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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등가:상(서울 6백년만상:29)

    ◎기생 떠돌며 몸팔던 「양수척」서 유래/미모와 춤솜씨로 벼슬아치와 어둘려/한말 관기폐지후 조합결성,권번으로 이태조 개국 연회에서 정승 배극렴이 당시 명기였던 설매에게 말한마디 잘못 건넸다가 조소를 받은 얘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대취했던 배극렴은 『너는 아침에는 동쪽 집에서 먹고 저물면 서쪽에서 자니,나와 하룻밤을 지낸들 어떠랴』고 설매를 희롱했다.그러자 설매는 『동가식 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왕씨의 신하 노릇하다가 이씨의 정승 노릇하는 대감과 하룻밤을 ,봇지낼 것이 있겠습니까』고 응대했다. 오늘날 유흥업소 호스티스 격인 기생의 연원은 멀리 정도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기생의 종류는 본래 떠돌이 유민인 양수척에서 유래해다』고 기술하고 있다.유민들은 호적도 부역의 의무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매춘행위를 하다가 양수척이란 신분이 됐다.양수척이란 관기의 또다른 별명이며 이들몸에서 남아가 태어나면 노비로 삼고 여아가 출생하면 기생으로 만들었다.구한말에는 일본의 창녀들이 서울에 몰려들어 양수척과 마찬가지로 매음하고 다녔다. 이런 경로로 등장한 기생이란 새로운 신분계급은 음악과 무용의재능을 연마하는데 열중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궁중의 연회에 동원되는 여악의 기능도 갖게 됐다.또한 이들은 미모와 춤솜씨등으로 왕실과 벼슬아치들의 사랑을 받아 태조 같은 임금은 총애하던 기생 칠점선을 옹주로 봉하기도 했다. 태종에 이르러 음란한 풍속이 더욱 심해져 왕이 이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정승 허조가 반대했다.그의 의견은 『남녀의 성욕은 인정의 자연인데 만일 이를 금지하면 청춘의 자제나 그밖의 유력자가 도리어 양가의 부녀를 오욕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어서 폐지를 면했다. 기생에는 「1패·2패·3패」로 구분돼 있었다.1패는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최고급 기생이고 2패는 각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생을 말한다.3패는 지금으로 치면 창기로 아무에게 몸을 파는 그런 기생들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은 있게 마련이다.기생과의 연애(?)는 몇번 만나서는 안되므로 계속 요릿집을 드나들었다.돈을 물쓰듯 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았다.지주의 아들이 놀아나면 반드시 한달 1할변으로 돈을 대주는 자가 있었고 심한 자는 「부사후출급」이라는 증서를 내고 돈을 썼다.아비가 죽은 뒤에 돈을 내겠다는 탕아의 짓이다. 동기로 있을 적에 돈을 쓰고 그 「처녀성」을 사는 것을 『머리 얹는다』고 말했다.정보를 바치는 대신에 남자로부터 옷에서 장롱·패물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받고 댕기를 쪽으로 바꾼다. 기생제도는 구한말 서양문물이 물밑듯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회제도의 개혁과 더불어 흔들리기 시작한다.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서울에 기생들의 조합인 한성 기생조합이 탄생하게 된다. 기생조합은 1914년 권번이란 일본식 이름아래 서울시내에는 한성·다동·조선등 10여개의 군소 권번이 생겨났다.이것이 기생들의 집단적으로 생존경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으며 동시에 기생을 데리고 유흥하는 장소가 요정으로 옮겨지게 됐다.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백제의 신화/무왕때부터 “왕은 용의 아들”(백제를 다시본다:11)

    ◎건국신화 없어 고구려·신라에 열등감/권위회복·단결위해 「용 설화」 만들어/능산리 금동용봉향로의 태자상 장식이 그 증거 우리나라 상고사중 한민족 중심인 단군조선,부여와 고구려에는 각기 고유하면서도 서로 맥이 통하는 신화가 있다.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인 설화에는 신화,전설과 민담이 포함된다.어떤 학자는 신화를 건국,씨족,마을과 무속의 네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한국의 신화에서는 신격을 타고난 인물이 범상을 벗어나 과업을 성취하거나 주인공의 원향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출생­성장­혼인­즉위­죽음의 통과의례에 대한 과정을 다룬 건국신화나 시조신화를 으뜸으로 쳐왔다.왕권을 신성화하고 있는 한국의 건국신화는 신화에서 벗어나 역사화된 것으로,그리고 전설이 역사적 믿음을 이념으로 삼은 신화와 전설의 복합체이다.신화는 민족적인 범위에서 전승된다고 한다.국가창건신화의 경우 국가가 바로 증거물에 해당하며,만일 신화에서 이와같은 증거물이 없다면 전승은 중지되거나 민담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 「삼국유사」권제1기이 제2에 의하면,왕검조선은 상제인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지상(신단수아래 신시)에 내려와 3.7일을 굴에서 지낸후 여자가 된 웅녀와 결혼해서 난 단군왕검이 아사달에서 나라를 엶으로써 생겨난다.그 해가 요제 즉위후 50년 경인년(실제는 정사)으로 기원전 2333년(동국통감에 의해 당고 무진년)에 해당한다.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일컫고 이어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5백년을 다스리다가,주 무왕(호왕)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조선이 들어서매 장당경으로 옮기고 후일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그의 나이는 1천9백8세였다 한다.최근 그의 무덤(소위 단군릉)이 평양근교 강동군 대박산기슭에서 발굴되었다고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무덤의 위치,연대,묘의 구조와 출토 유물 등에서 여러가지 모순점을 보인다. 북부여의 경우 해모수가 하늘에서 다섯마리의 용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나라가 이루어진다.그 해가 전한 선제 신작 3년으로 기원전 59년에 해당한다.그의 가계는 해부부(가엽원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함)­김왜(하늘이 점지한 개구리같은 어린이로,해부루의 수양아들이며 태자임)­대소에게로 세습된다.삼국유사 권1 동부여조에 의하면 이 나라는 왕망 15년,기원후 22년(고구려 3대 대무신왕5년)에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부여는 346년 연왕 모용황에게 망하고,실제 고구려에 투항하는 494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동명왕(주몽,성은 고)의 개국설화에는 대개 세가지가 전한다.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그는 북부여의 건국자인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사이에 알로서 태어났는데(난생),그 해가 한 신작4년,기원전 58년이다.그리고 그는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와는 이모형제가 된다.그가 금와의 태자인 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졸본주(졸본부여,홀본 골성)로 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규보의 「동국리상국집」동명왕편에 의하면,그 해가 한 원제 12년으로,기원전 37년(최근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잡고 있으며 그 이전단계를 「구려」로 보고 있다)이며 그의 나이 21세 때이다.그리고 기원전 19년에는 그가 부여에 있을때 예씨부인으로부터 얻은 아들로서,자기집 일곱모의 소나무 기둥 아래(칠령칠곡의 소나무위에 선 기둥)에서 부러진 칼을 찾아 온 유이(기원전 19∼기원후 18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기원전 18∼기원후 28년)이다.그는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왕자(고구려의 제2대왕)존재에 신분의 위협을 느껴 한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년)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하북위례성(현 중랑천근처이며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옮긴 하남위례성은 강동구에 위치한 몽촌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하고,형인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근거를 삼는다.이들 형제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삼국사기 백제본기 별전(권23)에는 북부여의 둘째왕인 해부루의 서자인 우대의 아들로 나와 있다.이는 그의 어머니인 서소노가 처음 우태의 부인이었다가 나중 주몽에게 개가하기 때문이다. 이들 신화에서는조지훈과 이동환을 비롯한 이 관계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국조탄생설화,이주개국형,난생설화,개탁국가,중서자립국과 이모형제들이 공통된다.다시 말하여 단군조선­부여­고구려­백제는 같은 맥이나 한핏줄을 이루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최근 북한에서 이러한 맥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정당화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천손인 해모수,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의 신화적인 요소와,알에서 태어난 주몽의 탄생과 같은 난생설화가 없이 처음부터 주몽­서소노­우태라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그래서 백제에는 부여나 고구려다운 건국신화나 시조신화가 없다.이것이 백제가 어버이 나라인 고구려에 항상 열등의식을 지녀온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점은 온조왕 원년에 동명왕묘를 세운 것이나,백제 13대 근초고왕(346∼375년)이 371년 평양으로 쳐들어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331∼371년)을 사살하지만 평양을 백제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한성으로 되돌아 오는 점 등에서 이해된다. ○왕권 신성화 애써 그래서 백제의 왕실은 고구려왕실에 대한 열등감의 극복과 아울러 왕실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애를 써왔다.그것이 전설적인 신화보다는 용이 왕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왕권의 탄생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인 것 같다. 중국과 한국에서 용은 물(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농경사회를 상징하는 왕이다.최근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의 뚜껑과 몸체에 표현된 도교와 불교적 문양과 용봉(또는 주작과 현무),연화문 가운데의 태자상의 장식등이 그러한 증거로 보여진다.이것은 후일 신화가 없어도 될 것 같은 고려나 조선도 「제왕운기」나 「용비어천가」를 만들어 건국의 정신적,이념적 틀을 꾸준히 보완해 나가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농경사회의 수신… 왕권 상징/부여 절터에서 용무늬 벽돌 출토/용의 의미 백제는 신화나 설화의 자료가 사실상 희박하다.특히 건국신화는 없다.우리 신화의 원전격이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의 경우 고구려,신라,가락의 건국신화만을 다루었다.그러면서 신라 중심의 호국,인문신화에 치중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건국신화 말고는 무왕(?∼641년)과 관련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용이 등장하는 설화다.그 어머니가 서울 남쪽 못가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못 속의 용과 관계한 이후에 낳은 아들이 무왕이라는 것이다.용을 모티브로 한 숱한 「삼국유사」기록 가운데 하나인 이 무왕과 용에 대한 대목은 시사하는 바 크다. 용은 대체로 호교의 상징 내지는 호국의 상징으로 나타난다.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 무왕은 호교와 호국 두 요소에 바로 연결된다.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했고 부소산성과 마주하는 백마강 건너 울성산성 근처에 호국사찰 왕흥사를 완공시켰다.그는 금강 언덕의 바위에서 예불한 다음 배를 타고 건너가 법회에 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신라를 위협했다.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 가장 막강한 군주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 영토를 관리하는데도 주력했다.이렇게 보면위대하고 훌륭한 존재와 비교되는 용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할 수도 있다.그래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과 무왕의 연관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난해 연말 사비시대 백제의 고토인 부여 능산리 출토품 김동용봉봉래산향로의 용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된다. 더구나 뚜렷한 신화가 없는 백제가 사비시대에 창조한 신화적 요소가 용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그렇다면 용에는 백제인들의 융합을 위한 신성성이 내포된다.이는 역사와 관련을 가지면서 민족의 단합을 꾀하는 신화구성 원칙에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 추리기법 소설 독서계 휩쓴다

    ◎「무궁화 꽃…」「앵무새…」「개미」 등 20여종 폭발적 인기/인종갈등·살인사건·핵개발 등 주제 다양/긴장감·호기심 유발,독자들 기호에 부합 추리기법을 활용한 소설들이 독서계를 휩쓸고 있다.지난해 하반기이후 베스트셀러 소설부문 상위권을 번갈아 차지하며 큰 인기를 모았던 추리기법의 소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영원한 제국」「앵무새 죽이기」「개미」「펠리컨 브리프」「돌연변이」등 줄잡아 20여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돌연변이」「펠리컨 브리프」등이 본격추리물,즉 「살인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지적게임」을 추구한 소설이라면 나머지 소설들은 추리물 형식을 빌리되 다양한 주제를 독자들에게 제시한 작품들로 인정받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중반에 발표돼 몇달째 교보문고·종로서적·을지문고등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종합순위 1∼2위를 오르내리는 「영원한 제국」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등 2편. 평론가 출신 작가인 이인화씨의 「영원한 제국」은 조선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해 왕실의 서고인 규장각에서 한권의 책이 없어진 뒤 잇따라 살인이 일어나고 젊은 관리가 이에 휘말려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따라서 이야기 전개는 추리 형식을 따랐지만 그 주제는 유학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두 집단간의 갈등,즉 세계관의 차이라는 철학적인 명제에 매어 있다. 「월간 책」이 독자 1만9천여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독자가 뽑은 93년의 가장 좋은 소설」로 선정한 김진명작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추리소설의 틀을 충실히 따른 작품이다. 실존했던 인물인 재미교포 물리학자 이휘소씨의 돌연한 죽음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한국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미간의 갈등등 20세기 후반의 국제정세를 폭넓게 다룬 역사소설 또는 정치소설로 인정받고 있다. 외국소설인 「개미」와 「앵무새 죽이기」도 문명비판과 흑백간의 인종갈등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추리소설의 틀에 담았다. 이밖에 한승원씨가 발표한 「시인의 잠」과 고원정씨의 「바다로 가는 먼길」에서도 「기억상실과 복수극」,「실종자에 대한 추적」이라는 전형적인 추리소설 구조를 활용했다. 이처럼 추리기법을 쓴 소설들이 인기를 끄는데 대해 출판·서점업계는 『책머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한꺼풀씩 벗겨나가는 추리물 형식이 끝까지 호기심과 긴장감을 유지하기 원하는 요즘 독자들의 기호에 맞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추리물 애호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어 작가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겨냥해 작품을 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교보문고 박동수일반서적과장은 『「제3의 사나이」「대위와 적」등 추리물을 여럿 발표한 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노벨문학상에 단골 추천된데서 알 수 있듯이 구미 각국이나 일본에서는 순수문학과 추리소설을 구분하지 않게 된지 오래』라고 말하고 앞으로 국내에서도 추리기법을 쓴 소설들이 뿌리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 백제인의 불교신앙(백제를 다시본다:8)

    ◎성왕이래 융성… 불국정토건설 희구/미륵신앙 대유행… 미륵사는 그 중심/6세기 불경·불상 이미 국제적 수준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이 매우 많다」.주서의 이 기록처럼 백제에는 불교가 성했고,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불교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풍진세상 살면서도 때묻지 않는 연꽃의 그 맑은 마음 배우기를 희망했다.그리고 미륵불이 출현하는 아름다운 불국토를 희구하면서,불전에 향을 사르는 공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그들이 꿈꾸던 행복은 서산마애불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웃음같은 것이기도 했다.불국은 향기로 가득한 나라다.계의 향기,삼매의 향기,그리고 해탈의 향기가 가득 피어나기를 불전에 기원하던 백제인의 염원은 최근에 출토된 아름다운 향로에도 스며있다.백제의 향로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또 그 작은 향로에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있고,음악이 또 거기에 있음은,자신을 향기롭게 닦고 세상을 향기롭게 꾸미려던 진실된 마음의 발로이기도 한 것이다. ○향로에도 불심스며 백제는 한강 유역에 도읍하고 있던 4세기 후반에 이미 불교를수용한다.그러나 웅진시대를 지나 사비로 천도할 무렵까지의 기록은 거의 없다.다만 성왕 이후의 기록이 약간 전할 뿐이다.사비시대라 할지라도 불교에 관한 기록이 적고 유물과 유적 또한 흔치 않다.그나마 단편적인 자료가 남아 이 시기 백제불교가 국제적 수준의 문화를 소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백제 구법승의 발길은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인도에까지 미쳤다.사비성에는 인도의 패달다삼장이 겸익을 따라와서 율부번역에 참여했다.선신니등 일본의 구법유학승이 와서 백제불교를 배웠다.사신과 구법승의 중국 내왕을 통해서 부지런히 선진의 문화를 수용했고,동시에 신라 및 일본 등지로 그들의 불교문화를 전파했다. 겸익이 인도의 구법유학에서 돌아온 것은 성왕 4년(526년)이다.왕은 그를 흥륜사에 살게하고 28명의 고승과 함께 역경에 종사토록했다.율부 72권이 번역되자 담욱과 혜인이 율소 36권을 저술한다.겸익의 인도 유학과 율부의 번역은 백제불교의 폭과 역량이 국제적인 것이었음을 일러준다.백제불교는 계율을 중시했다.율부의 번역과 주석이 그 대표적 사례다.이밖에도 법왕은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불사르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법왕이 살생을 금한 것은 불교의 윤리를 국민의 생활 속에 심어주려는 노력의 하나로 풀이될수 있다.이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은 더없이 소중하다.불살생은 자비를 적극적 실천하는 일이다.우리의 일상생활을 제멋대로 방치해둔채,새로운 인생의 행로나 역사는 열리지 않는다.계의 정신은 나쁜 행위를 막고 대신 훌륭한 일은 권장하는데 본래의 뜻이 있다.백제불교가 계율을 중시했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겸익,인도 불교유학 미륵사,미륵불광사 등의 사찰이 세워졌던 백제사회에는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다.AD634년에 낙성된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원이다.전륜성왕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던 백제 왕실의 원찰이기도 했다.이 절의 창건연기설화에서 용화산 아래의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미륵사는 미륵하생신앙을 토대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때 이 세상은 낙토로 변하고 나라는 깨끗이 잘 정돈되어 온갖 재난은 사라진다고 했다.그리고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 것으로 믿었다.미륵신앙은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구라는 특징을 지닌다. ○전륜성왕의 이념 구현 그러나 미륵불의 세상은 사람들의 노력과 공덕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미륵신앙은 희망의 신앙이거니와 끊임없는 정진의 신앙이기도 하다.아무튼 백제인들은 불국토의 건설을 꿈꾸었고,그것은 미륵사의 창건으로 표출되었다.경전은 미륵불이 이 세상에 출현할때 샹카라는 전륜성왕이 등장하여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린다고 기록하고 있다.이같은 내용을 감안하면 백제 왕실의 미륵사 창건은 정치적 의도를 담았다고 하겠다.그것은 불교적 정치이념인 전륜성왕사상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전륜성왕은 무력이나 힘에 의한 지배자가 아니라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려서 천하를 통일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였다.왕실에서는 전륜성왕사상을 빌려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없지 않았겠지만 전륜성왕의 이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려 했던 욕구 또한 강했던 것이다. 백제의 승려들에게는 법사·율사·선사·주사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불교의 여러 분야중에서 어느 하나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승려가 있었던 것이다.경전은 거의 대부분이 유통되었겠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열반경·법화경·유마경·반약심경 등이 있다.그리고 천대학이나 삼론학에 조예가 있는 고승도 있었다.현광은 위덕왕때 진나라에서 남악 혜사로부터 법화경을 배우고 법화삼매를 증득했다.귀국 후에는 웅천에서 교화했다고 한다.그는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쳤고 귀국 도중에는 용궁에 초청받아 설법했다는 설화가 전할만큼 유명했다.혜현은 수덕사에서 법화경과 삼론을 강의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관륵도 삼론학에 밝았다.의영이 약사본원경소와 유가론의림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전하는 것이 없다. ○일 아스카문화에 기여 백제에는 대통사·왕흥사·미륵사 등의 큰 절이 있었다.최근의 발굴로 그 규모가 밝혀진 익산의 미륵사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큰 절이었다.신라에서는 선덕녀왕때에 황용사에 9층탑을 건립하고자 하여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해간 일이 있다.이는 백제의 건축 기술이 신라에 비해서 앞서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많은 백제의 고승·기술자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아스카문화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일본 고대국가의 정비에 정신적 이념을 제공한 것도 물론 백제다.성왕30년(552년)에는 일본에 본격적으로 불교를 전했다.위덕왕 24년(577년)에는 경론과 율사와 선사 등을 보냈다. AD588년에는 불사리와 사문과 화공 등이 건너갔는가 하면 AD595년에 도일한 혜총은 쇼토쿠태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AD602년에 일본으로 간 관륵은 최초의 승정이 되기도 했다. 백제가 신라에 무력으로 병합된 이후인 신문왕때에 국로가 되었던 경흥이 백제의 웅천주 출신이었음은 주목할만 하다.그는 유식학의 대가로 당시의 대표적 고승이었다.이처럼 융성했던 백제불교는 통일신라의 새로운 불교발전에도 공헌했다.삼국은 오랜 분열과 대립으로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많은 이질적인 것이 있었지만 불교라는 공통의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민족 융합이 가능했다.우리 민족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백제 불교문화의 향기는 최근에 발견된 향로에서 아직도 풍기고 있다. ◎백제불교의 역사/384년 동진서 전래… 일에 전파/사비시대 정림사·금강사 등 많은 사찰 건립 백제불교에 관한 기록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이는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삼국사기」는 AD384년 백제에 처음 불교가 들어왔다고 기록했을뿐 그 이후 성왕 19년(AD541년)까지 불교관계 기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있다. 그러나 성왕 19년에 불교기사가 다시 등장한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다.그 해는 「삼국사기」기록대로라면 불교전래 1백57년이 되는 해이고,시기적으로는 사비천도 직후에 해당한다.그렇다면 성왕 때부터 불교가 융성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실제 사비시대에 백제불교가 대단히 번창했다는 사실은 근래 부여일대에서 발굴된 절터에서도 확인되었다. 군수리절터를 비롯,동남리절터,정림사절터,김강사절터 등이 그 대표적 발굴사례다.그리고 부여에서 멀리 않은 익산 미륵사절터는 발굴결과 사비시대 최대의 가람으로 밝혀졌다.이밖에 사비시대 백제고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많은 절터가 산재해 있다.또 도기가마와 기와가마에서도 불상과 연꽃무늬기와,연꽃무늬상자형벽돌 등의 불교관련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원년(AD384년)이다.백제는 침류왕 원년 7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백제에 처음 불법을 전한 호승 마라난타는 귀국길에 오른 백제사신과 함께 왔을 것으로 보고있다.그리고 나서 오랫동안 불교관계기사가 나오지 않지만,사비시대가 개막되면서 백제불교는 국제화하는 양상을 띠게된다.구법승들이 중국은 물론 서역까지 진출하는가 하면,일본의 구법승들은 백제를 찾았던 것이다. 삼국 가운데 최초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나라는 백제다.그 시기는 AD552년이다.고구려보다 32년 먼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백제불교에 관한 기록은 일본쪽에 더 많이남아있다.
  • 「상공의 날」 포상자 공적사항

    ◎급탑/김준형 (주)행남사 회장/국내 도자기기술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려 지난 42년 우리나라 첫 도자기 업체인 행남사를 설립,국내 도자기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도자기 업계의 산 증인.전통 사기그릇에서 본 차이나,세라믹스 자기,초정 자기 등 도자기 전문 생산체제를 갖췄다. 지난 86년에는 업계 처음으로 기술연구소를 세워 매년 매출액의 5%를 연구개발비로 쏟을 만큼 기술개발에 정성을 다했다.38건의 소재 및 도자기 기술을 개발했으며 실용신안 및 의장등록도 11건이나 된다.93년 현재 42개 품목의 우수 디자인 마크를 획득했다. 제품의 고급화에 전력,도자기의 여왕이라는 본 차이나를 자체 개발한 뒤 최고의 강도와 백색 투광도를 자랑하는 「울트라 파인」이란 초정 자기를 선보여 격찬을 받았다.프랑스 베어나도사 등과 함께 태국 왕실에 전용 식기를 공급하고 있다.베네수엘라에 6백만달러,인도에 4백만달러의 플랜트수출도 했다.5분 일찍 일하고 5분 늦게 퇴근하는 등 5.5 운동을 전개,20% 이상 생산성을 높였다. ◎은탑/이순국 온양팔프 회장/법정관리기업 인수 정상화 지난 77년 온양팔프를 설립,83년에 기업을 공개했다.경영 부실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신호제지,대화제지,일성제지 등을 조기 정상화시켰다. 지난 87년 부설연구소를 세워 일본에서 수입되던 난연벽지,과실재배용지 등 고부가가치상품을 잇따라 개발,연간 3백40억원의 수입대체효과를 올렸다.개인 주식 30억원을 출연,종업원 집단지주제를 실시하고 자유복장제 등을 도입해 사내화합을 다졌다.부채비율 1백31%,차입금 의존도 38% 등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매년 30억원 이상의 당기 순이익을 내고 있다. ◎동탑/장주일 삼성전자 부사장/통신산업발전 견인차 역할 지난 58년 체신부에 투신,35년간 국가기간 통신망 발전에 이바지해 통신 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견인차역할을 했다.영동전신전화국장 재직시 전자식 교환기를 첫 설치했으며 삼성전자로 옮긴 뒤 지난 80년에는 전자교환기의 국산화 개발에 성공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아날로그 방식의 휴대용 전화기,최소형 무선전화기 등을 잇따라 개발했다.
  • 해외건설 1천억불 돌파 공사현장 28년 뒷얘기

    ◎공사 따내려 모슬렘교도로 변신까지/사우디왕에 강원도 매 진상… 거래길 터/중동선 한국인 모략 유언비어로 곤욕/입찰서류 싸놓고 보름동안 한곳에서 “낙찰” 기원하기도 해외건설 수주실적이 지난해말 현재 1천42억8천2백만달러를 기록,1천억달러를 돌파했다.지난 65년 현대건설이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와트 고속도로 공사를 5백40만달러에 수주한 이후 28년만이다.그것은 현장 사나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불굴의 투지,도전의 결과이다.그러나 그러한 결실을 얻기까지 말못할 숱한 애환과 에피소드들이 「신화」처럼 남아있다.현지인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해 먹기힘든 토속음식을 맛있는 듯 집어삼켜야했고 산악 공사장에선 산소부족으로 모래알 같은 설익은 밥으로 연명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산골의 매까지 건설외교에 한 몫을 했다.사막과 정글및 산악에서 한국인 건설전사들이 남긴 해외건설의 뒷얘기를 모아본다. ○교인 증명서 얻어 ○…중동에서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모슬렘 교도로 변신한 건설역군이 있었다. 동부건설(당시 미륭건설)은 지난 81년 4월 사우디에서 열린 이슬라믹 올림픽을 앞두고 사우디 정부가 발주한 막카포츠시티공사를 시공중이었다.그러나 계약체계가 유럽식이었던 탓으로 동부건설은 공정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해 독일업체에 공사를 넘겨야하는 상황에 몰려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막카공사 뿐만 아니라 사우디에서 더 이상 추가공사를 바라볼 수 없게 되는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현장팀은 발주처를 설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마침 주감독관이 막카시내의 노부모집을 재단장한다는 기회를 접할 수 있었다.즉시 개축을 실비로 해주겠다고 제의,가까스로 승낙을 얻어냈으나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쳤다.개축할 집이 막카시내에 있어 모슬렘교도가 아닌 한국인은 출입할 수가 없었다. 고심끝에 일부는 본국 휴가기간을 이용해 서울 한남동 모스크에 나가 교리교육을 이수하고 세례를 받았다.나머지 인력은 사우디 지다의 한국인 이맘(주임목사)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교인 증명서를 어렵사리 얻어낼 수 있었다.이렇게 급조된 모스렘 공사팀은 주감독관의 부모집을 개축할 수 있게 됐다.감독관집 개축공사장에 투입된 근로자들은 날마다 5차례씩 모스크에서 살라(기도)를 해야했고 라마단(금식기간) 한달 동안엔 주위눈치를 보며 숨어서 식사를 해야했다.이같은 천신만고 끝에 동부건설은 막카스포츠시티공사를 무난히 끝낼 수 있었다. ○비행기로 긴급수송 ○…중동 건설시장 개척에는 강원도 매까지 한몫을 했었다. 78년봄 주사우디 한국대사관 건설관 허재영씨에게 사우디 도시지방성의 마지드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한국을 다여온 뒤 형인 칼리드 국왕에게 귀국보고를 했더니 한국의 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시하더라는 것이었다.그러니 한국산 매를 구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 요지였다.허건설관은 즉시 서울에다 「사우디국왕 한국산 매 사육 희망 조속조치 요망」이라고 타전했다. 건설부는 신문에 「매 급구」라는 광고를 내고 창경원의 동물원 등 생각이 닿는 데라면 어디든 수소문했다. 그러나 매 특히 칼리드 국왕이 원하는 사냥매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집에서 기른 매는 사냥을 못하고 야생매는 사람 말을 듣지않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심초사하던 장관에게 마침 건설부 지방청장회의에 참석했던 원주청장이 훈련된 사냥매를 구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부리나케 서둘러 그 매를 사우디로 보내려는데 김포세관에서 제동이 걸렸다.조수 보호및 수렵에 관한 법률상 매는 출국 금지 대상이었던 것이다.긴급관계기관대책회의 끝에 결국 김포를 통해 매를 내보내되 세관장은 모르는 체 하기로 했다. 허건설관은 그해 6월10일 상오7시 눈 빠지게 기다리던 한국 산 매를 지다공항에서 인수했다.허건설관은 상오10시 발 리야드 행 비행기를 타려고 했으나 공항직원에게 걸렸다.사우디 관계법상 매는 비행기 탑승을 못하게 돼있다는 얘기였다.그러나 『칼리드 국왕께 진상할 매』라는 한마디에 특별 리무진버스까지 동원,매를 비행기까지 모셨다.그날 하오5시 사우디궁에서 매를 전달받은 칼리드 국왕은 『내가 좋아하는 매를 보내준 한국정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국왕은 진상받은 매가 마음에 들었던지 허건설관에게 『한국에 매조사단을 파견하고 싶다』고 말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황태자를 비롯해 22명의 각료들이 국무회의 참석차 대기중이었다.한국산 매를 선물받고 기뻐하는 국왕의 모습을 본 각료들은 허건설관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꾸기 시작했다.국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는 허건설관에게 평소 거만하게 굴었던 비서실장까지 『숙소는 잡았느냐』,『비행기편은 문제가 없느냐』는등 친절하게 대했다.그 이후에도 왕실관계 업무는 계속 부드럽게 이뤄졌고 다른 정부기관과의 거래도 잘 풀렸다. 매 한마리를 선물받고난 뒤 한국 관계 일에 대해 각별히 잘 봐주던 칼리드국왕은 지병으로 82년 6월 서거했다.허건설관은 그 이후 전 국왕에게 진상했던 매의 행방을 알아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매를 사랑했던 국왕이 서거하자 매도 관심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건설 현장엔 미신과 터부도 많다. 입찰이란 절대절명의 과제를 앞둔 시점에서는 현장의 사나이들도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완성된 입찰서류를 방바닥에 펼쳐놓고 중역부터 순서대로 전직원이 밟고 지나가도록하는 것은 낙찰을 기원하는 신성한 의식의 하나이다.서류뭉치를 싸놓고 1주일 동안 목욕도 안한 몸으로 그 위를 깔고 뭉개기도 한다. ○절대절명의 위기 복과 비밀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입찰 보름전부터 숙소겸 준비 사무실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식사도 배달해 먹고 식기도 내보내지 않고 쌓아둔다.그런 행위를 미신이나 터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모두의 합일된 열정,목표 달성에 대한 정성이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80년대까지 계속 ○…중동건설 경기가 고조되기 시작할 무렵인 70년대 중반께부터 사우디 투웨이트 등지엔 한국인을 모략하는 유언비어들이 나돌아 현지 대사관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76년 가을 당시 유양수 주사우디대사는 사우디 외무장관으로부터 깜짝놀랄 얘기를 들었다.사우디측의 얘기는 『중동에 나와있는 한국인은 단순히 근로자가 아니라 전원이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군인이며 미국 CIA의 지령에 따라 언제든지 군사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물론 낭설이라고 믿지만 한국측에서도 주의를 환기시켜달라』는 내용이었다.사우디 뿐만 아니라 쿠웨이트에서도 신문에 비숫한 내용이 실리기도했다. 사우디 외무장관의 얘기로는 사우디 국왕이 쿠웨이트를 방문했을 때 그 쪽 국왕으로부터 유사한 말을 들었다고 했다.유대사는 즉각 본국에 보고하고 건설업체들과 숙의했다.그 결과 우선 현지의 오해를 살만한 소지부터 없애자는 견해가 가장 많았다. 예를 들면 한국 근로자들은 본국에서부터 같은 모자,같은 의복,같은 신발을 신고 현지 공항에 도착한다.공항에서도 인솔책임자 지휘아래 군대식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현지인들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잡업복을 입은 군대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이같은 소문이 나돈 데에는 우리나라의 해외 건설시장 진출을 시기하는 경쟁국들의 모함 탓도 없지 않았다.이 문제는 한국 근로자의 숫자가 급감하기 시작한 80년대초까지 계속 괴롭혔다.
  • 교통수단:중(서울 6백년 만상:19)

    ◎차 1903년 왕실용 첫 도입/택시 1912년 운행 시작… 급속 확산/6·25직후 「시발」 등장… 국산차시대 개막 『오줌 찔끔 진고개,방구 뿡뿡 자동차』­1920년대 초기 서울의 개구쟁이들이 부르며 놀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당시 자동차는 종로나 육조(중앙청)거리등 큰길만 달렸다.그 속도가 어찌 느린지 골목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이 자동차 뒤에서 뿜는 「가솔린」냄새를 맡고자 달음박질해 따라갈 정도였다.한시간에 한대 구경하면 그날은 「운수좋은 날」이었다. 운전사들은 양복을 입고 모자는 「헌팅 캡」을 꼭 뒤로 돌려썼다.운전사는 선망받는 엘리트 직업이요,신식직업이었다.특히 왕족의 차를 몰 경우엔 가문의 영광으로 삼기까지 했다.관용차운전사는 금테가 요란한 고등관제복을 입고 으스댔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3년으로 어림된다.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도입시기와 배경등이 명확치 않지만 왕실전용으로 이용하기위해 영국과 프랑스에서 1대씩 들여온 것이 효시라는 설이 유력하다.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망국의 한과 울분에 잠긴 의친왕,순종비의 부친 윤택영등에게도 차례로 승용차를 제공했다.고종과 순종이 전용차 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에서 엿볼수 있듯 우리의 자동차문화는 제국주의자들의 유화정책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귀족과 작위를 받은 일부 고관들의 전용물이던 자동차는 1914년부터 돈많은 갑부들도 탔다.광산부자 박기효·최창학과 친일재벌 한상용,대지주 배석환·김종성등이 그들이다. 일본인 곤도(근등삼천삼)와 한국인 이봉래가 1912년 포드차 2대를 도입,1시간에 5원씩 받고 영업을 개시한 것이 택시업의 시작이다.당시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2∼3명밖에 없어 운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운전사 양성소」를 개설했고 미국과 자동차수입특약도 맺었다. 1926년부터 택시업이 수지를 맞추면서 서울 곳곳에 수십개의 택시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한강 인도교가 준공된 이듬해인 1918년의 서울의 자동차의 수는 2백12대였다.1926년에 1천5백87대,1931년에는 4천3백31대로 크게 늘어났다.지난 2월말 기준 자동차 등록대수는 1백77만5천1백41대.6명당 1대꼴로 생활화됐다. 그 당시 요금은 시내에서는 어디를 가든 80전이었다.한참뒤에 1원으로 올랐다.택시는 전화로 불러서 탔다.시내 요리집에서 나온 건달들이 음벽정 또는 천향원별장등 「2차」로 가면서 주로 이용했다.기생들은 택시운전사를 좋아해 은근히 「데이트」를 즐기는 일이 잦았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우리의 손에 의해 그 유명한 시발자동차가 서울에 첫 등장했다.국산차의 효시이기도 한 시발자동차는 첫 출고때 8만여환 하던 것이 60년대에는 대당 3백만환을 웃돌 정도로 값이 치솟았다. 62년5월 개조차가 아닌 산뜻한 모양의 세단형 자동차가 일본에서 수입된데 이어 그해 8월에는 부평에 자동차공장이 준공되면서 조립생산차인 「새나라」가 장안을 누볐다.그 다음해인 63년11월 신진자동차는 소형세단 「신성호」3백대를 만드는 한편 일본 도요타와 손을 잡고 코로나를 생산했다.이어 크라운·코티나·포드20M·피아트등이 속속 선보여 마침내 마이카시대의 막을 올렸다. 대중교통수단인 버스가 서울에 굴러다닌 것은 전차의 등장으로부터 3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경성부가 1928년 처음으로 「부영버스」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부영버스의 운행노선은 관청이 있는 곳이거나 일본인 거주지역에 집중됐다.전차노선과 겹치는 경우가 많아 전차와 버스간의 손님 유치경쟁은 치열했다.이무렵 여차장이라는 신종직업이 생겨났다.그녀들은 맵시있는 유니폼으로 요즘 TV탤런트에 못지않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65년부터는 대형급행및 좌석버스 운행이 개시됐으며 2년 뒤인 67년엔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영버스 50대가 첫선을 보이기도 했다. 「승객이냐,짐짝이냐」「입석된 좌석,완행된 급행」등 당시 유행어처럼 버스는 당초 제도상의 취지와는 달리 파행적으로 운행돼 급행버스 제도는 폐지되고 말았다.
  • 호화의 극치 러 황실보석/파블레제의 세공작품

    ◎영 빅토리아박물관/차르일가의 350점 전시… 천재성 재조명 19세기말 제정러시아시대 차르일가에 전속으로 보석을 세공해준 파브레제라는 「황실보석가」가 있었다. 파브레제는 당시 귀족,왕가의 사치와 격식주의에 힘입어 최대한 화려하고 정교하게 보석을 다듬는 기술로 명성이 높았다.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페드로브나로부터 「당대 최고의 천재」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의 섬세한 손길을 거친 보석을 구하기 위해 유럽 각국의 왕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뒤 잊혀져왔던 전설속의 인물 파브레제가 최근 영국에서 다시 부각되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은 파브레제를 재조명하고 러시아 유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파브레제,황실의 보석세공인」이라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박물관은 파브레제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연구소나 개인들로부터 수집한 3백50점의 보석을 전시회에 선보이고 있다.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덴마크의 마그레드 여왕 등이 소중히 갖고 있는 보석들도 함께전시돼 파브레제 보석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전시관을 찾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 가운데서도 「부활절 선물」에 가장 많은 눈길을 보낸다. 파브레제가 부활절을 맞아 니콜라이 황제를 위해 세공한 달걀모양의 이 걸작은 눈이 부실만큼 화려한 광채를 낸다.이 작품은 황금 사륜마차위에 달걀형의 보석이 놓여져 있다. 신교 위그노교도의 후손인 파브레제는 184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성장해서 형과 함께 이곳에서 조그만 작업실을 마련해 보석세공일을 했다. 1894년 니콜라이가 왕위에 오르기전 약혼녀에게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장식된 목걸이를 그에게 구입하면서부터 파브레제는 황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니콜라이는 목걸이의 황홀함에 넋을 잃었고 파브레제는 황실의 보석인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단숨에 유명해졌다.그의 솜씨에 대한 소문은 해외로까지 퍼져 멀리 샴왕국등에서도 찾아올 정도였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18년 니콜라이 황제 일가가 처형되자 그도 바로 러시아를 떠나 유랑생활을하다 2년뒤 스위스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파브레제의 눈부신 보석들도 「구시대의 폐해」로 여겨져 공산당원들에게 압수되거나 파괴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작업실마저 폐쇄명령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 “개혁의 동반자” 여야 새 자리매김/청와대 영수회담 뭘남겼나

    ◎주고받는 보따리없이 보완적관계 정립/결론 내기보다 회동자체에 의미/분위기 유지 여부 야태도에 달려 11일의 청와대 영수회담은 종전의 관행에 비추어 형식과 내용에서 전혀 새로운 여야대화의 시도였다. 여야수뇌부가 정치개혁의 실천의지를 확인한 큰 의미를 가졌음에도 현안에 대한 합의는 아무것도 없었다.이런식의 회담이 여야관계의 발전방향에서 바람직한 것이긴 하지만 존속·발전여부는 야당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다. 이날 회담에서 김영삼대통령은 이기택대표가 현안으로 제시한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노」를 선언했다.주돈식청와대대변인의 발표중에서 합의라고 볼만한 사항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이대표는 언짢은 표정으로 청와대를 떠났다. 김대통령은 이대표가 전력을 기울여 제시한 보안법개정과 방북문제에 대한 협조요청을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보안법개정에 대해서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이대표의 방북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의 통일전선에 말려드는 일』『도움이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야당측으로서는 관례에 비추어 예상하지 못했던 회담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여야관계,여야영수회담의 형식과 내용을 고려하면 이런 회담결과는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기도 하다. 청와대와 김대통령이 생각하는 새로운 정치환경에서의 여야관계는 주고 받는 즉,대치상태를 전제로 한 관계가 아니다.그보다는 국가의 문제를 편가름없이 같이 걱정하고 논의하며 좋은 일은 서로 돕는 그런 관계다.이런 식의 여야관계가 정통성있는 문민정부 아래서는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당연히 영수회담도 자주 갖는 것이 좋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고 합의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국정,특히 개혁의 동반자로서 자연스럽게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개혁작업에 힘을 모으는 것이 영수회담으로 정의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때문에 이날 회담의 결과에 대해 야당이 큰 결론을 기대했다면 잘못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영수회담이 길어지면서 오찬장의 청와대관계자와 야당관계자 사이에서 오고간 말을 보면 이런 점은 분명해진다.이자리에서 김대식민주당원내총무는 『국가보안법 개폐문제로 이대표의 부담이 크다』면서 개혁의 완성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이에 대해 박관용청와대비서실장은 『무슨 결론을 내기보다 회동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좋을텐데…』라고 의미해석을 달리했다. 청와대측은 이번 모임을 정치개혁법의 통과를 맞아 과거정치를 청산하고 새출발을 다짐하는 계기로,새로운 여야동반자관계를 출발시키는 시점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주돈식대변인은 『구체적인 합의나 세세한 타협여부가 아니라 혁명적인 선거법에 의한 새정치풍토의 조성과 국가현안 전반에 대한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데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이를테면 청와대는 정치개혁법의 정착을 위한 첫 대화상대로서 야당을 택했고 야당은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개혁법의 통과를 맞아 새로운 정치,이 법에 대한 실천의지를 다짐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게 사실이다.정치개혁법이 단순히 여당이나 김대통령의 제안에 야당이 어쩔수없이 따라간게 아니라 여야가 공동으로 입안·통과시켰다고 보면 정치개혁을 위한 개혁주체들간의 단합재확인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또한 이런 모임은 자주 있는게 정치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당내사정이 복잡한 이대표가 손에 움켜잡은게 하나도 없이 당내 정적들을 다독거려가며 새로운 여야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다.회담을 끝낸뒤 이대표의 굳은 표정이 이같은 곤혹스러움을 상징한다. 이대표는 그러나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 의미있는 회담』이라고 평가했다.새로운 여야관계를 위한 영수간 노력의 발전여부는 이대표의 평가에대한 민주당의 수용여부에 상당부분 달린 것으로 보인다. ◎영수회담·오찬대좌 이모저모/김대통령,정개법협상대표들 일일이 격려/민주,“만난것 말고 뭐있나” 시큰둥/이대표,“우리당과 큰 견해차 확인” 김영삼대통령과 이기택민주당대표는 11일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정치관계법 통과에 따라 우리 정치권도 새롭게 태어나야한다는 총론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개폐,이대표의 방북문제등 각론에서는 현격한 이견을 좁히지 못함으로써 민주당은 「선물」이 없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이대표는 민주당의 정치개혁법 협상대표들과 당3역,박지원대변인등과 함께 상오 10시25분 청와대에 도착,현관에서 이원종 정무수석의 마중을 받았다.이대표는 본관 1층 로비로 걸어 들어가며 『이 정권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호감을 표시했고 이수석은 『지금은 야당이 실질적 여당』이라고 화답. ○…김대통령은 상오 10시30분 대통령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이대표에게 취임1주년 축하인사를 건네고 날씨를 화제로 5분동안 환담. 김대통령의 축하인사에 이대표는 『대통령께서 야당을 잘 아시겠지만 1년이 언제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1년이 전부 결단의 순간들 아니었습니까』라고 덕담. 이어 이대표가 『몇㎞쯤 뛰나요』라고 묻자 김대통령은 『4㎞』라고 답했고 이대표는 『연세 자시면 과거와 같지 않을텐데』라며 염려를 표시.이에 김대통령은 『몸에 배 똑같다』라고 대답. 이대표가 『새벽 운동을 좀 해야겠습니다.등산 좀 할 수 있게 야당에 여유를 달라』고 의미를 두어 말을 잇자 김대통령은 『운동중 등산이 최고다.한번 하면 5시간 10시간 걸리니 나는 하기가 어렵다』고 언급. 과거 야당시절 상하관계였던 까닭인지 김대통령은 이대표에게 말을 낮춰 친근감을 표시. ○…김대통령과 이대표의 영수회담은 예정보다 35분이 늘어난 12시33분까지 2시간3분동안 진행됐다.회담이 끝나자 김대통령과 이대표는 김종필민자당대표와 여야 당3역,정치관계법협상대표등이 기다리고 있던 오찬장인 인왕실로 직행. 오찬장으로 들어서며 김대통령은 환한 표정을 지은데 반해 이대표는 상당히 무거운 기색이어서 대조적. 김대통령은 식탁주위를 돌며 참석자들과 일일히 악수를 나눴으며 특히 정치관계법을 타결지은 신상식 국회정치특위 위원장을 비롯,6인 협상대표들에게 『수고 많았다』고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자리에 앉으면서 『나는 일어서려는데 이대표가 자꾸 잡아 길어졌다』고 회담 분위기를 소개했으며 김대통령이 참석자들과 환담하는 동안 이대표는 시종 침묵을 지켰다.김대통령은 박희태의원과 박상천의원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 박위원은 서로 적수라던데 이렇게 보니 적수가 아니라 동지중의 동지인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네기도.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이 『만난 것 말고는 별 것이 없지 않느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새정부들어 두번째인 여야영수회담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 김원기·유준상·박상천의원등은 『김대통령이 보안법 폐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정치개혁에 대해 단호한 실천의지를 보인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라고 언급. 이대표는 당사 5층 회의실에서 1백여명의 당직자·당원들에게 영수회담 결과를 보고하면서 『김대통령에게 우루과이라운드와 관련한 미국과의 재협상과 보안법 폐지를 강력 촉구했다』고 밝히고 『보안법과 북한에 대해 김대통령과 우리당의 견해가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이에 놀라움을 금치못한다』고 설명.
  • 탁월한 백제공장들(백제를 다시 본다:4)

    ◎“6∼7세기 문화선진”… 신라·일에 기술 전원/황룡사 9층탑·안압지 백제장인 손길/와·노반박사 일서 가람 짓고 향로 제조/금속공예·건축기술 당시론 최고수준… 장인들은 관인으로 대우 신라통일기 장인들의 탁월한 기량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만불산이란 공예품이다.신라 경덕왕은 당나라의 대종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소문을 듣고 공장에게 명하여 만불산을 만들게 했는데,「삼국유사」에는 그 모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만불산은 한 발쯤 되는 가산에 험한 바위와 괴이한 돌,동굴을 장치하여 여러 구역을 만들었다.각 구역마다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의 모습과 각국의 산천형상을 새겨넣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어 언뜻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궁남지 본떠 건립 그 뿐이 아니다.그 한가운데는 크고 작은 만불을 안치하고 주위에는 각종 장식품,천여구의 승려 조각과 누각 그리고 자줏빛 종을 벌여놓았다.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승려들이 모두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은은히 염불하는 소리가 나도록 기막히게 장치되었다고 한다.그리하여 이 만불산을 선물로 받은 대종은 『신라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깊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신라의 기술은 본래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의 호국사찰 황용사 9층탑을 제작한 것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였다.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왕궁 옆에 못을 파서 안압지를 만들었는데,그 의장이나 기법은 모두 백제의 궁남지를 본뜬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무왕 35년(634)3월에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궁남지를 만들었는데 못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한다.뒤에 못가에 망해루를 지어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이기백선생이 추리하듯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사비도성에 입성한 신라의 최고지배층은 이 궁남지와 망해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당나라를 상대로 한창 피나는 전쟁을 치르는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서둘러 안압지와 임해전을 축조했다.앞서 얘기한 경덕왕때 황룡사 연기법사의 발원으로 화엄경을 베끼는 사경작업이 진행되었는데,16년전 세상에 공개되어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화엄경사경의 발문을 보면 광주,남원,장성,고부등 옛 백제지역 기술자들이 종이를 만든다거나 경문을 쓰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백제는 그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일찍부터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다.건국 초기에는 북쪽에 인접한 낙낭군을 통하여 중국 한대문화를 받아들였다.낙랑군이 멸망된 뒤로는 고구려와 접촉했다.그런데 고구려는 중국 뿐아니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과도 접촉이 많았기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를 통하여 야성적인 호주문화까지 받아들인 셈이다. 한편 백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서해안을 끼고 있어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바다 건너 양자강유역의 세련되고 우아한 중국 남조문화와 접촉했다.백제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각지에서 흘러들어온 외래문화에 끊임없이 자신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여종합하려고 한 점에 있다.삼국 중 가장 기름진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어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던 백제였던 만큼 느긋한 마음으로 풍요로운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기술자 박사 칭호 흔히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고대의 기술자들을 한결같이 노예계급으로 보면서,삼국시대의 명품들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강제된 노예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삼국시대 및 통일기 신라의 기술자들은 국가로부터 전문 박사칭호를 부여받았을 뿐아니라 관등까지 받은 어엿한 관인신분이었다. 일본측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실로 많은 백제 기술자들이 등장한다.6세기 초 이래 백제로부터 일본조정에 유교경전이나 의학,역학,역학을 지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파견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뒤로는 사찰건물이나 불상,기와,향로를 제작하기 위해 노반박사,와박사 등이 파견되었다.현재 알려져 있는 수많은 금동제 불상이나 무령왕릉에서 나온 각종 금속제품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은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일본왕실의 외척으로 권세가였던 소가(소아)씨가 법흥사(일명 비조사)건립에 착수했을 때는 실로 많은 백제의 일급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갔다.당시 일본에 건너간 노반박사 백매순은 덕장이란 관등을 갖고 있었는데,그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유일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자이다.한편 「원흥사가람연기변류기자재장」에는 그를 「누반사」백매순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다름아닌 누금세공기술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누금세공이란 금판와 금입에 금판을 붙이는 방법이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나 국내정치면에서 실로 다사다난한 때였다.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백제가 그동안 축적한 기량이 최대로 발휘된 일대 황금시대였다.바야흐로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불교가 이 시기 백제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한편으로는 도교사상이 스며들어 전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유토피아사상이 싹트게 했다. ○문화 견인차 구실 야심만만한 정복군주였던 무왕은 불교와 도교 모두에 심취해 있었다.그가 궁남지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긴 것은 도교사상에서 영향받은 것이다.한편 그가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유명한 사실인데 이밖에도 그는 부소산성과 마주보고 있는 금강 대안의 울성산성 근처에 또 하나의 호국사찰을 완공했다.바로 왕흥사였다. 왕흥사는 오랜 공사끝에 무왕 35년(634)2월에 낙성되었는데,왕은 때때로 이 절을 찾았다.무왕은 먼저 금강 언덕에 있는 바위에서 멀리 부처를 바라보며 예불을 한다음 배를 타고 절에 가서는 법회에 모인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향을 피워 부처와 보살을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그토록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을 피우는데 필수적인 이 시대의 향로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마침 작년 말에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향로가 나온 것은 기적같은 느낌이 든다.의장의 풍부함이라든가 현란한 장식성으로 볼 때 문득 신라의 만불산을 연상케 하는 이 진품의 작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끝내 유감일 따름이다. ◎백제 기술집단/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인/와박사도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 만들어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기술과 공장들의 모습을 가늠해 왔다.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에서 그 생생한 백제 기술의 실상을 비로소 가늠하게 되었다.그 대표적 케이스의 하나가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 할 수 있다. 세기적 보물이기도 한 능산리 금동향로의 출현은 백제의 기술과 우선 노반박사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일본서기」등과 같은 일본쪽 기록에 보이는 백제최고 기술집단의 하나인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장이고,바로 능산리 금동향로를 제작한 기술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활동은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불상이나 탑의 상륜부 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본 나라(나양)의 이소노카미(석상)신궁에 비장된 백제전래품 칠지도는 백제의 금속공예술이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새김글씨를 금으로 상감한 4세기경의 칠지도는 금속의 정련과 주조기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따라서 6∼7세기경 사비시대 백제의 기술은 능산리 금동향로를 만들어낼 만큼 더욱 발전되었다.심미안적 세공에 의해 제작된 틀,소재의 정선,주조술,가공,도금술이 어울려 이룩한 걸작의 종합금속예술품이 능산리 금동향로인 것이다. 그리고 와박사 역시 넓은 영역에 걸쳐 활동한 공장이다.단순히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 뿐 아니라 테라코타불상,토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특히 삼국 가운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를 만들어 낸 이들도 바로 와박사로 보여진다.녹유토기는 후대 고려청자의 모태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 동양최고의 공예품(백제를 다시본다:2)

    ◎용봉향로는 백제문화의 「집약체」/용무늬는 왕실의 상징… 탄생설화 묘사/도교적요소는 정치적 이상향 나타내/700년 시공 뛰어넘어 한대작품 능가하는 미 창조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사적14호)과 나성(사적58호) 사이의 건물터에서 지난해 연말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축약한 문화사 바로 그것이다. 이 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크게는 뚜껑과 몸체 두부분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뚜껑 꼭대기의 봉황장식,뚜껑,몸체,용모양의 다리부분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었다.특히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윗단에는 5인의 주악상을 앉혔다.이들 주악상의 인물은 모두 머리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묶어 내려뜨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혹은 날아가고 있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연화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부여시대(사비시대·서기 538∼660년)의 마지막 6∼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특히 발굴당시 이 향로가 매장된 장소의 정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숨가쁜 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뚜껑엔 삼산형문향 이제까지 향로가 실물로서 출현한 예로는 중국의 화북성 만성현 능산의 중산왕류승의 묘(전한·기원전 154년 재위·기원전 113년 사망),평양 서암리9의 219호낙랑고분,신안 해저출토 청동제 박산향로(원대 14세기)등을 들 수있다. 박산로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한나라때 전성기를 맞는다.그 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과 원나라에까지 사용된 것같다.그러나 박산이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뚜렷한 지명은 없고,당시 황실이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신선사상이 중심이 된 도교사상에서 유래하는 상상의 지명으로 보인다.그런가 하면 이런 향로에는 불교적 색채도 보인다.향로가 향을 피우는 불구이며 박산이란 이름이 수미산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또 이번에 발견된 것처럼 향로의 몸체 주위에 돌아가며 앙련복변판련화문이 새겨진 것도 바로 이러한 불교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향로의문양만 보더라도 백제사회에 도교와 불교사상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진나라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불사는 그 이듬해 한산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도승이 10여명 거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최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국보163호)의 말미에 쓰여진 불종율령이란 단어가 도교의 주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이는 백제왕실 깊숙히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심취했던 도교의 신선사상의 주제는 고구려고분의 벽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의 공주 송산리6호와 부여 능산리 2호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용봉문전과 산경문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앙련복판화문은 백제 전래품으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법륭사소장의 귤부인념대 아미삼존불 몸체 대좌에서도 보인다. ○5인주악사을 앉혀 사실 삼국가운데 중국의 앞선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 시키고,더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전파시킨 당시 발빠른 백제의 문화감각으로 볼때 도교는 이미 상류층의 사상과 정치구현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표현된 이 향로는 일찍이 서왕모가 중국임금인 황제에게 바친 신물이었다는 전설과 함께 태자를 책봉할 때 봉정했던 왕통의 상징일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여기에 표현된 용봉의 문양이 왕을 상징한다.또 몸체의 연화문가운데 상투를 하고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주목된다.이소년이 왕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백제인의 얼굴이나 모습은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양서 직공지에 실려있는 백제국사,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과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국보 83호)등에서 보이는 얼굴이 고작이다.그러나 이 백제 왕태자로 추정되는 얼굴 옷과 상투는 앞으로 백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전문가들의 구체적인 견해가 나오겠지만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용의 존재가 그 하나라 할 수 있다.이 용은 바로 왕가의 「탄생설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에서 나온 주몽은 난생개국신화를 가지고 탄생한다.그리고 동부여에서 부인 예씨로부터 얻은 아들 류이에게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을 통해 건국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왕태자 추정 그러나 백제 건국자 온조는 주몽 서소노 우대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그러면서 고구려 제2대왕 유리(기원전 19∼기원후 18년)를 피해 남천,하북∼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연들 때문에 왕통에 대한 정통성 부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꽤나 신경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간다.그래서 신화보다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계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향로는 바로 이 탄생설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다만 왕통을 잇는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나 신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탄생설화를 담은 향로를 만들게 한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그렇다면 몸체위의 뚜껑에 표현된 도교적인 요소는 백제왕실의 사상이나 정치적 이상향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능산리에서 새로이 발견된 향로는 기본적인 형태를 서기전 113년 중산왕의 한묘에서 출토된 금으로 상감된 청동제박산로를 법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이것이 제작된지 약 7백년후에 봉·용을 뚜껑과 몸체에 덧붙여 백제화된 향로로 만들어 낸다.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전례가 없는 걸작품에 속할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하지 않은 백제사와 문화의 여백을 상당부분 메워 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이 향로가 주는 값진 의미이다. ◎향로의 유래/서방의 훈향풍습따라 제조/남북조시대 불교적 색채… 활짝 핀 연꽃 장식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과 한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향로라고 부른다. 이 향로의 산 부위 곳곳에 구멍을 뚫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 올라 마치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그래서 향로는 일반적으로 훈로를 말하고 있다. 박산이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려도경」에 나온다.이 도경은 한대의 문헌기록을 빌려 접시는 대해를,뚜껑은 봉래산에 비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러면서 대해속의 거북등에 봉황이 딛고 서서 봉래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덧붙인다.여기에 향을 피우면 뚜껑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향연은 신선이 내뿜는 안개와 같다는 향로 예찬론을 펴고있다. 향로에 불교적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이 시기의 대표적 박산향로는 용문석굴 21호굴의 상자모양 윗덮개와 정광3년(서기 522년) 새김글자가 있는 화상석에서 볼 수 있다.이때 비로소 몸통 아래 부위에 활짝핀 연꽃을 둘러향로를 떠받치게 된다.그리고 인동당초문등 여러 문양을 첨가함으로써 장식적 요소가 늘어난다.화려한 장식문양과 함께 향로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자재도 금속 뿐 아니라 도자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왕통의 계승을 의미하기도 했던 향로는 당·송·원대까지 계승되었다.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14세기 원대 청동제 향로에서 보듯 일체의 문양이 사라지는 향로 변천과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 상도동집마저 버릴 각오로/최평길(시론)

    총집권기간중 5분의1을 보낸 김영삼문민정부는 이제부터는 선언적 사정개혁을 계속하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국제화시대의 경제업적 창출에 전력을 기울일 때다. 하지만 사정개혁은 지속되어야 한다.영국은 1215년 대헌장선포로 왕실비용과 정부예산이 뚜렷이 양분되었고 그이후 8백년을 거치는 동안 영국의 국가예산과 정치자금은 어항에 노는 붕어같이 투명성이 맑아져 왔다.이에 비추어 볼때 일제하의 급조된 국가재정관리와 최근까지 있어온 정경유착에서 빚어진 검은 돈의 원천봉쇄를 위하여 과거의 부패를 청산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금융실명제 등과 같은 도덕성회복노력이 앞으로 수백년간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정신혁명을 밑받침으로 이제부터는 선진형 경제강국이 되기위한 실질적정책을 마련,추진하여야 한다.60­80년대에 돈되는 것이면 무조건 수출하여 신발에서 TV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유럽의 백화점을 주름잡던 우리의 수출품은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삼성의 전자제품,현대의 쏘나타도 중질의고가품으로 외면당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적자수출로 허덕이고 있다. 최근 미·일·중·러·한국의 한반도전문가 50명이 2000년까지 남북한을 진단한 결과를 보면 남한은 90년대초에 선진형 경제구조로의 개선,보수·혁신구도의 정계개편으로 대표되는 개혁이 이루어지고,중반기에 무역흑자에 내각제개헌이 예상되는 개혁의 성숙단계에 올라서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아울러 90년말이후 2000년에는 북한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서 북한판 흐루시초프와같은 대중정치인이 등장하여 북한체제붕괴를 선언하고 결국에는 북한을 남한에 떠맡기는 식의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대다수 남북한전문가들의 예측이다.이같은 전문적예측을 고려해 보아도 통일은 기존의 외교·군사적측면의 해결방식에서 앞으로는 경제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생긴다. 따라서 피부로 느끼는 경제회생과 통일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도 내부정치에서 국제경쟁력향상의 세계안목을 넓혀야 할 것이다.그러므로 김일성체제유지에 고육지책으로 나온 동반자살용의 조잡한 원자탄제조중지에무한정 목을 맬 이유도 없다. 위험스러운 중국땅에 시설투자를 하는 것보다는 국민내부거래행위로 북한의 싼 임금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북한주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면서 국제가격경쟁을 이겨내고 그 이익금을 기술개발투자에 쏟는 탄력적정책을 행동으로 옮겨야 될 것이다.이미 물건너 간 러시아차관 회수도 미국의 스텔스전폭기와 맞먹는 진정한 의미의 차세대인 MIG31 생산시설도입을 통해 변제함으로써 우리나라 연관산업의 기술정밀도를 한단계 끌어올리고 역수출이 가능하도록 적극적이면서 정열적인 방법을 모색해 나아가야 한다. 끊임없는 부패소탕과 선진경제강국이 되기위해 김영삼대통령이 할 일은 국민 모두가 60년대에 다같이 잘 살아보자고 월남의 전쟁터와 사우디의 사막에서,그리고 북유럽의 오슬로에서 남미의 리우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때우는 수출운동에서 첨단과학기술을 통해 흑자수출로 전환시키는 21세기를 향한 국가재도약에 국민의 지지를 모으는데 있다. 특히 김대통령은 저소득서민과 근로자,경영난에 허덕이는 영세기업,8∼9급 하급관료 모두의 고통을 몸으로 느껴야 하고 영국의 근로임금을 앞지르고 미국의 근로자평균임금에 육박하는 한국근로자의 높은 임금을 자제시켜야 할때가 왔다.이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한 방편은 대통령이 그의 마지막 남은 재산인 상도동집 한채도 팔아 경영난에 허덕이는 영세기업이나 과학기술개발연구소와 교육기관에 상징적으로라도 기부함으로써 오늘날 최대의 과제인 경제회생을 위해 몸을 던지는 필사즉생의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며 여자는 남자의 반려자로,그리고 돈은 인간을 움직이는 최소한의 연료로서 생각하고 살아왔다는 트루먼 전 미대통령의 자서전을 회고해 보면서 과거 야당시절 포천 광덕산과 3당통합후 관악산을 오르내리며 했던 자신의 전재산 사회환원 약속을 직접 행동으로 옮길 최적의 시기가 바로 1994년 오늘의 이 시점이라 생각된다.5년후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생활을 마감할때 자서전을 쓸 자료가방 하나만을 들고나온다면 1980년대말 신민당사 문앞에서 하루종일 번데기 판 돈을 야당성금으로쓰라고 담넘어 전해주고 지나가던 아줌마와 YH여공농성때 만원짜리지폐를 돌에 말아 던졌던 택시운전기사가 보여준 바로 그러한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지지가 반드시 되살아날 것이라 확신한다.이와함께 남북통일시대에 있어서 김일성과 함께 양금시대에 돋보이는 도덕정치지도자로서 통일의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문화 APEC제창설의 기우/황주호 문화부 부국장급(오늘의 눈)

    이탈리아인 콜럼버스가 1492년 스페인왕실의 도움으로 대서양을 처음 건넜을 때 섬을 만났다.오늘날 남북아메리카에 해당하는 두 육지 중간쯤 해역의 이 섬 위치를 인도의 서쪽으로 여겨 얼토당토 않게 서인도라고 명명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당시의 세계사정은 그토록 캄캄했다. 그러나 20세기가 저물면서 세계는 사뭇 달라졌다.세계를 마을단위 정도의 촌락개념을 담아 지구촌으로 이해하는 시기에 도달했다.지구 구석구석의 거리가 좁혀졌거니와 서로의 사정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게된 것이다.그리고 오는 21세기는 더욱 거리를 좁힌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정보화사회를 예견하게끔 되었다. 20세기에 축적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정보를 한껏 향유하는 시대가 바로 정보화사회다.이는 인간을 위한 사회이고,또 문화를 지향하는 사회로 귀결된다.우리가 여기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대명제는 정보의 국제화다.정보의 국제화는 우리가 얼마만큼 많은 양의 정보를 공급하고,대신 얼마를 받아들이느냐는 문제점을 안는다.그래서 21세기의 미래전쟁은 오늘날 경제전쟁에 못지 않은 문화전쟁 양상을 띨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이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문화판 성격을 지닌 「아·태문화교류협의회」창설을 제창한 것이라는 도쿄발 기사(서울신문 1월4일자6면)가 나왔다. 일본의 문화교류협력회의 제창설은 얼핏 호혜평등 원칙의 교류로 보일지 모른다.그러나 실은 새로운 세계경제질서 개편기를 맞아 다른 모습으로 움직이는 것이다.문화교류를 국가이익과 부합시켜 온 일본의 문화정책은 직접위성방송(DBS)을 통해 우리네 안방을 오랫동안 공략했다. 위성방송은 일본 미래산업의 첨병이라는 사실을 들여다 보자.우선 하이비전이라는 이른바 신세대방송망 구축을 겨냥한 것이다.이와 함께 방송은 컴퓨터와 연관한 21세기 정보산업의 핵심임을 일찍 간파했다.그리고 대중문화를 주축으로 한 일본의 문화산업은 가히 세계적이다.할리우드의 작가와 연출가,배우들을 돈으로 움직일 정도니까….도쿄를 음악문화의 발상지로 하여 세계를 석권할 날도 멀지 않다고 공언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화고립주의를 자청할 의도는 없다.다만 대등한 문화교류의 타당성과 우리 문화산업의 현실을 반추할 시기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 정도 유래/계룡산·무악과 최종경합(서울 6백년 만상:2)

    ◎태조,민심수습 위해 한양천도를 결정/구세력 반발속 무학대사·정도전 주도/고려때부터 고지소문… 개경·평양과 함께 3대도시 서울은 어떻게 서울이 되었을까. 서울은 조선의 수도가 되기전부터 「국조연장의 땅」으로 불렸다.고려때부터 국가와 왕조의 위업을 연장시켜줄 길지라는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예비국도」의 대접을 받아왔다.고려 숙종은 1099년에 친히 한양에 행차해 지세를 둘러보고 도성개창도감을 두는 등 천도준비를 하기도 했으며 우왕도 1382년부터 중신들과 함께 반년씩 옮겨와 정사를 보았다.1390년 공양왕때는 개성이 지력이 쇠했다는 이유로 한때 임시수도가 된적도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떠나 새 수도인 한양에 도착한 것은 즉위 2년2개월뒤인 1394년11월29일(음력 10월28일)로 지금으로부터 6백년전 일이다. 한양이 수도가 되기까지는 왕실의 강력한 천도추진에도 불구하고 일반백성과 중신들의 이견과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천도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왕실과 구귀족의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태조등 왕실은 천도를 통해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들의 경제적·군사적 능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이같은 우려에 천도에 따른 경제적 부담까지 져야하는 중신들은 풍수지리를 앞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을 수도로 만들기 위해 왕실과 줄다리기를 벌인다.이 사이 태조는 계룡산일대와 무악일대(현재의 연희동·신촌부근),한양등 3곳을 직접 방문하는등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바삐 움직인다.천도 자체에 대한 반대론 뿐아니라 천도장소를 놓고도 풍수지리학적으로 의견이 분분할뿐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이 때문에 1393년말에는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관한 책을 모아 정리하는 음양산정도감이라는 관청이 만들어져 풍수지리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태조의 맨 처음 천도희망지는 한양이었다.사실 한양은 수도인 개경·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도시였을 정도로 기반이 잡혀있었다.태조는 즉위 직후인 1392년10월 최고행정기관이던 도평의사사에 빠른 시간안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그러나 배극염·조준등 대부분의 중신들은 성벽과 궁궐등의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태조의 「즉각 천도」령을 좌절시킨다.1393년1월엔 중신중 한명인 권중화가 주장한 계룡산천도론이 받아들여져 10달동안 신도시건설이 진행되다 하륜등의 무악천도론에 밀려 중지된다.무악천도론 역시 중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천도계획자체가 표류하기에 이른다.태조실록은 『여러 재상의 천도반대에 대해 임금께서는 언짢은 기색으로 개성으로 돌아가 소격전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당시를 적고있다. 다급해진 태조는 이어 한양으로 행차,고려의 남경구궁(지금의 청와대자리)을 둘러보고 주위의 의견을 물은뒤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만한 곳이다.더욱이 조운이 통하고 길과 땅도 고르니 인사에 편함이 있다.』고 말하며 무학대사등의 지지를 얻어낸다.정도전과 무학대사등이 대세를 몰아 다른 중신들의 한양천도지지를 얻어내자 태조는 행여 그들의 마음이 바뀔세라 건설공사도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천도를 단행한다. 천도당시 별다른 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한성부의 객사를 왕궁으로 이용해야 했다.관아와 관리들은 민가를 점유해 임시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천도 이듬해인 1395년 가을에 들어서야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되고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당시 천도가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이런 어려움을 뚫고 옮긴 수도도 태종이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방번·방석형제등을 죽이는 왕자의 난 직후인 1399년 정종원년에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1401년 재천도하는 우여곡절의 한 막을 더하게 된다. 한양정도에 관해서는 무학대사와 왕십리,정도전과 무학의 도시배치논쟁,탐랑목성래용설등 이씨의 한양주인설등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이 적지않다.실상 태조실록등 정사도 무학에게 의지하는 태조의 태도와 그의 영향력을 비교적 잘 그려놓고 있다.그러나 일반에 전해지듯 한양정도가 무학등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는 한양이 당시 수도로서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막오른 「한국방문의 해」… 어떻게 치러지나

    「94 한국방문의 해」가 밝았다.94년 1월1일0시 서울 종로의 보신각 타종식과 함께 시작된 이 행사는 한국의 관광분야는 물론 문화·예술등 모든 분야의 세계화·국제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한국방문의 해」를 주관하는 한국관광공사는 94년에 개최되는 각종 행사의 효과를 면밀히 분석,다양한 이벤트의 정례화와 국제화 작업을 통한 관광상품을 개발,오는 2000년에는 세계 10대 관광국대열에 진입시키겠다는 야심에 차있다.「한국방문의 해」각종행사의 추진상황을 살펴본다. ◎눈축제… 꽃축제… 1년내내 문화행사/민속공연 등 펼쳐 「한국의 맥」 알려/태권도·요리품평회 등 볼거리 풍성/외국관광객 4백만명 유치 목표… 관광산업 국제화 등 제도약 계기로 ▷추진배경◁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가 된지 6백주년을 기념하는 1994년을 한국 방문의 해로 선포합니다』 지난 90년 9월27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94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선포,각국에 행사개최를 알렸다. 정부는 이어 92년 1월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위원장으로한 관련업계와 단체의 관계자 25명으로 행사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교통부중심의 정부지원기구도 구성했다. 이에따라 정부는 94년 한햇동안 4백50만명의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50억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사업은 지난 70년대 국가전력산업으로 지정,육성된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하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수그러들기 시작한 관광산업을 되살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도 6백주년 기념 실제로 92년 방한한 외국인 관광객은 3백23만1천명,내국인 해외관광객은 2백4만3천명,관광수입 32억7천2백만달러,지출 37억9천4백만달러,관광수지는 5억2천3백만달러 적자였다.지난해 관광수지는 4억5천4백만달러가 적자다. ▷주요행사◁ 전국 곳곳에서 일년내내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에 따라 축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타종과 함께 시작되는 축제는 겨울부터 시작이다. 용평·무주·알프스스키장등에서 눈축제가 벌어지고 한강 시민공원에서는 국제 연날리기대회가 행해진다. 봄바람을 실은 꽃축제는 4월부터 시작된다.고도경주에선 4월9일 한일 마라톤대회가 있고 부산 해운대에서는 5월11일부터 4일간 윈드서핑대회가 벌어진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1일 수도 서울 상권의 중심지 명동에선 웨이터달리기대회가 벌어지고 전국의 유명식당은 맛깔스러운 갖가지 요리를 6월26일까지 선보인다.제주도 함덕해수욕장에서는 7월24일 국제 철인 3종경기대회가 개최된다. 상큼한 가을바람이 불면 한국방문의 해 기념세미나가 시작되고 단풍이 곱게 물든 설악산에선 10월9일 국제 산악마라톤대회도 열린다. ○산악마라톤대회도 다시 찾아온 겨울에는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 한마당잔치가 우렁찬 함성속에 펼쳐진다. 또 왕실문화축제등 우리나라의 전통민속공연을 다체롭게 펼쳐 외국인들이 「한국의 맥」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지방에서는 진해 군항제,진도 영등제,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백제 문화제,신라 문화제,한라 문화제,전주 풍남제,충북 예술제,광산 고싸움축제등 10대 행사가 이어지고 서울의 명동축제·이태원축제등 대도시 시민들이 가까이서 함께 할 수 있는 문화행사도 일년내내 끊이지 않아 볼거리·먹거리·할거리가 풍성한 한해가 될 것이 틀림없다. ▷시설준비◁ 항공·호텔·위락시설 등 관광관련 업종에서는 내한하는 외국관광객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먼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관광객의 관문이 될 공항에서는 출입구절차 간소화를 통해 첫 인상을 좋게 심는다.이를 위해 지난해 6월부터 7년이상 홍콩거주자에 대한 무사증입국이 허용된데 이어 올해 방문의 해 기간중 일본인의 무사증입국도 확대 실시했다. 양대 민항에서는 성수기와 비수기를 구분, 2중요금적용체제를 적용하고 친절을 바탕으로한 질 위주의 서비스를 강화했다.또한 외국인의 교통 이용 편의를 위해 공항과 호텔간의 리무진버스와 모범택시를 확대 운용하고 외국인 열차 우선예약권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내한 외국인의 주 숙박장소가 될 호텔업계에서는 외국인들이 호텔을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장소로 활용토록 서비스와 시설을 늘려 개선했다. ○세계10위권 도약대 정부에서도 이를 위해 지난해초 호텔업을 소비성 서비스업에서 제외한데 이어 특급관광호텔의 칵테일바 영업시간 제한과 호텔 사우나의 정기휴일제를 폐지하는 등 관광시설에 대한 각종 규제완화조치를 단행했다. 이와함께 각종 국제회의를 유치하고 축제를 준비하는 등 호텔 부대시설 이용의 극대화를 꾀했다. ▷기대효과◁ 88년 서울올림픽개최이후 우리나라의 위상은 물론 관광산업도 급성장,그 절정을 이뤘다. 그러나 89년 해외여행 자유화조치로 내국인의 무절제한 해외여행과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관광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 「한국방문의 해」사업은 이같은 시점에서 관광산업 재도약을 위한 시의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 행사를 통해 전세계에 한국관광 붐을 조성,올해 4백50만명의 외래관광객 유치와 50억달러의 관광수입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또한 이번에 펼쳐진 다양한 이벤트를 국제수준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활성화함으로써 오는 2000년에는외래관광객 7백만명유치,1백억달러 관광수입을 올려 세계 10대 관광국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지방의 각종 민속축제와 문화예술행사가 널리 소개돼 지역관광산업도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 궁중유물전시관 1돌/새해 2월까지 기념전

    23일로 개관 한돌을 맞은 궁중유물전시관이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94년 2월27일까지 갖는다. 이 전시회에는 격조높은 궁중노리개와 술끈 주머니 보자기등 왕실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유물 2백50여점과 함께 전통자수가 이산옥씨(71)가 기증한 자수품 1백69점도 선보이고 있다. 눈여겨 볼만한 유물로는 「영왕비대례복 다삼작노리개」를 비롯,「국화매듭 딸기술끈」「길상문수 다홍비단 두루주머니」「노리개 비단 색보자기」등이 있다. 덕수궁 안 석조전에서 지난해 문을 연 궁중유물전시관은 5대궁과 12개 능·원에 흩어져 있던 조선왕실 5백년의 갖가지 유물 3만6천점을 전시하고 있는 왕궁박물관이다.
  • 금동향로에 기마인물상 등 다양한 조각/1400년전 백제인모습 생생

    ◎정교한 공예… 왕실유물 추정/학자들/“의자왕이 패망후 묻은듯”/부여능산리 발굴현장 【부여=최홍운기자】 백제의 마지막 도성 사비성 옛터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되어 22일 하오 공개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백제인의 사상과,또 그들의 얼굴을 가장 잘 표현한 유물이다.국운이 다했던 시대의 백제 후기 유물이라는 점에서 흘러간 구슬픈 가요 「백마강」과도 결코 무관치 않은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향로는 금동제 제의유물로 일명 박산로라고도 불리고 있다.주목되는 부분은 향로에 돋을새김(양각)한 선경인물도.여기에는 홀을 든 인물,책상다리한 인물,기마상,기마수렵상,책을 읽는 인물,코끼리를 탄 인물,절하는 인물,지팡이를 든 인물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이들은 백제인이 틀림없기 때문에 1천4백여년전 백제인들의 얼굴과 표정하나까지 복원할수도 있게 되었다. 신라인들의 얼굴은 기왓장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왔지만,지금까지 백제의 얼굴로 떠올린 것이 있다면 불상이 고작이었다.이를테면 여래와 보살상이웃음을 띠고있는 충남 서산 마애불의 상호 정도를 백제의 얼굴로 여겨왔다.그러나 이번에 출토된 금동향로의 인물상들은 백제인의 모습을 여러각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인물이 갖는 여러가지 표정만으로도 도록 한권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금동향로의 존재로 백제의 사상과 종교를 엿볼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물론 불교를 숭상하면서 도교를 받아들인 백제는 제의만큼은 도교식을 채택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공예미술의 가치로 보아 왕실 소유의 유물이 틀림없는 금동향로는 사직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한 아주 귀중한 유물.그래서 학계는 나당연합군에 쫓긴 의자왕이 도성을 황망히 떠나면서 묻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유물은 평지성으로서의 도성인 부여 나성 동문자리 밖에서 출토되었다.나성의 동문은 오늘날 논산 땅인 황산으로 가는 길목.문을 나오면 왼쪽이 청마산성이고,오른쪽이 벽화고분으로 유명한 능산리고분군이다. 그리고 들녘을 사이에 둔 멀지않은 거리에 3천 궁녀가 꽃잎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아래로 사자수 옛물이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흘렀다.그 사비성시대(AD538∼660년) 백제사직의 유물이 오늘 슬픈 역사이야기로 다시 들려오고 있다.
  • 고려불화 걸작 60점 새달 11일부터 전시

    ◎동국대박물관 개관30돌 기념/일 소장 보물급 16점도 귀국나들이/학계, “보기드문 비교연구 기회” 반겨 세계의 불화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손꼽히고 있는 명품 고려불화. 지나간 아픈 역사속에서 외국인들의 손에 넘어간 10여점의 고려불화가 잠시 고국나들이를 하게돼 미술계와 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있다. 동국대박물관이 개관30주년을 맞아 삼성미술문화재단과 공동으로 개최하는 「고려불화전」이 그 전시로 오는12월11일부터 94년 2월13일까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린다. 화려하고 장엄한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진수를 감상할수있는 이 자리에는 일본에 소장돼 있는 고려불화 명품16점(조선초기 불화 일부포함)과 지금껏 공개된 바 없는 국내소장 고려불화(경전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경변상도」연작 포함)등 60점이 전시된다. 일본의 정토종 총본산인 지은원과 산하 사찰 서복사 선림사 선도사 법련사 김계광명사등에 보관돼 있는 이들 불화들은 「관경변상도」(1323년) 「아미타여래도」(고려시대)등 그들이 중요문화재로 지정해놓은 귀한 보물급들로 5백여년만에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이와함께 공개되는 국내소장 불화들은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박물관 동국대박물관 통도사 해인사등에 소장된 국보와 보물급 불화와 「사경변상도」. 벽화 탱화 판화등을 통칭하는 고려불화는 그림의 기교가 정밀하면서도 화사하고 섬려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왕실불교와 귀족불교의 호화스러움을 담고있어 당대 서양종교화의 화려함에 비견할만하다. 고려불화가 지닌 가치는 지난91년 미소더비경매에서 「수월관음도」가 한국고미술사상 최고가격인 1백65만달러에 판매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인 불화들은 고려말부터 임진왜란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뼈아픈 사연을 담고 있으며 현존하는 1백점가운데 대부분이 일본에 소장돼 있다. 국내에는 「사경변상도」연작을 빼면 실제 10점이 넘지않는 숫자만 있을뿐이다.때문에 고려불화에 대한 국내전시는 물론 전문연구도 간접적일수 밖에 없어 이번 전시는 학계로서는 평소 접하기 힘든 귀한 「학술의 장」이 될것으로 기대된다. 주최측은 전시와 함께 2백여쪽의 전시도록을 발간하고 고려불화관련 비디오상영,불화강좌,학술세미나,불화제작실연등의 프로그램을 곁들여 일반인의 이해를 도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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