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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정조 독살설/이용원 수석논설위원

    1993년 나온 ‘영원한 제국’은 요즘 유행하는 팩션소설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세상을 뜨기 직전 24시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절대왕권을 추구하는 정조와 이에 맞서 ‘사대부의 나라’를 지키려는 노론 벽파 사이의 음모·갈등을 스릴 넘치게 묘사해 큰 인기를 모았다. 작가 이인화씨(현 이화여대 교수)는 책 후기에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고향인 영남 일대에서 어려서부터 들어온 정조 독살설 때문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이 책은 허구”라고 강조하고 “허구화를 위해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등 여러 추리소설의 모티프를 응용했다.”고 공개했다. 허구에 불과한 정조 암살설에 치밀한 논증을 가해 역사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한 이는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이다. 이씨는 2005년 내놓은 책 ‘조선 왕 독살사건’에서 조선왕조실록 등 사서를 동원해 벽파가 정조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열거했다. 특히 정조가 ‘급서(急逝)’할 즈음 약을 처방한 심인이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고, 임종할 때 유일하게 곁을 지킨 이가 최대의 정적인 정순왕후라는 데 방점을 찍었다. 어쨌거나 이인화·이덕일 두 사람이 지목한 독살의 주범은 심환지였다. 그러나 정조 연구의 대가인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을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그동안 정조 독살설을 전면 부정해 왔다. 학계가 추정하는 정조의 사인은 일종의 과로사이며 그 직접적인 원인은 종기 때문이었다는 것. 정 위원장은 서울대 규장각 관장 시절에 한 인터뷰에서 정조는 “암살을 피하고자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못하며 공부했고” 그러다 보니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드는 버릇이 생겨” 이에 따라 생긴 지병인 “피부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정조의 어찰 299통을 분석한 결과 심환지는 정조의 대척점에 섰다기보다 심복인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붕어(崩御) 열사흘 전 편지에서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호소했다. 또 정조는 의서 ‘수민묘전(壽民妙詮)’을 편찬할 만큼 의학에 조예가 깊어 제 병에 대한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독살당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들이다. 정조 독살설은 정사(正史)의 영역에는 아직 비껴나 있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정조 비밀편지 공개’ 여진

    ‘정조 비밀편지 공개’ 여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의 발굴로 정조가 독살됐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는 게 자료 분석에 참여한 학자들의 대체적 견해다. 하지만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측은 여전히 비밀편지가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는 증거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독살”→사망한 날 심환지 영의정에 정조 독살설은 조선시대 남인들이 제기한 적이 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지금처럼 광범위하게 유포된 건 소설과 대중역사서에 힘입은 것이다. 독살설을 제기하는 측은 ‘정조실록’에 정조의 발병 기록이 사망 24일 전인 6월14일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을 들어 정조와 적대적이었다는 정순왕후와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에서 기득권 유지를 위해 독살을 감행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조가 사망 1년 전인 179 9년 7월7일 외사촌 홍취영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벌써 건강에 커다란 이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정조는 사망 13일 전에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어쩔 수 없이 체모를 세우고자 탕제를 내어 오라는 탑교(榻敎·명령)를 내렸다.”고 썼다. 정조가 시종일관 자신의 병세를 극도의 비밀에 부쳤음을 알 수 있다. ●“낭설”→집권 시파서도 제기 안해 저서 ‘정조대왕의 꿈’에서 정조 독살설의 허구성을 분석했던 유봉학 한신대 사학과 교수는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은 집권 시파에서도 제기하지 않은 낭설에 불과하다.”면서 “소설적 상상력의 소산물이 사실(史實)의 영역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반면 ‘조선왕 독살사건’의 지은이인 이덕일씨는 “이번 편지에서 병에 걸린 정조가 사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정조가 사망한 바로 그날 정순왕후 김씨가 인사를 바로 단행해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점을 들어 여전히 독살설에 무게를 실었다. 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정도 독살설에 불을 붙였던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해석해도 편지는 (독살에) 심환지가 연루되지는 않았을 가능성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당시 간찰은 지금의 전화에 가까운 일상적인 통신수단으로 구어적인 표현이 있다고 해서 정조와 심환지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도 했다. 한편 비밀편지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정조 독살설로 쏠리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9일 기자회견에서 독살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정조 어찰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당대 정국 동향을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면서 “독살설이 어찰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정윤수의 종횡무진] 고지대 지옥 경기와 ‘캡틴’ 박지성의 역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 저녁 8시30분. 한국 대표팀은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4차전을 치른다. 그 상대는 이란. 격전지는 그들의 홈구장 아자디 스타디움이다. 해발 1273m로 우리의 치악산 정상 비로봉과 비슷한 높이다. 이란은 눈까지 내리는 그 높은 경기장에서 4년 넘게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2004년 10월 열린 독일과의 평가전에서 0-2로 패한 이후 이란은 아시아, 북중미, 유럽, 아프리카 등 전 대륙의 팀들과 맞붙어 A매치 25승5무를 기록해 ‘홈 30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고 있다. 다른 경기장까지 포함해도 이란은 2000년 이후 홈경기 A매치 성적 45승8무4패다. 특히 11일은 1979년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원리주의파가 50여년 동안 이란을 지배해온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기념일 다음날이다. 그들은 승리의 예감과 격정에 들떠 있고 우리 선수들은 침착하게 마무리 훈련에 임했다. 지옥의 경기가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캡틴’ 박지성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경기가 되었다. 우선 그는 그 자신의 신체적 역량으로 고지대의 경기장을 지배해야 한다. 평정한 상태에서 가진 실험에서 박지성의 분당 심박수는 40회 정도로 나타났다. 마라토너 이봉주와 비슷하다. 같은 조건에서 일반인은 60~80회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산소 소비로 뛰어다닐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난 선수가 박지성이다. 폐활량도 일반인(3000~4000㏄)에 비해 월등한 5000㏄ 이상이다. 물론 축구는 직진의 달리기나 수영 같은 개인 종목이 아니다. 심박수나 폐활량으로 해결되지 않는 종목이다. 박지성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의 신체적 조건뿐만 아니라 경기 전체를 지배해 나가는 균형 감각이다. 경기가 격렬해질수록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그것을 잉글랜드의 정글 같은 경기들에서 3년 반 동안이나 단련해 왔다. 현재 허정무호의 평균 연령은 26.13세로 고참이자 주장인 28세의 박지성이 해야 할 일이 결코 적지 않다. 게다가 이근호, 기성용, 이청용, 박주영 같은 공격 라인은 20대 초중반으로 체력에 있어서는 큰 무리가 없지만, 이란 특유의 경기장 조건에서는 자칫 균형을 잃을 수가 있다.한국 대표팀은 박지성이 출전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크게 엇갈려 왔다.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열린 A매치에서 박지성이 출전한 11경기에서는 8승2무1패로 승률 73%를 거뒀지만 그가 뛰지 않은 경기에서는 7승12무5패로 승률이 겨우 29%에 그쳤다. 박지성은 이번 대표팀의 선수 24명 중 유일하게 이란에서, 그것도 지옥의 경기장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골을 넣은 선수다. 2000년 6월 그는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로 참가해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뽑은 적이 있다.오늘 밤 최종예선 4차전. 결코 쉽지 않은 원정 경기지만, 바로 오늘을 위해 축구의 신은 한국 팀에 박지성을 내려보낸 것이다.스포츠 평론가 prague@naver.com
  • 힌두 인도 vs 이슬람권 파키스탄 분쟁의 역사 파헤치다

    어찌 보면 중동의 가자지구나 인도의 카슈미르나 전 세계 분쟁지역들이 50년 넘게 유혈사태를 빚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는 원인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통치 잔재나 흔적 탓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중동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에서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생국가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민족주의란 배경은 또 다른 분쟁의 원인이 됐다. 신생 국가 내의 소수민족과 다수민족 사이에 권력을 둘러싸고 민족문제가 불거지거나 인근 국가들과 종교, 인종적인 갈등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분리해서 통치하라.’는 원칙을 준용해 가면 한 나라를 분열시켰기 때문이다. 2009년 세계 주요 분쟁지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도 같은 양상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조길태 지음, 민음사 펴냄)은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한 양국 간의 분쟁을 인도에서의 파키스탄 분리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아주대 사학전공 교수인 저자는 두 나라의 대립과 분쟁이 단지 종파적 민족주의의 산물인지 또는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인지 자문하고 있다. ●인도에서 파키스탄 분리 중심으로 분쟁사 분석 힌두 국가였던 인도에 이질적인 무슬림이 섞인 것은 12세기 말 무슬림 왕조가 수립되면서다. 인적 구성상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200여년 동안 힌두의 관직진출은 무슬림보다 많았다. 이에 19세기 후반 무슬림의 지도자인 사예드 아메드 칸은 무슬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영국 정부로부터 무슬림에게 유리한 분리 선거제의 특혜를 얻어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인도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두 개의 민족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다른 한편에서 무슬림의 분열 운동을 촉진시켰다. 영국으로서는 ‘분리통치’를 통해 식민지 인도 내부에서 정치적 급진주의를 억제하고, 종파적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통치의 안정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분리통치의 결과 2차 대전이 종식되고 1947년 8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자 인도는 힌두의 인도와 무슬림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된다. 분리된 인도의 힘은 불가피하게 국제사회에서 약해진다. 여기에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된 이후에도 전쟁의 형태로 갈등이 지속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 후 3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중 2번이 인도령인 카슈미르가 발단이다. 카슈미르는 이슬람교가 전체인구의 77%, 힌두교·불교·시크교가 23%다. 종교적인 측면이나 전체 국민의 뜻을 따지자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파키스탄으로 편입됐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카슈미르 지방을 통치하던 힌두계 토후 왕족들은 인도 편입을 선언했다. 만약 영국이 식민통치 과정에서 두 개의 종교적 세력(민족)을 용인하지 않거나, 철수하는 영국이 카슈미르의 주민 80%인 무슬림의 뜻을 고려하는 장치를 마련했더라면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해 10월 카슈미르 이슬람 세력이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수도를 점령하려고 하자 인도가 군대를 파견해 1차 인·파 전쟁이 시작됐다. 그 다음해 8월 유엔 개입으로 정전합의가 이뤄졌고,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각각 63%, 37%씩 영토가 쪼개졌다. 2차 인·파 전쟁은 1964년 파키스탄이 인도령 카슈미르 지역을 공격하면서 발발했다. 1980년대 들어서서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 내 이슬람 세력이 분리독립 운동을 시작하면서 양측 간 충돌은 더욱 빈번해졌다. 이때 결성된 ‘잠무 카슈미르 해방전선(JKLF)’은 파키스탄의 지원 아래 테러전을 시작했다. 인도군도 이들과 이슬람 주민을 상대로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했다. 2007년 12월 인도 국회의사당 폭탄테러도 JKLF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파키스탄 문명의 충돌 세계에 재난 될 것” 핵무기 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갈등은 두 국가만의 비극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가공할 만한 재난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우려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중동처럼, 힌두권과 이슬람권의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국제주의와 세계 시민 사상을 강조하는 국제적 개방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의해 분열되고 억악받던 국가가 통일운동이나 해방운동을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2만 80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대한민국 극&극] 최고령 송파실버악단 vs 최연소 화동정재예술단

    [대한민국 극&극] 최고령 송파실버악단 vs 최연소 화동정재예술단

    한쪽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 다른 한쪽은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귀여운 여자아이들. 한쪽은 서양악기를 연주하고, 다른 한쪽은 궁중무용을 선사한다. 한쪽은 평균 연령대가 70대, 다른 한쪽은 10세. 한쪽은 무대 경력이 무려 50여년, 다른 한쪽은 길어야 1년 조금 넘는 기간. 한쪽의 최연소 단원과 다른 한쪽의 최고령(?) 단원의 나이 사이에는 강산이 다섯번이 바뀔 세월이 존재한다. 전자는 최고령 공연단이라고 내세워도 웬만해선 딴죽걸기 힘들어보이는 ‘송파실버악단’, 후자는 국내 유일의 어린이 정재 무용단 ‘화동정재예술단’이다. 화동정재예술단의 아이들이 송파실버악단 어르신의 나이가 될 때까지 수십년 공연을 한다 해도 만날 일이 없어보일 정도로 두 공연단체는 양극의 끝에 서 있다. 정반대의 양극단으로 뻗어가기 위해서는 한 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법. 이 두 공연단의 시작점은 ‘무대’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열살짜리 무용수도, 이 무용수만 한 손자가 있을 법한 트럼본 연주자도 무대에서 느끼는 감정은 같다. 설렘, 떨림, 흥분, 그리고 감동. ■ 송파실버악단 악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빨간색 재킷보다 더욱 강렬한 정열을 불사르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동년배의 어르신들을 위한 흥겨운 트로트 메들리부터 손자뻘인 어린이집 아이들 앞에서 들려줄 동요까지 거침없는 레퍼토리로 못 오를 무대가 없다. 지난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전국실버밴드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전국 최강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들이 ‘송파실버악단’이다. 1994년에 서울 송파구청이 지원해 만들어진 송파실버악단은 트럼본 연주자 엄남익(81) 단장을 포함해 13명이 활동한다. 색소폰 4명, 트럼펫 2명, 트럼본 2명, 기타·베이스·드럼·건반이 각 1명이다. 나머지 1명은 사회를 맡고 있다. 악단에서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단원은 역시 엄 단장. 익산공고 밴드, 해양경비대 군악대, 동양방송(TBC), 서울 인사동 시절의 문화방송, 6·25참전예술단 소속 악단 등 60여년의 악단 역사가 줄줄이 펼쳐진다. 이중 참전예술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8~9명이 별도의 악단을 구성하면서 송파실버악단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창단 15년째를 맞은 송파실버악단의 무대는 경계가 없다. 공식적으로 실버악단의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연주단체라고 확신할 만큼 긴 역사를 가진 데다 실력이 알려지면서 공연 섭외가 끊이질 않는다. 구청의 문화공연뿐만 아니라 다른 자치단체의 행사와 해외 공연까지 해내고 있다. 한해 평균 공연 횟수는 60회 정도. 봄·가을에는 매주 3~4회씩 공연이 이어진다. 1930~40년대 생이 악기를 다루는 것은 소위 ‘있는 집 자제’여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린 대부분 학창시절 특별활동으로 악기를 처음 만졌죠. 천안공고 시절에 처음 클라리넷을 배웠는데 얼마나 재미있던지 학교에서 하는 걸로는 모자라 집안일 돕는 척하면서 뒷산에 올라가 연습했어요. 집에서는 농사일 안 돕고 딴따라짓이나 한다고 얼마나 혼내시던지.” 색소폰 연주자인 윤영득(71) 총무는 어려웠던 당시를 회상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는다. “예전엔 요즘 같은 음악 교육 과정을 못 밟았어도, 학교 밴드 활동도 얼마나 열심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오히려 학교에서 하는 예술교육은 더 후퇴한 것 같아.”(엄 단장) 악보를 보기 전에 귀로 먼저 익히고 연주를 했기 때문에 듣기만 하면 착착 음악이 나온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어떤 공간에서든 분위기를 띄울 수도, 잔잔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이다. 공연이 끝난 뒤에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관객이 우리 또래면 ‘눈물젖은 두만강’ ‘감격시대’ ‘단장의 미아리고개’, 중년층이면 ‘만남’ ‘사랑이여’, 젊은층은 ‘쿵따리샤바라’ ‘어머나’…. 요즘은 이것도 좀 오래된 노래 축에 들더만. 다른 음악도 추가해야겠어.” 엄 단장의 입에서 레퍼토리가 술술 나온다. 평균 연령 73세의 실버악단이지만 흥(興)과 열정(熱情)은 여느 젊은 악단 못지않다. 나이가 들수록 폐활량이 모자라 연주하기 어려워지는 금관악기 연주자들이 대부분이지만 단원들의 악기에서는 힘찬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침마다 축구를 하는 게 폐활량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윤 총무) “난 배드민턴을 치는데, 같이 치는 사람들이 ‘80대 맞냐.’고 물어. 그럼 내가 ‘아니, 60대 청년한테 80대라니.’라고 되레 화를 낸다고. 껄껄.”(엄 단장) 엄 단장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평생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연주활동을 60년이 넘도록 하고 있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들을 모아놓은 악단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끊임없이 악단을 찾아주는 곳이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싶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를 보면 그 생각은 달라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의 연주실력은 상위 클래스에 속하지만, 사실 우리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찾지 못한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서울시 자치구에도 실버악단이 생기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바람은 모든 자치단체에 실버악단이 생기는 것이죠. 우리 ‘실버’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보람이거든요.” 보람은 언제나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내면서도 일주일에 2~3차례 모여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악단에 끊임없이 열정을 샘솟게 하는 바탕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화동정재예술단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 서울무용학원 연습실. 화려한 궁중무용 의상에, 이마에는 꽃과 구슬로 장식한 머리띠 ‘대요’를 두른 여자아이 10명이 놋쇠로 만든 타악기인 향발을 손가락에 끼운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춤을 춘다. 악학궤범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 능숙하게 ‘향발무’를 추는 아이들의 모습은 놋쇠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어우러져 귀여우면서도 때론 우아하다. 조선시대 궁중무용 ‘정재’의 맥을 잇고 있는 ‘화동정재예술단’이다. 화동정재예술단은 궁중무용을 전승하고 있는 단체 ‘정재(呈才)연구회’가 대궐 잔치에서 춤사위를 펼치던 어린 여자무용수인 동기(童妓)를 복원해 만든 무용단이다. 올해 초등학교 2~6학년이 되는 여자아이로 구성된 무용단은 창단된 지 꼬박 1년이 됐다. “2007년 10월 궁중무용 공연에 당시 가르치던 아이들을 무대에 세워봤는데 너무 잘 하는 데다 관객 호응도 상당한 거예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모아 예술단을 만들었죠.” 정재연구회 회장이자 무용단을 이끄는 이미주 단장의 설명이다. 조선왕조에서는 10대 초반의 동기와 10대 중·후반의 여령(女伶)이 선보이는 정재를 통해 궁중의 춤을 전승해 왔으나 일제시대 이후 동기여령 정재는 사라지고 성인 중심의 정재만 전승돼 왔다. 이 때문에 동기가 추어야할 대목에서도 30~40대 무용수가 어린아이 분장으로 역할을 대신하고, 마지막 무동인 김천흥 옹이 2년 전 별세하면서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이 단장은 “많은 부모들이 발레는 가르치면서 전통춤은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이러다간 우리 고유의 문화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 싶어 예술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학원에 못 보낸다고 하면 학원비를 받지 않으니 그냥 보내라고 하며 아이들에게 정재를 가르치려고 했죠. 지금은 학부모들이 공연을 보면서 역사공부를 할 수도 있다면서 너무 좋아해 뿌듯합니다.” 아이들은 어떨까. 전통춤은 만드는 모든 동작들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재미가 있고, 새로운 작품을 배우기에 앞서 옛이야기와 전통문화에 대한 지식도 넓힐 수 있어 신난다. 한번은 10분도 안 되는 한 작품을 익히기 위해 5시간을 내리 연습에 매달린 적도 있다. 잠시도 쉬지 않았다. 공연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힘이 솟아 피곤한 줄 몰랐단다. 물론 잊혀진 동기 정재를 잇는다는 자부심도 크다. 그래서 연습을 하는 날이면 연습시간보다 일찍 학원에 도착해 마음을 가다듬는다. 예술단에서 가장 ‘오래된’ 단원인 배주희(11·광주 광명초등)양의 집은 심지어 경기도 광주이다. “늘 엄마랑 같이 다니는데 집이 좀 멀어도 너무 재미있어서 매일 학원에 가자고 졸라요.”라며 똘똘하게 대답한다. 김진하(10·남양주 장현초)양과 가장 어린 단원 진서(8)양은 자매이다. 진하양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예술단에 들어오지 못한 막내동생이 대기 중”이라면서 수줍게 말했다. 아이들의 음악성도 남다르다는 게 이 단장의 설명이다. 특히 주희양과 함께 공연을 시작한 윤지현(11·가동초)양은 포구락을 출 때 선두에 서며 아이들을 이끌고, 리허설이 끝난 뒤에 “악단이 조금 빠르게 연주하는 것 같다.”고 지적해 박자를 맞추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공연단체가 이름을 알리기엔 썩 길지 않은 1년이라는 기간동안 아이들은 향발무, 포구락, 무산향, 춘앵전 등을 공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많은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7월에는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초청으로 스페인 사라고사에서 동기 춘앵전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국립국악원 기획공연과 숙명여대 가야금연주단 공연에서 협연을 하는 등 공연 일정이 빼곡하다. 오는 3월에도 국민대 명원민속관에서 4차례의 상설공연이 잡혀 있다. “피아노 치는 것보다 무용을 하는 게 훨씬 좋아요. 혼자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왠지 갇혀 있는 느낌이거든요. 여기 오면 또래 친구들도 있고 멋지게 춤도 출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조성윤(11·신가초)양이 또박또박 말한다. 무대에 오르면 어떤 기분일까. “오르기 전에는 떨려요.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요. 근데 공연이 끝나고 박수소리를 들으면 너무 막 좋아지고요….” 한결같은 반응이다. 정재연구회는 올해 동기정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올해 말에는 남자아이들을 모아 무동정재예술단을 만들 예정이다. 이 아이들에게서 한국 전통문화의 미래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 가기] 불황의 두 얼굴 독감 백신은 있는데 감기 백신은 왜 없을까 스★타★탄★생-이민호 등 대형 신인 대거 등장 아름다운 ‘잡 셰어링’ 각 진 자동차가 사라진다
  • [데스크 시각] 난청의 시대/심재억 미래기획부 차장

    [데스크 시각] 난청의 시대/심재억 미래기획부 차장

    설 명절 황망하게들 보내셨지요? 연휴가 짧았지만 하루, 이틀 연휴 짧은 게 대수겠습니까. 다들 마음이 눅눅하고 무거우니 설도 예전 같지 않았을 터이고, 수상한 시절을 말하자니 눈알 부라리는 세태와의 거친 입싸움이 부담스러워 말문을 닫기도 했을 것입니다. 태평성대라면 가솔들 결혼이나 취직 못한 것이 차례상 요깃거리였겠지만 모두들 내일 일을 모르니 언죽번죽 말 꺼내기 뭣해 그냥 입맛만 다시다 만 말들도 많았겠지요. 그러자니 주전부릴 해봐도 주린 듯 헛헛하고, 뭔가 부족한 공복감이 가시지 않습니다. 설 분위기가 예전과 다른 것도 따지고 보면 갈라지고 뒤틀린 세상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한사코 국민들 말문에 쇳대를 채우려 들고, 그러지 말라는 외침엔 오불관언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국민들 가슴이라도 열어봐야 할 사람이 고쟁이 속 똥 뭉개듯 눙치고 앉아 딴전만 피우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난청의 세상’이랄밖에요. 말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못 듣는 것보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는 게 문제이고, 이보다 난감한 것은 알아듣고도 못 들은 척 잡아떼는 것입니다. ‘느물거리며 고집 안 꺾는 방안퉁수’ 하나가 여럿 골병 들이기는 일도 아니듯 말이지요. 의학적으로 난청은 대부분 감각신경의 이상이 원인입니다. 풀어 말하면 내이(內耳)의 문제이거나 내이와 뇌 사이의 회로가 손상된 결과이지요. 지금 권력의 동향을 보면 국민들이 중구난방 떠들거나 혀짧은 소릴 해대서가 아니라 확실히 듣는 쪽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도 남습니다. ‘30대 백수’라는 인터넷 논객에게 우롱당하는 수준의 경제정책에 무조건 전임자의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투의 부동산정책과 대북문제, 대운하 시비에 지역·파벌인사, 여기에다 “같이 좀 살자.”는 철거민들을 떼죽음으로 내몰고도 검찰이 내놓은 웃기는 수사결과를 보면 병증이 참 위중해 보입니다.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참담한 인간 유린 등 어느 것 하나 귀를 열고 국민의 말을 경청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니까요. 이런 세상을 지켜보자니 가슴에 서늘한 고드름이 돋습니다. 그렇다고 권력이 국민의 말을 통 못 알아들은 건 아닙니다.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많은 후회를 했다.” “지금 주식 사면 부자 된다.” “광우병 걱정되면 안 먹으면 된다.” “국민들이 반대하면 대운하 추진하지 않겠다.” “전임 대통령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 등 사안마다 꼬박꼬박 촌철살민(寸鐵殺民)의 멘트는 빠뜨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나라와 국민의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논죄든 상찬이든 이명박 대통령의 1년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동서·남북도 모자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청소년과 기성세대를 깡그리 싸움판으로 내몰아 감당 못할 분열을 조장한 과오, 단지 전임자와 다르게 보이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고집한 과실, 철거민들을 주저없이 불지옥으로 밀어넣는 그런 죄악 위에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잘만 사는 나라’를 세워본들 제 정신 가진 누가 그걸 성취라고 평가하겠습니까. 이 엄동에 고립된 농성자들을 향해 얼어죽으라는 듯 물대포를 쏘아대는 것도 모자라 희망 대신 죽음을 안기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자해다.” “어쩔 수 없었다.”고 우기는, 저 ‘법치’를 빙자한 권력의 만행. 금수에게도 하지 못할 짓을 공공연히 자행하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법의 정신을 잊은 충견들의 포효와 권력의 가치를 망각한 제왕식 군림을 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국민들 지지리도 복이 없다는 거지요. 꼴랑 이 정도 먹고 사는 일도 복에 겨운지 뽑아세우는 사람마다 앞앞이 ‘허당’이고, 더구나 이 어이없는 난청이 최첨단 보청기로도 해결될 일이 아닌 듯해 참 난감한 정초(正初)입니다. 심재억 미래기획부 차장 jeshim@seoul.co.kr
  • 달비와 꽃비녀, 그리고 옥가락지

    달비와 꽃비녀, 그리고 옥가락지

    이제는 곱고 화려한 전통 소품, 장신구를 찾아 번거롭게 헤매지 않아도 된다. 사극 열풍으로 매무새를 제대로 갖추려는 욕구에 부응해 인터넷 쇼핑몰도 외양은 진품 뺨치면서 저렴한 가격(3500원~2만원대)에 맵시를 뽐낼 수 있는 제품을 준비해 놓고 있다.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옥션(www.auction.co.kr)의 여성의류 담당 송하영 과장은 “불황으로 설빔을 마련하지 않는 대신 기존 한복에 화사하게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가락지나 비녀, 아얌 등 소품과 멋과 보온을 동시에 주는 배자 등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가장 쉽게 선택하는 것이 머리 장식. 머리 모양에 따라 한복의 맵시가 좌우된다. 머리가 길다면 촘촘히 땋아 배시댕기, 자수댕기, 목단머리띠 등을 사용하면 좋다. 머리가 짧은 여성들에겐 굴레가 인기다. 한복과 같은 색상으로 해야 단정해 보인다. 술이나 자수 등 화려한 문양이 들어가면 앳된 인상을 줄 수 있다. 한복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은 올림머리다. 머리숱이 적거나 길이가 짧은 여성들의 경우 올림머리 가발(달비)을 사용하면 풍성하게 연출할 수 있다. 머리를 묶어 동그란 모양으로 말고 가발 속의 구멍으로 깊숙이 넣어준 다음 큼직한 U자형 핀을 사용하여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면 된다. 왕조시대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첩지도 빼놓을 수 없다. 전통미를 강조하는 장신구로 그만이다. 가르마를 단정히 타서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후 앞 가르마 정 중앙에 꽂아주면 된다. 얼굴빛을 한층 살리는 역할을 하는데 너무 큰 사이즈를 고르면 부자연스러울 수 있으며 얼굴이 긴 사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오색 비단 주머니나 노리개도 차림새를 완성시키는 소품이다. 자수무늬에 화려한 매듭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노리개가 일반적. 나이에 상관없이 두루 잘 어울린다. . 서양식 주얼리보다 전통 가락지를 착용해야 제멋이 난다. 금이나 칠보 소재가 따뜻한 분위기를 낸다. 치맛자락 아래의 하이힐은 꼴불견이다. 치마색과 어울리는 꽃신으로 갈무리해야 제대로다. 한복을 입고도 키 커 보이고 싶은 여성들을 위해 7㎝ 굽의 키높이 꽃신도 호응을 얻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조선 왕 독살의 다른 이름 ‘당파주의’

    조선 왕 독살의 다른 이름 ‘당파주의’

    ‘꿩고기는 종기와 상극이었다. 꿩이나 닭, 오리 등은 껍질에 기름이 많아 종기 환자에게는 절대 처방하면 안 되는 음식이었다. 문종이 종기로 누웠을 때 전순의가 꿩고기를 올렸다. 꿩고기는 겨울철 대지가 얼었을 때 올려야 하는데, 전순의가 이를 무시하고 문종에게 계속 섭취시킨 것은 고의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파주의 물든 신하들 왕 독살 국사에서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 4개월만에, 장년인 39살에 종기로 죽었다고 배웠다. 문종의 급서는 안타깝게 열 두 살에 즉위한 단종에게는 갑작스러운 비극이었다. 그런데 문종의 급서가 자연사, 즉 하늘의 뜻이 아니었다면? 조선 전기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없어 숙부 수양대군이 불가피하게 왕위를 찬탈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을 두고 왕실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이것은 조선 초기 동북아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의미다. 소통과 통합 대신 독살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이 잉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독살의 비극은 단종뿐만 아니라 세조의 아들 예종으로도 이어졌다. 예종이 공신의 적폐를 내세워 숙청에 나서자 신하들은 다시 독살을 감행한 것이다. 결국 세조는 문종만 독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도 죽이고, 조선 후기의 인조반정 이후 숙종, 경종, 정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의 독살로 연결지어지는 악의 사슬에 뿌리를 내린 셈이다. 또한 세조가 등극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공신집단은 초법적인 특권층으로 훈구파의 뿌리가 된다. 조정의 질서가 무너지고, 특권층을 형성하는 공신은 정공신 3000명과 그 가족을 포함한 원정공신까지 1만명으로 늘려놓는다. 조선 전기 인구가 300만~400만명에 불과한데 군포 등 세금을 안 내는 특권층이 1만명이나 되는 것이다. 이들은 지역단위로 세금을 대납하고 나중에 세금을 징수하는 특권까지 주어져 백성을 체계적으로 수탈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인 이덕일씨는 앞서 2005년에는 ‘왕의 독살’이란 프리즘으로 조선 후기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중앙공무원교육원에 강의하러 갔다가 만난 안덕균 전 경희대 한의대 교수에게 문종도 종기 탓이 아니라 독살당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다. 자료를 다시 살펴본 결과 이씨는 왕을 독살하는 것이 왕권이 약화됐던 조선 후기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 아니 조선 왕조 500년을 관통해온 ‘코드’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조선의 ‘사악한’ 신하들이 왕들을 제거해나간 것이다.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 펴냄) 1,2권은 이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씨는 “조선 후기의 왕은 집권 노론과 갈등관계가 있을 때 독살당할 위기에 처했다.”면서 “왕이 어느날 느닷없이 죽어버리면 갈등이 종료되면서 노론의 집권이 강화되는 식으로 조선의 정치체계가 이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통합의 정치 못하면 독살은 현재진행형 이덕일씨가 조선 왕 독살 사건을 통해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는 “세조의 계유정난과 조선 후기 인조반정으로 조선의 정치 체제가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면서 “조선시대 왕의 독살은 집권 다수당인 노론이 정치적 파트너이자 야당인 남인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에서 나왔고, 왕이 혹시 남인의 편을 들 경우에는 독살도 서슴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정치가 상호 공존을 인정한 상황에서 소통과 통합을 향해 가지 않는다면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도 국민 의사를 대변하고 실행하지 않고 기득권 수호와 당파주의에 빠지면 조선시대 왕을 독살하는 상황이 대한민국의 현재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씨는 “유목민족의 호전성과 농경민족의 창의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은 내부 투쟁에 몰두할 경우 상대를 몰살할 때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는 DNA를 가지고 있는 만큼, 소통과 공존을 바탕으로 세계경영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각권 1만 40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국립미술관 서울관 확정 의미

    국립미술관 서울관 확정 의미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군기무사령부 터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가칭)이 들어서는 것은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문화벨트, 문화의 메카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이 1986년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과천에 세워진 이후 서울관은 문화·예술계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에 이번 결정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서울관을 중심으로 반경 1~2km 안팎에 유무형 문화·관광 자원들이 밀집해 있다. 조선 왕조의 중심지인 경복궁, 창덕궁, 종묘, 경희궁터, 사직공원, 덕수궁은 물론, 인사동, 사간동, 정동으로 이어지는 박물관·미술관 등 볼거리도 만만치 않다. 가깝게는 500m도 안 되는 거리에 국립민속박물관과 북촌 한옥마을, 사간동 화랑거리, 인사동이 연결되고, 문화벨트는 동숭동 대학로까지 이어진다. 또한 남쪽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소로 근대미술관인 덕수궁 미술관과 정동 서울시립미술관, 서쪽으로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연결·연계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5일 밝힌 대로 “전통적인 미술뿐만 아니라 설치미술, 멀티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첨단 시각 예술을 아우르는 컨템포러리아트센터로 운영할 계획”이어서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문화공간이라는 측면이 한층 강조될 전망이다. 기무사 건물은 1929년에 지어진 뒤 지난해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본관만 원형을 살리고, 나머지 1970~1980년대 건물은 경우에 따라 철거할 수 있다는 방침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DJ “민주주의 역주행 가장 우려”

    DJ “민주주의 역주행 가장 우려”

    ”누구도 국민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은 결코 성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기자간담회에서 얼마 전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한 배경에 대해 묻자 “지금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우리가 피 흘리고 고문당하며 얻은 민주주의가 최근 역주행을 하는 것이 매우 우려가 된다.”고 현 정부를 겨냥했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의 정부 신년 인사회에서 현 상황을 “민주주의 위기,경제 위기,남북관계 위기”로 규정하면서 “지금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옥가고, 사형언도 받고, 고문당하고 할 때 독재자 편에 붙거나 방관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최근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로 지목된 박 모씨 사건에 대해 “나는 미네르바가 누구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운을 띄운 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예측은 언론·학자들도 다 한다.미네르바의 예측이 구속까지 할 정도인가에 대해 국민들은 의아해하고 있다.”며 과잉 수사문제를 지적했다.  이어 “오늘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적부심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재판부가 현명히 판단해 불구속 처리되는 것이 국민들의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흐르는 세월은 못 피한 듯…  간담회를 마친 후 모인 기자들에게 “사진 많이 찍어줘서 고맙다.”는 농담을 던진 김 전 대통령은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는 그간 10번이나 와서 내 집에 온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김 전 대통령이 외신기자클럽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것은 퇴임 후 처음.  서울외신기자클럽 임연숙 회장의 진행으로 이뤄진 이날 간담회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민주당 박지원 의원,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측근들이 함께 자리했다.  회색 양복을 입고 연설문을 낭독하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은 예전 현역시절과 다를바 없었다.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하는 모습,낭독 도중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을 더듬는 모습에서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한 것을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측은 취재진에게 김 전 대통령이 휠체어를 타고 간담회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촬영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등 각별히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김 국방위원장,이 대통령 비방 중지하라”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정권과 한반도’라는 연설문 낭독을 통해 “조선 왕조 말엽에 친청·친러·친일파 등으로 사분오열돼 역사의 비극을 초래한 쓰라린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며 남북이 한 목소리를 낼 것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6·15,10·4 선언 준수를 강조하는 북한이 그에 역행하는 비난을 일삼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며 “남한 정부,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이는 지난해 11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가 예방한 자리에서 “남북이 상호 비방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정부는 안하고 민간은 해도 된다는 것은 사람을 우롱하는 이야기”라며 현 정부를 공격했던 것과는 다르게 북한측에 ‘화살’을 날린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북한이 보이고 있는 ‘통미봉남’ 움직임에 대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일축한 김 전 대통령은 “오히려 북한은 남북간의 화해·협력 속에서 남한의 지원을 받으며 대미 협상에 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시절 자신을 찾아와 대북화해 정책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 했었다면서 “나는 지금도 이 대통령의 생각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오바마 정권 출범 이후 북미관계가 급진전할 가능성이 있다.우리가 지금 같이 대립의 상태속에 있다면 우리는 소외만 당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대화를 촉구했다.  또 “나는 이 대통령이 6·15,10·4 선언을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일이 없다는 것을 주목한다.”며 ▲대북 삐라(전단지) 살포 중지 ▲6·15,10·4 선언 인정을 제안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취임 후 북핵 문제 해결을 우선시 할 것을 권고한다.”고 전했다.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열망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김 위원장은 통 큰 협상을 선호한다.따라서 주고받는 협상을 하면서 상호 신뢰를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북특사?난 적임자 아냐”  이어진 질의 응답에서 본인 스스로 특사로 나서 대북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김 전 대통령은 “특사는 대통령이 신임하고 정책적으로 일치하는 사람이 가야하는 것”이라며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평양 방문 당시 김 위원장과 나눈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사실 당시 가장 어려운 협상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었다.이후에 중국에서 김 위원장이 ‘남한에 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선 “건강은 언론에 나온 정도만 알고 있다.”고 즉답을 피한 김 전 대통령은 사견임을 전제하면서 “아마 김 위원장의 아들 중 한 명을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군부가 중심이 돼 당·행정부와 함께 집단 지도체제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글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영상 나우뉴스팀 김상인VJ bowwow@seoul.co.kr
  • [문화마당] 한자교육 주장을 반박한다/탁석산 철학자

    [문화마당] 한자교육 주장을 반박한다/탁석산 철학자

    초등학교 정규 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촉구하는 건의서가 제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건의는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역대 국무총리 20명이 서명하였다고 한다. 전직 총리를 앞세운 이 건의서를 보면서 다시 한번 한글 표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건의서에 의하면 한자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전통문화의 계승과 국어의 정상화’에 두고 있다. 과연 타당한 이유인가? 우선 전통문화 계승을 보자. 무엇이 전통문화인가는 차치하고 범위를 고문서에만 국한해 보자. 고문서를 읽어야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데 고문서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자교육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 같다. 즉 ‘한자 없이 우리가 어떻게 전통을 계승하겠느냐.’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하지만 한자를 3000자 알아도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수는 없다. 한자와 한문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문은 한자로 기록되지만 한문은 하나의 체계이다. 낱낱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문장을 독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어문법을 모른다면 영어단어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영어책을 읽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한자를 몇만자 안다고 해도 문법, 의미론, 활용법과 시대 배경 등 인문학적 지식이 없으면 한 문장도 읽어낼 수가 없다. 따라서 전통을 계승하길 원한다면 한자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고전어로서의 한문을 활성화해야 한다. 즉 고서를 번역하는 전문 인력 양성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국어의 정상화라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보자. 도대체 어떤 표기가 국어인가? 한글전용, 한자혼용, 한자병기, 영어혼용, 영어병기? 어느 유형이 국어인가?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한글전용을 인정한다면 한글과 한문 두 가지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한자교육을 주장한다면 한자혼용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건의서를 주도한 교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자교육을 등한시한 결과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반문맹이 돼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한자를 읽지 못하면 반문맹이라는 것은 한자혼용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한자를 읽지 못하면 반문맹인가? 한자를 읽지 못하면 반문맹이라는 사고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기준을 한자에 두기 때문이다. 즉 한글은 불완전한 문자이기 때문에 한자의 도움을 받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태도가 과연 21세기 한국에서 취할 태도인가 의심스럽다. 한국의 글자는 한글이다. 한자가 흔적을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은 한글로 성공적인 언어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지금 이 글에 한자는 전혀 없다. 문제는 내용인 것이다. 한자를 쓸 줄 알면 유식하다는 편견은 언제쯤 없어질까. 한자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국어 어휘의 50% 이상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고서는 어휘력과 학습능력을 높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미국인과 영국인은 모두 프랑스어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영어 어휘의 40% 이상은 프랑스어에서 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를 모르고서는 어휘력과 학습능력을 높일 수 없다는 주장이 영미에서 통하는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든 영어로 표기되고 영어 속에서 쓰임새를 갖는다면 영어가 되는 것이다. 동음이의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도 한자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단어는 문맥 속에서 의미가 결정된다는 언어학의 기초를 무시하는 거친 주장이다. 끝으로 조어력을 보자. ‘엄친아’가 무슨 말인지 알고 계신가? 한자를 몰라도 젊은 세대는 끊임없이 재미있고 시의적절한 신조어를 한글만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언어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탁석산 철학자
  • DJ “민주주의 역주행 가장 우려”

    “누구도 국민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은 결코 성공시키지 못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기자간담회에서 얼마 전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한 배경에 대해 묻자 “지금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우리가 피 흘리고 고문당하며 얻은 민주주의가 최근 역주행을 하는 것이 매우 우려가 된다.”고 현 정부를 겨냥했다.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의 정부 신년 인사회에서 현 상황을 “민주주의 위기,경제 위기,남북관계 위기”로 규정하면서 “지금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옥가고, 사형언도 받고, 고문당하고 할 때 독재자 편에 붙거나 방관했다.”고 비난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최근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로 지목된 박 모씨 사건에 대해 “나는 미네르바가 누구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운을 띄운 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예측은 언론·학자들도 다 한다.미네르바의 예측이 구속까지 할 정도인가에 대해 국민들은 의아해하고 있다.”며 과잉 수사문제를 지적했다. 이어 “오늘 미네르바에 대한 구속적부심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재판부가 현명히 판단해 불구속 처리되는 것이 국민들의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흐르는 세월은 못 피한 듯… 간담회를 마친 후 모인 기자들에게 “사진 많이 찍어줘서 고맙다.”는 농담을 던진 김 전 대통령은 “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는 그간 10번이나 와서 내 집에 온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김 전 대통령이 외신기자클럽 기자간담회에 참석하는 것은 퇴임 후 처음. 서울외신기자클럽 임연숙 회장의 진행으로 이뤄진 이날 간담회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민주당 박지원 의원,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측근들이 함께 자리했다. 회색 양복을 입고 연설문을 낭독하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은 예전 현역시절과 다를바 없었다.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입장하는 모습,낭독 도중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을 더듬는 모습에서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한 것을 느끼게 했다. 김 전 대통령측은 취재진에게 김 전 대통령이 휠체어를 타고 간담회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촬영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등 각별히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김 국방위원장,이 대통령 비방 중지하라” 앞서 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정권과 한반도’라는 연설문 낭독을 통해 “조선 왕조 말엽에 친청·친러·친일파 등으로 사분오열돼 역사의 비극을 초래한 쓰라린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며 남북이 한 목소리를 낼 것을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6·15,10·4 선언 준수를 강조하는 북한이 그에 역행하는 비난을 일삼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며 “남한 정부,특히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이는 지난해 11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가 예방한 자리에서 “남북이 상호 비방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정부는 안하고 민간은 해도 된다는 것은 사람을 우롱하는 이야기”라며 현 정부를 공격했던 것과는 다르게 북한측에 ‘화살’을 날린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북한이 보이고 있는 ‘통미봉남’ 움직임에 대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일축한 김 전 대통령은 “오히려 북한은 남북간의 화해·협력 속에서 남한의 지원을 받으며 대미 협상에 임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시절 자신을 찾아와 대북화해 정책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는 말을 여러번 되풀이 했었다면서 “나는 지금도 이 대통령의 생각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오바마 정권 출범 이후 북미관계가 급진전할 가능성이 있다.우리가 지금 같이 대립의 상태속에 있다면 우리는 소외만 당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대화를 촉구했다. 또 “나는 이 대통령이 6·15,10·4 선언을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일이 없다는 것을 주목한다.”며 ▲대북 삐라(전단지) 살포 중지 ▲6·15,10·4 선언 인정을 제안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취임 후 북핵 문제 해결을 우선시 할 것을 권고한다.”고 전했다.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열망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김 위원장은 통 큰 협상을 선호한다.따라서 주고받는 협상을 하면서 상호 신뢰를 확립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북특사?난 적임자 아냐” 이어진 질의 응답에서 본인 스스로 특사로 나서 대북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김 전 대통령은 “특사는 대통령이 신임하고 정책적으로 일치하는 사람이 가야하는 것”이라며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평양 방문 당시 김 위원장과 나눈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사실 당시 가장 어려운 협상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었다.이후에 중국에서 김 위원장이 ‘남한에 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선 “건강은 언론에 나온 정도만 알고 있다.”고 즉답을 피한 김 전 대통령은 사견임을 전제하면서 “아마 김 위원장의 아들 중 한 명을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군부가 중심이 돼 당·행정부와 함께 집단 지도체제에 나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글 /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울광장] ‘원로회의’를 만드시려거든…/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 ‘원로회의’를 만드시려거든…/노주석 논설위원

    ‘기로소’(耆老所)라는 정부기구가 조선시대에 있었다.쉽게 말하면 왕립 경로당이고 의미를 좀 부여하면 원로원격이다. 광화문 육조거리에 위치했다. 교보빌딩과 KT 사이 어림이다. 두 건물 한쪽에 ‘기로소 터’라는 표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정2품 이상으로서 70세가 넘은 문신에게만 입회가 허용됐다. 서열상 육조의 앞이었다. 기로소가 권세를 누린 이유는 임금도 회원으로 가입했기 때문이다. 단 임금에게도 ‘60세 이상’의 제한규정을 적용했다. 수명이 짧았던 조선왕 28명 중 기로소에 입회한 왕은 태조·숙종·영조·고종 등 고작 4명뿐이었다. ‘기로당상’(耆老堂上)들은 임금의 탄생일이나 설·동지 같은 절기의 행사, 상·혼례 등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왕의 자문에 응했다. 조선시대 대표적 초상화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1713∼1791년)의 초상화는 표암이 기로소에 들어간 기념으로 정조의 지시에 따라 제작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20일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이 초상화의 제작비는 당시 쌀 20가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숙종이 기로소에 들기에 앞서 베푼 잔치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한 ‘기사계첩’에도 기로당상 10명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기로소에 드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고 가문의 영광이었다.원로 모시기를 십분 활용한 조선왕조의 지혜였다. 기로소에 관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은 까닭은 이명박 대통령이 ‘위대한 국민을 위한 원로회의’라는 원로자문회의체를 만들기로 했다는 연초 보도 때문이다. 기로소의 현대판이라 할 만하다. 군사정권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에 이어 1981년 설치된 국정자문회의, 1988년 만들어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변종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어 퇴임 후 의장이 되려다 무위로 돌아간 적도 있다. 여론의 반발 때문이었다 헌법 제90조에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고 원로회의 의장은 전직 대통령이 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동안 사문화되다시피 한 이 조항을 정부가 만지작거리는 이유는 뭘까. 이명박 대통령의 심정을 헤아릴 만하다. 해묵은 이념논쟁이 가장 큰 두통거리일 터이다. 지난해 건국절과 광복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좌편향 역사교과서 논쟁, 정부홍보책자의 임시정부 법통부인 논란 등으로 피멍이 들다시피 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이념귀신’에게서 자유롭게 해 줄 ‘해우소’를 찾는 것이다. 지리멸멸한 보수세력의 단합도 필요하리라. 발상은 그럴듯하지만 해법이 문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3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국가원로 초청간담회를 가졌다. 그때 참석했던 인사 30여명을 중심으로 ‘원군’을 구하는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그 나물에 그 밥’식의 인적 구성으론 밥먹고 헤어지는 모임밖에 안 된다. 정권마다 만들었던 원로회의체가 실패한 전철(前轍)이다. 기로소는 태조 때 만들어져 고종 때까지 갔다.조선왕조와 흥망을 함께했다. ‘신하는 정2품 문신·70세 이상, 왕은 60세 이상’이라는 철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원칙없이 정부의 입맛에만 맞는 원로들의 회의체란 또 다른 분열을 부를 뿐이다. 상처를 덧나게 한다. 우리 시대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진정한 원로를 동수로 구성해 ‘거안제미’(擧案齊眉)의 심정으로 지극정성 모셔야 한다. 풍상을 겪은 원로들의 맺힌 응어리가 풀리면 후학들의 마음도 덩달아 풀릴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해외반출 회암사 유물 되찾기 청신호?

    해외반출 회암사 유물 되찾기 청신호?

    해외로 나간 문화재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고자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혜문 스님(‘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은 12일 “불교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가 해외에 흩어져 있는 상태인데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급선무”라면서 “이곳에서 두세 달 더 머물며 보스턴 박물관, 뉴욕 버크 컬렉션, 하버드대학 박물관 등 관계자들과 환수 및 임대 협상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버크 컬렉션 소장 석가삼존도 확인 그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반환 노력이 ‘영구 기증’으로 봉합된 사례 등을 보면 현재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의 저항만큼이나 국내 학계 등의 부정적 인식이 문제가 되는 것 같다.”면서 “사회적·종교적 측면에서 패배주의를 벗어던지고 문화재가 본래 있던 자리를 찾도록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혜문 스님을 포함한 ‘해외 반출 문화재 반환을 위한 미국 방문단’은 지난 8일 미국에 도착했다. 뉴욕, 보스턴 등 미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의 현황과 보존 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경기 양주 회암사터에 세워지고 있는 박물관이 내년에 개관함에 따라 관련 유물을 돌려받거나 임대를 요청하는 작업 등을 벌이고 있다. 방문단은 일단 뉴욕 버크 컬렉션이 소장하고 있는 회암사 ‘석가삼존도’를 확인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회암사에 시주한 불화 400점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6점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 전기 불교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이 불화는 현재 국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만 1점이 있을 뿐, 일본에 4점, 미국 버크 컬렉션에 1점이 있다. 뉴욕의 ‘석가삼존도’는 1990년 일본에서 발견돼 버크 컬렉션 측이 ‘합법적’으로 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버크 컬렉션이 소장한 회암사 불화가 사진으로나마 국내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방문단은 미국 버크 컬렉션과 접촉해 2010년 회암사지 박물관 개관에 맞춰 ‘석가삼존도’의 임대를 요청,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이렇게 될 경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회암사 불화 6점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류 유산 제자리 돌려놓기 필요성 역설 이와 함께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금은제 라마탑형 사리구’의 환수도 방문단 활동의 핵심적 과제다. 이 사리구는 회암사 또는 개성 화장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부처님 진신 사리 등 3여래 2조사의 사리가 함께 모셔져 있다. 1939년 도굴돼 일본에 반출된 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일본 도쿄에서 매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혜문 스님은 “보스턴 박물관 관장을 만나 일단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얘기를 진행했다.”면서 “오는 3월까지 인류의 유산이 제자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 등을 설명하고 협상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으로, 사회적·종교적 당위성을 가진 만큼 잘 진행될 것이라 믿고 있다.”고 기대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내 책을 말한다] 韓-日 편견·피해의식 뿌리찾기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부정적인 상호인식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평생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고발해온 재일사학자인 금병동(1927~2008) 전 일본 조선대 교수는 ‘조선인의 일본관’과 ‘일본인의 조선관’(논형 펴냄)을 통해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가진 민족적 편견과 감정적인 모멸감, 한국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적대감의 뿌리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전한다. ‘조선인의 일본관’은 조선왕조 시대 일본에 파견된 사신들과 근대 이후 조선 정부의 개화정책 시행에 따라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일본 견문기, 식민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일본인의 조선관’은 18세기 말 이래 근대 일본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관료, 정치가, 학자, 문인, 언론인, 군인 등 57명의 조선관을 정리했다. 일본인의 침략사상과 멸시관은 8세기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과 임나지배 기술에서 기원한다. 에도시대의 일본국학자들은 한학자들이 중국이나 조선의 학문을 존중하는 것을 비판하고,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일본의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진구 전설은 1592년 임진왜란과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 불평등조약으로 강제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러·일전쟁(1904년)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정책, 그리고 1910년 이래 35년에 걸친 식민통치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일본관의 원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임진왜란과 강제병합에 의한 가혹한 식민통치가 바탕이 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신들의 기록을 보면 일본 생활상이나 문화(특히 풍속)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두 사건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이 강해졌다. 되풀이되는 일본 정치가의 망언이나 교과서의 역사 왜곡 문제는 이런 인식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일본 보수정치가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의 적극적 미화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이것은 두 나라가 가까워지기 어려운 대립과 갈등을 만드는 한 요인이 된다. 단순히 현재의 한·일 관계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 짐을 고스란히 물려주게 될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두 나라의 관계, 갈등의 시작을 파악하지 않으면 상호이해가 막히는 것은 물론 성숙한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다.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 원점으로 돌아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두 나라의 관계는 여전히 민감한 사안이 나오면 불편해지기 일쑤인 채 제자리걸음 상태다.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신사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망언 문제 등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권 1만 6000원. 최혜주 한양대 한국학硏 학술연구교수
  • 국보급 문화재 美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첫 전시

    국보급 문화재 美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첫 전시

    국보 제175호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 등 조선왕조 초기의 예술작품 32점이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처음 전시된다. 정부는 6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국립중앙박물관 등 3개 기관이 신청한 국가지정문화재 국외반출건을 심의·의결했다. 전시회는 3월17일부터 6월21일까지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조선 전기의 미술 Art of the Kor ean Renaissance, 1400~160 0’이란 주제로 열린다. 32점 중 국가지정문화재는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을 비롯해 석보상절(보물 제523-2호), 정통십삼년명분청사기상감묘지(보물 제1428호) 등 모두 9점이다. 15세기 중반에 제작된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은 고려 백자의 전통을 이은 백자대접으로 연꽃 덩굴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4·끝) 조선을 알았던 청, 청을 몰랐던 조선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청군은 병력의 수,무기 체계,전략과 전술,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그들은 교전 경험도 풍부했다.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남한산성 공성은 1631년 홍타이지가 주도했던 대릉하(大凌河) 공략전과 흡사했다.대릉하전 당시 청군은 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산해관 쪽에서 몰려오는 명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한 것과 똑같다.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그들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우선 오랫동안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만약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또 김경징 같은 용렬한 인물에게 섬의 방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의 배후에는 엄연히 명이 있었다.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후금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러면 설사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었다.적은 나를 아는데,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기까지 했던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다.“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잘 몰랐을 것이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그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았다.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그 상징이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했다.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수많은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청은 달랐다.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군율로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역설적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이 보인다.1627년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는 높았다.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에 대한 ‘각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안단 ’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을까? 1997년 혹심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0년 만에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다시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다. 1627년과 1637년,1997년과 2008년.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역사를 두려워하고,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하며 글을 마친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 “지금의 경제위기도 10년 전 IMF 원인 규명 미흡했기 때문” 연재 마치는 한명기 교수의 소회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입니다.지금의 경제난국도 10년 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기획시리즈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가 31일자로 마침표를 찍었다.2007년 1월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꼬박 2년간 모두 104회에 걸쳐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 한 교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위기는 언제든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위정자들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다. 한 교수는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그러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의 전말을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로 집대성해서 풀어쓴 사례는 드물다.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임진왜란과 한중관계’‘광해군’ 등의 저서를 쓴 한 교수는 앞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대중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때문에 현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길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올 마지막 국무회의 무슨말 오갔나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올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과 한승수 국무총리,국무위원 등이 올해를 결산하는 발언과 소회를 밝혔다.다음은 발언록. ▲이명박 대통령 (올 한해)후회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발전하는 조직은 어려움속에서 배우는 만큼 같은 실수를 두번하지 않아야 한다.새 정부 출범 이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놀라서 소심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오히려 담담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다.어려움도 겪었지만 밋밋할 때보다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일한다는 게 어찌 보면 보람이고 행복일 수 있다.좀 더 투철한 사명감과 의식을 갖고 전도사 역할을 해달라.그래야 공직사회가 따라 온다.국무위원들은 자기가 맡고 있는 분야의 현안에만 몰두하지 말고 고개를 들고 밖을 봐야 한다. ▲한승수 국무총리 과거에는 정상들이 외국에 나가면 조마조마할 때가 있었는데 이 대통령은 대외관계에서 리드를 잘 하시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나라로서도 복된 일이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었다.국무위원이 되고 나서 일찍 일어나게 됐다.좀 익숙해졌지만 아직 잠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 과거 왕조시대 호조판서를 포함해 역대 재무책임자로서 가장 돈을 많이 써 본 사람에 속할 것이다.(추가경정예산 등을 비롯해)원 없이 돈을 써본 한해였다. ▲김경한 법무장관 경제위기 속에서 박진감 있는 대처를 해 국민이 호응하는데 이런 대처가 진작 있었으면 하는 반성을 해 본다. ▲김하중 통일부장관 나만 유일하게 상대가 없었다.내년에 남북관계를 반드시 정상화시키겠다.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장관 쇠고기파동 때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여러 이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장관 쇠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신뢰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이영희 노동부장관 분규가 예전보다 적고 빨리 해결된 것은 비정치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각자 자기자리에서 열심히 해서 이 대통령에게 짐이 되지 않고 힘이 되는 각료가 되자. ▲정정길 대통령실장 압축성장과정에서 누적된 문제들이 분출하면서 사회전반에 불신풍조가 확대되고 있다.그래서 약간의 정부의 잘못된 틈이나 실수가 확대되는 경우가 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故최진실 공로상…대리수상 정준호 “눈에 선하다”

    故최진실 공로상…대리수상 정준호 “눈에 선하다”

    탤런트 故 최진실이 MBC 연기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30일 오후 9시 50분부터 170분동안 생방송된 2008 MBC ‘연기대상’의 공로상 부문은 故 최진실에게 돌아갔다. 선배 탤런트 최불암이 나와 최진실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고인이 출연했던 MBC 인기 드라마 5편을 소개했다. 최진실이 출연한 드라마 중 국민들이 가장 기억나는 작품으로는 유작인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을 1위로 꼽았다. 뒤이어 2위 ‘질투’ 3위 ‘별은 내 가슴에’ 4위 ‘그대 그리고 나’ 5위 ‘조선왕조 오백년-한중록’이 순위에 올랐다. 이 날 故 최진실의 공로상은 그녀의 유작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 함께 연기한 정준호가 대리수상했다. 정준호는 “함께 촬영하며 제 등을 두드려줬던 최진실씨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 상을 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며 최진실의 빈자리에 마음 아파 했다. 개그맨 신동엽과 탤런트 한지혜의 사회로 진행된 2008 MBC ‘연기대상’은 시청자들에게 지난 한해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리를 빛냈다. 서울신문NTN 김예나 기자 yeah@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2008년 진 별들] 박경리·이청준 대작 남기고 흙과 천국으로

    ●국내 무자년 올 한 해는 국내외 인사들의 부음이 끊이지 않았다. 국내에선 한국문학계의 두 큰 별이 졌다.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82) 선생이 5월5일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선생은 1969년 현대문학에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94년 8월까지 원고지 4만장 분량을 탈고,한국 현대 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웠다.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 새겨진 개인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짚어냈다.폐암 진단 후에도 치료를 거부한 채 원주 토지기념관에서 기거했다.유해는 고향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기슭에 묻혔다. 4·19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이청준(69)은 7월31일 역시 폐암으로 타계했다.소설 ‘서편제’와 ‘이어도’에서 토속신앙과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묘사했다.실화가 바탕인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한센인 병원에 부임한 원장과 원생들 사이 갈등과 화해를 통해 자유,구원의 상관관계를 그렸다.생전에 25권 전집이 발간된 흔치 않은 작가이기도 했다.박경리와 이청준,두 작가에게는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국악계의 큰어른 성경린은 3월5일 97세를 일기로 영면했다.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보유자로 1986년부터 국립국악원 사범으로 재직해 온 궁중음악계의 산 증인이었다.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한 뒤 61년 국립국악원장을 지냈다.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 후신인 국립 국악고등학교 교장직도 역임했다.후학을 위해 2000년엔 관재국악상 기금으로 1억 7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대중문화계는 스캔들성 궂긴 소식이 이어졌다.톱탤런트 최진실(40)이 10월2일 스스로 생을 마감해 연예계는 물론 온나라가 발칵 뒤집혔다.최씨가 탤런트 안재환 자살 및 사채업 괴담의 악플에 시달렸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성론이 일었다.그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란 CF광고 멘트로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뒤 20년 넘게 꾸준히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어린시절,매니저의 죽음,야구선수 조성민과의 이혼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사후에도 아이들 양육권과 유산상속을 놓고 조씨와 가족들간 분쟁이 이어졌다.그의 죽음으로 사이버 모욕죄 입법이 추진되기도 했다.앞서 탤런트 안재환(36)은 9월8일 서울 노원구 주택가 골목 승합차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지난해 11월 개그우먼 정선희와 결혼한 새신랑이자 서글서글한 이미지로 사랑받던 터라 그의 죽음은 의문부호였다.수사 결과 40억원의 사채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드러났다.이로 인해 고리사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고,타살설 및 정선희씨의 방송진행 중단 등 후유증이 이어졌다. 해양법학계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독도 전문가인 박춘호(78) 국제해양법 재판관은 11월12일 작고했다.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때 한·일 어업분쟁을 보고 해양법 연구에 발을 들였다.1996년 우리에겐 불모지나 다름없던 유엔 사법기구 고위직에 한국인으로 처음 진출했다.독일 함부르크에 설립된 국제해양법재판소 초대 재판관으로 당선됐고 2005년 9년 재선에 성공했다. 재계에서는 동성제약 창업주 이선규 회장이 8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3월17일).이 회장은 한국 제약산업 1세대로 ‘정로환’ 등 토종 브랜드를 히트시킨 주인공이다. 주요 기업의 안주인들도 잇달아 타계했다.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이자 구본무 회장의 모친인 하정임(85)씨가 1월9일 타계했다.여든이 넘도록 제사상을 직접 차리며 살림을 꾸렸다.두산가(家)는 9월16일 정신적 지주 명계춘(95)씨를 잃었다.고(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의 부인이자 18살에 30명이 넘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장남 용곤(두산 명예회장),2남 용오(성지건설 회장),3남 용성(두산 회장) 등 6남1녀를 키워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 김홍조(97)옹은 9월 말일 세상을 떴다.생전 멸치어장으로 큰 돈을 벌어 아들의 정치인생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정계에선 그의 멸치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으면 정치인이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았을 정도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손자이자 동아일보 회장을 지낸 김병관(74)씨도 2월25일 타계했다.89년부터 동아일보 사장 겸 발행인을 맡으며 동아일보를 이끌었다.서울신문 사장 출신인 원로 언론인 장기봉(81)씨도 8월28일 유명을 달리했다.65년 신아일보를 창간했지만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종간을 맞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 밖에 소설가 홍성원(71·5월1일),조선왕조 마지막 무동 김천흥(98·8월18일)옹,정진숙(96·8월22일) 을유문화사 회장,춘향가 예능보유자인 오정숙(73·7월7일) 명창,중문학 개척자이자 독립투사였던 차주환 (88·12월2일)박사,탤런트 박광정(46·12월15일) 등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 해외에선 ‘러시아의 양심’ 솔제니친(89)이 8월3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옛소련 반체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그러나 73년 옛 소련의 인권탄압을 기록한 ‘수용소 군도´ 를 내놓으면서 반역죄로 강제추방당했다.그는 16년 만인 90년에야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했다.조국에 돌아간 뒤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조국 부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지난해 6월 러시아는 그에게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했다. 32년간 철권통치를 펼치다 88년 반정부 시위로 물러난 수하르토(1월27일)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86세로 숨졌다.한때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지만 국제투명성기구는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그를 지목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 스로트’(Deep throat·익명의 제보자)였던 윌리엄 마크 펠트 전 미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은 12월18일 95세로 사망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영원한 반항아였던 배우 폴 뉴먼(83)이 9월27일 암으로 숨졌다.‘상처뿐인 영광’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58년 마틴 리트 감독의 ‘길고 긴 여름날’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85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컬러 오브 머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아카데미상 후보에 10회나 올랐다.감독으로 나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을 연출하기도 했다.지난해 6월 그의 은퇴의 변은 “기억력과 자신감,창의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어 연기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벤허’와 ‘십계’로 유명한 미국 영화배우 찰턴 헤스턴(4월5일)은 84세를 일기로 숨졌다. 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88)경은 1월11일 세상을 떠났다.53년 5월29일 네팔인 세르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후 20세기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문명의 충돌’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81) 하버드대 교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타계했다.고인은 “이념은 가고 문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면서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충돌을 예견한 석학이다.비교정치,민주주의 분야에서 제3의 물결 등 17권의 저서,90여편의 논문를 발표했다.그러나 그의 서구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의 세계적 디자이너 이브생 로랑(71·6월1일)도 하늘나라로 떠났다.그는 여성 패션에 최초로 바지정장을 도입해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혁명가였다.가브리엘 샤넬,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이은 상업화 세대 전 마지막 오트 쿠튀리에(고급맞춤복 디자이너)다.이브생 로랑은 “블랙에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상이 존재한다.”고 한 블랙예찬론자이기도 했다. 정리 이재연기자 osacl@seo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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