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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국왕 ‘원유 생산량 유지 정책’ 고수…시장 변동 적을 듯

    새 국왕 ‘원유 생산량 유지 정책’ 고수…시장 변동 적을 듯

    친서방 개혁정책을 표방해 온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이 90세를 일기로 23일(현지시간) 타계했다. 유가 하락으로 재정 압박이 가중되고, 이슬람국가(IS) 등 극단주의 세력이 세를 불리는 민감한 시기에 압둘라 국왕의 사망이 미칠 파장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왕위를 계승한 이복동생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0) 왕세제는 중도파로 알려졌으나 왕실 내에서 개혁에 반대해 온 ‘수다이리 7형제’ 중 한 명으로 지목돼 벌써부터 개혁 요구가 쇄도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날 BBC 등 외신들은 사우디 왕가의 여섯 번째 국왕인 압둘라가 수도 리야드의 킹 압둘아지즈 병원에서 폐렴으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이로써 그의 10년 통치도 마감됐다. 압둘라는 지난해 말 병원에 입원한 뒤 잠시 튜브로 호흡하는 등 고비를 넘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공영방송은 이날 새벽 국왕의 별세 소식을 전하기에 앞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이슬람경전인 코란의 구절을 보여 주는 화면을 내보냈다. 2005년부터 왕위를 이어온 압둘라의 사망으로 왕위는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이복동생 살만 왕세제에게 넘어갔다. 왕세제 자리는 무끄린(69) 왕자가 이어받았다. 1932년 사우드 왕조를 연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사우드는 형제세습의 원칙에 입각해 왕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미국 등 서방은 살만의 전면 등장을 껄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압둘라 국왕보다 더욱 서방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평가를 듣기 때문이다. 압둘라 국왕이 시아파 종주국 이란과의 핵 협상을 두고 오랜 우방인 미국과 잠시 관계가 틀어진 상태였기에 미국으로선 오히려 관계 정상화를 위한 기회를 잡은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단기적으로 살만 국왕이 과도기의 불안정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과 우방관계를 강조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몰라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압둘라의 죽음으로 유가시장은 들썩였다. 22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선 3월 인도분 WTI가격이 시간외 거래에서 3.1%나 치솟는 등 후임 국왕의 원유 생산량 감축에 기대감이 쏠렸다. 하지만 살만 국왕 역시 원유 생산량을 유지해, 점유율을 확대하는 기존 정책을 고수할 것으로 예상돼 원유 시장에 큰 변동은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사우디는 원칙상 국왕이 수장인 최고석유위원회와 왕실 인사들, 장관들, 산업계 지도층 등의 합의로 원유 정책을 결정하지만 실제로는 알리 누아이미 장관에게 실권이 있어 장관의 유임 여부가 정책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은 내다봤다. 사우디는 하루 95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700만 배럴을 수출해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10분의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개혁이다. 압둘라의 최대 성과는, 속도는 느리지만 그래도 개혁을 진행했다는 데 있다. 각종 규제를 풀어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젊은이들의 해외 유학을 독려했다. 사우디는 거대 산유국이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전제군주국에 불과하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압둘라 국왕은 중동 대부분 지역이 폭력과 급속한 정치적 변화에 휘둘리던 시절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다”면서 “신임 국왕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사우디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열린세상] 각자의 경험 모두가 나라 자산이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열린세상] 각자의 경험 모두가 나라 자산이다/김용환 서울대 초빙교수·전 문화부 차관

    지금부터 25년 전의 일이다. 독일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유엔이 설립한 아시아공과대학에서 공부할 때였다. 논문 지도 교수는 일본인으로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야 했고, 혼자 남아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던 필자는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후임 일본인 교수를 만난 일순간에 모든 걱정은 기우가 됐다. 후임 교수는 논문 진행 상황은 물론 가족관계, 출신학교, 직업, 취미까지 나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고 심지어는 논문에 꼭 필요한 SPSS, TSP 등 수백만원에 달하는 고가의 통계 프로그램을 일본에서 구입해 와서 나에게 전해 주었다. 전임자의 철저한 기록 덕분에 무사히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마움에 앞서 일본의 저력과 경쟁력이 이렇듯 치밀하고 꼼꼼한 기록 정신에서 나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4개월 전의 일이다. 미주개발은행(IDB)이 마련한 정책포럼에서 우리나라의 재정정보화 경험을 중남미 공무원들에게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주최 측은 재정정보화의 필요성이나 운영효과 등 총론적 설명보다는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과 갈등조정 등 실제 겪은 현장 경험을 듣길 원했다. 포럼을 준비하면서 정보화사업이 추진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대부분의 자료들이 재탕·삼탕의 총론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수천억원이 투입됐고 국제적인 성공 사례로 뽑히는 국책사업에 대한 경험서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백서조차 없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재정정보화사업 초기의 실무책임자였기에 당시의 기억을 바탕으로 참석자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지만 제대로 된 경험 기록이 없어 영영 아쉬웠다. 우리는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모든 백성들이 쉽게 글을 읽고 기록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난중일기, 일성록 등 11개의 기록유산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에 등재돼 문화대국이라는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의 기록문화 보유국이 됐다. 우리 선조들은 기록이 창조의 원천임을 알고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란 말이 있다. 둔필의 기록이라도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는 경험의 지혜다. 어찌 개인에게만 해당되랴. 국가도 매한가지다. 한때 화려했던 마야, 잉카 문명이 소멸된 것도 문명을 전달할 수 있는 기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이 없는 문명은 지속 가능성이 없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특히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은 국가는 물론 개인의 생존 전략이며 미래를 열어 가는 값진 국가의 지식정보 자원이다. 우리는 지난 60년간 압축성장의 과정 속에서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각종 경험들은 소중한 자산이라기보다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 정도로 치부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본다. 기록을 잘 하는 사람은 쫀쫀한 사람으로 낮게 평가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우매한 자라는 말도 있듯 후대의 교훈이 되고 미래발전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는 국가건 개인이건 경험을 정리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지금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방통행에서 벗어나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숨고르기가 필요한 시기다. 세계는 우리의 개발 경험을 공유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리의 개발 경험이 새로운 시장이 되고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기 마련이고, 소중한 경험을 갖고 계신 원로들께서 유명을 달리하시는 안타까운 소식도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부터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스포츠 역사 발굴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니 여간 기쁜 소식이 아니다. 그동안 간헐적으로 스포츠 역사 발굴 사업이 추진됐지만 이번처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되는 것은 한국스포츠 100년사에서 처음이다. 체육계 원로들의 경험을 채록하고 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한편 개인 소장품들을 기증받아 디지털 아카이브로 집대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타 분야에서도 우리의 경험을 집대성하는 작업이 보다 신속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 남북관계 불투명한데… ‘장밋빛 통일사업’ 실현 미지수

    남북관계 불투명한데… ‘장밋빛 통일사업’ 실현 미지수

    정부는 1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갖가지 남북 간 협력 사업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현성을 예측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보고된 사업들이 실현되려면 남북 간의 합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의 남북 관계는 가까운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통일준비’ 부문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통일부는 우선 남북 당국 간 대화를 통해 북한에 가칭 ‘광복 70주년 남북공동기념위원회’ 구성을 제안, 문화·예술·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공동 기념행사를 협의해 나가는 한편 ‘한반도 종단 및 대륙철도 시범운행’을 올해 추진하기로 했다. 열차 시범운행 사업은 서울에서 출발한 열차가 경의선을 이용해 북으로 올라가 신의주 및 나진까지 운행하는 2개 노선이 구상되고 있다. 이 밖에 나진~하산 물류사업 추진을 통해 육상·해상 복합물류 통로를 개설하는 등 남북 경제공동체 인프라 구축사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통일부는 당국 간 대화가 열리면 이산가족·국군포로·납북자 문제 등 인도적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우선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북한과 민생·환경·문화 등 이른바 ‘3대 통로’ 개설도 협의하겠다고 보고했다. 또 남북 주민 간 동질성 강화를 위해 가칭 ‘남북겨레문화원’을 서울과 평양에 동시에 개설해 겨레말 큰사전 편찬사업, 개성 만월대 발굴 등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협력 성과물을 전시하고 민간 단체의 사회 문화 교류 사업을 지원토록 하는 방안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씨름을 비롯해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유·무형 문화재의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 남북의 의식주와 풍습 등 생활문화양식을 집대성한 ‘한민족생활문화편람’ 편찬,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민족 기록유산 공동전시(서울·개성 순차 개최)’ 등의 사업을 통해 남북 간 동질성 회복에 나서기로 했다. 정부는 더불어 통일준비위원회와 함께 한반도의 통일 비전을 담은 통일헌장과 평화통일기반구축법을 제정해 국민이 공감하는 통일정책을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통일기반구축법에는 통일준비 인력 양성 및 부처별 전담관 지정 등의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정부의 꿈은 남북 관계의 근원적 개선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를 반영하듯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정부의 보고는 남북 관계가 제대로 된다는 전제 속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 남북 관계가 안 좋으면 전부 헛꿈”이라면서 “남북 관계 복원을 위한 전략적 접근은 전혀 없이 기존 주장을 재탕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도시현상 연구 서울학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에서 파생되는 모든 도시현상 및 도시 관련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서울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도록 서울에 대해 연구하는 학제적인(Interdisciplinary) 성격을 가진 학문(최근희 서울시립대 교수)”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서울은 너무나 거대하고 과밀하며 복합적이지만 축적된 학문적 기초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학문적 적확성이나 방법론적인 정교성에 매달려 답을 구하려면 한계에 부딪힌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서울’이라는 지명을 보자. 서울이라는 지명이 언제, 어떤 연유로 생성됐는지 알기조차 어렵다. 서울이라는 말이 역사나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용했는지 파악하는 게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이 한자 표기가 안 되므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서울이라는 땅 이름 대신에 수도(首都)를 뜻하는 한성, 한양, 경성, 경도, 경조, 경, 수부, 수선, 도성, 도부, 도읍, 황성, 황도, 왕도, 한도 같은 한자 수도 개념어 10여 가지가 두루 쓰였다. 최근 서울과 수도의 개념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선보이고 있으나 서울이라는 지명의 용례를 다룬 연구는 여전히 드문 것도 자료 부족에 기인한다. 서울지역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기원전 18년 온조가 위례(현재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면서 역사의 전면부에는 한강 이북보다 한강 이남이 먼저 등장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 때는 한산(漢山)이라고 호칭했는데 한강(漢江), 북한산(北漢山), 남한산(南漢山)이라는 지명의 생성과 연관성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는 남평양(南平壤)이었으며, 6세기 신라 진흥왕(540~576) 때는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 통일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을 두었고 고려 들어 양주(楊州)와 남경, 한양부 등을 오락가락하다가 조선 들어 한성부(漢城府)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서울이라는 말의 어원은 여럿 있지만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어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서울이란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행정사’에 따르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소부리(부여), 고려의 송악(개성), 후고구려의 철원 등 일국의 수도 명칭 모두가 서라벌(새벌)에서 나왔다. 수도가 서라벌이고, 서라벌이 서울인 것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강제 격하, 개칭됐다가 광복과 함께 갑자기 새로운 수도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해방 후 각계 인사 7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미 군정청은 1946년 9월18일 군정법령으로 ‘서울특별시’라는 대한민국 유일 한글 지명을 확정했다. 미 군정은 경성이라는 일제의 잔재도 청산하고, 한성부 혹은 한양이라는 왕조 복고도 거부하는 이중 효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SEOUL’이라는 알파벳 명칭이 그들의 입맛에 맞았을 법하다. 정부 수립 이후 논란이 일었다. 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명칭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불붙었다. 명칭 개정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서울이란 수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아니라는 것, 둘째 서울이 땅 이름이 된 경위는 외국인의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붙여졌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수도가 어디인지를 물은 프랑스 신부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이를 프랑스 사람이 소리 낼 수 있는 음을 취해서 써넣은 것이 ‘소울’ 또는 ‘솔’ 등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논리였다. 이때부터 서울의 명칭 개정을 놓고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해방 직후 수도 명칭의 결정과 1950년대 개정 논의’라는 김제정(서울시립대)의 논문에 따르면 최남선, 이병도,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신문지상 등을 통해 논쟁에 가세했고 찬반 논리를 제공했다. 대개 한양, 한성 등 복고풍이 지배적이었으며 큰 벌판을 뜻하는 우리말 지명 ‘한벌’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급기야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 제정연구위원회’가 구성됐고 서울시를 중심으로 수도 명칭 개명에 관한 현상 모집 광고가 신문지상에 게재됐다. ①우남 ②한양 ③한경(韓京) ④한성 등 4가지 명칭을 놓고 여론조사를 한 결과 우남시가 1423표를 얻었다. 한양 1117표, 한경 631표, 한성 353표를 각각 받았다. 초대 대통령이자 이른바 국부(國父)인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나 아호를 딴 ‘이승만시’ 혹은 ‘우남시’로 하자는 추종자들의 속 보이는 명칭 개정 작업은 격렬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57년 1월 19일 다시 담화를 내고 “내가 대통령으로 앉아서 서울의 이름을 내 별호로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우남시 안을 철회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서울의 명칭 개정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서울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 군정청 관리들에 의해 ‘선물’처럼 주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정부 수립 이후 제기된 개칭 추진에서 최고 권력자의 추종세력에 의해 섣불리 추진됐다가 유야무야된 과정도 개운치 않다. 그러나 이후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등으로 서울이라는 수도명은 ‘코리아’라는 국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빅 브랜드가 됐다. 고유명사를 보통명사화한 선례이자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인 우리의 수도명이자 지명이 됐다. ●대한민국의‘ 종주도시’이자 ‘의사이상향’ 14세기 이슬람의 역사학자이자 최고의 사상가인 이븐할둔(Ibn Khaldun)은 “새 왕조가 새 수도를 정하고, 옛 수도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즉시 주민을 새 수도로 이주시켜야 불만 세력을 없애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통치권의 초점인 수도는 마땅히 왕국의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조선의 수도 한성부는 1394년 제국(帝國)지향적 수도인 송악에서 남하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양에서 인구 10만명의 계획도시로 출발했다. 620년이 흐른 지금 면적은 30배, 인구는 100배 이상 급속 팽창했다. 서울은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이 지향하고, 수도권을 포함한 2500만명이 생활하는 대한민국의 종주도시(宗主都市)이자 의사이상향(擬似理想鄕)이 되었다. 왜 이렇게 서울로 몰려든 것일까. 서울학의 연구과제 중 사회학, 도시사회학, 도시행정학의 초점은 인구 집중 및 확장과 관련된 문제에 맞춰진다.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이 모든 현상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전제군주의 통치 공간이었고, 권력의 핵이기에 기회와 경쟁을 제공했다. 돈을 벌거나, 출세를 원하거나, 학업을 하려거나, 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서울의 도시성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이 인구문제다. 역사적으로 조선 한성부의 인구는 17세기 후반 이미 30만명에 달해 당대 세계 최대급의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출산율, 사망률 등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인구 증감이 좌우되는 향촌과 달리 인구 이동이라는 사회적인 요인의 영향력이 높다는 점이 최근 연구의 성과다. 인구 상황과 호구를 분석한 고동환은 ‘조선후기 인구 추세와 도시문제 발생’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인구를 1669년 22만명, 1720년대 25만명, 1770년대 30만명, 1820년대 35만명, 1870년1900년 33만 명으로 추정했다. 조성윤은 ‘조선후기 서울의 인구 증가와 공간구조의 변화’라는 논문에서 1663년 한성부 북부의 호적과 한말의 신(新)호적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성을 분석한 결과 전국의 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전입인구가 서울의 하층민으로 정착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살펴보면 조선초기 10만명이던 인구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 이후 4만명까지 떨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 때 18만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구한말까지 200년 이상 18만명에서 20만명 사이를 오갔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도성 내 상업 발달이 주원인이었다. 18세기 서울은 16~17세기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성 밖 경강(뚝섬~양화나루까지의 한강구간) 일대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전국에서 상인자본의 집적도가 가장 높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경강 일대에 상업촌락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세 정치·행정 중심도시에서 근대적 상업도시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의 도시발달은 17세기 양난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시기를 거쳐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로 사대문 밖으로 공간적 확산이 이뤄지고 신분제의 붕괴 조짐을 나타냈다. 도성 내 인구의 증가는 주택 부족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현상은 도성 밖으로 거주공간이 확장되는 원인이 됐다. 15세기까지 사대문 밖 10리(성저십리)의 민가숫자는 모두 1719호로 한양 인구의 9%에 불과했지만 18세기 전반 한성부의 5부(동-서-남-북-중부) 중 경강에 가까운 서부(용산)와 남부(마포)를 중심으로 촌락이 속속 들어서면서 행정구역의 확대 개편이 촉발된 것이다. 서울은 사대문을 벗어나 한강이라는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확대됐으며 서울 구심점의 한강 이남 이전은 시간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정치·농업·세금… 향촌 학자의 일기 속 17세기 조선

    정치·농업·세금… 향촌 학자의 일기 속 17세기 조선

    일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이성임 외 지음/새물결/275쪽/2만 1000원 조선시대는 장대한 조선왕조실록이 보여주듯이 기록의 왕조였다. 이는 중앙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지방의 지식인 수준에서도 비근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일기나 서한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의 소우주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일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는 경상북도 예안 지방에 거주하던 계안 김령(1577~1641)이 39년 동안 기록한 일기를 6개의 상이한 프리즘으로 조명한 연구서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일기 연구 1차 연도 결과물로 다분히 이념이나 전쟁, 당쟁으로만 기억되는 조선 후기에 대해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한 정사와는 다른 미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김령은 퇴계 이황의 고제인 설월당 김부륜(1531~1598)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부친이 상경 종사한 까닭에 서울에서 태어나 5세에 독서를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비교적 어린 나이인 15세에 도산서원 강학에 참여했다. 예안을 대표하는 광산 김씨 가문으로서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대의 3대에 걸친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를 산 김령은 26세 때인 1603년 7월 1일부터 64세로 세상을 떠난 해인 1641년 3월 12일까지 일록을 남겼다. ‘계암일록’은 중앙의 정치사와 지방의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일상사와 생활사가 두루 담겨 있어 조선 후기의 미시사로서 훌륭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7세기 안동은 중앙에서 소외된 변방이 아니었다. 1612년(광해군 4년)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 주서가 되었으나 병과 낙마 사고 등으로 벼슬살이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낙향한 후에도 중앙 정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10일쯤의 간격으로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남인, 학파적으로는 범퇴계학파에 속했던 김령의 입장과 판단을 통해 17세기 전반 조선의 정치 변화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의례문화의 이상과 실제가 어떻게 향촌사회에서 구현되는지, 농업과 세금 수취 과정 및 이에 대한 그의 생각 등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주윤발·변진섭·왕조현의 추억 살아나나”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주윤발·변진섭·왕조현의 추억 살아나나”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주윤발·변진섭·왕조현의 추억 살아나나”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나왔다 하면 대박스타 ‘기대 폭발’

    응답하라 1988, 나왔다 하면 대박스타 ‘기대 폭발’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이 나올까. 11일 한 매체는 “신원호 PD의 신작은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번엔 1988년이 배경”이라고 ‘응답하라 1998’ 제작 소식을 전했다. 해당 매체는 “지난해부터 언급된 것처럼 2002년과 1988년 등 많은 시기를 두고 고민했지만 1988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다. 방송 시기는 오는 7월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응답하라 1988’은 이미 지난해 한 차례 얘기가 나왔다. 당시 몇몇 소속사에서 제작진과 미팅을 갖는 등 움직임을 보였지만 무슨 일인지 제작이 중단됐다. 신원호 PD도 “여러 가지 회의를 했는데 사정이 있어 전부 올스톱 됐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지켜봐야한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1988년은 많은 얘기를 다룰 수 있다.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주윤발·왕조현 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국내 가수도 화려하다. ‘가왕’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 등과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 故 신해철도 그릴 가능성이 높다. 마스코트 호돌이를 내세운 세계인의 대축제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지강헌 인질극과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중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모습이 전파를 탄 사건도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응답하라 1997’의 서인국, 정은지, ‘응답하라 1994’의 정우, 고아라, 유연석 등 청춘스타들을 재발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에 ‘응답하라 1988’의 캐스팅에도 벌써부터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CJ E&M(응답하라 1988)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엔 어떤 것이 유행이었을까?”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엔 어떤 것이 유행이었을까?”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엔 어떤 것이 유행이었을까?”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네티즌 반응 폭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반응 폭발 ‘아이돌은 엑소 멤버?’ 가능성 봤더니..

    응답하라 1988, 반응 폭발 ‘아이돌은 엑소 멤버?’ 가능성 봤더니..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시리즈를 만들어 온 신원호 PD는 12일 “여러가지 회의를 했는데 사정이 있어 전부 올스톱됐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지켜봐야한다”고 전했다. 신원호 PD는 또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CJ E&M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고 밝혔다. 앞서 한 드라마 관계자는 “신원호 PD의 신작은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번엔 1988년이 배경이다”면서 “방송 시기는 오는 7월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또 일각에서는 아이돌그룹 엑소(EXO)가 ‘응답하라’ 새 시리즈에 출연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 네티즌이 연예매체를 인용, tvN의 서명혜 미술감독이 엑소가 출연하는 웹드라마 작업에 한창이라고 전했기 때문. 서명혜 감독이 ‘응답하라 1994’에서 미술과 소품을 담당했던 만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응답하라 1988’이 웹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1988년에는 장국영·주윤발·왕조현 등 중국과 홍콩 영화의 부흥,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김완선·이선희·변진섭 등 화려한 가수들의 등장,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 故 신해철, 세계인의 대축제 서울올림픽 등 다양한 소재가 기다리고 있어 시청자들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한편 2012년에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팬덤 문화를 그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응답하라 1997’은 H.O.T와 젝스키스로 대변된 1990년대를 배경으로, 오빠들에 미쳐있던 여고생과 다섯 친구들의 감성복고 드라마로 그려졌다. 특히 마지막 회는 최고 시청률 9.4%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응답하라 1988 소식을 접한 네티즌은 “응답하라 1988..진짜 방송됐으면 좋겠다”, “응답하라 1988..신해철 다룰까?”, “응답하라 1988..엑소가 출연하면 꼭 봐야지”, “응답하라 1988..기대된다”, “응답하라 1988..인기 많을 거 같은데”, “응답하라 1988..제발 방송해주세요”등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응답하라 1988) 연예팀 chkim@seoul.co.kr
  •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당시에 무슨 사건 있었나 보니…” 대박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당시에 무슨 사건 있었나 보니…” 대박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당시에 무슨 사건 있었나 보니…” 대박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나온다..당시 이슈보니 ‘대박’

    응답하라 1988 나온다..당시 이슈보니 ‘대박’

    11일 한 매체는 “신원호 PD의 신작은 ‘응답하라’ 시리즈로 이번엔 1988년이 배경”이라고 ‘응답하라 1998’ 제작 소식을 전했다. 해당 매체는 “지난해부터 언급된 것처럼 2002년과 1988년 등 많은 시기를 두고 고민했지만 1988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다. 방송 시기는 오는 7월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응답하라 1988’은 이미 지난해 한 차례 얘기가 나왔다. 당시 몇몇 소속사에서 제작진과 미팅을 갖는 등 움직임을 보였지만 무슨 일인지 제작이 중단됐다. 신원호 PD도 “여러 가지 회의를 했는데 사정이 있어 전부 올스톱 됐다.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지켜봐야한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1988년은 많은 얘기를 다룰 수 있다.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주윤발·왕조현 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국내 가수도 화려하다. ‘가왕’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 등과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 故 신해철도 그릴 가능성이 높다. 마스코트 호돌이를 내세운 세계인의 대축제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지강헌 인질극과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중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모습이 전파를 탄 사건도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응답하라 1997’의 서인국, 정은지, ‘응답하라 1994’의 정우, 고아라, 유연석 등 청춘스타들을 재발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에 ‘응답하라 1988’의 캐스팅에도 벌써부터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주윤발·변진섭·왕조현 추억 되살리나”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주윤발·변진섭·왕조현 추억 되살리나”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기대 만발 “주윤발·변진섭·왕조현 추억 되살리나”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장국영·주윤발·이선희·변진섭’ 추억 되살리나

    응답하라 1988 ‘장국영·주윤발·이선희·변진섭’ 추억 되살리나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 ‘장국영·주윤발·이선희·변진섭’ 추억 되살리나 tvN의 응답하라 새 시리즈 편성이 화제다. ’응답하라 1988’이 유력한 상황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에 시청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하지만 일단 tvN 측은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신원호 tvN PD는 “‘응답하라 1988’이라는 건 딱히 정해진 게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하고 있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CJ E&M 측도 이날 “아직 확정된 바 없다. ‘응답하라 1988’은 논의 중인 여러 가지 방안 중 하나”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논의 변경될 정도다. 제작 가시화라고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이 세간의 이목을 끈 바 있고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사고도 있었따. ‘무전유죄, 유전무죄’ 지강헌 인질극도 벌어졌다. 또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 주윤발, 왕조현 등이 국내팬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가수로는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 김완선, 이선희, 변진섭이 사랑을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88년 사회적 이슈보니 “기대감폭발”

    응답하라 1988,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 88년 사회적 이슈보니 “기대감폭발”

    응답하라 1988, ‘응답 신드롬 이어갈까’ 88년 사회적 이슈보니 “기대감폭발” ‘응답하라 1988’ ‘응답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응답하라’ 세 번째 시리즈가 1988년으로 가닥을 잡아 화제다. 11일 한 드라마 관계자는 한 매체를 통해 “신원호 PD가 신작 ‘응답하라’ 시리즈를 1988년을 배경으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다”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언급된 것처럼 2002년과 1988년 등 많은 시기를 두고 고민했지만 1988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라며 “방송 시기는 오는 7월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응답하라 1994’의 서명혜 미술감독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는 ‘응답하라 1988’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더불어 1988년 사회적 이슈에 네티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988년은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주윤발·왕조현 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며 국내 가수도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김완선·이선희·변진섭 등 그리고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 故 신해철 이야기도 담을 수 있다. 또한 세계인의 대축제 서울올림픽 속 굴렁쇠 소년 등도 이슈였으며 지강헌 인질극과 MBC ‘뉴스데스크’ 중 괴한이 침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친 것도 88년이다. 한편 2012년에 방송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1990년대 팬덤 문화를 그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 제작된 ‘응답하라 1994’는 서울 신촌의 한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재연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진=응답하라 포스터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응답하라 1988, 당시 유명했던 사건 뭐가 있었을까 ‘눈길’

    응답하라 1988, 당시 유명했던 사건 뭐가 있었을까 ‘눈길’

    11일 한 드라마 관계자는 한 매체를 통해 “신원호 PD가 신작 ‘응답하라’ 시리즈를 1988년을 배경으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다”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언급된 것처럼 2002년과 1988년 등 많은 시기를 두고 고민했지만 1988로 가닥을 잡고 제작 준비 중”이라며 “방송 시기는 오는 7월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1988년은 중국·홍콩 영화의 최대 부흥기 시절로 장국영·주윤발·왕조현 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으며 국내 가수도 조용필을 비롯해 이문세·김완선·이선희·변진섭 등 그리고 1988년 ‘대학가요제’ 우승자 故 신해철 이야기도 담을 수 있다. 사진=응답하라 포스터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해외여행 | 황하가 편애한 땅 닝샤寧夏

    해외여행 | 황하가 편애한 땅 닝샤寧夏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천하황하부녕하天下黃河富寧夏’. ‘천하의 황하黃河가 닝샤寧夏에 복을 준다’는 뜻이다. 백 가지 해를 끼친다는 황하가 닝샤에서 그 도도함을 내려놓고 온순해졌으니, 그 물줄기가 빚어낸 운치는 필경 황하가 감춰둔 속살이 분명하다. 닝샤를 여행하기 전 중국을 여행하려면 관광비자를 준비해야 한다. 단체비자의 경우 5명 이상이 모여야 신청 가능하다. 닝샤의 연평균 기온은 11℃로 우리나라보다 낮고 건조한 편이다.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옷을 잘 준비해야 한다. 단벌보다는 입고 벗기 쉽게 겹쳐 입도록 챙기는 게 요령이다. 5~10월 초가 푸른 초원을 볼 수 있어 여행 적기다. 닝샤에서 흔히 접할 수 있고 유명한 음식은 양고기 요리다. 찜이나 탕보다는 바비큐가 우리 입맛에 맞다. 황하를 비롯해 호수가 많아 잉어 등 민물고기 요리도 다양하다. 한국식당과 커피전문점은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입맛이 걱정된다면 밑반찬과 개인 기호식품을 챙기면 좋겠다. 인촨공항은 규모가 작아 면세점이 한 곳뿐이고 술과 담배만 판매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인촨銀川 은빛 물의 도시 북으로는 네이멍구자치구, 남으로는 간쑤성에 접해 있으며 5,463km의 황하가 관통하는 서북부 내륙. 그곳에 닝샤寧夏, 정확히는 닝샤후이족자치구가 있다. 닝샤는 사막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분지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다. 연간 일조량은 3,000시간이지만 그에 비해 강우량은 200m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밀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옥수수와 쌀, 수박 등 농산물이 풍부하다. 이 땅이 이토록 비옥한 이유는 황하가 마르지 않는 물을 공급해 주고 몽골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추위를 허란산맥이 막아 주기 때문이다. 황토고원과 산이 대부분인 남부에 비해 황하가 접한 닝샤 중·북부는 비옥한 닝샤평원을 끼고서 도시들이 몰려 있다. 닝샤의 성도인 인촨銀川도 이곳에 자리한다. 영상 4도. 10월의 마지막을 며칠 앞둔 인촨의 아침은 쌀쌀했다. 황사의 발원지라는 서북부 내륙답지 않게 공기가 맑다. “인촨에서는 ‘아침에는 솜옷을 입고, 점심때는 견사를 입고, 저녁에는 화로에 앉아 수박을 먹는다’는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가이드 안룡씨는 15도 이상 벌어지는 인촨의 일교차를 이리 설명한다. 따갑게 햇볕이 내리쬘 때면 그 말이 내내 떠올랐다. 인촨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72개다. 덕분에 안개도 잦다. 인촨이라는 이름도 ‘햇살에 하천이 은빛으로 빛난다’ 해서 붙여졌다. 인촨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40km 거리 사호沙湖로 향했다. 전통 배 형상의 유람선을 타고 안개 낀 습지를 가로질러 닿은 곳은 모래섬. ‘푹푹’ 모래를 밟고 올라 한숨 고르고 뒤를 돌아보면 언덕 아래로 갈대 호수가 장쾌하다. 전체 80km2의 방대한 사호의 중심에 선 이 모래섬은 텅그리 사막으로부터 날아온 모래가 호수 주변에 쌓이면서 시작됐다. 호수는 원래 양어장이었는데 황하가 범람하면서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1989년부터 개발을 시작했다. 봄이면 흑고니 등 200여 종의 철새들이 이곳을 찾는다니, ‘변방의 강남’이라는 별칭으로 낭만을 부추길 만하다. 56개의 소수민족이 인구의 60~70%를 차지하는 중국에는 소수민족자치구가 5개다. 몽골족의 네이멍구자치구, 장족의 광시장족자치구, 티베트족의 시짱자치구,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인 신장웨이우얼자치구, 그리고 중국계 무슬림 민족인 닝샤후이족자치구다. 사실 닝샤후이족의 분포는 34%, 약 200만명이다. 8세기 용병으로 중국에 왔던 페르시아와 아랍의 병사와 상인들이 조상이다. 한족과의 혼혈정책으로 지금은 중국화된 상태지만 후이족들은 지금도 그들만의 전통문화를 지켜 간다. 박물관, 사원, 민속촌, 공연장, 식당 등 중화회향문화원 내에서는 그 문화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 타지마할을 본뜬 입구를 들어서 광장을 지나면 황금빛 모스크와 마주친다. 중국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이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화려한 내부는 사뭇 경건하다. 후이족을 상징하는 ‘회回’자 형태로 지어진 박물관 안에는 관련 문화유물이 전시돼 있는데, 그중 금박을 입힌 코란은 국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지난 9월27일,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장셴량張賢亮이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를 접했다. 지병이 악화돼 인촨에서 숨졌다고 했다. 19세 때 쓴 서정시 ‘대풍가’ 때문에 반혁명죄로 지목돼 22년을 노동수용소에서 보냈고 1979년, 명예회복 이후 써 낸 작품들로 중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됐던 그의 자전적 장편소설 <남자의 반은 여자 1985>는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당시 중국에서 금기시된 주제를 다뤄 화제가 됐었다. 근교에 자리한 전베이푸鎭北堡영화촬영장. 닝샤서부영화세트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을 만든 이가 바로 장셴량이다. 전베이푸는 변방을 지키는 보루였다. 사병들이 주둔하고 그 가족들과 농민이 거주했다. 장센량은 자신의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영화산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폐허가 된 옛 성터를 1992년 촬영장으로 개발했다. <붉은 수수밭>, <목마인>, <신용문객잔> 등 총 70여 편의 중국과 홍콩 영화 및 드라마가 이곳에서 제작됐다. ‘중국전영종저리주향세계中國電影從這里走向世界.’ 중국 영화가 이곳에서부터 세계로 진출한다는 입구 현판이 이곳의 영향력을 입증해 준다. 방대한 규모의 촬영장을 다 둘러보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고대문명의 흔적들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고대 왕조는 한나라와 당나라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에 세워졌던 서하왕조(1038~1227년)는 쓰촨에서 살던 유목민 탕구트족이 토번족에 밀려 간쑤성 일대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당나라 말기 독립된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탕구트족은 1028년에 족장이었던 이원호李元昊가 간쑤성을 평정하고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하大夏라 이름 지어 스스로를 제왕으로 명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대하를 고대 하夏나라와 구분 짓고 송나라의 영토 서쪽에 있다 해서 ‘서하西夏’라고 불렀다. 서하는 그 영토가 한반도의 다섯 배에 달했다. 동쪽으로는 송나라를 압박하고 서쪽으로는 서역으로 가는 통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지배해 실크로드의 무역권을 장악했다. 역사는 길지 못했다. 1227년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서하를 침략했다. 잔혹한 이민족 말살정책에 의해 사료도 없이 그야말로 ‘미지의 제국’으로 남은 서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0년대 구 소련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다. 서하의 흔적이 남은 서하릉西夏陵으로 향했다. 능으로 가는 길은 하란산의 능선이 끝없이 동행한다. 입구부터 서하문자가 눈에 띈다. 한자보다 더 복잡하다. 6,000자로 창제된 서하문자는 티베트-미얀마 계통 언어로 알려져 있는데 획수가 40획을 넘기도 한다. 서하문자는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16세기 초까지 사용됐다. 하란산 동쪽 기슭, 지는 해를 등지고 선 능은 신비로웠다. 총 53km2의 서하릉에는 9개의 제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인 253기의 순장묘가 있다. 제왕릉은 북두칠성 모양으로 구성됐고, 순장묘도 별자리 형태로 만들어졌다. 궐대, 월성, 내성, 남문 등 다양한 구조물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흔히 ‘태릉’이라 불리는 3호 왕릉, 바로 이원호의 묘다. 정확히는 지름 36m, 높이 24m의 모래 벽돌로 쌓아올린 능탑陵塔이다. 서하릉에서는 지금껏 200점의 건축 장식물과 문화재 등이 출토되고, 왕릉은 최근 6기까지 발굴됐지만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는 것은 이 태릉뿐이다. 서하는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를 국교로 숭상했다. 승려를 교육하고 배출시키는 관청을 설치하고 사찰을 건립했다고 전해지는데, 청동협시市에서 그 종교문화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108청동탑一百零八塔은 청동협시 입구의 서쪽 산기슭에 선 거대한 탑군이다. 서하 중·말기 때 라마교 양식으로 축조된 탑은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탑이 거대한 삼각형 모양을 이룬다. 맨 꼭대기 3.5m 높이의 탑을 시작으로 아래로 2.5m의 탑들이 3, 3, 5, 5, 7, 9, 11, 13, 15, 17, 19의 개수로 12단으로 이루어졌다.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탑의 꼭대기에서는 우수牛首산과 물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오르면 닝샤의 기원은 구석기 시대까지 닿는다. 인촨 남쪽 20km, 황하문명의 발원지인 수이둥거우水洞溝유적지에는 약 3만년 전의 유물과 유적이 광활한 자연경관 속에 잠들어 있다. 수이둥거우는 1923년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인 에밀 리상Emile Licent과 테야르 드 샤르댕P.Teilhard de Chardin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이곳을 보려면 노새가 끄는 마차와 유람선, 전동차와 도보의 여정을 번갈아 거쳐야 한다. 2,700km 만리장성의 끝자락이기도 한 수이둥거우에는 흙으로 쌓은 장성의 원형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명나라 때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지하 요새 창빙둥藏兵洞이 볼거리다. 좁은 미로로 이루어진 내부는 자칫하면 길을 잃기 일쑤다. 놀랍게도 함정, 식수로 썼던 우물터, 침실까지 있다. ●중웨이中衛 사막을 즐기는 방법, 텅그리 사막 ‘사포터우沙坡頭’ 닝샤, 내몽골, 간쑤 세 개의 지역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 중웨이의 사포터우沙坡頭로 향한다. 중웨이라는 이름은 세 지역을 가운데서 호위한다는 의미다. 중웨이는 특히 구기자로 유명하다. 회족들이 안경을 낀 사람이 없는 이유가 눈을 밝히는 구기자를 많이 먹기 때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사포터우는 청나라 건륭황제 3년인 1738년에 지진이 발생해 황하 북쪽에 길이 약 2,000m, 높이 100m, 경사 200m의 모래언덕이 생겨나 얻은 이름이다. 옛 이름은 사타沙陀였다. 잘 조성된 정원을 가로질러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00m 모래 언덕에 올랐다. 사막의 남쪽 아래로 샹산香山의 줄기가 황하의 지류를 두르고 함께 굽이친다. 장관이다. ‘대막고연직, 장하낙일원大漠孤煙直, 長河落日圓’. ‘큰 사막에 외로이 연기만 곧게 솟고, 긴 강에 지는 해가 둥글구나.’ 오죽하면 당나라 때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의 시 ‘사시새상使至塞上’의 한 대목을 이곳에 적어 놓았을까. 사실 사포터우는 강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사막의 서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활기차다. 개발된 사막인 사포터우의 매력은 차라리 액티비티에 있다. 낙타 라이딩, 모래썰매, 케이블카, 전동카 등 모래와 함께하는 레포츠의 재미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200m의 모래언덕을 쏜살같이 내려오는 모래 썰매도 인기가 높지만 백미는 역시 낙타 타기다. 낙타의 굽은 등에 올라 출렁이며 모래를 밟으면 마치 수백년 전 실크로드를 지나던 상인이라도 된 듯하다. 상상하던 ‘진정한’ 사막을 보기 위해 사포터우에서 약 8km 떨어진 북면의 텅그리騰格里 사막으로 발길을 옮겼다. 텅그리는 몽골어로 ‘하늘처럼 넓다’는 뜻이다. 사포터우에 비해 텅그리 사막은 손대지 않은 사막의 풍광과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텅그리 사막은 신장의 ‘타클라마칸’, 내몽골의 ‘마오우쑤’, ‘바단지린’과 함께 중국 4대 사막으로 꼽힌다. 사포터우는 텅그리 사막의 한 지류다. 텅그리 사막 입구에 들어서자 겨울을 준비하는 퉁후초원이 길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텅그리에는 422개의 오아시스가 있다. 소금호수와 초원, 습지가 어우러져 사막 속의 에덴동산이라 불린다. 그 아름다움을 담지 못하는 아쉬움은 사막 지프로 달랬다. 굴곡진 텅그리의 사구를 굉음을 내며 롤러코스터마냥 내달렸다. 모래 파도 너머 해가 지고, 바람 한줄기가 심장을 다독이며 지나간다. ●징타이景泰 황하의 기적, 황하석림黃河石林 길은 좀더 멀어진다. 인촨에서 390km, 차로 약 3시간 거리의 징타이景泰로 향한다. 징타이는 간쑤甘肅성에 속해 있고 닝샤와는 접경이다. 인촨에서 벗어나 고속도로를 1시간여 달리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주위는 온통 돌과 흙뿐. 허허롭지만 메마르지는 않다. 대륙을 적시고 생명을 길러낸 황하의 물줄기는 징타이에 또 하나의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국가지질공원이자 지질유적자연보호구인 ‘황하석림黃河石林’이다. 총 34km2의 황하석림은 우취엔산五泉山의 퇴적암들이 어우러져 빽빽한 숲을 이룬 것이다. 약 210만년 전부터 지금까지 비바람과 중력에 가라앉은 풍화작용에 의해 그 모습을 변화시켜 왔다. 바위 형상이 세워진 입구부터 이색적이다. 풍경구 내를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굽이치는 골짜기를 오르고 내렸다. 절벽 아래 누런 황하가 동에서 서로 휘돌아 흐르고 라우룽완老龍灣 마을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버스가 여행객을 내려놓은 곳은 라우룽완 마을의 선착장. 석림으로 가려면 먼저 특별한 이동수단을 타고 황하를 건너야 한다. ‘양피파즈羊皮筏子’라는 양가죽 뗏목이다. 나무를 구할 수 없었던 이곳에서는 예부터 강을 건너기 위해 양가죽을 이용했다. 한나라 광무제 때의 기록에는 소나 양의 가죽뗏목이 운송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전해지니 양피파즈의 역사는 적어도 2,000년인 셈이다. 양가죽 뗏목은 통 양가죽에 유채기름칠을 해 가죽을 부드럽게 한 다음 말린다. 작은 입구에 풍선처럼 바람을 불어넣어 봉한 뒤 나무판에 14개를 엮어 물에 띄우는 방식이다. 얼기설기 엮은 뗏목은 사공을 합쳐 4~5명이 정원.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노가 일렁이는 물살을 가르자 천천히 뗏목이 움직인다. 눈앞으로 기암절벽이 강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황하 덕에 문명이 탄생하고 티베트 고원에서 화북 평원으로 이어지는 강 유역은 비옥한 곡창 지대를 이루었으며 수많은 왕조들이 이 강과 함께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물 한 말에 흙이 여섯 되’라는 누런 강 위에 생각이 머무는 사이 뗏목이 도착했다. 음마飮馬대협곡. 중국 역사극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는 황하석림의 시작점. 오랜 시간의 흔적들을 암석들은 거대한 제 몸 깊숙이 새기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골짜기 양쪽으로 거대한 바위들이 뿜어내는 비장함이 황홀하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4.5km의 협곡을 지난다. 마른 먼지가 훅 인다. 늙은 마차꾼은 능숙한 걸음으로 나귀를 재촉하고 이따금 고개를 쳐들어 기암괴석들이 품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란이라는 소녀가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는 12년을 종군하고 금의환향 했다지요.” ‘화목란花木蘭의 귀향’ 등 바위들은 저마다 형상에 걸맞은 이름과 사연을 담고 있다. 감동은 끝나지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로 오른다. 끝도 없는 바위산이 발아래로 굽이친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람도 세차다. 10여 분. 1,600m 우취엔산 정상에 다다랐다. 날리는 옷깃을 여미는 사이 형용하기 힘든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천산만학千山萬壑’. 천개의 산과 만개의 골짜기다. 이토록 방대하고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돌무더기라니. 위풍당당한 이 기적 앞에서 그저 설레설레 고개만 저을 뿐이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하나투어www.hanatour.com, 티웨이항공www.twayair.com ▶travel info Ningxia Airline 티웨이항공이 11월26일까지 2주에 3회 인천 출발 (월·금·수요일), 인촨 출발(화·목·토요일) 전세기를 운항 중이다. 2015년 3월부터는 주 3회 인천-인촨 정기편이 운항될 예정이다. 티웨이항공은 11월1일 무안-제주 노선을 시작으로 무안국제공항을 통해 중국 노선을 확대해 왔다. 앞으로 인천-하이커우, 인천-지난, 제주-난닝 등 서울거점 외 지방 공항을 활성화할 예정이다. 인천에서 인촨까지 비행시간은 약 3시간이다. www.twayair.com HOTEL 롱청 호텔Long Cheng Hotel 중웨이에 자리한 호텔로 깔끔하고 넓은 객실이 나무랄 데 없다. 총 148개의 객실과 레스토랑,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고 닝샤 지역에서는 드물게 무선인터넷 사용이 편리하다. 공항과도 가까워 현지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중위시 고루동가 오환광장 서측宁夏 中卫市 鼓樓东街 五环廣場 西側 +86-0955-7667777 ACTIVITY 사파두 사막 액티비티 사막에서 모래를 이용해 다양한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사파두의 매력. 200m의 경사를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모래썰매, 허공을 가로지르는 아찔한 로프웨이와 지프와이어, 번지점프는 스릴 만점. 마치 사막에 펼쳐진 놀이동산을 보는 듯하다. 지프나 사막 충랑차를 타고 굴곡진 사막의 능선을 신나게 내달리는 체험도 놓치기 아깝다. 기계적인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에서 맛보는 스릴감은 색다르다.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낙타 라이딩. 일정 대열을 맞춰 낙타 등에 올라 몰이꾼을 따라 천천히 사막을 약 30분 지난다. 운 좋게 일몰을 만난다면 그 낭만이야 말할 것 없다. 가격은 낙타 라이딩이 80위안, 지프는 200위안이다. 영하 중위시 사파두 관광구宁夏 中卫市 城西 16公里 +86-0955-7681481 www.spttour.com RESTAURANT 만수르 궁Mansour Palace 중화회향문화원 안에 있는 이슬람 식당이다. 후이족 향토음식과 이슬람 연회식 등 후이족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슬람 풍의 인테리어를 갖춘 홀은 2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11개의 개별 룸도 있다. 양고기 바비큐와 양 내장요리, 냉채, 교자만두 등이 인기메뉴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허용된 할랄 재료를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 맛은 일반 중국식과 큰 차이 없다. 은천 중화회향문화원宁夏 银川市 永宁县西京藏高速路 口出口处 +86-0951-8027318 www.zhhxwhy.com SHOPPING 중국 구기관Chinese Wolfberry Museum 닝샤는 구기자의 고향이다. 역사가 4,000년이다. 특히 주산지인 중웨이시 중닝현의 구기자를 최고로 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약재나 차로 즐겨 먹지만 닝샤 구기자는 맛이 달아 건포도처럼 간식으로 먹을 수도 있다. 2011년 인촨에 문을 연 중국구기관은 중국 구기자에 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중국 최초의 박물관이자 쇼핑점이다. 2층 건물 내에는 박물관, 문화센터, 건강서비스센터 등 홀이 나뉘어 고대로부터 이어온 중국 구기자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쇼핑점에서는 차, 스낵류, 음료, 건강식품 등 다양한 구기자 제품들을 시식하고 구매하며 국제배송도 가능하다. 중국 구기자는 5등급으로 분류하는데 최고로 치는 1등급 야생 흑구기자 가격은 약 3,000위안(한화 약 52만원), 15g 간식용은 약 7위안(한화 1,200원) 정도. 박물관 입장료는 20위안이다. www.berylgoji.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4500년 전 고대 이집트 ‘잃어버린 왕비’ 무덤 발견

    4500년 전 고대 이집트 ‘잃어버린 왕비’ 무덤 발견

    고대 이집트 파라오 네페레프레의 왕비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됐다. 이집트 고고유물부는 4일(현지시간) 지금까지 그 존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왕비의 무덤을 체코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왕비는 4500년 전 고대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 네페레프레의 부인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이집트 수도 카이로 남서부 도시 아부시르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레(Re)는 아름답다’라는 이름 뜻을 지닌 네페레프레를 포함한 고대 이집트 제5왕조(기원전 2494~2345년)의 왕들이 묻힌 피라미드가 밀집해 있다. 무덤 주인의 이름은 ‘켄타카웨스’로 밝혀졌다. 맘두 알다마티 고대유물부 장관은 “무덤이 발견될 때까지 불분명했던 왕비의 이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같은 이름의 선대가 2명이 존재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이므로, 이 왕비는 ‘켄타카웨스 3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알다마티 장관은 “켄타카웨스 3세의 이름과 신분은 무덤의 벽에 새겨져 있었다”면서 “이는 무덤의 건설자들이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또 “제5왕조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발굴조사대를 이끈 체코 이집트학연구소의 미로슬라프 바르타에 따르면, 켄타카웨스 3세의 무덤은 네페레프레 왕의 장제전 내에서 발견됐다. 장제전은 고대 이집트에서 국왕의 영혼을 제사하던 숭배전을 말한다. 바르타 연구원은 “이 사실 때문에 무덤 주인은 네페레프레의 왕비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무덤은 고대 이집트 제5왕조 중기 시대의 것으로, 약 30개의 부장품이 발견됐다. 그중 24개는 석회석, 4개는 구리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사진=이집트 고고유물부 제공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사설] 시대착오 국정운영 위험 직시해야 한다

    집권 3년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에 여전히 인적 쇄신과 소통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취임 이후 지속돼 온 일방통행식 국정운영과 비밀주의 깜깜이 인사 방식은 끝없는 비판의 표적이 돼 왔지만 변화의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윤회 문건’ 등의 여파라고 하지만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취임 이후 최저치인 30%대로 바닥을 친 것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소통 부족, 폐쇄회로 같은 인사 스타일과 무관치 않다. 청와대의 일방적인 잣대가 아니라 평균적인 국민 눈높이에서 국정정상화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감한 인적 쇄신과 경직된 국정운영 방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불충’(不忠) 운운하는 왕조시대적 ‘충성’ 맹세로 비칠 만한 구닥다리 발언을 예사로 하고 청와대는 이를 이례적으로 공개하는 현실이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애국영화 ‘명량’의 대사까지 초들며 쓴웃음을 짓겠는가. 김 실장이 세간의 우려대로 정말 재신임을 받고 인적 쇄신 요구는 허망한 메아리로 끝나고 만다면 국정정상화의 길은 요원하다. 김 실장은 파부침주(破釜沈舟)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다며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지만 지금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세라고 본다. 이제라도 그릇된 것을 깨고 바른 것을 훤히 드러내야 마땅하다. 최근 SBS·TNS(74.5%)와 KBS·미디어리서치(71.1%)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청와대 개편과 개각이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문건 파문으로 그렇게 난리를 치고도 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비서관들을 포함한 청와대 개편이 속히 이뤄지지 않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국정 일신을 바라는 국민으로서는 그야말로 맥이 빠지는 노릇이다. ‘비선 국정농단 의혹’ 수사는 사실상 마무리 단계이지만 상당수 국민은 지금도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청와대 ‘가이드라인’에 따른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상처 난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라도 청와대의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 김 실장이 자신의 말대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면 그동안 그 많은 크고 작은 ‘인사참사’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자리를 지킬 수만은 없을 것이다.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북아메리카 원주민 트릭스터 이야기(리처드 어도스·알폰소 오르티스 지음, 김주관 옮김, 한길사 펴냄) 민족신화나 민담에 동물이 인격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트릭스터. 이 트릭스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인간의 문화를 가능하게 한 문화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우리에겐 그다지 친숙하지 않지만 서구에선 문학, 예술비평에서까지 폭넓게 다뤄지는 존재다. 책에서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구비문학의 중심이라는 트릭스터 이야기 100편이 풀어진다. 코요테, 거미인간 등의 트릭스터들이 흥미롭게 소개된다. 남을 속이는 교활한 인물이면서 스스로 속는 바보스러움, 하찮고 나약하지만 힘있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치는 이중성…. 트릭스터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지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볼 수 있는 자료 가치도 돋보인다. 508쪽. 2만 7000원. 일자리 전쟁(짐 클리프턴 지음, 정준희 옮김, 북스넛 펴냄) 갤럽 최고경영자(CEO)가 갤럽 보고서를 바탕으로 제시한 일자리 해법. 앞으로 닥쳐올 세계전쟁은 무력의 싸움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전면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양질의 일자리, 즉 정규직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국내총생산(GDP) 성장 둔화. 각국은 지원금 정책과 공익사업 확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며 그 자금을 세금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갤럽 조사 결과 이는 근본 해결책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과 중소기업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수록 소비 지출과 사업 확장, 고용 감소를 부추겨 일자리와 GDP 축소를 부른다. 책은 그 해결책을 국가보다 도시 차원에서 먼저 찾으라고 한다. 지역의 대학과 리더들이 일자리 창출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이자 요소라는 것이다. 277쪽. 1만 3000원. 한국 미라(전승민 지음, 휴먼앤북스 펴냄) 한국에서 발굴된 미라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현장 취재 기록과 조선왕조실록, 장례 변천사 등의 문헌 연구를 토대로 했다. 이 땅의 미라가 다른 지역과 다른 형태로 생성되는 이유는 대부분 고유의 전통인 회곽묘 때문이다. 횟가루와 고운 모래, 황토로 이뤄진 회곽묘가 물과 섞이면서 발산되는 고열 때문에 열소독이 이뤄져 미라로 보존된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처럼 한국 미라가 생성된 과학적 원인과 과정, 역사문화적 배경을 촘촘하게 훑어냈다. 이색적인 과학 도서이자 고고학 도서이기도 하다. 미라 연구는 기생충학의 진전은 물론 고대 복식·생활사 연구에 큰 성과를 가져다준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저자는 미라를 “자연과 문화와 역사가 후세에 남긴 선물이며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담고 있는 조상들의 타임캡슐”이라고 말한다. 252쪽. 1만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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