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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39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儒林(39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8) 이렇듯 맹자는 고향인 추나라에서부터 이웃 나라에서까지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올 만큼 이미 학문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공자처럼 사(士)란 벼슬에 종사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맹자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여러 나라를 주유할 것을 결심한다. 일찍이 제자 공손추(公孫丑)와 대화를 나누다가 ‘선생님은 어느 쪽입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벼슬해야 될 때는 벼슬하고, 그만두어야할 때는 그만두며, 오래 머물러야 될 때는 오래 머물고, 빨리 떠나야 될 때는 빨리 떠나는 것이 공자이시다. 모두 옛 성인이시오니 나는 아직 그런 것을 행할 수는 없지만 원하는 것은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공자를 배우는 것(願則學孔子)’을 자신의 천업으로 삼았던 맹자였으므로 고향에서 어느 정도 학문이 무르익자 천하를 유세하면서 공자처럼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보일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공자가 13년간의 주유열국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55세 때인 기원전 497년. 그러나 맹자가 천하주유를 시작한 것은 시기가 불분명하다. 다만 맹자가 만났었던 수많은 왕들의 재위연도를 미루어 추정하여 볼 때 맹자가 고향을 떠나는 것은 대충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여겨진다. 또한 맹자가 돌아다닌 열국의 순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제나라에 간 것이 먼저인지 양나라에 간 것이 먼저인지 하는 문제와 제나라에 간 것이 한 번인지 두 번인지 하는 것 역시 일치되는 견해가 없다. 다만 맹자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던 시절에 이미 상당한 사회적 명망과 지위를 얻고 있었고,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맹자가 공자보다 열국으로부터 더 환영을 받았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제자 팽경(彭更)은 이 무렵 맹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스승이 길을 떠날 때면 뒤쪽에는 언제나 수십 대의 마차가 뒤따랐으며, 수백 명의 수행원이 줄을 이어 참으로 장관이었다.” 맹자가 처음으로 찾아간 나라는 제나라로 추정된다. 맹자가 제나라에 간 것은 두 번이었는데, 첫 번째는 위왕(威王) 때였고, 두 번째는 선왕(宣王) 때였다. 공자 역시 35세 되던 해 제나라로 첫 번째 출국을 단행하였는데, 그것은 그 무렵 제나라가 재상 안영이 다스리던 최고의 강국이자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누리던 문화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는 성 안의 가구 수만 7만으로 길마다 수레의 바퀴가 서로 맞부딪치고, 행인의 어깨가 서로 맞닿을 정도라 해서 ‘곡격견마(擊肩摩)’로 불리던 화려한 도시였던 것이다. 그것은 1세기가 지난 맹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선왕은 선비들을 좋아하여 수도 임치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세워 천하에 이름난 선비들을 널리 초빙하여 거처를 마련해 두고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맹자가 제나라를 주유열국의 첫 번째 나라로 선택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으나 이루하(離婁下)편에 나오는 맹자와 광장(匡章)과의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맹자가 제나라를 첫 번째로 방문한 것은 대충 38세 이전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제나라가 맹자의 첫 번째 출국지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38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2)

    儒林(38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2)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2) 맹자가 태어난 것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기원전 372년경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72년은 공자가 죽은 107년 후. 맹자의 고향은 사기에 기록된 대로 추(鄒). 오늘날 산둥성 퉈저우부( 州府) 쩌우현(鄒縣)이란 곳이다. 맹자의 생애는 공자와 달리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공자에 대해서는 ‘공자세가’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왠지 맹자에 대해서는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맹자의 저서를 읽고 양 혜왕이 맹자에게 ‘어떤 수단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소.’하고 물은 대답에 접할 때마다 무심코 책을 놓고 ‘아, 그렇구나. 이득이란 실로 난(亂)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자(夫子:공자)가 거의 ‘이(利:이득)’에 관하여 말하지 않은 것도 항상 난의 근원을 막으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다. ‘이득을 보이려 일을 하면 원한이 많다.’ 위는 천자에서 아래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득을 좋아하는 폐단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사마천의 기록은 바로 맹자의 첫 장에 나오는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의 내용을 인용한 말 . 예로부터 이를 얻기보다는 먼저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자신의 저서 첫 장에 올려놓은 맹자의 태도에 대해 사마천은 이처럼 탄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마천은 맹자에 대해 다만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맹가는 추나라 사람.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 나아가 배웠다. 제 선왕(齊宣王)을 섬기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양나라로 갔다. 양 혜왕은 맹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를 친견해 보니 하는 말들이 의미가 너무 멀어서 현실사정에 어둡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진(秦)나라는 상군(商君)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에 힘쓰고, 초(楚)와 위(魏)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싸움에 이기어 적을 꺾고, 또 제 선왕은 손자(孫子)와 전기(田忌) 등을 등용하여 제후를 동으로 하여 제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등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연횡(合從連衡)에 미쳐 날뛰어 전쟁하고 공격하는 것을 현명한 일로 생각하던 난세였다. 그런데 맹가는 오로지 요순의 태평시대와 삼대(夏,殷,周)의 제왕의 덕을 부르짖어 시세의 요구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말을 하여도 용납되지 않았다. 물러와서 제자 만장(萬章) 등과 함께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을 강술하고 중니(仲尼:공자)의 뜻한 것을 펴서 맹자(孟子) 7편을 저술하였다.” 이상이 사마천이 기록한 맹자에 대한 전문의 내용이다.‘공자세가’에 기록된 공자의 생애에 비하면 형편없이 짧은 단편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면 맹자 역시 공자와 매우 비슷한 생애를 보냈음을 알 수가 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4) ‘원조’ 예언자들

    언제 누가 무슨 예언으로 세상을 움직였을까. 시대의 변천에 따라 예언자의 계보도 많이 달라졌다.20세기 초엔 손병희를 비롯한 신종교단체 지도자들이 ‘정감록’을 근거로 ‘후천개벽’을 예언했다. 그에 앞서 조선 후기에는 풍수지리와 점술에 밝은 ‘술사(術士)’들이 예언자로 활동했다. 그들은 정권에서 소외된 이른바 ‘원국지사(怨國之士)’들과 연합해 새 왕조의 창립을 꿈꾸었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언서 ‘정감록’을 민간에 유포시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좀더 다양한 부류의 예언자들이 발견된다. 우선 고려 후기에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다가 사기꾼으로 단죄된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고려시대만 해도 국가는 정치적 예언을 독점 관리하였으며, 이를 위해 천문과 지리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술관(術官)을 따로 설치했다. 국가가 예언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는 경향은 이미 고대로부터 비롯됐다. 우리와 이웃한 고대 중국은 물론, 서양문명의 뿌리로 알려진 로마제국에서도 정치적 예언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정치적 예언은 허가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만큼 고대사회에서 예언의 역할은 중요했다. 한국 고대의 예언자들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왕, 무당, 일관 및 승려가 그들인데, 이들은 예언의 원조였다.‘정감록’의 가장 깊숙한 뿌리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성한 왕들의 예언능력 고대엔 왕들이 직접 예언자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신라 선덕여왕이 그랬다.‘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인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줄거리만 간단히 언급하겠다.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 떼가 모여 여러 날 동안 울어댔다. 이것을 보고 여왕은 여근곡이란 곳에 백제 군사가 잠복해 있는 줄을 알아냈다. 개구리는 눈이 툭 불거져 있어 성난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병사로 해석했다. 개구리가 울던 옥문은 곧 여자의 생식기인데 여자는 음이요, 빛깔로 말하면 흰색, 방향으로는 서쪽이다. 여왕은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데 남근이란 여근 속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라 여근곡의 적군은 물리치기가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선덕여왕의 예언은 사물의 형태, 이름, 빛깔이 당시 사람들이 공유한 상징체계의 틀 안에서 이뤄졌단 점이 주목된다. 역사가들은 이 설화를 예로 들어 선덕여왕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능력이 있었다든가, 또는 여왕의 권위가 만만치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한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고대의 왕은 신성시 됐는데, 왕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그 이면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 고대의 진시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신성한 능력의 소유자로 간주돼, 사시사철 천지의 순조로운 운행을 알리는 달력을 공포할 권리가 있었다. 심지어 고대 동양에서는 신기한 동식물의 출현, 별자리의 움직임을 비롯해 갖가지 천문 현상, 바람과 비 등 일체의 자연 현상에서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환경의 사소한 변화에도 한 나라의 정치적 공과가 반영되어 있다고 믿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사가 수없이 많다. 왕은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 암시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고 적절히 대응해야만 됐다. 그것이 하늘과 백성에 대한 왕의 의무였다. 이런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한국 고대엔 왕이 흉년이나 자연재해에 대해 직접 책임을 져야 됐다. 부여에선 여차하면 왕을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여 왕은 정치적 수장이자 최고의 사제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부여 사람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하늘의 의지가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 모양으로 길흉을 점칠 정도였다. 일종의 동물 점(占)이 애용되었던 것인데, 그 방법이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갑골점(甲骨占)과 비슷해 보인다. 고대에는 아직 세속적인 지식과 종교적인 신앙심이나, 정치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왕은 최고 권력자이자 종교적으로 신성한 존재로서 하늘의 뜻을 정확히 읽어내야 된다는 사명을 떠안게 됐다. 심한 경우, 예언과 주술의 능력이 부족한 왕은 퇴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상적인 왕은 선덕여왕처럼 예지 능력을 구비했어야 됐다. ●궁중의 무당 또는 일관들, 예언 전문가로 국정에 간여해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정치와 종교는 점차 분리되었고, 정치권력이 종교적 권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여전히 정치적 예언능력이 요구되었지만, 왕이 직접 예언자여야 할 필요는 사라졌다. 왕은 궁궐 안에 예언자들을 고용했고, 그것으로 족했다.‘삼국사기’에 보면 이미 백제의 초창기인 온조왕 때,‘일관(日官)’이란 전문가가 측근으로 기용돼 있었다. 어느 한 해엔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도성에 사는 어떤 백성의 집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머리는 하나였으나 몸은 둘이었다. 이런 변고(?)에 대해 일관이 해석을 내놨다.“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세력을 일으키게 될 징조입니다. 소가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하게 될 징조입니다.” 예언은 맞아들었다. 얼마 후 온조왕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일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라고도 하였다. 그는 천체의 이상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예컨대 149년(고구려 차대왕 4년) 5월에 다섯 별(歲星 또는 木星,熒惑 또는 火星,太白 또는 金星,辰星 또는 水星 그리고 鎭星 또는 土星)이 동쪽 하늘에 모였다. 일자가 보기에 흉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의 마음에 거슬리면 공연히 화를 당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임금의 덕”이 있다는 증거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늦어도 2세기에는 천문에 정통한 직업적인 예언자들이 고구려 왕실에 존재했다. 일자는 이를테면 전문직 관리로 왕을 보좌했다. 고구려 왕실에는 또 다른 부류의 예언자들도 있었다. 역시 고구려 차대왕 때의 기록이 참고가 된다.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마침 하얀 여우가 보이기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맞히지 못해 떨떠름해했다. 왕은 ‘무사(巫師)’에게 이 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스승 사(師)’ 자를 붙여 무사라 일컫는 데서 짐작되듯, 최상급의 무당이었다. 무사는 그 일이 아주 나쁜 징조라고 말했다. 여우는 요사스러운 짐승인데 하물며 그 빛깔이 하얗다면 더욱 괴이한 일이라 했다.“임금님은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십시오. 만일 임금님이 덕을 닦으시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렇게 간언하는 무사를 죽여 버렸다. 나라 안의 최고 무당으로서 예언자는 자연 현상에 은밀하게 담긴 하늘의 뜻을 제대로 알아맞혀야 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무당은 자연 현상의 예언적 의미를 캐낼 때 현실정치에 깊숙이 개입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의 정치적 개입은 위의 이야기가 상징하듯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다. 우리에게 삼국통일의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김유신만 해도 본래는 고구려의 무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전생에 고구려의 무당 추남이었다 한다. 추남은 천지자연의 여러 현상을 예언으로 풀이하는데 능했다. 뿐만 아니라 점술에도 밝았다. 하지만 고구려 왕비의 뜻을 거스른 바람에 무고하게 죽음을 당했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적국 신라의 귀족 가문에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유사’에 보면, 고구려의 연개소문 역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적국의 장수로 환생하였다고 했다. 환생에 얽힌 전설이 사실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점은 추남이든 또는 차대왕 때의 무사든 국가의 운명을 바로 예언해야 될 사명을 띤 무당들이 왕의 곁에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과 별도로 천문에 밝은 일자들 역시 예언을 임무로 삼았다. ●명산대천과 시조 사당의 제관들, 국운을 예언하다 7세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얼핏 무당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구별되는 새로운 부류의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사제 또는 제관(祭官) 즉,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담당하던 종교인들이 예언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고구려 말기인 보장왕 때 일이다.654년(보장왕 13년) 4월, 마령 고개 위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했다. 마령의 신인이란 산신령을 가리킨 것이 거의 틀림없다. 신라의 경우 김유신의 전기를 읽어보면 삼산(三山)의 여신들이 국운을 수호하는 신으로 언급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마령도 국가적으로 중시되던 명산이며, 그 곳의 산신이라면 특별한 신앙대상이 아닐까 한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마령 산신의 예언을 청취한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다. 그는 산신령의 제사를 전담하는 사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딱히 고구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국에는 저마다 국가적인 제사의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유명한 산천과 국가의 시조묘(始祖廟) 등이 신앙 대상이었다. 이들 종교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만 해도 시조 주몽(朱蒙)의 사당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마침 예언자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된다. 보장왕 때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이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 아래까지 쳐들어 왔다. 당나라 군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달아 성을 공격했다. 당 태종까지 친히 합세해 요동성을 수십 겹으로 에워싸 북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요동성 주민들의 사기는 저하됐고 성은 함락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주몽 사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섰다.“우리가 모시는 주몽 사당에는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이 있고 날카로운 창이 있다. 전해오는 말로 이것은 전연(前燕·249∼370) 때 하늘이 내려 보냈다고 한다. 지금 적에게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하다. 미녀를 단장하여 주몽 신에게 아내(‘婦神’)로 바치자.” 그의 제안대로 미녀를 바친 다음 제관이 다시 말했다. 주몽이 기뻐하시므로 성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란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동성은 바로 함락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에는 주몽 사당의 제관을 단순히 무당(‘巫’)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크게 괘념할 일은 아닐 성싶다. 요동성의 함락에 관한 내용은 고구려의 적국인 당나라 측의 사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 사당을 보호하고 관리할 ‘사제’ 또는 ‘제관’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쯤에서 요점을 간추려보자. 첫째, 고구려의 건국 시조 주몽은 사후에 국방의 요충인 요동성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돼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슷한 예로 신라의 문무왕도 죽어 국가의 수호신이 되었다. 문무왕과는 달리 주몽은 성곽의 수호신이었다. 그런 점에서 주몽 사당은 후대 중국 성황(城隍)의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주몽 신에게 젊은 여성이 희생으로 바쳐졌다는 점이다. 사람을 산 채로 무덤에 부장품으로 삼는 순장(殉葬) 풍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종교적 희생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인용한 사료에서 확인되듯 국가적으로 중요한 이 사당을 관리하는 제관이 있었고, 그는 수호신 주몽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우리에겐 가장 중요하다. 백제의 경우에도 명산대천은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만큼 국가의 멸망을 예언하는 징조가 가장 분명하게 포착된 장소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부터 기이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됐다. 빨간 말이 북악의 오함사(烏含寺)에 들어와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은 사찰을 여러 날 동안 맴돌다 죽었다는 것이다. 북악이라는 명칭에서도 짐작되듯 그 산은 백제의 오악 가운데 하나였다. 명산 중의 명산으로 백제가 국가적 신앙대상으로 삼았던 북악 산신이 나라의 멸망을 알리는 징조였다면 의미심장하다. 하필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도 상징적이다. 앞서 예로 든 고구려의 산신도 마령 즉 ‘말 고개’에 출현했던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에 말은 전쟁 또는 군신(軍神)의 상징이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 백제의 우물, 강물 그리고 바다에도 재앙의 조짐이 역력했다. 서해안 해변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어찌나 많던지 백성들이 아무리 먹어도 남았다고 했다. 생초진(生草津)엔 거대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됐다. 그 길이가 무려 18척이나 됐다고 한다. 수도 사비성의 서남쪽으로 흐르는 사비하(금강)에는 큰 물고기가 죽어 떠올랐는데, 길이가 3척이나 됐다. 이어서,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도성의 우물물도 핏빛으로 변했다. 모두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따져보면 우물물이나 강물이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는 큰 물고기나 거대한 여성이 폐사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한국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물속에는 물의 신이든가 아니면 용이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특출한 사람의 모습일 수도 있었고 물고기 또는 지렁이와 같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물의 신은 우선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한다. 주몽의 외할아버지 하백이 바로 그렇다. 작은 물고기들은 물의 신(水神,河伯)의 신하로 인식됐다. 적에게 쫓기던 주몽이 무사히 강물을 건너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물고기와 자라들 덕분이었다. 만일 주몽이 수신의 외손이 아니었더라면, 수중 생물들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다는 것이 신화의 논리다. 백제 왕실은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던 만큼 명산 못지않게 대천(大川)도 중요했다. 수도 사비성을 감싸 흐르던 사비하, 생초진 그리고 서해 바다의 수신은 모두 백제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물론 수호신들의 죽음에 대한 관찰은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현상을 목격하고 보고하고 기록한 것은 보통사람들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언자인 제관들의 고유한 권리요, 또한 의무였다. ●호국사찰의 승려들, 불안한 미래를 보다 삼국에 불교가 전파된 뒤로 각 나라엔 호국사찰(護國寺刹)이 들어섰다. 기존의 산신과 수신에 더하여 부처님의 가호가 나라의 융성을 보장해주리란 믿음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조짐이 호국사찰에도 나타났다. 백제의 경우,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탑이 벼락을 맞는가 하면,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왕흥사(王興寺)에선 배의 돛과 같이 생긴 것이 강물을 따라 절간 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격됐다. 왕흥사 승려들은 이런 모습을 함께 지켜봤다 한다. 정치적 예언은 본래 신성한 왕과 무당들의 독점적 영역이었으나, 역사 속에 새로 등장한 일관(日官)들, 불가(佛家)의 스님들에게도 예언의 권능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이런 고대 예언자들의 직업적 계보가 이어져, 조선후기엔 술사(術士)와 스님들이 정감록의 생산과 유통을 주로 담당하게 된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2) 정감록과 천주교의 대화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2) 정감록과 천주교의 대화

    정감록은 조선후기 한국에 전파된 천주교와도 만났다? 서쪽에서 들어온 새 학문이라 당시엔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에 관심을 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는 쌍방향 교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에 담긴 ‘해도진인(海島眞人)’이란 관념을 빌려갔다. 또한 ‘정감록’처럼 편년체 예언서 형식을 차용해서 ‘니벽전’이란 천주교신자들만의 예언서를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정감록 신앙집단은 ‘요한계시록’에 보이는 말세관에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발견했다. 얼핏 생각하면 서로 대립적이었을 것만 같은 정감록 신앙과 천주교 신앙 사이에 양방향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거리가 될 만하다. 알다시피 18∼19세기 한국의 천주교는 일종의 비밀 종교단체였다. 정감록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천주교회에 호응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민중이었다. 정감록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양자는 저마다 종교 철학적 출발점은 달랐지만 신앙집단으로서 사회적 구성이 엇비슷했고, 그들이 처한 정치 문화적 배경도 같았다.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조선 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신앙은 이를테면 이란성(二卵性) 쌍생아와도 같았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해도진인(海島眞人)으로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정감록과 서학의 미묘한 관계를 증명하는 사건 하나가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진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단 이야기다. 알고 보면 이미 1794년부터 주문모 신부는 국내에 잠입해 전교활동을 벌였다. 그 당시 국왕 정조는 천주교를 그다지 심하게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제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유교 국가인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이를 국가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1801년 정월, 정조가 세상을 뜨고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지배층의 정서를 대변하듯 천주교를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소동을 겪은 끝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 100여명이 처형되고 400명가량이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지도급 천주교 신자들 및 진보적인 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실 신유박해는 천주교세의 팽창에 불안을 느낀 지배층의 종교탄압인 동시에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권력투쟁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신유박해에 관한 ‘실록’ 기사를 살펴보면 문제의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 대강을 간추려 보겠다. 당시 체포된 사람 중에 김건순이란 서울 양반이 있었다. 그는 집안도 좋고 재산도 많아 어느 모로나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방술(方術)에 관한 책들을 유독 좋아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정감록과 같은 비결이나 도술에 관한 책을 늘 끼고 살았다. 자연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 중엔 천주교 신자들도 끼어 있었다. 신자들의 소개로 그는 주문모 신부를 만났다. 김건순의 눈에는 주문모 신부가 도사 중에서도 출중한 ‘이인(異人)’으로 비쳤다. 늘 주문모를 성심껏 모시던 김건순은 주문모에게 함께 해도(海島)로 들어가자고 간청했다. 섬에 들어가서 무기를 마련하고 큰배(巨艦)를 만들어 중국으로 쳐들어가자고 했다. 병자호란 등 청나라로부터 받은 원한을 씻어보자는 것이었다. 장차 진인이 해도에서 나와 세상을 평정한다는 정감록의 내용에 공명했던 김건순은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주문모는 이를 거절했다. 김건순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주문모에 대한 그의 기대는 사그라지지 않아 결국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 중에서 김건순은 지적 수준으로나 재력 면에서 최상위층에 속했다. 그런 그조차 해도에서 진인이 나와 세상을 바꾼다는 정감록의 예언에 매달려, 주문모를 진인으로 상정해 거사를 꿈꾸었던 것이다. 조선의 관헌 앞에서 털어놓은 말로는 장차 청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고 했지만 정말 그랬을지는 의문이다. 하필 가까운 조선을 놔두고 머나먼 청나라까지 쳐들어간다는 것이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역시 천주교 신자였던 김이백의 언사는 더욱 심했다. 그는 서울 사는 친척 김건순과 천안 사는 천주교 신자 강이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편지를 전해주곤 했는데, 정감록 풍의 예언을 많이 지어냈다. 예컨대 “바다 가운데 품(品) 자 모양의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군사와 말(兵馬)이 무척 날래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한다.“바다 가운데 진인(眞人)이 있다. 진인은 육임(六壬)과 둔갑(遁甲) 즉, 점과 도술에 능하다.” 당국의 조사 결과, 강이천과 김이백은 그런 예언을 이용해 남의 재물을 빼앗으려 한 적도 있었다. 달리 말해, 자기들이 섬에 있는 진인의 군대와 잘 통하므로 미리 군자금을 제공하면 장차 좋은 수가 생긴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강이천이라면 꽤 유명한 선비였다. 일찍이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적이 있는 지식인인데, 그 또한 정감록의 내용과 논리를 빌려 포교의 기회를 노렸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강이천 등은 정감록 비결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단 점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천주교를 전교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니벽전’, 초기 천주교 지도자 이벽의 예언서 19세기 중엽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을 모방해 일종의 신앙 비결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이벽선생몽회록(李檗先生夢會錄)’이란 이름의 필사본이 문제의 비결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알려주는 책이란 뜻에서 ‘새벽젼’이라 부르기도 하고, 예언자의 이름을 따라 ‘니벽전’이라고도 한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예언자 정감의 이름을 따서 붙인 책이름이다.‘니벽전’은 천주교 신자 정학술이란 선비가 천주교 초기의 거물인 이벽(1754-1786)을 사후 60년만인 1846년 6월 14일 밤 꿈에서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한 대화체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대화체란 점에서도 정감록을 연상시킨다. 비결에 예언자로 등장하는 이벽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거물급 지도자였다. 그는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뒤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셋집을 빌려 천주교 교리 연구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전도에 앞장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들과 서울의 중인층인 김범우,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도 천주교를 전했다. 당대의 석학 이가환, 이기양 등과 교리논쟁을 벌어졌을 때도 그들을 압도할 만큼 교리에 능통하였다. 이벽의 천주교 이해는 ‘성교요지(聖敎要旨)’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하느님 을 천주(天主)나 천제(天帝)라고 불렀던 것과는 달리 상제(上帝) 또는 상주(上主)라고 불렀다.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아울러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유교적 윤리가 천주교의 교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이벽이 그리던 하느님 나라는 유교에서 말하는 고대의 성인(聖人), 성군(聖君)의 정치와 일치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하늘의 본성(天命)을 탐구해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룩하는 데 신앙의 목적을 두었다. 이벽의 천주교는 다분히 유교적 천주교였다. 그는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쓴 정약종(丁若鍾·1760-1801)과 더불어 18세기 조선후기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공교롭게도 ‘니벽전’은 이벽을 예언자로, 정약종을 저자로 설정해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정약종이 “정유년(1777년·정조1)”에 기록했다고 적혀 있는 관계로, 사람들은 이 책을 정약종이 지은 종교 소설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조사한 바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미 1801년 신유박해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약종이 어떻게 1846년 정학술이란 사람의 꿈속 일을 기록할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 틀림없다. 하지만 정약종을 저자로 가탁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로 말하면 의금부에 잡혀 가서 심문을 받을 때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임금이요, 가정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아비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고 하여, 유교적 사회질서를 한마디로 질타했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다 죽은 사람이므로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모범이었다. ‘니벽전’은 이와 같은 사람의 붓을 빌려 천상선인(天上仙人) 이벽이 천주교 신앙에 관한 말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소재를 훑어보면, 우주창조의 원리, 낙원추방과 예수의 구원, 유·불·도의 황당함, 조상제사와 우상숭배의 잘못된 점, 신유옥사와 천주교의 마지막 승리, 하느님의 최후심판이 거론된다. 그런 다음 이벽은 정학술에게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를 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이 책의 목적은 천주교도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는 이벽 같은 인물을 내세워 천주교 박해사건을 예언함으로써, 온갖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이 신앙을 더욱 강화하도록 고무 격려하는 데 있었다. 책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반드시 알아야 될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둘째, 하느님과 예수를 굳게 믿고 끝까지 제사를 거부하라는 교회의 명령이다. 셋째, 한국천주교회에 닥친 박해와 환란은 미리 예정된 것이지만 이제 곧 끝난다고 예언한다. 신유박해를 비롯해 19세기 전반의 숱한 박해사건을 연대기식으로 적어나가는데, 기록방식이 편년체란 점에서 정감록을 완전히 닮았다. 참고로, 이벽의 입에서 떨어진 마지막 예언은 이러했다.“병오 이후로 다음 세상이 되어 죄 있는 자는 모두 멸망하며 착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어갈 때가 오느니라.” 여기서 병오년은 1846년을 가리킨다. 이 예언에 따르면,19세기 중엽 세상은 종말을 맞이해 최후의 심판이 열린다. 죄지은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착한 천주교 신자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를테면 지상천국이 열릴 거라고 했다. 이런 천주교 신자들의 예언에서 나는 19세기말에 등장한 동학의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과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동학에서도 새 세상이 열리면 동학의 가르침대로 수련을 쌓은 군자(君子)들이 지상천국을 맡아 다스린다고 보았다. ●정감록에 스며든 ‘요한 계시록’ 물론 동학을 설립한 최제우가 말한 후천(後天)의 개념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고대부터 있었고, 우리 역사에서도 이미 고려 인종 때 선천과 후천이 곧 바뀔 거라는 예언이 나오기도 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동학과 고대 중국의 후천관은 차이가 있다. 동양 고대의 선·후천 교대설과는 달리 동학에는 ‘최후의 심판’이란 요소가 감지된다. 이 ‘심판’이란 것은 다분히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래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등장한 예언서에도 아직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 ‘정감록’은? 내가 보기에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는 ‘심판’을 연상시키는 구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감결’에서 이심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세 사람이 마주하였으니 못할 말이 어디 있겠나. 신년(申年) 봄 삼월, 성세(聖歲) 가을 팔월에 인천(仁川)과 부평(富平) 사이에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하고, 안성(安城)과 죽산(竹山)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여주(驪州)와 광주(廣州) 사이에 인적이 영영 끊어지고, 수성(隨城)과 당성(唐城) 사이에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한강 남쪽 백리에 닭·개의 소리가 없고,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이번의 신문연재에서 이미 한 두 차례 언급한 구절이라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세에 전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는 메시지는 다시 강조할 만하다. 이와 같은 비극적 종말은 ‘요한계시록’을 뇌리에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정감록의 저자가 반드시 천주교 신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17세기 이후 한국사회는 직접 간접으로 천주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고 있었다는 점을 우선 인정해야 하겠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비록 소수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했다. 더욱이 중국에는 서양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였다.18세기 후반엔 한국에도 천주교회가 지하조직으로 운영되었다. 그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최후심판’과 같은 천주교의 기본교리라든가 몇몇 유명한 성경구절은 한국사회에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설사 명확한 증거를 댈 순 없을지라도, 천주교가 정감록이란 민중의 신앙에 끼친 영향은 적어도 논리적인 면에선 개연성이 인정돼야 한다. 요한 계시록이 상정하는 말세의 비참한 모습은 정감록의 여러 곳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감록의 일부라 할 ‘경주이선생가장결(慶州李先生家藏訣)’에도 최후의 상황이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살아 있는 백성들이 달아나 숨으니, 삼강(三綱)이 없어져 끊어졌네. 하늘의 재앙이 계속하여 혹독하니, 벌레의 독을 무엇이라 말하리. 부자가 먼저 죽으니, 아무리 뉘우쳐도 미치지 못하리. 우물 가운데 물이 연하여, 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 남쪽과 북쪽 군사의 조짐이 불과 같이 점점 번져오네. 집 위의 토운(土運)이 하늘의 재앙에 때로 변하네. 옛날에도 드물고 오늘날에는 없는 일, 굶주려서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어, 저마다 서로 짓밟고 있네. 사람의 목숨을 해치니, 산 자가 몇이나 되리. 또 겸해서 흉년이 들어, 쌓인 시체가 구렁을 메우네. 벼락같은 화운(火運)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네. 먼 방향에서 움직여 화서, 바람과 구름이 어두우니 장차 다시 어찌한단 말인가.” 이처럼 정감록은 ‘최후의 심판’이 행해질 때, 그것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전염병, 흉년, 전쟁은 그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 점은 ‘요한계시록’을 비롯해 신약과 구약의 경우에도 똑같다. 한 가지 나로선 무척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정감록에 보이는 말세의 모습이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불교적 세계관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현재도 도솔천에서 수행 중이라고 전하는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내려와 건설할 용화세계(龍華世界)는 피를 흘리는 전쟁 따위를 전제로 삼지 않는다. 불교의 이상향인 용화세계를 선도할 전륜성왕은 절대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모든 적의 항복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정감록이 기술한 참혹한 말세는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것,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이다. 좀더 생각해 보면 문화란 결국 상이한 계층, 종교, 언어권의 소통으로 풍요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와 정감록의 만남은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고, 바로 그런 만남이 있었기에 한국 민중의 문화는 좀더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해야겠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오는 27∼28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남양군도의 사이판을 방문한다.6000여 일본인들도 이때 함께 이 작은 섬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 대변지인 산케이신문은 벌써부터 광분하며 기획특집을 쏟아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일왕은 팔라우와 마셜군도 등 태평양 섬들을 두루 둘러볼 참이었으나 미국령인 사이판만 찾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주, 옛 일본 육군 제30사단 소속 야마카와 요시오(87) 중위와 나카우 스스키(83) 상등병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인근 산악지대에서 숨어살다가 발견됐다는 오보 사태로 일본 열도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972년 괌의 요코이 쇼이치(당시 56세)에 이어 74년 필리핀에서 오노다 히로오(당시 51세)가 종전 30여년 만에 생환했었다. 당시 요코이는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는 귀국 일성을 토해내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열광케 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이들은 또 무슨 말을 내뱉을까. 이래 저래 일본인들의 해묵은 관심이 태평양에 쏠리고 있다. 그 태평양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머나먼 태평양에 수만의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다. 신혼여행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이판 같은 곳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과 군속,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들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는 일명 만세절벽은 일본인 참배객의 메카가 되었으며, 일왕은 여기에 세워질 신사 준공식을 겸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2차대전은 곧 태평양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 중국, 버마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전선이 확대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남양군도에서는 바다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양군도란 오늘날 미크로네시아를 가리킨다. 지도를 펼치면, 일본 남쪽으로 괌, 사이판 등이 포함된 북마리아나군도가 있고 그 밑으로 얍과 팔라우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마셜군도가 있는데 이곳을 총칭하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라 부르며, 여기에는 2106개의 섬이 포함돼 있다. 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근거지였던 팔라우를 찾았다. 연전에 어느 정신없는 탤런트가 ‘정신대를 기리는’ 누드촬영을 하겠다고 나서 온 사회를 벌컥 뒤집어 놓은 바로 그곳이다. 육·해·공군을 관장한 팔라우 집단사령부와 식민청인 남양청 본청, 법원, 병원 등이 있던 매우 중요한 전략기지였다. 흔히 일본이 2차대전 무렵에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일본의 태평양 진출은 이보다 앞선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의 이른바 ‘아메리카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 쟁탈전을 조정하기 위해 태평양쪽은 스페인이 독식하는 것으로 합의된다. 그리하여 필리핀을 위시한 팔라우도 16세기에 스페인에 예속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이저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이곳에 독일 자본이 밀어닥쳤다. 독일의 스페인에 대한 도전은 1899년에 드디어 성공한다.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힘을 잃게 되자 스페인은 파리에서 비밀협정을 맺어 독일에 이 섬들을 팔아넘긴다. 이에 1914년 10월, 일본은 영국과 연대해 독일에 대항하면서 미크로네시아를 넘본다. 사실, 일본의 태평양 탐욕은 훨씬 전부터 드러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북방 대륙 진출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남쪽 바다를 향한 야욕을 잠시 유보했을 뿐이다.1880년대에 다케코시 요사부로는 “적도를 얻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 일본 해군은 캐롤라인과 마리아나, 마셜군도의 주요 섬에 상륙한다.1914년 10월7일, 수백명의 일본군이 폰페이섬의 성당에 들이쳤으며, 이곳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팔라우 공격에 나섰다. 1919년에 국제연합은 공식적으로 이곳의 일본 지배를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남양군도를 획득했으니, 일본의 태평양 식민사는 이로부터 근 100년에 이르는 것이다. 종교와 교육, 그리고 경제적 개발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남양청을 세우고 식민 관료들이 섬을 지배한다. 일본인 이민이 급증했으며 그들은 전력산업, 알루미늄광산, 진주양식과 카사바 같은 상업적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 1935년까지 5만여 일본인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기카와로부터 이주해 왔다.1940년에 일본인 인구는 7만 7000명까지 늘었으며,2년 뒤에는 9만 6000명을 헤아렸다.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군속들이 속속 집결, 일본인 수는 거의 2배로 불었는데, 팔라우와 사이판이 주요 거주지였다. 일본 식민청은 이곳에서 각 섬마다 이른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한반도에서 하던 방식과 똑같이 원주민의 토지 개인소유는 인정하되, 바닷가나 산의 공유지는 모두 식민청 소유로 돌렸다. 한마디로 ‘털도 벗기지 않고’ 대부분의 땅을 먹어치운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땅의 대부분은 군사기지로 징발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도 기실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을 둘러싼 이해대립 때문에 생긴 필연적 귀결이었다.2차대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양국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급기야 미크로네시아에서 태평양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투가 치러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으니, 괌이 2차대전 때 미국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괌은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부산물로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태평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783년에 무역선 차이나호(Empress of china)를 통해 태평양에 본격 등장했다. 배에는 무역 상인과 선교사, 뉴잉글랜드의 포경업자, 해군 장교 등이 타고 있었다. 미국은 괌에 더해 20세기 초반에는 필리핀, 하와이, 사모아제도 등을 추가로 얻는다. 하와이에서는 1893년에 미국 상인과 선교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조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 후 이곳에서 사탕수수 산업이 시작되었고, 한국인 이민도 비슷한 시점에 이뤄진다. 말이 이민이지 노예수출에 지나지 않았다.1899년에는 미국령 사모아에 미국 해군이 진을 친다. 괌에서도 미국은 ‘어머니 나라(Mother Country)’로 등장했다.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때린 것은 이처럼 태평양을 둘러싼 해묵은 패권 다툼의 발화였을 뿐이다. 거의 동시에 일본 육군은 홍콩을 공격한 데 이어 42년 2월에는 영국군 거점인 싱가포르까지 먹어치운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태평양전쟁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김도형 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6년,15살 어린 나이의 한국인 위안부 10여명이 처음 팔라우에 끌려온다. 그 후 코롤섬 토목공사를 위해 전라·경상도에서 노무자 200여명이 왔다. 코롤시 동쪽 끝에 위치한 ‘아이고브리지’는 한인들이 다리를 놓을 때 너무 혹독하게 시달린 나머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붙은 이름이라는 내력이 슬프다. 한인 노무자와 더불어 조선총독부는 농업이민도 보냈다. 모두 13회에 걸쳐 1266명이 이주됐다. 중부 태평양의 중심기지인 트럭섬이 궤멸되자 1944년 2월25일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선발된 정예부대 29사단이 팔라우에 진주했다. 이때 중국 관동에서 1만 2000여명이 왔는데, 대부분 한인 병사들이었다는 설이 있다. 팔라우의 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은 군속이었다. 말이 군속이지 해군에서 토목작업을 시키기 위해 끌고온 노무자들이었다.1943년 5월20일, 부산을 거쳐 팔라우에 800여명의 한인이 도착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 본토와 남양과의 수송시설 건설에 종사하다가 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진지 구축에 투입된다. 인근 무인도에서는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갈매기 배설물인 인광을 채굴하여 비료를 만드는 일에도 이들이 투입됐다. 1944년 8월, 연합국이 중부 태평양의 마지막 공격지 팔라우에 들이쳤다. 미 제1전대의 공격으로 일본 육군 7212명 중 6766명이 전사하고 466명만 살아남았다. 해군도 3400명 중 단지 10명만이 생존했다. 물론 그 일본군 중에는 징병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군 폭격이 거세지자 일제는 팔라우의 일본인 1만7800여명을 본국으로 강제소환한다. 그렇지만 강제 징용된 한인들은 송환 대상에서조차 제외된 채 전쟁이 본격화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식량보급이 끊기면서 한인들에게는 식량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쳐 식량을 훔치다 총을 맡고 숱한 한인들이 죽어 나갔다. 정신대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도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창고에서 건빵을 훔치려다 들킨 한인을 나무에 매단 뒤 귀나 코를 베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과 흡사한 짓을 자행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전해진다. 팔라우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 공식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총알받이로 수많은 한인들을 끌고 왔다 수세에 몰리자 나몰라라 내팽개친 뒤 자신들만 빠져나간 것도 일제 만행의 일부로 기록돼야 한다. 그 불바다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환한 사람이 2만 5773명이었고, 팔라우에서는 3000여명이 귀환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팔라우에서도 ‘천상의 바다정원’으로 소개되는 록 아일랜드로 스피드보트를 타고 나가 무인도에 배를 댔다. 물 속으로 들어가자 ‘물 반 고기 반’이다. 산호섬답게 산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용궁’이 본디 이런 풍경이었을까 여겨지는 곳. 그러나 물 밑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탱크와 항공기, 선박의 잔해가 즐비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역사의 시간은 진행 중임을 이 잔해들이 말해주고 있다. 과거, 잠시 적이었고 이후 해양 패권의 든든한 동지로 미국에 보조를 맞춰 온 일본의 왕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미국령 사이판을 찾는다. 태평양의 바다 속에 잠긴 탱크들이 다시금 포신을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의 태평양을 다시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다. 이 막막한 타국을 떠돌고 있을 한국인들의 넋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일왕에 의해 지금 다시 시작된 것이다.
  • 사우디 파드국왕 위중 후계자 압둘라 유력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20여년 동안 통치해온 파드 빈 아델 아지즈 국왕이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후계구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28일(현지시간) 파드 국왕이 폐렴으로 전날 파이잘 왕립병원에 입원, 진찰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알 파이잘 외무장관은 “국왕의 상태는 안정적”이라고 밝혔지만 일부 소식통들은 국왕의 병세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앞서 미국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사우디연구소는 파드 국왕이 25일 사망했으며 사우디 군에 비상이 걸렸다고 주장했다. 올해 82세인 파드 국왕은 지난 95년 뇌졸중을 앓은 뒤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파드 국왕의 와병 소식이 전해지자 지난 27일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서부텍사스중질유(WTI) 7월 인도분이 전날보다 배럴당 0.84달러 오른 51.85달러에 마감되는 등 유가에 영향을 미쳤다. 파드 국왕 유고시 압둘라(81) 왕세자가 뒤를 이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파드 국왕의 의붓동생인 압둘라 왕세자는 파드 국왕을 대신해 10년 가까이 사실상 사우디를 통치해 왔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온 압둘라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중동의 안정을 위해 미국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을 펼 것으로 전망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러나 차기 왕세자 자리를 놓고는 암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압둘라 왕세자는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를 이미 차기 왕세자로 지명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을 이끌며 인기를 얻고 있는 내무장관 나예프 왕자도 왕세자 후보로 거명되고 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차도르 벗는 아랍의 女權

    아랍 여성들의 차도르 속으로 여권 신장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만, 바레인, 카타르에 이어 쿠웨이트 의회가 16일(현지시간) 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총선 투표권과 입후보권을 부여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쿠웨이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44년 만이다. ●법안 통과되자 의회밖 축제분위기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순간 의회 밖에서는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기뻐했고, 불꽃놀이가 하늘을 밝혔다. 걸출한 여성 활동가인 로라 알 다스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냈다. 오늘부터 2007년 총선을 위한 선거 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정 선거법은 셰이크 알 아흐마드 알 사바흐 국왕이 서명하는 즉시 발효되며 2주안에 관보를 통해 공표될 예정이다. 알 아흐마드 국왕은 지난 1999년 여성에게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의회는 여성 참정권 허용 법안을 부결시켰고 지난 3일에도 여성의 지방의회 선거 참여를 허용하는 법안도 저지했다. 이번에도 보수 이슬람계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로써 전체 쿠웨이트 국민 96만명 가운데 13만 9000명에 불과했던 유권자수는 33만 900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아랍 여성 의회진출 세계 최저 쿠웨이트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다른 아랍 여성에 비해 진보적이고 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정치적 권리에서는 뒤처졌다. 오만과 바레인은 2002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고, 카타르도 2003년 여성이 총선에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은 여전히 참정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단지 최근에서야 여성들도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아랍권에서는 비교적 일찍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던 이집트에서는 오늘 9월 대선을 앞두고 여성 무소속 후보가 출마했다. 나왈 엘 사다위란 여성 후보는 5선을 노리는 현 무라바크(76) 대통령과 자유로운 선거운동을 제한하는 정부 때문에 고향에서도 모임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음달 열리는 이란 대선에는 1010명이 입후보했는데 이 중 89명이 여성 후보이다. 하지만 이란 의회는 여성들이 대선 후보로는 적합치 않다고 결론짓는 등 차별은 여전하다. 이란의 내무장관 무사비 라리도 “여성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은 될 수 있지만 더 이상의 고위행정직은 맡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체 아랍 여성의 절반은 문맹이며, 임산부 사망률은 라틴 아메리카의 2배, 동아시아의 4배에 이른다. 아랍 의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5%로 12.9%인 남미,21.2%인 동아시아에 비해 한참 뒤처진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7) ‘정감록(鄭鑑錄)’이 정감록인 까닭?

    예언서는 예언가의 이름을 빌려 제목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단군조선 때의 ‘신지’, 후삼국의 ‘도선’, 조선의 ‘남사고’와 ‘이토정’은 유명한 예언가였다. 그들의 이름을 딴 ‘신지비사’‘도선비기’‘남사고비결’‘토정비결’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한 예언서였다. 대부분 내용은 위작으로 보이지만 신지비사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정감록’은 어떠한가? ‘영조실록’에 보면 ‘정감의 참서’라고 돼 있어 예언가 정감이 쓴 책으로 보아야 옳다. 아닌 게 아니라 현전하는 정감록을 읽어 보아도 예언가 정감이 중요하다. 정감은 누구인가? 그는 실존 인물이었는가? 만약 가공 인물이라면 하필 왜 정감인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정감비기’ 또는 ‘정감비결’이 아니라 ‘정감록’인가? 역사상 최초로 문제가 됐던 정감록은 어떻게 생긴 책이었을까? 나는 정감록이 정감록인 까닭을 좀더 정확히 알고 싶다. 이번 호에서 검토될 사항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이다.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정감록의 기원을 밝히려는 나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실존 인물 정감이 정감록의 저자?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17세기 초반에 정감(鄭鑑)이란 관리가 있긴 했다. 그는 흔히 소과(小科)라 불리는 생원진사시험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됐다. 실록엔 형조 정랑(正郞)이란 중견관리로 나와 있다. 관리로서 제법 성공한 편이다. 그는 당시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광해 8년(1616) 5월 국왕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헌부는 정감의 치부를 샅샅이 들춰냈다. 그는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도 말썽을 일으켜 처벌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일가친척이 성관계를 가진 여성을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독직(瀆職) 행위였다. 고위층의 청탁 유무와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린다 했다. 사헌부의 주장대로 정감은 부도덕한 부패 관리의 전형이었을까? 강경한 사헌부의 처벌 요구와는 달리 국왕이 정감에게 내린 처벌은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분이었다. 광해군은 정감의 벼슬을 바꾸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불법 행위에 대한 사헌부의 고발이 한낱 풍문에 근거한 것이라 중벌이 가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정감을 애써 두둔할 생각이 내겐 없다. 내 관심은 17세기 전반 형조정랑을 지낸 정감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의 참서’와 무슨 관계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아무 관계도 없었다. 형조정랑 정감은 생전에든 사후에든 단 한번도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1782년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사건 피의자 박서집의 진술이 참조된다. 그는 정감록의 유래에 대해 “그것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왕조 때라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이런 진술을 취조관들도 문제삼지 않았다. 요컨대 정감록의 저자 정감은 가공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씨가 조선왕조의 대안? 가공 인물 정감이 하필 정(鄭)씨인 이유는 무엇인가? 250개나 되는 한국의 많은 성씨들 가운데서 굳이 ‘정’을 가공의 예언자에게 준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에 눈을 돌려보자. 조선 왕조가 출범한 14세기 말부터 정감록이 출현한 18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정씨 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반 왕조적인 인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 정몽주(鄭夢周)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고려 말의 대표적 유신(儒臣)이었다. 충의(忠義)를 다하기 위해 그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의 회유를 끝까지 물리쳤다. 결국 태종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善竹橋)에서 무참히 격살(擊殺)됐다. 흥미롭게도 ‘정감록’에 보면 정감이 정몽주를 후손이라 부르고 있다. 둘째, 정도전(鄭道傳)도 거론해야 옳다. 그는 조선 개국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선의 수많은 제도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런 까닭에 현대 역사학자들 중에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도전은 정말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들의 갈등에 관련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셋째, 정여립(鄭汝立)이 있다. 재능과 학식이 탁월했던 그는 선조 연간에 불붙기 시작한 당쟁에 휘말려 국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향리에서 세월을 보내던 정여립은 끝내 반역자로 낙인 찍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도주하던 끝에 깊은 산골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감록을 지었다고 보기도 하고 그의 비참한 운명을 애달파하기도 했다. 이밖에 영조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죽은 정희량(鄭希亮)이 주목된다.1728년 그는 이인좌 등과 함께 남부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엔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거창에서 관군에 붙잡혀 사형 당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정희량이 아직 살아 있고 머지않아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행할 정도였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민중의 기림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알다시피 역사상 반왕조적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은 결코 한둘이 아니었다. 이씨와 김씨를 비롯해 여러 성씨가 골고루 뒤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위에서 언급한 몇몇 정씨는 민중들의 기억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다. 정여립과 정희량의 일생은 특히나 비극적이었고 신비한 부분도 적지 않았다. 민중들은 그들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더욱더 정씨를 이씨 왕조의 대안으로 삼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민중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정성진인’에서 ‘정감’까지 16세기 말 정여립이 죽고 나서부터였다. 다음은 정씨 왕조가 들어설 차례란 생각이 민중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런 생각이 차츰 영글어 17세기엔 이른바 ‘정성진인(鄭姓眞人)’이 민중들 사이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달리 말해 정씨 성을 가진 완벽한 인간이 출현해 민중을 도탄에서 구해낼 거란 믿음이었다. 그런 인식이 널리 퍼진 가운데 18세기 전반 정희량이 붙들려 죽었다. 그는 군사를 일으켰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정성진인설’을 적극적으로 사방에 유포하지 않았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희량은 현실에선 실패했다. 그럼에도 민중의 뇌리엔 ‘이씨 왕조를 대체할 이는 정씨뿐이다.’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18세기에 등장한 정감록은 민중의 그런 생각에 확신을 불어넣어준 것으로 봐야 한다. 정감록의 핵심 내용은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감(鑑)이란 이름의 뜻은? 좀더 생각해 보면 정감록에 예언가의 이름을 ‘감(鑑)’이라 설정한 이유도 무척 궁금하다. 그것을 일부 이본엔 ‘감(堪)’이라고도 했다. 예언가의 이름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지 따져 보고 싶다. 가공 인물을 대단한 예언가로 부각시키려 했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될 점은 이름에 담긴 상징성이었을 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라야 예언서의 독자들 그리고 민중을 설득해 믿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숙고의 결과가 ‘감(鑑)’ 또는 ‘감(堪)’이란 글자의 선택이었다고 본다. ‘감(堪)’은 감여(堪輿) 즉 풍수지리를 뜻한다. 달리 표현하면 ‘감’은 천도(天道),‘여’는 지도(地道)라고도 한다. 감이란 글자를 이름으로 쓴다면 본인이 풍수가 또는 예언가임을 이미 천명한 셈이 된다. 현전하는 정감록은 풍수지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감(堪)’은 책의 성격에 적합한 이름이다. 하지만 내가 본 정감록의 대부분은 ‘감(鑑)’을 주인공으로 정해 두고 있다.‘거울 감(鑑)’자엔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담겨 있어 그런가? 고대로부터 한국에선 거울이란 사물은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거울은 과거, 현재 및 미래를 비추는 마술적인 존재로 주목돼 왔다. 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다뉴세문경은 당시 최고지배층이었던 제사장들이 소유했던 특수한 물건이었다. 주술을 비롯한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대에도 거울의 마술적 속성은 여전하다. 무당들은 누구나 명도(明圖)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명도를 이용해 집을 나간 사람을 찾거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도 점친다. 무당들은 명도 거울이 신(神)의 영력(靈力)을 상징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바로 그 거울이 있어서 인간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거울이 국가의 운명을 예언하는 데 동원된 적도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아직 궁예의 부하로 있던 시절, 낡은 청동 거울에 새겨진 예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즉위, 그리고 후삼국의 통일을 예언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에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도 있었다. 은(殷)나라의 거울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부연하면 주(周)나라 왕은 바로 앞선 시기에 존재한 은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란 뜻이다. 다른 사람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란 것이다. 이 경우 거울이란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정감록의 주인공 정감 역시 역사의 교훈을 알려준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데 있었다. 정감록은 거울이란 이름을 가진 정감을 저자로 내세워 거울이 가진 주술성을 빌리고자 했다. 한마디로 말해 거울의 신비한 힘에 의존한 정감록은 결코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예언서란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록(錄)’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예언서 따지고 보면 예언서 ‘정감록’의 제목이 ‘록(錄)’자로 끝나는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이게 웬 말인가 되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려고 역대 예언서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봤다. 놀랍게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에 발견된 예언서 중에 ‘록’자로 제목이 끝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세기까지 우리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예언서들은 그 제목이 무슨 무슨 비기(秘記), 비사(秘詞)’ 또는 유훈(遺訓)이라 돼 있었다.‘기’와 ‘사’는 한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의 예언서는 은연중에 문학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짐작은 실제로 예언서를 검토해본 결과와 일치한다. 한시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운문(韻文) 형태의 예언서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훈’자를 예언서 제목으로 삼은 경우는 도덕적인 명령을 내세우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해동고현유훈(海東古賢遺訓)’이 대표적인 예다. 이 ‘유훈’도 문장의 표현 방식은 역시 운문이었다. 조선 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은 그 제목부터 새롭다.‘록’은 ‘실록’을 연상시킨다. 수사의 멋과 맛을 중시하는 과거의 예언서와 달리 앞으로 일어날 사실을 묵묵히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태도와 정신이 엿보인다. 예언서 정감록은 서술양식도 과거의 운문에서 벗어나 산문(散文)이 되었다. 한문학을 대표하는 시문(詩文)을 버리고 역사책의 전형인 편년체(編年體)를 택하거나 유교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화체를 선택했다. 정감록은 기왕의 예언서와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서술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18세기의 정감록은 한글본이었다! 정조 6년(1783) 1월에 발생한 정감록 사건의 연루자 안필복은 자기가 읽은 정감록에 대해 상세히 진술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가 집에 소장했던 정감록은 책자의 길이가 52∼62㎝, 두께는 4㎝,200장 정도 분량이었다. 정감록은 형태와 크기에 있어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여느 한적(韓籍)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사실은 정감록이 백지에 한글(諺文)로 적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필사본이었다. 안필복의 진술이 있기 한 해 전에도 정감록 사건이 있었다. 그때 피의자 박서집은 정감록에 대해 “저는 어렸을 때 단지 한글로 된 ‘정감록’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박서집의 출생 연도를 감안하면, 그가 정감록을 읽은 시기는 1740∼50년대에 해당한다. 아마도 1739년 최초로 조정의 관심을 끌었던 정감록은 박서집이 읽은 한글본 정감록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유행한 ‘정감록’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정감록이 본래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다. 20세기에 와서 정감록을 집대성한 여러 편찬자들뿐만 아니라 정감록을 연구한 학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정감록이라 하면 한문으로 된 ‘감결(鑑訣)’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20세기 초 ‘비난정감록진본(非難鄭鑑錄眞本)’을 편찬한 현병주는 ‘감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본장의 기록문자가 즉 정감록의 원본이다. 본장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전 사회를 통하여 오백년간의 시선이 집주(集注)하던 정감록의 편명이 성립된 것이다.” 그 뒤의 다른 연구에서도 정감록이라면 으레 한문본을 염두에 두었을 뿐이다. 이 한문본은 18세기의 한글본 정감록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이것은 반드시 규명해야 할 장래의 과제다. ●새 예언서의 출현은 조선후기 사회문화의 변화를 반영해 정감록의 등장은 조선 후기 사회에 일어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더이상 극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시기엔 내면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상세히 서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사적인 글쓰기가 유행하게 돼 정감록과 같은 편년체 또는 대화체 서술이 일반화된 것이다. 책이 흔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종이 생산량도 늘어났고 소비도 활발해 정감록과 같은 필사본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상층 지식인들 사이에선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는 지적 분위기가 유행했다. 정감록을 향유한 하층 지식인과 민중들도 사실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담론에 그 나름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구태의연한 ‘정감비결’이나 ‘정감비기’가 아니라 하필 ‘정감록’이 된 데는 다 그만한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정감록이 한글본이었다는 점도 중요한데 지식의 생산과 소비는 더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감록과 더불어 새 시대의 동은 터 오고 있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열린세상] ‘은둔의 나라’ 부탄에서 배워야 할 것들

    담배를 팔지 않고 모든 공공장소에서 흡연이 금지된 나라가 있다고 하면 모두 설마하면서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2004년 7월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의 의회는 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지난해 12월17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인구 70만명이 사는 부탄에서는 어디서든 담배를 살 수 없으며 공공장소 어디를 막론하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불법이다. 만약 이 법을 위반한다면 벌금으로 225달러를 지불해야 하는데,1인당 평균 소득이 630달러에 불과한 부탄 국민으로서는 엄청난 액수라 아니할 수 없다. 흡연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비싼 관세를 물고 수입할 수는 있으나 오로지 자신의 집 안에서만 흡연할 수 있다. 흡연하는 관광객에게는 입국할 때 20갑까지 허용된다. 부탄이 세계 최초로 담배 판매를 금지하게 된 배경에는 담배가 건강에 나쁜 점은 물론이고, 담배 연기와 꽁초로 인해 자연환경이 더럽혀지는 것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부탄의 친환경정책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나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림을 보호하기 위해 등산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부탄 의회는 1995년에 나라 면적의 60%가 삼림화되어야 하며 이 중 26%는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부탄은 ‘샹그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제임스 힐턴이 1933년 발표한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히말라야의 유토피아를 지칭한 이름이다. 부탄은 아직도 가난한 나라이다. 이들도 관광객을 많이 받아들이고 등산을 허용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방해 받지 않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관광객 수를 매년 6000명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관광객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으며 가이드와 함께 허용된 구역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남미와 아시아의 국가들이 경제개발을 위해 숲을 파괴하면서 개간을 하는 것과 대조를 보이는 이유는, 이들은 여전히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작은 은둔의 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담배를 판매 금지시킨 결단과 용기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담배는 수십종의 독성 발암물질이 담긴 독극물이다. 시판되는 식품에 발암물질이 하나만 들어 있어도 흥분하면서 밝혀진 발암물질만 69종인 담배를 파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에게 담배의 생산 및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면 일부는 찬성하지만 일부에서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담배회사가 문을 닫을 경우 경제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국가 세수를 걱정하기도 한다. 부탄의 엄격한 자연보호가 경제 발전을 더디게 한다는 지적이 있을 때마다 부탄의 왕축 국왕은 “국가총생산(GNP)보다도 국가총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누누이 공언해 왔다. 이제 우리는 담배 판매 금지의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 왕축 국왕의 말을 ‘국가총생산보다도 국민총건강이 중요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너무나도 익숙하게 생각하는 담배 판매에 대해서도, 앞으로 수십년 지난 뒤에는 아무리 돈벌이가 된다 하더라도 발암 물질을 버젓하게 팔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납득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정감록’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런데도 막상 언제, 누가 정감록을 썼냐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자라 왕조 말까지 금서(禁書)였고, 그래서 저작에 관해 참조될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럼, 우리는 정감록의 저자와 출현 시기를 하나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심했다.‘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정사를 샅샅이 뒤지며 여러 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정감록이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답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에선 정감록의 기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선조22년 정여립 역모사건이 기원? 처음으로 정감록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이능화다. 그는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이능화의 저서 ‘조선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 外交史)’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정여립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룡산에 갔다가 반란할 마음을 적은 시(反詩)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장차 나무 아들(木子, 즉 이씨)이 망하고 전읍(奠邑, 즉 정씨)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지어서 퍼뜨렸으며, 스스로 그에 응하였다. 이것이 정감록에 관한 주장의 시초가 된다.”요컨대 정여립이 계룡산에서 지은 ‘반시’에서 정감록이 시작됐다는 말이 된다. 일제시기엔 정감록의 기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써 찾아낸 답도 근거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1923년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集錄)’을 보면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 저자에 대하여도 항간의 주장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승려인 무학(無學, 또는 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조선의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숭배하였던 것은 고려의 태조가 도선(道宣 또는 道詵이라고도 함)을 대우한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는데, 사실은 무학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무학의 비석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입증할 수 없다.” 정감록의 작자와 출현 시기에 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진척되지 못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나 할까.1973년 안춘근은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의 이본들을 대대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을 간행했다. 그는 정감록의 저자를 확인하기가 곤란한 사정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작자에 대한 확증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알 수 없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에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더욱 알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정감록과 같이 허황하면 그럴수록 또 작자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른바 술서(術書) 또는 그 밖의 미신과 관련 있는 저작들의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요, 그것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 말대로 정감록을 언제, 누가 썼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서로 낙인 찍혀 있었던 책이라서 그 사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베끼는 사람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변형됐을 것은 틀림없다. 내 자신의 연구결과 확인된 사실이지만 역사상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 정감록의 내용은 현재의 정감록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어떤 연구자는 정감록이 등장한 시기를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전반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정감록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하지 못하다. ●‘정감록’은 고구려 때 나왔다? 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정감록을 애독한 민중들은 그 저자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1979년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살던 강성도(조사 당시 69세) 노인은 정감록의 유래를 이렇게 말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고(上古)에, 뭐라더냐. 고구려 때, 그 때쯤 되었던 모양이라. 응 그 때쯤인데 어디 사람인가 하니 평안도 사람이야. 나면서부터 이 양반은 참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중국 땅을 한번 시찰로 나갔는데. 이 정감록은 남방의 화직성(火直星, 화성임)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야. 이 재주를 당할 재주가 없어. 미래를 다 알고 앉았으니 말이야. 뭐 요새 정감록비전(鄭鑑錄秘傳)이 그런 소리가 있지? 그 정감록이 남긴 책이 그렇지.” 강성도 노인은 정감록의 저자를 고구려 사람 정감록으로 보았다. 정감록을 평안도 출신이라고 못 박은 점도 재밌다. 젊었을 때 누구 못지않게 ‘정감록비전’을 자주 읽었다고 하는 강 노인의 이런 확신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강 노인의 견해가 일반의 인식을 대표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구비 전승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노인의 주장을 완전히 억지주장이라 매도하기도 어렵다. 강 노인 역시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감록’이 삼국시대 고구려에 살던 정감록이란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는 뜻도 된다.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정감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았다. 영조 15년(1739) 음력 8월6일(경진)이었다. 그 날짜 실록엔 정감록의 성격과 그 책에 대한 당시 조정의 입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실려 있다. 정감록에 관해 워낙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몇 줄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이때 서북변방(평안도와 함경도)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鄭鑑讖緯之書)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그 책을 불살라 금지시키기를 청했다. 아울러 소문의 뿌리를 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말하기를,‘그것이 어찌 진시황이 서적의 소유를 금지한 것과 다르겠는가? 바른 기운(正氣,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충실하면 나쁜 기운(邪氣)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운을 북돋우는 데 학문이 아니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어서 왕은 수백 마디 말로 훈시하였다.” 방금 읽은 실록 기사는 정감록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거론하기는 어렵겠기에 우선 한 가지 사실만 특히 강조해 둔다. 정감록은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 유행했다는 점이다.“이 때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그 때 ‘정감록’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면 특히 서북지방이 심하였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강 노인의 진술에서도 예언서의 작자가 평안도 사람 정감록이라고 했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말 가운데는 정감록이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다. ●문제의 인물 조유제는 누구? ‘정감록’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또 다른 자료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보다 약 두 달쯤 앞선 그 해 6월15일자 기록에 정감록의 유행에 대해 새로운 단서가 포착된다. “우의정 송인명이 또 아뢰었다.‘정감록(鄭鑑錄), 역년(歷年) 등에 관한 일은 조사에 있어 철저를 기해야 하고 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함경감사에게 명령해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본사(비변사)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니 조유제(趙裕齊) 등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가지고 비밀리에 함경도로 내려보내서 수사에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 정감록이나 역년은 모두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들 예언서의 전파에 직접 관여한 이는 조유제로 밝혀져 있다. 전후 관계로 보아 함경도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언급된 사항은 아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미처 모르고 있는 정보를 비변사가 입수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어쩌면 조유제란 이는 예언서나 괴문서를 조작한 전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함경도 측이 몰랐을지 의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마지막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함경도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비변사에 조유제를 밀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 해도 조유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는 조유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실록 등을 검색해 보았으나 도무지 정보가 없다. 좀 더 추측해 보면, 서울의 비변사가 그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떤 사건에 연좌돼 함경도로 유배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방에선 이름이 다소 알려진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예언서를 저술할 정도라면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록에 조유제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인 비중은 대단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하필 서북지방에서 ‘정감록’이 출현한 이유는?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북부 지방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중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무인(武人)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초창기부터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게다가 서북 사람들은 본래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해 문과를 비롯한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서북인들은 중앙 정계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다. 자연히 서북 사람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이 컸는데,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긴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서북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대우는 20세기 초까지도 서북 출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박은식은 광무 10년(1906)에 창립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창간호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정도였다. “여러 백년 동안 이른바 서토(西土 평안도와 황해도)의 출신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던가. 책 읽는 선비는 재상 집안의 심부름꾼이요, 일반 평민은 모두 관리배들의 희생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는 이가 이른바 진사(進士)니 급제(及第) 등으로 붉은 대문(재상의 집)에 찾아가서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손님(벼슬을 구하기 위한 비굴한 행동을 말함) 노릇을 하면서 서울의 여관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평생을 그르쳤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 이는 진실로 안타깝다 하려니와 설사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라 한들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은 이가 있었던가.” 또 한 가지. 정감록이 하필 서북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데는 서북지방이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6세기 말부터 시작된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은 산간 오지가 많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속담 중에 “내일은 삼수(三水, 함경남도) 갑산(甲山, 함경남도)을 갈지라도.” 라는 표현이 있다.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같은 곳으로 유배를 당할망정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속담이 웅변하듯이 서북지방의 유배지는 누구에게도 최악의 거주 장소였다. 권좌에서 축출돼 서북 변경으로 쫓겨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서북지역에 다수의 불만 정객들이 원한을 품은 채 지내는 실정이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일촉즉발의 화염병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처럼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나는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로 거론된 조유제를 유배객 또는 지방 양반으로 추정했다. 바로 그와 같이 불우한 인사들이 예언서를 조작하고 유포하였을 것이다. ●나라를 원망하는 뜻이 꺾인(怨國失志) 사람들 손에서 탄생 정감록이 실제 출현한 시기는 1739년보다 앞섰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란 것이 민간에 남몰래 유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정에서 문제로 삼기 전에 이미 항간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정감록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39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 때부터 조선왕조는 정감록을 문제의 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어본 실록 기사를 되새겨 보면, 정감록은 “참위(讖緯)”라고 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예언서란 뜻인데, 왕조의 뜻에 반하는 예언서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예언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조작하고 유포했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이능화는 그 점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감’은 가공인물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실록에선 ‘정감록’을 “정감의 참위한 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조정은 정감이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정감록의 저자로 인식하였다는 뜻이 된다. 정감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가공인물인가 또는 역사적 인물인가?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5) 변산 태진스님과 정감록 사건(下)

    1733년 7월 전라도 남원성벽에 괴벽보가 나붙었다. 머지않아 영조 임금이 쫓겨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는데 벽보를 직접 작성한 사람은 남원 부자 김영건의 아들들이었다. 이 벽보에는 김씨들의 숙적인 이유성 일가의 이름이 도용돼 있어 이씨들을 모함하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그처럼 단순하고 우발적이었을까? ●이여매와 이여진 형제의 이름으로 된 벽보 남원성벽에 내걸린 벽보는 이유성의 아버지 이여매와 숙부 이여진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 형방은 문서를 읽고 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이런 흉악한 문서에 제 이름 석자를 붙여 걸어둘 바보가 과연 있겠는가? 형방은 박 호장, 최 이방 등과 이 문제를 상의한 다음 이씨 집안과 다투고 있던 김영건 부자에게 혐의를 두었다. 일차로 김영건 부자를 연행한 다음 그 집안을 수색했다. 그 과정에서 벽보의 초안이 발견돼 사건은 싱겁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김씨들이 괴문서의 말미에 이여매 형제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러나 원수의 이름을 빌려 반역의 의지가 명백한 벽보를 붙일 만큼 김씨들은 무지몽매했을까? 벽보를 손수 쓴 김원팔로 말하면 제법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그 정도 계산도 못할 만큼 청맹과니는 결코 아니었다. 김원팔 형제가 남문 옆 성벽에 벽보를 붙여두고 집으로 돌아간 직후, 세 사람의 괴한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둘은 좌우에서 망을 보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벽보의 맨 끝에 “이여매와 이여진 씀”이란 글귀를 추가했다. 그 글씨체는 영락없이 김원팔의 것이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 보면 왼쪽으로 좀더 비스듬히 올라간 것이 눈에 띌 만도 했다. 눈썰미가 남다른 이방 최정도는 그 점을 이미 정확히 짚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필체의 미세한 차이를 말하지 않았다. “사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돼야 한다. 만약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면 남원은 헤어날 길이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건의 근원적인 규명이 아니다. 확대 수사는 도리어 민심을 뒤흔들어 놓을 뿐이다. 여기서 종결시키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잡음을 불러일으키지 말고 사적 원한에 근거한 우발적인 사건으로 마무리하자. 그것이 모두에게 좋다. 어차피 이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것이 남원의 사정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던, 아니 18세기 한국사회의 물정을 정확히 파악했던 최정도 이방의 생각이었다. ●김영건 일가를 저버린 지하조직 따지고 보면 그랬다. 조직은 김원팔 일가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작정했다.18세기에는 하삼도만 해도 남원 운봉 함양의 지리산, 부안의 변산, 충청도 계룡산과 오서산, 합천의 가야산 등지를 잇는 지하조직이 결성돼 있었다. 조직원의 수가 얼마나 됐고 조직의 구성이 어땠는지 전모를 정확히 파악할 길은 없지만, 수십 수백 명이 가담한 비밀결사가 존재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런 지하조직의 최종 목표는 조선왕조를 전복시키고 용화세계 또는 미륵세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동학에서 말하는 지상천국, 후천세계의 원형이 이미 18세기에 형성되고 있었다. 지하조직은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결을 앞세워 민심을 선동했다. 조직은 나라를 원망하는 각양각색의 인사들을 점조직으로 편성했다.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처의 부자들을 포섭하거나 도적질을 하기도 했다. 남원부자 김영건 같은 이는 지하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쓸모있는 인물이었다. 김영건은 천민출신이라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반대했으며 자금력도 어느 정도 충분한 데다 김원팔과 같이 유능한 아들이 있어 지하조직의 한 귀퉁이를 맡길 만했다. 김영건 자신은 아마 짐작도 못했을 테지만, 지리산에 근거지를 둔 지하조직은 오래 전부터 김영건 일가를 포섭하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일찌감치 지하조직의 지도부는 김영건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원, 운봉, 함양 일대를 제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아는 탁발승들이 바로 조직의 중추였는데,17세기 후반 영건의 어머니 분금이 무작정 노씨 집을 뛰쳐 나왔을 때 지리산에서 굶어 죽지 않고 무사히 남원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실은 어느 탁발 승려 덕택이었다. 그 인연은 영건이 모르는 사이에도 계속됐었다. 나중에 분금이 아들 영건에게 남긴 유언 가운데 부처님의 원력을 말한 것도 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나온 말이었다. 양반 정 노인의 신분시비 사건으로 김영건은 큰 충격을 받아, 현세를 지배하는 논리에 회의를 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천품이 온화하고 조심성이 많으며,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직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희생을 바칠 사람은 못 되었다. 지하조직은 그런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에게 더더욱 큰 기대를 걸었다. 지하조직은 지도부에 속한 변산의 승려 태진과도 연줄이 있는 최봉희를 시켜 김원팔, 김원하, 김원택 3형제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 최봉희는 우선 비결을 가지고 그들을 설득하려 했고, 가장 먼저 그 먹이를 문 사람은 김영건의 막내아들 김원택이었다. 그 덕분에 김원팔과 김원하를 조직에 가담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1732년 가을부터 김원택은 조직을 이탈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김원택은 지하조직이 추구하는 목적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고, 조직 활동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김씨 일가의 담당인 최봉희 보기를 꺼려했다. 그는 형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다. 조직은 김원택에 대해 다각도로 회유책을 폈으나 전혀 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됐다. 조직은 마지막 수단을 고안했다. 김영건 일가에게 괴벽보를 작성해 남원읍성에 부착하도록 지시했다.3형제가 공동으로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들을 묶어두지 않으면 장차 조직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게 상부의 판단이었다. 김원팔 형제가 벽보를 붙이는 순간에도 조직은 멀리서 그 광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나타난 것은 약속한 3형제가 아니었다. 김원택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담당책 최봉희는 상부와 긴급히 상의했고, 그 처방은 간단명료했다. 김씨 일가를 희생시켜라! 그리고 최봉희 넌 멀리 도망쳐라! 우리 조직의 남원 지부는 당분간 활동중지다! 그러나 이 벽보를 계기로 민심을 한 번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김원택과 최봉희의 머리싸움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 남원의 일부를 담당한 최봉희는 부자 김영건이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김원택에게 접근했었다. 최는 세상 물정에 두루 밝은데다 붙임성이 대단히 좋았다. 게다가 남원에선 손꼽히는 양반가문의 후예였다. 집이 가난한 것만 빼놓으면 도무지 나무랄 데가 없는 선비였다. 출신이 미천해 고민하고 있던 김원택 일가로선 그런 최봉희와 사귀게 된 것이 큰 영광이었다. 최봉희의 지식에 매료된 김원택은 장형 원팔과 중형 원하에게 차례로 최를 소개했다. 김원팔 등은 매일 같이 최봉희를 만났고 그 때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후의를 베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마치 최봉희가 김원팔의 식객(食客)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처음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최봉희는 김씨 일가의 내면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시작했고, 김원택은 바로 그 점을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원택은 최가 자기 형들과 함께 만든 필묵계에도 관여하길 거부했다. 그는 두 형과 아버지 김영건에게 최를 멀리하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벽보를 붙이는 문제가 집안에서 거론되자 김원택은 최가 배후 인물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충직한 종 남산을 성밖으로 내보내 최봉희가 숨을 만한 곳을 미리 수소문하라고 했다. 만일의 경우 관가에 연락해 최봉희가 즉각 검거되도록 손을 써둔 것이었다. 김원택은 장차 아버지와 형들이 벽보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멸문의 화를 당할 게 너무 억울했다. 만일 집안에 화가 닥치면 최를 비롯한 지하조직도 분쇄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하조직은 점조직이라 최봉희 위에 누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원택은 그동안 최봉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정리해 보았다. 문득 변산 승려 태진의 이름이 뇌리에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할수록 태진과 최봉희의 관계는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원택은 배후조종자로 태진을 고발했다. ●‘정감록’ 사건의 마무리 김영건 4부자를 비롯해 최봉희, 태진 등은 제각각 검거된 장소와 시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창덕궁의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에 끌려가 엄한 취조를 받았다. 때로 국왕 영조가 직접 심문에 나설 정도였다. 제1급 시국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끌려가 조사를 받은 사람이 삼사십 명이나 됐고, 전라도 각처에서 일시 검거돼 취조받은 사람은 수백을 헤아렸다. 인정문 앞에선 열흘 넘게 날마다 지독한 고문이 계속됐다. 몽둥이찜질은 기본이고, 인두로 몸 지지기, 정강이뼈 뒤틀기, 무릎 관절 부수기 등은 이를테면 선택사항이었다. 혐의자들은 차례로 단독 심리를 거쳐, 관련자와 대질 신문을 받은 뒤 다시 재심리를 받았다. 중간에 말이 바뀌면 모든 수사과정이 처음부터 되풀이됐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듭된 고문과 그 중간에 잠깐 끼어든 달콤한 회유, 그리고 교활한 유도신문이 연달았다. 머리 좋고 경험 많은 의금부 관리들을 비롯해 조정대신들 그리고 국왕 영조까지 직접 심문에 나섰기 때문에, 그 자리에 끌려 나온 사람은 여간한 배짱과 지능으로는 조금도 숨기거나 속일 수가 없었다. 며칠만 닦달을 하면 고분고분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되었다. 특히 사건 심리의 초기 단계에는 가능한 모든 범위로 수사가 확대되었다. 털끝만큼이라도 혐의가 있어 뵈는 사람은 연일 추가로 체포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김원팔과 그의 아버지 김영건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판결도 내려지기 전에 형틀에서 죽고 말았다. 실상 벽보 사건에 전혀 가담하지 않는 김원택도 맞아 죽었다. 고문을 잘 견뎌 용케 살아남은 이는 김원하였다. 그는 역적의 아들이란 죄로 또다시 두들겨 맞은 다음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럴 때도 고수는 따로 있었다. 지하조직의 하급간부 최봉희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는 수사관들의 의견이 있긴 했지만 그의 죄를 증명할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지 않아 외딴섬으로 귀양가는 데 그쳤다. 본래 점조직으로 운영된 조직이다 보니 김영건 부자는 최봉희의 윗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수사과정에서 최봉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지만, 특수 훈련을 받은 최봉희는 노련했다. 최는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지하조직의 비밀은 하나도 노출시키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제침으로써 수사본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수사본부는 최봉희를 미치광이로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수사를 매듭지었다. 조직의 거물이자 당시 전라도내에서 이름난 승려였던 변산의 태진은 자신을 변호하기에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남사고 비결’을 소장했다는 점만 인정했을 뿐, 벽보 사건과 무관하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했다. 영조는 “태진의 대답이 범행을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구나!”라고 하여 태진이 사건에 관련돼 있다고 보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태진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조정은 지하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가? 당시 도승지 홍경보는 영조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금 영남 하도(下道, 경상남도)와 호남의 인심이 매우 험악합니다. 만약 수사를 여기서 멈춘다면 괴수들이 비웃을 것입니다. 각별히 헤아려서 연루자를 체포해야겠지만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런 뜻으로 공문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영조는 홍경보의 말이 옳다며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는 불가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하조직에 음양으로 관련돼 있었던 데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사정이 조금만 더 악화되면 조직에 대거 참여할 기세였다. 이런 판국에 혐의자들을 함부로 붙들어다 고문하게 되면 조정이 정말로 우려하는 반란 또는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야말로 혹 떼려다 혹 붙인다는 말처럼 될 수도 있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관리들은 자신들의 임기에만이라도 그저 별일 없이 조용하기를 바랐다. 얼마나 애를 써서 얻은 벼슬자리인가. 아직 본전을 다 뽑지도 못했는데 만일 난리가 일어나 벼슬을 놓치게 되는 일이 생겨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 관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뢰었다. “엄히 조사를 해봤습니다만 별탈은 없는 듯합니다. 백성들이 불안해서 생업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이제 수사를 종결해야 됩니다. 이번 사건은 배후에 무슨 특별한 조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시골의 무식하고 못돼 먹은 반역자 김영건 4부자가 사적인 원한으로 엉뚱한 짓을 벌인 것입니다.” ●영조의 선택 영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역적 놈들은 과인의 목을 요구한다. 놈들은 이 나라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을 축소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처리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은 일부 몰지각한 놈들의 소행이라고!” 결국 왕의 생각이나 조정대신들, 지방관들의 뜻은 남원 이방 최정도의 견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왕의 마음은 께름칙했다. 하필 왜 남쪽 지방, 그것도 전라도에서 이런 고약한 무리들이 자꾸 나오는 것일까. 왕은 자기의 친어머니가 전라도 출신의 미천한 나인인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산란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완전히 눅이지 못한 채 목청을 돋워 각도의 관찰사들을 독려했다. “전라도는 우리나라에서 잡술을 가장 숭상한다고 들었다. 근래 태진이란 중놈의 예언서를 보면 그 폐해의 심각성을 알만 하다. 예언서를 엄금해야 한다. 너희들 휘하의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일체 그런 불온서적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라. 삿된 경전(邪經)을 버리고 성리학에 힘쓰게 하라.” 왕은 ‘정감록’에 대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낡은 성리학으로 ‘정감록’을 이길 수 있을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대박? 쪽박?넉넉지 않은 지자체들 드라마세트장에 수십억씩

    대박? 쪽박?넉넉지 않은 지자체들 드라마세트장에 수십억씩

    ‘대박을 위한 투자인가, 민선단체장의 업적과시용인가.’ 인기드라마 ‘겨울연가’로 드라마 세트장 유치경쟁이 일면서 자치단체가 혈세를 드라마 세트장에 쏟아붓는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자치단체들은 표면적으로는 지역이미지 제고 및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해선 돈이 조금 들더라도 드라마 세트장 건립은 불가피하다며 투자로 봐줄 것을 주문한다.TV가 가진 막대한 전파력과 홍보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때문에 드라마 유치전은 점점 치열해지고 비용도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넉넉지 않은 지자체 살림에 수십억에 이르는 거액을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한 드라마에 투자하는 것은 무모하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광고를 유치하거나 시청료를 받아 살림이 넉넉한 방송국이 드라마 제작비를 지자체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냐며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투자용, 홍보용 알쏭달쏭 자치단체들은 세트장 유치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도박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드라마 세트장 유치에 혈안이 돼 있을까. 자치단체들은 우선 드라마 인기를 등에 업고 지역이미지를 높이고 관광객을 유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이들의 말대로 일부 이런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역이미지를 높이고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것은 드라마가 방영될 때와 그 후 ‘반짝’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역경제도 세트장 주변 상인들에게 한정될 뿐 주민이 고루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다. 충남 금산군 ‘대장금’ 세트장 주변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신건택(52)씨는 “드라마를 촬영할 때 스태프들이 예약만 하고 늦게 오는 일이 잦아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장사가 영 신통치 않았다.”면서 “지금은 관광객 발길도 뚝 끊겼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자치단체들은 또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트장을 유치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대형 세트장이 필요한 사극이 주로 지방에 집중되고 있지만 학술·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짝퉁’이 얼마나 상품가치를 보장해줄지는 의문이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이 있는 전북 부안군은 이순신 장군과 무관한 곳이다. 드라마 세트장 유치는 전 주민에게 골고루 주민편의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주 목적인 ‘행정행위’의 본래 기능과 어긋나는 측면이 많다. 상당수 사람들은 이것보다는 자치단체의 다른 속내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SBS드라마 ‘서동요’ 세트장을 유치한 충남 부여군 관계자는 남얘기하듯이 말했지만 “표를 먹고사는 민선 아니냐.”며 솔직한 속내를 내비췄다. 그는 “관선은 월급만 타면 그만이지만 민선은 다르다.”며 “문화시설, 이벤트 등이 모두 서울에 집중돼 있는데 지방에서 뭐 할 게(뭘로 띄우느냐)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벤트성 세트장 유치를 통해 단체장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족히 짐작케 한다. 김무환 부여군수는 “선거와 전혀 무관하다.”면서 “무왕은 백제 사비시대를 꽃피운 왕이다. 다른 자치단체에서 유치했다면 주민들이 얼마나 실망했겠느냐. 세트장 건립비 부담은 관례가 그래서 했다.”고 밝혔다. ‘서동요’의 경우 오는 9월 중순부터 반년간 방영, 종영된 이후 2∼3개월까지 그 효과가 지속된다면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 때까지 현직 군수는 그 덕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세트장을 유치하려 하고, 드라마제작사들은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률 10% 밑돌아 SBS가 박경리의 소설대로 최 참판댁을 건립해 놓은 경남 하동을 드라마 ‘토지’ 촬영지로 활용할 것이냐를 놓고 미적거린 것도 지자체에 세트장 조성을 떠넘기기 위해 그런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하동군은 세트장 유치를 위해 군비 19억 1500만원을 들여 최 참판댁이 있는 마을에 초가 18동·물레방아·초가장터 등을 추가로 조성해줬다. 운군일 SBS 드라마국장은 “한류문화가 왕성한 시기에 드라마 콘텐츠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지역에서의 노력도 필요하다.”며 “콘텐츠 업그레이드와 지역이익이 만나 만들어지는 지자체의 세트장 건립비 부담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KBS 홍보실 관계자는 ‘시청료 받는 공영방송에서 세트장 건립비를 자치단체에 부담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외주제작사에 문제가 있다. 바쁘다.”며 전화를 끊었다. 부여군과 ‘서동요’ 세트장 유치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전북 익산시 관계자는 “드라마 세트장 유치는 성공률이 고작 5∼10%인 도박으로 지나가면 그만”이라면서 “대부분 재정이 열악한 자치단체들이 거액의 주민혈세로 세트장을 유치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양은경 교수도 “형편이 어려운 자치단체가 큰 재원이 있는 방송사에 지자체의 일부 이익이나 개인 홍보를 위해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들인 만큼 돈을 빼낼 수 있는지, 또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브레이크 고장난 일본…우경화 누가 이끄나

    |도쿄 이춘규특파원|현직 각료가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망언하고, 전직 총리가 ‘일왕은 국민통합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등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경화를 이끄는 일본판 ‘네오콘’의 추동세력은 누구인가. 정부와 집권 자민당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 ‘전후세대’가 주축이라는 데 별 이견은 없다. 무엇보다 우경화에 제동을 걸었던 사민당 등 혁신세력이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 잇달아 참패하며 지금 일본은 브레이크 없는 페달과 같은 상태다. ●고이즈미 내각, 네오콘 전방위 포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2001년 4월 취임 이래 매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핵심 인물이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와 영토분쟁 중인 북방 4개섬을 직접 시찰, 분쟁을 선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집권 4년간 몇차례 개각을 단행하면서 강경보수 매파인 ‘네오콘’을 내각과 정당에 전방위로 배치했다. 내각 서열 1위 총무상인 아소 다로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던 것”이라는 등 망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우익단체인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 회장도 맡고 있다. 내각 서열 3위 마치무라 노부다카 외상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두둔했다.2001년 후쇼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검정을 통과할 때 문부과학상이었다. 마치무라 외상은 올 초 직업외교관 최고위직인 외무성 사무차관에 대북 강경파인 야치 쇼타로 전 관방부 장관보를 기용, 외교실무라인의 보수색채를 강화했다. 이들 강경라인이 최근의 ‘실력외교’를 실무적으로 이끌고 있다. 일본 교육을 총괄하는 나카야마 나리아키 문부과학상은 ‘일본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 출신으로 취임 후 “역사교과서에 군대위안부나 강제연행이란 말이 줄어 다행”이라는 망언을 했다. 급기야는 29일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산업정책을 맡은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은 “종군위안부에는 강제성이 없었다.” “반일적 교과서에서 배우는 어린이들이 맡을 차세대는 괜찮은가.”라는 망언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네오콘의 총본산 자민당 당직자 자민당은 네오콘들의 본거지이다. 차기 총리후보 1순위로 지목되는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는 ‘북한 때리기’를 통해 성장한 인물이다. 강경 네오콘의 주축이다.“자위대는 군대다. 누가 총리가 되든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야 한다.”고 호언하고 있다. 다케베 쓰토무 간사장은 “일본은 천황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30∼40대의 ‘젊은 우파의원’들은 전범국의 책임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신사참배 강행 등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들 당정의 핵심세력은 대부분 전범국으로서의 부채의식이 없는 ‘전후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A급 전범 용의로 투옥까지 됐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인 아베 간사장 대리, 아소 총무상, 나카가와 경제산업상 등 2∼3세 정치인들은 “선조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힘의 일본 외교’를 지향하고 있다고 외교소식통들은 분석했다. 아울러 고도성장기에 자라면서 ‘일본이 최고’라는 의식이 강해 경제력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아시아 일원이 아닌, 즉 140여년만에 다시 탈아(脫亞)를 외치며 ‘세계의 강국 일본’을 꿈꾸고 있다. ●뒤에서 미는 우익본류, 전전세대 한·일의원연맹 일본측 회장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자민당의 신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우경화의 상징인 개헌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모리 전 총리는 총리 때인 지난 2000년 9월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도, 국제법상으로도 명확하게 우리나라의 고유 영토”라고 망언해 물의를 빚었었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직접적인 표현으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입장을 밝힌 인물이다. 그는 아울러 고이즈미 총리의 친위부대 역할을 하는 강경 우파 ‘모리파’의 수장이다. 자민당 신헌법조사위원회의 전문분야 소위원장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천황은 국가원수”,“일본도 이제 보통국가가 될 때가 됐다.”,“방위군 보유” 등의 발언으로 전후세대들을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taein@seoul.co.kr
  • [CEO 칼럼] 드라큘라와 청렴한 CEO/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

    [CEO 칼럼] 드라큘라와 청렴한 CEO/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

    드라큘라는 영국의 괴기소설가 B 스토커의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의 주인공이다.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였던 블라드 체페슈다. 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꼬챙이를 뜻한다. 전쟁포로나 범법자를 긴 꼬챙이로 잔인하게 처형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이처럼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용장으로 유명하다.‘용(Dracul)’이라는 작위를 받은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생각해서 자신의 이름을 블라드 드라큘이라고도 했다 한다. 어쨌건 드라큘라는 흡혈귀로 뭇사람의 목에서 생피를 빨아 먹는 어둠의 악마였다. 그러나 매력이 넘치고 힘이 장사였다. 다만 그는 빛과 십자가, 그리고 마늘을 두려워했다. 그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심장에 나무말뚝을 꽂아야 했다.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는 음습하고 무섭지만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둠의 제왕은 능력이 엄청났지만 약점이 있었다. 그는 우선 빛에 약하다. 광명세계에서는 괴력도 무용지물이다. 둘째, 십자가의 뜻은 희생봉사다. 셋째, 마늘은 ‘알리신’이라는 매운 맛을 내는 특성이 있다. 이는 살균력이 대단하다. 소금과 마늘은 부패를 막는 먹을거리다. 고위공직자 재산변동 공개가 있었다. 대부분 고위공직자 재산이 1년새 늘었다. 특히 경제수장인 이헌재 전 부총리의 재산급증이 말썽이 됐다. 청와대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리를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수장으로서는 탁월했는지 모르지만 재산공개 앞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인으로서 그의 재테크는 그리 나무랄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공직자는 희생을 요구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부인이 부동산 재테크로 재산을 불린 것은 뭇서민들을 실망시켰다. 고위공직자는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영향력이 큰 정책을 주무른다. 고위공직자가 소금이 되고 마늘이 돼야 뭇사람이 그나마 청결을 유지하기 쉽다. 모처럼 경제회복 기미가 있는 상황이라서 그의 퇴진은 그만큼 어려웠겠지만 여론은 끝내 야박했다. 1993년 조무제 전 대법관은 첫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25평 아파트와 1000만원 예금 등 6400만원을 신고해서 고위법관 103명 가운데 꼴찌를 기록했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후 서울 서초동에서 보증금 2000만원짜리 원룸에 살면서 5급비서관도 ‘필요 없다.’고 거절했던 일화로 유명하다. 관례로 여겨지던 전별금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2004년 퇴직시까지 3597만원이 늘어난 것으로 집계돼 ‘빈 손’으로 떠났다. 퇴직 후에도 한 움큼 돈을 만질 수 있는 변호사를 마다하고 대학 강단에 서 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도 감동스럽다. 이런 분 때문에 그래도 살맛이 나고 나라가 이만큼 견디나 보다. 조 전 대법관이나 황희 정승 같은 경륜과 청렴함을 갖춘 CEO를 국민은 모두 바랄 것이다. 물론 무리하고 소박하고 순진한 소망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백성이고 국민이고 고위 공직자다. 황정승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그의 아들이 정승에 올라 선물을 가져왔다.“네 놈이 벌써 재물을 아느냐.”고 호통치며 임금께 파직 상소까지 올렸다. 가족을 다스린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18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가난했다. 지붕에서 빗물이 새어 그릇으로 받아냈다. 오늘날 부동산 재테크도 말썽이지만 ‘주식백지신탁제’도 물 건너가는지 국민들은 궁금하다. 부동산과 함께 주식을 통한 재산증식이 고위공직자들의 양대 재테크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 중 하나만 취해야 한다. 그것도 삼권분립이다.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2)일본의 끝나지 않은 해양 정복욕

    아, 우리가 즐겨써 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 조차도 큐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지난 10일. 일본 시마네현의회 총무위원회가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안을 가결시켰다. 대통령과 한국 외무부가 아무리 ‘내 마누라론’을 주장하고, 침묵으로 묵살하고, 소극으로 일관해도 일은 끝내 벌어진 것이다. 사실 흥분할 것도 없다. 사태는 예정된 수순을 따랐을 뿐이므로. 주한 일본대사의 당당한 영유권 주장, 아사히신문 경비행기의 독도 진입작전, 게다가 한승조·지만원을 비롯한 국내 극우인사들의 맞불작전까지, 돌이켜 보면 우연은 하나도 없다. 영토분쟁을 표면화시켜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가기 위한 일본 지도부의 야욕이 마각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19세기 에도막부, 홋카이도 식민화 ‘다케시마’ 주장은 망언이 아니며, 망언은 실제로 없으니 망언이란 말을 써서도 안된다. 체계적이며, 장기지속적인 심대한 해양정책에서 비롯된 국가의지의 또다른 표현일 뿐 결코 돌출발언은 아니다. 일본의 노골적인 행태는 가히 고삐 풀린 망아지 수준이되, 관·민 합동으로 질서정연하게 치고 빠지면서 주연·조연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등 화려한 연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시네마현의 조례 제정을 일본 정부가 만류했다고 하나 전혀 믿을 게 못된다. 양동작전일 뿐이다.‘식민지근대화론’의 미몽에 취해 선전·선동을 일삼던 지식인들을 비롯, 차제에 지난 수백년간 일본이 아시아 바다에 남긴 족적을 단계적으로 살펴 감고계금(鑑古戒今)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19세기에 에도(江戶) 막부는 ‘숲속의 사람들’ 아이누족의 영토였던 북해도, 즉 홋카이도를 식민화한다. 일단의 식민경영 세력이 ‘숲의 섬’을 치고 들어갔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오늘, 보호구역에 갇힌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아이누들은 박제화되어 일본에서도 차별받는 2만여명의 혼혈아로 잔존할 따름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에 이어 사할린으로 손길을 뻗친다. 러시아와 북방 4개 도서 반환문제로 시끌벅적하지만, 사실 러시아도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이 없는 나라다. 차르 시절,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동진을 거듭해 사하·축치·에벤키·캄챠달 등이 살던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들 아닌가. 일본은 이어 남쪽의 류쿠(우리측 사료에는 유구로 기록됨)를 병합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이 붙인 이름이고 본래는 류쿠국이었다. 독립 왕국으로 중국은 물론 조선과도 문물교류를 활발히 하며 조공·중계무역에 힘써 문화가 크게 번성한 나라였다. 무역선 활동 범주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등 서남아시아까지 뻗친 해상국가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 성립 6년째 되던 1609년 규슈 남부의 번주인 사쓰마한(薩摩藩)은 3000군사로 류쿠를 점령한다. 단, 정략적 입장을 취해 국제무역에서 엄청난 차익을 남기는 사탕수수 같은 경제적 수탈은 감행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수준에서 방관·조절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후 류쿠는 일면 일본에 수탈당하면서도 중국에 조공의 예를 갖추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다. 사실 사스마한의 점령 이전에도 류쿠는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려 왔으니, 류쿠와 일본의 악연은 해묵은 것이다. 그러던 일본은 1879년 드디어 ‘류쿠 처분’을 단행한다. 이로써 독립왕국 류쿠는 오키나와현으로 강등되어 일본에 병합된 이래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일본의 해양식민화 정책은 전략적 포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집요하게 기다리며 정확히 잡아먹을 시기를 노리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日정부, 남양군도 침략행위 전면 부정 1874년 청·일전쟁의 전후 보상으로 타이완을 챙긴 것은 교과서에 나온 상식.‘대륙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긴 셈이 되었지만 사실은 그 중국이 타이완을 팔아넘길 자격이 있는지도 되물어야 한다. 타이완에는 푸젠(福建) 등 남부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도 많았지만 이른바 타이완 원주민인 토착 타이완족이 살고 있었다. 일본의 타이완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들의 운명 역시 아이누처럼 박제화되고 만다. 타이완총독부에서 갈고 닦은 식민경영의 노하우가 이후 고스란히 조선총독부로 전수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의 해양식민화가 홋카이도, 사할린, 류쿠, 타이완 같은 섬 정도에 그친 것은 아니다.1919년 파리강화회의 결과 일본은 사이판, 괌 등이 속한 이른바 남양군도를 자치령으로 분배받는다. 세계열강의 태평양 분할정책에서 그 지분을 챙긴 것. 남양군도는 서태평양 적도 이북의 작은 섬인 미크로네시아의 동쪽 끝 카리바시와 서쪽의 괌을 제외한 엄청나게 드넓은 바다.19세기말 이래로 독일이 지배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의 남양제도 위임통치령이 되었고,1947∼1986년에는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은 미국의 태평양 신탁통치제도가 되었으니, 태평양은 태평과는 무관한 격동의 바다였다. 일본인들은 남양군도로 들어가 설탕, 술, 수산가공품 같은 사업을 펼쳤으며 한때 사이판의 일본인이 10만을 헤아리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패전 후 최초로 오는 6월 극우인사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대동하고 남태평양의 미국령 사이판을 찾아 일본군 전몰자들을 추모할 계획이다. 남양군도에 대한 침략행위의 전면 부정이 자행되고 있으며, 그 선봉에 일왕이 선 격이다. 당연히 대표적 극우언론인 산케이는 일왕의 사이판 방문 소식에 ‘감격해 하며’ 이를 전면에 도배하는 충성을 과시했다.‘위령의 여행’으로 묘사하면서 ‘남양군도’를 지배하던 향수를 노골적으로 되살려 낸 것이다. 팔라우의 수도인 코로(Koror) 외곽으로 빠지다 보면 코발트빛 바다 위에 ‘아이고 브리지’가 떠있다. 머나먼 팔라우까지 징용왔던 한국인들이 기아와 고통 속에 ‘아이고’를 연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오죽하면 ‘아이고다리’로 명명되었겠는가. 정신대로 끌려온 나이 어린 여성들이 하루에 수십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하며 피를 토하고 죽어간 남양군도로 ‘신의 아들’이 ‘위령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한 즉, 야스쿠니신사 참배에서 격을 높여 다시 대양으로 진출하는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이른바 태평양전쟁이라 칭한 데서 알 수 있듯 세계대전의 본질은 해양패권의 각축이다. 일본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사이판과 괌은 물론 필리핀, 팔라우, 티니안, 얍, 뉴기니 같은 섬, 그리고 서진을 거듭하여 인도네시와, 말레이시아 등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식탐을 과시했다. 우리의 인식은 대륙 지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일본의 아시아정책은 예나 지금이나 해양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영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기다리다 덮치기… 집요한 日 해양정책 일본은 세계열강의 해양 재편성에 기초한 배타적경제수역(EEZ)이라는 국제해양법 신질서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서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기왕에 문제가 되어온 조어도, 일명 센카쿠열도 문제로 중국과 심각한 해양분쟁을 일으킨지 오래다. 미래의 해양자원을 염두에 넣는다면 일본이 조어도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너무도 확실하다. 남쪽으로 눈을 돌려 손톱만 한 바위에 불과한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로 명명하고 자기 영토에 포함시켰다. 해양과학자들까지 동원해 섬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 침대만 한 섬 하나에 290억엔을 퍼부었다. 이로써 자신의 영토(38만㎢)보다도 넓은 40만㎢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하게 된 것. 나아가서 태평양 복판에 떠있는 미나미도리까지 영토로 선포했다. 이렇듯 일본은 해양 영토에 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독도가 어찌 그들의 눈독에서 빠질 수 있었으랴. 이런 만행이 대중국 포위전략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가능할까. 미국 역시 ‘해양제국’이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하는 단서가 마련되지만, 기실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테프트밀약을 통해 섬 국가인 필리핀과 반도국가인 한반도를 ‘빅딜’하는 국제적 공모에 가담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태평양의 섬은 거의 없다. 태평양은 공해가 분명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대주주’행세를 하고 있다. 오키노도리시마와 미나미도리는 남양군도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일본이 만들어낸 ‘바다 땅따먹기’의 야심작이 아니겠는가. 근래 일본 정부는 해양권 확보에 노골적이다. 경제산업성, 외무성, 국토교통성 등이 주동이 된 연락회의가 공개적으로 열린다. 숨길 게 없다는 식이다. 독도 영유권까지 인정받는다면 일본은 전체적으로 405만㎢의 배타적 경제수역, 즉 일본 영토의 10배를 뛰어넘는 방대한 해양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제주도 한경면에는 일본군이 옥쇄를 대비해 만든 거미줄처럼 얽힌 가마오름땅굴이 있다. 버려졌던 이 땅굴은 한 개인의 희생적 노력으로 현재 평화박물관이 되어 있다. 이곳 이영근 관장은 “현재 공개된 굴은 극히 일부로, 모두 바다를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땅굴에서 바닷가 쪽으로 내려와 일본군 알트르비행장을 벗어난 송악산 해변에도 미군기를 겨냥했던 동굴들이 줄지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구체적인 해안진지가 한반도 곳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같은 ‘평화’라도 韓·日 인식 달라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을 감행했던 규슈 남쪽 가고시마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란(指宿) 바닷가에도 같은 이름의 ‘평화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소년병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모정을 빙자한 최루성 역사 회고만 존재할 뿐 전쟁 자체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평화’를 거론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는 상상을 초월한다.‘제국의 바다’를 잊지 못하는 일본의 추억만들기가 계속되는 한 ‘현해탄’의 파고도 계속 높아질 것이다. 아, 우리가 즐겨 써온 그 ‘현해탄’이란 이름조차도 규슈 북부의 특정 해변에서 비롯된 것이니, 식민 극복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가슴으로 느낀다. 독도는 이같이 거대한 해류 위에 돌출된 시금석이리라. 독도를 독도 문제로만 국한할 경우, 결코 해양 패권의 세계사적 드라마를 읽지 못할 것이니,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어도 제국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 일이다. 해방 60주년, 일본은 20세기형 제국의 바다를 21세기에 다시 ‘신장개업’했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우선 청와대와 외무부의 공식 입장 및 향후 일정부터 듣고 싶다. 또 ‘내 마누라타령’으로 일관하면서 질질 끌려다니다 끝내 국제사법재판소 법정마당까지 끌려가 내 영토를 약취당하고 말 것인가.
  •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30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기생 신세를 면하게 되자 이듬해 봄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마한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퇴계가 70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두향은 이곳 적성산 초당에서 22년간을 수절하였다. 두향이가 이퇴계를 만난 것이 몇 살 때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퇴계가 숨을 거뒀을 때에는 아마도 초로의 아낙네였을 것이다. 22년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재회한 적이 없고 서신도 교환한 적은 없다. 다만 이퇴계가 말년에 지은 시 한 수가 두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연애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 보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대해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처음 두 행은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이퇴계의 근황을 알리는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인가. 나는 술을 받쳐 올리고 봉분 앞에 무릎을 꿇고 배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술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흠향(歆饗)한 술은 음복(飮福)하는 법. 나는 빈 컵에 다시 술을 따라 나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고마운 선원에게 잔을 내밀며 말하였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곁에 서서 나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선뜻 술잔을 받았다. “5월 초에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요.” 사내는 술을 마시며 대답하였다. “해마다 5월 초면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제가 올려집니다. 그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지요. 축문도 읽고 분향도 올리지요.” 무덤 앞까지 밀려든 강물은 소용돌이를 치면서 굽이치고 있었다. 선조 3년 경오년(1570년) 섣달 초여드렛날 밤 유시(酉時). 이퇴계는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두향은 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뒀다는 비보를 전해 듣자 목욕재계하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소복까지 준비하고 단신으로 안동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단양에서 안동까지 200리 험난한 태산준령을 여자의 몸으로 나흘 만에 무사히 안동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까지 도착한 두향은 집집마다 걸려진 만장(輓章)을 보고 소복으로 갈아입고 유해가 안치된 한서암(寒棲庵)을 보며 밤을 새워 망곡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가 서거하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이퇴계에게 영의정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런 관계로 장례는 의정예법(議政禮法)에 따라 이듬해 3월에야 거행한다는 말을 듣고 두향은 그대로 단양으로 돌아와 초당에 궤연(筵)을 꾸미고 신주를 모셔 놓은 후에 아침저녁 상식을 올리며 곡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그 시신을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선대 위에 묻어 주옵소서.”
  • [수도권 남부 아파트 시황]경기회복 기대감 반짝 상승

    [수도권 남부 아파트 시황]경기회복 기대감 반짝 상승

    수도권 남부지역 아파트값은 경기회복 기대감에 반짝 살아났다. 재건축 아파트값 상승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2·17대책’ 이후 시장은 안정돼 가고 있다. 문의는 늘었지만 부동산시장 전망이 불투명해 거래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전셋값도 지난달에 이어 약보합세 분위기이고 이사수요는 거의 없다. 수원은 매매가격이 0.27%, 전세가가 0.58% 내렸다. 그러나 장안구 정자동 효성아파트 32평형은 1000만원 안팎 올랐다. 과천지역은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중심으로 지난달에 비해 많이 올랐다. 매매가가 0.57%나 오르고 전세가도 1.17% 상승했다. 중앙동 주공아파트 40평형은 1000만∼1500만원 올랐다. 군포는 매매가와 전세가 모두 전달에 비해 큰 움직임 없다. 안양은 매매가 0.06%, 전세가는 0.08% 올라 변동폭이 작았다. 안양동 삼성래미안 아파트 32평형이 500만원 안팎 올랐다. 의왕은 재건축 대상 아파트가 많이 올라 매매가가 0.85% 오르고 전세가도 0.13% 정도 올랐다. 오전동 LG진달래아파트 53평형이 1000만원 정도 올랐다. 평택은 매매가격이 0.24%, 전세가는 0.15% 올라 조금 반등했다. 안성은 매매가격이 0.05% 빠지고 전세가는 변함이 없었다. 김광성 한국감정원 정보조사팀장 ●조사일자 2005년 2월23일
  • 찰스왕세자 재혼 ‘산 넘어 산’

    30여년의 밀애 끝에 연인 카밀라 파커 볼스(사진 오른쪽·57)와 오는 4월8일 재혼하는 찰스(왼쪽·56) 영국 왕세자가 예식 준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우선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윈저궁 근처의 시청에서 세속 예식으로 치러지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버킹엄궁이 22일 공식 발표했다. 대신 여왕은 예식 직후 윈저궁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열리는 봉헌 미사에 참석하고 피로연에서 하객들을 맞을 계획이다. 이같은 여왕의 결정은 전례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왕위를 계승할 경우 영국국교회 수장에 오를 찰스의 이른바 ‘등록소 결혼’을 여왕이 추인하는 모양새는 곤란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분석이다. 식장이 터무니없이 비좁은 것도 문제다. 당초 이들 커플은 성 조지 예배당에서 예식을 올리려 했으나 지난주에야 이곳이 세속 결혼식장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 급히 시청 회의실로 예식장을 바꿨다. 그런데 이 회의실은 100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찰스가 초청하고 싶어하는 하객 700명 중 상당수는 길거리에서 예식을 지켜보게 됐다. 이런 가운데 법학자들은 왕실 인사가 잉글랜드에서는 세속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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