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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만대장경 속 부처의 가르침 재조명

    팔만대장경 속 부처의 가르침 재조명

    꼭 1000년 전인 고려 현종 2년, 거란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는 위기 속에 불력을 빌려 나라를 지키고자 대장경을 새기는 최초의 작업이 시작된다. 76년 만에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당대 불교경전 일체를 한자로 새긴 기록문화의 결정체다. 1232년 몽골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고려왕조는 몽골에 대한 항전의지를 담아 두 번째 대장경인 재조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한다. 1251년 완성된 결실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이다. KBS가 15일 첫선을 보이는 4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다르마’(Dharma·진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는 팔만대장경에 담긴 부처의 가르침을 재조명해 인간의 삶과 죽음, 고통과 해탈이라는 인류 공통의 난제에 대한 답을 모색한다. 윤찬규 PD는 11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려고 내레이션을 없앴다. 대장경의 역사를 개괄하는 1편을 제외하고 2~4편은 지구 반대편 두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전개했다.”고 설명했다. 15일 밤 8시에 방송되는 1편 ‘붓다의 유언’에서는 미국 버클리대 루이스 랭커스터 교수의 3차원(3D) 입체 대장경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세계인들이 붓다의 최후를 기록한 고려대장경을 릴레이로 읽어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세계 최초로 팔만대장경의 영문목록을 작성한 랭커스터 교수는 고려대장경 목판 전체를 가상공간에서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2편 ‘치유’(16일)에서는 미국 매사추세츠의 유매스 메모리얼 병원과 영국 런던 외곽의 아마라바티 불교사원을 넘나들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알아본다. 특히 약물을 쓰지 않고 불교의 수행법을 통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MBSR(정신에 기초한 스트레스 감소법)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뇌졸중 등으로 고통을 겪는 30명의 환자가 8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3편 ‘환생과 빅뱅’(22일)에서는 빅뱅 실험이 벌어지는 유럽핵물리학 연구소와 4100m 고원에 있는 티베트 불교수행처가 교차되며 ‘우리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4편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23일)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과 지리산 쌍계사의 절경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고민한다. 다큐멘터리는 해설 없이 출연자의 육성과 음악으로만 구성된다. 베르나르도 베스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로 1988년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받은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을 맡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청나라 볼모 8년… 소현·효종 형제와 그들 부부의 불운했던 삶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7일만에 폐위 단경왕후… 50년 넘도록 중종만을 그리며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조선 최초 세자 이방석은 여색에 빠지고 세자빈은 불륜을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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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의궤를 제자리로”

    “조선왕실의궤를 제자리로”

    “조선왕실의궤를 강원 오대산 본래 자리로 돌려주세요.” 일본에 있는 오대산 사고본(史庫本) 조선왕실의궤의 국내 환국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 강원도민들은 오대산 사고 문헌이 예전처럼 오대산 현지에 보관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의궤 제자리 찾기’를 추진해 온 범도민추진위원회와 강원도는 10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된 ‘한·일 도서 협정 비준’에 따라 조선왕실의궤 등이 당초 한·일 정상회담 시기로 예상됐던 이달 말 돌아올 것으로 전망되면서 왕실의궤만은 본래 보관 장소인 오대산 사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환국하는 서책은 조선왕실의궤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대전회통, 증보문헌비고 등 총 1205책(권)이다. 이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만을 오대산으로 돌려달라는 것이다. 오대산 사고에는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실록 788책(권), 의궤 380책 등이 보관돼 있었다. 이 가운데 왕조실록 788책은 1913년 일본 도쿄대학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714책이 소실됐다. 나머지 74책은 1932년(27책)과 2006년(47책) 각각 돌아와 현재 서울대도서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이번에 왕조실록의 환수는 월정사 등 불교계가 중심이 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앞장을 섰다. 왕실의궤 380책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으며, 이 가운데 81책이 일본 궁내청 도서관에 보관돼온 사실이 2001년에 확인됐다. 박용옥 강원도 국장은 “문화재청에 확인한 결과 외교통상부 차원에서 정상회담과 연계한 환국 시기를 일본 측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늦어도 이달 말에는 돌아오는 조선왕실의궤,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의 오대산 반환을 위한 범도민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및 왕실의궤 제자리찾기 범도민추진위원회는 그동안 진행해온 100만명 서명 운동을 조기에 마무리하고 서명부를 문화재청과 국회 등에 보낼 예정이다. 20일에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정부와 국회에서 ‘오대산본 제자리 찾기 운동’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기로 했다. 도의회에서도 이에 맞춰 건의문이나 성명서를 채택, 실록과 의궤의 오대산 보관을 촉구할 계획이다. 도는 오대산본 실록과 의궤의 보관을 위한 유물전시관을 2013년까지 완공하기 위한 설계를 하고 있다. 조승호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은 “왕실의궤가 오대산으로 돌아오면 월정사 매표소 인근에 새로 짓게 되는 유물전시관에 보관할 예정”이라면서 “유물전시관은 올해부터 2013년까지 120억원을 들여 내진과 항온·항습 설비를 갖춰 현재 월정사 내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유물 3500여점과 함께 전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7) ‘동의보감’ 허준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7) ‘동의보감’ 허준

    허준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모르면 간첩이라는 농담도 안 통한다. 그만큼 범국민적 인물이라는 뜻이다. 물론 친근한 것 이상으로 신비화되어 있기도 하다. 고난에 찬 삶의 역정, 라이벌들의 비방과 음모, 예진 아씨와의 지순한 사랑 등등. 물론 하나같이 소설과 드라마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이 이미지들로 인해 허준은 400여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명의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 화려하고 강렬한 이미지들로 인해 그의 진면목은 봉쇄되어 버렸다. ●허준이 ‘허준’이 된 까닭은? 먼저, 허준의 라이벌 역할을 담당한 양예수는 실제로 허준의 스승뻘이자 당대 최고의 명의였다. 동의보감 편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만 정유재란 이후 빠졌다. 다음, 많은 이들이 지적했다시피 허준의 스승으로 나오는 유의태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허구적 인물의 등장 자체야 문제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과 드라마의 절정에 해당하는, 허준이 스승 유의태의 몸을 해부하는 장면은 참으로 문제적이다. 이것은 마치 한의학이 미망의 어둠을 거쳐 해부학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학적 편견을 조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예진 아씨와의 러브스토리? 택도 없는 소리다. 사랑이 이렇게 특화된 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우정과 의리가 훨씬 더 중요한 가치였다. 20세기 이후 우정이 사라진 자리를 사랑과 연애가 채웠고, 그 결과 허준을 비롯하여 모든 사극의 주인공들은 본의 아니게(?) 사랑의 화신이 되어야 했다. 아무튼 좋다. 허준의 ‘만들어진’ 이미지 가운데 더 결정적인 결락이 하나 있다. 허준이 ‘의성’ 허준이 된 건 명의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슨 소리? 허준이 전통의학의 아이콘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건 의사로서가 아니다. 양예수를 비롯하여, 당대 허준을 능가하는 명의들은 많았다. 하지만 허준처럼 ‘동의보감’이라는 대저서를 남긴 사람은 없었다. 아니, 조선은 물론이고 동양의학사를 다 통틀어서도 동의보감처럼 방대하고 체계적인 의서는 없다. 고로 허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허준’이 된 건 어디까지나 동의보감이라는 저서 때문이다. 허준의 생애는 의외로 드라마틱하지 않다. 양반집 서자로 태어났지만 그것 자체가 특별한 사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원이 되는 과정도 비교적 순탄했다. 사대부 유희춘의 추천을 통해 내의원에 들어갔으며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면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대부 관료들조차 앞다퉈 도망을 갔지만 허준은 선조의 피란길을 동행함으로써 그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서자 출신임에도 종1품 승록대부에까지 올랐다. 이 정도야 뭐,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밋밋하지 않은가. 이런 허준을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선조다. 더 구체적으론 선조가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맡기면서부터다. 그때 이후, 허준의 이 평범한 ‘성공스토리’는 비범한 삶의 여정으로 변주된다.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살린 것이 부지기수다.”(‘의림촬요’) 허준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자료다. 보다시피 그의 삶을 규정하는 키워드는 의사 이전에 학문이다. 당대 명망 높은 사대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것, 또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많은 의서들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 등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학문적 열정과 집념이었다. ●동의보감의 탄생-전란에서 유배까지 1596년 어느 날 선조는 어의 허준에게 의서 편찬을 명한다. 허준의 나이 58세. 허준의 생애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전란의 와중이었다. 전란 중에 잉태된 의서! -극적이라면 이런 장면이 극적이다. 허준은 그 즉시 유의 정작과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과 함께 프로젝트팀을 꾸렸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과정은 실로 험난했다. 바로 그 다음해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면서 초기 작업은 중단되었다. 난이 수습되긴 했지만, 프로젝트팀은 해체되었다. 결국 의서의 편찬은 허준 개인의 몫이 되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작업의 속도는 한없이 더뎠다. 그렇게 해서 무려 10여년이 지났다. 1608년 2월 1일. 허준의 생애에, 아니 동의보감 편찬의 여정에 결정적인 변곡점이 찾아왔다. 선조가 승하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선조의 위상은 이중적이다. 선조의 등극과 더불어 조선은 훈구파의 집권이 끝나고 마침내 ‘사림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림 내부의 분화와 갈등이 점화되면서 ‘당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는 특히 북인 안에서 대북파와 소북파의 분화가 심각하게 재연되는 때였다. 대북이란 선조의 후계자인 광해군을 미는 쪽이고, 소북이란 선조가 말년에 낳은 영창대군을 미는 쪽이다. 한데, 하필 선조가 승하할 당시 내의원 전체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도제조가 유영경이었는데, 이 유영경이 바로 소북파의 리더였다. 대북파에서 이 사건을 간과할 리 없다. 어의 허준에게 책임을 묻고 그 책임은 허준의 상관인 유영경에게까지 미쳤다. 허준도 이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지만 광해군한테 허준은 특별한 존재였다. 왕자 시절 두창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할 적에 다른 어의들은 약을 썼다가 허물을 뒤집어쓸까봐 망설였지만 허준은 과감하게 약을 써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빗발치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허준을 적극 방어해 주었다. 이를테면, 허준을 위기에 빠뜨린 것도 의술이었고, 허준을 구해준 것도 의술이었던 것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래도 유배만은 피할 수 없었다. 69세의 나이로 머나먼 의주땅으로 유배를 가야 했으니, 참으로 고단한 말년이었다. 하지만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두었다던가. 유배기간은 1년 8개월.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다. 이때 한 작업은 전체 분량의 반에 해당한다. 유배지는 그에게 집필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마련해준 셈이다. 대반전! 만약 이 작업이 없었다면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얼마나 억울하고 쓸쓸했으랴. 허준으로 인해 동의보감이라는 비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동의보감은 무엇보다 그 편찬자인 허준의 생을 구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다. 흔히 생각하듯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있었기에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허준과 동의보감이 바로 그런 관계였던 것. 71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돌아오자마자 허준은 후반부 작업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동의보감을 완성해서 조정에 바친다. 시작한 해로부터 따지면 무려 14년의 기나긴 여정이다. 조선으로서도 전란과 정권교체, 당쟁 등으로 이어진 초유의 시간이었고, 허준으로서도 영광과 오욕을 한꺼번에 누린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이후 내의원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역병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등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선조는 허준에게 의서편찬을 명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기존 의학사의 난만한 흐름을 정리하라는 것, 둘째, 질병이 아니라 수양을 중심으로 한 양생서를 쓰라는 것, 마지막으로 조선의 약재를 가난한 백성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는 것. 허준은 선조의 세 가지 당부를 훌륭하게 구현해냈다. 먼저, 동의보감에는 의학사의 양대 지존인 ‘황제내경’과 ‘상한론’을 비롯하여 손진인의 ‘천금방’, 이천의 ‘의학입문’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의학사의 최고봉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 바탕 위에서 허준은 오랜 기간 서로 갈라져 온 양생과 의술을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였다. 즉, 그는 병과 처방이 아니라, 몸과 생명을 전면에 내세웠다. 질병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해서 구성된 ‘내경’-‘외형’-‘잡병’-‘탕액’-‘침구’로 이어지는 목차는 어떤 의서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분류학의 결정판이다. 아울러 처방과 약재들의 방대한 목록은 자연사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말하자면, 최고의 지적 성취와 가장 대중적인 용법을 두루 갖춘 의서가 탄생한 셈이다. 그것을 가능케 했던 핵심 키워드는 단연 양생이다. 양생은 단지 임상을 넘어 존재의 우주적 ‘탈영토화’를 꿈꾸는 ‘삶의 기술’이다. 요컨대, 양생이라는 비전 위에서 몸과 우주, 질병과 자연, 생명과 존재의 근원적 일치를 기획했던 자연철학자, 그것이 허준의 진면목이다. 고미숙 감이당 연구원
  •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 禮學에 빠진 조선후기, 왕실 저출산 낳았다

    禮學에 빠진 조선후기, 왕실 저출산 낳았다

    조선시대 상소문을 보면 재밌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자연재해로 농작물 수확이 시원찮을 경우,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노총각, 노처녀를 시집·장가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노총각, 노처녀의 원성이 쌓이다 보니 하늘에 노기가 치밀고, 이 때문에 날이 가물어 농사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재해는 하늘의 뜻이니 제왕된 자는 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 유교적인 해석인데, 정작 이런 유교사상이 왕조의 목을 졸랐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왔다. ●인조이후 왕실자녀 절반 급감 계간지 정신문화연구 가을호에 실린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조선시대 왕실여성의 출산력’에 담긴 내용이다. 왕조시대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자식 생산이다. 그런데 김 연구원이 선원계보기략, 돈녕보첩 같은 왕실 족보를 분석한 결과 조선 후기 들어 왕실의 출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앞서 태종~선조 때까지는 자녀 수가 보통 20~29명에 이르렀으나 인조 이후에는 4~14명에 그쳤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는 유교 사상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김 연구원의 분석이다. 유교 사상 강화는 특히 예학(禮學)의 발달을 뜻한다. 강화되다 못해 교조화된 예학은 왕조의 정통성을 오직 ‘정실부인을 통한 맏아들’에게만 줬다. 널리 알려진 ‘예송논쟁’도 결국 적장자냐 아니냐를 따지다 벌어진 일이다. 논란이 어떤 결론으로 치달았는지는 수치상으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시대 왕실 자녀 수는 모두 273명이었는데 인조 이전은 183명, 인조 이후는 90명이었다. 왕비에게서 난 자식은 59명에서 34명으로, 후궁에게서 난 자식은 127명에서 53명으로 줄었다. ●적장자에만 정통성·후궁 홀대 왕실 자녀 수 자체가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정실부인보다 후궁에게서 난 자식 수가 더 크게 줄어든 것이 드러난다. 정실부인을 통한 맏아들에게만 권위를 인정하다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실제 조선 전기에는 으레 후궁 3명은 기본적으로 뒀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후궁은 가급적 줄이고, 들이더라도 정비의 소생이 없을 경우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정비가 일찍 죽더라도 후궁을 승진시키기보다 계비를 맞는 방식으로 대체했다. 이렇게 후궁을 홀대하니 후궁으로 들이려는 집안도 점점 줄어들었다. ●제사 때도 왕에게 엄격한 금욕 게다가 예학의 발달은 왕에게 엄격한 금욕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3년상이다. 주자가례는 ‘2년이 지나면 침실로 돌아간다.’고 규정짓고 있다. 최소한 2년은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 때도 3일 재계를 해야 한다. 김 연구원은 제사기록을 추정치로 만들어본 결과, 조선 후기 제사 대상자가 6명으로 가장 많았던 6월과 8월에는 한달 30일 가운데 18일이 금욕일이었다고 전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은 출산행위 같은 사적인 일상생활에까지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했지만, 사실 왕조시대에서 왕과 출산은 그렇게 사적인 일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선 후기의 과도한 예학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쳤는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례로 보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용어 클릭] ●예송논쟁(禮訟爭) 효종과 효종비가 1659년과 1674년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효종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두 차례의 의례 논쟁. 1차 논쟁 때는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국왕 자리에 올랐으니 장남 대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3년)과 태생대로 차남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1년)이 맞붙었다.
  • 드라마·K팝 이어… 日 서점가에도 ‘한류’

    드라마·K팝 이어… 日 서점가에도 ‘한류’

    드라마와 K팝에 이어 일본 서점가에도 한류 붐이 일고 있다. 2일 각종 통계를 조사해 발표하는 오리콘에 따르면 한국 조선왕조 역사를 다룬 책인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조선왕조 역사와 인물’(강희봉 저·시쓰교노니혼샤)이 오리콘 책 종합 판매랭킹에서 처음으로 10위권 내에 랭크됐다. 누계판매 10만 9000부, 주간 2만 9000부를 판매해 10월 3일 자 오리콘 북 랭킹에서 7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일본에서 연예인들의 사진집이 아니고는 베스트셀러에 오른 우리나라 책이 별로 없었던 데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역사는 물론 역대 27명의 왕, 왕실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한국 역사 드라마를 즐겨보는 일본 시청자들이 조선시대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가이드 북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제작돼 한국에서도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의 역사 드라마가 자주 방영되면서 조선 왕조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본격적인 한류 시대극을 즐기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이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지난 7월에 발매돼 한류 역사 드라마 마니아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판매부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8월 22일 자 오리콘 북 랭킹에 처음으로 100위권 내에 진입한 이 책은 9월 5일부터 매주 판매부수가 올라가며 인기를 끌면서 장르별 신간부문과 주요 서점 신간 판매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오리콘 관계자는 “책 구매자 연령층은 시대극을 즐기는 40대 이상이 주를 이룬다.”며 중장년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드라마 ‘대장금’ ‘이산’ 등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일본 서점가에도 한류

     드라마와 K팝에 이어 일본 서점가에도 한류붐이 일고 있다.  2일 각종 통계를 조사해 발표하는 오리콘에 따르면 한국 조선왕조 역사를 다룬 책인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조선왕조 역사와 인물(강희봉 저·시츠교노니혼샤)’이 오리콘 책 종합 판매랭킹에서 처음으로 10위권 내에 랭크됐다. 누계판매 10만 9000부, 주간 2만 9000부를 판매해 10월 3일자 오리콘 북 랭킹에서 7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일본에서 연예인들의 사진집이 아니고는 베스트셀러에 오른 우리나라 책이 별로 없었던데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포함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역사는 물론 역대 27명의 왕, 왕실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져 있다. 한국 역사 드라마를 즐겨보는 일본 시청자들이 조선시대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가이드 북이다. 조선 왕조 실록을 기초로 제작돼 한국에서도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데 일본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의 역사 드라마가 자주 방송되면서 조선 왕조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본격적인 한류 시대극을 즐기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이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지난 7월에 발매돼 한류역사 드라마 마니아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판매부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8월 22일자 오리콘 북 랭킹에 처음으로 100위권 내에 진입한 이 책은 9월 5일부터 매주 판매부수가 올라가며 인기를 끌면서 장르별 신간부문과 주요 서점 신간 판매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오리콘 관계자는 “책 구매자 연령층은 시대극을 즐기는 40대 이상이를 주를 이룬다.”며 중장년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 드라마 ‘대장금’ ‘이산’ 등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 역사책의 베스트셀러 진입은 일본에서 부는 한류 바람이 드라마와 K팝, 연예인들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한류 문화 전반에 파급되는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안중근 시복시성 추진해야”

    “안중근 시복시성 추진해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숨지게 한 토마스 안중근은 살인자인가 가톨릭의 예비 성인(聖人)인가.’ 28일 오후 1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여는 심포지엄에선 안중근(1879~1910) 의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발표된다. 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 황종렬 박사의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가 화제의 논문. 황 박사는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한국천주교가 안중근 의사를 가톨릭 최고의 명예인 복자와 성인의 품에 올릴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 박사의 논문은 최근 ‘안중근’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처음으로 안 의사의 성인 반열을 거론한 만큼 천주교계의 큰 반향을 부를 전망이다. 19세 때인 1897년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가족 친척과 함께 영세를 받은 안 의사는 황해도 일대를 돌며 전교활동을 한 신앙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이며 뤼순 감옥에서 형장으로 나아갈 때도 기도를 잊지 않은 신실한 신자로 기록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천주교에서도 죄악이 아닌가.”라는 일본 검사의 신문에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고 응대했던 그다. 이토 저격 사건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1854~1933) 주교는 ‘살인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형에 앞서 마지막 성사를 원한 안 의사의 요청을 거부했고, 심지어 안 의사에게 성사를 베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빌렘(1860~1938) 신부에게는 미사 집전 금지조치를 내렸다. 황 박사는 안중근의 유년기부터 신앙 입문기, 교육 활동기, 의병 항거기, 동양 평화 수인기에서 최후까지를 거론하면서 독실한 신자로서의 신앙적 측면이 간과된 채 그저 ‘이토 살해자’로 부각돼 온 종전의 안 의사에 대한 평가는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황 박사는 “어떤 한 사건을 놓고 그 이전과 이후의 역사와 시공적으로 가능한 한 분리해 의도적으로 고립시켜 판단하려는 경우가 있다.”며 안 의사의 평가도 그런 예에 속한다고 말한다. 황 박사는 “안중근은 뤼순을 일본과 청나라, 한국이 형제국으로서 동양의 평화를 이루고 세계의 평화를 구현하는 데 함께 연대할 거점이 되게 할 것을 제안했다.”며 “그가 현대 가톨릭 교회의 모범이자 동아시아와 세계 가톨릭 교회, 전 지구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고해성사를 통해 정화를 거친 영혼으로 상징되는 갈림 없는 마음으로 이토 저격 이후 일관되게 증거한 그의 믿음과 민중과 조국에 대한 투철한 사랑에 있다.”고 못박았다. 황 박사는 결국 “하느님의 종이나 시복시성 여부는 교회가 판단할 일”이라면서도 “안중근의 저격부터 죽음에 이르는 151일간 그의 생애를 다시 한번 믿음의 마음으로 만나자.”고 제안한다. 황 박사가 논문을 발표할 심포지엄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2차 시복을 추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 그 자리 자체가 뮈텔 주교 이후 한국 천주교에서 줄곧 배척당하던 안 의사의 위상 차원에서 큰 변화로 관측된다. 안 의사는 순국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3월에야 정진석 추기경 집전으로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공인돼 공식적으로 천주교의 품안으로 들여졌다.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李대통령 결과 중시… 최종기록만 남겼을 것”

    대통령 기록물의 양은 대통령 업무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대통령 기록물의 양은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명박 대통령 기록물의 양이 전임 대통령의 8분의1이라고 해서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의 8분의1만큼만 일했을 리는 없다. 정책 논의 과정보다는 최종 결정 단계에서만 전자기록이나, 종이문서를 남겼을 수 있다. 아니면 불필요한 사진, 오디오·비디오 테이프 등은 굳이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스타일에서 빚어진 결과라는 분석들이 많다. 정권 운영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역사 앞에서 평가받겠다는 의도로 통치와 관련된 모든 기록물을 남기고자 제정된 것이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다. 대통령 전자기록물은 청와대 업무관리 프로그램인 ‘위민 시스템’ 또는 ‘온나라 시스템’에서 주로 생산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간행물, 종이문서, 기타 종이기록물, 선물, 사진 등 비전자기록물이 계속 줄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1만 885건, 2009년 5669건에서 올해는 4299건으로 줄어 전체 대통령 기록물의 5%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5년 동안 120만건이 넘는 비전자기록물을 남겨 전체 기록물의 15% 가까이 되는 전임 정부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전자기록물은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 공식적인 성격을 띠지만, 종이문서 등은 아무래도 좀 더 비공식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아 파기의 유혹도 많이 느낄 수 있다.”면서 “권위주의적 속성을 가진 권력일수록 내부를 비공개하려는 특성이 강하지만 미국 등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민주적인 정부일수록 더욱 투명하게 정책의 결정과 집행 과정 등을 공개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꼬집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보면 어떤 기록을 남길지 어떻게 분류해서 남길지 등에 대한 임의재량권이 너무 많다.”면서 “정치학자, 행정학자는 물론 서지학자들까지 포함해 공청회를 갖는 등 좀 더 정교한 방향으로 법 개정을 논의할 때”라고 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현재 대통령기록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역대 전직 대통령 기록물은 모두 868만 352건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하는 등 기록물 보존에 열의를 보였던 참여정부가 남긴 825만 3715건을 제외하면 42만 6637건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김대중 정부 때의 20만 2348건까지 빼면 50년 동안 남긴 대통령 기록물은 22만 4289건 뿐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고 사실상 모두 폐기처분했거나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모두 싸가지고 갔음을 보여준다. 정치적이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기록 등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특히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대통령으로서 임기 중 통치기록을 후대에 남겨야 할 어떤 법적 의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료 파기가 더욱 관행화한 측면도 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을 가진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모습이다. 역대 전직 대통령 기록물의 소장 현황을 보면 이승만 정부가 7만 4279건을 남겼고, 전두환 정부 4만 3078건, 박정희 정부 4만 1328건, 김영삼 정부 3만 9528건 등 순이었다.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감탄하는 왕실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사실 관계에서 어긋남이나 빠짐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내용적으로 충실했을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후대 왕이 기록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드는 등 정교하고 치밀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대통령 기록물 관리의 정교한 운용을 촉구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열린세상] 전통공연의 변화와 확장/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열린세상] 전통공연의 변화와 확장/이세섭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

    최근 들어 전통 공연이 다양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전통 판소리가 외국인에 의해 연출돼 ‘오페라 혹은 뮤지컬 형식’으로 제작되는가 하면 화려한 무용극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외국 사신 접대와 연회를 베풀었던 경복궁 경회루에서는 누각뿐 아니라 서쪽의 인왕과 북쪽의 북악 등 주변 산봉과 근정전 등 전각 지붕선의 자연미까지 그대로 ‘무대’로 살려내 빼어난 누각 건축미와 함께 최고의 전통 공연 향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민족 대명절인 추석 연휴를 전후해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수궁가’가 독일 오페라 연출가이자 무대 디자이너이며,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아힘 프라이어의 연출을 통해 무대에 올려져 공연계의 이목을 끌었다. 오직 창자와 고수의 단출한 ‘독립 공간’이었던 전통 판소리 공연의 무대가 이 공연에서는 ‘설치미술’의 전시관이었다. 무대는 흰 바탕(1막, 2막은 검은 바탕)에 굵은 붓질이 지나가며 큰 선(線)을 이뤄 산과 물, 별과 달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한국적 정서를 빚어낸 한 폭의 수묵화였다. 여기에 바다를 파란색으로, 육지를 노란색으로 원색의 조명을 비춰 무대를 물들였다. 높이 5m에 달하는 사다리형 설치대를 같은 높이의 한복 치마로 두른, 그 위에서 이끈 도창(導唱)의 의상은 이날 무대장치의 하이라이트였다. 젊은이들에게 고루하게 여겨진 판소리 무대, 창극의 무대가 서양 오페라 연출가의 손을 통해 현대적 이미지의 깔끔하고 세련된 무대로 태어나면서 흥미와 감동이 더해져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정(靜)과 동(動)이 절묘하게 결합된 시각적인 무대 미학이 판소리의 ‘청각적인 소리’에 더해져 빛을 발했다. 판소리는 단출하고 지루한, 오직 소리로만 관객의 청각을 집중시켜 몰입으로 소통했던 ‘우리 전통 예술’이다. 이런 소리에 다양한 연출 기법을 시도하면서 화려한 무대예술로, 현대적 내용의 익살과 풍자로 내용을 재해석하고, 다양한 연기를 얹으면서 관객과의 소통 통로를 청각과 시각으로 다양화해 전통 예술의 인식을 확장한 변화의 시도였다. 시각적으로 소박했던 우리 판소리가 화려한 볼거리와 방대한 출연진, 극적인 요소로 가득한 ‘오페라’ 혹은 ‘무용극’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전통적 관객인 노인층과 장년층 외에 젊은 층의 발길이 공연장으로 향했다. 연령대별 관객뿐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등에 몰렸던 다른 장르 관객들도 공연장을 찾았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지난 17일 오후 8시 서울 경복궁 경회루(국보 224호)에서 마련한 ‘경회루 연향’ 역시 경회루와 주변 자연경관을 무대화한 새로운 연출의 전통 공연이었다. 어둠의 정적을 깨고 경회루 서편 만세산에서 들려오는 이생강 명인의 대금산조, 궁중정재 가인전목단과 오고무, 선유락은 조선시대 외국 사신이 왕실을 찾았던 당시처럼 경회루 누각에서 펼쳐져 그 아름다운 한국의 춤사위를 경복궁 전각의 곡선미와 함께 야경에 실어 연못 주변 객석으로 내려 보내며 환호를 이끌어 냈다. 공연이 무르익어 갈 무렵 연못에 미끌어지듯 들어오는 나룻배 한 척이 관객의 시선을 모았고, ‘국창’ 안숙선 명창이 나룻배 위에서 판소리 ‘심청가’ 중 뱃노래를 구성지게 부르자 700여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500년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의 야경과 경회루 누각의 건축미를 무대화하고, 한국 최고의 가(歌) 무(舞) 악(樂)을 결합해 새로운 형식의 전통 공연을 연출한 초가을 밤의 감동이었다. 비록 판소리뿐 아니라 이날 ‘경회루 연향’처럼 우리 전통 무용과 전통 국악기 연주, 연희 등 전통 공연들이 갖는 ‘민족 미학’이란 본질을 유지하면서 연출의 기법, 연주의 변주(變奏)를 통해 흥미와 감동을 유발하고, 관객과 소통하면서 다양한 관객층을 확보해 나간다면 고답적이라고만 여겨진 우리 전통문화가 ‘어제의 문화’가 아닌 ‘내일의 문화’로 재발견되고, 새롭게 탄생하지 않을까. 우리 전통의 원형은 유지하되 이를 새롭게 창조하여 소통과 향유의 폭을 넓혀 가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의미의 실천으로 현대문화에 도취된 관객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새롭게 이해시키고, 전통문화의 전승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로야구] 2000경기 출장 -1

    [프로야구] 2000경기 출장 -1

    18시즌을 뛰면서 변변한 개인타이틀 하나 없었던 프로야구 선수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숭용(40·넥센).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타이틀을 갖게 됐다. 최고령 2000경기 출장 기록이다. 심지어 이적 없이 한 팀에서만 올린 기록. 프로야구 사상 처음이다. ●18시즌 한팀에서 뛰어… 사상 첫 기록 화려하지도 강하지도 않았지만 우직함 하나로 버텨 온 이숭용의 야구인생을 가장 적확하게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숭용은 15일 현재 개인통산 2000경기 출장에 단 한 경기만을 남겨 놓고 있다. 이날 목동 두산전에는 나오지 않았다. 2008년 전준호(전 SK 코치) 이후 통산 여섯 번째, 현역으로는 박경완(SK)에 이어 두 번째다. 40세 6개월 5일인 그는 넥센의 김동수 코치가 2008년 세웠던 최고령 2000경기 출장 기록도 경신한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1994년 태평양에 입단한 뒤 팀이 현대에서 넥센으로 바뀌는 동안 한 팀에서만 활약하며 세운 기록이라 더욱 뜻이 있다. 이숭용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야구를 해 의미있는 대기록을 세우게 됐다. 가족의 헌신과 코칭스태프, 동료 선수, 구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기록이다. 앞으로 몇 경기 안 되지만 은퇴까지 최선을 다해 플레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40세 6개월 5일’ 최고령 출장 기록 사실 기록만 놓고 보면 이숭용은 불세출의 톱타자는 아니다. 통산 타율 .281, 안타 1727개에 홈런 162개다. 타율이 3할대를 넘은 것은 딱 세 번,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은 한 시즌도 없다. 하지만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불우한 팀으로 손꼽히는 현대에서 그가 헤쳐온 나날들을 돌아본다면 이숭용은 또 하나의 레전드로 기억될 자격이 충분하다. 1996년 현대는 태평양을 인수한 뒤 12년의 팀 역사 동안 네 차례 정상에 오르며 ‘현대 왕조’로 불렸다. 이숭용은 2003년부터 5년간 주장을 맡아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1998년 첫 우승 때, 2003~04년 2연패를 할 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그의 손으로 잡아냈다. 그러나 2007년 팀이 해체라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불안해하는 선수들을 다독이는 것은 주장 이숭용의 몫이었다. 2008년 1월 기자회견에서 그가 보인 눈물은 아직도 많은 야구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후 현대는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에 의해 재창단되며 히어로즈로 바뀌었고 그동안 연봉 삭감 등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팀을 이끌었던 것이 이숭용. “현대엔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 실력이 모자란 내가 어떻게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고, 내가 내린 답이 바로 리더로 선수단을 잘 이끌어가는 것이었다.”고 이숭용은 말한다. 그의 이름 앞에 ‘캡틴’이 붙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18일 삼성전에서 은퇴… 지도자 변신 18일 삼성전에서 은퇴식을 치르는 이숭용은 지도자로 야구인생 제2막을 시작한다. 구단의 지원으로 해외 지도자 연수를 마친 뒤 코치로 현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 동료들을 이끌었던 ‘숭캡’ 이숭용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책꽂이]

    ●문자메시지는 언어의 재앙일까? 진화일까?(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이주희·박선우 옮김, 알마 펴냄) 영국의 언어학자인 저자는 문자메시지가 언어를 파괴한다는 주장에 맞섰다. 단어를 단축하는 데 능숙한 아이일수록 철자 시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1만 5000원. ●몸으로 책읽기(명로진 지음, 북바이북 펴냄)방송인 겸 작가인 저자의 서평집. 조선 왕조에 대한 책을 읽고 왕릉을 찾고, 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술을 마시는 등 ‘몸으로’ 책을 읽은 기록이 재기 넘치는 문장에 담겼다. 1만 2000원. ●정진홍의 사람공부(정진홍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지난 10년간 500여명의 스승을 만났다는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체 게바라, 반 고흐, 이순신, 송해 등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물을 통해 성찰한 내용을 풀어냈다. 1만 5000원.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강병철 지음, 작은숲 펴냄) 해직교사 출신으로 공주공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저자의 청소년 소설. 1960~70년대 서울 변두리 중학교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전학 온 주인공의 성장을 그렸다. 1만 1800원. ●퇴마록-국내편(전2권)(이우혁 지음, 엘릭시르 펴냄) 1994년 3권으로 나와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이 2권짜리 소장판으로 새롭게 발간됐다. ‘퇴마록 해설집’에 실렸던 용어 해설을 줄이고 문장도 가다듬었다. 각 권 1만 4800원. ●미치광이화가 IN에덴(김선도 지음, 돌판 펴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며칠 뒤 전쟁을 펼친다는 내용.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흥미진진한 상상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이 시대의 선과 악, 과연 우리는 오늘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저자가 현직 치과의사여서 더 눈길을 끈다. 1만 1000원.
  • [박재범 칼럼] 소용돌이의 정치와 북한

    [박재범 칼럼] 소용돌이의 정치와 북한

    역시 한국 정치의 소용돌이는 세차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1950~60년대 한국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은 ‘소용돌이의 정치’였다. 다음 달 말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일으킨 돌풍은 블랙홀급이다. 세상에는 그러나 정치게임의 역동성보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 더 영향을 주는 변수가 여럿 있다. 첫번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북한이다. 이 점에서 선거바람이 한창인 이때 북한을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북한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변화 조짐이 뚜렷하다고 진단한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깜짝쇼로 등장한 3대세습 왕자 김정은의 퇴조다. 김정은 대신 김정일 위원장의 활기찬 모습이 자주 공개되고 있다. 지난 5월 중국 방문 때에 비해 러시아 방문길의 김 위원장은 훨씬 좋아보였다. 담배를 다시 피운다는 얘기도 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30년간 머물렀다. 김정은이 권력을 넘겨받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릴 전망이다. 건강을 되찾은 김 위원장은 어떤 행로를 걸을까. 1990년대와 현재를 비교해보면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일성은 1990년대 초반 옛 소련의 소멸을 지켜봐야 했다.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핵 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 긴장수위를 높였다. 때맞춰 북한 경착륙론이 세계를 풍미했다. 김일성은 상황 타파를 위해 서울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 준비작업 중 갑자기 심장쇼크로 숨졌다. 이로써 한반도의 지형 변화는 무산됐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과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다. 재스민 혁명 등 아프리카 우방의 붕괴를 바라보고 있다. 경제난은 도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핵과 함께 재래전 위협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 김 위원장은 위키리크스에서 폭로한 대로 중국을 믿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겉으로만 융숭하게 접대하는 데 실망하는 모습이다. 차선책으로 러시아의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 금강산은 봉쇄했지만, 개성공단은 4만 3000명에서 4만 8000명으로 근로자 수를 늘리고 있다. 사면초가에 처한 김 위원장의 불안한 내심을 엿볼 수 있는 사안이 최근 하나 있었다. 북한 TV는 지난 6월 한국 측이 남북 접촉을 매수하려 했다고 일방주장했다. 한달 전 중국 방문에서 돌아온 김 위원장이 왕왕 있었을 법한 낮은 단계의 남북 접촉에 불벼락을 내리자 실무자들이 화들짝 놀라 뚱딴지 같이 나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 위원장이 예민해졌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상 층부의 이런 움직임보다 한층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다. 똑같은 위기 시대인 1990년대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북한 주민의 사상은 견고했다. 지금은 배급체제가 무너진 탓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정보와 의견의 소통이 활발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한류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최근 북한 이탈 주민들은 체제 비교 때문이 아니라 시장과 문화의 매력에 이끌려 탈북을 결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앞에 두게 된다. 하나는 북의 변화가 언제 우리의 현실 생활을 좌우할 사안으로 대두될 것인가, 둘째는 한반도의 변화 관리를 위한 대화 상대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시장과 문화의 변화는 근본적이어서 되돌이키는 게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이 60년 전 설계한 현행 유일신 형태의 봉건왕조는 지속가능성이 극히 낮다. 대화는 설익은 김정은보다 아무래도 산전수전 다 겪고 고민이 깊은 김 위원장이 적절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지금 생존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정적 변화에 목을 매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남북정상회담 외에는 달리 묘책이 없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실력과 북한의 여건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한국은 북의 좌충우돌식 행보에 단호하게 대처하되 취약한 여건을 염두에 두고 유연한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해야 할 시점이다. 북한발 소용돌이는 국내 정치의 그것보다 범위와 강도가 넓고 크다. jaebum@seoul.co.kr
  • 이승만 박사, 건국의 아버지? “이미지 전쟁 통한 역사 선전”

    이승만 박사, 건국의 아버지? “이미지 전쟁 통한 역사 선전”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이시요, 세기의 영도자이신 국부”, “그의 생일에는 3군 분열식이 거행되는 등 국경일보다 더 성대했고, 학생들은 그를 찬양하는 글짓기를 해야 했다.”, “그가 출마하지 않겠다는 유시를 내리자 노총에서는 소와 말까지도 그의 출마를 원한다는 이른바 우의마의(牛意馬意) 소동을 벌였다.” 이처럼 낯 간지러운 호칭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동을 벌인 나라의 지도자는 대체 누굴까. 김일성? 카다피? 아니면 미래의 김정은? 답은 ‘이승만’이다. 1956년 서울 남산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그의 호 우남을 따서 우남정, 우남공원, 우남도서관 등이 들어선 데 이어 1955년엔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려고도 했다. 무산되지 않았다면 한국판 스탈린그라드, 한국판 김일성대학이 탄생할 뻔했다. 계간지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린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이승만과 3·15 부정선거’에 담긴 내용이다. 서 교수는 왜 고(故)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심은 사람이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파괴한 사람인지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래도 이승만은 박정희와 달리 선선히 물러나지 않았느냐.’는 옹호론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이 전 대통령은 ▲고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공수특전단 같은 직속 진압부대가 없었고 ▲군 지휘도 간접적이었던 데다 ▲차지철(박 대통령 재임 당시 경호실장)과 달리 ‘2인자’ 이기붕이 뇌중추마비로 나약했으며 ▲본인 자신도 85세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이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어올리며 ‘역사 전쟁’을 시도하는 세력에 대한 통렬한 십자포화다. ‘역사문화’ 개념으로 현 상황을 분석한 이동기 서울대 평화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의 ‘현대사 박물관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글은 더 주목할 만하다. 이 교수가 보기에 역사 전쟁의 성패는 역사적 사실이 쥐고 있는 게 아니다. 현 정권이나 뉴라이트 진영의 관심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문화의 헤게모니 장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문적 역사서술이나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교과서 문제, 역사기념일과 기념관, 박물관과 전시회, 신문과 방송을 통한 역사 선전에 집중한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일종의 변칙공격인 셈이다. ‘사실’보다 ‘이미지’ 전쟁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이미지 전쟁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은폐, 왜곡하거나 비판적 역사의식을 억압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들 나름의 새로운 서사와 종합적 거시 역사관을 끌어들여 희생, 억압, 저항을 주변화하거나 의의를 축소 혹은 상대화하는 것”이자 “기괴한 개념과 플롯으로 구성된 메타역사(Meta-History)를 그려놓고 불편한 역사적 사실들을 탈맥락화하면서 역사비판을 교란시키고 무화시키는” 작업이다. ‘성공의 역사’라는 키워드에 맞지 않으면 무시해 버리고, 연관이 있다 싶으면 ‘이게 다 그분 덕’이라고 칭송하는 방식이다. 이 교수는 비교사례로 독일 역사박물관을 든다. 통일 뒤 독일은 1994년 본에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의집’을, 2006년 베를린에 ‘독일역사박물관’을 열었다. 둘 다 첫 논의는 1983년 시작됐다. 제안자는 16년간(1982~1998년) 총리를 지낸 보수주의자 헬무트 콜. 배경엔 역사적 정통성이란 측면에서 동독과의 경쟁이 깔려 있었다. 그의 제안 연설에는 독일민족의 ‘위대함’, ‘발전’, ‘성공’ 같은 단어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곧 역풍을 맞았다. “학문적으로 ‘성공한 역사’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권력정치적 해석에 기초한 역사박물관은 왕조시대 ‘궁정박물관’으로 전락할 것이다.” 등 정치·역사학계의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10~20년에 걸친 대대적인 논쟁과 수정작업 끝에야 각각 문을 열 수 있었다. 이 교수는 “콜 총리를 비롯해 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이들은 자의식이 강한 고루한 우파였지만 비판의견들을 수용했다. 어쨌든 그들은 ‘민주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보수주의자들은? 현 정권이 추진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대해 이 교수가 “극우파 보수세력의 정신적 위안소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객주/임태순 논설위원

    산업자본주의는 시간차에 기반을 둔다. ‘새로운 제품’ 대 ‘유행이 지난 제품’이라는 구도다. 신제품이 아니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상업자본주의는 공간의 차이를 이용해 이윤을 창출했다. 바닷가 소금과 내륙의 곡물이, 개성 인삼과 중국 비단이 거래를 통해 이윤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지역에서 나오는 물건이 다른 곳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공간의 한계 때문이었다. 물물교환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에서 공간차의 간극을 메워준 것이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봇짐(보따리)장수를 뜻하는 ‘보상’(褓商)과 등짐(지게)장수를 가리키는 ‘부상’(負商)의 합성어다. 보부상은 건어물, 옷감, 신발 등 일용잡화를 짊어지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으니 그들의 삶에는 시대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들의 물건을 맡아 흥정을 붙이고 잠자리도 제공하면서 동고동락하던 사람들이 객주(客主)다. 역사의 뒤편에 머물렀던 보부상의 삶을 문학으로 조명한 사람은 소설가 김주영이다. 그는 1979년 6월 1일부터 1984년 2월 29일까지 장장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객주’를 연재했다. “소설을 쓰기 위해 4~5년 정도 자료를 준비해 왔다. 한 4년 정도 걸릴 작품인데 지면 할애가 되겠느냐.”는 작가의 제의에 상업성에 구애받지 않은 서울신문이 과감히 지면을 내줘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객주는 1878년부터 1885년까지 8년간을 배경으로 보부상을 비롯한 백정·기생·천민 등 민초들의 사랑과 애환을 경상도 등 전국을 무대로 굴곡 없이 펼쳐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객주는 왕조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닌 장사꾼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민중(民衆)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집단에 대한 서술을 시도하고, 인물 중심에서 삶의 양상으로 포커스를 옮겼다는 점에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도 화제가 됐다. 보부상과 관련된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의 장터를 누비다 충남 강경에서는 선착장 사람들에게 간첩으로 몰려 몰매를 맞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김주영씨가 객주 속편을 쓴다고 한다. 보부상이 다니던 길이 남아 있는 경북 울진을 현지답사하는 등 연말까지 자료수집을 끝내고 내년에 집필할 예정이다. 산업자본주의건 상업자본주의건 물건을 사고팔고 교환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부상은 아무리 사회가 바뀌어도 시대를 관통하는 경제의 주역이다. 디지털 시대에 그가 풀어낼 이야기는 어떤 울림을 가져올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3)‘법가’ 대표주자 한비자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3)‘법가’ 대표주자 한비자

    춘추전국시대(B.C. 772~221)는 전쟁의 시대였다. 하늘의 덕을 상징하던 왕자(王者)의 정치가 힘의 논리를 앞세우는 패자(覇者)의 정치로 바뀌었던 것. 하지만 혼란의 시대가 사상적으로는 커다란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극심한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정치철학이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가(道家), 유가(儒家), 음양가(陰陽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등 독특한 세계관에 바탕한 제자백가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법가를 대표하는 한비자(韓非子, 280~233)는 이러한 시기에 가장 늦게 등장한 사상가였다. 한비자는 한(韓)나라 왕의 측실 소생 왕자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고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순자(荀子) 밑에서 배움을 구했다. 성악설(性惡說)에 기반한 순자의 사유는 한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만, 한비자는 예치(禮治)를 주장하는 스승의 생각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한비자가 보기에 세상은 인의나 도덕, 혹은 예 같은 이상적인 담론으로 구원될 무엇이 아니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혼탁했으며, 인간이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사상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유용해야 했다.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무기는 말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변설(辨說)을 통해 자신들의 말이 갖는 가치와 명분을 설파했다. 하지만 진리들이 넘쳐나도 왜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인 것일까. 어째서 그토록 훌륭한 가치들이 실현되기는커녕 또 다른 말을 낳는 수단이 되고 마는가. 그 수많은 말들 속에서 진정으로 어떤 말이 천하를 제패하는 귀중한 말이 되고 어떤 말이 그저 자신의 입을 나오는 순간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지는가. 말과 말이 충돌하며 말들의 진리 게임이 펼쳐지던 시대, 한비자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려고 했던 것일까. 놀랍게도 한비자는 심한 말더듬이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한비자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말을 아꼈던 사람처럼 보인다. “저에게 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하기를 꺼려 망설이는 까닭은 다음에 있습니다.” 한비자는 유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글은 보는 이를 감탄케 하는 간명하고 통쾌한 논리로 충만해 있었다. 송(宋)에 부자가 있었다. 비가 내려 담장이 무너졌다. 그 아들이 말하기를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도둑이 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웃집 노인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밤이 되어 과연 그 말대로 재물을 크게 잃어버렸다. 그 집에서 아들은 대단히 지혜롭다고 여겼지만 이웃집 노인은 의심하였다. (‘세난’) 말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말의 힘을 말에 담긴 진정성에서 찾는다. 진실된 말. 그런 말이라면 상대가 누구이건 어디에서건 말은 힘을 갖는다고. 하지만 한비자에게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송나라의 부자에게 아들과 이웃집 노인이 건넨 말은 표면상 동일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말은 그를 지혜로운 자로 여기게 만들었고, 다른 한 사람의 말은 그를 의심스러운 자로 여기게 만들었다. 하나의 말, 두 개의 가치. 그 자체로 훌륭한 말, 좋은 말은 없다. 정황상 옳은 말도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싫을 땐 폭력이 된다. 반대로 내가 스승이라 여기는 사람의 말은 뼈아픈 말들까지도 나를 키우는 배움의 말이 된다. 한비자는 이윤과 백리해 같이 지혜로운 자들이 군주에게 다가가기 전에 요리사와 노예로 살았던 사실을 지적한다. 이윤과 백리해는 비천한 신분으로라도 군주와의 관계를 먼저 만들고자 했다는 것. 그들이 지혜로운 이유는, 말에 앞서 관계를 만들어 냈다는 데 있다. 하여 이윤과 백리해의 말은 마침내 군주에게 가 닿을 수 있었다. 한비자는 말 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말로써 뜻을 이루겠다고 나서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다. 말의 힘은 믿음에서 생긴다. 믿음(信)은 말(言) 옆에 사람(人)이 서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말에서 사람, 즉 관계가 사라지면 말은 곧 죽고 만다. 우리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많은 말들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장을 떠나면 말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매번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쉽게, 그리고 자주 이 사실을 잊는다. 한비자는 종종 권모술수의 사상가로 소개된다. 아마도 이것은 한비자가 노골적으로 군주의 ‘통치술(術)’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면적인 평가는 한비자에게서 그의 시대를 분리시킨 결과다. 다시 말해 한비자가 법(法=형벌)·술(術)·세(勢) 등 실제적인 통치 수단을 강조했던 것은 그의 시대가 앞선 사상가들에 의해 숱한 이념으로 점철된 상태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념은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그런데 이념을 말하는 어떤 사상가도 정치를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비자는 사람들이 침묵한 곳에서 묻는다. 그가 보기에 좋은 이념과 나쁜 이념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이념이 실현되도록 힘써야 한다. 아니 실현될 때에만 이념은 이념이 된다. 중요한 건 정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죽기 전에 한비자를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훗날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룩한 진왕(진시황)의 말이다. 당시 진왕은 누구보다도 일찍 그리고 높이 한비자를 주목했던 야심만만한 군주였다. 진왕 밑에는 한비자와 함께 순자에게서 공부했던 이사(李斯)란 인물이 있었다. 이사는 진왕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계책을 꾸민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면, 한왕이 급히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 화평을 요청할 것이라는 것. 이사의 예측은 적중했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 한비자와 전국시대 최고의 전쟁 군주 진왕은 그렇게 마주 섰다. 막상 한비자와 진왕의 만남이 이루어지자 당황한 쪽은 이사였다. 이사는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한비자가 진왕의 총애를 받을까봐 두려웠다. 한비자와 진왕의 실제 만남이 어떠했다는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진왕이 실망을 느꼈다고도 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만남은 한비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이 났다.한비자의 죽음은 말의 힘이 관계에 기반한다는 그의 생각과도 관련이 깊다. 사람과 말이 맺는 관계의 차원에서 보자면, 당시 진왕의 곁에 있던 사람은 이사였지 한비자는 아니었다. 이사는 진왕에게 참언한다. 한비자는 왕족이라 결코 마음으로 한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살려 보낸다면 결국 진나라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진왕은 이사의 말을 좇아 한비자를 옥에 가두었다. 결국 한비자는 이사가 건넨 독약을 마시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억울했지만, 그에게는 진왕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한비자의 죽음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건 그의 사상이 새롭고 진취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었다는 것. 그가 죽은 뒤 천하를 통일하게 된 진시황이 한비자의 사상을 자신의 주요 통치 이념으로 현실화했다는 것. 하지만 한비자의 비극은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가로서 그가 삶을 통해 아무런 관계의 현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미처 그런 자신을 성찰하지는 못했다는 것. 현실화되지 못하는 말의 허망함이라면 일찍이 한비자가 통찰했던 지혜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도 정작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현장 없는 곳에 자신의 말을 세우고 말았다. 한비자는 영원한 말더듬이로 남았다. 이념이 삶의 척도가 되는 시대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한비자의 법은 새로운 관계에 대한 사유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법 앞에서는 관계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법 앞에는 오직 법과의 관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념이 사라지고 법만 횡행하게 되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사회가 어떤 이상을 갈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정의’에 열광하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문성환 남산 강학원 연구원
  • [2011 대구세계육상] 씁쓸한 ‘美笑’

    이번에도 미국이 웃었다. 4일 끝난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이 금메달 12개, 은 8개, 동 5개로 종합 1위를 기록하며 1983년 헬싱키 대회 이후 10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 미국 육상의 자존심이었던 남자 단거리에서 자메이카에 패권을 넘겨줬을 뿐 아니라 ‘영원한 라이벌’ 러시아의 추격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트랙 부문에서 7개의 금메달을, 필드에서는 남·여 높이뛰기, 남자 멀리뛰기와 세단뛰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남자 10종경기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문제는 남자 단거리에서 자메이카에 완전히 밀렸다는 것. 자메이카는 남자 100m에서 요한 블레이크, 남자 200m에서 우사인 볼트가 우승해 지난 대회에 이어 타이틀을 석권했다. 400m 계주에서도 자메이카가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따는 동안 미국은 바통터치에 실패하며 레이스를 끝마치지도 못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스프린터 왕조’로 군림했다. 100m의 경우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칼 루이스가 3연패했고, 1997~2001년 모리스 그린이 다시 3연패를 달성했다. 200m에서도 모리스 그린(1999년), 존 카펠(2003년), 저스틴 게이틀린(2005년), 타이슨 게이(2007년)가 정상을 지켰다. 그나마 여자는 상황이 좀 낫다. 400m 계주에서 자메이카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고, 100m에서 카멀리타 지터가 우승해 자존심을 지켰다. 그러나 200m에서는 베로니카 캠벨브라운(자메이카)에게 밀려 4연패에 도전한 앨리슨 펠릭스가 동메달로 무너졌고 지터도 은메달에 그쳤다. 2013년 모스크바 대회를 개최하는 러시아의 도전도 거셌다. 러시아는 9개의 금메달을 따며 종합 2위를 기록했다. 러시아는 옛 소련 시절까지 포함하면 1983년 1회 대회 이후 2009년 베를린 대회까지 획득한 메달 수가 208개(소련 75개)로 미국(250개) 다음으로 많은 육상 강국이다. 케냐도 중·장거리 종목과 남·여 마라톤에서 모두 7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3위에 올랐다. 아시아권에서는 중동 국가들의 부진으로 트랙에서 전멸했으나 중국과 일본이 필드에서 금메달을 한 개씩 수확하며 7위와 11위에 올랐다. 대구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씨줄날줄] 브로커의 입/주병철 논설위원

    ‘입은 마음의 문이니 입을 지킴이 엄밀하지 못하면 마음의 참기틀을 다 누설(泄)할 것이요, ….’(채근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구약성서) ‘모든 화(禍)는 입에서 나온다. 일체 중생의 불행한 운명은 그 입에서 생기고 있다. 입은 몸을 치는 도끼이며 몸을 찌르는 칼날이다.’(석가모니) 모두 입조심을 경고하는 가르침이다. 입의 힘은 놀랍다. 누구의 입이냐에 따라 파장도 다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전·현직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스티브 잡스 애플 전 최고경영자(CEO) 등의 말 한마디는 명령이자 실행이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정·재계 지도자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지구상에서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입은 똑같다. 폭발력으로 보면 ‘브로커의 입’이 가장 세다.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터지면 핵폭탄급이다. 파장의 대상을 가늠할 수가 없다. 무차별적이기 일쑤다. 권력 주변에 기생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거나 끝날 무렵 종종 등장한다. 병역·부동산·정치·무기·금융 등 이권사업에 많다. 옛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대표적인 브로커로 통한다. 이 정권에서도 ‘함바비리’ 유모씨 등이 그런 유의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도 불법 브로커가 활개를 쳤다고 한다. 재력가 아들을 대신해 군복무하는 아르바이트 군인(代立), 신분 세탁을 위장한 군면제, 부처 공직자 매수 등에는 전문브로커들이 개입했다. 그래서 막상 전쟁이 터져 군대를 소집하면 10만~20만명이 돼야 할 군사가 1만~2만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에는 법률 브로커인 외지부(外知部)들이 글과 법을 모르는 백성들의 소장을 대신 써주면서 의뢰자를 속여 먹는 일이 허다했다고 기록돼 있다. 부산저축은행 검찰수사와 관련해 브로커 박태규씨의 입에 정치권이 떨고 있다고 한다. 박씨로부터 로비를 받은 사람이면 박씨의 입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할 것이다. 문제는 불법 브로커의 입 하나 때문에 엉뚱한 피해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에도 그랬다. 브로커의 말 한마디로 감옥에 갔다 훗날 무죄판결을 받아도 명예회복이 안돼 억울해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앞으로는 미국처럼 ‘로비활동규제법’을 제정해 로비를 합법화하든지 그러지 않으면 브로커의 ‘거짓 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브로커의 입만 바라보는 지금의 현실이 한심하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열린세상] 기억과 성찰/김태승 아주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기억과 성찰/김태승 아주대 사학과 교수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는 먼저 ‘이름’을 교환한다. 명함을 이용하거나, 말로 하거나 교환의 형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름이라는 분류방식을 통해 상대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름은 ‘견출지’이고 이제부터(관계가 지속된다면) 그 이름 아래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축적되면서 기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만난 상대는, 이름으로 분류된 ‘폴더’ 안의 기억들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나 역시 그에게는 동일한 방법으로 기억될 것이다(이러한 과정은 새로운 사물과 접촉하게 되거나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기억의 정리과정에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선택’과 ‘배제’는 기억의 효율성을 높여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지만(감각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한편으로 기억을 ‘주관화’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주관화 과정에서는 기억을 왜곡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쉬운데, 그것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불편한 기억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리하려는 본능적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편견’과 ‘견해의 대립’은 기억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기억은 당연히 ‘망각’과 ‘무시’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은 ‘선택’과 ‘배제’, ‘망각’과 ‘무시’의 과정을 거쳐 일종의 ‘가상 세계’(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를 만들어 내기가 쉽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상상 속의 귀신을 그리고 있으면서 살아 있는 개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하기 쉽다는 말이다. 밖에서 볼 때 분명히 내가, 우리가 귀신을 그리고 있음이 관찰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억화의 과정이 조작될 수 있고, 임의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런 기억에 의존하는 우리의 의견은 항상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 때문에 기억의 한계를 거의 성찰하지 못한다. 특히 집단화된 기억은 ‘신성한 교육’을 통하여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 없이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하나의 도그마로 작동되며, 집단 기억의 밖에 있는 모두를 ‘타자화’(적대시)하기 쉽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에 대한 ‘성찰’은, 이 모든 문제를 넘어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소통’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미덕이 된다. 동아시아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분쟁은 그런 점에서, 자기 성찰 없는 ‘기억정치’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교육기구의 독점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집단 기억의 중심인 역사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한다. 중국은 1당 독재체제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애국주의’라는 정서를 매개로 억압하기 위해서, 대형 국가프로젝트를 통해 고대사의 상한을 끝없이 끌어올렸고, 얼마 전까지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고구려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전범국가’라는 성찰 없이 ‘침략과 폭력의 현대사’를 재구성하여 자국사를 미화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가해자’로서의 일본은 사라지고 ‘피해자’로서의 일본이 부활한다. 북한은? 기억조작을 통해 ‘김씨 왕조’ 건설에 몰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성찰 없는 기억정치의 가장 가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 한국의 제1공화국과 관련된 논의가 제헌헌법정신 등 국민적 총의에 의해 선택되었던 국민적 합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축출한 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는 것을 보면 매우 걱정스럽다. 오늘의 리비아를 보면서 카다피를 영웅시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확실히 기억은 조작되기 쉽고, 대부분의 기억은 ‘자기 중심성’을 회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통을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진리라고 믿는 자신의 기억에 대한 성찰 없이 ‘다른 기억의 체계’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화해와 공존을 위한 미래를 논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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