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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살아나는 궁궐/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열린세상] 살아나는 궁궐/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수줍은 듯 구름에 얼굴을 묻은 채 새하얀 살갗만 살포시 내밀며, 구중궁궐 창덕궁을 포근하게 감싼다. 달빛 받은 박석, 궁궐 전각의 기왓장이 빛의 반은 머금고, 남은 절반은 뱉어내 찬란한 음영으로 어둠 속 궁궐의 경이로움을 연출한다. 찬란한 음영은 궁궐의 밤의 신비로운 기운을 깨우며, ‘궁인’이 된 손님들을 궁궐의 이야기 속으로 안내한다. 600년 전 돌로 만들어진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백성들의 ‘원성’을 북으로 알렸던 신문고의 잔영을 들려주고, 원성의 ‘소리받이’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를 치렀던 인정전으로 왕도는 이어진다. 나는 듯한 유려한 곡선과 위엄 어린 직선이 조화를 이룬 정전(正殿) 인정전은 구중심처의 수백년 흥망성쇠, 곧 백성들의 고락의 내력이 달빛에 실려 도란도란 전해 오는 듯하다. 한 왕조의 흥망성쇠를 배태했던 임금의 집무실 선정전과 침전으로 사용됐던 희정당을 지나면 왕실이라기엔 너무도 소박한 ‘별궁’ 낙선재가 관람객을 맞는다. 전각은 소박하나 달빛 속에 빛나는 섬세한 문양의 문살과 담장은 고혹적인 아름다움으로 방문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낙선재 뒤뜰의 화계를 천천히 올라 머리를 낮추고, 작은 문을 통과하면 창덕궁의 비경이 담긴 후원이 손을 내밀어 관람객의 가슴에 얹으며, ‘달빛기행’ 감동의 절정을 이룬다. 은은한 달빛에 의지해 고갯길을 천천히 오르면 후원의 백미인 부용지의 그림 같은 풍경이 환상을 자아내고, 영화당에서 달빛 속에 빚어내는 대금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1시간여 이어진 관람의 행렬이 사대부집을 모방해 아흔아홉 칸 한옥으로 지은 연경당에 이르러 발품을 잠시 내려놓으면 그 사이 ‘달빛풍류’가 찾아든다. 효명세자가 어머니 4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정재(궁중무용) ‘춘앵전’의 춤사위에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해금산조, 2010년 유네스코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가곡 한 수가 고요한 궁궐의 후원에 달빛과 함께 녹아들며 정점에 이른다. 지난해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창덕궁 달빛기행은 올해 들어 프로그램 내용의 격을 높여, 한국 궁궐의 명품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으며 새로운 야간 궁궐 관광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작년에 이어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매달 음력 보름을 앞뒤로 3~5일 진행되는 창덕궁 달빛기행은 예약 시작 불과 몇 십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동료와 함께 신청하고 일본에서,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온 관광객이 찾아 든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궁궐의 건축미와 역사 속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대표적인 고궁 활용 프로그램이다. 이 외에도, 고종임금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곳, 덕수궁 정관헌에서는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관객과 하나가 되어 펼치는 전통공연 ‘덕수궁 풍류’, 지난해 11월 주요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냈던 경복궁 야간 개장도 지난 5월에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확대 시행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경복궁 야간 개방은 오는 10월 한 번 더 운영되어 가을밤 경복궁의 아름다운 야경을 선보일 예정이다. 여기에 외국 사신들을 위한 궁중연회가 베풀어졌던 경회루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살린 ‘경회루 연회’도 더해져 대표 궁궐로서 경복궁의 다양한 모습과 감동을 보여줄 계획이다. 궁궐 속의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유·무형 문화유산의 가치를 높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경제적으로도 큰 자산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살아 숨쉬는 궁궐문화’ 프로그램들이 한 시대 문화수준의 정점이었던 왕실문화의 정수를 조금이라도 훼손하거나 단순한 볼거리, 즐길거리로만 전락시키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검토하고 시행하여야 한다. 궁궐 전각의 배치와 그 쓰임새에 깃든 철학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 당대의 문화수준을 깊게 이해하고 짚어 보며, 오늘 우리가 창출하고 형성해 가는 ‘우리시대의 궁궐텐츠’가 미래세대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기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과 자세로 프로그램 하나하나에 혼과 정성을 들여 격조 있게 꾸며야 할 것이다.
  • 남한산성에 저런 풍경이…

    남한산성에 저런 풍경이…

    “저런 풍경이 실제로 있나요.” 등산을 한답시고 남한산성에 몇번 가본 경험으로 물었다. ‘겨울산’에 담긴 풍경이 마치 강원도 산악지대 같아서였다.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처럼, 보는 사람을 끌어당겨 깊은 숲속에 내동댕이쳐 버릴 것 같은 느낌. “그럼요. 저 왼쪽 언덕 너머가 남한산성 안쪽이에요. 저 언덕을 따라서 산성이 지어져 있죠. 저도 운전하면서 지나가다가 저런 풍경이 있었나 싶어서 사진을 찍은 뒤 그린 거예요.” 아마 남한산성이 품고 있는 역사적 회환이 그런 풍경을 작가의 눈에 띄게 한 것이리라. 다음 달 17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먼 그림자 - 산성일기’ 전시를 열고 있는 강경구(59) 작가. 경원대 교수로 있다 보니 늘 남한산성과 마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김훈이 쓴 소설 ‘남한산성’이 떠올랐다. 그 소설을 한번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남한산성 곳곳을 깊숙이 느끼면서 몇번이나 소설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봤다. 그래서 내놓은 작품 26개를 걸었다. 강 작가는 오방색에서 따온 강렬한 원색을 쓴다. 때문에 화려할 것만 같은데, 화려하다기보다 전반적으로 탁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은유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소나무다. 불그레한 소나무들이 빽빽한 풍경이 대부분인데, 피의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솔잎도 뾰족한 게 아니라 두루뭉술하다. 끊임없이 피어나는 의구심과 못다한 말들이 반영된 것 같다. 그 덕분에 ‘떠도는 이야기’ 같은 그림을 보면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었던, 불온한 상상이 가득 찬 남한산성의 풍경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하기야 김훈도 남한산성을 일러 말로써 치른 전쟁이라 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목탄으로 그린 그림들은 더더욱 직접적이다.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들 눈에는 흑색 세상만 보였으리라. 작가는 작품 개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꺼렸다. “워낙 유명한 소설을 주제로 삼았으니 관객분들도 직접 한번 느껴 보았으면 좋겠다. 아직 그리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 기회가 닿는다면 이 소재를 더 밀고 나가고 싶다.” 관람료 2000원. (02)736-437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시론] ‘문화재 환수’가 겨레의 단합 계기되길/혜문 스님·조선왕실의궤환수委 사무처장

    [시론] ‘문화재 환수’가 겨레의 단합 계기되길/혜문 스님·조선왕실의궤환수委 사무처장

    지난 11일 외규장각 도서의 귀환을 축하하는 국민환영 행사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하루 앞선 10일에는 한·일도서협정이 발효돼,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한 1205책의 도서도 조만간 귀국할 예정이다. 약탈 문화재의 연이은 귀환으로 ‘문화재 환수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정부도 ‘민·관 협력 문화재 환수 전담 기구’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이미 문화재청은 6명으로 구성된 ‘국외문화재팀’을 발족, 해외 문화재 반환을 위한 지원에 나서고 있다. 반갑고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환수’ 문제는 아직까지 그다지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우선 어떤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환수해야 하는지 문제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가 수십만점이라지만 모두 환수 대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환수 대상 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불법적 유통경로’를 추적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불법적 유통경로를 규명한 대상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직지심경과 같은 문화재는 안타깝게도 ‘불법거래된 문화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현재까지 문화재 환수 성적도 저조하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돌려받은 문화재를 제외하고 우리가 돌려받은 국보급 문화재는 2006년 일본 도쿄대학으로부터 환수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유일하다. 그나마 귀국 직후 고궁박물관에서 두 달 동안 전시된 뒤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환수된 문화재의 관리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다. 도쿄대로부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돌아오자 서울대 규장각은 겉 표지에 ‘규장각 장서인’을 날인, 국보 훼손이 아니냐는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6·25 당시 미군이 약탈했던 ‘명성황후 표범 카펫’은 1951년 미국 정부가 우리정부에 반환했으나 지난해까지 행방이 묘연했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국민감사’를 청구하자 부랴부랴 소재 파악에 나섰고 그제서야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60년 만에 발견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문화재 환수에 대한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몇 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 문화재 전문가라는 학자들과 정부 관료,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앞으로의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분들의 발표와 주장을 들어보아도 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문화재 환수 운동은 상대가 있는 운동이고, 그 상대란 것이 대개 선진국이기 때문에 신중한 대응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응책의 골자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신중하고 예의바른 노력으로 인해 환수된 문화재는 아직까지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검증된 적 없는 이론에 불과하거나 외국의 사례를 분석하는 초보적 수준에 불과한 이야기임을 증명한다. 이런 미숙한 상황에도 불과하고 침략으로 약탈당했던 문화재들에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먹고 살기 급급했던 시절을 넘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신호이다. 남북으로 분단된 민족이 ‘한마음’으로 단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문화재 환수’ 운동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외세에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는 문제에는 남북한과 해외동포들도 모두 한마음으로 뭉칠 수 있는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번에 되돌아올 예정인 일본 궁내청 조선왕실의궤에 관한 소식을 일본의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북한에서도 의궤 반환문제를 중요한 소식으로 전하고 있다고 한다. 빼앗긴 문화재의 제자리 찾기가 분열된 우리 민족의 제자리 찾기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發願)한다.
  • 中홍색 블록버스터 ‘건당위업’ 전역개봉 흥행돌풍 몰고올까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7월1일)을 기념해 만들어진 홍색(紅色) 블록버스터 ‘건당위업’(建黨偉業)이 15일 중국 전역에서 개봉됐다. 영화 개봉에 맞춰 중국은 공산당 창당 90주년 자축 모드에 들어섰다. ●신해혁명~공산당 창당 ‘마오’ 주인공 영화는 청나라 봉건 왕조를 무너뜨린 1911년의 신해혁명부터 1921년 공산당 창당까지 10년간의 격동사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당연히 공산당 창당 주역인 마오쩌둥 전 주석이 중심인물이다. 중국 영화사상 최고액인 8억 위안(약 1345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등 중국은 이 영화제작에 총력을 기울였다. 저우룬파(周潤發), 류더화(劉德華)를 비롯한 중화권 스타 108명이 출연하는 등 캐스팅도 화려하다. 홍콩의 액션 영화감독 우위썬(吳宇森), 중국의 ‘코미디 황제’ 자오번산(趙本山)도 기꺼이 출연했다. 영화 ‘색·계’에서 관능적인 연기를 펼친 탕웨이(湯唯) 출연 부분이 마오쩌둥 손자 등의 반발로 모두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몇 장면에서 얼굴이 등장했다. ●저우룬파·류더화 등 초호화 캐스팅 중국 당국은 영화의 흥행 성공을 위해 ‘트랜스포머3’ 등 할리우드 대작들의 상영 일정을 7월말 이후로 늦추도록 조정하기도 했다. 2009년 상영된 건국 60주년 기념 홍색 블록버스터 ‘건국위업’의 흥행 실적을 훨씬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 상하이 등 11개 성·시는 이날부터 무료관람 이벤트를 시작했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

    누군가에게 그들은 알록달록 그림이 가득한 옛날 책에 불과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그냥 도서관 한편에 놓인 채 잊혀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들은 민족문화의 정수였다. 수백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조상들의 삶과 생활을 알 수 있는 역사의 기록이었다. 그들이 145년의 세월을 건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들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들은 이제 옛 사람의 후손들에 의해 다시금 숨결을 되찾고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30여년에 걸친 우리의 노력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우리의 유산들이 외국에서 이 땅을 그리워하고 있다. 서울신문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은 외규장각 도서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장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는 전 세계의 유명한 ‘약탈(掠奪) 문화재’도 모습을 나타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같은 신세였던 외규장각 도서를 부러워하면서…. 그들이 저마다 고향을 향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얘기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덕분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대여’(貸與)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게 아쉽지만, 저와 제 가족은 다시는 이 땅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휘경원(徽慶園) 원소도감의궤(園所都鑑儀軌)가 건배사를 시작하자, 참석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1993년 휘경원 의궤가 홀로 파리 국립도서관을 떠나 한국으로 갈 때 다들 그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후로 18년. 휘경원 의궤의 뒤를 이어 자신들도 금의환향한 것이 스스로 믿기지 않는 그들이었다. 1866년 강화도를 떠난 지 무려 145년 만이다. 휘경원 의궤가 파티장을 둘러본 후 다시 말을 이으려는 찰나, 문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문이 열리자 일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듯한 조각 뭉치부터 미라 머리까지 괴기스럽기 그지없었다. 표정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조각상이 대표로 말을 꺼냈다. ●엘긴 마블 축하드립니다. 한국 국민들의 승리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조선왕실의궤처럼 다른 나라에 무참히 끌려간 인류의 유산들입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매일 얼굴을 팔면서 살고 있지만, 한순간도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설움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의궤가 너무 부럽고 해서 함께 찾아왔습니다. ●휘경원 의궤 감사합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여기 계신 손님들이 잘 모르실 수도 있어 간략하게들 자리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엘긴 마블 안녕하세요. 전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장식입니다. 기원전 440년 무렵에 만들어졌고, 인물 360여명과 말 219마리로 구성돼 있어요. 제 치욕스러운 이름은 영국 외교관인 엘긴 브루스에서 비롯됐습니다. 19세기 초 터키의 그리스 지배 당시에 저희를 몽땅 긁어모아서 영국으로 옮겨왔죠. 대수집가로 추앙받는 경우도 있던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죠. 저희 가족은 ‘파르테논 마블스’로 불려야 마땅합니다. 성스러운 신전의 장식물을 떼어 와 감상하려 한 약탈자의 이름을 붙이다니요. 아마 가능하기만 했다면 파르테논 신전을 통째로 가져오고도 남았을 테죠. 현재 저희 가족은 대부분 대영박물관에 있고, 일부는 루브르박물관에도 있습니다. ●휘경원 의궤 파르테논 마블님은 문화재 반환운동의 대부로 유명하시죠. ●파르테논 마블 가만있자…, 그게 1960년대였을 거예요. 런던을 무대로 영화를 촬영하던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가 저희가 대영박물관에 있는 걸 보고 통곡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메르쿠리는 1981년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정부와 전 국민을 상대로 반환운동을 벌였고,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한시도 운동을 쉬지 않았어요. 지금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메르쿠리 이름으로 된 호소문을 받게 됩니다. ●휘경원 의궤 그리스에도 우리나라 박병선 박사 같은 분이 계셨군요. 그 얘기는 조금 있다가 더 듣기로 하고, 그 옆에 계신 분도 역시 영국에서 오셨죠? ●로제타스톤 안녕하세요. 전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프톨레마이오스왕의 공덕비입니다.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로제타(현재의 라시드) 마을에서 요새를 쌓다가 발견했죠. 뭐 신기한 돌이다 싶어 슬쩍 프랑스로 가져오려고 했는데, 2년 뒤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영국 소유가 됐죠.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이겼으면 아마 지금 제 거처는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루브르박물관이 됐을 겁니다. 전 세계 교과서에 제 이름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테지만, 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어요. 수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존재라고 할까요. 이집트 상형문자, 민용(民用)문자, 그리스어 등 세 가지로 쓰여 있어 상형문자 읽는 방법을 현대에 전달했죠. 물론 제 고향인 이집트에서는 절 돌려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벨리스크 여기서 오랜 친구 로제타스톤을 만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전 고대 이집트 왕조 때 태양신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입니다. 보통 신전 앞에 쌍으로 있고 수십개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고향에 있는 애들은 6개에 불과하고 외국에 더 많아요. 뉴욕, 파리, 런던에 하나씩 있고 이탈리아에는 무려 16개나 있습니다. 오벨리스크를 무슨 열강의 상징쯤으로 여긴 때문이겠죠. 심지어 뉴욕과 런던의 오벨리스크는 원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는 이름으로 투트모세 3세가 만든 한 쌍입니다. 파리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룩소르에 있는 람세스 2세 오벨리스크의 나머지 한쪽이고요. 게다가 더 놀라운 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우리가 운반을 위해 다 쪼개졌다는 거죠. 상처 입고 신음하는데 보기만 좋으면 다인가요. ●휘경원 의궤 뒤쪽에 계신 아리따운 여자분과 용맹한 전사님은 누구시죠? ●네페르티티 흉상 저 역시 고대 이집트 출신이에요. 이집트 최고의 미녀로 클레오파트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으로 알려진 네페르티티 왕비의 모습을 하고 있죠. 1912년 독일오리엔트협회 조사단이 공방터에서 발견해 지금은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있습니다. 말이 조사단이지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가지고 오면 그만인 시절이었죠. 이집트 최고 미녀의 조각이자 최고의 조각상으로 평가받는 저를 정작 이집트의 후손들은 볼 수 없는 셈이죠. ●토이 모코 전 집으로 돌아갈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고 있는 뉴질랜드의 토이 모코입니다. 마오리족 전사가 전투에서 사망하면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신을 새겨 머리를 보관하던 전통에서 비롯된 일종의 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소장품으로 인기를 끌면서 아예 마오리 전사에게 문신을 새긴 후 목을 자르는 일까지 벌어졌죠. 그 당시 500여개가 해외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92년부터 뉴질랜드 정부가 저희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지금까지 300여개가 돌아갔습니다. 그나마 고향에 돌아가기 쉬운 건 아마 저희는 문화재라기보다는 개인의 수집에서 비롯된 기념물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겠죠. ●휘경원 의궤 저희가 돌아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죠. 누구보다 재불 사학자인 박병선 박사의 역할이 컸습니다. 1979년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저희들을 찾아냈고, 이를 고국에 알렸죠. 프랑스 내 지식인층에 약탈문화재의 고국 반환을 주장하면서 30년 넘게 외롭게 싸워오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역시 고국에서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뭐죠? ●오벨리스크 자랑스러운 그들의 박물관이 약탈문화재로 가득차 있다는 점 때문이겠죠. 그들은 조상들의 유산을 돌려 달라는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습니다. 루브르의 이집트 천궁도를 비롯한 이집트 유물들도 대부분 도굴된 물건이지요. 마치 장물(贓物)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꼴입니다. 우리 오벨리스크를 가장 많이 소유한 이탈리아는 정작 우리 요구는 무시하면서 자기네 로마 유적은 돌려달라고 떠들고 있어요. 역지사지라는 말도 모르나봐요. 심지어 약탈국 정치인들은 대놓고 “하나둘씩 돌려주다 보면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떠들기까지 합니다. 남의 나라 문화재를 강제로 뺏거나 훔쳐다 놓고 그게 할 소리입니까. ●로제타스톤 맞습니다. 관람객들은 마땅히 우리의 단순한 역사적 가치 이외에 언제 어떻게 훔쳐서 이 나라에 왔고, 그 나라에서 돌려 달라는 운동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는 사실, 또 전 국민들의 소망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집트에서 만들어졌고 이집트 상형문자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지, 대영박물관에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잖아요. ●휘경원 의궤 뭐 사실 그렇습니다. 유명하면 포기하기 더 힘들겠죠. 만약 저희 의궤들이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로제타스톤이나 오벨리스크처럼 중요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겠네요. ●네페르티티 흉상 프랑스나 영국 정부가 항상 말하죠. 우리가 문화재 보존에 대해 최고의 노하우를 갖고 있고, 돌려받을 국가를 믿기 힘들다고 말입니다. ●파르테논 마블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자 핑계일 뿐입니다. 반환운동이 시작된 후 그리스 정부는 아테네에 영국 박물관 분관을 지어 저희를 전시하자고 영국에 제안했고, 그 전시실은 실제로 대영박물관에 견줘 손색 없이 지어졌죠. 하지만 영국 정부는 아직까지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둘씩 돌려주는 선례를 만들다 보면, 아직 먹고사느라 조상의 문화에 관심이 적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남미 국가들이 나중에 떼로 달려들 것이 겁나기 때문이겠죠. ●휘경원 의궤 박 박사가 저희를 찾아냈을 때 저희는 폐지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보관과 연구능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한문을 읽고 조선의 문화를 이해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저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실제로 145년 동안 프랑스 사람들은 저희의 0.1%조차도 파악하지 못했고, 분류조차 못했으니까요. 오늘 이 자리에 걸음해 주신 각국의 약탈 문화재 여러분. 우리 의궤의 반환 축하 역시 이른 감이 있습니다. 한국 역시 아직까지 18개국에 7만여점에 가까운 조상의 문화재가 외국을 떠돌고 있습니다. 문화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소망이 실현되는 날. 다시 한번 진정한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약탈 그 역사와 진실(샤론 왁스먼·오성환/ 까치) 위대한 유산 74434(위대한유산 제작팀/ 지식의숲) 조선을 죽이다(혜문/ 동국대출판부) 오벨리스크(권염흠/ 스틸로그라프)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 휴머니스트)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김경임/ 홍익출판사)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WHO&WHAT] 소설 속 영국인 주인공 폴 웨스트 “파리서 1년 살아보니” [WHO&WHAT] 인류 첫 셀레브러티 ‘클레오파트라’… 베일 속의 그녀의 얘기 들어보니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 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 [주말 영화]

    ●워터보이(OBS 토요일 밤 11시 15분) 바비(애덤 샌들러·오른쪽)는 서른한 살의 노총각이다. 그의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비는 사교성이 함량 미달이다. 학교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바비의 유일한 낙은 대학교 풋볼 팀 선수에게 1등급 수질의 물을 공급하는 ‘워터보이’로 일하는 것이다. 풋볼팀 선수들은 언제나 바비를 동네북으로 취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인 코치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운명은 180도 탈바꿈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바비에게서 클라인은 프로급 선수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바비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다. 44연패의 늪에서 허덕이던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은 바비의 눈부신 활약으로 급기야 대표팀 중 최강을 결정짓는 ‘버본 볼’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 없이 대학생으로 위장하여 부정 선수로 뛰던 바비는 버본 볼 결승전에 올라온 루이지애나 대학의 레드 코치에 의해 비밀이 들통나고 만다. ●굿모닝 베트남(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1965년 전쟁이 한창이던 사이공. 활기 없는 디제이(DJ), 검열을 거친 무미건조한 뉴스, 무더운 날씨와 알맹이 없는 건강 정보, 따분한 구닥다리 노래들로 가득 찬 사이공의 공군 라디오 방송국에 묘하게 생긴 디제이 애드리안이 나타난다. 그는 방송 첫날 정훈 장교에게서 갖가지 규제 사항을 지시받는다. 하지만 마이크를 잡자마자 그 모든 지시를 무시해 버리고, 그만의 스타일로 방송을 진행한다. 특유의 오프닝 멘트, 배꼽 잡게 웃기는 유머 감각과 성대모사, 그리고 신나는 록과 재즈, 군대에서 금지된 곡들까지 틀어주면서 참호 속의 지친 영혼들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가지만 라이벌 디제이와 상부의 눈에는 골칫거리다. 조직 내에서 갈등도 깊어 가는데…. ●아나스타샤(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1928년 프랑스 파리. 몰락한 러시아 황실의 장교였던 부닌(율 브리너)은 초라한 행색의 여인을 추적한다. 여인은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강물로 뛰어들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저지된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코레프(잉그리드 버그먼). 로마노프 왕가의 공주인 아나스타샤와 비슷한 외모다. 부닌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이 여인을 이용해서 로마노프 왕조의 막대한 유산을 받아낼 속셈으로 그녀를 훈련시킨다. 안나는 차츰 정신적인 안정을 찾게 되고 부닌조차 그녀가 실제 아나스타샤 공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공주로서의 위엄까지 보이지만 러시아 귀족들은 그녀에 대해 반신반의한다. 결국 부닌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나스타샤 공주의 할머니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를 찾아가기로 한다.
  • “2016 기록올림픽 유치로 우리 역량 알릴 것”

    “2016 기록올림픽 유치로 우리 역량 알릴 것”

    우리나라는 ‘기록강국’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 9개로, 아시아 최다 보유국이다. 국가기록원이 오는 2016년 국제기록관리협의회(ICA) 총회를 유치하기 위해 팔소매를 걷어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세계기록유산 9개… 亞 최다 보유국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등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 기록유산은 무려 9개나 된다.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많은데, 안타깝게도 정작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록올림픽’이라고 불리는 ICA 총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함으로써 기록강국으로서의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무대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경옥(53) 국가기록원장은 8일 “우리 기록문화를 알리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2016년 ICA 총회를 유치하고, 국민들에게도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작업을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기록의 날’인 9일 경기 성남시 나라기록관에서 처음으로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행사를 연 것도 그 같은 취지에서다. “영국, 일본, 스페인 등 세계 주요국들은 일찍부터 ‘세계기록의 날’ 기념행사를 성대히 열어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알려온 반면 그동안 우리나라는 공식행사 자체가 한번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국제기록문화 전시회’를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한국의 기록문화 전통과 관리의 우수성에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이 원장은 “2016년 ICA 개최지 선정을 놓고 프랑스 파리와 경합 중인데 투표권을 가진 ICA 집행이사들에게 지지 요청 서한 자료를 전달하는 등 요즘 한창 물밑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치 결과는 오는 10월 ICA 연례회의에서 발표된다. ICA는 세계 198개국 13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총회는 4년마다 열린다. ●전국 순회전시·체험학습 등 계획 올해 국내 처음 열리는 ‘세계기록의 날’ 행사 프로그램은 푸짐하다. 지난달 28일 사전행사로 이미 ‘기록사랑 나라사랑 백일장’을 열었다. 14일부터 다음 달 9일까지는 ‘기록사랑 이야기’ 전국 순회전시를 개최하고, 10일부터 21일까지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학습도 실시할 계획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데스크 시각] 늑대와 양떼몰이/오일만 경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늑대와 양떼몰이/오일만 경제부 차장

    역대 정권에서 반복됐던 ‘부패 게이트’가 이번 정권에서도 변함없이 재현됐다. 이른바 ‘부산저축은행 게이트’다. 한푼의 이자라도 더 받으려는 서민들의 돈이 부패고리의 ‘종잣돈’으로 쓰였다. 예금 인출 과정에서 소외됐던 ‘힘없고, 백없는 서민’들이 원금을 돌려달라고 길거리에 나서는 형국이다. 이들의 분노와 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피해를 입은 고객이 2만 7000여명, 피해액은 1조 5000억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공정사회를 전면에 내건 현 정권의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파괴력이 감지된다. 과거 게이트와 달리 이번엔 금융권력을 장악한 ‘금피아’(금융감독원+마피아)와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마피아)의 최상위 핵심들이 줄줄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이 크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감독기관 차원을 떠나 정치권과 청와대를 포함한 부패 커넥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밀하고 끈끈하게 얽혀, 정밀하고 교묘하게 작동했던 부패 시스템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짙은 암운을 던진다. 해결 방법은 없는가. 부패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던 중국이 우리의 반면교사다. 중국 왕조의 흥망사를 끈질기게 추적했던 이중톈(易中天) 교수(중국 샤먼대)는 관료들의 부패가 중국 역대 왕조의 생명을 단축한 근본 원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도 온갖 감독·감찰부서를 만들어 관료들을 통제했지만 감독기관과 피감기관이 한통속이 되면 속수무책이다. 마치 도적패의 졸개가 두목에게 훔친 물건을 상납하는 구조다. 그는 관료체제를 ‘늑대(감독)에게 양몰이 개(관료)를 감독하게 하는 것이나 같다.’고 일갈했다. 이번 사태도 감독기관(금감원)과 피감기관(부산저축은행)이 전관예우를 고리로 먹이사슬을 형성, 금융 비리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관료제가 부패하는 이치에서 해결책을 찾아보자. 원래 양떼(백성)의 주인은 황제이고 관료는 황제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주인이 아닌 이상, 관료들은 목장의 항구적인 이익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의 임기 내에 주어진 권력과 기회를 이용해서 한몫 챙기는 것이 최대 관심사다. 이런 이해관계 속에서 감독·피감독 관료들 모두가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공무원 제도가 지연과 학연이란 연결고리 속에서 서서히 부패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중국 춘추시대 최악질 도둑인 도척(盜跖)의 일화를 보자. 그는 도둑의 도(道)로 성용의지인(聖勇義知仁)의 5가지를 들었다. 재물이 집안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을 아는 것(聖)이고, 도둑질 하러 집안에 들어갈 때 맨 앞에 서는 것이 용(勇)이며, 도둑질을 마치고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의(義)라고 했다. 장물의 가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지(知)이고, 각자의 몫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거협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척의 도를 이번 부패사건에 적용해 보자. 금감원은 부산저축은행의 부실구조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聖), 그 부실을 앞장서 덮어줬으며(勇), 각자의 몫을 전관예우를 통해 공평하게 분배(仁)한 꼴이다. 다만 누가 ‘총대를 메고’ 이번 비리를 마무리할지(義)는 아직 모르겠다. 이런 신랄한 유머가 술자리에서 울분을 푸는 서민용 안주로 오르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문득 한국은행 총재와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씨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국의 고위 관료들의 머릿속에서 국익이란 상위 개념이 사라지게 되면, 결국 사사로운 ‘밥그릇’만 남을 것이라고. 그의 지적은 참으로 탁월한 혜안이었다. 국무총리는 물론 장·차관을 마치고 곧바로 대형 로펌이나 기업의 로비스트로 변신하는 사회 풍토 속에서 건강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전관예우 근절 역시 우리 관료시스템을 보다 건강하게 유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만간 우리 사회는 새로운 저축은행 개혁안을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를 것이 분명하다. 더 이상 ‘늑대에게 양떼몰이 개를 감시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금융권력들이 부패에 개입할 수 없는 보다 정교한 금융 감독 시스템이 도입되기를 기대한다. oilman@seoul.co.kr
  • 자연과 인간의 충돌·상호작용 3000년 중국 환경사 한눈에

    장자(莊子)가 얘기했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벌목당하고 , 물맛 좋은 우물이 먼저 마른다’. 무슨 의미일까. 굳이 해석을 하지 말고 음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환경문제는 이제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티셔츠에 등장할 만큼 우리에게 일상적이고도 긴박한 현안으로 등장했다. 최근 들어 중국의 건조화가 심해져 사막이 확장되고 황사(黃砂)라는 자연재해 발생이 잦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중국의 사막과 황사 현상은 인간의 활동이 증가된 역사 시대에 이르러 크게 늘어났으며 인간에 의한 삼림파괴와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경작지 개간의 확대가 사막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진단한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의문점을 하나 던져보자. 도대체 역사시대의 중국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중국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학자로 정평이 나 있으면서 ‘중국 역사의 발전 형태’(1989)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영국 출신의 마크 엘빈은 수천년 동안 벌어진 중국의 자연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물로 중국 고대 시기 상(商) 왕조에서부터 전(前) 근대시기 청 왕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0년에 걸친 중국 환경사를 다룬 ‘코끼리의 후퇴’라는 대작을 2004년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펴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서구사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매우 경이로운 역작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 흐름을 타고 이번에 국내에 번역(정철웅 옮김, 사계절 펴냄) 출간됐다. 이 책은 매우 치밀하게 중국의 문학, 정치, 종교, 과학, 지역사, 지리학, 식물학, 동물학 등을 동원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충돌과정,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있다. 중국 환경사에 관련된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으며 환경사 연구와 방법론을 위한 종합 교과서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책의 제목 ‘코끼리의 후퇴’는 기원전 2000년 무렵, 중국 농경문화의 정착으로 인간과 서식지 경쟁을 벌이다 밀려난 코끼리의 양상이 중국 땅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됐다. 다시 말해 중국 땅에서 인간과 자연, 즉 환경의 관계를 다채롭고 밀도 있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저자가 인용한 산거부(山居賦), 오잡조(五雜俎), 청시탁(淸詩鐸) 등의 자료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것으로 다분히 문학적 성격을 띠었지만 내용으로 보면 종교, 철학, 정치, 경제, 과학 등을 모두 망라하고 있어 흥미롭다. 4만 8000원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저자와 차 한잔] 프랑스 소재 에세이 나란히 펴낸 이중수·강문정 시인 부부

    [저자와 차 한잔] 프랑스 소재 에세이 나란히 펴낸 이중수·강문정 시인 부부

    프랑스 파리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시인 부부가 나란히 책을 냈다. 남편 이중수(48)씨는 ‘그녀가 사랑한 파리’를, 아내 강문정(49)씨는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라는 제목이다. 샘터사 기획으로 나왔다. 남편의 책은 파리의 랜드마크 22곳에 담긴 이야기를 서정적인 수채화와 함께 소개한 여행 산문집이다. 아내의 책은 프랑스문화의 진수라고 하는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문화에세이다. ●파리에서 20년째 생활… 함께 머리 맞대고 기획 책 출간을 위해 일시 귀국했던 부부를 지난달 19일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면서 처음 만나 1995년 결혼했다는 이-강 부부. 살짝 들뜬 사춘기 소년 같은 남편, 문학소녀 같은 아내. 왠지 아직 아이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혹시나 하며 물었다. 역시. 아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결혼할 때 아이는 낳지 말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그리고 좋은 책을 많이 낳고 살자고 했습니다. 이번 책은 우리 부부가 낳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부가 기획 출판으로 함께 책을 내기는 처음이다. 남편 이씨는 비교문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로 많는 시집과 산문집,번역서를 펴냈다.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아내 강씨는 2002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해 첫 시집으로 ‘양철가슴’을 펴낸 바 있다. 책의 내용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부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획을 하고 아이디어를 주고 받으며 쓴 자식 같은 책이니만큼 네 책, 내 책이 없었다. ●랜드마크 22곳·베르사유궁 역사 인물 이야기 이씨는 아내의 책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에 대해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처럼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역사를 서사로 풀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면서 “초반은 문화에세이지만 3분의2가 역사소설”이라고 설명했다. 강씨는 3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쓴 이 책에서 프랑스 왕조변천사에서부터 위대한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거쳐간 역사 속 인물들의 삶과 사랑에 대해 얘기한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분야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루이 14세, 사치와 허영에 들뜬 여인으로 치부되며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마리 앙투아네트, 슬픈 운명의 주인공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를 흠모했던 페르젠백작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쉽고 생생하게 풀어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베르사유 궁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과 조각, 유물들을 곁들여 다채롭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건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씨는 “단순하게 역사적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랑한 파리’는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나 다름없다. 남편이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골라 그 역사와 배경을 문학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바스티유 광장과 생마르탱 운하 등. 조용히 미소 짓고 있던 부인 강씨는 “지금까지 나왔던 수많은 파리 관련 도서와는 전혀 다른 감성과 매력을 선사할 것”이라고 남편의 책을 평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함혜리 문화에디터 lotus@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궁중무악 재현 현장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궁중무악 재현 현장

    145년 전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가 4차분까지 모두 돌아온 뒤 500년 조선왕조 역사와 예술의 중심축인 궁중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는 7월 이들 도서의 일반 공개에 앞서 각종 공연과 기념행사가 진행 되고 있는 가운데 궁중문화의 핵심으로 기품이 넘치는 궁중무악(宮中舞樂)을 재현하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 초여름의 성급한 무더위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지난달 29일.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서는 ‘세종조 회례연’(世宗朝 會禮宴)을 재현하기 위한 국립국악원 단원들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전통 궁중의상을 차려 입은 연주단원과 무용단원들의 이마에는 비지땀이 흘렀다. ‘회례연’은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 임금과 문무백관이 모여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벌이는 잔치를 일컫는다. ●경복궁 ‘세종조 회례연’… 뙤약볕 1시간 공연 관객 기립박수 휴일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들은 15세기의 품격 높은 궁중무악을 감상하기 위해 공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근정전 주변에 모여들었다. 뙤약볕 아래서 1시간 넘게 진행된 공연이었지만 도중에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관객들은 수준 높은 공연에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임금이 되는 상상을 하며 공연을 봤다.”는 김정길(53)씨는 “고궁에서 옛 왕조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공연을 자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례·연향·조회·군례악 등 다양한 궁중 행사에 사용되었던 궁중음악은 오늘날 정악(正樂)의 한 장르로 분류된다. 아정하고 고상하며 속되지 않고 바른 음악이란 뜻의 ‘정악’. 국립국악원 이숙희 학예연구관은 “예로부터 유교 문화권에서 악(樂)은 인간의 심성을 바르게 하고 사회를 교화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했다. ‘낙이불류(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라 했던가. 신라의 우륵이 제자들의 연주를 듣고 던졌다는 찬사다. ‘즐겁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 감정의 절제’가 정악의 특징이다. 정악의 연주에는 민속악에서 느끼는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이입은 없지만 그 담담하고 유유한 장단의 흐름 속에서 선현들의 고고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정재(呈才)로 불리는 궁중무용은 장엄하고 화려하면서도 모든 것이 절제된 가운데 우아함과 품위를 잃지 않은 정중동(靜中動)의 고혹적인 춤사위입니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심숙경 안무자의 설명이다. 어우러진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녀의 표현처럼 무용단원의 춤가락은 마치 숨을 고르고 명상의 세계에 잦아드는 과정처럼 현실을 초월한 신비스러운 멋을 느끼게 했다. 실로 공연이 끝난 후 느끼는 상쾌함에 일상의 불필요한 잡념과 찌꺼기들이 씻겨 나간 기분이다. 선조들의 예술 수준이 이처럼 높았단 말인가. ●국내 유일 편종 장인 김현곤씨 “수백 년 전 소리 찾는 일 내 천직” 궁중무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악학궤범’(樂學軌範) ‘악기조성청의궤’(樂器造成廳儀軌) 등 고서에 전해지는 방식 그대로 제작된다. 충북 영동의 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는 과거로부터 전승되는 악기를 복원하고 오늘날의 무대 공연에 맞는 악기를 개발, 연구하는 곳이다. 김영희 학예연구관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이 직접 만들어 사용한 거문고 악기인 고산유금(孤山遺琴)과 세종조 편경(編磬)과 짝을 이루는 세종조 편종(編鐘)을 지난해 복원 제작했다.”며 성과를 설명했다. 김현곤(76)씨는 국내 유일의 편종 장인이다. 6·25 전쟁이 끝나고 고향인 전북에서 상경하여 서양 악기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 김씨는 국립국악원에서 망가진 옛 악기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수백 년 전의 정확한 소리를 찾는 일이 저의 천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지난해 악기연구소에서 고증한 ‘악학궤범’에 따른 그림과 치수를 참고하여 세종조 편종을 제작했다. 주물 작업을 마친 종(鐘)의 조율을 하고 있는 그의 손놀림이 현란하다. 마치 옛 악기의 소리뿐 아니라 그 시대의 정신도 함께 되살리려는 듯했다. 진솔하고 고상한 궁중무악은 조선왕조가 성취한 최고급 문화의 결정체이다. 햇살이 풍요로운 6월, 싱그러운 자연과 더불어 선조들의 고고한 감성을 헤아리며 또 하나의 슬기를 배워보는 것도 좋겠다. 글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천녀유혼 왕조현, 17살 ‘숨겨진 딸’ 있다” 주장 나와

    “천녀유혼 왕조현, 17살 ‘숨겨진 딸’ 있다” 주장 나와

    1987년 개봉한 영화 ‘천녀유혼’의 주인공으로 국내에도 큰 인기를 모은바 있는 배우 왕조현(왕주셴·44)에게 숨겨진 딸이 있다는 보도가 나와 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타이완의 한 매체에 따르면 왕조현은 한창 인기를 끌던 1994년 상반기에 딸을 몰래 출산했고, 이미 17세가 된 딸은 현재 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는 당시 아이를 받은 조산사에게서 “톱스타의 숨겨진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조산사는 “생모는 키가 170㎝가 넘는 유명스타이며, 현재 홍콩에서 활동중”이라면서 “유덕화와 스캔들이 난적도 있는 인기 배우이며 공식적으로는 ‘미혼’”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에 양부모는 “혹시 왕조현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조산사는 “그렇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왕조현은 함께 영화를 찍었던 장국영과 주윤발, 유덕화 등과 잇따른 스캔들로 팬들의 의혹을 산 바 있다. 왕조현의 딸을 데려다 키웠다는 양모는 “왕조현이 내 딸의 친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DNA검사라도 해서 친부모를 찾아주고 싶은 마음 뿐”이라면서 “하지만 왕조현이 친모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딸을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소식을 접한 왕조현 측은 현재 어떤 공식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5·18기록물·일성록 세계기록유산 된다

    5·18기록물·일성록 세계기록유산 된다

    200년 전 조선시대 왕이 직접 써나간 기록도, 30년 전 아픈 현대사의 기록도 모두 세계의 중요한 유산이 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8, 9번째가 된다. ●5·18기록물 조건부 등재 권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국제자문위원회(IAC)는 24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에서 제10차 회의를 열어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과 함께 정조가 국정 운영 및 조정의 일들을 직접 쓴 일성록(日省錄)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단 5·18 기록물은 조건부로 등재를 권고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IAC 회의 결과를 25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유네스코 관행상 등재 권고 결정은 확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특히 5·18 관련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2007년 최근 현대사의 한 대목인 넬슨 만델라의 1963년 법원 판결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적은 있다. 하지만 아시아 민주화 운동,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1980년 광주의 상황을 기록했다는 점은 향후 국내 현대사 정립의 측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관련 자료는 5·18기념재단, 국가기록원, 육군본부, 국회도서관, 미 국무부 등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5·18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위’는 정부기관 자료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자료, 시민 성명서, 필름, 피해자 병원 치료기록, 국가 보상 자료 등 5·18 전개 과정과 흐름을 보여 주는 방대한 자료를 유네스코에 제출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홍세현 5·18등재추진위 연구위원은 “관련 기록들은 광주시청에 상당 부분이 있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서 “공공기록물 관련 법률에 따라 각자 관리할 것으로 보지만 5·18 아카이브를 구성하면서 한 곳으로 모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성록 - 한 질만 편찬된 유일본 이와 함께 유네스코 IAC가 등재 권고 결정을 내린 일성록(국보 153호)의 의미 또한 크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 이어 일기체로 쓰인 조선왕조와 관련된 기록이 모두 세계기록유산이 된 셈이다. 일성록은 조선 후기 정조를 비롯한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 운영사항을 일기체로 정리한 연대기 자료로서 1760년(영조 36) 이후 1910년(융희 4)까지 151년치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질만 편찬된 유일본이자 필사본으로, 총 2329책 전체가 온전하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보관 중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에 쓰기 시작한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 뿌리를 둔 일성록은 정조 즉위 이후에는 국가의 공식기록으로 편입됐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시론] 서울의 역사는 왜 2000년 인가/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화여대 명예교수

    [시론] 서울의 역사는 왜 2000년 인가/신형식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화여대 명예교수

    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한성백제 500년과 조선왕조 500년을 합친 1000년의 역사로만 기억하고 있다. 앞의 두 시기 외에 서울은 분명히 수도가 아니었는데 왜 2000년 역사라고 설명하고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서울역사 2000년의 제1단계는 백제의 한성시대(BC18~475)였다. 백제는 21명의 왕이 존재하면서 한강유역의 유리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 3국 중 가장 먼저 고대 국가를 완성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을 기반으로 근초고왕(346~375)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패사시켰으며, 요서지방에 진출하여 역사상 첫번째 해외진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서울을 웅진(공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정벌은 고국원왕의 보복을 앞세웠지만, 한강유역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백제는 수도를 남으로 옮겼지만, 한강유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었고 신라와 협조하여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신라의 법흥왕과 진흥왕은 백제와의 군사협력을 파기하고 단독으로 한강 북부를 장악한다. 여기서 서울 2000년 역사의 제2단계가 시작된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허리로서 지리적 환경이나 서해로 향한 관문이 되는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어서 “오래 지닌 자는 번성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지만, 이를 잃는 쪽은 쇠약 혹은 패멸한다.”는 이병도 박사의 지적을 떠올릴 수 있다. 한강유역의 확보로 신라는 3국 중 최강국임을 과시할 수 있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결국 신라가 이 일대에 설치한 한주(한산주)는 통일신라의 정치 안정과 문화 개발에 바탕이 되었다. 더구나 826년(경덕왕 18) 황해도 남부일대(금천~재령 남부)에 장성까지 쌓았다. 북방진출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낙동강과 한강을 하나로 묶어 경주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서울역사 2000년의 제3단계는 고려시대의 500년간(918~1392)이다. 신라 말부터 한반도에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호족들이 난립하였고, 변경변혁설의 시각에서 서울 북방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었다. 성종 2년(982)의 12목에는 황해도 지역의 황주와 해주, 한강 북부의 양주와 광주가 포함되었으며, 현종 9년(1018)의 5도 양계에는 독자적으로 한강유역에 양광도가 설치되면서 점차 비중이 커졌다. 현종 2년(1011)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 함락을 경험한 고려는 예성강과 임진강을 넘어선 서울지역(양주)을 제2의 수도로 생각했다. 서울지역 남경론은 숙종 1년(1096)에 김위제(金謂磾)의 ‘남경천도론’으로 나타났다. 그는 왕에게 “건국 후 160여년에 목멱벌(남경)에 도읍한다.”는 도선의 비기를 설명하였다. 특히 개경·서경·남경의 3경을 저울로 비교하여 개경은 저울대(衡), 서경은 저울의 접시(極器)이지만, 남경은 저울추(錘:머리)가 된다고 했다. 서울지역은 탁월한 자연환경 외에 북으로 예성강과 임진강의 보호를 받는 군사적 위치, 육상 및 해상의 호조건, 그리고 경제적 여건이 컸기 때문에 숙종의 남경 궁궐 조성(1104) 이후 충렬왕의 한양부 개칭(1304)이나 공민왕의 한양천도론(1356)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서울지역은 단순히 수도 개경에 보완적인 명칭상의 제2수도가 아니었다. 정치·경제·군사·통상으로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남경 없는 개경은 있을 수 없었다.  제4단계는 조선시대 500년과 그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현실을 말한다. 한양은 조선왕조 시절 완비된 체제와 시설로 수도로서의 위상을 마련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4·19와 5·16은 물론 한강의 기적과 88올림픽, 그리고 오늘날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기까지 서울은 한국의 상징으로 역사적 전통을 이어왔다.
  • [박명재 세상 추임새] 너 자신 외에 모든 이를 용서하라

    [박명재 세상 추임새] 너 자신 외에 모든 이를 용서하라

    1년 중 가장 좋은 5월을 맞으면서 지나간 4월에 우리 역사상 아물지 않았던 상처 하나가 아름답게 매듭지어졌으면 하는 아쉬운 사건이 있었다. 다름 아닌 쉰한 번째 맞는 4·19혁명 기념일에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씨가 4·19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사죄를 하려 했으나 관련 단체의 저지로 무산된 일이다. 유족들의 원통하고 한 맺힌 심정을 잘 알 수 없는 제3자의 입장에서 섣불리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망설여지는 일이다. 다만 눈여겨볼 대목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에서는 사죄가 진정성이 없고 사전에 적절한 절차나 교감 없이 갑작스레 이루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죄의 가장 본질적 요소인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죄과”라고는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참배와 사죄를 거부당한 이씨 쪽에서도 “그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며 더 늦어지기 전에 역사의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뜻”이라고 밝혀 계속해서 사죄를 해나갈 뜻임을 분명히 했다. 잘하면 쉽사리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희망 섞인 생각을 하면서 몇 가지 이유로 역사의 한 매듭과 당사자 간의 응어리가 풀리기를 기대한다. 첫째, 사죄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사건의 당사자가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된다. 즉, 당사자의 적격성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이승만 전 대통령을 대리할 사람은 양자인 이인수씨밖에 없다. 그분은 엄연한 법적 후계자 내지 대리인으로서 아비의 죄를 자식이 비는 법적, 윤리적, 인간적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정치적 사면과 용서·화해는 역사가와 국민들의 몫이며, 그가 어떤 정치적 사면과 용서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 무엇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80을 넘은 그의 생전에 사죄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뒷날 다른 어떤 자연인이나 단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죄는 그만큼 당사자 적격성에 치명적인 흠결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 우리가 어떤 잘못과 과오에 대한 용서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가 잘못을 예방하고 근절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또 다른 잘못과 과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반복성의 효과에 대한 의문과 염려 때문이다. 프랑스 격언 중 ‘쉽사리 용서해 주면 잘못을 반복시킨다.’라는 말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국민적·정치적 역량과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더 이상 이 땅에 또 다른 독재의 망령을 부활시키거나 학생운동을 무자비하게 총칼로 탄압하고 희생을 되풀이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4·19혁명의 숭고한 이념과 발전적 미래가치의 정립 그리고 역사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양자 간에 사죄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의 건국과 4·19혁명의 민주화, 5·16의 산업화, 현재의 선진화 그리고 미래의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야 할 역사적 맥락과 정체성 측면에서 꼭 매듭지어야 할 역사적 과제이자 필연이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논리나 사변의 이성적 차원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의 인간적 차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 속담에 ‘귀신도 빌면 듣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머리 허연 80 노인이 살아생전에 양부의 역사적 과오와 허물을 빌기 위하여 묘역에 나왔다가 이리 밀치고 저리 떠밀리는 모습을 보면서, 저 노인이 세상 떠나기 전에 진정한 사죄와 용서 그리고 역사적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숱한 전쟁과 보복의 왕조사가 점철된 영국에 유난히 용서에 관한 격언이 많다. 그중 아래 두 가지를 인용하면서, 늦어도 내년 4월까지는 양쪽 간에 아름다운 사죄와 용서가 이루어져 우리 역사의 한 매듭이 마무리 되기를 희망한다. ‘너 자신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용서는 가장 고귀한 승리이다.’
  • 트래비 스토리> 시안(西安)…황제의 죽음을 함께했던 사람들

    트래비 스토리> 시안(西安)…황제의 죽음을 함께했던 사람들

    시안(西安) 방문을 앞두고 체크한 일기예보는 여정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올 것이라고 알려줬다. 여행객에게 ‘날씨 흐림’은 반갑지 않은 동반자임에 분명하다. 북서부에 황토고원이 위치하고 황하가 아니었다면 건조한 이곳에 하필이면 여행 시기에 맞춰 비라니, 이번 여행 운은 나쁘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시안에 도착하고, 워낙 건조한 지역이서 손님이 비를 몰고 오면 더 귀하고 반갑게 맞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금세 우쭐한 기분이 됐다. 또 평소 같으면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 전시돼 있어도 화창한 날씨 탓에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들곤 했던 박물관 방문도 흔쾌히 즐기게 됐다. 글·사진 이지혜 기자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서울사무소 02-773-0393, 산시성인민정부, 시안시인민정부, 2011시안세계국제원예박람회 www.expo2011.cn, 대한항공 www.koreanair.com ◈ 여유(旅遊)는 여행과 관광을 뜻하는 중국어다. 중국어로는 ‘뤼요우’라고 발음한다. 중국국가여유국은 중국 중앙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여행 관련 업무 조직이며, 서울사무소를 운영 중에 있으므로 이곳에 여행 관련 정보를 문의할 수 있다. 대한항공은 인천-시안 항로를 주 4회(월·수·금·토요일) 운항하고 있다. 병마용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진시황을 지키는 병마용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기병이고, 한경제의 왕릉인 한양릉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궁정악사와 무희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왜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시황은 무력을 통해 전국시대를 통일했으며, 강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통치체계를 확립했다. 특히 다른 국가와 달리 우위를 가진 기량이 다름 아닌 기병이었다. 한양릉의 주인인 경제는 한나라의 네 번째 황제로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특유의 문화예술이 발달하던 시기의 황제다. 이때의 힘을 바탕으로 한무제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전성기를 누리고 됐다. 힘의 역사를 수호하는 병마용 “시엔양 가세요?” “아니요, 시안 가는데요.” 병마용 유적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시안 출장길에 공항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자 한다. 탑승카운터 직원이 위와 같이 물었을 때 동북지역 리야오닝(요녕)성의 성도인 선양(瀋陽, Shenyang)을 묻는 줄 알았다.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을 이용해도 서울 간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감안하면, 그 직원은 시엔양이 시안의 국제공항임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을 듯하다. ‘시안’은 산시(陝西, 섬서)성의 성도이자 중국 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한자 발음인 ‘서안(西安)’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그나마 역사 시간에 배운 ‘서안사변(1936년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이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을 화청지에서 납치하고 감금했던 쿠데타)’이 떠오르는 이곳, 중국식 발음으로 ‘시안’이다. 과거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로 나라가 오래도록 평안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아 ‘장안(長安)’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수도를 비롯한 국가 경제·문화 중심이 동부의 베이징 등으로 옮겨온 것과 더불어 서쪽이 편안하라는 의미에서 ‘시안(西安)’이 됐다. 시안은 여전히 서부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지만, 중부의 충칭(重慶)이나 남부의 광저우(廣州) 등과 같은 고층 빌딩은 찾아볼 수 없다. 흔히 ‘시안은 어디를 파도 유적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함부로 개발할 수 없고, 옛 건물들은 중소지방도시의 소박한 모습인 채로 수년이 흘러도 홀로 제자리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이는 그곳에는 넓디넓은 관중평야가 2,00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방궁이나 대명궁과 같은 황제의 권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사라졌지만, 친숙한 중국여행의 이모티콘인 병마용과 무용(무희 등을 형상화한 인형) 등을 만날 수 있는 유적지들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눈에 보이는 엄청난 규모와 예스런 자태 등은 두 눈을 즐겁게도 하지만, 각각의 유물과 그것이 발견된 유적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시엔양(咸陽)’은 시안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시엔양국제공항은 시안 시내에서 약 1시간 거리다. 인천은 특수한 경우지만, 이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공항을 건설한 이유는 시안 인근에 유적지가 워낙 많아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안과 시엔양국제공항 사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발견한 유적지가 한양릉이다. 또한 시엔양은 진시황제가 다스린 진나라의 황궁이 위치한 곳이다. 시엔양은 관중평야에서도 위하의 하류 지역으로 여산을 끼고 있는 풍수지리가 좋은 땅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방궁은 시엔양 지역에 위치한 궁들 가운데 정무를 보는 정전(正殿)의 전전(前殿 )이다. 진나라의 시조는 본래 황하 하류 동해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분파였는데, 후에 간쑤(甘肅)성의 동부로 이주해 유목민족 생활을 한다. 한족과 외모가 다르며 신체적으로 훨씬 체격조건이 우월한 편이었다. 역사서 <사기>에는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이 묘사돼 있다. 지상의 궁전을 본떠 만들었으며, 대량의 수은을 사용해 황하와 양자강을 조성하고 매일 진시황의 관이 중국 전역을 주유할 수 있도록 설비했다. 병마용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4년에 린퉁(臨潼)의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병마용갱의 위치를 근거해, 인근 여산 토질에 수은 함량이 많은 점 등과 연계해 진시황릉의 위치를 파악하게 됐다. 오랫동안 밀폐된 공간에 있던 지하궁전 내의 수은이 공기와 접촉할 경우 대량의 독가스가 발생하기에 발굴을 미루고 있으나, 과학적인 조사에 따르면 그 내부의 모습이나 규모가 사기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과 1.5km 거리에 위치하며, 약 7,000여 개의 사람과 말의 토우가 매장돼 있다. 실제와 같은 크기로 제작됐으며, 같은 모습이 없고 핏줄이나 근육 모양,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병마용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궁전과 성의 문 위치 등도 동일하다. 이에 대해 동방을 숭상하는 종교를 가졌다거나, 동쪽 나라를 평정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 한양릉 병마용만 봐도 사람들은 진시황을 떠올린다. 서양의 드라큘라와 미이라만큼 동양의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양릉에서 출품된 도용(도자기 형태로 제작된 인형)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50~60cm의 자그마한 크기에 팔도 없이 앙상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금성과 경복궁을 크기만으로 비교할 수 없듯이, 한양릉의 도용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안을 찾는 이들에게 병마용뿐 아니라 한양릉도 꼭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중국의 문화를 꽃피운 한나라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나라를 먼저 알아야 하고, 동시에 한나라와 패권을 다툰 초나라를 알 필요가 있다. 진나라는 아방궁을 비롯해 수도 시엔양에 호화로운 성을 지었을 뿐 아니라, 지상의 궁전과 유사한 규모의 지하궁전도 건설했다. 동시에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도 축조했다. 진시황릉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이 즉위한 직후부터이며, 37년 동안 72만명의 인력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사는 황실의 위엄과 통치력을 확보하는 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진시황 사후에 진나라는 곧바로 멸망했다. 진나라의 멸망 후 천하를 얻기 위해 겨룬 이들은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다. 항우는 초반에 우세를 띠었는데, 진나라의 궁전은 물론이고, 병마용갱 등 유산을 모두 불태웠다. 병마용갱은 화재로 인해 내부를 지탱하던 기둥이 소실되면서 함몰됐고, 병마용 역시 심하게 훼손됐다. 다만 도굴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지금도 병마용갱 박물관에 가면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 쪽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병마용은 균열된 자국이 보인다. 일부는 복원하지 못한 것도 있다. 후학자들이 유방이 승리한 이유를 분석하는 데 있어, 평민 출신의 유방이 백성의 고초를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때문에 한나라 왕조 역시 되도록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는 데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한양릉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실제 크기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 크기로 제작돼 있다. 이는 실물 크기로 제작할 경우 백성의 고충이 너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황후의 능과 합장하고 있으며, 다른 왕조와 비교해 소박함이 느껴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특징은 무희나 악사 등 문예와 관련된 도용이 많다는 점이다. 병마용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황궁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에 예인이 많이 포함돼 있다. 특히 한나라 시대의 무용은 궁정 의전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전문 악부가 민간 무용을 비롯해 고대의 의전 무용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서역과 서남 소수민족의 무용 또한 포함돼 있었고, 감정과 예술을 결합시키는 데 대해 관심이 높았다. 사람 도용 외에 동물 도용도 다양하다. 흥미로운 것으로 개보다 작은 크기의 돼지가 있다. 이 돼지는 쓰촨(四川) 지역 등의 토종 품종으로 육질이 훨씬 쫄깃쫄깃하고 맛있다고 한다. 이렇듯 한양릉에서는 궁의 의장군대뿐 아니라 생활용구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부장품이 다수 발굴됐다. ◈ 2011시안세계원예박람회는? 211시안세계원예박람회 (International Horticultural Exposition 2011 Xi’an, China)가 4월28일부터 10월22일까지 178일 동안 시안시 찬바 생태구에서 진행된다. 박람회 주제는 ‘천인장안(天人長安), 창의자연(創意自然)-도시와 자연의 화합 공생’이다. 장안은 시안의 옛 명칭인 동시에 ‘국가번영과 평안의 상징’이다. 마스코트는 시안의 시화인 석류를 형상화한 ‘장안화’다. 중국은 1999년에 쿤밍, 2006년 선양에서 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418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장안탑, 창의관, 자연관, 광운문 등 주요 건축물과 5곳의 테마경관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관은 정자와 연못으로 이뤄진 우리 정원을 조성했다. 정자의 이름은 순천정이다. 조선관은 한옥의 양식과 사뭇 다른 모습의 조선가옥을 선보이고 있다. 언뜻 한옥처럼 보이지만 용마루 끝과 처마 끝에 장식하는 십장생 동물의 형상인 ‘어처구니’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관 내부에는 김정일화를 전시할 예정이다. 입장료 일반표 100위안(한화 1만8,000원), 지정일표 150위안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한국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한국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씨줄날줄] 전자담배/주병철 논설위원

    유럽인으로 처음 담배를 피운 사람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탐험 동료인 로드리고 데 헤레스였다. 탐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에 회부돼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교황 클레멘스 8세(1592~1605)는 거룩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모두 파문한다고 위협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도 1604년 담배금지령을 내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차르 표도로비치 미하일은 담배를 피우면 입술을 잘랐다.담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사례들이다. 신석기시대의 아시아 원시 민족은 이미 흡연의 풍습이 있었다고 고증하는 학자도 있긴 하지만, 담배를 뜻하는 영어 ‘타바코’(Tabacco)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담뱃잎을 담아 피운 파이프 담배에서 유래했다. 유럽을 비롯, 세계적으로 담배를 유행시킨 사람은 콜럼버스였는데 인디언들이 믿고 있는 담배의 약효성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실제 16~18세기 의사들이 진통, 설사에서부터 피부병, 천식, 벌레 물린 데 쓰이는 해독제 등으로 담배를 사용했다. 19세기 들어 미국에서도 구취 등의 치료법으로 담배가 처방돼 어른은 물론 젊은 여성, 어린이까지도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 광해군 때로 추정되며 담배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인조실록에 나온다. 지봉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담바고는 남령초라 하는데 근년에 일본에서 온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번 습성이 되면 잊을 수 없다는 뜻에서 ‘상사초’(相思草)로 불리기도 했다. 담배는 1912년 흡연이 폐암의 원인일 것이라는 외국 논문과 1950년 영국인 의사를 대상으로 한 역학연구 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기호품이 아닌 건강위협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 금연효과가 불확실한데도 전자담배를 찾는 사람이 니코틴 액상 유통량 기준으로 1년 새 23배나 급증했다는 자료가 눈길을 끈다. 니코틴이 들어 있지만 궐련담배보다 유해물질이 적어 금연 보조기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흡연율 세계 1위다. 남성 흡연율은 40%대에서 머물고 있지만 여성은 20%에 육박한다. 흡연인구를 줄이기 위해 최근 담뱃값 인상, 금연구역 확대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타의적인 수단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그렇다면 자의적인 판단의 전자담배 소비자들과 금연과의 함수관계는 어떻게 나타날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7) ‘삼민주의’ 쑨원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7) ‘삼민주의’ 쑨원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1866~1925). 그가 내세웠던 ‘삼민주의’ 곧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구국주의’이다. 삼민주의는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건국할 수 있게 만든 혁명 정신이었고, 외세로부터 중국의 통일을 지켜낼 수 있게 하는 이념적 모토였다. 쑨원의 유훈을 받든 장제스나 마오쩌둥 등에 의해서 삼민주의는 재해석되고 계승되었다. 그리고 지금 쑨원은 중국과 타이완 양쪽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성공한 혁명가 쑨원. 이상이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알고 있는 쑨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실제 쑨원의 삶은 이와 달랐다. 현실의 쑨원은 혁명가로 이름을 내건 이래로 단 한번도 혁명 봉기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신해혁명을 알리는 1911년의 우창 봉기까지도. 한마디로 쑨원의 삶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무엇이 혁명 봉기에 계속 실패한 그를 성공한 혁명가의 아이콘으로 기억하게 만드는가. 쑨원에게 혁명이란 과연 무엇이었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쑨원은, 혁명은 또 어떤 의미인가. ●직업 혁명가 쑨원의 탄생 1800년대 청나라가 외국에 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유일한 곳 광둥성 광저우. 근처 농촌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외국인과 그들의 생활 및 문화에 대해서 낯을 가리지 않았다. 이 지역 출신자가 으레 그러했듯 그의 집안에도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버는 친척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일하는 형 덕분에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에 접할 수 있었고, 이후 의학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청나라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고, 중국은 점차 서구 열강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다. “대체로 중국과 조약을 맺은 나라는 모두 중국의 주인이다. 따라서 중국은 한 나라의 식민지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우리는 한 나라의 노예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노예가 되어 있다. … 이것을 보아도 중국이 안남이나 조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래서 중국을 반(半)식민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내가 만든 명칭에 따르자면 ‘차(次) 식민지’라고 불러야 한다.”(‘민족주의’ 제2강, 1924년 2월) 1895년 전근대시기 세계 최대 제국의 하나였던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서구 열강도 아닌,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에 중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중국의 멸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위기감은 강력한 민족주의적 신념과 혁명적인 방법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쪽으로 쑨원을 몰고 갔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건설하자.’ 혁명이 그의 답이었다. 쑨원은 요동치는 정국을 틈타 혁명 봉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쑨원의 봉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청 정부의 감시와 단속에 발각됐다. 함께 거사를 도모한 동지들 중 일부는 정부군에 잡혀 처형을 당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 이 거사로 쑨원은 반체제의 길로, 직업적 혁명가의 길로 들었다. 이후 혁명은 그의 삶이 되었다. 한번은 쑨원이 해외의 지원자를 모으기 위해 영국 런던에 갔다가 런던 주재 중국 공사관 관헌에게 잡힌 일이 있었다. 쑨원의 자칭 ‘피랍’ 사건은 그의 이름을 중국보다도 해외에서 먼저 반체제 혁명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쑨원은 하와이를 필두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가는 곳마다 중국혁명을 역설했다. 그들로부터 한두 푼 피땀이 가득 밴 후원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불길을 살리고,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해 항상 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는 상관없이 그는 항상 격동하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온몸으로 부딪쳤다. ●혁명, 다시 한번 더 1905년 쑨원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보황회와 힘겨운 각축을 벌였다. 그는 혁명과 공화를 기치로 내건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중국동맹회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당시 쑨원만큼 서구 열강을 다루는 교섭에 뛰어나다고, 해외 화교 사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평가를 받은 자가 드물었던 덕분이다. 쑨원은 중국혁명에 열강들이 개입할까 항상 우려했다. 쑨원에게는 열강들의 이권다툼 속에서 중국의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냉철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쑨원이 도모했던 봉기들, 가령 광둥, 광시, 윈난 등 남서부 변방의 봉기들은 모두 실패했다. 1911년에 일으키려고 했던 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쑨원에게는 중국 국내에 어떠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쑨원을 대하는 서구 열강의 시선도 냉담해졌다. 열강들은 중국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낼 수 있느냐, 쑨원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쑨원이 기댈 것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민중의 불만과 혁명적 열기뿐이었다. 쑨원은 자신을 대하는 서구 열강의 시선이 냉담해질수록 민중의 혁명적 열기에 의지했고, 그것을 혁명 이상으로 녹여 내는 작업에 매진했다. 삶이 계속되듯 쑨원의 혁명은 계속되었다. ●1911년, 혁명정신을 갖고 온 사나이 쑨원은 우창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신문을 통해 접했다. ‘열 번째 패배’에서 잠시 낙담한 뒤,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고 움직이고 있던 찰나였다. 우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이었지만, 쑨원은 서둘러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워싱턴, 런던, 파리를 경유해서 귀국하는 긴 행로를 선택했다. 긴 항해를 마치고 1911년 말 상하이에 도착한 쑨원. 사람들은 그에게 무엇을 갖고 왔느냐고 물었다. 쑨원의 답은 간단했다. ‘혁명 정신’을 갖고 왔노라. 쑨원이 세계를 돌고 돌아 귀국한 까닭은 바로 열강들에게 중국 혁명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 위해서였다. 열강의 이권 다툼으로 중국이 사분오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쑨원에게 중국 혁명의 성공은 외세의 중국 분할 없이 전 영토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형태로 공화제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보여 줬던 통일된 중국에의 염원, 이것이야말로 쑨원을 중국을 낳은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든 힘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후에 쑨원이 보여준 행적도 중국의 통일이라는 궤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화정에 맞춰 비밀결사의 구태를 벗은 동맹회는 국민당으로 거듭났다. 국민당의 대표로 선출된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군사적인 기반이 약했던 그는 초대 대총통의 자리를, 당시 베이징을 중심으로 기반을 잡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에게 양보했다. 쑨원에게서 혁명은 공화정의 수립으로 완성됐기도 했지만,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하나 된 중국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1912년 마침내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그러나 혁명 정신의 완성태로 보였던 공화정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선거를 통해서 만들어진 임시약법은 믿었던 위안스카이 등 정치가들에게 유린당했다. 아첨, 뇌물, 협박과 살인이 횡행했다. 설상가상으로 1915년 위안스카이의 칭제(稱帝)와 군벌의 난립으로 중화민국의 기반은 흔들렸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쑨원의 방식 “또 다른 거사를 분주히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 나는 모든 일을 직접 지휘하겠다.”라고 쑨원은 미국인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중화민국의 성립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진 듯 보이는 쑨원.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국민당을 재정비하고, 혁명 세력을 결집시키고, 그들을 훈련시켰다. 삼민주의로 혁명 정신을 다잡았다. 1923년 쑨원은 마침내 광둥을 진원지로 한 통일을 위해 북벌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시작점에서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1925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쑨원은 단 한번 성공한 1911년의 혁명에서 무참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쑨원은 결과물로 주어진 현실을 견주고, 재고, 제도화하는 정치에 서툴렀으므로 새로 만들어진 공화정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쑨원은 그 실패에서 혁명이 결코 공화제라는 정치체제의 수립만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알았다. 쑨원은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전히 혁명 정신은 유효하고, 중국은 통일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쑨원은 중국의 통일을 향한 외침, 북벌을 선언한 채 죽었다. 그는 혁명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혁명이란 오로지 길 위에서 끝나지 않는 과정으로만 말해지지 않던가. 그래서 쑨원에게 혁명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지금 여기 혁명의 이름으로 그는 항상 살아 있다. 이것이 바로 ‘혁명가’ 쑨원이 갖는 의미다. 최정옥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법정 소송을 통해 일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고종)의 투구와 갑옷을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대한제국의 상징적 적통을 이은 황사손(皇嗣孫·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 이원(49)씨는 29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환수 목표는 왕실의 보물이 돼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이기도 한 그는 유행을 좇는 케이블TV 프로듀서(피디) 출신으로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년째 전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옛 문화 살리기에 노력해 왔다는 이씨는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에서 돌아오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고종의 유품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이르면 오는 6월 제기하겠다.”며 의지를 나타냈다. 영국 왕실의 결혼으로 세계가 떠들썩했던 이날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종약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6년간 어떤 일을 하고 지냈나. -제사를 계속 지냈다. 조선왕릉 40기의 제사와 황실의 5대 제향(조경단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건원릉기신친향례·환구대제)에서 초헌관(제사 지낼 때 첫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맡았다. 1년에 120여회 정도 된다. 600년 넘게 한 왕조의 후손이 애초 양식을 유지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대한제국 때까지의 문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화를 이미지로 복원해 내고 싶다. →그동안 성과가 있었나. -대표적인 것이 2008년 환구대제를 복원한 일이다. 일본이 침략 후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없애고 군 장교들이 머무는 철도호텔을 지었다. 일본이 박아 놓은 말뚝을 빼는 것처럼 우선 이 문화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증을 거쳐 2008년 제례를 되살렸다. 그러나 원래 터에 건물이 들어선 탓에 환구단 시설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서울광장에 환구단을 세우려고 했는데 서울시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 특히 몇 해 전 언론에 ‘황실문화원’을 설립하겠다고 얘기했는데 반발이 컸다. 문화원 이상의 정치적 세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종약원 회원이 500만명이다 보니 마음먹고 뭉치면 (정치 세력을)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울 수 있어 안 한다. 순수한 의미로 문화를 찾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황실의 무능함 탓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냉소적인 국민도 많다. -대한제국은 대비를 못 해서 망한 나라가 맞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정확히 역사를 밝혀서 후대가 그 사실을 토대로 50년, 100년을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지금 대한제국의 문화·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해야 하나. -현재 상황이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과 닮아서다. 우리는 항상 주변 국가가 부강할 때 침략당했다. 이제 문화로 당할 수 있다. 성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봐라. (대한제국의 역사가) 아픔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기억한다. 왜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펼쳐놓고 알아봐야 한다. →정부도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부족한 점을 느끼나. -그렇다. 예컨대 문화재청은 ‘살아 있는 궁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내 할아버지가 나라를 제대로 못 지켜서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 가셨다. 그분이 사셨을 때 왕자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얘기를 직접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낙선재 활용 방안’을 5년 전부터 문화재청과 청와대에 계속 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황사손이 들어와서 궁을 활용하느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재산인데…” 하는 논리를 폈다. →피디 경험을 살려도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자료 속 역사를 드라마로도 직접 제작하고 다큐멘터리로도 만들 것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왕실 문화와 의복, 관습, 혼례, 제례 등 진짜 역사를 담아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다. 이것을 해외로 수출하면 ‘대장금’처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대한제국을 들여다보면 이야깃거리가 엄청나게 많다. 지난해 (고종의 고명딸의 삶을 다룬) 소설 ‘덕혜옹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왜 대한민국 국민은 여기에 감정이입을 할까. 우리도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국내로 돌아오게 됐는데, 문화재 반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난해 10월쯤 혜문 스님이 찾아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증조부인 고종의 투구와 갑옷 등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누군가 황실에서 훔쳐 갔거나 도굴당한 물품이 (문화재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넘어갔고 이를 물려받은 오구라의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얘기였다. 사무라이 문화가 남아 있는 일본이 제후국을 침략해 전리품으로 빼앗는 대표적인 것이 (그 나라 왕의) 투구와 갑옷이다. 그런 의미로 도쿄박물관에 보관된 것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나에겐 할아버지 얘기였기에 너무 화가 났다(침묵). 한 개인이나 스님 한분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문화재청이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혜문 스님은 문화재청 관계자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스님께 물었더니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라면서 “나라가 안 움직이는데 직계손이니까 소송을 해 보라.”고 권했다.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찾아와서 환구단에 놓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소송도 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다음 달로 예상되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이후 도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준비 중이다. 애초 3월 중순에 일본에 가 도쿄박물관장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가서 “내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계손이 소송을 한다면 문제화·이슈화될 것 같다. 그 이후 혜문 스님이 본인이 쌓아온 노하우를 토대로 분위기를 일으킨다면 찾아올 수 있을 듯싶다. 일본이 바로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못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국민이 어떻게 느낄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된다. -왕실의궤가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궤 안의 그림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자료에서 어떤 가치를 끄집어내 지금 시대에 재현해 내느냐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의궤에는 모든 왕실의 행사가 기록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행사는 매우 화려하고 세밀한 문화적 볼거리요, 예술이다. 궁에서 이런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복원해야 한다.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다시 책장이나 박물관에만 넣어 둬서는 안 된다. 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30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의 ‘TV 쏙 서울신문’ 방영 ■ 이원씨는 누구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이다. 부모가 말하지 않은 탓에 어린 시절 출생에 대해 모르고 자랐다. 이름도 왕실 이름인 ‘원’ 대신 ‘상협’을 썼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이씨를 데리고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에게 인사를 시켰고 이 자리에서 집안사에 대해 처음 들었다. 미국 뉴욕기술대(NYIT)에서 방송학을 전공한 뒤 유명 케이블방송사인 HBO에서 프로듀서(피디)로 일하다가 6년 만에 귀국했다.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에서 5년간 일했고, 케이블 채널인 뷰티TV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케이블 채널인 현대방송 피디와 현대홈쇼핑 본부장 등을 지내며 직장인으로 나름의 꿈을 키워 갔다. 황실의 상징적 적통을 이을 수 있다고 직감한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한 출판 기념회에서 삼촌인 이구 황태손을 만났는데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이씨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는 2005년 7월 후사가 없었던 황태손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양자로 들여 법통을 잇도록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삶은 이때부터 180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무려 13m 이집트 파라오 ‘거대 조각상’ 발굴

    무려 13m 이집트 파라오 ‘거대 조각상’ 발굴

    역대 발굴된 고대 이집트 파라오상 가운데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조각상이 최근 출토돼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다. 이집트 유물관리 당국은 “장례의식을 치렀던 3400년 된 룩소르신전에서 제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의 조각상이 출토됐다.”고 지난 27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사료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9대 왕인 아멘호테프 3세는 교묘한 외교로 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우호관계를 쌓고 교역을 활발히 해 신전과 궁전을 건축했다. 이번에 발견된 조각상은 높이가 무려 13m로 역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규모. 거대한 규석벽돌 7장으로 구성돼 있었으며, 이중 하나는 신전 북쪽 입구에 놓여 있었으나 기원전 27년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8년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진 이 조각상은 머리가 사라진 상태다. 이번 출토작업의 총책임자인 압델 가파왁디는 “어딘가 남겨져 있을 이 조각상의 쌍둥이를 찾는 동시에 파괴된 부분을 매만져 원래의 장소에 재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외에도 고대 이집트 신화 속 지혜의 신 ‘토트’와 사자머리를 한 파괴와 재상의 여신 ‘세크멘트’ 등의 조각상 2개가 추가로 발견됐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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