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왕실 사면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고령농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미중 협상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임기진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9
  • 잉락 泰총리 “의회 해산 조기 총선 신속히 실시”

    잉락 泰총리 “의회 해산 조기 총선 신속히 실시”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에 따른 정국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잉락 친나왓 총리가 9일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잉락 총리는 이날 TV를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정치적 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하원 의회를 해산하고 이른 시일 안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성명에서 “다양한 의견을 청취한 뒤 왕실에 의회 해산령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면서 “민주주의에 따라 새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고 밝혔다. 잉락 총리는 총선 시기에 대해서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상의해 최대한 신속하게 선거일을 정하겠다”고 언급했다. 내각은 이날 총선일을 내년 2월 2일로 잠정 결정했으나, 이를 최종 확정하려면 선거위원회가 승인해야 한다. 태국에서는 현 정부와 여당이 잉락 총리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염두에 둔 포괄적 사면 법안을 처리하려다 역풍을 맞아 지난달 초부터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야권은 의회 해산 선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잉락 총리와 탁신 전 총리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수텝 트악수반 전 부총리는 “총선이 시행돼도 탁신 정권은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이라면서 “우리의 목표는 탁신 정권을 뿌리 뽑는 것이다. 싸움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열린세상] 정치적 혼란과 위기에 공감하기/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정치적 혼란과 위기에 공감하기/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격동의 2013년이 끝나 가는 즈음, 지구촌 정치판은 여전히 시끄럽다. ‘아랍의 봄’ 물결이 지구촌을 뒤흔든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태국과 우크라이나가 뜨거운 정치적 격랑에 휩싸여 있다. 태국에서는 최초의 여성 총리 잉락 친나왓 정부가 반대 세력의 거센 반정부운동에 직면해 있고,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대외정책에 관한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두 나라 모두 거리 시위가 격화되면서 정권의 안위가 위협받고 있다. 내막이야 서로 다르겠지만 두 나라 사정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외견상으로는 두 나라 내에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태국에서는 잉락 정부가 추진해 온 국가화합법안과 헌법개정안에 대한 야당과 반대세력들의 거부 움직임이 이번 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이 좌초되면서 현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둘러싼 의견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지만,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근원은 늘 정책이 아니라 정치에서 유래한다. 태국 정부의 국가화합법안은 2006년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후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해외로 도피한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위한 전초전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태국 현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헌법개정안도 반대 세력에게 시빗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입헌군주제의 틀을 수정하여 왕실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고, 군부의 면책특권을 제거하면서 정당에 대한 정치적 제약을 누그러뜨리려는 개헌 시도는 태국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왔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010년 대선 당시 현 대통령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야당지도자 율리아 티모셴코가 부패혐의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다. 2005년 이후 두 차례나 총리직을 맡았던 티모셴코는 문호개방을 통해 러시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바람을 위해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 모색해 왔다. 이런 노력이 현 정부에 들어와 틀어지면서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망명 중인 탁신과 복역 중인 티모셴코의 그림자가 두 나라의 정치적 혼란의 핵심에 어른거리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민주주의 초년병으로서 두 나라가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국가나 외부의 분위기 역시 이들 국가의 정치적 불안정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미국은 탁신정권 당시의 태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해 왔고, 이후 탁신 세력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잉락의 정치적 승리를 적극 환영했다. 미국으로서는 동남아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산을 저지하는 데 있어 태국이라는 중요한 포스트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주변 국가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일찌감치 동방동반자계획을 통해 구공산권 국가들을 끌어안으려는 구상을 펼쳐 왔다. 이에 대응하여 러시아는 주변 국가들을 포함하는 경제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데, 러시아 다음으로 규모가 큰 우크라이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압박과 회유를 반복해 왔다. 단순한 경제통합의 이슈를 넘어 정치적·전략적 세력권 다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한 나라의 민주화나 경제발전 등 대내적인 문제가 자국 국민들의 뜨거운 열정만으로 해결되기는 어렵다.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발목을 잡고, 주위의 견제와 시비가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만큼 역사의 경로 의존성과 강대국들의 이해 다툼은 작은 나라들이 극복해야 할 힘겨운 과제다. 태국과 우크라이나 두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회갈등 현상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만은 아닐 게다. 헌법과 의회라는 정치제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시민사회운동이 거리로 확산되는 지금, 태국과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걱정한다면 과연 기우일까.
  • 불황속 ‘나만의 작은 사치’… 프리미엄 향수 인기몰이

    불황속 ‘나만의 작은 사치’… 프리미엄 향수 인기몰이

    ‘로케팅’(rocketing)은 일상적으로 쓰는 물품은 저렴한 것으로 사면서 자신이 가치를 두는 특정 제품에는 큰돈을 쓰는 소비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2002년 낸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됐다. 이를 연구한 존 버트먼은 “로케팅은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경제상황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때 기쁨을 줄 수 있는 상품을 소비하며 위로를 얻는다”라고 정의했다. 불황에 지갑이 얇아지면 다른 소비는 줄이고 한두 가지 품목으로 사치를 즐긴다는 얘기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고급 향수의 인기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나만의 향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한 병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프리미엄 향수 시장이 커지고 있다. 수입화장품의 백화점 매출이 떨어지는 반면, 고급 향수 매출은 매년 큰 폭으로 늘고 있다. 15일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1~7월 고급 향수 매출은 지난해 동기 대비 100.3% 증가했다. 향수 매출 증가율은 2011년 65.6%, 지난해 92.7%로 꾸준한 성장세다. 화장품의 매출 증가 폭이 2011년 17.6%, 지난해 4.8%, 올 들어 2.6%로 매년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가격이 10만~50만원대로 일반 향수보다 최대 10배 이상 비싼 프리미엄 향수가 잘 팔리는 이유는 뭘까.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작은 사치’라고 설명한다. 수백만원짜리 명품 백은 아니지만 비교적 적은 돈으로 명품을 소비한다는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조말론, 딥티크, 아닉구탈, 바이레도, 크리드, 아쿠아디파르마 등 프리미엄 향수 브랜드는 전문 조향사를 두고 꽃, 아보카도 오일, 송진, 계피, 소금 등 40~50종의 천연 원료를 조합해 직접 수제 향수를 만든다. 합성 향료를 사용하는 일반 향수와 달리 독특하고 풍부한 향을 낸다는 평을 받는다. 프리미엄 향수는 니콜 키드먼, 시에나 밀러 등 해외 유명 연예인을 비롯해 이효리, 고현정, 서인영 등 국내 패셔니스타들이 애용한다고 알려지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9월 영국 향수 조말론의 매장을 본점과 강남점에 열었는데, 일부 상품은 사려면 5~6개월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갤러리아 명품관은 지난해 가을 매장 개편에서 프리미엄 향수를 강화했다. 영국 왕실이 인증한 향수인 펜할리곤스의 단독 매장을 시작으로 샤넬, 디오르, 아르마니 등 향수 전문매장을 8개로 늘렸다. 향기를 즐기는 소비자를 중심으로 향초와 막대형 방향제인 디퓨저 등의 판매도 급격히 느는 추세다. 온라인쇼핑몰 G마켓에서는 지난달 천연 콩기름으로 만든 소이캔들과 인기 향초 브랜드 양키캔들의 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이 각각 687%와 115% 증가했다. G마켓 관계자는 “우드윅의 갤러리캔들처럼 천연 나무 심지를 쓰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인테리어 효과까지 내는 향초가 반응이 좋다”고 전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한산모시·나전칠기 스타들마저… 웬만해선 그들을 살릴 수 없다?

    [주말 인사이드] 한산모시·나전칠기 스타들마저… 웬만해선 그들을 살릴 수 없다?

    독일 ‘쌍둥이칼’은 280년 전 군인용 단검을 만들던 대장장이 마을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출발했다. 산업혁명 때 민수용으로 전환했다. 오롯한 장인 정신에 생산환경 변화에 맞춰 디자인과 기술 개발이 덧칠됐다.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료시카’는 120여년의 역사를 뽐낸다. 일본 목각인형에 착안했다. 예술가들이 수작업으로 만들면서 러시아 상징 민예품이 됐다.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명품이나 한 나라의 상징물로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제품들은 가내수공업에서 출발했다. 보잘것없는 규모로 출발했을 가내수공업이 전통의 두께를 더하고, 현대 감각에 맞게 발전하면서 세상 사람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최고 명품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국내 전통 가내수공업은 딴판이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수공업 제품조차 ‘몰락’했다고 할 만하다. ‘화문석’을 전문적으로 다루던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강화토산품판매장이 몇해 전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재래 돗자리 중 최고급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찾는 사람이 드물어서다. 화문석체험장을 운영하는 고미경(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씨는 “예전에는 강화 5일장에 화문석시장이 따로 마련됐는데 줄어든 거래량 탓에 아예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1880년대 강화 일대에는 화문석 재료인 왕골 재배 농가가 1000여 가구나 됐으나 지금은 고작 100가구 남짓이다. 그나마 가구당 재배 면적은 330~660㎡뿐이다. 대개 부업에 그치고 송해·양사면 일부 가구에서 주문을 받아 연간 2000~3000장 짜는 정도다. 1970년대 강화에서만 연간 5만여장이 생산됐는데 말이다. 39년간 수도 역할을 한 고려 중엽 왕실에까지 공급했던 화문석이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것이다. 화문석의 몰락은 1980년대 이후 주거 형태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카펫이 대세를 이룬 탓이다. 전북 전주 부채도 에어컨과 선풍기에 자리를 내줬다. 부채는 일부 무형문화재들이 소량 생산하고 있다. 양반들은 합죽선, 서민들은 태극선을 무더위를 날리는 필수품으로 삼았지만 이젠 장식품, 소장품, 선물용으로 나가는 정도다. 반면 제작 과정은 복잡해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 최공호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우리나라 전통 가내수공업은 원형만 고집하고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산업화가 자신의 역사인 외국에선 가내수공업도 자연스럽게 진화했지만 우리는 새것을 급히 받아들이면서 전통 수공업을 버리다시피 한 게 큰 이유다. 외국인들이 선뜻 구입할 수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전통 제품이 없는 게 아쉽다. 관련 통계조차 없다”고 말했다. 한때 1만 4000가구에 이르던 전남 보성삼베 제작 농가는 10가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원료인 대마 생산량은 2004년 40t(30㏊)에서 2011년 7.1t(4.3㏊)으로 줄더니 올해 5농가에서 겨우 2㏊를 재배한다. 보성삼베 영농조합 이찬식(70) 대표는 “36년째 종사하는데 너무 힘들고 일손도 부족해 버티기 힘들다”면서 “삼베를 찾는 사람은 많지만 값싼 중국산이 들어오고, 일당이 5만원도 안돼 일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소연했다. 전남 담양 죽세품의 명성도 옛날얘기다. 대나무공예 명인 9명, 준명인 4명, 무형문화재 6명과 일부 농가에서 만들지만 31개 판매 업소에서도 중국산을 팔 정도로 위상은 초라하다. 경기 안성 유기는 현재 3곳만 가족 공방을 운영 중이고, 경북 안동포는 100여명이 삼베를 짜고 있으나 예전에 비하면 형편이 없다. 권구찬 안동시 주무관은 “삼에서 실을 만드는 삼삼기가 삼베 짜기의 95%를 차지하는데 기계화가 안 돼 있다”면서 “그렇다 보니 값이 비싸 일부 부유층의 옷과 침구 등으로만 만들어지고 청바지 등 현대 의류 제작은 엄두도 못 낸다. 정부가 기계 개발에 나서지 않으면 안동포 부활은 꿈도 못 꾼다”고 내다봤다. 명성이 덜한 가내수공업은 더 쪼그라들었다. 충남 서천군 서천읍 삼산리 고살메마을의 ‘갈꽃비’가 그 예다. 한때 농한기 최고 농가소득원이었던 이 빗자루가 청소기와 플라스틱 빗자루에 밀린 것이다. 농촌 고령화도 한몫했다. 갈꽃의 부드러움으로 자잘한 먼지까지 쓸어 내는 장점이 있지만 지금은 10명 남짓한 주민이 해마다 3000자루를 만든다.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장식용으로 많이 팔린다. 이장 한병우(51)씨는 “겨울이면 마을회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꽃을 피우면서 빗자루를 만들던 옛날 모습이 생생하다”면서 “요즘은 강원 철원 등에서 조금씩 갈대를 사와 빗자루를 만들지만 이마저 머잖아 사라질 판”이라고 전했다. 최 교수는 “스위스는 한 마을 전체가 가위만 만들어 유명해졌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유리공예, 일본은 도자기 마을을 상품화해 외국 관광객을 끌어모은다”면서 “우리 가내수공업은 외국인 특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생산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미숙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독특하고 개성 있는 최고 명품은 수공업에서 태어난다. 우리도 잠재력이 충분하다”며 나전칠기가 명함 케이스 등으로 상품을 다각화하는 것에 주목했다. 충남 서천 한산모시도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150년간 양반들 바지저고리를 만들던 데서 벗어나 청바지, 와이셔츠, 팬티, 양말 등 현대 제품까지 제작한다.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고 브랜드화해 모시떡과 모시막걸리 등 먹거리까지 제품을 확대했다. 모시풀 재배 농가도 지난해 150곳에서 올해 190곳으로 늘었다. 2005년 서천군이 한산모시세계화사업단을 만들어 지원한 뒤 모시 제품이 다양하게 개발돼 팔리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돈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연간 소득은 20억원으로 늘었고, 고용 33명 등 부수 효과도 생겼다. 김맹선 군 한산모시계장은 “아직 해외 지명도가 낮지만 현대 감각에 맞게 상품을 개발하고 고급화해 부유층이 찾다 보면 외국에서도 알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농업과학원 정명철 박사는 “(전통 가내수공업은) 지금 없어지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많이 사라졌다. 정부와 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야 부활을 꿈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천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강화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보성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탁신 아바타’ 이미지 벗고 반대세력 포용 과제

    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태국의 잉락 친나왓은 ‘탁신-반(反)탁신’으로 찢긴 사회의 통합과 불안정 해소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무엇보다 잉락 당선자는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아바타’, ‘꼭두각시’라는 비난 속에서 왕실·군부·중산층으로 대변되는 반탁신 세력과의 타협과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4일 푸어타이당의 잉락 당선자는 찻 타이 파타나당과 찻 파나타 푸어판딘당, 팔랑촌당, 마하촌당 등 4개 군소 정당 지도자들과 만나 연립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의회 전체 의석 500석 가운데 60%에 이르는 299석을 확보, 안정적인 주도권을 쥐게 됐다. ●4개 군소정당과 연정… 299석 확보 이번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 전 총리와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의 잉락 모두 국가 통합을 선결과제로 내놓았다. ‘다행스럽게’ 5년 전 탁신을 쫓아내는 등 태국 정치에 개입해 온 군부가 또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우려는 어느 정도 완화됐다. 4일 프라윗 옹수완 국방장관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군부는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면서 “국민들이 뜻을 확고히 했기 때문에 군대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며 쿠데타 가능성을 일축했다. 2006년 쿠데타를 주도했던 전직 육군 참모총장 손티 분야랏글린도 방콕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대중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쿠데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잉락 당선자가 오빠 탁신의 관심사를 공격적으로 요구하지만 않으면, 군대도 푸어타이당 정권과 공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고비는 탁신의 귀국 및 정계 복귀 문제다. 태국 엘리트층, 즉 반탁신 세력은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에 망명 중인 탁신이 돌아올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엘리트층은 탁신을 포퓰리스트이자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또 그가 입헌군주제를 공화정으로 전복시킬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가 귀국하거나 죄를 사면받으면 차기 정부와 군부와의 관계 단절은 물론 친탁신-반탁신 간 대결과 시위 촉발이 불가피할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탁신 전 총리의 귀국이 국론 분열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우려다. 탁신과 푸어타이당 측은 “쿠데타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정부가 지난해 방콕을 봉쇄한 레드셔츠(친탁신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킨 군 장군 등에 대한 사법 절차 등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어 군과 집권당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 같은 기득권 세력의 우려를 어떻게 다독일 것인지가 새 정부의 주요 과제다.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동남아 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은 일단 선거 결과를 존중하면서 군부의 자제를 주문하고 있다. 한편 푸어타이당의 압승에 이어 연정 구성 소식에 시장은 일단 반색했다. 4일 태국의 SET지수는 전날보다 4.7%가까이 급등한 1090.28로 장을 마감했다. 경제전문가들도 태국 경제의 중단기적인 ‘맑음’을 점쳤다. 푸어타이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일단 정치적인 불확실성과 불안정이 해소될 것으로 본 것이다. WSJ에 따르면 홍콩 크레디트 에그리콜 CIB의 프란시스 청은 “태국 국민의 다수를 대변하는 푸어타이당의 승리는 (시장의) 환영을 받고 있고, 떠났던 외국 투자자들이 이른 시일 내에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태국 증시가 하반기 들어 최대 19%가량 반등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증시 하반기 최대 19% 반등 전망 국내적으로도 총선 이후 새 정부가 공약 이행을 위해 지출을 늘리게 되고 시중에 돈이 돌아 증시도 강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총선 이후 새 정부가 선심성 공약을 이행하면 태국 경제에 현금이 풍부해질 것”이란 분석이다. 푸어타이당은 물론 집권 민주당도 총선을 앞두고 경제 성장을 위해 지출을 늘리겠다고 공언해 왔다. 하지만 2002~2006년 탁신 집권 당시 연평균 5.7%의 경제성장을 이뤘으나 가계부채는 급증하고 빈부 간 소득 격차도 제자리걸음에 그쳤음을 비춰볼 때 낙관은 금물이다. 일본 고쿠사이 자산운영의 다카히데 이리무라는 “푸어타이당의 승리가 정치 불안정을 완전히 씻어낸 것은 아니며 이 점을 투자자들은 잊지 않고 있다.”며 “향후 새 정부의 정치적 타협과 통합정책 여부가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석우·정서린기자 jun88@seoul.co.kr
  • 태국 정권교체… 도망자 탁신 “적당한 때 귀국”

    태국 정권교체… 도망자 탁신 “적당한 때 귀국”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망명길에 오른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의 막내 여동생 잉락 친나왓(44)이 이끄는 푸어타이당이 3일(현지시간)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에 따라 잉락 친나왓은 정권 교체와 함께 태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르게 됐다.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탁신 전 총리도 조만간 입국, 정치 일선에 복귀해 사실상 막후 정치를 펼칠 전망이다. 그러나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태국 군부 내 일부 세력의 반발로 제2의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다 ‘레드셔츠’(탁신 지지 세력)와 ‘옐로셔츠’(탁신 반대 세력)로 대표되는 태국 내 계층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태국 정국은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전국 9만 800여개 투표소에서 실시된 태국 국회의원 총선 결과 선출직 의원 375명과 비례대표 의원 125명 등 전체 500개 의석 가운데 제1야당인 푸어타이당이 과반 의석을 웃도는 263석을 차지한 것으로 태국 선관위 잠정 집계 결과 드러났다. 반면 민주당은 161석을 얻는 데 그쳤다. 푸어타이당은 이날 총선을 통해 과반 의석을 차지함에 따라 군소정당과의 연대 없이 독자적으로 정부를 꾸릴 수 있게 됐다. 잉락은 출구 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총선 승리가 확실시되자 취재진에게 “이 결과를 나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시민들이 나에게 기회를 줬고 나는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웨차치와 총리도 총선 패배를 인정하며 잉락의 승리를 축하했다. 투표 직후 실시된 출구조사에서 푸어타이당이 압승한 것으로 나타나자 두바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탁신 전 총리는 잉락에게 전화를 걸어 총선 승리를 축하했다. 탁신 전 총리는 “민심은 화해를 원했다. 푸어타이당은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귀국을 희망하지만 태국 사회에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만큼 서둘러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축출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뒤 주로 두바이에 머물러 왔다. 탁신의 ‘클론’(복제 인간)으로 불리는 잉락은 오빠의 후광에 더해 수려한 외모와 빼어난 말솜씨, 똑똑한 이미지와 다듬어진 매너 등 인간적 매력을 앞세워 표심을 사로잡았다. 특히, 탁신의 전통적 지지층인 도시 빈민과 농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왕실과 군부, 엘리트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집권 민주당은 부패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선고된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건 푸어타이당을 비판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정치 신인’의 거센 바람몰이에 끝내 무릎을 꿇었다. 투표율이 75%에 이른 것으로 예상된 가운데 태국의 이번 조기 총선은 경찰 18만 3000명이 투입돼 삼엄한 경계를 펼친 덕에 큰 불상사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최남단 나라티왓주에서 총선 투표함을 수송하던 트럭이 무장 괴한으로부터 총기 공격을 받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도 보였다. 한편 ‘푸어타이당이 승리하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프라윗 옹수완 태국 국방장관은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군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며 쿠데타설을 일축했다. 푸어타이당의 압도적 승리 속에 총선이 큰 충돌 없이 끝났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잠복해 있다. 전문가들은 태국 내 빈부계층 간, 정치세력 간 갈등의 골이 워낙 깊어 정정불안이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푸어타이당이 현재 30%인 법인세를 2년 뒤 20%로 낮추고 학교에 입학하는 80만명의 학생에게 태블릿PC를 주기로 하는 등 선심성 공약을 쏟아낸 탓에 이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태국에 첫 여성총리 탄생…탁신 전 총리 여동생 잉락 친나왓 승리

    태국에 첫 여성총리 탄생…탁신 전 총리 여동생 잉락 친나왓 승리

     태국의 제1야당 푸어타이당이 3일 실시된 조기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획득, 푸어타이당의 총리 후보인 잉락 친나왓(44)이 태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등극하게 됐다. 잉락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해외로 도피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이다.  그녀는 정계에 입문한 지 불과 한 달 반만에 정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르며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푸어타이당은 해외도피 이후에도 도시 빈민층과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탁신 전 총리의 지지층의 흡수를 위해 잉락을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잉락은 태국 치앙마이 대학에서 정치·행정학부를 졸업, 미국 켄터키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탁신 일가와 연계된 기업에서 일해 왔다. 기업가인 아누손 아몬찻 사이에 아들 1명을 두고 있지만 혼인 신고는 하지는 않았다.  잉락은 모델 뺨치는 외모와 우아하고 겸손한 태도로 선거기간 내내 유권자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잉락은 ‘탁신 전 총리의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선거 기간에 탁신 전 총리 등 정치범을 사면하겠다고 밝혀 앞으로 군부와 왕실, 엘리트층 등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한편 탁신 전 총리는 푸어타이당이 집권하면 오는 12월말쯤 딸 잉릭의 결혼식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겠다고 밝혔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서울광장]피맛골 백자와 바돌로뮤의 한옥/김성호 논설위원

    [서울광장]피맛골 백자와 바돌로뮤의 한옥/김성호 논설위원

    ‘피맛골에서 최상급 조선백자가 출토됐다.’ 지난주 불쑥 전해진 피맛골의 백자 발굴소식. 재개발이 한창인 피맛골 청진동에 조선초기 보물급의 희귀 순백자 항아리 3점이라니. 고고학 발굴서 보물급의 백자를 수습하기란 아주 드문 일일 터. 그것도 예상치 않은 엉뚱한 곳에서 왕실의례용 고급 자기가 모습을 드러낸 연유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림은 괜한 게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종로 일대 고관대작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드나들던 피맛골. 큰 길 양쪽의 좁은 골목길이 자연스럽게 서민들의 공간으로 형성된 채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서민의 골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백자는? “후대인이 소장하다가 급하게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발굴팀의 설명.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황급히 묻었을까. 발굴 자체보다 지켜내기 위한, 누군가의 절박한 몸짓에 신경이 쏠린다. 빌딩 올려세우기가 한창인 서민의 거리에서 500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자. 사라져 가는 것들의 가치를 ‘지켜내라.’는 소리없는 외침으로 들림은 왜일까. 지난주 피맛골 백자 출현과 함께 전해진 동소문동의 한옥 지킴이 소식 역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울림이 아닐까. 재개발이 한창인 지역에서 철거될 뻔한 한옥 43채를 살려낸 미국인 바돌로뮤씨.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35년째 동소문동 한옥에 몸담아 살며 한옥이 들어있는 동소문동 재개발 취소소송을 낸 지 3년만에 결국 취소 판결을 끌어냈다고 한다. 경제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채 스러져 가는 우리 것들을 못 본 척 지나치는 세상. ‘한옥을 살려내야 한다.’는 한 외국인의 힘겨운 싸움을 향해 많은 이들이 보내는 박수에 씁쓸함이 묻어나는 건 왜일까. 피맛골에서의 백자 출토와 동소문동 한옥 지킴이의 소식에 얹어 멀지않은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을 떠올려 본다. 원래 고종이 황제 자리에 오른 뒤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한다.’는 통합의 뜻을 담은 핵심공간으로 일궜다는 서울광장의 유래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덕수궁 대한문을 중심점으로 해서 방사선형 도로를 닦아 이룬 서울광장. 고종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울광장은 현대사를 관통하며 분열과 갈등의 공간에 치우쳐온 파란의 궤적을 담고 있다. 3·1운동, 4·19혁명, 한일회담 반대시위, 6월 민주화운동…. 이 서울광장이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 이후 또다시 관심의 극단적 초점이 되고 있다. 서로 다른 구호와 이념이 엇갈린 채 난무하는 각축장으로서의 서울광장은 분명 슬픈 공간이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문 행렬과 그로 인해 치열했던 광장 개방의 공방.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뜨거운 6월’의 서울광장은 혼란스러운 가치 다툼이 난무한 채 가파른 충돌을 또 겪어내야 할 것 같다. 나라의 갈라짐을 한군데로 모으기 위한 통합의 공간이었던 광장은 실종된 채. 허물고 다시 쌓아올리는 불도저 소리에 파묻힌 피맛골서 나온 백자, 그리고 동소문동의 쓰러져 가는 한옥을 지켜 내려는 고달픈 싸움은 그래서 반갑다. 우리가 정작 지켜 내야만 하지만, 휩쓸린 채 잊고 살아가는 것들의 가치를 서울광장에서 먼저 찾을 길은 없을까. 날 세운 구호와 가치의 충돌을 잠재울 평화와 통합의 광장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뜨거운 6월 피맛골의 백자, 아니 ‘서울광장의 백자’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다른기사 보러가기] ☞유시민 한명숙 손석희 누가 나와도 吳 시장 누른다 ☞사면초가 대검 중수부 ☞[환각에 빠진 연예계] 끊이지 않는 연예인 마약 왜 ☞[관가 포커스]“호화결혼식 자제하세요” ☞6월 모의고사 후 고3 수험 전략 “영역별 성적 고려 목표대학 정해야”
  • 「미스·동양제과」김수진(金秀鉁)양-5분데이트(169)

    「미스·동양제과」김수진(金秀鉁)양-5분데이트(169)

    사근사근한 태도가 무척 뜻밖이라고 느껴진다. 톡 쏘듯 맵살스레 보이는 첫 인상에서 가졌던「주춤거림」때문에. 동양제과 영업부에 근무하는 김수진(金秀鉁)양. 청주 대성여고를 나오고 직장경력 1년반인 49년생. 청주에서 아버지가 상업을 하는 외에도 어머니가 양장점을 경영하고 있어 유복한 집안 살림이지만 꼭 자립해 보고 싶단다. 지금은 서울 삼각지 직장 부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함께 자취생활. 주산 2단의 실력, 깨끗한 용모와「센스 」있는 대인관계가 웃사람의 눈에 들어 어느 무역회사에서「스카우트」된 아가씨라는 주위 사람의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양장점을 하시니까 옷을 남보다 자주 갈아입는 편인데요. 사정을 모르는 분들은 월급 받아서 옷값도 못하지 않느냐고 못마땅해 하신다는 걸 느껴요』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이렇게 단적으로 나타내는 김양은 고등학교때 문예반에 들어 활동했고 여기자가 되기를 꿈꿨었단다. 평범하게 살기 싫다는 김양더러 자신의 성격 평을 하랬더니『무척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외향성이에요. 지금은 다만 참는 것뿐이죠』 영화 구경과 등산을 자주 가는데 지난번 인수봉 등반사고를 듣고는 당분간 등산할 맘이 통 내키지않고 있는 상태. 이제 몇 남지 않은 왕실가족에 대한 기사면 빠짐없이「스크랩」해 두는 열심파. <원(媛)> [선데이서울 72년 1월 30일호 제5권 5호 통권 제 173호]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2) 반란자와 귀순자들 Ⅲ

    조명연합군의 필사적인 저지 작전에도 불구하고 공유덕과 경중명은 후금으로 귀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중간에 다소의 손실이 있었지만 공경(孔耿)이 끌고 갔던 전함과 수군의 대부분은 후금군으로 넘어갔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공경이 가져온 전함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며 환호했다. 공경의 귀순으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왔던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은 깨졌다. 후금은 기존의 철기(鐵騎)가 지닌 막강한 위력에 더하여 수군까지 확보함으로써 군사력이 배가되었다. ●후금, 공경의 식량을 조선에 요구하다 1633년 4월, 공경이 이끄는 반란군의 선단은 장자도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갈 때 후금군의 인도를 받았다. 진강(鎭江)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의 저지를 뿌리치는 데 성공한 뒤부터 후금은 전함들을 간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압록강 연안을 파서 물길을 낸 다음 전함들을 진강 근처의 마이산(馬耳山) 부근으로 예인했다. 전함 주변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혹시라도 명군이 몰래 들어와 배들을 태워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4월28일,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녹지( 只)가 서울로 들어왔다. 용골대 일행은 공경이 귀순한 전말을 설명한 뒤, 그 일행들에게 먹일 식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용골대가 내민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명군 신분으로 가도에 머물 때는 식량을 주다가 후금으로 귀순했다는 이유로 주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급량(給糧)을 강하게 요구했다. 공경 일당이 상륙한 지역이 심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이 식량을 운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도 조선에 손을 내미는 명분으로 제시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은, 공경을 추격해 온 주문욱 일행으로부터 급량을 요구받은 상황에서 후금까지 식량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후금 사신 접대를 맡고 있던 구관소(句管所) 신료들은 용골대에게 ‘공경은 중국의 반장(叛將)이자 유흥치(劉興治)와 함께 조선을 도모하려 했던 원수’임을 내세워 식량을 내어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요구를 받아들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용골대 등은 다시 ‘형제의 도리’를 들고 나왔다. 그들은 ‘명에 붙으면 식량을 주고, 후금에 붙으면 주지 않는 것은 형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주문욱 일행에게는 이미 3000석의 양곡을 공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임경업 등을 보내, 공경 일행과 합세한 후금군과 전투까지 치른 상황이었다. 이미 확실하게 명 측으로 기우는 태도를 보인 터라 후금의 식량 요구까지 거부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내심 찜찜해하고 있던 5월6일, 명 황제의 칙서가 도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어머니 구씨(具氏)를 왕비로 각각 추봉(追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신료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매불망 추진해 온 인조의 ‘숙원 사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인조는 고무되었고,‘명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번지면서 후금의 급량 요구는 거부되었다. ●홍타이지, 공경을 극진히 예우하다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귀순해 오자 홍타이지는 고무되었다.1633년 5월6일,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줄 양마(良馬)를 마련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에게서 말 100마리를 차출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아끼는 내구마(內廐馬)도 포함되어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을 각별히 대우했다. 그들을 바로 심양으로 부르지 않고, 일단 휘하 무리들을 거느리고 요양(遼陽)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공경이 자신의 부하들을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량권도 주었다. 이윽고 6월3일, 공경이 귀순한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으로 들어왔다. 홍타이지는 백관을 이끌고 궁궐 밖 10리까지 나아가 공경을 맞았다. 홍타이지는 공경과 포견례(抱見禮)를 행했다. 서로 얼싸안는 것이었다. 만주의 신료들은 누구든지 칸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방식이었다. 후금의 신료들은 ‘투항자와 포견례를 행하는 것은 참월하다.’며 홍타이지를 만류했다. 홍타이지는 ‘공경은 등주(登州)를 장악했던 세력가로서 수많은 무리와 전함을 이끌고 귀순했으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신료들의 반대를 뿌리쳤다. 공경은 홍타이지의 형 다이샨(代善)과도 포견례를 행했다.6월5일에도 홍타이지는 공경을 다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과거 조대수(祖大壽)가 투항했을 때보다 더 극진한 대접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을 도원수(都元帥), 경중명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임명하고 칙인(勅印)을 하사했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 내린 유시문(諭示文)에서, 공경이 군민(軍民)과 무기, 전함을 갖추고 귀순한 것을 ‘위적풍공(偉績豊功)’이라고 찬양했다. 두 사람에게 ‘부귀(富貴)를 영원히 보장하고 죄를 지어도 전부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격적인 환대였다. 이 같은 환대가 뒷날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亂)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함선과 수군을 얻게 된 홍타이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후금, 명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되다 공경이 후금으로 귀순한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1633년 6월, 후금은 악탁(岳託) 등에게 병력 1만을 주어 명의 여순구(旅順口)를 공략하도록 했다. 공유덕과 경중명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 원정에 동행했다. 공경의 안내를 받은 후금군에 의해 여순은 힘없이 함락되었고, 후금군은 5302명의 포로와 2만냥 이상의 은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여순의 함락 소식은 당장 가도와 조선에 파장을 미쳤다. 가도를 지키던 부총병(副總兵) 심세괴(沈世魁) 등은 후금군의 공격을 우려하여 가도를 포기하고 본토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8월16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가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들도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과시했다. 이어 ‘우리가 배를 띄우면 가도를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조선이 놀랄까 삼가고 있다.’며 ‘향후 가도를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가도를 비롯하여 명 본토가 후금 수군의 위협 앞에 노출되자 명 조정의 조바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혹시라도 조선이 후금에 굴복하여 양자가 연합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수시로 사람을 보내 조선을 견제하려 했다.10월에는 가도의 부총병 정룡(程龍)이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여순이 함락되었다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조선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가도의 명군에게 군량을 공급하라.’고 채근했다. 공경의 귀순 이후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후금의 ‘협박’과 명의 ‘호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함과 수군을 보유하게 된 후금의 ‘변신’에 대처하지 못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1637년 1월 조선의 왕실과 중신들이 피란해 있던 강화도는 공유덕이 이끄는 후금군의 상륙작전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강화도 수비를 책임졌던 조선군 지휘부는 ‘후금이 수군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공경의 귀순은 ‘명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돌아온 탁신 … 태국 ‘태풍의 눈’

    돌아온 탁신 … 태국 ‘태풍의 눈’

    태국 정국이 다시 술렁이고 있다. 태국의 망명 정객인 탁신 친나왓(59) 전 총리가 28일 다시 조국 땅에 돌아온 탓이다.17개월만에 귀국한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잘못한 게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라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해냈다. 정치적으로도 숱한 업적을 남겼다. 정계엔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막강한 영향력에 비춰 ‘자제’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측근들이 만든 신당 ‘국민의 힘(PPP)’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제1당에 올랐다. 최대 그룹의 소유주이기도 해 마음만 먹으면 정국을 좌지우지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망명 17개월만에… 지지도 여전히 높아 이날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는 4000여명의 지지자들이 “당신은 최고 지도자”“탁신을 사랑한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했다. 28일 AP·AFP통신에 따르면 탁신은 홍콩에서 입국한 직후 대법원에 출두했다. 사법당국은 국유지 불법매입과 일가가 소유한 SC자산운용의 주식을 은닉한 혐의로 지난해 9월 탁신 부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그는 이날도 “군부가 부패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되풀이했다. 2006년 9월 권좌에서 쫓겨난 탁신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여전히 높다. 태국 아박센터가 지난 26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66.5%가 탁신의 국정운영이 좋았다고 응답했다. 국민들은 경제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탁신이 다시 총리직을 맡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태국을 경제도약 국가로 이끈 최고경영자(CEO) 출신의 탁신이 재임 때 저지른 비리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그의 세력화를 반대하는 국민들도 적잖아 태국 정국은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탁신은 법원에서 실형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부인 포자만이 남편에 앞서 귀국한 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전례대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탁신 “정치 보복하지 않겠다” 탁신은 28일 법원을 나선 뒤 발표한 성명을 통해 “명예를 되찾으려는 것일 뿐, 그 어떤 누구에게도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밝혀 또 다른 추측을 키웠다. 태국 정가에서는 탁신이 정계에 복귀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기 위한 모종의 협상을 왕실과 벌일 것이며, 의회와 정부 요직을 장악한 자신의 측근들을 앞세워 막후 실력자 행세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야권은 새 정부가 탁신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귀국을 허용했다고 판단할 만한 결과가 나올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터여서 어떻게든 태국 정국은 또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2)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2) 조선의 운명을 바꾼 역관 홍순언

    문관인 정사(正使)는 공식적인 국서를 전달하고 답서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역관은 배후에서 절충하는 일을 맡았다. 절충하는 과정에는 유창한 외국어가 기본이었지만, 때로는 금품도 오가고, 여러 해 동안 오가며 맺어둔 인맥도 중요했다. 사신들은 일생에 한 두번 가기 때문에 인맥을 쌓을 기회가 없었지만, 역관들은 대여섯 번, 이상적이나 오경석 같은 역관들은 열 번이 넘게 파견되었으므로 각계에 인맥이 형성되었고, 제자들에게 그 인맥을 소개했다. 인맥을 통해 조선과 중국 사이의 외교 현안을 해결한 역관으로는 홍순언(洪純彦)이 가장 유명하다. ●공금 털어 구한 여인이 明 예부시랑의 후처로 홍순언은 젊었을 때에 뜻이 컸고 의기가 있었다. 한번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주에 이르러, 밤에 청루에서 놀았다. 자태가 특별히 아름다운 한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주인할미에게 부탁하여 한번 놀아보자고 청하였다. 순언이 그 여자의 옷이 흰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묻자,“첩의 부모는 본래 절강 사람인데, 서울에서 벼슬하다 불행히 염병에 걸려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나그네 길이라 관(棺)이 여관집에 있지만 첩 한몸뿐이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낼 돈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팔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마치고는 목메어 울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순언이 불쌍히 여겨 장사지낼 비용을 물으니,“삼백금이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곧 돈자루를 다 털어 주었지만, 끝내 그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여자가 순언의 이름을 물었는데도 이름을 말해주지 않자,“대인께서 성명을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첩도 또한 주시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홍씨라는) 성만 말해 주고 나왔다. 동행 가운데 물정 모르는 짓이라고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자는 나중에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후처가 되었다. 석성은 순언의 의로움을 높이 여겨, 우리나라 사신을 볼 적마다 반드시 홍역관이 왔는지 물었다. 순언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공금의 빚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잡혀서,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문에 전후 열댓 명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왔지만, 아무도 허락받지 못했다. 임금이 노하여 교지를 내렸다. “이것은 역관의 죄이다. 이번에 가서도 또 허락받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수석 역관 한 사람을 반드시 목 베겠다.” 역관 가운데 감히 가기를 원하는 자가 없자, 역관들이 서로 의논했다.“홍순언은 살아서 옥문 밖으로 나올 희망이 없다. 그가 빚진 돈을 우리들이 갚아 주고 풀려나오게 하여 그를 중국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 그는 비록 죽는다 해도 한스러울 게 없겠지.” 모두들 가서 그 뜻을 알리자, 순언도 기꺼이 허락했다. 선조 갑신년(1584)에 순언이 황정욱을 따라서 북경에 이르러 바라보니, 조양문 밖에 비단 장막이 구름처럼 펼쳐 있었다. 한 기병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홍판사가 누구시냐고 물었다.“예부의 석시랑이 공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부인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 조금 뒤에 보니 계집종 열댓 명이 부인을 에워싸고 장막 안에서 나왔다. 순언이 몹시 놀라 물러서려고 하자, 석성이 말했다.“당신이 통주에서 은혜 베푼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 아내의 말을 들으니 당신은 참으로 천하에 의로운 선비입니다.” 부인이 무릎을 꿇고 절하기에 순언이 굳이 사양하자, 석성이 “이것은 보은(報恩)의 절이니, 당신이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 사신이 이번에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고 석성이 물었다. 순언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당신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객관에 머문 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과연 조선 정부가 청한 대로 허락되었다. 석성이 주선한 것이다. 순언이 돌아올 때에 부인이 자개상자 열 개에 각각 비단 열 필을 담아 주며,“이것을 첩의 손으로 짜 가지고 공께서 오시길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언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돌아왔지만, 깃대를 든 자가 압록강까지 와서 그 비단을 놓고 갔다. 비단 끝에는 모두 ‘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여 있었다. 순언이 돌아오자 나라에서는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기록하고 당릉군(唐陵君)에 봉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사는 동리를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그의 손자 효손(孝孫)은 숙천부사가 되었다. ●조선 왕실의 계보를 바로잡다 정명기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홍순언의 이야기는 39가지 책에 조금씩 다르게 전한다. 그 가운데 서사구조가 분명한 ‘국당배어’‘연려실기술’의 기록을 위에 소개했다. 홍순언의 이야기 가운데 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종계변무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이인임이 나이 어린 우왕을 세웠는데, 명나라 사신 채빈이 본국에 돌아가 공민왕 피살사건을 보고하면 재상인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까 염려하여 중도에 살해하였다. 정도전·권근·이첨 등의 친명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누렸지만,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유배보냈다. 이성계의 정적인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로 망명해 ‘이성계가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후사(後嗣)’라고 모함했다. 명나라는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후사라고 기록된 것은 조선 왕실의 가장 큰 모욕이었으므로, 태조뿐만 아니라 대대로 사신을 보내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수정해 주지 않았으므로 가장 큰 외교 현안으로 남아 있었다.1584년에 황정욱이 ‘대명회전’ 수정판의 조선관계 기록 등본을 가져오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종계변무’라는 용어는 ‘왕실의 계보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홍순언은 조선 왕실이 종계변무를 본격적으로 해결할 준비를 하면서 역사에 정면으로 등장했다. 선조실록 5년(1572) 9월11일 기사에 “주상이 중국 사신을 접견할 때에 종계(宗系)의 악명(惡名)을 바로잡는 일에 관해 먼저 대략 말하고, 이어 단자(單子)로써 자세히 기록해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통사 홍순언 등을 시켜 한어(漢語)로 번역해 단자를 만들어 예조에 주어 아뢰도록 했다.”고 했다. 국서는 한문으로 된 문어체라서 친근감이 없었지만, 단자는 구어체였으므로 간절한 마음이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계변무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12년 뒤인 선조 17년 11월1일 실록에서야 “종계 및 악명 변무주청사 황정욱과 서장관 한응인 등이 칙서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다. 선조는 그 사실을 종묘에 고한 뒤 죄수들을 사면했으며,“정욱과 응인 및 상통사 홍순언 등에게 가자(加資)하고, 노비와 전택(田宅), 잡물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종계변무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했는데, 홍순언에게 2등 당릉부원군을 봉했다.19명 가운데 실무자급인 역관은 홍순언 한 사람만 포함되었다. ●39가지 야담과 소설로 전하는 홍순언 이야기 당릉군에 봉군된 홍순언은 왕궁을 지키는 종2품 우림위장(羽林衛將)까지 승진했는데, 사간원에서 두어 차례 탄핵하였다.“출신이 한미한 서얼이라서 남에게 천대받는다.”는게 이유였는데, 선조는 그가 공신으로 가선대부까지 받았으니 결격사유가 없다고 옹호했다. 역관 홍순언의 능력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발휘되었다.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사신이 가며 그도 따라갔고, 선조와 고관들은 그에게서 반가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그를 믿고 조선 정세를 파악했으며, 선조가 이여송을 만날 때에도 그가 통역했다. 석성이 과연 홍순언이 구해준 여자와 혼인한 덕분에 조선에 원군을 보냈는지, 역사 자료만 가지고 확인할 수는 없다. 야담이나 야사에서는 여인이 몸을 팔게 된 이유도 달리 나오고, 석성의 벼슬도 달라지며, 그가 해결해 준 현안도 달라진다. ‘청구야담’에는 홍순언이 병술·정해년(1586∼1587) 사이에 북경에 갔다가 청루 문 위에 “은 천 냥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쓴 것을 보고는 중국 탕아들도 값이 비싸서 들어갈 생각을 못하는데, 그는 “부르는 값이 그만큼 비싸다면 반드시 뛰어난 미인인 것”이라 생각하고 수천냥을 털어 그 여자를 샀다고 한다. 이미 종계변무가 해결된 뒤이니, 이 책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원군 요청의 임무를 띠고 홍순언이 파견되었으며, 병부상서 석성이 해결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종계변무는 외교적 사안이니 예부에서 담당하고, 원군 파견은 군사적 사안이나 병부에서 담당한다. 석성의 벼슬은 그에 따라 달라진다. 홍순언은 공금을 횡령해 청루의 여자를 산 협객인데, 결과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에 살이 덧붙어 야담과 소설이 39종이나 되고, 박치복이라는 시인은 5언 264구의 장편서사시 ‘보은금(報恩錦)’을 지었다. ●곤담골에 천인 백정교회가 들어서다 그가 살던 동네에는 지금 롯데호텔이 서 있고, 그 앞에 ‘고운담골’ 표지석이 있다.‘보은(報恩)’ 두 글자가 수놓인 비단을 기념해 동네 이름이 보은단골인데, 고운담골, 곤담골로 바뀌었다. 고운담골을 한자로 쓰면 미장동(美牆洞)이다. 임진왜란이 300년 지난 1892년에 무어 선교사가 조선에 왔다가 조선어를 익히기도 전에 곤담골에 이사하여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조선인을 야만시하던 권위적 선교사와 달라 인목(仁牧)으로 불렸는데, 백정까지도 교회에 나오게 하여 곤담골 ‘백정교회’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얼 출신 역관이라 천대받던 홍순언의 동네에 백정교회가 세워진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와인은 이제 일상이다

    가히 ‘와인 열풍’이라 할 만 하다. 과거 와인은 돈 좀 있거나 폼 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다 심장병 예방 등 건강을 돕는 술로 차차 인식이 바뀌더니 요즘에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위상이 높아졌다. 와인을 ‘배운다.’라는 표현이 유행하는 이유다. 물론 교묘하게 파고든 상업주의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요즘 한창인 유통업체들의 와인 판촉전을 알아봤다. 업체마다 수백∼수천가지의 와인에다 전문 소믈리에(와인 감별사)까지 두며 확대되는 와인시장에서 소비자의 눈길과 발길을 붙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지하 1층 와인 매장에 프랑스·이탈리아·칠레산부터 스페인·남아프리카공화국·아르헨티나산에 이르기까지 국내 최다인 2500여종의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 와인글라스, 디캔터를 비롯한 액세서리 및 관련 서적도 함께 판다. 본점 와인 매장에서는 다음달 5일까지 ‘유명와인 균일가전’을 통해 와인을 정상가(價)보다 50∼60% 싸게 판다.‘조르주 카베르네 소비뇽’·‘퀸테라 카베르네 소비뇽’ 6000원,‘하디보이지’ 1만원,‘자메이유 코트뒤론 화이트’ 2만원,‘샤토 라섹’·‘그랑 쥐네브’ 6만 2000원 등이다. 다음달 6∼11일에는 ‘보르도와인 특집전’을 통해 정상가보다 30∼50% 낮은 가격에 판다. 롯데마트도 다음달 4일까지 모든 점포에서 ‘와인 초특가전’을 연다.20여가지 와인을 최고 70% 싸게 판다.‘스패니시 게이트 레드’ 5400원,‘코퍼리지 샤도네이’ 7500원,‘샤토 라로제 피곳 메독’·‘샤토 라그라 베테 보르도’ 1만원 등이다. 신세계백화점은 본점·강남점 등 주요 점포에 별도의 와인숍을 운영하며 1300여종을 취급하고 있다. 올해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60% 정도 늘었다. 특정 와인과 궁합이 맞는 치즈 등 관련 상품도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 올 초 영국산 치즈 8가지를 새로 들여오는 등 60여종의 치즈를 판매해 술과 안주의 원스톱 쇼핑이 가능하다. 다음달 6일부터 17일까지 본점·강남점 등 주요 점포에서 할인행사를 한다. 이마트는 34개의 와인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판매량의 절반 가량이 칠레 ‘조세피나’, 이탈리아 ‘시트라’ 등 1만원 안팎의 저가 와인이다. 다음달 8일까지 캔 와인과 함께 소용량 와인을 최고 30%까지 싸게 파는 ‘미니 와인대전’을 연다. 미니와인을 2병 사면 5%를,4병 이상 사면 10%를 깎아준다. 와인 전문 유통업체 와인나라는 다음달 4일까지 ‘와인 액세서리 대전’(와인글라스 최고 50%, 디캔터 최고 40% 할인), 다음달 15일까지 ‘와인셀러 대전’(와인 냉장고 최고 41% 할인)을 연다. 다음달 4일부터 말일까지는 ‘프랑스와인 대전’을 통해 보르도·부르고뉴 등지의 와인 500여종을 50% 이상 싸게 판다. 구매자 중 추첨을 통해 와인셀러 등 경품을 주고 구매액에 따라 와인글라스, 디캔터, 치즈 등을 사은품으로 준다. 오픈마켓 G마켓(www.gmarket.co.kr)은 이달 말까지 고급 와인 소품들을 판매하는 ‘나만을 위한 고품격 와인바’ 기획전을 연다. 입으로 불어 만드는 독일 전통방식으로 제작돼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등에 공급돼 온 ‘슈피겔라우(Spiegelau)’ 와인잔의 경우 ‘수와레 시리즈 보르도 레드와인 글라스’ 6개 세트가 6만원이다. 덴마크 왕실 공식 납품업체인 ‘메뉴(Menu)’의 디캔터는 3만 6000원이다. 이밖에 6병 보관용 철제와인랙 1만 7800원, 스프링형 와인 버틀러 2만 7000원, 특수아크릴 와인잔걸이 버킷 2만 7500원 등이다. 오픈마켓 ‘엠플’(www.mple.com)은 올 4월 업계 최초로 와인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와인은 통신판매가 금지된 주류 품목이어서 인터넷 판매가 불가능하지만 소비자의 관심을 충족시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오프라인 판매자들이 직접 상품을 알릴 수 있는 광고·정보 코너로 개설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미국, 칠레, 독일, 스페인과 기타 지역까지 산지별로 와인을 분류했으며 빈티지, 타입, 주품종, 알코올 도수별로도 검색이 가능하다. 원하는 와인의 종류와 가격대, 당도, 판매지역을 지정하면 그 와인을 어디에서 파는지 연락처·약도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롯데백화점 유승현 주류 선임상품기획자(CMD)는 “와인을 찾는 고객층이 늘고 선호하는 와인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어 판매의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고객 개인별 맞춤 서비스 역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와인 소비량은 2만 7000㎘로 2002년에 비해 56%가 늘었다. 반면 양주 소비량은 3만 3000㎘로 같은 기간 27%가 줄었다. 업계에서는 머잖아 둘 사이에 역전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주말탐방] 시청앞 크리스마스 트리의 일생

    [주말탐방] 시청앞 크리스마스 트리의 일생

    출생지:인천 철물공장 키:23m·몸무게:6t 조상:고대로마 상록수 나뭇가지 경력:1884년 영국 왕실 트리장식 신체특징:전나무잎 모양 갈런드 3.24㎞ 파워:시간당 45㎾ 전기·1만 2000V 전구 고민:술취한 어른 실례·아이들 조명 뜯기 유언:“철골·전구 고물상에 팔아줘” 사망 예정일:2007년 1월15일 나는 서울광장 크리스마스 트리다.10만개의 불빛을 반짝이며 우뚝 서있다. 키 23m, 몸통 둘레 38m, 몸무게가 6t이나 되는 거구다. 서울시민 1200만명이 나를 바라보며 한해를 마감하고 또 희망찬 새해를 시작한다. 나는 38일간의 시한부 인생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다. ●철물공장에서 태어나다 나는 무늬만 전나무다. 뿌리부터 잎새까지 모두 사람이 만들었다.11월12일 인천의 한 철물공장에서 태어났다.L자형 건축 철골을 자르고 붙여서 가로·세로 30㎜의 각파이프를 만들고, 그 파이프를 구부려 크고 작은 원형 구조물 8개를 완성했다. 전나무처럼 보이도록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2∼2.8m 간격으로 층층이 쌓아 올렸다. 철골 뼈대 위에 전나무잎 모양의 갈런드(garland·합성수지 나뭇가지를 철심에 붙인 것) 3.24㎞를 둘둘 말아 입혔다. 그리고 작은 전구 10만개가 다닥다닥 붙은 크리스마스 조명을 달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선을 내려뜨린 뒤 전구를 갈런드에 일일이 고정했다. 전구가 철골에 닿으면 누전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갈런드도, 조명도 모두 ‘메이드 인 차이나’다. 나는 5t트럭 10대에 나뉘어 지난 2일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옮겨졌다.12명이 5t,25t 크레인을 이용해 밤새 나를 조립했다. 차량 통행이 많은 도심이라 밤샘 작업은 필수.9일 오후 6시 휘황찬란한 불이 들어왔다. 내 조상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집에다 상록수 나뭇가지를 장식해 동짓날을 기념했고,16세기 독일 기독교인이 이 풍습을 크리스마스날 트리를 꾸미는 것으로 계승했다.1884년 영국 왕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전세계로 확산됐다. 매년 캐나다산 전나무 100만그루가 미국·멕시코·독일로 수출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천연나무로 만든 트리를 좀처럼 보기 어렵다. 큰 전나무가 없고, 있어도 운반이 힘들기 때문이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올림픽공원에서 트리용 전나무를 키우고 있어 우리도 곧 멋진 천연트리를 감상할 것이다. ●행복과 고통이 교차하다 나는 행복하다. 가족과 연인들이 시간당 45㎾의 전기로 수놓은 은하수를 사랑한다. 나를 기억하려고 그들은 쉼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린다. 오후 5시30분부터 새벽 2시까지 38일간 조명을 켜면 전기료가 100만원쯤 나온다. 고통도 찾아온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몸에 붙은 전나무잎과 조명을 뜯어낸다. 조마조마하다. 누전 차단기가 있지만, 전류가 흐르고 있어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데…. 특히 네온전구에는 1만 2000V의 전압이 흐른다. 눈·비가 내릴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술취한 어른들도 골칫거리다.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내게로 달려와 곧잘 부딪친다. 전봇대를 만난 듯 노상방뇨도 일삼는다. 전선이 가득해서 물청소는 엄두를 못낸다. 냄새를 꾹 참으며 마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머리 위에 십자가를 얹은 것도 논란이 됐다. 다른 나라에서는 별모양의 장식물을 올리기 때문이다. 내 몸값을 나도 모른다. 기독교TV가 기독교 단체의 후원을 받아 만들었는데 제작비를 공개하지 않은 탓이다. 다만 친구인 올림픽공원 쌍둥이 트리가 1억 4000만원이라니 내 몸값을 대충 짐작할 뿐이다. ●한줌의 고물로 돌아가다 내년 1월15일 나는 세상을 떠난다. 화려한 조명을 끄고 추억으로 남는다.10만개의 전구는 일회용이다. 실타래처럼 엉킨 전선을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풀려면 인건비가 많이 들어 새 전구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고물상에 넘기면 구리전선을 둘러싼 검정색 비닐을 태워 재활용할 수도 있다. 전나무잎 갈런드는 햇빛이나 습기를 피해 보관하면 내년에도 사용할 수 있다. 올림픽공원의 친구는 재활용한 갈런드로 만들어졌다. 집에서도 갈런드를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면 몇 년 동안 쓸 수 있다. 철골 뼈대는 고물가격으로 팔린다. 나의 삶은 짧지만 화려하다. 그러나 떠날 때는 한줌의 고물로 돌아간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닮았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트리의 경제학 크리스마스 트리 업계에서는 국내 시장규모를 200억∼300억원 정도로 추산한다. 계산상으론 2만∼3만원(도매가격)짜리 완성품 트리가 매년 100만개 정도씩 팔리는 셈.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산일 뿐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긴 쉽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도 그럴 것이 트리 장식의 종류만 해도 수 천여가지가 훌쩍 넘는데다 수입업자도 소위 보따리상, 도매상, 할인마트까지 다양하다.5∼6년 전만 해도 트리의 뼈대부터 미니전구, 방울, 리스 등 소품 하나하나가 대부분 국내산이었다. 하지만 저가의 중국산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실상 국내 크리스마스 트리 제조업계는 거의 파산상태다. 실제 2000년 초반까지 통일사, 미성트리, 미스터트리 등 쟁쟁한 트리 전문업체가 있었지만 이제 경오트리 한곳을 제외한 모든 제조회사가 문을 닫았다. 중국산의 ‘저가공세’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국내 크리스마스 장식품의 99%는 ‘메이드인 차이나’란 말이 나올 정도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세계 성탄절 장식품의 약 70%가 중국 저장(浙江)성의 작은 도시 이우(義烏)를 통해 거래될 정도라고 하니 놀랄 일만도 아니다.”라고 체념한 듯 말한다. 소비층이 젊은층이다 보니 소매시장에서는 온라인 매장의 강세가 두드러진다.G마켓의 경우 지난해 11월12일부터 12월11일까지 한달 판매량이 4억 5000만원이었던 반면 올 들어 같은 기간 판매량은 15억원 정도로 3배 이상 늘었다. 필수품이라기보다는 장식을 위한 기호품이라는 속성상 크리스마스트리 시장은 연말 경기를 반영하는 일종의 ‘체감지표’가 되기도 한다. 25년간 트리제조업을 해왔다는 경오트리 서재선 사장은 “이젠 공장을 닫아야 할 처지”라고 말했다. 그는 “먹고 살 만해야 하는데 올해는 지난해 매출보다 30%는 줄 것 같다.”면서 “팔리는 제품도 중국산 중에서도 저가상품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 트리 어디서 사면 싸게 살까 직접 예쁜 소품들을 구입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면 즐거움과 보람은 갑절이 된다. 가격면에서는 인터넷쇼핑몰을 따라가기 힘들지만 사방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전시된 곳에서 쇼핑을 즐기며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다면 도매시장이나 할인점을 찾는 것이 좋다. ●한 번에 살 수 있지 가장 손쉽게 크리스마스 트리 용품을 살 수 있는 방법은 가까운 할인점을 찾는 것. 이마트, 롯데마트, 뉴코아아울렛에는 특설 매장을 꾸며 크리스마스 트리와 각종 장식품, 원형 리스(벽걸이 장식) 등을 20∼30% 할인 판매하고 있다. 특히 뉴코아아울렛은 24일까지 400여가지의 크리스마스 트리 용을 최고 50%까지 저렴하게 판매한다.1.2∼1.5m 높이의 트리가 2만 4000∼4만 2000원선. 앙증맞은 미니트리(18∼30㎝)가 3600∼6000원선, 리본·볼·크리스털 촛대 등 장식 세트는 1000∼7000원선으로 대부분 1만원 미만이다. ●더 싸게 살 수도 있지 다리품을 파는 만큼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이 고속터미널, 남대문 등이다. 서울 반포동 고속터미널 3층 꽃도매상가에는 5∼6개의 대규모 매장이 밀집돼 있다. 가장 잘 나가는 것이 1.2∼1.5m 높이의 트리. 솔방울, 잎의 재질에 따라 4만∼7만원선이다. 여기에 줄전구, 볼, 별, 산타 리스 등을 달아 크리스마스 트리를 완성한다. 줄전구는 1500(미니트리용)∼1만 5000원선, 장식볼 세트는 작은 것 6개들이가 1000원선, 큰 것 3개들이가 6000원선,6개들이 반짝이는 별 장식은 6000원선이다.3000∼4000원선인 작은 곰인형, 별·달, 산타리스 등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해도 좋다. 남대문은 메사와 원아동복 건물 주위에 4개 매장이 몰려 있다.1m높이의 트리, 지름 1m의 리스는 완성품이 6만원선이다. 중보다 20∼30% 저렴한 편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32)선비들의 차 문화

    살랑거리는 바람에 온기가 실려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깨어나는 햇살이 마치 솜털구름처럼 포근하다. 흐르는 물은 굳게 닫혔던 문을 활짝 열어젖히듯 포효하며 콸콸 흐른다. 어디선가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묵은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은 뒷간인가, 엊그제 하얀 명주수건으로 곱게 닦아놓은 차솥에서인가, 아니면 자우홍련사 작은 연못에서인가,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이 환희롭게 깨어나는 소리다. 바람과 햇볕과 물을 어미의 자궁으로 삼아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하는 것 역시 기쁨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존재로도 고귀한 것이고 축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 우주와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은 소중한 존재다.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굳었던 대지의 가슴에 불을 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 바람처럼, 그 어느 곳 하나 빠트리지 않고 골고루 내리쬐는 햇살처럼 자신을 환희롭게 행복하게 바라봐야 한다. 차의 살림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간장종지보다 더 작은 찻그릇 속에서 우리는 온 우주를 담아내는 자신의 살림살이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살림살이를 살아온 분들이 바로 한 잔의 차에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큰 도를 담아온 선비들이다. 이른바 군자다도이다. 선비다도의 핵심은 바로 수신과 수양의 길이다. 이색의 시 한구절은 그같은 선비다도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깨어진 노구솥에 노아차를 달이네/귓바퀴가 갑자기 밝아지고/코로는 차향을 맡네/별안간 눈에 가린 편견이 없어지니/밖으로 보이는 데는 티끌이 없구나/혀로 맛본 후 목으로 내려가니/살과 뼈가 똑발라 비뚤어짐이 없도다/마음은 한 뙈기 좁은 밭/밝고 깨끗하니 생각에 그릇됨이 없네/어느 겨를에 천하 다스리는 일에 생각이 미치겠는가/군자는 마땅히 집안을 바르게 해야 하리.” 선비들의 차 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다. 차를 끓이기 위해 손수 물을 뜨고 귀한 노아차를 달여 먹으며 밝고 깨끗하고 그릇됨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선비들의 차 문화는 수신과 제가, 치국의 근본을 담아내는 또하나의 문화적 그릇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개념은 지식인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알고 출발해야 한다. 유교문화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 속에 깃든 고리타분하고 현상유지적인 것이 아닌, 학식과 인품을 갖춘 지식인을 선비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비는 당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 그룹이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선비문화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로 알려져 있다. 백제·신라도 건국 초기에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 중 하나였던 유교를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선비문화는 우리 문화의 삶과 철학을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였다. 선비들의 차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고려 300년간 쯤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선비문화의 발판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무신란이다. 무신란을 지켜본 선비들은 도성을 떠나 산과 물이 좋은 곳을 찾아 은거하며 차 생활을 즐기게 된다. 무신란은 고려시대 선비 차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왕실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화려한 차문화는 쇠퇴하게 되고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을 중심으로한 차문화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변화는 음다 풍속에서부터 시작됐다. 귀한 단차를 갈아 말차를 마시던 음다 풍속에서 만들기 쉬운 잎차를 즐기게 된다. 그에 따라 다구도 변화를 했다. 유차를 담는 고급 찻그릇인 ‘다구’보다 맑은 탕차도 겸해서 담을 수 있는 ‘다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지배그룹으로부터의 소외는 물적 토대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졌고 당시 수입해 공유했던 값비싼 단차를 맛볼 수 없었다. 은거에 들어간 선비들은 우리나라에서 손쉽게 제조하고 구할 수 있는 아차(芽茶) 즉, 잎차를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잎차의 선호는 그에 따라 다구의 변화도 함께 가져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 차인들은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다석(茶席)’‘다연(茶筵)’‘명석(茗席)’‘명연(茗筵)’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찻자리는 초대장을 미리 받아야 했으며 손님의 자격에 따라 앉는 자리도 달라졌다. 당시 찻자리의 손님 자격으로는 ‘청덕과 영명, 즉 명예를 갖춘 사람’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유교적 규범에 따라 다례에도 철저하게 규범과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찻자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다담(茶談)’이었다.‘다담’이란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로 당시 사상적·철학적·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지식 기량과 수양 깊이를 나눠보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찻자리는 자격과 규범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선비다도를 대표한 차인은 이색이다. 성균관 대사성·대제학 등을 지낸 이색은 차를 전문적으로 구해오는 ‘가동(家童)’과, 전다하는 전문 노비가 있었을 정도로 차의 명인이었다. 차의 불꽃을 잘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는 법을 공부하며 연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색은 ‘다종(茶鐘)’‘화자’(꽃무늬 오지찻잔),‘노아’‘영아’‘다탑’(차마시는 평상)등 차 용어도 만들어 전파시켰다. 이색은 육우의 ‘다경´ 속 시들을 섭렵하며 차 문화 공부도 했다. 이색의 차생활은 당시 고려시대 선비차인들의 보편적인 차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좋은 찻자리에 초대받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에 따른 지식적 기반도 축적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선비들의 차생활은 훗날 조선시대를 건국하는 이념적·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적 아이러니다. 선비들은 차의 청덕(淸德) 정신을 매우 애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차 나무를 사람을 맑게 하는 청인수(淸人樹)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헌공하는 차를 청공이라 부를 정도로 차의 청덕을 중요시했다. 차의 청덕은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을 지향했던 선비들의 삶의 문화와 잘 부합되었다. 서거정은 그같은 삶을 실천한 대표적인 선비다인이다. 대사헌을 두번이나 역임하고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후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45년간 공직에 머문 서거정은 지붕에 구멍이 난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선비 다인 중 차끓이는 일과 차 맛내기에 달인으로 불리는 서거정은 70편이 넘는 다시를 남길 정도로 깊은 차생활을 영위했다. 청빈한 공직자의 초상으로 불리는 청백한 삶을 산 서거정은 “비와 바람은 이미 지붕을 뚫었고/시와 글씨는 부질없이 집에 가득하네/조용히 가는 글씨를 쓰고/한가롭게 게 눈차를 끓인다네.”라고 노래하고 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없는 구멍뚫린 초가집에 살며 다리 부러진 쇠솥과 금 간 찻잔을 쓰며 청빈한 삶을 산 서거정 모습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때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과 차생활이 어디에 있음을 일깨운다. 참으로 멋스럽고 멋스러운 삶속에 자신의 삶을 최고로 극대화시킨 차인 서거정의 삶은 아련한 아픔과 경탄스러움을 던져준다. 선비 다인들의 검박한 차살림살이는 ‘다실’에서 볼 수 있다.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지어 그것을 ‘소실’‘소재’‘소려’‘소루’라 부르기도 했으며 기와가 아닌 억새나 짚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초당’‘모옥’‘모암’‘초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허균의 ‘누실명’은 이같은 선비들의 차살림살이를 잘 말해준다. 작은 다실에서 청빈하게 사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긴 허균은 “사방은 아홉자 크기의 단칸방으로서, 책을 갖춰두고 차 마시고 향 피우며 지내는데, 남들은 누추하다고 하나 심신은 편안하다. 누추하다고 함은 몸과 이름이 썩어버림을 말하니 군자를 지향하는 내가 사는 방은 누추하지 않다.”고 적고 있다. 허균처럼 대부분의 선비다인들은 차에 그 어떤 부와 명리보다도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비차 문화의 핵심은 바로 청빈의 덕을 통해 개인과 가족, 국가의 경영을 영위하는 지혜를 쌓는 데 있었다. 자연과 벗삼으며 버림을 통해 세상을 얻는 미학을 터득한 선비들의 차 생활은 진정한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잘 일깨우고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다인인 자하 신위는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밥 먹는 것은 아무리 즐거워도 색·향·미가 뛰어난 차보다 못하다.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아 자신에게 웃음을 준다.”고 적고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끼니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뿐인데. 차를 병처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다.” 차는 좋은 삶의 양식과 같아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찌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을 부끄럽게 바라볼 수 있는 넉넉한 혜안을 준다. 차가 우리삶에 있어서 우주처럼 넓고 광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지암 암주 ■ 조선시대 법정의 다례의식 우리 차문화사에 있어서 차례는 단순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채 발전해왔다. 죄와 법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왕과 신하들이, 또한 사헌부에서 사형 등 중형을 지닌 죄인들의 죄를 판결하거나 사면할 때 차를 통해 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왕과 신하들은 죄인을 사형시키느냐 아니면 섬에 유배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 함께 다례의식을 행했다. 그당시 실제로 행했던 다례의를 살펴보자. 다례가 시작되기 전 왕이 내전의 남쪽 행랑에 앉고 신하들이 재배한 후 제자리를 잡는다. 다례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차를 담당하는 다방참상원이 각종 다구들과 차를 보관하는 별채에서 차를 들고 들어온다. 칠품원의 관직을 가진 내시가 뚜껑을 연다. 집례가 전의 앞기둥 밖으로 올라와서 왕과 마주보고 절 한후 차를 권하고 놓은 뒷전 아래로 내려온다. 다음은 문무고관대작들에게 차를 올린다. 원방의 8품 이하 벼슬아치가 다례를 담당한다. 집례가 다시 전에 올라가 엎드려 차를 내어갈 것을 청한다. 붉은 붓과 먹을 든 주대원(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관원)이 들어와 “단필로 참형을 결정하시되 유인도에 들어갈 자를 제외하소서.”라고 아뢴다. 형이 결정된 후 왕과 문무 고관대작들에게 차를 권하고 신하들은 다시 재배를 한다. 다례가 끝난후 신하들은 왕이 술과 과일을 하사한다는 분부를 전달받고 차례로 나간다. 다례의에서 형을 결정하기 전 왕과 신하들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탁한 말차를 마셨으며, 중형 결정 후에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탕차(湯茶)를 마셨다. 고려시대에는 또 죄를 사면해주는 ‘사면다례’도 행해졌다. 고려 때 왕은 중요한 죄인을 사면할 때 죄를 사면하는 공식 의례를 행했다. 이때 의례에 동참하는 행렬에 행로와 휴대용 화로를 든 군인인 다담군사 4명이 함께한 것을 볼 때 중요한 사면의식 때도 차례는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던 사헌부의 다시(茶時)도 차를 단순한 행다를 넘어선 문화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은 ‘사헌부 제좌청중신기´에 “부의 청에서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다시이며 또 하나는 제좌이다. 다시란 다례의 뜻을 취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 대관은 다만 임금에게 간언하는 책임만 맡았고, 관청의 일반적인 일은 다스리지 않아서 하루에 한번 모여 차 마시는 자리를 베풀고 헤어졌다.”고 적고있다. 사헌부 감찰을 엮임했던 정극인도 “대관들이 다 모이지 않아서 임금을 뵐 때가 되지 않았으면 잠시 물러나 있기를 청하여 아뢰고 차를 점다하여 시장기를 메웠다. 그러므로 감찰은 다시라는 두 글자를 들고 들어가서 임금께 아뢰었다.”고 말한 것을 볼때 차를 마시는 일이 지금처럼 단순한 휴식이 아닌, 하나의 업무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에서는 각 관청에서 사헌부의 검사를 청할 때 전날 다시에 통보하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에서도 간단한 업무를 처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흠흠심서´에서 “감찰이 다시라는 패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고 가면 비록 대관을 만나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고 적고있다. 이는 다시가 간단한 업무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까지 다시는 모든 관아에서 철저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다시의 본뜻이 상실되어갈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민족은 매우 신중한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죄의 결정을 신중하게 하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지나온 판결을 되짚는 것은 올바름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되짚는 신중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차는 올바름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엄정하고 평등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민족은 차를 단순한 음료의 도구를 벗어나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성을 추구하는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켜낸 위대한 족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차는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운용하는 삶의 뿌리로서 각인되고 있다.
  • 설 선물 뭘 할까

    설 선물 뭘 할까

    “설 선물 뭘 하지?” 명절이면 한번쯤 고민하지만 뾰족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선물이다. 부모님에게는 건강식품을, 조카에겐 설빔을, 형제들에게는 갈비세트를…. 그러고 나서, 세배 나들이를 해야 하는 일가친척들에겐 뭘 선물할까? 이쯤이면 주머니 사정도 고려된다.‘주는 즐거움, 받는 기쁨’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선물은 없을까. 올 설에는 선물 고르는 고민을 지금부터라도 꼼꼼히 해보자. ●올 설에 첫선이오 롯데백화점은 국내산 호두 360g·황잣 500g·곶감말이 660g·곶감 14∼18개를 엄선해 세계적인 크리스털 브랜드인 프랑스 듀랑의 크리스털 용기에 담은 명품 선물세트를 내놓았다. 3세트 한정이며 100만원. 또 156년 전통의 영국 왕실백화점 헤로즈의 주요 상품인 그린 라인의 티타임(티포트·티잔·쿠키)과 커피로 구성한 선물세트도 눈길을 끈다.35만 8000원. 그랜드백화점은 이번 설을 겨냥해 개발한 간편 양념 모둠세트(떡갈비·소불고기 각 1.2㎏)를 내놓았다.3만 9600원. 제주도에서 만든 떡갈비와 전문 육가공 기술을 가미한 실속형 간편 양념육으로 5만원 이하대 선물로 안성맞춤이다. 또 청정제주 모둠세트(삼겹살·목살·갈비 각 1.2㎏)는 6만원이다. CJ도 이색선물 2종을 내놓았다. 잡곡을 선물세트로 짠 햇반秀미곡 선물 세트는 발아현미·발아흑미·발아오곡 등으로 구성한 제품으로, 발아현미와 발아오곡을 묶은 2종세트(2만 1000원)와 발아현미·발아흑미·발아오곡으로 구성된 3종세트(3만 3000원)가 있다. 샘표식품이 지난해의 식초 열풍을 반영해 내놓은 식초선물세트도 주목할 만하다. 사과식초 900㎖ 2개와 부드러운 현미식초 900㎖ 1개로 구성됐으며 값은 7900원. ●건강도 챙기고…. 한국인삼공사는 정관장 홍삼 설 선물세트를 새로 선보였다.40만∼1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특히 올 설을 겨냥한 정관장A 플러스는 고급삼인 지삼과 봉밀절편 등으로 구성된 선물세트다. 또 철도회원 중 20만원 이상 산 고객에게는 KTX 30% 할인권 2장을, 아시아나 항공회원 중 15만원 이상을 산 고객에게는 1만원짜리 정관장 상품권 1장을 준다. 웅진식품은 과거 웅진인삼 시절부터 가진 인삼제품 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인삼·홍삼류 건강기능식품 선물세트를 마련했다. 진홍삼 홍삼봉밀절편(20g 10개입·4만 9000원)은 건강도 챙기고 품격있는 선물을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제격이다. 기존 홍삼절편과 차별화한 제품이다. 그랜드백화점은 최고급 건강선물인 석류세트(15개·4만 5800원)와 한지함 죽방멸치세트(1.2㎏·25만원)도 준비했다. 은의 강력한 살균·향균작용으로 웰빙선물로 각광받는 은나노 멸치세트(볶음 200g·볶음조림 150g·조림 150g·국물 300g,10만원)도 마련했다. ●주부 마음에도 쏙 들게 GS마트는 한우 선물세트인 안성맞춤 소 한마리 세트(60만원)를 20개 한정 판매한다. 또 알이 밴 길이 23㎝ 이상의 참굴비세트(알배기 4호)도 주부 시선을 끌 것으로 보인다. CJ는 지난해부터 시장에 선보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올리브유 스팸 세트 60만개를 준비했다. 또 포도씨유, 황금참기름 등 고급유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36만 세트를 마련했다.1만 8300원부터. 삼성플라자 분당점은 경북 영덕군의 대표 상품인 영덕대게 두 마리(2㎏) 이상을 시가로 내놓고, 야생에서 15년 이상 자란 장뇌삼을 33만 9000원에 선보이고 있다. ●덤 받는 재미 쏠쏠 그랜드백화점은 10+1에 이어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1+1행사’도 준비하고 있다.1+1상품은 템플러 양주(700㎖), 와인세트(아이다 750㎖+리아니치 750㎖), 벌집 토종꿀(1.5㎏), 종근당 장뇌삼골드(60포) 등이 대표적이다. GS슈퍼마켓과 GS마트는 고객들이 선물세트를 구매하면 선물세트에 추가 보너스 포인트를 추가하고, 선물세트의 종류에 따라 10개를 구입하면 1개를 무상으로 증정하는 ‘10+1’ 덤 행사를 실시한다.GS 인터넷슈퍼마켓(www.GSeretail.com)은 농·축·수산 및 공산품 선물세트 200여종을 주문후 3시간 이내에 배송한다.E마트도 10+1행사를 갖는다. ●전통적이지만 여전히 인기있는 선물 GS마트는 친환경적으로 재배한 신고배 7.5㎏(10개)을 5만 2000원에 판매한다. 당도 체크를 통해 가장 당도가 높고 크기가 1개에 750g 이상인 과일로 선정했다. 친환경적으로 기른 사과 8㎏(21개)이 9만 5000원이며 껍질째 먹을 수 있다. E마트는 자사 브랜드 이베이직 남녀 양말세트 2족(2500,2700원)을 내놓았다. 또 피에르카르댕 벨벳 덧신 2족 세트를 5000원에 판매하는 등 실속 이색선물을 많이 내놓았다. 가장 부담없는 선물 가격대인 9000∼1만 5000원대에는 샴푸비누·김·차·포도씨기름·타월 세트 등 다양하다. 해태음료는 음료선물의 대명사인 패밀리 주스를 중심으로 더 고급스러워진 가정방문 선물세트 1·2호와 꿀물·홍삼이 만나 몸에 좋은 웰빙 선물세트, 황도·백도 선물세트, 과일 통조림과 주스로 구성된 종합 선물세트 등을 내놓았다. ●톡톡 튀는 건 어떨까? 올림푸스한국의 온라인 인화사이트 미오디오(www.miodio.co.kr)는 고향에 떨어져 사는 부모님을 위한 효도선물로 매달 가족들의 다른 사진을 볼 수 있는 달력·앨범·액자 등 다양한 인화 상품을 내놓았다. 설 선물로 가입하면 고객에게 2500원 상당의 무료 인화권도 준다. 또 퍼즐갤러리(www.puzzlegallery.co.kr)는 디카로 촬영한 가족 사진을 조각 맞추기 퍼즐로 만들어 준다. 퍼즐이 완성되면 액자 장식도 가능하다.2만∼18만원. 좋은사람들은 새해 선물로 힘과 부의 상징인 용과 나비 무늬를 넣은 속옷을 제안했다. 검은색에 흰색 줄무늬의 용시리즈 남성 삼각과 트렁크로 각각 1만 2000원과 1만 8000원. 또 동양적 신비감이 담긴 여성의 나비 무늬의 브라 팬티 세트는 3만 9800원.(080)320-6620.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유럽 순방 江澤民 연일 곤욕

    국빈 자격으로 유럽·중동을 순방중인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연일 곤욕을 치르고 있다.인권단체들과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 등이 가는곳 마다 ‘진드기 시위’를 벌여 ‘흠집’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달 3일까지영국·프랑스·포르투갈·모로코·알제리·사우디아라비아 등 6개국 순방에나선 장 주석은 당초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축 문제 등 공동 관심사를 논의하고 유일 강대국인 미국을 겨냥,중국의 외교력을 과시할 참이었다.특히 국제사회의 핵확산 금지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미 상원의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안 부결문제를 집중 부각함으로써 중국의 위상을 높인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장 주석의 ‘야심’은 첫 방문국인 영국서부터 빗나갔다.영국 왕실과 정부는 50년만의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한 장 주석을 국빈으로 모셨으나인권단체들은 방문지마다 인권탄압 반대 시위를 벌였다. 18일 인권운동가 2명이 장 주석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란히 탄 마차를 향해 돌진하다 체포된데 이어,19일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버킹엄궁 밖에서인권단체들이 ‘고추가루’를 뿌렸다.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22일 리옹에 도착하자 국제사면위원회(AI)과 국경없는 기자회(RSF) 등의 주도로 200여명이시위를 벌였고,23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장 주변에서도 시위는 이어졌다. 그러자 태연한 척하던 장 주석은 끝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그는 24일 “인권문제는 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제이며 해당국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중국과 바티칸 교황청은 그동안 관계회복의 최대 걸림돌이던 주교 임명문제를 해결함에 따라 올해말까지 외교관계를 회복하기로 합의했다고 홍콩의타이양바오(太陽報)가 25일 보도했다. 김규환기자 khkim@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