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왕은 없다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행운이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출연금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광고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비상 대책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74
  • [기고] 조세의 역사교육이 더 필요한 시대/오기수 한국조세사학회 회장·김포대 세무회계정보과 교수

    [기고] 조세의 역사교육이 더 필요한 시대/오기수 한국조세사학회 회장·김포대 세무회계정보과 교수

    한 나라의 조세제도는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나라의 조세제도는 과거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현상과 연결돼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금까지 변천해 왔고 앞으로 계속 변화해 갈 것이다. 조세의 역사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흔히 현대 국가를 ‘조세국가’라 한다. 조세가 국가 운영에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조세는 국민의 경제생활과 밀착돼 있다. 따라서 국민들의 조세에 대한 올바른 의식은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조세 의식의 형성에 조세 역사 교육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오늘날 조세 역사 교육은 중요성에 비해 매우 미약하다. 아니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보면 과거보다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세 역사에 대한 현실성 있는 연구와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 교육이 마찬가지이지만 조세의 역사 교육도 역사적인 사실의 인식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은 세법인 공법(貢法)의 입법을 위해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과 조정에서 15년 이상 논쟁하며 완성했다. 왕의 말이 곧 법인 시대에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세법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세조와 성종은 그 뜻을 이어받아 공법을 ‘경국대전’에 수록하며 조선의 기본 세법으로 굳히고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면서 40여년에 걸쳐 전국적인 시행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연산군 이후 세종대왕의 조세사상과 철학은 계승되지 못했다. 나라의 재정은 급속히 바닥을 드러냈고, 급기야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풍전등화의 국운이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도 수십 차례씩 세법이 개정되고 있다. 그때마다 서민증세·부자감세라는 말이 국민들을 정치적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고 있다. 세법을 조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입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미워서 세금을 부과해서도 안 되고, 누군가가 예뻐서 세금을 깎아 줘서도 안 된다. 더구나 표(票) 때문에 세금을 올리고 내려서는 안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말을 했다. 이에 감히 ‘조세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란 말을 하고 싶다. 조세의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현실성 있는 올바르고 긍정적인 조세 의식을 위해 우리 조세사(租稅史)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좀 더 깊이 있게 이뤄져야 한다. 초·중·고교에서부터 현실성 있는 조세 역사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 세월이 멎은 듯… 달도 숨다

    세월이 멎은 듯… 달도 숨다

    단풍 하면 퍼뜩 떠오르는 곳이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우리나라 단풍 유람의 대표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한데 내장산 국립공원이 전북 정읍 쪽의 내장산뿐 아니라 전남 장성 쪽의 백암산과 입암산을 아우른다는 것을 아는 이는 뜻밖에 적다. 백양사가 깃든 백암산은 그나마 유명세를 얻은 편이다. 입암산을 아느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외로 꼬기 일쑤다. 내장산 국립공원의 한 축인 입암산 일대에 장성새재 옛길이 남아 있다. 세인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 선 곳이니 한적함이야 더 말할 게 없을 터. 남도 사투리는 이를 ‘다붓한(한적한) 새름길(샛길)’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삼한시대 축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입암산성 가는 길을 덧붙이면 멋진 트레킹 코스가 완성된다. 길의 들머리는 남창계곡이다. 산성골, 새재골 등에서 흘러온 여섯 지류가 합류되는 곳이다. 예부터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상찬을 받아온 대봉감의 산지로도 이름났다. 전남대수련원 입구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남경산기도원 왼쪽 흙길 임도로 들어선다. 넓고 완만한 길이다. 계속 직진해서 새재화장실을 지나면 곧 장성새재 갈림길이다. 전 구간을 통틀어 화장실은 이곳뿐이다. 미리 ‘해결’하고 가는 게 낫겠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장성새재를 거쳐 백암산과 백양사 또는 순창새재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흔히 새재 하면 경북의 문경새재를 떠올리지만 장성에도 새재가 있다. 한데 이름의 어원은 다소 다르다. 문경새재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조령(鳥嶺)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장성의 새재는 지름길 혹은 샛길의 의미가 강하다. 김채림 장성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지역에 살던 선조들이 장을 보거나 과거를 보기 위해 정읍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길”이라며 “한양으로 가는 삼남대로인 갈재(노령)를 이용하기 곤란한 사람들도 관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샛길로 장성새재를 이용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장성새재 옛길은 장성 쪽 남창계곡에서 전북 정읍 입암공원지킴터까지 5㎞ 남짓한 구간을 이른다. 한데 이 구간을 종주하면 원점회귀가 어려울 뿐 아니라 산행거리도 짧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따라서 옛길 정상인 장성새재까지 3㎞ 정도 걸은 뒤 되짚어 나와 입암산성까지 다녀오길 권한다. 이 경우 산행거리가 약 14㎞로 확 늘어난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오르는 데 별 어려움이 없고 볼거리가 많아 좀 더 발품 팔 이유는 충분하다. 장성새재 정상에서도 입암산성 북문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지만 현재는 폐쇄됐다. 김 해설사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여 보겠다고 이 코스로 올라붙었다가는 죽을 만큼 고생한다”고 경고했다. 오래전 장성새재 가는 길은 정감 넘치는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군용도로로 쓰기 위해 폭을 넓히면서부터 주변 환경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70년대 들어 차량 통행은 금지됐고 길은 다시 옛 정취를 되찾아가는 중이다. 옛길은 인적이 드물다. 산행 내내 사람 한 명 보기 어렵다. 그 덕에 길을 독차지하고 걷는 호사도 누린다. 길은 완만한 편. 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위로는 산새들이 삐쭝대며 날아간다. 가을이 짙어지면서 단풍 빛깔도 한결 요염해졌다. 거리가 짧으니 숨이 찰 까닭도 없다. 산책하듯 ‘싸목싸목’ 걷다 보면 어느새 새재 정상이다. 선조들은 새재를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다. ‘달이 숨은 고개’란 뜻인데, 숲이 어찌나 깊든지 하늘에 뜬 달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장성새재 갈림길까지 되짚어 내려온 뒤 입암산성 등산로로 접어든다. 갈림길에서 5분가량 올라가 다리를 건너면 숲 체험장이다. 전남대가 1960년대 조성한 삼나무 숲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삼나무가 수직의 세상을 펼쳐낸다.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나무의자도 여럿 놓여 있다. 삼나무 이파리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빈 의자 위로 사뿐히 걸터앉는다. 삼나무 숲 끝자락은 계곡이다.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계곡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잠시 가팔라졌다가 다시 완만해진다. 이렇게 몇 굽이를 돌면 은선동 삼거리다. 왼쪽 길은 갓바위(638m), 오른쪽은 입암산성 남문 방향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입암산성을 돌아 원점회귀할 수 있다. 예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번의 된비알을 지나면 입암산성 남문이다. 오랜 시간을 버텨왔을 성벽이 어찌나 견고하든지 입에서 쉼 없이 탄식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다. 입암산성은 호남 내륙의 자연과 선조들의 지혜가 어우러진 천혜의 요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전라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곳으로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성이다. 높이 626m인 입암산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계곡을 감싼 형태의 성곽) 산성으로 3.2㎞ 정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축성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고려사’ 등에 1256년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향토 사학계에서는 삼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백제 때는 견훤이 요새로 쓰기도 했단다. 과거 네 곳의 포루(砲樓)와 두 곳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문만 공개되고 있다. 남문 성벽은 수직에 가깝다. 성 안에는 물이 솟는 곳이 예닐곱 곳에 달한다. 양식만 비축한다면 외적의 침입에도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는 모양새다. 남문에서 북문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내마을터가 특히 인상적이다. 198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성내마을터를 지나 북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입암산이란 이름의 근원이 됐던 갓바위(笠岩)로 가는 길이다. 둥근 접시 모양의 갓바위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갓이다. 갓바위 위는 최고의 전망대다. 드넓은 들녘 한가운데 입암저수지가 보이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호남고속도로와 정읍 시가지, 두승산 등이 한눈에 잡힌다. 입암산성 최고의 망루다운 전망이다. 하산길은 어려울 게 없다. 노송들 사이로 능선길을 따라 20~30분 내려오면 은선동 삼거리다. 글 사진 장성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승용차는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백양사 방향으로 가다가 남창(입암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북이면 사거리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관건이다. 기차는 사거리에 있는 백양사역에서 내리면 된다. 사거리터미널에서 남창 가는 군내버스는 오전 8시 20분, 10시, 오후 1시 50분, 4시 50분 네 차례 있다. 남창에서 나가는 시각은 여기에 30분을 더하면 된다. 사거리에서 남창계곡을 거쳐 백양사까지 가는 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 운행한다. 고속버스는 장성터미널, KTX는 장성역까지 각각 가야 한다. 장성 시내에서 사거리까지는 20~30분에 한 대꼴로 버스가 오간다. →맛집:장성호 인근의 호반가든(392-8692)은 메기찜이 맛있는 집이다. 시래기를 깔고 갓 잡은 메기를 올린 뒤 갖은 양념을 섞어 졸여낸다. 짭짜름하게 양념이 밴 시래기에 메기를 얹어 먹는 맛이 각별하다. 2인분 2만 5000원. 백련동 시골밥상(393-7077)은 유기농 식재료로 차린 열두 가지 반찬이 맛있는 집이다. 1만원. 청자연(394-9909)도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은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들이 일품이다. 두 집 모두 홍길동 테마파크 인근에 있다. →잘 곳:숲 속에서 아침을 맞고 싶다면 축령산자연휴양림(390-7770)이나 방장산자연휴양림(394-5523)이 좋겠다. 축령산은 편백나무 숲이 깊고 방장산은 고창과 서해 일대가 조망된다. 홍길동 테마파크(394-7240)에도 소규모 숙박시설과 오토캠핑장이 마련돼 있다. 남창계곡에도 오토캠핑장이 있다. →주변 볼거리:주변에 단풍 명소가 많다. 그 가운데 백양사가 가장 가깝다. 장성호관광지에 임권택시네마테크가 조성돼 있다. 전망대에선 장성호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테마파크 인근의 금곡영화마을은 영화 ‘태백산맥’ 등의 배경이 됐던 산골마을이다. 필암서원도 지척이다.
  • “남을 통해 나를 깨우친다” 새롭게 본 ‘북학의’ 정신

    “남을 통해 나를 깨우친다” 새롭게 본 ‘북학의’ 정신

    쉽게 읽는 북학의/박제가 지음/안대회 옮김/돌베개/272쪽/1만 2000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또 사촌 간인 친지를 종으로 부리는 자가 있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쭐대며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자기야말로 예의를 지켜 중화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것은 우리 풍속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박제가는 왜 조선의 당면 과제로 북학(北學)을 내세웠을까. 강대국을 꿈꾼 이 젊은 선비는 1778년에 쓴 ‘자서’와 1786년 쓴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 1798년에 쓴 ‘북학의’(北學議)를 임금께 올렸다. 이를 통해 북학의 초고를 완성한 1778년 이후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 북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국왕은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대왕. 1786년에 쓴 글에선 아예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동안 미봉책으로 가난한 조선의 폐정을 개선했을 뿐이라 꼬집는가 하면 “현재의 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현재의 풍속 아래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며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정조는 호의적 태도를 내비쳤으나 박제가의 제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여러 조목으로 진술한 내용을 보니 너의 식견과 지향을 알 수 있다”며 비켜갈 뿐이었다. 한문학자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의 저서인 북학의를 새롭게 편집하고 해설을 붙여 책으로 내놨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글을 엄선하고 체제와 수록 순서 등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북학의는 제목만 보면 북쪽에 있는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제시한 청사진은 먼저 중국을 배우고 이어 일본과 서양을 배워 국력과 문화를 증진하자는 것이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하)

    북한산성은 신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등 5개 나라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다. 북한산성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 무렵 한성백제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토성을 쌓으면서 비롯됐다. 132년 백제 개루왕이 산성을 쌓아 북진의 기치를 높이 올렸으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점령하여 남진의 발판으로 삼았고, 551년 신라 진흥왕이 차지하여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1387년 고려 우왕이 중흥산성을 쌓았다. 한강을 차지하는 나라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 우리 전쟁사이다. 한반도의 목구멍(咽喉)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각축의 역사를 웅변하는 것이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순수’(巡狩)란 천자가 제후의 봉지(封地)를 직접 순회하면서 현지의 통치상황을 보고받는 의례이며 순행(巡行)이란 용어가 일반적이다. 순수비란 순수를 기념해 세운 비석인데, 진흥왕 순수비의 비문 속에 나타나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진흥왕은 가야 병합, 한강 유역 확보, 함경도 해안지방 진출 등 왕성한 대외정복사업을 기념하고자 4곳의 비석을 세웠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산 3번지 북한산 비봉 정상이 순수비가 서 있던 자리이다. 큰 비석이 있다고 해서 비봉(碑峰)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순수비는 함경남도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경상남도 창녕비와 더불어 진흥왕 재위 말인 568년부터 576년 사이에 세워졌다. 1972년 옮겨질 때까지 최소 1400년 동안 한강과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풍상을 겪었다. 이 비석의 정체는 건립 1200여 년 후인 1816년에야 밝혀졌다. 추사 김정희였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로 서예가, 화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개조(開祖)였다. 실용학문을 연구하라는 스승 박제가와 박지원의 가르침을 좇아 금석학과 문자학, 음운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두루 연구했다. 그때까지 이 비석은 ‘고려 태조 비’ ‘도선국사 비’ ‘무학대사 비’ 등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황초령비와 북한산비의 비문을 고증한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서 추사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지금 경도(한양)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 곁의 비봉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154cm)이고 너비는 3척(71cm)이며 두께는 7촌(16cm )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 행 몇 자씩을 분별할 수 없다.…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 모르겠다.…그래서 마침내 이 비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200년이 지난 고적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의 비(無學之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라고 적었다. 북한산비는 1200년 만에 주인을 찾았다. 추사는 비석 왼쪽 측면에 ‘두 번 와서 비의 글을 읽었다’라는 내용의 글을 손수 새겼다. 순수비는 1934년 국보 제3호로 지정됐다. 1400년 역사에다 추사의 글씨까지 더해지니 ‘국보 중의 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국보 1호가 아니라 3호로 정한 일제의 간사함에 치가 떨린다. 문화적 열등감의 발호였으리라. 숭례문이 2008년 소실되고서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이 일 때마다 ‘국보의 번호는 관리번호일 뿐 가치의 순서와는 무관하다’고 변명하는 우리 문화재 당국의 순진함도 못마땅하기는 매한가지다. 추사는 비석을 발견했을 때 덮개돌이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고 적었지만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총알 세례를 받아 탄흔이 선연하다. 언제인지 모르게 몸돌 위쪽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잘렸고, 오른쪽 아래 귀퉁이는 뭉텅 떨어져 나갔다. 1972년 일단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겨 보존하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006년 10월 그 자리에 복제비를 세웠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 그리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이 서울을 지키는 대표적인 성곽이다. 우리나라에는 3000개에 이르는 산성이 있고,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기원전의 고대 도시 서울주변엔 숱한 성곽의 유허가 존재하지만, 규모나 형태면에서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 성곽이 서울을 제대로 지켰나’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북한산성은 왜 쌓았을까. 한양도성의 북쪽 외곽 방어막인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단 한번도 서울을 사수하지 못했다. 서울을 남쪽에서 보호하는 남한산성이나 강화성과 달리 외적의 침입 때마다 무용지물이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추풍낙엽으로 무너졌고, 두 번의 반정(중종과 인조) 과 이괄의 난 때도 맥없이 뚫렸다. 한국전쟁 때 창동~미아리 전선을 형성했지만 서울사수의 최후 방어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자는 북쪽 외곽 방어선 축조에 집착했다. 고려의 영향이 컸다.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태조 왕건의 관을 옮겨둔 오래된 피란처였고, 1232년 몽골 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최영 장군의 전공이 있다는 점에서 경복궁의 뒤를 지키는 산성의 필요성을 느꼈다. 성을 지키려면 곡성(曲城)과 돈대(墩臺) 그리고 해자(垓子)가 필요하다. 한양도성은 방어용 성이 아니었다. 임진, 병자 양란에서 경험하였듯이 군사적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하였다. 지금 만일 개축한다면 몰라도 수축만 하게 한다면 나을 것이 없을 듯하다”라는 숙종의 고변이 비변사등록에 남아있다. 조선 왕들에게 성곽은 국가 권위와 통치의 표상이었다. 외적을 방어하는 국력의 표현이기에 앞서 내부의 적대세력을 물리치는 대내용이었다. 숙종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에서 구역을 나눠 성을 쌓게 했다. 축조공사는 불과 6개월 만에 끝났다. 북한산성의 넓이는 49만㎡로 한양도성의 14만㎡보다 3배 이상 넓다. 왕이 집무를 볼 수 있도록 1만㎡에 124칸의 행궁을 지었다. 2만 6000섬의 군량미를 확보하고, 저수지 26개와 우물 99개를 팠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나한봉~용혈봉~미륵봉(의상봉)~원효봉~영취봉 같은 험한 봉우리를 이어 구축한 포곡식 산성이다. 숙종은 몸소 시단봉 동장대에 올라 9.73km에 이르는 산성의 위용을 만끽했다. 그러나 이때 지은 성곽과 행궁은 1915년 대홍수 때 대부분 떠내려갔다.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 경기편에서 도성과 산성에 관해 여러 차례 의견을 피력했다. “비록 산세를 따라 성을 쌓은 것이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하다. 또 성 위에 작은 담을 쌓지 않았고, 해자도 파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난리 때 모두 지켜내지 못했다”라고 한양도성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북한산성에 대해서도 “숙종 때 조정에서 도성을 고쳐 쌓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동쪽이 너무 낮아서 만약에 강을 막아 그 물을 성에다 댄다면 성 안 백성은 모두 물고기 신세’라는 말이 있어 그 논의는 중지되고 말았다”라고 언급했다. 숙종 재위 기간 내내 이어진 산성 축조 논쟁을 지적한 말이다. 북한산성 축조가 처음 논의된 1675년부터 완공된 1711년까지 무려 36년을 끈 북한산성 축조논쟁을 비꼰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북한산성으로 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전략인가” “북한산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북한산성은 험준하여 지키기는 좋지만 도성민을 수용하기는 좁지 않은가” “물자와 인력이 부족하니 강화성이나 남한산성 둘 중 하나는 포기하는 게 옳다” 등의 온갖 논의가 난무했다. 찬반의 논리는 단순했다. 찬성론자들은 유사시 왕이 피할 곳이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고, 반대론자들은 병자호란 때 청과 맺은 정축조약의 ‘성곽을 수축할 수 없다’라는 조항을 위배해선 안 된다면서 맞섰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1710년 청으로부터 날라온 한 장의 외교문서가 결정적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니 연해 지방의 방어에 유의하라’는 문서가 성곽수축 금지조항을 해제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반대논리를 잃자 축성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청화자 이중환은 비판적이다.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사현(무악재)이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녹번현이 있다. 당나라 장수가 여기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겠다’하였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벽제령인데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한 곳이다. 고개 두 곳과 벽제령은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 …천연적인 험한 곳을 버리는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벽제령에서 남쪽으로 40리를 가면 임진나루터이다.…아주 험하게 되어 있으니 참으로 지킬 만한 곳이다”라고 대안까지 제시했다. 소용도 없는 도성과 산성을 짓는다고 백성을 달달 볶거나 세금을 축내지 말고 지킬 만한 곳을 찾아서 지키라는 주장이었다. 천 번 만 번 지당한 말씀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난공불락 요새 18세기 방랑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기도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광주부)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화가 결정되고 나서도 국도(한양)를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성이라 생각해서, 성 안에다 절 아홉을 세워 스님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녹을 주는 까닭에 스님들은 오로지 활과 살로써 업을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스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내려온 것이지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3세기 전 세계를 휩쓴 무적 몽골군의 두 차례 공격과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파상공세도 47일간 막아냈다. 해발 4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쳐 11.7㎞가 넘는 성벽을 쌓았는데 내부는 넓고 평평했다. 우물이 80곳, 연못이 45개에 이를 정도로 물이 풍부해 군량미와 소금만 잘 비축하면 수만 명의 병력이 장기농성할 수 있는 철벽의 금성탕지였다. 우리나라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다 합쳐 3000여개의 성이 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니 1리마다 1개의 성곽을 쌓은 셈이다. 가히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남한산성은 산성 축성기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성곽유산으로는 평지 성인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1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문화대국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등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와 독립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 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며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남한산성이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63%, 하남시에 24%, 성남시에 13%가 속해 있다. 광주는 고려 태조가 이름 짓기 이전까지 한강 남쪽의 넓고 오래된 땅 한산(漢山)이었다. 하남이라는 지명은 한강의 남쪽,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울과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공간적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남한산성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장처였다. 왕의 선택지는 대개 강화 섬이 아니면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광주행궁이라고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는 23곳에 이르는 행궁이 있었다.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했다. 전란에 대비한 광주행궁, 양주행궁(북한산성), 강화행궁, 전주행궁을 비롯해 능행을 목적으로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풍덕행궁을 지었다. 왕은 질병 치료와 휴양차 온양행궁, 청주행궁, 목천행궁, 고성행궁, 전의행궁 등에 행차했다. 온양행궁 가는 길인 과천행궁과 수원행궁에도 머물렀다. 행궁의 역사는 오래다. 백제본기에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라는 최초의 기록이 남았으며 고려사에는 40건의 행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했다.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임시 수도로서의 위상이다.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으며 광주부가 1917년 경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도시였다.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행궁은 두 개의 궁으로 나뉘었는데 상궐은 73칸, 하궐은 154칸으로 총 227칸의 당당한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 경복궁은 7715칸, 창덕궁은 4500칸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 북한산성 행궁은 124칸이었다. 대부분의 행궁은 말이 궁이지 왕이 실제 머문 횟수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모두 6차례 행차했고 머문 기간도 농성 47일을 비롯해 50일을 넘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가 서장대를 둘러보았고, 정조는 서성과 남성을 거쳐 북성까지 돌아보고서 서장대에서 군사훈련까지 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등 모두 6명의 왕이 찾았다. 남한산성이 몽골과 청은 물론 일제에 항거한 외세 저항의 본거지였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과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1, 2차 대몽항쟁의 승전지에다가 척화론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학사를 모신 현절사가 세워진 항청의 기운이 항일로 옮아붙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에 깃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열전이 있다. 정조실록 등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군사를 독려하다 앉아서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온조가 나타났다.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뭐하고 있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들어 군사를 보내 격퇴했으며 이에 감읍해 온조왕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서라는 장군이 배향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환궁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묘를 세워준 것이 고마우나 혼자서는 지내기 외로우니 이서 장군을 보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이서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온조가 이서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숭열전에 배향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정말 백제의 왕도였을까 남한산성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택리지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으론 입증된 바 없다. 18세기 홍경모가 지은 ‘중정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면서 “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는 다른 설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은 물론 남한산성에서도 백제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원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사 4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주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해서 신라가 쌓은 한강 이남의 방어거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돼 ‘주장성=남한산성’의 신빙성을 높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른 작명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역사상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함께 비운의 임금 1, 2위를 다투는 인조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했으나 반정공신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달아나야 했다.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내세우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등 세 번이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즉위 2년 만인 1624년 남한산성 축성을 명하였고 1626년 성이 완성되자 서부면에 있던 광주부를 옮긴 것도 인조였다. 남한산성은 축성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땅에는 3000개에 이르는 성이 있었지만, 성의 역할을 제대로 한 성은 평양성과 진주성, 강화성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세에 빼앗기지 않았던 ‘서울지킴이’ 같은 존재이다. 항몽, 항청, 항일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계의 창] 1707년 英과 합병… 20세기 북해유전 발견되며 독립의 꿈

    [세계의 창] 1707년 英과 합병… 20세기 북해유전 발견되며 독립의 꿈

    스코틀랜드는 영국(그레이트 브리튼)을 구성하는 4개 지역(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중 한 곳이다. 오는 18일 스코틀랜드의 410만 유권자가 독립에 찬성하면 307년 동안 유지됐던 대영제국은 해체된다. 켈트족의 스코틀랜드와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가 써 내려온 애증의 역사에서 변곡점이 된 사건과 인물을 키워드 삼아 분리독립의 흐름을 짚어 봤다. ●윌리엄 월리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 독립영웅 윌리엄 월리스를 모델로 했다. 월리스는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이듬해 폴커크 전투에서 패했다. 증오심에 찬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그를 처형지로 끌고 가 나무에 목을 매달았고, 숨이 끊기기 전 끌어내려 거세하고 창자를 꺼내 불태웠다. 그리고 주검 조각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도처에 내걸었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올해로 꼭 700주년(1314년)이 된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해 독립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두 왕실은 혼맥으로 연합왕국을 이뤘고, 1707년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 합병됐다. ●세계대전과 대공황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스코틀랜드 젊은이가 영국군으로 징집돼 전사했다. 1919년 이에 항의하는 ‘레드 클라이드사이드’ 운동이 벌어졌는데 영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1920~1930년대 대공황의 충격은 스코틀랜드 대표 도시 글래스고로 집중됐다. 2차대전 때 스코틀랜드는 나치 독일의 집중 표적이 되기도 했다. ●북해유전 스코틀랜드가 독립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은 1970년대 들어 북해유전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독립 진영은 최대 240억 배럴에 이르는 석유 매장량을 기반으로 새 국가를 건설하면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채산성이 떨어져 2050년쯤 북해유전이 소진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마거릿 대처 스코틀랜드인들은 보수당 출신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그 여자’(the woman)라고 부른다. 대처는 스코틀랜드의 기반이었던 철강과 조선산업을 해체 수준으로 구조조정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 5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 지역에서 보수당이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앨릭스 샐먼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인 앨릭스 샐먼드는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불린다. 1990년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의 당수에 오른 이후 1999년 자치의회 수립을 이끌었다. 2011년에는 스코틀랜드 의회선거에서 독립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마침내 과반 의석을 차지해 집권에 성공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수당 정권이 추진한 긴축정책과 민영화는 스코틀랜드의 ‘좌경화’를 심화시켰다.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의 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스코틀랜드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2012년 말 전격적으로 주민투표 방안을 허용했다. 보수당은 현재 스코틀랜드에 할당된 웨스트민스터 하원의석 59석 가운데 단 1석만 차지할 정도로 고전하고 있다. 만일 독립안이 가결된다면 캐머런은 세계사적으로 길이 남을 정치적 오판을 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숀 코너리 vs 조앤 롤링 투표 열기가 뜨거워진 또 다른 이유는 스코틀랜드와 연고가 있는 유명 인사들의 찬반 대결 때문이다. 독립에 가장 적극적인 문화예술인은 배우 숀 코너리다. 그는 ‘스코틀랜드여, 영원히’라는 문신까지 새겨 넣었다. 인기 팝 듀오 유리스믹스의 여성 보컬인 애니 레녹스, 작가 어빈 웰시, 시인 리즈 록헤드도 찬성 운동을 펼쳤다. 반면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100만 파운드(약 17억원)를 반대 캠페인에 후원했다. 배우 이완 맥그리거와 에마 톰슨, 알렉스 퍼거슨 전 맨유 감독도 잉글랜드 편에 섰다. ●파운드 분리독립을 둘러싼 가장 큰 문제는 영국의 화폐인 파운드화 지속 사용 여부다. 찬성파는 파운드화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영국 중앙은행 총재는 “어림없다”고 잘라 말했다. 만약 영국이 파운드 사용을 허용하더라도 파운드를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 의미에서 독립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시장에서 당장 통용될 자체 화폐를 만들 만큼 스코틀랜드의 경제력이 탄탄한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찬성 여론이 높아질수록 런던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스코틀랜드의 대표 금융사인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로이드 금융, 스탠더드라이프는 독립이 된다면 스코틀랜드를 떠나겠다고 밝혔다. 독립 투표가 부결되면 결국 파운드가 스코틀랜드의 꿈을 좌절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엄정중립을 약속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4일(현지시간) 결국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스코틀랜드인이었던 여왕은 “(유권자들은) 미래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독립 반대를 선언한 것이다. 전날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찬반 우세가 근소하게 엇갈렸다. 여왕의 막판 개입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40여만명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마지막 관전 포인트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산성(상)

    한국전쟁 최대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서울사수’를 외치던 이승만 정부가 전쟁발발 이틀 만에 서울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면서 한강 다리마저 폭파해 150만 서울시민을 적지에 버린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전에 머물면서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녹음방송을 내보내 국민을 속였다. 국회가 서울 사수 결의를 전달코자 했을 때 대통령은 경무대에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64년 전 그때 한강 다리를 넘지 못한 서울 사람들의 원한이 부동산 투기로 이어져 오늘의 강남 아파트공화국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몽진(蒙塵)의 역사는 길다. ‘서울 사수’는 한국전쟁 때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고려 이후로 역사를 좁혀도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때 도읍 송악(개성)이 함락돼 현종이 나주로 몸을 피한 것을 시작으로 모두 9차례 일어났다. 조선 선조와 인조, 고종 등 3명의 왕이 5차례에 걸쳐 의주와 강화, 남한산성, 러시아공사관으로 각각 몸을 피했다. 인조는 강화, 남한산성에 이어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도피한 비운의 ‘몽진 3관왕’이었다. 그 이전에 4명의 고려 왕(현종·고종·충렬왕·공양왕)이 거란과 몽골을 피해 강화, 안동 등을 30년 가까이 전전했다.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몽진이나, ‘도성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는 파천(播遷) 같은 왕에게만 쓰는 고상한 용어로 헛갈리게 하지만 이승만식 야반도주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도성수성론 대 서울사수론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1712년 북한산성 축성공사를 끝낸 숙종은 북한산성에 올라 “내 어찌 도성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라는 기념시를 지었다. 외침이 있으면 이곳에 들어와 백성과 더불어 성을 지키겠다는 얘기다. 이때 19살이던 연잉군(영조)은 부왕을 부축해 산성에 올랐다. 도성민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결코 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도성 사수 의지가 가슴에 깃든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수성윤음이 무색하게 200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 남하 3일 만에 대통령은 서울을 버렸다. 영조가 도성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다진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도성 방어 전략의 전환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엽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위상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도성의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고, 상공업의 발달로 서울은 거대한 소비도시가 됐다. 중세 유럽의 대도시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선비들의 낙향문화는 사라지고, 경화사족(京華士族)의 벼슬길 독점이 극심했다. 서울은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대도시였고, 서울을 떠난 왕은 존재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서울을 버릴 수 없는 속사정과 함께 이제는 중국과 일본을 향해 큰소리칠 때가 왔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숙종 이후 영조에 걸쳐 삼군부를 중심으로 도성 방어 군사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들 병력을 동원해 한양도성과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더불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도성 방어체제가 비로소 갖춰졌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서울 사수 방송은 대국민 사기극이었지만 영조가 직접 지어 반포한 도성 수성 의지는 탄탄한 국력의 과시이자 거듭된 환난에 고생한 대국민용 위로였다. ●북한산과 남한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조선 개국 이후 서울의 정식 명칭은 한성(漢城)이었다. 백성은 한양(漢陽)이라는 별칭을 즐겨 썼다. 삼국시대 이래 지역명 한주(漢州), 한산(漢山)의 맥을 이어받은 지명이다.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가 터 잡은 이후 한강(漢江) 아래쪽 지금의 강남 땅이 중심이었지만 1392년 조선이 백악 아래 오늘의 사대문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강 이북으로 중심지가 북상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있는 산은 북한산(北漢山)이요, 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삼각산은 세 개의 뿔(백운대·만경봉·인수봉)을 이르는 신령스런 산이름이지만 한강 북쪽 산은 모두 북한산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본래 산이름이 희미해졌다. 한강 남쪽 산은 남한산(南漢山)이요, 성은 남한산성(南漢山城)인 점도 자연스럽다. 남한산성은 세계 최강 10만 청군의 공격을 45일간 버틴 금성탕지(城湯池)이자 난공불락의 철옹성(鐵甕城)이었다. 남한산성은 함락된 것이 아니다. 강화도 함락과 주사파와 주화파의 분열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왕이 스스로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성곽의 증축과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이 6번째 항복조건일 정도였다. 남한산(522m)이 최고봉이고 산성은 일장산과 주장산 두 산 사이에 걸쳐 쌓았다. 우리에게 북한산은 산의 개념이 강하지만 남한산은 산성이라는 인식이 더 세다. 서울의 성곽축조 역사는 한성백제, 삼국의 한강 쟁패,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양도성 등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뉜다. 지금의 서울은 한성백제의 위례성, 고려의 남경, 조선의 한성 등 2000년 세월 동안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기에 궁궐과 내성, 산성의 3중 체제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한강 남쪽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강을 따라 중곡동·옥수동·삼성동·암사동 토성과 대모산성, 양천고성 등이 외곽방어 진지 역할을 했다. 아차산성·이성산성·금암산성·남한산성 또한 백제왕성의 방어기지로 파악된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각축지였다. 한강권에서는 주장성, 이성산성,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이 뺏고 빼기는 삼국의 격전지였다. 진흥왕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워 이곳이 신라 영토임을 알린 까닭이다. 임진강권에도 칠중성·호로고루·고모리산성·당포성·아미성·계양산성 등이 산재했다. 고려시대 성곽의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연흥전이라는 남경별궁을 세웠고, 최영 장군이 북한산성 자리에 중흥산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환인현 오녀산성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었다.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 북쪽 해발 820m의 솟아오른 암벽 위 조촐한 산성이 기원전 37년 고구려의 첫 둥지였다. 이처럼 우리의 왕성(도성)은 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삼국시대 초기 산성과 왕성의 이원적 구조가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사비성에서 나타났지만, 후기 들어 산성과 왕성의 일체화가 정립되었다. 고려 송악에 이어 조선 한양 도성에도 이 같은 전통이 이어졌다. 중국에는 한국형 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성은 자생적 문화유산이다. 평지의 도성과 산지의 산성이 짝을 이루는 조합은 고대 삼국 이후 한반도 도성 축조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성은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타고 쌓았다. 자연지형의 최고 경계점에 성곽을 쌓아 지형의 높낮이를 성곽으로 이용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축조 기법과 다르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창의문을 나서 부암동 가는 산등성이가 내려가는 곳에 백석동천이 있고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세검정과 탕춘대 터가 있다. 도성 밖 북쪽을 지키는 군대(총융청)가 새로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신영동(新營洞)이다. 탕춘대 터에는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지만 본래 신라시대 장의사(藏義寺)라는 절터였다.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파랑과 장춘랑 등 두 화랑을 기리는 사찰이었으나 연산군이 이를 허물고 연희장으로 만들어 ‘질퍽하게’ 놀았다고 해서 탕춘대라고 이름 붙었다. 장의사 당간지주가 세검정초등학교 교정 한 귀퉁이에서 1400년의 역사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장의사는 비록 사라졌지만 이름은 장의동으로 남았고, 서울의 북소문인 창의문을 장의동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장의문이라고도 불렀다. 인조반정 때 반군이 홍제원에 집결하여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통해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으므로 창의문이 개선문인 셈이다. 풍수 최양선이 숙정문~창의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은 곳이니 길을 내어 지맥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하여 태종 때부터 폐쇄한 문을 인조반정 이후 열어 놓았다. 영조는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창의문 현판에 새겼다. 안동 김씨 중 이곳에 사는 권문세족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다. 김정호의 경조 오부도 중 백악과 인왕산 사이에 그려진 성곽과 ‘서성(西城) 한북문(漢北門)’이라는 기록이 곧 오늘의 탕춘대성과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4㎞ 길이의 산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처음에는 한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라고 하여 한북문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 공식 명칭이 되었다. 탕춘대성 안에 전시 식량을 비축하는 곳간을 만들어 평창(平倉)이라고 하였는 데 평창동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서울은 도성을 중심으로 3개의 산성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북한산성, 남쪽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서쪽 산성이 탕춘대성이다. 원래 도읍은 궁궐과 내성 그리고 외성 등 삼중구조를 갖춰야 하지만 조선은 궁궐과 해자도 없는 도성만으로 버텼다. 외성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란을 호되게 겪고서야 도성의 군사적 방어체계를 고쳤다. 이를 본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한양도성을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이라고 찬탄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스코틀랜드 독립땐 어떻게 되나 Q&A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투표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풀어 봤다. →언제부터 독립국가가 되나.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이끄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2016년 3월 24일을 독립 선포일로 정해 놨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스코틀랜드 자치정부와 영국 정부는 협상에 들어 간다. 스코틀랜드 측은 니콜라 스터전 자치정부 부총리를 협상 대표로 선정했지만, 영국 정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영국을 상징하는 ‘그레이트 브리튼’, ‘U.K’, ‘유니언 잭’은 사라지나. -셋 다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지리적인 영국을 뜻하는 그레이트 브리튼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가리킨다. U.K(United Kingdom)는 1707년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통합하면서 생긴 명칭이다.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에서도 스코틀랜드를 뜻하는 파란 바탕에 흰색 대각선이 빠진다. →독립된 스코틀랜드는 유럽연합(EU)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남아 있을 수 있나. -스코틀랜드는 EU와 나토 회원국으로 남길 원하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명확한 규약은 없지만 EU는 28개국의 승인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나토 사무총장도 “스코틀랜드가 재가입 신청을 한 뒤 28개국의 만장일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화폐를 사용하나. -보수당, 노동당, 자유민주당 등 영국 주요 3당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하면 파운드화를 사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유로존에 가입해 유로화를 쓰거나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야 한다. →군주제는 유지되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분리 투표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중립을 강조했다. 스코틀랜드도 군주제는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고, 헌법에 이를 반영할 예정이다. 그러나 분리독립 후 군주제 유지를 놓고 국민투표에 부칠 가능성도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똑똑 아시안게임] 마린보이 박태환 7관왕 달성 땐 ‘최다관왕’ 北사격 서길산과 타이

    2006년 도하와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각각 3관왕에 등극한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이 인천에서는 자유형 100·200·400·1500m와 단체전인 계영 400·800m, 혼계영 400m에 출전해 최대 7관왕 도전에 나선다. 역대 아시안게임 단일 대회 최다관왕 기록은 누가 갖고 있을까. 1982년 뉴델리대회에서 북한의 전설적인 사격 영웅 서길산이 세운 7관왕은 64년 역사의 아시아경기대회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재 사격은 한 선수가 세 종목까지만 출전할 수 있어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해도 6관왕이 최고다. 규정이 바뀌지 않는 한 사격에서 서길산의 기록을 깨는 선수는 나올 수 없다. 1995년 은퇴한 서길산은 이후 지도자로 변신해 광저우대회까지 북한 사격대표팀을 이끌었다. 선수를 발굴하는 데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김현웅과 김정수 등 스타를 길러 냈다. 현재는 북한사격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최다관왕은 1986년 서울대회 양창훈(양궁)과 유진선(테니스), 광저우대회 여자 볼링의 황선옥(류서연으로 개명)이 세운 4관왕이다. 현대모비스 감독인 양창훈은 남자 대표팀 코치로 인천대회에 참가한다. 또 한국인 개인 최다 금메달은 양창훈과 승마의 서정균, 박태환이 갖고 있는 6개다. 양창훈은 1990년 베이징대회에서도 2개의 금메달을 보탰고, 서정균은 서울대회부터 2006년 도하대회까지 20년에 걸쳐 차곡차곡 금메달을 모았다. 하지만 박태환이 이번 대회에서 금빛 물살을 가르면 이들을 넘어서게 된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英 여왕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개입 않겠다”

    英 여왕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개입 않겠다”

    “여왕이 스코틀랜드의 주민투표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할 것이라는 의견은 모두 틀렸다고 단언한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오는 18일 실시되는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주민투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고 BBC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BBC에 따르면 버킹엄궁은 “국왕이 헌법에 따라 중립을 지키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확고한 원칙”이라면서 “왕실은 정치 위에 존재하고 이 문제는 정치인들이 다뤄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성명은 지난 6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분리독립에 찬성하는 의견이 51%를 차지하며 반대 의견(49%)을 처음 앞선 것으로 나타나자 여왕의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 나왔다. 집권 보수당은 “여왕이 개입하면 여론은 달라질 것”이라며 왕실에 분리독립 반대 입장 표명을 요구해 왔다. 독립을 추진하는 진영은 여왕의 불개입 선언이 독립 찬성 여론을 더 확산시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분리독립을 이끄는 알렉스 새먼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겸 스코틀랜드국민당(SNP) 당수는 “여왕도 독립국가인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77년엔 분리독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가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던 당시, 재임 25주년 기념행사에서 여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의 왕과 여왕들을 내 조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열망을 이해한다”면서도 “그러나 내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아일랜드를 합친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만수르 재산 전체규모는 1000조…왜 부자순위에 없을까

    만수르 재산 전체규모는 1000조…왜 부자순위에 없을까

    만수르 재산 포브스 만수르 재산이 연일 화제다. 만수르는 아랍 에미리트의 현 부총리이자 국제 석유투자회사 회장,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로 잘 알려져있다. 이 밖에도 만수르는 아랍 에미리트 경마 시행체 회장, 영국 2위 은행 바클레이의 최대주주, 벤츠 다임러 최대주주, 포르쉐 주주, 폭스바겐 주주 등 여러 직함을 가지고 있다. 만수르 개인의 재산은 32조 정도로 추정되지만 만수르 가문 전체의 재산 규모는 1000조 이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발표한 포브스 순위에는 만수르가 없다. 포브스 순위에는 세계 부자 순위에는 석유나 왕가의 재산은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사항에 모두 포함되는 만수르는 부자 순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왕은 순수 재산 38조원을 보유하고 있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푸미폰 국왕의 재산은 알려진 것만 방콕 부동산 3329에이커, 태국 내 부동산 13200에이커, 태국 최대 시멘트 회사 시암 시멘트사의 지분 32%, 태국 최대 은행 시암 상업은행 지분 23%, 태국 건설업체 크리스티아니&닐슨, 보험사 데베스, 태국 대기업 친코포레이션 지분 등이다. 세계 최다면체 다이아몬드 ‘골든 주빌리 다이아몬드’도 푸미폰 국왕의 소유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KLPGA 투어 19세 동갑내기 절친 3인 “신인왕은 내 것”

    KLPGA 투어 19세 동갑내기 절친 3인 “신인왕은 내 것”

    열아홉 살 동갑내기 ‘절친’이지만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은 양보할 수 없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샛별 고진영(넵스)과 백규정, 김민선(이상 CJ오쇼핑)이 29일부터 사흘간 강원 정선의 하이원골프장(파72·6567야드)에서 열리는 ‘2014 채리티 하이원리조트 오픈(총상금 8억원·우승상금 1억 6000만원)’에서 신인왕 레이스의 중대 기점에 선다. 지난해 KLPGA 신인왕은 김효주(19·롯데)와 전인지(20·하이트진로) 양강 구도로 전개됐지만, 올해는 고진영·백규정·김민선의 삼파전이다. 투어 28개 대회 가운데 16번째 대회인 까닭에 반환점을 돈 뒤 하반기 리드를 잡기 위한 쟁탈전이다. 가장 먼저 주목받은 선수는 지난 4월 넥센 세인트나인 마스터즈와 6월 롯데칸타타 여자오픈 우승을 차지한 백규정이다. 그러나 고진영이 5월 말부터 6개 대회 연속 ‘톱10 진입’에 성공하더니 지난 17일 끝난 넵스 마스터피스 정상에 오르며 급부상했다. 신인왕 포인트 230점을 추가한 고진영은 시즌 합계 1301점으로 백규정(1131점)을 제쳤다. 여기에 김민선까지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경쟁에 가세했다. 우승은 없지만 출전한 16개 대회 모두 컷을 통과해 어느덧 1129점까지 포인트를 쌓았다. 백규정을 2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이번 대회에 걸린 신인왕 포인트는 270점. 박빙을 깨고 단박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또 이 대회는 서희경(28·하이트진로)과 유소연(24·하나금융그룹), 안신애(24·해운대비치골프앤리조트) 등 쟁쟁한 선배 우승자를 배출해 낸 터라 우승 의미가 남다르다. 김효주까지 합쳐 ‘돼지띠 황금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경기가 끝난 뒤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친한 사이다. 국내외 투어에 나가면 한데 어울려 맛집과 명소를 찾아다니고, 우승한 친구에게는 마음껏 축하의 물을 뿌려주는, 국가대표팀 출신들이기도 하다. 한편 올해 7억 9000만원의 시즌 상금으로 부문 선두를 지키고 있는 김효주의 행보도 관심사다. 지난달 한화금융클래식에서 시즌 3승째를 신고했지만 이후에는 우승권에 들지 못해 잠시 주춤한 상황. 3억 9000만원을 쌓아올린 2위 허윤경(24·SBI저축은행)이 이번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면 자칫 상금왕 경쟁이 오리무중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극락전 등 국보·보물 14점 보유… 2018년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명인·명물을 찾아서] 극락전 등 국보·보물 14점 보유… 2018년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경북 안동의 천년고찰 봉정사(鳳停寺)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면서부터다. 오랜 역사와 전통,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봉정사는 영국 여왕의 방문과 영화를 통해 세계인들로부터 주목받은 바 있다. 문화재청, 대한불교조계종, 안동시는 2018년까지 봉정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를 위해 최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추진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준비에 들어갔다. 2017년까지 등재를 위한 연구와 조사, 국내외 학술대회를 열어 유네스코 현지 실사를 마칠 계획이다. 봉정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전통사찰의 위상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사상·의식·생활·문화 등을 잘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의상이 영주 부석사에서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 날렸는데, 그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있다.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갔다는 봉정사는 국보와 보물로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해 대웅전(국보 제311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대웅전 후불탱화(보물 제1614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상회 괘불도(보물 제1642호), 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 등 문화재를 무려 14점 보유하고 있다. 특히 극락전은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겹처마로 구성, 매우 간결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평가다. 기둥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부석사의 무량수전이었다. 그러나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지붕 서까래를 건 도리에서 ‘1368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무량수전의 중수 시기보다 8년 앞섰다. 이로써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 학계 인정을 받게 됐다. 봉정사는 1999년 4월 21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가면서 유명해졌다.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여왕은 봉정사 극락전을 둘러보고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 조각이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린다”며 감탄했다. 이어 방명록에 ‘조용한 산사 봉정사에서 한국의 봄을 맞다’라는 글귀를 남겨 봉정사에 스토리를 더했다. 여왕은 극락전 앞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돌탑에 쌓고 “돌탑을 쌓았으니 복을 많이 받겠다”며 환하게 웃음 짓기도 했다. 사찰 입구 솔 숲길은 여왕이 다녀간 길이라고 해서 ‘퀸스로드’로 이름 붙여졌다. 봉정사 관계자는 “여왕이 봉정사를 방문한 직후 평일 1000여명, 주말과 휴일 2000~3000명의 관광객이 몰린 것을 시작으로 지금도 국내외에서 꾸준히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대웅전 오른편의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은 영산암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 배용균 감독), ‘동승’(2003년 주경중 감독)이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여유롭게 퇴락을 즐기는, 곱게 늙어 가는 절집의 자연주의 미학에 세계인이 공감한 바로 그 현장이다. 특히 ‘달마가 동쪽으로’는 제42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산암은 바위 속에 자라는 소나무가 일품이다. 사찰이라기보다 사대부가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뛰어난 미를 갖춰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가까이서도 아름답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절집이다. 어느 건축가는 영산암을 놓고 “축복이며 신비”라고 격찬했다. 가을이면 봉정사 일대는 온통 샛노란 국화꽃 세상으로 변한다. 서후면 금계리에서 봉정사까지 8㎞ 구간은 각양각색의 국화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때맞춰 ‘봉정사 국화 대향연’도 열려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김재교(57) 안동시 문화예술과장은 “봉정사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대표적 건축물로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종교사와 문화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며 “물론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글 사진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서울광장] 새만금 개발, 지신과 용왕 허락받으라/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새만금 개발, 지신과 용왕 허락받으라/서동철 논설위원

    새만금 내부의 토지개발이 본격화되는 모양이다. 이달부터 산업용지 분양도 시작됐다. 새만금 간척은 33.9㎞의 둑을 쌓아 283만㎢의 땅과 118만㎢의 호수를 얻은 초대형 사업이었다. 그렇게 만든 땅과 호수, 둑, 그리고 해양자원을 이제 경제 활동에 쓰겠다는 것이다.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을 넘어서는 비용이 들어갔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큰 국가적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주 새만금을 찾았다. 변산반도 쪽 초입에 자리 잡은 새만금 홍보관에서 바라본 방조제는 흔히 듣던 ‘대역사’(大役事)란 단어의 뜻이 이런 거구나 싶을 만큼 장관이었다. 그런데 둑길을 따라 야미도의 횟집으로 달려가면서 조금씩 편치않은 심정으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땅과 바다의 모습을 인간이 마음대로 바꾸어 놔도 뒤탈이 없을지 슬금슬금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과거엔 배를 타고 한참이나 달려야 닿을 수 있던 야미도만 해도 지금은 육지나 다름없는 둑방의 징검다리가 됐다. 새만금 간척은 그 사업 초기부터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쳤던 것이 사실이다. 공사가 시작된 것이 1991년이니 무려 23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 목소리를 냈지만 나는 그 절실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방조제가 완성된 다음에야 뒤늦게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고 사업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찬성으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완성된 방조제를 어찌할 수 없을 뿐, 흔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었을 리 없다. 신앙이 있든, 없든 만물에 신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데 크게 거부반응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존재가 하느님이다. 반면 우리 민속신앙에서는 세상 만물에 저마다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만경강과 동진강에는 각각의 수신(水神)이 있고, 주변 땅에는 지신(地神)이 있다. 그 너머 바다에는 서해용왕(西海龍王)이 있다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는 우리 민속신앙일 것이다. 이런 이치에 따르면, 만경강수신과 동진강수신, 새만금지신과 서해용왕은 요즘 말로 너 나 할 것 없이 깊은 ‘멘붕’에 빠져 있을 게다. 돌이켜 보면 우리 조상은 집터를 다질 때도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지신에게 고(告)하고 허락을 받는 집터다지기 소리를 했다. 인간과 땅과 지신이 일체화하는 제례행위이자 생활과 신앙이 하나 되는 축제라고 민속학에서는 설명한다. 그저 작은 집 한 채를 새로 짓는데도 이랬을진대 지도의 모습을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며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이해를 구하는 절차가 없다면 천벌을 받고도 남을 일이라고 옛사람은 노(怒)했을지도 모른다. 엉뚱해 보이겠지만 지신과 용왕에게 방조제를 쌓은 데 대해 용서를 받고 본격 개발에 앞서 허락을 얻는 것은 사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다. 지신과 용왕의 심기를 풀어주려는 노력은 곧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노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만금 주변을 돌아보며, 이 사업으로 상처받은 신과 인간의 해원(解寃)을 위해서는 박물관을 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본격 농업사박물관과 해양생활사박물관을 이곳에 세우자는 것이다. 농사체험장을 겸한 농업사박물관은 변산 쪽 새만금 입구에 만들어 많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해양생활사박물관의 최적지는 당연히 둑길로 연결된 야미도와 이웃한 신시도 일대다. 이 섬들이 속한 고군산군도는 최근 새만금사업지구에 편입돼 새만금 사업의 일환으로 해양생활사박물관을 짓는 데 제약조건은 사라진 듯하다. 농업사박물관과 해양생활사박물관에서 펼쳐질 지신제와 용왕제는 지신과 용왕을 위로하는 행사에 머물지 않는다. 새만금 개발 사업으로 흩어지거나, 또다시 흩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은 민심을 다시 한데 모으는 것은 물론 새만금의 대표적 명물 축제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축제의 주인공은 지신과 용왕이 아니라 사람이다. dcsuh@seoul.co.kr
  • [프로야구] ‘박병호 vs 강정호’ 홈런레이스, 집안싸움 될까

    [프로야구] ‘박병호 vs 강정호’ 홈런레이스, 집안싸움 될까

    올해 ‘홈런레이스’ 출전 선수 명단이 확정되면서 올해 국내 프로야구 홈런 최강자에 누가 등극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3일 발표한 G마켓 홈런레이스 출전선수는 이스턴 올스타인 호르헤 칸투, 김현수(이상 두산), 루이스 히메네스(롯데), 이재원(SK), 웨스턴 올스타인 박병호, 강정호(이상 넥센), 나성범(NC), 나지완(KIA) 등 8명이다. 이들은 오는 17∼18일 광주에서 열리는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서 홈런 경쟁을 펼친다. 17일 예선 1, 2위가 18일 결승에서 맞붙어 최종 승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기록상으로 가장 유력한 홈런왕은 현재까지 홈런 부문 1위를 달리는 박병호와 2위 강정호다. 이들은 모두 넥센 히어로즈 소속 타자여서 18일 결승이 넥센 집안 싸움으로 치러질지 관심사다. 박병호는 지난 12일 기준으로 총 30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강정호는 26개로 뒤를 잇고 있다. 공동 5위에 오른 나성범(19개)과 9위 칸투(18개)도 올 시즌 홈런 타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히메네스(14개), 나지완(13개), 김현수(12개), 이재원(9개)은 홈런레이스 현장에서 집중력을 발휘해 기존의 순위를 무색하게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타율을 기준으로 홈런레이스 참가자들의 순위를 매기면 이재원이 0.393으로 1위, 박병호는 0.294로 8위로 뒤집힌다. 나성범이 0.344로 2위, 나지완은 0.338로 3위를 차지한다. 강정호는 0.335, 히메네스 0.332, 김현수 0.320, 칸투는 0.313의 타율을 기록 중이다. 칸투와 히메네스는 12년 만의 외국인 홈런왕에 도전한다. 1993년 시작한 홈런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머쥔 외국인 타자는 2000년 두산 베어스의 타이론 우즈와 2002년 삼성 라이온즈의 틸슨 브리또 단 두 명이다. 2010년 홈런레이스 우승자인 김현수는 올해 다시 한 번 홈런왕을 노린다.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최다 우승 기록은 통산 3차례 우승한 양준혁(전 삼성)과 박재홍(전 SK), 김태균(한화)이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대영제국 여왕의 암울한 귀환…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

    대영제국 여왕의 암울한 귀환…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

    지난 4일(현지시간) 영국은 스코틀랜드 지방의 로지스(Rosyth) 조선소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영국 해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모함인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 진수식을 가졌다. 전통적으로 군함의 진수식에서는 배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여성이 샴페인 병을 배에 부딪치게 해 깨뜨리는데, 이날 행사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행사가 열린 조선소가 스코틀랜드 지방인 점을 고려해 이 항공모함의 진수식에서는 전통적으로 쓰이는 샴페인 대신 위스키 병을 깨뜨리며 이 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 HMS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은 영국이 35년 만에 갖는 정규 항공모함이었고, 대영제국 해군 역사상 최대의 군함으로 기대를 모아왔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한 여왕과 영국 해군 관계자들의 표정은 밝았지만, 실제로 이들의 속은 누구보다 더 타들어 가고 있었다. ▲풀을 먹고 살더라도 항공모함을 가지겠다! 풀을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를 가져야겠다며 핵개발을 밀어붙여 결국 성공시킨 파키스탄의 부토(Zulfikar Ali Bhutto) 전 대통령처럼 영국 해군 역시 눈물겨운 집착으로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을 탄생시켰다. 한때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던 영국 해군이지만, 영국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시달리면서 영국 경제는 전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해군력에 더 이상 쏟아 부을 돈도 없었고, 많은 군함들이 해외로 팔리거나 폐기 처분되는 운명에 처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영국은 제국의 자존심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고, 그 자존심의 상징은 역시 항공모함이었다. 영국 해군 최후의 정규 항공모함이라 불렸던 아크 로열(HMS Ark Royal)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문되어 전후 건조가 취소될 뻔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950년 진수되어 1955년 취역한 5만 4천톤급 항공모함이었다. 이 항공모함은 미 해군의 대형 항공모함과 동일하게 증기 사출기로 항공기를 발진시키는 CTOL(Conventional Take-Off and Landing) 방식의 대형 항공모함이었고, 당시 최신・최강으로 평가되던 F-4K 전투기와 자국산 버캐니어(Buccaneer) 공격기 등 24대의 전투기와 4대의 가넷(Gannet AEW) 조기경보기, 9대의 씨킹(Sea King) 대잠헬기 등 40여 대의 함재기를 운용하던 강력한 항모였다. 영국은 극심한 재정 적자 속에서도 이 항공모함을 전력화하고, 약 20여 년간 유지했지만, 1978년 제2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경제 공황에 가까운 위기를 겪던 영국은 결국 1978년 이 항모를 퇴역시켰다.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마이너스 성장과 두 자릿수의 인플레이션, 그리고 극심한 재정적자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영국은 가난해도 제국의 자존심은 버릴 수 없었고, 궁여지책으로 경항공모함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인빈서블(Invincible)급 항공모함 3척을 건조해 실전에 배치했다. 배 이름은 ‘무적(Invincible)’이었지만, 2만톤의 작은 덩치에 수직이착륙 전투기를 운용하는 이 항공모함은 20여년 운용하다보니 한계점이 너무 많았고, 영국은 다음에는 무리를 좀 하더라도 미국처럼 대형 항공모함을 가져야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차세대 항공모함 사업에 착수했다. ▲만들고 보니 ‘반쪽짜리’ 7월 4일은 대영제국이 35년 만에 정규 항공모함을 갖게 된 날이었지만, 영국 언론들은 이 항공모함의 진수를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고 있다. BBC는 특집 보도를 통해 “2008년 계획 당시 2척 건조에 39억 파운드 정도의 예산이 들 것이라던 항공모함이 이제는 2척 건조에 62억 달러로 치솟았다”고 꼬집었다. 영국 정부는 극심한 재정위기로 인해 지난 2011년부터 영국군이 보유한 각종 무기들을 신형・구형 가릴 것 없이 ‘바겐세일’하고 있다. 4,200톤급 방공 구축함을 100만 파운드(약 17억원)에 내놓는가 하면 대당 1,800억 원 넘는 가격에 구매해 3년도 채 쓰지 않은 유로파이터 전투기를 반값에 내놓기도 했다. 전투기를 매각하면서 파일럿이 필요 없어지자 4년간 공들여 육성한 공군사관학교 생도 100명에게 이메일로 ‘해고’를 통보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언론들은 값비싼 대형 항공모함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며 항모 도입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지만, 영국 해군은 멀쩡한 다목적 구축함(Type 23)을 해외에 매각하고, 신형 방공 구축함(Type 45) 도입 계획을 대폭 축소하면서까지 항공모함은 반드시 도입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렇게 강력한 의지로 탄생한 항공모함은 스펙은 정말 화려하다. 길이 280m, 폭 73m에 72,000톤에 달하는 덩치를 자랑하는 거함(巨艦)이다. 롤스로이스가 자랑하는 신형 가스터빈 등 최신 동력 장치를 갖췄고, 항해용 아일랜드와 항공기 관제용 아일랜드를 독립해 설치하는 등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다. 함재기 역시 막강하다. 최신예 F-35B 전투기를 최대 40대까지 탑재하며, AW-101 대잠헬기 등 고가의 헬기들도 다수 탑재된다. 한때 미 해군의 정규 항공모함처럼 사출기를 장착해 CTOL 방식의 항공모함으로 건조되는 방안이 검토되었지만, 예산 문제로 취소되고, 스키 점프대를 운용하는 STOVL(Short Take Off and Vertical Landing) 항공모함으로 건조됐다. 그러나 화려한 모습은 여기까지다. 당초 2척이 건조되어 취역할 예정이었던 이 항공모함은 취역도 하기 전부터 반 토막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자매함으로 건조되고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HMS Prince of Wales)는 예산 부족으로 인해 건조 취소 또는 건조 후 해외매각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5조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대형 항공모함을 구매할 나라가 있겠냐는 여론에 건조 취소가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함재기 역시 반 토막 났다. 당초 영국은 올해까지 36대의 F-35B 전투기 구매 계약을 체결했어야 했지만, 현재까지 영국에 인도된 F-35B 전투기는 3대에 불과하며, 확정된 구매 예산은 14대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영국 정부의 재정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F-35B의 가격은 어지간한 호위함 1척 가격 수준을 넘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며, 천문학적인 유지비가 들어갈 이 항공모함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해군은 모든 것을 버려 가며 전력을 쏟아 부어 35년 만에 꿈에 그리던 대형 항공모함을, 그것도 찬란했던 대영제국을 건설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딴 최첨단 항공모함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 항공모함은 취역도 하기 전에 적의 어뢰나 미사일보다 더 무서운 ‘예산 부족’이라는 위협에 침몰할 위기에 내몰리게 됐다. 이일우 군사 전문 통신원 finmil@nate.com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데스크 시각] 정도전과 어느 총리 후보자/김경운 정책뉴스부장

    [데스크 시각] 정도전과 어느 총리 후보자/김경운 정책뉴스부장

    “삼봉이 생각하는 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태조 이성계) “듣는 것이옵니다.” “참는 것이옵고 품는 것이옵니다.”(삼봉 정도전) 요즘 TV 대하사극 ‘정도전’이 인기를 끄는 데에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명대사도 한몫한다. 곱씹을수록 절묘하고, 또 지금 현실 정치를 빗댄 것 같기도 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도전이 꿈꿨던 조선은 백성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민주적 복지국가였다. 그런 조선의 건국을 민본대업(民本大業)이라고 했다. 권력과 부를 모두 거머쥔 족당들의 수탈 아래서 노비에 가깝던 농민들은 조선에 이르러 비로소 제 땅을 갈고 천하의 근본으로 대접받았다. 출산한 관비의 남편도 육아휴직을 보장받은 곳이 조선이다. 당시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시대를 앞선 이상국가, 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느릿느릿 쟁기질을 하고, 아무 때나 흥얼거리는 구한말 농부의 모습이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에게는 게으른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어린 아이들마저 공장에 나와 값싼 노동력을 보태야 했던 산업혁명기의 본국과 비교하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동양의 낯선 나라에 점차 애정을 느꼈고 돌아갈 땐 아쉬움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요새 입에 오르내리는 국무총리 후보자는 정도전의 앞선 조선을, 비숍 여사의 다정한 조선을 애써 폄하하는 데 열을 올렸던 모양이다. 구한말에 우왕좌왕하다가 일제강점을 맞은 사실이 분하고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낯익은 교인들에게 한 것이라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뭐가 있다. 일관된 논리로 우리 역사에 대해 자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조선을 헐뜯고 싶었던 세력은 아마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16~17세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시대를 열면서 조선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즉 수도를 신도시 도쿄로 옮긴 뒤 군사정권의 특성대로 산업과 상업을 중시하며 국력 양성에 매진한다. 이 과정에선 민본 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달을 때도 여유를 부리던 조선은 기계문명 중심인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만다. 당시 일본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게으른 나라를 산업화로 구제한 것이라는 식민사관을 필요로 했다. 여기에는 어느 한 시기에 개방화, 산업화, 군사화 등이 뒤처졌다고 조선의 가치를 통째로 무시하는 태도가 담겼다. 총리 후보자가 말하는 ‘게으르고 남(일본)한테 신세나 지는 우리 민족의 DNA’에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구석이 엿보인다. 역사시대 이래 세계 문명의 흔적은 거의 예외 없이 반도에서 열도로 넘어갔다. 이는 반도인들의 DNA가 더 우수해서가 아니고, 열도인들의 그것이 열성이어서도 아니다. 신문명이 세계 대륙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흘러드는 과정일 것이다. 하물며 근세기에 얼마간 열도의 기술력이 반도를 앞질렀을 뿐인데, 이를 두고 DNA까지 운운하는 것은 기어코 역사인식을 의심받을 만하다. 더욱이 할 말이 없는 게 ‘일본군 위안부 배상 요구는 떼쓰기’라는 말이 피해 할머니들을 울렸고, ‘욕망의 땅 세종시’가 충청인들을 뿔 나게 했으며 끝내 ‘표현을 잘하지 못해서’라는 해명은 표현도 직업 기술인 후배 기자들을 속 터지게 했다. 정승감으로서 민심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것 같다. 김경운 정책뉴스부장 kkwoon@seoul.co.kr
  • [시론] 인사는 만사, 그러나 망사가 될 수도/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시론] 인사는 만사, 그러나 망사가 될 수도/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원광대 초빙교수

    국무총리 인선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지난 며칠 동안 국력 낭비가 심했다. 오늘 총리 임명 동의요청서가 국회에 제출되면 앞으로 20일 이내에 가부간 결론이 나게 된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문창극 후보자의 국회 청문회 통과를 밀어붙일 계획인 것 같고 새정치민주연합을 비롯한 야당은 문 후보자를 낙마시키려고 한다.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도 입장이 180도 다르다. 이렇게 편이 갈려 있기 때문에 앞으로 20일 동안 총리 인선 관련 기사가 언론을 도배할 것이다. 문 후보자가 정부 여당의 뜻대로 총리에 취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야당의 계획대로 결국 낙마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정치의 세계에서 하루는 보통사람의 일생보다 긴 시간이라는데, 앞으로 20일 동안에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가 없고, 핫(hot) 이슈도, 그보다 더 ‘핫’한 이슈가 터지면 우선순위가 밀리면서 대충 다뤄지고 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당의 목표와 야당의 전략을 밀어 낼 만큼 엄중한 대형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면 여야 간의 공방은 계속될 것이고, 그만큼 국력은 낭비된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이 고심 끝에 문 후보자를 골랐는지 신임이 높은 측근이 제시한 안을 그대로 수용했는지 필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안다. 이렇게 온 국민의 여론을 양분시키고, 또 시끄럽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설사 총리가 된들 그분이 제대로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우선 야당이 국회 안에서 사사건건 총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도 거리에서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저항과 반대가 일과성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속성을 가질 것이고 호소력도 있을 것이다. 국가 지도급 인사로서 문 후보자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절대 다수의 국민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직 인사는 출범 초기부터 유난히 험난했다. 집권 초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낙마,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해프닝,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자진 사퇴, 이번 문 후보자 관련 논란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정책이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인사가 만사(萬事)라는 말도 있고 인사가 망사(亡事)라는 말도 있다. 인사를 잘하면 만사가 잘 풀리지만 인사를 잘 못하면 만사를 망친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과 측근들에게 인사와 관련된 고사(故事)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정치를 잘했다 해서 명군 중의 명군으로 꼽히는 당태종이 ‘정관(貞觀)의 치(治)’로 칭송받는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 태종은 황제 후계권을 놓고 형과 경쟁해서 이겼다. 그런데 집권 후 경쟁과정에서 형의 편에 서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위징(魏徵·580~643)을 직접 만나보고는 그를 간의대부로 중용하고 재상으로까지 승진시켰다.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보다 그의 식견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당 태종이 위징에게 제왕은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를 묻자 위징은 삼경훈(三鏡訓), 즉 동경(銅鏡), 사경(史鏡) 그리고 인경(人鏡)을 말했다. 세 개의 거울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동경은 매일 아침 자기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사경은 역사 공부를 통해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잡아 나가라는 뜻이다. 마지막 인경은 사람을 알아보고 골라서 쓰는 거울이다. 문 후보자는 이 세 가지 거울 중 두 번째 ‘사경’과 관련해서 논란의 대상이 돼 있고, 박 대통령은 ‘인경’과 관련해서 의문의 대상이 돼 있다. 역사관과 국가관이 많은 국민들과 다르면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총리로서 국민들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총리에게 국정 개혁을 맡겨도 될지 박 대통령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지금부터라도 삼경훈을 마음에 새기고, 인사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 나가기 바란다.
  • 野 “朴대통령 눈물에 속았다” 與 “청문회 거부, 국회 책무 포기”

    역사관 논란에 휩싸인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사과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야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정부의 문 후보자 임명동의안 국회 제출을 하루 앞둔 16일 문 후보자에 대한 감싸기를 고수하며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한 검증을 거듭 강조했다. 이와 함께 당내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 후보자 사퇴 촉구 목소리가 자중지란으로 비치지 않도록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박근혜 대통령이 흘린 눈물에 국민이 속았다”며 문 후보자의 자진 사퇴 또는 지명 철회를 촉구하는 등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면서도 당내에서는 7·30 재·보궐선거를 감안하면 ‘문창극 이슈’를 끌고 가면서 인사청문회 절차를 밟아도 나쁠 것 없다는 기류가 흐른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거두절미하고 후보자의 적격, 부적격 판단을 내리는 공식 절차가 바로 청문회이며 법에 보장된 절차가 지켜지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라면서 “그 과정에서 적격, 부적격 여부는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현 사무총장도 “국회 청문회 절차는 글자 그대로 듣고 묻는 것인데, 야당 대표는 듣지도 묻지도 않고 임명동의안 제출을 하지 말라고 한다”며 “야당이 청문회를 거부하면 국회 스스로의 책무를 포기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이 원내대표는 문 후보자에 대한 반감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새누리당 초선 의원 모임인 ‘초정회’와 점심을 함께하며 여파 단속에 나섰다. 앞서 문 후보자 사퇴 촉구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초선 의원 6명 가운데 1명은 당 지도부의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내 문 후보자 사퇴 촉구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친이(친이명박)계 좌장이던 이재오 의원은 당 지도부를 향해 “고집부릴 일이 아니다”라며 정면으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옛 중국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바른 소리로 간언하는 것을 잘 들어 나라를 창성했다”면서 “지금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니다. 국민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접어 가고 있다”고 썼다. 한편 김한길 새정치연합 공동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여권의 문 후보자 임명 강행 움직임에 대해 “참으로 엉뚱한 국무총리 후보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국민 정서와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고, 헌법 정신에 반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김 대표는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흘렸던 눈물을 스스로 배반하는 일이고, 대통령 눈물의 진정성을 믿었던 국민을 또 한번 배신하는 일”이라며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 때문에 자리를 비운 박 대통령을 정조준했다. 안철수 공동대표 역시 문 후보자에 대해 “본인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것이 더 이상 국민들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국제적 망신을 피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박영선 원내대표도 “일본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을 총리를 시키겠다는 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박근혜 정권은 아직도 식민사관의 연장에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 인사청문특위 위원장에 내정된 박지원 의원은 이날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문 후보자는) 재·보선을 앞두고 여당에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며 “식민사관을 가진 총리 후보는 결국엔 청문회 통과를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문 후보자가 사퇴 요구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야당에 가서 물어보라”는 발언을 한 것과 관련, “(야당의 대답은) 사퇴하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英 75년 잉꼬커플의 비결은…‘부부싸움과 으~리’

    英 75년 잉꼬커플의 비결은…‘부부싸움과 으~리’

    영국 내 최장수 노부부가 75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잦은 부부싸움’과 이러한 작은 갈등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져지는 ‘의리’라고 밝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영국 최장수 잉꼬부부로 알려진 조셉 리틀우드(98), 셀리 리틀우드(99)의 75년 해로 사연을 9일(현지시간) 소개했다. 현재 영국 북서부 그레이터맨체스터 주(州) 채더튼에 거주하고 있는 리틀우드 부부가 처음 만난 건 81년 전인, 1933년 한 댄스파티에서였다. 당시 영국 국왕은 조지 5세였고 독일에서는 이제 막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했으며 미국에서는 오리지널 킹콩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당시 금융회사 사원이었던 남편 조셉과 제분소 여공이었던 아내 셀리는 천천히 사랑을 쌓은 끝에 1939년 지역 가톨릭교회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하지만 신혼의 단 꿈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남편인 조셉이 군대에 징집되었던 것. 연합군 소속으로 북아프리카에 파견돼 이집트 카이로 등지에서 적군 폭격기의 항공 고도계측을 관찰하는 레이더 병으로 복무하게 된 조셉은 1945년 종전까지 아내를 볼 수 없었다. 리틀우드 부부는 신혼 직후 약 6년간을 헤어져 지냈는데 그들은 전쟁터를 넘나드는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조셉은 셀리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이들 부부는 75년 간 변함없는 애정을 과시하며 영국 내 최장수 잉꼬부부로 유명세를 타게 됐는데 최근 이혼과 별거가 흔해진 젊은 부부들과 비교하면 독보적이다. 이들이 밝히는 75년 해로비결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비법은 ‘잦은 부부싸움’이다. 언뜻 들으면 잘 이해되지 않지만 설명을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인인 셀리 리틀우드는 “서로 모르던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게 되면 사소한 부분부터 큰 부분까지 마찰이 발생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 마다 말다툼을 하면서 서로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여기서 말하는 다툼은 단순한 부부싸움이 아니라 평소에 몰랐던 서로의 불만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부부싸움 주제를 1가지에 국한하지 말고 여러 가지 주제로 옮기며 하다보면 어느 새 부부가 서로를 깊게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부부만의 ‘의리’와 ‘정’이 쌓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결혼 75주년 기념식을 가진 리틀우드 부부는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젊은 부부들이 안타깝다는 견해를 밝히며 “쉽게 쌓은 벽돌은 쉽게 무너진다. 우리는 8년이 넘게 연애한 뒤, 결혼 직후에도 6년을 떨어져 지내며 사랑을 키웠다. 인내심을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한편, 리틀우드 부부는 100세를 눈앞에 둔 최근에도 사소한 말다툼을 자주한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자녀들은 “저게 부모님만의 사랑방식”이라며 “두 분의 인생은 누가 봐도 멋지다. 마치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사진=데일리메일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