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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실의 계절 가을… 순수한 ‘지식 나눔’ 행사 풍성] “틀어진 세종로 축 복구 꿈 키워요”

    [결실의 계절 가을… 순수한 ‘지식 나눔’ 행사 풍성] “틀어진 세종로 축 복구 꿈 키워요”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일본 신사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요. 명성황후의 능이 있는 이곳 홍릉에서 제가 여러분을 만난 오늘 이 순간이 여러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스님·음악가 등 다양한 무료강연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앞장서 온 혜문 스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 을미사변에 대한 기록 등이 커다란 스크린에 지나가자 탄성도 터져나왔다. 혜문 스님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문화재 반환도 할 수 없게 됐다는 포기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혜문 스님은 세종로의 축이 경복궁과 틀어져 있다는 점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일제가 틀어놓은 이 각도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이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9일 서울 홍릉에 위치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테드x홍릉의 첫 행사가 열렸다. 테드x는 대표적 지식콘서트로 꼽히는 테드의 지역 기반 행사다. 강연 시간 18분, 스폰서 최소화, 무료 강연 등 모든 원칙이 테드 공식 행사와 동일하다. 테드x홍릉 역시 강연자와 행사 진행자가 모두 무료로 참가했다. ‘그 순간 나는’이라는 주제로 열린 올해 테드x홍릉에는 대학생, 회사원, 고등학생, 방송 및 출판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똥박사’ 정화조 연구 수출하기도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박완철 KIST 책임연구원은 자신의 별명에 얽힌 그 순간을 털어놓았다. 그는 “30년 전 정화조에 대한 연구를 연구실 막내라는 이유로 떠맡았다.”면서 “지금까지 내가 해 온 결과물이 한국의 배수처리장에 설치되고 일본과 타이완에 수출되는 것을 보면서 ‘똥 박사’라는 별명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매뉴얼 페스트라이시(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만 알던 내가 해인사에서의 경험 덕분에 한국에 정착하게 됐다.”면서 사고의 전환 과정을 설명했다. 장재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디지털음악을 실제로 들려주며 “쇼팽도 음악이지만 기이한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두뇌는 머리에 있지만 손끝에도 있다.”며 실천을 강조한 신인철 작가에게는 강의가 끝난 뒤 젊은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기도 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사우디 왕세제에 나이프 내무장관

    사우디 왕세제에 나이프 내무장관

    사우디아라비아의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78) 내무장관 겸 제2부총리가 최근 서거한 형 술탄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새 왕세제로 책봉됐다. 왕실은 27일(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압둘라 국왕이 왕실 인사 37명으로 이뤄진 충성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나이프 내무장관을 왕세제로 확정했다.”면서 그가 술탄이 맡던 제1부총리직도 이어받는다고 밝혔다. 강경 보수파인 나이프 왕세제는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무장단체에 적대적인 대테러 정책을 구사해 서방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권 신장과 정치개혁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라이벌 이란에 대해서도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1953년 리야드 주지사로 공직에 입문해 이듬해 내무차관에 올랐으며, 1970년부터 32년째 내무장관을 지내며 치안과 국경 수비, 국내 정보 조직을 관장해 왔다. 나이프 왕세제도 술탄과 마찬가지로 암 진단을 받고 지난 4월 해외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우디 충성위원회는 현 압둘라(88) 국왕이 왕위 계승절차를 둘러싼 왕실 갈등을 없애고 절차를 투명하게 하자는 취지로 즉위 이듬해인 2006년 만들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집 나간 부처가 돌아왔다’를 사자성어로 하면 뭘까.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이승에서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왕좌왕 헤맨다고 한다. ‘금강경’에 그 뜻을 풀이해놨다.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 이른 시일에 인도하겠다.” 이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4년간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한·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협력해 이루어 낸 한·일관계의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 스님이 있었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이라고 하는 도쿄대를 끈질기게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의 중심인 일본 왕궁에 직접 들어가 조선왕실의궤를 목격한 뒤 반환의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혜문 스님은 이 밖에도 도쿄 시내 오구라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율리사지 오층석탑’ 환수 등 북한까지 포함시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오류 바로잡기’ 운동가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가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하여 당국에 정정 신청을 내 ‘송어’라고 교과서에 고쳐놨다. 국보146호 청동방울은 당초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추적 끝에 강원도가 아닌 충남 논산으로 올바르게 돌려놨다. 안동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안동군수가 심었다는 것도 그가 새롭게 밝혀낸 일이다. 도산서원 준공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서 금송을 심었는데 겨울이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겁을 먹은 안동군수가 몰래 금송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 또 있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쓰던 표범가죽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과 백백교 교주 머리의 보존 중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런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까닭을 먼저 물었더니 ‘환지본처’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다시 “그래도 꾸준히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을텐 데요.”라고 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교수나 공무원이 독립운동하는 것 봤냐고 말입니다.”라며 크게 웃는다. 그렇다면 문화재 환수를 위해 그동안 일본에만 40여 차례 오갔는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다. “다 부처님 것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구, ‘도 닦은 스님’에게 괜히 물어봤나 보다. 이렇게 그의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랬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어떻게 벌이게 됐을까. “2003년 저희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께서 경기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철안 스님은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선사의 관할 사찰 중 27개의 전통사찰에 대한 문화재 현황 파악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멸실된 문화재의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지요. 예를 들어 현등사 사리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유통경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흩어진 문화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탄력을 받은 혜문 스님은 ‘한·일협정 문서공개’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문화재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한·일협정 문서는 일부만 공개됐다가 2004년 완전 공개되는 과정에서 과연 1432점의 반환 문화재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의심되는 것들을 보고 졸속 협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신물(神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문득 느꼈습니다. 일왕 궁내청에서,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린 ‘조선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봤을 땐 더욱 그랬습니다. 원래의 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 2개월에 걸쳐 치러진 생생하고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보인소의궤’란 책이 눈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단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로 이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 제작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서 제작된다고 한다. 스님은 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의궤인 ‘대례의궤’란 책을 봤을 때도 ‘신물의 부름’으로 울컥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한·일 간 피로 피를 씻었던 사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의병,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반일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봉선사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신물의 부름이 아니겠습니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후쿠오카에서 봤을 때는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고종의 갑옷과 투구 반환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대로 내려오던 임금의 투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군대가 싸울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것과 같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번 강조한다. “조선시대 군사권력의 최고 상징인 투구, 정치권력의 최고 상징인 임금의 관모 익선관(翼善冠·높이 19㎝)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아직까지 인질처럼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스님이 던지는 말문마다 조목조목 비장함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까지 친일 논쟁만 했습니다. 누가 친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얘기지만 2000년 이후에야 직접 도쿄에 와서 ‘우리 문화재 내놓으라’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당국은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장본인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북·일 수교 때 대대적인 문화재 반환을 약속받아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은행에 있는 징용 노무자 공탁금 4조원이나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 등도 말입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50가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10가지밖에 못 했다.”며 웃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조경과 석등이 일본식으로 돼 있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중국 갑옷과 일본도를 차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실의궤도 원소장처인 오대산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오늘 화장을 하는데 염불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자리를 떴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혜문 스님은 1998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1년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다. 2004년 일본 교토 유학 중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한 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2006년 9월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일본 정부로부터 1205점의 문화재를 반환받게 했다. 그 외에도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했던 ‘표범카펫’의 행방에 문제를 제기, 60년 동안 박물관수장고에 있던 것을 찾아냈으며 보스턴미술관 소장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과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등을 맡고 있다.
  • [27일 TV 하이라이트]

    ●역사스페셜(KBS1 밤 10시) 수만 마리의 강치가 서식하던 독도,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강치는 완전히 멸종되었다. 강치는 이제 사진, 박제품, 그리고 기록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많던 강치는 왜 자취를 감춘 것일까. 강치 멸종의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어부들의 무분별한 남획이다. 그 중심에는 어부이자 사업가였던 나카이 요자부로가 있었다. ●TV 특강(KBS2 밤 12시 35분) 정조는 왕실 그림을 맡기기 위한 도화서 화원 차출 시험에 직접 문제를 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곳에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있었다. 겸재의 진경산수와 관아재의 풍속화, 이 두 가지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며 탄생한 조선 후기 풍속화를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만나 본다. ●조은지 패밀리(MBC 밤 9시 55분) 아빠랑 단둘이 살고 있는 은지에게는 라이벌이 하나 있다. 바로 같은 반 조경지다. 둘은 언제 어디서나 만나기만 하면 다툰다. 은지는 경지에게 자신이 밀리는 이유가 힘센 동생이 없어서라 여기고, 동생을 낳아달라고 아빠를 조른다. 결국 아빠는 은지에게 새 엄마가 될 여자를 소개시켜 주게 된다. ●스타 부부쇼 자기야(SBS 밤 11시 15분) 원조 국민 여동생인 탤런트 이재은이 남편과 함께 출연했다. 아역 때의 귀여운 연기를 시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이재은. 남편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모습으로 나와 눈길을 끈다. 상큼한 아내 이재은의 귀여우면서도 발칙한 이야기와 남편 이경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스타 부부쇼 ‘자기야’에서 공개한다. ●EBS 다큐 프라임(EBS 밤 9시 50분) 국화빵 아저씨와 여대생으로 만난 두 사람. 누구도 못 말릴 뜨거운 사랑으로 결혼에 골인했고, 두 사람의 사랑과 행복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혼 12년 만에 서로 증오하게 돼버린 두 사람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싸움을 시작했다 하면 세 시간은 기본이고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를 윽박지르고 닦달한다는데…. ●김구라, 문희준의 검색녀(OBS 밤 11시 10분) 유난히 구설수에 많이 오른 방송인 주영훈. 그의 억울한 사연이 공개된다. 다이어트를 했다가 어이없게 검찰청에 끌려간 사연, 심장질환으로 병역 면제를 받았지만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아야 했던 사연까지. 주영훈의 삶과 인생, 그리고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어 본다.
  • 내년부터 골프 ‘어드레스 뒤 바람에 움직인 공’은 무벌타

    내년부터 골프경기에서 어드레스 뒤 바람 때문에 공이 움직였다는 이유로 벌타를 받는 억울한 일은 사라진다. 영국왕실골프협회(R&A)와 미국골프협회(USGA)는 2012년 1월1일부터 전 세계 골프경기에서 적용되는 골프규칙을 개정해 25일 발표했다. 종전에는 선수가 어드레스한 후 공이 움직이면 무조건 1벌타를 부여했지만 개정된 골프규칙은 벌타를 주지 않는 예외 조항을 추가했다. 이에 따라 어드레스한 선수가 공을 움직인 원인이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타를 받지 않는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86세 사우디 왕위계승자 사망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계승 예정자인 술탄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제가 22일 지병으로 숨졌다. 사우디 왕실은 이날 성명을 내고 86세의 술탄 왕세제가 국외에서 질병으로 사망했으며, 25일 리야드 이맘 투르키 빈 압둘라 모스크에서 장례식이 열린다고 밝혔다. AFP 통신은 술탄 왕세제가 2004년부터 대장암으로 스위스와 미국 등에서 치료를 받아 왔다고 보도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MB·노다, FTA·북핵·위안부 보상 등 논의

    MB·노다, FTA·북핵·위안부 보상 등 논의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18일 저녁 한국을 공식방문했다. 노다 총리는 19일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과 공동기자회견을 갖는다. 노다 총리의 이번 방한은 지난달 2일 취임 이후 양자 차원의 첫 해외방문이다. 이 대통령과는 지난달 21일 유엔 총회를 계기로 뉴욕에서 가진 정상회담 이후 두 번째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진전 방안과 북핵 6자회담 재개, 양국 간 교류 확대 등 현안에 대해 폭넓게 논의할 전망이다. 노다 총리는 특히 한·일 FTA의 필요성을 부각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 대통령은 연간 300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는 현재의 대일 무역구조를 고려할 때 신중한 접근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및 교과서 왜곡 시도와 관련해 어느 정도의 논의가 이뤄질지도 주목된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보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지난달 15일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공식 논의할 것을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는 한·일 수교 당시 일단락된 문제라며 사실상 논의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노다 총리 역시 이에 대한 진전된 입장을 피력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는 게 외교가의 관측이다. 한편 노다 총리는 이번 방한때 한·일도서협정에 따라 우리나라에 반환키로 한 일제강점기의 강탈도서 1205권 중 상징적인 의미가 큰 5책을 갖고 들어왔다. 조선왕실의궤 3책(대례의궤 1책 및 왕세자가례도감의궤 2책), 정묘어제 2책이다. 이 도서들은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측에 전달된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방한 日총리 강탈도서 靑에 직접 반환

    방한 日총리 강탈도서 靑에 직접 반환

    일본 궁내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우리 도서 중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와 고종의 황제즉위식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 그리고 순종의 결혼식을 정리한 왕세자가례도감의궤(王世子嘉禮都監儀軌)가 먼저 한국에 돌아온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8일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방한하는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이들 도서 3종 5책을 직접 가져온 뒤 도착 즉시 청와대로 들어가 우리 정부에 반환할 예정”이라고 17일 밝혔다. 노다 총리가 들고 올 도서는 대례의궤 1권1책, 왕세자가례도감의궤 1권2책, 홍재전서 전체 100권 중 2권으로, 모두 3종 5책이다. 지난해 11월 1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간 나오토 총리가 참관한 가운데 열린 양국 외무장관 간 한·일도서협정 조인 당시 협정식장에 전시된 것들이다. 홍재전서는 정조의 시문(詩文)과 교지(敎旨) 등을 엮은 문집이다. 정조가 동궁 시절부터 국왕 재위 시절까지 지은 것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펴냈다. 대례의궤는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대한제국의 국새 ‘황제지보’(皇帝之寶)가 그려져 눈길을 끈다. 주로 거북 모양으로 만들었던 조선의 국새와 달리 대한제국의 국새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형상화했다. 왕세자가례도감의궤는 순종의 왕세자 시절 결혼식 과정을 파노라마 식으로 담은 것이다. 앞서 한국과 일본은 조선왕실의궤 등 우리 도서 1205책 전체를 오는 12월 10일까지 반환하기로 지난해 11월 합의했다. 이들 도서는 이르면 11월 중, 늦어도 12월까지는 반환이 완료될 예정이다. 그에 맞춰 대국민 보고회가 개최되고 관련 특별전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韓·사우디 협력 학생·관광 교류로 넓혀야”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면 학생 교류와 관광 활성화에 신경을 더 써야 합니다.” 한국 정부의 중동 왕실 인사 초청사업으로 최근 방한한 투르키 알파이잘(66)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는 1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원유 등 에너지 및 건설·인프라 기술 등 경제 협력 면에서 아주 특별하며, 이 같은 관계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렇게 밝혔다. 투르크 왕자는 “사우디 학생이 한국에 200여명 와 있는데, 사우디에 한국 학생은 10~20명 정도에 불과하다.”며 “장학사업 확대를 통해 양국 학생 방문을 늘리고, 내년 한·사우디 수교 50주년을 계기로 사우디 사람들이 아름다운 한국에 더 많이 방문할 수 있도록 관광 및 의료 사업 등을 더욱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네 번째 방문한 투르키 왕자는 “1970년대와 80년대 방문과 비교할 때 한국은 정치·경제·사회·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이 같은 발전은 다른 나라들이 따를 만한 본보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퍼진 ‘재스민 혁명’에 대해 그는 “재스민 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사우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면서도 “북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북한과 이란의 핵 협력 의혹에 대해서는 “이란과 북한 핵 문제는 우리도 의심스럽고 걱정스럽다.”며 “중동 국가들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이에 대한 유엔 제재와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투르키 왕자는 압둘라 사우디 국왕의 조카이자 사우드 외교장관의 친동생으로, 지난 30여년 간 정보부장 및 주미대사·주영대사 등을 지냈다. 현재 왕립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차기 외교장관으로 거론되는 등 세계적인 중동 전문가다. 지난 13일 한국외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4일에는 제주도에서 열린 한·중동 협력 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17일 김황식 국무총리, 김성환 외교장관을 만난 뒤 출국할 예정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특파원 칼럼] 한국사를 배우는 일본인이 두렵다/이종락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한국사를 배우는 일본인이 두렵다/이종락 도쿄특파원

    얼마 전 일본인 노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올해 70세를 맞는 고희연에 기자를 초청한 것이다. 직장 직원들과 함께하는 자리이니 부담 없이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책 한 권을 샀다. 우리나라 사극 마니아인 그를 위해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조선왕조의 역사와 인물’(강희봉 저·시쓰교노니혼샤)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조선시대 역사는 물론 역대 27명의 왕, 왕실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렸다. 예상대로 그분의 반응이 뜨거웠다. 언젠가는 서점에 가서 사고 싶었는데 선물로 줘 고맙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다. 이 책은 이미 10만권 이상이 팔려 최근 오리콘 책 종합 판매 순위 7위에 올랐다. 사실 조선왕조 하면 학창시절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하는 식으로 왕들의 즉위 순서를 외우던 기억만 난다. 그런데 한국 사극을 즐기는 일본인들은 조선시대에 27명의 왕이 있었으며 그들의 치적이 어떠했는지를 꿰고 있다. 드라마 배경이 어느 왕 때인지를 단박에 알아맞히는 그들 앞에서 당혹스럽기만 하다. 지난달에 외무성 고위 간부와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한·일 간의 현안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한국 드라마 얘기가 나왔다. 자신과 한류팬인 부인이 드라마 ‘주몽’을 즐겨 본다고 했다. 기자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주몽을 왜 좋아하냐고 묻자 기가 막힌 답이 되돌아왔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활약하던 2000년 전에는 일본은 부족들만 있었다. 그런 시기에 한나라에 맞서 나라를 건국하는 주몽에 반했다는 것이다. 갈수록 힘이 세지는 중국에 맞서 앞으로 일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주몽을 통해 배운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 내 드라마, 특히 사극의 붐을 가벼운 터치로 이해하는 듯하다. 음식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라 ‘대장금’이 히트치고, 장수국가에 사는 이들이 건강에 신경쓰다 보니 ‘허준’에 열광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조선왕조 책도 한국 역사 드라마를 즐겨 보는 일본 시청자들이 조선시대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가이드 북 성격이 짙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넓게 보는 것보다 깊게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 분야에 열중하는 오타쿠 정신이다. 드라마 재미만을 만끽하기 위해 한국 역사책을 집어드는 단계는 지난 듯싶다. 조선 왕조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본격적인 한국의 뿌리를 이해하고 싶다는 시청자들이 매년 늘고 있는 점이 이런 추측을 가능케 한다. 반면 우리는 일본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물어보고 싶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생을 그린 대하소설 ‘대망’을 읽어본 사람도 손에 꼽을 만할 것이다. 우리는 일본 역사를 모르는데 일본은 40~50대 주부들까지 조선왕조의 계보를 줄줄 외우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책을 자주 찾는다고 해서 우리 역사의 우월성만 주장하는 이들도 나타날지 모르겠다. 고교 수능시험에서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내몰았던 우리의 빈약한 역사의식으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일본에서 부는 한국역사 붐을 지켜보면서 이들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우리는 저들의 역사를 모르는데 일본의 보통 사람들도 우리 역사를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게 왠지 꺼림칙하다. 양국 간에 얽힌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인들의 한국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볍게만 여길 수 없다. 실제로 우리가 일본을 우습게 여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구한말에는 국권까지 침탈당하지 않았나. 우리 역사를 알려는 일본인들 앞에 우쭐해 있다가는 세 번째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본 역사서나 시마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등 역사 소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룬 ‘고우-공주들의 전국’이나 ‘료마전’ ‘아쓰히메’ 등도 지상파 TV에서 방영돼 일본의 역사를 진지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이 아닌가. jrlee@seoul.co.kr
  •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 일본 연내 모두 반납키로

    일본 정부가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 1205책을 오는 12월 10일까지 한국에 반납한다. 13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오는 18일과 19일 서울을 방문하면서 조선왕실의궤 일부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도서를 항공편으로 12월 10일까지 모두 양도하기로 최종 의견을 모았다. 일본이 강탈해 간 한국 도서 1205책은 지난 6월 10일 발효된 의궤에 관한 한·일 도서협정에 따라 협정 발효일부터 6개월 후인 12월 10일까지 모든 도서를 양도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그동안 명확한 반환 날짜를 밝히지 않아 한국 정부로부터 조기 반환 요구를 받아 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가을단풍처럼 화선지에 물든 선인의 삶

    가을단풍처럼 화선지에 물든 선인의 삶

    가을 단풍만큼이나 화선지를 다채롭게 물들인 조상의 숨결전이 잇따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초상화의 비밀’로 첫 테이프를 끊었다. 지난달 27일 전시 시작 이래 9일 현재 1만 706명이 다녀갔다. 간송미술관의 ‘인물풍속대전’, 리움미술관의 ‘조선화원대전’이 그 뒤를 잇는다. 비교하자면 이렇다. 중앙박물관 작품은 선비정신을 중시하다 보니 그림에 서릿발 같은 위엄이 넘친다. 대신 정물화 같아 재미가 덜하다. 반면 간송의 작품들은 일상의 소소한 잔재미를 크로키처럼 잽싸게 잡아챘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 한데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리움의 작품들은 그림 속으로 뛰어들기보다 그림을 뒤에 배경으로 두고 운치 있게 즐기고 싶게 만든다. ●간송미술관 ‘인물풍속대전’ 한량들의 놀이 풍경을 담은 ‘연소답청’(年少踏靑)을 보면 과연 혜원 신윤복(1758~?)이다 싶다. 기어이 기생을 자기 말에 태우고 직접 끌고 다닌다. 세도가 자제 같은데 여자에 ‘미치니’ 종 노릇도 마다 않는다. 그래서 왼쪽 뒤편의 말도, 모자도 뺏긴 채 따라가는 종의 표정이 재밌다. 제 주인이 흥에 겨워 난장 놀음을 하는데 맞장구치기도 그렇고, 말리기도 그렇다. 그 난감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백인산 학예연구위원의 설명이 재미있다. “혜원의 아버지가 화원화가였던 신한평(1735~1809)인데, 이분이 일흔 넘게 사시면서 생계를 모두 해결했습니다. 그러니 신윤복은 왈자패들하고 어울려 속 편히 놀았던 것 같아요. 단원(김홍도)의 풍속화를 왕이 보는 그림이라 단정했다면, 신윤복은 자기가 먹고 놀던 모습을 그대로 그렸으니 퇴폐적이고 흥겨운 거지요.” 미인도를 비롯해 널리 알려진 신윤복의 그림들이 지금까지 화사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고관대작 자제들과 어울렸던 덕분에 좋은 재료를 쓸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단다. 김후신(1735~?)의 ‘통음대쾌’(痛飮大快)도 유쾌하다. 제목 그대로다. 배경을 빌딩으로 바꾸고 등장인물에게 양복만 입혀 두면 2차, 3차를 외치며 도심 뒷골목을 다니는 현대인과 같다. 겸재 정선(1676~1759)에서 시작된 진경산수화의 참맛을 내세우는 간송미술관답게 ‘어초문답’(漁樵問答)을 비교해보는 맛도 쏠쏠하다. 낚시꾼과 나무꾼의 문답이라는 ‘어초문답’은 성리학의 대의를 밝히는 내용 때문에 조선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창작 모티프가 됐다. 해서 이전의 어초문답은 중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데 반해 정선의 어초문답은 인물, 배경, 옷매무새가 모두 조선풍이다. 16~30일. 무료. (02)762-0442. ●리움미술관 ‘조선화원대전’ 1층 전시장에는 왕의 행렬, 궁중 행사, 어진(임금 초상화) 등을 배치했다. 위엄을 갖춘 공식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중앙박물관 전시에 가깝다. 인물화에 있어서는 김홍도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명기(?~?)의 ‘오재순 초상’도 볼 수 있다. 지하 전시장은 간송과 같은 풍속화로 넘어간다. 전시장을 독특하게 분할하는 칸막이들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옥 마을을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관람객에게 주기 위한 설정”이란다. 간송이 민속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리움은 중국적인 냄새가 짙다. 화원화가들이 왕실과 사대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한 만큼 아무래도 작은 화첩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해지기는 하지만 진경 그 자체보다 ‘그들의 취향’에 맞춘 듯한 분위기가 강하다. 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요즘 스마트폰에 쓰이는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옛 그림을 자유자재로 확대해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가반차도’(動駕班次圖)는 가로 길이만 10m에 이른다. 김두량(1696~1763)과 김덕하(1722~1772)가 함께 그린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는 길이가 2m에 가깝지만 폭은 8㎝가 채 안 된다. 이런 그림을 상세히 볼 수 있도록 부분 확대 또는 축소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이 똑같은 인물이 없다는 점에서 찬탄을 불러내듯 확대해서 들여다본 사람과 풍경 역시 모두 달라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3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4000~7000원. (02)2014-6900.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대왕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영조대왕전’을 여는 이유는 민국의 이념 때문이다. 최근 연구 성과를 모아 보니 영조가 이미 민국의 이념을 내세웠다는 데서 시작했다. 6000점에 이르는 영조 관련 소장 자료 가운데 민국의 면모를 드러내는 300여점을 추려냈다. 영조 어진을 비롯해 숙종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해 열린 잔치 모습을 그린 ‘숭정전 진연도’ 등이 공개된다. 11월 20일까지. 무료. (031)709-811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조선왕실의궤를 제자리로”

    “조선왕실의궤를 제자리로”

    “조선왕실의궤를 강원 오대산 본래 자리로 돌려주세요.” 일본에 있는 오대산 사고본(史庫本) 조선왕실의궤의 국내 환국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 속에 강원도민들은 오대산 사고 문헌이 예전처럼 오대산 현지에 보관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의궤 제자리 찾기’를 추진해 온 범도민추진위원회와 강원도는 10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된 ‘한·일 도서 협정 비준’에 따라 조선왕실의궤 등이 당초 한·일 정상회담 시기로 예상됐던 이달 말 돌아올 것으로 전망되면서 왕실의궤만은 본래 보관 장소인 오대산 사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환국하는 서책은 조선왕실의궤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대전회통, 증보문헌비고 등 총 1205책(권)이다. 이들 가운데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만을 오대산으로 돌려달라는 것이다. 오대산 사고에는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의 실록 788책(권), 의궤 380책 등이 보관돼 있었다. 이 가운데 왕조실록 788책은 1913년 일본 도쿄대학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714책이 소실됐다. 나머지 74책은 1932년(27책)과 2006년(47책) 각각 돌아와 현재 서울대도서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이번에 왕조실록의 환수는 월정사 등 불교계가 중심이 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가 앞장을 섰다. 왕실의궤 380책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으며, 이 가운데 81책이 일본 궁내청 도서관에 보관돼온 사실이 2001년에 확인됐다. 박용옥 강원도 국장은 “문화재청에 확인한 결과 외교통상부 차원에서 정상회담과 연계한 환국 시기를 일본 측과 협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늦어도 이달 말에는 돌아오는 조선왕실의궤,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의 오대산 반환을 위한 범도민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및 왕실의궤 제자리찾기 범도민추진위원회는 그동안 진행해온 100만명 서명 운동을 조기에 마무리하고 서명부를 문화재청과 국회 등에 보낼 예정이다. 20일에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정부와 국회에서 ‘오대산본 제자리 찾기 운동’의 분위기를 확산시키기로 했다. 도의회에서도 이에 맞춰 건의문이나 성명서를 채택, 실록과 의궤의 오대산 보관을 촉구할 계획이다. 도는 오대산본 실록과 의궤의 보관을 위한 유물전시관을 2013년까지 완공하기 위한 설계를 하고 있다. 조승호 강원도 문화재전문위원은 “왕실의궤가 오대산으로 돌아오면 월정사 매표소 인근에 새로 짓게 되는 유물전시관에 보관할 예정”이라면서 “유물전시관은 올해부터 2013년까지 120억원을 들여 내진과 항온·항습 설비를 갖춰 현재 월정사 내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인 유물 3500여점과 함께 전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WHO&WHAT] 무궁무진한 미래 사극 주역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청나라 볼모 8년… 소현·효종 형제와 그들 부부의 불운했던 삶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7일만에 폐위 단경왕후… 50년 넘도록 중종만을 그리며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조선 최초 세자 이방석은 여색에 빠지고 세자빈은 불륜을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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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WHO&WHAT] 미래 사극의 주인공을 만나다

     등장인물이 칼에 찔리거나 물에 빠진다. 거의 매회 생명의 위기를 맞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장면이 되풀이되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미 그가 역경을 극복하고, 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가 품은 꿈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는지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면 때가 되면 누가 원해도 주인공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비극을 희극으로 바꿀 수도 없고, 삼각관계의 결말도 정해져 있다.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시청자의 요청’이나 ‘여론’도 통하지 않는다. 바로 끝이 정해진 드라마 사극의 운명이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엮어야 한다는 점에서 사극은 줄타기에 가깝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사실은 사돈이었다는 줄거리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렸던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연인이었다는 몇 줄의 야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그들 가문의 족보로 보면 엄연한 허구다.  이순신 장군을 한산대첩에서 미리 전사시키거나 명성황후가 사실은 살아있다는 식의 무리수만 두지 않는다면 사극은 무한한 상상력이 보장된다. 특히 주인공을 바꾸거나 조금만 틀어본다면 무궁무진한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시각에서 쓰이지만, 사극은 그렇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왕의 여자, 왕이 되지 못하고 스러져간 세자는 물론 아무런 공헌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갔다는 기록만 남긴 사람도 얼마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사극이다. 수백년간 ‘성춘향과 이몽룡’의 시각에서 쓰인 춘향전이 방자의 시각에서 쓰이기만 해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이미 영화 ‘방자전’을 통해 입증되지 않았는가.  이번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미래에 영화나 드라마의 중심이 될 사극의 주인공들을 찾아봤다. 시놉시스를 통해 이미 만들어진 사극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 엑스트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던 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한번 들여다보자.  드라마나 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한글 창제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얘기가 그녀의 시가였던 죽산 안씨 문중 문헌에 기록돼 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으로만 알고 있는 한글 창제에 조선시대의 공주가 관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소재다. 정의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가.  조선왕조 518년간 27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왕이 되지 못한 세자 11명이 있었다. 장자 계승을 토대로 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했지만, 정작 맏아들이 왕위를 이은 것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6명에 불과하다. 순종은 요절한 형이 있는 차남이었다. 왕후 자리는 ‘국모’로 불리며 절대 비워서는 안 되는 자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29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문종은 세자 시절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켰고, 홀로 왕위에 올라 세자빈을 왕후에 추증한 유일한 홀아비 왕이었다. ‘왜’라는 궁금증을 품으면 스토리가 될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여기 세 가지의 스토리를 꺼내봤다.    ##심양의 왕자들  ●주요 등장인물  소현세자 이왕/세자빈 강씨/효종/효종비 인선왕후/인조/인조의 후궁 조소용  ●극적 요소  조선의 세자 27명 중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우유부단한 형 소현세자와 강인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동생 효종 형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남편만큼 불행했던 소현세자빈 강씨와 남편보다 더욱 강건했던 인선왕후의 시각에서 풀어간다.  ●시놉시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세자로 봉해진 소현세자는 결혼 8년 만에 후사를 보지만 불과 몇 달 뒤 병자호란이 터진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는 전쟁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무책임한 군주의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고, 세자에게도 항상 짜증 섞인 태도로 일관한다. 삼전도의 굴욕과 함께 세자는 아버지와 대신들의 강권에 의해 “자진해서 적국에 볼모로 가겠다.”고 말해버린 후 울음을 터뜨리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세자 부부는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부부와 함께 볼모살이를 떠난다. 가는 길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세자는 무력감을, 봉림대군은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정작 청나라에 도착한 후 세자는 돌변한다. 이국에서의 고생으로 몸은 무너져 갔지만 조국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세자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커져간다. 반면 세자빈은 오랜 타국생활을 겪으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아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신하고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볼모살이 8년 만에 돌아온 세자를 인조는 ‘오랑캐 물이 들었다.’며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 황제의 하사품이라며 세자가 내민 벼루를 세자의 머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결국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인조와 애첩인 조소용에 의해 독살당하고 만다. 인조는 예비 국모의 체통을 내팽개친 며느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는 누명을 씌워 세자빈 강씨를 폐위시켜 죽이고 만다.  청나라의 문물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고 했던 형과 달리 봉림대군은 오로지 병자호란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었다. 형의 죽음 이후 세자에 책봉되어,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북벌을 위해 궁중 살림을 극도로 긴축했고, 인선왕후 역시 이에 앞장섰다. 인선왕후는 병자호란 당시 피신한 강화도에서 오랑캐에게 잡힐 처지가 되자 자결하려고 했고, 볼모살이 후 돌아와 왕후가 되자 청나라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자점과 조소용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한 여걸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순치제의 등장으로 청나라가 더욱 강해지면서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인선왕후는 아들 현종이 그 뜻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현종은 그럴 뜻이 없었다. 결국 8년간이나 굴욕의 세월을 보낸 왕가의 형제와 그 부인들은 마지막까지 뜻하는 바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들이 되고 만다.    ##7일의 행복, 영원한 이별  ●주요 등장인물  단경왕후 신씨/중종  ●극적 요소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후로 단종비 정순왕후와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를 꼽는 이들이 많다. 왕의 이복동생에서 한순간 왕이 된 남편과, 남편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왕후 자리를 내놓아야 했던 비운의 여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임금의 순애보가 담긴 치마바위 이야기.  ●시놉시스  성종은 왕비였던 윤씨가 연산군을 낳고 폐위된 후 세 번째 왕후로 정현왕후 윤씨를 맞아 진성대군을 낳았다. 진성대군은 12살 때 13세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다. 왕이 되지 못하는 대군의 생활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들 부부 역시 이를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진성대군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진성대군은 더욱 은인자중했다. 어느 날 밤, 여러 장수와 조정 대신들이 진성대군의 집에 들이닥쳤다. 횃불을 켜 든 이들은 “반정을 일으켰으니, 대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게 된 대군 부부는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왕좌에 올라 중종이 됐다. 왕비가 됐다는 기쁨을 누리고 있던 다음 날 아침, 단경왕후에게 급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든다. 아버지 신수근이 전날 밤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비였고,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모든 가족들이 반정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비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단경왕후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종이 보위에 오르고 7일이 지나자 반정 공신들은 단경왕후의 폐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보기 드물게 의좋은 부부였지만 칼로 정권을 잡은 반정 공신들 앞에서 그는 무력했다. 결국 단경왕후는 폐위돼 사가로 나가야 했고, 이때 중종은 19세, 왕후는 20세였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 간택을 1년 가까이 미뤘지만, 신하들의 압박에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중종은 항상 인왕산 산자락을 바라보면서 단경왕후를 그렸다. 이를 전해들은 신씨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의 분홍치마를 펼쳐놓고 남편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10년 후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죽자 일부 대신들이 다시 단경왕후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했고, 결국 신씨는 잊혀졌다. 고작 7일간의 왕후 생활을 하고 스무 살에 왕궁에서 쫓겨난 단경왕후는 무려 71세까지 50년 넘게 남편만을 그리며 살았다.    ##왕궁의 스캔들  ●주요 등장인물  이방석/이성계/태종/정도전/세자빈 유씨/이만  ●극적 요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국정의 기틀을 잡은 강인한 왕 태종과의 관계에서 희생양이 된 조선 최초의 세자 이방석. 어린 나이에 형에게 목숨을 잃기까지 자신의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운한 그와, 조선왕실 최초의 스캔들을 일으킨 세자빈 유씨를 통해 왕실의 비틀어진 모습을 들여다본다.  ●시놉시스  북방의 무인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신덕왕후)와의 사이에서 48세에 막내아들을 본다. 방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아이는 조선이 개국했을 때 11세였고, 한 달 만에 조선 최초의 세자에 책봉된다. 어머니 신덕왕후와 개국공신들이 장성해 사병을 가진 이방원(태종)과 이방간 등을 경계한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던 방석은 본인의 자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총명하지 않은 방석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고, 어느새 여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궁궐을 나서 기생집에 가고, 사냥 대신 민간의 가축을 쏘아 죽이는 일도 허다했다. 한편 방석에게는 나이가 한참 많은 세자빈 유씨가 있었다. 어린아이와 결혼해 억지로 궁궐에 끌려온 유씨는 마음 줄 곳을 찾지 못하다가 궁궐의 내시 이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철없는 망나니 방석보다는 정감 있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이만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국 초기, 궁궐 안팎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몰래 불륜을 이어가던 이들의 행동은 결국 태조에게 발각되고, 끝을 맞게 된다. 태조는 이만을 참수하고 세자빈은 폐서인해 사가로 내쫓았다. 조선왕조에 처음으로 기록된 불륜스토리의 결말이었다.  방석을 앞세운 정도전 등 일부 개국공신들은 태조의 장성한 왕자들이 거느린 사병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결국 정도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기획했고, 왕자들이 사병 차출을 거부하자 관직을 빼앗고 사병까지 몰수했다. 그러나 불과 17일 만에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태조에게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경각에 달린 방석의 목숨을 살려 주는 조건으로 태조는 영안군(정종)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방석은 대궐 밖으로 나서는 순간 이방원 일가의 칼을 맞고 스러졌다. 임금의 적자였던 방석이 ‘대군’의 위치를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270여년이 흐른 숙종 6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올라, 자유로움을 갈망하던 철부지 세자는 ‘조선왕조의 첫 세자’이자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만 남았다. 폐서인된 세자빈 유씨가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조선을 뒤흔든 16인의 왕후들(이수광·다산북스)  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김영사)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김영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들녘)  정의공주(한소진·해냄출판사)  소현세자(박안식·예담)
  • 고려선박서 목간 발굴… 삼별초, 태안 앞바다서 깨어나다

    고려선박서 목간 발굴… 삼별초, 태안 앞바다서 깨어나다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불렸던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馬島) 해역에서는 무수히 많은 배가 침몰했다. 마도 뱃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조세뿐 아니라 곡물을 나르는 배가 다니던 길이었기에 한국 고고학의 보물 터가 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6일 마도 해역에서 수중 발굴 조사 중인 마도 3호선에서 인양된 287점의 유물을 소개했다. 그동안 마도 해역에서는 태안선, 마도 1호선, 마도 2호선의 발굴이 이루어져 완벽한 형태의 고려청자 매병이 발견되는 등 국내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마도 3호선에서 나온 여러 유물 가운데 삼별초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목간(木簡·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물품 꼬리표)이 가장 눈길을 끈다. 몽골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는 그동안 별초의 지휘관이 7~8품의 하급 무반(武班)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마도3호선의 목간에서 ‘우삼번별초도령시랑’(右三番別抄都領侍郞)이란 글이 발굴됐다. 이를 통해 삼별초가 좌·우 각 3번으로 나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와 별초의 지휘관이 4품의 시랑(장군과 같은 품계)도 맡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이란 평이 없지 않았던 삼별초가 장군을 맡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의 항쟁 의식이 더 빛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 성낙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은 “삼별초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는 획기적인 사료”라고 평가했다. 최충헌에서 시작한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한 김준(金俊)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도 포함돼 이채를 띤다. 목간 가운데 앞면에 ‘事審令公主宅上’, 뒷면에 ‘○○生四十合伍一缸玄禮’(○는 표기 불능 글자)라는 글자가 확인된다. ‘사심관인 김 영공 댁 앞으로 보내는 홍합 젓갈과 날 것 40항아리 합 51항아리. 현례’라는 뜻이다. 다른 수취인에 비해 수령할 화물이 압도적으로 많아 김 영공이 월등한 권력자임을 알 수 있다. ‘사심관 김 영공’은 바로 최씨 무신정권 60년에 종지부를 찍은 당시 무신정권 최고실력자 김준이다. 영공(令公)은 고려시대 왕실 제왕(諸王)에게만 붙이던 극존칭이며, 다른 목간에 보이는 ‘택상’(宅上), 즉 누구누구 댁 앞이라는 표기로 만족하지 못하고 ‘주택상’(主宅上)이라고 했다. ‘김 영공님 댁 앞으로 보내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당시 김준의 권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마도 3호선은 길이 12m에 너비 8m, 깊이 2.5m가량이며 현재까지 수중 발굴된 고려 선박 중에서는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 그동안 발굴된 적이 없는 배의 이물과 고물, 돛대와 이를 고정하는 구조 등이 완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선박 구조의 전모도 밝힐 수 있게 됐다. 주요 화물은 젓갈, 말린 생선, 육포, 볍씨 등 먹을거리가 주를 이룬다. 말린 홍합, 생전복, 전복젓갈 등도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사어(沙魚)라고 적힌 목간이 있어 상어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홍합 털과 거대한 사슴뿔도 다량 나왔는데 지혈제 등 약재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47점의 장기돌. 현재 쓰는 초(楚)나 한(漢) 대신 장군(將軍)이라고 새겨진 장기돌과 차(車), 포(包), 졸(卒) 등이 뚜렷이 새겨진 검은색 조약돌은 고려 선원의 생활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자극한다. 마도 3호선의 발굴 조사는 이달 말까지 이루어질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일 정상회담 19일 개최

    6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양측은 일본군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권 문제에 대한 입장차를 공식 확인했다. 그러나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오는 18일 처음으로 방한해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타협이 이뤄질 것인지 주목된다. 지난달 취임 후 처음으로 방한한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무상은 이날 이 대통령을 예방한 뒤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김성환 장관을 만나 1시간 동안 회담했다. 김 장관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 양자 협의 개최를 촉구했으며 일본이 대국적 결단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겐바 외무상은 “일본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왔다.”며 한국 측과 계속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겐바 외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 장관은 또 조선왕실의궤 반환,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8일 치러지는 7급 지방직 필기시험 마무리 전략

    8일 치러지는 7급 지방직 필기시험 마무리 전략

    올해 마지막 일반행정직 공무원 시험인 ‘7급 지방직 공개채용 필기시험’이 경기·부산 등 12개 시·도에서 8일 동시에 치러진다. 수험 전문가들은 “새로운 문제를 풀기보다는 기존에 풀었던 문제 가운데 틀린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시험 당일에는 꼭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알맞은 옷차림을 해 환절기 큰 기온 차에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번 시험의 난이도는 올 7급 국가직 필기시험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망된다. 출제기관이 행정안전부로 같은 데다, 올해 7급 국가직 필기시험의 합격선이 81점(일반행정직)으로 적절하다는 평가가 대체적이기 때문이다. 5일 서울신문이 에듀스파와 함께 7급 지방직 공채 필기시험의 과목별 출제 전망과 마무리 대비법에 대해 알아봤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국어는 최근 독해 문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에도 독해 문제는 8개나 출제됐다. 이런 경향은 올해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시험 전날까지 지문 길이가 긴 지문으로 5~6개 정도 골라 풀면서 독해 감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문법은 표준발음·품사·문장종류·로마자·사동과 피동·어법 등을 꼭 정리해 둬야 한다. 유두선 남부행정고시학원 강사는 “너무 욕심 내지 말고 기존에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7급 국가직과 난이도 비슷할 듯 영어에서 문법은 책의 본문을 바로 공부하기보다는 목차를 펴 놓고 단원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나서, 잘 정리가 안 되는 부분만 정리하는 것이 낫다. 또 풀어왔던 문제집에서 틀린 부분만 다시 보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독해는 기존에 풀었던 문제보다는 새로운 문제로 풀고, 시험 전날까지 날마다 연습해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두형호 강사는 “시험 당일 어려운 문제가 나왔을 때 본인에게만 힘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차분하게 시험에 임하는 것도 최대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당부했다. 한국사는 최근 7·9급 시험 모두 다양한 화보 관련 문제나 사료 제시형 문제가 많이 출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사 검정 고급 기출문제를 풀어보면서 사료와 화보, 지역 관련 문제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또 지난해 우리나라와 같은 시대에 해당하는 중국사 문제가 출제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독도문제, 올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일성록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 프랑스에서 반환된 조선왕실의궤 관련 부분은 출제될 공산이 매우 크므로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선우빈 한국사 강사는 “시험이 얼마 안 남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보다 그동안 공부해 온 익숙한 교재로 정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틀린 문제 다시 풀어라 행정법은 법령과 판례의 극히 지엽적인 부분까지 출제되는 것이 최근 출제의 특징이다. 행정절차법, 민원사무처리에 관한 법률, 정보공개법 등은 단골로 출제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30일부터 시행되고 있는 개인정보보호법은 이번에 꼭 출제된다는 생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정리해 둬야 한다. 판례도 지난해 판례보다는 최신 판례 중심으로 정리해 둬야 한다. 행정학은 금방 잊게 되는 문제인 ‘휘발성 문제’의 출제가 잦다. 학자 이름에 관한 문제는 암기카드를 준비해 시험을 보기 직전까지도 살펴봐야 틀리지 않을 수 있다. 또 지난해부터 지방자치론이 선택과목으로 지정돼, 행정학에서는 지방자치 부분의 비중이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시간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 신용한 행정학 강사는 “시험 보기 전까지 요약서가 아니라 기본서를 1회독하면서 암기형 문제에 대비하는 것이 막판 점수를 올리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번 7급 공채 선발인원은 일반행정직을 기준으로 전남 18명, 경기 14명, 대구 10명, 충북 8명, 부산 7명, 강원 6명, 광주·충남 5명, 전북 4명, 대전·경남·울산 2명이다. 선발인원이 적어 경쟁률은 대부분 지역에서 수백대1에 이른다. 경기가 554.3대1, 대전이 524대1, 부산이 383대1이며 경쟁률이 낮은 지역인 전남도 80.2대1, 충북도 132.3대1, 울산은 208대1에 이른다. 올해 7급 국가직 공채시험(123대1)에 비해 경쟁률이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지난해 응시율이 최대 55.6%(전북)~최소 24.7%(전남)로 평균 45.5% 정도라 올 7급 국가직(62.6%)에 비해 매우 낮다. 지원자가 국가직 등 다른 시험에 이미 합격했거나 선발인원이 너무 적어 응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남부행정고시학원 관계자는 “시험을 포기하지 말고 실제로 시험을 치러 보면서 실전 감각을 익히는 것이 좋다.”고 당부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도움말 에듀스파
  • 한국 고대인의 ‘통치·생활·사상’ 문자로 만나다

    한국 고대인의 ‘통치·생활·사상’ 문자로 만나다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 등 고대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문자, 그 이후:한국고대문자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일부터 11월 27일까지 열린다. 전시는 한국의 고대 문자자료 5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국보 126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연가7연명 금동불상(국보 119호), 진솔선예백장 인장(보물 560호) 등 널리 알려진 국보급 문자자료는 물론이고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과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 문서 등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문자 자료의 수용과 발전 과정을 통해 고대인의 통치, 생활, 사상을 조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자료인 광개토대왕비 원석 탁본은 일본 역사민속박물관 소장품으로 석회를 바르기 전에 뜬 탁본(돌비에 종이를 대고 먹을 두드리는 것)이다. 이 탁본은 5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1차 자료인 광개토대왕비의 원모습을 전해주는 일급자료다. 지금까지 10여종의 원석 탁본이 알려졌는데, 이번에 전시되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일본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다는 설)의 근거로 삼고, 석회로 훼손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고대사 연구의 뜨거운 감자였다. 일본 정창원의 문서는 신라 호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미노국(御野國) 호적 등이다. 문자로 파악 가능한 고대인의 생활은 다양하다. 신라 궁중에서는 가오리, 돼지, 사슴, 노루, 간장, 젓갈 등을 먹었다. 백제인은 거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튼튼한 품종의 벼인 적미를 개발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다.”는 한탄, 죽은 가족이 극락 왕생하기를 비는 가족들의 바람, 가뭄에 비를 애타게 기다리며 용왕에게 기도하던 절박한 심정 등 전시 자료에는 옛 사람들의 내면까지 생생하게 담겨 있다. 7세기 백제 목간(木簡·글씨를 써넣은 나무조각)에는 이자가 5할이나 되는 고리대가 존재한 사실이 나와 있다. 신라 촌락 문서에서는 뽕나무를 심고 삼밭을 일구던 농촌 백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자 수용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문방구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낙랑지역의 봉니(封泥·문서를 봉함할 때 쓴 점토)와 인장, 경주 석가탑에서 출토된 먹, 안압지에서 출토된 종이자료 등 희귀 자료와 여러 종류의 벼루 등도 전시된다. 이용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문자 자료 속에서 옛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헤아려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禮學에 빠진 조선후기, 왕실 저출산 낳았다

    禮學에 빠진 조선후기, 왕실 저출산 낳았다

    조선시대 상소문을 보면 재밌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자연재해로 농작물 수확이 시원찮을 경우,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노총각, 노처녀를 시집·장가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노총각, 노처녀의 원성이 쌓이다 보니 하늘에 노기가 치밀고, 이 때문에 날이 가물어 농사가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자연재해는 하늘의 뜻이니 제왕된 자는 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 유교적인 해석인데, 정작 이런 유교사상이 왕조의 목을 졸랐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왔다. ●인조이후 왕실자녀 절반 급감 계간지 정신문화연구 가을호에 실린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조선시대 왕실여성의 출산력’에 담긴 내용이다. 왕조시대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자식 생산이다. 그런데 김 연구원이 선원계보기략, 돈녕보첩 같은 왕실 족보를 분석한 결과 조선 후기 들어 왕실의 출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앞서 태종~선조 때까지는 자녀 수가 보통 20~29명에 이르렀으나 인조 이후에는 4~14명에 그쳤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는 유교 사상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김 연구원의 분석이다. 유교 사상 강화는 특히 예학(禮學)의 발달을 뜻한다. 강화되다 못해 교조화된 예학은 왕조의 정통성을 오직 ‘정실부인을 통한 맏아들’에게만 줬다. 널리 알려진 ‘예송논쟁’도 결국 적장자냐 아니냐를 따지다 벌어진 일이다. 논란이 어떤 결론으로 치달았는지는 수치상으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시대 왕실 자녀 수는 모두 273명이었는데 인조 이전은 183명, 인조 이후는 90명이었다. 왕비에게서 난 자식은 59명에서 34명으로, 후궁에게서 난 자식은 127명에서 53명으로 줄었다. ●적장자에만 정통성·후궁 홀대 왕실 자녀 수 자체가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정실부인보다 후궁에게서 난 자식 수가 더 크게 줄어든 것이 드러난다. 정실부인을 통한 맏아들에게만 권위를 인정하다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실제 조선 전기에는 으레 후궁 3명은 기본적으로 뒀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후궁은 가급적 줄이고, 들이더라도 정비의 소생이 없을 경우로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정비가 일찍 죽더라도 후궁을 승진시키기보다 계비를 맞는 방식으로 대체했다. 이렇게 후궁을 홀대하니 후궁으로 들이려는 집안도 점점 줄어들었다. ●제사 때도 왕에게 엄격한 금욕 게다가 예학의 발달은 왕에게 엄격한 금욕을 요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3년상이다. 주자가례는 ‘2년이 지나면 침실로 돌아간다.’고 규정짓고 있다. 최소한 2년은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 때도 3일 재계를 해야 한다. 김 연구원은 제사기록을 추정치로 만들어본 결과, 조선 후기 제사 대상자가 6명으로 가장 많았던 6월과 8월에는 한달 30일 가운데 18일이 금욕일이었다고 전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은 출산행위 같은 사적인 일상생활에까지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했지만, 사실 왕조시대에서 왕과 출산은 그렇게 사적인 일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선 후기의 과도한 예학이 어떻게 스스로를 해쳤는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례로 보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용어 클릭] ●예송논쟁(禮訟爭) 효종과 효종비가 1659년과 1674년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효종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두 차례의 의례 논쟁. 1차 논쟁 때는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국왕 자리에 올랐으니 장남 대우를 해야 한다는 주장(3년)과 태생대로 차남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1년)이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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