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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 육룡이 날으샤’ ‘정조대왕 이산’/로크미디어 펴냄

    팩션(faction)은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소설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새로운 문학예술 갈래다.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지는 만큼 자칫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출간된 추리작가 이상우(70)씨의 ‘해동 육룡이 날으샤’와 ‘정조대왕 이산’(로크미디어 펴냄)은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한 팩션 작품. 추리작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다양한 복선을 깔아 마치 퍼즐을 짜맞추는 것처럼 짜릿한 전율감을 안겨준다. 세밀한 심리 묘사와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뒤통수를 강타하는 복선이 곳곳에 숨어 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 생동감과 긴박감이 넘친다. ‘해동육룡이 날으샤’는 조선 개국 후 일어난 골육상쟁의 참극인 이방원과 방석간의 ‘왕자의 난’이 배경이다. 비취 불상이라는 천축국 보물에 얽힌 미스터리와 태평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지관의 뜨거운 사랑과 모험이 박진감 있게 펼쳐진다. 여기에다 지관 김용세와 여진족 출신 상궁 신홍아 사이에 얽힌 러브 로망이 당대 주요 사건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팩션이다. ‘정조대왕 이산’은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수원에 화성을 쌓고 ‘정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신념을 천명한 정조가 개혁을 펼치는 시대에 정조를 위해 목숨을 건 친위대 하급군관 장용영의 이야기가 씨줄날줄로 촘촘하게 짜여졌다. 주인공 장용영의 정조에 대한 충성과 천주교도 여성과의 사랑은 보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특히 정조 암살이 진행되던 당대의 시대상과 막 들어온 천주교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각권 95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태국전하와 사랑맺은 한국여인

    태국전하와 사랑맺은 한국여인

    유사(有史)이래 우리나라 여성이 타국의 왕실과 인연을 맺기는 고려(高麗)말엽 원순제(元順帝)의 제2왕후가 된 기(奇)씨가 최초. 이로부터 6백여년이 흐르는 오늘, 태국의 왕족과 결혼, 15년만에 모국을 찾은 박명복(朴明福) 여사(44)가 두번째의 여성이 될 듯-.「몸·박(朴)」이라는 왕족의 존칭을 받고 있는 이 화제의 주인공은? 사귈땐 왕족(王族)인줄도 몰라…남편은 국왕(國王) 할아버지뻘 태국은 1782년의「차쿠리」왕조 이래 입헌군주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57년 결혼한 박여사의 부군「차오·조티시·데바쿤」씨(64·차오는 왕족 남자에 대한 존칭)는 9대째인 현「부미볼」태국왕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근친. 『저의 시아버님께서는 4대국왕의 왕자였어요』 왕족 촌수를 풀이하는 박여사의 얘기다. 박여사와「조티시·데바쿤」씨가 부부의 인연을 맺기는 57년 서울에서. 『그때「언커크」태국 대표로 저의 주인이 한국에 나와 있었어요』 이화여대로는 제1회 영문과출신. 49년에 한국은행에 입행했다가 EAC로 옮겨 미국 유학을 마치고 54년에 귀국한 박여사에게 당시 WHO에 있던 태국인의 소개로 약1년간 교제끝에 태국왕족의 아내가 된 것. 처음 교제할 때는「전하」라는 칭호를 받고있는 왕족인 줄을 몰랐었다는 얘기. 『결혼은 서울서 간단하고 조촐하게 했어요. 저의 주인이 마침 미국 대사로 가시게 되어 몇 년간 미국서 살았지요』 “우리애들 모두 친한파(親韓派)죠…어머니 나라를 절대지지” 그후「유엔」대사를 역임, 태국 외무부국장 자리에서 4년전 정년퇴직, 현재는 조용히 가정에서「골프」를 즐기고 있다고. 현재 태국에 있는 한국인중 외국인과 결혼한「케이스」는 29가구. 부인이 태국인인 경우는 12, 남편이 태국인인 경우가 7, 남편이 미국인인 경우가 10가구인데 이중 남편이 태국인인 경우는 유일하게 박여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태국군인이 한국에 주둔했을 때 맺어진 것이라고. 15년만인 지난 4월 22일 3주간 예정으로 잠시 귀국한 박여사는 과거 주 태국무관이던 손장래(孫章來)준장 부인 정영자(鄭英慈)여사의 안내로 부산까지 관광하기도 했는데『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정말 모국이 놀랍도록 변했어요』라고 탄성을 연발한다. 『이번에 우리 어린애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게 여간 섭섭하지가 않아요. 어머니 나라가 보고싶다고 여간 아닌데 말이지요…』 자녀는 1남1녀를 두고 있다는데 올해 14살인 딸은 왕족 학교에, 12살의 아들은「인터내셔널·스쿨」에 보내고 있다고. 『우리 아이들…어머니 나라 보지는 못했지만 한국이라면 열성이 보통 아닙니다. 아빠와 엄마가 정구를 해도 엄마가 이기라고 응원할 정도로-. 『저번 축구시합때 한국이 승리하니까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아버지가 우스갯 소리로 한국으로 추방하겠다고 말해 웃음바다가 된 일이 있어요』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의 얘기를 묻자, 무지무지하게 더운 나라라는 것과「바나나」를 비롯, 풍족한 과일이 제일 먼저 눈에 띄더라고. 『내가 왕족과 결혼했다니까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들 있는데 사실은 그저 먹고 살 정도의 재산뿐입니다』 “부부함께 태국과 한국의 교량이 되고파” 아직도 변함없이 또렷한 모국어로 말을 잇는다. 현재 왕족으로서 받는 대우는 연4백「바트」의 국왕이 내리는 명목상의 은사금(恩賜金) 정도라고. 『계보상으로 저의 시댁 집안을 말하면 시아버지께서는 31명의「라마」4세 자녀중 내이시고 주인은 다음대의 11형제중 막내입니다』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는 승려를 거쳐야만 지도자나 요직에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박여사 가정은 철저한 불교신도들이라고. 시누이는 76세의 노처녀로 왕족학교의 교장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궁중 의식중 진기한 풍습은 높은 분 앞에 갈때는 저만큼서부터 무릎을 꿇고 기어가는 것. 『태국 국민들의 왕족에 대한 신뢰도는 보통이 아닙니다. 우상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정신적인 지주로 말입니다』 지금 태국에는 약 4백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는데, 모두 부유하게 잘들 지내고 있다고 교포들의 근황을 박여사는 말하고 있다. 『태국나라 국적을 얻는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태국 정부가 배정한 한국으로부터의 이민「쿼터」가 매년 5백명이었는데 금년엔 50명으로 줄었어요. 자기만 좀 부지런하면 살아가는데 아무 불편 없읍니다』 더위만 잘 참을 수 있다면 우리 한국인이 많이 태국에 건너와 살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주인과 저는 미력하나마 한국과 태국간에 하나의 교량적인 역할을 다할 생각입니다』 지금 태국에는 무역진흥공사가 나가 있는데 가장 인기있는 품목은 인삼과 모직물이란다. “한국여성의 긍지 지키려 각별히 언행에 조심해요” 태국에 있는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게 김치였다고 말하는 박여사, 귀국하자마자 정여사에게 김치부터 찾았다고 웃는다. 『우리 한국 여성들, 이번에 와 보니까 더 세련되고 많이 예뻐졌더군요. 아주 유행에 민감한 것 같아요』 며칠전 미장원에 들러 태국은 지금「맥시·스타일」이 유행이라고 했더니 한국에선 벌써「맥시·스타일」이 한물 갔다고 해서 새삼 놀랐단다. -왕족이 외국인과 결혼하는걸 꺼리는 경향은 없나요? 『별로 그런거 없읍니다. 전 지금까지 태국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백안시한다거나 그런 경우를 당해 본 일이 없어요』 -왕족이기 때문에 특별히 받는 제약 같은 건 없는지요? 『옛날엔 격식도 갖추어야 했겠고 제약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거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사에 주의하고 있읍니다』 한국여성의 긍지를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한마디. 지금 박여사의 가장 큰 소망 하나가 있다면 태국에 멋진 회관 하나를 지어 양국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일이다. 이번에 다시 태국으로 가면 한 10여년 후에야 다시 모국을 방문하게될 것 같아 안타깝단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모습을 열심히 뛰어 다니며 보고 있읍니다. 다음에 올 땐 한국이 더 멋지게 발전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읍니다. 그리고 그때의 모습을 보는 재미로 기다리고 참겠어요』라고 동족애에 넘친 인사를 잊지 않는다. <承> [선데이서울 71년 5월 16일호 제4권 19호 통권 제 136호]
  • [20일 TV 하이라이트]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청화백자 모란문 푼주. 푼주란 큰 대접처럼 생긴 도자기나 옹기로 된 그릇을 말하는데, 주로 식혜나 화채를 담거나 나물을 무치는 데 사용했다. 의뢰된 푼주는 맑은 청화문이 돋보이고 내부 밑바닥에 장수를 의미하는 ‘壽(수)’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궁중이나 왕실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뇌왕 아인슈타인(KBS2 오전 10시40분) 김나운, 이광기, 김영철, 김태현, 조원석, 장동혁, 강균성, 서단비, 이현지가 아인슈타인에 도전한다. 김영철은 MBC 라디오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을 통해 영철 영어 코너를 인기리에 진행해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력 있는 영어 강사로 거듭나기도 했다. 개그맨 김영철이 영어를 잘하는 비법을 공개한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세조 6년, 한 소설 속에 등장한 절세 영웅.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 영웅이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된 영웅의 기록을 놓고 학계에서는 그의 활동 범위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과연 그는 누구이며, 정말 실존했던 인물일까? ●굿모닝 세상은 지금(SBS 오전 7시40분) 취미를 넘어 프로 뺨치는 실력자들, 사람들은 그들을 ‘프로추어(프로페셔널+아마추어)’라고 부른다.‘프로추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 1인 미디어. 취미삼아 그린 만화, 요리 비법 등을 블로그에 올려 스타가 된 프로추어들을 만나본다. 연예계 지망생이 몰리는 ‘프로추어 오디션’ 현장도 가본다. ●스페이스 공감(EBS 오후 10시) 2인조 포크 록 밴드 ‘플라스틱 피플’. 이 밴드는 음악 전문 잡지 ‘서브(Sub)’의 기자 출신이자 밴드 ‘메리 고 라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김민규와 보컬리스트이자 드러머인 윤주미가 만나 2000년에 결성한 팀이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오후에 코코아처럼 달콤한 이들의 음악을 만났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5시30분) 스리랑카에서는 도시의 미용실에서부터 시골의 농장에 이르기까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탄자니아에서는 농산물 쓰레기를 연료로 벽돌을 구워냄으로써 숲을 보존하고 있고, 방글라데시에서는 태양열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업인들에게 무담보 소액 대출을 지원해 1년에 1000만 리터의 등유를 절약하고 있다. ●SBS 스페셜(SBS 오후 11시5분) 평균 수명 100세를 꿈꾸는 21세기에 인간의 장애물은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질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뇌질환 연구를 선도해온 세계적 권위자들의 처방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첨단 뇌영상 보고-당신의 뇌, 안전하십니까?’에서 제시한다. ●비포&애프터 성형외과(MBC 오후 11시40분) 기남은 어머니가 쓰러져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병원에선 계속된 적자 때문에 회의가 열리고 서진이 제안한 옥외광고를 추진하기로 한다. 기남은 건수에게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다. 한편 거만한 복부인과 딸이 병원을 찾아와서는 유지인, 송혜교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한다.
  • [책꽂이]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정운경 지음, 정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18세기 우연히 제주에 머물렀던 지식인 정운경이 낯선 땅 제주의 문화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기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표류민들의 기록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1만 3000원.●사랑에 빠진 세계사(치우커핑 지음, 유수경 옮김, 두리미디어 펴냄)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과 예술가들의 사랑,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세계 각국의 사랑과 성 풍속을 에피소드별로 모았다.1만 2000원.●조선이 버린 여인들(손경희 지음, 글항아리 펴냄)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세종에서 성종까지의 기록에 등장한 하층민 여성 33인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왕비, 후궁, 기생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조선사회 하층민 여성 이야기란 점이 새롭다.1만 3000원.●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일리야 레핀 외 지음, 이현숙 옮김, 써네스트 펴냄)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걸작 100여편에 대한 해설. 작가의 생애, 창작활동, 예술관을 담았다.2만원.●차티스트 운동, 좌절한 혁명에서 실현된 역사로(김택현 지음, 책세상 펴냄)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차티스트 운동의 역사적 진행과정과 배경을 조명했다. 대표적 차티스트 지도자인 퍼거스 오코너, 윌리엄 러벳의 활동도 되짚었다.1만 2000원.●보헤미안의 파리(에릭 메이슬 지음, 노지양 옮김, 북노마드 펴냄) 예술의 도시 파리를 단순한 관광지로서가 아닌, 창조적 작업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라고 제안하는 여행기. 파리의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 창조적일지 친절히 귀띔한다.1만 2000원.●그래도 희망입니다(문규현 글, 홍성담 그림, 현암사 펴냄) 문규현 신부가 이해와 용서, 사랑을 주제로 쓴 25편의 짧은 글 모음. 홍성담 화백이 글에 걸맞은 따뜻한 그림을 그렸다.8500원.●문화재청 사람들의 문화유산 이야기(강신태 등 지음, 눌와 펴냄) 현직 문화재청 직원 23명이 알려지지 않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들을 엮었다. 업무나 개성에 따라 문화재를 바라보는 현장의 시각들도 다양하다.1만 5000원.●마음 사전(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펴냄)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과 연관된 낱말 300여개로 복잡한 감정의 실체를 더듬었다. 행복과 기쁨은 어떻게 다를까. 시인이 간추린 다양한 마음의 빛깔들에 무릎을 치게 된다.1만 2000원.●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이유진 지음, 이매진 펴냄) 태양광, 풍력, 바이오가스, 유채기름 등으로 에너지 자립을 실현해가는 국내외 현장들을 방문했다. 녹색연합 에너지·기후변화 팀장인 저자가 석유고갈 시대의 대안을 모색했다.1만원.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2)후삼국통일의 기념비 개태사 삼존불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2)후삼국통일의 기념비 개태사 삼존불

    요즘에는 흔히 대학 이름을 따서 지하철역 이름을 짓는다지만, 한때는 역에 절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해남부선의 불국사역이나 호남선의 백양사역, 경원선의 망월사역, 중앙선의 희방사역이 그렇지요. 경전선의 다솔사역에는 이제 여객열차가 서지 않고, 여천선의 흥국사역은 여천산업공단의 화물터미널이 되었습니다. 호남선 개태사역은 절 이름이 붙여진 역 가운데서도 단연 특별하지요. 기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절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역이기 때문입니다. 호남선이나 전라선 열차를 타고 남도로 내려가다 서대전역이 막 지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면 언제나 개태사의 안부가 궁금해 슬금슬금 왼쪽 차창 밖 산기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개태사가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은 ‘황산벌’이라고 설명하면 더욱 이해가 빠르겠지요. 백제의 결사대가 장렬하게 산화한 이곳에는 계백장군의 것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고, 최근 바로 곁에 백제군사박물관이 세워져 계백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싸움으로부터 276년이 지난 936년 이곳에서는 후백제와 고려가 맞붙게 되지요. 견훤의 큰아들인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지금의 경북 선산 동쪽으로 추정되는 일리천에서 왕건에게 대패한 후유증이 컸던 탓인지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항복하고 맙니다. 개태사는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승리의 현장에 세워졌습니다. 신검의 항복을 받고는 곧바로 착공하여 4년 남짓한 공사 끝에 태조 23년(940) 낙성법회가 열립니다. 개태사(開泰寺)라는 이름은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으로 태조 왕건이 직접 지었습니다. 절이 자리잡은 황산도 ‘하늘이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천호산(天護山)이라고 바꾸었지요. 왕건은 친히 발원문을 짓는 등 이 절이 갖는 상징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개태사는 이렇듯 태조의 발원으로 창건된 고려의 대표적인 국찰이었지만,10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절의 분위기는 고즈적함을 넘어서 스산할 지경입니다. 그렇다해도 이 절에는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첫장을 연 보물 제219호 석조삼존불상이 있어 역사적 의미는 퇴색하지 않습니다. 창건 당시 개태사는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굴 조사 결과 절터는 석조삼존불이 있는 현재의 개태사와 북쪽으로 400m쯤 떨어진 옛터, 그리고 동쪽으로 150m쯤 떨어진 산중턱까지 미쳐있습니다. 당시의 영화가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석조삼존불은 가운데 본존불의 키가 4.15m이고, 왼쪽의 협시보살은 3.5m, 오른쪽의 협시보살은 3.21m 정도입니다. 사진으로는 장난스러워보였던 삼존불을 실제로 대하면 위압감마저 듭니다. 미술사학자들이 아미타삼존불로 분류하고 있음에도, 전각을 미륵이 머무는 용화대보궁(龍華大寶宮)으로 이름지은 것도 개태사를 찾는 중생들이 삼존불에서 미륵의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삼존불은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왼쪽 협시보살의 조각솜씨가 조금 더 정교한 만큼 본존과 오른쪽 협시보살은 나중에 왼쪽 협시보살을 모델로 조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터의 전면적인 발굴로 원래 조각의 흔적이 나타난다면 이런 주장이 힘을 얻을 수도 있겠지요. 개태사의 창건이 새로운 통일왕조의 개막을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면, 석조삼존불은 후삼국통일의 기념비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행길에 지나치는 개태사역은 작은 시골정거장에 불과하지만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51)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51)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회암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름을 떨친 거찰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머물게 하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참례토록 한 것은 물론 상왕으로 물러앉은 다음에는 아예 이곳에서 도를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하지만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삼은 마당에 왕실의 권위를 등에 업고 번성한 회암사는 더더욱 유생들의 집중 견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쇠락해가던 회암사는 조선 중기 이후 어느 때인가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회암사터는 1997년부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지요. 발굴 현장에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면,262칸에 이르렀다는 전성기 회암사터의 규모에 놀라게 됩니다.14세기의 대(大)여행가로 새롭게 주목받는 지공(持空·1300∼1363)의 부도는 그가 중창한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 중턱에 법제자인 나옹과 무학의 부도와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지공은 본명이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提納薄陀)로 인도의 마가다국(摩竭提國) 출신입니다. 그는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원나라 수도 연경을 거쳐 충숙왕 13년(1326년)에는 고려에 들어와 ‘환생한 부처’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3년 가까이 머물게 되지요. 지공은 1328년 연경으로 돌아간 뒤에는 고려인들이 세운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나옹과 백운, 무학 등이 다투어 원나라로 건너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지요. 지공의 가르침에는 개혁사상이 담겨 있었던 듯 나옹은 고려 말 개혁정치를 시도한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고, 무학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엽니다. 지공은 1361년 11월 겨울 입적하는데,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의 혼란 속에 그의 유골을 네 사람의 제자가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고려로 가져온 유골이 회암사와 장단 화장사, 묘향산 안심사에 나뉘어 안치된 것입니다. 마가다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지공의 행적은 목은색이 지은 지공의 회암사 부도비명 병서에 자세히 전합니다. 지공은 인도의 동북부에서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오늘날의 스리랑카에 이르는 인도의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사(史)는 14세기 초에 이르면 인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었고, 이를 전후한 시기에 힌두교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던 반면 불교는 거의 사라졌다고 서술하고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지공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인도의 동부는 당시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공은 처음엔 바닷길로 중국으로 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미얀마와 말레이반도의 초입까지 진출했다가 돌아선 것으로 짐작되고 있지요. 이후 인도 서부의 사막과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티베트와 운남, 연경을 거쳐 고려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고려에서도 개경에만 머물지 않고 금강산과 양산 통도사에서도 설법을 했습니다. 지공은 티베트에서는 주술사가 독약을 타놓은 차를 마셔야 했고, 하성(蝦城)에서는 이교도들로부터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으며, 중국의 양자강 상류에 속하는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알몸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지공의 발자취를 담은 기록은 당시 아시아 각국의 지리와 민속, 종교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지공을 모로코 탕헤르 출신으로 이슬람세계와 중국을 여행한 이븐 바투타(1304∼1368)와 비교되는 대여행가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회암사에 있는 지공의 부도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dcsuh@seoul.co.kr
  •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개성, 사무치게 그리웠다…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유년기를 보낸 시골마을, 기억나십니까. 포장도로라고는 달랑 신작로뿐, 대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길은 이내 흙먼지 폴폴 나는 흙길로 바뀌지요. 때에 전 옷차림의 개구쟁이들이 겨울이면 비료포대로 눈썰매타던 마을 고샅길이며, 아버지 읍내 나가시던 둑방길이 그랬습니다. 버스를 타고 돌아 본 고려 500년 도읍지 개성의 풍경이 딱 그 모습이었습니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남바위 비슷한 털모자를 쓴 아낙네가 물을 길어 등지게에 지고 나릅니다. 선죽교 부근의 냇가에서는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는 여인네의 모습도 눈에 띕니다. 버스가 마을을 지날 때 제법 용감한 개구쟁이는 언덕 위에서 늠름하게 폼을 잡고 손을 흔드는 반면, 수줍음 많은 녀석은 담장 뒤에 숨어 보일 듯 말 듯 손짓합니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세계가 교차하는 듯한 풍경이었지만, 참 정겨웠습니다. 버스를 함께 탔던 관광객 누구에게서도 잘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상대적 우월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금강산 일대가 처음 개방됐을 때와 비교하면 주민들의 표정도 놀라울 만큼 변했습니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마다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었지만, 주민들이 예전처럼 외면하거나 심지어 등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웃고 손을 흔들며 환영의 뜻을 표했습니다. 전혀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었지요. 박연폭포, 선죽교 등 고도(古都) 개성의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주민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개성에서의 체류 8시간을 기록했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그 사이엔 이념과 체제의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지요.60년 세월을 에둘러 돌아왔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훔쳐보는 묘한 즐거움도 각별했고요. 시간대별로 개성관광의 묘미를 소개해봅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흔히 출입국사무소로 알고 있지만, 서로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지 말자는 뜻에서 ‘국’자를 뺐다)에서 개성관광증을 받는 등 수속을 마친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5분 정도 달린 버스가 개성표시판을 지날 즈음 전신주 가운데 테두리 색깔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다. 북한 지역으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버스 행렬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북한군 지프차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쯤이다. 경계근무를 서는 앳된 얼굴의 북한군 병사 몇 명을 지나면 곧바로 북측 출입사무소. 간단하게 입국심사를 마치고, 버스에 동승한 북한 안내원 2명과 함께 개성으로 향했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낯익은 남측의 풍경이 이어진다. 공장 건물 사이로 24시간 편의점도 있고, 서울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버스가 출근길의 북한 근로자들을 실어 나른다. 개성공업지구를 지나 15분쯤 경의선 철길과 나란히 달리면 개성의 초입 송남동에 닿는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거란에서 보낸 낙타 50마리를 굶겨 죽였다는 약대다리가 있는 곳이다. 개성 주민들에게는 ‘야다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개성에서 경의선 열차가 매일 한차례 와닿는 봉동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야다리를 건너야 한다. 송남동을 지날 무렵, 느닷없이 머리 위로 고가도로가 나타났다. 안내원은 장차 서울과 평양을 연결할 고속도로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개성과 평양을 오가는 데 이용된다. 고기남새, 세거리 사진관, 리발관 등 개성시내 건물에 내걸린 간판들이 마치 1960∼70년대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슬그머니 사진을 찍고도 싶었지만, 안내원의 경고대로 ‘피곤한 여행’이 될 듯해 꾹 참고 말았다. 시내는 거의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주민들의 옷이며, 건물들이 검고 어두운 색깔 일색이다. 거기에 낮게 깔린 안개까지 더해지며 무채색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다. 간밤에 무척이나 추웠던 듯, 주민들 대부분이 두툼한 옷차림이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동여맨 여인네의 얼굴이 시선을 붙잡았다. 차가운 날씨 탓에 볼에서 귀밑머리에 이르도록 빠알갛게 얼어 있다. 개성에서 박연폭포까지는 40분 남짓 소요된다. 개성시 외곽의 고갯길에 서면 개성을 둘러싸고 있는 송악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만삭이 된 여인이 두 팔 벌려 개성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란다. 그래서 개성 시민들은 송악산을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기 위해 고려 왕조에 정기를 불어넣어 주던 송악산의 여신을 임신시켰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개성시내를 벗어나자 처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산자락이 겹겹이 다가섰다. 나긋나긋한 느낌, 박연폭포에 가까워지면서부터 산세가 우람해지기 시작했다. 고봉준령은 아니지만 바위산답게 흰 눈을 이고 선 모습이 당당하다. 길도 제법 험하다. 좌우로 휘어지는 모양새가 설악산 한계령에는 못 미쳐도, 속리산 말티재에는 버금갈 듯하다. 마침내 박연폭포 앞에 섰다.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히는 곳. 북측에선 천연기념물 제388호로 지정해 놓았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38m 높이 암벽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겨울이라 가늘어지긴 했지만, 금강의 구룡폭포와 설악의 대승폭포 등과 더불어 국내 3대폭포를 이룰 만한 자태다. 이쯤에서 관광안내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오래전 박연폭포를 찾은 기생 황진이는 폭포 아래 고모담에 훌쩍 뛰어들어 목욕을 즐깁니다. 목욕을 마친 황진이는 폭포 바로 옆 룡바위에 올라 젖은 머리에 먹물을 묻혀 초서체로 시 한 수를 적습니다.‘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의시은하 락구천(疑是銀河落九天)’이란 내용이지요.1957년 이곳을 처음 방문한 김일성 주석께서 그 문장을 ‘날아흘러 곧추 아래로 떨어진 물이 삼천척이나 되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떨어지는지 의심스럽구나’라고 해석해주셨습니다.” 안내원은 또 “황진이가 적은 글씨를 곧바로 도공들이 새겨 오늘까지 전해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연폭포의 전경을 감상하기에는 고모담 오른쪽의 범사정이 으뜸이다.‘박연폭포가 안개 위에 떠있는 듯하다’는 뜻의 정자. 범사정에 앉아 쉼을 청한 이옥임(81·하남시)할머니의 눈가에도 옅은 물방울이 괸다.“70년 전 개성에서 소학교 다닐 때 걸어서 소풍왔던 곳이야. 아침나절 개성을 출발하면 저녁 무렵 도착하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구경한 다음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지.” 범사정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온다. 고려때 개성 방위를 위해 천마산과 성거산 등의 봉우리를 따라 쌓은 석성이다. 황진이의 연인 서경덕도 산성 동쪽 성거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성 왼쪽의 박연(朴淵)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박연폭포란 이름의 유래가 된 못이다. 폭포 위쪽에 있다. 박씨 성 가진 사람이 폭포 앞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그 소리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고모담(姑母潭)은 아들이 용녀를 따라 죽자 그의 어머니가 몸을 던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대흥산성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관음사에 닿는다.970년 조성된 사찰. 작고 화려한 대웅전의 뒷문 장식에 슬픈 전설이 숨어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관음사 조성공사에 동원된 조각 신동 운나(당시 11세)는 뒷문 장식물 조각에 열중하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는다. 곧바로 하산하려 했으나, 공사 진행이 늦어질 것을 우려한 공사 관리자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왼손잡이였던 운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도끼로 자신의 왼팔을 자른다. 결국 뒷문 왼쪽은 완성됐지만, 오른쪽은 미완으로 남게된 것. 그는 왼쪽문에 왼팔이 잘린 자신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박연폭포를 출발한 버스는 50분쯤 걸려 개성시내 중심부의 통일관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개성 시내와 개성 남대문, 뒤로는 자남산과 김일성 동상이 펼쳐져 있다. 낡은 벤츠 승용차 뒷좌석의 흰 드레스 입은 신부, 파란색 복장의 교통보안원, 삼삼오오 걸어가는 주민 등 모두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관광객들을 관찰하고 있다. 시간이 느린 화면처럼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다. 그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겨우 수m 쯤. 하지만 말을 걸 수도, 더더욱 손을 잡을 수도 없다. 통일관의 자랑은 닭곰탕과 장지단(계란조림), 이면수 조림 등으로 구성된 ‘개성 13첩 반상기’. 쌀밥에 13가지 반찬이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개성지역 토속요리다. 여기에 입에 불이 날 만큼 독한 송학소주가 곁들여진다. 개성시 문화회관 뒤편의 숭양서원은 정몽주와 서경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정몽주의 생가터에 지어졌다. 입구 알림판에 따르면 ‘특별한 장식없이 간소하게 지었으나 이 곳 지형조건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크고 작은 집들을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조화시킨 우수한 건축물’이다. 정몽주의 영정과 저잣거리에 버려진 정몽주의 시신을 수습한 친구 우현보, 서경덕 등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선죽교앞에 섰다.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당한 곳으로 너비 2.54m, 길이 6.67m의 자그마한 돌다리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인공수로가 물길을 대신하기 이전엔 송악산에서 발원한 로계천이 선죽교 아래를 흐르고 있었다. 선죽교를 지난 로계천은 사천강, 예성강 등과 차례로 만나 서해로 흘러 들어갔다. 원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것을 정몽주가 흘린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돋았다고 해서 선죽교(善竹橋)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자세히 보면 다리가 두 개인데, 난간이 있는 멋진 다리가 진짜다. 1780년 이곳에 부임한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선조할아버지의 피가 묻은 곳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다니자 원래 다리에 난간을 만들고 그 옆에 새 다리를 놓았다고 전해진다.‘문제의’ 핏자국은 화강암의 철분이 산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개성 출신의 명필 한석봉이 썼다는 비석 맞은 편에 두 채의 비각이 서있다. 하나는 변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만난 친구 성여완의 것이고, 또 하나는 피습을 눈치챈 정몽주가 도망치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그와 함께한 하인 김경조의 것이다. 선죽교 건너편에는 표충비가 있다. 거북이 두 마리가 정몽주 충정을 찬양하는 비석을 이고 섰는데, 각 각 조선의 21대,26대 임금이 만들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박물관. 성균관 건물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992년 고려시대 국자감으로 창설됐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한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의 성균관보다 500년을 앞선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17세기 초에 개축했다. 노거수(老巨樹)들의 집합소라고 할 만큼 넓은 뜰에 심어진 1000년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국보로 지정된 곳인데도 건물 내부를 들고 남이 자유롭다. 성균관 내 4개의 전시관에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 1000여점의 고려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헌화사 7층탑 등 북측의 국보급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개성을 빠져 나오는 길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오전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숫자다. 때는 이미 땅거미지는 시간. 전력이 부족한 마당에 어두컴컴해 진 건물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을 게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보일 듯 말 듯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개성 시내 한 쪽을 가로지르는 경의선 철길 위로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기차가 자주 지나지 않으니 무서워할 것도 없을 터. 어른들도 무시로 지나다닌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던가. 등돌리고 있었던 겨레가 금강산과 개성 등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서히 간극을 좁히려 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열매를 거둘 날도 머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글·사진 개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가는 길 :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까지 가는 셔틀버스가 오전 6시 전후 서울 계동, 광화문 등에서 출발한다.5000원. 자가용의 경우 임진각까지 간 다음, 임진각에서 셔틀버스(6시40분∼7시20분 운행)로 출입사무소까지 가면 된다. 예약은 현대아산의 개성관광 홈페이지(www.ikaesong.com)에 링크된 전국의 개성관광대리점에서 할 수 있다. 현대아산 02)3669-3000, 도라산사무소 031)954-3940,950-5195.1일관광 요금은 18만원이다. ▲신분증 : 현지에서의 신분증은 개성관광증이 대신한다. 관광증 발급에는 여권 사진 2장이 필요하다. 관광증을 훼손하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 국내 출국 수속을 위해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여권 중 하나는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화폐 : 개성에서는 미국 달러 외 원화나 카드 등을 사용할 수 없다. 출발 전 환전해 가는 것이 좋다. 개성 북측 출입사무소 출구에서도 환전할 수는 있다. ▲휴대 금지 물품 : 필름 카메라는 반입 금지. 디지털 카메라는 허용되지만 초점거리 160㎜ 미만 렌즈, 광학 기준 24배줌 미만일 경우만 가능하다. 남측의 신문·잡지, 휴대전화(배터리 등 관련 용품 포함),MP3와 GPS, 내비게이션, 소형 라디오, 녹음기 역시 반입금지. 해당 물품은 현대 아산측이 보관, 관광 후 돌려준다. ▲국내 반입금지 물품 : 북측에서 구입한 뱀술, 령정술 등 동물을 재료로 만든 주류와 비아그라·우표·불온 서적 등은 들여올 수 없다. ▲남측출입사무소 1층에 설렁탕 등 간단한 아침 식사를 파는 매점이 마련돼 있다.
  • [씨줄날줄] 時和年豊/육철수 논설위원

    대도무문(大道無門)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이자 좌우명이다.‘바른 길을 가면 꺼릴 게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멋있는 말도 의미 전달이 미흡해서 한바탕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1993년 7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다.YS는 이 글을 일필휘지해서 클린턴에게 선물했다. 클린턴은 당시 박진 공보비서(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그 뜻을 물었다. 박 비서관은 얼떨결에 직역해서 “A high street has no main gate.”(큰 길에는 정문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클린턴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번엔 멋을 좀 부려 “Righteousness overcomes all obstacles.”(정의로움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라고 했다. 그래도 반응이 시원찮자 기지를 발휘해 “A freeway has no tollgate.”(고속도로에는 요금정산소가 없다)라고 했더니, 클린턴은 그제야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뜻이 웅대하고 깊으면 이렇게 의미 전달에 어려움을 겪는 법이다. 새해가 밝았다. 덕담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시화연풍’(時和年豊)이란 사자성어를 내놓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시화세풍(時和歲豊)과 같은 의미다. 당선인 측은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뜻이며,‘화합의 시대를 열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의미라고 소개했다. 국민화합과 경제살리기란 시대정신을 압축했다는 얘기다. 뜻풀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한학자들에 따르면 시화연풍에는 다른 뜻도 숨어 있다.‘시대와 화합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의미로,‘새 권력에 화합(時和)해야 좋은 결실을 맺는다(年豊).’는 풀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권력이 바뀌었으니 잔말 말고 따라와야 만사가 편하다.’는 메시지도 담겼다는 주장이다. 이 당선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새 정권이 쿠데타나 불법으로 집권한 게 아닌 만큼, 그리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저것 뒤져 괜찮은 사자성어 하나 골랐는데,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면 기분이 좋을 리도 없을 테고…. 그러나 그 깊은 의미를 애초에 밝힌 대로 전달할 책임은 이 당선인과 집권측의 몫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스핑크스가 물속으로? 이집트 유적지 침수 ‘비상’

    스핑크스가 물속으로? 이집트 유적지 침수 ‘비상’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잘 알려진 이집트 카이로 부근의 기자(GIZA) 지역 고대유적지들이 해마다 상승하는 지하수로 일부 침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집트 고고학최고평의회(Supreme Council of Antiquities)의 자히 하와스 사무국장은 지난 30일 “피라미드 주변 유적에서 물이 넘쳐 침수됐다.“고 밝히면서 ”이로 인해 피라미드 건설노동자와 귀족 등의 주거지였던 ‘피라미트 타운’ 발굴 작업이 계속 차질을 빚고 있다.”고 발표했다. 염분이 포함된 지하수는 지난해 여름부터 넘쳐 오르기 시작, 고대 이집트 4왕조기(기원전 2613~2494년)에 형성된 피라미드 타운과 귀족의 주거지 및 토기가 다수 출토되고 있는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스핑크스 바로 밑 부분에서도 지하수가 넘쳐흘러 침수 및 범람이 우려되고 있으며 주변 유적지의 벽돌건물은 지하수를 빨아들여 가루처럼 부서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 후지여자대학의 코바야시 미쓰나 교수는 “나일강의 아스완하이댐(Aswan High Dam)으로부터 물이 스며들고 있으며 농지의 하수나 배수시설의 정비가 잘 안돼 있는 것도 원인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씨줄날줄] 폐족(廢族)/육철수 논설위원

    왕조시대의 연좌제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반역을 하거나, 왕권에 잘못 대들었다간 3족(부모·형제·처자 또는 친가·외가·처가),9족(9대에 걸친 직계친족 또는 부계 4친족+모계 3친족+처가 2친족)이 참혹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다 10족이라 해서 죄인의 스승이나 문하생을 포함하기도 했다. 죄가 다소 가벼우면 폐족형(廢族刑)을 내려 목숨만은 살려주고, 대신 후손이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흔했다. 10족을 멸한 사례로는 중국 명대의 대학자 방효유(方孝儒)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명태조 주원장은 태자가 일찍 죽자 손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태조의 넷째아들인 연왕(후에 영락제)이 황위를 찬탈했다. 당시 즉위의 조서를 쓰도록 명을 받은 방효유는 붓을 집어던지며 이를 거부했다. 방효유는 즉시 극형을 당했고, 그의 9족에다 친구·제자 등 84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고려·조선시대에도 이런 형벌이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됐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조정에서 웬만한 벼슬을 차지한 가문이면 좁은 땅덩어리에 친인척 관계가 워낙 복잡해 인재를 다 죽일 판인데, 집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폐족은 잦았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병연의 가문이 대표적이다.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반란군에 항복한 죄로 그 후손은 벼슬길이 막혔다. 연좌제가 박물관으로 간 게 언젠데, 뜬금없이 폐족론이 터져나와 화제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동업자’인 안희정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에서 친노(親盧) 세력을 폐족이라 칭했다. 자신들은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5년전 정권을 창출하고 기세등등했던 언동은 찾을 수 없다. 국민의 신망을 잃은 권력 실세의 뒤늦은 석고대죄가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하지만 요해가 안 되는 것은, 폐족이라면서 총선 출마설이 나도는 것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안씨의 처연한 몸부림을 보면서 권력을 안겼다가 어느 순간 거두어 가는 국민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다. 새 정부의 떠오르는 실세들은 안씨의 회한을 꼭 반면교사로 삼길 바란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17세기 승정원사초 161책 첫 공개

    조선시대 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된 ‘승정원사초’(承政院史草) 161책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은 광주이씨 문익공(文翼公) 이원정(李元禎)의 종가에서 기증한 유물을 전시하는 ‘광주이씨 옛 종가를 찾아서’ 특별전을 28일부터 내년 2월 24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전시회에는 승정원사초를 비롯해 이원정의 유품인 임금 교서와 교지 등 조선후기 남인(南人)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던 광주이씨 종가의 기증유물 100여점이 함께 전시된다. 승정원사초는 승정원일기나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원고격인 사초(史草)류로, 이원정의 아들 이담명(李聃命)이 승정원과 춘추관에 재직하던 1672∼1675년에 손수 기록한 것이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 맞춰 27∼28일 이틀간 광주이씨 대종회, 한국역사문화연구원 등과 공동으로 `조선시대 광주이씨 인물의 삶과 학문’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도 개최할 예정이다.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휘둘리고, 엄당의 참소가 곁들여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증오가 높아 가던 분위기 속에서 엄당 계열의 온체인(溫體仁)은 다섯 차례나 상소를 통해 원숭환을 죽이라고 촉구했다. 반면 동림당 계열의 신료들은 ‘적이 성 아래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장성(長城)을 허물 수는 없다.’며 숭정제에게 구명을 호소했다. 원숭환의 생사는 바야흐로 동림당과 엄당 대결의 핵심 현안으로 등장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숭정제는 엄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그 배경 1630년 9월22일, 원숭환은 북경 서시(西市) 거리에서 ‘임금을 속여 모반을 꾀한 죄’로 처형되었다. 원숭환은 책형(刑)이라 불리는 가장 잔혹한 형을 받았다. 기둥에 묶어 놓고 형리들이 달려들어 칼로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중에는 두개골까지 부숴 버리는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형벌이었다. 후금이 파놓은 반간계에 휘말려 원숭환을 처형했던 사람은 숭정제였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원숭환을 죽이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이었다. 이들은 숭정제 즉위 후 약화된 자신들의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엄당의 잔당들을 규합하려 했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원숭환을 제거하려 했던 것과 ‘모문룡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지만, 모문룡은 가도에 위충현의 소상(塑像)을 세웠을 만큼 그와 밀착해 있었다. 모문룡은 해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막대한 요향(遼餉·명 조정이 요동으로 보내던 군량) 가운데 상당한 양을 횡령했고, 그렇게 착복한 자금을 바탕으로 위충현 등 엄당의 요인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조선과 후금 상인들을 통해 흘러들어 온 인삼, 모피, 진주 등의 보화도 철철이 엄당 신료들에게 보내졌다. 엄당은 뇌물을 챙기는 대신 모문룡의 뒤를 든든하게 봐주었다. 그런데 그 모문룡이 죽었다. 때마다 쏠쏠하게 들어오던 뇌물도 뚝 끊어졌다. 당연히 모문룡을 죽인 원숭환에 대한 반감과 그와 연결된 동림당에 대한 적의(敵意)는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타 조정 신료들 중에도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북경 주변의 경기 지역에 원림(園林)이나 정사(亭舍)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후금군이 장성을 넘어와 경기 지역을 유린하자 그들이 소유한 원림이나 정사가 망가지거나 파괴되었다. 자연히 그들은 원숭환을 원망하게 되고, 궁극에는 그가 후금군을 고의로 끌어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원숭환,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영웅으로 추앙 원숭환의 죽음을 계기로 명은 확연히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원숭환을 죽이고 전용석 등 동림당 관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온체인 등은 숭정제를 주무르며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상황 파악이 어두운 황제와 그에게 달라붙은 간신들의 발호 속에 후금에 대한 방어 대책이 제대로 마련될 리 없었다. 한 예로 원숭환을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祖大壽)는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명에 대한 후금의 도전이 본격화되었던 만력 연간부터 숭정 연간까지 원숭환은 명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 그가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허망하게 죽자 많은 사람들이 비탄에 잠겼다. 원숭환은 자연스럽게 과거 송(宋) 시절 금(金)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주화파 진회(秦檜) 등에 의해 제거되었던 명장 악비(岳飛)에 비견되었다. 청나라 말엽 반청흥한(反淸興漢)의 열기가 높아갈 무렵 ‘한족의 영웅’으로서 원숭환을 추모하는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변법자강 운동에 가담했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원숭환을 기려 ‘원독수전(袁督師傳)’이라는 글을 썼다. 광서(光緖) 연간 일본에 유학했던 장백정(張伯楨)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원숭환 찬양론자였다. 원숭환과 같은 광동(廣東) 출신이었던 그는 원숭환이 남긴 시문(詩文)을 수집하여 문집을 만들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을 주도했다.‘원숭환유집(袁崇煥遺集)’의 발문에서 그는 ‘원숭환이 죽음으로써 명이 드디어 망했고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가 중원을 차지하게 되었다.’라고 썼다. 장백정은 원숭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명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궁극적으로 반간계를 써서 원숭환을 죽게 만든 것은 청’이라고 하여 청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드러냈다.‘반청흥한’의 분위기 속에서 원숭환이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1952년 북경시 정부가 도시 정비 차원에서 원숭환의 묘를 외곽으로 옮기려 할 때, 북경의 지식인들은 모택동에게 원숭환의 묘를 보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당시 북경시장 팽진(彭眞)에게 원숭환 묘를 원위치에 보전하도록 지시했는데, 모택동 또한 원숭환을 ‘민족영웅’으로, 후세 사람들을 감동시킬 ‘애국주의의 화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신(貳臣)들 홍타이지 명령받아 반간계 실행 원숭환이 투옥되고 결국 처형되었던 것은 명이 스스로 무너져 가는 과정이었다. 명이 이렇게 자멸하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담당했던 부류가 이신(貳臣)들이다. 이신이란 ‘두 조정을 섬긴 신하’, 즉 명에서 벼슬하다가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신료들을 가리킨다. 명이나 한족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배신자’였지만 후금이나 만주족의 입장에서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특히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중용(重用)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후금의 국가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실제 당시 원숭환을 제거하기 위한 반간계를 제시했던 사람도, 홍타이지의 명을 받아 반간계를 실행으로 옮겼던 사람도 모두 이신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아, 사로잡은 명의 환관들이 있던 옆방에 머물면서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했다.’고 말하며 반간계를 실행했던 고홍중(高鴻中)과 포승선(鮑承先)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다. 홍타이지에게 원숭환을 제거할 반간계를 기획하여 제공한 사람은 한족 출신 범문정(范文程)이었다. 그는 심양의 명문 출신으로 증조 범총(范총)은 명 조정에서 병부상서를 지냈고 조부 범심(范瀋)은 심양위지휘동지(瀋陽衛指揮同知)를 역임했다. 범문정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자신의 책사(策士)로 중용했다. 범문정은 1629년 홍타이지의 관내(關內) 원정에 수행했는데, 원숭환 때문에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를 제거할 반간계를 구상했다. 숭정제가 평소 시기심과 의심이 많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결국 이신 범문정을 활용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명의 간성(干城)을 제거할 수 있었다. 범문정은 뒤 시기 순치(順治) 연간에도 시정(施政)의 계책과 방향을 제시하여 청이 중원을 원활히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닦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을 ‘제어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이신들이 청으로 귀순했던 이유는 제각기 다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북경까지 달려와 사투 끝에 적을 물리쳤지만, 간신들의 참소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숭정제를 보면서 조대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신들의 후금으로의 귀순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명의 목줄을 겨누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과 이신들의 존재 앞에서 ‘자멸한 왕조’ 명이 던지는 역사의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최첨단 ‘국가기록 보석함’ 열렸다

    각종 국가기록을 보존·관리하기 위한 최첨단 시설이 문을 열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12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 자리한 ‘나라기록관’ 준공식을 갖고 일반에 공개했다.3년 동안 1200억원이 투입된 나라기록관은 지하 3층, 지상 7층, 연면적 6만 2240㎡ 규모다. 기록관은 건물의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보가 없는 ‘무량판 구조’다. 공기 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으로,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와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등에 적용되고 있다. 또 건물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내진·방폭 기능 등이 강화된 이중벽 구조로 지어졌다. 때문에 일본 ‘고베 지진’과 맞먹는 리히터 규모 7의 강진에도 끄떡없고, 건물 10m 근처에서 TNT 폭탄 250개가 한꺼번에 터져도 견딜 수 있다. 내부 시설에도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됐다. 우선 필름류를 보관하는 ‘냉동서고’는 영하 2도 안팎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쓰이는 ‘초정밀 항온·항습 유지시스템’이 도입됐다.또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전자기록물을 관리하는 ‘전자매체서고’는 전자파를 차단하기 위해 서고 전체가 동판으로 둘러싸였다. 때문에 서고내 기록물은 미군이 걸프전 당시 사용한 ‘전자 폭탄’이 터져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 특히 기록관에 들어오는 모든 종이류는 중성화하는 ‘탈산’ 처리 과정을 거쳐 1000년 이상 원형대로 보존 가능하다. 서고 길이는 서울∼평양(약 300㎞)간 거리에 육박하는 270㎞. 이는 일반 문서 400만권, 시청각자료 등 특수기록물 1300만건을 동시에 보관할 수 있는 규모다. 방대한 기록물이 보관되지만,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문서 확인을 위한 ‘무선인식시스템’(RFID)을 도입, 개별 기록물에 대한 위치 추적 등을 쉽게 할 수 있다. 기록물 유출 방지를 위해 폐쇄회로(CC)TV·카드키·지문인식 등 이중삼중의 통합보안시스템도 구축됐다. 조윤명 국가기록원장은 “각 행정기관이 자체 보유한 1500만권 규모의 기록물을 단계적으로 수용할 예정”이라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도 인터넷과 현장 방문 등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기존 대전 국가기록원과 부산 역사기록관에는 주요 정책 관련 기록물,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기록물이 각각 보관돼 있다. 이날 개관한 나라기록관에는 전자·시청각 등 특수기록물이 보존될 예정이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아시아 음식이란 바로 이런 것!

    케이블·위성TV Q채널은 아시아의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5부작 다큐멘터리 ‘맛있는 아시아’를 자체제작해 새달 3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9시에 방송한다. 다양하고 독특한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는 아시아 음식 요리법, 최근 웰빙·장수의 비결로도 인정받는 아시아 음식들의 진수 등을 두루 살펴본다. 100일간 현지 올 로케이션으로 음식을 조명한 곳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등 8개국. 프로그램은 이들을 ‘왕의 만찬’‘별난 음식’‘매운 음식’‘길거리 음식’‘웰빙 푸드’ 등 5가지 테마 아래 5주에 걸쳐 펼쳐보일 예정이다. 3일 방송되는 1부 ‘왕의 만찬, 최고의 음식’편은 제목 그대로 각국의 왕실요리를 선보인다. 한국의 조선왕조 궁중요리, 일본의 가이세키 요리, 중국의 만한전석 등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귀족요리와 전통조리비법도 귀띔해 준다. 10일 방영되는 2부 ‘놀라운 음식, 별난 요리’편은 돼지 귀, 뱀의 허파, 개구리 알 등 일생에 한번도 맛보기 어려운 독특한 음식들을 내놓는다. 별난 재료들이 먹거리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놀라움 그 자체다. 17일에는 각국의 매운 음식이 다 모인다. 이 ‘新나고 火끈한 매운맛 열전’편에 등장하는 음식은 한국의 청양고추, 태국의 쥐똥고추(프리키누), 인도네시아의 삼발 소스 등이다. 그야말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매운 양념들이 집합하는 셈. 최근 매운 음식은 다이어트와 스트레스 해소 효험도 인정받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24일 방송되는 ‘3분의 승부! 거리음식 총출동’편은 아시아의 재래시장을 찾아간다. 색다른 풍경에 저렴한 가격, 맛좋은 음식까지 1석3조를 거머쥘 수 있는 재래시장의 장점은 어느 나라를 가나 마찬가지. 길거리 음식의 향연에 함께 빠져본다. 31일 마지막 편인 ‘몸을 위한 음식, 슬로푸드’에서는 패스트푸드에 찌든 몸을 정화시키는 보양식들을 만날 수 있다.21세기의 화두는 뭐니뭐니 해도 건강. 환경친화적인 재료와 전통적인 조리방식으로 건강식의 맥을 잇고 있는 각국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수십 년 동안 정성스럽게 묵힌 간장, 젓갈, 천연 조미료를 이용해 만든 음식들이 망라된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국립고궁박물관 탄생교육실 탯줄의식 전시코너 새로 꾸며

    국립고궁박물관 탄생교육실 탯줄의식 전시코너 새로 꾸며

    조선 왕실의 가장 독특한 출산 문화는 탯줄을 갈무리하는 안태의례(安胎儀禮)라고 할 수 있다. 출산하면 탯줄이 남는데, 이 탯줄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태어난 왕손이 현명하고 강건한 군주가 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탯줄은 내·외 두 개의 태항아리에 넣은 뒤 길지(吉地)를 선정해 태실을 만들어 보관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28일 전관 개관하면서 1층의 ‘탄생교육실’에 조선 왕실의 안태의례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시 코너를 새로 꾸몄다. 조선 왕실의 태실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을 전후하여 태실에서 태항아리들을 꺼내 이왕가 박물관으로 옮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왕가 박물관은 해방 이후 소장품을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신인 궁중유물전시관에 넘겼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먼저 투박해 보이는 태조의 태항아리와 백자로 만들어진 세종의 태항아리가 보인다. 조선 초기의 태조, 정종, 태종의 태항아리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질그릇으로 만들었다. 문종 이후에도 한동안은 분청사기로 태항아리를 만들었는데, 세종의 태항아리가 백자인 것은 그의 백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성종과 성종비의 태항아리가 나란히 선을 보이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의 내항아리가 있다는 것은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안태의례가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귀(1557∼1633)가 쓴 ‘묵재일기’에는 사대부 사이에 안태의례가 행해지고 있다는 내용이 있으나, 그 증거는 이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시 경안면 태전리에 있던 성종태실은 1928년 창경궁으로 옮겨졌다. 연산군의 원자 금돌이(金乭伊)의 태항아리는 왕실에 도자기를 공급하는 사옹원 분원이 생긴 이후 백자 태항아리가 정형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연산군의 원자가 어린 시절 금돌이라고 불리었음은 함께 전시되어 있는 태지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지석은 주인공이 태어난 연·월·일 등을 기록한 뒤 묘지명처럼 백자로 구워 태실에 넣었다. 정조의 내항아리는 바닥에 개원통보(開元通寶) 한 개가 놓인 상태로 전시되어, 동전 위에 탯줄을 올려놓았던 안태 방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한편 전시실 끝에는 충남 서산에 있는 명종태실이 실제의 4분의3 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새롭게 고증하여 숙종 당시 수리되었을 때의 원형에 가깝게 만들었다고 한다. 박상규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안태의례는 중국의 제도가 아닌 우리 고유의 풍속으로 조선 왕실에서 꽃을 피웠다.”면서 “왕조가 지속되려면 왕실이 번창해야 하고, 지혜로운 군주의 대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염원을 안태의례는 담고 있다.”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국립고궁박물관 전관 28일 개관

    국립고궁박물관 전관 28일 개관

    국립고궁박물관이 3개 층 12개 전시실로 전시공간을 늘려 28일 전관 개관한다. 앞서 고궁박물관은 광복 60주년을 맞은 2005년 8월15일 경복궁 남서쪽의 옛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에서 1개 층 5개 전시실로 문을 열었다. 고궁박물관은 전관 개관으로 기존의 ▲제왕기록실 ▲국가의례실 ▲궁궐건축실 ▲과학문화실 ▲왕실생활실 말고도 ▲탄생교육실 ▲왕실문예실 ▲대한제국실 ▲어차(御車) ▲궁중회화실 ▲궁중음악실 ▲어가의장(御駕儀仗)실 ▲자격루실이 새롭게 선보이게 된다. 상설 전시품도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과 보물 7건을 포함해 기존의 500여점에서 900여점으로 크게 늘어난다. 전관 개관으로 조선 왕조의 역사와 조선 왕실의 예술과 문화를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조선왕실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보물 23건 등 모두 31건 71점의 초상화와 관련 유물이 출품되는 ‘화폭에 담긴 영혼-초상’특별전도 갖는다. 영조의 세자 시절을 그린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은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불에 탄 자국이 선명하다. 한편 고궁박물관은 전관 개관을 기념해 12월 말까지 무료로 개방하기로 했다. 매표소에서 무료입장권을 받으면 오전 9시와 11시, 오후 1시와 3시에 각각 1500명씩 4차례에 걸쳐 모두 6000명 한도에서 관람할 수 있다.(02)3701-7631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책꽂이]

    ●길 위에서(정재규 지음. 산지니 펴냄) 작가가 첫 소설집 ‘집이 있는 풍경’을 낸 지 10여년 만에 낸 신작 단편 모음집. 광고회사 직원이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위해 길을 떠나는 ‘길 위에서’와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인터넷 사이트만을 배회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 ‘정글게임’, 아내의 죽음을 아내와 함께 여행한 공간을 여행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 ‘시간의 향기’ 등 인간과 시대,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한 글이 실렸다.1만원●천개의 찬란한 태양(칼리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 펴냄) ‘연을 쫓는 아이’로 잘 알려진 작가의 두번째 소설.40년간 계속된 전란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고난을 다뤘다.‘연을 쫓는 아이’가 계층과 종족이 다른 두 아프간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다뤘듯, 이 소설도 대조적인 성장 배경을 지닌 두명의 아프간 여성 이야기를 다룬다.1만 3500원.●시인과 서커스(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의 런던을 무대로 10대 소년, 소녀들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그렸다.‘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작품을 통해 베르메르라는 화가의 삶을 복원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소설에서도 자유분방한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삶과 예술 세계를 끌어들였다.1만 2000원.●연서(김하인 지음, 티비 펴냄) 책의 제목처럼 ‘사랑’을 주제로 한 ‘러브레터’. 이해타산적인 사랑이 판치는 시대이기에 더욱 소중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소중함을 그렸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을 때의 설레임과 이별의 아픔을 통해 인스턴트 사랑의 경박함을 드러낸다.8800원.
  • [최종찬기자의 시드니 뒤집어보기] (10) 호주 언론에 비친 한국

    [최종찬기자의 시드니 뒤집어보기] (10) 호주 언론에 비친 한국

    호주 언론에서 한국 관련 기사를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한 이유이겠지만 호주의 주류사회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주요 관심대상이 아닌 것 같다. 기사의 절대적인 양도 매우 적다. 반면 중국 관련 기사는 상대적으로 넘친다. 호주 내에 중국인이 많기도 하지만 초강대국으로 무섭게 커가고 있는 중국의 국력과 비례한다. 중국 최대명절인 춘제(春節) 관련 기사는 몇 주 전부터 신문과 방송에 오른다. 호주 사람들도 중국 음식을 즐기고 중국문화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 ●노대통령 방문도 거의 보도안해 그런데 지난해 호주 언론에서 이례적으로 한반도에 대해 대서특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북한 핵 관련 소식이었다. 호주는 특히 북한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미국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하는 존 하워드 정권은 북한이 지난해 10월9일 핵실험을 단행하자 호주 주재 북한 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 호주 주요 언론들도 ‘김정일 핵도발’ ‘북한 첫 핵실험후 공포, 분노 만연’등의 선정적 제목과 함께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이렇듯 한국이 호주 미디어의 사정권 바깥에 있다 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작년 말 호주를 국빈방문했을 때 호주 신문이나 방송은 노대통령의 동정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시드니대 곽기성 교수는 “호주 언론이 한국을 보는 눈은 치솟는 임금, 빈번한 노조 파업,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에 대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규 때문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면서 “한국 관련 기사는 중국과 일본의 3분의1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가뭄에 콩 나듯 한국 관련 기사가 나와도 십중팔구 부정적 내용이다. 그나마 지난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임시취업비자의 경우 우리 교민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저임금에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한국인이고 악덕 고용주로 비춰진 사람도 한국인이기 때문이었다. 올 들어 한국 관련 소식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크게 보도된 것은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과 ‘수영천재’ 박태환 선수의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 자유형 400m 우승 정도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호주 언론들은 10월6일자 외신면 등에서 ‘한반도 지도자들 냉전 종식 합의’ ‘김정일 냉전 무대에서 나오다’ 등의 비교적 긍정적인 제목으로 처리했다. 특히 박태환 선수가 폭풍 같은 막판 스퍼트로 자유형 400m에서 호주영웅 그랜트 해켓을 제치고 우승하자 호주언론들은 3월26일자 스포츠면 머리기사로 ‘호주 400m 왕조 몰락’이란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시드니대 판카지 모한 교수는 “호주인들이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만 호주의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들의 시선은 요즘 중국에 집중돼 있고 한국에 주목하지 않는다.”면서 “북한 핵문제나 남북 정상회담 등 호주의 국가안보 환경과 직접 관련된 뉴스를 소개하고 있지만 호주 언론에는 한국의 다이내믹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특징없는 나라 인식 뉴사우스웨일스대 신기현 교수는 “일반 호주인한테 한국은 특징이 없는 나라”라면서 “한국이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급성장했지만 아시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고정관념을 확인시켜주는 보도가 많다.”고 말했다. 채스트우드에 살았던 김호성씨도 “한국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면서 “지난해 북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때도 6자회담의 당사국인 한국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이 호주의 4대 수출국이며 연간 20만명 이상의 한국인 관광객과 4만여명의 청년층이 호주에 체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도 호주의 중요한 파트너 가운데 하나다. 호주 언론은 한국 관련 기사를 이런 양국 관계에 걸맞은 수준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 노력이 요구된다. 신기현 교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시점이다.“아직도 호주에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딱히 정립돼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국가홍보 슬로건을 보자. 예컨대 ‘한국, 유쾌한 놀라움!´(Korea,a pleasant surprise´)으로 해봄직하다. 그동안의 ‘역동적인 한국’(Dynamic Korea)이 훌륭한 이미지라는 것은 한국인들만의 생각이다. 한국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siinjc@seoul.co.kr ■조창범 駐濠 한국대사 “취업 이민땐 높은 세율 염두에 둬야” “호주는 경제호황 속에 전문인력 구인난을 겪고 있어 우리 전문 직종이나 기술인력의 이민 전망이 매우 밝습니다. 하지만 호주는 언어와 생활, 제도 면에서 우리와 차이가 많아 이에 관한 이해나 사전준비가 없으면 낭패를 보기 쉬워요.” 조창범(61) 주 호주 한국대사는 호주 이민이나 유학을 고려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22일 이렇게 조언했다. ▶호주가 언어, 생활, 제도면에서 우리와 차이가 많다고 했는데. -호주는 서구적 시각을 가진 영어권 사회다. 한국과는 다른 관습과 제도가 있다. 예컨대 지난해 서부 호주로 이민온 우리 용접공들이 연봉에 비해 많은 근로소득세, 사회보장보험 부담으로 예상보다 낮은 실질소득, 언어 장벽, 복잡한 노사관계와 근로조건 때문에 정착에 어려움을 겪다가 중도 귀국하거나 고용주와 분쟁을 겪은 일이 있다. ▶호주가 최근 이민정책을 대폭 강화했는데. -지난 9월1일부터 기술이민 비자를 신청하는 유학생의 경우 과거보다 높은 수준의 영어 실력과 업무 경험을 증명해야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 호주 언론들은 기술이민자 및 유학생 졸업자의 영어 실력 부족으로 직장 내 원활한 의사소통이 방해받고 사소한 오해나 이해부족으로 노동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고 자주 지적해왔다. 영어의 경우 생활에 기본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므로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실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호주 주재 다른 국가 대사관과의 협력관계는. -각국 국경일 행사, 리셉션, 호주 정부기관 초청 행사 등을 통해 120개국 공관원과 접촉하며 주요 관심현안이나 주재국의 주요 정세와 정책동향에 관해 정보를 교환하고 업무적으로 긴밀히 협력해 나간다.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북한대사관 사람들과도 만나 한반도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호주 교민사회를 진단하면. -교민사회가 40년이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공동체 중 규모 6위를 차지할 정도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특히 교민 1.5세대 및 2세대를 중심으로 회계사, 변호사, 의사, 교수 등 전문직과 공직 진출자가 증가하고 있다. 호주 주류사회에 성큼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교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의 구체적인 사례는. -순회영사 서비스, 영사협력원제도, 온라인 영사서비스(e-consul), 사건·사고 출장지원 등이 있다. 순회영사 서비스는 공관에서 먼 멜버른, 애들레이드, 퍼스 등지의 교민들을 위해 영사가 출장을 가서 여권, 호적, 병무, 공증, 영사확인 등의 민원을 현장 처리해주고 교민 간담회를 통해 교민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영사협력원은 사건·사고가 많은 지역의 교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로, 현재 멜버른과 퍼스에 1명씩 두고 있다. 올해 4건의 교민 사망사고 중 3건을 영사가 출장 지원했다. ▶호주대사관의 주요 업무와 역점 사업은. -북핵 등 한국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호주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데 중점을 둔다. 또한 안정적인 자원 공급국으로서 호주와 협력 확대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이와 관련 올 봄 한국석유공사와 호주 우드사이드사(社)간 동해 조광계약 체결, 한국가스공사와 호주 ALNG사간 LNG 연장공급계약을 체결했다. 호주 우드사이드사의 LNG 수송선 2척(약 5억달러 규모) 수주업체로 우리 기업이 선정됐다. ▶양국의 무역규모는. -지난해 교역액은 약 160억달러로 전년보다 17% 늘었다. 한국은 자동차, 휴대전화,TV, 석유화학제품 등 공산품을 중심으로 47억달러를 수출했고 LNG, 원유, 철광석, 석탄, 쇠고기 등 113억달러를 수입했다. 올 상반기 기준으로 한국 기업의 대 호주 투자는 총 408건 31억달러에 달하며, 호주기업의 경우 메콰리뱅크 등 총 285건에 16억달러를 한국에 투자했다. siinjc@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4) 부여 성흥산 대조사 석불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4) 부여 성흥산 대조사 석불입상

    백마강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부여의 부소산을 돌아 남쪽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다시 한번 서쪽으로 크게 S자를 그리며 휘감아도는데, 그 반원의 중심에 성흥산이 있습니다. 해발 268m인 성흥산은 같은 부여군이라도 400∼500m급 봉우리가 늘어선 서북부의 차령산맥 끝자락에 갖다 놓으면 그저 언덕에 불과할 높이입니다. 하지만 야트막한 구릉이 이어진 서남부에서는 단연 우뚝하지요. 성흥산에 오르면 평야지대 너머로 논산 반야산이 어렴풋하고, 날씨가 좋으면 익산 미륵산도 보인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부여읍내에서부터 굽이굽이 흘러 강경을 거쳐 군산 앞바다로 빠져나가는 백마강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지요. 당연히 일찍부터 국방의 요지로 떠올랐습니다.‘삼국사기’는 공주에 도읍하고 있던 백제가 동성왕 23년(501)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바로 성흥산성이지요. 이 성이 있는 부여군 임천면이 당시는 가림군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림성의 구축은 사비 천도(538)를 앞두고 새로운 도읍을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가림성은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백제부흥군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신라가 문무왕 12년(672)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삼국사기’에서 사라집니다. 성흥산성이 아무리 백제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고, 호쾌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대조사(大鳥寺)가 없었다면 방문객들을 조금은 심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조사는 성흥산성의 남쪽 기슭에 있지요.‘대조사미륵실기’가 전하는 창건 연대는 백제 성왕 5년(527)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흔적은 고려시대 것입니다. 높이가 10m에 이르는 보물 제217호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사각형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관촉사 석조보살입상(968년)을 본떠 고려 초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조사 석불 역시 은진미륵처럼 ‘미륵’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은진미륵이 관음보살인 것처럼 연꽃을 들고 있는 대조사 석불도 관음보살입니다. 백제의 관음도량인 태안 백화산에 올랐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대조사의 입지도 불경이 묘사하는 관음보살 상주처의 풍경과 일맥상통하지요. 성흥산에는 ‘태사유공지묘(太師庾公之廟)’라는 현판이 걸린 유금필(?∼941) 장군의 사당도 있습니다.‘태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수받은 고려시대 으뜸 벼슬의 이름이지요.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인 유금필의 사당이 이곳에 있는 것은 뜻밖입니다. 하지만 유금필이 주로 충청도 지역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싸웠다는 점을 떠올리면, 사당의 존재는 후삼국시대에도 성흥산성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후 개성을 도읍으로 통일국가인 고려왕조가 출범하자 군사적 요충으로 성흥산성의 중요성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관음신앙의 성지(聖地)라는 새로운 역할이 맡겨졌습니다. ‘대조사미륵실기’의 창건설화에는 관음보살이 큰 새(大鳥)가 되어 날아가 앉은 곳에 관음상을 새기고 절을 지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대조사는 지금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큰법당입니다. 그럼에도 관음이 미륵으로 믿어진 데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관음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주는 미륵이 백제시대든,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대조사를 찾는 농투성이들에게는 결코 다르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었겠지요. dcsuh@seoul.co.kr
  • 조선시대 시전 행랑 유구 발견

    탑골공원과 이웃한 서울 종로2가 40 영동빌딩 신축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상점거리 시전(市廛)의 점포인 행랑(行廊) 유구가 발견됐다. 조선왕조는 태종 10∼14년(1410∼1014년)에 4차례에 걸쳐 종로를 비롯한 서울 중심가에 3000여칸에 이르는 상점거리를 조성했다. 한울문화재연구원은 이 현장을 지난 10월1일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 타버린 마루의 형태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시전 행랑 유구를 찾았다고 12일 밝혔다. 한울연구원은 13일 오전 11시 현장에서 유적 발굴 조사 내용 및 성과에 대한 현장 지도위원회와 설명회를 갖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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