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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법조인 전성시대/손성진 수석논설위원

    김황식·정홍원 국무총리를 이은 안대희 총리 후보가 청문회를 통과하면 법조인 출신이 세 번 연속으로 총리가 된다. 법조인으로서 처음 총리가 된 인물은 이회창(1993~1994) 전 총리다. 언론들은 ‘강골 검사’로 지칭되는 안 후보를 ‘대쪽 판사’로 불렸던 이 전 총리와 비교하며 ‘제2의 이회창’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한동(2000~2002)·김석수(2002~2003) 전 총리도 법조인 출신이다. 감사원장(황찬현)과 대통령 비서실장(김기춘) 같은 중요한 자리도 법조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바야흐로 법조인 전성시대가 열렸다. 법조인들은 역대 국회에도 40~50여명이 꾸준히 진출했고 19대에도 42명이 당선됐다. 김 비서실장이 검찰총장으로 재직하던 1988~1990년 정 총리는 대검 강력과장, 안 후보는 서울지검 특수1부 검사였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서울지검 공안2부 검사, 홍경식 민정수석은 서울지검 형사2부 검사였다. 가히 ‘김기춘 사단’으로 불릴 만하다. 정 총리가 공식석상에서도 김 실장을 어려워한다는 것은 과거를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고 안 후보가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이라고 말했다는 것도 틀린 게 아닐 것이다. ‘김기춘 우산’ 아래 있던 법조인들의 전성기에 김 실장의 역할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요, 야권이 김 실장의 전력을 문제 삼고 ‘왕실장’, ‘부통령’, ‘기춘대원군’으로 부르며 유임을 비난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판사 출신이지만 법조인들의 정·관계 진출에 대한 여론은 썩 좋지 않은 것 같다. 사법부나 검찰이 권력에서 독립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 탓이 아닌가 싶다. 정치와 권력에 아부하다가 결국 정계로 진출하는 법조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법조인은 법조인으로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미국은 역대 대통령 44명 가운데 절반인 22명이 법조인 출신이다. 그런데도 그런 의식이 덜 한 것은 평소 삼권분립이 잘 지켜지기 때문일 게다. 존 애덤스(2대)를 필두로 마틴 밴 뷰런까지 7연속으로 법조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도 법조인 출신이며 현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변호사로 활동했다. 법률 이론으로 무장한 법조인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중시하는 ‘법과 원칙’, ‘법치주의’도 잘 이해한다. 어떤 수사와 판결도 결론을 내듯이 맺고 끊음이 분명한 장점도 있다. 그러나 융통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원칙에 매달리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는 정치와 법률은 잘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좋다, 나쁘다 하기도 어렵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새 총리 안대희 지명] “김기춘 교체 없는 인적 쇄신 무의미”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후임 총리에 안대희 전 대법관을 지명하고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전격 경질하자 야권은 “비서실장 교체 없는 인적 쇄신은 무의미하다”며 김기춘 비서실장이 유임된 것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이날 박 대통령의 후임 총리 인사 소식을 접하고는 예정된 용인 죽전역 지원유세를 연기했다. 총리 인사 상황을 그만큼 엄중하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김 대표는 제일 먼저 “김기춘 실장은요?”라고 물었다고 한정애 대변인은 전했다. 안철수 공동대표 역시 김 비서실장이 유임된 데 대해 “대통령 본인이 변했다는 가장 중요한 표시는 비서실장 교체인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서 미흡한 변화”라고 비판했다. 민병두 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많은 국민들이 부통령, 왕실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현재 국정 전체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김 실장이 교체되는 것이 국민을 아우르고 신뢰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변인도 현안 브리핑을 통해 “지금 이 시점에서 김 비서실장의 교체 없는 인적 쇄신은 무의미하다”면서 “세월호 참사로 상처받은 민심을 추스르기에 적절한 인사인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김재연 통합진보당 대변인은 “여론을 무마하고 일단 지방선거부터 치르자는 속셈인가. 대통령 담화에 진정성이 있다면 김기춘 체제와 작별해야 한다”고 말했고, 정의당 김종민 선대위 대변인은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인선이다. 비서실장의, 비서실장을 위한, 비서실장에 의한 가신정치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새누리당은 이날 박 대통령의 총리와 청와대 인사에 대해 “환골탈태의 의지를 보인 인사”라며 환영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은 구두 논평에서 “안 전 대법관의 신임 총리 지명과 국정원장·안보실장 사표 수리는 부조리 척결과 환골탈태의 의지를 보여 준 인사”라면서 “온 힘을 모아 국가적 개혁을 통해 진정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러 외무부 “찰스는 ‘왕’ 자격 없어” 강경 발언

    러 외무부 “찰스는 ‘왕’ 자격 없어” 강경 발언

    영국 찰스 윈저(67) 왕세자가 블라디미르 푸틴(63) 러시아 대통령을 나치 히틀러에 비유한데 대해 러시아 외무부가 “찰스 왕세자는 영국 왕 자격이 없다”며 강경 대응을 펼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러시아 외무부가 찰스 왕세자의 ”푸틴은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 발언에 대해 ‘깊은 모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영국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강력 항의, 이 발언을 둘러싼 파장이 양국 간 갈등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찰스 왕세자의 이 발언은 공식일정으로 캐나다를 방문 중이던 지난 20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이민사박물관에서 처음 언급됐다. 당시 찰스 왕세자는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가족을 잃었던 자원봉사자 마리안 퍼거슨(78)과 관련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침공에 비유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기존 영국 왕실이 국제 정세에 중립적 행보를 취해왔던데 반해 이번 찰스 왕세자의 발언은 이례적이라는 것이 외신들의 분석이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맞서 싸우며 3,000만 명이 넘는 군인이 희생된 러시아의 수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대단한 모욕”이라며 영국 당국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심지어 “찰스 왕세자는 영국 왕에 적합하지 않다”는 강경 발언까지 쏟아냈다. 또한 러시아의 ‘친 푸틴 미디어’들도 영국 왕실을 독일 나치에 연관시키는 보복성 보도를 내놓고 있으며, 한 영국 노동당 의원은 “찰스 왕세자의 발언에 정치적 견해가 담겨져 있다면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는 발언을 제기하기도 하는 등 영국 정계에도 파장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영국 왕실 측은 “찰스 왕세자의 발언은 나치의 유대인말살정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나온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며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영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들은 런던에서 영국 외무부 실무자들과 만나 찰스 왕세자의 발언에 대한 공식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외무부 측은 왕세자 발언에 대한 해명 대신 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러시아의 행동을 역으로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러 외무부 “푸틴=히틀러 발언, 깊은 모욕” 항의

    러 외무부 “푸틴=히틀러 발언, 깊은 모욕” 항의

    영국 찰스 윈저(67) 왕세자가 블라디미르 푸틴(63) 러시아 대통령을 나치 독재자인 히틀러에 비유한데 대해 러시아 외무부가 분노를 표출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러시아 외무부가 찰스 왕세자의 ”푸틴은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 발언에 대해 ‘깊은 모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강력 항의, 이 발언을 둘러싼 파장이 양국 간 갈등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찰스 왕세자의 이 발언은 공식일정으로 캐나다를 방문 중이던 지난 20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이민사박물관에서 처음 언급됐다. 당시 찰스 왕세자는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가족을 잃었던 자원봉사자 마리안 퍼거슨(78)과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찰스 왕세자는 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히틀러가 ‘이것은 수주일 안에 마무리 될 전격 전쟁’이라며 진행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침공에 비유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행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외신들은 기존 영국 왕실이 국제 정세에 중립적 행보를 취해왔던데 반해 찰스 왕세자가 이례적인 행보를 보여 큰 관심을 표했다. 또한 찰스 왕세자는 내달 6일 프랑스에서 열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70주년 기념식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어서 왜 현시점에서 해당 발언을 했는지에 대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러시아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러시아 외무부는 찰스 왕세자의 발언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맞서 싸우며 3,000만 명이 넘는 군인이 희생된 러시아의 수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대단한 모욕”이라며 영국 당국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 또한 러시아의 ‘친 푸틴 미디어’들도 영국 왕실을 독일 나치에 연관시키는 보복성 보도를 내놓고 있으며, 한 영국 노동당 의원은 “찰스 왕세자의 발언에 정치적 견해가 담겨져 있다면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야한다”는 발언을 제기하기도 하는 등 영국 정계에서도 파장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영국 왕실 측은 “찰스 왕세자의 발언은 나치의 유대인말살정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나온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며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게티이미지/멀티비츠 이미지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英 런던 내셔널 갤러리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英 런던 내셔널 갤러리

    런던 트라팔가 광장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1805년 스페인 남쪽 트라팔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나폴레옹이 지휘하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한 넬슨 제독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 광장에는 높이 50m나 되는 기둥 위에 세워진 넬슨제독의 동상, 수많은 비둘기들이 모여드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명실상부한 런던 최고의 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의 넘치는 생동감은 미술관으로 들어가서도 이어진다. 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고상하고 딱딱한 분위기는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들은 전시장 가운데 놓인 편한 소파에 앉아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어떤 이는 미술관에 비치된 이동식 의자를 좋아하는 거장의 그림 앞에 가져다 놓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상하기도 한다. 손주에게 그림을 설명해 주는 할머니, 지팡이 짚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나온 중년의 아들, 넥타이 맨 회사원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에선 편안한 마음으로 거장들의 작품을 만끽한다. 마치 내 집 거실에 있는 것처럼. ●한 해 603만명 관람… 세계 4위 규모 13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서양 유럽회화 2300여점을 모아 놓은 내셔널 갤러리는 다른 유명 미술관들처럼 블록버스터급 기획전시 없이도 한 해 603만명(2013년 기준)의 방문객을 모으는 세계 4위의 미술전시관이다. 이처럼 많은 관람객이 찾는 이유는 미술관 조직과 운영방식, 그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1824년 러시아 출신의 금융가이며 미술애호가였던 존 앵거스타인이 보유하던 회화작품 38점을 영국 정부가 5만 7000파운드에 구입한 것을 계기로 탄생한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들은 3분의2가 개인 기증을 통해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작품은 모두 국가소유로 되어 있고, 문화·미디어·스포츠부의 보조를 받지만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설립 초창기에 조직된 운영위원회가 ‘박물관·미술관 운동 1992’라는 조직의 세부원칙에 따라 운영한다. 위원회가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모든 사람이 내 집에서처럼 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갤러리는 설립 당시부터 모든 이에게 무료 공개되고 있다. 미술관의 접근성부터 소장품의 취득 , 관리, 운영 등에서 내셔널갤러리가 걸어 온 역사는 진정한 국립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현재의 트라팔가 광장에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1838년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죽은 나자로의 소생’을 포함해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의 주요 작품이 포함된 앵거스타인의 컬렉션은 팔몰가 100번지에 있는 앵거스타인의 집에서 전시됐으나 비좁고 더워서 방문객들의 불만이 컸다. 풍경화가이며 회화작품 수집가였던 조지 보몬트 경이 1826년 자신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했고, 1828년에는 예술품 수집가였던 윌리엄 홀웰 카 목사가 기증한 34점이 추가되자 팔몰가 100번지는 발딛을 틈 없이 붐볐다. 건물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105번지로 옮겼지만 역시 비좁은 실내와 열악한 환경으로 혹평을 받았다. 언론은 영국의 국립미술관이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등 인근 경쟁국에 비해 형편없다는 것을 기회가 될 때마다 비판했다. 1831년 의회는 새로운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어디에 지을지를 놓고 오랫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런던 중심부인 트라팔가 광장의 왕실 마구간 자리가 미술관 건축부지로 결정됐다. 부유층이 모여 사는 런던 서부와 동쪽의 서민 거주지역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모든 계층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대학건물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윌리엄 윌킨스(1778~1839)가 설계를 맡았다. ●전체 전시 면적 축구장 6개 크기 윌킨스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칼리지, 트리니티칼리지, 코퍼스 크리스티칼리지 등 신고딕양식의 대학건물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다. 그는 왕실 마구간의 구조를 살려 미술관 건물을 설계했다. 하지만 잇따른 기증으로 컬렉션이 점점 풍요로워지면서 건물은 1869년 전반적인 개·보수를 거쳐 7개의 전시실을 추가하는 등 몇 년에 걸쳐 확장되고 개선됐다. 그럼에도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1985년 세인즈베리가의 형제들이 내셔널 갤러리의 신관 건축비용을 기부한 덕분에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뒤 방치된 서쪽의 가구공장 부지를 매입해 새로운 건물을 확장 건설할 수 있게 됐다. 1991년 미술관 서쪽의 세인즈버리관이 개관하면서 공간은 괄목할 정도로 늘어났다. 미국인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와 그의 부인이 설계를 맡은 세인즈베리관은 자연채광을 극대화시켰으며 2층의 전시실, 지하층의 극장 등을 갖추고 있다. 세인즈베리관이 완성되고, 2005년 동관이 재정비되면서 미술관의 전체 전시면적은 축구장 6개 넓이인 4만 6396㎡로 늘었다. 런던 시민들은 1월 1일, 크리스마스 연휴를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되는 내셔널 갤러리를 내 집 거실처럼 애용한다. 직장인들은 점심 식사시간에 잠시 들러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고 일터로 돌아가곤 한다. 지난달 초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존 핀들리(88)도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냈다. 17세기 회화를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미술관에서 20분 거리에 직장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샌드위치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미술관에 책을 들고 와서 독서를 하다가 가곤 했다”고 했다. 나이도 들고, 런던 교외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전처럼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가능하면 부인과 함께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미술관을 찾는다고 했다. 인상파 회화를 좋아한다는 그의 아내는 “이렇게 가치가 있는 그림들을 언제나 와서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내셔널 갤러리가 개관 이래 중점을 두는 분야는 교육이다. 인류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예술작품을 활용한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감수성과 예능적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 홈페이지에서는 초등학생과 중등학생용 교육프로그램을 안내하고 있으며 교사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도 인터넷에서 참고할 수 있다. 전문 교육을 받은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 작품들을 설명해 주고, 놀이를 하고, 함께 그려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모두가 어울려 마음껏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배우는, 살아있는 미술관이 바로 내셔널 갤러리이다. lotus@seoul.co.kr
  • 오픈 샌드위치 맛보세요

    오픈 샌드위치 맛보세요

    20일 서울 중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로얄코펜하겐 창립 20주년 아트 오브 핸즈 전시장에서 덴마크 출신 옌스 옌센(왼쪽에서 첫 번째) 셰프와 명현지(세번째) 한식요리연구가가 덴마크 왕실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 식기 위에 한국과 덴마크의 식재료로 만든 오픈 샌드위치를 선보이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열린세상] 국가개조는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가개조는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정정화 강원대 공공행정학과 교수

    노무현 정부 때의 일이다. 대통령이 어느 날 국무회의에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읽어 보기를 권했다고 한다. 1995년 4월 미국 오클라호마 시에서 발생한 연방정부 청사 폭파사건을 계기로 하버드대 조셉 S 나이 교수팀이 쓴 ‘국민은 왜 정부를 믿지 않는가’라는 책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왜 정부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고 있는지를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추적한 이 책은 경제정책의 실패와 부정부패로 인한 도덕성 상실, 개인주의적 성향과 몰가치적 현상, 정부업무의 효율성 저하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 정보기술(IT) 기술 발달에 따른 정보접근성 확대와 국민의 기대와 욕구의 증가도 정부에 대한 신뢰 하락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뿐만 아니라 대기업, 대학, 의료계, 언론계 등 주요 기관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30년 전에 비해 반 토막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특히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각국 정부신뢰도 조사결과 한국 국민의 23%만 정부를 신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4개 회원국과 러시아·브라질을 포함한 36개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스위스 국민의 정부 신뢰도가 77%로 가장 높았고 OECD 회원국 평균은 39%였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24.8%에서 올해는 더 하락했다. 세월호 참사로 정부에 대한 신뢰는 더는 추락할 곳이 없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다. 정부 불신뿐만 아니라 이번 참사로 한국 사회의 총체적 난맥상이 낱낱이 드러나 국민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개조를 천명한 것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을 반영한다. 현재 거론되는 국가개조의 요지는 국가안전처를 신설해 안전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편하고,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난 ‘관피아’ 개혁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얼마나 성공할지 국민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때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과 인력을 보강해 국민 안전을 최우선시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고 정보의 공유와 공개를 통해 유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어 ‘정부3.0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관료조직의 카르텔이 얼마나 견고하고 촘촘히 얽혀 있는지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역대 대통령들도 국가개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한국창조’를 위해 ‘한국병’을 고치겠다고 칼을 빼들었지만 임기 후반에는 측근 비리와 관료들에 포획되어 국가경제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제2건국’을 내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가개조론도 관료주도의 개혁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4대강 사업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개조론’에 빗대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강산개조론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최근 한국사회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민초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과 맞섰고, 구한말 왕실과 위정자들의 무능과 부패에 분개해 국가의 존엄을 되찾겠다고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주체도 민초들이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고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섰고, 태안 앞바다의 기름을 닦아낸 것도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직과 시스템을 점검하고 책임자를 엄벌해야 한다. 국가개조 수준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와 시스템을 작동하고 매뉴얼을 실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세월호 참사는 위기관리시스템의 부재나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가 아니라 과정이나 절차보다는 이익만 추구하려는 성장 지상주의와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합작품이었다. 그래서 국가개조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한다. 시민단체, 교육계, 종교계가 나서 인간존중과 신뢰회복을 위한 국민의식 개혁운동을 벌여야 한다. 서로를 배려하고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는 시민정신과 공동체의식이 뿌리내릴 때에야 비로소 국가개조가 성공할 수 있다.
  • ‘실패에서 배운다’ 인간 한계 도전한 시도들

    ‘실패에서 배운다’ 인간 한계 도전한 시도들

    위대한 실패/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 지음 장혜경 옮김/율리시즈/336쪽/1만 5000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실패자에 대한 기록은 잘못된 것, 극복해야 할 대상 정도로 사용된다. 독일 작가 베른트 잉그마르 구트베를레트는 “과거에 대한 언급이 항상 옳은 것일 수는 없다”면서 그렇게 ‘기만당한’ 역사적 사실과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위대한 실패’는 그중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시도에서 비롯된 12가지 실패를 살핀다. 저자는 “야망, 노력,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얽힌 매혹적인 이야기라는 점과는 별개로 이러한 큰 실패 사례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고 했다. 제목에 붙은 ‘위대한’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고, 때론 황당한 계획이었지만 그조차 후대에 남기는 메시지가 있다는 의미다. ‘보베 생 피에르 대성당’이 저자가 드러내고자 한 오만과 자만이 부른 대표적인 실패작이다. ‘고딕’은 구시대적인 것, 교회의 음험한 지배, 비참한 백성의 생활 등 부정적인 측면을 내포한 경멸의 의미로도 쓰인다. 생 피에르 대성당은 그 표상이자 과욕이 부른 불행이다. 1140년 7월 프랑스 국왕들의 무덤이자 가문의 수도원인 생 드니 베네딕트 수도원은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으로 권위를 과시하기 좋은 고딕식 대성당이 완공되자 다른 성당들은 너도나도 그 스타일을 따랐다. 생 드니 개축 이후 300년 동안 프랑스에는 대성당 100개가 건축됐고, 대형 성당도 500여개가 생겼다. 현대의 마천루 경쟁의 시초라 할 만하다. 서로 최고가 되려는 경쟁에 프랑스의 부자 도시 중 하나인 보베가 뛰어들었다. 왕실 관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베의 주교들은 세속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위용을 뽐낼 만한 성당 건축에 나섰다. 그러나 건축은 경제, 권력이동 등 상황 변화에 취약한 프로젝트라는 것을 간과했다. 1225년 성당 건축을 시작한 뒤 제단을 완공한 1272년까지 주교가 세 번 교체됐고, 공사는 진행과 중단을 반복했다. 1284년 11월에는 제단 천장이 무너졌으나 어수선한 시대 분위기 탓에 1480년대에야 재건축이 논의됐다. 1560년대 135m짜리 종탑을 완성했지만 1573년 탑이 내려앉는 재앙을 맞았다. 현재 보베 대성당을 동쪽에서 보면 장대함에 놀라지만 남쪽 면으로 돌아서는 순간 옹색한 외관을 가진 건물이 되고 만다. 연속된 불행의 결과이자 자만이 부른 참담한 흔적이다. 책은 또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의사·언어학자였던 루드비히 자멘호프를 불러온다. 공동의 언어를 갖게 되면 모든 민족적 증오가 사라질 것으로 믿고 국제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자국 언어의 쇠퇴를 우려한 강대국의 반대와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보급 운동은 실패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상주의적 노력의 실패가 위대한 것은 비록 비현실적이지만 그 목표의 숭고함은 영속하기 때문”이라면서 “어떤 역경에도 씩씩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류가 짊어진 숙제요 사명”이라고 강조한다. 책은 이 밖에도 기존의 달력을 바꿔 ‘1주 10일’을 주장했던 프랑스 혁명력,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고자 지중해 수면을 낮추려 했던 아틀란트로파 계획, 인간 본성의 개량을 목표로 시도됐던 인간과 원숭이의 교배 등을 다룬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과정, 당대 역사와 실패의 원인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풀어내면서 나름의 해설을 덧댄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우린 아직 일본의 문화재 식민지다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아라이 신이치 지음/이태진·김은주 옮김/태학사/256쪽/1만 5000원2011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가 89년 만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도서가 145년 만에 돌아왔다. 조선 말기와 일제시대에 약탈된 우리 문화재의 소재가 확인돼 우리 정부가 요구하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와 책임 문제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아온 아라이 신이치 일본 스루가다이대 명예교수 겸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대표가 조선 말기와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의 문화재에 관해 쓴 책이다. 원제는 ‘식민주의와 문화재-근대 일본과 조선을 통해 생각한다’. 그는 2011년 4월 조선왕실의궤 등 귀중 도서 반환에 관한 한·일 협정을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가 심의할 때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그 자리에서 “반환 문제는 식민지 지배 청산을 위한 기본틀이며, 역사자료 등 문화재는 그것이 태어난 환경이나 배경에 두어야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조선왕실의궤도 조선왕조 문화의 상징으로서 원래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진술했다. 저자는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 어떻게 시작됐고 진행됐는지를 추적했다. 첫 무대는 1875년 9월 강화도였다. 그때 일본은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의 지휘 아래 조선의 귀중 도서들을 노획해 갔다. 이후 1894년의 청일전쟁에 편승해 일본은 궁중의 재화와 보물들을 마구 약탈했다. 일본 궁중 고문관 겸 제국박물관 총장인 구키 류이치는 전시 문화재 수집 지침을 정부와 육해군 고관들에게 전달했다. 평시에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명품을 얻을 수 있으며, 평시에 비해 중량 있는 물품을 운반할 방법이 있다는 등 군이 주도하는 문화재 약탈의 이점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일본의 학계와 정치인, 군이 일체가 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문화재 약탈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일제의 목표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미술품까지 약탈, 수집함으로써 ‘동양미술 유일의 대표자’ 지위에 서는 것이었다. 청일전쟁 선전포고 직전인 1894년 7월 23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궁중의 재화, 보물, 역대 제왕의 진기한 물건이나 법기(法器), 종묘의 주기(酒器)류를 모조리 챙겨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조선이 수백년간 축적해 온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간 것이다. 개성과 강화 부근의 고려 고분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파헤쳐졌고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를 포함한 고미술품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뒤 발군의 것들을 골라 일왕에게 갖다 바쳤다. 오사카에는 조선에서 나온 고물(古物)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일제의 기상학자인 와다 유지는 우량(雨量) 측정기인 측우기를 일본으로 빼갔다. 이후 1923년 이 측우기는 영국에 기증돼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가 학술조사라는 이름으로 시행한 고적(古跡) 조사는 한국의 문화재를 더욱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빠트렸다. 낮은 등급 판정을 받은 경희궁이 헐렸고, 고분묘 조사는 결과적으로 사굴이나 남굴 풍조를 심화시켜 유적들을 괴멸시켰다. 한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일본으로 반출된 한반도 문화재가 6만 1409점이 넘을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 내에서 개인이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만 해도 30여만 점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한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에서 약탈 문화재 반환 사례가 부쩍 늘었다.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에우프로니오스의 항아리를 포함해 21점을 이탈리아에 반환했다. 영국은 20만년 전 돌도끼와 기원전 7000년대의 토기, 동전 등 2만 5000점의 유물을 이집트에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도 약탈 문화재의 일부를 반환했다. 책에는 한·일 간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참고 사항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해외 여러 나라들의 문화재 반환 사례, 국제법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반환 움직임, 문화재 반환과 식민지 청산의 현재적 의미 등을 두루 짚어볼 수 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영국박물관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영국박물관

    박물관과 미술관은 문화 생태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전통적 문화 강국으로 꼽히는 유럽 국가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창간 110주년을 맞아 ‘예술을 품은 예술 공간’, 즉 건축적 관점에서 세계 유수의 박물관·미술관과 국내의 대표 미술관을 탐사하는 특집 기획을 연재합니다. 문화융성을 위해 마련한 기획시리즈를 통해 예술의 역사와 건축의 역사, 그리고 미술관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글 사진 런던 함혜리 기자 유럽 주요 도시의 유서 깊은 박물관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박물관 전성시대’를 열었고, 그 유행을 선도한 곳이 바로 우리가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이다. 파리의 루브르, 로마 바티칸 시국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으로 불리는 영국박물관은 80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모아 온 전리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인류학적 가치를 지닌 문명사적 유물을 소장·전시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박물관이라기보다 세계의 박물관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법하다. 규모 말고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또 있다. ‘박물관의 나라’인 영국의 첫 국립박물관이자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도록 영국박물관은 설립 이래로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한다는 점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에 의해. ●2000년 ‘밀레니엄 프로젝트’로 대변신 부활절 연휴였던 지난달 초 런던 그레이트 러셀 스트리트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박물관을 찾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런던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추적추적 걸어야 하는 여행자의 신세. 비에 젖은 신발 때문에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이지만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정면의 기둥들을 보는 순간 피곤이 싹 달아났다. 계단을 올라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깥 날씨와는 정반대로 박물관 중앙 홀이 빛으로 가득했고 쾌적했기 때문이다. 빛은 격자모양의 수많은 유리와 철골조로 이어진 거대한 유리지붕에서 박물관 중앙부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빛 아래에서 박물관에 대한 정보도 얻고, 공부도 하고, 바닥에 앉아 쉬기도 하며, 기념품을 고르기도 한다. 박물관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떤 도시의 중앙 광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중앙홀은 활기로 넘쳤다. 영국박물관의 밀레니엄프로젝트로 지난 2000년 만들어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정원’(Queen Elizabeth Ⅱ Great Court)이다. 대정원을 설계한 이는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 경이다. 단순함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는 그의 건축은 인간과 자연, 예술과 건축기술을 조화시키는 건축 철학과 방법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의사당 건물을 통해 알 수 있듯 포스터는 거대한 유리 돔이나 유리 캐노피를 이용해 옛 건물에 신선하고 창의적인 감성과 혁신을 부여하는 데 탁월하다. 그의 건축철학과 기술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대정원이다. 영국박물관 위원회는 박물관에 있던 영국도서관이 1997년 세인트 판크라스의 새 건물로 이전하는 것을 계기로 박물관 개축 계획을 세우고 국제공모전을 열었다. 위원회가 내건 조건은 감춰져 있는 공간을 드러낼 것, 오래된 공간에 활력을 줄 것,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낼 것 등 세 가지였다. ●유럽 3대 박물관… 260년간 시민에 무료 공개 영국 박물관은 내과의사이자 박물학자였던 한스 슬론(1660~1753) 경의 유언에 따라 국가에 기증된 수집품과 왕실이 기증한 책과 메달 수집품을 기초로 1753년 설립됐다. 박물관 개관과 운영을 위해 구성된 위원회는 17세기에 지어진 블룸스베리의 몬태규하우스를 2만 파운드에 구입해 그 갤러리와 서재에서 1759년 1월 15일부터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기존 박물관들이 교회나 왕실에 속해 있고, 귀족적인 회화 중심의 컬렉션을 소장하던 것과 달리 이 박물관은 최초의 국립박물관으로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물 및 유물을 무료로 공개전시했다. 공공의 목적을 위해 기증된 귀중한 유물들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무료 공개하는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자연사유물과 도서 등이 탁월했던 영국박물관 컬렉션에 인류학적 유물들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1772년이다. 나폴리의 영국 대사였던 윌리엄 해밀턴의 그리스·로마 컬렉션, 영국 내전을 기록한 토머슨 컬렉션, 1000여점의 희곡원고로 이뤄진 개릭 장서컬렉션,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토머스 쿡의 수집품들이 추가되면서 영국박물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특히 19세기 초에는 영국군이 나일강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한 후 고대 이집트의 조각작품이 대거 유입됐고, 이집트의 영국 영사로 근무한 헨리 솔트가 보유하던 람세스 2세의 거대 흉상, 찰스 타운리의 그리스 조각 컬렉션, 토머스 브루스의 파르테논 신전 대리석 조각 등이 차례로 유입됐다. 이들 방대한 컬렉션과 조지 3세의 장서를 함께 소장하기 위한 미술관 건립 계획이 수립됐고 네오클래식 디자인을 추구했던 건축가 로버트 스머크(1780~1867) 경이 설계를 맡아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에 걸맞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4각형 건물이 1852년 완공됐다. 이후 박물관은 수차례에 걸쳐 확장과 개축을 거듭했다. 190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북관을 증축했고 1930년대에는 이집트, 그리스, 아시리아 조각품을 소장하는 서쪽 갤러리와 두빈갤러리 증축이 이뤄졌지만 가장 괄목할 만한 변신은 밀레니엄프로젝트였다. 총 1억 파운드의 건축비 중 3000만 파운드는 밀레니엄위원회에서, 1575만 파운드는 문화유산복권기금에서 충당했으며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의 기부로 메워졌다. 계단 양옆을 휘감고 있는 흰 벽에는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공의 공간이 40%… 중앙부에 도서관·서점이 포스터는 장소의 역사성을 살리는 한편 미래의 박물관이 기능하도록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냈다. 박물관 중앙부에 열람실을 두어 도서실과 박물관이 공존해 온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한편 격자무늬 유리지붕이 안뜰 전체를 뒤덮은 중앙홀이 완성되면서 카페테리아, 서점, 안내센터, 삼성디지털체험센터 등 공공을 위한 공간이 40%나 늘었다. 과거 이집트관의 전시품들을 쌓아 두었던 공간은 어린이와 가족 단위 방문객들을 위한 교육장소로 쓰이고 있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딸아이들과 켈트문화전의 연계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 주부 엘런은 “날씨에 관계없이 박물관 실내 광장에 모여 휴식하고 공부하며 문화를 만끽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박물관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세계보존·전시센터(WCEC)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박물관 북서쪽에 들어서는 WCEC에는 총 1억 3500만 파운드가 소요되며 세인즈베리 가문의 기부와 문화유산복권기금 및 문화·유산·스포츠부 지원금으로 충당하며 기금 모금이 진행 중이다. 총면적 1만 8000㎡에 달하는 WCEC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그레이엄 스터크는 “260년 역사를 지닌 영국박물관 진화의 다음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박물관은 전시, 보존, 실험 및 분석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간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lotus@seoul.co.kr
  • 美반환 국새 60여 년 만에 특별 공개

    美반환 국새 60여 년 만에 특별 공개

    문화재청은 13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된 대한제국 국새 등 인장 9과를 공개하는 특별전을 개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인장 9과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만든 국새인 ‘황제지보’(皇帝之寶), 순종이 고종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어보인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 등 대한제국 황실과 조선 왕실 소유의 유물이다. 조선왕실의 사인(私印)인 보소당(寶蘇堂)의 인장들도 함께 돌아와 공개된다. 반환된 인장들은 1950년대 국내에 주둔하던 주한미군이 몰래 불법 반출한 것을 문화재청과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의 공조로 압수한 것들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위기 때마다 나라 바로잡은 명문장

    위기 때마다 나라 바로잡은 명문장

    고려를 읽다/이혜순 지음/섬섬/512쪽/2만 5000원 그동안 조선시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해 왔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됐고 왕과 사대부의 삶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역관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삶, 노비와 기생의 일상까지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이고 삶은 어떠했으며 시대와 역사의 흐름속에서 무엇을 열망했을까. 고려 역사를 알 수 있는 책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유일하다. 고려 전기의 문집은 대부분 소실됐다. 신간 ‘고려를 읽다’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철학이나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다양한 사고와 의식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문학적 가치가 높은 글에서부터 정치적인 글, 외교문서, 논설문, 편지, 묘지문, 종교의례문, 과거시험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명문장을 선정해 번역하고 해설을 붙였다. 고려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엿볼 수 있다. 저자는 고려시대의 공문서가 역사·학술적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고려는 조선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사회였다고 말한다. 신분 간 고착이 심하지 않았고 왕실과 귀족이 정면 대립하기도 했다. 고려는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특히 중국과 만주의 정세 변화에 따라 나라 운명도 수시로 바뀌었다. 거란의 내침에 시달렸고 송나라 멸망 이후 새로 세운 남송과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몽골 항쟁에 실패한 뒤에는 오랫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마다 이를 바로잡는 데 일조한 것이 문장보국의 명문들이었다. 이 책은 이런 글들을 통해 고려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을 이해하게 하고, 인문학이 나라를 살렸음을 일러 준다. 역사의 고비마다 외세로부터 영토를 지키고 국권을 방어하기 위해 간절한 진정성을 담아 보낸 외교 편지를 읽다 보면 고려와 주변국의 복잡한 정세 변화가 한눈에 잡힌다. 고려 사회와 문화, 풍속 등 매력적인 면을 알 수 있어 흥미롭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조선왕실 옥새 돌아오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조선왕실 옥새 돌아오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멈추는 듯했어요. 곧바로 답장을 보냈죠. ‘당신이 내게 역사를 보냈다’고 썼습니다.” 지난해 9월 23일, 그날 일을 떠올리면 김병연(41) 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주무관은 지금도 얼굴이 상기된다.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 조태국 서울지부장은 김 주무관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흐릿한 사진에 담긴 9점의 도장들과 함께 ‘구한말 한국의 문화재가 맞느냐’는 물음이 덧붙어 있었다. ●옥보 ‘황제지보’ 역사책에만 전해지던 것 ‘융희원년존봉도감의궤’ 등 옛 기록을 샅샅이 뒤져 사진과 일일이 대조했다. 며칠 밤을 지새웠다. 도장들은 고종 황제가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만든 국새 ‘황제지보’(1897년)와 고종의 황제 존봉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어보인 ‘수강태황제보’(1907년) 외에 유서지보, 준명지보, 우천하사 등의 왕실 인장으로 확인됐다. “황제지보는 옥으로 만든 ‘옥보’예요. 예전 금으로 만든 국새들과는 다르죠. 옥보는 기록도 없고, 그저 역사책에만 전해지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종이 만든 국새는 기존 8점에서 9점으로 늘었다. 지난달 25일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손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에 이르는 국새와 어보, 왕실 인장 등 9점이 들려 있었다. 감정가만 150억원에 이르렀다. 모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불법 반출한 것들이다. 세간에선 다양한 추측이 떠돌았다. 유네스코 협약이 작용했다거나, 미국과 모종의 협상이 오갔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서 만난 김 주무관은 일련의 추측들을 일축했다. “외국군 점령 당시 이전된 문화재는 ‘사안별 접근’ 방식을 따릅니다. 1970년 맺어진 유네스코 협약은 이전 사건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아요.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때 인장을 들여오자는 아이디어도 우리 측이 먼저 냈지요. 약탈 문화재 반환은 늘 상대의 명분을 살려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번 반환은 지난해 9월 돌아온 우리나라 최초의 미발행 지폐인 ‘호조태환권’ 원판 이후 한·미 공조수사에 의한 두 번째 수확물이다. HSI는 제3국의 테러 자금이 문화재 거래에 유입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우던 터에 경매에 나온 도장들을 우연찮게 발견했다.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사는 80대 미망인이 내놓은 물건들이었다. 주한미군이던 그녀의 남편은 1950년대 이 도장들을 몰래 국외로 반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美 주한미군 80대 미망인이 경매에 내놓아 HSI로부터 이를 통보받은 문화재청은 다급해졌다. 즉시 경매 회수와 인장 압수를 요청했고 미 법원에 영장 발부를 신청했다. 미 형법인 연방도품법(NSPA)에 따라 법 논리를 펼쳤다. “미국 판례와 형법을 뒤져 수사요청서를 작성하는 데만 수주일이 걸렸어요. 도난 문화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관련 내용이 담긴 1950년대 국내 신문기사와 옛 대한제국 문건 등을 몽땅 제출했죠. HSI는 자국민에 대한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민사소송을 통해 환수하길 원했습니다.” 그해 11월 미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자 HSI 수사관들은 미망인으로부터 도장들을 압수했다.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인장을 기증받았다고 발표했다. ●오바마 방한 일주일 전 특공대 호위 속 도착 그렇게 도장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방한 일정보다 일주일 앞서 서울 광화문의 미 대사관 건물에 특공대(SWAT)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했다. 외교관을 꿈꾸던 김 주무관은 환수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대학시절 프랑스국립도서관을 방문했다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를 보고 국새와 어보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환수 업무를 맡기 위해 7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화재청으로 자원해 이동했다. 그는 “약탈이나 불법 반출된 문화재라도 감정을 앞세워 되찾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상대국의 박물관은 우리 문화재를 수장고에 감춰 버린다”면서 “물밑에서 협상을 통해 명분을 살려 찾아오는 게 최선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英 로열패밀리가 직접 뽑은 ‘베스트 사진’ 보니

    英 로열패밀리가 직접 뽑은 ‘베스트 사진’ 보니

    영국 윌리엄 왕세손부부가 우방국인 호주와 뉴질랜드를 3주간 국빈 방문해 화제를 모은 가운데, 당시 왕세손부부와 생후 8개월의 조지왕자와 함께 찍은 수 천 장의 사진 중 왕실이 직접 베스트 컷을 선정해 눈길을 끌고 있다. 왕세손비인 케이트 미들턴이 뽑은 ‘최고의 사진’은 자신이 조지왕자를 품안에 안고 어딘가를 향해 환히 웃는 모습을 담고 있다. 비록 윌리엄 왕세손은 이들 뒤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서 있지만, 왕세손비와 조지왕자의 웃음은 어느 때보다 해맑다. 이번 ‘베스트 컷’은 왕세손 비가 직접 고른 것으로, 뉴질랜드에 머물 당시 현지의 사진작가인 사이먼 울프가 찍은 스냅사진 중 한 장이다. 울프는 “미들턴 왕세손비가 이번 여행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위의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장소는 뉴질랜드 수도에 있는 정부청사이며, 사진이 찍힌 당시는 조지 왕자가 현지 아이들과 즐거운 놀이시간을 갖기 직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번 국빈방문은 ‘조지왕자를 위한 행보’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만큼,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을 받았다. 영국 언론이 조지왕자를 두고 “생후 8개월에 트렌드세터로 등극했다”고 말할 정도. 특히 조지왕자가 입었던 옷과 신발은 ‘완판’ 대열에 들어서기도 했다. 조지왕자는 영국 왕실 와위계승 서열 3위로, 지난 해 7월 태어났다. 이름보다는 ‘로열 베이비’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며, 풀 네임은 조지 알렉산더 루이스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TV 영화]

    ■동승(씨네프 화요일 오후 2시) 천진난만한 아홉 살짜리 아기스님 도념, 한창 외모에 신경 쓰고 있는 총각스님 정심은 큰스님과 한솥밥을 먹으며 산 아래 고요한 산사에 살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들이 피고 지고, 빨간 단풍이 물들고, 함박눈이 내렸지만 어린 도념이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절에 나무를 해 주는 아랫마을 초부 아저씨는 분명히 도라지꽃이 피면 엄마가 오신다고 했지만 소식은 없다. “이번에도 저 나무만큼 자라면 오신다고 하겠지”라면서, 엄마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절에 들르는 예쁜 아줌마가 오늘도 또 왔다. 저 아줌마가 우리 엄마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도념은 생각한다. 그 예쁜 아줌마는 큰스님한테 도념을 입양하겠다고 하지만, 큰스님은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 막아선다. 그럼에도 도념의 마음은 자꾸만 설레기만 한다. ■라푼젤(OBS 월요일 낮 12시 5분) 높다란 탑 안에서, 청소하고 밥해 먹고 그림을 그리며 18년을 살아온 끈기 만점의 소녀 라푼젤. 어느 날 탑에 침입한 왕국 최고의 대도, 플린 라이더를 한 방에 때려잡고, 대도를 협박해 꿈에 그리던 집 밖 여행을 단행한다. 어릴 때부터 세상은 험난한 곳이라고 익힌 라푼젤은 라이더를 쫓는 왕실 경비마(馬) 맥시머스의 추격, 라이더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스태빙턴 형제의 위협, 라푼젤의 가짜 엄마 고델의 무서운 음모 등 흥미진진한 사건들과 맞닥뜨린다. 그래도 이 스릴 넘치는 세상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데….
  •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개성상인의 ‘홍삼로드’ 개척기

    향대기람/공성구 지음 /박동욱 옮김/태학사/188쪽/1만 2000원 1928년 4월 30일 개성삼업조합의 조합장인 개성의 거부 손봉상, 부조합장 공성학과 그의 사촌 공성구 등은 미쓰이사의 직원 아마노 유노스케와 홍삼 판로 시찰을 떠난다. 이들은 6월 10일까지 홍콩과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돌며 동아시아 곳곳에 퍼져 있는 미쓰이 지사를 방문하고 지역의 명승지를 관광한다. 공성구는 42일간의 행로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향대기람’(香臺紀覽)을 남겼다. 예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고려인삼의 명성은 자자했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인삼에 관한 이권을 장악했던 이유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홍삼과 관련한 권한을 보유하다 1914년 이후 미쓰이물산에 독점 판매권을 줬다. 이 때문에 당시 개성상인들은 홍삼 판매를 위해 미쓰이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개성상인들의 동아시아 시찰도 그렇게 이뤄졌다. 개성에서 시작된 여정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대만, 홍콩, 마카오, 상해까지 이른다. 그들은 곳곳에서 격랑의 근대 동아시아 역사와 마주한다. 5월 14일에는 타이베이에서 독립운동가 조명하가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독검으로 찔렀다. 그 기간 중국 산둥성 지난에서는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혁명군이 무력 충돌해 중일전쟁을 촉발한 ‘지난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 각지에서 배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해 엔화를 거부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는 통에 육지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덤덤하다. 반면 곳곳에서 열린 미쓰이 지사 초대의 연회는 분위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하면서도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심지어 일본과 타이완의 신사에 꼬박꼬박 참배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신문물과 현대 문명에 집중됐다. 시모노세키에서 타이베이 항으로 가는 배에서는 선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배의 내부를 구석구석 시찰하기도 한다. 타이완에서 원시림의 거대한 목재를 운송하는 철도시설이나 운송 수단에 주목하는 등 조선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운송 및 교통수단, 도로, 기계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주요 도시의 인구와 주요 산업을 점검하며 홍삼 판매량을 계산하기도 하는 철저한 상인의 모습을 보였다. 번역을 맡은 박동욱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는 “개성상인인 그들의 관심사는 정치나 역사보다 경제와 시장이었다”며 “책은 근대 한문학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 일제강점기에 홍콩과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일기 형식으로 상세한 묘사를 남긴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헌사·역사적 사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박 교수는 평가했다. 책은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엮어 이해를 돕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英 왕세손비가 뽑은 ‘베스트 사진’…남편은 ‘병풍’

    英 왕세손비가 뽑은 ‘베스트 사진’…남편은 ‘병풍’

    영국 윌리엄 왕세손부부가 우방국인 호주와 뉴질랜드를 3주간 국빈 방문해 화제를 모은 가운데, 당시 왕세손부부와 생후 8개월의 조지왕자와 함께 찍은 수 천 장의 사진 중 왕실이 직접 베스트 컷을 선정해 눈길을 끌고 있다. 왕세손비인 케이트 미들턴이 뽑은 ‘최고의 사진’은 자신이 조지왕자를 품안에 안고 어딘가를 향해 환히 웃는 모습을 담고 있다. 비록 윌리엄 왕세손은 이들 뒤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병풍’처럼 서 있지만, 왕세손비와 조지왕자의 웃음은 어느 때보다 해맑다. 이번 ‘베스트 컷’은 왕세손 비가 직접 고른 것으로, 뉴질랜드에 머물 당시 현지의 사진작가인 사이먼 울프가 찍은 스냅사진 중 한 장이다. 울프는 “미들턴 왕세손비가 이번 여행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 위의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장소는 뉴질랜드 수도에 있는 정부청사이며, 사진이 찍힌 당시는 조지 왕자가 현지 아이들과 즐거운 놀이시간을 갖기 직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번 국빈방문은 ‘조지왕자를 위한 행보’라고 공공연하게 알려진 만큼,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을 받았다. 영국 언론이 조지왕자를 두고 “생후 8개월에 트렌드세터로 등극했다”고 말할 정도. 특히 조지왕자가 입었던 옷과 신발은 ‘완판’ 대열에 들어서기도 했다. 조지왕자는 영국 왕실 와위계승 서열 3위로, 지난 해 7월 태어났다. 이름보다는 ‘로열 베이비’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며, 풀 네임은 조지 알렉산더 루이스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오바마 日방문서 감탄한 음식, ‘초밥’이 아니라… 아베 ‘헛발질’?

    오바마 日방문서 감탄한 음식, ‘초밥’이 아니라… 아베 ‘헛발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최고급 스시(초밥)를 대접했지만 정작 오바마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25일 산케이신문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일본 왕실이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떠나며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녹차 아이스크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은 후지산 모양을 본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녹차 아이스크림에 대한 애정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제 만찬에서 “어머니가 나를 일본에 처음 데리고 온 지 거의 50년이 지났다.나는 집을 멀리 떠나온 여섯 살 아이에게 일본인이 보여준 친절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그를 사로잡은 것이 바로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일본을 방문해 연설할 때 ‘대불보다 녹차 아이스크림에 더 열중했다’고 가마쿠라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 일본 여행을 추억햇다. 이어 201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시 가마쿠라를 찾아가 실제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반면 국빈방문 첫 일정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스시 만찬의 효과에는 의문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애초 아베 총리는 만찬 후 취재진에 오바마 대통령이 “평생 가장 맛있는 스시였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지만 이 스시만찬은 ‘참다랑어(bluefin tuna)’가 재료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참다랑어는 다랑어의 한 종류로 남획으로 인해 최근 멸종 위기에 몰려 국제 환경 단체들이 보호에 나선 어종이다. 국제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는 이날 성명을 내고 오바마 대통령은 음식 선택에 있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오바마, 스시 가장 좋아했다고? 천만의 말씀…가장 좋아한 일본 음식은

    ‘오바마 스시’ 아베 일본 총리가 일본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최고급 스시(초밥)를 대접했지만 정작 오바마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25일 산케이신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일본 왕실이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떠나며 아키히토 일왕 부부에게 “녹차 아이스크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날 만찬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은 후지산 모양을 본뜬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녹차 아이스크림에 대한 애정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4일 만찬에서 “어머니가 나를 일본에 처음 데리고 온 지 거의 50년이 지났다. 나는 집을 멀리 떠나온 여섯 살 아이에게 일본인이 보여준 친절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2월 일본을 방문해 연설할 때 ‘대불보다 녹차 아이스크림에 더 열중했다’고 가마쿠라에 있는 가마쿠라 대불을 방문했던 어린 시절 일본 여행을 추억햇다. 이어 2010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다시 가마쿠라를 찾아가 실제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반면 국빈방문 첫 일정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스시 만찬의 효과에는 의문이 제기되는 분위기다. 애초 아베 총리는 만찬 후 취재진에 오바마 대통령이 “평생 가장 맛있는 스시였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지만 이 스시만찬은 ‘참다랑어(bluefin tuna)’가 재료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참다랑어는 다랑어의 한 종류로 남획으로 인해 최근 멸종 위기에 몰려 국제 환경 단체들이 보호에 나선 어종이다. 국제 환경보호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는 이날 성명을 내고 오바마 대통령은 음식 선택에 있어서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박 3일 일본 국빈방문을 마치고 25일 방한해 1박 2일 일정을 이어간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英왕세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호주총리 곤혹

    英왕세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호주총리 곤혹

    ”감히 왕세손 몸에 손을 대다니…”  토니 애벗 호주총리가 영국 윌리엄 왕세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곤혹을 치루고 있다. 지난 24일(현지시간) 호주 의회에서 열린 윌리엄 왕세손 환영 공식행사에서 애벗 총리는 왕세손의 등에 손을 대는 ‘결례’를 범했다. 영국왕실은 지금도 ‘보통사람’이 ‘로열패밀리’에게 악수를 제외하고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을 의전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호주는 과거 이와 같은 사례로 한차례 ‘손’을 크게 데인 바 있다. 지난 199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호주 의회를 방문했을 당시 폴 키팅 호주 총리가 여왕을 안내하며 등에 손을 대는 실수를 한 것. 곧바로 영국언론은 키팅 총리에게 ‘오즈의 도마뱀’(The Lizard of Oz)이라는 별명과 함께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후에도 이같은 사례는 여러차례 있었다. 지난 2009년 영국 버킹엄궁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환영식에서도 미국 미셸 오바마 여사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어깨동무 비슷한 포즈를 해 영국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이에대해 당시 버킹엄궁 측은 “두 사람의 친밀함과 존중의 표시”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으며 이번 왕세손 사건 역시 영국 왕실에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많은 네티즌들이 “사라지지 않은 구시대의 의전”이라며 비난한 반면 일부 네티즌들은 “이는 왕실예법으로 오랜시간 내려온 전통”이라며 반박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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