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미 태평양 사령부와 미 국방부는 논평을 거부했다. 워싱턴타임스는 이 사건으로 미·중 군사당국 간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장애가 조성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 국방당국은 윌리엄 팰런 미 태평양지구 사령관을 최근 수차례 중국에 보내 양국 군사당국 간 관계 개선을 위한 교환 프로그램을 추진해 왔다. 국방부 내 강경파는 중국이 최근 활동 범위를 대양으로 확대해 가고 있으며, 특히 석유 수송로인 중동∼아시아 항로에 개입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며 이번 사건도 이와 연관돼 있다고 분석했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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