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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국 유혈사태 확산] 옐로셔츠 vs 레드셔츠 계급갈등… 브레이크 없는 충돌

    [태국 유혈사태 확산] 옐로셔츠 vs 레드셔츠 계급갈등… 브레이크 없는 충돌

    태국 정부와 반정부시위대의 유혈충돌사태를 몰고 온 극한 대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몰아낸 2006년 9월 쿠데타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뿌리는 엘리트 지배계급과 가난한 농민계급·도시빈민층 사이의 계급대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개월 넘게 반정부시위를 벌이는 이른바 ‘붉은 셔츠’의 핵심은 도시 빈민층과 북부와 북동부 지역 농민들이다. 이들이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것은 탁신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들을 위한 정치를 편 적이 없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탁신 전 총리는 2001년 취임 이후 농가채무 탕감, 저소득층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사회기반시설 확충 등을 통해 저소득층 소득수준을 높여 유효수요를 창출하려는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정책의 최대수혜자가 바로 북부와 북동부에 거주하는 빈곤 농민층과 도시빈민층이다. 이들과 달리 도시 중산층들은 세금은 자기들이 내고 농민 좋은 일만 시킨다며 탁신 총리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탁신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도 반감을 키웠다. ☞[포토]유혈충돌 태국 어디로… 2006년 쿠데타는 탁신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의 갈등이 표면에 드러난 계기가 됐다. 탁신 반대세력인 ‘노란 셔츠’는 왕실과 군부 등 지배엘리트를 주축으로 한다. 노란색 자체가 왕실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노란 셔츠’는 특히 쿠데타 이후 첫 총선에서 탁신계 정당인 ‘국민의 힘’이 승리하자 2008년 8월부터 3개월 넘게 정부청사를 점거했고 같은 해 11월 말에는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돈므앙 국내공항을 8∼9일 동안 점거해 시위를 벌였다. 결국 친탁신계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는 무너졌고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를 수반으로 한 현 정권이 들어섰다. ‘붉은 셔츠’로서는 ‘노란 셔츠’가 ‘투쟁 승리’의 선례를 보여준 셈이다. 지난 2월 말 대법원이 부정축재 혐의로 태국 내 은행 계좌에 동결돼 있던 탁신 전 총리의 재산 766억바트(약 2조 7000억원) 가운데 460억바트를 국고에 귀속시키라고 한 판결은 갈등에 불을 질렀다. 대법원 판결 직후 ‘붉은 셔츠’는 조기 총선과 의회 해산을 촉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총선을 실시하면 표대결에서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극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지만 양측의 구심점인 국왕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도 브레이크 없는 충돌을 부채질하고 있다.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으며 현실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푸미폰 아둔야뎃(82) 국왕은 노환으로 인해 지난해 9월부터 장기 입원치료를 받으며 최근 정세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푸미폰 국왕 침묵의 이유

    푸미폰 국왕 침묵의 이유

    태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푸미폰 아둔야뎃(82) 국왕이 최근의 시위 정국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2개월 넘은 반정부 시위가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건만 국왕은 각계의 개입 호소에도 불구, 전과 달리 가타부타 말이 없다. 국왕이 중재 활동을 벌이지 않는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 문제. 지난해 9월부터 고열과 식욕부진 등으로 방콕 시리라즈 병원에 장기입원해 있다. 그러나 그가 침묵하는 진짜 이유는 이번 사태가 계층간 갈등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과거와 달리 국왕 자신도 ‘이해당사자’가 돼 끼어들기가 껄끄럽게 됐다는 것이다. 과거 푸미폰 국왕은 군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충돌 과정에 ‘제3자’로서 개입할 수 있었다. 현재는 왕실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온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시위대를 지원할 수도 없고, 왕실 수호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현 정부와 군부 손을 섣불리 들어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다. 태국은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푸미폰 국왕은 ‘헌법 위의 존재’로서 초월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1946년 즉위해 60년 넘게 재임하고 있는 그는 재임 기간 19번의 군부 쿠데타와 16번의 헌법 개정 등 사회 격변을 겪었지만 지도력과 중재 능력으로 고비 때마다 사태를 해결해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받아 왔다. 그는 1973년 군부가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향해 발포하자 궁전 문을 열어 학생들의 편에 섰고 1992년 군사정권에 의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을 때도 직접 개입해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 1992년 당시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친다 총리와 야권의 잠롱 방콕 시장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무릎을 꿇어앉히며 준엄하게 질책하던 모습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당시 푸미폰 국왕이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자 수친다 총리는 해외 망명길을 떠났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전통시장 문화의 옷 입다] 시니어들 추억의 온천여행

    [전통시장 문화의 옷 입다] 시니어들 추억의 온천여행

    2008년 12월15일 수도권전철이 아산까지 연장 운행하면서 잊혀 가던 온양전통시장이 북적이고 있다. 문화관광형시장 지정은 ‘달리는 말에 채찍’과 같은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왕실온천, 1960~70년대 국내 최고 신혼여행지로의 추억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온양시장은 평일에도 등산복 차림의 시니어들로 활기가 넘친다. 지방 소도시 시장에서 보기 드문 현상으로 수도권 전철이 운행되면서 생긴 변화다. 아산시에 따르면 2008년 759만명이던 관광객이 지난해 1027만명으로 35.3% 증가했다. 일평균 7000명 이상이 아산을 찾은 것이다. 대부분 시니어들로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내려와 온천을 즐긴 뒤 식사와 장을 본 뒤 상경한다. 구매력이 높지는 않지만 하루 7000만원 이상을 아산의 전통시장에서 대부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주말 매출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아산시와 시장연합회는 관광과 건강을 연계, 시니어 중심에서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도시관광형 시장을 컨셉트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김일규 아산시 지역경제과장은 “온양은 시내 전체가 온천인 특색이 있다.”면서 “온양시장은 아산의 유일한 시장으로 전철역과 인접해 있고 먹거리와 살거리가 충분해 관광객이 많은 편”이라고 소개했다. ●콜라텍, 온궁수라상 등 선봬 ‘365일 따뜻한 온양시장’을 기치로 휴양과 관광·건강 등에 초점을 맞춰 시니어카페와 온궁수라상·온등거리·토요장터 등 4대 사업을 준비 중이다. 시니어카페는 온천 후 어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을 반영해 조성한 핵심 공간이다. 시장 내 825㎡ 면적에 온궁보양식을 판매하는 푸드코트와 장기·바둑 등을 즐길 수 있는 쉼터(일소일소·一笑一少 ), 콜라텍 등을 6월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또 시장 내 5개소에 온천수를 활용, 건강을 기원하는 ‘온양 트레비 분수’도 설치키로 했다. 이색 프로그램으로 온궁수라상을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선보인다. 임금이 온궁에서 식사를 했던 과정을 재연하는데, 일반인도 참여시킬 계획이다. 수라나인들이 시장에서 직접 장을 봐서 수라간(시장 주차장)에서 음식을 만들면 온궁(온양관광호텔)에서 어가가 수라간으로 이동한다. 왕은 왕족과 관광객을 불러들여 주연을 베풀게 된다. 토요장터는 지역에 외국인 근로자 등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다문화장터로 운영할 계획이다. 매주 금요일 저녁 외국인 먹거리 경연대회 등을 열어 입상자에게 장터에서 영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로 했다. 윤성진 PC는 “온궁수라상과 토요장터 등은 가족 및 주말 관광객과 연계토록 했다.”면서 “수라상에 올랐던 보양음식과 임금이 먹던 간식류는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옛 중심지 활성화 추진 온양시장은 역과 인접한 데다 온천 후 시장을 거쳐야 하는 등 입지적으로 최적의 접근성을 갖추고 있다. 상설시장과 3개 골목시장(맛내는 거리·멋내는 거리·샘솟는 거리)이 합쳐졌는데 전철 개통 후 역과 인접한 멋내는 거리와 맛내는 거리가 중심지로 부상했다. 더욱이 젊은층이 멋내는 거리에 집중되면서 한 블록 건너인 샘솟는 거리와 단절된 양상이다. 시와 상인회는 과거 시장의 중심인 상설시장과 샘솟는 거리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샘솟는 거리에 들어설 토요장터는 ‘S자’ 동선에, 노점상 중심의 과거 시장 모습을 담을 계획이다. 황의덕 상인연합회장은 “전철 개통 후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면서 “관광객이 편하게 찾고 즐길 수 있는 시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아산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泰 국왕 “관리들, 국민에 모범보여야”

    태국의 반정부 시위 사태가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태국 국왕이 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AP통신에 따르면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은 26일(현지시간) 새롭게 임명된 법관들에게 그들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7개월 동안 입원 중인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역할을 강하고 분명하게 수행하는 관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또한 국민들도 각자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시위대 중 한쪽의 입장을 명확히 지지한 것은 아니지만 국왕이 태국의 혼란스런 정국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태국 방콕 시내에는 여전히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아피싯 웨차치와 태국 총리가 25일 친탁신 세력인 반정부 시위대(UDD·레드셔츠) 측이 제안한 협상안을 거부하고 강제 해산 작전을 밝혔다고 AP통신·방콕포스트 등 외신들이 이날 보도했다. 아피싯 총리는 “시위대의 협박에 의해 정치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면서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시위대가 무단 점거하고 있는 라차프라송 거리를 탈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UDD 측은 지난 23일 ‘30일 내 의회 해산, 3개월 내 조기 총선 실시’를 주요 내용으로 한 협상안을 정부 측에 제시한 바 있다. UDD 측도 더이상의 협상은 없다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UDD 지도자인 나타웃 사이쿠아는 “협상을 깨뜨린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정부”라며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타웃은 ““아피싯 총리는 시위대 강제해산 작전을 포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사극 최다출연 조선왕은 숙종

    사극 최다출연 조선왕은 숙종

    1956년 첫 TV 사극인 MBC의 ‘숙종시대 여인열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장편 드라마 사극은 93편에 이른다. 기록이 비교적 많은 조선시대 사극이 가장 많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극 가운데 최다 출연한 왕은 누굴까. ●정조·고종 8편·세조·광해군 5편 서울신문이 13일 1956년부터 2010년까지 조선왕조를 배경으로 한 66편의 장편 사극을 분석한 결과, 숙종이 총 11편에 나와 출연횟수가 가장 많았다. 그 뒤는 정조와 고종이 각각 8편, 세조와 광해군이 각각 5편이었다. 한 사극에 여러 왕이 출연한 경우는 주인공 1명으로 집계했다. 가령 1994년 KBS의 ‘한명회’는 세종부터 중종까지 8명의 왕이 출연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이 핵심인 까닭에 세조만을 헤아렸다. 1983년 시작된 MBC의 역사 시리즈 ‘조선왕조 500년’은 10편으로 나눠 분석했다. 출연횟수가 전무한 비운(?)의 왕은 현종으로 나타났다. 정종과 단종, 예종, 인종 등이 3년 안팎의 짧은 재위기간에도 짧게나마 조명을 받은 것과 대조된다. 정종은 태조의 조선 건국과 태종의 ‘왕자의 난’을 주제로 삼은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고 나왔으며 단종 역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 단골 출연했다. 하지만 15년이나 재위한 현종은 조선시대 가장 치열한 붕당 싸움으로 꼽히는 ‘예송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음에도 사극의 주요 인물로 극화된 적이 없다. 예송 논쟁은 유교 경전의 해석을 둘러싼 학술 논쟁이기 때문에 시청자 흥미를 끌기엔 극적 매력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숙종의 출연횟수가 가장 많은 이유는 단연 ‘장희빈’ 덕분이다. ‘궁중 암투’와 ‘악녀의 비극적 최후’란 소재는 시청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궁중암투·요부캐릭터 대중관심 끌어 사극의 장희빈 사랑은 한국의 정치상황과도 연관이 깊다는 지적이다. 정치적 통제가 강했던 1950~70년대에는 정치성을 배제시킨 드라마를 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장희빈은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요부’ 캐릭터 덕분에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최적의 소재였다. 실제 1950~70년대에 제작된 8편의 사극 가운데 6편이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1956년 ‘숙종시대 여인열전’, 1963년 TBC(현 KBS2) ‘인현왕후전’, 1975년 MBC ‘요녀 장희빈’ 등이 대표적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2002년 KBS의 ‘장희빈’과 현재 방영 중인 MBC의 ‘동이’ 두 편 뿐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는 “1996년 KBS의 ‘용의 눈물’ 이후 정치적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장희빈 중심의 사극이 정치적 논쟁 거리가 있는 사극으로 진화되는 양상”이라면서 “여권신장과 더불어 남성의 소모품에 불과했던 장희빈의 여성상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것도 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동이’의 장희빈만 하더라도 정치영역에서 입지가 강화된 여성상으로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권지연 민우회 모니터분과장은 “왕의 환심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는 인물 설정은 주체적 여성상과 거리가 있다.”면서 “아무리 재해석을 하더라도 사극 속 장희빈이란 인물이 가진 태생적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통쾌한 승리? 왕따의 시작!

    통쾌한 승리? 왕따의 시작!

    첫날 오전 8시45분, 세 개의 이스라엘 전투기 편대는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에 있는 이집트의 모든 공군 기지를 기습, 쑥대밭으로 만든다. 400여대의 전투기가 폭격되며 이집트 공군력은 궤멸된다. 둘째 날 오전 1시, 요르단령인 동예루살렘으로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된다. 요르단 후세인왕은 전의를 상실한다. 오전 5시45분 시리아는 뒤늦게 골란고원 국경 즈음에서 이스라엘과 교전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패퇴당한다. 셋째 날, 새벽녘 이집트군의 3분의1만이 시나이 반도를 탈출, 수에즈 운하를 건너 목숨을 건진다. 이스라엘은 저녁 무렵 요르단령이었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완전히 점령한다. 요르단은 항복과 마찬가지의 휴전을 요청한다. 넷째 날, 이집트가 손을 들었고, 다섯째 날 시리아의 골란고원 점령을 마쳤고, 여섯째 날 시리아마저 백기를 흔든다. 태초에 ‘이 전쟁’이 있었다. 1967년 6월5~10일, 지중해 동부를 접한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 단 6일 동안 벌어진 ‘이 전쟁’은 반 세기 넘게 자행되고 있는 테러와 학살, 파괴와 통곡 등 반문명적 혼란과 악순환을 불러일으킨 결정적 첫걸음이었다. 또한 중동 지역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거듭되는 반(反) 미국, 반 이슬람 등의 갈등 한가운데 있도록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근대 세계 전쟁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승(大勝)이자 쾌승(快勝)을 거뒀을뿐더러 이스라엘로서는 아랍 국가들 틈바구니의 위태로움 속에서 근대 국가 성립의 확실한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3차 중동전쟁인 이 전쟁을 이스라엘과 서방 사가(史家)들은 ‘6일 전쟁’이라 불렀고, 아랍에서는 ‘6월 전쟁’이라 불렀다. ‘6일 전쟁’은 속전속결 전투의 전형이었다.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첩보와 미국, 유럽의 군사지원을 바탕으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쿠웨이트, 이라크 등 주변 아랍 연합에 기습 공격을 가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스라엘이 경제, 외교,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동의 새로운 패자(覇者)임을 만방에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결코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6일 전쟁’의 승리는 중동 지역에 몰아친 비극과 증오의 시작이었고, 고통과 학살은 쉼없이 확대 재생산됐다. 영국 BBC의 중동 통신원을 지낸 제러미 보엔은 ‘6일 전쟁’(김혜성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을 통해 이 전쟁이 치러진 6일 동안을 정확하고 치밀한 시간, 장소, 인물별 묘사로 재구성한다. 기자 특유의 방대한 인터뷰 취재 자료를 바탕으로 마치 한 걸음 곁에서 전쟁의 모든 상황을 지켜본 듯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 없는 객관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미덕을 보여준다. 저자 보엔은 한 편의 전투 소설을 읽는 듯 긴장감을 끌어올리다가도 어느새 냉엄한 현실 속의 역사 인식을 깨우쳐 주곤 한다. 이스라엘은 이미 1948년 영국 등 UN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 건국을 선포하며 아랍 국가들과 1차 중동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 78%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 사람 80만명은 난민이 됐다. 이후 1956년 이집트와 대결하는 2차 중동 전쟁을 거치고 10년 뒤 치른 ‘6일 전쟁’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전쟁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은 오만함으로 바뀌었고, 점령 지역을 돌려주라는 유엔의 권고 사항마저 무시하고, 팔레스타인과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자국 총리(이츠하크 라빈)를 암살했을 정도의 폭력이 일상화된 나라로 바뀌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기도 하다. 요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유대인 정착촌 건설도 ‘6일 전쟁’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테러와 분쟁, 갈등의 최전선에 일반 유대인들을 보낸 뒤, 그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을 추가로 배치하는 식이다. 과거 역사 속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라는 면죄부를 앞세워 폭력과 광기를 무시로 자행하며 10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역사의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냐, 아랍이냐 하는 정치적 호불호, 혹은 종교적, 이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과 경외, 평화의 선순환 체제 마련이 절실한 이유다. “만약 우리가 생명을 위해 싸웠다면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통곡의 벽을 위해 싸웠다면 그것은 새끼손가락만큼의 가치도 없다.”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이 6일 전쟁을 통해 점령한 예루살렘 구시가지(동예루살렘)에 있으며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일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한 이스라엘 어머니가 외치는 이 절규가 전쟁이 품고 있는 반 생명적 속성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준다. 2만 5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부적에 대한 믿음 어디서 왔을까

    부적에 대한 믿음 어디서 왔을까

    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공사팀은 연못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승천하는 모습의 청동용을 발견했다. 궁궐 대부분이 불에 약한 목조건물이라 우리 조상들은 화재를 막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을 다스리는 동물의 상징인 용을 조각해 넣었던 것이다. 기원전 2000~3000년 신석기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동물들이 화살이나 작살에 맞은 모습을 바위에 새겨 넣었다. 사냥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모두 부적(符籍)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부적은 동양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원전 8세기 고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솔로몬 왕은 각종 부적과 마법의 주문을 책으로 남기게 했다. 16세기에 살았던 프랑스 앙리2세의 아내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부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대체 부적이란 어떤 것이기에 아득히 오랜 옛날부터,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던 것일까. 과학과 이성이 기상을 드높이고 있는 21세기에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부적을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일까. 부적에 대한 믿음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그 효험을 입증할 만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경험과 증언은 부적을 여전히 유효하게 만든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EBS가 ‘다큐프라임’ 시간에 3부작 다큐멘터리 ‘부적’을 준비했다. 5일부터 사흘 동안 오후 9시50분에 방송된다. 인류의 가장 오랜 믿음 가운데 하나인 부적의 기원과 역사를 짚어보는 한편,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부적에 얽힌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들여다본다. 이집트에서 경찰의 단속을 피해 부적을 만드는 주술사를 만나보고, 부적의 나라 일본에서 부적과 관련된 도야도야 축제, 도조신 축제 등 다양한 축제를 찾아가는 등 세계 각국의 부적에 대한 현장 취재가 돋보인다. 문신 부적이 발달한 태국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기록과 성적으로 승부를 걸지만 징크스에 민감하고 행운의 마스코트나 부적을 믿는 스포츠 선수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씨줄날줄] 신의 아들/이춘규 논설위원

    일본 수도 도쿄 핵심요지에 ‘천황(天皇·일왕)’이 사는 왕궁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왕궁으로 이용되고 있다. 왕궁에서는 매년 1월2일 수차례 일본 국민의 신년인사회가 열린다. 수만명의 국민들이 찾아가 2층 베란다에 나와 손을 흔드는 일왕을 향해 “천황폐하 만세”를 뜨겁게 외치며 인사를 올린다. 신처럼 떠받든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 일 왕족은 국민들은 갖고 있는 성(姓)이 없다. 일반 국민의 의무도 다수 면제된다. 신이라고는 하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일왕이 신의 아들로 본격 자리매김한 것은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서양에 뒤진 것을 우려한 존왕개국 세력이 이끌었다. 그 이전 일왕은 가마쿠라바쿠후 이후 675년간 신하들에게 줄 녹봉도 없고, 왕궁에 비가 샐 정도로 아주 고단한 신세였다.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그런 일왕을 메이지유신 세력이 건국신화를 기초로 신의 위치로 격상시켜 일본 국민 통합의 중심으로 삼았다. 유신세력은 불교를 탄압하고 신토를 대대적으로 보급해 일왕을 신격화했다. 근대화를 달성해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를 침략했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일왕은 국가원수로서 군통수권을 가졌다. 그리고 쇼와 일왕은 2차대전의 중심에 섰다. 가미카제 특공대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 갔다. 일제가 미국에 패한 뒤에야 일왕은 점령군사령부의 뜻을 따라 1946년 1월 인간으로 돌아왔다. 이후 일왕은 신도, 국가원수도 아닌 상징적인 존재로만 인식돼 왔다. 패전 뒤 일 왕실 범위도 대폭 축소됐다. 일왕들은 측실(후궁)들이 있어 측실 소생 일왕도 다수였지만 다이쇼 시대(1912~26)에 폐지됐다. 측실제도가 없어진 지 1세기가 되어 가고, 왕실이 축소되며 왕실에 남자가 적어 대를 잇기 힘든 상황이다. 왕세자는 외동딸만 있고 둘째 왕자가 늦둥이 외아들을 낳아 네 살이 됐지만 안정적인 왕위계승은 여전히 일 왕실의 과제다. 왕실이 여러 문제로 편치 않다. 이 시기 경제마저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불황에 시달리며 일왕이 신으로 부활하려 한다. 문부과학성이 검정을 마친 초등학교 교과서 5종 모두 일왕이 신의 자손임을 암시하는 건국신화를 새로 추가했다. 니혼분쿄출판의 교과서 1종은 ‘신의 자손이 천황이 되어 국가를 통일해 간다.’고 기술할 정도다. 일본 정부와 국민이 자학사관을 버리고 국수주의로 내달리나. 벌써 태양신의 아들 일왕이 중심이었던 군국주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글로벌 시대]물 부족과 미래 발전 전략/남상욱 유엔공업개발기구 서울투자진흥사무소 대표

    [글로벌 시대]물 부족과 미래 발전 전략/남상욱 유엔공업개발기구 서울투자진흥사무소 대표

    인도의 데칸고원에는 높은 성곽에 둘러싸인 ‘다우라타바드’라는 거대한 고대도시가 있다. 그러나 웅장한 외양과는 달리 성문을 들어서면 인적이 드물고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AD 1327년 인도의 투그룩왕은 수도를 델리에서 이곳으로 옮기기 위해 대대적인 도시건설에 나섰다. 건설이 대충 마무리되어 델리의 전 주민을 새 수도에 이주시키려 할 무렵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늘어나는 인구가 마실 수 있는 물이 부족한 것이다. 왕은 백방으로 물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새 수도의 꿈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일, 인더스, 황하 등 큰 강이 고대문명의 요람인 것처럼 태초부터 물과 인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은 인간의 생명유지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농업, 공업 등 생산 활동에도 긴요하다. 문제는 유한한 자원인 물이 점차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구증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수질 오염, 기후변화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줄어들고 있다. 유엔은 인류가 물을 아끼고 관리하지 않으면 21세기 중 전 세계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유엔이 매년 3월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제정한 까닭이다. 이미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중국, 중남미 등 여러 지역에서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유엔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10억명이 마실 물을 찾아 헤매고 있으며, 2015년에는 세계인구의 절반인 30억명이 물 부족 상태에 놓일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세계 1, 2위 인구 대국인 중국과 인도의 물 부족은 국제안보와 경제에도 큰 파장을 미칠 것이다. 유엔은 물 부족이 빈곤을 심화시키고 전쟁마저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엄청난 담수를 간직하고 있는 히말라야의 수자원을 두고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으며, 특히 파키스탄과 인도 간에는 핵전쟁마저 터질 위험이 있다. 최근 50년 만의 가뭄으로 메콩 강 수위가 크게 낮아지자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중국이 메콩 강 상류 윈난 성에 댐을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집트는 나일 강의 상류국가인 에티오피아 등이 상수원을 막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물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물위기는 에너지나 식량위기보다 더욱 위협적이다. 우리나라는 물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복 받은 나라다. 예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금수강산으로 칭하였다. ‘물쓰듯 하다’는 말과 같이 그동안 우리는 물을 공짜나 다름없이 여기고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는 수자원의 보존과 관리가 부실하여서 가뭄에는 물이 부족하고 홍수가 나면 물이 넘쳐 버리는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나날이 급증하는 물 소비 및 낭비와 수질오염을 감안하면 가까운 장래에 심각한 물 부족 사태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한국의 미래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생명선인 물을 확보하고 효율을 높이며, 물을 자산으로 한 발전전략을 세우는 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향후 백년을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수자원을 미리 확보해야 한다. 추진 중인 4대강 살리기 사업도 당연히 맑은 물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전 한반도적 통합수자원 관리를 해 나가야 한다. 북한은 수자원관리의 실패로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벌거숭이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강바닥이 높아져 해마다 극심한 수해가 이어지고, 이에 따른 농업피해는 식량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셋째, 물 관련 산업을 미래의 먹거리로 육성해 나가야 한다. 물은 이미 에너지나 식량을 능가하는 전략상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천연수의 수질이 좋은데다, 세계 최고의 담수화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 “DMZ 주인이 한반도 지배한다”

    “풀잎을 흔들며 처연히 울리는 바람과 맑은 하늘 구름 곁을 스치듯 나는 새, 숲속을 자유로이 오가는 고라니, 멧돼지들이 비무장지대(DMZ)의 주인이겠죠. DMZ의 진짜 주인은 평화여야 합니다.” ●차지하는 세력마다 역사의 중심에 ‘한국사의 중심 DMZ’(파란하늘 펴냄)를 쓴 최현진(39)씨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국가로 세계에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DMZ(Demilitarized Zone)의 중요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구려 광개토왕을 시작으로 조선왕조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 속에서 DMZ를 차지한 이가 한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주인이 된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DMZ는 말 그대로 비무장지대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휴전선으로부터 남북2㎞씩만큼 248㎞ 길이로 펼쳐져있는 곳이다. 한국 전쟁이 멈춘 이후 군인도, 무기도 둘 수 없는, 인간의 발길이 끊긴 공간이다. 엄혹한 분단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역설적으로 풍성하게 보전된 생태계는 평화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누천년의 역사 동안 한반도의 주인을 결정짓는 중심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대륙을 누비면서 한강 지역까지 지배하며 한반도의 실질적인 주인을 자처했고,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이 한반도의 주인 역할을 했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태봉국 궁예의 꿈을 이어받은 왕건은 통일 국가를 건설했다. 서울에 도읍을 정한 조선은 말할 것도 없음이다. 조선 지배 세력의 중심부에 있던 서인 노론 세력의 지리적 기반 역시 파주DMZ 주변 임진강이었다. ●DMZ서 죽은 인물은 ‘신화’ 돼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DMZ 지역에서 죽은 이들은 민간 신앙의 주인공이 돼 신화로서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 역사와는 별개로 철원에서 죽은 궁예는 미륵으로 구전된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개성에서 살다가 죽어 연천 임진강가에 묻혔다. 그리고 인제 민간신앙 속에서 김부대왕으로 부활했다. 최영 장군 또한 개성 남쪽 DMZ 주변 덕물산에 묻힌 뒤 널리 알려졌다시피 무속신앙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가 DMZ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통일된 한반도의 필요성을 역사 속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지금 미국과 북한이 관리하고 있는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 DMZ를 남북 한민족이 스스로 우리의 것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도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 속 남북의 발전이 필요하겠죠.”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 생활을 하며 DMZ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1997년 중·고등학생 DMZ 현장체험 학습 강사로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한 달이면 서너 차례 이상 DMZ를 찾는다. 지금껏 쓴 책도 ‘안녕 DMZ’, ‘DMZ는 살아있다’ 등 모두 DMZ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는 “잦을 때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방문하기도 했으니 아마 총 횟수가 500차례는 훌쩍 넘을 것”이라면서 “평화와 통일, 생태의 가치뿐 아니라 우리 한반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도 이만한 곳이 없다.”고 DMZ의 미덕을 설명한다. 1만 3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지방시대] 국민통합은 불편한 진실 인정부터/이병화 조선대 국제경제학 교수

    [지방시대] 국민통합은 불편한 진실 인정부터/이병화 조선대 국제경제학 교수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한 지역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역내 국가 간 어떤 교훈을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실이 역내 국가들 간에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 간 덮어두고 싶은 불편한 진실의 역사는 깊다. 예를 들면 고대 일본국가 형성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도 일본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가 개최되기 전 일왕은 고대 일본 왕실의 뿌리가 한국과 연결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발언하며 한국이 일본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개발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는 사실도 역사적 이유 때문에 불편한 진실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박정희, 싱가포르의 리콴유, 타이완의 장제스, 중국의 덩샤오핑 등은 국가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일본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개항을 강요받은 후 개혁주의자들이 막부 정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시대를 열어 국가개혁을 선도하였다. 메이지 유신시절에 일본의 선각자들은 전 세계로부터 최선의 관행(best practice)을 찾아내 자국 실정에 맞게 보완하여 적용하였다. 일본의 사법, 행정, 교육 등의 제도와 산업화 전략, 수출산업 육성 등의 정책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도입되었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 전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한국이 최빈국의 대열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모델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러나 과거 일시적으로 불행했던 한·일관계와 정권연장을 위한 유신헌법 때문에 우리 국민들에게 메이지 유신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중국도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을 모방하였다.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덩샤오핑은 1950년대 말의 대약진 운동과 1960, 70년대의 문화대혁명의 실패를 목격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된 이듬해 싱가포르, 방콕 등을 방문한 후 중국은 싱가포르의 산업화 전략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용주의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 일본과 한국의 모델을 말하지 않고 싱가포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은 당시 냉전시대의 유산 때문이다. 북한에도 한국이 성공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사실과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 눈감고 넘어가고 싶은 진실이다. 눈을 국내로 돌려보면 우리의 해묵은 지역갈등에도 그 근원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는 역내 국가들이 모두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상호 존중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국민통합의 출발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사실들을 덮어두고 넘어간다고 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지폐속 여왕님’ 세월엔 장사없네

    ‘지폐속 여왕님’ 세월엔 장사없네

    조폐를 담당하는 영연방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이 17일부터 6월4일까지 런던의 영국은행박물관에서 여왕의 지폐도안 데뷔 50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 ‘장식과 보안’을 개최한다고 텔레그래프와 데일리 메일 등이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폐 속 여왕의 얼굴은 50년 동안 모두 5차례 바뀌었다. 최초로 사용된 도안은 로버트 오스틴이 그린 초상화였다. 이후 1963년 레이놀즈 스턴이 그린 여왕의 얼굴이 5파운드 지폐에 등장했다. 해리 엑슬스턴이 그린 초상은 1970년과 1971년 각각 20파운드와 5파운드의 앞면을 장식했다. 그후 20년간 변동이 없다가 1990년 로저 위딩턴이 그린 여왕의 모습이 5, 10, 20, 50파운드에 반영됐다. 세월이 흐른 만큼 지폐 속 여왕도 조금씩 달라졌다. 초기에는 젊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반영됐다면, 엑슬스턴이 그린 여왕은 인자한 눈빛과 지적인 분위기가 강조됐다. 위딩턴은 최초로 나이 든 여왕을 그렸고 지폐에도 입가와 눈가에 주름이 파인 ‘할머니 여왕’의 모습이 반영됐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객원칼럼] 국가적 쟁점과 방관자 효과/정인학 언론인

    [객원칼럼] 국가적 쟁점과 방관자 효과/정인학 언론인

    사회 심리학에 방관자(傍觀者) 효과(Genovese syndrome)라는 게 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몇몇은 대기실에 혼자 있게 하고 더러는 여러 명이 함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대기실 문틈으로 조금씩 연기를 들여보냈다. 혼자 있던 학생들은 곧바로 보고했지만 여럿이 있던 대기실일수록 늦게 보고하더라는 것이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남들이 가만히 있기에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국가적 현안이나 사회적 쟁점이 불거지면 사실관계를 확인해서 생산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애써 외면하려는 현대인들의 대중적 무관심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쉽게 풀리지 않는 사회적 쟁점이 대두될 때면 후세의 역사가들이 심판할 것이라며 쟁점에서 방관자로 자리를 옮기려는 성향이 있다. 사회적 쟁점은 개인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느슨하기 때문일 것이다.세종시가 어떤 방식으로 조성되더라도 나로서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은가. 침묵의 나선형 이론 현상도 있다. 대다수와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개진했다가 대중으로부터 따돌림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이 사회적 쟁점을 외면하게 한다. 대입 3불정책을 폐지하라고 말문을 열었다가 교육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침묵을 강요한다. 여기에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할 것이라는 방관자 효과까지 보태지면 사회적 쟁점을 애써 외면해 세상에서 저만치 멀어진다. 우리는 세상 일에 관심을 갖고 논란에 목소리를 보태야 한다. 역사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바로 우리가 심판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 역사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 사고방식이나 배경지식은 생활해온 세상의 문화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인간은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고 또 바꾸어 왔다. 인류 역사는 세상에서 눈을 돌려 외면하기보다 용기있게 세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발전되어 왔다. 사회적 논란의 당사자가 되어 세상이 가야 할 방향으로 몸부림칠 때 인간은 진정한 역사적 존재로 완성되는 것이다. 2500년 전,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페르시아제국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침략했다. 페르시아의 위세에 눌려 세상이 페르시아와의 타협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은 달랐다. 세상의 다수 앞에 나서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비록 패망하더라도 외적에 맞서 싸우는 게 역사의 올바른 방향으로 보았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시대적 쟁점을 판단하고 행동했다. 스파르타의 의회가 군대 동원을 승인해주지 않자 자신의 호위병 300명을 이끌고 역사적 판단을 실천에 옮겼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300인 전사는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아내는 역사가 되었다. 모두 역사적 영웅일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 교훈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몇가지 사회적 쟁점에 발목을 잡혀 질척이고 있다. 교육 문제가 그렇고, 세종시 문제가 그렇다. 이제 지방선거가 본격화되고 개헌문제도 불거질 조짐이다. 일부에서는 세종시 논란에 국민들이 피로증을 겪고 있다며 세종시 논의를 훗날로 미루자고 한다. 또 세종시 논란은 정치권의 문제로 그들이 풀어 낼 것이라고 치부한다. 전형적인 방관자 효과의 증후군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방관자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헝클어진 사회적 쟁점이 불거지면 이를 외면하는 방관자 효과를 이제는 극복해야 한다. 비록 목소리가 남들과 달라 외면당하더라도 의견을 말하고 주장을 내세워야 한다. 사회적 논란의 중심으로 뛰어들어 국가적 쟁점을 풀어내는, 논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역사는 지금을 사는 우리가 심판하고 그 요구를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새겼으면 한다.
  • [도시와 길] 청주 성안길

    [도시와 길] 청주 성안길

    2006년 지방선거 한나라당 합동유세. 2009년 청주·청원 상생발전위원회 주민서명운동 발대식. 2010년 2월 중학생들의 졸업식 뒤풀이 스트리킹.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청주시 상당구에 위치한 성안길에서 이뤄졌다는 것. 정치인이나 시민단체, 청소년 등 계층을 불문하고 청주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 바로 성안길이다. 유동인구가 청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곳으로, 청주지역 최대 상권, 최대 번화가 등이 성안길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문화·패션1번지가 됐지만 주변에는 청주의 유일한 국보인 용두사지 철당간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자리잡고 있어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곳으로 불러도 될 듯싶다. 문화와 삶의 치열함이 함께 숨쉬는 청주의 심장이기도 하다. ●일제 이후 한동안 ‘본정통’으로 불려 성안길은 지금은 해체되고 없어진 옛 청주읍성의 북문자리에서 남문 자리에 이르는 큰 길을 말한다. 이 때문에 청주읍성의 역사가 곧 성안길의 역사가 된다. 청주읍성은 예로부터 청주의 사회, 경제, 문화,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 청주읍성 안쪽에 있던 길이었으니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과 함께 호흡하며 살았을 것이다. 청주문화사랑방을 운영하는 이철희(50) 청주시 문화관광과장은 “성안길은 천년 전에도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시 최초로 승전고를 울린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곳이지만 일본에는 치욕적인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 침략기인 1920년대 도시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청주읍성은 완전히 파괴됐다. 당시 청주읍성 안에는 청주목과 충청병영 등 수많은 집무청과 객사가 있었는데 대부분 헐렸다. 이때부터 청주읍성의 가운데 큰길을 일본식 지명인 ‘본정통(本町通)’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광복이 됐지만 1990년대 초까지 많은 사람들이 ‘본정통’이라는 명칭에 숨겨진 아픈 역사를 모른 채 지금의 성안길을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통은 ‘한 도시의 중앙에 있어 중심이 되는 거리’라는 뜻으로 지금의 ‘중심가’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다행히도 1993년 청주문화사랑모임이 청주시민을 대상으로 좋은 이름을 공모해 ‘청주읍성 안쪽길’ 이라는 뜻의 성안길을 채택, 1994년부터 공식 이름이 됐다. ●유동인구 시간당 2000여명 달해 성안길은 ‘본정통’이라는 옛 이름답게 현재 청주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거리다. 시간당 2000여명이 유동하면서 청주 최대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서울 명동, 대구 동성로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가두 상권으로 불린다. 핵심부에 해당하는 로드상권 거리만 600m에 달한다. 은행, 우체국, 패션전문점, 백화점, 극장, 분식점, 고급레스토랑, 커피숍, 보석가게, 미용실, 병원, 헌혈의 집 등 없는 게 없다. 상권 점포수는 대략 2200여개다. 종사자만 6000여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성안길에 오면 화려함과 함께 삶의 치열함을 동시에 느낄수 있다. 성안길 상가는 청주 경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올해 창립 91주년을 맞는 청주상공회의소의 시발점이 바로 일본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1919년 성안길 상인들이 구성한 청주상무연구회였다. 성안길은 1960년대 말 청주시가 도시정비사업을 하면서 차량이 다니던 도로에 보도블록을 깔아 차없는 거리를 조성하면서 상권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드상권이 좌우로 흩어지지 않고 한줄로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동선이 끊기지 않는 상권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춰 최대 상권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안길이 젊은이들에게 열정을 토해내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라면 중·장년층들에게는 추억이 숨쉬는 곳이다. 장현석(62) 청주문화원장은 “청주인구가 15만명에 불과했던 1970년대 젊은이들이 갈 만한 다방, 극장, 제과점 등이 모두 성안길에 있었다.”며 “당시 성안길 뒷골목에 있던 돌체다방에는 청주지역 유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 있었던 현대극장과 청주극장은 서점과 백화점으로 변했고, 순두부와 우동으로 유명한 그집식당과 공원제과는 지금도 성안길에서 맛과 추억을 함께 판다. 약속장소 1순위였던 중앙공원도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장 원장은 “성안길은 청주를 상징하는 길”이라며 “성안길에 속해 있는 가구점골목 같은 특색있는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는 방안이 추진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글 사진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문화유적 즐비한 성안길 國寶 용두사지 철당간… 700년된 망선루… 성안길 곳곳에는 많은 문화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상점들의 화려한 네온사인 속에 역사가 함께 살아숨쉬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적은 청주의 유일한 국보(41호)인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962년에 만들어진 용두사지 철당간은 신라말 고려초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라는 절 앞에 있던 불기(佛旗) 게양대다. 당시 절들은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었다고 한다. 번화가의 높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즐비한 가운데 고고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철당간의 원래 높이는 18m였다고 한다. 고층건물이 흔하지 않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위용이었을 것이다. 요즘 7층빌딩 높이 정도 되니 청주로 오는 사람들이 이 당간이 보이면 ‘청주에 다 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등대와 같은 구실을 했다고 한다. 철당간은 쇳물을 틀에 부어 찍어낸 원기둥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다행히도 세번째 원기둥에 ‘준풍(峻豊) 3년에 용두사에 철당간을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오랜 역사성을 알 수 있다. ‘준풍’은 고려 광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시기를 스스로 만들어 쓴 연호다. 성안길 인근에 위치한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지방유형문화재 110호인 망선루를 볼 수 있다. 망선루는 고려시대 청주목 관아의 부속 누정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7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충북도가 발간한 문화재지에 따르면 이 건물은 한때 ‘취경루’로 불렸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의 난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왕은 공주와 더불어 남으로 피천해 안동으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를 행하고 방(榜)을 취경루상에 게재했다고 한다. 전란 중에도 청주에 머물며 과거를 행했으니 교육의 도시인 청주의 역사적 정체성에 일조를 한 건축물이라고 할까. 성안길에 있는 청원군청 내에는 고을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관아의 중심건물인 동헌이 있다. 이 건물의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는 ‘조선 순주25년(1825)에 관아를 전면적으로 개축했다.’고 적혀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구조로 1982년 충북도 유형문화재 109호로 지정됐다. 이 밖에도 충청도 전체 방어를 맡았던 병마절도사의 출입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충북도유형문화재51호),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 등이 ‘이초의 난’에 연루돼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가 대홍수가 나서 옥이 파손되자 이 나무위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압각수(충북도 기념물 제5호),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에 앞장선 조헌선생, 박춘무선생, 영규대사의 추모비 등도 성안길에 오면 만날 수 있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이평주 성안길 번영회장 - 한복·영화 특화거리로 260m 인공수로 추진 “상인들이 똘똘 뭉쳐 성안길의 옛 명성을 되찾겠습니다.” 성안길은 아직도 청주 최대의 번화가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상업지역이다. 하지만 청주 외곽지역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면서 신흥 상권이 형성돼 경기가 예전같지 않다. 성안길 번영회 이평주회장은 올해 지자체 도움 등을 받아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우선 6000만원을 들여 성안길 활성화 연구용역을 의뢰할 예정이다. 시민들을 성안길로 끌어들일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다. 또 20억원을 들여 성안길 상점들을 찾는 소비자들을 위해 주차장을 조성할 예정이다. 현재 부지를 물색중이다. 지난해 신종인플루엔자 때문에 열지 못했던 성안길 페스티벌을 오는 10월 초에 3일 일정으로 개최할 계획이다. 성안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페스티벌은 패션쇼, 인기가수 축하공연, 노래자랑 , 무료시식행사 등 다양한 행사로 꾸며질 예정이다. 성안길 페스티벌은 올해로 13회째다. 성안길 상점들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성안길 곳곳에 CCTV 40대도 설치하기로 했다. 이 회장과 상인들은 성안길만의 특색을 살린 문화의 거리 조성 계획도 갖고 있다. 성안길 내 남문로의 한복전문점 밀집지역에 한복의 아름다움과 전통문화를 적극 알릴 수 있는 한복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고,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4곳이 자리잡고 있는 산업은행 주변에는 한류스타들의 동상을 세워 영화의 거리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은 “성안길은 전국 모든 상권에서 접근이 용이한 충북의 중심상권”이라면서 “청주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성안길을 건강하고 유익한 곳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청주시는 올해 30억원을 들여 성안길 260m에 인공수로를 설치할 예정이다. 도심물길창조사업의 일환으로 차없는 거리와 연계해 휴식공간과 특화거리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청주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무릎팍 최대웅 작가 “MC계 5대 천왕은..”

    무릎팍 최대웅 작가 “MC계 5대 천왕은..”

    “천재는 노력한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한자도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노력한자는 운 좋은 사람을 못 따라간다.”무릎팍 도사 최대웅 작가를 기자가 만났을 때는 그가 말한 것처럼 ‘운 좋게, 순풍에 돗단배’처럼 무난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예상이 맞았을까? 최작가는 시종일관 자신은 ‘운 좋은 사람’이라고 칭했다.하지만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단편적으로 말하는 ‘운’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천상 예능작가일 수밖에 없던 그 ‘운’을 파헤쳐보자. 팍팍!최대웅 작가는 고교 시절 당시 인기 청소년 프로그램이었던 ‘비바 청춘’에 출연하면서 방송을 처음 접했다. ‘비바 청춘’은 각 학교를 돌며 재치 있는 학생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비바 청춘때 콩트를 썼는데 장덕균(개그작가) 선배가 대학 가면 작가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때 작가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됐고 대학시절 94년도 SBS 공채에 뽑혔다.”며 회상했다.사실 최대웅 작가는 연예계 ‘운’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네와 학교에 연예인이 많았다. 정준하가 동네 친구이며 이윤석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갈갈이 박준형은 초등학교 후배, 특히 비바청춘이 가져다준 연예인 인맥은 유재석을 비롯해 인기 연예인이 대부분이다. 또한 군대 시절 국군홍보지원단 ‘작가사병’ 1호로 쌓은 연예인들과의 조우는 그가 방송일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말해준다.작가는 “어릴 때 코미디 프로 좋아했어요. 지금도 다 기억해요 특히 학예회 때면 각색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죠. 작가 생활에 힘들었던 점이 있었냐는 질문이 많은데 작가세계에는 남자가 별로 없었어요. 오히려 귀여움을 많이 받았죠. 그래서 운이 좋았어요.”라고 말한다.하지만 “천재는 노력한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한자도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노력한자는 운 좋은 사람을 못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실력으로 평가받는 작가세계에서 진정성으로 승부한 최작가는 이미 경쟁을 뛰어넘어 즐기고 있는 것. “방송국 기회만 주어진다면 연예인과 일하는 거 나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화려한 직업’이라는 오해 속 현실은 달콤한 무화과 밭만은 아니다. 예능프로 작가의 현실은 생존경쟁에 떨어진 정글 숲과 같다. ‘예능, 아마존의 눈물’로 비유 당할 수도 있다.최작가가 운 좋은 사람임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운이 100%라고 말하는 것은 99%노력이라고 보고 노력을 많이 한자에게는 운이 따라온다. 그래서 그는 예능을 즐기고 있다.인기도와 트렌드에 따라 게스트 선정? NO!그런 의미에서 과감히 물었다. “무릎팍은 인기도와 트렌드에 따라 게스트 선정 하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동안 강호동의 질문 수위가 얌전해지고 재미가 하락하는 추세와 맞물려 연예인이 아닌 뜸금없이 ‘아마존의 눈물’ 제작진을 출연 시켰다. 그 프로의 인기도를 가지고 무릎팍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 이용한 것 아니냐.”는 무게 있는 질문을 독하게 던졌다. 이는 “적당히 홍보성 짙은 유명연예인과 요즘 트렌디한 게스트를 섭외해서 시청률 올리는 것 같다.”며 일각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이 같은 질문에 최작가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시청률이 많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대중이 먼저 알아봐주시는 거죠. 시청자들의 수준이 이미 높아졌기 때문, 궁금한 분들을 토크쇼에 불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가령 밴쿠버의 금메달 딴 선수들을 모두가 섭외하고 싶어 할 것이며 그 시점에 궁금한 분들을 토크쇼에 불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함이거든요.”또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일반인을 다룬 것은 ‘아마존의 눈물’이 처음은 아니죠. 엄홍길씨도 있었고 한비야씨도 출연했고, 연예인이든 비연예인이든 무릎팍도사는 시청자들이 궁금한 인물을 데려다가 해갈시켜주는 프로인 만큼 홍보나 해주고 스타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기존 토크 방식을 떠나 ‘대중이 원하는 인물’, ‘대중이 궁금해 하는 질문’의 여론 의견과의 조합이 적절한 타이밍을 이루었던 거죠. 이용했기보다 선용한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날 시청률이 2주 연속 높게나온 것은 시청자들이 평가해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게스트의 진정성, 가치관이 명확한 사람 좋다!“세월이 흐름을 망각한 체 가식적으로 혹은 지나친 설정을 가지고 임하는 게스트들은 정말 싫다.”고 말하는 최대웅 작가는 그것은 자신만의 생각이 아니라며 시청자들이 영상정보와 인터넷을 많이 접하기 때문에 이미 ‘진실인가! 아니가!’를 먼저 안다고 말한다. 그건 바로 진정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기 때문.최작가는 “인생에 관한 가치관이 명확한 사람이 좋아요. 한때는 실수를 했을지 모르지만 그 가치관이 토크쇼를 40분 간 이끌어 가는데 적합한 게스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다시 말해 시청자들이 이미 진정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죠. 저도 그런 진정성이 좋아요.”무릎팍+강호동=시청률 상승?최작가는 강호동이 ‘무릎팍도사’ 예능과 만나 최고가 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강호동의 장점을 먼저 알아야 해요. 첫째로 모든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과 둘째로 어떤 게스트보다 체력이 좋아요. 답변을 들을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엄청난 체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수를 미리 예상하는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 씨름선수는 힘뿐만 아니라 모래판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수를 예상한데요. 그걸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토크쇼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생각하는 거죠.”이어 “날로 방송하는 사람과 열심히 방송하는 사람은 다른데 강호동은 그런 맥락에서 봤을때 열심히 노력하는 걸 인정받는 거겠죠. 그러므로 강호동 자체가 시청률 요인이 아닌 그의 노력이 토크쇼의 본질과 어우러져 간다고 생각합니다.”최대웅이 말하는 MC 5대천왕강호동을 정의한다. 팍팍! “경상도 구수한 사투리를 쓰면서 아메리카식 사고방식을 가진 MC.”, “촌스러움과 모던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촌스러움이란 시청자들로 하여금 친근감 갖게 하고 모던함이란 젊은 시청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 롱런 할 수 있는 사람이죠.”유재석을 정의 한다. 팍팍! “대한민국 최초의 배려형 MC.”, “몸소 실천 하는 모습을 한결같이 보여주죠. 과거의 MC들은 굴림 하려 들었거든요. 하지만 유재석은 ‘사회자는 왕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대한민국 1호 MC가 된 것 같아요.”이렇게 최고점의 2강 MC체제에서 “요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바로 박미선, “과거에는 여자이고 주부인 것이 한계점이었다면 요즘 추세는 오히려 그것이 장점으로 진보됐죠. 부드럽고 영리하고 내조 잘하는 MC가 시청자로 하여금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것 같아요.”또 “이경규도 요즘 트렌드를 잘 읽고 있고 있어요. 언제나 최고였지만 현재 놀라운 속도로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고 있죠. 그래서 이렇게 4대 천왕체제로 재편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어요.”그 번외로 천재적인 인물이 있어요. 그는 바로 신정환. “웃기는 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다른 주변인에게 물어 봐도 이사람 외계인이죠. 유머에 관한 독특한 시각이 남다르고 안정적인 웃음을 선사해요. 항상 저도 프로그램 런칭 할 때는 늘 신정환과 함께 할 정도에요.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죠. MC계의 주요 인물을 굳이 따지자면 이렇게 5대 천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작가로의 꿈은?작가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것 같은데 꿈이 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웃지만 영어 잘하는 사람을 데리고 미국에 가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요.(웃음) 제가 만든 예능포멧이 전 세계적으로 방송되는 게 꿈이죠. 언어도 안통하고 문화도 달라서 힘들겠지만 웃음의 본질은 똑같다고 생각하거든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에서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최작가는 “미스터 빈을 보면 말이 하나도 없어도 국제적으로 인기 있는걸 보면 웃음은 ‘만국 공통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준 높은 웃음 콘텐츠를 세계적으로 수출, 제공하는 초석이 되고 싶어요. 많은 후배들이 만든 좋은 프로들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포부를 밝혔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아시아권은 팔리고 있는 실정, 조만간 최작가표 웃음 아이콘이 미국에 유명한 예능 토크쇼를 통해 비춰질 수 있는 ‘운’이길 희망해본다.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 / 사진=현성준 기자, MBC 라이프@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칠레 강진] 빗나간 쓰나미 경보 과학자들 머쓱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칠레 강진에 따른 강력한 쓰나미를 예상했던 53개 태평양 연안 국가들은 쓰나미의 규모가 예상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으면서 별 피해 없이 지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과도한 경보로 국민들이 장시간 불안에 떨고 생활에 불편을 초래했다며 정확성이 떨어지는 예측능력이 문제로 지적됐다. 일본 기상청은 1일 쓰나미를 너무 높게 예측한 데 대해 사과했으나 미국의 과학자들은 쓰나미의 위협을 과도하게 예측한 결과가 됐지만 적절한 단계를 거쳐 내려진 조치라고 해명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의 해양학자 다이 린 왕은 “우리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대처해야 한다.”면서 “경보 발령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자칫 상황을 안이하게 판단했다가는 단순히 낭패가 아닌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해양학자들은 제때 쓰나미 경보를 발령하지 않아 23만명의 인명피해를 낳은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를 잊을 수 없다. 빗나간 쓰나미 경보에 과학자들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사과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정확한 예측이 잦다 보니 행여 예측기관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릴까 내심 걱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해양학자 왕은 “경보를 남발하다 보면 신뢰를 잃을 수 있다.”면서 “이 문제를 잘 알고 있고, 예측능력을 향상시키는 길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이 발달했다고는 하나 쓰나미 규모와 시기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과학자들은 현재 태평양상 심해 30여곳에 센서를 설치, 쓰나미 발생 여부를 관측한다. 심해 5000~8000여m 아래에 설치된 센서에서 보내오는 데이터를 분석해 정확한 위치와 강도 등을 찾아내야 한다. 또한 해안선의 지형에 대한 자료가 한정돼 있어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예측을 보수적으로 할 수밖에 없고, 이번처럼 과도한 경보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경보도 내리지 않아 무방비로 재앙을 맞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헛수고가 될지라도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kmkim@seoul.co.kr
  • [특파원 칼럼]선택 강요하는 중·미관계 변화/박홍환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선택 강요하는 중·미관계 변화/박홍환 베이징특파원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연초부터 티격태격하던 양국은 결국 갈등의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치킨게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어느 한쪽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일각에서는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을 세계질서의 급속한 재편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금융위기로 힘이 빠진 미국은 연일 중국의 약점을 찔러가며 패권이 아직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음을 애써 과시하고 있다. 새 강자로 부상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중원 제패의 야망을 품은 초나라 장왕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를 향해 구정(九鼎·하나라 우왕 때 전국 아홉 주에서 거둔 금으로 만든 솥, 천자의 상징)의 크기와 무게를 묻고 그 답을 기다리는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의 패자였던 미국은 20세기 말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유일 강대국으로서 세계를 호령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불량국가’로 지목해 공격했을 때 어느 누구도 반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방세계는 연합군 형식으로 미국의 전쟁에 동참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꽃도 영원히 붉을 수 없듯이 권력 또한 무상하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전성시대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이 독점했던 힘의 일정 부분을 중국이 가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지난해 중국 지도부는 말 만이 아닌 행동으로 중국의 굴기(우뚝 솟음)를 알렸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중국의 뜻을 거슬러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연이어 사절단을 보내 중국의 심기를 달래야만 했다. 호주, 캐나다도 비슷한 곤경을 겪었다.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림)하던 중국이 아니다. 구심력 또한 만만치 않다. 세계가 급속히 중국의 영향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전후 65년 동안 미국의 우산 속에 몸을 숨겼던 일본은 그 우산을 벗고, 중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 유럽,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전체와 각각 상호협의기구를 갖췄다. 국제 외교무대에서 중국 뒷선에 서 있는 국가는 하나둘 늘고 있다. 중국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묻는다. “저쪽(미국)이냐, 이쪽이냐.”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측은 “한·미 군사동맹은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주장했다. 주중대사에 중량감 있는 인사를 보내라고도 거리낌 없이 요구할 정도이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조속히 체결하자고도 한다. 중국의 요구를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는 현실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수출로 먹고사는 중진국 입장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최대 무역상대국인 중국 없이는 우린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지경이 됐다. 미국 역시 묻는다. “저쪽(중국)이냐, 이쪽이냐.” 한국이 미국의 탄도 미사일 방어(BMD)체제에 참여하길 희망한다고 했다. 전통적 우방이자 가장 밀접한 군사파트너의 요구를 묵살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일본과 청(淸) 사이에 끼여 운신할 수 없었던 조선 말의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 민감한 반응일까. 물론 그때처럼 군사력으로 우리를 힐난할 상황은 아니다. 우리의 힘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양쪽의 ‘구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세계는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미국이 유럽연합, 일본, 중국과 함께 G4 체제를 도모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현명하고도 정확한 외교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국제질서의 재편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철저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G20 의장국이 됐다고 마냥 들떠 있기보다는 조용하고 냉철하게 국제질서의 재편을 읽어야 한다. 초나라 장왕은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면 하늘에 치솟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말한 뒤 춘추시대의 패주가 됐다. 내실을 다지며 때를 기다린 결과다. 중국이 부러운 건 이런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이젠 우리가 도광양회할 때이다. stinger@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100년 대기획] (6) 일왕과 군국주의

    한·일 병탄 100년을 맞은 올해 양국간의 최대 관심사는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여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양국 간의 우호적인 발전을 위해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초청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일본 정치권도 한국 내 여건이 충분히 조성됐다고 판단되면 일왕의 방한을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일왕의 역할과 방한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에 흑선을 몰고와 개국을 요구한 뒤로 일본은 구미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식민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은 부국강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 한국을 병탄하고 중국을 침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지탱해준 게 바로 근대 일왕제의 이데올로기였다. ●일왕은 군국주의 지탱해준 이데올로기 메이지 정부가 1877년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을 상대로 일본에 유리한 조일수호조약을 강제로 맺은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민족주의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일왕과 관계없던 일반 국민은 제2차세계대전에 패할 때까지 일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열광적으로 숭배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은 군부의 주도로 일왕 중심의 ‘황국사관’과 일왕에 대한 절대적인 귀의를 강조했다. 초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이래 124대 ‘천황’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왕위가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왕실이 단절된 적이 없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 논리를 내세워 국민을 선동했다. 일왕이 통치하는 일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광신적인 국수주의로 질주했다. 일왕의 절대적인 권력은 1889년 공포된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확립되고 이로써 일왕은 정치대권과 군사대권, 제사대권을 일신에 독점하는 현인신(現人神)이 되었다. 헌법은 외견상으로는 입헌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왕주권과 신성불가침을 법적으로 명시했다. 제2차세계대전 전에는 일왕이나 일왕제에 대한 비판은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에 따라 극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패전 후 미국의 지시에 의해 일왕의 지위를 ‘상징’으로 규정한 것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과 일왕 신격화에 의한 국민통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전후 일본은 일관되게 일왕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일왕제를 국민통합의 한가운데에 놓으려 노력해 오고 있는 중이다. 전쟁 이후에도 일왕 및 일왕제에 대한 비판이나 불경스러운 언행은 종종 우익의 공격대상이 됐다. 대부분의 우익은 일왕제라는 일본의 ‘국체’ 자체를 절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왕제라는 시스템의 전통 속에서 국민통합을 강화할 수 있는 요소를 모색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일왕제가 표면적으로는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심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위기에 직면하면 할수록 일왕제의 전통적인 요소를 이용해 국민통합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위기때마다 일왕제에 기대 실제로 일부 정치인은 일왕을 활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총리는 일왕을 거론하며 중의원 선거에 활용했다. 1992년 아키히토 일왕의 중국 방문은 일본 자위대의 해외 파병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던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중국 시장 공략의 일환으로 성사됐다. 최근 오자와 민주당 간사장이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방일시 관례를 깨고 일왕의 면담을 긴급히 추진한 것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왕의 한국 방문은 또 다른 논란을 확대시킬 공산이 커 보인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방한이 추진되고 있지만 양국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일왕제가 일본 사회속에 불가결한 시스템으로 존속하는 한 근대 일본의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시도가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 전공 교수는 “일왕의 방한을 통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일왕의 중국 방문 이후에도 중·일이 과거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한·일 100년 대기획] “반성 없는 일왕방한 과거사 면죄부 우려”

    하종문 한신대 일본지역학과 교수는 “일왕의 방한은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서 “방한을 계기로 향후 양국 관계에 있어 카드(협상 우선권)를 일본에 넘겨줄 수도 있다.”며 경계했다. →역대 한·일 관계에서 일왕의 역할이 어떠했나. -해당 시기에 따라 일왕의 정치적 역할이 달랐다. 메이지 일왕은 조선 병합에 관여했고, 다이쇼 일왕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쇼와 일왕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군국주의를 선동했다. →일왕의 시대적 역할이 달랐지만 총체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로 내몬 것은 일왕제에 대한 폐해 때문이지 않나. -일왕은 군부를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내각이 있었지만 육군대신과 해군대신 등 군 통수권자를 일왕이 실제로 지휘했다. 중국과의 전쟁은 군부가 일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왕은 전쟁 상황에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중 모든 보고가 일왕에 보고됐다는 점에서 일왕이 태평양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평가가 진실에 가깝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일왕과 군부중에서 누가 더 크나. -군부가 일왕을 앞세우고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일본 재벌의 책임은 없나. -일본 재벌은 우익의 속성을 지녔고, 일왕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를 지탱한 또 다른 세력으로 평가받을 만 하다.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데.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없고, 아무런 대가없이 일왕이 방한하는 게 실익이 없다는 차원에서 반대한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야스쿠니의 어제와 오늘

    [한·일 100년 대기획] 야스쿠니의 어제와 오늘

    │도쿄 박홍기특파원│야스쿠니(靖國)신사의 겨울은 비교적 한산했다. 지난달 30일 주말임에도 관광객들이나 젊은 남녀, 나이가 든 시민들이 이따금 참배할 뿐, 여느 신사나 다름없었다. 신사의 초입에 진을 치던 노점상도 없었다. 계절 탓도 있지만 야스쿠니는 예전과 같지 않다. 버팀목이었던 자민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하토야마 정권에서는 ‘야스쿠니신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스쿠니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내전에서 숨진 병사들의 제사를 위해 세워진 신사로 전국 8만여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쇼콘샤(招魂社)로 불리다가 1879년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엔 전몰자의 추모 및 호국신사로 자리매김했다. 일왕이 직접 참배, 군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절대적인 역할을 맡았다. 패전 뒤 야스쿠니는 연합군총사령부의 강요에 따라 추모시설 대신 종교시설로 전환했다. 하지만 추모 기능은 유지됐다. 야스쿠니는 메이지유신 이후 군인·군속 등 전몰자 246만여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한국인도 2만여명에 달한다. 야스쿠니가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도조 히테키를 비롯,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하면서부터다. “전범재판은 승자의 일방적인 재판이다. 합사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야스쿠니 측의 입장이다. 야스쿠니 본전 옆에는 침략전쟁을 미화·찬미하는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이 자리잡고 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A급 전범 합사 후 “깊은 화근을 남기게 될 것”이라며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재임시절 8·15 종전일에 노골적으로 야스쿠니를 찾았다. 고이즈미 이후 총리들은 한국·중국 등의 반발을 의식, 참배를 자제했다. 야스쿠니의 존재 의미는 지난해 9월16일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출범과 동시에 축소됐다. 하토야마 총리는 ‘8·30 중의원선거’ 전부터 “나와 각료들은 야스쿠니를 참배할 생각이 없다.”고 공언했다. 또 야스쿠니를 대체할 국립추모시설의 건립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실제 하토야마 정권의 각료들은 단 한명도 지난해 10월 야스쿠니 추계대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야스쿠니의 위기감은 전몰자 유족모임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후쿠오카현 유족연합회는 최근 야스쿠니 측에 합사된 A급 전범 14명의 분사 방안을 제안했을 정도다. 다만 야당으로 전락한 자민당의 야스쿠니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자민당은 지난달 24일 “보수의 기치를 올려야 한다.”면서 올해 ‘행동강령’에 야스쿠니 참배를 명문화했다. 글 사진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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